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0-11-2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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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화펼치기] ‘1984’에서 ‘멋진 신세계’로?
    1. 인터레그넘 시대의 불안 21세기 현재 세계화 시대를 가리켜 영국의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은 인터레그넘(interregnum, 최고지도자 부재기간)의 시대라고 말한다. 성서의 역사 가운데는 출애굽(과 사사시대까지) 시대로 볼 수 있다. 로마법에서 사용된 일종의 권력 이양기를 뜻하는 용어로 ‘지금까지 통치하던 왕이 사망했는데 아직 새로운 왕이 즉위하기 이전의 기간’을 의미한다. 애굽왕의 통치를 벗어나 새로운 왕(사사, 혹은 사울과 다윗 왕 등)이 나타나기 전까지 일종의 체제 변화기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체제변화, 혹은 권력 이양기가 현재 세계화 시대에는 계속 진행된다는 것이다. 사실 세계화는 영토, 국민, 주권에 기반을 둔 국민국가 중심의 질서를 해체했다. 세계시장과 자본권력이 개인의 삶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지만 국민국가의 정치적 제도와 국민의 주권적 힘은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인터레그넘 시대가 계속되고 있다는 것이다. 재벌. 혹은 프랜차이즈 본사의 갑질은 묻지 않고 최저임금 인상으로 경제가 죽어가는 것처럼 조장하는 현상, 부동산 과열문제, 교육 현장 붕괴 및 학벌 사회의 문제 등에 관해 자본 권력과 결탁한 언론 권력이 우리 사회 구성원들에게 불합리한 영향을 미치고 있지만, 국가의 제도는 물론, 국민의 주권적 힘은 이를 마냥 쳐다만 보는 기이한 현상에 놓여있다. 인터레그넘 시대에 사람들은 저 창밖으로 스물스물 기어들어오는 불안을 맛보고 있는 것이다. 마르크스주의와 라캉의 지적 유산을 계승한 슬로베니아 출신의 철학자 레나타 살레츨은 『불안들』 (후마니타스, 2015)에서 세계화 시대, 혹은 후기 자본주의를 살고 있는 탈근대적 주체들의 불안을 분석하며 프로이트와 라캉의 이론을 빌어 이렇게 말한다. “불안이란 주체가 사회적 기대와 관련해 겪는 내면의 동요이다.” 명확한 현실은 아니지만, 사회 전체가 광기에 빠져 (가짜 뉴스는 이 광기의 시작이다) 이상한 비상식을 권유할 때 주체는 탈근대(획일성이 사라진 사회)를 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면의 동요를 겪는다는 것이다. 사실 미디어는 끊임없이 위험들을 경고하고, 언론은 불안을 고조시켜 정치적으로 이용한다. 제약회사들은 온갖 항우울제를 팔아 번창하고, 기업들은 쇼핑으로 불안을 가라앉히라고 유혹한다. 이것은 일찍이 발터 벤야민이 자본주의적 모더니티의 절정인 19세기의 파리를 “판타스마고리아의 수도”라고 불렀던 것의 귀환이다. 판타스마고리아(phantasmagoria, 환영 또는 환상)는 카메라가 발견되기 전, 다양한 환영들을 볼 수 있는 기계인데, 벤야민은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이런 기계장치에서 현실의 사회적 과정을 분석하며 당대의 현실을 비판한다. 가령, 누가 어떤 목적을 가지고 환영 이미지를 만들어 내는가에 주목하고, 환영 이미지를 생산하는지를 찾아내는 것이다. 그것은 곧 자본 권력(과 결탁한 언론 권력)이 평범한 일상과 상식적 인간에게 판타스마고리아를 주입하여 구별짓는, 구별짓기의 발생사를 파헤치는 일이다. ▲ 1984의 빅브라더 2. 자본(언론) 권력의 구별짓기 네가지 프랑스의 사회학자인 부르디외는『구별짓기: 문화와 취향의 사회학』(새물결, 2005)에서 4가지 자본을 소개한다. 곧, 경제자본, 문화자본, 사회자본, 상징자본으로 나눈다. 사실 부르디외는 발터 벤야민과 유사하게 사회적 관계를 단순히 경제적 자본논리(경제자본)로 설명하지는 않는다. 물론 경제자본이 매우 중요하고 결정적인 힘이 있긴 하지만, 경제적 자본 이외에 최소한 세 종류의 자본을 더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첫째, 문화자본은 가정환경이나 가정교육을 통해 개인에게 내면화된 고급스런 취향 및 언어능력, 인지능력이라고 할 수 있다. 학위나 학벌이 여기에 해당 된다. 곧 문화와 예술을 향유할 수 있는 미적 감각 그리고 사람들이 소장한 작품들을 의미한다. 둘째, 사회자본은 명문 대학에 들어가서 졸업장을 따거나 국가고시와 같은 시험제도를 통과해 얻는 자격 혹은 지위를 의미한다. 마지막으로 상징자본, 곧 사회관계자본은 문화자본과 사회자본을 얻는 과정에서 부수적으로 발생하는 ‘인맥’이다. 곧, 서울대 출신이나 판사, 검사, 의사처럼 실제 가치보다 높이 평가되고 과도하게 명예, 위신을 누리게 해 주는 상징적인 힘(정당화 메커니즘)을 뜻한다. 물론 부르디외가 주목하는 이 세 가지 자본들은 모두 경제자본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그러나 복권에 당첨된 벼락부자가 경제자본인 돈만으로 위 세 가지 자본을 저절로 확보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이것들은 지속적인 시간과 여유가 있어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위 세 가지 자본들은 하류계층에서 상류계층으로 직접 진입하려는 벼락부자들을 막는 방어막이 되며 상류계층이 하류계층과 자신을 구별하는 구별짓기의 방편이 되는 것이다. 비록 경제적 자본은 상류사회와 비교해볼 때 결코 뒤지지 않지만, 신흥부자들은 상류사회가 가지는 아비투스(Habitus, 부르디외의 개념으로 인간 행위를 상징하는 무의식적 성향을 뜻한다. 이러한 아비투스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교육이다. 즉, 아비투스는 복잡한 교육체계를 통해 이루어지는 무의식적 사회화의 산물이라고 볼 수 있으며, 교육을 통해 상속된다), 특히 미적 취향을 공유할 수 없다. 부르디외는 이렇게 말한다. “미적 취향이 상류사회에 걸맞은 실천이나 상품으로 인도한다.” 곧, 상류계급이 선호하는 운동이나 행동 그리고 상품이 따로 있다는 말이다. 따라서 신흥부자들은 겉으로는 상류계급의 미적취향을 끊임없이 흉내 내려고 노력한다. 상류계급의 사람들은 하류계급 사람들이 쉽게 접근할 수 없다는 특성 때문에 (지금은 아니지만)골프나 고가의 외제 승용차, 핸드백을 구매하는 것이다. 이처럼 비싼 명품을 구입할 때, 상류계급 사람들이 의도하는 것은 자신들이 하류계급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스스로에게 그리고 타인에게 분명히 입증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립보서 2:5~8) 따라서 명품 차와 가방이 아니라, 종의 형체를 지니고 죽기까지 복종하심이 참된 그리스도인의 구별짓기라는 것을! 그러나 오늘날 미디어는 그리스도의 마음이 아니라, 미디어의 판타스마고리아를 따르라 한다. 상류층을 모방하도록 조장하며 그렇지 못한 이들에게 열등감을 심어준다. 조지 오웰의 『1984』가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의 옷을 입은 것이다. ▲ 멋진 신세계 책 3. 『1984』와 『멋진 신세계』 미디어 이론의 대표적인 학자로 마샬 맥루한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닐 포스트먼은『죽도록 즐기기』(굿인포메이션, 2009)에서 “디스토피아를 다룬 소설 조지 오웰의 『1984』와 올더스 헉슬리의『멋진 신세계』에서 오웰은 우리가 증오하는 것들이 우리를 몰락시킬 것을 두려워했고, 헉슬리는 우리가 좋아하는 것들이 우리를 몰락시킬 것을 두려워했다.”라고 말한다. 텔레비전 주도의 ‘쇼비즈니스 시대’는 인쇄매체 시대에 가능했던 이성적인 사회적 담론이 죽어가고 있다고 경고한 포스트먼은 “대중이 하찮은 일에 정신이 팔릴 때, 끊임없는 오락 활동을 문화적 삶으로 착각할 때, 진지한 공적 대화가 허튼소리로 전락할 때, 한마디로 국민이 관객이 되고 모든 공적 활동이 가벼운 희가극과 같이 변할 때 국가는 위기를 맞는다. 이때 문화의 사멸은 필연적이다.”라고 말한다. 결국 닐 포스트먼은 조지 오웰보다는 앨더스 헉슬리가 옳다는 입장이다. 조지 오웰은 『1984』에서 이렇게 말했다. “‘고통’(외부적 압박)을 통해 사람들을 통제한다. ‘1984’에서 우리는 외부나 압제에 지배당할 것을 두려워했다. 누군가 서적을 금지시킬까 두려워했다. 정보통제 상황을 두려워했다. 진실이 은폐될 것을 두려워했다. 통제로 인해 문화가 감옥이 될까 두려워했다.” (영화 <1987>은 이런 맥락에서 『1984』와 통한다.) 그러나 올더스 헉슬리는 『멋진 신세계』에서 이렇게 말한다. “‘즐거움’을 제공함으로써 사람들을 통제한다. 멋진 신세계에서는 차고 넘쳐 나는 정보와 지천에 깔린 오락거리로 인해 사고능력이 저하된 수동적인 존재가 될 것을 두려워했다. 우리가 좋아서 집착하는 것이 우리를 파멸시킬까봐 두려워했다. 굳이 서적을 금지할 만한 이유가 없어질까 두려워했다. 지나친 정보과잉으로 인해 우리가 수동적이고 이기적인 존재로 전락할까 봐 두려워했다. 서구 민주사회가 춤추며 꿈길 속을 헤매다 스스로 망각 속으로 빠져들어 나란히 속박 당하게 되리라 확신했다. 모순에 무감각하고 기술이 주는 재미에 중독된 대중에게 아무 것도 감출 필요가 없음을 간파했다.” 사실 디스토피아(dystopia)는 유토피아(utopia)의 반대말이다. 따라서 유토피아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이상향’이기에, 디스토피아는 ‘어두운 미래 또는 현실’이 된다. 커지는 빈부격차와 취업난, 무한경쟁을 부추기는 분위기, 해법이 보이지 않는 교육·부동산 문제 등을 배경으로 아이엠에프 경제위기 이후 우리나라의 문화 콘텐츠와 담론에서 디스토피아가 본격적으로 등장하였다. 어려웠지만 앞날에 대해선 낙관적이었던 과거 군사정권 시절(물론 고통스러웠지만)의 역동감 있는 문화 콘텐츠와 상반되는 문화적 흐름이다. 포스트먼에 의하면 디스토피아는 크게 셋으로 나눌 수 있다. ‘체제 디스토피아, 인간 디스토피아, 문명디스토피아’가 그것이다. 체제 디스토피아는 ‘개선이 거의 불가능한 억압적인 체제’와 관련된다. 국가와 거대자본은 물론이고, 실생활에서 고통을 느끼는 모든 분야가 그 대상이 된다. 인간 디스토피아는 인간 자체에 대한 불신과 환멸로 인한 디스토피아이다. 미시적이나, 사회 발전과 문명의 주체를 부정한다는 점에서 근본적인 디스토피아라고 할 수 있다. 문명 디스토피아는 현대 문명의 비관적인 전망과 연관돼 있다. 기후변화, 유전자 조작, 인공지능, 새 전염병, 외계인의 습격 등이 단골 소재가 된다. 지금 우리는 ‘체제 디스토피아’의 위기를 간신히 넘어 인간 디스토피아와 문명 디스토피아로 넘어가는 인터레그넘의 시대에 살고 있다. 1984(우리에겐 ‘1987’과 ‘촛불혁명’)을 넘어가지만 멋진 신세계가 이상하게 도래하고 있는 것이다. 이래저래 불행한 디스토피아임은 더 말할 나위 없다. 그러나 연민이 창밖으로 기어들어오는 불안의 뒤를 잇기에 아직 우리 인터레그넘 시대는 희망이 있다. 4. 연민, 구원의 세례 요한 정치 철학자인 시카고 대학 마사 누스바움 교수는 주요한 ‘인간의 기능적 능력 십계명’을 작성한 바 있다. 1. 생명(life): 정상적인 수명까지 살 수 있을 것. 2. 신체적 건강(bodily health): 좋은 건강에는 적절한 영양 공급, 적절한 주거, 건강한 재생산 기능을 포함한다. 3. 육체적 완전성(bodily integrity): 자유로운 장소 이동, 주권자로서 취급될 신체적 경계선을 지킬 것, 즉 성적 학대, 아동에 대한 성적 학대, 가정 내 폭력, 성적 만족과 임신의 문제에서 선택권을 가지는 문제를 포함하여 폭력으로부터 보호될 수 있을 것. 4. 감각, 상상력, 사상(senses, imagination and thought): 상상하고 사유하고 추론할 수 있는 감각 기관을 이용할 수 있는 것은 ‘진정한 인간의’ 길이고, 이 길은 적절한 교육에 의해서 길러지는 것이며, 결코 문자 위주의 기본적인 수학적, 과학적 훈련에 한하는 것은 아니다. 5. 감정(emotions): 자기 자신의 외부의 사물이나 사람들에게 애정을 가질 것, 우리를 사랑하고 배려하는 사람들을 사랑할 것. 6. 실천 이성(practical reason): 선 관념을 형성하고 자신의 삶을 계획하는 데 비판적으로 성찰하고 참여할 수 있을 것(양심의 자유 포함). 7. 협력 관계(affiliation):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살고 있고 그들에 대하여 관심을 보이고 인정하며 여러 형태의 사회적 상호 작용에 참여할 것. 8. 자연적 환경(other species): 동물, 식물, 기타 자연 세계와 관련하여 관심을 가지고 살 것. 9. 놀이(play): 웃고, 놀고, 여가 활동을 즐길 수 있을 것. 10. 자신의 환경에 대한 통제: 정치적으로 자신의 삶을 지배하는 정치적 선택에 효율적으로 참여할 수 있을 것, 물적·형식적으로가 아니라 실질적 기회를 통해서 재산을 유지할 수 있을 것. 여기서 연민에 관해 중요한 인간의 기능적 능력은 4~7계명이 된다. 감각과 감정을 통하여 실천 이성으로 협력 관계를 맺는 것이 올바른 인간의 기능이자 연민의 시작이라는 것이다. 좀 더 세밀하게 누스바움은 연민이 발현되기 위한 조건 네 가지를 말한다. “첫째, 상대방의 고통이 충분히 심각한 것이어야 한다. 둘째, 그 고통이 스스로가 아닌 타인에 의해 유발된 것이어야 한다. 셋째, 그 고통이 나의 삶에서도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되어야 한다. 넷째, 그 사건이 나의 행복에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것이어야 한다.” 연민의 발현을 방해하는 세 개의 병리학적 감정에 대해서도 누스바움은 “첫째, 수치심은 자신의 잘못된 감정에 빠져 그가 자신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만든다. 둘째, 질투는 타인의 성취에 눈멀어 타인의 상실과 슬픔에 무감각하게 만든다. 셋째, 혐오감은 우리와 그들을 임의적으로 갈라 그들을 증오하도록 만든다.”라고 말한다. ‘나의 삶과 행복에 영향을 미치는 타인이 다른 타인에게 끼치는 충분히 심각한 고통’(가령, 이웃집에 강도가 들어 우리 집도 안전하지 못할 때)에 대해서 우리는 연민을 느끼지만, ‘수치심과 질투, 그리고 혐오감’(가령, 이웃집 사람에 대한 관계)은 우리로 하여금 연민을 느끼지 못하게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연민만 있고 공정하지 못하다면, 자신의 손해를 감수하며 남을 돕지 않을 것이요, 공정하나 연민이 없으면 타인을 위할 아무런 일을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공정과 연민은 양립하는 것이다. 사실 우리가 누군가를 돕기 위해서는 공정함과 연민을 동시에 필요로 한다. 즉 이성과 공감이 함께 작용할 때 우리는 타인을 이해하고 행동하는 도덕적 인간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오늘 많은 이들이 연민을 상실하고, 판타스마고리아에 빠져 살고 있다. 연민의 구원 열차가 지금 ‘1984’를 넘어 판타스마고리아의 ‘멋진 신세계’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향하여 기적 소리를 내며 달려오고 있다. 출애굽의 목적이 가나안이었다면, 가나안에서의 삶의 목적은 연민과 공정의 평등 공동체였다. 이것을 상실한 이스라엘은 다시 바벨론의 포로로 고통을 받았다. 올바른 목적이 없을 때 그 고통은 이토록 심각하건만, 우리는 이 과도기 시대에, 인간과 문명 디스토피아 시대에 목적 없이 사는 것이 아니라, 타자에 대한 연민과 공정으로 살아야 할 것이다. 어린왕자도 이렇게 충고했다. “사람들은 모두들 똑같이 급행열차를 타고 어디론가 가지만 무얼 찾아가는지는 몰라. 그러니까 어디를 가야 할지 몰라서 갈팡질팡하고 제자리만 빙빙 돌고 하는 거야.” ▲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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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9-10
