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2-07-06(수)

문화
Home >  문화  >  문화펼치기

실시간 문화펼치기 기사

  • [문화] 남자, 아내 그리고 아버지
    “나는 언제나 성실한 사회인이자 친절한 동료, 착한 아들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문득 내 주변을 돌아보니 나는 지난 10여 년 동안 직장, 친구관계, 가족관계에서 실패를 반복하고 있었다. 그것도 매번 같은 실수를. 어찌된 일일까?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전인권,『남자의 탄생』(푸른숲, 2003) 1. 남자의 탄생 『남자의 탄생』은 5살부터 12살까지 자신의 유년기를 소재로 삼아 한국 남자의 인성 형성 과정을 심리적ㆍ정치적ㆍ사회적 맥락에서 분석하여, 이 시대 한국 남자들의 정체성을 결정지은 한국 특유의 가족문화와 한국사회의 구조적 특징들이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는 책이다. 전인권에 의하면 ‘한국식 남자는 동굴 속 황제’이다. 부모에 의해 철저하게 한국식 남자로 길러지는데, 동굴 속 황제는 모성의 공간에서 양육되고 부성적 질서에 의해 완성된 한국 특유의 가족문화가 낳은 인간이라는 것이다. 한국식 남자인 동굴 속 황제는 모든 인간관계를 진선미의 우열에 따라 상하관계로 설정하는 봉건적 인간이며 자신을 ‘진선미의 화신’이라고 여기며 자신의 우월함을 타인에게 강요하거나 타인으로부터 인정받으려고 한다. 또 그러한 신분관계에서 생겨나는 심리적 영토를 끊임없이 넓히려는 행동원칙을 갖고 있다. 전인권의 말을 들어보자. “‘동굴 속 황제’의 허영심에 대해 좀 더 깊이 생각해보면, 두 가지의 특징적 증상이 있는 듯하다. 첫째는, 그저 ‘남보다 우월하다’는 데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진선미(眞善美)의 화신’이라고 생각하며, 이 사실을 끊임없이 타인에게 주지시키려 한다는 것이다. 둘째는, 자신의 심리적 영토가 있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끊임없이 넓히려 한다는 것이다.” 더구나 권위주의와 자기애의 동굴에 갇힌 황제의 성에 대한 인식도 신분관계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한다. 이성과 성을 물건처럼 다루는 성적 체험에서 ‘여성은 성녀 아니면 창녀’라는 이분법적 구도가 자리 잡혔던 것이다. 따라서 여성에 대한 관심의 범위도 단순했고 평화로운 사랑을 하기에는 너무 거칠었다. 전인권의 다음의 진솔한 고백은 비단 그만의 열등감이 아니라, 대한민국 모든 남자들의 모습이다. “(동굴 속 황제는) 일단 손을 대었다 하면 자신의 소유물처럼 생각한다. 그리하여 그에게는 고향도 내 것이고, 대한민국도 내 것이며, 출신 학교도 내 것이며, 가족도 내 것이고, 직장도 내 것이 된다. (…) 심지어 경제학자나 회사원인 내 친구가 플라톤 이야기를 하면, 굳이 틀린 이야기도 아닌데, 괜히 속이 뒤틀리고 이상한 느낌이 들곤 했다. 플라톤이나 막스 베버는 정치학을 전공한 나의 소유물인데, 엉뚱한 직업을 가진 의사나 경제학자가 뭐라고 하면, 다른 집 사람이 내 아파트 열쇠를 들고 있는 것처럼 이상했다는 말이다. 사정이 이 모양이나 나의 학문이 제대로 발전할 수가 없었다.” 따라서 스스로를 ‘동굴 속 황제’라고 부르는 전인권은 이제 자신이 누구인지 제대로 알고 자신이 갇혀 지내온 동굴에서 벗어날 때가 되었다고 말한다. 그것은 바로 동굴 속 황제의 습성을 버릴 때 가능하며, 그때 비로소 자신과 주변부터 행복해질 수 있다. 나아가 한국사회의 발전을 가로막는 권위주의, 아버지를 ‘신분의 감옥’에 가두고 어머니에게 세 얼굴(여자와 현모양처, 어머니)을 만들어준 그 권위주의의 그물도 걷어버릴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2. 아내란 무엇인가? 메릴린 옐롬은 ‘아내’라는 키워드를 가지고, 서양 역사 속에서 아내의 지위 변화를 살펴보며 아내의 개념, 지위, 역할이 언제 형성되어 어떻게 변해왔으며, 역사 속에서 아내들은 자신의 위치를 어떻게 보았고, 이를 바꾸려고 어떻게 싸워왔는지, 그 순종과 반항의 역사를 우리들에게 들려주며『아내』(시공사, 2007)에서 “부부 간에 지위, 역할, 성별 등 어떤 차이도 없는 결합이라면 아내라는 용어가 의미를 가질 것인가?”를 묻는다. 먼저, 아내라는 이름은 일반적으로 남과 여의 결합에서 파생된 것이다. 아내라 불리는 여성의 역사는 결혼과 이혼, 여성성, 모성, 임신, 성과 사랑에 관한 역사와 다를 바 없으며 더불어 아내의 역사는 남편의 역사이기도 하다. 사실 아내의 시작은 성서 속 하와이며, 이때 아내는 ‘아담의 갈비’, 곧 남자의 갈비뼈로 태어난다. 그러나 고대 그리스와 로마 시대에 아내는 남편이 사용하는 ‘가재도구, 혹은 재산’이었다. 나아가 중세 기독교 사회에서 아내는 ‘출산의 그릇’이었다. 이 시기 여성들 중 아내의 지위는 처녀, 과부, 그 다음이 아내였다. 왜냐하면 이 시기 섹스는 타락이었으므로 여성들 내부의 서열은 금욕을 기준으로 매겨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근대에 와서 아내는 ‘일하는 기계’가 되었다. 그러나 현대에 들어서면서 이러한 전통적인 아내상 혹은 아내 관념이 급격하게 변한다. 옐롬은 이렇게 말한다. “역사 이래 1950년대에 이르기까지 아내를 먹여 살리는 것은 남편의 의무였다. 아내는 그 대가로 섹스, 아이, 가사노동을 제공했다.” 그러나 맞벌이 아내들이 대거 등장함으로 이 관념은 급속도로 약화되었다. 그렇다면 여기서 생기는 질문 두 가지! 첫째 질문, ‘아내’와 ‘어머니’의 관계는 무엇인가? 옐롬은 이렇게 말한다. “아내와 어머니 사이의 경계는 분명치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 속에서 아내인 동시에 어머니이지 않았던 여자들은 자식을 낳지 못한다는 이유로 철저히 박해를 받고 죄인 취급 받았다(구약성서의 유다의 며느리 다말을 보라). 반대로 아내가 아니면서 어머니인 여자들은 독신모라는 낙인을 피하려고 갓난아이 살해를 자행하였다. 그러다 들켜 마녀로 오해받고 처형당했다. 아내는 ‘아내로서 어머니’가 되어야만 인정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둘째 질문, ‘그렇다면 아내는 여성인가?’ 오늘날 캐나다, 덴마크, 스웨덴, 스위스, 벨기에, 프랑스 등 세계 여러 나라에서 동성 간의 결혼이 합법화 되는 이때에 동성 결혼에서 아내는 누구인가? 현대에 들어 아내라는 이름이 멸종 위기에 직면한 것은 아닌가? 다시 돌고 돌아 아담과 하와 시대로 돌아가야 하는가?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창2:21-23) 코뼈도 다리뼈도 아닌 왜 하필 ‘갈비뼈’일까? 갈비뼈가 감싸고 있는 가슴은 사랑으로 콩닥거리는 감성의 진원지이며, 갈비뼈가 위치한 옆구리란 남녀의 동등한 지위를 암시하는 인체의 중심이 된다. 성서학자인 매튜 헨리는 이렇게 말한다. “여자는 남자를 지배할 머리 꼭대기도, 남자에게 짓밟힐 발도 아닌, 동등하게 옆구리로부터 만들어졌으니, 이는 남자의 팔로 보호받고 그 가슴으로 사랑받을 수 있게 함이다.” 이탈리아의 성서학자 움베르토 카수토도 “좋은 아내란 그의 옆에서 조력자로 서며 영적으로 남편과 단단히 매어지는 것”이라고 말했다. 3. 아버지란 무엇인가? 동굴 속 황제인 남자가 영적으로 맺어진 아내와 하나가 되어 이제 아버지가 된다. 그러나『아버지란 무엇인가』(르네상스, 2009)에서 융이 설립한 국제분석심리학회 회장을 지낸 분석심리학자 루이지 조야는 “서구 사회, 나아가 오늘날의 인류 전체가 아버지 상을 잃어버림으로써 거대한 공황 상태에 처했다.”고 분석한다. 조야는 역사적, 심리학적, 문화적 관점에서 아버지의 발생사적 연원을 추적하지만, 핵심은 ‘심리학적 관점’이다. ‘원형’, ‘집단무의식’ 같은 융의 심리학 개념을 근거로 서구 사회 집단무의식 안에서 발견되는 아버지 상의 원형을 찾아 서구 문화의 시원으로 들어간 뒤 거기서부터 역사를 밟아 내려온다. 1단계, ‘선사시대’에 아버지가 탄생했다. 여기서 조야는 아버지 곧, ‘부성’과 ‘남자’를 구분한다. 남자가 생물학적 속성이라면, 부성은 사회적·문화적 구성물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남자라고 해서 다 아버지가 되는 것은 아니다. 남자는 파괴적이고 공격적인 충동과 욕구에 직접적으로 지배받는다. 그러나 아버지는 충동과 욕구를 제어하고 인내, 의지, 지성으로써 삶을 계획하고 끌어가는 존재이다. 따라서 책임감이야말로 부성의 핵심 특징이 된다. 조야는 이렇게 말한다. “원시 인류가 진화의 어느 단계에 이르러 이런 특성을 지닌 아버지를 탄생시켰고, 그 탄생은 문명의 출발과 다르지 않았다.” 2단계, ‘고대’에서는 ‘문화적 형성물인 아버지’는 그 내부에서 ‘원시적 남성성’과 다툼을 벌일 수밖에 없다. 이러한 다툼을 신화적 장대함으로 보여주는 것이 바로 고대 그리스 서사시인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이다. 그리스의 트로이 정복을 그린 『일리아스』의 경우, 부성과 남성의 대결은 트로이의 왕자 헥토르와 그리스의 영웅 아킬레우스의 싸움으로 나타난다. 헥토르는 가족을 걱정하고 자식을 염려하는 전형적인 아버지의 모습이다. 반대로 아킬레우스는 남성적 힘의 분출 욕구만을 따르는 거친 전사이다.『일리아스』에서 헥토르는 아킬레우스에게 패배하는데, 남성이 부성을 이겼다는 사실은, 부성 내부의 남성이 지닌 힘의 파괴성을 잘 보여준다. ▲ 남성성의 상징인 영화 <트로이>의 아킬레우스 ▲ 아버지의 상징인 영화 <트로이>의 헥토르 트로이 함락 후 오디세우스의 귀향을 그린 『오디세이아』역시 부성과 남성 사이의 대결 드라마이다. 여기서는 ‘고향에 돌아가려는 오디세우스’와 ‘한없이 충동에 이끌리는 오디세우스’의 대비로 부성과 남성의 대결을 잘 살펴 볼 수 있다. 이러한 싸움은 거인-괴물 퀴클롭스와 오디세우스의 싸움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오디세우스의 부하들을 산 채로 잡아먹는 퀴클롭스가 원시적 남성성을 상징한다면, 지략을 발휘해 퀴클롭스를 제압하고 탈출하는 오디세우스는 부성적 존재를 가리킨다. 그리고 오디세우스는 기나긴 유혹과 충동의 항해를 끝내고 마침내 고향으로 돌아온다. 이것은 아버지의 귀환이며 남성에 대한 부성의 승리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조야의 분석은 좀 더 나아간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그리스 문화의 이런 아버지 승리는 동시에 어머니의 패배를 뜻하는 것”이다. 부성은 남성을 제압함으로써 여성도 함께 종속시켜 가부장제를 확립했던 것이다. 가부장제의 승리를 보여주는 것이 아이스퀼로스의 비극 『자비로운 여신들』이다. 미케네의 왕 아가멤논이 트로이 원정을 떠난 틈을 타, 아이기스토스와 정을 나누고 아버지를 배신한 어머니 클뤼타임네스트라를 죽인 아들 오레스테스가 존속살해 혐의로 재판을 받는데(물론 이때 공범은 누나이자, ‘엘렉트라 콤플렉스로 유명한 엘렉트라이다), 판관은 아버지의 원수를 갚은 오레스테스의 손을 들어준다. 판관은 이렇게 말했다. “어머니는 자식의 생산자가 아니라, 아버지 씨의 양육자일 뿐.” 이 판결은 서구 문명사에서 어머니의 패배를 상징하는 사건이 되었다. 이후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신화적 판결을 과학과 철학의 이름으로 합리화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여성을 남성에게 종속된 존재이나 노예보다는 우월한 존재라고 보았던 것이다.『정치학』제12장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렇게 말한다. “노예에게는 생각하는 요소가 결여되어 있다. 여성은 그 요소는 갖고 있으나 권능이 결여되어 있다. 아이는 생각하는 요소를 갖고 있으나 불완전하다.” 그리고 그리스를 이어받은 로마는 법률로 가부장제를 확정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부성이 모성을 처단한 역사의 시작이었던 것이다. 3단계, ‘중세’에는 이렇게 확립된 아버지의 권위가 기독교라는 저항에 부딪혔다. 기독교는 천상의 신만을 아버지로 섬기고 지상의 아버지를 부정함으로써 부성적 권위를 뿌리부터 흔들었다. 지상의 아버지를 부정하고 남은 것은 ‘형제 관념’과 ‘평등 관념’이었다. 4단계, ‘근대’에는 18세기 계몽사상과 프랑스혁명을 통해 아버지는 숙청당했으며, 산업혁명은 아버지들을 공장으로 밀어 넣어 무력한 존재로 만들었다. 우울증 걸린 아버지들은 술에 찌든 불량한 아버지가 되어 남은 권위마저 잃어버렸다. 5단계, 아버지의 상실은 그 자리를 대신할 다른 것을 찾게 되는데, 이때 등장한 파시즘이 무력한 아버지들을 규합하고 국가주의를 외치며 텅 빈 아버지의 자리를 대신했다. 조야는 이렇게 말한다. “파시즘이 겉보기에는 가부장적 권위의 발현 같지만, 실은 부성 상실의 반작용이었다.” 게다가 포스트모던의 부친살해는 현대의 질환을 더욱 그 극단으로 몰아가고 있다. 파시즘이 부성 상실을 폭력적으로 해결하려 했다면, 포스트모던은 해결이 아니라, 무덤까지 이장하여 삭제시켜 버린 것이다. 그리하여 오늘날 문명의 위기는 ‘모성의 부활’인가, 아니면 ‘부성의 새로운 자리 비워주기인가’가 되었다. 따라서 조야의 다음의 말은 현대 문명의 질환을 치유하기 위해 ‘아버지를 되찾아야 할 것인가?’, 아니면 ‘어머니를 되찾아야 할 것인가?’를 고민하게 한다. “부성 상실 문제는 오늘날 더욱 깊은 문화적 질병으로 산재해 있으며, 그 질병을 극복하려면 잃어버린 아버지를 되찾아야 한다. … 집단무의식 속의 아버지 향수는 사라지지 않는다.” 최병학 목사 (남부산용호교회 담임) * 이 글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문화
    • 문화펼치기
    2018-04-09
  • [문화] 최병학 목사의 문화펼치기 36 : 양
    종말론과 어린양 신학, “미투” 1. 종말론2001년 9월 11일 ‘911 테러’ 사건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은 테러와 악의 존재에 대한 답과 그 의미를 성서에서 찾으려고 노력했다. 당시 미국 대통령 부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과 힘을 빗대면서, 공식적으로 ‘악의 축’과 싸우는 미국인들의 힘을 성서에서 찾았다. 하지만 테러와 악에 대하여 성서는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 오늘 이 세계를 위하여 일하시는 하나님의 행위에 대해서 성서는 어떻게 이야기하고 있는가? 이러한 질문들에 대한 많은 해답들을 기독교 성서의 마지막 책인 요한계시록에서 볼 수 있으며 오늘날 널리 퍼지고 있는 종말론(Eschatology)에서도 볼 수 가 있다.폭력과 전쟁으로 몸살을 앓고 있는 이 지구촌에 요한계시록이나 다니엘서와 같은 묵시록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세대주의(Dispensationalism) 종말론과 같은 잘못된 종말론이 판을 치고 있는 이 때에 기독교 근본주의에 기초한 기독교 종말론 소설들, 영화, 그리고 어린이를 위한 게임 등의 ‘휴거산업’은 우리의 영성에 어떠한 해악을 끼치고 있는가? 더 나아가 잘못된 종말론의 영향으로 인한 미국의 중동정책은 국제 정치에서 어떠한 의미를 던져주고 있는가? 실제로 미국의 종교사회 학자들은 미국 기독교인의 45%가 휴거나 아마겟돈 전쟁과 같은 부류의 종말론을 믿고 있다고 하는데, 이들은 중동에 대한 미국의 정책을 강력히 지지하는 사람들이다. 가령 예루살렘을 이스라엘의 수도로 규정해 버린 트럼프의 정치적 행동을 무조건 찬성하는 것이다.사실 종말론에 관한 입장은 인류의 역사에서 마지막으로 일어날 사건이나 우주의 마지막에 대한 신학적 이론이다. 그 근거는 마태복음 24장 예수께서 언급한 내용에 잘 나타나 있다. 이것을 조직신학의 한 부분에서 ‘개인의 죽음’과 ‘인류의 최후의 심판’에 대한 내용으로 다루게 되었는데, 부활 승천한 예수 그리스도가 마지막 때에 다시 재림하는 것이 기독교 종말론의 핵심이다. 슈바이처 (A. Schweitzer)의 연속적 종말론(Konsequente Eschatologie), 도드(C. H. Dodd)의 실현된 종말론(Realized Eschatology), 불트만(R.Bultmann)의 실존적 윤리적 종말론, 몰트만(J.Moltmann)의 혁명적 종말론, 오스카 쿨만(O.Cullmann)의 구속사적 종말론 등을 들 수 있다.이러한 현대신학자들의 종말론의 특징을 세 가지로 정리해 보면, 첫째 ‘유대교의 묵시문학적 종말론’으로 하나님 나라의 미래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슈바이처와 바이스가 예수의 종말론을 연구한 결과 얻은 결론으로 미래 대망적 종말론이다. 이러한 종말론은 미국의 천년왕국 운동자들에 의해서 재강조 되었다. 둘째로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을 강조하는 견해로, 도드의 실현된 종말론에서 시작되어 여러 가지 실존주의적, 윤리적 종말론과, 최근에 이르러 정치신학과 결부되어 혁명적 행동의 이념으로 이해된 종말론이다. 마지막으로 종말론을 구속사적으로 보면서 ‘약속과 성취’라는 구조 안에서 그 나라의 양면성(‘이미’와 ‘아직 아니’)을 강조하는 경향이다. 이렇게 여러 가지 측면과 차원에서 해석하고 이해하려고 했으나, 아직도 종말론(하나님 나라)은 풀기 어려운 신비로 남아 있다. 2. 거짓된 휴거와 기획된 미래종말에 관한 소설들을 살펴보면 성서의 문자를 폭력적으로 해석하며 세상의 종말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이러한 경향은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의 설교자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이들은 사람들에게 유엔의 평화 정책이 실패하였고, 지진과 같은 자연 재앙과 테러 등을 하나님의 계획이라고 가르친다. 