• 최종편집 2020-10-26(월)

문화
Home >  문화

실시간 문화 기사

  • [문화사역자를 소개합니다] 김태군 목사
    지난5월18일부터 21일까지 밀양에서는 지방자치단체 주관으로 <밀양아리랑>이라는 큰 축제가 열렸습니다. 특히 이 행사의 메인 이벤트인 “밀양 오딧세이”라는 지역주민 3,000명이 출연하는 퍼포먼스가 있는데 이 무대에서 합창을 연출하고 지휘하는 분이 이번에 소개하는 김태군 목사님입니다. 이처럼 지역의 여러 문화적행사에 적극적으로 동참하며 지역주민들과 소통하는 김태군 목사님은 밀양 깊숙한 시골마을에 위치한 조그만 <별빛교회>를 담임하고 있습니다. 시골교회라서 성도수도 적고 초등학생들과 노인 몇몇이 전부인 작은 교회이지만 이 교회에서는 많은 음악회와 찬양집회, 문화행사들이 열려 주일외 평일에는 늘 북적북적한 교회입니다. 목사님 본인도 노래를 엄청 잘하여서, 평소에 혼자 예배당에서 찬양하며 묵상하기를 즐기기도 하며, 얼마전 전국노래자랑 밀양편에 나가서 대상을 수상하기도 한 실력자입니다. 목회자이지만 이 대회에 나간 이유는 이 대회를 통해 별빛교회를 알리고 지역주민들에게 더욱 친근하게 다가가고자 출전을 결심하게 되었고, 대상을 받은 기념으로 돼지 한 마리를 잡아 교회마당에서 잔치를 열어 지역주민들을 더욱 교회로 쉽게 발걸음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또한 서울의 유명 연주자들을 초청하여 별빛교회에서 음악회를 개최하였는데, 많은 주민들이 오셔서 “이 시골에서는 접하기 어려운 좋은 시간이었다”며 무척 즐거워하였습니다. 이처럼 지역주민들에게 친근함을 무기로 다가가 복음을 전하는 김태군 목사님은, 밀양지역에 인지도를 넓히며 많은 지방자치단체의 문화적행사에 적극 참여하여 건전한 기독교 문화로서 복음을 전파하는 문화사역자이며, 간혹 다른 사역자들과 함께 찬양집회에 가서 찬양인도와 특송 등으로 섬기기도 하며, 개인적으로도 찬양으로 복음을 전하는 귀한 찬양사역자입니다. 지금은 시골의 작은 교회를 섬기고 있지만 그 활동과 사역이 더욱 많은 곳에 쓰여지기를 기대합니다. <부산,경남 기독문화 일정> 1. 노래하는 순례자 찬양팀 5월28일(주일) 오전11시 : (김해) 전원교회 새신자초청축제 5월28일(주일) 오후2시 : (부산) 섬기는 교회 6월4일(주일) 오전10시 : (부산) 온병원 환우예배 2. 모인 김인희 (찬양사역자) 5월26일(금) 오후9시 : (대구) 시티교회 아트홀 개관기념 기획 공연 3. 디아코노스 (연극팀) 5월28일(주일) 오후2시 : (부산) 문현제일교회 6월4일(주일) 오전11시20분 : (경주) 안강열린교회 4. 우미나 (찬양사역자) 5월26일(금) 오후7시 : YIM 가야교회당 6월13일(화) 오후7시 : 대동교회, 기독문화연대 세미나 오프닝 공연 5. 기독문화연대 주최 기독문화강연 6월12일(월)~13일(화) 저녁7시~9시30분 대동교회(대연동 농협 뒤편) 강사 : 김종회 교수, 강진구 교수 특별찬양 : 김후란, 우미나
    • 문화
    • 문화사역자
    2017-05-29
  • [기독교 교양 읽기 26] 정의롭지 못한 권력에 대해서는 복종의무 사라져
    복종을 넘어 저항으로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 이렇게 시작되는 로마서 13장 1절에서 7절까지의 성경말씀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해설서이다.얼마 전 박근혜 정권 퇴진과 관련하여 촛불집회와 태극기집회가 서로 정반대의 주장을 폈다. 이 와중에 일단의 목사와 기독교인들은 이 성경구절을 내세우며 ‘불법적인’ 정치권력이라 할지라도, 이 권력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이기 때문에 기독교인들은 복종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이에 대해 저자는 그렇지 않다고 반론을 편다. 모든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왔고, 그러므로 복종해야 한다. 그러나 바울의 이 이야기는 특별한 상황에서 언급된 것이므로, 이것을 일반화하는 것은 오류라는 것이다. 또한 그 권세는 하나님의 공평과 정의를 이루기 위한 것이어야 한다는 전제를 가진다. 이 전제를 만족하지 못할 경우, 그 권세는 불의한 권력이 되고, 그럴 경우 그 권력은 하나님의 인정을 받지 못하므로 복종의 의무는 당연히 사라진다.요한계시록 등에 따르면 그런 권력에 대해서는 불복종으로 넘어 오히려 저항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교회의 입장에서 가장 큰 문제는 정권에 친화적인 목회자들의 정교유착이라고 본다. 성경은 이에 대해서도 역시 저항해야 함을 가르친다.◈ 《로마서 13장 다시 읽기》 || 저자 권연경은 현재 숭실대학교 기독교육과 교수이다. 저서로 《행위 없는 구원?: 새롭게 읽는 바울의 복음》 《로마서 산책》 등이 있다. 뉴스앤조이, 2017. 9,000원. ▌좌담: 김길구 전 부산YMCA 사무총장, 김수성 경성대 초빙외래교수, 김현호 기쁨의집 기독교서점 대표 지난 5월 9일 실시된 대통령 선거에서 문재인 후보가 당선되어 다음날부터 바로 업무를 시작하였다. 이로 인해 그동안 탄핵정국을 둘러싸고 광화문광장과 대한문 앞에서 벌어졌던 ‘촛불’과 ‘태극기’의 공방도 일단락되었다. 이 시점에서 일부 교계 지도자들의 극단적인 행태가 여론의 뭇매를 맞기도 했다. 《로마서 13장 다시읽기》를 통하여 올바른 기독교와 권력의 관계를 생각해 보고자 한다. 태극기 집회에 등장한 십자가 ‘충격’김길구 이 책 앞부분에도 나와 있지만, 오늘날 로마서 13장 1절에서 7절까지에 나오는 “위에 있는 권세에 복종하라”는 바울의 이야기는 한국 교회에 늘 뜨거운 감자였습니다. 여기에 더하여 이 성경구절이 작년 말부터 올해 초까지 계속된 탄핵정국과 관련해서도 교계에 등장하였습니다. 즉, 정권에 복종하라는 의미로 사용된 것이지요.김현호 불의한 정권에 대해서도 그 권세에 복종해야 한다는 주장은 한국의 근현대사에 반복된 일이었습니다. 대표적으로 일제강점기와 군사정권 시절에 기독교 지도자를 자처하는 이들 중에 이 구절을 언급하며 그리스도인들을 향해 정부에 순응하기를 권한 역사적 사실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일이 이번 촛불집회와 태극기집회에서도 나타난 것입니다.김수성 나는 태극기 집회에 목회자들이 교인들을 동원하고, 대형 십자가를 지고 앞장서 행진하는 모습을 보고 적잖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목사들은 하나님께 예배드릴 때나 입을 가운까지 입고, 교인들 중에도 역시 성가대 가운을 입고 뒤따라 행진하였습니다.김현호 일부 목회자들이 그들을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교인들을 잘못 인도했기 때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로써 목회자들이 하라는 대로 하는 것이 ‘순종’이라고 생각하는 교인들이 많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목회자들이 앞장서 ‘십자가를 진다(?)’는 데 따르지 않으면 불순종이 됩니다.김길구 일부 교회 목회자와 지도자들이 전체적인 맥락은 생각하지 않고 문자주의에 따라 성경을 읽고 이해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성경에는 권세도 몇 가지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로마서 13장에 나오는 권세를 어떤 권세로 보느냐에 따라 그 입장도 달라질 수 있습니다.김수성 한 종교학자는 이런 것이 나타나는 이유 중 하나로 아직 유교적 이념에서 벗어나지 못한 국민이 많기 때문이라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즉, 민주적으로 대통령을 뽑지만, 대통령은 왕으로, 정부는 절대권력이라는 인식 속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이죠. [이길용, 《종교로 읽는 한국사회》 참조] ‘공평과 정의가 권력의 근거’ 깨달아야김길구 권력은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사무엘을 통해 왕을 세운 것처럼 하나님께서 인정한 권력입니다. 둘째는 하나님께서 세운 권력도 불의를 행할 때는 그 권력을 파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대표적으로 말년의 사울왕의 권력을 들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인간 스스로가 세운 권력입니다. 로마서 13장에서 이야기하는 권력은 바로 첫 번째라 할 수 있습니다.김현호 결국 권력이란, 성경 곳곳에서 찾을 수 있는 ‘공평과 정의에 대한 하나님의 집요한 관심을 깨닫는 일’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통치 권력을 세우지만, 그 권력이 공평과 정의를 저버리면 그 권력은 근거를 잃어버리게 된다고 할 수 있을 겁니다.김수성 즉, 권력이란 하나님께서 의를 세우기 위해 대리자에게 위임한 것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집니다. 그렇다면 대리자가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행위를 하면 그 권력에 복종하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를 가진다고 봅니다. 즉, 복종의무가 사라지는 것이죠.김길구 저자는 로마서 13장이 특정한 상황이나 조건에서 나온 내용이라는 주장을 합니다. 즉, 권력이 올바로 섰을 때에 복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의 법정에 서겠다고 한 것도 로마의 권세가 정당하게 행사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당시는 네로의 치세였지만, 폭군 네로도 처음에는 정치를 잘해서 칭송을 받았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염두에 두고 이 부분을 해석해야 한다는 학자도 있습니다.김현호 만약 부패한 권력이라면 단순히 복종할 것이냐 아니냐를 떠나서, ‘우리의 행동이 창조 세계를 회복하는 성령의 인도하심과 일치하느냐 아니냐’라는 척도로 바뀌어야 할 것입니다. 독재정권이나 부패정권에 대해서는 오히려 기독교인들이 앞장서 바로잡는 것이 올바르지 않을까요.김수성 절대권력 시대에 살았던 맹자조차도 역성혁명(易姓革命)의 정당성을 이야기합니다. 