  • [영화] 아파트와 살인 목격자의 침묵을 통한 한국사회 비판
    범죄스릴러물의 역동적 구조 일상생활에 대한 예리한 시각을 가진 조규장 감독이 <그날의 분위기>(2015)와 같은 로맨스장르에서 이번에는 사회비판적인 영화를 만들었다. 그의 첫 장편영화인 <낙타는 말했다>(2008)를 통해 사회적 성공과는 거리 먼 비루한 인간의 모습을 세밀하게 담았다면 이번에는 한국사회의 집단 이기주의와 보신주의(保身主義)에 대한 면밀한 관찰을 통해 각성을 촉구하고 나섰다. 아내와 어린 딸을 둔 평범한 직장인 상훈(이성민)은 새벽에 살려달라는 비명소리를 듣고 다가간 아파트 창문 너머로 살인현장을 목격하게 된다. 범죄현장의 목격자로서 경찰에 신고하면 될 것 같은 단순한 일은 그만 살인자와 눈이 마주치게 되면서 어렵게 꼬이기 시작한다. 살인자와 목격자가 서로 자신의 존재를 노출하게 된 상황이 벌어지고 만 것이다. 영화는 이때 살인자 보다는 목격자의 위치에서 심리를 전개시킨다. 정의로운 시민의 한사람으로서 경찰에 신고할 것인가, 아니면 혹시라도 있을지 모를 살인자의 표적이 되어 자신과 가족을 위험에 빠뜨릴 것인가. 상훈은 마음이 복잡해지기 시작한다. 단순 범죄물이 범죄 심리극으로서 발전하는 과정에 중요한 것은 사건을 바라보는 주체가 겪는 갈등의 성격에 달려있다. 일반적으로 범죄물은 범인과 수사관 그리고 피해자 혹은 피해관계자라는 삼각구도 속에서 진행된다. 수사를 담당하는 형사의 입장이라면 수사관으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기 어려운 상황을 전개시켜서 심리적 갈등을 조장하게 된다. 승진에 목을 걸고 있거나 집안의 어려움이 있는 수사관이 범죄자 혹은 범죄자와 연관된 사람들과 모종의 거래 과정에서 겪게 되는 심리적 갈등이 전개되는 경우가 많다. 범죄자의 입장이라면 자신이 범죄를 저지를 수밖에 없는 상황이 밑바탕에 깔려있다. 불우한 어린 시절 겪었던 개인적 고통이나 인격모독을 당한 일, 혹은 사랑하는 가족의 희생 등의 과거사를 전개시키면서 범죄자의 심리적 갈등을 표출시킨다. 범죄 피해자를 사건의 주체로 등장시키는 경우는 가해자의 밀도 있는 관계를 조명시키면서 피해자가 되기까지의 과거사가 전개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때 피해자는 죽음을 통해 가해자와의 갈등을 해소시키면서 문제를 마무리 하곤 한다. 그런데 목격자가 사건의 주체로 등장하게 될 경우 영화는 철저히 다층적인 심리극으로 갈 수 밖에 없다. 자신과 가족이 피해를 보지 않기 위해서 범죄자나 수사관과의 관계를 저울질 하게 되는 상황이 벌어진다. 이 때 범죄 목격자가 흔히 겪는 심리적 갈등은 거래관계 대상자와의 불신으로부터 비롯된다. 경찰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지 못하는 이유는 경찰이 자신과 가족을 지켜준다는 확신을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영화 <목격자>에서도 오직 한사람의 수사관(김상호)을 제외한 다른 경찰들은 엉뚱한 수사를 하고 있거나 심지어 범죄자의 공격을 받기도 한다. 범죄자의 암묵적인 거래 역시 불안하지 않을 수 없다. 과연 범죄자가 자신의 신분을 명확히 파악하고 있는지 알아야 하며, 범죄자에 대해서 침묵을 지키는 일이 자신과 가족의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는 길인지 확신할 수 없는 것이다. <목격자>의 주인공 상훈이 택한 것은 경찰이라는 공권력이나 범죄자 모두를 불신한 상태에서 스스로 가족을 지키는 쪽이었다. 가장의 책임을 다하겠다는 개인의 신념은 사회에 대한 불신이 클수록 더욱 강해지는 법이다. 아파트는 어쩌다 이기적인 공간이 되었을까? 범죄현장 목격자의 심리를 다룬 <목격자>가 관객의 마음에 깊이 새겨질 수 있는 이유는 범죄현장이 한국인의 생활공간인 아파트 단지 한복판이기 때문이다. 한밤중에 벌어진 일이라고는 하지만 늘 사람이 다니는 아파트 단지 안에서 살인마가 잔인하게 사람을 칼로 찔러 죽였음에도 불구하고 목격자가 나타나지 않는 영화 속 설정은 어쩌면 사실일 지도 모른다는 공감대가 관객들 사이에서는 형성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현대 한국사회에서 아파트는 흔히 단절된 공간의 상징으로 묘사되고 있음을 누구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앞집에 누가 사는지도 모르며 관심도 없다. 이사 온 날 떡을 돌리는 풍속이 사라진지 오래고 앞집의 사정이란 다만 내부 인테리어 공사를 할 때 엘리베이터나 복도 게시판에 공사한다는 사실을 알리는 쪽지 정도로만 알 수 있을 뿐이다. 그것도 이웃이 직접 작성하기 보다는 인테리어 업체에서 붙이는 경우가 이제는 태반이지만 말이다. 문제는 소통이 결여되고 이웃공동체로서의 의식이 결여된 생활공간인 아파트가 한국인의 가장 일반화된 생활공간이란 사실이다. 2017년 11월 기준으로 대한민국의 아파트는 전체 주택의 60.6%인 1038만호에 이른다. 가히 아파트는 한국의 대표하는 주거공간인 셈이다. 일상적인 삶의 중심이자 가족의 거처 공간인 아파트는 성냥갑 혹은 닭장으로 비유되는 독특한 건축구조와 특유의 폐쇄성 때문에 공포영화의 단골 소재로 등장하기도 한다. 즉 산장이나 바다 한가운데 있는 보트에서 살인사건을 다룰 경우 일상의 공간과는 유리되어 있는 까닭에 호기심을 불러일으킬 수는 있어도 현실감은 떨어지게 마련이다. 그러나 아파트에서 일어난 범죄일 경우 현실감은 살아날 수 있다. 그 이유는 아파트가 범죄를 일으키는 환경에 적합한 구조를 갖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이웃의 일에는 무관심하고 도무지 자기 외에는 생각하지 않는 지독한 개인주의가 팽배해있고, 조금이라도 손해 보지 않으려는 이기적인 생각을 불러일으키는 공간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영화 <목격자>는 살인범을 목격했음에도 불구하고 함구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비춰준다. 관객을 더욱 흥분시키는 이유는 영화 속 주인공처럼 가족의 안전을 걱정하기 보다는 아파트값이 떨어질 것을 염려한 부녀회장의 행동 때문이었다. 아파트에서 일어난 살인사건이 TV뉴스를 통해 보도되는 것이 걱정스럽고 경찰의 탐문수사에 협조를 거부하는 주민들의 행동 속에는 자본주의 사회의 지독한 이기주의가 도사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아파트 값을 올려 받기 위해서 부동산중개소와 주민들이 담합을 하는 현실에서 사람의 목숨 보다 중요한 것이 아파트 집값인 것이다. 침묵과 응징 범죄에 침묵했을 때 오히려 범죄자에 쫒기는 신세가 되어버린다는 영화 <목격자>의 이야기는 이미 사회심리학에서 연구한 내용을 답습하고 있다. 흔히 ‘방관자 효과(Bystander Effect)’라 불리는 제노비스 신드롬(Genovese Syndrome)은 집단이 속해 있는 사회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서는 책임감이 분산되는 바람에 일에 개입하기 보다는 상관하지 않고 옆에서 지켜보기만 하는 현상을 해설해주고 있다. 즉 내가 아니더라도 다른 사람들이 알아서 할 거란 생각으로 방관상태에 머무르고 만다는 얘기다. 영화는 아파트에 거주하는 방관자들을 응징하는 결말을 보여준다. 폭우가 쏟아지며 아파트 인근에 있는 산이 무너지는 바람에 토사가 아파트 앞으로 밀려오는 장면은 감독이 이웃의 고통에 대해 방관자로 사는 현대인들을 향해 내던지는 일종의 경고장 같은 것이다. 이미 영화 전반부에 주인공을 통해 아파트 축대가 산사태로 무너질 것이 언급되었지만 부녀회장은 집값 외에는 관심이 없다. 더욱 놀라운 것은 주인공과 범인과의 격투가 벌어진 아파트 뒷산이 연쇄살인범이 사체를 묻어 놓은 장소임이 드러나는 일이다. 아파트로 밀려오는 흙더미 속에 유골들이 드러나는 일은 마치 방관자들을 향해 침묵의 결과가 죽음으로 이어질 수 있음을 보여준다. 누가복음 10장에는 ‘선한 사마리아인’에 대한 비유가 등장한다. 이 비유는 ‘내 이웃이 누군인가’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으로 이루어진다. 강도를 만나 옷이 벗겨지고 맞아서 거의 죽은 상태로 버려진 피해자를 목격한 사람들의 이야기인 것이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방관자로서의 모습을 보여주고 사마리아인은 참된 이웃이 누구인지를 나타낸다. 나는 과연 누군가의 이웃이 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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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9-10
  • 가을에 나의 서가를 풍성하게 해줄 좋은 책들
    만남-한길 가는 교육운동가 송인수의 예수를 만난 사람들 송인수 지음/303쪽/IVP ‘사교육걱정없는세상’공동대표인 교육운동가 송인수 선생이 낸 설교집. 공립학교 교사로 13년간 아이들을 가르치다가 퇴직하고 좋은교사운동 대표를 지내다 지금은 ‘사교육걱정없는세상’을 창립하여 대한민국의 교육개혁을 일궈가는 저자는 세상의 고통에 응답하는 평신도 중심의 아주 작은 교회 ‘산아래교회’를 섬기고 있다. 복음서를 통해 예수를 만난사람들 아홉 사람의 이야기와 진정한 신앙이란 무엇인지를 질문하는 여섯 개의 주제를 담고 있는 이 책은 예수를 인격적으로 만난 사람들이 어떤 결단을 통해 반응했는지를 감명 깊게 소개한다. 사춘기를 지나던 큰 아들과 성경 공부를 시작하면서 성경에 새롭게 눈떴고, 두 아들을 키우며 ‘육체적’ 부모에서 ‘정신적’ 부모로 거듭났다고 말하는 그는 “신자는 사람에게 의존하지 않고 오직 주 예수께만 의존하는 독립적 존재”임을 강조하고 교회의 본질은 목회자나 예배당이 아닌 ‘타자지향성’에 있다고 믿는다. 성경을 읽다가 누구나 한번쯤 의문했을 법한 본문을 끈질기게 묻고 상상력을 발휘하여 오늘 이 시대 고민을 정면 돌파한다. 저자는 예수님을 찾아왔던 부자청년의 설교에서 자신의 부르심에 대한 응답을 이렇게 소개한다. ‘그때 제가 버려야 할 모든 것은 안정된 직업이었습니다. 부르심이 분명했기에 안정된 직업을 버리고 그분을 따라나섰습니다. 불안한 미래에 대해 아내에게 마음을 털어놓았을 때 아내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보, 산 한 모퉁이를 돌아야 그 다음이 보이는 것 아닌가요? 퇴직 후에 주어지는 보장된 삶을 생각하지 말고 일단 나서 보지요.’ 저자의 신실한 신앙의 고백과 체험이 말씀을 따라 나선 이들에게 용기를 준다. 성경이 신학 이론의 원전이 아니라 생동하는 내러티브임을 실감하게 해 주는 아주 특별한 책이다. 꼼짝할 수 없는 내게 오셔서 윤석언,박수민 지음/224쪽/포이에마 고난을 용광로로 녹여 낸 용광로와 같은 이야기, 특수 스티커를 붙인 안경을 쓰고서 모니터를 응시하며 눈으로 자음과 모음을 하나하나 입력해 기록한 윤석언씨의 병상일기이다. 스물셋의 나이에 당한 교통사고로 27년째 목 아래가 마비된 전신장애인이 되어 요양원에서 지내고 있지만 하루의 호흡조차 보장할 수 없는 육신으로 매 순간을 주님과 동행하고, 쉬 잠들지 못하는 불면의 시간조차 다른 이들을 위해 기도하는 한 그리스도인의 소망과, 일상의 작디작은 일들 속에서 경험한 하늘의 은총, 친구와 나눈 우정의 기록을 담았다. 몸이 회복되어 자리에서 일어나기를 바랐으나,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육신의 고통으로 ‘나를 그만 하나님 품으로 데려 가달라’고 호소하지만 그 기도조차 이루어지지 않던 날들 속에 기적처럼 찾아온 하나님의 사랑, 그를 품어 주는 우정을 만나며 새로운 소명에 눈떴다. 그는 온라인으로 목회학 석사과정을 공부하며 선교사가 되는 꿈을 꾸고 있다. 문서선교의 꿈이다. 이 책은 그 꿈의 첫 결실이다. 윤석언의 친구 박수민은 한 선교단체의 자비량 사역자이다. 막 결혼해 가정을 꾸린 1998년, 평신도 선교사로 헌신하여 폴란드로 건너갔고, 그곳에서 세 아이를 낳아 키웠다. 주중에는 한국 무역회사에서 직장생활을 하고 주말에는 자비량 선교사로 현지 젊은이들과 예배하고 있다. 미국 월드미션대학에서 목회학 석사과정 중에 만난 윤석언 형제를 알게 되어 그와 이메일로 교제하며 서로를 격려해왔고, 2년 동안 2천회가 넘는 그 우정 어린 동행의 기록이 이 책의 2부에 실려 있다. 결국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이들의 우정이 한 인생에게 생의 희망을 부풀게 하고 역경을 이기게 한다. 1세기 교회 이야기 로버트 뱅크스 지음/75쪽/IVP 초대교회로 돌아가자고 한다. 그럼 우리가 지향점으로 삼는 초대교회는 어떤 모습일까? 신약성서의 사도행전이나 서신서에 나타난 대로 교회가 세워진다면 오늘날의 교회와는 매우 다른 모습이 될 것이다. 이 책에는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이끄는 가정교회의 모습이 그려지고 있다. 성경도 교회당도 없던 때, 목사도 없고 예배 형태도 갖추지 못했던 1세기 교회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울 수 있는가? 이 책은 단순한 초대교회 및 가정교회 안내서가 아니다. 교회의 본질이 역동적으로 드러난 살아 있는 교회의 모습을 통해 교회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 주는 책이다. 한자리에서 한 시간이면 읽을 작은 책속에 교회가 담아야 할 매우 다양한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 준다. 종과 주인, 여자와 남자, 가난한 자와 부자, 아이와 어른과 노인, 가족과 독신, 해방과 자유, 세상과 교회, 직업 소명과 신분, 성만찬과 세례, 논쟁과 조정, 상황과 말씀, 식사와 성찬, 일상과 초월, 공간과 시간, 의외성과 규칙성, 참여와 권위, 본질과 형식, 치료와 치유,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덩치만 크지 단조롭기 그지없는 오늘날의 어떤 대형 교회보다도 소수로 이루어진 이 작은 공동체에서 우리가 오랫동안 잃어버린 교회의 본질과 다양하고 풍성한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우리는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교회를 믿는다. 교회는 나가거나 안 나가는 곳이 아니라 매 순간 갱신하며 새롭게 태어나는 생명체다. 푸블리우스와 함께 2천 년 전 로마에서 모였던 원초적 교회의 방문자가 되어 오늘의 교회를 위한 상상력과 확 신을 길어 올리기를 바란다. 그들은 휴머니스트였다- 조선의 역사가 된 이방인, 시민사회를 열다 하희정 지음/319쪽/15000원/꽃자리 1세기 초대교회 성도들을 일컬어 세상은 ‘그 길을 걷는 사람들’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다. 