더구나 이들 중 몇몇은 신의 각본에 의한 우주적 종말인 피비린내 나는 ‘아마겟돈 전쟁(Armageddon)’ 속으로 이 세상은 초읽기에 들어갔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성서의 종말에 대한 내용을 다루는 다니엘서와 요한계시록은 그들의 구미를 당기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문제는 이러 한 소설이 성서의 이야기를 왜곡하며 꾸며낸다는데 있다.아마겟돈은 세대주의 종말론이 갈망하는 사건 중 하나이다. 사실 아마겟돈이라는 말은 요한계시록 전체에서 단 한번 등장한다(계 16:16). 그러나 세대주의 종말론은 이 단어가 요한계시록의 가장 중심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 아마겟돈이 단순히 단 한번 수행되는 전쟁이 아니라 적어도 네 번의 전쟁으로 팔레스타인 곳곳에서 수행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첫 번째 전쟁은 페트라(Petra) 또는 에돔(Edom) 지역(현재 요르단 지역)에서 일어나는데, 이곳은 ‘주님의 옷이 적들의 피로 얼룩지는 곳’이며 상상할 수 없는 두렵고 충격적인 군사적인 참상이 있을 것이라고 한다. 세대주의 종말론자들은 자신들이 아마겟돈 전쟁을 갈망하는 이유가 예수의 재림에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예수는 폭력과 전쟁을 일삼으면서 재림하지 않으신다. 그럼 무엇 때문에 이토록 세대주의 종말론자들은 재림에 열광하는가? 어떤 이유로 그들은 피와 죽음을 강조하는가? 그 대답은 간단하다. ‘성자들은 땅에서 하늘로 휴거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즉 세대주의 종말론자들은 자신들이 하늘로 휴거 된 이후, 저 높은 하늘에서 이 땅에 남겨진 사람들이 당하는 고통과 세상의 종말을 구경하겠다는 것이다. 이것은 “이웃을 사랑하라”,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의 말씀과 위배되는 행위이다. 이웃이 고통 받을 때, 자신들은 폭력의 고통에서 탈출하여 휴거 된다는 아주 이기적인 신학이다. 마치 영화관 앞자리에서 총격전을 관람하듯 휴거된 이들은 하늘이라는 2층 특별석에서 지구에 남아 있는 자들의 종말을 구경하겠다는 것이다.사실 요한계시록은 근본주의자들이 익히 알듯이 선한 서구(미국과 이스라엘)가 악한 중동(구체적으로 아랍 이슬람)을 쳐부수는 아마겟돈 전쟁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으로 우리가 사는 이 세상 한복판에서 평화를 외치는 것이다. 요한계시록은 우리로 하여금 양을 치는 목자와 같은 하나님의 마음으로(God’s Shepherding Lamb) 우리의 삶을 성찰하도록 이끌며 폭력과 힘의 구조를 성찰하도록 가르친다. 동시에 억압의 구조에 도전하고 새로운 희망을 꿈꾸도록 가르친다. 더 나아가 요한계시록은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하나님께서 거주하시는 땅임을 이야기 한다. 이렇듯 요한계시록의 오독(거짓된 휴거와 기획된 미래)은 파괴주의 종말론을 형성하고 종말론적 광신을 불러일으킨다. 3. 어린양의 신학예수는 요한계시록에서 가장 중요한 등장인물이다. 요한계시록은 ‘예수 그리스도의 묵시(1:1)’ 라는 제목으로 시작한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의 가장 원초적인 목적은 ‘예수의 이야기’를 말하는 것이지, 중동이나 유럽의 마지막 시대를 예언하는 것이 아니다. 그럼 예수는 누구인가? 이 책에서 예수의 이미지는 처음에는 검을 가진 위엄 당당한 모습으로 그려지지만, 나중에는 어린양의 모습으로 대체된다. 그리고 어린양은 요한계시록의 모든 부분을 지배하는 요소로, 144,000명의 거룩한 시온 산 전사를 소집하고(14:1), 악한 적과 싸우며(17:14), 전쟁이 끝난 후에 결혼을 하며 세상을 다스릴 것이다(19:7, 22:3). 실제로 요한이 사용한 헬라어 ‘양’은 단순히 어린양이 아니라, 정말 작다는 것을 뜻하는 단어로 ‘어린 양’, ‘작은 양’(아르니온)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이 단어는 신약성서에서 오직 예수가 자신의 제자들을 파송 할 때만 사용한 것이다. 가령, “어린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눅10:3).” 그 어떤 묵시문학도 신적인 존재에 대해 어린양이라고 표현하지 않는다. 유대교의 관점에서는 결코 어린양이 메시야가 될 수 없다. 예수에 대한 이러한 이미지는 가장 연약한 모습의 예수이미지를 보여주는 것이면서 역설적으로 가장 강력한 표현이 된다. “예수는 십자가에 죽었지만 다시 살아 나셨다!”따라서 요한계시록의 어린양 이미지는 로마제국의 폭력을 무효화시키는 하나의 대안으로 1세기 초대 기독교인들에게는 상당히 충격적인 것이었다. 왜냐하면 요한계시록은 로마의 군사적 승전 이데올로기(팍스 로마나)가 온 세상을 지배하고 있었던 시기에 쓰여 졌기 때문이다. 요한계시록은 용감하게도 로마가 아니라, 하나님과 어린양이 이 세상을 다스린다고 선포한다. 세상은 그 어떤 제국이나 강대국이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종이나 노예들이 다스린다는 것이다. 요한이 있었던 에베소는 노예무역의 중심적인 도시로서 초대기독교인들은 이 도시에서 노예였던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당시 로마제국 전체 인구의 약 30% 이상이 노예였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요한은 노예들도 세상을 지배할 수 있다는 아주 획기적인 선언을 한 것이다. 가장 힘없는 노예들에게 요한의 이러한 약속은 그들의 삶에 얼마나 큰 힘과 용기를 주었을까! 어린양은 식민지 노예들에게 제국주의 고통에서 구출하며 폭력, 욕심, 두려움, 그리고 불의에 중독된 그들을 자유롭게 하신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날마다 경험하는 출애굽인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요한계시록의 메시지는 오늘날 가장 힘없고 나약한 사람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제공해주고 있다. 결국 요한계시록은 진정한 힘이 과연 무엇인지 보여준다. 곧. 우주의 가장 중심에 서 계시는 예수의 힘은 하나님의 희생양이라는 것이다. 구약성서 이사야 53장의 내용(유대교가 인정하지 않는)을 기억에 떠올리면, 예수는 도살장으로 끌려가면서 침묵하는 어린양과 같은 이미지와 유사하지만, 요한계시록의 어린양은 결국 승리로서 장식한다. 그 승리는 군사와 전쟁을 통한 승리가 아니라, 자신을 죽이고 희생함으로써 승리를 장식하는 아이러니를 보여준다. 요한계시록의 시작부터 끝까지 바로 이러한 ‘십자가의 신학’을 보여준다. 하나님의 능력과 힘은 약함에서 드러난다는 놀라운 아이러니의 신학인 것이다. 이러한 신학은 바울의 서신에서도 잘 드러나 있다. 어린양 신학은 요한계시록의 전체 메시지를 대변한다. 악은 폭력과 군사적인 힘에 의해서 제거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어린양의 사랑의 희생으로 정복된다는 놀라운 신학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 신학은 희생자가 승리자가 되는 또 하나의 아이러니를 보여준다.어린양 신학은 진정한 승자(Nike), 곧 최후의 나이키가 누구인지를 잘 보여준다. 어린양 예수를 믿고 따르는 이들 역시 ‘승리자들’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요한계시록이 가지고 있는 신학의 핵심이다. 사실 요한계시록의 많은 부분들은 폭력적인 장면으로 보일 것이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의 이러한 폭력의 이면에 있는 신학적 의미들을 파악해야 한다. 요한계시록은 승리자와 정복의 개념을 새롭게 정의한다. 바로 어린양처럼 하나님의 사람들은 싸움이나 전쟁을 통해 얻어지는 승리가 아니라, 희생과 사랑으로서 얻어지는 승리인 것이다. 이러한 폭력에 대한 대안적인 면을 가진 ‘어린양 신학’은 세대주의 종말론이나 파괴주의 종말론에서는 도저히 찾아 볼 수 없는 귀중한 메시지이다. 4. 어린양, 미투이러한 어린양의 비전은 놀라운 이미지이자 동시에 적개심을 없애는 위대한 비전이다. 왜냐하면 로마제국의 승리 이데올로기에 비하면 요한계시록의 어린양 이미지는 너무나 나약하고 보잘것 없기 때문이다. 군사적 힘을 의지하는 관점에서 보면 어린양의 이미지는 비폭력을 상징하고 있다. 로마제국의 잔인한 살육에 대하여 요한계시록은 자기 자신을 살육의 희생 제물로 바치는 어린양의 이야기를 통해서 새로운 세상의 모습을 그려주는 것이다. 최근 벌어지고 있는 미투 운동 역시 남성가부장적 문화 속에서 잔인한 폭력의 희생양으로 고통받던 여성들이 어린양과 같은 비폭력적 고백운동을 통해 새 역사를 만들어 가고 있다.따라서 요한계시록은 우리에게 어린양과 같은 힘을 가지라고 요청한다. 우리로 하여금 어린양과 같은 삶을 실천하며 살아가기를 가르친다. 즉 우리가 어디를 가든지, 어느 곳에 있든지 어린양과 같은 삶을 살아갈 것을 촉구하는 것이다. 사실 어린양의 힘은 상처받기 쉬운 연약한 힘이지만, 동시에 세상을 변화시키는 가장 강력한 사랑의 힘이다. 어린양의 힘은 비폭력적의 힘이자, 불의에 저항하는 용기이다. 미투 운동이 그렇다. 어린양의 힘은 견고한 힘으로서 용서하는 힘이다. 미투 운동이 지향해야 할 목표이다.이 험난한 세상에 우리는 언제든지 ‘어린양의 힘’과 ‘짐승의 힘’ 둘 중 그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운명에 처해있다. 어린양의 힘을 선택한다는 것은 우리가 십자가 희생의 사랑의 정신을 받아들인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사랑은 정의(혹은 하나님의 의)와 함께 하는 사랑이다. 따라서 어린양의 힘은 희망과 저항을 향한 우리들의 노력이며 실천이다. 또한 어린양의 힘은 짐승의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한 우리의 노래이며 결속력이다.우리는 요한계시록 말씀을 통하여 비폭력적인 어린양의 힘과 증언으로 이 불의한 세상(짐승들, 즉 바벨론/로마제국)을 정복하였음을 듣는다. 그들은 신성한 하나님의 법정에서 재판을 받았다. 이제 하나님은 우리를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초대하여 생명의 강과 나무를 상속하실 것이다. 그러나 정말로 복된 소식은 이미 우리가 이 하나님의 비전을 맛보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도 어린양이 가신 비폭력의 길과 정의의 길처럼 평화와 사랑의 길을 걸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어린양, 미투!” 왜냐하면 이러한 새 세상으로 어린양은 우리 모두 오라고 초대하고 있기 때문이다.“다시 저주가 없으며 하나님과 그 어린 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에 있으리니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 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 그의 이름도 그들의 이마에 있으리라.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 데 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그들에게 비치심이라. 그들이 세세토록 왕 노릇 하리로다(계22:3-5).” 최병학 목사 (남부산용호교회 담임) * 이 글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문화
    • 문화펼치기
    2018-03-12
  • [문화] 최병학 목사의 문화펼치기 35 : 젊은 세대
    만약 영화 <택시운전사>와 <1987>에 열광하는 40-50대가, 지금의 20-30세대가 열광하는 암호화폐, 가령 비트코인(BTC)으로 대표되는 가상화폐의 발생사적 기원에 관한 인문학적 통찰이 없다면, 또한 전 세계 젊은이들이 방탄소년단(BTS)에 신앙을 고백하는 이 현실의 의미를 깨닫지 못한다면, 바로 그들이 <1987> 속 전두환이며, 박처장(김윤석 분), 나아가 오늘날의 적폐세력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지금 젊은 세대(10-30대)의 분노는 그들 자신의 문제(가령, 게으름이나 불성실 같은)가 아니라, 우리 사회의 지속적인 구조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구조는 <택시운전사>의 광주, <1987>의 함성 이후, 지금의 50-70세대가 만든 것이다. ▲ 비트코인 1. 20-30세대: 비트코인에 열광하는 청춘 ‘88만원 세대’로 젊은 층을 지칭했던 우석훈은 최근 큰 사회적 파장을 일으켰던 비트코인 열풍을 통해 20-30세대의 욕망을 잘 포착하고 있다. “암호화폐 투자 광풍은 젊은 세대 개인의 문제라기보다는 한국 사회의 실패이다.” 사실 욕망은 원래부터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법과 제도, 정확히 말하면 권력구조의 산물이다. 따라서 각자 도생에 익숙한 생존주의 세대인 2030세대가 <택시운전사>와 <1987>을 보고 감동받으리라 생각하는 것은 아직도 청춘들의 욕망을 읽어내지 못하는 기성세대의 무지라고 할 수 있다. 20-30세대가 성공할 희망이 없어 불로소득을 노리는 암호화폐 투기에 빠져들었다고 생각하는 60-70세대, 계층이동 사다리가 사라진 탓에 젊은층이 ‘투기세대’가 되었다고 생각하는 40-50세대 때문에 지금 청춘들의 세상은 우리와 다른 세상을 만들어 가고 있다. 사실 419혁명을 20대에 겪은 세대(현재 70대)는 여의도와 강남 개발로 재산을 형성했다. 유신을 20대에 겪은 세대(60대)는 경기 과천과 서울 개포동, 목동, 상계동개발 수혜자이다. 6월 항쟁의 주역인 386세대(50대)는 강남과 신시가지 아파트 값이 3-4년만에 두세 배씩 뛰는 모습을 목격하면서 분당, 일산, 평촌 등의 신도시를 기반으로 중산층이 됐다(물론, 이들은 그 세대의 극소수이며, 대다수 사람들은 피해자일 것이다). 그러나 지금 20-30세대는 어떤가? 투기공화국의 역사 속에 이들에게 비트코인 투기를 중단하라고 할 수 있을까?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 정치의 민주화는 경제의 민주화를 완성하지 못했으며 도덕성의 이름은 처음부터 정치민주화에 없었다. 암호화폐의 미래가 어떻게 전개될지 예단하기 쉽지 않지만, 적어도 이것 하나는 분명하다. 암호화폐의 원천기술인 블록체인을 지배하는 자가 마지막 승자가 될 것이라는 것. 주식과 달리 24시간 거래되는 가상화폐의 특성상 실시간으로 등락하는 주가에 투자자들은 민감하게 반응한다. 투자자들끼리 정보를 공유하기 위해 전용 커뮤니티에서 사용하는 그들의 은어가 일상생활에서도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데, 지난해 말 최고의 유행어 중 하나인 ‘가즈아’는 토토나 주식 투자자들이 사용하던 언어였지만, 가상화폐 투자자들이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급격히 유행을 타게 된 신조어이다. 이 유행어 하나가 20-30세대를 이해하는 인문학적 통찰이 된다. 그렇다면 왜 20-30세대는 암호화폐, 비트코인에 열광하는 걸까? 그들의 말을 옮겨보자. “한탕주의, 도박 등이 만연해 있고 집값, 결혼비용, 육아비용 등의 부담을 사회가 줄여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기성세대의 부동산 신화처럼 사두면 무조건 이익을 볼 수 있다는 믿음 아래 자산이 없는 세대가 단돈 몇 만원을 투자해 수십, 수백 배까지 돈을 불릴 수 있는 ‘기회의 장’을 놓치지 않으려 한다.” “매달 넣는 적금 이자에 비해 ‘한방에 많은 돈을 얻을 수 있는 기회가 생기니 눈이 뒤집혀졌다.” “부모세대가 부동산, 주식에 열광했듯 비트코인에 열광한다.” 그러나 좀 더 깊이 분석해보면, 현재 신자유주의 경제 시스템 전반에 대한 문제제기와 더불어 정부와 중앙시스템에 관한 의구심이 그 중심에 놓여있다. 사실 화폐제도는 회계시스템이다. 인터넷 기술의 발달로 개인간(P2P)의 ‘정직한’ 회계시스템이 가능하게 되었는데 이 기술로 새화폐시스템을 만든 것이 바로 암호화폐이다. 이 암호화폐가 활동을 본격화한 것은 2008년 월가 파동이 터진 후, 다시 말하면 국가와 중앙은행 간의 부적절한 관계가 만천하에 드러난 시점이었다. 이러한 가상통화의 혁신성은 은행과 국가라는 ‘제3자’의 개입 없이 지급결제를 가능하게 만들었다. 제3자들에게 뜯기던 중개 수수료를 내지 않아도 된다(은행 VIP가 아니면 늘 출금과 계좌이체에 몇 백원이 뜯기지 않는가? 따라서 비트코인과 그 기반 기술인 블록체인은 언젠가 국가 혹은 중앙은행(제3자)의 법정화폐를 대체하게 될 것이다. 시민들 사이를 중재한다는 명목으로 착취와 간섭을 일삼았던 제3자를 축출할 것이다. 이것이 만약 정치와 산업(용역 대행업체), 선거와 민주주의(가령, 대의가 아닌 직접민주주의)에도 가능하게 된다면 세상은 어떻게 바뀔까? 지금 20-30세대는 그런 세상을 꿈꾸고 있고, 비트코인의 P2P라는 정직한 회계시스템과 블록체인의 보완 기술은 그 시대를 여는 세례 요한이 될 것이다. 2. 10대들의 신앙의 대상, 방탄소년단 ▲ 방탄소년단 “우릴 공부하는 기계로 만든 건 누구일등이 아니면 낙오로 구분 짓게 만든 건 틀에 가둔 어른이란 걸 쉽게 수긍할 수밖에 단순하게 생각해도 약육강식 아래 친한 친구도 밟고 올라서게 만든 게 누구라 생각해” (BTS, 가사 중 일부) ‘연애, 결혼, 출산, 내집마련, 취업, 취미, 인간관계’ 등을 포기한 ‘7포 세대’. 지금 이 시대의 청춘들의 미래는 시간이 지날수록 그들이 포기한 희망의 단어들로 쌓여가고 있다. 왜 포기할까? 의지가 약해서? 신앙이 없어서? 그렇지 않다. 포기의 중심에는 경제적 문제가 있다. 시스템이 시키는 대로 열심히 살고 대학까지 졸업했는데 두 손에 남은 건 갚아야 할 학자금 대출과 취업걱정이다. 눈이 높아서 취업을 못한다고 기성세대는 말하지만, 매월 학자금 대출을 갚으려면 편의점 시급수준의 월급으로는 어림없다(더 기가 막히는 것은 최저 임금 인상으로 경제가 무너진다는 보수언론과 보수정치인들이다). 