비록 지금의 민중혁명과는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왕이 패악을 일삼으며 백성을 돌보지 않고 억압할 경우 그 왕조를 패하고 올바른 다른 왕조가 들어서야 함의 정당성을 이야기합니다. 평화와 질서 아래서 훌륭한 시민 돼야김길구 본회퍼의 히틀러에 대한 입장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만일 미친 사람이 대로로 자동차를 몰고 간다면 목사로서의 나는 그 차에 희생된 사람들의 장례식을 치러주고 그 가족을 위로하는 것으로 책임을 다했다고 할 수 있겠는가? 만일 내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자동차에 뛰어올라 그 미친 사람의 손에서 핸들을 빼앗아버려야 하지 않겠는가?”김현호 미가서 3장 9절의 말씀도 같은 맥락인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정의를 미워하고 정직한 것을 굽게 하는” 통치자들과 권력자들을 인정하시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이런 악한 통치에 복종하고 그 악에 협조하는 것은 오히려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것이 될 것이라는 저자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김수성 로마서 13장을 해석할 때 더 중요한 것은 시대가 바뀌었음에 유의해야 할 것입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왕정이나 제국의 지배를 받는 것이 아니라 민주공화국입니다. 그러므로 이에 적합한 성경읽기가 필요할 것입니다.김길구 민주국가에서는 모든 권력이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이 상식입니다. 대통령을 비롯한 모든 권력자는 국민에게서 그 권력을 위임받아 권한을 행사합니다. 그러므로 그 권력은 반드시 국민을 위해 사용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을 경우 국민들의 저항에 직면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김현호 유진 피터슨이 쓴 《메시지 신약》에는 이렇게 써놓았습니다. “훌륭한 시민이 되십시오. 모든 정부는 다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습니다. 평화와 질서가 있다면 거기에는 하나님의 질서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책임성 있는 시민으로 사십시오.” 국민으로서의 책임성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역시 하나님의 질서가 우선입니다.김길구 저는 태극기 집회에 참가한 기독교인들의 인터뷰에서, 역사적 맥락이나 깊은 신학적 통찰 없이 거리로 나선 이들 어르신의 모습에서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교회와 권력의 균형 잡힌 시각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좀 더 깊이 고민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으면 좋겠습니다.다음에는 필립 얀시의 《교회, 나의 고민 나의 사랑》(Ivp, 2010)을 읽고, 교회 출석에 대해 고민하는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조그마한 책이지만, 필력이 뛰어난 저자의 글이 독자에게 많은 감동을 줄 것이라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 [정리: 김수성] ▲ 로마서 13장은 문자 그대로 읽을 경우 현실과는 동떨어진 해석이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성경의 전체적인 맥락을 살펴서 해석해야 한다. [사진은 태극기 집회에 등장한 십자가 행진] ◇ 같이 읽으면 좋은 책 《더불어 사는 다문화 함께하는 한국교회》 / 조성돈 외 / 예영 《마지널리티: 다문화 시대의 신학》 / 이정용 신재식 / 포이에마
    • 문화
    • 기독교 교양 읽기
    2017-05-15
  • [문화사역자를 소개합니다] 동서대학교 찬양팀 – VIC : Voice in Christ
    VIC은 동서대학교 채플을 섬기는 찬양팀입니다. 기독교재단인 동서대학교는 매주 전체학생들이 채플에 참여합니다. 이 시간에 보다 효과적으로 복음을 전하고 예배를 도우고자 하는 학생들이 1999년에 기타 두 개를 메고 찬양으로 섬기게 된 것을 시작으로 찬양팀이 활동하게 되었습니다. 올해 19년째를 맞이하게 되면서 악기도 많이 갖추게 되었고, 찬양멤버도 30명 정도로 늘어나 어느 정도 체계적으로 섬기게 됐고 개강채플, 종강채플에서 주로 찬양으로 섬기는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가을 추수감사절에는 인근 고등학교에서 찬양으로 섬기고, 여름방학에는 성우보육원에가서 찬양과 모든 프로그램을 같이 진행하며 젊음의 열정으로 봉사하는 찬양팀입니다. 한편, 채플시간에 앉아있는 학생들 대부분이 비기독교인 학생들이고 학점 때문에 억지로 참여한 학생들이 많아, 찬양에 대한 반응이 너무 없어서 찬양팀으로는 어려운 분위기에서 찬양시간을 이끌어 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간혹 그 중에 열심히 박수치고 찬양하는 한명의 학생으로 인해 열심히 찬양하며 감동을 받기도 합니다. 또 어떤 학생들은 “왜 요즘은 노래 안하냐”며 말을 건네줄 때 찬양팀으로서 큰 힘을 얻기도 합니다. 이런 순간마다 한 영혼이 정말 중요하다는 것을 절실히 느끼기도 합니다. 이렇게 채플시간에 학생들이 주체가 되어 찬양팀으로 섬길 수 있음에 항상 감사하고, 친구들과 선후배들, 그리고 다른 교회의 형제자매들이 모여 찬양연습을 하면서 하나님 안에 한 공동체가 되어서 나아가는 순간들이 은혜가 되기도 합니다. 학생들끼리 모인 팀이고 공식 동아리가 아니다 보니 재정적으로 자립하기가 어려운 부분도 있습니다. 그리고 아직은 부족한 부분이 많은 학생들이어서 실수도 하고 단원들 사이에 조그만 일로 어려움을 겪기도 하며 우여곡절이 많지만 이 찬양팀이 19년간 이어올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귀하게 사용하시기 때문인 줄 믿기 때문입니다. 젊은 대학생들이 희망을 잃어가는 이 세대에 찬양으로 희망을 전하는 귀한 찬양팀으로 계속 사용되어지길 기도합니다. <부산, 경남 기독문화 일정> 1. 노래하는순례자 찬양팀 5월13일(토) 오전11시 : (전북고창) 열린동산교회 설립예배 찬양인도 5월14일(주일) 오후2시 : (부산) 기쁨의교회 5월16일(화) 오후6시20분 : (부산) 밀알화요모임 찬양인도 5월21일(주일) 오후2시 : 기장소명교회 2. 우미나 (찬양사역자) 5월14일(주일) 오전11시 : 이음교회 3. 디아코노스 (연극팀) 5월13일(토) 오후7시 : 부산대청교회, <붕어빵 아줌마의 첫차랑>연극 5월13일(토) 오후2시15분 : 영도효성교회, <초록구슬>연극 5월14일(주일) 오전11시30분 : 사직동교회. 연극 5월21일(주일) 오후2시15분 : 열린하늘문교회. 연극 4. 민들레(인형극단) 5월14일(주일) : 브니엘교회 5월17일(수) : 예선아동지역아동센터 5월21일 (주일) : 거성교회 5월24일(수) : 낙동종합사회복지관 5월25일(목) : 봉래초등학교
    • 문화
    • 문화사역자
    2017-05-15
  • [문화] 최병학 목사의 문화펼치기 26 - 부활
    1. 그렇다면 나는 그런 천국에는 가지 않겠다. ▲ 화형당하는 아투에이 추장 500여년 전에 있었던 역사적 사실 하나. 지금의 도미니카공화국인 에스파뇰라 섬의 타이노(Taino) 부족의 아투에이(Hatuey) 추장은 스페인 정복자들이 섬에 쳐들어오자 부족 사람들을 결집시켜 용맹스러운 투쟁을 벌였다. 그러나 잘 훈련된 스페인 군인들을 막아 낼 수는 없었다. 그의 부족은 전멸했고 아투에이는 수백 명의 남은 타이노 부족 사람들과 함께 쿠바로 피신하게 된다. 그러나 거기에서도 스페인 정복자들과 전쟁을 벌이게 되고 1512년 2월 2일 결국 그는 사로잡혀 화형을 당하게 된다. 이투에이 추장은 부족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이 지금 보고 있는 내 손의 금은보화, 이것이 스페인 사람들이 섬기고 있는 그들의 신입니다. 이것들을 위해 그들은 전쟁을 벌이고 우리를 죽입니다. 이것들 때문에 그들은 우리를 탄압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그들을 물리치고 바다에 처넣어야 합니다. 멀리서 온 이 야만족들은 자신들이 평화와 평등의 신을 믿는다고 우리에게 말합니다. 그러면서 우리의 땅을 강제로 빼앗습니다. 우리를 그들의 노예로 삼습니다. 그들은 영원한 영혼의 존재에 대해 말하고 신의 상급과 징벌에 대해서도 말합니다. 그러면서 우리의 소유물을 강탈하고 훔쳐가고 있습니다. 우리의 아내와 딸을 강간하고 죽입니다. 우리는 그들보다 월등한 용기를 가지고 있지만 그들은 우리의 무기로써는 도저히 뚫을 수 없는 강철로 만든 갑옷으로 그들의 몸을 감싸고 있습니다.” 아투에이 추장의 사형이 집행되기 바로 직전 스페인 가톨릭의 종군 신부는 이렇게 물었다. “예수를 영접하고 세례를 받고 천국으로 갈 것이냐?” 그러자 아투에이 추장이 물었다. “여기에 나를 둘러싸고 있는 이 사람들, 아무런 잘못한 것이 없는 나의 가족을 겁탈하고 그리고 나의 온 재산을 빼앗고 가축들을 탈취해 간 이 군인들도 천국을 가는가?” 신부는 “당연히 이들은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았으니 천국에 간다.” 그러자 아투에이가 즉시 대답했다. “그렇다면 나는 그런 천국에는 가지 않겠다. 그것은 천국이 아니다. 이들이 없는 지옥이 바로 천국이다.”라고 하며 산 채로 화형을 당했다. 1492년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한 후 이 지역을 향한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본격적인 정복전쟁은 1500~1650년 까지 150년에 걸쳐 완료됐다. 이 기간 동안 중남미 대륙의 토착민은 6,500만 명이었으며 정복전쟁 이후는 500만 명 이었다. 약 6,000만 명이 죽임을 당했던 것이다. 기독교의 이름으로, 예수의 이름으로, 사랑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2. 