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2-05-27(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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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임중칼럼] 그래도 3월 9일 투표장으로 가야한다.
    지혜롭지 못한 곰 이야기가 있다. 남극에 사는 백곰이 어느 날 시베리아에 있는 호전적이고 당돌한 흑곰의 방문을 받았다. 저녁 식사 후에 시베리아 곰이 남극 백곰에게 말했다. “남극은 이 지구상에서 가장 추운 지방이 아닙니까? 이런 곳에서는 햇볕을 다 흡수하여 따뜻하게 해 주는 검정 털이면 더 좋은데 남극 곰님의 털은 이게 뭡니까. 하얀 백색이니 이 추운 지방에서 더욱 춥겠습니다.” 유식한 척, 거만하게 그리고 딱하다는 듯 흑곰이 말했다. 순진하게 생긴 남극 곰은 흰털을 갖고 있다는 것이 부끄럽다는 듯 두 눈을 껌벅거리며 작은 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태어날 때부터 이런 털을 갖고 태어났으니 어쩌겠습니까.” “남극 곰님도 참 딱하십니다. 검정색 물을 들이면 될 텐데, 그렇지 않습니까?” 그래서 남극 곰은 자기의 흰털을 검정색으로 염색을 했다. 그러고 나니 북극곰처럼 참 따뜻하고 좋았다. 그렇게 염색을 한 얼마 후 총소리가 나면서 사냥꾼이 남극 곰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남극 곰은 평소처럼 잽싸게 하얀 눈과 얼음 사이로 달아나 숨었다. 그러나 이미 자신의 몸은 검정색으로 온 몸이 염색 되어 있어 흰눈과 얼음 사이에 선명하게 드러나 있었고 결국 남극 곰은 사냥꾼에게 잡히고 말았다. 이 이야기를 통해 여의도 1번지를 보는 듯해서 씁쓸하다. 나는 古稀 중반의 세월을 살아오는 동안 수많은 선거에 참여했다. 그때마다 후보들의 동일한 구호는 “내가 적임자이고 동시에 내가 당선이 되면 이렇게 하리라”며 공약을 내걸곤 했다. 한 해 두 해 지나면서 公約은 空約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 이번에는 속지 말고 투표를 잘 해야지 했으나 수포로 돌아갔다. 그래서 公約을 보지 말고 인성과 그가 살아온 세월을 살펴보아야 한다는 것이 개인적인 선택 기준이 되었다. 그것은 백곰이 검은색으로 염색한 후 낭패를 당한 슬픈 이야기와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2022년 3월 9일은 20대 대통령 선거일이다. 그리고 석 달이 못 지나는 6월 1일은 지방선거일이다. 이 나라는 온통 선거이슈가 1년 365일 어느 날도 그치지 않는다. 대선, 총선, 지방선거, 보궐선거... 그야말로 선거천국인지 선거지옥인지 모를 판이다. 참으로 미안한 표현이다. 그렇지만 정말 ‘깜도 안 되는 사람’이 대통령이 되겠다고 20대 대선에서도 20여명이 넘게 예비후보로 등록했다. 그리고 여전히 후보들은 ‘나 아니면 이 나라는 희망이 없다’고 자아도취적 목청을 높이고 있다. 그럼에도 아직까지 그런 사람들 덕분에 이 나라가 태평성대를 맛 본 역사는 없기에 이 글을 쓰면서 생각해도 민망하다. 그래도 투표장으로 가지 않으면 그것이 역사의 물줄기를 엉뚱한 곳으로 돌리는 우를 범하기 때문에 우리는 대한민국의 내일을 생각하면서 투표장으로 가야 한다. 정당이나 후보의 정치적 修辭에 속아서도 안 된다. TV 오래 된 광고 문구 중 “순간의 선택이 십년을 좌우합니다.”라는 것이 있는데 그 글귀는 백번이라도 맞는 말이다. 대선을 앞두고 후보 진영의 선거유세를 들어보면 아직도 국민들을 우매한 것으로 인식하는 듯한 공약들이 남발되는 것을 볼 수 있고,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뻔히 알지만 이제는 그런 말장난에 이력이 나서 무감각해지는 것에 슬픔을 느낀다. 약속 파기와 거짓말을 물마시듯 하는 정치 지도자일수록 나를 믿어달라는 뻥치기 수법이 능수능란하다는 것도 이제 국민은 다 안다. 그러기에 진정한 일꾼을 선택하는 것은 유권자들인 국민에게 달려 있다. 대부분 정치인들의 듣기 민망한 언어구사 가운데 하나가 걸핏하면 ‘국민’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데 왜 그 말이 마음에 와 닿지를 않는가? ‘내가 말할 때의 국민’과 ‘네가 말할 때의 국민’이 다르게 느껴지는 언어구사는 하지 말아야 한다. 그야말로 대한민국 국민은 하나인 것이다. 그러기에 자유 민주주의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지역과 세대를 아우르며 미래 지향적인 대한민국을 책임질 정책, 곧 국방・경제・교육・사회・복지에 관하여 평소의 언행이 신뢰를 줄 수 있는 후보를 우리는 가려내어야 한다. 이런 때에 아직도 오늘의 유권자들의 의식이 후진성을 벗어나지 못하고 국가 흥망성쇠가 걸린 이 나라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을 뽑는데 나라야 어찌되든 상관없이 지극히 개인적이고 이기적인 사고에 치우쳐 소위 학연(學緣)・지연(地緣)・혈연(血緣)은 물론 금권(金權)에 자신의 고유한 권리를 넘겨 버린다면 그보다 더 서글픈 일이 없다는 것을 반드시 알아야 한다. 