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1-09-23(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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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병학 목사의 AI시대 읽기]인공 친구(AF) 클라라의 사랑
    소설 『클라라와 태양』(민음사, 2021)은 2017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며 명실상부 현대 영문학을 대표하는 최고의 작가로 꼽힌 작가 가즈오 이시구로가 노벨상 수상 이후 최초로 발표한 장편소설입니다. 인간 소녀 조시와 그녀의 동반자가 된 인공지능 로봇 클라라의 이야기입니다. 인간과 인공지능 로봇이 그려내는 가슴 저미는 슬픔과 사랑 이야기입니다. 소설의 배경은 지금으로부터 멀지 않은 미래의 미국입니다. AI 제조기술과 유전공학이 발전하고, 사회는 이 과학기술의 발전을 기반으로 계급 시스템을 재구성합니다. 아이들의 지능은 유전적으로 ‘향상’되고, 학교에 갈 필요 없이 집에서 원격 교육을 받습니다. 인공친구(AF, Artificial Friend)라 불리는 인공지능 로봇이 이런 아이들의 친구로 생산되어 팔립니다. 물론 사회의 모든 구성원이 그 혜택을 누리는 것은 아닙니다. 재력이나 계급이 그에 미치지 못하거나, 혹은 시스템에 소속되기를 거부하고 따로 공동체를 꾸려 살아가는 사람들은 이런 과학기술의 혜택에서 제외됩니다. 소설의 주인공은 소녀형 AF인 클라라입니다. 오늘도 클라라는 AF 매장 쇼윈도에서 자신을 데려갈 아이가 나타나길 기다리고 있습니다. 클라라는 갓 출시된 최신형 모델은 아니지만 매우 특별한 점이 있습니다. 유난히 인간을 열심히 관찰하고 그들의 감정과 소통방식을 익히는 데 관심이 많은 것입니다. 클라라는 매장 쇼윈도에 앉아 지나는 사람들의 감정을 파악하고, 그 감정에 자신을 대입하고 상상합니다. 하지만 다른 AF들은 그런 일에 거의 관심이 없습니다. 클라라의 말입니다. “로사와 내가 세상에 나온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우리는 매장 중앙부 잡지 테이블 쪽에 있었는데, 그 자리에서도 창문이 절반 넘게 보였다. 그래서 바깥세상을 볼 수 있었다. (…) 이렇게 해가 움직이는 걸 볼 수 있는 운 좋은 날이면 나는 얼굴을 내밀어 해가 주는 자양분을 최대한 많이 받으려 했다. 로사가 곁에 있을 때는 로사에게도 그러라고 말했다. (…) 우리와 같이 있던 소년 에이에프(AF) 렉스가 걱정하지 말라고, 우리가 어디에 있든 해는 우리한테 올 수 있다고 했다. 렉스가 마룻바닥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게 해의 무늬야. 걱정되면 저걸 만져 봐. 그러면 다시 튼튼해질 거야.’” 렉스가 말한 태양은 매우 중요합니다. 클라라는 태양이 사람들에게 자양분을 한껏 쏟아 부어 준다고 생각합니다. 커피잔 아주머니와 한 남자의 포옹하는 장면을 클라라는 매니저와 함께 보고 이렇게 대화를 나눕니다. “RPO 빌딩 쪽에 다다르자 두 사람은 마치 한 몸인 것처럼 서로를 꼭 끌어안았다. 해도 그 모습을 보고는 두 사람 위에 자양분을 한껏 쏟아 부었다. 커피잔 아주머니는 여전히 얼굴을 볼 수 없었지만, 남자가 눈을 꼭 감은 게 보였다. 행복한지 속상한지는 잘 알 수가 없었다. ‘저 사람들 만나서 무척 기쁜가 보다.’ 매니저의 말에 매니저도 나처럼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는 걸 알았다. ‘네, 아주 행복해 보여요. 그런데 이상하게 속상한 것처럼 보이기도 해요.’ ‘아, 클라라. 너는 놓치는 게 없구나.’ 매니저가 조용히 말했다.” 아무튼 클라라는 창문 앞에 전시되어 지나가는 사람들의 표정과 감정을 예리하게 살펴봅니다. 클라라의 눈에 비친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때로는 걸음을 멈춘 사람이 우리에게 아무 관심이 없을 때도 있었다. 그냥 운동화를 벗어서 뭔가 하려고 하려거나 혹은 오블롱(직사각형 창)을 들여다보려고 걸음을 멈출 때도 있었다. 하지만 유리창으로 다가와 안을 들여다보는 사람도 있었다. 주로 아이들, 우리와 가장 잘 맞는 나이대의 아이들이 많이 다가왔는데 우리를 보고 즐거워하는 것 같았다. 아이들은 혼자, 혹은 어른과 같이 와서 우리를 가리키며 웃고 괴상한 표정을 짓고 유리를 두들기고 손을 흔들었다. 가끔은 아이가 다가와 우리를 보는데, 우리가 마치 무슨 잘못이라도 한 듯 슬픔 혹은 분노가 어린 표정일 때도 있었다. 이런 아이도 금세 돌변해서 다른 아이들처럼 웃거나 손을 흔들기도 했지만, 창문 앞에 선 지 이틀째에 나는 그래도 여러 아이들 사이에 뭔가 다른 점이 있음을 느꼈다.” 어느 날, 자신을 데려갈 아이와의 운명적인 만남을 기다리던 클라라 앞에 한 소녀가 다가옵니다. 조시라는 이름의 소녀는 걸음걸이가 불편하고 몹시 야윈 것이, 한눈에 봐도 건강에 이상이 있습니다. 클라라와 조시는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 둘은 서로에게 이끌립니다. 둘의 첫 만남입니다. “조시는 행인들이 뒤쪽으로 다 지나갈 만큼 유리창에 가까이 다가온 다음 걸음을 멈추더니 나를 보고 웃었다. ‘안녕.’ 조시가 창문 너머에서 말했다. ‘내 말 들려?’ 아이가 나에게 말을 걸었기 때문에 나는 아이를 돌아보고 마주 웃으며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정말?’ 조시가 말했다. ‘시끄러워서 나도 내 목소리가 잘 안 들리는데. 정말 내 목소리가 들려?’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조시는 신기하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조시는 클라라를 꼭 데려가겠다고 굳게 약속하고, 클라라 역시 다른 아이의 간택마저 거부하며 조시가 자신을 데려갈 그 날이 찾아오기만을 기다립니다. 그러나 AF 매장 매니저는 클라라와 조시의 약속을 믿지 않습니다. “매니저는 자리를 뜨려다 말고 다시 몸을 돌렸다. ‘그건 아니지, 클라라? 너 누구랑 약속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나는 매니저가 창문에서 거지 아저씨를 보고 비웃은 소년 에이에프 둘을 꾸지람했을 때처럼 나한테도 꾸지람을 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매니저는 내 어깨에 손을 얹고는 아까보다도 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내 말 잘 들어 봐. 아이들은 툭하면 약속을 해. 창가로 와서 온갖 약속을 다 하지. 다시 오겠다고 하고 다른 사람을 따라가지 말라고 해. 그런 일이 수시로 일어나. 그런데 그래 놓고 다시 안 오는 아이가 훨씬 많아. 더 심한 경우는, 아이가 다시 오긴 했는데 딱하게도 기다렸던 에이에프를 외면하고 다른 에이에프를 고르기도 해. 아이들은 원래 그래. 너는 늘 세상을 관찰하면서 많은 걸 배웠지. 이것도 잘 명심해두렴. 알겠니?’ ‘네.’ ‘좋아. 그럼 이제 이 이야기는 끝난 걸로 하자.’ 매니저가 내 팔을 쓰다듬고 돌아섰다.” 그러나 이렇게 오랫동안 펫숍의 동물처럼 진열대에 놓여 있다가 결국 조시의 선택을 받아 그녀의 집으로 가서 살게 됩니다. 클라라는 좋은 친구로서 갖춰야 할 전인적 인격과 미덕을 다 갖춘 AF입니다. 지정의(知情意), 지덕체(智德體) 어느 것 하나 부족함 없이, 균형 잡힌 품격을 갖춘 AF입니다. 클라라 덕분에 조시는 하루하루 건강하게 살아갑니다. 그러나 사실 조시는 언니를 죽인 질병을 앓고 있는데, 어느 날 병세가 악화되어 거의 죽게 되었습니다. 클라라는 자신의 모든 능력을 동원해 조시를 치료하려고 했으나, 해결책을 찾지 못합니다. 결국 클라라는 태양의 도움을 요청하려고 기도합니다. 태양이 사람들을 살리기도 하고 모든 로봇에게도 생명의 자양분을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클라라는 붉게 타오르는 석양에게 간절히 기도합니다. “조시가 좋아지게 해주세요. 거지 아저씨한테 한 것처럼요.” 한때 클라라가 진열대에 있었을 때, 유리창 밖으로 거지 아저씨와 개가 아무런 도움이나 관심을 받지 못한 채 죽어가고 있는 것을 본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음 날 찬란한 아침햇살이 거지 아저씨와 개를 비추었는데, 이들이 다시 살아났습니다. 거지 아저씨처럼 조시를 다시 살려달라고 클라라는 정말 간절히 기도합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드릴 수 있다고 기도합니다. 며칠 후, 어둡던 하늘이 갑자기 열리더니 강렬한 태양 빛이 조시에게 비쳤습니다. 그리고 조시는 건강이 회복돼 대학에 진학하기 위해 집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클라라는 태양이 자신의 기도를 들어주었다고 생각하고 태양에게 감사의 인사를 했습니다. 그러나 조시가 떠난 후 클라라는 이제 더 이상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AF는 어린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이었죠. 클라라는 폐기되어 야적장에서 최후를 맞게 됩니다. 다섯 살 때 일본 나가사키에서 영국으로 이주하여 평생을 영국에서 살아온 가즈오 이시구로는 ‘이방인’ 혹은 ‘타자’에 관해 깊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의 모든 작품에는 이처럼 타자의 시선을 통해 당연한 듯 존재해온 세상의 근간을 뒤흔드는 조용한 질문들이 담겨져 있습니다. 물론 여기서 타자, 혹은 이방인은 양면적이고 위태로운 존재입니다. 『클라라와 태양』에서 우리는 인간이 아닌 존재인 타자, 혹은 이방인인 인공지능 로봇 클라라를 통해, 한결같이 인간을 위해 헌신하는 모습을 엿보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과연 ‘인간됨’이란 무엇인지, 그리고 무엇이 인간을 고유하게 만드는지에 생각해 보게 됩니다. 인간이 아닌 존재가 인간을 사랑하는 방식, 그것은 인간이 서로 사랑하는 것과 무엇이 다를까요? 클라라의 조시 사랑이, 사랑이 아니라면, 과연 무엇이 사랑인가요? 하나님 나라는 우리 인간이 아니라, 타자와 이방인, 그리고 인공지능 로봇에게서 진정한 휴머니즘을 발견하는 나라인가요? 그리고 빛으로 오신 예수님처럼, 태양의 빛이 그 휴머니즘의 발생사적 근원인가요?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본질적인 질문을 던지게 합니다. 클라라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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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9-03
  • [영화]‘모가디슈’의 한국인을 말하다
    류승완 감독이 그린 남북 갈등의 현대사 류승완 감독이 <베를린>(2015)에 이어 남북 간의 갈등을 역사 속 사건을 통해 새롭게 조명한 영화를 만들었다. 영화 <베를린>이 남북 첩보원들의 충돌과 인간애를 액션을 통해 그려냈다면, 최신작 <모가디슈>는 남북갈등은 시대적 배경으로 전개시켜 놓은 채 소말리아 반군의 혁명 속에서 함께 탈출하기 위해 함께 고군분투하는 남북외교관의 모습을 다루었다. 즉 <베를린>에서는 남과 북이 서로에게 총을 겨누는 적대적 관계로 등장한다면 이번에는 외부의 총을 피해 협력해야 하는 상황을 묘사하고 있다. <모가디슈>에서 발견하는 한민족의 상황은 한마디로 웃프다(겉으로는 웃기지만 속으로는 슬픈 처지라는 신조어). 동서독을 나누던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지 얼마 안 된 시점에서 벌어진 일을 다루고 있어서 남북은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가 되어버렸을 때의 상황을 읽을 수 있다. 1991년 남과 북은 유엔가입을 앞두고 아프리카 국가들의 표를 얻기 위해서 치열한 외교전을 펼쳤다. 유엔 회의장에서는 잘살든 못살든 한 국가당 한 표의 투표권이 주어지는 까닭에 아프리카 국가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일이 시급했다. 소말리아주재 한국 대사관의 한신성(김윤석) 대사는 안기부 출신의 정보 요원 강대진 참사관(조인성)이 가져온 선물 보따리를 들고 소말리아 대통령을 만나러 가는 길에 무장강도를 고용한 북한 대사관의 방해 작전에 피해를 받고 만다. 강대진은 이에 대한 보복이라도 하듯 북한의 총기가 소말리아 반군의 손에 들어간다는 언론 플레이를 벌여 어떻게든 소말리아 정부와 북한 간의 관계를 떨어뜨려 놓으려 한다. 이런 상황 속에서 반군은 수도 모가디슈에 진입하게 되고 남북대사관 직원과 그 가족들은 수도를 탈출해야 하는 위기에 직면하게 되는 것이다. 류승완 감독은 ‘지명(地名)’을 통해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식을 취해왔다. 