복음서에 보면 길 위에서 제자들이 스승이신 예수님께 이렇게 묻는다. “쿠오바디스” 어디로 가십니까 라는 뜻이다. 2018년 한국에서 세상이 길 잃은 교회를 향해 묻고 있습니다. “지금 당신들은 어디로 가는가?” 우리나라가 아직 조선이란 이름으로 존재했을 때 외국의 여인들은 이 조선을 위험한 나라로 여겨 발도 디디지 않았을 때 기꺼이 조선으로 걸어와서 일생을 불살랐던 여인들이 있었다. 또한 세계열강들의 이해 관계 속에 크게 흔들리던 조선을 찾아와 조선왕조를 마감하고 근대 시민사회로 진입할 수 있도록 학교를 세우고 개인의 인격적 존엄을 일깨워주며 무지와 전염병과 고단한 삶속으로 들어가 함께해준 소중한 선교사들이 있었다. 저자는 이 책에서는 12인의 선교사를 소개하며 특히 여선교사들도 동일한 볼름으로 소개하고 있다. 특히 그동안 내한 선교사에 대한 연구와 저술이 많았으나, 대부분 ‘선교’라는 특정 주제 속에서 그들의 복음전파와 의료 및 교육 활동을 다루었지만 이 책에서는 이들의 내면 깊은 곳에 꿈틀거리고 있는 인류 보편의 휴머니즘의 관점에서 이들의 삶을 그려내고 있음이 특징이라 하겠다. 이들 선교사들이 기독교적 휴머니즘에 녹아 있었기에 이방인의 경계를 넘어서서 ‘조선의 역사’로 수용될 수 있었다는 것을 배울 수 있다. 기독교는 타종교로부터 무엇을 배울 수 있는가? 제럴드 맥더모트 지음/311쪽/IVP 한국은 세계에서도 종교간 분쟁이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 몇 안 되는 다종교 사회이다. 근대 개화기에 기독교가 한국사회에 전파될 때 당시의 주류종교인 불교와 유교가 그 품을 열어줌으로서 큰 저항 없이 우리사회와 접목될 수 있었고 이로 인해 비교적 타종교와 더불어 영역을 지켜주고 양해해줌으로서 평화를 지켜온 셈이다. 하지만 근래 사회 전반이나 개인의 삶에서 크고 작은 종교적 갈등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이 되고 있다. 만약 사회적 상황이 변한다면 언제라도 그 갈등이 폭력화될 여지가 있다. 이 책이 우리사회에 종교들 간의 파괴적 적대감을 줄이고 서로를 존중해 줄 수 있는 교양을 제공해 준다. 저자는 기독교 신앙이 타종교로부터 배울 수 있다고 말한다. 저자는 “최종구원의 여부”가 아니라 “계시의 속성”이라는 맥락에서 그리스도인이 다른 종교들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지 조언을 제시하고 있다. 자신의 신앙에 충실하면서도 다른 신앙의 소유자들을 포용하려 하는 이중의 과제를 균형 잡힌 시각에서 풀어가는 것, 친구나 가족 중에는 다른 종교와 신앙을 가진 분들이 많은 우리 사회 속에서 내 신앙이 소중한 만큼 다른 이들의 신앙도 소중하다고 느끼지만,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해야 할지 마땅한 지침이 없어 고민하던 열린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책은 좋은 지침서가 될 수 있다. 순간을 소유하라-흔들리지 않고 사는 법 칼 렌츠 지음/295쪽/움직이는서재 이 책의 저자는 뉴욕 힐송교회를 이끌고 있는 칼렌츠 목사이다. 1978년생 미국 버지니아 태생인 칼렌츠는 헤어스타일 옷차림부터 남다르다. 신실한 기독교가정에서 자랐지만 청소년기에 농구에 올인하면서 하나님과 멀어졌던 그가 노스캘로라이나 주립대학에서 인생의 항로를 재점검하고 하나님께 헌신했다. 청소년기까지 농구 선수가 꿈이었던 칼 렌츠 목사는 스키니 진이나 찢어진 청바지를 즐겨 입으며 일반의 고정관념을 깨고 젊은이들과 공감하며 그들을 예배 앞으로 이끌어 들인다. 한국교회에도 젊은 세대들과 소통하기 위해 노력하는 목회자들이 있지만 젊은 세대와의 공감능력 저하는 지금 한국교회의 과제가 되고 있다. 뉴욕도 다르지 않지만 칼렌츠 목사는 욕망에 이끌려 이리저리 흔들리며 살기 쉬운 젊은이들을 잡아 주는 설교 메시지를 함께 전달하는 방식으로, 젊은이들에게 ‘교회는 재미없고 따분한 곳이 아니라, 내 삶을 긍정적으로 변화시키고, 잠들어 있던 나의 영성을 깨워 나의 하나님을 만날 수 있게 하는 곳’이라는 인식을 심어주는 데 성공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 책은 평소 뉴욕의 20~30대 젊은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칼 렌츠 목사 설교에서 가장 핵심적인 메시지인 ‘순간을 소유하라OWN THE MOMENT’에 관한 내용을 에세이식으로 풀어낸 것이다. 기독교적인 용어를 거의 사용하지 않으며, 목사가 할 수 있는 뻔한 이야기로 흘러가지 않고 호소력 있는 시나리오 방식으로 메시지를 전달한다는 특징이 차별성이라 하겠다. “노잼!”이라며 교회로 올 생각조차 하지 않는 젊은 세대들에게 “예배가 이렇게 즐거운 일이네!”라고 탄성을 지르도록 해야 된다면 이 책이 자극제가 될 것 같다. 세계관적 설교-창조, 일상, 공공의 복음을 회복하라 전성민 지음/371쪽/한국성서유니온 밴쿠버기독교세계관대학원 학장이며 세계관과 구약학 교수로 재직 중인 저자는 그리스도인이 성경을 읽는다는 것을 이렇게 정의한다.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것은 나의 세계관과 성경 저자가 제시하는 세계관을 충돌시키고, 그것이 나의 세계관을 변화시키도록 나를 내어 놓는 것이다.” 성실한 성경읽기는 읽는 독자의 세계관을 변화시키도록 요구하며 이 성경을 설교하는 설교자들은 세계관을 변화시키는 설교(세계관적 설교)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 그리고 그 관심은 설교를 전하는 이나 듣는 이가 얼마나 세계관적인가?”하는 질문 앞에 직면한다. 세계관적 설교는 무엇일까? 그것은 먼저 성경 본문이 어떤 세계관을 전제로 기록되었으며 독자들이 어떤 세계관을 가지도록 도전하는가에 관심을 둔 설교다. 따라서 청중의 세계관 변화(마음과 몸의 참된 돌이킴)를 목적으로 한다. 또한 세계관과 관련된 주제를 다루는 설교이기도 하다. 이 책은 그러한 관심과 필요에 의해 쓰였다. 세계관적 설교의 세 가지 특징은 예를 들어 창세기 설교본문일 때,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일차적으로 주어졌던 창세기 말씀이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 강력한 도전을 줄 수 있는 것은 창세기 1장에 담긴 서술된 세계관과 규범적 세계관을 구별했기 때문이다. 이 둘을 구별하지 못할 때, 하나님이 온 우주를 창조하셨다는 장엄한 선언을 달이 광명체라고 우기는 난센스로 격하시키고 만다. 여기서 서술적 세계관을 걸러내는 것은 역사적 배경 탐구의 한 측면이며, 본문의 역사적 배경을 살피는 해석은 모든 설교의 기초가 되어야 한다. 또한 창조를 간과하고 일상성과 공공성을 잃어버려 이원론적이고 사사로워진 기독교는 성경의 기독교가 아니다. 그렇기에 모든 설교는 바른 창조 이해를 통해 복음의 일상성과 공공성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라고 정리한다. 바로 설교자가 자신이 생각하는 단편이 아니라 세상을 바라보는 틀 전체의 변화를 바라는 것이야말로 모든 설교의 목표가 되어야 하는 것이며, 모든 설교는 넓은 의미에서 세계관적 설교여야 한다는 것. 이 책에는 1부-창조의 복음, 2부-일상의 복음, 3부-공공의 복음으로 총 23편의 설교학 강의가 실려있다.
    • 문화
    • 도서
    2018-08-28
  • [문화] 당신들의? 우리들의! 대한민국
    1. 모기들이 반대한다고 에프킬라 안칩니까? 2018년 7월 23일 노회찬 정의당 의원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노의원에 관해 도올 김용옥 선생은 이렇게 말했다. “저는 원래 노회찬이라고 그럴 때 그게 노나라 노(魯) 자예요. 그 노나라가 공자 나라라고요. 그래서 노회찬을 항상 보면 공자같이 생겼다. 사람이 너그럽고 좀 품위가 있게 넓게 생겼잖아요. 참 공자 같은 사람이다. 이런 생각을 내가 항상 했고. 회(會) 자라는 게 항상 사람을 모은다 그런 의미겠거든요. 이문회우(以文會友)라든가 그런 우리 동양의 고전에도 그런 말들이 많지만. 사람을 주변으로 잘 모으고 그리고 그들을 아주 설득시키는 데 귀재고.” 노나라의 공자와 같이, 진보 정당의 원내 정당 진입을 위해 힘써 왔고, 그럼으로 약자들의 목소리가 법을 통해 제대로 대변되기를 힘썼던, 그렇게 사람들을 모았던 사람이라는 뜻이다. 기독교에도 상당한 식견이 있는 도올 선생은 또 이렇게도 말한다. “그런데 이 사람의 특징이 말이죠. 우리 시대의 예수라고 생각했어요. 마가복음에 보면 예수라는 사람은 입 뻥긋 하면 다 비유였다 그러거든. 비유가 아니면 말하지 않았다. 씨 뿌리는 자의 비유라든가 겨자씨의 비유라든가 수없는 비유가 있습니다. 강도를 만난 비유라든가 이 모든 그 수많은 비유를 쓰는 데 사실 달인이었는데,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이해를 못하고 그게 무슨 하늘의 무슨 하나님의 말씀으로 아는데 예수가 그 비유의 달인이었다는 의미는 예수가 바로 ‘민중의 언어’를 쓸 줄 알았다는 거예요.” 촌철살인의 비유, 오늘날 예수가 이 땅에 오셨다면 울고 갈 비유들이 노회찬 의원의 입에서 나왔다. 가령, 문재인 정부의 공수처(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 설치를 반대하는 자유한국당에 노의원은 이렇게 이야기 했다. “정확한 얘기죠. 아니, 동네파출소가 생긴다고 하니까 그 동네 폭력배들이 싫어하는 것과 똑같은 거죠. 모기들이 반대한다고 에프킬라 안 삽니까?” 2. 모기들의 대한민국, 번아웃 당하다! 『비굴의 시대』(한겨레출판사, 2014)에서 우리 시대 가장 급진적이고 예외적인 지식인인 박노자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지금 한국사회는) 전례 없는 더러운 시대이다.” 사회적 연대 의식은 증발하고, 저마다 자신과 몇 안 되는 피붙이들의 잇속만 추구하고, 타자의 아픔에 대한 공감이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는 각자도생의 사회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다. 이제 ‘인간이 사라져가는 곳’이며, 정치적으로는 파시즘이 위세를 떨치고 있으며, 유신 때보다 더한 ‘공포를 먹고 사는 사회’라고 말한다(물론, 이것은 촛불혁명 이전의 대한민국이다. 그러나 촛불혁명 이후 얼마나 달라졌는가?). 이러한 모기들의 대한민국에서 인간들은 번아웃 당한다. 번아웃 증후군(Burnout Syndrome)은 오로지 한 가지 일에 몰두하던 사람이 신체적 혹은 정신적으로 모든 에너지가 소모돼 무기력증이나 자기혐오, 직무 거부 등에 빠지는 현상을 말한다. 쉽게 말해 완전한 소진을 의미한다. 대체로 능력을 인정받고 근면 성실한 사람일수록 일을 마다하지 않기에 번아웃에 빠질 확률이 크다. 이러한 번아웃은 개인의 문제이기 이전에 ‘문명의 질병’이다. 수익 갈증에 따른 고강도 생산체제, 늘어나는 노동시간, 갈수록 심화되는 무한 경쟁, 풀리지 않는 스트레스와 피로는 현대인을 방향 상실로 몰아가는 것이다. 따라서 번아웃은 인간과 노동이 맺고 있는 풍요로운 관계를 앗아가고, 그 자리에 의미 상실이라는 커다란 공백을 남겨 놓는다. 단순히 고된 노력에 대한 성취감만 사라져버린 것이 아니라 더 나아가 일에 대한 의미마저도 파괴하는 것이다. 사실 명예는 빼더라도 ‘권력과 황금’의 곁에 다가서기 위해, 이 과열 시스템에 동참하기 위해, 수많은 이들이 피로와 추락으로 내몰리고 있다. 왕 모기들은 번아웃으로 노동자들을 탈진시키고, 더 나아가 해고시킨다. 아직도 쌍용차 해고 노동자 100여명을 복직시키지 않는 것은 더 이상 노동자가 필요하지 않다고 선언했던 신자유주의적 기획을 거스리지 않고 싶은 기업의 논리이다. 시인 노혜경의 말처럼, “1997년 현대자동차가 시작한 구조조정이 2009년 쌍용차로 완결되었다고 만족스러워하는 ‘보이지 않는 손들’을 실망시키면 안 되기 때문”인 것이다. 따라서 우리 나라는 대통령은 몰아낼 수 있어도 노동자를 복직 시킬 수 는 없다. 인간의 노동 대신 기계와 금융이 지배하는 산업구조에서 사람이 설 자리는 애초에 없었기 때문이다. 왕 모기들에게 뜯기는 대한민국이다. 다시 도올 선생의 외침을 들어보자. “우리 사회는 기본적으로 이 노회찬의 목소리라고 하는 것은 이 문제를 해결해야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대기업들이 생각을 바꿔야 됩니다. 예수께서 천국이 가까웠으니 회개하라 했는데, 그게 원어로는 메타노이아라고 하는데, 생각을 바꾸라는 건 뉘우치라는 게 아니라, 너의 세계를 바라보는 눈을 좀 돌려라. 시각을 개조해라. 왜? 네가 개조하면 바로 천국이, 누구에게든지 천국이 온다. ‘kingdom of God is at hand’ 가까이 있다는 말이죠. 그거는 생각을 바꿔야 돼요. 그러니까 우리나라의 사회 진보를 위해서 대기업들이 생각을 바꿔야 됩니다. 그러면 최저임금 문제든 모든 걸 다 해결됩니다. 정권의 힘을 가지고 있는 자들은 절대적으로 진보, 보수를 막론하고 지금 이 대기업들의 횡포를 바로잡아야 합니다.” 그러나 모기들이 생각을 바꿀까? 회개할까? 낙타가 바늘구멍 통과하는 것이 차라리 더 쉬울 것이다. 3. 자유로운 기술과 행위, 그리고 협력 임마누엘 칸트는 『판단력 비판』에서 ‘산물의 생산을 목적으로 하는 모든 기술’에 관해 ‘봉사적 기술’과 ‘자유로운 기술’, 두 가지로 구분한다. 봉사적 기술은 ‘물질적 산물의 생산과 관계하며 욕구에 봉사하는 기술’이다. 기계론적 테두리를 벗어날 수 없으며 학습과 반복적 연마를 통해 숙련이 가능하다. 이러한 기술의 가치는 생산의 유용성의 정도에 따라 결정된다. 가령 장인적 기술, 수공업적 기술, 기계적 기술 등이 그 예라고 볼 수 있다. 반면 ‘자유로운 기술’은 ‘목적을 그 자신 속에 가지며 그리하여 그 자체로서 영원한 생명력을 가지는 기술’이다. 곧, 독자적이고 자유로운 기술을 뜻한다. 따라서 칸트는 “예술의 목적은 물질적 욕구에 대한 봉사도 아니고, 어떠한 철학적 종교적 관념에 대한 봉사도 아니다.”라고 말한다. 우리들의 대한민국은 자유로운 기술이 꽃피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거기에는 첼로를 사랑했던, 그리하여 모든 국민이 악기 하나 정도는 연주할 줄 아는 세상을 꿈꾸었던 고(故) 노회찬 의원의 미학적 정치의 멋도 깃들어 있다. 칸트는 이렇게 말했다. “미적 예술은 그 자체만으로도 합목적적인 표상 방식이며, 비록 목적은 없다 해도 사회적 전달을 위한 심의능력들의 문화를 촉진시키며, 이러한 미적 대상(표상)의 합목적성은 자의적 규칙들의 모든 구속으로부터 벗어나 있어, 마치 순수하게 자연의 산물인 듯 보여야 한다.” 예술은 자유로운 기술로서 과학적 인식의 법칙과도 무관하며 심지어 회화의 기하학적 법칙과 음악의 수학적 법칙으로부터도 해방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미적 예술은 필연적으로 천재의 예술이다. 천재는 예술작품을 통해 미를 구현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취미가 미를 판정하는 능력이라면 천재는 미를 산출하는 능력을 가진 이다. 예술작품은 ‘자유로운 기술’의 소산이기에 천재는 아무런 목적이나 의도 없이 자신이 가진 재능을 발휘한다. 봉사적 기술이 요구되고, 노동이 소외되고, 인간이 기계화되는 이때 노회찬이 그리던 우리들의 대한민국은 어디에 있을까? 구약성서의 노동 개념 두 가지인 아보다(aboda)와 멜라카(melaka)는 각각 ‘봉사’와 ‘보내심’에서 유래된 것이다. 따라서 노동은 ‘신에 대한 봉사’와 ‘신적 위임으로 보내심’이라는 뜻이 있다. 