민주주의의 신봉자 링컨은 “투표는 탄환보다 강하다”는 명언을 남겼다. 탄환을 영어로 벌리트(bullet)라 하고 투표용지를 벨러트(ballot)라 한다. 두 단어는 철자와 발음이 비슷하다. 그래서 이 단어가 갖는 의미가 더욱 크다. 그렇다. 우리가 선택하는 후보자들의 이름이 기록된 투표용지는 탄환보다 강하다. 그 탄환보다 강한 투표용지를 전혀 쓸모없는 납 조각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은 무서운 범죄행위나 다를 바 없다. 투표를 포기하는 것, 이도 저도 싫어 무효표 만드는 것, 인물 중심이 아니라 이기적인 욕심에 치우쳐 타락된 투표 행사를 하는 것이 바로 범죄다. 대선 후보들의 면면을 보면 소위 그 나물에 그 밥이란 말이 생각나지만 그래도 “투표는 탄환보다 강하다”는 링컨의 말을 생각하면서 대한민국 제 20대 대통령을 선택하기 위하여 우리는 3월 9일 반드시 투표장으로 갈 수 있어야 한다. 2022년 3월 9일은 대한민국의 미래가 결정되는 역사적인 날이라는 것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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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2-11
  • [독일이야기] “빌리 브란트의 동방정책”
    독일 통일에는 당시 수상이었던 헬무트 콜의 역할이 컸다. 그의 정치적인 판단력과 추진력 그리고 미국과 영국, 프랑스와 소련으로부터 통일의 동의를 받아낸 외교력이 높이 평가되고 있다. 분명 1989~90년 급박하게 돌아가는 동독의 상황을 정확하게 판단하고 많은 결정을 내리면서 결국은 통일을 이끌어낸 보수당(기민 기사 연합) 콜 수상의 역할은 결코 과소평가할 수 없다. 그러나 독일 통일의 기반은 이미 1969~74년 서독의 수상으로 재직하면서 1971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던 빌리 브란트에 의해서 닦여졌다. 1949년 독일연방공화국이 수립된 이후 20년간 장기 집권한 보수당은 동서독의 관계에 있어서는 초대수상 아데나워의 할슈타인 원칙을 고수했다. 이는 동독과 수교한 나라와는 수교하지 않는다는 것으로 힘의 우위로 동독을 고립시키려는 정책이었고, 그 밑바닥에는 동독을 적으로 간주하면서 이념대결을 펼치려고 하는 냉전적인 사고가 있었다. 그러나 좌파정권인 사민당의 브란트가 집권하면서 이런 대결정책은 평화공존의 정책으로 전환되었다. 브란트는 좌파였지만, 소련의 체코 침략과 베를린 봉쇄에 대해 강한 비판을 주저하지 않으면서 스스로를 반공주의자라고 자처했다. 집권 후 그는 소위 동방정책을 펼치면서 ‘접근을 통한 변화’로 냉전과 분단을 극복하려고 했다. 왜냐하면 동독의 공산정권과 대결하고 힘의 우위로 눌러서는 아무런 변화도 이루어내지 못함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는 동독뿐 아니라, 동유럽과도 수교하고 정상외교를 가졌는데 폴란드 방문 시 바르샤바의 유대인 게토 추모지 앞에서 무릎을 꿇어 사죄하면서 세계를 놀라게 했다. 이것이 역사에 대한 참회뿐 아니라, 화해와 평화를 위한 의지를 드러낸 행위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미 서베를린 시장이었을 때부터 공산정권의 경직된 속성을 잘 아는 브란트는 동서독의 관계에서 통일보다는 ‘분단의 평화적인 관리’를 앞세웠다. 동서독의 분단을 받아들이고, 서로의 체제와 국가를 인정하면서 둘 사이에 평화적인 관계를 발전시켜나가자는 것이다. 그가 통일을 앞세우지 않은 것은, 이미 서독의 경제력과 국력이 동독을 월등히 앞지른 가운데서 서독이 말하는 통일은 자칫 동독정권의 붕괴를 전제하는 공격적인 정책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1972년 동서독간 기본조약을 맺었고, 이것은 이후 정권이 바뀌어도 변하지 않고 양독간에 화해와 협력의 제도적 법적인 근거가 되었다. 그리고 이 기본조약 하에서 동서독은 서독주민의 동독방문, 서신교류와 경제협력, 문화 교류, 동독주민의 서독방송 시청 등등 다양한 분야에서의 교류를 증진시켜나갔다. 이러한 동방정책은 브란트 이후 중단되지 않았다. 그의 뒤를 이은 같은 당의 슈미트 수상은 브란트의 좌클릭에 대해 서유럽국가들이 의구심을 갖자 약간 우클릭하면서 서방진영을 아우르며 이 정책을 이어갔다. 그 이후에 들어선 헬무트 콜의 우파정권도 동방정책을 중단하지 않고 보다 적극적으로 동구권과의 교류를 확대하면서 신뢰를 쌓더니 마침내 독일통일의 결실을 맺게 된 것이다. 이처럼 이념대결에서 평화공존으로 전환한 브란트의 동방정책이 훗날 독일통일의 기초가 되었고, 통일정책을 정쟁의 도구로 악용하지 않고 일관성 있게 이어간 독일의 성숙한 정치가 통일을 향한 대로를 닦아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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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2-11
  • [시사칼럼] 고통의 문제