이전 작품의 도시 베를린은 동서독 분단을 상징하는 도시여서 남북 정보원들의 생사를 넘나든 작전이 전개되는 상황은 충분히 관객을 납득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베를린은 이제 분단이 아닌 통일을 상징하는 도시가 되었다. 그 누구도 합칠 수 없을 만큼 골이 깊어진 이념과 경제적 차이를 극복하고 한순간에 무너진 베를린 장벽은 남북분단의 상황에서 왜 우리만 과거 냉전 시대의 대결 구도를 벗어나지 못한 채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생각을 일으켰다. 이제 류승완 감독은 ‘모가디슈’를 들고 나왔다. 우리에게 소말리아는 국제 수송선들 납치하여 몸값을 받는 ‘소말리아 해적’으로 알려졌을 뿐이다. 영화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리들리 스콧 감독의 <블랙 호크 다운, Black Hawk Down, 2001>을 떠올릴 수도 있을 것이다. 1993년 소말리아에 파견된 유엔평화유지군으로서의 미군 특수부대와 유엔의 구호식량을 착취하는 소말리아 민병대와의 시가전이 압권인 영화였다. 그런데 소말리아와 모가디슈는 이게 전부였다. 부정과 혼돈의 도시 소말리아의 모가디슈. 그 속의 남북은 부조리한 상황 가운데서 살기위해 함께 탈출을 감행한다는 점에서 모가디슈는 통일 이전에 개별적 생존을 상징하는 도시로 남게 될 전망이다. 한국의 영화 관객들은 이제 낯선 소말리아에 대한 또 하나의 기억을 간직하게 되었다. 모가디슈에서 드러난 한국인의 민족성 영화는 평소 인식하지 못했던 인간 무의식의 통로 역할을 한다. 특히 사람들이 주목하고 인기 있는 영화들은 그 사회 구성원들의 집단 무의식(Collective Unconscious)을 보여준다. 칼 융(Carl G. Jung)이 언급한 집단 무의식은 개인이 갖는 무의식과는 달리 사회 구성원들이 역사와 전통 그리고 문화 가운데 갖게 되는 무의식으로 보통은 신화나 설화 그리고 전래동화를 통해 드러난다. 특별히 생각하지 않아도 그 문화 속에 사는 사람들의 삶 속에서 은연중 나타나는 것이 있다면 집단 무의식의 영향이라 볼 수 있다. 현대 사회에 적용하자면 집단 무의식은 대중성을 통해 나타난다. 한국의 오랫동안 사랑받는 상업영화나 시간을 뛰어넘어 인기 있는 가요 안에는 한국인의 집단 무의식이 들어있을 가능성이 높다. <모가디슈>에는 세 가지의 한국인의 집단 무의식으로 해석될 수 있는 민족성이 내포되어 있다. 첫째는 경쟁(競爭)의 무의식이다. 그 먼 아프리카에서조차 남과 북은 갈라져서 서로에 대한 비방과 투쟁을 멈추지 않는다. 말이 좋아서 외교전이지 실상은 거짓과 술수 그리고 폭력이 난무한다. 그런데 이 같은 갈등은 소말리아에 주재하는 남북외교관들이 아프리카에까지 오게 하는 원동력이며 그들은 경쟁 가운데서 자신의 입지를 넓혀가는 성과를 거둔다. 삼국시대에 민족 안에서 분열했던 신라와 고구려 백제의 모습으로부터 조선시대의 당파싸움과 현대 사회에서 여야로 나누어져 치열하게 싸우고 경쟁하는 모습은 때로는 국민들을 절망시키고 위기로 몰아가기도 하지만 이는 에너지를 고양시키고 적절한 안내를 통해 성장의 밑거름이 되기도 한다. 우리는 일제강점기를 경험했고 미국의 도움을 받아 살아온 역사를 가지고 있지만 지금은 이 국가들과 경쟁하고 있지 않은가! 둘째는 동정(同情)의 무의식이다. 어려운 사람을 불쌍히 여기고 돕는 동정은 인간의 본능 같지만 그렇지 않다. 아무리 미워하고 못된 사람이라도 잘못되고 위기에 빠졌을 때 모르는 척 넘어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그런데 한국인들로서는 모른 척 하기가 쉽지 않다. 특히 도와달라고 사정하는데 이를 어찌 무시할 수 있냐는 생각이 한국인들의 마음에는 있는 듯하다. 북한 대사관이 소말리아 반군에 의해 피습당하고, 믿었던 중국대사관마저 폭도들에 의해 강탈당하는 모습을 보며 북한의 림용수 대사(허준호)가 택한 곳은 한국 대사관이었다. 총알이 빗발치고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에서 림용수 대사는 한국 대사관의 문을 두드리며 도움을 요청한다. 한국 대사관 안에서는 고민이 흐르고 마침내 문을 열어준다. 이들을 망명으로 보고하여 실적을 올리려는 외교적 술수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북한 대사관 직원들을 맞이하는 한국 대사관 안에는 난장판 속에서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는 것이 옳다는 기류가 흐른다. 셋째는 문기(文氣)의 무의식이다. 책을 좋아하고 배움을 가치 있게 여기는 무의식이 한국인에게 있다. 남북의 외교관과 가족들은 승용차에 나눠 타고 이탈리아 대사관으로 피신하게 된다. 아마도 이 영화에서 류승완 감독이 가장 심혈을 기울여 찍은 액션 장면이 아닐 수 없다. 도로마다 반군이 장악한 상황에서 총알이 빗발치듯 쏟아지는데 이들은 어떻게 탈출에 성공할 수 있었을까? 임용수 북한 대사는 한국 대사관에 있던 책들을 모아 승용차의 외부에 붙여서 방호벽을 만든다. 끈과 테이프로 책들을 승용차 위와 겉면에 부착시켜서 총알이 뚫고 오지 못하도록 일종의 방탄복 역할을 하게 함을 볼 수 있다. 책으로 총을 막는다! ‘펜이 칼보다 강하다’라는 서양 속담이 있었다면 앞으로는 ‘책으로 총을 막는다’라는 말도 유행시켜야 할 듯하다. 관객이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장면이지만 이것은 문기(文氣)에 대한 한국인의 무의식을 상징화시킨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세계에서 금속활자를 가장 먼저 만든 민족일 뿐만 아니라 선교사가 들어오기 전에 한글로 번역된 성경이 먼저 들어온 선교역사를 우리는 갖고 있지 아니한가? 지금도 대한민국은 세계에서 두 번째로 성경을 많이 출판하는 나라다. 모가디슈의 그리스도인 영화를 보는 관객들은 한신성(김윤석) 대사의 부인 김명희(김소진)의 이미지에 깊은 인상을 받을 수밖에 없다. 김명희는 매우 신실한, 교회 밖의 사람들이 본다면 극성스러울 정도로 기독교 신앙을 가진 인물로 묘사되고 있다. 대사 부인 역할을 맡은 김소진 배우는 <마약왕>에서도 범죄의 길에 빠진 남편(송강호)을 구하고 가정을 지키는 그리스도인 현모양처의 역할로 주목을 받았었다. 대사관 밖의 어려움을 감지한 김명희는 여직원과 직원 부인을 모아 기도회를 연다. 교회도 다니지 않고 심지어 불교 신자이기도 하지만 이들은 청산유수로 주기도문을 외울 줄도 안다. 기독교 영화가 아닌 일반 상업영화 속에서 기독교인이 보여준 신앙의 모습은 대개 긴박하고 무거운 상황을 잠시 쉬어가게 만드는 코믹한 설정으로 자리 잡는 경우가 적지 않은데 이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이후에 나타난 대사 부인의 행실은 감동적이며 긍정적인 그리스도인의 이미지를 갖고 있다. 대사부인 김명희는 저만 살려고 애쓰며 이기적인 존재가 되기 쉬운 전장의 상황에서 부상당한 현지인 운전사를 치료해주고 대사관을 가득 채운 북한 대사관 가족들에게 아낌없이 식사를 대접하는 면모를 보인다. 남북의 위기 속에서 화합하는 모습을 보여줘서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뻔히 예상할 수 있는 장면을 거부했던 류승완 감독도 이 장면만큼은 뺄 수 없었다. 바로 남북이 함께 식사하는 자리에서 절인 깻잎을 집기 쉽도록 젓가락으로 잡아주는 장면이다. 이 주인공은 소말리아의 그리스도인 김명희였다. 모가디슈의 남북이 마음을 여는 순간이다. 이것이 실화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류승완 감독의 머릿속에는 남북이 위기 속에서 마음을 열고 함께할 수 있는 자격이 되는 사람을 찾지 않을 수 없었고, 그 역할은 그리스도인인 대사부인에게로 돌아갔다. 이것은 세상이 생각하고 수용할 수 있는, 혹은 마땅히 그렇다고 여기는 그리스도인의 이미지이기도 하다. 상업영화 속에 언뜻언뜻 비치는 그리스도인의 이미지는 그리스도인에 대한 세상의 생각과 판단을 담고 있다. 영화는 세밀한 작업이며 의미 없는 장면이란 영화 안에 들어갈 수가 없다. 또한 반대로 영화 속 그리스도인의 이미지는 관객에게 영향을 줄 수도 있다. 비그리스도인들이 성경을 읽고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을 잘 알기 때문에 부정적 입장을 취하는 것이 아니다. 언뜻 나타나는 이미지, 특히 매스미디어를 통해 드러나는 그리스도인의 이미지를 통해 자신의 생각을 새롭게 하기도 하고 기존의 생각을 강화시켜 나가기도 한다. 현대를 사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이미지가 중요한 시대에 살고 있음을 새삼 깨닫게 하는 영화가 아닐 수 없다.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오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벧전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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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8-13
  • 나카가와 켄이치 [3분 변증 : 성경의 관점에서 나아갑시다]
    지은이 : 나카가와 켄이치 / 옮긴이: 이선복, 이시은 / 도서출판 디자인21 / 20210802 / 15,000원 『3분 변증: 성경의 관점에서 나아갑시다』는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 비신자부터, 초신자까지 다양한 사람들의 질문을 포함하고 있다. ‘성경이란 무엇인가?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인가? 하나님은 누구인가? 구약성경, 신약성경, 신앙과 삶, 기독교와 타종교, 이단, 신앙과 교회 등 8개 카테고리를 질문 내용에 맞추어 성경적 관점에서 답을 하고 있다. 이 책은 비신자들에게도 공감이 되는 내용이 많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궁금하지만 물어 볼 수 없었던 것, 설명이 어려웠던 주제들을 철저하게 성경의 관점에서, 귀납적 방법으로 알기 쉽게 변증(辨證)하고 있다. 신앙생활의 체계를 세워 가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또 사역을 하는 목회자에게도 일상에서 발생하는 질문들을 체계적으로 변증하는 점에서 공과교재 준비 자료로도 유익하다. 또 각주에 일본어 동영상 링크 주소를 표시했다. 일본선교를 준비하거나 일본어를 공부하는 분들에게도 도움이 될 것이다. 저자 나카가와 켄이치(中川健一) 대표(하베스트 타임 미니스트리)는 1947년생으로, 일본 오사카부 출신이다. 1970년 히토쓰바시 대학을 졸업하고 6년간의 샐러리맨 생활을 했다. 이후 미국 트리니티신 학교에 유학, 동교를 졸업했으며, 1986년 일본 복음 텔레비전 방송 단체 「하베스트·타임·미니스토리즈」를 설립해 2010년까지 24년간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방송했다. 또한 이스라엘을 50여 차례 방문해 성경의 세계를 탐구했으며, 현재 하베스트 타임 미니스토리즈 이사장으로 사역을 하고 있다. 저서로 「3분에 알아가는 성서」(문예사) 1,2를 포함, 「일본인에게 전하는 성서 이야기」 (문예사) 시리즈 (문고판 전8권) 외 다수의 출판물이 있다. 이 책을 번역한 이선복 교수(동서대)는 1965년 충남 논산 출신으로, 니혼(日本)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1999년부터 동서대에서 회계학을 가르치고 있으며, 2007년 부산기독교수연합회 창립, 초대총무와 회장을 역임하고, 전국대학교수선교연합회 회장, 부산성시화운동본부 감사, 한국로고스경영학회 이사로 대외활동을 하고 있다. 화명중앙교회 장로이며, 동서대 일본어채플을 설립 당시부터 15년째 섬기고 있다. 연구논문으로 「성경적 관점에서 본 회계윤리」, 「한일경제 비교와 선교적함의」, 「성경적 가치에 따는 일본 CEO경영연구」 등이 있다. 책을 공동 번역한 이시은 씨는 이선복 교수의 딸로, 1995년 대전에서 모태신앙으로 태어나 유년시절을 일본에서 보냈다. 부경대학교를 졸업, 재학 중 홋카이도대학 교환학생을 경험했다. 2020년에 일본사회사업대학대학원사회복지학(노인복지전공)을 수료하고 현재 삼성 제일기획 일본지점에서 광고기획 AE로 근무하고 있으며, 대한예수교장로회 도쿄온누리교회 청년부를 섬기고 있다. 이선복 교수는 “학교에서 학생들과 일본어채플에서 쓰던 영상을 보며, 성경적 접근방법에 감명을 받았다. 신앙생활의 핵심은 성경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책으로 번역한 이유”라고 설명했다. 책은 교보문고, 알라딘외 전국 주요서점에서 판매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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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8-12
  • 기독교인이 인문학 공부를 해야 하나요?