고난과 부활 ‘하나님의 이름을 정의’로 규정하는 희망의 신학자 위르겐 몰트만(J. Moltmann)은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에서 “오늘날 우리의 문명은 능력의 원칙과 향유의 원칙하에 이루어져 있으며, 따라서 고통과 죽음을 개인화시키고 공공의 사회로부터 추방시켜 버렸다.”라고 한다. 이 말을 이 땅 대한민국의 지난 9년에 적용시켜보면, 국가와 사회적 차원에서 자행되는 온갖 구조적 불의에 대한 종교적 발언과 비판은 사적인 영역으로 치부되어 공적 차원에 반영되지 못한 채(지난 3년간 세월호에 대한 함구를 보라), 국가권력의 구조적 폭력은 합법성과 정당성으로 합리화 되었으며(세월호에 관한 언론과 정치의 행태를 보라), 이에 대한 저항과 항거는 불법적이고 위법적인 차별과 함께 반정부적이고 사회의 안정을 해치는 위험한 행동으로 인식되었다는 것이 바로 그 증거이다. 따라서 지금 불의한 정치에 합법성의 이름을 갖다 붙이는 이들과 신앙을 개인화 하는 사제들을 통해 하나님은 오늘도 십자가에 달리신다. 그리고 그 하나님은 자본과 권력의 ‘능력의 원칙’과 ‘향유의 원칙’에서 배제된 이름 없는 하나님이다.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고난과 부활은 모두 죽음, 혹은 죽임에 관계가 된다. 정신분석학의 명제에 의하면 사람은 두 번 죽는다고 한다. 한번은 생명체로서 죽고, 또 한 번은 상징적으로 죽는다. 한 사람의 죽음이 사회적 상징체계 안에서 적합한 자리에 안착하는 것을 상징적 죽음이라고 하는데, 따라서 충분한 애도와 장례의 절차를 통해 죽은 자에 대한 타당한 의미 부여를 한 이후에, 산 자들은 죽은 자를 잊고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육신적 생명체가 먼저 죽고 상징적인 죽음이 뒤따른다. 한 사람이 죽은 후 그 장례 절차를 통해 우리는 육신적인 죽음과 상징적인 죽음의 순서를 보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상징적인 죽음이 먼저 있고 생명체가 나중에 죽는 죽음도 있다(박근혜 대통령의 탄핵으로 우리 사회에 ‘박정희 체제’가 해체되는 상징적인 죽음이 그러하다). 반면 생명체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했으나, 상징적으로 죽지 않는 경우가 있다. 그리고 이것은 부활의 경우를 통해 지속성을 획득한다. 이스라엘 역사에 있어서 부활사상은 바벨론 포로기 말기에 이르러 생성이 되었다. 물론 페르시아나 바벨론, 그리스 등의 주변 종교들의 영혼불멸이나 윤회 같은 영향이 있었겠지만, 유대교는 부활을 ‘메시아적 기대’라는 틀로 ‘기억 투쟁’과 연결시킨다. 전 감신대 교수였던 이정배 교수에 의하면 ‘자신들의 역사를 빼앗겨 잊혀진 존재들을 새롭게 역사의 주체로 불러내는 것, 메시아를 통한 정치적 사건, 이것이 유대교의 부활 이해’이다. 힘들고 어려운, 또한 고통스러운 바벨론 포로기를 살면서 정치적 독립과 종교의 자유, 해방을 위해 힘껏 싸우다 죽은 사람들의 억울함을 풀어주기 위해서는 이들의 죽음에 대한 선한 보상이 필요했던 것이다. 따라서 이것이 부활 사상으로 확장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세상 속을 살면서 세상 밖을 꿈꿨기에 고난당해야만 했던 사람들의 고통과 절망을 지속적으로 이야기하고, 그런 체제 속에서 희생된 사람들을 거듭 이야기하는 것이 유대교의 부활의 의미이다. 3. 영혼 불멸과 몸의 부활 그러나 기독교, 혹은 개신교로 오게 되면 팔레스틴 유대교의 지평이 헬레니즘 철학의 지평과 만나 조금 더 새로운 개념으로 확장이 된다. 민중신학자 서남동 교수는 인간 존재의 종극적 운명(혹은 사후의 운명)에 관해 ‘영혼 불멸’과 ‘몸의 부활’이라는 두 가지 상징이 있다고 말하며 “전자는 그리스적인 상징이고, 후자는 히브리적인 상징이다. 기독교 신앙은 이 두 가지를 아울러 가졌다. 영혼 불멸의 상징에 의하면 사람이 죽으면 그때그때 단독적으로 불멸의 영으로 되지만, 몸의 부활의 상징에 의하면 기다렸다가 한꺼번에 부활한다.”라고 말한다(이하 서남동, 「우리의 부활과 4월 혁명」 참조). 인간 개인의 운명에 대한 개인적 상징과 인간존재의 사회적 운명에 관한 사회적 상징의 대조이다. 서남동 교수는 사후의 ‘불멸의 영혼’은 영원한, 말하자면 신국에 개인적으로 입장하게 되는데, ‘부활’의 경우에는 역사적인 미래에 도래할 메시아 왕국에 단체로 입장하게 된다고 본다. 그리고 이것은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로 연결되는 부활이라고 한다. 유대교의 부활의 맥락에 공동체성을 부여한 것이다. 사실 예수의 하나님 나라는 타계적인 것이 아니라, 역사의 미래에 지금 억눌린 자들이 상속 받고 그 주인공이 될 약속의 새 시대를 말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리스적 풍토에 들어가 순수이념(이데아)의 초월계와 비실재적인 그림자의 현실계라는 이층구조 속에 편입되었으며 로마 콘스탄틴의 왕권 종교가 되면서 기독교의 신국은 타계적인 피안이 되었다. 따라서 시간적 미래와 역사적 지평을 자신의 삶의 자리로 삼고 있는 히브리적 전통을 상실하고 말았다. 서남동 교수는 “역사적 기독교는 두 가지 상징(그리스적이고 히브리적인 상징)을 아울러 물려받았다. 개인이 죽으면 천국에 간다는 신앙, 곧 개인 영혼의 절대적 가치가 보장되는 상징과 이 사회가 낡아지면서 새 사회가 와야 한다는 사회 갱신에 대한 보장이 병립공존(竝立共存)되어서 상호 견제되는 것이 불가피하기도 하고 바람직하다. 신국 상징이 메시아 왕국 상징에 의해 삼켜진다면, 사회개혁을 위해서 개인 영혼은 희생되어도 좋다는 생각과 결말이 나올 것이고, 메시아 왕국 상징이 신국 상징에 의해서 삼켜져 버린다면, 지상 역사의 미래와는 상관이 없는 타계적 신앙이 되고 말 것이다. 양자택일이 얼마나 잘못된 길이라는 것, 그리고 기독교도 아니라는 것에 관해서는 다시 논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라고 말한바 있다. 그러나 역사적 기독교의 경우 메시아 왕국 상징이 신국 상징 속에 먹혀버렸다. 사실, 지배자와 가진 자들은 천년왕국, 메시아 왕국의 도래를 원하지 않고 도리어 무서워한다. 그것은 자기네들의 소유와 지위에 대한 위협과 그 전복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눌린 자, 가난한 자들에게는 메시아 왕국의 도래가 절실한 갈망이다. 따라서 강자와 부자들은 메시아 왕국을 이단시하고 불법화해버린 것이다. 그것이 역사적 기독교의 발자취가 아닌가? 한국 개신교의 행태를 보면 결코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부활을 ‘메시아 왕국의 도래’요, 메시아 왕국의 도래는 곧 ‘민중의 역사적 주체성의 획득’이라고 말하는 서남동 교수는 “몸의 부활은 메시아 왕국에 결부된 역사적, 사회적 신앙의 상징이다. 몸의 부활은 천국으로 왕생한다는 약속이 아니라 이 세계의 불의와 억압에 항거하여 역사의 새 시대에 다시 부활 하생한다는 민중의 의지이며 그 갈망이다. 영혼 불멸과 신국이 지배자의 유혹으로 쓰여지는데 대해서, 도래할 메시아 왕국에서의 몸의 부활은 눌린 자의 갈망을 그대로 말하는 신앙이라는 말이다. 부활은 민중의 역사적, 사회적 갈망이다.”라고 말한다. 구약성서학자 폰 라트(G. von Rad)도 말한바, ‘출애굽 사건은 창조신앙에 선행’한다. 사실, 이스라엘의 하나님 표상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시킨 역사적 해방 행위에서 생겨난 것이다. 그리스처럼 존재 철학적 관점이 아니었다. 애굽에서 억울하게 종살이를 하던 보잘 것 없던 백성 합비루(habiru)들이 하나님의 해방 행위를 통해 그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 역시 그들의 하나님이 된 것이다. 따라서 출애굽은 이스라엘의 ‘뿌리 경험’이며 억눌린 모든 집단을 위한 정의의 모형이 될 것이다. 따라서 창세기가 성경에 가장 먼저 나와 있기에 ‘신의 천지창조’를 신앙에 강요하지 말고, 그 다음 나오는 출애굽기의 ‘출애굽 정신’을 따를 것인지를 묻는 것이 신앙의 시작이 되어야 할 것이다. 고난과 부활의 참의미는 창조신앙에서 출애굽 정신으로 변화될 때 가능할 것이다. 4. 부활절의 참의미 도대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는 부활의 참의미는 무엇인가? 민중신학자 안병무 박사는 한국의 종교가 죽음에 관심이 있다고 말하면서, 유교는 ‘주검’에 관심이 있고, 불교는 ‘죽음’에 관심이 있고, 그리스도교는 ‘죽임’에 관심이 있다고 말한다. 사실 십자가는 그리스도가 죽임을 당한 사형틀이다. 안병문 박사가 보기로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임사건은 철저히 집단적이다. 예수 한 개인이 아닌, 인류에게 일어난 집단적 사건이다. 그 집단적 죽임사건은 예수 개인이 죽었으나, 그것으로 묶어둔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고 긴긴 인류역사 속에서 계속 사람을 죽이는 일들이 연속되었는데 예수의 죽임만이 이토록 우리들에게 지속적으로 환기되는 것은 죽임을 죽임으로 맞서지 않고 죽임을 증거 하는 것으로 맞선 성서의 민중들 때문이라고 말한다. 가령, 예수 당시 젤롯당처럼 죽임을 죽임으로 맞서는 방법이 아니라, 전혀 새로운 운동방식인 죽임을 증거 하는 방법으로 이루어졌던 것이다. 그렇다면 증거 하는 일, 그것이 죽임의 세력을 어떻게 끝장낼 수 있겠는가? 지금 우리가 우리들의 두 눈으로 보고 있지 않는가? 세월호의 죽임과 그 죽임을 증거한 기억저장소, 그리고 마침내 비폭력적인 집회와 민주적 절차에 따른 거대 권력의 탄핵! 따라서 세월호 3주기가 부활절과 같은 날(2017.4.16.)인 것은 너무나 큰 상징적 의미가 있다. 역사는 반복된다. 한번은 비극으로, 한번은 희극으로! 마르크스의 말이기는 하지만, 오늘 이 땅에 역사는 수십번 비극으로 반복이 되었다. 결코 희극으로 끝나는 법이 없었다. 『한국말년사』 (덕흥서림, 1945)에서 저자 장도빈은 “1884년 갑신 이후로 1894년 갑오에 이르는 10년 사이는 그 악정이 날로 심하여 그야말로 큰 고기는 중간 고기를 먹고, 중간 고기는 작은 고기를 먹어 2000만 민중이 어육이 되고 말았다. 관부의 악정과 귀족의 학대에 울고 있는 민중이 이제는 참으로 그 생활을 보존할 수 없게 됐다. 삶이 위태한 민중이 혁명을 일으키는 것은 자연의 추세였다.”라고 한다. 지금 안녕하지 못한 사람들이 다시 부활할 것이다. 2000년 전 갈릴리 예수의 정신과 눈물로, 동학의 정신으로, 그리고 4월과 5월, 6월의 함성(419, 518, 6월 항쟁)으로, 마침내 그것은 이제 한겨울 매서운 추위 속 촛불의 힘으로, 새 봄의 역사로, 소중한 한 표의 힘으로!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담임) *이 글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문화