    어느 날 일면식 없었던 분이 보내신 저서를 한 권 받았습니다. “욥이 물었다, 내게 왜 이러세요? 강정훈 지음.” 신앙 유무를 불문하고 고난의 대명사가 되어버린 욥, 과연 저자 역시 신학생 시절부터 만나 동고동락했던 아내를 암으로 먼저 떠나보낸 후 기나 긴 아픔의 시간을 겪어야 했더군요. 고통의 승화를 논할 수 있겠으나, 사실은 고통으로 말미암아 인간이 느끼는 첫 번째 감정이 고스란히 책의 제목에 녹아 있습니다. 최근 들어서 부쩍 각광 받는 ‘죽음학(Thanatology)’의 시조라고 할 수 있는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1926-2004)는 말기 암 환자 육백 명을 관찰한 뒤 사람들이 고통의 시간을 보내면서 변화되는 다섯 단계가 있다고 보고했는데, 첫 단계가 ‘부정(否定)’으로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나다니 말도 안 돼!’라면 그 다음이 바로 ‘분노’ 곧 ‘도대체 나에게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였다고 합니다. 이어지는 ‘타협’과 ‘우울’과 ‘수용’의 단계보다 훨씬 더 솔직하고 원초적인 반응이 초기 두 단계에 압축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선한 양심으로 살아왔거나 특히 독실한 신앙을 견지하며 살아온 인생이라면 오히려 더 그럴 수 있습니다. 유대인 랍비이기도 한 해롤드 쿠쉬너(Harold S. Kushner)가 아들을 14년 만에 잃고 스스로 상처 입은 종교인임을 자처하면서 쓴 『왜 착한 사람에게 나쁜 일이 일어날까』를 보십시오. 이러한 문제를 신학적으로 규명해보려 애썼던 옥스퍼드의 루이스(C. S. Louis, 1898-1963) 교수 또한 먼저 심대한 아픔을 경험해야 했습니다. 일평생 단 한 번 사랑했던 여인을 잃고 그가 남긴 글(A Grief Observed)에 이런 대목이 등장합니다. “주여, 이것이 당신의 진짜 조건입니까? 제가 당신을 너무 사랑하여 그녀를 만나든 만나지 못하든 괘념치 않을 때에만 H를 만날 수 있는 것입니까?” 여기서 “H”는 그의 아내를 상징합니다. 아내가 세상을 떠나서 이토록 고통스러운데 도대체 하나님은 어디 계신가, 분노와 원망 섞인 감정이 그대로 드러나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고통이 이들을 쓰러뜨리지는 못했다는 사실입니다. 고통은 결코 최후의 승자가 될 수 없습니다. 끝을 알지 못하겠는 감염 사태 속에서 최근 두 분이 세상을 떠나셨다는 소식을 뒤늦게 알게 되었습니다. 한 분은『안식』의 저자인 마르바 던(Marva J. Dawn, 1948-2021)입니다. 그녀는 걸어 다니는 종합병원이라 불러도 좋을 정도로 암에서 장애까지 인간의 연약한 굴레들을 온 몸으로 짊어지고 살아오신 분입니다. 살아있는 동안 고통의 극치가 무엇인지 궁금하다면 이 분을 보면 되겠습니다. 하지만 결코 고통에 굴복하지 아니하고, 숭고한 인내와 견고한 믿음이 어떠한가를 직접 보여주셨습니다. 또 한 분은 차동엽 신부입니다. 서울공대를 졸업한 수재로 학식과 강연이 대단한 분이셨지요. 장차 한국의 추기경이 될 수도 있었던 인물인데 겨우 60대 초반에 생을 마감했으니 안타깝습니다. 대중적으로도 인기가 많았던 그는 『믿음 희망 사랑』에서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마지막 1초까지 우리의 삼색 촛불은 타고 있어야 한다!” 흔들릴지언정 꺼지지는 않는, 고통 속에 더 아름답게 타오르는, 그런 믿음과 소망의 촛불이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서도 은은하게 타오르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고통의 문제를 다시 논하는 까닭은 이런저런 일들로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들이 그 어느 때보다 많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고통에는 상대적인 무게가 아니라 절대적인 질량만 존재합니다. 각자가 처한 상황에서 느끼는 고통이야말로 우주제일입니다. 극복하기는커녕 위로하기에도 벅찬 것이 또한 고통입니다. “아내가 떠난 이십 수년 동안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내의 죽음을 빙자해서 청중들에게 눈물을 유도하여 은혜를 짜내는 설교가 될까봐 말을 아꼈다.. 이제는 입을 열고 싶다.. 이 책은 간증집이 아니다. 비극적인 상황에서 세월이 오래 흘러가지만 답을 찾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아직도 많이 아프세요? 이렇게 생각해 보면 조금은 낫지 않을까요?’ 하는 조심스런 목소리다. 아픈 사람에게는 아픈 사람, 아팠던 사람의 말이 위로가 된다. 동병상련이다.”(강정훈, 9) 그 말이 나에게는 적잖이 위로가 되었습니다. 루이스와 던 그리고 차 신부 또한 훌륭한 위로자가 되어 주었습니다. 이 글 역시 고통 중에 있는 누군가에게 작은 위로가 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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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2-11
  • [은혜의말씀] 아름다운 소식(왕하 7:3-10)