    디아코니아부산 제2회 기독교인문학 포럼 우선 귀한 시간을 주신 백양로교회와 이를 주관하시는 (사)디아코니아부산 이사장 김태영 목사님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제 사역과 관련하여 기독교인들이 왜 인문학을 알아야 하는지 묻는 분들이 꽤 있습니다. 긍정적인 의미로 묻는 분들도 계시지만, 그렇지 않은 분들도 계시죠. 교단의 선배 목사님 한 분이 교회에서 그런 공부를 왜 하느냐고 해서 제가 ‘종교개혁자 중에는 인문학자들이 많았다’고 했더니, ‘그래서 종교개혁이 엉망인 거야’ 이러시는 거예요. 그래서 말을 더 잇지 못하고 ‘예’하고 말았습니다. 그러한 분들의 인식 속에는 인문학이 기독교의 적으로 교회에 나쁜 영향을 끼친다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실제로 그런 논쟁은 초기 교회사에도 많았습니다. 실제로 터툴리안의 경우 ‘예루살렘과 아테네’가 무슨 상관이 있으며 ‘아카데미아와 에클레시아(교회)는 무슨 관계가 있으냐?며 적대감을 들어 내기도 했습니다. 물론 터툴리안이 유명한 법학자이기 때문에 몰라서 한 말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만, 한국의 기독교인 중에는 이런 생각을 가진 분들이 많습니다. 오늘 이 시간 제가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려고 하는 것은 크게 역사적 맥락과 개념적인 측면에서 설명을 드리려고 합니다. ■ 인문학이란 무엇인가? 실제 인문학이 무엇이냐고 했을 때 우선 동양적 개념에서 인문학이란 말을 더 잘 이해하려면 그 말의 반대말을 알아보면 됩니다. 동양에서는 인문(人文)의 반대 말이 천문(天文)입니다. 천문은 여러분들도 잘 아시다시피 별의 움직임이잖습니까? 하늘에 대한 연구가 천문학입니다. 그래서 천문지리라고 했고 혹은 인문지리라고 했거든요. 그래서 하늘 天이라는 의미도 있지만 무늬 문자라 의미도 있습니다. 그래서 별의 움직임의 무늬, 자취, 흔적을 조사하는 것을 천문학이라고 한다면, 인문학은 사람의 자취입니다. 뱀이 지나가면 흔적을 남기듯, 사람의 자취를 통하여 사람이 가야 할 길을 연구하는 것을 인문(人文)이라고 하였습니다. 동양에서는 만물을 구성하는 요소로 천, 지. 인(天地人)을 말하는데 지는 지리 즉 땅의 원리 같은 것이지요. 여러분들이 학교를 다니실 때 문·사·철이란 말을 들어보셨지요? 일반적으로 동양의 인문학은 보통 문학, 역사, 철학을 아우르는 개념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들이 쓰는 인문학은 서양적 개념입니다. 인문학은 인문과학, 자연과학, 사회과학과는 다릅니다. 영어로 보면 인문학(Humanities)이란 단어가 humanity 와 liberal arts(교양과목)의 의미로 쓰입니다. 인문과학이란 인간이 무엇인가를 묻는 학문으로 추상적이고 보통적인 인간, 개별적 인간을 다룬다면, 사회과학은 인간과 인간과의 관계를 다루는 학문으로 사회학과 역사학처럼 공동체 속에서의 관계를 다루고 있습니다. 자연과학은 자연을 연구하는 학문입니다. 그런데 요즈음 개념이 확대돼 이러한 것을 다 아우르는 개념이 되었습니다. 과학의 발달로 자연과학의 도움 없이 - 생물학, 빅뱅이라든지 상대성이론, 불확실성의 원리 등과 신경과학, 뇌과학 같은 것을 안 다루고는 - 인간을 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석, 박사 등이 연구하는 humanity가 전문적이고 학문적인 영역이라면 우리가 말하는 인문학은 liberal arts 즉 시민교양으로서의 대중인문학 입니다. ‘한 사람으로서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 인간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고 그런 것을 교양으로 가르치는 학문으로서의 인문학’ 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요즘 매스컴이나 유튜브 등을 통하여 플라톤아카데미 등 인문학 강좌 등을 쉽게 접할 수 있습니다.. ■ 헤브라이즘 VS 헬레니즘 신학(Theology)이란 단어는 신을 나타내는 theos 와 학(學), 이성, 언어, 논리 등을 나타내는 logos의 결합, 즉 인간을 신의 눈으로 이해하는 헤브라이즘과 인간을 인간의 눈으로 이해하는 헬레니즘이라는 어떻게 보면 서로 상반되는 구조의 산물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오래 전에 독일의 여성신학자 도르테 죌레가 예루살렘에 있는 <나와 너>로 유명한 마틴 부버(Martin Buber)를 방문했을 때의 일화입니다. 그녀가 신학을 한다고 하자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부버가 하는 말이 “신학이라…그걸 어떻게 하지?”하는 것이었습니다. 죌레는 이때 비로소 히브리사상과 그리스사상의 차이의 깊이를 이해할 수 있었다고 술회했습니다. 학문으로서의 하나님이 아니라 성경에서 경험하는 인격적 하나님을 어떻게 파악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물론 부버가 신학을 왜 모르겠습니까? 몰라서 그런 말을 하지는 않았겠죠. 신학이란 뜻이 가능하냐는 반어적 표현이겠죠. 헤브라이즘은 하나님 중심의, 인간을 신의 눈으로 보는 것이라면 헬레니즘은 인간을 인간의 눈으로 보는 것입니다. 고신대학교 입구의 비석에 코람데오(Coram Deus) ‘하나님 앞에서’ 처럼, 인간이 인간이기 위해서는 우리의 일상이 항상 신을 인식하며 밥을 먹고 일을 하고 또 사람을 만나는 일 등의 모든 것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야 하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창조론에서 본 기독교는 어떠한 존재입니까? 성경은 우리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image of God)대로 창조되었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당시에는 왕만이 신의 형상이던 시절에 하비루 같은 하찮은 민중들에게 맹자의 말을 빌리면 왕후장상 따로 없다는 놀라운 선언을 한 것입니다. 기독교는 인간을 인간의 최대치로 본 것입니다. 그러나 요즘 기독교는 인간을 보잘 것 없는 벌레같은 존재로 낮춰 보지 않습니까? 교회만 오면 죄인, 죄인하며 인간을 폄훼합니다. 구속론으로 보더라도 기독교만큼 인간을 높게 평가하는 종교는 없습니다. 기독교가 다른 종교와 차이점이 있는데 그 가운데 가장 유별난 점은 신이 인간을 위해 희생하는 종교라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다른 종교는 인간이 신을 위하여 헌신하는 것이라면 기독교는 신이 인간을 위하여 희생된 종교라는 것입니다. ■ 신학과 인문학의 관계는? 리챠드 니이버의 「그리스도와 문화」에 나타난 다섯 모델을 중심으로 1) 대립: 문화에 대항하는 그리스도 2) 일치: 문화의 그리스도 3) 종합: 문화 위의 그리스도 4) 역설: 문화와 역설 관계에 있는 그리스도 5) 변혁: 문화를 변화시키는 그리스도의 다섯 유형이 있는데 비판적 수용과 거리 확보를 통해 문화를 변화시키는 변혁 모델이 바람직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교회사 측면에서 밀접한 관계를 유지해 온 기독교 신학과 인문학과의 관계를 시간이 없어 짧게 말씀드리면, 고대에는 정통신학과 플라톤 주의가 결합했으며, 중세에는 중세신학과 신플라톤주의가 결합하였고, 근대를 연 종교개혁기에는 마르틴 루터, 훌리히 츠빙글리, 장 칼뱅 등 핵심 종교개혁자들은 모두 인문학자였다는 사실입니다. 중세가 몰락하고 새로운 질서 도래를 앞둔 과도기적 상황에서 다시 ‘근원으로(Ad Fontes)’ 돌아가자는 운동들이 전개되었는데 남유럽은 그리스와 플라톤 다시보기의 르네상스로, 북유럽은 성서와 어거스틴 연구의 종교개혁의 영향으로 ‘원전을 원어로!’ 읽는 독서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습니다. 왜 고전읽기운동인가? 한 예로 라틴어로 번역된 불가타역본에는 회개하라를 고해하라로 잘못 번역하여 카톨릭에서는 고해성사가 일상화 되었는데, 헬라어 원어를 대조해 본 결과 오역을 발견하고는 종교개혁자들은 고해성사를 폐지했습니다. 이처럼 인쇄술의 발달과 함께 각 나라의 민족주의 대두로 자국어 성경이 보급되면서 종교개혁의 열풍은 전 유럽을 강타하자 혹자는 종교개혁을 독서혁명이라고 부를 정도였습니다. ■ 인문학을 하는 이유 그러므로 인문고전을 읽는다는 것은 사람답게 살기 위함입니다. 앞서 말했듯이 인문학이란 ‘인간다움’입니다. 인간이 인간답게 산다는 것을 캐묻는 작업입니다. 그렇기에 소크라테스는 성찰하지 않는 삶은 살 가치가 없다고 했고, 톨스토이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성찰하지 않는 삶은 짐승과 같다고 했다. G.O.D의 노래 ‘길’의 가사처럼 내가 지금 제대로 살고 있는지, 이렇게 살아도 되는 건지를 묻고 또 묻는 작업입니다. 살기 위해서, 잘 살기 위해서, 살아도 산 것 같이 살기 위해서 우리는 인문학을 읽어야 합니다. 두 번째로 인문학을 한다는 것은 자신과 시대를 성찰하기 위함입니다. 인문학은 거울과 같습니다. 거울이 없다면, 우리는 자신의 얼굴을 알 수도, 볼 수도 없습니다. 현재의 나와 우리의 삶에 대한 성찰의 작업이 인문학입니다. 그렇기에 그 책에는 나, 남 없는 우리 모두의 얼굴이 담겨 있습니다. 내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들여다보는 데는 인문학 만한 것이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인문학을 한다는 것은 시대를 비판하기 위함입니다. 이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성찰하는 학문인 인문학은 비판하는 학문이기도 합니다. 성가시게 예언자처럼 쓴소리, 잔소리를 여과 없이 해대는 것이 인문학의 본령이기 때문입니다. 시대를 해석하기도 하고, 시대를 비판한다는 점에서 인문학은 우리에게 꼭 필요합니다. 다른 하나는 그 인문학을 비판하기 위해서 인문학을 읽어야 합니다. 앞서 신학과 인문학의 관계를 말하면서, 신학이 바라본 인간은 결국 하나님 앞에 선 인간(Coram Deo)입니다. 인간다움이란 창조자 하나님을 제외하고, 구속하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젖혀두고는 설명하기 어려우며, 그것 없이는 참다운 인간을 해명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신학과 신자는 당대의 인문학적 결과물을 유심히 따라가며 세심하게 읽어야 시대를 통찰하고 비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논리적으로 신학은 인문학 없이도 존재할 수 있지만, 현실적으로 인문학 없이 신학은 절름발이에 다름 아닙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누구보다도 인문학을 더 진지하게, 즐겁게 읽어야 합니다. "학생 때 들은 허혁교수의 강의가 생각난다. ‘독일 교인들은 일상에서도 칸트나 하이데거와 같은 담론을 즐기는데, 우리는 명품, 부동산 얘기 밖에 없다. 그런 인문학적 소양의 부재가 지금의 기독교 위기를 초래한다고 볼 수 있다" "문학, 예술 등을 아우르는 인문학은 우리에게 사회를 바라보는 시각을 제공한다. 그리스도의 정신이 이 땅에 충만하려면 콘텍스트인 인문학적 시각으로 텍스트인 성경을 바라볼 때 더 많은 인간에 대한 이해와 통찰을 얻을 수 있다" "신학은 그 시대의 물음에 대한 기독교적 응답이다. 그런 의미에서 신학과 인문학은 서로에게 상호보완적 관계로 발전해 왔다. 물론 한계가 모호한 지점이 있기는 하다. 최근 인문학의 붐은 상호 소통의 도구가 되지 않을까?"