부모님의 재산이 넉넉하지 못하면 빚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하는 것이 지금의 청춘들이다. 따라서 황새(금수저)들은 금수저보다 좋은 길로, 뱁새(흙수저)들은 흙수저보다 못한 길로 가는데, 그건 시간문제다. 경제에 성서적 희년(Year of Jubilee)은 없고, 희망은 사라지고, 고통은 친근한 친구로 바로 옆에 자리 잡는다. “3포 세대 5포 세대 / 그럼 난 육포가 좋으니까 6포 세대 / 언론과 어른들은 의지가 없다며 우릴 싹 주식처럼 매도해 / 왜 해 보기도 전에 죽여 걔넨 enemy enemy enemy / 왜 벌써부터 고개를 숙여 받아 energy energy energy / 절대 마 포기 you know you not lonely / 너와 내 새벽은 낮보다 예뻐 / So can I get a little bit of hope yeah / 잠든 청춘을 깨워 go” ‘BTS, <쩔어>가사 중 일부) BTS는 “이런 세상에 살게 된 것은 너의 잘못이 아니야.”라고 말한다. “비난은 무시하고 죄책감을 벗어나 너의 담론을 만들어 내라.”고도 말한다. 그리고 “혼자가 아니라, BTS가 옆에 있어준다.”고 희망을 준다. “노력만으로 쉽게 극복되는 것도 아니니 네 탓도 아니”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이 불평등과 불의를 평등과 옳음으로 어떻게 바꾸어야 하는가? BTS는 황새들만을 위한 룰을 바꿔야 한다고 노래한다. “룰 바꿔 change change 황새들은 원해 원해 maintain 그렇게는 안 되지 BANG BANG 이건 정상이 아냐” (BTS, <뱁새>가사 중 일부) 그리고 이러한 룰을 바꾸는데, BTS는 ‘디지털’과 ‘부드러움’을 내세운다. 그리고 우리는 지난 겨울 촛불의 따스한 혁명이 세상을 바꾼 것을 기억한다. 따라서 우리나라 10대, 아니 세계의 청춘들은 BTS의 음악을 듣고 이렇게 말한다. “BTS가 내 인생을 바꿨어요.” “절망의 밑바닥에서 아무도 위로해주지 않을 때 BTS의 음악 하나로 버텼어요.” “차마 마주보기 힘들었던 제 모습을 똑바로 보게 되었고 이제는 사랑해야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어요.” “꿈을 포기하지 말라고, 져도 괜찮다고 말해줘서 고마웠어요.” “노래가 위로가 될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어요. 많은 사람들이 BTS를 알고 위로받았으면 좋겠어요.” “절 더 나은 사람이 되게 해주었어요. 정말 고마워요.” “꿈을 포기하지 말라는 가사는 많이 들어봤지만 마음에 와 닿은 적은 처음이었어요.” 이것은 간증이다. 복음송가가 아니라, 찬송가가 아니라, BTS의 음악을 듣고 청춘들은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얻는 것이다. 대중음악이라고 폄하한다면, 세속음악이라고 무시한다면 교회는 영영 기성세대의 무덤이 될 것이며 그 무덤에 꽃을 갖다 줄 청춘들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자세히 들어보면, 가사를 살펴보면 BTS의 음악은 한 사람의 인생을 빛나게 바꾸려는 선한 의도, 그리고 실제로 사람들에게 자신의 우주를 찾아낼 수 있게 도와주는 힘을 가진 메시지와 철학이 깃들어 있다. 더욱이 이러한 가사가 일반적인 단련의 한계를 뛰어넘는 퍼포먼스와 음악에 실려 가장 파워풀한 미디어들을 통해 청춘들의 삶으로 전해지고 있는 것이다(차민주, 『BTS를 철학하다』, 비밀신서, 2017 참조). 목하 BTS는 10대들의 신앙의 대상이다. 3.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언을! “창의성은 지그재그(zigzag)로 온다.”라고 워싱턴대학교 심리학과 키스 소여(Keith Sawyer)교수는 말한다. 어떤 유형의 창의성을 연구해도 창의성이 발생하는 과정은 똑같다. 창의성은 단한 번 번쩍하고 눈부신 섬광으로 세상을 밝히는 번갯불처럼 내려오는 것이 아니라, 아주 사소한 조치들, 약간의 통찰력, 점진적 변화를 통해 왔다는 것이다. 곧, 창의성은 ‘지그재그’로 온다는 것이다(키스 소요, 『지그재그, 창의력은 어떻게 단련되는가』 청림출판, 2014 참조). 이러한 지그재그의 발생사적 기원을 살펴보면 놀랍게도 기원전 5000년으로 돌아가야 한다. 신석기 인간이 만든 빗살무늬토기가 바로 그것이다. 토기 위에 새겨놓은 ‘∧∨∧∨∧∨’ 이러한 빗살무늬가 바로 지그재그 패턴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지그재그가 산업디자인에서 본격적으로 활용된 것은 두 차례 세계대전 후이다. 악몽 같은 전쟁을 목격한 인류는 신줏단지처럼 모시던 ‘인간 이성’에 회의를 느끼기 시작했고, 이성으로 쌓아올린 반듯한 세상을 해체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지그재그로 상징되는 비정형적 디자인의 탄생이다. 인간 이성에 대한 반작용이 불러온 것이 지그재그라는 것은 지그재그가 이성이 아닌 인간의 본성과 본질에 가깝다는 의미일 수도 있다. 휘돌아 나가는 강이나 긴 세월 쌓인 퇴적층 등 자연은 지그재그와 가깝다. 10대로부터 20-30세대들이여! 삶은 한 방향을 향해 일직선상으로 뻗어 나가는 인생이 아니다. 이런저런 시련을 겪는, 굴곡 있는 삶, 탄탄대로가 아닌 인생. 우리의 삶은 바로 지그재그의 삶과 인생, 그 자체인 것이다. 2018년의 마지막 날을 위해서 2018년 새해 첫날부터 직선으로 달려가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넘어지기도 하고, 뒤로 가기도 하고, 옆으로 가기도 하며 하루하루를 소중히 여기며 살아가는 것, 그것이 삶인 것이다. 따라서 BTC이 주는 ‘한방의 매력’도, BTS이 주는 ‘저항의 매력’도 한 템포 쉬어가며 돌아가는 여유도 필요할 것이다. 비트코인 투자자들은 이렇게 항변한다. “언제국가가 헛된 희망이나마 품게 해줬냐” 그렇다. 맞는 말이다. 신분 상승의 사다리가 밑 칸부터 없어진 세상, 능력주의가 비집고 들어가야 할 좁은 입구에 배경과 연줄, 학연이 독사처럼 똬리를 틀고 앉은 세상에 대한 그들의 절규는 맞는 말이다. 그러나 나의 이익이 궁극적으로 누군가의 희생을 전제로 하는 방식으로는 사회경제적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극소수의 대박을 위해 대다수가 눈물흘리는 것은 MB의 다스로도 족하고, 최순실-박근혜의 야합으로 족하다. ‘분노’에 관해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렇게 말한다. “누구나 분노할 수 있으며, 그러기 쉽다.” 그러나 이렇게도 말한다. “적절한 상대에 대해, 적절한 정도로, 적절한 시점에, 적절한 목적으로, 적절한 방식으로 분노하기는 어려우며, 모두가 그런 능력을 지니지는 못한다.” 자, 지금부터 청춘들이여, 다른 세상을 만들기 위해 적절한 분노를 표출해 보자. 10대들이여, 포기하지 말고 돌아돌아 “가즈아!” 20-30세대여, 힘들고 어렵더라도 “존버!” 그때 마침내 ‘떡락’이 아니라, ‘떡상’의 세상이 올 것이다. 우리의 스승 예수도 그렇게 살았고, 우리더러 그렇게 살라 한단다. 최병학 목사 (남부산용호교회 담임) * 이 글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문화
    • 문화펼치기
    2018-02-05
  • [문화] 최병학 목사의 문화펼치기 34 : 개
    “2018년도 트렌드 키워드 슬로건은 ‘WAG THE DOGS’” (김난도 외, 『트렌드코리아 2017』) ▲ 웩더독 큰 그림 1. 무술년, 황금 개의 해, 꼬리가 몸통을 흔들다(WAG THE DOGS). 올해 2018년은 무술년(戊戌年)이다. 무(戊)는 오행에서 흙(土)과 노랑(중앙)에 속한다. 12간지 동물 가운데 개를 뜻하는 술(戌)도 양(陽)과 흙(土)에 해당된다. 따라서 2018년 무술년은 ‘노랑(황금) 개띠의 해’로 풀이된다고 한다. 서울대 김난도 교수의 『트렌드 코리아』 시리즈는 해마다 우리 시대를 관통하는 주요 흐름을 정확하게 예측한다. 매년 출간과 함께 베스트셀러에 오르며 폭발적인 반응을 이끌어내고 있는데, 2018년에는 어떤 트렌드가 한국 사회를 주도할 것인가? 『트렌드 코리아 2018』 (미래의 창)은 2018년의 10대 소비트렌드 키워드를 ‘WAG THE DOGS’로 선정하였다. 왝더독은 일종의 속어로, 권력자가 어떤 불미스러운 행동이나 부정행위 등으로 인해 여론의 비난을 받을 때 자신에게 쏟아지는 비난 여론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 연막을 치는 행위를 가리킨다. 가령 <왝더독(Wag the Dog, 1997)>이라는 영화를 보면, 선거를 앞둔 현직 대통령이 백악관에 견학 온 걸스카우트 학생을 성추행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정치 문제 해결사들이 이름도 생소한 알바니아를 적대국으로 포장하고 여론을 조작해 성추문을 덮는다. 그러나 원래는 금융시장 용어로 주식시장에서 선물시장(꼬리)이 현물시장(몸통)을 좌우할 때 쓰는 경제적 의미이다. 그러나 이처럼 정치, 경제에서 쓰이는 말이 이제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자주 발견된다. 곧 ‘꼬리가 몸통을 흔드는 일’이 자주 발견되는 것이다. 가령 사은품을 본상품보다, SNS가 대중매체보다, 1인 방송이 주류 매체보다, 카드뉴스가 TV뉴스보다, 노점의 푸드트럭이 백화점 푸드코트보다, 인디레이블들이 대형 기획사보다, 인터넷의 마이크로 인플루언서들이 대형스타보다, 싱글 프로덕트 브랜드가 대형 종합 브랜드보다 인기를 더 끄는 현상이 속출하고 있다는 것이다. 정치도 마찬가지이다.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일련의 정책은 시급 노동자, 프랜차이즈 가맹점주, 하청과 협력업체의 권익을 향상시키고자 하고 있는데, 이 역시 꼬리가 몸통을 흔드는 일이다. 사회적 약자인 언더독(underdog)의 약진이 뚜렷해진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다양한 현상들을 포괄하는 의미로 김난도 교수팀은 2018년의 트렌드로 ‘WAG THE DOGS’를 선정했다는 것이다(김난도 외, 8-9). 이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면(교회와 목회자 관련으로), 1) What’s Your ‘Small but Certain Happiness’? 소확행, 작지만 확실한 행복 무라카미 하루키는 한 수필집에서 자신이 생각하는 행복을 이렇게 말했다. “갓 구운 빵을 손으로 찢어서 먹는 것, 서랍 안에 반듯하게 접어 돌돌 말은 속옷이 잔뜩 쌓여 있는 것, 새로 산 정결한 면 냄새가 풍기는 하얀 셔츠를 머리에서부터 뒤집어쓸 때의 기분, 겨울밤 부스럭 소리를 내며 이불 속으로 들어오는 고양이의 감촉.” 작지만 확실한 행복. 그렇다. 행복은 멀리 있지 않으며 거창하지 않다. 그런데 평범한 일상에서 행복을 찾는 것은 왜 이리 어려운 걸까? 일상에서 소확행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교회는 소확행을 위해 강소형 교회가 힘을 내야 한다. 2) Added Satisfaction to Value for Money: ‘Placebo Consumption’ 가성비에 가심비를 더하다: ‘플라시보 소비’ 플라시보 효과는 “이 약을 먹으면 낫는다.”는 말을 들으면 가짜 약이라고 할지라도 증상이 호전되는 효과를 말한다. ‘마음의 힘’이 그만큼 크다는 뜻이다. 가성비에 마음을 더한 ‘가심비’는 소비자에게 심리적 안정을 줌으로써 불안을 잠재우고 스트레스를 덜어준다. 오늘날 목회자의 설교는 가심비는커녕, 협박과 심판의 메시지가 아닌가 돌아 보아야 할 것이다. 3) Generation ‘Work-Life-Balance’ ‘워라밸’ 세대 워라밸은 ‘일과 삶의 균형(Work-and-life balance)’의 준말이다. 개인의 원자화가 급속도로 진행되고 타인과의 관계보다 스스로의 삶을 더 소중히 여기는 가치가 중요시되면서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새로운 ‘직딩’이 출현하고 있는데, 이들에게 ‘칼퇴’는 기본, 취직은 ‘퇴직 준비’와 동의어이며, 직장 생활은 더 소중한 취미 생활을 이어나가기 위한 방편이다. 새로운 가치관으로 무장한 이 신세대 직장인, ‘워라밸’ 세대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만 교회의 미래가 밝을 것이다. 4) Technology of ‘Untact’ 언택트 기술 4차 산업혁명 시대에 무인(unmanned) 기술이 사람과 사람 사이의 접촉(contact)을 지워버리고 있다. 공항에서든 패스트푸드점에서든 이제 어디를 가나 우리를 맞이하는 것은 모니터 화면이다. 사람과의 접촉이 부담스러운 디지털 원주민들은 언택트 기술을 반기는 반면, 늘 대면 접촉을 하고 살았던 디지털 이주민들은 두려움이 앞선다. 그러나 편하고 저렴하고 빠른 언택트 기술은 이제 돌이킬 수 없는 대세다. 하지만 여기서도 ‘사람이 그 중심에 있어야 한다’는 명제를 잊지 말자. 이것은 인간 존재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는 사실을 잊지 않는 데서 시작한다. 5) Hide Away in Your Querencia 나만의 케렌시아 스페인어인 ‘케렌시아(Querencia)’는 ‘나만이 알고 있는 아늑한 휴식 공간’을 뜻한다. 하지만 그냥 편하게 쉬기만 하는 곳이 아니다. 원래 케렌시아는 투우장의 소가 투우사와 마지막 결전을 앞두고 잠시 숨을 고르는 곳이다. 즉, 뭔가 중대한 일을 앞두고 최대한 에너지를 모으는 곳이란 뜻이다. 바쁜 일상에 지쳐가는 현대인에게 가장 필요한 공간이 바로 ‘케렌시아’가 아닐까? 케렌시아는 공간 비즈니스와 수면 산업 등 현대인에게 필요한 신산업 분야의 발전을 예고한다. 교회가 케렌시아가 될 수 있을까? 영적인 창조의 공간으로, 고통스런 삶의 재충전 장소로서 교회가 이 시대의 케렌시아가 되지 못하면 문을 닫게 될 것이다. 6) Everything-as-a-Service 만물의 서비스화 최근 아파트를 고를 때 시공사와 인테리어보다 어떤 서비스를 제공하는지가 더 중요해지고 있다. 발레파킹은 기본이고 하우스키핑과 컨시어지 서비스, 호텔급 조식까지. 자동차를 살 때도 앞으로는 자동차 제조업체가 아니라, 내부 서비스가 더 고려 대상이 될 전망이다. 자동차가 그저 운송수단이 아니라 달리는 ‘서비스 단말’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사물인터넷과 클라우드 기술의 발전은 만물의 서비스화를 더욱 앞당기는 배경이다. 물건을 사면 서비스는 공짜인 시대는 지났다. 이제 서비스는 제품의 선택을 좌우하는 결정 요소로 작용할 것이다. 예배라는 몸통보다 주차장부터 교회의 건물, 환경까지가 더 중요한 세상이 되었다. 꼬리가 몸통을 흔드는 세상, 신앙의 본질도 흔들리고 있다. 7) Days of ‘Cutocracy’ 매력, 자본이 되다 매력의 ‘매(魅)’는 ‘도깨비 매’자다. 도깨비처럼 사람을 홀리는 힘에 누군들 끌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매력은 이처럼 이성의 힘을 약화시킨다. 상품이 넘쳐나는 시대, ‘선택장애’에 걸린 소비자들에게 어필하기 위해서는 이 ‘매력’이 필수다. 그냥 속수무책으로 집어 들게 만드는 라인과 카카오의 캐릭터 상품들을 생각해보라. 저항 불가. “그래, 졌다”라고 말하면서도 소비자는 행복할 뿐이다. 오늘날 교회가 목회자가 카카오의 캐릭터 상품보다 못한 처지가 되었다. 변하지 않으면 도태되는 자본주의 세상에 변하지 않는 진리의 말씀은 어떻게 매력을 발휘할까? 8) One’s True Colors, ‘Meaning Out’ 미닝아웃 소셜네트워크의 해시태그는 누구나 자기만의 생각을 세상에 소리칠 수 있게 했다. 그리고 또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쉽게 모일 수 있게 되었다. 바야흐로 ‘슬로건의 시대’이다. 무엇을 걸치고 어떤 가방을 들고 무엇을 먹느냐가 ‘나’라는 사람을 정의한다. 소비를 통해 부를 과시하던 시대는 저물었다. 이제 소비는 투표와 마찬가지로 신념의 표를 던지는 행위가 되어가고 있다. 교회는 사회에 어떤 미닝아웃을 드러내야하는가? ‘생명, 평화, 정의’의 가치를 제대로 드러내지 않는 교회는, 이를 실천하지 못하는 교인은, 이미 그 슬로건에 있어서 세상에 졌다. 9) Gig-Relationship, Alt-Family 이 관계를 다시 써보려 해 가장 가까운 가족들마저 때로는 짐으로 다가오고, 소셜네트워크의 수많은 지인들은 얼굴도 모르는 경우가 허다하다. 너무나 많은 관계의 압박 속에서 이제 사람들은 소수와 오랫동안 깊게 관계를 맺기보다 다수와 짧게 얕은 관계를 맺는 것을 더 선호한다. 가장 확실한 관계 맺기라고 여겨지는 결혼조차 흔들리고 있다. 이혼은 물론이고 해혼, 졸혼이 유행하고 2040년쯤이면 결혼제도 자체가 소멸될 것이라는 예측도 있다. 이제 관계 이후의 관계를 고민해야 할 때다. 성도 간의 관계, 목회자와 성도간의 관계, 성서는 아니 교회는 이러한 시대에 창조적 관계를 통해 여전히 사람들에게 힘이 될까? 10) Shouting Out Self-esteem 세상의 주변에서 나를 외치다 자세히 보라. ‘중심’이 아니라 ‘주변’이다. 지금처럼 자존감이 낮은 시대는 일찍이 없었다. 사람들은 저마다 흙수저를 자처하고, 끊어진 계급 사다리 앞에서 절망한다. 무너진 자존감을 세워주는 자기계발서들이 서점의 베스트셀러 자리를 몽땅 차지하고 있다. 낮은 자존감은 어떻게 소비로 발현되는가? 무너진 자존감을 세워주는 교회의 전략이 더한층 필요한 때다. 예수는 세상의 주변인 갈릴리에서 ‘나’를 외쳤다. 자존감 있는 교회! 자존감 있는 교인!! 세상의 중심에서 주변을 외치라. 세상의 중심에서 예수를 외치라. 개도 2018년에는 소리 짖는다. “멍, 멍!” 2. 개 때문에 인간이 네안데르탈인을 이겼다? 황금 개의 해에 개의 역사를 살펴보면 흥미롭다. 개 때문에 현생 인류인 호모 사피엔스가 그 경쟁자인 네안데르탈인을 이겼다는 가설 때문이다. 미국의 고인류학자인 팻 시프먼의 『침입종 인간: 인류의 번성과 미래에 대한 근원적 탐구』 (푸른숲, 2017)이 바로 그것인데, 요약을 하자면 이렇다. 45억년 지구의 역사 중 인간(호모 사피엔스)이 지금의 지위를 차지한 것은 최근의 일이다. 사실 600만년 전 인간과 침팬지가 갈라진 뒤 250만년 전 호모속이 출현한 이래 네안데르탈, 호모 하빌리스, 호모 에렉투스, 베이징 원인, 루시, 데니소바인 등 다양한 호미닌(호모과와 호모속 중간의 사람족)들이 살았다. 