    사마리아성에 극심한 기근이 시작되었습니다. 바로 아람 왕 벤하닷과 그의 군대가 이스라엘의 수도 사마리아를 완전히 포위해 버렸기 때문입니다. 먹을 것이 바닥난 성내는 그야말로 지옥이나 다름없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비참한 현실 앞에 엘리사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습니다.(7:1) 하나님의 말씀이 내일은 기적을 보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돌아보실 때 놀라운 은혜의 역사, 기적의 역사가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모든 문제의 열쇠는 하나님께 있음을 믿습니다. 다음 날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그대로 성취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성취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사마리아의 상황이 우리의 현실이라는 것입니다. 기근과 굶주림으로 사람을 삶아먹는 비참하기 짝이 없었던 지옥과도 같았던 사마리아성의 상황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의 모습은 아닐까요? 영적으로 보면, 이 세상은 하나님의 은혜와 영원한 생명, 구원에 대한 소망을 알지 못한 채, 인간의 욕심과 욕망, 자신의 이익을 위해 끊임없이 투쟁하지마는 끝내 공허함과, 굶주림, 채우지 못하는 쾌락 앞에, 사람들은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구원의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셨습니다. 내일이면 사마리아가 구원을 받을 것이라는 복된 소식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마리아는 구원을 받았습니다. 아름다운 소식은 구원의 소식입니다. 죄로 말미암아 죽을 밖에 없는 우리들을 위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영원한 생명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이것이 복음이요, 아름다운 소식입니다. 그러면 이 아름다운 소식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 1. 내게 주신 구원의 은혜를 누리십시오. 성안은 굶주림과 기근으로 죽음의 공포가 엄습하고 있었지만, 이 네 명의 나환자들 구원의 기쁜 소식을 보고 체험하고 누리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루어 놓으신 구원의 기쁨을 거저 가서 보고, 누리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한 자만이 그 은혜를 전할 수 있습니다. 2. 나만 누리는 것은 죄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나환자들은 이런 아름다운 소식을 자신들만 누리고 침묵하는 것은 죄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아름다운 소식-복음을 전하지 않는 침묵은 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와 복을 나 혼자만 누리고 죽어가고 있는 자들이 있는 것을 뻔히 보고 있으면서도 알리지 않는다면 우리는 옳지 못한 것입니다. 이제 나를 위한 구원에서 남을 위한 구원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3. 우리는 복음을 전하는 사명자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먼저 부르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복음을 전하는 사명자로 삼기 위해서입니다. 영적인 눈으로 지금도 지옥을 향해 죽어가는 수많은 영혼들을 보십시오. 이 복음은 죽은 영혼을 살리는 생명의 능력입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 이 아름다운 소식이 온 세상에 전파되길 원하십니다. 나를 통해 이 생명의 복음이 또 다른 사람에게 전해질 수 있도록, 복음 전도자의 사명을 다하는 여러분 되시길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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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2-11
  • [분홍목사의 다음세대이야기] 가난해서 스타가 된 아이