    • 문화펼치기
    2017-04-28
  • [문화사역자를 소개합니다] 화가 최영이 권사
    수영로교회 최영이 권사는 초등학교시절 미술선생님이셨던 친구 아버지의 영향과 난초 그림을 잘 그렸던 언니의 영향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어릴 때 방문 앞 언니가 걸어둔 액자에 그려진 흰 수염에 인자하신 모습의 하나님, 그 주위에 발가벗은 아기천사들이 둘러싼 그림이 지금도 생각난다고 합니다. 그림을 시작할 때 동양화를 배우면 자연히 불교미술을 공부해야 한다는 생각에 동양화를 포기하고 프랑스로 건너가 바로 서양화를 택하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국내·외를 다니며 전시회를 가지고 있습니다. 작품으로 전도지를 만들어 전도용으로 사용하기도하고, 미술선교를 하는 최영이 권사에게 주위에서 미술선교사로 불러줘 행복하다고 합니다. 기독교 관련 그림을 그리게 된 계기는, 1977년 3월23일 구덕운동장에서 큰 집회가 있었고, 기도 가운데 갑자기 “너는 그림을 그리지 않니?”라며 그림으로 나를 전하라는 음성을 듣는 순간 눈물을 흘리며 그림으로 복음을 전하기로 결심하게 됐다고 합니다. 그래서 작품마다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길 원하며 작품을 감상하는 사람마다 마음에 평안과 기쁨을 누리길 기대하면서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구원의 역사가, 믿는 자들에게는 자기가 가진 재능으로 복음을 전하는 계기가 되길 바랍니다. 최근 부전교회 새 성전에서 2017청년 연합말씀사경회 겸 종교개혁500주년기념전에 100호 2점을 비롯해 크고 작은 13작품을 전시했는데, 청년들이 사진을 찍으며 많은 호응을 얻었습니다. 통일을 기원하는 작품도 있었고 다양한 성화 그림들이라 감상하는데 쉽게 접근할 수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유물전시회에서도 8점의 작품을 전시했습니다. 예수님의 온화하심과 아픔이 동시에 느껴지는 작품으로 이스라엘유물전에 더 생기를 불어 넣어주었다고 합니다. 최영이 권사는 교회마다 작품을 전시 할 수 있는 갤러리들이 많아지길 바란다고 전하면서 “목사님들께서 강단에서 설교하실 때 ‘탕자의 비유’ 돌아 온 탕자를 그린 렘브란트 그림과 작가를 소개 등 그림을 활용하면서 성도들이 관심을 많이 가질 수 있도록 동기부여를 해 주기를 원한다”고 말했습니다. 언어와 문화가 다른 곳이라도 그림으로는 얼마든지 복음을 전 할 수 있기에 국내뿐 아니라 국외에도 그림으로 복음을 전하는 계기가 많아지길 소원합니다. <부산,경남 기독문화 일정> 1. 노래하는 순례자 찬양팀 4월30일(주일) 오후2시30분 : 해맑은교회 2. 선한사마리아인의 밤 (경남중·고 기독동문회 주최) 4월27일(목) 19시 : 협성뷔페. 3. 성경서예작품초대전 : 초대작가 병암 여운부 장로 * 주최 : CBS 부산방송 이사회 * 전시기간 : 17년 4월25일 ~5월 3일 (관람시간 10:00~18:00) * 전시장소 : CBS부산방송 5층전시실 * 전시작품 100점 4. 비저너리 한주희 집사(가야금) 초청 연주회 4월30일(주일) 오전11시, 오후2시 : 믿음찬교회 5. 우미나 (찬양사역자) 4월27일(목) 오후7시 : 수영로교회 4월30일(주일) 오후1시30분 : (서울) 주님의교회 5월14일(주일) 오전11시 : 이음교회 6. 디아코노스 (연극팀) 4월29일(토) 오후3시 : 장전제일교회, <초록구슬>연극 5월11일(목) 오전10시20분 : 덕천초등학교, <초록구슬>연극 5월11일(목) 오후6시50분 : 경북대학교EF, <카페살인사건>연극 5월13일(토) 오후7시 : 부산대청교회, <붕어빵 아줌마의 첫차랑>연극 5월13일(토) 오후2시15분 : 영도효성교회, <초록구슬>연극 5월14일(주일) 오전11시30분 : 사직동교회. <Are you happy?>연극 7. 민들레(인형극단) 5월1일(월) 푸른교회 5월2일(화) 부산진교회 5월4일(목) 샘물어린이집 5월7일(주일) 시온영광교회 5월11일(목) 평화노인요양원 5월14일(주일) 브니엘교회
    • 문화
    • 문화사역자
    2017-04-27
  • [기독교 교양 읽기 25] 한국교회, ‘이주민’에 더욱 관심 기울이길
    이주민과 ‘함께’! 20년 전 어느 날 성남의 한 양말공장에서 일하다가 부당한 처우와 상습적인 성추행 등을 피해 도망쳐온 이주노동자 8명이 저자가 담임하던 교회로 피신해 왔다. 여성이 7명이었다. 그들을 만난 것을 계기로, 민중목회를 하던 부부 목사가 당시 던졌던 물음은 이러했다.“오늘 이 땅에서 가장 고통받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그때 그들이 들은 대답은 “외국인 노동자”라는 소리였다. 이들은 이 소리에 바로 응답하였다. 외국인 노동자센터를 설립하고는 이들의 권익을 지키기 위해 앞장섰다. 특히 갈 곳 없는 이주여성들을 위한 전용쉼터를 한국 최초로 마련하였다. 국제결혼으로 입국한 여성들이 대폭 늘어남으로써, 한국이주여성인권센터도 설립하였다. 그리고서 그들의 개인적인 문제에서부터 구조적인 문제, 나아가 한국인의 인식 문제 등에 대해 하나씩 바꿔나가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그동안 이 땅에서 일어났던, 이주민들이 고통받은 구체적인 사례도 많이 제시해 놓았다. 우리 사회가 그들에게 저질렀던 악행이다. 우리 먼저 부끄러워하며 스스로를 돌아봐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저자들이 주장하는 이주민인권운동의 원칙에 대해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 이주민을 ‘위해서’가 아니라, 이들과 ‘함께’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지적이다.◈ 《다르게, 평등하게》 || 최정의팔, 한국염 목사는 둘 다 한국기독교장로회 목사면서 부부이다. 20여년 외국인노동자와 국제결혼 이주여성 등의 인권 신장을 위한 이주민 운동을 해왔다. 동연, 2016. 15,000원. ▌좌담: 김길구 전 부산YMCA 사무총장, 김수성 경성대 외래교수, 김현호 기쁨의집 기독교서점 대표 저자인 한국염과 최정의팔 부부 목사의 말 한마디가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컴퓨터로 ‘인권’을 치다가 받침 ‘ㄴ’을 빠뜨리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그러면 ‘이권’이 된다. ‘함께’를 놓치면 인권이 이권이 되기 쉽다. 인권운동을 하는 모든 이가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던져야 할 질문이라 할 수 있다. 유대인도 이주민이었음을 기억해야김길구 최근 우리나라에 닥친 심각한 문제 중의 하나가 이주 외국인과 관련된 것입니다. 이들을 보는 우리의 인식에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민이라고 주장하는 히브리민족도 이주민 또는 떠돌이인 에일리언(alien)이었습니다. 그래서 구약에서는 끊임없이 이들에게 ‘나그네’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향해 너희는 힘없는 자는 물론, 나그네를 잘 대접하라고 강조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김현호 신약에도 ‘나그네 같은’이라는 말이 자주 등장합니다. 우리 인생 자체가 천국을 향해 가는 순례 길이요, 나그네 길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기독신자들은 한반도라는 좁은 지역주의를 극복하고, 세계시민으로서 국내에 들어와 함께 사는 이주 외국인들에 대한 의식을 긍정적으로 바꾸어야할 시점이라 봅니다.김길구 그렇죠. 신약시대에 베드로가 전도하였던 대상은 유대인이라 하더라도 디아스포라, 즉 나라를 떠난 사람들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유대인들에게 이방인은 외부인이었습니다. 그렇기에 갈라디아서 3장 28절을 기억해야 합니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김수성 얼마 전 한 신문에 난 기사를 보면, 한국사회에서 이주민 노동자들은 ‘더럽고’ ‘시끄럽고’ ‘냄새가 나서’ 기피하고 싶은, ‘미개하고’ ‘무식하고’ ‘게으르’면서도 ‘돈을 밝히는’ 집단으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또 ‘남의 나라에 와서 일자리를 빼앗는 집단’ ‘잠재적 테러리스트’ ‘아이를 낳으러 팔려온 불쌍한 사람’이란 편견에 시달려야 합니다.김현호 이러한 것은 결국 한국 사람들의 선민의식 때문 아닐까요? 단군의 자손이라는 신화, 단일민족이라는 허구성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왜곡된 선민의식 말입니다. 이러한 선민의식이 외국인에 대해 배타성 또는 혐오증을 드러내는 것 아닐까요. 여기에 더하여 피부 색깔에 따라 반응이 달라지는, 어떻게 보면 사대주의적 무의식도 잠재된 것 같습니다. 동화정책을 넘어 통합·조화로 나가야김길구 여기에 더하여 법이나 정부의 정책도 대체로 외국 노동자에게 불리하게 적용되었습니다. 단적인 예로 이들의 취업에 관한 법을 보면 몇 차례 개정을 통해 2008년부터 고용허가제가 전면 시행되고 있지만, 아직도 이들은 여러 가지 면에서 인권의 사각지대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 사실입니다. 정부가 일방적으로 적용하는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 때문이죠.김현호 결혼 이주민들의 사정도 별반 다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이들 역시 코리안 드림을 안고 왔지만, 현실은 그렇게 녹록치 않습니다. 특히 소개소를 통해 결혼한 다문화가정의 경우 더욱 그러합니다. 여기에 더하여 다문화가정의 자녀들 중에 학교와 사회에서 편견 때문에 상급학교 진학을 포기하는 아이들이 많다는 것도 큰 문제입니다.김수성 우리나라의 이주민에 대한 정책 중 가장 큰 문제는 ‘동화(同化)정책’ 일변도라 할 수 있습니다. 현재 어떤 형태로든 우리나라에 들어와 있는 체류하고 있는 외국인 숫자가 200만 명을 넘었습니다. 