특히 인간과 경쟁하다 3만년 전 사라진 ‘최후의 비인간 호미닌’ 네안데르탈인은 사피엔스보다 30만년 앞서 유라시아에서 진화해갔다. 네안데르탈인은 인간처럼 도구를 제작하고 불을 피울 줄 알았으며 의사소통이 가능했다. 무리 지어 매머드 같은 대형 포유류도 사냥했다. 사피엔스보다 뇌가 크고 다부진 근육을 갖춘 데다, 멸종 이전에도 한차례 빙하기를 이겨냈던 강인한 네안데르탈인은 왜 갑자기 멸종한 것일까? 시프먼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제시한다. 물론 여기서 제목인 ‘침입종’은 고유종, 자생종이 아닌 원래 그 지역에 속하지 않는 종을 일컫는다. 외래종 중에서도 생태계에 미치는 침입의 영향력이 클 경우 생태학자들은 ‘침입종’이라는 딱지를 붙이고 각별히 경계한다. 그러나 지구 역사상 사피엔스만큼 강력한 침입종은 없다. 시프먼은 이렇게 말한다. “일단 인간이 발을 들이고 나면 그 지역의 동물상(특정 지역에 사는 모든 동물)이 붕괴하고 생태계에 격변이 일어난다. 이러한 전 지구적 패턴은 지금까지 알려진 예가 없다.” 시프먼이 이 책에서 집중한 공간은 인간이 침입종으로 처음 활동한 4만년 전 유라시아 대륙이다. 아프리카에 살던 사피엔스가 유라시아로 이동하자, 본래 이 지역의 주인이었던 네안데르탈인이 사라졌다. 그동안 인류학계에선 네안데르탈인들이 멸종한 이유를 놓고 ‘기후변화설’과 ‘사피엔스와의 경쟁설’이 맞서왔는데, 시프먼은 이 두 가지가 배타적인 학설이 아니라고 말한다. “기후변화로 인해 네안데르탈인이 능숙한 사냥 솜씨를 발휘하던 숲이 사라지고 평원과 툰드라가 늘어난 것에 겹쳐, 새로 이주한 사피엔스와의 먹이 경쟁이 강한 압박으로 작용했다.”는 것이다. 즉 네안데르탈인들 입장에선 예전에 살던 대로 살기엔 환경이 척박해졌고, 사피엔스와 먹잇감을 나누기엔 부족한 상태가 됐다는 것이다. 따라서 시프먼은 생태적 지위가 같은 두 종은 공존할 수 없다는 ‘가우제의 법칙(Gauze’s axiom, 생활요구가 비슷한 2종류는 동일 장소에서 공존하기가 어렵고, 종간경쟁에 의해 최종적으로는 반드시 한쪽이 다른 쪽에 의해 배제된다는 가설)’을 예로 들며, “사피엔스와 네안데르탈인 중 어느 한쪽이 멸종할 수밖에 없었다.”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네안데르탈인들은 왜 인간에게 밀려난 것일까? 현재까지 발굴된 유적지를 살펴보면, 사피엔스가 네안데르탈인들을 살해했다는 증거는 나오지 않고 있다. 사피엔스가 네안데르탈인을 직접 학살했다고 단정할 순 없는 것이다. 시프먼은 미토콘드리아 디엔에이(DNA) 분석, 세포핵 디엔에이 분석, 탄소연대측정법, 동위원소 분석 다양한 과학적 분석 기법을 종합해 네안데르탈인들의 멸종 과정을 짚어나간다. 정리하면 이렇다. 몸집이 큰 네안데르탈인들은 생존하기 위한 에너지 필요량이 사피엔스보다 7~9%가량 더 많아 신체적 조건이 불리했다. 인간은 변화한 환경에 맞춰 식물성 먹이와 소형 동물에도 손을 대는 등 식단을 다양화했지만, 네안데르탈인들은 중대형 육상동물 위주의 입맛을 고수했다. 초원지대에선 창을 손에 들고 직접 먹잇감을 찌르는 네안데르탈인들보다는 발사형 무기를 투척하는 사피엔스의 사냥 기법이 더 효율적이었다. 네안데르탈인들의 유적지에서 동족을 잡아먹었던 흔적이 발견되는 것은 그만큼 생존 위기에 내몰린 이들의 절박함을 말해준다는 것이다. 더욱이 시프먼은 2009년 벨기에의 인류학자 미체 제르몽프레가 현생 늑대, 현생 개, 선사시대 개의 두개골을 분석한 결과를 거론하며, 늑대도 개도 아닌 중간지대 ‘늑대-개’가 3만2000년 전에 살았다는 점에 주목하여 ‘개의 가축화’가 신석기 시대 농부가 아니라, 구석기 시대 수렵 채집인이라는 주장을 펼친다. 다시 말하면 인간이 농작물을 기르기 시작한 9000년 전에 개의 가축화가 이뤄졌다는 기존 학설을 뒤집는 것이다. 게다가 ‘늑대-개’의 출현 시기는 네안데르탈인의 멸종 시기와 맞아떨어진다. 따라서 시프먼은 “개의 가축화가 인간이 네안데르탈인과의 먹이경쟁에서 승리하는 주요 원인이 됐을 것이다.”라는 가설을 끌어낸다. 인간은 바늘을 이용해 야무지게 털옷을 챙겨 입고, 위협적인 무기를 만드는 능력 외에도 ‘살아있는 도구’, 즉 가축을 ‘창조’함으로써 그들의 예민한 후각과 청각, 뛰어난 사냥 실력을 빌릴 수 있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사람이 개를 데리고 사냥하면 사냥개의 도움을 받지 않을 때보다 획득한 사냥감이 56% 증가한다고 한다. 시프먼은 이렇게 말한다. “인간이 동물을 처음으로 가축화한 것은 도구를 최초로 발명한 것과 맞먹는 커다란 도약이다.” 물론, 네안데르탈인의 멸종을 개의 가축화와 연관 짓는 시프먼의 가설은 많은 논쟁을 가져올 것이다. 그러나 연대 측정기법 등 과학의 발달에 힘입어 사피엔스의 실체를 놓고 더 풍성한 대화가 오가는 것은 매우 반가운 일임이 틀림없다. 이것은 또한 4차 산업혁명을 통한 인공지능 시대에 개의 가축화가 로봇의 인간화를 통해 새로운 패러다임을 창출하는 오래된 미래가 될 것이다. 왜냐하면 2018년은 황금 개의 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로봇의 시작은 안드로이드가 아니라, 강아지였다는 사실! 최 병학 목사 (남부산용호교회 담임) *이 글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문화
    • 문화펼치기
    2018-01-02
  • [문화] 최병학 목사의 문화펼치기 33 : 땅,‘ 분노의 포도’를 거쳐‘ 사랑의 연대’로
    ▲ 땅따먹기 그림 어린 시절 땅위에 줄을 그으며 땅따먹기를 하던 때가 있었다. 가급적이면 많은 땅을 차지하려고 경쟁을 했었지만, “병학아, 저녁밥 먹어라.”라는 어머니의 목소리에 땅에 그어졌던 금들은 하루를 보낸 따스한 태양빛과 함께 사라졌다. 그렇게 시간은 흘렀고 땅 위에 아파트가 들어서고 사람들이 모이고 주변 환경은 오염되고 인간들의 욕심으로 지구는 몸살을 앓게 되었다. 땅은, 어머니 대지는 어느샌가 소중한 삶의 터전이 아니라, 다 쓰고 남은 똥이 되어 버렸다. 1. “신문이나 우유 배달하는 사람들은 승강기 이용을 금합니다” 위 제목은 몇 년 전 서울 강남 대치동의 한 고가 아파트의 승강기 앞에 붙어 있던 경고문이다. 층마다 승강기를 멈추는 바람에 주민들이 불편을 겪고 전기료가 많이 나온다는 것이 그 이유이다. 이러한 고가 아파트 소유자들은 누굴까? 다주택자를 정조준 한 ‘8·2부동산 대책’이 시행되고 있는 가운데, 청와대, 국무총리실, 중앙부처 등 1급 이상 정부 고위 공직자 가운데 42%가 다주택 보유자라고 한다. 66%가 투기과열지구에 있고, 투기과열지구와 투기지역으로 중복 지정된 서울 강남 4구에 위치한 주택도 28%가 된다고 한다. 땅이 돈이 되고, 돈이 되는 땅에 지은 아파트는 금값이 된다. 폴 리쾨르는 “하나의 작품을 해석한다는 것은 그것을 통해 자신의 새로운 ‘존재가능성’을 찾는 것이다. ‘텍스트 앞에서 자기 이해’를 얻는 것이며, 그것은 텍스트를 향해 자신의 고유하고 한정된 이해 능력을 주입시키는 것이 아니라, 텍스트 앞에 겸허히 나서는 일이다. 그럼으로써 텍스트에서 더 넓어진 자기를 얻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즉 텍스트 앞에 겸손할 때 우리의 시야는 더 넓어진다는 것이다. 성서에 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구약성서의 땅에 관한 내용 가운데, 여호수아서는 해석의 다양성을 보여준다. 전통적인 성서 해석에 따라 여호수아서를 읽게 되면, 가나안 땅 정복의 ‘폭력과 전쟁의 역사’가 된다. 그러나 이러한 관점 대신 땅 없는 민족(히브리 민족)에게 땅을 주시리라 약속한 ‘땅(대지)의 소중함’과 ‘하나님 약속의 신실함’으로도 읽을 수 있다. 따라서 여호수아서를 ‘땅 정복과 분배’로 읽어낸 기독교 역사가 십자군 전쟁에서 식민지 전쟁에 이르기까지의 오류의 역사, 그 발생사적 연원이었다면, 여호수아서라는 텍스트를 겸손한 자세로 읽게되면 땅 없는 민족에게 땅을 주신 하나님의 ‘정의와 평등의 사건’이며, 땅이야말로 저 하늘의 피안을 사모하는 종교사의 역사에 역설적인 반역의 사건이며 동시에 땅을 소중히 여기고 보전하라는 생태학적 명령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땅에 관한 인류의 욕심은 끝이 없다. 어머니 대지, 모신(母神)인 땅의 핍박, 영화 <마더!>는 그것을 잘 보여준다. 2. 영화 <마더!>, 모신 학대사 숲 속 외딴 곳에 집이 한 채 있다. 이곳에 아내(제니퍼 로렌스 분)와 남편(하비에르 바르뎀 분)이 산다. 글 쓰는 작가인 남편은 창작에 몰두하지만 영감이 떠오르지 않고, 진흙으로 집 벽을 칠하는 아내는 도와줄 방법이 없다. 어느 날 이 집에 한 사람(에드 해리스 분)이 찾아온다. 그는 옆구리에 상처가 있다. 그리고 다음날 그의 부인(미셸 파이퍼 분)이 찾아온다. 그리고 그 다음날은 그들의 두 아들이 찾아오고 형은 동생을 죽인다. 조문객들이 집을 찾아온다. 그리고 집은 혼란의 소용돌이에 빠진다. 마더는 이들 일가족과 조문객 모두를 내쫓아버린다. 평화로운 시간이 찾아온다. 마더는 임신을 하고, 남편의 작품은 인정을 받는다. 그러나 이 평안은 짧게 끝나고, 남편의 작품을 추앙하는 팬들이 집으로 몰려오자, 마더는 환대가 아닌, 환멸을 느낀다. 마침내 태어난 아기마저 이방인 팬들에게 빼앗겨 죽게 되고 분노로 인해 마더는 집을 폭파시킨다. 모든 이방인(타자)들을 불로 태워 죽인 것이다. 성경이나 신화적인 전이해가 없이는 이해가 되지 않는 대런 아로노프스키 감독의 영화 <마더!(Mother!, 2017)>는 봉준호의 <마더(Mother, 2009)>와 같이 어머니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는 영화이자, 봉준호의 영화와 달리 신화적인 확장성을 지니고 있고(특히 모신의 경우), 환대와 용서, 상처받을 가능성에 관한 담론들을 펼쳐 보인다. 사실 평론가 이동진이 훌륭하게 썼듯이 영화는 성경의 이야기를 잔뜩 차용하고 있다. 인용해보자. “하비에르 바르뎀이 연기한 캐릭터를 신으로 본다면, 그 집에 처음 찾아온 커플은 아담과 이브 같다. 창조의 날들이 끝날 때마다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말이 덧붙여지는 창세기 구절처럼, 신은 이 영화의 아담이 좀 수상한데도 보자마자 호의를 표한다. 아담이 화장실에서 구역질을 할 때 엿보이는 그의 옆구리 상처는 이브를 만들 갈비뼈를 떼어낸 흔적이다. 그렇게 창조된 이브는 그 다음날 집으로 찾아온다. 그 둘은 결코 만지면 안 되는 귀중한 크리스털을 깨뜨린 후 서재에서 추방된다. 금기의 선악과를 따먹어서 에덴 밖으로 내쫓긴 구약의 상황 그대로다. 몸이 아픈 아담은 실락원의 결과로 필멸의 존재가 된 인간의 운명을 드러낸다. 서재에서 쫓겨난 둘은 방에서 섹스를 한다. 그러니 이제 그 결과로 자식들이 등장할 차례다. 들어서자마자 싸움판을 벌이는 형제는 가인과 아벨처럼 보이는데, 신이 멱살을 잡는 것은 역시 차남이 아니라 장남이다. (성경에서 신은 형 가인보다 동생 아벨을 더 흡족해한다.) 결국 가인은 아벨을 죽이고 그 집엔 지워지지 않는 핏자국이 남는다.” 길지만 좀 더 인용해 보겠다. “후반부에 제니퍼 로렌스가 연기한 캐릭터(이후 ‘마더’로 지칭)가 낳는 아기는 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로 보인다. 마더가 후미진 공간을 간신히 찾아 아이를 낳은 뒤엔 성경의 동방박사들이 그랬듯 선물이 답지한다. 광기에 들뜬 군중은 마치 십자가에 달린 예수처럼 팔을 뻗은 아기를 옮긴 끝에 살해한다. 이후 사람들이 아기의 몸을 뜯어먹는 끔찍한 모습은 ‘이것은 내 살이다’라며 예수가 상징적으로 떼어 준 떡을 제자들이 먹었던 성찬식을 글자 그대로 그려낸 난폭한 유머처럼 다가오기도 한다.” 물론 이동진의 분석처럼 영화가 끌어들이는 것은 기독교적인 맥락만이 아니다. 산 채로 희생자의 심장을 꺼내 신에게 바치는 것은 잉카제국의 제의이며, 파괴의 순간이 새로운 창조의 원동력으로 바뀌는 순환의 사이클은 힌두교 신화이다. 첫 방문자(아담)가 사용했던 라이터(매우 중요한 상징인데)는 의미를 곁에 명확히 새겨놓았듯이, 북유럽 신화 속 여신 프레야(Freyja)이다. 사랑과 미의 여신으로 남편은 오딘(Odin)이다. 아무튼 영화는 마더를 대지의 여신 가이야(신통기), 미의 여신이자 사랑의 여신(북유럽 신화), 곧 태초의 어머니 모신으로 읽을 수 있다. 그러나 인류의 역사는 이 모신에 대한 학대의 역사였다. 땅(지구 전체라고 해도 무방할 듯)으로 대표되는 영화는 ‘모신 학대의 역사’를 잘 보여준다. 그리고 우리의 문명도 현재 그러하다. 이러한 모신의 분노, 혹은 땅의 분노는 어떻게 해결이 될까? 3. 에덴의 동쪽과 ‘팀셸’ 존 스타인벡의 또 다른 소설인 『에덴의 동쪽』은 성경의 가인과 아벨 이야기를 모티브로 한 소설이다. 가인과 아벨의 갈등 구조를 20세기 초 캘리포니아의 아론과 칼 형제에게 투영함으로써 인간의 원죄 의식, 선악 사이에서의 갈등, 죄의 극복을 보여 준다. 줄거리는 이렇다. 아론은 잘생긴 외모에 선한 성품을 갖고 있으며, 동생 칼(영화 <에덴의 동쪽>에서 제임스 딘이 칼 역을 맡았다)은 질투심이 강하고 다소 사악한 성격을 갖고 있다. 이들의 어머니인 캐시는 아론과 칼 쌍둥이를 낳은 후 아버지 애덤(성서의 아담으로 보아도 된다)을 총으로 쏘고 도망쳐 시내에서 유곽을 운영하고 있으며(하와의 선악과 사건으로 보아도 된다), 아버지 애덤은 이 사실을 숨기고 중국인 하인, 리와 함께 아이들을 키워 왔다. 칼은 1차 세계 대전 때 콩 값이 오르는 것을 이용해 콩 장사로 돈을 벌고 이 돈을 아버지 애덤에게 드리지만, 애덤은 전쟁의 혼란을 이용해 부당하게 돈을 벌었다고 생각해 칼이 주는 돈을 거절한다. 자신의 성의가 아버지에게 거절당하자 그간 느끼던 아론에 대한 질투심이 폭발해, 칼은 우연히 알게 된, 어머니가 자기들을 버리고 유곽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론에게 알린다. 순수하고 이상적인 성격의 아론은 큰 충격을 받아 그 길로 군에 입대하여 결국 전사하고 만다. 애덤은 아론이 전사했다는 소식에 쓰러져 버리고, 자기가 아론을 죽인 것과 다름없다고 고백하는 칼에게 “팀셸(timshel)”이라는 말을 남기고 숨을 거둔다. 성경 가인과 아벨 이야기의 현대판 해석이라고 할 수 있다. 아론(Aron), 칼(Caleb)의 머리글자는 아벨(Abel), 가인(Cain)과 같고, 신이 가인의 제사물을 거절한 것과 애덤이 칼의 돈을 거절한 것, 가인이 아벨을 죽였듯 칼이 아론을 죽게 만든 것, 신이 가인을 에덴의 동쪽으로 추방하며 ‘가인을 죽이는 자는 일곱 배의 벌을 받으리라’고 낙인을 찍은 것처럼 애덤은 칼에게 ‘팀셸’이라는 말을 남긴다. 성경과 다른 점은 가인은 형이지만, 칼은 동생이다. 아무튼 팀셸이란 단어가 중요한데, 이 단어는 히브리어로 ‘너는 할 수도 있을 것이다(Thou mayest)’로, 선택의 기회를 주는 단어이다. 선택의 길이 열려 있다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인간에게 책임이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신과의 관계에서 책임은커녕, 인간 사이의 책임도 전무하다. 그리고 거기에 땅의 문제가 차별과 불평등으로 존재하고 있다. 『에덴의 동쪽』에 나오는 대화이다. 주인공 ‘아담’에게 중국인 하인 ‘리’가 이렇게 말한다. “먼저 말씀드려야 할 것은, 미국 서부의 철도를 놓을 때 땅을 고르고 침목을 놓고 레일을 까는 고된 일을 중국인들이 많이 했다는 것입니다. 중국인들은 노임이 싸고 열심히 일하는데다가 혹시 죽더라도 걱정을 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들은 대부분 광동에서 모집해 왔는데 광동(Guangdong, 廣東)인들은 체구가 작지만 힘이 세고 끈덕지면서도 싸움을 좋아하지 않았거든요. … 철도 회사의 노무자 모집원은 계약을 맺고, 그 자리에서 돈을 지불해 주었지요. 그래서 빚더미에 않은 많은 사람들을 모은 것입니다. … 남자들은 동물처럼 떼를 지어 컴컴한 배 밑바닥에 실려 6주를 향해한 끝에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지요. … 5년 동안 중노동을 하도록 되어 있었어요. … 샌프란시스코에서는 살과 뼈만 가진 인간들이 홍수처럼 가축 화차에 실려 산 위로 올라왔어요. 그리고는 시에라 산맥의 작은 언덕을 깎아 내고 산 밑에 터널을 파는 일을 했습니다.” 땅에서 사람들이 죽는다. 그리고 사람들은 똥을 눈다. 땅을 똥으로 만들어버린 인류의 모신 학대는 똥의 재해석을 통해 새로운, 텍스트 앞에서의 자기 이해를 이끈다. 4. 똥의 연대: 한반도가 똥으로 하나가 될 수 있다 우리는 지금 2차적인 환경오염을 걱정할 정도로 유기성 폐기물 처리에 골머리를 앓고 있다. 반면 북한은 유기성 자원의 부족에 따른 토양의 황폐화로 만성적이고 구조적인 식량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남한의 넘쳐나는 유기성 자원을 퇴비로 만들어 북한 땅을 살린다면 남북한 전체를 대상으로 하는 순환적인 자원 재활용 시스템을 구축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남북한 서로의 문제점을 상생의 기반으로 만드는 반전의 계기가 된다. 사실 지난 2013년 12월 31일을 끝으로 ‘런던협약 96의정서’에 의해 우리나라는 모든 유기성 폐기물의 해양투기가 전면적으로 금지됐다. 그동안 우리는 분뇨와 음식물쓰레기, 가축분뇨, 하수처리 등 유기성 폐기물을 푸른 바다에 아무 거리낌 없이 버려왔다. 지구상에 살아있는 생물체 가운데 오직 인간만이 저지르고 있는 반환경적, 반생태적 행위이다. 그러나 2014년부터 유기성 폐기물을 바다에 투기하는 것이 금지되면서 더 이상 반문명적 행위는 할 수 없게 됐다. 한국유기질비료산업협동조합 김선일 이사장의 말은 의미심장하다. “유기성 자원 재활용의 시야를 전 한반도적 차원으로 확대하면 남한은 음식물쓰레기 및 축분(畜糞) 처리와 씨름하는 일반 시민과 (그것을 재활용하여) 요식업자, 축산농가에 간접적인 지원을 하는 결과를 얻게 된다.”고 말한다. 또한 북한은 북한대로 스스로의 힘으로 확보하기 어려운 유기성 자원을 퇴비 형태로 확보하게 됨으로써 지력회복을 통한 농업생산성 증가로 식량난 해소의 커다란 전기를 마련할 수 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한반도가 ‘똥으로 하나가 되는 놀라운 일’이 벌어질 수도 있다는 것이다. 남과 북이 똥으로 하나 되어 땅으로도 하나가 되면 좋겠다. 여호수아서처럼 정복 정쟁이 아니라, 가인과 아벨의 분쟁이 아니라, 분노의 포도가 아니라, 후회 없는 팀셸로. 그때 어머니 모신은 똥으로 하나 되는 땅에서 웃을 것이다. 최 병학 목사 (남부산용호교회 담임) *이 글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문화