    제가 초등학교 5학년 때의 이야기입니다. 저는 서울의 삼광국민학교를 다녔는데 빨간색 체육복이 아주 멋진 학교였습니다. 그런데 저는 체육복이 없었습니다. 집에 돈이 없어서 삼천원짜리 체육복을 사 입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체육이 있는 날이면 삼촌이 입던 츄리닝을 입고 학교에 갔는데 그러다 운동회 날이 되었습니다. 전교생 앞에서 저 혼자만 다른 츄리닝을 입고 서야 하는 시간이 온 것입니다. 그래서 엄마한테 울며불며 체육복 안 사주면 나 학교 안 갈 거라고 떼를 썼습니다. 그래서 엄마가 꾸깃꾸깃 감춰뒀던 비상금을 주셨습니다. 정말 기뻤습니다. 그래서 들고 뛰어나가는 데 문앞에서 아버지에게 그 돈을 빼앗겼습니다. 아버지는 그날도 술을 드셨습니다. 저는 결국 체육복을 못 사고 보라색 츄리닝을 입은채 운동회를 갔습니다. 그날의 제 심정은 지금 생각해도 너무 창피하고 쥐구멍이라도 숨고 싶은 마음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 순간 교회학교에서 듣던 전도사님의 설교말씀이 떠오르면서 제 안에 작은 믿음이 생겨나는 것이었습니다. “야, 너 하나님의 자녀 아니냐? 옷 한 벌 가지고 네가 이렇게 기죽어? 야, 그러면 하나님은 뭐가 되냐? 야, 기 펴! 어깨 펴! 고개 들어!” 이런 마음이 생기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고개를 들었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사람이다.” 자신감을 가지고 어깨를 펴고 섰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날, 생각도 못했던 정말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당시는 핸드폰이 없었던 시절이었습니다. 운동회 날 점심시간이 되면 엄마, 아빠는 자기 아이를 찾아 가서 만나야 합니다. 그런데 전교생이 다 똑같은 옷을 입고 있는 상황 아닙니까. 아이들이 다 비슷비슷하게 생겨서 구별이 잘 안 됩니다. 여기서부터 문제였습니다. 부모마다 자기 아이를 찾을 길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저만 다른 색 옷을 입고 있었잖습니까. 그래서 엄마들이 자기 자녀에게 말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야, 점심시간이 되면 보라색 쟤 옆에 가 있어라. 그러면 내가 널 찾아갈게.” 그리고는 점심시간이 되자 친구들이 제 옆으로 몰려오기 시작한 겁니다. 정작 저희 부모님은 이날 장사하시느라 못 오셨습니다. 그런데 제 덕분에 아들을 찾은 엄마들이 저한테 고마워하시며 연신 사진을 찍어주셨습니다. 네 덕분에 우리 아들을 찾았다구요. 제가 일종의 랜드마크, 깃발이 되었던 겁니다. 그러면서 내 친구들이 이렇게 말하기 시작햇습니다. “융희야, 나 그 옷 부럽다. 나도 한번 입어보면 안 되냐?” “야, 우리는 똑같은데 너만 특별해 보여.” 저는 가난해서, 돈이 없어서 체육복을 못 입었는데 그날 저는 학교에서 완전히 스타가 됐습니다.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진 겁니다. 저는 그날 깨달았습니다. “난 특별하구나. 나는 가난하지만, 체육복도 못 사 입지만, 아빠한테 빼앗긴 술값으로 내 체육복은 날아갔지만 나는 하나님의 자녀요,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나는 특별한 존재구나.” 그리고 저는 완전히 새로워졌습니다. 하나님이 어떻게든 저를 쓰실 거라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아무리 가난하고 형편이 어려워도 기가 죽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그건 전적으로 이날의 경험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분홍목사가 된 지금도 만나는 다음세대들에게 이렇게 말해줍니다. “너희들 중에 집에 돈이 없어서 체육복을 사 입지 못하고 츄리닝을 입고 학교에 가본 아이가 있니? 없다면 너희는 목사님보다 훨씬 더 나은 환경에서 살고 있는 거야. 그렇다면 너희가 목사님보다 더 위대한 인생을 살 수 있을 거라는 기대를 할 수 있기를 바래. 하나님은 그 시절 그 가난한 아이였던 내게도 다가와주셨단다. 지금 너희들에게도 동일하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꼭 붙들기를 바래. 하나님은 너희들의 앞날을 인도해주시고 너희를 통해 세상을 변화시키길 원하신단다. 우리 하나님의 손을 잡고 우리에게 맡겨진 삶의 사명들을 하나씩 감당해 보자. 힘을 내렴. 하나님이 함께하실 거야!” 그렇습니다. 우리의 자녀들에게, 다음세대들에게 아름다운 미래를 열어주실 하나님을 기대하며 사랑하고 보살피고 양육합시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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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분홍목사의 다음세대 이야기
    2022-02-11
  • [신앙교육나침반] 코로나시대, 이 땅의 쓰러진 부모들에게