따라서 그리스적인 노동관인 ‘자연의 질서, 숙명, 고통’으로 이해하는 것과는 다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창조행위에 인간이 그의 노동으로 참여하는 동역의 의미인데, 이러한 동역이 개인의 일이 아니라 공동체에 위임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러한 맥락에서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2:20)” 하와가 창조되었다는 사실은 노동과 공동체의 관계를 잘 보여준다. 따라서 노동은 공동체 내에서 자기 동일성의 실현이 된다. 결코 타자와의 관계에서 경쟁이 아닌 것이다. 자유로운 기술에 기반한 협동과 공동 참여라는 노동, 자연에 대한 착취와 지배가 아닌 공존과 돌봄이라는 노동은 언제 가능할까? 독일의 여성 정치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인간의 조건』(한길사, 2017)에서 노동과 작업, 행위 3가지로 인간의 활동 유형을 나눈다. “‘노동(labor)’은 생존과 욕망 충족을 위해 행하는 육체의 동작이고, ‘작업(work)’은 자신의 재능을 발휘하여 일의 재미와 일정한 명예를 바라며 수행하는 제작 활동이며, ‘행위(action)’는 개인의 욕망과 필요를 넘어 공동체 속에서 어떤 대의를 위해 하는 행동이다.” 예를 들면, 직장에 다니는 목적이 단지 봉급을 받기 위해서라면 그것은 노동일뿐이며, 그 일에서 보람과 재미를 느낀다면 작업이 된다. 그리고 출퇴근 시간에 짬을 내어 봉사활동을 하거나 자신이 중요하다고 여기는 문제를 놓고 시위에 참여한다면 그것은 행위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땅은 ‘노동’조차 어려운 나라가 되었다. 우리들의 대한민국은 노동이 행위로 바뀌기 까지 험난한 세월을 보내야만 하는 걸까? 『협력하는 종: 경쟁하는 인간에서 협력하는 인간이 되기까지』(한국경제신문사, 2016)에서 새뮤얼 보울스&허버트 긴티스는 이렇게 말한다. “협력에 관한 가장 간단하면서도 많은 실험 및 증거들에 의해 지지받고 있는 설명은, 사람들이 비슷한 심성을 갖는 사람들과 협력하는 것에서 기쁨을 얻거나 또는 그렇게 하는 것에 대해 도덕적 의무감을 느낀다는 것이다. 또한 사람은 타인의 협력에 무임승차해 이로부터 이득을 취하는 사람들을 처벌함으로써 기뻐하거나, 그렇게 하는 것을 도덕적인 의무로 여긴다. 무임승차자들은 때때로 죄의식을 느끼며, 타인들에 의해 제재를 받을 경우 수치심을 느끼기도 한다. 우리는 이러한 감정들을 모두 묶어 사회적 선호(social preference)라 부른다.” 진화생물학과 진화게임이론 연구 결과, 사람들이 이타적 협력을 지속시키는 것이 바로 ‘사회적 선호’ 때문인데, 이것은 오랜 진화의 역사 속에서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즉, 사회적 선호란 사람들이 비슷한 심성을 갖는 사람들과 협력하는 기쁨이나, 협력에 대해 느끼는 도덕적 의무감, 또는 협력에 무임승차한 사람들의 죄의식이나 제재를 받을 경우 느끼게 되는 수치심 등의 감정을 뜻한다. 사회적 선호가 확산될 수 있는 이유는 제도를 만들고 학습된 행위를 문화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인간 특유의 능력 때문이다. 그러나 대한민국에서 이러한 공교육은 무너졌다. 사실 대한민국에서 ‘남자의 일생’은 이렇다. 세 살 때는 신동, 예닐곱 살 때는 천재, 초등생 때까지도 수재, 입시 한두 번 겪으면 범부, 사회 나오면 둔재! 교육환경이나 훈련보다 중요한 것은 어린 시절의 인지능력과 성취감이 성공 여부를 좌우하는데, 제대로 된 공교육이 무너진 대한민국은 아직도 학과 점수에 아이들을 길들이고 있다. 그 결과 무임승차자들은 죄의식이 없고, 당당하다. 따라서 자유로운 기술을 통하여 행위하는 인간들의 협력이 당신들의 대한민국을 우리들의 대한민국으로 만들 수 있을 것이다. 4. 당신들의 대한민국? 우리들의 대한민국 박노자의 대한민국은 이렇다. 노조의 지원을 받는 정당들이 국회 의석을 절반 정도를 차지하는 나라, 입사 때 여성이나 장애인이 ‘정상적인 남성’보다 더 유리한 평등의 나라, 노동운동가들이 감옥에 잡혀가지 않는 나라, 학생들이 교수를 만날 때 노르웨이처럼 동등한 인간으로서 웃으면서 악수할 수 있는 나라, 제국주의의 침략으로 완전히 폐허가 된 아프가니스탄에 각종 원조를 제공하는 일이 덴마크처럼 지성계의 가장 중대한 관심사가 될 수 있는 나라, 여성들이 손님의 냉면을 잘라주는 ‘음식집 아줌마’ 정도의 역할밖에 맡지 못하는 나라가 아닌 그런 대한민국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가야할 길은 무엇인가? 박노자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실존적 운동으로서의 사회주의인… (다시) 좌파의 길이다.” 현실 사회주의를 다시 일으키자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에 반대하는, 이른바 비자본주의적 삶의 방식을 대변할 수 있다면 무엇이든 해보는 것이다. 자본의 한계를 직시하고 거기서부터 새로운 대안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단순히 집권만을 위한 정당 운동이 아닌 폐허를 딛고 일어나 ‘인간으로 다시 거듭나고 뜻을 되찾기 위한 실존적 운동’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경계를 넘어서는 연대의 힘’만 있다면 못 이룰 것도 없다. 따라서 박노자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새로운 참사가 계속 일어나도 아무런 투쟁을 하지 않고 그대로 두는 것은 결국 역사 앞에서 커다란 죄를 짓는 일일 것이다.” 서론에 언급했던 노회찬 의원은 그 길을 가다 넘어졌다. 그의 유언은 이렇다. “나는 여기서 멈추지만 당은 당당히 앞으로 나아가길!” 다른 세상으로 가는 길에 동지 하나를 잃고 어깨에 더 무거운 짐이 올려지건만, 그리 힘들지 않음은 그의 웃음과 해학이 예수의 그 마음에 닿기에, 예수의 부활처럼 그도 부활하리라 생각하여 오늘도 당당히 앞으로 걸어간다. 노회찬 의원이 꿈꾸었던 대한민국을 향하여! ▲ 남부산용호교회 담임 * 이 글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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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8-13
  • [영화] 최고의 기독교 변증은 용서와 사랑이다
    기독교 변증 영화의 전성기 최근 미국에서 제작되고 있는 기독교영화의 가장 큰 특징은 간증이 아닌 변증의 성격을 강하게 내포하고 있다는 점이다. 교회를 둘러싼 세속적 사회는 기독교가 진리라고 믿고 있는 사실을 부정하는데 그치지 않고 적극적으로 공격을 하고 있고 기독교영화는 이에 대해서 논리적이며 또한 신앙적으로 방어하는 모양새를 갖추고 있다. 즉 기독교 변증영화는 현 시대의 교회를 향한 무신론적이며 세속적인 사회의 공격적 태도를 보여주는 한편으로, 그래도 <신은 죽지 않았다1,2>(2014, 2016)와 <예수는 역사다>(2017)는 기독교변증 영화의 흐름을 주도하고 있는 영화들이다. <신은 죽지 않았다> 1편에서 대학 신입생 조쉬 휘튼(쉐인 하퍼)은 무신론 교수의 철학수업시간에서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라는 교수의 요구에 대해 하나님의 존재를 시인하면서도 또한 지성적인 대응을 함으로써 서구 대학세계에 만연한 무신론적 상황의 심각성을 일깨워 주었고, 한편으로 대학캠퍼스에서 크리스천 대학생들이 순교자적 신앙을 요구받을 수 있다는 새로운 사실도 알게 되었다. 대학 강의실에서 모든 권력을 소유한 무신론 교수와 이제 갓 들어온 크리스천 신입생의 대결 구도는 오늘날 기독교가 서구 지성인 사회에서 처해 있는 어려운 형국을 압축해서 보여준 것에 다름 아니었다. <신은 죽지 않았다> 2편은 공교육 현장에서 기독교신앙이 처한 위기와 위협적인 상황을 매우 밀도 높게 보여주었다. 공립학교 역사수업시간에 간디의 비폭력저항운동에 예수의 사상이 영향을 주었는지를 묻는 학생의 질문에 크리스천 역사교사 그레이스(멜리사 조앤 하트)는 예수가 역사적인 인물, 다시 말해서 기독교 믿음의 중심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적 사실성을 근거로 답을 해주었다. 그러나 이를 스마트폰으로 녹음한 학생이 공교육의 현장에서 특정 종교를 선전한다는 이유를 들어 학교위원회에 이의를 제기함으로써 크리스천 교사는 실직의 위기에 처하게 되는 상황을 통해 영화는 기독교신앙과 공교육과의 갈등 상황을 묘사하기 시작했다. 영화 <예수는 역사다>는 언론계에 만연한 무신론적이며 비기독교적 정서를 여지없이 보여주었다. 무신론자이며 미국 중부 최대 일간신문인 시카고 트리뷴지의 인정받는 기자 리 스트로벨(마이클 보겔)은 자신의 아내가 예수를 믿고 신앙생활에 열심을 내는 것을 지켜보며 불만을 품게 된다. 객관적 사실을 중요한 판단 기준으로 삼는 기자생활에 익숙한 그의 입장에서 볼 때 아내가 믿는 기독교는 비합리적이며 미신적인 사고방식으로 가득한 구시대적 유물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스트로벨 기자는 특종을 내겠다는 직업정신과 교회에 빼앗긴 아내를 되찾겠다는 사적인 감정이 결합된 가운데 기독교의 근간을 흔들기 위해 예수의 부활이 거짓임을 밝혀내는 일에 착수한다. 세상이 교회에 바라는 것은? 다시 <신은 죽지 않았다> 시리즈의 차례가 돌아왔다. 마이클 메이슨 감독의 최신작 <신은 죽지 않았다3:어둠 속의 빛>(God's Not Dead: A Light in Darkness, 2018)은 반기독교적인 미국사회의 정서에 대해 충실한 신앙적 답변을 보여주며 기독교 변증영화의 흐름을 이어나가고 있다. <신은 죽지 않았다1,2>에서 조연으로 출연했던 데이브 목사(데이비드 A. R. 화이트)는 대학 캠퍼스 안에 위치한 150년 전통의 세인트 제임스 교회의 담임목사로 등장한다. 전편에서와 달리 이번 영화에서 데이브 목사는 심각한 고난과 갈등에 직면하고 만다. 무신론 분위기가 팽배한 대학의 학생들은 예배당이 대학 캠퍼스 안에 있는 것에 불만을 갖고 퇴출되기를 강하게 희망한다. 더군다나 교회에 불만을 가진 대학생 아담 리처드슨(마이크 매닝)은 우발적이긴 하지만 교회에 벽돌을 집어 던져버리는 바람에 지하실에 있던 가스파이프가 터지고 이를 알지 못한 채 지하실에서 전등을 켜던 데이브 목사의 절친 주드(벤자민 오치엥) 목사는 가스 폭발로 인해 사망에 이르는 가슴 아픈 사건을 맞이하고 만다. 불타버린 교회를 바라보는 대학생들은 이 기회에 교회가 대학에서 떠나기를 바라지만 데이브 목사와 크리스천 학생들은 어떻게든 교회를 지키기 위해 격앙된 반응을 나타내기도 한다. 영화는 사회적 갈등이 있다면 이를 법정에서 푸는 일반적인 미국사회의 풍속으로부터 시작한다. 누가 교회에 불을 냈는지 알지 못한 채 데이브 목사와 학교 당국 그리고 학생들 간의 대결은 사뭇 심각한 양상으로 발전한다. 데이브 목사는 교회를 지키기 위해 변호사인 자신의 동생을 찾아가 도움을 요청하는 한편으로 하나님께서 왜 자신에게 이런 시련을 주셨는지 신앙적 갈등 또한 겪게 된다. 이 영화의 가장 중요한 가치는 갈등을 푸는 방법에서 발견할 수 있다. 교회와 학생 그리고 학교당국과의 대치 국면을 해결하는 방안은 교회를 내쫓으려는 학생들 머리 위로 천둥벼락이 내리기를 기도하는데 있지 않음을 영화는 보여준다. 그렇다고 타락한 학교당국의 처사에 낙담만 하는 것으로 끝내지도 않는다. 가장 중요한 문제 해결방안은 캠퍼스 내 교회가 있다면 학생들이 교회에 기대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파악하고 학생들을 위한 교회의 존재목적을 다시 한 번 정립하는 일이다. 무신론자는 기독교인에게 무엇을 기대하는가? 이 영화의 가장 큰 매력은 무신론자들이 원하는 것은 기독교인이 무신론자로 변하여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는 다른 생각과 행동, 즉 일반적인 생각을 뛰어넘는 가치관을 기대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데 있다. 교회에 벽돌을 던진 리처드슨은 자신의 신분을 감추고 데이브 목사의 휴대폰에 범인이 누구인지를 밝히는 메시지를 보낸다. 이때 리처드슨이 기대했던 것은 데이브 목사를 통해 예수가 보여준 사랑과 용서의 모습이 실현되는 것이었다. 비록 고의는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 자신의 친구가 죽고 예배당이 불타 버린 현실에서도 과연 목사는 문제 많은 자신을 품을 수 있는지 궁금했던 것이다. 이것은 결국 단지 오래되었다는 이유만으로 교회의 예배당이 세속적인 사회에서 그 가치를 존중받을 수는 없음을 영화는 은연중 보여준다. 교회의 가치는 예수의 말씀을 실천하는지 여부에 달려있다. 교회가 세상과 똑 같이 자신의 이권만을 주장하고 전도의 대상인 세상 사람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무시해 버린다면 교회의 본래 역할을 감당하기란 결코 쉬울 수 없는 일이다. 데이브 목사는 불타버린 예배당을 포기하는 대신 대학 당국의 지원을 받아 외곽에 새로운 교회를 지을 수 있도록 지원 약속을 받는다. 예배당이 있던 자리에는 학생들이 모여 활동할 수 있는 학생회관이 들어서게 되고 그 안에 학생들의 영혼을 돌볼 수 있는 센터 설립 또한 약속을 받는다. 어떻게 보면 세속적인 학생들과 대학당국의 요구에 교회가 무릎 꿇는 것처럼 보이지만 학생들이 원하고 필요에 응답하며 한 발짝 물러서는 모습은 오히려 학생들을 감동시키는 결과를 가져 온다. 왜냐하면 세상이 교회에 원하는 것은 자신들처럼 스스로의 주장과 이익을 싸우고 상대방을 뭉개버리는 일이 아니라 자신과는 뭔가 다른 행동을 원하는 기대감이 잠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비록 그 현장에서는 세상이 승리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한 교회는 궁극적인 승리를 얻게 될 것이다. 기독교 변증적 성격을 지닌 이 영화가 제시하는 메시지는 세상 가치에 대한 예수님의 역설에 있다. 현대의 크리스천은 교회를 싫어하는 사람들과 맞서 싸워서 그를 굴복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른 뺨을 맞을 때 왼 뺨을 대어주고, 고소당해서 속옷을 빼앗길 때 겉옷까지도 내어주고, 억지로 오 리를 가자고 강요받을 때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해주는 일(마5:39-41)을 요구받고 있다. 원수를 사랑하고 자신을 박해하는 사람들 위하여 기도할 것(마5:44)을 기대하는 것은 오히려 세상 사람들일 수 있음을 영화는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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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8-13
  • [기독교 교양 읽기 40] 《신》이 기독교 인문학 발전의 계기되길