    • 문화
    • 기독교 교양 읽기
    2021-07-22
  • [영화]한국영화가 사회문제를 다루는 두 가지 방법
    영화, 선진국 대한민국에서 일어나는 일을 말하다 지난 7월 2일 유엔무역개발회의(UNCTAD)가 한국의 지위를 개발도상국 그룹에서 선진국 그룹으로 변경했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해 전 세계 경제가 어려운 상황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은 경제 규모로는 세계 10위에 올랐고, 1인당 국내총생산(GDP)에서도 이탈리아를 추월하는 등 선진국으로서의 면모가 확인된 까닭에 이번 발표는 예상된 일이었다. 특히 의미가 있는 것은 대한민국이 개발도상국 범주를 벗어나 선진국에 진입한 최초의 국가라고 유엔이 공인한 일이다. 그렇다면 한국영화 속에 나타난 한국 사회는 과연 선진국의 면모를 보여주고 있을까? 증권이나 금융사기와 같은 선진국형 범죄가 소재로 등장하는 현실은 분명 경제력을 갖춘 한국의 현주소를 보여주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해결방법이 극히 사적인 고통과 이에 따른 복수로 끝을 맺을 뿐 제도적인 개선에 이르지 못한다면 무늬만 선진국이라는 오명을 벗어나기 어렵다. 특히 장애인과 같은 사회적 약자를 대하는 현실을 다룬 영화라면 영화를 보는 내내 얼굴이 화끈거림을 감출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점에서 과연 우리는 선진국인지를 자문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김창주 감독의 영화 <발신제한>과 김정인 감독의 <학교 가는 길>은 우리 사회에 일어난 갈등이 선진국형인지 아니면 아직도 개도국 수준에 머물고 있는지를 확인시켜주고 있다. <발신제한>은 드라마로 제작된 상업영화인 반면 <학교 가는 길>은 다큐멘터리다. 드라마는 스릴러나 액션 등과 같은 대중이 선호하는 방법을 동원하여 사회문제를 부각시키는 장점이 있다. 과거의 시간 속에 잊혔던 문제를 새롭게 인식시키는데 매우 유용한 방식이다. 그에 비해서 다큐멘터리는 소재주의를 선택한다. 즉 원래부터 우리가 알고 있는 사건이나 문제를 깊이 파고들며 연출자가 제시하는 새로운 이해를 촉구받는 형식이다. 은행의 불완전 판매에 대한 복수 드라마 타입의 스릴러 장르를 표방한 영화 <발신제한>은 자본주의의 꽃인 금융업의 비리를 지적하고 그로 인해 희생당한 사람의 존재를 상기시킨다. 돈 많은 고객을 관리하는 PB(프라이빗 뱅크) 센터장 성규(조우진)는 두 아이를 자신의 고급 SUV에 태우고 출근하는 길에 테러범(지창욱)으로부터 걸려온 발신 번호 제한표시의 전화 한 통을 받는다. 거액의 돈을 마련하지 않으면 자동차 시트 밑에 설치한 사제폭탄을 폭파시키겠다는 협박 전화는 성규를 대혼란에 빠뜨리고 그는 어떻게든 아이들을 살려야겠다는 생각에 VIP 고객에게 전화를 걸어 그들의 돈을 유용하려 한다. 전후 사정을 알지 못하는 경찰은 성규를 테러범으로 오인하여 그를 뒤쫓기 시작하고 지뢰 위에 걸터앉은 모양새의 성규는 절체절명의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게 된다. <발신제한>은 2016년에 국내에서 개봉한 스페인 영화 <레트리뷰션: 응징의 날>을 각색한 작품이다. 자동차에 갇혀 있는 상태에서 다양한 감정을 표현해야 하는 만큼 연기력이 출중한 배우가 필요하다는 점에서 주연을 맡은 조우진 배우는 합격점을 받고도 남음이 있다. 특별히 이 영화를 <더 테러 라이브>와 <끝까지 간다> 등 작품성 있는 스릴러 영화들을 편집한 편집 감독 출신의 김창주 감독이 연출했다는 점은 이 영화의 전개가 매우 빠르고 간결하여 요즘 젊은층의 성향에도 잘 맞을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외국영화를 각색했다지만 범행의 이유가 은행의 잘못된 투자로 인해 손실을 입고 가족이 파괴된 상처 입은 사람들의 복수란 점까지도 동일한 것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그런데 한국영화를 본 관객들은 은행의 불완전 판매로 인해 큰 손실을 입은 범인의 복수극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다. 한마디로 개연성 있는 이야기로 보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2011년 부산저축은행 사태는 1조 원이 넘는 피해액에 3만8천 명에 이르는 서민 피해자들을 낳았지만, 아직도 보상은 요원한 상태다. 금융기관들이 이익에만 몰두한 채 고위험 금융상품을 제대로 안내 없이 판매하는 일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발신제한>은 금융계에 윤리적 경고장을 날린 셈이다. 지역이기주의를 극복한 어머니들의 용기 지난 5월 5일, 어린이날에 개봉한 <학교 가는 길>은 발달장애인을 위한 특수학교인 ‘서진학교’ 개설을 둘러싼 지역사회와 장애아 학부모들과의 갈등을 그린 다큐멘터리 영화다. 특수학교 설립문제로 학부모와 지역사회가 큰 갈등을 겪고 있다는 소식을 접한 김정인 감독은 2017년 9월 5일에 진행된 ‘특수학교 설립을 위한 2차 주민토론회’부터 카메라를 들고 직접 당사자들을 인터뷰하며 장애인 가정이 겪는 현실을 모으기 시작했다. 슬프고 어두운 모습만 있을 것이라는 예측은 빗나갔다. 웃음과 기쁨 그리고 자녀와의 갈등이 있는 모습은 여느 비장애인 가정과 다를 게 없었다. 비장애인들이 장애인들에 대해 가진 편견의 가장 중요한 원인은 함께 어울려 살지 않기 때문이란 사실을 영화는 가르쳐 주고 있다. <학교 가는 길>에는 국민을 안타깝게 만들었던 어머니들이 학교를 짓게 해달라고 지역주민 앞에서 무릎 꿇고 사정하는 바로 그 장면도 등장한다. “집에서 2시간 전부터 학교를 가려고 나와야 합니다. 여러분들도 부모이시고 저도 부모입니다. 단지 장애가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아이들의 학교를 여기에 지을 수 없다고 하시면... 그럼 어떻게 할까요? 여러분들이 욕을 하시면 듣겠습니다. 여러분들이 모욕을 주셔도 저희 괜찮습니다. 여러분들이 지나가다가 때리셔도 맞겠습니다. 그런데 학교는 절대로 포기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 장애아들도 교육받을 권리가 있지 않습니까?” 지역사회와의 갈등을 줄이기 위해 서진학교 설립을 반대하는 지역주민들에 대해서 몸을 낮추고 이해하려는 어머니들의 언행은 존경스러울 따름이다. ‘특수학교를 반대하는 것은 아니나 우리 지역에는 안된다’ 혹은 ‘특수학교가 들어서면 집값이 떨어진다’는 몇몇 주민들의 발언에 분노하는 사람은 관객들뿐이다. 아이들을 위해 학교를 짓는 일이라면 모든 것을 감내할 준비가 되어 있는 어머니들은 역시 위대했다. 특수학교 설립보다는 지역 국회의원의 공약사항이면서 생활에 편리한 의료시설 건립을 찬성하는 지역주민들의 의견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지 않은 전형적인 지역이기주의가 등장했다는 판단은 피할 수 없었다. 특수학교 설립을 반대하는 모습 이란 이름하여 님비(NIMBY·Not In My BackYard)현상에 다름 아니었다. 님비는 ‘내 뒷마당에는 안 된다’란 뜻으로 사회에서 필요로 한 시설이나 정책을 집행할 때라도 ‘내가 사는 지역에 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다’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화장장이나 쓰레기 매립장에서부터 핵폐기물 처리장에 이르기까지 혐오나 기피시설로 인정되는 한 자신의 지역사회에서의 건립을 반대하는 운동에 대해 붙여진 이름이다. 그러나 지역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라면 지역이기주의에 편승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한국에서 님비현상이 지역이기주의로 비판을 받는 결정적 이유는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가 무시되는 경향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정신적으로나 신체적으로 혹은 경제적으로 외부의 도움과 특별한 배려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사회적 약자들 역시 존엄한 인간이며 사회의 구성원으로 누려야 할 권리가 있는 법이다. 따라서 적극적으로 반대 운동을 벌일 만큼 사회적 약자에 대한 편견이 도를 넘어 지역이기주의로 확산될 때 우리는 님비현상의 비인간적 행태를 문제 삼을 수 있는 것이다. 한국교회의 숙제 보건사회연구원의 2020 장애인 실태조사 결과에 따르면 2020년 3월 말 기준 등록장애인은 2,622,950명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2017년에 비해 약 4만2천 명이 늘어나는 등 지속적인 증가 추세를 보이고 있다. 그나마 장애인이 느끼는 차별의 시선은 약간 줄어든 것이 다행스럽다. 장애인 실태조사에서 함께 시행한 설문조사 가운데 장애인 차별에 대하여 ‘없다’고 응답한 비율은 36.5%로 2017년 20.1%, 2014년 27.4%에 비해 증가함으로써 우리 사회의 장애인 차별이 점차 줄어들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아직도 장애인을 차별하는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에 비해 월등히 많은 현실을 피해가지는 못했다. 님비현상을 극복하며 사회의 약자를 돌보는 일은 한국교회가 감당해야할 시대적 과제이기도 하다. 세속화된 사회에서 지역사회와 소통을 이루는 가운데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될 수도 있다. 구한말 가난한 나라 조선에 발을 디딘 선교사들은 사회에서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았던 장애인과 소외받은 사람들에 대한 관심과 돌봄을 시작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캐나다의 의료선교사 로제타 홀(Rosetta Sherwood Hall) 선교사는 1894년 시각장애인 학교인 평양여맹학교를 세움으로써 국내 특수교육의 첫 문을 열었다. 한국교회와 기독교인들이 존경받을 수 있었던 것은 세상이 편견을 갖고 하지 못했던 사회적 약자를 품었기 때문이었다. ‘소자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마25:40)는 예수님 말씀은 님비현상에 대해 침묵해서는 안 되는 교회의 사회적 사명을 뜻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왕 사랑을 실천하고자 한다면 지혜롭게 해야 할 일이다. ‘다툼이나 허영’(빌2:3)이 아닌 지역사회도 함께 품으며 겸손한 마음으로 이타적 존재가 누리는 기쁨을 제공하는 것이 마땅하다. 영화는 사회를 고칠 수 있을까? 문제를 알면 해결 방법도 찾을 수 있다. 영화가 한국사회의 문제를 제기한다면 그 답은 영화를 보는 관객의 마음에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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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7-09