    모세는 이집트에서 살아가는 이스라엘 백성의 아들로 태어났다. 이집트의 노예의 신분으로, 죽음의 위험가운데 태어났다. 하지만 하나님의 놀라운 인도하심으로 이집트 왕궁에서 자라게 되었다. 그는 이집트 사람의 모든 지혜를 배워 그들의 언어와 모든 일에 능통하게 되었다. 그는 공주의 양자로서 백성을 다스리고 재판하는 일을 하였다. 그는 그 누구보다 뛰어났으며, 그 누구보다 높은 자리에 있었다. 모든 사람은 그를 우러러봤으며, 그의 자리를 부러워하였다. 하지만, 그는 반짝이는 대리석이 아닌, 거친 모래바닥을 지탱하며 하루 종일 고된 일을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면 분노가 치미는 것을 날마다 느껴야했다. 그러던 어느 날 모세는 기어이 인내의 한계선을 넘고야 말았다. 이집트 사람은 지칠 데로 지쳐 더 이상 일어서지 못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쓰디쓴 채찍을 휘둘렀고, 모세는 그 순간을 참지 못하고 그를 죽였다. 그는 바로를 피하여 머나먼 미디안으로 달렸다. 왕자의 자리에서 한순간에 도망자의 자리로 내려온 순간이다. 이제 그는 더 이상 누군가를 지휘하거나 재판하지 않는다. 그가 자랑했던 이집트의 지식은 그가 살아가는 광야에서는 더 이상 쓸모없는 지식이다. 그는 날마다 모래바람 속에서 양들과 씨름하는 목자일 뿐, 한숨과 원망으로 하루하루를 겨우겨우 살아갔다. 모세는 ‘나’를 완전히 잃어버린 자리에 있었다. 나의 존재도, 나의 사명도 완전히 사라져버린 상태였다. 그때 하나님이 그에게 오셨다. 불꽃 가운데 임하신 하나님은 그를 부르셨다. “모세야! 모세야! 내가 이집트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보고, 그들의 부르짖음과 근심을 알고 내가 그들을 이집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 땅에서 그들을 인도하려 한다. 이제 가라!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에게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이집트에서 인도해낼 것이다!” 모세는 하나님이 왜 자신에게 이렇게 원대한 말씀을 하시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이렇게 말씀드렸다. “하나님, 저는 이제 왕자가 아닙니다. 다스리는 자리에 있지 않습니다. 누군가를 이끌어낼 수 있는 자리가 아닙니다. 저를 좀 보세요. 가장 낮은 자리에 있는 저를 보세요. 저는 이제 양을 돌보는 일만으로 충분히 바쁘고 분주합니다. 하나님의 원대한 일을 맡을 만한 사람도 아니고, 그런 일을 맡을 만한 능력도 없어요. 하나님, 내가 누구이기에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인도해낼 수 있겠습니까?” 모세는 하나님께 ‘존재가치를 잃어버린 나’를 분명히 보여드렸다. ‘사명의 자리를 떠나버린 나’를 정확히 보여드렸다. 존재가치를 잃고, 사명의 자리를 떠나버린 자리에 선 내가 어떻게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이러한 모세의 물음에 하나님이 대답은 전혀 예상 밖이다. 모세의 물음에 대한 성실한 답변이라면, 모세의 존재가치를 회복시키는 말씀이 어울린다. 모세가 잃어버린 사명의 열정을 다시 불태울 수 있는 말씀이 적합하다. 예를 들면, “모세야, 너를 다시 왕자의 자리로 돌아갈 수 있게 해줄게. 다시 백성을 다스리고 재판할 수 있는 지도자가 되어서 이집트 백성을 멋지게 구출하도록 하여라!”와 같은 말씀일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전혀 예상치 못한 말씀을 하신다. “모세야,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 하나님은 자신을 잃어버린 모세에게 참된 자아를 분명히 알려주셨다. “모세야, 나와 함께하는 네가 바로 참된 너란다!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고 사랑받지 않아도, 사명을 잃어버려도 나와 함께한다면 너는 너란다!” 코로나시대를 살아가는 수많은 부모들은 아마도 모세와 비슷한 경험을 할지도 모른다. “하나님, 제가 너무 힘듭니다. 제가 이런데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존재가치를 잃고, 사명의 자리를 떠나버린 자리에 선 내가 어떻게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대부분의 부모들은 이와 같이 체념하며, 어린 자녀를 기르는 힘들고 분주한 육아의 자리에서 존재와 사명을 잃어버렸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부모들에게 하나님이 말씀하신다. “너라는 사람은, 사람들로부터 너의 존재가치를 인정받거나 중요한 일을 해낼 능력과 힘이 있어야 되는 것이 아니란다. 너라는 사람은, 나와 함께 할 때 비로소 너란다!” 고통의 긴 터널을 지나는 수많은 부모들에게 하나님의 이 놀랍고 강력한 메시지를 꼭 전해주면 좋겠다. 이 땅의 쓰러진 기독 부모들이 어떠한 역경 속에서도, 자신의 존재와 사명이 아닌 하나님과의 함께함 속에서 진정한 자아를 찾고 회복하며, 그것을 일상의 원동력으로 삼는 부모로 세워지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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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앙교육 나침반
    2022-02-11
  • [목회자칼럼] 이런 사람 없습니까?