이런 현실에서 정부는 아직도 이주민에 대해 동화정책만을 고집한다면 시대착오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김길구 이 책에서도 지적하다시피 ‘동화’가 아니라 ‘통합’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는 지적은 오래 전부터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정부의 입장은 요지부동입니다. 이 역시 ‘불통’의 전형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김수성 저는 이주민을 대하는 우리의 마음가짐에 있어서는 통합에 더하여 ‘조화’도 중요하다고 강조하고 싶습니다. 자기의 개성을 유지하면서도 서로가 조화를 이루는 것이 소통의 본질이라 생각합니다.김길구 오늘 우리가 초점을 맞추어야 할 부분은, 이러한 상황에 처한 이주민들에 대해 우리 교회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톺아보는 것입니다. 이는 교회의 사명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무엇이 문제인가는 이 책에 구체적으로 제시된 많은 사례를 보면 알 것입니다. 김현호 저는 교회의 선교사업에 이주민들을 대상으로 하는 사역을 적극적으로 포함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외국에 나가 선교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외국에서 한국으로 들어온 이들 이주민을 우리의 이웃으로 삼는 것 역시 중요한 선교사업입니다.김수성 아주 중요한 지적이라 생각합니다. 현재 한국 교회가 처한 입장에서 볼 때 이주민에 대한 선교는 선교정책의 터닝포인트가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연합체에서 현지 언어 예배 추진하길김길구 이주민에 대한 교회의 선교정책은 최소한 두 가지 면에서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첫째로 약자에 대한 교회의 관심과 보살핌입니다. 이것은 성경의 핵심적인 가르침 중 하나입니다. 또 하나는 한국 교회는 물론, 한국의 미래를 위한 선교정책의 변화를 의미합니다. 더 나아가 미래 한국의 성장 지렛대가 될 수도 있습니다.김현호 이를 위해서 지역별로 교회들이 협의하여 현지 언어별 예배를 드리도록 하였으면 좋겠습니다. A교회에서는 중국어 예배를, B교회에서는 베트남어 예배를, C교회에서는 필리핀어 예배를 하는 식이죠. 그러면 자연적으로 교회를 중심으로 이들의 공동체가 형성될 것입니다. 부기총 등 교회연합체에서 이를 추진하면 좋겠습니다.김수성 우리도 마더 데레사의 말을 현실에서 실천해야 할 것입니다. “난 다만 한 개인을 바라볼 뿐이다. 난 한 번에 단지 한 사람만을 사랑할 수 있다. 한 번에 단지 한 사람, 한 사람씩만….” 주위에 있는 이주민 한 사람씩만 사랑하다보면 모두가 이웃이 될 것입니다.김길구 신학교에서도 이와 관련한 강좌 개설은 물론이고, 나아가 이주자 선교나 이주자 복지와 관련한 학과 개설도 필요하다고 봅니다. 우리나라 신학교가 나갈 방향 중의 하나로 설정한다면 새로운 동력이 될 수도 있습니다.김현호 우리 아이의 경험에서 착안한 것인데, 교회의 이주민에 대한 관심이 증폭된다면 노인들만 사는 가정에 유학생 등을 위한 홈스테이 주선도 가능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 중에서 원하는 이를 선교사로 양성하여 본국으로 파송하면 적은 비용으로 큰 효과를 거둘 수 있을 겁니다.김수성 북유럽을 비롯한 선진국에서 시행하는 방법이죠. 일본에서는 오래 전부터 YMCA 등에서 제3세계 청년들을 초청하여 공부하도록 주선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들이 공부를 끝내고 본국으로 돌아가서 일을 하게 되면, 결국 일본과 밀접한 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습니다. 10년 이상을 내다본 투자입니다.김길구 미래를 위한 교회의 선택이라 할 수 있겠군요. 우리 교회가 이슬람 공포에만 사로잡혀 있을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적극적으로 이들을 향한 선교의 손을 내밀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이들을 개종시키지는 못할지라도 이들을 우호적으로라도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다음에는 필립 얀시의 《교회, 나의 고민 나의 사랑》(Ivp, 2010)을 읽고, 교회 출석에 대해 고민하는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정리: 김수성] 여성가족부의 ‘2015년 전국다문화가족 실태조사’에 따르면, 전국의 다문화가구수는 27만 8,036가구이고, 결혼이민자·귀화자는 30만 4,516명으로 추정된다. 특히 2012년 조사 때에 비해 만 9~24세 자녀 수가 8만 2,476명으로 24%나 증가했다. [위의 표 자료는 통계청의 ‘2015년 다문화인구 동태 통계’에서 발췌한 것임.] ◇ 같이 읽으면 좋은 책 《더불어 사는 다문화 함께하는 한국교회》 / 조성돈 외 / 예영 《마지널리티: 다문화 시대의 신학》 / 이정용 신재식 / 포이에마
    • 문화
    • 기독교 교양 읽기
    2017-04-10
  • [문화사역자를 소개합니다] 새노래 찬양단 - 부산대학교 SFC 찬양팀
    부산대학교 안에 기독교 동아리인 SFC가 있는데, 이 단체 안에서 생긴 찬양팀인 새노래찬양팀은 역사가 무려 30년이 된 전통 있는 찬양팀입니다. 1987년에 부산대학교 학생들을 대상으로 찬양으로 복음을 전하기 위해 창단된 이 팀은 초창기에 기타2대를 메고, 학교 정문에서 등하교길에 찬양을 하며 복음의 메아리를 대학 캠퍼스에 울리기 시작하였습니다. 당시 사회적으로 혼란한 시기라 학교정문에서는 온갖 시위와 최루탄가스로 인해 등하교 때마다 몸살을 앓고 있던 형편이었는데, 찬양으로 이 지역을 정화해가며 복음을 전하던 이 운동은 많은 반향과 기독교문화의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후 교내에서 1달에 한번 찬양집회를 가지기 시작하여, 많은 기독대학생들이 모여 같이 찬양하며 기도하고 하나님나라를 확장해가는 학원복음화의 핵심적인 역활을 감당하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1992년에 대운동장에서 열린 찬양큰모임은 당시 세상적인 축제문화에 맞서 기독교적인 축제문화를 당당히 캠퍼스에 선포한 귀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 찬양모임은 더욱 확대되어 다른 대학에서도 찬양팀을 조직하여 부산지역 캠퍼스의 복음화를 이루는데 큰 영향을 끼치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장지현 학생을 비롯한 6명의 단원이 이 팀을 이끌어가고 있으며 매주 목요일마다 SFC의 큰모임에서 찬양인도를 하고 있습니다. 반면 학생들로 이루어진 팀이라 음향 장비에 대한 교육이 부족한 상태에서 섬기다보니 처음에 시행착오를 많이 겪는 부분도 있고, 선배들이 졸업하면 후배들이 또 이어받아 가야하는 대학교팀의 특성상 새로운 멤버를 구성하고 교육시키는 일이 가장 힘들다고 합니다. 하지만 찬양의 가사를 통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더 알아가고, 하나님의 은혜에 더욱 감격하게 되는 것이 가장 중요하며, 찬양팀은 청중의 은혜를 돕는 은혜의 다리의 역할을 해야 하는 것이 사명이라고 생각하며 열심히 달려가는 이 젊은 학생들의 찬양이 캠퍼스에서 귀한 역할을 잘 감당하길 기도합니다. <부산, 경남 문화사역자 일정> 1. 늘소리 (국악찬양팀) -4월23일(주일) 저녁7시 : 천안중부교회 부활주일 찬양집회 2. 그리스도의 편지 (찬양팀) -4월9일(주일) 오후2시30분 : 효성교회 -4월16일(주일) 오후2시 : 교리제일교회 3. 약속의 땅 (찬양팀) -4월16일(주일) 오후2시30분 : 창남교회, 거창부활절 연합집회 4. 노래하는 순례자 (찬양팀) -4월9일(주일) 오후2시 : 동신교회 찬양집회 -4월11일(화) 오후6시30분 : 부산밀알화요모임 찬양인도 -4월16일(주일) 오전11시 : (청도) 별빛교회 찬양예배 5.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 및 기독교부산방송 후원을 위한 ᆞ성경서예작품초대전ᆞ * 초대작가 : 병암 여운부 장로 * 초대일시 : 4월 25일 오후2시 * 전시기간 : 4월25일 ~5월 3일 * 전시장소 : 기독교부산방송5층전시실 * 문의 : 전화 051-636-0050, 작가 010-7712-4554
    • 문화
    • 문화사역자
    2017-04-10
  • [문화사역자를 소개합니다] 인형극단 민들레
    민들레 인형극단은 2005년 창단된 팀으로서 온 세상에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님의 말씀을 인형극에 담아서 전하고, 공연 예술문화 확산과 발전에 힘쓰는 인형극 전문극단입니다. 먼저 민들레가 하는 일은 당연히 인형극 공연입니다. 인형극의 특성상 아이들이 많이 좋아하다보니 유치부, 초등부 아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인형극 공연이 가장 많습니다. 특히 정서발달에 가장 중요한 나이인 아동들에게 인형을 통하여 복음을 전하면 이 아이들의 기본정서에 복음적 내용이 깔리게 되고, 이 복음적인 기초위에 사회성, 상상력, 창의력이 쌓이다 보니 많은 분야에서 민들레를 찾고 있습니다. 특히 민들레는 교회에서의 인형극도 많이 하지만 일반 교육분야에서도 특히 많이 찾고 있습니다. 일반 유치원, 학교, 도서관, 문화센터 등 믿지 않는 곳에서도 공연을 많이 하는데, 이 팀이 하는 인형극의 모든 내용이 성경을 기초로 한 뒤 그 내용을 일반인에게 맞게 각색하여 인형극을 하다 보니 그 어느 문화단체보다 복음을 전하는 도구로서 역할을 효과적으로 잘 감당하는 팀이기도 합니다. 한편 사회가 노령화되어가는 이 시기에 노인대학 등에서도 인형극을 많이 하는데, 나이 드신 어르신들은 마음이 어린이처럼 인형극을 무척 좋아하고 이를 통해 복음이 정말 잘 전해지기도 합니다. 또한 인형극에 관심이 많은 교회나 단체의 교육에도 열심을 내고 있어서, 학교의 자유학기제 강의, 여러 전문 강습회의 강의, 세미나, 문화체험 프로그램 등으로 인형극을 배우고자 하는 많은 이들에게 인형극을 보급하는 귀한 일들도 담당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교회에서 인형극을 배워 여름성경학교나 각 교회의 여러 프로그램에 사용하는 교회가 많이 있기도 합니다. 그리고 개인이 인형극을 하기에는 소품을 마련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습니다. 민들레에서 각 교회의 성격에 맞는 캐릭터 인형 직접 제작 판매하며, 무대 주문 제작 공연에 필요한 자료를 제공하여 인형극을 하고자 하는 분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기도 하였습니다. 또한 외국에 가서 복음을 전할 때 언어의 문제가 가장 큰 어려움이 있는데 이 인형극을 통하여 복음을 전할 때 그 어려움들을 극복할 수 있어서 정말 효과적인 복음의 도구가 되었고, 중앙아시아의 학교 및 유치원 등을 다니며 해외선교에서 큰 힘을 다하고 있는 귀한 인형극팀입니다. 이 귀한 복음의 도구가 되는 팀이 앞으로도 많은 교회와 단체에서 인형극으로 복음을 전하는 귀한 자리가 많아지길 기대합니다. 공연문의 051)202-2770 / 010-2851-7195 (김영희 공연팀장) E-mail. hannah-1972@hanmail.net <부산,경남 문화사역자 일정> 1. 찬양사역자 김인희 음반 발매 쇼케이스 3월 25일(토) 저녁 6시.공간 이음(부전역 2번출구) 2. 그리스도의 편지 (찬양팀) 3월25일(토) 오후2시 평강교회 3. 36차문화전도아카데미 : <바리스타로 전도한다> 강사 : 김삼송 목사 3월23일(목) 오후7시, 늘노래연구소 4. 노래하는 순례자 (찬양팀) 3월26일(주일) 오후3시 : 푸른교회 4월2일 (주일) 오후2시30분 : 연지교회