  • [기독교인문학]‘한 사람에 대한 관심과 배려 그리고 존중
    박 양 규 《인문학은 성경을 어떻게 만나는가》 한국의 대형교회의 교육현장에 있던 그의 고민은 하나님의 말씀이 정작 필요한 갈급한 이들에게 성경은 왜 생동감 없이 격리된 언어로 존재하는가?에 대한 물음의 답이 이 책에 담겨 있다. 그의 해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모세와 함께 출애급한 200만명의 히브리인, 베드로가 전도한 3,000명의 결신자, 오병이어의 기적과 5,000명의 군중처럼 ‘영웅’만 기억하고, 그 뒤에 감춰져 숫자로만 기억되는 ‘아무개’들의 재발견이다. 이를 위하여 문학, 역사, 철학, 예술의 인문학을 끌어드린다. 인문학의 정신이 ‘영웅’이 아닌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한 관심과 배려, 그리고 존중이라 믿기 때문이다. 지적 과시가 아닌 밀레와 고흐의 시선처럼 아래로의 관심과 환대가 새로운 세상을 만들기 때문이다. ◇ 저자소개 박 양 규∥ 총신대와 동 대학원에서 신학을 전공하고, 고려대학교 서양사학과에서 헬레니즘 분야로 석사과정을 마쳤다. 영국 에버딘대학교에서 중간사 분야로 박사 과정을 수료, 삼일교회에서 교회학교를 총괄했다. 목회자로서 저자의 오랜 고민은 목회와 교육현장에서 왜 성경이 현실에 와 닿지 않는가, 왜 성경은 격리된 언어로 존재하는가였다는 그는 현재 대형교회의 울타리를 벗어나 성경과 인문학을 연결한 교회교육 콘텐츠를 제시하기 위하여 유튜브 채널 <교회교육연구소>와 <큐리랜드TV>를 운영하고 있다. 저서로는 《유럽비전트립》, 《청소년들을 위한 하이델베르크》, 《중세교회의 뒷골목 풍경》 등이 있다. 샘솟는 기쁨 / 2021. 1. 21. / 16,500원 ◇ 같이 읽으면 좋은 책 《인문학으로 읽는 성경》 김주철 / CLC / 《설교자는 왜 인문학을 공부해야 하는가》 김도인 / 글과 길 / ‘ 지식’이 아닌 ‘시선’ “한국의 기독교 집단이 성경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이것이 인문학과 관련해서 대담하게 던지는 질문이다, 성경적이지 않다면 인문학으로 성경을 읽는 ‘태도’가 필요한 이유이다. ~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한 인간을 향한 ‘시선’이지 인문학 ‘지식’이 아니다.” 바르게 믿기 위하여 인문학 필요 김길구 우리 코너 이름이 기독교+인문학입니다. 서로 앙숙 같은 신본주의냐 인본주의냐를 가르는데 익숙한 우리 풍토에서 용어에 대한 오해가 꽤 있는 것 같아요? 김현호 그것은 오해지요. 중세는 물론 종교개혁을 선도한 이들의 학문적 배경에는 인본주의자들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보수적이라는 미국도 1980년대부터 기계문명의 발달로 인한 인간성 상실에 대한 반성으로 대부분의 기독교 학교들이 고전교육 등 인문학을 강화하는 추세입니다. 박영규 말씀하셨듯이 원래 인문학은 기독교 세계 속에서 성경을 뿌리에 두고 태어났어요. 하나님이 주신 이성을 통하여 하나님을 바르게 알고 사고하는 방법을 배우기 위함이었으니까요. 김길구 인문학 Humanities 은 인간의 근원적인 문제를 탐구하는 학문입니다. 그런 인문학이 성경과 만나면 어떻게 될까? 오늘의 주제입니다. 김현호 ‘수십 년간 기독교인으로 살아오면서 안타까운 점은 여전히 한국 교회에는 질문과 토론이 없고 자구 하나에 집착하며 바벨탑 같은 성경 지식만 쌓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공허한 설교와 맹목적 아멘만 넘쳐나는 것도 여전하다. 이를 극복하려면 관성으로 굳어진 시각의 틀을 깨고 성경을 바라보는 노력이 필요하다.’ 경향신문 기자인 저자의 누나가 쓴 추천사의 일부입니다. 우리 교회의 일그러진 자화상이지요. 박영규 저자는 학문과 일상, 성경과 삶이 분리되고, 교회 교육의 안팎이 다른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습관과 관성의 틀을 깨는 인문학적 시각으로 성경과 공감하고 소통하는 새로운 ‘관점’을 제공해 주고 있습니다. 김길구 최근 출판계의 흐름 중에 하나는 인문학을 주제로 한 출간이 꾸준히 느는 현상이 아닌가 싶은데, 기독출판계 역시 이러한 흐름에 예외가 아니죠? 어때요? 김현호 그렇지요. 저희 모임에서도 이정일 교수의 〈문학은 어떻게 신앙을 더 깊게 만드는가〉란 책으로 독서 나눔을 가진 적이 있는데 참가자들이 성경을 인문학적 배경을 통해 다양한 시각으로 이해하려는 것을 보고 저도 놀랐습니다. 교인들의 수준이 높아졌다고 봐야 하나요? 박영규 성경도 잘 모르는데 인문학까지? 라는 부정적 시각도 있고요. 자칫 19세기의 ‘살롱문화’처럼 신분과 계급, 지적 허영을 과시하기 위한 일종의 ‘귀족적 문화’로 변질 될까 우려되기도 합니다. 김길구 책으로 들어가 보죠. 고전의 반열에 오른 작가들의 주제 의식과 명작이 된 시대적 배경에 대하여 예를 들고 있지요? 김현호 「데미안」에서 묘사된 인생의 고뇌, 「걸리버 여행기」에서 말하는 부조리한 현실, 밀레와 고흐의 작품이 전하는 ‘한 인간에 대한 연민’ 같은 투철한 주제 의식이 고전의 반열에 오른 이유로, 러시아 정교회의 극심한 타락과 프랑스 사회의 가득한 부조리가 톨스토이와 까뮈를, 영국사회의 부도덕과 스페인의 부패한 사회상이 톨스토이와 돈키호테라는 캐릭터를 창조한 시대적 배경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박영규 한마디로 시대를 꿰뚫어 보는 작가의 ‘시선’이 향하고 있는 곳을 얘기하고 있어요. 예를 든 작품들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산다는 기독교가 지배했던 유럽의 얘기들이잖아요. 괄목할만한 성장을 이룬 우리 교계 기독교인의 삶도 점점 ‘살롱문화화’ 되고 있지 않은지 성찰해 봐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런 작품들은 우리에게 많은 통찰을 주고 있지요. 이것이 인문학이 필요한 이유겠죠. 주인공이 아니 보통 사람들에 주목해야 김길구 이제 이 책의 주제로 들어왔어요. 먼저 성경을 바라보는 ‘시선’에 대해서 말씀을 하셨는데, 이 책의 또 하나의 주제는 성경에 나오는 ‘주인공’이 아닌 이 책에서 ‘아무개’라고 불려지는 이름 없는 작은 이들에 주목하라는 것입니다. 김현호 인문학이 신학을 전달하는 통로라면 그것을 잘 아우를 수 있는 장르가 문학 같아요. 서점에 있으면 신학책들이 많이 들어와요. 자칫 과잉교리와 신학의 전달로 성경 말씀이 실생활과 괴리된 공허한 설교가 되지 않을까 염려됩니다. 박영규 저자는 성경의 주인공들의 스토리에 가려진 동시대의 ‘아무개’들에게 다가가 그들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그 말씀을 적용할 때 말씀에 생명력이 생겨 아무개들이 살아갈 지혜와 영감을 얻게 되는데, 그 이유는 그 아무개들이 바로 오늘, 우리들의 모습이기 때문이죠. 김길구 이 책은 270쪽에 어떤 믿음을 가졌는가? 어떤 삶을 선택할 것인가? 등 흥미로운 12개의 주제로 나눠 각 주제마다 벤치마킹, 공감하기, 인문학적 성경읽기라는 3단계 과정을 두어 성경공부의 깊이를 더하는데요,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를 떠나는 장면을 다룬 ‘떠날 것인가, 머물 것인가?’를 통하여 인문학과 성경이 어떻게 만나는가를 알아보죠. 김현호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이해하려면 우선 「우르」에 대한 선이해가 필요합니다. 우르는 세계사에 등장하는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중심도시죠. 인류 최초의 서사시 <길가메시 서사시>나 성문법 함무라비 법전은 우르를 중심으로 꽃을 피웠던 이 메트로폴리스를 고려치 않으면 그의 ‘순종과 결단’의 의미가 빛이 바래죠. 당시 우르는 문명과 법 제도가 완비된 완벽한 주거공간이었습니다. 저자는 주인공의 아브라함의 결단에 주목합니다. 공감하기, 그리고 인문학적 성경읽기 박영규 1단계인 벤치마킹하기에서는 여기에 멈추지 않고 한 걸음 더 들어가 ‘영웅’인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처럼 하나님께 직접 듣지 못하고 전언을 듣고 그의 명령에 따라야 했던 그 많은 주변부 사람들의 입장에서 그 말씀을 재해석하고, 고심 끝에 따라나서야 했던 이들의 처지를 되돌아보고 그들의 결단에 우리도 공감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매일 매일을 크고 작은 선택을 해야 하는 수많은 ‘아무개’ 속에 한 명인 바로 우리 자신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김현호 다음 단계인 공감하기 단계에 이르면 사걀의 <이삭의 희생>을 보면서 당시 사회적 약자였던 사라의 입장이 되어 보고, 고심 끝에 내린 그녀의 믿음에 주목합니다. 그리고 아브라함과 롯이 나그네를 환대하는 장면에 이르면 ‘선한 영향력’이란 고지를 점령해야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다르게 설정된 태도에서 나옴을 상기시킵니다. 3단계인 인문학적 성경읽기에서는 창세기 12장1절의 야웨께서 명령하셨다. ‘너 자신을 위해서’ 네 고향, 즉 네 친척, 네 아버지의 집을 떠나~(창12:1, 히브리어 원본)의 성경본문을 통해 번역본에 빠진 ‘너 자신을 위해서’란 부분을 통해 아브라함과 함께했던 아무개들을 살펴보면서 우르를 떠난 것은 하나님을 위한 것인가, 아니면 아무개들 자신을 위한 것인가?란 물음에 우리가 스스로 답하도록 인도합니다. 박영규 저는 이 책을 읽으면서 인문학이 하나님과 다른 길을 가는 것 같지만 결국에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인간의 이성을 통하여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김길구 정리하자면 저자의 인문학적 성경읽기의 특징은 성경에 등장하는 수많은 등장인물 중 몇 사람으로 기억되는 ‘영웅’들의 위인전이 아니라 주변부의 등장인물 한 사람 한 사람에게도 관심과 배려, 그리고 존중의 시선으로 잃지 않는 따뜻함이 있다는 점이고, 저자는 이것이 인문학의 정신이라고 합니다. 이를 위하여 시대를 넘나드는 해박한 문학, 역사, 예술을 아우르는 다양한 이야기를 통해 텍스트인 성경이 고대 중동의 케케묵은 박제화된 남의 나라 이야기가 아닌 우리의 삶의 현장인 바로 지금 여기의 콘텍스트에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살아있는 말씀으로 다가오는 감동을 느꼈던 좋은 시간이었습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다음 호인 7, 8월에는 여름휴가 관계로 연재를 쉽니다. 비정상이 정상이 되어버린 코로나19 시대 독자 여러분의 건강한 여름나기를 성원합니다. 감사합니다. 【 정리 : 김길구 】