    하나님을 증명한다! 이 책은 우선 방대하다. 900쪽이 넘는데다 고대 철학에서 현대 신학까지 가로지르며 하나님이 어떤 존재인가를 이야기한다. 즉, 서양문명에서 ‘하나님’을 어떤 분으로 인식하고, 신학적으로 이를 어떻게 증명했는가를 이야기한다. 그러면서 하나의 주제를 증명하기 위해 세부적인 명제까지도 가능하면 상세하게 설명하는 방식을 사용한다.예를 들면, 3부 ‘하나님은 창조주다’라는 주제를 이야기하면서, ‘창조론이 왜 《고백론》 안에 있나’ ‘창조는 어떻게 이루어졌나’ ‘창조의 목적은 무엇인가’를 소주제로 내세워 하나씩 설명한다. 또한 이들 소주제를 설명하는 내용도 만만찮다. ‘태초는 언제인가’부터 시작해서 ‘영원이란 무엇인가’ ‘시간이란 무엇인가’ ‘천지란 무엇인가’ ‘창조의 여섯 날이 문자 그대로 6일인가’ ‘다윈의 진화론과 그 영향’ ‘창조론은 진화론을 수용할 수 있나’ 등 별도로 신학적/철학적 곁가지를 끄집어내 일일이 설명한다.이를 위해 플라톤과 신플라톤주의를 받아들였던 아우구스티누스를 중심으로 교부철학과 토마스 아퀴나스, 그리고 요한 칼빈을 비롯한 종교개혁자, 칼 바르트와 파울 틸리히 등 현대 신학자들의 주장까지 연결시켜 하나님을 증명한다. 책이 방대해질 수밖에 없는 구조다. 그나마 한 가지 위안은, 나름대로 전문용어를 피하고 쉬운 낱말과 대화체 문장을 사용함으로써 독자들이 좀 더 친근하게 책을 읽을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다. ◈ 《신》 || 저자 김용규는 독일 프라이부르크 대학교에서 철학을 공부했고, 튀빙겐 대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하며 위르겐 몰트만과 에버하르트 융엘의 강의를 들었다. 저서로는 《데칼로그》 《생각의 시대》 《철학카페에서 문학 읽기》 등이 있다. Ivp, 2018. 42,000원. ◇ 같이 읽으면 좋은 책《데칼로그》 / 김용규 / 포이에마《하나님을 말하다》 / 팀 켈러 / 두란노 《신》이 기독교 인문학 발전의 계기되길 그럴 때 교회부흥도 담보할 수 있을 것 ▌좌담: 김길구, 김수성 경성대 초빙외래교수, 김현호 기쁨의집 기독교서점 대표 ▲ 유발 N. 하라리는 이제 인간이 신이 되고자 하는 시대에 접어들었다고 선언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김용규는 기독교 인문학으로 하나님을 증명하고자 한다. 그러면서 우리가 신앙과 이성의 균형을 유지할 것을 권면한다. [그림은 미켈란젤로가 그린 이탈리아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화 〈아담의 창조〉] “하나님은 모든 존재물이 존재하는 바탕입니다. 즉, 모든 존재물은 하나님 안에서 존재를 부여받아 존재하지요. ‘하나님은 존재다’라는 말이 여기서 나온 겁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우주마저 자기 안에 포괄하며, 무소부재하고, 오직 하나님만이 존재할 뿐 하나님의 바깥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유일자다’라는 말은 바로 여기서 나왔습니다. 그런데 이 존재는 또한 자신의 내적 법칙인 ‘말씀’으로 모든 존재물을 자기 안에 창조하지요. ‘하나님은 창조주다’라는 말이 여기서 나왔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부단히 자신의 피조물들과 관계하며 그들을 오직 자신의 의지대로 이끌어 가지요. ‘하나님은 인격적이다’라는 말은 여기서 나왔습니다.” [본문 56~57쪽에서] 인문학을 망라하여 신을 이야기하다 김길구 오늘로 ‘기독교 교양 읽기’가 마흔 번째를 맞이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이번에는 900쪽이 넘는 아주 두꺼운 책을 택했습니다. 저자가 2010년에 펴냈던 《서양문명을 읽는 코드, 신》의 개정증보판이라 할 수 있는, 《신》입니다. 이 책은 신 없이도 살 수 있다는 이 세대를 향해, 나름 의미 있는 메시지를 던지고 있습니다. 김현호 저자는 이 책에서 서양철학과 신학, 역사, 문학에 더해 현대 물리학 등을 망라하여, 인문학적으로 오늘도 우리 속에 살아계신 하나님을 이야기합니다. 최근 과학을 무기로 한 무신론자들을 비롯해 첨단기술을 이용하여 인간이 신적 존재로 바뀌고 있는 현실에서, 책을 읽는 내내 저자의 섬세하고 따뜻한 마음을 읽을 수 있어 행복했습니다. 김수성 저자는 이 책의 목표를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나님에 대한 바르고 정치한 이해를 통해 서양문명의 심층을 파악”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제가 보기에 이 책은 불신자나 일반 교인들을 대상으로 인문학적 지식을 총동원하여 기독교의 하나님을 증명하는데 집중한 결과물이라고 생각합니다. 즉, 궁극적인 목표는 ‘인문학으로 하나님을 증명하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김길구 맞습니다. ‘인문학으로 읽는 하나님과 서양문명 이야기’란 부제가 있습니다만 저자는 오늘날 인류가 직면한 문제를 ‘신을 떠난 인간’의 문제로 진단하면서 다시 신본주의적 관점에서 해답을 찾고 있습니다. 그래서 미켈란젤로가 그린 이탈리아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화 중에서 〈아담의 창조〉에 등장하는 하나님의 모습을, 책 맨 앞에 언급한 것으로 보입니다. 김현호 이 그림에서 흰 수염을 휘날리며 막 창조된 아담과 손가락을 마주대려고 하는 할아버지 같은 모습의 하나님이, 실제로는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제우스의 모습에서 나온 것이라고 저자는 지적합니다. 그러면서 당시 인문학을 최고의 가치로 생각한 르네상스인들은 제우스를 하나님과 같은 존재로 여겼다고 합니다. ‘인문학’과 ‘기독교 인문학’ 구분해야 김수성 그렇다면 ‘인문학적으로’ 하나님을 증명한다는 말에 있어, 뭔가 앞뒤가 맞지 않는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김길구 저자가 여기서 이야기하는 인문학은, 정확하게는 ‘기독교 인문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르네상스 당시의 인문학은 신본주의에서 인본주의의 회복에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이에 비해 기독교 인문학은 당연히 하나님 나라가 그 주제가 되어야겠지요. 바울은 로마서에서 하나님 나라는 먹고 마시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고 했습니다. 기독교 인문학의 지향점이라고 생각합니다. 김현호 그래서 저자는 먼저 그리스철학을 이야기하고 이어서 르네상스 초기 인문학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단테의 《신곡》에서 인용을 하고, 그것들을 기독교 인문학의 정점인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을 비롯한 다양한 저작과 상호 비교하면서 하나님을 속성을 찾아나가는군요. 김수성 역사적으로 본다면, 신이라는 코드로 서양사상의 두 기둥인 헬레니즘적 인문학과 히브리즘적 기독교 인문학을 가로 세로로 직조하면서, 하나님의 모습을 불신자나 일반 신자들에게 소개하는 것이라 할 수 있겠군요. 김길구 그래서 사회학자 등에게서는 비판을 받기도 합니다만, 신을 잃어버린 젊은 세대에게 어필하는 바는 적지 않다고 봅니다. 단적인 예로 헬레니즘 전통의 ‘불변성’과 히브리즘 전통의 ‘역동성’을 비교한 것은 하나님을 증명하는데 아주 중요한 키워드라 할 수 있습니다. 저자는 이를 통해 하나님의 인격성을 이야기합니다. 김현호 변하지 않는 제우스는 오늘날 ‘그리스 로마 신화’라는 책 속에 갇혀 옛날이야기로만 읽혀지는데 비해, 역동적인 하나님은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오늘도 우리와 함께 다양한 모습으로 역사하고 있다고 구체화합니다. 김수성 그렇다고 하더라도 ‘인문학적’ 관점에서 보면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 상호모순이 되는 부분이 적지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책에서도 누누이 지적하고 있듯이 초기 기독교사상에는 그리스 철학이 상당부분 흡입되었고, 아직도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력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교회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현대사회는 자기가 원하는 神 만들어 김길구 사실입니다. 기독교 역사가 증명하고 있듯이 신플라톤주의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특히 교부철학시대에는 플라톤의 이데아론에 더하여 신플라톤주의에다 기독교 옷만 입혀 교리화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스토아철학이 기독교에 영향을 미칠 때는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이 밀려 들어왔습니다. 김현호 저는 대표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가 인간을 정점으로 동물-식물 등으로 계층화시킨 ‘자연의 사다리’가 기독교에 유입되어 ‘존재의 사다리’로 변형되었다는 것이 기억납니다. 이로 인해 하나님-천사-인간으로 서열화되고, 교회 안에서도 교황-주교-사제-평신도로 계층화되었죠. 사실 이 ‘존재의 사다리’는 사회적으로도 많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김수성 저자는, 대표적인 신학자인 바울이나 아우구스티누스가 그리스 철학에 영향을 받기는 했음에도, 이에서 벗어나 ‘십자가의 은총’을 중심으로 한 기독교 교리를 확립한 인물들이라고 지적합니다. 종교개혁자들은 이들의 사상을 물려받아 ‘존재의 사다리’의 주장과는 전혀 다른 만인제사장설 등을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나 한국 교회는 아직도 직분을 계급으로 착각하는 교인들이 많은 것도 사실입니다. 김길구 끝으로 아우구스티누스가 “네가 하나님을 파악하지 못한다는 것이 뭐 그리 놀라운 일인가? 만일 네가 그분을 파악한다면, 그분은 하나님이 아니다.”라고 했던 말의 의미를 생각해보면서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하나님은 자칫, 내가 창조한 하나님이 될 수 있음을 지적하는 말입니다. 김수성 유명한 신화학자인 조셉 캠벨도 같은 이야기를 합니다. “신이라는 관념의 진정한 의미는 초(超)‘신학적’입니다. 이것은 정의될 수 없고, 헤아릴 수 없이 신비스러운 초신학, 살아 있는 모든 존재의 근원이자 종말이자 살아 있는 모든 것을 떠받치는 힘입니다.” 내가 만든 하나님을 내가 신앙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하는 말입니다. 김현호 역사적으로 인간이 이성을 중시하면서 이러한 일이 일어났죠. 근대주의의 물결이 몰아치면서 사람들은 하나님의 도움 없이도, 아니 ‘이성이라는 하나님’이 세계를 잘 이끌어나갈 것이라고 자만했습니다. 그러나 1, 2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인간이 얼마나 잔인하고 포악하고 어리석은가를 실감했습니다. 그 결과 포스트모더니즘이 등장하였지만, 이제는 첨단 물질문명이 하나님을 대신하는 결과를 빚고 있습니다. 인간은 끊임없이 자기만의 하나님을 창조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김길구 이 책을 계기로 여러 사람이 다양한 저작물을 많이 출판하여 기독교 인문학을 더욱 발전시키기를 기대합니다. 우리 사회에 이러한 분위기가 형성된다면, 교회의 부흥도 새롭게 일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다음에는 제임스 K. A. 스미스가 쓴 《습관이 영성이다》(비아토르, 2018)를 읽고 이야기를 나누겠습니다. 수고했습니다. [정리: 김수성]
    • 문화
    • 기독교 교양 읽기
    2018-07-23
  • [문화]너희는 나그네를 사랑하라: 환대의 신앙 -'너희는 나그네를 사랑하라(신10:19)'
    ▲ 예멘 난민 생활모습 1. 예멘 난민, 제주도에 오다! 지난 6월 한반도를 의미 있게 달구었던 것은 미국 대통령 트럼프가 북한의 김정은 위원장을 만난 것도 아니고, 2018지방선거의 놀라운 결과(부산의 경우, 지방 권력이 교체되었다)도 아니다. 나아가 러시아 월드컵의 열기(한국이 세계랭킹 1위 독일을 2:0으로 이겼다)도 아니다. 바로 제주도의 예멘 난민이었다. 아니, 그래야만 한다. 제주도 예멘 난민 수용이 사회적 화두로 확산되는 가운데 한국 국민 절반가량(49%)이 난민 수용에 반대한다는 여론조사가 발표됐다. ‘찬성한다’는 응답은 39%, ‘잘 모르겠다’는 응답은 11.9%로 집계됐다(리얼미터가 tbs 의뢰로 6월 20일 전국 성인 500명을 상대로 조사, 95% 신뢰수준에 표본오차 ±4.4%포인트). 자기 집 근처에 자국민 장애아 교육시설이 들어오는 것도 반대하고, 양심적 병역거부자를 종교가 다르다고 매국노로 취급하며, 성정체성이 다른 이들을 혐오하는 이 대한민국에 당연한 일이겠지만, 어쩐지 서글픈 생각이 든다. 다른 이들은 여러 가지 이유로 난민을 반대하더라도 그리스도인들은 최후까지 나그네 된 자를 돌봐야 하는 것이 성경의 정신일진대, 이러한 배타성과 거부는 도대체 무엇인가? 현지인 대상의 절호의 선교 기회이자, ‘정착 골든타임(숙소와 일자리를 마련해 안정적인 삶을 영위하도록 돕는 3~6개월 정도의 기간)’을 놓치게 되면 또 다른 문제가 야기될 수도 있을 텐데! 따라서 이러한 새로운 시대적 전환, 그 골든타임에 우리는 우리가 당면한 새로운 시대의 화두인 환대에 관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2. 환대에 대하여 해체주의 철학자 자크 데리다(J. Derrida)의 『환대에 대하여』는 1980년 소위 세계화의 바람과 함께 세계 경제에 불어 닥친 신자유주의와 국가 경계가 허물어진 초국가적 자본의 이동으로 인해 발생한 이주민과 난민, 이방인과 타자에 관한 유용한 지침서이다. 그리고 예멘 난민(은 물론, 앞으로도 다가올 이주민, 나아가 탈북자와 통일 이후의 인구 이동에 이르기까지)을 통해 타자를 어떻게 대해야할지를 고민하는 우리들에게 데리다는 ‘무조건적인 환대’를 주장하며 나름대로 타자에 관한 우리들의 행동을 제안한다. 데리다는 소크라테스를 끌어들여 논의를 시작한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끊임없는 물음이 되기 위해, 즉 불편한 존재가 되기 위해 이방인을 자처한다. 그리고 이방인은 ‘우리(혹은 주체)’와 다른 것을 가지고 있는 존재이다. 이들은 언어가 다르고 문화가 다르고 생각이 다르다. 이방인은 우리의 문화를 변화시킬 수 있고, 토박이 집단에 혼돈을 야기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방인, 혹은 타자는 동일성 철학의 구조 안에서 극복되어야 하는 이질성으로 이해된다. 동일성을 파괴하는 오염이며 불편하고 위협적인 존재가 되기 때문이다. 예멘 난민에 관하여 떠도는 소문(이슬람, 강도, 강간, 가짜 난민, 테러리스트 등)들은 바로 이러한 배타적 동일성 철학을 그 근저에 둔 배제와 혐오의 속삭임이다. 데리다에 의하면 이러한 이방인에 관한 환대(hospitality)에는 두 가지 유형이 있다고 한다. 먼저, 칸트(I. Kant)로 대표되는 ‘조건적 환대(초대의 환대, 선별적 환대)’인데, 칸트는 환대를 적대시 당하지 않을 권리, 보호를 요청할 권리를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전제 위에서 논의 한다. 가령, 주권자는 평화로운 공존을 위해 환대의 권리를 수용해야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환대는 데리다가 보기에는 ‘조건적 환대’, ‘법에 근거한 환대’, 곧 ‘관용(tolerance)’이라고 할 수 있다. 