    • 문화펼치기
    2017-12-04
  • [문화] 최병학 목사의 문화펼치기 32 : 조선의 글과 청의 길
    ▲ 영화 '남한산성' 영화 <남한산성>은 보름달의 이야기이다. 보름달이 뜰 때까지 산성 문을 열지 않으면 나라가 멸망당하는 이야기, 초생달이 반달이 되고, 반달이 보름달이 되어 마침내 산성문은 열렸고, 이제 보름달은 깨어진다. 그 보름달이 비춰주는 조선의 길과 청의 길은 너무도 다르고, 그 길을 글로 예비하는 조선의 길과 청의 글 또한 다르다. 글은 ‘말의 씀’이고, 종교개혁은 ‘오직 성서(오직 말씀)’로 시작되었다. 조선의 글과 길이 지금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는 한국 교회의 방향성이 되기를 소원한다. 1. 최명길의 글과 칸의 글 남한산성을 포위한 칸은 문한관(文翰官)들에게 산성 안으로 들여보낼 문서를 작성하라 명한다. 문서는 대청 황제가 조선 국왕에게 내리는 조유(詔諭, 임금의 명령을 적은 문서)의 형식을 갖추고, 조선 국왕을 ‘너’라고 칭하라했다. 칸은 붓을 들어 문장을 쓰지는 않았으나, 문한관들의 붓놀림을 엄히 다스렸다. 고사를 끌어대거나, 전적(戰績)을 인용하는 문장을 금했다. 문체를 꾸며서 부화한 문장과 뜻이 수줍어서 은비한 문장과 말을 멀리 돌려서 우원한 문장을 먹으로 뭉갰고, 말을 구부려서 잔망스러운 문장과 말을 늘려서 게으른 문장을 꾸짖었다. 칸은 이렇게 말한다. “말을 접지 말라. 말을 구기지 말라. 말을 펴서 내질러라.” 문한관들은 다음 날 아침 문서를 올렸다. “네가 기어이 나의 적이 되어 거듭 거스르고 어긋나 환란을 자초하니, 너의 아둔함조차도 나의 부덕일진대, 나는 그것을 괴로워하며 여러 강을 건너 멀리 내려와 너에게 다다랐다. (중략) 너는 스스로 죽기를 원하느냐. 지금처럼 돌구멍 속에 처박혀 있어라. 너는 싸우기를 원하느냐. 내가 너의 돌담을 타 넘어 들어가 하늘이 내리는 승부를 알려주마. 너는 지키기를 원하느냐. 너의 지킴이 끝날 때까지 내가 너의 성을 가두어주겠다. 너는 내가 군사를 돌이켜 빈손으로 돌아가기를 원하느냐. 삶은 거저 누릴 수 없는 것이라고 나는 이미 말했다. 너는 그 돌구멍 속에 한세상을 차려서 누리기를 원하느냐. 너의 백성은 내가 기른다 해도, 거기서 너의 세상이 차려지겠느냐. 너는 살기를 원하느냐. 성문을 열고 조심스레 걸어서 내 앞으로 나오라. 너의 도모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말하라. 내가 다 듣고 너의 뜻을 펴게 해주겠다. 너는 두려워 말고 말하라(김훈: 남한산성, 308-310).” 칸이 말했다. “뻗쳐서 씩씩하다. 국새를 찍어라.” 문서는 남한산성을 넘었고, 인조(박해일 분)는 천천히 말했다. “칸이 여러 가지를 묻더구나.…… 나는 살고자 한다. 그것이 나의 뜻이다.” 최명길(이병헌 분)이 먹을 갈았다. 젖은 붓을 종이 위로 가져갔다.“소방은 바다 쪽으로 치우친 궁벽한 산골로, 시문과 담론에 스스로 눈이 멀어 천명의 순환에 닿지 못했고 천하의 형세를 살피지 못하였습니다. 캄캄한 두메에서 오직 명을 아비로 섬겨왔는데, 그 섬김의 지극함은 황제께서 망월봉에 오르시어 친히 보신 바와 같습니다. 소방의 몽매함은 그러하옵고, 이제 밝고 우뚝한 황극(皇極)이 있는 곳을 벼락 맞듯이 깨달았으니, 새로운 섬김으로 따를 수 있는 길이 비로소 열리는 것이옵니다. (중략) 황제의 깃발 아래 만물이 소생하고 스스로 자라서 아름다워지는 것일진대, 황제의 품에 들고자 하는 소방이 황제의 깃발을 가까이 바라보면서 이 돌담 안에서 말라 죽는다면 그 또한 황제의 근심이 아니겠나이까. 하늘과 사람이 함께 귀의하는 곳에 소방 또한 의지하려 하오니 길을 열어주시옵소서……(336-337).”올곧은 명분의 사람, 곧 예조 판서 김상헌(김윤석 분)의 말대로 ‘뜻을 빼앗기면 모든 것을 빼앗길 터’, 최명길의 문서는 떳떳하게 살자는 문서가 아닐 수 있다. 그러나 최명길의 말대로 ‘상헌은 백이(伯夷)’이지만 자신은 ‘아직 무너지지 않은 초라한 세상에서 만고의 역적’이 되어도 좋으니 신의 문서를 칸에게 보내달라고 한다. “신의 문서는 ‘글’이 아니옵고 ‘길’이옵니다. 전하께서 밟고 걸어가셔야 할 길바닥이옵니다.” 끝내 글은 길을 요청하러 남한산성을 넘는다.“글을 곧게 써라, 그래야 저들이 알아듣는다.” 칸은 조선의 국서를 접수한 문한관 두 명을 처형한 뒤, 남한산성으로 들여보낼 문서를 다시 작성하라고 일렀다. 문한관이 글을 지어 올렸다.“네가 사특한 입질과 기름진 붓질로 몽롱한 문장을 지어서 나를 속이려 하니 나를 따르겠다는 너의 기쁨이 대체 무엇이냐. 너의 문서는 돌려보낸다. …… 너의 신하들 중에서 나를 적대하고 능멸해서 결국 너를 그 돌구멍 속으로 몰아넣은 자들을 너의 눈으로 찾아내고, 너의 손으로 묶고, 너의 군사에게 끌리게 해서 나에게 보내라. 죽여서 그 머리를 높이 걸어 너희 나라의 후세 만대를 가르치려 한다. 만일 보내지 않으면 내가 너의 성을 깨뜨리는 날에 나는 내 손으로 너의 성을 뒤져 그자들을 찾지는 않겠다. 그날, 나는 너의 성 안에 살아 있는 모든 자들에게 나를 능멸한 죄를 묻게 될 것이다(351).”젊은 당하관인 교리 윤집과 부교리 오달제가 스스로 척화신을 자처했다. 금군위장이 그들을 묶었고, 최명길이 앞장서서 임금의 대열은 서문을 나와 삼전도로 향했다. 일제 식민지의 치욕 이전 가장 치욕스러운 한반도의 운명은 이렇게 남한산성을 떠났다. 글이 길을 만들었는지, 길이 글밖에 없었는지, 글과 길은 같은지, 다른지? 청의 글과 조선의 글은 무슨 차이인지, 또한 조선의 길과 청의 길은 무엇인지? 최명길은 이렇게 말한다. “강한 자가 약한 자에게 못 할 짓이 없고, 약한 자 또한 살아남기 위하여 못 할 짓이 없는 것이옵니다.” 2. 주름과 실선: 바로크와 고전주의 바로크(Baroque)를 찬양하는 철학자 질 들뢰즈(G. Deleuze)는 『주름, 라이프니츠와 바로크』(1988)에서 이렇게 말한다. “바로크는 무한한 주름의 작업을 발명하였다. 문제는 주름을 어떻게 유한하게 만들 것인가가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무한하게 이어나갈 것인가이다. 즉 주름을 어떻게 무한히 실어 나를 것인가가 문제다.” 주름은 사람의 피부에 있는 것으로, 손금의 경우 하나의 큰 선으로 보이지만, 사실 미세한 주름들로 이루어져 있다. 주름의 모양이 사람마다 다르듯, 사람들의 표정이나 움직임도 다르다. 바로크 시대의 예술은 이러한 무수히 많은 주름을 표현한 것이다. ▲렘브란트 자화상(1659) 가령 바로크 시대의 대표적인 화자인 렘브란트(Rembrandt, 1606~1669)의 <자화상>(1659)은 얼굴에 내재한 삶의 굴곡을 주름으로 거침없이 드러내고 있다. 여기에는 기쁨과 분노, 환희와 절망, 공포와 용맹과 같은 ‘세계의 모든 속성’이 ‘내재’해 있다. 따라서 무한한 존재의 모습을 보여준다. 따라서 들뢰즈에게 있어서 바로크의 주름은 ‘내재적인 무한성’을 의미한다. 들뢰즈가 발견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하나의 실선으로 환원 될 수 없는 무수한 주름들의 발견, 그리고 이것이 곧 바로크의 실체이다. 반면 고전주의는 주름보다는 실선을 중요시한다. 따라서 데생이 강조된다. 주름과 실선의 차이가 바로크와 고전주의의 차이이며, 이것은 ‘변화/획일성’, ‘차이/동일성/’의 대립에 다름 아니다. 이러한 동일성과 차이의 대립은 음악에서도 드러난다. 사실 바로크 음악의 특징은 통주저음(through bass, 숫자 붙은 베이스)이라고 볼 수 있다. 계속저음(basso continuo)이라고도 하는데, 말 그대로 베이스(저음)를 끊임없이 이어주는 것이다. 심장박동처럼 잘 들리지는 않지만 긴장감을 유발한다. 동시에 시작도 끝도 없이 저음이 반복되면서 곡의 서사적 완결성을 방해한다. 이러한 바로크 음악과 달리 고전주의 음악은 ‘제시부-발전부-재현부’라는 체계적이고 완결적인 소나타 형식을 통해 화음과 선율의 형식을 강조한다. 따라서 비형식적으로 반복되는 저음의 소리, 곧 정서적 강도(intensity)를 유발하는 바로크식 음의 긴장감은 밀려나게 되는 것이다. 서양 근대음악이 자기완결적이며 거시적 체계와 형식에 얽매이는 것이다. 게다가 고전주의 음악에서 악보는 항상 동일한 의미를 전달해야하는 언어의 개념과도 같기 때문에 같은 곡은 다시 연주하더라도 같은 곡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바로크와 고전주의의 이러한 차이에서 들뢰즈는 개념의 동일성에 깔려 죽은 차이를 다시 복원시킨 것이다. 따라서 바로크의 부활은 차이의 부활이 된다. ▲<그림2> 바흐의 두 대의 바이올린을 위한 협주곡 BWV.1043 3. 조선과 청의 글과 길 조선의 길과 청의 길은 차이와 동일성의 대립이며, 조선의 글과 청의 글은 ‘변화(칸의 말대로, 문체를 꾸며서 부화한 문장, 뜻이 수줍어서 은비한 문장, 말을 멀리 돌려서 우원한 문장, 말을 구부려서 잔망스러운 문장, 말을 늘려서 게으른 문장)’와 ‘획일성(칸의 말대로, “말을 접지 말라. 말을 구기지 말라. 말을 펴서 내질러라”)’의 대조이다. 최명길의 글은 바로크적이다. 그리고 칸의 글은 고전주의적이다. 명길의 글에는 조선이라는 나라에 내재한 삶의 굴곡이 깃들어 있다. 이 굴곡은 다름 아닌 주름이여 이 주름은 하나의 뚜렷한 실선이 아닌 무수히 많은 미세한 선들로 이루어져 있다. 삶의 무게를 넘어서지 못하고 그 무게에 짓눌려 감당할 수 없는 무게의 흔적을 글은 담고 있다. 기쁨과 분노, 환희와 절망, 공포와 용맹이 주름져 놓여있기에, 어느 한 글이라도 근접할 수 없는 무한한 존재라 할 수 있다. 이렇게 무한한 주름으로 이루어진 명길의 글은 초월적인 의미에서 무한한 존재가 아니라 모든 것을 다 포함하고 있다는 점에서 ‘내재적으로 무한한 글(존재)’이라고 할 수 있다.명길의 글 바닥은 바로크 음악의 시작도 끝도없이 계속 진행되는 통주저음이 깃들어 있다. 이것은 조선의 비극적 운명을 드러낸다. 동시에 명길의 글은 길을 찾고자 하는 글이다. 이 글에 조선의 길이 있는 것이다. 반면 칸의 글은 고전주의 음악처럼 조선에 항복을 제시하고(제시부), 이를 직선적으로 발전시킨다(발전부). 마침내 다시한번 재현하며(재현부) 체계적이고 완결적인 ‘소나타 형식’의 자기 완결적이며 거시적 체계와 형식을 완성한다. 길을 제시하나, 그 길은 주름을 곧게 펴는 직선의 길로 무수한 주름들이 쓰러져가고, 죽어가는 처참한 흔적을 그 뒷 배경으로 남긴다. 영화 <남한산성>에서 명나라는 지금의 미국이고, 청나라는 북한과 중국일까? 명나라 더하기 청나라가 미국이 아닐까? 영화에 보면 병자호란 시기에 “명은 천자의 나라이고, 청은 오랑캐”라고 주장하며 임진왜란 때 ‘명나라의 재조지은(再造之恩, 거의 망할 위기에서 구해준 은혜)’을 떠받드는데, 6·25전쟁 때 남한을 구해줬으니 과거의 미국은 명나라에 해당될 것이다. 그리고 북한과는 전쟁을 하겠다고 으름장 놓고, 남한과는 ‘한-미 FTA 폐지, 주한미군 철수’ 등의 위협으로 FTA재협상 시도를, 사드 조기 배치를 밀어붙일 뿐, 동맹을 존중하는 태도를 찾아볼 수 없기 때문에 현재의 미국은 청나라에 해당될 것이다. 중국이 명에서 청으로 바뀌듯 미국도 ‘아름다울 미(美)’에서, 지구촌의 ‘곰팡이 미(黴)’로 바뀌는 것이다.북한의 김정은 정권이 요구하는 핵심사항은 ‘적대시 정책과 핵 위협의 종식’이라고 볼 수 있다. 과거 제네바 합의나 6자회담의 9·19공동성명의 ‘핵무기 불위협, 불사용’이나 ‘불공격, 불침공’에서 한 걸음 더 나간 것이다. 과거 협상에서 수세적으로 ‘현상 유지’를 요구했다면 이제는 공세적으로 ‘현상 변경’을 요구하는 것이다. 사실 트럼프 대통령은 트위터를 통한 협박성 멘트를 앞세워 동맹국들에 값비싼 첨단무기 구매를 압박하여 미국 군수산업체들의 배를 불리고 있고, 무역협상에서 미국에 유리하도록 만드는 장사꾼에 다름없다.지금 역사는 반복되고 있다. 조선의 길은 남한의 길로, 명, 청의 길은 미국과 중국의 길로. 보름달은 지금 다시 떠오르고 있건만. 500년 종교개혁의 음성이 들리건만, 아, 남한산성이여! 아, 한국의 교회여!! 최 병학 목사 (남부산용호교회 담임) *이 글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문화
    • 문화펼치기
    2017-10-30
  • [문화] 최병학 목사의 문화펼치기 31 : 양극화
    1. 갑질과 마름: 중간 착취자의 나라 ▲ 영화 <군함도>의 마름 최근 우리 사회에 문제가 된 ‘갑질’은 전통사회에서 양반이 상놈을 부려먹는 작태가 왜곡된 방식으로 되살아난 것이다. 그리고 상놈끼리 서로 하대하는 ‘졸질’도 있다. 상놈끼리는 상대방이 이룬 성취가 하찮아 보이기 때문에 서로가 서로를 우습게 보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의 갑질은 대부분 졸질의 변형이다. 그리고 이러한 갑질이 가능한 것은 빈부의 격차,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차별, 사회의 양극화 때문이다. 『중간착취자의 나라: 비정규 노동으로 본 민주공화국의 두 미래』 (미지북스, 2017)에서 저자인 이한 변호사는 이렇게 말한다. “비정규직 제도가 개별 기업이 비용을 줄이는 데 도움이 될 수도 있다는 점은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개별 기업이 비용을 줄인다고 해서 그것이 꼭 그 사회의 생산성이 높아진다는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와 정반대로 일자리의 대부분을 비정규직으로 채워 넣을 경우 그 사회의 생산성을 낮게 만든다는 유력한 근거들이 있다.” 이한 변호사는 이 책에서 비정규 노동과 이와 얽혀 있는 아웃소싱(외주), 파견, 위장 도급 전문 인력중개·공급업자, 그리고 그 위에 구축돼 있는 망국적 착취구조, 곧 인력중개·공급업자(업체)를 분석하며 중간착취자의 실체를 선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이를 위해 조선과 일제 강점기에 번성했던 지주-소작제의 핵심 장치였던 ‘마름’을 소개한다. 사실 마름은 소작인과 지주를 연결해주는 서비스를 제공하고 그 대가를 받았다. 가령 중개 수수료를 한 번 받고 끝나는 부동산중개업자와는 달리 마름은 중개가 끝난 뒤에도 지주-소작 관계가 유지되는 동안 계속 그 대가를 받았다. 생산과 관련해 마름이 하는 역할은 아무것도 없었다. 마름에게는 자신의 기간설비도, 장비도, 경영계획도, 노하우도, 전문기술도 없었다. 그럼에도 소작인이 지주에게 바치는 소작료에는 지주가 마름을 육성·지원할 때 들이는 비용까지 포함돼 있었다. 따라서 소작인은 지주와 마름에게 이중으로 착취당한 것이다. 이러한 가혹한 이중착취 결과로 소작인은 농업기술 혁신·숙련 등을 통해 생산성을 끌어올릴 생각 자체를 포기했다. 더 생산해봤자 지주와 마름이 다 뜯어갔기 때문이다. 겨우 먹고살 정도만 남겨두고 다 가져가기 때문에 혁신을 위한 축적의 여지도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는 생산성 발전이 없거나 아주 느리게 진행된다. 따라서 마름은 개별 지주에겐 큰 이익을 안겨주었지만, 나라 전체의 ‘국민경제’ 관점에서는 발전을 가로막은 기생적 중간착취자였을 뿐이다. 그럼에도 지주가 마름을 육성한 것은 소작인들과의 직접 대면을 피하고 그들의 교섭력을 파괴하기 위해서였다. 소작인들이 요구사항을 들고 지주를 찾아가면 지주는 이렇게 말한다. “당신들과 계약관계를 맺은 것은 내가 아니라, 마름이니 그리로 가라.” 소작인들은 마름을 찾아간다. 그러면 마름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실질적인 결정권이 없고, 당신들 요구를 들어주면 나는 마름 노릇을 할 수 없고 그렇게 되면 당신들도 소작을 부칠 수 없게 된다.” 마름은 철저히 지주의 이익을 위해 존재한다. 문제는 그런 식의 지주 이익 확보가 나라 전체의 이익과는 배치되고 사회 발전을 가로막으며, 구성원 대다수의 이익과 정의와 행복을 망가뜨린다는 데 있다는 것이다. 이한 변호사는 이렇게 말한다. “기업이 교육 훈련에 투자를 많이 하면 할수록 경제적 성과와 노동생산성이 늘어난다. 그리고 교육 훈련은 고용 관계의 안정성이 높아야 효과적으로 이루어지며, 이것은 다시 노동생산성 상승으로 이어진다. 반면에 비정규직 비율이 높으면 이직률이 높아지고, 교육 훈련율이 낮아지며, 노동생산성 향상에 부정적인 효과를 미친다. 다시 말해, 비정규직이 많아질수록 기업들의 생산성과 그 사회 전체의 생산성은 낮아진다.” 보이는가? 조선시대의 마름이 오늘날의 비정규 노동자들을 공급·관리하는 인력공급업체라는 것이? 지주는 자본가(기업), 소작인은 노동자이다. 대한민국은 이러한 ‘중간착취자의 나라’였던 것이다. 갑질은 바로 여기서 시작된다. 사실 헌법이나 근로기준법,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 직업안정법 등은 이런 중간착취를 금하고 있다. 하지만 이 원칙은 제대로 지켜지지 않고 있다. 기가 막힌 것은 중간 인력공급업체는 마름처럼 생산을 위한 아무런 자체 기간설비도, 장비도, 경영계획도, 노하우도, 전문기술도 없다. 단지 사용자 즉 원청업체의 노동자 직접 고용과 관련 법적 규제를 회피하게 해주는 사실상의 인력관리 대행업자 역할을 하면서 번성하는 ‘중간착취자’, ‘기생충’일 뿐이다. 설비도 노하우도 돈도 사실상 다 대는 원청업체가 이처럼 인력공급업체를 앞세워 간접고용 형태를 취하는 이유는 바로 노조와의 직접 대면을 피할 수 있고, 인력조정과 낮은 임금 유지에 유용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비정규직 문제도 자본(기업)과 비정규직 간 모순에서 나오는 ‘비정규직 고유의 문제’이지, 사용자와 언론이 유포한 정규직-비정규직 간 갈등이나 ‘정규직 과보호’에 따른 노동자 간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물론 비정규직 제도는 고용과 정리해고를 통해 산업구조 변화에 신속하게 대응할 수 있게 하고, 수요 변화나 생산여건 변화에 탄력적으로 대응할 수 있게 해줘 산업 활동과 취업 기회를 높이는 등의 긍정적 기능을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기간제 비정규직의 직접고용’을 통해 달성할 수 있으므로, 도급이나 파견 등 간접고용을 해야 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따라서 이한 변호사는 이렇게 말한다. “결국 경제 효율성과 정의의 원칙을 만족시키려면 이렇게 편법을 동원하는 노동압착과 착취를 타파하고, 사회 전체의 생산성을 높여 그 결과물을 모두에게 이익이 되는 쪽으로 분배해야 한다. 