    인사가 만사다. 지도자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고 만들어 지는 것이다. 준비되지 않은 사람은 쓸 데가 없다. 누가복음 1장에는 주의 길을 예비한 세례요한의 여덟 가지 특징이 나타난다. 그야말로 팔방미인이다. 신년벽두에 이런 사람으로 나타났으면 좋겠다. 사도바울은 일체의 비결을 배웠다고 했다. 배워서 남주자. 벌어서 섬기자. 첫째, 세례요한은 사무엘처럼 부모님의 기도 응답으로 태어났다. 세례요한의 부모인 스가랴와 엘리사벳은 나이가 많은 할머니, 할아버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고 오랫동안 기도하였기에 주께서 그 기도를 들으셨고, 응답하셔서 아들 세례요한을 주셨다. 사람을 대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이 신앙적이냐는 것이다. 기도하는 사람을 말한다. 기도는 만사를 변화시킨다. 나는 사랑하나 저희는 도리어 대적하니 나는 기도할 뿐이다. 기도를 쉬는 죄를 범치 말아야 된다. 새벽기도 끝나는 날 내 인생도 끝난다. 둘째, 세례요한은 이삭처럼 남에게 기쁨을 선사하는 사람이다. 세례요한은 어머니 엘리사벳의 뱃속에 있을 때에도 마리아가 잉태한 예수님께서 가까이 올 때 기뻐 뛰어 놀았다. 남들에게 기쁨을 나누어주는 사람, 해피 바이러스가 되어야 된다. 옛말에 남의 눈에 눈물 나게 하면 내 눈에 피눈물이 난다는 말이 있다. 다른 사람 가슴에 한이 맺히게 하지 말고 흥을 돋우는 사람이 되어야 된다. 성도의 특징은 기쁨이 샘솟듯 하고, 은사를 불일 듯 하고, 청춘이 독수리 날개침 같이 하고, 사슴의 발같이 높은 곳으로 인도 받는 것이다. 셋째, 세례요한은 주 앞에서 큰 자였다. 여자가 낳은 자 중에서 가장 큰 자가 세례요한이다. 크리스찬은 하나님 앞에서, 코람데오, 신전인격이 중요하다. 창세기부터 복있는 사람은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이다. 사람들의 평판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보실 때 좋아야 되는 것이다. 주는 자가 복이 있고, 섬기는 자가 큰 자이다. 큰 은혜를 받았으니 축복의 통로가 되어서 흘려보내는 통 큰 대인이 되어야 된다. 주께서는 교만한 자를 낮추시고 겸손한 자를 높이신다. 넷째, 세례요한은 나실인처럼 구별된 자였다. 구약성경에 나실인들은 엄마 모태로부터 구별되이 자랐다. 포도주나 독주를 금하였다. 하나님의 뜻은 성공이 아니고 성결이다. 가정의 목적은 행복이 아니고 거룩이다. 거룩의 뜻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깨끗하고, 정결하고, 순수한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구별되고, 차이가 있고, 다르다는 것이다. 신앙생활에서 주의해야 될 것은 이것저것 주워 모은 혼합주의이다. 성도는 다른 사람 어찌 하든지 나는 주의 군사가 되어야 된다. 세상 사람들과 똑같은 사람이 아니라 구별된 사람이 되어야 된다.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뜻을 분별해야 된다. 다섯째, 세례요한은 모태로부터 성령 충만함을 받은 자였다. 성경에 존귀하게 쓰임받은 사람들은 하나같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사람들이다. 오직 성령이 임하시면 권세와 능력을 받고 증인의 삶을 감당할 수가 있다. 오직 성령의 충만함을 받을 때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로 화답하고, 피차 복종하고, 범사에 감사하고, 사랑하고, 존경하고, 자녀들이 순종한다. 바나바는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자였다. 성령을 소멸하고는 항상 기뻐하고, 쉬지말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할 수가 없다. 여섯째, 세례요한은 이스라엘 자손을 하나님께로 많이 돌아오게 한 사람이었다. 주께서는 성도가 복음을 잘 전하도록 건강도, 물질도, 시간도 주신다. 지상 대 명령이 복음전도이다.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사람의 발이 아름답다. 전도가 주께서 가장 기뻐하는 일이다. 전도 목표를 설정하고 이름을 적고 작정 기도하면 모든 한계를 뛰어 넘고 기적의 구원 역사가 일어난다. 일곱째, 세례요한은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사역한 자였다. 엘리야가 등장하는 구약성경 열왕기상 17장을 보면 그의 소개가 디셉 사람 엘리야가 전부이다. 엘리야는 스펙도 없고 자랑할 것이 별로 없는 농사꾼이었다. 그러나 그는 혼자서 바알과 앗세라 거짓 선지자들을 일당백 하였으며 무너진 제단을 수축하고 간절히 기도해서 불로 응답받은 사람이다. 엘리야는 열심이 특심이었다. 엘리야는 엘리사라는 후계자를 잘 세웠다. 엘리야가 구약의 대표적인 선지자라면 엘리사는 구약에서 기적을 가장 많이 행한 선지자이다. 여덟째, 세례요한은 주의 길을 준비한 자였다. 예수님보다 앞서 와서 주의 길을 예비한 삶을 살았다. 준비되지 않은 사람은 쓸데가 없다. 성도는 부름 받고, 사랑받고, 쓰임 받는 자이다. 쓰임 받을 동안에는 죽을 틈도 없다. 주께서 부르실 때 준비된 사람은 내가 여기 있사오니 나를 보내소서 라고 선뜻 대답할 수가 있다. 실력 있는 사람은 “ㄲ”시리즈 여덟 가지가 있다. 꿈, 꾀, 끼, 깡, 끈, 꼴, 꾼,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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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2-11
  • 원로 목회자들의 잇따른 개척, 왜 이러지?