관용은 데리다에 의하면 권력자의 양보와 자비, 은혜 베풀기에 기댈 수밖에 없는 한, 그것은 ‘힘이 곧 정의’라고 하는 ‘최강자의 논리’편에 서있을 수 밖에 없다고 지적한다. 따라서 데리다는 강자의 자비가 이방인과의 평화로운 공존의 원리가 될 수는 있지만, 그 자체가 이방인과의 평화로운 공존의 관계를 만들수는 없다고 본다. 따라서 데리다는 관용을 극복할 윤리적 이념으로 ‘무조건적인 환대’라는 용어를 제안한다. 조건적 환대를 넘어, 두 번째 환대인 ‘무조건적인 환대(방문의 환대)’야말로 데리다에게 관용을 넘어선 진정한 환대이다. 이것은 조건 없이 방문자에게 문을 여는 것인데, 어쩌면 두려움을 동반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방인은 손님으로서 주인의 자리를 위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데리다에 의하면, 나와 우리를 보호하기 위해 내 구역을, 나의 장소를 내어 놓아야 하는 일이 생길 때(지금 제주가 그렇다), 관용이 환대로 기능하기 위해서는 무조건적인 환대가 필요하다고 한다. 사실 신은 그 무조건적인 환대를 십자가 위에서 이루었다. 아들이 죽기까지 환대를 실천하셨던 것이다.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마22:39).”는 말씀은 바로 이러한 환대의 가르침을 실천하라는 것에 다름 아니다. 칸트의 ‘조건적 환대’인 관용을 넘어서는 데리다의 ‘무조건적 환대(방문의 환대)’는 지극히 성서적이다. 따라서 종교적 환대라고 고쳐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종교적인 환대’는 이방인의 조건을 따지지 않고, 굶주림이라는 단 한 가지 사실로 그들을 환대해야 한다. 가령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눅10:25-37)와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마5:43~46)”라는 예수의 말씀은 종교적 환대를 잘 보여준다. 3. 환대는 시적이다 그러나 아낌없이 주는 것은 환상이다. 따라서 환대는 환상이다. “환대는 시(詩)적일 수밖에 없다.”라는 데리다의 고민은 이를 잘 표현한다. 현실적인 환대가 아닌 이념의 환대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추구하는 ‘인간의 무한한 윤리성’에 의미를 두는 것으로 데리다는 자신의 책임을 회피한다. 해결책을 제시하지 않은 것은 그의 철학이 해체는 하나, 재구성은 독자의 몫으로 맡겨놓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철학이 종교(십자가 희생)로 넘어가기에는 자존심이 너무 센 것일까? 그래서 데리다는 환대의 문제를 결국 ‘물음’에 관한 문제로 던져버린다. 그렇다면 환대는 어디까지인가? 데리다는 창세기 19장에 나오는 롯의 가정 이야기를 인용한다. 두 천사가 롯의 집에 찾아오자, 소돔 남자들은 “이 저녁에 네게 온 사람이 어디 있느냐 이끌어 내라. 우리가 그들을 상관(성관계)하리라(5절).”고 말한다. 그러자 롯은 두 딸을 음란한 소돔 남자들에게 내놓는다. 사사기 19장에도 비슷한 상황이 나온다. 한 노인이 자기 집에 찾아온 레위인 손님을 지키기 위해 자기 딸과 레위인의 첩을 찾아온 불량배들에게 내놓는다(24절). 그러자 “그들이 그 여자와 관계하였고 밤새도록 그 여자를 능욕하다가 새벽 미명에 놓은지라. 동틀 때에 여인이 자기의 주인이 있는 그 사람의 집 문에 이르러 엎드러져 밝기까지 거기 엎드러져 있더라(삿 19:25-26절).”라고 한다. 밤새 강간당한 레위인의 첩이 죽은 것이다. 그런데 데리다는 이 장면의 의미를 더 이상 해설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무조건적 환대라고 다 좋은 것은 아니며, 더 중요한 것은 여기서 ‘환대의 법’을 만든 것은 가정의 폭군이었던 아버지, 그리고 남편이었기 때문이다. 자신을 내놓지 않고 자신의 소유물(딸과 첩인 여성)을 내놓은 것은 환대의 이름으로 차별을 구현한 것이다. 따라서 환대의 문제는 권력의 문제로 연결된다. 환대론 이후 『불량배들: 이성에 관한 두 편의 에세이』 (휴머니스트, 2003)에서 데리다가 파시즘적 국가 행태를 해체하려는 것은 바로 위와 같은 이유이다. 이러한 데리다의 ‘불량 국가’ 담론은 미국 대통령 아들 부시가 미국의 일방적 외교 노선을 정당화하기 위해 이라크, 이란, 시리아, 리비아, 북한 등을 ‘불량 국가’로 규정했을 때, 노엄 촘스키 등을 비롯한 지식인들이 2차 대전 이후 미국의 초법적 국제 테러 행위야 말로 ‘세계 최대의 유일한 불량 국가’라고 비판하면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데리다는 현존하는 모든 민주주의 국가는 사실상 불량 국가이며 따라서 우리는 불량 국가의 시대에 살고 있다고 결론을 짓는다. 그리고 그들의 환대는 관용은커녕 차별을 곤고히 하는 악마의 속삭임인 것이다. 4. 레비나스의 타자의 윤리와 용서의 한계 레비나스는 타자의 관점에서 내가 가질 수 없는 타자의 절대성에 대한 나의 순종적 태도를 이야기한다. 나의 자유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타자의 절대성에서 시작하는 것이다. 현실성이 부족하고 ‘피학적인 주체’를 말한다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레비나스의 타자의 윤리는 이방인과 타자, 이주민에 대한 탁월한 이해가 된다. 사실 레비나스는 ‘시간’이 아닌 ‘공간’을 사유했다. 어떤 사람이 어떤 장소를 점유하고 있다는 것은 독특성을 지닌 유한함을 가리키는 것이다. 따라서 타자에게 공간을 마련해 주는 것은 타자의 현존을 위해 자리를 만들어 주는 것이고, 잊혀졌던 타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겠다는 의지의 표현이 된다. 이를 위해 레비나스는 ‘거주’라는 개념을 통해 ‘자기를 추스르고 휴식을 취하며 불안정을 유예하고 향유를 예비할 수 있는 곳’을 상정한다. 그런데 이러한 나의 거주 공간에 환대를 통하여 타자를 맞아들이는 것이 바로 타자 윤리의 핵심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왜 내가 나에게 익숙하고 안락한 세계를 열고, 위험 부담이 있는 나그네를 받아들여야 하는가? 내가 미래의 불안정을 덜기 위해 모아 놓은 노동의 산물과 향유의 대상을 나그네에게 내놓고 대접해야 할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레비나스는 ‘낯선 자가 헐벗고 굶주리고 가난한 자로 나에게 찾아오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리고 여기서 그 낯선 자는 ‘무한자’이면서 가난한 자이다(역설적이게도!, 그리고 이것은 마태복음 25장에 잘 나와 있다). 게다가, 사실 집 주인 역시 처음부터 자신의 거주지에서는 손님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만 한다. “거류민이 너희의 땅에 거류하여 함께 있거든 너희는 그를 학대하지 말고 너희와 함께 있는 거류민을 너희 중에서 낳은 자 같이 여기며 자기 같이 사랑하라. 너희도 애굽 땅에서 거류민이 되었었느니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레19:33~34).” 또한 레비나스는 ‘상처 입을 가능성(혹은 상처받을 수 있는 능력, vulnér-abilité)’을 ‘타자의 괴로움에 의해 상처받는 일, 타자의 비참함을 느끼는 고통에 노출되어 있는 상태’로 정의한다. 사실 삶은 무수한 상처의 흔적들로 채워진 것이 아닌가? 그리고 우리는 그 상처의 자국들을 외면할 수 없다. 상처에 취약한 몸(을 지닌 인간)과 상처입기 쉬운 유기체(로서의 공동체), 그것이 곧 우리 삶의 흔적과 인간 존재의 관계성, 그 핵심이다. 그리고 그 흔적에 관한 해결책이 레비나스에게 있어서 ‘초월’이며, 데리다가 물은 환상의 환대가 용서의 한계라는 구체적인 실천으로 육화되는 것이다. 레비나스의 초월 개념을 가장 잘 설명해 주는 용어는 아듀(adieu)이다. 어원적 의미로는 첫째, 타자와 만났을 때 하는 인사(축복) 둘째, 죽음을 포함해서 떠날 때 하는 인사(축복) 셋째, ‘신에게로 가다(à Dieu)’로 들 수 있다. 이 어원적 의미는 곧 ‘타자와 만남’, ‘존재의 타자로서 죽음에 직면’, ‘무한자에게로 초월’로 각각 상승(?)한다. 여기서 레비나스는 세 번째 의미인 신과의 만남은 오로지 첫 번째 의미인 타자와의 만남에 의존해서만 성립할 수 있다고 본다. 곧 타자에 대한 나의 윤리적 책임성은 나의 주체성의 본질적인 구조를 이루는 동시에 초월의 본질적 구조를 형성한다는 것이다. 보이는 이웃을 사랑하지 못한다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하겠는가? 따라서 내가 타자에 대해 윤리적 책임성을 지닌다는 것과 내가 주체로 선다는 것, 마침내 내가 초월할 수 있다는 것은 동일하다는 이야기이다. 용서의 관점에서 보면, 용서의 한계는 초월의 이러한 의미를 깨달을 때 용서라는 말은 사라지고 타자에 대한 무제약적인 책임성만 남은 순수 종교의 형태를 요청한다. 지금 제주에는 예멘인의 모습으로, 당신의 집 앞에는 무엇인가(음식, 의복, 직장, 집 등) 결핍된 모습으로 나타난 하나님이 보이는가? 바야흐로 환대의 신앙이 우리를 부르고 있다. 최병학 목사 (남부산용호교회 담임) * 이 글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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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7-06
  • [영화] 할리우드의 공룡사랑에 감춰진 인간복제
    할리우드 영화는 어디까지 발전할 수 있을까? 할리우드 영화는 자본과 기술 그리고 상상력의 결합물이다. 스티븐 스필버그와 조지 루카스로 대표되는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감독들이 세계 영화계를 주름잡기 시작했던 1970년대 후반부터 영화는 돈과 컴퓨터 그리고 무한한 상상력의 경연장이 되었다. 요즘 한창 제작 붐을 타고 있는 ‘어벤져스 시리즈’와 같은 SF액션물의 경우 평균 1억 달러 이상의 제작비가 들어간다. 높은 제작비의 원인 가운데 하나는 천정부지로 오른 스타들의 몸값도 크게 한몫 했다. <분노의 질주> 시리즈와 최신작 <스카이 스크래퍼>의 주인공을 맡은 배우 드웨인 존슨(Dwayne Johnson)은 6,450만 달러(한화 약 720억 원)의 출연료를 받아 화제가 되었지만, 이내 <아이언맨>의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가 <어벤저스3> 출연료로 1억 달러(약 1,120억 원)를 받은 것이 밝혀지면서 2위로 물러나야 했다. <어벤저스3>의 총예산은 약 3억 4000만 달러로 할리우드가 스타에 지불하는 비용만큼이나 엄청난 돈을 실제작비에 쓰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참고로 한국영화 가운데 가장 제작비가 많이 든 영화는 강제규 감독의 <마이 웨이>(2011)로 3백억 원에 약간 미치지 못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스타와 더불어 컴퓨터 그래픽은 할리우드의 제작비를 빨아들이는 블랙홀에 다름 아니다. <쥬라기 월드: 폴른 킹덤>은 대형 스타가 나오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추정 제작비만 약 1억7천만 달러에 달한다. 고생물학자들의 조언에 따라 제작된 공룡뿐만 아니라 유전자 조작을 통해 탄생한 가상의 공룡들은 모두 컴퓨터 그래픽이 탄생시킨 값비싼 상상의 결과물들이다. 공룡의 피부조직 하나하나가 섬세하게 묘사되는 영상을 만드는 일과 공룡 특유의 움직임을 재현하기 위해 들이는 인건비와 시스템사용 비용은 할리우드가 대형 영화를 제작하는데 감수해야할 내역인 것이다. 할리우드의 블록버스터 영화들의 강점은 또 있다. 최신 과학 정보들을 재빠르게 활용하여 관객들에게 끊임없이 새로운 이야기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할리우드는 과학기술의 발전에 매우 민감하다. 즉 자본과 기술 그리고 상상력이 최신 과학정보를 스펀지처럼 흡수하여 관객들로 하여금 그럴 수 있다는 개연성이 있는 이야기를 만들고 있는 것이다. 영화에서의 개연성은 당장 실현되고 있지는 않지만 그럴 수 있다는 암묵적 동의를 이끌어 내는 작용을 한다. 아무리 멋진 화면을 전개시키더라도 그저 허무맹랑한 공상에 지나지 않는다면 이야기 전개에 무리가 생길 수밖에 없고 관객을 설득할 만한 논리구조를 갖지 못한 저급한 영화로 낙인찍힐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런 점에서 <쥬라기 월드: 폴른 킹덤>은 전편에 이어서 유전자 합성을 통해 탄생한 인도미누스 렉스(Indominus rex)와 벨로시랩터(Velociraptor)의 유전자를 재교배하여 탄생한 인도랩터(Indorapto)라는 새로운 종을 보여주며 관객 설득에 나서고 있다. 전편인 <쥬라기 월드>(2015)에서 인도미누스 렉스는 가장 거대한 공룡으로 알려진 티라노사우루스 렉스(Tyrannosaurus rex)를 기본으로 갖가지 공룡들의 장점을 결합시켜 만든 무서운 공룡으로 탄생했었는데, 후속편에서는 여기에 가장 잔혹하고 교활한 공룡인 벨로시렙터의 유전자를 결합시켜서 더욱 공격적인 공룡을 만들어냈다. 특정 유전자 조작을 통해 상품성 있는 공룡을 만드는 일이 관객에게 그럴 듯하게 이해될 수 있는 것은 현시대의 유전자공학 기술의 발전을 재빨리 흡수했기 때문이다. 2013년 미국의 생화학자 제니퍼 다우드나(Jennifer Doudna)가 발견하여 유전공학의 혁명으로 불리우며 세상을 놀라게 한 ‘크리스퍼 유전자가위(CRISPR/Cas9)’는 <쥬라기 월드>에서 보여준 유전자 조작을 통한 보다 강력한 공룡을 만들 수 있는 과학적 개연성으로 작용한다. ‘크리스퍼 유전자가위’는 특정 유전자만을 정밀하게 조준해서 편집함으로써 유전병이나 난치병을 고칠 수 있는 획기적인 의료기술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또한 얼음에 오랜 시간 갇혀있었던 매머드 (mammoth)의 온전한 사체를 가지고 멸종된 매머드를 복원시키는 일을 진행하는데 이 유전자가위를 사용하고 있는 중이다. 한마디로 현재 상용화된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는 벌레에 강하면서도 맛도 좋고 빛깔도 좋은 과일품종을 개량하는 일로부터 크고 맛있고 빨리 성장하는 돼지(영화 ‘옥자’에 나오는 유전자 변형 돼지처럼)를 생산해 내는 일 등에 손쉽게 적용되고 있는 살아있는 최첨단 기술이다. 그런 까닭에 공룡의 유전자를 편집하여 새로운 공룡을 만든다는 <쥬라기 월드>의 설정은 공룡의 피를 빨아 먹은 채 호박 속에 갇힌 모기로부터 공룡의 유전자를 채득하여 공룡을 복원시킨다는 스필버그의 <쥬라기 공원>에서 제시된 설정보다 훨씬 개연성이 높은 편이다. 인간복제의 문제를 감추는 방법 할리우드 영화가 사회적 저항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메시지를 다루는 방법은 이름 하여 ‘소매치기 수법(The method of pickpockets)’이다. 관객들이 관심을 둘 만한 사항을 부각시키면서 은근슬쩍 관객의 저항이 따를 만한 메시지를 슬쩍 집어넣는 방식을 말한다. 소매치기가 지하철에 탄 승객의 안쪽 주머니에 있는 지갑을 몰래 빼내려할 때 그는 절대 혼자 행동하는 법이 없다. 바람잡이를 동원하여 승객의 주의를 다른 곳으로 유도하는 순간 다른 쪽에 있던 동료 소매치기가 지갑을 터는 방식이다. 