모두에게 이익이 되는 공정한 협동의 조건을 구현하기 위해서는, 증가된 생산물을 비정규 노동자처럼 불리한 여건에서 가장 많은 부담을 지는 이들에게 더 많이 배분(전체 평균의 1.3배)해야 한다.” ‘특권층이 나머지 구성원을 지배하고 억압하는 고비용 저효율의 병영국가’가 될 것인가?, ‘공정하고 협동하는 공화국’이 될 것인가? 대한민국은 지금 기로에 서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지금까지 한국 사회의 기득권층은 병영국가 쪽으로 나라를 이끌어 왔다. 그만큼 새하늘 새땅은 멀다는 이야기이다. 2. 양극화와 펭귄 프로젝트 ▲ <양극화 만평> 현재 영미권에서 가장 주목받는 사회심리학자인 조너선 하이트(Jonathan Haidt)는 도덕심리학의 세 가지 원칙을 이야기한다. “첫 번째 원칙은, 직관이 먼저고 전략적 추론이 그 다음이다.” 우리는 보통 믿고 싶은 것이 있을 때, “이걸 믿어도 될까?”라고 물으며 믿어도 되는 이유는 찾지 않고, 믿고 싶지 않은 것이 있을 때는 “이걸 믿어야 해?”라고 물으며 믿지 않을 이유를 찾으려 한다. 어떻게 보면 우리는 두 개의 별개의 믿음 매트릭스에서 살아가고 있고, 그렇기 때문에 논쟁이 늘어나는 것이다. 간단히 말하자면 직관과 추론의 분리를 뜻한다. 도덕심리학의 “두 번째 원칙은, 바른 마음에는 다양한 힘이 있다.”는 것이다. 배려(Care), 공평함(Fairness), 자유(Liberty), 충성(Royal), 권위(Authority), 신성함(Sanctity) 등 도덕의 기반이 되는 가치들은 여러 가지이다. 그리고 진보와 보수는 이 중에서 각각 선호하는 가치가 다르며 같은 가치라도 다르게 해석한다. 가령, ‘공평함’이라는 가치에 있어서 진보는 1%의 사람이 전체 부의 43%를 가지는 것이 문제라도 본다. 그러나 보수는 기여한 바에 따라 가져가는 것이 공평하며 기여하지 않은 사람에게 혜택을 주는 것이 부정한 것이라고 본다. 재미있는 것은 위 6가지 가치 가운데, 좌파는 ‘배려’를 가장 중요하게 여기고, 다른 가치들(가령, 충성이나 권위, 신성함)에 대해서는 큰 의미를 두지 않는다. 반면 보수는 6가지 가치를 모두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도덕심리학의 제3원칙이 등장한다. 하이트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바른 마음은 개인보다 집단의 차원에서 더 강력하다.” 지구상에서 혈연관계 없이도 집단적 협력을 보여주는 유일한 동물이 인간이다. 역사를 돌이켜 보면, 인류는 항상 무언가를 중심에 두고 모일 때 효과적인 팀워크를 발휘해왔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류처럼 플러스극과 마이너스극이 생기고 서로 상대방을 악마로 취급해왔다. 가령, 고대 마니교의 세계관에서 세계는 선과 악이 싸우는 전쟁터로, 선의 반대쪽인 악이 제거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하지만 이런 극단적인 대립이 심해지면 우리는 상대방과 함께 무언가를 할 수 없게 되고 민주주의는 더 이상 발전하지 못하게 된다. 따라서 하이트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양극화가 심해지면 기본적인 인간에 대한 예의가 사라진다. 그리고 사회 전체의 신뢰도가 떨어진다. 이에 대한 고민은 한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 국가들 모두 고민해야 할 문제이다.” 사실 세계적 홍보컨설팅 기업 에델만은 2000년부터 매해 각국의 정부기관, 기업, 비정부기구(NGO), 미디어 등 4개 사회주체에 대한 신뢰도를 측정해 스위스 다보스포럼에서 발표해 오고 있다. 에델만코리아의 ‘2017 에델만 신뢰도 지표 조사(2017 Edelman Trust Barometer)’ 를 보면(조사는 2016년 10월13일~11월16일 조사됐으며, 총 1150명이 참여했다.) 한국인들의 정부, 기업, 미디어, NGO 등 4개 사회주체에 대한 평균 신뢰도는 38%로 나타났다. 전 세계 편균은 47%였는데, 크게 밑도는 수준인 셈이다. 조사 대상 28개국 중 23위를 기록했다. 에델만은 이 조사에서 60~100%는 신뢰국가, 50~59%는 중립국가, 49% 이하는 불신국가로 분류한다. 즉, 한국은 불신국가에 포함됐다. 특히, 기업 신뢰도가 낮은 것으로 조사됐다. 지난해에는 33%였는데, 올해는 29%로 나타났다. 조사 대상 28개국 가장 낮은 성적이다. 기업 CEO에 대한 신뢰도 역시 24%로 나타나 지난해 35%와 비교해 11%p 떨어졌다. 정부 신뢰도도 큰 폭으로 떨어진 것으로 조사됐다. 올해 국민의 정부 신뢰도는 28%로 지난해(35%)보다 7%p 떨어졌다. 전세계 평균치는 41%인데, 절반을 조금 넘는 수준인 셈이다. 정부 신뢰도는 28개국 중 22위에 기록됐다. 정부 관계자에 대한 신뢰도는 17%로 전년(27%)보다 10%포인트 추락한 것으로 나타났다. ‘시스템이 제 기능을 하고 있다’고 답한 이들은 11%에 불과했다. 한국인 48%는 ‘사회 시스템이 실패했다’고 답했고, ‘사회 시스템에 확신이 없다’고 답한 이들도 41%에 달했다. 국민 10명 중 9명은 한국의 사회 시스템을 부정적으로 보고 있는 셈이다. 펭귄 프로젝트가 있다. 2016년 강남역 살인사건 이후 여성 혐오 문화를 바꾸기 위해 대학 캠퍼스에서 벌어진 운동이다. 성폭력, 여성혐오에 반대하며 수도권 대학 12곳의 20여 단체가 함께하는 연합운동인데, 이 운동이 특이한 것은 ‘용기’와 ‘연대’의 뜻을 펭귄의 습성에서 가져왔다는 것이다. 가령, 펭귄 가운데는 무리를 위해 먼저 바다에 뛰어드는 ‘퍼스트 펭귄’이 있는데, 이는 용기를 보여준 것이며, 또한 영하 70도 남극의 추위를 이겨내기 위해 서로 밀착하여 살을 맞대고 온도가 낮은 바깥쪽 펭귄들이 안쪽으로 조금씩 자리를 바꿔가며 이동하여 체온을 유지하는 펭귄의 ‘허들링(Huddling, 물결처럼 안과 밖의 위치를 바꾸는 것)’은 연대의 중요성을 알려준다는 것이다. 양극화의 세상이 펭귄의 용기와 연대의 정신으로 어떻게 변해야하는지를 잘 보여준다. 3. ‘멈춤, 낮춤, 갖춤, 맞춤.’ ‘멈춤, 낮춤, 갖춤, 맞춤.’ 인간의 욕심에서 비롯된 계란 파동에 관해 대증요법(symptomatic therapy)이나 미봉책으로 어물쩍 넘기지 말고 근본대책을 강구해야한다며 한양대 유영만 교수가 제안한 네 가지 ‘춤’이다. 이것은 계란 파동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아주 중요한 인문학적, 신앙적 통찰이 될 것이다. 첫째, 멈춤. 유영만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춤은 멈춤의 연속이다. 멈춤이 없이 추는 춤은 춤이 아니다. 끊임없이 물 흐르듯 이어지는 춤은 사실 멈춤의 연속이다. 멈춤은 다음 동작을 위한 짧지만 깊은 성찰의 시간이자 어디로 가야 할지 방향을 결정하는 결연한 순간이다. 멈춰 있지만 사실은 치열하게 고민하고 사유하는 시간이다.” 그렇다. 검도에도 ‘중단 겨눔’이 있다. 멈춰 있지만 상대의 마음을 읽어내는 치열한 전투의 시간이다. 다음 전투를 위한 치열한 멈춤이자 푹풍전야의 긴장감이 감도는 순간인 것이다. 둘째 낮춤. “모든 춤은 자신을 낮추면서 세상을 끌어안고 우주에게 마음을 열고 자연과 대화하는 몸동작이다. 나를 낮추고 상대를 높이면 저절로 나도 높아진다. 자세를 낮추면 자신의 인격은 올라간다. 낮춤은 겸손함을 표현하는 자세이자 다름을 포용하겠다는 태도다. 낮춤 없이 추는 춤은 허공에 들떠 떠다니는 환상이나 망상의 춤이다.” 세 번째 갖춤. “모든 춤은 춤의 기술과 기교 이전에 갖춰야 될 게 있다. 춤의 본질에 대한 깊은 이해는 물론 춤을 추는 사람의 자질과 품격이다. 격이 있는 춤은 기법과 기교의 산물이 아니라 춤에 임하는 사람의 자세와 자질, 품성과 인격의 문제다. 춤은 나를 세상에 드러내는 매개체다. 내가 추는 춤이 바로 나다. 춤은 내가 살아온, 살아가는, 살아가고 싶은 삶을 표현하는 욕망의 분출구다.” 네 번째 맞춤. “맞춤은 상대의 아픔에 귀 기울이고 들어보려는 경청의 자세이자 상대의 마음을 헤아려 하모니를 이루어보려는 노력이다. 맞춤은 나를 먼저 드러내기보다 상대를 위해 내가 무엇을 도와주고 지원해줄 수 있을지 알아보려는 애쓰기다. 맞추지 않고 추는 춤은 자기 욕구만 일방적으로 발설하는 난장판의 춤이다.” 우리의 신앙에 이 네 가지 춤이 필요할 것이다. 니체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한 번도 춤을 추지 않는 날은 헛된 날이 되게 하라.” 우선, 멈춤은 인간의 욕망에 대한 멈춤일 것이다. 그리고 낮춤은 인간의 교만에 대한 적절한 대안이다. 갖춤은 인간을 넘어 종들 간에 대한 예의를 갖추는 것이며, 맞춤은 사람다운 세상을 위해 필요한 덕목들을 갖추는 것이다. 따라서 갑의 갑질도 없어야 되겠지만, 을들이 을들끼리 서로에게 졸질 하는 세상이 아니라, ‘최고의 갑중에 갑’이신 창조주께서 ‘을 중의 을’이 되신 성육신 사건의 중요성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또 며느리는 나이 드신 시부모에게 갑질 하지 않는 것, 친구들끼리 갑질 하지 않는 것, 조금 불편한 사람을 다르다고 갑질 하지 않는 것, 땀 흘려 일하시는 노동자들의 그 땀 냄새가 역겹다고 갑질 하지 않는 것, 아파트 입주민들이 경비원 아저씨에게 반말하며 갑질 하지 않는 것, 주유소나 편의점 등에서 알바하시는 분들, 비정규직이라고, 전임이 아니라고 갑질 하지 않는 것, 직분 받았다고, 출세했다고 갑질 하지 않는 것 이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언젠가 정말 큰 갑질은 최고의 갑인 신께서 반드시 심판 하실 것이다. 최 병학 목사 (남부산용호교회 담임) *이 글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문화
    • 문화펼치기
    2017-09-25
  • [문화] 최병학 목사의 문화펼치기 30 : 진화생물학과 진화심리학
    1. 진화, 목적론과 기계론 사이에 19세기까지 세계를 바라보는 시선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만물이 신에 의해 계획되고 신에 의해 종말을 맞을 것이라는 ‘목적론’이고, 다른 하나는 우주만물은 시계와 같이 기계적인 법칙에 의해 움직인다는 데카르트의 ‘기계론’이었다. 그러나 1875년 찰스 다윈(Charles Darwin)의 『종의 기원』이 출판되고, 진화론의 등장은 두 세계관에 엄청난 충격을 준다. 진화론의 핵심은 ‘적자생존(適者生存)’이다. 적자생존은 특정한 환경에 적응을 잘하면 살아남고, 그렇지 못하면 도태된다는 것인데, 이 방향을 예측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신의 목적에 의한 세상’과 ‘기계적으로 맞물려 돌아가는 세계’가 이제 돌발 상황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이다. 물론 다윈은 자연도태를 맞이하여 우리 인간은 이러한 자연의 냉혹함 속에서도 비인간성을 극복하기 위해 공동체를 구성하고 복지 정책을 베푼다는 변명 아닌 변명을 하긴 한다. 2. 진화의 산물, 도덕성? 리처드 도킨스(Richard Dawkins)은 『이기적 유전자』 (을유문화사, 2010)에서 “모든 생명의 역사는 성공적인 자기 복제를 위한 DNA의 일대기이며, 인간의 몸은 DNA의 자기 복제를 위한 그릇이다.”라고 말한다. 곧, 인간의 본성과 의식, 문화 등 우리가 인간적인 특성으로 간주하는 모든 것들이 유전자가 정해준 범위 내에서 일어난다는 것이라는 말이다. 진화생물학자 최재천 교수도 『통섭의 식탁』 (명진출판사, 2011)에서 “인간의 자기희생적이고 이타적인 행위도 더 효율적으로 디엔에이를 복제하고 확산하려는 이기적 유전자가 시킨 것이다.”라고 말한다. 적어도 DNA의 관점에서는 ‘자기희생적 이타성’은 ‘자기중심적 이기성’과 상충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도덕성도 진화의 산물이라는 말인데, 왜 우리 사회는 도덕적이지 않은 인간들이 지배자가 되는 것일까? 최재천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그건 일시적인 거다. 우리가 이 순간 사회가 썩었다고 얘기하면서도 한편으로 끊임없이 도덕을 얘기하는 이유가 뭘까. 그건 우리가 도덕적인 조상의 후손이기 때문이다. 도덕적인 사람들이 궁극적으로 더 잘 살았기 때문에 우리가 그들의 후손으로 여기 살아남은 거다.” 가령 돌고래를 통해서도 이러한 도덕성을 볼 수 있는데, 수컷 돌고래에게 제일 힘든 점이 뭐냐면, 혼자서는 암컷과 짝짓기를 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망망대해에 무슨 막다른 길도 없고 암컷 돌고래가 도망가면 혼자서는 잡아 세울 도리가 없다. 그래서 수컷 두세 마리씩 짝패를 만들어서는 한 마리 암컷을 놓고 양쪽에서 방향을 제어하며 쫓아간다. 몇 시간 지나서 암컷이 더 이상 도망가기를 포기하면, 둘 중에 한마리가 짝짓기를 하고 다시 새로운 암컷을 찾아 나서는데, 이때는 아까 못한 수컷이 짝짓기를 한다. ‘아까는 네 차례고 이번엔 내 차례야.’ 이런 계약이 암묵적으로 체결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데 호주 샤크 베이에서 연구한 결과 신기한 게 발견되었다. 간혹 얌체 같은 놈이 있는 것이다. 자기가 먼저 짝짓기를 하고는 계약을 깨고 도망 가버리는 수컷이 있는 것이다. 먹고 튀는, 먹튀 돌고래이다. 그런 얌체 짓을 몇 번 하다 보면 돌고래 사회에 그놈에 대해 평판이 돈다. 이후 사랑의 추격 팀에는 그 돌고래를 끼워준다. 두 마리가 쫓아가는 것보다 세 마리가 쫓아가면 더 유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암컷에게 다가갈 순서가 되면 그놈을 탁 쳐낸다. “넌 안 돼! 팀에는 끼워주지만, 너 같은 놈은 우리 사회에선 안 돼.” 이렇게 ‘평판’이라는 것을 통해 돌고래 사회에서 도덕은 진화의 산물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인간도 씨족사회, 부족사회처럼 옆집 숟가락 개수도 알던 사회에서는 평판이 어마어마하게 중요했다. 25만년 인류의 역사에서 야비한 사람들이 성공한 기간은 길지 않다. 25만년 중에 우리가 농경을 한 것이 최근 1만년인데, 농경사회로 접어들고 산업사회가 되면서 야비한 사람이 득세를 하기 시작했지만, 이런 사람들의 권력은 그리 길지 않다(지금 우리나라 기준으로는 10년 정도?) 인간과 같은 사회성 동물이 도덕적인 추구를 멈출 리는 없다. 따라서 도덕성도 진화의 산물인가? 3. 번식 수단인 종교? 짝짓기, 번식, 연애 등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본능이 표출되는 행위를 진화심리학의 관점으로 풀어쓴 『인간은 야하다: 진화심리학이 들려주는 인간 본성의 비밀』 (21세기북스, 2012)에서 진화심리학자 더글러스 켄릭(Douglas T. Kenrick)은 “추측건대 우리의 마음은 미녀와 권력자를 찾아내게 되어 있다. 왜냐하면 우리의 조상들은 ‘마을의 미녀’를 짝으로 맞거나, ‘거물들의 짝’이 되기 위해 경쟁해야 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TV나, 인터넷 등 대중 매체를 도배하는 연예인들의 매혹적인 외모는 실제 연인과의 관계에 있어서 좋은 영향을 끼치지는 않는다고 한다. 당황스러운 것은 종교에 관해서도 켄릭 교수는 “종교는 번식의 수단”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종교가 장려하는 일부일처제는 번식 전략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즉, ‘이성 간의 독점적 사랑’, ‘무분별한 성교 억제’ 등 일부일처제의 규범이 번식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이다. 가령, 켄릭 교수는 한 가지 실험을 했는데, 학생들에게 매력적인 이성과 동성 사진을 보여준 뒤 신앙심과 관련된 질문을 했다. 이 조사에서 남녀 모두 매력적인 이성보다, 매력적인 동성을 봤을 때 신앙심을 더 크게 표출했다. 켄릭은 “이러한 현상은 매력적인 경쟁자가 많으면 번식에 불리해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종교를 끌고 와 일부일처제란 틀 속에서 안정적으로 짝을 찾으려 한다. 성과 가족에 대한 사고방식은 종교 의식에 참석하게 만드는 원인이지, 단순히 종교적 가르침의 결과는 아니다.”라고 말한다. 흔히 ‘진화=적자생존’으로 알려져 있지만, 켄릭은 이렇게 말한다. “진화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생존이 아니라, 번식이다. 변화한 환경에 적응했다 해도 홀로 산다면 자신의 유전자를 다음 세대에 전해줄 수는 없어 진화로 보긴 어렵다. 진화론의 관점에서 볼 땐 빨리 죽더라도 짝을 유혹해 자손을 낳는 동물이 성공한 것이다.” 그러나 진화를 이끈 것이 꼭 번식을 위한 이기적 본성만은 아니다. 만약 그랬다면 지금쯤 사회는 ‘만인을 위한 만인의 투쟁터’로 변했을 터, 켄릭은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타인과의 관계에 신경 쓰고, 그들에게 선하게 행동해야 번식에도 성공할 확률이 높기에 이타적인 본성도 지니게 됐다. 따라서 진화생물학의 원칙 중 하나인 상호 이타주의는 이렇게 나오게 됐다.”라고 말한다. 4. 생물학의 수수께끼, 동성애 동물행동학이나 진화생물학으로 인간 사회를 설명하려고 하면 부딪히는 딜레마가 있다. 자식을 낳을 능력이나 조건이 안 되는 개체는 삶의 의미가 없는 것인가? 비혼 남녀나 동성애자처럼 생물학적으로 자기 유전자를 번식시킬 조건이 안 되는 사람들은 인간 생태계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 최재천 교수는 “동성애자가 왜 진화했느냐 하는 문제는 지금도 생물학계의 수수께끼다. 하지만 가장 막강한 이론 중 하나는 ‘동성애자가 필요했다’는 가설이다. 사냥을 가야 하는데 동네 남자들이 다 같이 가지 않으면 문제가 생긴다. 남은 놈이 내 부인을 겁탈할까봐. 