    • 문화
    • 문화사역자
    2017-03-23
  • [문화] 최병학 목사의 문화펼치기 25 - 권력과 폭력
    “걸작은 새로운 다중을 창조한다.”(질 들뢰즈) 질 들뢰즈에 의하면 걸작의 참된 의미는 대중의 주어진 감수성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대중’(다중)을 창조하는 것, 대중이 듣기 원하는 입에 발린 이야기가 아닌, ‘새로운 감수성을 창조하고, 현실 안에 잠재된 어떤 힘을 드러내는 이야기’라는 것이다. 그는 “문제의 해법에만 옳고 그름이 있는 것이 아니라, 문제에도 옳은 것과 그른 것이 있다.”고 한다. 옳지 않은 문제에 옳지 않는 답도 문제지만, 옳지 않은 문제에 옳은 대답은 더욱 문제라는 것이다. 따라서 들뢰즈는 “이론과 실천은 두 다리와 같다. 오른발이 앞으로 나가면 왼발이 따라가고, 왼발이 앞으로 나가면 오른발이 따라간다.” 지금 대한민국이 그러하다. 대중이 한발 나가니, 헌법기관이 한발 따라온다. 그렇다면 헌법기관이 한발 나아가면 정치가 한발 따라갈까? 목하 대한민국은 새로운 대중을 창조하는 걸작이 필요한 시대이다. 그리고 걸작을 창조하는 새로운 지식인이 필요하다. 1. 지식인: 자퀴즈! 20세기 ‘지식인들의 지식인’이었던 장 폴 싸르트르(J. P. Sartre)는 지식인에 관해 이렇게 말한다. “지식인은 자신과 무관한 일에 쓸데없이 참견하는 사람이다.” 여기에 ‘계몽적 지식인’과 ‘유기적 지식인’을 첨가하면 참다운 지식인은 세 종류가 된다. 첫째, ‘참견하는 지식인’은 자신의 전문영역에서 쌓아올린 명성, 곧 상징자본을 세상을 바꾸는 데 사용하는 지식인이다. 가령, 1898년 드레퓌스 사건의 한복판에서 에밀 졸라(É. F. Zola)가 소설 쓰기를 제쳐두고 “자퀴즈!”(J’accuse!) 곧 “나는 고발한다.”라고 외치고 나섰을 때, 반드레퓌스 우익세력이 한목소리로 작가가 왜 쓸데없이 남의 일에 끼어드느냐고 비난의 화살을 쏘는 순간 현대적 의미의 지식인은 탄생했다. 둘째, ‘계몽적 지식인’은 소위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이란 뜻에서 스스로 철학자라고 불렀던 지식인들, 곧 (프랑스로 한정하여) 볼테르, 루소, 디드로, 달랑베르를 들 수 있는데, 이들은 18세기를 계몽주의 시대로 만들었다. 중세의 타락한 가톨릭 교회 권력에 맞서 미몽의 세상에 빛을 끌어들였던 참 계몽적 지식인들이라 할 수 있다. 셋째, ‘유기적 지식인’은 일찍이 안토니오 그람시(A. Gramsci)가 말했던 바, ‘사회 계급의 신경 노릇을 하는 지식인’이다. 노동자계급의 유기적 지식인이야말로 그람시적 지식인의 본령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세 부류의 지식인은 당대 피억압자를 대신해 그들의 대표자, 대변자 구실을 하였다. 그러나 이런 의미의 지식인, 곧 대중 위에서 대중을 대표하고 대변하는 지식인은 죽었다. 대중이 스스로 지식의 주인이 되었으므로 이러한 지식인이 퇴장한 것일까? 아니면, 침묵 속에 짓눌려 익사당한 것일까?¹ 지금 대한민국은 후자에서 전자로 진행 중이다. 그렇다면 그 지식과 대중은 정치적 권력을 차지할 것인가? 2. 권력이란 무엇인가? 권력이란, ‘다른 사람의 의사에 관계없이 자신의 의사를 관철시킬 수 있는 힘’(대통령의 국정농단)이기도 하며, ‘다양한 의견을 모아 하나로 일치시키기 위해 나타난 것’(대통령 탄핵)이기도 하다.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실제로 우리 일상생활 주변에 다양하게 존재하는 것이 바로 권력이다. 스티븐 룩스(S. Lukes)는 『3차원적 권력론』 (나남, 1992)에서 “권력은 1, 2, 3차원으로 분류되는데, ‘직접적인 힘으로 제압하는 권력’인 1차원적 권력과 ‘법이라는 간접적 힘’으로 통치하는 2차원적 권력, 그리고 ‘설득과 영향력으로 부지불식간에 작용’하는 3차원적 권력”이 있다고 한다. 가령, 점심시간에 무엇을 먹을까를 생각하고 있을 때 담임목사가 자장면을 시켜 먹자고 하면 부목사들이 따를 수밖에 없는 경우가 바로 그것이다. 이때 담임목사가 가진 힘을 1차적 권력이라고 한다. 따라서 1차원적 권력은 권력의 일반적인 정의로 국가의 국민에 대한 공권력 행사, 사회적 강자의 사회적 약자에 대한 권력 행사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행태적(behavioral)’권력이라고도 한다. 2차원적 권력이란 ‘구조적(structural)’ 권력으로, 어떠한 문제를 모든 사람이 알 수 있도록 표면 위로 올릴 수 있는 혹은 올리지 않는 권력을 뜻한다. 교회 내적 문제에 관하여 당회가 막강한 권력으로 사안을 결정하여 좌지우지 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구조적 강자가 소수자의 의견을 아예 제도적, 혹은 원천적으로 막아서 그들의 의견이 수면위로 나오지 못하게 하는 권력을 뜻한다. 3차원적 권력은 ‘구성적(constitutive)’ 권력으로, 교육과 사회화를 통해 사회 구성원의 사고방식을 지배하는 권력을 말한다. 그러나 보통 언론이나 매체의 권력을 뜻하기도 한다. 가령, 조선일보가 노조에 대해 ‘귀족노조’식으로 폄하하여 기사를 쓴다면(교회적으로는 여론을 형성하는 대형교회가 담론을 형성하면) 사람들의 생각도 노조를 ‘귀족노조’로 구성한다는 의미에서의 권력이라고 보는 것이다. 독일 나치스의 선전장관 괴벨스가 “대중은 거짓말을 처음에는 부정하고, 그다음에는 의심하지만, 되풀이하면 결국에는 믿게 된다”, “거짓과 진실의 적절한 배합이 100%의 거짓보다 더 큰 효과를 낸다”, “승리한 자는 진실을 말했느냐 따위를 추궁당하지 않는다”, “나에게 한 문장만 달라. 그러면 누구든지 범죄자로 만들 수 있다.”라고 말한 것이 바로 구성적 권력의 힘이다. 히틀러와 괴벨스는 국민 여론을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다고 믿었다. 괴벨스는 선전 수단으로 라디오에 주목했다. 그는 국가 보조금을 풀어 노동자들의 일주일분 급여인 35마르크만 있으면 라디오를 살 수 있도록 했다. 그리고 매일 저녁 7시 라디오 뉴스에 ‘오늘의 목소리’라는 코너를 만들어 총리 관저를 르포(reportage)하도록 했다. 나치스 지지 군중대회도 실황으로 전국에 생중계했다. 이러한 괴벨스의 정치 연출의 핵심은 한마디로 “이성은 필요 없다. 대중의 감정과 본능을 자극하라.”라는 것이었다. 반면 미국 16대 대통령 링컨은 “국민의 일부를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속일 수는 있다. 국민의 전부를 일시적으로 속이는 것도 가능하다. 그러나 국민의 전부를 끝까지 속이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했다. 지금 대한민국은 괴벨스에서 링컨으로 넘어가고 있다. 1, 2차원적 권력이 구체적으로 권력을 실천하는 것이 폭력이다. 대한민국은 촛불혁명과 헌법제판소의 일련의 절차를 통하여 세계사에 유래가 없는 비폭력과 민주적 혁명을 완성하였다. 그러나 권력과 폭력의 고고학은 어떨까? 3. 폭력의 고고학: “잔혹함이 없는 사랑은 무력하며, 사랑이 없는 잔혹함은 맹목적이다” “어제의 범죄를 벌하지 않는 것, 그것은 내일의 범죄에 용기를 주는 것과 똑같은 어리석은 짓이다. 공화국 프랑스는 관용으로 건설되지 않았다.” (알베르 카뮈) 관용(tolerance)이란 ‘자신과 다른 사고방식과 행위 양식을 존중하고 승인하는 태도’를 말한다. 자신이 아무리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어도 다른 사람의 신념을 존중해야 한다는 것이 관용의 전제 조건이다. 이러한 관용은 모든 것을 관대하게 대하는 중립적 관찰자의 태도가 아니라, 다른 존재에 대해서는 그 존재 안에서도 가치를 발견하고 그것에 의미를 부여하고자 하는 태도이며, 동시에 자신의 존재에 대해서는 오류와 편견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통찰에 근거한다. 그러나 관용에 한계를 정하지 않으면 관용의 정신 자체가 존립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열린 사회와 그 적들』 (민음사, 2006)에서 전체주의 정치체제를 ‘열린사회’와 ‘닫힌사회’의 비유로 통렬하게 비판한 칼 포퍼(K. R. Popper)는 이것을 ‘관용의 역설(paradox of tolerance)’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아무 제약 없는 관용은 반드시 관용의 소멸을 불러온다. 우리가 관용을 위협하는 자들에게까지 무제한의 관용을 베푼다면, 그리고 불관용의 습격에서 관용적인 사회를 방어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관용적인 사회와 관용 정신 그 자체가 파괴당하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관용의 이름으로 불관용을 관용하지 않을 권리를 천명해야 한다.” 열린사회(the open society)는 전체주의와 대립되는 개인주의 사회이며 사회 전체의 급진적 개혁보다는 점차적이고 부분적인 개혁을 시도하는 점진주의 사회이다. 