정말 중요한 것으로부터 생각을 빼앗아 다른 것에 시선을 모으도록 한다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소매치기는 자신의 임무를 완성한 채 유유히 사라져 버린다. 지갑을 털린 사람의 후회는 이미 때가 늦을 수밖에 없다. <쥬라기 월드:폴른 킹덤>은 ‘인간 복제’라는 사회의 안주머니에 깊이 들어가 있는 지갑이 털려도 관객들은 알아차리기 쉽지 않게 만드는 바람에 비윤리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는 비판을 비껴간 영화다. 이 영화에서 소매치기 수법은 두 가지로 나타나는데 하나는 인간의 탐욕을 부각시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동물보호 차원에서 공룡의 생명성을 중요하게 다루고 있다. 유전자 조작으로 탄생한 사나운 공룡들에 대한 책임은 모두 돈에 눈이 먼 자본가들의 몫으로 돌아간다. 돈에 대한 탐욕은 보다 사나운 공룡을 만들어 전투에 참가시키려는 군사용 공룡제작에까지 눈을 돌리게 만든다. 관객들의 마음에 세상에서 사라져야할 대상은 공룡이 아니라 돈이 된다면 생태계가 파괴될 수 있는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집요하게 공룡에 몰입하는 탐욕에 물든 자본가들인 셈이다. 또 한 가지는 생명이 있는 애완동물을 아끼듯 공룡에 대한 애정을 부각시킴으로서 인간복제의 위험성에 눈을 감고 만다. <쥬라기 월드>를 만든 투자자의 손녀는 공룡복제기술로 탄생한 복제인간 소녀 메이지(이사벨라 서먼)다. 영화에서는 어린 나이에 죽은 손녀딸이 복제된 인간임을 직접 공표하기 보다는 그녀를 키운 보모의 나이가 매우 많다는 사실과 그녀의 젊을 때 함께 찍은 사진을 비춰줌으로써 간접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런데 복제인간 메이지는 자신과 같이 유전자 기술을 통해 탄생한 공룡들을 살리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다. 난동을 부리는 사나운 공룡들을 가스로 죽이려는 순간에 메이지는 그 공룡들을 인간세계에 풀어 놓았다. “다 살아있는 생명이잖아요.” 그녀의 멘트는 생명의 귀중함을 뜻하는 상식적인 발언으로 들리지만 그로 인해 복제생명체도 생명으로서 존중받아 마땅하다는 논리에 기초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즉 인간의 탐욕에 따라 이미 모든 것을 저질로 놓고서는 생명의 절대적 가치를 운운하고 있는 것이다. 생명의 문제를 제기하려면 유전자복제와 변형이 가져올 수 있는 비윤리적인 문제부터 먼저 얘기를 해야 한다. 기술보다 중요한 세계관 제니퍼 다우드나는 그녀의 동료 새뮤얼 스턴버그와 함께 쓴 책 <크리스퍼가 온다:진화를 지배하는 놀라운 힘, 크리스퍼 유전자가위>에서 유전자 편집기술인 ‘크리스퍼 유전자가위’가 가져올 희망적인 미래를 낙관하기 보다는 두려운 미래를 생각하며 의료윤리 혹은 기술윤리의 측면을 반드시 고려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그것은 자기 마음대로 그리고 생각한 대로 유전자를 갖고 있는 생명체라면 무엇이든 통제할 수 있음을 뜻하기 때문이다. 크리스퍼 유전가위 기술은 태어날 때부터 마음에 드는 신체부위만을 조합하여 가장 이상적인 자신 만의 아이를 가질 수 있는 맞춤형 태아를 출산하게 할 수도 있다는 점에서 히틀러가 시도했던 우생학적 인간 실험을 떠올릴 수밖에 없음을 기억해야 한다. 영화는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이 ‘생명나무의 실과’(창3:3-5)에 도전하고 있음을 감추고 있다. 기술의 혁신적인 진보를 통제할 수 있는 것은 세계관이다. 어떠한 세계관을 갖느냐에 따라서 <쥬라기 월드: 폴른 킹덤>은 인간 사회의 현실화된 재앙의 예고편일 수도 있고, 잠깐의 즐거움을 주는 여흥으로 남을 수도 있다. 영화의 태도는 애매하다. 말콤 박사를 통해 유전자 변형 기술의 위험성을 지적하면서도 복제기술이야말로 앞으로 할리우드가 애용해야 할 영화의 소재이자 다가오는 현실임을 긍정하는 모호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유전자변형기술을 통한 인간조작에 대해서 가져야하는 그리스도인 태도가 더욱 더 중요한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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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7-06
  • [기독교 교양 읽기 39]근본주의의 소중한 유산
    이 책은 ‘근본주의가 남겨준 유산으로부터 배울 수 있는 것’이라는 부제(副題)에서 알 수 있듯, 근본주의에 관한 책이다. 그렇다고 해서 근본주의가 무조건 옳다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저자의 이력에서 볼 수 있듯이, 근본주의의 문제점도 명확하게 드러낸다. 그러면서 근본주의에서 우리가 배울 점을 부각시킨다.약점과 강점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그러나 약점을 바로잡으려고 강점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저자의 논지다. 강점은 강점대로 살리고, 약점은 보완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신앙에 있어 어느 하나만을 주장하는 것도 문제이다. 그래서 서로를 포용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근본주의에서 주장하는 개인 구원의 중요성과, 행동주의에서 강조하는 사회의 구조적인 억압 시스템의 타파는 어느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쉽게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면서 예수 그리스도와의 개인적인 관계는 나머지 다른 모든 것들의 기반이기 때문이라고 결론짓는다.이 책에서 ‘톱밥’은 저자가 어렸을 때 참석했던 야외전도집회 천막 아래 바닥에 깔아놓았던 톱밥길, 이 길을 따라 집회장 앞으로 걸어 나가 무릎을 꿇고 회개하라는 요청을 받았던 길의 표상이다. 즉, 톱밥길은 ‘회개의 길’을 의미한다.◈ 《톱밥 향기》 || 저자 리처드 마우(Richard J. Mouw)는 미국 칼빈대학교 등에서 기독교 철학과 윤리학을 가르쳤고, 1993년부터 20년간 풀러신학교 총장을 역임했다. 지은 책으로는 《문화와 일반 은총》 《아브라함 카이퍼》 등이 있다. 원제 The Smell of Sawdust(2000). SFC, 2016. 12,000원. ◇ 같이 읽으면 좋은 책《무례한 기독교》 / 리처드 마우 / Ivp《하나님 나라를 상상하라》 / 제임스 스미스 / Ivp 복음주의의 강점은 여전히 소중하다 “인내와 겸손을 통해 ‘제2의 소박함’ 촉진해야” ▌좌담: 김길구, 김수성 경성대 초빙외래교수, 김현호 기쁨의집 기독교서점 대표 ▲ 복음주의의 가장 큰 장점인 신앙적 순수성은 어떤 경우에라도 소중하다. 이 장점을 더욱 살리면서 단점을 고쳐나갈 때 한국 교회의 미래도 밝을 것이다.[사진은 2016년 버몬트주 벌링턴에서 개최된 부흥회에서 '톱밥길'을 따라 나와 기도하는 모습, 출처:greensboro.com] “오늘날 복음주의자들 중 스스로를 점검하는 질문을 던지는 사람은 너무 적다. 그러나 복음주의는 바로 자기반성이 특히 어울리는 운동이다. 운동은 방향감각을 필요로 한다. 어디에서 왔고, 현재 어디에 있는지, 그리고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고민해야 한다.” [본문 37쪽에서] 신앙부흥운동의 뜨거운 열기 기억해야 김길구 이 책의 저자 리처드 마우는 철저한 칼빈주의자였던 아브라함 카이퍼의 사상을 미국 복음주의에 도입한 학자로 익히 알려져 있습니다. 즉, 정치·경제·문화 등 사회 전 분야에 걸쳐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이 행사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김현호 아브라함 카이퍼는 네덜란드 신학자이자 정치가죠. 그는 국회의원을 거쳐 총리로 재직한 경력에서 볼 수 있듯이, 단순한 신학자가 아니라 현실 참여주의자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암스테르담 자유대학교를 설립하는 등 오늘의 네덜란드가 있게 한 주역 중 한 명이었습니다. 김길구 리처드 마우가 이러한 사상의 영향으로 뒤에 ‘공공신학’의 실천자가 된 것은 우연한 결과가 아닙니다. 공공신학에서 신학은 창조, 역사, 문화, 사회, 인류 전체를 포괄하는 개념입니다. 그래서 공적인 삶 속에서 교회의 위치와 교회의 사회적 형식, 그리고 사회 속에서 교회의 역할에 초점을 맞춥니다. 김수성 한마디로 종교와 세상을 분리해서 볼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도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다, 그러니 세상살이도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해야 한다는 것이군요. 상당히 현실참여적인 신학을 이야기한 학자가 근본주의의 중요성에 대해 언급한 책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김길구 미국 기독교의 발전과 관련하여 살펴보면 이 책이 던지는 메시지를 좀 더 정확하게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즉, 저자는 미국 기독교를 청교도 신앙으로 대표되는 1세대, 복음주의 신학과 자유주의 신학이 대립하던 2세대, 그리고 상호 문제점을 뛰어넘고자 하는 3세대로 구분하여 이야기합니다. 김현호 1세대는 신앙의 자유를 찾아 ‘하나님의 땅’으로 여긴 아메리카 대륙으로 이주했던 청교도의 신앙을 그대로 이어받으려고 노력했던 세대라 할 수 있겠죠. 복음의 열정으로 똘똘 뭉친, ‘종교 대각성운동’으로 대표되는 순수한 신앙운동 시기였습니다. 김수성 이 책에서 언급된 ‘톱밥길’은 1세대 신앙인들에게 잊지 못할 경험이라 할 수 있을 겁니다. 당시 자료를 보면 대형 천막 안에 수천 명의 신도들이 모였다고 합니다. 이 책의 표지 사진은 에디 마틴의 집회 때 모습인데, 이에 앞서 드와이트 무디의 신앙부흥운동은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복음주의적이지만 독선적이지 않아야 김길구 1세대 신앙부흥운동은 상당한 효과를 거두었지만, 이에 못지않게 부작용도 부각되었습니다. 이 책에서 지적하듯이 반(反)지성주의, 내세지향성, 분리주의를 들 수 있습니다. 이러한 가운데 유럽에서 시작된 자유주의 신학이 미국 땅에도 들어옵니다. 그러자 이들 양 진영의 대립이 첨예화되고, 그런 가운데 근본주의가 부각됩니다. 김현호 근본주의는 당시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주장은 물론, 당시 팽배하던 다원주의와 사회주의, 새로운 철학 사조와 문화 운동 등 모든 것을 비판하며 오직 성경을 모토로 전도와 선교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이러한 운동이 우리나라에도 들어와 아직까지도 영향을 미치고 있고요. 김수성 저는 우리나라에서 일어났던 상황을 기억합니다. 1970년대에 우리나라에 불어 닥친 교회성장론과는 달리, 한편에서는 역사비평과 양식비평, 편집비평 등의 방법론으로 기술한 신학서적들이 보급되기 시작했습니다. 여기에다 제3세계의 해방신학 서적까지 더해지자 기성교회에서는 이들 서적을 불온시하기도 하였습니다. 김길구 아이러니하게도 교회성장에 관한 이론이 연구되었던 곳이 바로 풀러신학교였습니다. 이로 인해 풀러신학교가 나중에 비판을 받기도 했죠. 어쨌든 이들 두 진영의 대립은 각자의 장점과 단점을 모두 드러냈습니다. 저자는 《무례한 기독교》라는 책에서 앞으로 나아갈 바를 적절하게 지적합니다. 첫째, 자유주의적이지 않지만 온건한 태도, 둘째, 타협하지는 않지만 정중한 태도, 셋째, 대화를 계속하겠다는 일종의 다짐, 넷째, 만약에 기독교가 자신이 있다면 더욱 세상에 대해서 겸허할 것을 주장합니다. 김현호 복음주의적이지만 독선적이지 않아야 한다, 지킬 것은 지키더라도 정중한 모습을 보여야 하고, 그럼에도 대화를 단절해서는 안 된다. 교회와 세상이라는 이분법적 인식에서 벗어나 오히려 세상의 지식도 포용해야 한다는 뜻이죠. 오늘날 우리 한국 교회에도 관심을 가져야 할 메시지라 하겠습니다. 김수성 사실 해방 이후 우리나라 교회역사를 살펴보면 정치권력과 타협한 사례가 너무도 많습니다. 특히 독재정권에 빌붙어 세력을 확장했는가 하면, 그러한 정권에 반발하는 세력을 간접적으로 탄압하기까지 했습니다. 그 후유증이 이제 하나씩 드러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젊은이들이 교회를 외면하는 것이 대표적인 사례죠. 김현호 복음을 지킨다는 당위성을 내세우면서 오히려 교회가 독선으로 빠져들기도 했죠. 그러면서 교회의 태도가 거칠어졌습니다. 이러한 것이 복음 전파를 오히려 위축시켰습니다. 이제는 부드럽고 상냥한 태도를 가져야 할 것입니다. 그럴 때 모든 분야,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파할 수 있습니다. 각자의 단점은 고치고 장점은 살려야 김길구 저자는 3세대 신앙으로 신(新)복음주의를 이야기합니다. 근본주의든 자유주의든 모두 한쪽으로 치우친 문제점이 있었다, 그러니 각자의 단점은 고치고 장점은 살려서 새롭게 출발해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그러면서 근본주의의 강점으로 아직도 강하게 남아 있는 ‘톱밥 향기’를 내세웁니다. 어렸을 때 느꼈던 그 열정과 순수, 이것은 어느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기독교 신앙에 있어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는 것이죠. 김현호 실제로 어려서부터 신앙생활을 했던 사람들에게는, 당시의 기억과 느낌이 신앙의 버팀목이 되어주는 경우가 많습니다. 나이가 들면서 어렸을 때 배웠던 것들에 허점이 많았던 것을 깨닫지만, 그럼에도 주일학교에서 체험했던 신앙적 순수성이 있기에 온전히 버틸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김수성 근본주의 못지않게 자유주의 신학에 따른 문제점도 있었습니다. 가장 두드러진 게 근본주의의 강점이라 할 수 있는 열성적인 신앙을 감정적으로 치부하고, 개인전도 중심의 활동을 폄하한 것이죠. 또한 주지주의와 계몽주의로 인해 경건주의가 나타나게 되었음을 새삼 일깨웁니다. 김길구 그렇기에 저자는 ‘제2의 소박함’을 강조합니다. 기왕에 드러난 단점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그것을 견뎌낸 믿음을 굳건히 지켜나가야 한다는 것이죠. 그러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두 가지 언급합니다. 인내와 겸손입니다. 독선주의를 떨치고 신실한 행동을 요구하는 제자도로 나가기 위한 덕목이라 할 수 있습니다. 김현호 한마디로 하면 ‘거룩한 현세지향성’이죠. 내세에 대한 관심 못지않게 현세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지되, 근본주의의 가장 큰 덕목인 거룩성을 잃지 않아야 한다는 지적인 것 같습니다. 현재 우리나라 교회 현실에서 이 말이 의미하는 바가 적지 않다고 할 수 있습니다. 김수성 그동안 우리가 몇 차례 거론했던 지역을 섬기는 교회의 모습이라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김길구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내용상 우리 한국 교회가 앞으로 어떻게 해야 존재의의를 찾을 수 있는가에 대해 고민한 책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다음에는, 900쪽이 넘는 방대한 책이기는 하지만, 철학자인 김용규의 《신》(Ivp, 2018)을 읽고 이야기를 나누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정리: 김수성]