    • 문화
    • 기독교 교양 읽기
    2021-06-25
  • [영화] 올림픽이 기억하는 신앙의 영웅
    올림픽이 열리기 전에 꼭 봐야 하는 영화 도쿄올림픽이 코 앞으로 다가왔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해 개최가 불투명한 가운데서도 올림픽을 준비하는 선수들의 심장은 뜨겁게 뛰고 있다. 만일 그 선수가 그리스도인이라면 영화 <불의 전차>는 자신의 심장이 요동치는 분명히 이유를 발견하게 해줄 것이다. 하나님이 주시는 힘으로 뛰고 있다는 사실에서 금메달보다 더 높고 위대한 목표가 눈 앞에 펼쳐지는 광경을 볼 수 있으리라. 영국이 낳은 위대한 육상선수 에릭 리델(Eric H. Liddell, 1902-1945)과 해롤드 아브라함(Harold Abrahams, 1899-1978)의 멋진 스포츠맨십이 빛나는 영화 <불의 전차>(Chariot of Fire)는 제작된 지 40년을 맞이하면서 스포츠영화로써 뿐만 아니라 기독교 영화로도 고전의 반열에 든 작품이다. 1981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을 비롯한 각본상, 의상상 그리고 음악상 등 무려 4개 부문을 획득했을 때 미국의 그리스도인들은 영화 <벤허>가 1960년 아카데미상 11개 부문을 휩쓴 이후로 가장 대중적인 기독교 영화가 탄생했다며 기쁨을 감추지 못했었다. 그러나 한국의 극장가는 할리우드에서 울려 퍼진 환호성을 35년 동안이나 외면했다. 한국전쟁 이후 아카데미 작품상을 받은 영화 가운데 한국의 극장에서 걸리지 않은 유일한 영화라는 꼬리표도 따라붙었다. <불의 전차>가 한국의 극장에서 공식적으로 개봉하기까지는 세기가 바뀐 2016년에서야 가능했다. 필름 원본을 디지털 리마스터링 작업을 거쳐서 디지털 영사 시스템에 맞춘 작업을 끝낸 직후였다. 그리고 지난해 가을 코로나로 인해 극장가에 신작들의 상영이 연기된 상황에서 관객의 호응도가 좋았던 영화들을 모아서 재상영하는 행사 가운데 다시 한번 극장에 걸릴 수 있었다. 이 위대한 명작을 극장에서 볼 수 없었던 것도 그리고 이제야 극장에서 만날 수 있었던 것도 그리스도인들 때문이었다. 기독교 영화를 외면했던 그리스도인들이 이제야 눈을 떠서 이 영화의 가치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불의 전차>는 기독교가 외면받는 이 시대에 더욱 기독교의 가치를 일깨워 주는 최고의 명작이다. 1924년 파리올림픽 육상 단거리 금메달리스트인 에릭 리델(이안 찰슨)과 해롤드 아브라함(벤 크로스)의 열정 넘치는 도전을 그린 영화 <불의 전차>가 특별한 이유는 신앙과 예술 그리고 재미라는 기독교 대중영화의 세 요소를 모두 갖췄기 때문이다. 신앙의 가치가 빛나는 영화일수록 예술성도 떨어지고 재미도 없을 것이라는 편견은 빨리 버리는 것이 좋다. 세상에서 가장 품위있는 영화 <불의 전차>는 스포츠맨들의 치열한 경쟁을 내면화시켜 품위 있는 스포츠영화가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었다. 경기에 나서는 선수들 사이에서 일어날 수 있는 시기와 질투 혹은 음모 등은 눈꼽만치도 보이지 않는다. 대신 최선의 가치를 추구하는 주인공의 내면적 갈등과 극적인 결과가 매우 느리게 표현될 뿐이다. 연출은 영국 귀족의 자세처럼 기품이 있어 보인다. 대중들의 호기심을 끌만한 자극적인 장치도 촬영기법도 보이지 않는다. 기교를 부린 점이 있다면 선수들이 달리는 장면에서 느린 동작으로 표현하며 반젤리스의 주제가를 덧입힌 정도다. 지난 2012년 제30회 런던올림픽 개막식에서 사이먼 래틀경이 지휘하는 런던심포니 오케스트라는 영화의 장면과 함께 바로 <불의 전차>의 테마를 연주함으로써 이 영화가 영국의 현대사를 빛낸 사건임을 전세계에 알렸다. 특히 ‘미스터 빈’으로 알려진 영국의 코미디언 로완 앳킨슨이 코믹한 연주와 연기로 참여하는 바람에 <불의 전차>는 더욱 세계인의 머릿속에 잊을 수 없는 올림픽 영화로 남게 되었다. 이 영화의 품위는 명예를 중시하는 영국인의 고전적인 전통이 내용으로도 확인되고 있어서 주목받을 수 있었다. 1919년 영국 캠브리지 대학의 신입생 환영회는 정오를 알리는 12번의 종소리가 멈추기 전까지 캠퍼스를 한 바퀴 도는 달리기 경주로 영화는 시작한다. 이 경기에 참여하고 또한 지켜보는 학생들은 도전과 패기와 열정으로 가득한 젊은이들일 따름이다. 그러나 이들은 단순히 젊다는 의미만을 지닌 학생들이 아니라 순수함과 바른 가치관을 가지고 국가와 세계를 위해 봉사하는 지도자가 될 사람들이란 점에서 세상사는 그리스도인의 역할을 떠올리기에 충분하다. 신입생 환영식에서 캠브리지 대학 학장은 강당 벽면 동판에 새겨진 이 대학 출신으로 1차세계 대전에서 나라를 위해 싸우다 죽은 전사자 명단을 보며 이렇게 회상하고 있다. “약속된 미래를 향해 정열적으로 학문을 탐구하던 모습을 기억합니다. 그들은 한 시대의 꽃이었고 영국의 자랑이었습니다.” 이 영화 속에서 나타난 명예란 한 개인이 자신의 이기적인 욕망을 위해서 살지 않고 자신 보다 높은 뜻을 향해 헌신하고 노력하며 사는 사람의 모습임을 나타낸다. 국가대표 육상선수란 개인의 명예뿐만 아니라 자신이 소속된 집단의 명예를 짊어지는 사람인 것이다. 해롤드 아브라함과 에릭 리델은 모두 영국의 명예를 위해 뛰지만 아울러 이들은 각각 유대인 사회와 스코틀랜드의 기독교도라는 자신이 속한 사회의 명예를 짊어진 사람들인 것이다. 대조적인 두 주인공의 절묘한 성격묘사 스코틀랜드 출신의 선교사인 에릭 리델과 유대인 고리대금업자의 아들인 해롤드 아브라함을 투 톱으로 내세운 이 영화의 캐릭터 설정은 역사적 실화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절묘한 대조를 이룬다. 두 사람이 육상선수로서 시합을 준비하고 경기에 임하는 자세는 완벽하게 다르다. 한마디로 세계관이 다른 까닭이다. 해롤드는 전형적인 유대인적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다. 에릭 리델을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다고 판단한 해롤드는 최고의 실력있는 코치인 무사비니를 찾아가 자신을 훈련시켜줄 것을 부탁한다. 선수가 코치를 선택하는 것은 마치 봉건시대에 여자가 남자에게 먼저 청혼하는 것과 같이 너무 이례적인 일로서 당시로서는 너무도 파격적인 행동이 아닐 수 없었다. 이것은 어떻게든 열심히 노력하는 행위를 통해 자신이 인정받고 최상의 자리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는 유대교의 율법주의의 영향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그러나 리델은 다르다. 그가 심장이 터질 듯 달리는 이유는 오직 한가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일 뿐이다. 중국선교를 위해 육상을 포기하라는 누이의 권유에 대해 리델은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은 중국을 위해서 날 만드셨어요. 그분은 또한 나를 빠르게 달릴 수 있도록 만드셨지요. 난 달릴 때 하나님의 기쁨을 느껴요.”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남보다 잘 뛸 수 있는 달란트를 주신만큼 이 재능을 주님을 위해 사용하겠다는 신념이 그를 최고의 선수로 만들었다는 사실에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리델로부터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선물을 수용하고 사용할 줄 아는 ‘은혜의식’을 발견할 수 있다. 하나님의 은혜를 느끼는 자는 표정도 남다르다. 아브라함은 항상 긴장된 표정으로 나타나는 반면에 리델의 얼굴에는 평안이 넘친다. 원칙있는 신앙생활에 임하는 하나님의 축복 1924년 파리올림픽에 참가한 영국국가대표선수단은 에릭이 주일성수를 이유로 그의 주종목인 100m 경기에 나가지 않기로 하자 심각한 혼란에 빠진다. 영화는 어찌할 바를 모르는 임원들과는 대조적으로 예배에 참석해서 성경을 읽으며 진중한 리델의 모습을 보여준다.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이사야40:30) 주일에 교회에 가지 않고 축구하던 어린이를 타일렀던 에릭 리델은 말과 행동이 신앙의 원칙에 기반을 둔 참된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은근히 가르치고 있다. 리델의 원칙 중심의 신앙생활은 주일성수문제에 대한 논란을 떠나서 관객으로 하여금 하나님 중심의 신앙으로 돌이키게 만드는데 큰 의미가 있다. 에릭은 동료 선수의 제안으로 자신의 주종목이 아닌 400m 경기에 나가 금메달을 목에 걸게 된다. 100m 금메달 후보였던 만큼 400m에 나가 우승한 것을 당연하게 생각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100m와 400m는 뛰는 방법도 전략도 다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신의 주종목도 아닌데 어떻게 우승할 수 있었을까? 에릭 리델은 달랐다. 그가 예사롭이 않다는 사실은 함께 뛰는 다른 선수들의 표정에서 읽을 수 있다. 리델과 함께 경기에 출전하는 옆의 다른 선수들이 리델을 보며 이런 말을 하는 것을 들을 수 있다면 우리는 곧 그가 금메달을 딴 이유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저자의 속엔 뭔가 있는 것 같아. 자네나 내가 갖지 못한 뭔가 특별한 것 말야.” 그리스도인이라면 주변의 사람들로부터 이런 얘기를 들어야 하지 않을까? 리델은 모든 행동의 기반을 신앙 위에 두었다.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잘 뛸 수 있는 달란트를 주신만큼 이 재능을 주님을 위해 사용하겠다는 신념이 그를 최고의 선수로 만들었고 하나님은 그를 축복하신 것이다. 나는 올림픽이 열리기 전 연례행사처럼 학교에서 선교학을 배우는 학생들을 모아서 <불의 전차>를 보곤 한다. 세상의 금메달보다도 더욱 귀한 주님 주시는 면류관을 향해 열심히 공부하고 신아앙의 훈련을 받는 학생들에게 이 영화를 보는 것만큼 즐거운 교육이 없기 때문이다. 최고의 지성을 겸비한 영국 캠브리지의 학생들이 조국과 학교의 명예를 위해 달리는 모습을 보노라면 심장이 뛰지 않을 수 없다. 중국선교사 에릭 리델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달리는 것을 보노라면 무신론이 지배하는 세속적 사회에서 우리는 은혜와 열정을 가지고 살아가지 않을 수 없다. 자신보다 큰 목표를 향해 달리는 젊은이들은 아름다운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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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6-11