그래서 다 끌고 가면 옆 동네 남자들이 쳐들어온다. 그런데 동성애자를 남겨놓고 가면 걱정할 게 없다. 그래서 거의 모든 인간 사회에는 동성애자들이 일정한 비율로 존재하고, 동물 사회에도 존재한다.”라고 말한다. 갈매기의 예는 무척 흥미롭다. 갈매기는 평생 해로하는 새로 알려져 있는데, 미국 캘리포니아 대학의 연구결과 갈매기의 이혼율은 30%를 넘는다는 결과가 나왔다고 한다. 과거 새끼를 키우면서 애를 먹인(먹이를 제때 물어다 주지 않는) 배우자와는 함께 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갈매기는 대개 2개의 알을 낳는데, 어떤 둥지에는 알이 4개가 있었다. 짝짓기는 다른 수컷과 하고 암컷끼리 레즈비언 커플이 돼서 함께 살기 때문이다. 통계상 갈매기 사회에 이런 둥지의 비율이 일정하게 있다는 것이다. “생물의 계통을 밝히는 연구에서는 철저하게 암컷의 계보를 따른다.”라는 증언으로 부계혈통주의를 근간으로 하는 호주제 폐지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바 있는 최재천 교수의 진화생물학적인 생각은 동성애에 대한 사회적 편견 해소도 어쩌면 자연의 섭리에 대한 과학적 이해로부터 재출발해야 함을 보여준다. 5. 호모 심비우스 공생인간(Homo symbious)을 이야기하는 최재천 교수는 이렇게 호소한다. “나는 기후 변화와 환경 파괴의 시대에 우리 인간이 살아남는 유일한 길은 우리가 ‘현명한 인간인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라는 자만을 버리고, ‘공생인간인 호모 심비우스’로 거듭나야 한다.” 호모 심비우스의 정신은 우리의 협동은 물론 이 지구 생태계에 함께 사는 모든 생명과의 공생을 우리 삶의 최대 목표로 삼자는 자성의 목소리를 담고 있다. 진화생물학자의 목표도 결국은 더불어 함께 사는 종교의 삶과 다르지 않다. 아무튼 이러한 공생의 모습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곤충이 꿀단지개미(honeypot ant)이다. 이들은 진딧물 같은 곤충들을 보호해주고 대가로 받은 단물을 저장할 마땅한 단지가 없어 몇몇 선발된 일개미들이 굴 천장에 매달려 그들의 뱃속에 단물을 담아놓는다. 이 개미 뱃속에 다른 개미들이 꿀을 집어넣으면 배가 100배 이상 커진다. 꿀단지개미는 위가 2개가 있는데, 하나는 소화를 담당하는 위이고 다른 하나는 ‘사회적 위’이다. 사회적 위는 동료들과 나눌 때 쓰려고 꿀을 저장하는 위이다. 따라서 천장에 매달린 꿀단지개미들은 먹이가 없는 겨울에는 입으로 꿀을 배출해 동료 개미들에게 영양분을 공급하는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최재천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이런 (꿀단지개미와 같은) 협력은, 인간 사회에선 절대로 불가능하다. 배고픈 건 참아도 배 아픈 건 못 참는다. 모두가 같이 희생을 감내하면 참을 수 있지만, 지나치게 불균형적으로 일방의 희생이 계속되면 협력 시스템은 깨진다. 내가 볼 때 민주주의는 효율이 가장 높은 제도는 아니지만 인류가 선택한 가장 합리적인 제도다. 희생을 평준화해서 골고루 나누고 어느 일방이 혼자 손해 보지 않게끔 하는 것, 그것이 협력을 촉진하는 기반이다. 민주주의는 진화의 결과물이다.”라고 말한다. 지금 지구상에서 가장 성공한 공동체인 인간, 개미, 흰개미, 꿀벌 등은 모두가 협력 할 줄 아는 동물들이다. 그러나 바퀴벌레나 모기한테는 협력이 없다. 따라서 고도로 협력할 줄 안다는 것은 우리 인간들의 행복의 근원이 된다. 그리고 그 협력에는 희생이 따른다. 누군가가 더 희생을 했기 때문에 협력 관계가 유지되고, 공동체가 살아난 것이다. 따라서 기독교 신앙적으로 25만년 역사를 되돌아보면 ‘꿀단지 예수’의 자기희생의 십자가 사건이야말로 우리 인간들이 지금도 살아가는 행복의 근원인 것이다. ▲ <천장에 매달린 꿀단지개미들> ▲ <꿀단지 개미 뱃속에 가득찬 꿀> 뱀꼬리: 진화론이 사회진화론으로 변하게 되면? 『독립신문』 (1899.11.9.)에서 윤치호는 “동양의 황인종이 하나로 뭉쳐 일본을 맹주로 하여 백인의 농락과 침탈에 맞서지 않는다면 다들 서양인의 노예가 될 것이다.”라고 말한다. 『황성신문』 (1904.5.11.-13)에서도 윤치호는 “같은 황인종의 형제인 일본과 한국의 동맹은 동양평화의 기초다. 우리가 일본을 확실히 믿어 우리의 제도를 고치고, 일본이 우리의 독립과 영토를 러시아 등의 야수로부터 지켜주게 된다.”라고 말했다. 『개벽』 (1922)에서 ‘민족개조론’을 외쳤던 춘원 이광수도 “열등한 민족성을 지닌 조선인이니 당장 독립하는 것은 시기상조요, 민족성부터 개조해야 독립할 수 있다.”라고 한다. 서구제국주의가 우수한 백인종이 열등한 인종들인 황인종과 흑인종을 지배하는 것이 자연의 거스를 수 없는 과학적인 사실이라는 ‘사회 진화론’을 무기로 동양을 침탈할 때, 동양의 민족주의는 그 제국주의 앞에서 무너지며 대다수의 지성인들은 독립운동보다는 오히려 제국주의 침탈에 순응하는 길을 택했다. 일본은 이러한 서양의 사회진화론에 대항하여 ‘사무라이 진화론’을 통해 ‘일본인은 개인적으로는 서구인들보다 열등하지만 집단적인 정신력으로는 국가 간의 경쟁에서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다. 더 나아가 일본인들은 백인종들의 침략으로부터 멸종할 수밖에 없는 동양인종, 특히나 중국과 조선을 지키는 것이 그들의 사명이라 인식했다. 이러한 사회진화론은 20세기 들어 생물학적, 사회적, 문화적 현상에 대한 지식이 증대되면서, 그 이론구조가 배격됨으로써 쇠퇴하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인간은 단지 약육강식과 적자생존의 진화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의 존엄성과 그들 간의 협력인 곧, 호모 심비우스로 살기 때문이다. 최 병학 목사 (남부산용호교회 담임) *이 글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문화
    • 문화펼치기
    2017-08-28
  • [문화] 최병학 목사의 문화펼치기 29 : 핵
    1. 늑대를 잡는 법 에스키모인들은 늑대를 잡을 때 칼을 잘 갈아서 날카롭게 만든 다음 칼날에 동물의 피를 흠뻑 묻혀 얼린다. 그리고 날카로운 칼날이 위쪽으로 오도록 향하고 땅속에는 칼의 손잡이를 박아놓는다. 그러면 피 냄새를 맡은 늑대들이 와서 칼날을 핥는다. 얼어서 무감각해진 늑대의 혓바닥은 어느새 날카로운 칼날에 혀를 베이게 되고 늑대는 자신의 피 맛에 끌여 더욱더 빠른 속도로 칼날을 핥는다. 죽음에 이를 때까지 말이다. 피 냄새에 이끌려 이성을 잃는 순간 늑대의 일생은 끝나게 되는 것이다. 지난 박근혜 정부는 후쿠시마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핵발전소 정책을 펼쳤다. 2035년까지 원전을 현재 23기에서 최소한 39기 이상으로 늘리는 것을 뼈대로 한 에너지 정책을 공식화했던 것이다. 유럽연합 등 선진국들은 세계 최고의 핵 기술과 안전시스템을 자랑하는 일본의 후쿠시마 사태를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지만, 정작 일본의 이웃 나라인 대한민국은 태연하다. 국가권력과 야만적 기업가들에 의해 지속되는 핵발전소는 희망이 들어있는 판도라의 상자가 아니라, 인류가 손에 넣어서는 안 되는 두 번째 선악과이다. 따라서 후쿠시마 원전 사고(와 경주 지진)는 인류에게 보내는 하나님의 경고요, 지구생명의 경고이며, 칼날에 묻은 자신의 피를 핥는 어리석은 늑대와 같은 우리들에게 들려주는 마지막 음성이다. 다행스럽게도 지난달 6월 19일, 고리원전 1호기가 영구정지 됐다. 건설 중인 신고리 5,6호기도 잠정적으로 건설을 중단하고, 사회적 공론화를 거쳐 진행 여부를 결정하겠다고 한다. 문재인 정부 들어 그나마 탈원전 기조로 돌아선 것이 다행이다. 2. 핵분열과 방사능 자연계에 존재하는 모든 물질은 93가지 원소로 되어 있다. 가장 가벼운 것이 원자번호 1번인 수소이고, 가장 무거운 것은 원자번호 93번인 우라늄이다. 그 가운데에는 산소, 질소, 칼슘, 철, 알루미늄, 납, 금, 은 등이 있다. 우주가 탄생했던 빅뱅과 함께 원자번호 1번의 수소가 탄생했고, 높은 온도와 압력, 초신성 폭발 등의 과정을 통해 현재 우리의 세상을 이루고 있는 다양한 원자들이 태어났다. 이들 원소들은 상온에서 기체, 액체, 고체로 존재하는데, 서로 결합하여 물, 돌, 나무 등 온갖 생물과 무생물을 이루게 된 것이다. 그런데 우라늄이라는 원소는 방사선을 내뿜는다. 그리고 이러한 능력을 방사능이라고 한다. 예를 들어 비행기를 타거나 엑스레이를 촬영할 때 혹은 전자레인지 앞에만 있어도 방사선에 노출된다. 그러나 이러한 방사능으로 우리 몸이 피해를 입을 가능성은 지극히 낮다. 문제는 인공 방사능이다. 과학자들은 우라늄-235에 열중성자를 부딪치면, 많은 에너지가 발생하는 ‘핵분열 반응’을 발견하게 된다. 핵분열이란 원자핵이 중성자에 의해서 쪼개지면서 많은 열에너지가 발생하는데, 이러한 핵분열 반응은 이후 핵 연쇄반응을 통해 ‘핵발전’과 ‘핵무기의 기반’을 만들게 된다. 가령, 원자핵이 가지고 있는 에너지를 순간적으로 발산시키는 것이 핵무기이고, 그것을 천천히 발산시켜 전기에너지로 바꾸는 것이 핵발전인 것이다. 따라서 엄밀히 따져보면, 핵무기와 핵발전의 뿌리는 하나이다.¹ ▲ 핵분열의 원리 과학자들은 아프리카 가봉의 오클로(Oklo)에 있는 한 노천 우라늄 광산에서 수십만 년 동안 우라늄-235가 스스로 핵분열 했다고 본다. 그리고 그 핵분열이 멈춘 지 20억 년이 지난 후, 인간들은 1942년 미국 시카고 대학의 운동장 한구석에 최초로 인공 원자로를 설치했고, 사상 처음 핵분열에 따른 연쇄반응 실험을 성공시켰다. 그리고 인간들이 이러한 압도적인 힘인, 핵에너지로 가장 먼저 한 일이 ‘폭탄’을 만드는 일이었다. 1945년 7월 16일 미국 뉴멕시코 주의 ‘죽음의 여행’이라는 뜻을 가진 사막에서 첫 핵폭탄 실험이 실시되었고, 20일이 지난 45년 8월 6일 히로시마 상공에 리틀보이(소년)란 암호명의 두 번째 핵폭탄이 터졌고, 며칠 후 나가사키(원래 고쿠라에 투하 예정이었으나)에 팻맨(뚱보)이라는 세 번째 핵폭탄이 투하됐다. 각각 16만 명과 8만 명이 죽었는데, 놀라운 것은 원자폭탄 피해자의 10분의 1은 일제에 의해 강제로 끌려갔던 조센징(朝鮮人)들이었다. 이 분들과 그 자손들은 오늘도 사람들의 망각과 무관심 속에 고통 받으며 살아가고 있지만 전혀 소개되지도, 알려지지도 않았다. 아무튼 놀라운 것은 핵발전용 연료인 우라늄이나 플루토늄이 핵분열하는 과정에서 1천7백여 종에 달하는 방사능이 나온다는 것이다. 그중 20종은 인체에 특히 위험한 방사능이라고 할 수 있다. 대부분 인체에 세균이 침투하면 인체 면역 체계가 작동돼 스스로 방어하지만 방사능은 예외이다. 그리고 방사능은 암 발생률을 증가시키고 백혈병을 유발하고 각종 질환을 유발시킨다. 게다가 분열하는 염색체에 이상을 일으켜 돌연변이도 발생하게 만든다. 폭탄으로도 위협적이고 방사능으로도 치명적인 핵은 한마디로 제2의 선악과인 것이다. 침범할 때 엄청난 대가가 따르는! 3. 하늘의 불과 하나님의 경고 일본의 시민과학자 다카기 진자부로(高木人三郞)는 원자력을 ‘하늘의 불’로 본다. 절대로 지구상에서 태워야 하는 불이 아니라는 것이다. 밤하늘에 빛나는 별은 핵분열로 원자의 불이 타고 있다는 것이다. 핵분열이 별을 빛나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하늘의 빛, 빛나는 별빛은 모두 하늘의 불, 우주의 불이다. 그리고 이런 곳에서는 생물이 살 수 없다는 것이다. 사실 지구는 태고시대에 우주의 부스러기로 이루어졌는데, 생성되었을 당시는 많은 방사능을 가지고 있었다. 말하자면 하늘의 불이 남아, 지구에 죽음의 재가 가득 차 있었던 것이다. 지구는 이러한 타고 남은 찌꺼기로 만들어졌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처음에는 꽤 강한 방사능이 많이 남아 있어서 지구에 생물이 살 수 없었다. 아주 원시적인 생물이 생기는데 10억 년 정도가 걸린다. 그리고 방사능이 식은 후에야 마침내 생물이 살 수 있게 된다. 이렇게 생물이 살 수 있게 된 지구에 다시 인간은 인공적으로 새 방사능을 만들어서 방사능의 불을 일으킨 것이 바로 핵발전이다. 확실히 하늘의 불을 훔친 인간의 오만은 그 벌을 받게 되는데, 그리스 신화가 이것을 잘 보여준다. 제우스로부터 인간에게 불을 훔쳐다 준 프로메티우스는 매일 간이 독수리에게 쪼아 먹히는 형벌을 받는다. 어쩌면 우리 사회에 사람들의 간이 안 좋은 것은 모두 북한의 핵무기와 남한의 핵 발전 때문이 아닐까? 하늘의 불을 훔친 프로메테우스처럼?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네가 북두칠성의 별 떼를 한데 묶을 수 있으며, 오리온 성좌를 묶은 띠를 풀 수 있느냐? 네가 철을 따라서 성좌들을 이끌어 낼 수 있으며, 큰곰자리와 그 별 떼를 인도하여 낼 수 있느냐? 하늘을 다스리는 질서가 무엇인지 아느냐? 또 그런 법칙을 땅에 적용할 수 있느냐?(욥38:31-33)” 다카기 진자부로는 위에 인용한 욥기에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에 영감을 받았다. 욥은 이유 없이 고통을 받았다. 따라서 욥은 하나님께 항의를 한다. 그러자 폭풍이 몰아치는 가운데 하나님이 나타나 욥에게 묻는다. 핵심은 이것이다. 자연계는 인간이 만든 것도 아니고, 인간이 속속들이 아는 것도 아니다. 인간은 자연의 한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신이 욥에게 묻는 다. 너는 그것을 아느냐고, 자연의 깊이, 자연의 균형을 아느냐고, 그런 것도 알지 못하면서 오만하게 그것을 개조하려 드는 인간에 대해 하나님은 엄중한 경고를 보내시는 것이다. 핵분열은 어쩌면 하나님의 영역을 넘어서는 인간의 오만, ‘죄’라고 볼 수 있다. 사실 기독교가 말하는 죄란 ‘인간이 자신의 유한성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지난 20세기 절반의 세계 신학사상을 지배한 신학자 칼 바르트도 “인간의 범죄는 단순히 자기 자신에 대한 오류, 자기소외, 자기중심성, 자기 폐쇄성만이 아니라, 광기와 영웅주의, 하나님의 영광의 찬탈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영광을 찬탈하고 그 스스로 하나님이 되려고 한다. 이러한 혼동 속에서 죄인은 자신을 거짓 신으로 만든다.”고 통찰했다. 성 어거스틴도 “죄란 인간이 신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모든 유형의 교만”이라고 말한다. 넘어서지 말아야 할 경계선이 있는 것이다. 설사 넘을 수 있어도 넘지 말아야 할 한계선이 있는 것이다. 그것을 넘어가도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 교만이고 오만이다. 따라서 핵개발은 현대판 선악과 사건이다. 한번 실수했는데, 또 다시 실수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때는 아담과 하와뿐이었지만, 지금은 집단 지성으로 좀 더 논의하고 지혜롭게 풀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핵은, 그것이 무기이든 발전이든 결코 평화와 양립할 수 없는 것이다. 팍스로마나, 팍스아메리카나도 안되지만, 팍스뉴클레우스(Pax Nucleus), ‘핵의 평화’도 안된다. 오직 ‘그리스도의 평화’만이 지구를 살릴 것이다. 팍스 크리스티(Pax Christi) 4. 핵과 핵발전에 대한 여러 가지 오해들 사람들은 핵발전을 ‘평화용’이라든지, ‘저탄소 청정에너지이며 기후변화의 대안’, 혹은 다른 에너지 보다 ‘안전’하다고 생각한다. 동시에 우리 인간은 끊임없이 ‘전기’를 필요로 한다는 사실 때문에 핵발전을 계속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핵발전은 처음부터 군사적 이용, 즉 원자폭탄 개발을 위해 시작됐고, 수많은 나라들이 민간 핵발전이라는 덮개 아래서 핵무기를 개발했고, 하고 있다. 그리고 핵은 절대 깨끗하지도, 안전하지도, 싸지도 않다. 설사 발전부문에 국한해서 핵발전이 이산화탄소 발생량을 억제하는 효과가 있다 하더라도, 핵발전의 전 과정을 살펴보면 심각하다. 특히 우라늄의 채굴과 가공 및 농축과정에서 어마어마한 온실가스가 발생한다. 게다가 핵발전은 낭비가 심한, 대단히 비효율적인 에너지이다. 물리적으로 핵발전 과정에서는 핵분열에서 방출되는 에너지의 단 3분의 1만이 전력으로 전환되고 나머지 3분의 2는 섭씨 30도가 넘는 온배수 형태로 바다에 버려져 주변 생태계를 심각하게 오염시킨다. 핵 과학자들이나 핵 산업계 종사자들도 그것을 다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핵발전을 고집하는 이유가 있다. 바로 핵발전이 핵무기의 원료를 생산해주기 때문이다. 일본이 후쿠시마의 그 경험에도 불구하고, ‘핵발전 산업체제’를 유지하려고 힘쓰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핵발전과 핵무기는 동전의 양면이다. 물론 심각한 것은 우리가 끊임없이 전기를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한국에서 핵발전소가 9기였던 1991년에 2,321킬로와트였던 1인당 전력소비량이 2005년에는 7,403킬로와트로 세배나 증가했고, 2010년에는 네배나 증가했다. 현재는 더 심각하다. 따라서 지금까지 핵발전이라는 전기의 풍요라는 ‘단맛’을 봤다면, 이제는 ‘핵발전소의 폐쇄’와 ‘핵폐기물 처리’라는 아주 힘들고 어쩌면 고통스러운 ‘쓴맛’을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 아이들과 미래 세대를 위해서 그래야 하기 때문이다.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서 핵발전소는 반드시 폐기, 건설 중단되어야 한다. 미래세대를 위해 지금 조금 불편해도 반드시 탈핵으로 나가야 한다. 대한민국은 지금 불면증 시대이다. 새벽 세시, 네시가 될 때까지 미친 듯 깜빡이는 술집들의 네온사인, 밤을 모르는 환한 밤거리, 열두시, 한시까지 꺼질 줄 모르는 심야학원의 불빛, 야간 자율학습을 하는 방방곡곡의 학교들. 밤늦은 시간까지 쉴 새 없이 돌아가는 냉방기와 난방기들. 밤에는 잠자면 될 것을. 십자가 네온사인도 11시-4시 까지는 꺼야 된다. 예수님도 주무셔야하지 않는가! 좀 아껴쓰고, 나눠쓰고, 덜 쓰고, 다시쓰고, 바꿔쓰는 그런 지혜가 필요할 때이다. 따라서 온전한 기독교인이라면, 온실가스 방출을 줄이기 위해 대중교통을 이용하고, 모든 일회용품의 사용을 삼가하고, 공장식 축산으로 고통 받는 동료 피조물들을 기억하면서 가급적 채식을 실천하는 일을 행하면서,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대규모로 파괴하는 잘못된 정책과 과학기술에 맞서 당당하게 예언자적 목소리를 발해야 할 것이다. -------------------------------------------------------------------------- 각주1) 핵발전소를 이야기할 때 먼저, 용어를 구별해야 한다. 일본과 한국에서는 마치 ‘핵’과 ‘원자력’이 서로 다른 것처럼 홍보되어 왔다. ‘반핵’은 옳지만 ‘반원자력’은 잘못된 주장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핵은 군사용이고, 원자력은 평화용인 것처럼 선전되었다. 따라서 북한의 핵은 문제지만, 남한의 원자력발전소는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둘 다 문제이다. 북한은 “핵무기와 함께 세계 그 어느 지역도 타격할 수 있는 최강의 ‘대륙간탄도로케트’를 보유한 핵강국이 되었다”고 발표를 하고, 남한은 탈핵 논의로, 사실상 남북 모두 “핵, 핵”거리고 있는 실정이다. 따라서 원전이라는 대중적인 용어 대신, 정확한 의미를 전달하기 위해 핵발전 이라는 용어를 사용해야 된다. 같은 이유로 방폐장(方廢場)이 아니라, 핵폐기장(核廢棄場)이라고 해야 한다. 최 병학 목사 (남부산용호교회 담임) *이 글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문화