반면 닫힌사회(the closed society)는 불변적인 금기와 마술 속에 살아가는 원시적 종족 사회로서 국가가 시민생활 전체를 규명하며 개인의 판단이나 책임은 무시되는 사회이다. 지금 지금 대한민국은 열린사회 안에 작은 닫힌사회가 있다. 이 닫힌사회 속에 갇힌 어르신들을 사랑해야 할까? 아니면 이러한 관용의 역설에 불관용을 관용하지 않을 권리를 천명해야 할까? 폭력의 고고학을 소환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폭력에 관한 고고학’의 첫째 이론가인 독일의 문예비평가 발터 벤야민(W. Benjamin)은 에세이 「폭력 비판을 위하여」 (1920)에서 “폭력에는 ‘신화적 폭력’과 ‘신적 폭력’이 있다. 신화적 폭력의 ‘신화’는 그리스 신화를 가리키고, 신적 폭력의 ‘신’은 유대교의 신, 곧 야훼를 가리킨다.”라고 말한다. 그는 그리스 신화 속의 ‘니오베 이야기’를 사례로 든다. 테베의 왕비 니오베는 아들 일곱명과 딸 일곱명을 두었는데, 그들을 무척 자랑스러워했다. 그러나 니오베는 불경죄를 저질렀는데, 자신이 레토(Leto) 여신보다 더 훌륭하다고 뽐냈던 것이다. 레토에게는 아들 아폴론과 딸 아르테미스 한명씩밖에 없었다. 따라서 화가 난 레토는 아폴론으로 하여금 니오베의 아들들을 죽이게 하고, 아르테미스는 딸들을 죽이게 하였다. 자식을 모두 잃은 니오베는 울며 세월을 보내다 돌이 되고 말았다. 여기서 레토의 분노가 바로 신화적 폭력이다. 반면, 벤야민이 든 신적 폭력의 사례는 구약 민수기의 ‘고라의 반역’이다. 고라는 모세의 사촌이었으나, 지휘관 이백오십 명과 함께 모세의 지도력에 반기를 들었다. 모세가 교만하고 독선적이라는 것이 반기의 명분이었으나, 사실은 같은 레위지파 후손으로서 모세에게만 영광이 돌아가는 데 대한 질투가 숨어 있었다. 그러나 모세에 대한 반역은 모세에게 권위를 준 야훼에 대한 반역이다. 따라서 모세가 야훼의 공정한 심판을 요청하자, 땅이 갈라지고 불길이 솟아 고라의 무리는 한꺼번에 소멸 당했다. “땅이 그 입을 열어 그들과 그들의 집과 고라에게 속한 모든 사람과 그들의 재물을 삼키매 그들과 그의 모든 재물이 산 채로 스올에 빠지며 땅이 그 위에 덮이니 그들이 회중 가운데서 망하니라. 그 주위에 있는 온 이스라엘이 그들의 부르짖음을 듣고 도망하며 이르되 땅이 우리도 삼킬까 두렵다 하였고 여호와께로부터 불이 나와서 분향하는 이백오십 명을 불살랐더라(민수기 16:32-35).” 이것이 신적 폭력이다. 그렇다면 ‘신화적 폭력’과 ‘신적 폭력’의 차이는 무엇인가? 벤야민은 “신화적 폭력이 법 정립적이라면, 신적 폭력은 법 파괴적이고, 신화적 폭력이 경계들을 설정한다면, 신적 폭력은 경계를 파괴한다.”라고 말한다. 곧, 신화적 폭력이 법을 정립하고 보존하는 폭력, 다시 말해 지배를 구축하고 유지하려는 폭력인 데 반해, 신적 폭력은 그런 법을 파괴하고 해체하는 폭력인 것이다. 벤야민은 이 신적 폭력을 ‘순수한 폭력’이라고 옹호하였다. ‘신화적 폭력이 생명체를 희생시킴으로 자족하지만, 신적 폭력은 생명체를 위해, 생명체를 구현하기 위해 생명을 희생’시키는 것이다. 약간의 신학적 무리수가 있긴 하지만, ‘레토(신)-니오베(인간)’과의 관계가 아니라, ‘인간(모세)-인간(고라)의 관계’에 ‘신이 폭력으로 편들어 주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곧, 신화적 폭력은 신의 이름으로 인간을 억압하는 폭력이 되지만, 신적 폭력은 신의 이름으로 인간의 한쪽을 편들어 주는 것이다(물론 시대와 상황에 따라 그 한쪽의 정당성에 관한 논의가 필요하겠지만). 그렇다면 여기서 벤야민이 쓰는 ‘폭력’의 의미란 무엇인가? 독일어 ‘Gewalt’는 ‘힘ㆍ폭력ㆍ권력ㆍ권능ㆍ무력’과 같은 다양한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벤야민이 다루는 폭력은 ‘윤리적 상황’과 관련된 폭력을 뜻한다. 가령, 화산폭발이나 지진과 같은 자연현상으로서의 폭력은 고찰대상에서 배제한다. 따라서 폭력이 윤리적 현상으로 파악된다면, 그때 폭력은 법과 정의와 관련된다. 곧, 벤야민이 다루고자 하는 것은 ‘법적 폭력’이다. 대체로 사람들은 폭력은 이성의 한계에서, 법은 이성의 정당한 출발점으로 인식한다. 그러나 벤야민은 “폭력은 정치의 근원이자 토대이고, 법은 정치의 종점”이라고 한다. 곧, 세상의 폭력을 제어하는 것이 법이 아니라, 오히려 법의 궁극적이고 내재적인 목적이 폭력 내지 권력을 통해 세상을 통제하는 데 있다는 것이다. 또한 벤야민은 이렇게 말한다. “신화적 폭력이 법에 준거하는 것이라면 신적 폭력은 법을 파괴한다. 전자가 경계를 설정한다면 후자는 한계를 인정하지 않는다. 전자가 죄를 만들고 속죄하게 하는 것이라면 후자는 죄를 제거한다. 전자가 협박적이라면 후자는 충격적이고, 전자가 피의 냄새를 풍긴다면 후자는 피의 냄새가 없고 치명적이다.” 그러나 ‘폭력에 관한 고고학’ 그 두 번째 이론가인 프랑스의 철학자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는 『법의 힘』 (1994)에서 벤야민의 「폭력 비판을 위하여」를 심층적으로 분석하며 “이 텍스트에서 발견하는 가장 가공할 만한 것은 … (하나의) 유혹이다. 어떤 유혹 말인가? 대학살을 신적 폭력의 해석 불가능한 발현의 하나로 사고하려는 유혹”이라고 비판 한다. 사실 데리다와 달리 벤야민은 파쇼의 시대를 살았다. 따라서 ‘신적 폭력으로서 메시아를 요청’하는 벤야민을 데리다는 이해하기는 하나, 이러한 벤야민의 폭력론은 좌파와 우파가 뚜렷하게 구분되기 이전의 ‘혼란스러운 근친성’ 속에서 저술된 것이며, 그런 만큼 위험을 내장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따라서 베냐민의 신적 폭력, 곧 피도 흘리지 않고 한꺼번에 내리치며 휩쓸어버리는 신의 폭력이 ‘최종 해결’이라면, 나치의 유대인 대학살 역시 그러한 맥락에서 읽혀질 수 있다고 비판한다. 그렇다면 아우슈비츠 가스실의 대학살은 벤야민의 ‘신적 폭력’의 한 모습이 될 것이다. 만약 모세를 나치로, 고라를 유대인으로 본다면 데리다의 비판은 타당할 것이다. 그러나 ‘폭력에 관한 고고학’ 그 세 번째 이론가인 이탈리아의 철학자 조르조 아감벤(G. Agamben)은 『호모 사케르』(1995)에서 “신적 폭력을 ‘최종 해결’과 비슷하다고 생각하는 데리다의 주장은 정말 독특하다고 할 수밖에 없는 오해이다.”라고 비판한다. 또한 ‘폭력에 관한 고고학’ 그 네 번째 이론가인 슬로베니아의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S. Zizek)은 아감벤과 같이 데리다의 ‘오해’를 비판하고, 베냐민의 ‘신적 폭력’을 옹호한다. 지젝은 『폭력이란 무엇인가』(난장이, 2011)에서 “신적 폭력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그래야 모호함을 피할 수 있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벤야민의 신적 폭력의 구체적 사례로 프랑스 대혁명의 자코뱅(Jacobins, Jacobin Club) 공포정치², 그리고 1919년 러시아 내전 때 붉은 군대의 ‘테러리즘’을 거론한다. 아무튼, 지젝은 『폭력이란 무엇인가』에서 신적 폭력이라는 이름의 ‘순수한 혁명적 폭력’을 변호한다. 지젝은 이렇게 말한다. “신적 폭력은 자본주의 세계체제가 저지르는 거대한 구조적 폭력에 맞서는 대항 폭력이며 이러한 신적 폭력은 그 내부에 뜨거운 사랑을 간직하고 있다.” (따라서 구약성서의 고라를 자본주의 세계체제로 본다는 말일 것이다.) 체 게바라도 “진정한 혁명가는 위대한 사랑의 감정에 이끌린다.”고 했다. 곧 사랑이 없으면 혁명도 없는 것이며, 이러한 맥락에서 칸트(I. Kant)의 명제를 비틀어 지젝은 “잔혹함이 없는 사랑은 무력하며, 사랑이 없는 잔혹함은 맹목적이다.”라고 말한다. 진정한 사랑, 진정한 혁명은 잔혹, 곧 폭력 없이는 이룰 수 없다는 것이 지젝의 결론이다. 십자가의 고통 없이는 부활의 기쁨이 없다는 기독교 신학의 정수를 역설적으로 폭력의 역사를 통해 메시아의 신적 폭력의 그 정당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폭력을 국가로 확장하면 성 어거스틴(A. Augustinus)의 ‘정당한 전쟁론’(just war theory)을 살펴볼 수가 있다. 어거스틴은 “자살은 어떠한 경우에도 금지되나 살해인 경우, 특별히 하나님의 거룩한 명령을 실천하는 경우에는 예외로 인정된다.”고 했다. 그리고 어거스틴의 이러한 살인에 대한 부분적 허용이 ‘정당한 전쟁론’으로 발전했는데, 그가 전쟁을 정당화하는 8개의 기본원칙은 “첫째 하나님의 공의를 침해하는 경우, 둘째 전쟁의 악함이 현저하다고 도덕적으로 판단될 때, 셋째 폭력의 사용을 위한 정당성이 인정될 때, 넷째 국가의 영적인 상태가 심각히 위협을 받을 때, 다섯째 신앙생활에서 복음적 기준의 해석들이 위협을 받을 때, 여섯째 불의한 사회적 변화에 더 이상 수동적 태도만으로 일관할 수 없을 때, 일곱째 전쟁에 참여하는 것이 성서에 비추어보았을 때도 적절했을 때, 여덟째 평화가 더 이상 지속될 수 없을 때”라고 한다. 지금 대한민국은 어떤 상태인가? 폭력의 고고학은 미래 권력을 향하여 묻고 있다. ----------------------------------------------- (각주) 1) 사실 ‘지식인의 고향’, ‘지식인의 태반’이었던 대학이 대기업과 대자본의 하청업체가 되어 버렸다. 대학은 ‘죽은 지식인들의 묘지’가 되어 버렸고, 앞으로도 더 극심해질 이러한 세상에 싸르트르적 지식인의 ‘불온한 기운’이 부활해야 할 것이다. 계몽적 지식인이 권력에 맞서 미몽의 세상에 빛을 밝혀야 한다. 그리하여 이 땅의 수많은 소외받는 이들과 함께 ‘불의에 대한 저항’의 꿈을 꾸어야 할 것이다. 2) 자코뱅파는 프랑스 혁명기에 생긴 정당 중 하나로 프랑스 혁명을 주도하였다. 파리의 자코뱅 수도원을 본거지로, 막시밀리앙 로베스피에르가 중심이 되어 급진적인 혁명을 추진하였다. 국민 공회에서 왼쪽 자리에 앉았다고 해서 ‘좌익’의 어원이 되었다. 물론, 마르크스가 높이 평가했으며, 따라서 공산주의의 사상적 뿌리라 할 수 있다. 최 병학 목사 (남부산용호교회 담임) *이 글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문화
    • 문화펼치기
    2017-03-23
  • [기독교 교양 읽기 24] “사회는 포용성과 시민상식 가진 목사 원해”