    • 문화
    • 기독교 교양 읽기
    2018-06-22
  • [문화]디지털 시대 태초에 인간이 새로운 천지를 코딩으로 창조하시니라(코딩복음 1장 1절)
    “우주는 넓은 의미에서 보면 물리법칙과 물리상수들로 코딩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생명체 역시 디지털 코드로 코딩 되어 있습니다.” (박준석,『세상을 만드는 글자, 코딩: 창의와 소통을 위한 코딩 인문학』동아시아, 2018) 1. 언어와 기호, 이미지의 세상 어쩌면 우리가 사는 세상은 환상 속의 공간일지도 모른다. 완전한 인식이 아니라, 희미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다. 사도 바울도 잘 보았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전13:12).” 그리고 이 희미한 환상 공간은 언어, 기호, 이미지 등으로 이루어진 세계이다. 언어를 통해 상상하는 세계, 기호로 구성하는 세계, 이미지로 체험하는 세계 등. 실재의 현실은 ‘그때’에 알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흔히 세상을 인식하고 변형시킬 수 있는 인간의 정체성을 ‘주체(subject)’라고 부르지만, 사실 우리는 이미 태어날 때부터 언어와 기호, 이미지로 이루어진 상징체계 아래로(sub) 던져진(jet) 존재, 즉 상징체계의 지배를 받는 (미셀 푸코 식으로 표현하면 사목권력 에서 목자와 양의 관계와 같이, 군주의 지배를 받는) ‘신민(subject)’인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상징체계가 우리에게 전달하는 메시지는 ‘서사(롤랑 바르트는 이를 ‘신화’라고 불렀지만)’의 형태를 띤다. 따라서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모든 영역에서 생산되는 신화들은 우리에게 말을 걸고, 우리는 그 신화에 반응한다. 그리고 우리들의 가치는 그 신화들을 통해 재생산된다. 그렇다면 이러한 상징계를 벗어난 실재는 인식, 아니 표현 가능할까? 푸코적 ‘신민(subject)’을 벗어나 진정한 참된 ‘주체(subject)’는 가능할까? 아니 실재 현실을 제대로 이해는 할까? 18세기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는 『순수이성 비판』(1781)에서 인간이 지닌 이성을 비판했다. 우리 이성은 사물의 본질을 제대로 인식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 이유는 우리 감각이 경험하는 것이 현상(phenomenon)일뿐, 물자체(Ding an sich)가 아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17세기 철학자 르네 데카르트도 자신이 경험하는 모든 상황들이 실재가 아닐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사실 데카르트는 “악령이 나의 경험을 조작하는 것은 아닐까?”라고 의심한적이 있다. 왜냐하면 데카르트에 따르면 인간이 감각하는 모든 것들은 거짓일 수 있기 때문이다. 더 과거로 가보자. 플라톤의 이데아론은 어떤가? 그는 현실은 이데아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다고 생각한다. 장자의 호접몽은 어떤가? 장자는 ‘꿈에 꾼 나비’를 통해 내가 나비인지, 나비가 나인지 구분이 안된다고 보았다. 영화 <매트릭스>(1999)는 초인공지능이 사람의 뇌에 디지털 데이터를 집어넣어서 사람들이 마치 현실을 살아가고 있는 것처럼 착각하게 만들고 사람의 신체는 기계를 돌리기 위해 피를 제공하는 밧데리에 지나지 않는다는 놀라운 상상력을 보여주고 있다. 그렇다면 내가 듣는 언어, 내가 보는 기호, 내가 경험하는 이미지는 진짜인가? 아니 무엇이 진짜인가? 아니 진짜는 진짜일까? 2. 코딩 창세기 코딩(coding)이란 컴퓨터가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프로그램을 만드는 것이다. 사람이 컴퓨터에 내릴 명령을 말이 아니라 글자, 즉 코드(code)로 표현하는 행위이다. 컴퓨터는 1과 0으로 사고하기 때문에 ‘사람의 언어’와 ‘컴퓨터의 언어’를 이어줄 언어가 필요한데, 이 중간 언어가 ‘프로그래밍 언어’이다. 따라서 코딩은 프로그래밍 언어를 만드는 것이다. 이를 위해 코딩의 핵심인 알고리즘(algorithm)이 필요한데, 알고리즘이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순서 또는 절차를 말한다. 그 알고리즘을 컴퓨터 언어로 표현하는 것이 코딩인 것이다. 인간의 단순 노동(계산)을 대신하는 컴퓨터, 그 컴퓨터에게 일을 주문하는 것이 바로 코딩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컴퓨터 프로그래머가 하루 종일 하는 일은 키보드를 두드리며 무언가를 열심히 쓰는 것이다. 코딩을 하는 것이다. 사실 코딩은 전 세계 아이들의 필수 교육과목이 되었다. 핀란드는 현재 4살부터 8살 아이들에게 무료 코딩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코딩전문학교도 생겼다. 영국에서는 2003년부터 코딩을 고등학교 이과 필수과목으로 지정하고 있고, 2014년부터는 5살부터 16살까지 모든 아이들이 배워야할 필수과목으로 지정했다. 미국, 중국, 일본도 중고등학교 필수과목으로 코딩을 배우고 있다. 우리나라도 초등학교에서는 2019년부터 실과교과로 연간 17시간을 지정했고, 중학교에서는 2018년부터 연간 34시간이상 코딩을 배워야 한다. 아무튼 미래사회인 디지털 시대는 컴퓨터가 주축이 될 것이다. 따라서 컴퓨터 언어인 코딩을 알지 못하면 미래 세상에서 소통을 할 수 없다. 서양의 고전어인 헬라어-라틴어가 옛날의 보편 언어였다면(그리고 영어가 오늘날 보편 언어인 것처럼) 미래의 보편어는 코딩이 될 것이다. 스마트폰은 물론 마트 계산대, 은행 현금자동인출기(atm), 인터넷쇼핑도 컴퓨터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컴퓨터 사고력과 프로그래밍은 미래를 살아가기 위한 사고력과 아이디어를 구현하기 위한 필수 수단이 될 것이다. 스티브 잡스는 이렇게 말했다. “모든 사람이 코딩을 배워야 한다. 코딩은 생각하는 방법을 가르쳐주기 때문이다.” 코딩이 논리력과 사고력을 길러주는 교양 과목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도 “비디오 게임을 사지만 말고 직접 만드세요. 휴대폰을 갖고 놀지만 말고 프로그램을 만드세요.”라고 말한다. 따라서 최근 강남 쪽 유치원 아이들이 라틴어와 코딩을 배우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가 읽는 책 1페이지는 보통 25줄 정도가 들어간다. 하루 종일 집중해서 글을 쓸 때 30페이지를 쓴다고 가정하면 한 사람이 대략 750줄을 쓸 수 있다.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 게임은 550만 줄의 글에 해당하는 글자가 살아 움직여 모니터 속 ‘세상’을 창조한 것이다. 안드로이드 운영체계는 ‘1,200만 줄’, 윈도7은 ‘4,000만 줄’, 페이스북은 ‘6,200만 줄’, 놀라지 말라. 구글은 무려 ‘20억 줄’ 이상의 글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코딩은 자신의 아이디어를 자기 스스로 구체화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다. 프로그래머들은 방금 떠오른 아이디어를 바로 코딩할 수 있고 바로 제품으로 만들 수 있다. 프로그램은 미리(pro) 작성해둔 것(gram)으로, 컴퓨터가 읽도록 미리 작성해둔 글이 프로그램이다. 지금 디지털 시대 최초에 인간은 코딩을 통해 새로운 천지를 창조하고 있다. 코딩 창세기가 개막된 것이다. 그렇다면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언어와 기호, 이미지로 살아가는 현실이 코딩언어와 기호, 스크린의 이미지로 재생될 때 그것은 환상 공간인가? 실재 공간인가? 혹은 진짜인가? 가짜인가? 3. 디지털의 영혼, 소스코드 소스코드(source code)는 원시코드라고도 한다. 컴퓨터의 소프트웨어를 개발할 때 그 안에 들어가는 모든 동작의 코드를 총체적으로 일컫는 말이다. 가령, 모든 제품에 설명서가 있듯, 디지털기기에 담긴 모든 내용을 컴퓨터 언어로 설명되어 있는 것이 바로 소스코드이다. 소스코드는 소프트웨어의 구조와 원리에 대한 모든 정보를 포함하고 있어 공개될 경우 기업의 개발 기밀이 드러날 수 있기 때문에 많은 기업들은 이 소스코드를 보호하려고 한다(하지만 최근에는 오픈소스라 불리는 개방형 소프트웨어도 있다). 디지털 시대의 영혼은 바로 소스코드라고 할 수 있다. 지금 세상은 원자와 분자의 세계로 이루어져 있다. 원자와 분자를 알면 모든 물질이 무엇으로 만들어져 있는지를 알게 된다. 마찬가지로 디지털을 알면 사람들이 만들어낸 비트 세계가 무엇으로 이루어졌는지를 알게 된다. 그리고 원자의 세계와 비트의 세계는 서로 동떨어진 세계가 아니다. 비트 세계는 원자 세계의 도움 없이 홀로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고 또한 인간이 작성한 코드도 결국 물리적 형태를 띨 수밖에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아무튼 코드는 허공에 둥둥 떠 있는 것이 아니라 전기나 자기, 아니면 전파와 같은 형태로 존재한다. 비트의 세계는 이런 식으로 원자의 세계와 관계를 맺는다. 그리고 코드는 전자회로 혹 전자들의 흐름을 제어하고, 나아가 원자들을 움직여 결국 프로그래머가 원했던 결과를 물리 세계에 만들어 낸다.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는 크게 보면 ‘무생물’과 ‘생물’이 존재한다. 물, 바위, 지구, 별, 공기 같은 것들이 무생물이고, 박테리아, 꽃, 강아지, 사람과 같은 것들이 생물이다. 둘 다 원자로 이루어져 있지만, 생물과 무생물의 차이는 생명 현상, 곧 ‘생장, 생식, 진화, 자극 반응성’ 등 4가지를 갖고 있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달려 있다. 생물의 생명현상을 인문학적으로 표현한다면 ‘다양성, 통일성, 연속성’으로 나눌 수 있다. 여기서 생물도 지능이 있는 생물과 지능이 없는 생물로 나눠진다. 나무나 풀과 같은 식물에는 지능이 없지만, 바퀴벌레, 강아지, 원숭이, 사람 같은 동물에게는 지능이 있다. 그리고 사람에게는 ‘영혼’이 있다. 디지털식으로 말하자면 소스코드의 유무로 생물과 무생물의 차이가 있는 것이다. 즉, 무생물과 생물은 원자와 분자가 일정한 형태로 뭉쳐져 있지만 그 안에 소스코드가 없는 것은 무생물, 소스코드가 있는 것을 생물이라고 할 수 있다. 소스코드는 카피 앤 페이스트(복사하기 및 붙여넣기)가 가능하다. 다양성과 통일성, 연속성을 통해 생장하며 진화하는 것이다. 따라서 돌멩이는 복사해서 2개로 만들 수 없지만, 나무는 번식을 통해 2그루로 만들 수 있다.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그렇다면 지능은 무엇을 할까? 창조한다. 만들어 내는 것이다. 그리고 지능이 만들어내는 것은 크게 3가지로 볼 수 있다. 하드웨어, 반하드웨어, 소프트웨어이다. 하드웨어는 책상, 의자, 망치와 같은 것이다. 100년 전까지만 해도 인류가 만들어 낸 것들은 모두 하드웨어였다. 이것들은 내부에 소스코드가 없기 때문에 복사가 불가능하다. 반(反)하드웨어는 컴퓨터, 스마트폰, 전자회로와 같은 것들이다. 내부에 소스코드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외부를 보면 하드웨어와 같이 생겼다. 이러한 기기들은 모두 소스코드가 없는 하드웨어와 소스코드가 있는 소프트웨어가 결합된 제품들인데, 하드웨어에 내장된 소프트웨어를 쉽게 지우거나 변경할 수 없기 때문에 하드웨어와 한 몸으로 취급된다(이것을 펌웨어, 말 그대로 딱딱한 소프트웨어라고 한다). 마지막으로 순수한 소프트웨어는 프로그램, 애플리케이션(앱, 응용 소프트웨어)과 같은 이름으로 불린다. 사람이 소스코드를 작성해서(프로그래밍 언어를 사용해서) 만든 것이다. 자, 다시 인간의 지능으로 돌아가 보자. 지금 인간은 자신의 지능으로 반하드웨어인 인공지능과 소프트웨어인 가상현실을 만들어냈다. 물론 가상현실은 당연히 코딩으로 만들어졌다. 가상현실이 제공하는 데이터양을 물리적 현실이 제공하는 데이터양만큼 늘린다면 어떻게 될까? 그때부터 사람들은 가상현실과 실재 현실을 분간할 수 없을 것이다. 언어와 기호, 이미지로 구성되는 세계는 이렇게 우리에게 새로운 세상을 창조하도록 만든다. 따라서 이제 영혼은 자신의 안식처로 디지털이라는 새로운 세계를 갖게 된 것이다. 4. 디지털 소통: 코딩으로 임하는 성령의 역사 글의 서두에 인용한 책에서 박준석은 이렇게 말한다. “비트 세계는 점점 현실 세계를 닮아갈 것입니다. 코딩을 모른다는 것은 새로 만들어지고 있는 세상에 대한 과학 지식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태초에 신은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셨지만, 디지털 세상은 이제 인간이 코딩으로 천지를 창조하는 세상이 된 것이다. 그리고 그 세상은 사이버스페이스에서 이미 구현되고 있다. 성경은 바벨탑 사건으로 흩어졌던 인간의 언어가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이 임함으로 말미암아 다시 소통 가능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제 코딩으로 임하는 성령의 역사를 과학 기술을 통해 바라보는 세상이 될 것이다. 따라서 박준석의 다음의 말은 코딩을 통한 새로운 소통을 잘 보여준다. “바벨탑 사건으로 흩어졌던 인간의 언어가 프로그래밍 언어를 중심으로 다시 모이고 있습니다. 코딩은 언어를 구사하는 지능이 발휘할 수 있는 능력의 극대치를 보여줍니다. 인간이 프로그래밍 언어를 통해 무슨 말을 하건, 그 말은 컴퓨터를 통해 세상에 유의미한 형태로 출력됩니다. 그리고 컴퓨터끼리는 서로 디지털 언어를 매개로 소통합니다. 결국 지능은 언어를 낳고 언어는 코딩을 낳고 코딩은 통신을 낳았습니다.” 코딩계시록 22장 21-22절의 말씀이다. “이것들을 증언하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코딩이여 오시옵소서. 코딩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지어다. 아멘.” 최병학 목사 (남부산용호교회 담임) * 이 글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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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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