    • 문화펼치기
    2017-07-24
  • [문화] 최병학 목사의 문화펼치기 28 : 민주주의
    1. 6월 항쟁 30주년, ‘대한민국 4.0시대’의 개막 2017년 6월 10일은 1987년 6월 항쟁 30주년을 맞는 해이자, 2016년 부터 이어진 촛불혁명과 더해져 그 의미가 남달랐다. 문재인 대통령은 기념식 연설에서 “더 넓고 더 깊고 더 단단한 민주주의를 만들어가야 한다.”고 했는데, 어느덧 대한민국은 민주주의 수입국에서 419, 518, 610, 촛불혁명을 통해 민주주의의 수출국이 된 것이다. 그리고 이제 대한민국의 4.0시대가 개막했다. ‘대한민국 1.0’은 1945년 광복과 더불어 열렸고, 남북으로 갈라진 반쪽짜리였다. ‘대한민국 2.0’은 60년대 들어 시작된 압축성장의 ‘산업화 시대’와 그 뒤를 이은 민주화 시대까지이다. 김대중-노무현 정부까지로 볼 수 있다. 사실 산업화 시대의 압축성장의 폐해는 심각했다. 몸과 정신의 괴리는 컸고, 사람다운 가치는 실종이 되었으며 분열과 차별은 당연시 되었고 배려와 공감은 사라졌다. 형식주의, 학벌주의, 외모지상주의, 금전과 권세 지향주의로 인해 사회의 공공성은 크게 훼손되었다. 여기에 사대주의가 끼어들어 엘리트 중심주의까지 판을 치게 되었다. 물론 경제가 성장한 긍정적인 측면도 있다. 그리고 이후 민주화 시대를 통해 산업화 시대의 폐해가 사라지는 듯 했다. 권위가 해체되고, 지역감정이 유보되고, 사회의 공공성이 강화된 것이다. 그러나 ‘이명박근혜’의 ‘대한민국 3.0’이 되자, 다시 대한민국은 1.0때의 반쪽짜리와 2.0의 산업화 시대만이 강화되었다. 결국 “이게 나라냐?”며 외쳐온 광장의 촛불들이 새로운 세상을 만들었다. 그것이 바로 ‘대한민국 4.0’이다. ‘청년실업, 노인빈곤, 남녀-세대-지역-문화-이념 갈등’을 넘어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는 자존감의 회복이, 생명이 생명답게 존중받는 생명의 가치가 그 핵심이 될 것이다. 2. 민주주의와 기독교 민주주의(democracy)의 어원은 그리스어 demos(민중)와 kratos(지배)의 합성어이다. 즉 ‘민중에 의한 지배’라는 뜻으로, 한자어 민주(民主)가 그 뜻을 잘 드러낸다. ‘백성이 주인’이라는 뜻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근대 이전의 국가들은 대부분 왕정이나 귀족정의 형태를 가지고 있었다. 즉 집단을 다스리는 주체가, 다시 말하면 권력을 가진 사람이 1인, 혹은 극소수에 불과한 정치 형태가 일반적이었으나, 민주주의는 다스리는 집단과 다스림을 받는 집단이 일치하 는¹, ‘치자(治者)가 곧 피치자(被治者)’인 정치 형태이다. 이후 근대 시민 혁명기에 다수의 민중은 피지배 계급이 아닌 정치의 주체로 자리를 잡게 되는데, 시민, 즉 국민 스스로 국가의 정책 결정에 참여하는 정치 체제인 민주주의가 발전하게 되었고, 오늘날 대부분의 국가에서 보편적으로 적용되고 있다. 중요한 것은 지배 계급의 억압과 착취로 개개인의 ‘자유’와 ‘평등’이 침해되는 것을 최소화함으로써 ‘인간의 존엄성을 수호’하는 것이 민주주의의 궁극적인 목적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 의미로 610항쟁과 촛불혁명은 민주주의의 참 뜻을 잘 내포하고 있다. 오늘날 이 민주적이라는 말이 생활 속으로 확장이 되어 민주적이라는 말은 집단 내에서 ‘건전한 비판’과 ‘타협’이 이루어지며, 타인에 대한 ‘관용’ 정신이 잘 발휘되고 있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진다. 물론 다수결이라는 의사 결정 방식도 우리 생활 속의 민주적인 요소의 하나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민주주의의 궁극적인 목적인, ‘인간의 존엄성 수호, 자유, 평등’의 측면에서 본다면 기독교와 민주주의는 상관이 있는 듯 보인다.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셨다는 측면에서 인간 최고의 존엄성 실현이 성서이며, 자유와 평등의 문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셔서 ‘신을 배반할 수 있도록 하신 것’(?)이야말로 최고의 자유가 아니겠는가? 마찬가지로 평등은 구약 이스라엘 선민공동체와 신약의 교회 공동체의 기본 원리라고 할 수 있다. 성서야 말로 민주주의의 교과서인 것이다. 3. 이스라엘 평등공동체 원래 이스라엘은 지파들이 모인 동맹체로서 자율적 기능을 가진 지파들이 야훼종교라는 이름 아래 평등주의적으로 결합된, 사회-문화적 공동체이다. 이들은 이집트 등 고대근동의 제국주의적 지배와 가나안 땅의 봉건적 착취구조에 저항하는 민중의 혁명으로 시작되었다. 고대 근동의 촛불혁명이라고나 할까, 아무튼 이러한 이스라엘의 구성원이 되는 조건은 야훼종교의 제의, 의식, 도덕적 훈련, 이데올로기에 대한 헌신과 사회경제적 법률들에 반영된 경제적 평등주의의 실천 등이 가장 큰 요건이었다. 오늘날의 ‘경제민화화’보다 세련된 가치였던 것이다. 그리고 매 7년마다의 계약 갱신을 위한 축제 때, 모든 지파회의를 통해서 토지의 재분배가 이루어졌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사람들은 토지의 주인은 야훼뿐임을 철저히 믿었기 때문이다. “토지는 하나님의 것이고 사람은 하나님에게 몸 붙여 사는 식객에 불과하다.”(레위기 25장23절) 땅의 주인은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토지는 개인이 함부로 팔아넘길 수 없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거역하는 행위가 되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의 가장 포악한 폭군 아합 왕마저도 처음에는 한 시골 노인 나봇의 포도원을 사들일 수조차 없었다.(열왕기상 21장 참조) 부득이한 경우 땅을 팔 수는 있었으나 가까운 친척이 사주어야 하며, 그렇지 못할 경우 희년 때까지만 기다리면 자동적으로 원래의 소유자에게 소유권이 되돌아오도록 규정한다.(레위기 25장) 민주적 평등공동체의 규현인 것이다. 또한 50년째마다 돌아오는 희년은 잉여재산을 상속하여 대를 이어 부가 집중되는 것을 막는 사회적 제도이다. 이스라엘은 이렇게 이중, 삼중적 토지제도를 통하여 사회의 부가 몇몇 사람에게 집중되는 것을 막았으며, 이것을 어기는 것을 야훼 하나님께 대한 반역으로 생각하여 엄격한 금기사항으로 여겼다. 이스라엘은 다시 말하면 하나님 앞에 평등한 공동체의 삶을 살도록 제도적으로 규정하고 보완한 신정국가라고 할 수 있다. 고대 근동의 다른 국가처럼 인간인 왕이 아니라, 야훼 하나님만이 이스라엘의 통치자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정착한 팔레스틴 땅은 왕을 중심으로 한 계급적 사회였으며 경제적 불평등의 사회였다. 게다가 해양민족인 블레셋(오늘날 팔레스틴 사람인)이 팔레스틴 지방에 최초로 철기문화를 들여와, 발달된 무기로 끊임없이 이스라엘 평등사회를 괴롭혔다. 내우외환(內憂外患)이라고, 이스라엘 지파 내부에서도 분쟁이 생긴다. 사사기 21장에 보면 가장 작은 지파인 베냐민 지파와 나머지 지파들과의 전쟁 이야기가 나오는데, 지파간의 이해관계에서 갈등이 생긴 것이다. 우리식으로 말하면 지역감정이 생긴 것이다. 그리고 이 지역감정은 그 지역 내부에 빈부격차는 물론 계급착취가 존재하는 상황에서 지파간 연대의식은 사라지고, 따라서 200년이나 생명을 유지해온 이 믿을 수 없는 민주적 평등공동체는 그 막을 내리게 된다. 그 결과 왕정이 성립이 된다. 4. 제한된 왕권: 사울 왕의 경우 그러나 이스라엘의 왕권은 주변국의 왕권과 상당히 달랐다. ‘제한된 왕권’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스라엘의 왕은 예언자에 의해 임명되었고 또한 폐위당하기도 하였다. 고대근동에서는 왕권이 세습에 의해 승계되는 것을 그 특징으로 하고 있지만, 이스라엘은 왕을 임명하고 폐위시키는 권한을 민중전통의 최후 보류인 야훼종교의 지도자에게 부여함으로 왕권이 절대권력이 되는 것을 제한하였다. 또한 왕의 권한은 군사적 임무로 제한되어 있었다. 따라서 이스라엘 초대 왕인 사울은 왕이라기보다는 블레셋에 대항하기 위한 군사적 총사령관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전쟁 선포도 왕의 권한이 아니라 종교지도자의 권한이었다. 그리고 왕의 통치는 철저하게 하나님의 법에 근거해야 했다. 고대 근동의 왕들은 자기 자신이 입법자이기 때문에 왕의 통치 근거는 자신에게 있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법제정의 권한을 철저하게 야훼 하나님께 돌린다. 그리고 왕 역시 법아래 있는 존재로, 법을 두루마리에 베껴 항상 왕의 옆에 두고 읽고 그것을 실천해야 했다. 제한된 왕권을 통해 백성이 주인이 되는 사회를 만들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다윗을 통해 변질된다. 그나마 민주적인 평등공동체가 다윗으로 인해 왕의 지배를 받는 체제로 변질된 것이다. 5. 강화된 왕권: 다윗 왕의 경우 다윗은 사울 밑에 장군으로 있었는데, 골리앗 사건을 통해 출세를 한다. 권력욕이 있었던 다윗은 개인적인 목적으로 용병을 고용하여 사병 조직을 키웠다. 군내 사조직인 것이다. 이스라엘판 ‘하나회’, 혹은 ‘일자회’, ‘독사회’라고 할 수 있다. 원래 이스라엘 지파동맹체는 지파별 징병제도에 의해 운영되었기에 다윗의 개인 용병조직은 이스라엘에 낯선 것이었다. 아무튼 이렇게 권력욕에 취한 다윗이 사울에 의해 쫓기게 되자, 자신의 사병조직을 이끌고 적국인 블레셋의 성읍인 갓의 왕 아키스에게로 넘어가 무엇이든지 하겠다고 한다. 일제 시대에 일본에 충성을 서약한 것과 똑같다. 그러자 블레셋의 왕은 다윗에게 시글락이란 성읍을 다스리도록 내준다. 그런데, 이러한 다윗 주변에 사울 체제에서 소외당한 사람들이 모이게 된다. 그 유명한 아둘람 굴이다. 어떤 이는 이를 『수호지』의 ‘양산박’으로 비유하는데, 환란당한 자, 빚진 자, 원통한 자들이 모여서 그렇다는 것이다. 그러나 블레셋으로 망명한 다윗 주변에 사람들이 모여들었다는 것은 이들이 사울체제에서 소외된 사람들이긴 했으나, 분명한 역사의식은 가지지 못한 민중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은 평등 공동체에 대한 애정도 없고, 단지 이기적인 목적을 달성하려는 의도로 다윗 주변에 모여들었던 것이다. 이렇게 힘을 가진 다윗은 막강한 군사력으로 헤브론을 장악하고 사유화했으며 자신의 사유지를 중심으로 마침내 유다지파의 왕으로 등극한다. 일종의 쿠데타이다. 이스라엘 지파동맹 체제에 대한 도전이며 반역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에 가만히 보면, 블레셋도 동의한다. 왜냐하면 다윗은 블레셋의 봉신이었기 때문에 블레셋의 승인 없이 다윗이 그러한 조치를 취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블레셋의 정책이 ‘분할하여 지배’하는 정책이기에, 이스라엘이 분단되는 것을 좋게 보았기 때문이다. 오늘날 한반도 주변 4대 강대국의 남북분할 정책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아무튼 다윗이 유다지파의 왕이 된지 7년 반의 세월이 지난후, 마침 사울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 지파동맹체의 지도자가 된 이스보셋과 그의 장군 아브넬 사이에 내분이 일어난다. 다윗은 내분을 틈타 아브넬을 꾀어 협상하는 척하다가 부하 요압장군의 손을 빌어 아브넬을 살해한다. 곧 이어 이스보셋도 원인 모를 자객에 의해 죽임을 당하게 된다. 성서는 표면상 아브넬과 이스보셋의 죽음에 대해 다윗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진행된 일임을 강조하는 듯 보이지만, 실제 사울의 친척이었던 시므이가 다윗에게 퍼부은 욕설에 따르면, 이스라엘 민중들은 피의 숙청과 폭력에 의해 통일 이스라엘의 왕이 된 다윗의 정당성을 의심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무엘하 16:8-9절에 시므이의 말이 잘 나와 있다. “꺼져라! 이 살인자야, 껴져라! 이 불한당 같은 놈아, 사울 일족을 죽이고 나라를 빼앗은 놈, 그 원수를 갚으시려고 이제 야훼께서 이 나라를 네 손에서 빼앗아 네 아들 압살롬의 손에 넘겨주신 것이다. 이 살인자야, 네가 이제 죄 없는 사람 죽인 죄를 받는 줄이나 알아라.” 그러나 민중들의 불만에도 불구하고, 북왕국의 장로들은 다윗의 힘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10.26 이후 전두환 장군의 위세와 같은 것이다. 더욱이 블레셋을 비롯한 외세의 위협이 극심한 상황에서 오랫동안 권력의 공백기를 겪을 수는 없었다. 따라서 다윗의 탁월한 군사적 지도력을 인정하여 계약을 체결한다. 다윗을 전체 이스라엘의 왕으로 옹립하게 되는 것이다. 이스라엘 평등 공동체가, 어쩌면 성서의 민주주의 전통이 다윗이라는 인물을 통해 무너지고 만 것이다. (이상의 다윗에 관한 ‘신명기 사가’의 관점은 ‘역대기 사가’의 관점에서는 180도 달라진다. 다윗의 장점만 부각시키는 것이다. 포로기 이후 고향에 돌아와 이스라엘 공동체를 재건해야할 역대기 사가의 관점에서 다윗-솔로몬 시대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6. 초대 교회 공동체의 대안 왕을 세워 왕을 통한 민족의 부강을 바랐으나, 세상의 왕이 이스라엘을 올바르게 다스릴 수 없다는 사실에 구약의 예언자(특히, 이사야)들은 메시야를 요청한다.² 그리고 그 메시야가 오셔서 성령을 통하여 새로운 민주적 평등 공동체를 세우는데, 그것이 바로 초대 교회 공동체이다. 사도행전 2장 44-47에 보면 초대 교회 민주적 평등 공동체의 모습이 잘 나와 있다. “믿는 사람은 모두 함께 지내며 그들의 모든 것을 공동 소유로 내어놓고 재산과 물건을 팔아서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만큼 나누어주었다. 그리고 한마음이 되어 날마다 열심히 성전에 모였으며 집집마다 돌아가며 같이 빵을 나누고 순수한 마음으로 기쁘게 음식을 함께 먹으며 하나님을 찬양하였다. 이것을 보고 모든 사람이 그들을 우러러보게 되었다. 주께서는 구원받을 사람을 날마다 늘려주셔서 신도의 모임이 커갔다.” 역사상 현존했던 가장 아름다운 민주적이고 개방적인 공동체였다. 그러나 이후 기독교의 역사에서는 그렇지가 못했다. 기독교가 주류종교가 되면서, 권력에 봉사하거나, 스스로 권력으로 군림하는 지배이데올로기로 전락하고 말았던 것이다. 로마의 국교로 전락이 되면서 기독교가 제 힘을 잃어버린 것이다. 예수 믿으려면 목숨을 걸고 믿어야 되는데, 이제는 속된 말로, ‘개나, 소나’ 다 예수를 믿으니 타락 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스라엘 평등공동체가 다윗-솔로몬이라는 왕정 체제에 의해 이념의 변질을 겪은 것처럼, 교회사에 있어서도 기독교의 원형이 굴절 된 것이다. 올해가 종교개혁 500주년이기도 하지만, 아드 폰테스(ad fontes) 곧 ‘근본으로 돌아가야’할 것이다. 그리고 그 근본은 정치적 민주, 사상적 자유, 공동체의 평등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 (각주) 1) 예외적으로 고대 그리스의 도시 국가인 아테네에서는 시민 전체가 참여하여 중요한 일을 결정하는 민회라는 의사 결정 기구가 존재했었는데, 그 민회에서 추첨제나 윤번제를 통하여 모든 시민이 공직에 나아갈 수 있었다. 오늘날의 민주주의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지만, 아테네에서 시민이란 성인 남자 자유민만을 의미하는 특수 계급으로, 여성, 노예, 외국인이 제외되었다는 점에서 제한적인 형태의 민주주의였다. 2)“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위에 앉아서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자금 이후 영원토록 공평과 정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이사야 9:6) 최 병학 목사 (남부산용호교회 담임) *이 글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문화
    • 문화펼치기
    2017-06-26
비밀번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