  • [기독교인문학]4차 산업혁명시대, 스마트 선교가 시작되다
    이동영의 《4차 산업혁명과 그리스도인의 삶》 - 교회, 플렛폼 경쟁에 놓이다 - 2016년 스위스 다보스에서 열린 세계경제포럼에서 ‘4차 산업혁명’이란 용어가 처음 사용된 이래 일반화된 이 말은 기존의 컴퓨터와 인터넷 기반 위에 오프라인과 온라인이 결합하여 IoT, CPS, 인공지능 등의 기술혁신의 쓰나미를 통해 만들어질 사회시스템 전반적인 대변혁을 일컫는 것으로 이에 대한 교회의 준비가 필요한 시점이다. 경영학자 출신으로 조직신학자가 된 저자는 가까운 미래 패러다임을 바꿀 혁명의 실체와 그리스도인의 대응을 풀어내고 있다. 총 11장 120 쪽의 이 책에는 각 장별로 토론을 위한 자료가 있어 스타디 그룹용으로 유용하다. 인간이 드디어 자신의 형상을 창조하는 호모데우스의 시대 하나님의 사람으로 사명을 준비하는 이에게 권하는 필독서 ◇ 저자소개 이 윤 석∥ KAIST에서 경영학 석, 박사 후 삼성SDS와 포스코 경영연구소에서 근무. 30대 중반에 목회자의 길을 가기로 결심하고 총신대에서 조직신학 전공으로 신학석, 박사 등을 마치고 충남 아산에서 아산시민교회를 개척 담임목회를 하였다. 현재는 독수리기독학교에서 연구소장으로 사역 중이다. 저서로는 《그리스도와의 연합관점으로 본 조나단 에드워드의 성화론》, 《성도의 삶에 나타나는 미덕의 특징에 대한 연구》, 《4차산업혁명 시대 코딩 기술과 교회교육》 등이 있다. CLC 간 / 2018.9. / 10,000원 ◇ 같이 읽으면 좋은 책 《기술의 불안한 미래》 에그버트스 휴르만 / 비아토르 / 2019 《기술체계》 자크엘륄 / 대장간 / 2013 4차 산업혁명의 문화적 사명 “ 저자는 교회라는 플랫폼에 스마트한 선교/목회/연합을 도입함으로써 기술을 축복으로 변혁시키는 문화적 소명을 신학과 경영학이라는 양날의 검으로 그 누구보다 탁월하게 열 어간다. ”(추천사에서 김준성) 성큼 다가온 4차 산업혁명 김길구 2016년 다보스포럼에서 열린 세계경제포럼에서 4차 산업혁명이란 말이 처음 사용된 뒤 세계적으로 유행어가 되었습니다. 박영규 사실 4차 산업혁명에 대한 논쟁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어요. 그 실체에 대한 논쟁이죠. 기존의 컴퓨터와 인터넷 기반의 3차 산업혁명인 지식정보혁명의 연장선상에서 보는 견해도 있으니까요. 김현호 세기의 대결이라는 이세돌과 딥 런닝으로 학습된 인공지능인 ‘알파고’와의 대결이 4대1로 인간이 일방적으로 패하자 멀게만 느껴졌던 인공지능이 주도하는 4차 산업혁명을 전 세계인이 체감하는 계기가 되었지요. 김길구 제4차 산업혁명을 정리하면 IoT, CPS, 인공지능 기반의 만물초지능의 혁명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요. 이에 대한 교계의 대처는 어떤가요? 김현호 우리교계도 활발치는 않지만 4차산업혁명에 대한 논의들이 꾸준히 있어 왔어요. 「Be Connected-4차산업혁명과 선교」 (FMnC선교회), 「4차 산업혁명과 기독교학문」 (기독교세계관학술동역회), 「4차 산업혁명과 기독교 포럼」, 「4차 산업혁명 이해와 대응전략」 (새세대아카데미) 와 「4차 산업혁명과 교회」 (한국복음주의조직신학회) 등이 개최되었습니다. 박영규 사실 우리 교계 현실은 거창한 4차 산업혁명이란 이슈보다는 당면한 교인 감소와 대사회적 이미지의 실추, 코로나19로 인한 위기 등에 대한 현안이 더 시급한 실정이지만, 4차 산업혁명이 초래할 특징 중에 하나인 초연결, 비대면으로 인한 극단적 개인화 등이 코로나19 영향으로 더 빨리 촉진될 수 있다는 견해도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비정상이 일상화 된 뉴노멀시대에 살고 있잖아요. 인간은 신이 된 동물 김길구 그럼 책의 본론으로 들어가 보죠? 이 책은 4차 산업혁명의 특징과 함께 베스트셀러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와 후속작 《호머 데우스》에 대한 비판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김현호 그도 그럴 것이 사피엔스에서는 과거 인류의 조상이 영장류의 일원으로 유인원으로부터 진화되어 오던 여러 종 중에서 유일하게 사피엔스종이 허구를 말할 수 있는 능력이 생겨 이 능력으로 세상의 지배자가 되었는데 이 ‘인지혁명’의 시기가 대략 약 7만 년 전부터 3만 년 전 사이라는 주장입니다. 박영규 그의 후속작인 호모 데우스는 미래 인류 진화에 대해 전망하면서 ‘호모 사피엔스’를 ‘호모 데우스’로 업 로드할 것이라는 주장입니다. 즉 인간은 신이 된 동물로 단어의 뜻 그대로 호모 속에 속하지만 신과 같은 종의 출현을 예고합니다. 김길구 여기서 유발 하라리는 현재 인류가 추구할 핵심 의제로 ‘불멸’, ‘행복’, ‘신성’이라는 세가지를 제시하는데 이를 추구하는 방법이 종전의 종교나 철학의 영역이 아닌 고도로 발전된 현대의 첨단과학기술에 의존할 것으로 보고 있어요. 김현호 작년에 번역된 하버드의대 수명혁명 프로젝트팀의 싱클레이박사가 저술한 ‘노화의 종말’에서 엿볼 수 있듯이 노화는 질병으로 치료할 수 있으며 앞으로 생명과학의 발달로 생명연장을 넘어 ‘불멸’을 추구한다는 주장이지요. 2013년 구글의 벤처투자회사인 구글벤처스 같은 회사는 생명연장과 관련된 프로젝트에 막대한 자금을 투자하고 있어요. 박영규 두 번째 의제는 ‘행복’ 추구인데 종전의 명상이나 종교적 행위, 또는 철학적 숙고가 아닌 생명공학, 사이보그공학, 인간이 갖고 있는 유기체 부분이 아예 없는 비유기적 존재를 설계하고 이 존재에 인간의 의식과 지능을 이식하는 것으로 인공지능과 신경과학의 획기적 발달로 가능하다는 주장입니다. 미래 인류의 핵심의제 불멸, 행복, 신성 김길구 마지막 의제인 ‘신성’인데 호모 사피엔스를 호모 데우스로 업그레이드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창조주 하나님은 아니어도 그리스 신들처럼 초능력을 가진 일종의 신성을 획득하는 존재의 출현이죠. 유발 하라리가 말한 데이터교의 출현 같은 것이죠. 김현호 이것이 가능한 것은 인공지능의 발전과 사물인터넷으로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결합으로 온 세계가 하나의 네트워크로 연결되면 막강한 지능과 거대한 데이터를 가진 강력한 권력의 출현이 가능하니까요. 박영규 저자는 이런 입장에 대하여 4차 산업혁명의 주요기술들이 인간의 모습을 어떻게 변화시킬지에 대한 많은 시사점을 준 것은 인정하면서도 하나님의 창조질서을 거스리는 부분에 대해서는 분별이 필요하다는 입장입니다. 김길구 교회도 일종의 플랫폼으로 플랫폼 경쟁에 놓여있다는 주장이 재미있네요. ‘플랫폼’(platform) 비즈니스는 어떤 형태의 비즈니스 모형을 구상하고 그 모형이 돌아갈 수 있는 토대를 구축해 놓고 그 안에 많은 사용자를 끌어들이고 나가지 못하게 하면서 수익을 내는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 최근의 세계 10대 기업 안에 새로운 플랫폼을 제공하는 기업들이 대거 약진하고 있잖아요. 김현호 구글, 페이스북, 아마존, 에이비엔비 등이 이에 속합니다. 박영규 교회는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의 모임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고 다른 모든 신자는 그 몸의 지체가 되어 전체의 몸을 이루는 공동체로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한 네트워크 에 속해 있는데, 이러한 영적 연합 외에도 4차 산업혁명의 주요 기술들을 도구로 활용할 수 있어야 플랫폼 경쟁에서 이길 수 있다고 조언합니다. 교회와 문화와의 관계 김길구 로버트 베버의 문화를 보는 관점 3가지 구분에 중에 아미쉬처럼 분리모형의 입장을 취한다면 산업혁명의 기술 수용에 소극적이면서 선교 또는 전도를 위해서만 기술을 활용하게 될 것이고, 루터처럼 교회와 세상을 동일시 하는 모형이라면 각 기술분야에 그리스도인들은 탁월성을 추구해야 하며, 하나님나라와 세상의 나라가 중첩되면서도 구분되는 경우 어거스틴의 신국론처럼 하나님 나라의 원리가 세상 나라의 각 영역에 침투하여 문화전체를 변혁시켜야 하겠죠. 박영규 긍정과 부정의 양날의 검처럼 양면성을 가진 4차 산업혁명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인공지능과 사물인터넷의 발전으로 일자리를 잃고 저임금 아르바이트나 프리랜서로 내몰려 야기되는 부의 양극화와 불평등의 현상에 대한 균형된 문제의식이 필요하고, 로봇과 인공지능의 경우 기독교 윤리적 입장에서 숙고한 후 개발과 활용하는 것이 필요하며, 사물인터넷의 경우 사람을 돈벌이 수단과 대상으로 전락시키지 않도록 엄격한 도덕적 기준이 필요하고, 의·생물학 분야 역시 인간의 존엄성을 훼손치 않도록 신앙적 분별력이 있는 선한 창조자 역할을 해야 한다고 충고합고 있습니다. 김현호 4차 산업혁명이라는 한번도 경험하지 못한 사회를 맞게 되는 기술혁명의 쓰나미 앞에 모두가 ‘두려움’이 앞서는 것이 사실이나 세상에 대해 두려워 말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신뢰하며 다가올 미래를 준비하되 예수 그리스도의 충만함을 구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김길구 수고 많으셨습니다. 다음 호에는 멈출 듯 멈추지 않는 코로나19를 보면서 일상으로의 회귀를 생각해 보는 CLC에서 펴낸 박동식 저 《코로나 일상 속 신앙, 교회, 삶》을 주제로 얘기해 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정리 : 김길구 】
    • 문화
    • 기독교 교양 읽기
    2021-05-21
  • 손상률 목사 회고록 [강 건너 언덕에 서서]
    손상률 지음/하야BOOK/444면/2021.04.28./13,500원 1965년 2월 전도사로 사역을 시작해 2013년 10월 후암교회에서 원로목사로 추대되기까지 반세기 가까운 목회 여정을 걸어온 손상률 목사! 긴 목회 여정을 끝내고 강 건너 언덕에 서서 내가 살아 온 인생의 걸음걸음 마다 새겨져 있는 은혜의 자취들을 기록으로 정리한 내용을 책으로 엮었다. 총 4부로 구성되어 있으며 제1부 “여호와 이레”는 성장과정에서 결혼까지의 내용이 담겨 있으며, 제2부 “임마누엘”은 전도사로 시작하여 원로목사로 마치기까지 시무했던 교회들과 목회현장의 사역들을, 제3부 “에벤에셀”은 목회자로 한 시대를 살아오는 동안 고비마다 흔들릴듯 바로 설 수 있도록 가늠추가 되어준 삶의 철학을 생각하게 하는 내용으로, 제4부 “해와 달과 별과 같이”는 사랑하는 자녀와 후손들에게 올바른 신앙적 가치관을 일깨워 주고 소중한 유산으로 발전해 나가기를 희망하는 내용을 담았다.