    “목회는 삶의 현장에서!” 모두 4부로 구성된 에세이집이다. “목회도 패러다임이다”라는 말로 시작한다. 그런데 여기서 언급한 패러다임은 본래의 의미와는 조금 다르게 사용한 것 같다. 삶의 현장에 적합한 목회를 해야 한다는 의미로 사용하였다. 패러다임이라기보다 ‘상대적’이라는 의미가 강하다. 노인들과 소외받은 아이들이 대부분인 산골교회에서 목회하면서, 목사가 지역주민들의 노동 현장에 뛰어들고, 당장의 애로사항을 해결해주는 것이 중요함을 이야기한다. 2부에서는 이들과 생활하면서 목회자로서 깨달은 바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3부와 4부에서는 신앙과 사회에 관한 이야기를 주로 한다. 1부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다. 1부는 어느 정도 편하게 읽을 수 있었다면, 3부와 4부는 내용 자체가 가볍지 않다. 사용한 단어도 까다롭고 사변적이어서 페이지를 빨리 넘기기 어렵다. 다 읽고 나니 목회 현장에서 일어난 일을 있는 그대로 조금 더 보여주었으면 더 좋았을 걸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이 책의 제목인 ‘목사 사용설명서’가 인터넷 등을 통해 알려지고, 몇몇 미디어에서 이를 취재하여 기사화하면서 저자와 시무하는 교회가 많이 알려졌다. ‘사용설명서’ 중 마지막에 제시한 ‘경로당에서 고스톱 칠 때 짝 안 맞으면 전화합니다’가 언론의 관심을 끌었기 때문이다. 교인들에게 좀 더 가까이가려는 목회자의 심경을 느끼게 하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 《목사 사용설명서》 || 김선주 목사는 충청북도 영동의 물한계곡교회에 시무하고 있다. 그는 목회 패러다임을 바꾸어 마을공동체와 함께하고자 노력하는 목회자이다. 대장간, 2016. 10,000원. ▌좌담: 김길구 전 부산YMCA 사무총장, 김수성 경성대 초빙교수, 김현호 기쁨의집 기독교서점 대표 “아, 잡꿀. 세상 모든 꽃들이 제 향기를 섞어 하나로 만든 꿀. 나는 퍼뜩 ‘잡놈’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어떤 하나의 전문성을 가진 순혈적 인간이 아니라 모든 것을 다 알고, 다 할줄 알고, 다 소통하는 인간. 만능 엔터테이너.나도 잡놈이 되고 싶어졌다. 목사라는 제사장적 순혈주의, 그 위선적인 거룩함과 순혈주의적 사제의 모습을 벗고 잡놈이 되고 싶다. 그러고 보니 예수님도 참 잡스럽게 사셨다. 목수, 의사, 선생, 혁명가, 설교자, 상담가……. 아, 그래서 예수님 말씀이 꿀맛이었구나.” [34쪽]글쓴이는 꿀을 뜨면서 잡꿀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서는 스스로도 ‘잡놈’이 되고 싶다고 말한다. 순혈주의적 사제의 모습을 거부한다. 그러면서 그는 의도적으로(?) 거친 단어를 사용한다. ‘나는 속물이다’로부터 ‘영성, 싸구려 유행상품’ ‘집단강간체제와 목사의 이력’ ‘도끼날처럼 시퍼런 가을하늘’ 등. #말로만이 아닌 ‘당장의 축복’이 중요김길구 : 옆에 있던 분이 《목사 사용설명서》라는 이 책 제목을 보더니 당장 “이건 너무했다”고 합디다. 목사가 물건도 아닌데 ‘사용설명서’라니, 이런 반응이었죠. 김현호 : 심정을 이해할만합니다. 그러나 저자인 김선주 목사가 목회하는 교회의 경우, 대부분 교인이 노인인데다 이들은 목사를 ‘특별한 분’으로 인식한다는 것이죠. 이에 비해 저자는 현장에서 이들을 돕고 함께 생활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그들의 일터로 뛰어들죠. 교인들이 자꾸 부담스러워 하자, 그 부담을 조금이라도 덜어주기 위해 생각해낸 것이라고 합니다. 본래는 ‘이럴 때는 전화하세요’라는 제목인데, 언론에 보도되면서 ‘목사 사용설명서’라는 제목으로 더 알려지게 된 것 같습니다.김수성 : 제목 자체로만 본다면 상당히 성공적인 것 같습니다. 검색해 보니 다른 분들이 쓴 것인데, ‘○○ 사용설명서’라는 제목을 붙인 책이 몇 권 있습디다. 한마디로 유행어처럼 퍼진 것이죠.김길구 저자는 교회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주어진 상황에 따라 목회자는 현장을 중시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스스로 이야기하듯 ‘목사는 교인들의 삶의 현장에 있어야 하는 존재’라는 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입니다.김현호 : 김 목사의 목회철학인 것 같습니다. 목사는 교회를 통해 기독교적 가치를 이 땅에 실현하려는 사람들을 독려하고 그들과 삶을 공유하는 지도자라는 것을 강조합니다. 나아가 목회는 지역적이지만 세계사적 인식과 사유를 통해 지역을 극복해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김수성 : 그는 ‘축복’도 관념의 언어로 끝나서는 안 되고 ‘당장의 축복’으로 나타나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추운 겨울날 한밤중에 홀로 사는 할머니 교인집의 고장난 연탄보일러를 고치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사택의 연탄불을 빼내 겨우 마무리하자 날이 밝았다는 이야기는 ‘당장의 축복’이 어떤 것인지 잘 보여줍니다.김현호 : 그의 목회철학에 설득력이 있다고 보는 이유입니다. 일손이 필요할 때 일꾼이 되고, 추위에 떠는 교인의 보일러를 고쳐주는 등 지금 목마른 사람에게 당장 물 한 모금을 주는 것이 축복이라는 것입니다. 막연한 미래를 기대하게 함으로써 현실의 목마름을 이겨내야 한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축복을 가장한 위선일 수도 있지 않을까요? ▲ 물한계곡교회에서 교인들에게 배포하여 화제가 된 ‘이럴 때는 전화하세요’ 내용. 목사를 특별하게 생각하는 연세 높은 교인들과의 거리감을 좁히기 위해 나름대로 노력한 결과이다. 목회란 보편적이면서도 상대적임을 보여준다. #시골교회-도시교회 이분화는 잘못김길구 : 이를 다른 시각으로 보면 교회의 지역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교회가 지역에 뿌리를 내려야 할 당위성은 몇 차례 거론했습니다만, 도시교회에도 이런 인식이 더욱 시급한 것 같습니다. 지역사회의 문제점을 함께 고민하고, 지역주민들과 함께 그 문제점을 풀어나가기 위해 고민하고 행동하는 모습을 교회가 보여주어야 할 것입니다.김현호 : 교회의 지역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은 것 같습니다. 해운대구에 있는 교회와 강서구에 있는 교회가 동일할 수 없듯이, 전국의 5만 3,000여개의 개교회가 각각 고유한 교회공동체로 인식해야 할 것입니다. 즉, 목사가 교회성장 이데올로기를 극복하고 지역에서 복음의 보편성을 실천하고자 노력할 때 존중받는 목회를 할 수 있을 거라 믿습니다.김수성 : 그런데 문맥을 살펴보면, 시골교회와 도시교회로 이분화하는 데 대한 반발도 내포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대형교회 목사는 성공한 사람, 시골교회 목사는 실패한 사람이라는 이야기가 바로 그런 의미이죠. 목사 청빙을 할 때 세속적인 기준에 우선하는 것에 대한 비판도 같은 맥락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김길구 : 시골교회 또는 작은 교회 목사를 무시하는 경향이 있는 우리나라 교회의 현실에 대해 일침을 놓은 것 같습니다. 복음은 가난한 사람이든 부자든 사람을 가리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시골사람에게나 도시사람에게나 복음의 중요성 또한 다르지 않습니다. 그런데 자본주의에 물든 우리 사회는 이를 구분하고, 그러한 잘못은 교회에서도 쉽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교회 지도자들부터 이러한 잘못을 고쳐나가야 할 것입니다.김현호 : 그런 의미와 더불어, 이 책을 읽으면서 문득 오늘날의 목사직은 어떠해야 할지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최근 들어 언론에 목사직에 대한 불편한 기사가 많이 나왔습니다. 사도 바울이 목사를 ‘책망 받을 것이 없는’ 사람이라고 한 기준에 빗대보면, 목사직이 올바른 자질을 갖춘 목회자로 바로설 수 있도록 교회 공동체가 다 함께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김수성 : 갈수록 세속화되어 가는 현대 사회에서 목사직의 위치가 점점 좁아지는 것은 사실입니다. 더구나 이제는 스마트폰을 통해 금방 답을 알 수 있는 시대입니다. 영성 훈련도 인터넷으로 하는 사회입니다. 여기에 더하여 소비만능사회입니다. 이런 현실에서 목사가 진리의 말씀을 선포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는 상상하기 어렵지 않습니다. 좀 더 내실을 기하기 위한 노력이 요구됩니다. 목사직은 환경에 따라 조금씩 달라야김길구 : 목사직을 수행하는 것이 점점 어려워가는 것은 사실입니다. 특히 사회는 물론 교인들이 목사를 바라보는 시선도 달라지고 있습니다. 이런 현실에서 목사직 역시 주어진 상황, 지역성이라는 환경에 따라 조금씩 달라져야 할 것입니다. 복음을 전파한다는 보편성에 더하여 지역성이 가미되어야 제자리를 잡을 수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김현호 : 오늘날 목사직은 선포 중심에서 말과 행동의 일치를 보여주는 수행(遂行) 중심의 목회자가 요구된다고 봅니다. 가끔 배타적 특권의식을 가진 성직자를 볼 수 있는데, 지금의 사회와 교회는 포용성과 시민 상식을 발휘하는 공공성의 목사직을 바라고 있습니다. 각 교단에서도 이에 유념하여 기독교의 질을 한 단계 높여갈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김길구 : 이 책은 열 번째로 제시한 ‘경로당에서 고스톱 칠 때 짝 안 맞으면 전화합니다’라는 항목이 언론의 관심을 끌었습니다. 그래서 책 제목도 ‘목사 사용설명서’로 붙였습니다만, 내용의 상당 부분은 저자가 생각하는 교회와 신앙, 그리고 사회에 관한 에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독자 스스로 판단하시리라 생각합니다.다음에는 최정의팔, 학국염 목사가 함께 쓴 《다르게, 평등하게》(동연, 2016)를 읽고, 다문화가족과 함께 살아가는 이야기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정리: 김수성] ◇ 같이 읽으면 좋은 책 《목사의 길》 / 윌리엄 스틸 / 복있는사람 《목사란 무엇인가》 / 조석민 외 / 대장간 《목회 영성의 흐름, 주일과 주일 사이》 / 유진 피터슨 / 좋은씨앗
    • 문화
    • 기독교 교양 읽기
    2017-03-03
비밀번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