    • 문화
    • 도서
    2021-05-21
  • [영화] 동성애를 향한 기독교 해법을 담은 영화
    기독교 영화도 스트리밍 서비스 시대 기독교 영화 사역을 하는 ‘필름 포럼’이 배급상영권을 가진 두 편의 수입 영화를 스트리밍 서비스로 내놓았다. 하나는 신림동 주사랑교회 이종락 목사의 베이비 박스 사역을 다룬 <드롭 박스>(Drop Box, 2014)이고, 다른 하나는 과거 동성애로부터 회복된 찬양 가수 데니스 저니건(Dennis Jernigan)의 고백을 담은 영화 <싱 오버 미>(Sing Over Me, 2014)다. 이 두 편의 다큐멘터리 영화는 상영 당시 기독교 언론의 주목을 받았지만 교회 성도들에게 제대로 홍보되지 못한 채 금방 잊혀지고 말았다. 특히 한국 교회가 동성애 반대 운동에 보인 관심과 열심에도 불구하고 동성애자를 향한 하나님의 치유와 사랑의 손길을 보여주는 <싱 오버 미> 같은 화제작을 놓친 것은 너무 안타까운 일이었다. 그동안 이 영화를 볼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교회에서 ‘필름 포럼’에 요청하여 교우들이 함께 보는 출장 상영밖에 없었다. 이 경우 교회 안에서의 단체 관람은 가능하지만 개인적으로 영화를 깊이 감상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그런데 이제 네이버 영화관이나 케이블 TV의 VOD 서비스를 통해 이 영화를 볼 수 있게 되었다. 동성애에 대해 기독교 교리적인 접근이나 설교식의 가르침에 부담을 느끼는 현대인들에게 안성맞춤인 <싱 오버 미>는 동성애는 선천적이며 변화가 불가능하다고 믿고 있는 동성애 옹호론자들의 주장을 완전히 뒤집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가 이루어지는 현장을 목격할 수 있다는 점에서 동성애에 대한 탁월한 기독교 관점을 감동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문제는 이 영화를 극장에서 본 관객 수가 영화진흥위원회 공식통계로는 불과 1,808명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 영화를 다시 한 번, 그것도 쉽고 편하게 볼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다. 코로나19로 인해 극장을 찾기보다는 스마트폰이나 노트북 그리고 케이블TV로 영화를 보는 것을 선호하는 현대인들의 성향에 맞게 기독교 영화도 스트리밍 서비스나 VOD 서비스로 상영 플랫폼을 바꿨다. 이것은 언제 어디서든 기독교 영화를 손쉽게 접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는 까닭에 앞으로는 스트리밍 서비스 제공을 목표로 극장 상영이 이루어지는 변화가 기독교 영화계에도 일어날 수 있을 것으로 예상할 수 있다. 미국에서 외면한 탈동성애 기독교 영화 영화 <싱 오버 미>는 교회 안에서 동성애자로 살아왔던 데니스 저니건의 신앙적 갈등과 예수님의 사랑으로 회복되기까지의 과정을 그린 다큐멘터리 영화다. 마치 무용담처럼 어두운 과거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다가 마지막에 가서 하나님의 은혜에 힘입어 빛나는 행복을 이뤘다는 간증형식의 여느 다큐멘터리 영화와는 다르다. 특히 동성애에 대한 신학적 비판을 쏟아붓기보다는 주인공이 보여주는 진솔한 고백과 눈물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힘입은 기독교인이라면 동성애로부터 돌이킬 수밖에 없음을 깨닫게 한다. 따라서 교회 안에서 미처 커밍아웃하지 못한 채 숨어서 신앙생활하는 동성애 기독교인이거나 혹은 동성애에 대해 세상적 시각을 가진 기독교인이라도 감동받고 공감하지 않을 수 없다. 깊은 상처와 혼돈 속에서도 그것을 어루만지는 하나님의 사랑의 손길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영화는 유명 찬양사역자의 다큐멘터리답게 그가 부른 찬양을 배경음악 삼아 그의 과거를 비추며 현재의 고백을 담았다. 어린 시절의 사진을 배경으로 진행하는 부모님과의 인터뷰와 그의 절친 척(Chuck King)이 말하는 저니건에 대한 언급 사이사이로 부모와 친구가 몰랐던 저니건의 동성애에 대한 고백이 이어진다. 다섯 살 나이에 공중화장실에서 바지를 내리고 나타난 성인 남자에 대한 경험으로부터 청소년 시절 여자아이 같다는 놀림을 피하려고 여자 친구에게 키스했지만 전혀 이성의 느낌을 받지 못한 이야기들은 일반적인 동성애자들의 과거와 비슷하다. 그러나 저니건은 하나님이 자신을 동성애자로 만드셨으니 난 어쩔 수 없다는 자포자기식의 동성애에 대한 자기합리화에 머물지 않고 끊임없이 갈등하고 변화를 모색해왔다는 점에서 동성애를 숙명으로 알고 사는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이 영화의 강점은 바로 여기에 있다. 지독한 갈등의 상황 가운데서 기독교의 신앙이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지를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또한 동성애가 유전적 혹은 선천적인 까닭에 동성애에 대한 책임이 인간이 아닌 하나님께 돌리려는 동성애 숙명론자들의 의견이 틀렸음을 보여주기도 한다. 우리가 동성애에 대해 가지는 왜곡된 이해 가운데 하나는 동성애 숙명론이다. 그러나 최근 연구에 따르면 동성애는 후천적이며 사회적 학습에 따른 경향이 강하다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왜냐하면 일란성 쌍둥이의 경우 모든 유전자가 동일하기 때문에 만일 동성애가 선천적이라면 일란성 동성애자 쌍둥이는 함께 동성애자여야 하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영화 <싱 오버 미>는 데니스 저니건을 통해 동성애가 어렸을 때 경험했던 왜곡된 성적 경험으로부터 발생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미국 최대의 장로교 교단에서조차 동성애 목사 안수를 인정할 만큼 동성애 문화에 대해 자유로운 미국사회에서 <싱 오버 미>는 극장에서 개봉조차 하지 못한 채 DVD로만 출시되었다. 영화에 대한 각종 통계와 정보를 보여주는 IMDb(Internet Movie Database) 조차 극장 개봉 및 수입에 대한 통계가 전혀 나와 있지 않다. DVD를 통해 이 영화를 본 미국 기독교인들의 의견은 완전히 극과 극이었다. 10점 만점에 10점을 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100점을 쓴 사람도 있었다. 신앙은 물론 성적 취향에 대한 개인의 자유를 옹호하는 동성애 지지자들이 얼마나 부정적인 시각으로 탈동성애자를 바라보는지를 알 수 있다. 세속적이고 동성애 문화가 만연한 미국사회는 이 영화를 외면했다. 이를 역으로 해석하자면 아직까지도 대한민국은 동성애 문화에 지배받지 않으면서도 성경의 진리를 실현시킬 기회가 남아있다는 뜻이 되기도 한다. <싱 오버 미>를 보는데 공개적으로 비판하는 기독교인은 아직 없지 않은가! 동성애에 대한 기독교 변증영화 <싱 오버 미>는 동성애를 자연스러운 성적취향으로 인정하려는 현대사회를 향해 하나님의 분명한 말씀을 전하고 있다. 이것은 <싱 오버 미>가 기독교 동성애자들을 향한 멋진 기독교 변증의 성격을 가졌기 때문이다. 현대의 세속적이며 상대주의적인 문화 속에서 프란시스 쉐퍼는 기독교 문화의 변증학적 성격을 강조한 바 있다. ‘변증학(Apologetics)’이란 일종의 기독교 신앙을 ‘변호’하는 것을 뜻한다. 특히 쉐퍼는 ‘변증학’의 목적을 방어(defense)와 전달(communication)이라고 말한바 있는데, 여기서 방어는 비기독교 혹은 반기독교적 메세지로부터 기독교 신앙을 보호하기 위한 논증적 방어를 뜻한다. 그러나 쉐퍼는 그의 다양한 저술과 강연, 그의 아들이자 다큐멘터리 감독이었던 프랭키 쉐퍼를 통한 영화 제작 활동이 의미하듯이 방어보다 전달에 관심이 많았다. 즉 그는 어떤 특정한 세대가 이해할 수 있는 형식으로 기독교를 전달하는데 심혈을 기울였던 것이다. 이 때 영화 <싱 오버 미>야 말로 오늘날 영화세대에게 기독교가 동성애자들을 향하여 하나님의 사랑과 관심 그리고 회복을 기대할 수 있음을 전달하는 훌륭한 문화변증의 실천자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싱 오버 미>가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기독교 동성애자들은 교회 누군가의 도움을 기대하고 산다는 점이다. 저니건 역시 성인이 된 이후 동성애자로서 살아가는 일에 대한 죄의식에 휩싸이는 한편으로 동성을 갈구하는 육체의 정욕 사이에서 방황하는 자신을 도와줄 누군가를 찾았음을 고백한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갈5:17)는 성경말씀은 그를 두고 하는 말이다. 그러나 그가 찾아간 교회의 도움은 없었고 오히려 교회 목회자는 자신을 탐하는 또 다른 동성애자였음을 알고 기겁할 수밖에 없는 과거 상황묘사에 관객들은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다. 그가 동성애에 대한 고민을 해결하기 위해 찾아간 교회는 딱 두 부류로 나누어졌다. 동성애에 대한 신랄한 비판만으로 가득 차 있거나 아니면 그와 동성애를 나누기 원하는 목회자가 있었던 교회였다. 이때 크리스천 동성애자들이 취할 수 있는 자세란 교회에서는 이성애자인 척하며 입을 다물고 밖에서는 육체의 탐욕에 스스로를 맡겨버리는 일이다. 교회는 고민 끝에 예배당을 찾는 동성애자들을 맞을 준비가 되어있어야 함을 의미하는 대목이다. 둘째, 예수님이야말로 동성애에 대한 갈등과 상처를 회복시키고 치유하시는 답이 된다는 사실을 영화는 보여준다. 어쩌면 이 영화 가운데 가장 명언이라 할 수 있는 대사가 저니건의 절친 척으로부터 나온다. 동성애로 살아온 친구의 고백을 들은 후 척은 매우 감동적인 말을 한다. “내가 어떻게 해야 할지 방법은 잘 모르겠지만 답은 안다. 답은 예수님이다. 내가 너와 함께 해줄게.” 시간은 걸릴 수 있지만 그러나 예수님이 답이다. 우리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님의 사랑(롬5:8)이라면 가능하다. 어쩌면 당연하고 기독교의 평범한 얘기처럼 들리지만 이보다 더 정확한 해답을 우리는 알지 못한다. 그리고 이것을 데니스 저니건은 자신의 삶과 그가 만든 찬양곡을 통해 증거하고 있다. ‘약할 때 강함 되시네/ 나의 보배가 되신 주/ 주 나의 모든 것/ 주 안에 있는 보물을/ 나는 포기할 수 없네/ 주 나의 모든 것/ 예수 어린 양 존귀한 이름/ 예수 어린 양 존귀한 이름’ 우리의 귀에 익숙한 찬양곡 ‘약할 때 강함 되시네’는 언제 들어도 기독교인의 마음에 감동을 준다. 예수를 보고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말한(요1:36) 세례 요한의 고백을 바탕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신앙고백이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울려 나옴을 느낄 수 있다. 만일 <싱 오버 미>를 보고 난 후라면 이 찬양이 주는 감동은 더욱 클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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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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