    은퇴해서 원로대우를 받고 있는 A 목사는 부산 강서구에 개척한 모 교회 설교목사를 부탁받고 주일날 말씀을 선포해 왔다. 하지만 이 교회가 담임목사 청빙을 위해, 설교를 그만 했으면 하는 부탁을 드리자, 자기가 데려온 성도들로 개척한 교회나 다름없다며 일부 성도들을 데리고 나가 근거리에 모 교회를 개척했다. 일부에서는 겨우 30여명 미만의 작은 개척교회에 보탬은 못되어도, 은퇴한 원로목사가 교회를 갈라 놓는 일은 적절하지 못하다는 평가를 하고 있다. 또 같은 교단 B 원로목사도 강서구 명지 국제신도시내 모 교회를 개척했다. 부산노회에 가입하고자 시찰회에 신청했지만 거부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은퇴목사들의 잇따른 교회개척에 후배들의 여론도 좋지 않다. 모 후배 목회자는 “후배들에게 길을 열어주고, 뒤에서 묵묵히 기도해 주시는게 원로목사님들의 사명 아닌가?”라며 곱지 않은 시선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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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야의 소리
    2022-02-11
  • 대선, 국가 대통령을 뽑는 선택은?
    거의 80세에 다다르면 이제 웬만하면 상대방의 태도와 말만 들어도 대강 짐작과 느낌을 파악할 수 있는 식견이 있을 수가 있다. 은퇴하고 나면 교회에서나 직장, 어떤 단체에서도 힘은 없게 되어 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건강을 주었다면 제2의 인생을 출발할 수가 있어 참 행복을 느낄 수가 있어 감사하다. 어느 교회에서 시무장로이고 잘 나가는 엘리트 인사라 해도 화려하게 있을 때는 잠시뿐이다. 힘 있고 교권이 있다 해서 함부로 담임목사나 선배 장로를 무시하거나 쫓아낼 수는 없다. 왜냐하면 교회가 자기 교회가 아니기 때문이다. 교회는 오로지 하나님이 주인이고 시무장로는 그저 주어진 범위 아래에서 잠시 맡겨 놓은 청지기에 불과하다. 그도 언젠가 은퇴의 길을 가고 있기 때문이다. “있을 때 잘해”라는 말이 빈말이 아니다. 우리나라 유명가수 중에 송대관 씨의 노래 중 “쨍하고 해 뜰 날 돌아온단다”라는 노래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한때 잘 나가다가 그의 부인으로 인해 홀딱 망해버려도 해 뜰 날이 있다고 노래 불러 대박을 터트렸다. 태진아 가수는 미국에서 노점장사를 하다가 한국에 돌아와서 나훈아 씨로부터 “넌 아주 특이한 음성인데 한번 잘 해봐 성공할 거야”라는 긍정적인 믿음을 주어서 ‘옥경아’로 대박을 터트렸다. 또 태진아 씨는 늘 후배 가수들에게 “너 잘해 봐. 잘 될 거야”라고 긍정 마인드를 심어 주어 후배 가수들은 다시 일어날 용기를 가지고 성공한 가수가 한둘이 아니었다. 성공의 비결은 어떻게 고통과 쾌락을 잘 통제하느냐에 달려 있다. 만약 이를 해낸다면 인생을 장악할 것이고 그러지 못할 경우는 인생의 실패 늪에서 헤어 나오지 못할 것이다. 긍정의 마인드를 가지면 비단 태도뿐 아니라 언어와 행동 그리고 운명까지도 바뀌는데, 이러한 긍정적 마인드로 자아를 실현한 대표적인 예가 바로 하버드 출신들이라 할 수 있다. 미국 전 대통령 프랭클린 델라도 루스벨트는 거상의 집안에서 태어나 18세에 하버드대 출신으로 잘 나가던 엘리트였다. 그가 졸업 후 뉴욕시 상원의원에 당선되어 정계에 입문한 그는 훗날 해군 차관보로 임명되며 인생의 탄탄대로를 달렸다. 그러나 그의 탄탄대로에 브레이크가 걸린 시기가 있었다. 바로 39세 때였다. 당시 그는 차가운 바다에 뛰어들어 수영을 즐기다가 척수성 소아마비를 앓게 되었다.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고 걷지도 못할 것이라는 진단을 받은 그는 자살을 생각할 정도로 크게 상실과 우울증에 시달렸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방구석에서 우연히 커다란 거미줄을 발견했다. 그리고 날개도 없는 거미가 공중에 매달려 거미줄을 치고 있는 모습을 본 순간 큰 깨달음을 얻었다. ‘두 발로 걸을 수 없다고 해서 아무것도 못 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그래. 설령 다시는 일어서지 못하더라도 마음까지 위축되어서는 안 되지. 내 인생을 이대로 멈출 수는 없어.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자.’, 루스벨트는 자신만만한 모습으로 정계에 복귀해 뉴욕주 지사 당선되었고, 훗날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다. 미국 역사상 장애인이 대선에 출마한 적이 없었기에 어느 주간지 기자가 그에게 도발적인 질문을 던졌다. “불편한 몸으로 대통령의 그 많은 업무를 감당할 수가 있을까요?”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날개 없는 거미도 공중에서 매달려 거미줄을 만들 수가 있는데, 저라고 왜 대통령의 업무를 감당하지 못하겠습니까? 정치에 필요한 것은 몸이 아니라 머리입니다.” 선거 당일 그는 지팡이를 내려두고 비틀대는 걸음걸이로 꿋꿋하게 연단에 올라가 낙관적이고 확고한 의지를 표명하며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에게 감동을 안겨 주었다. 루스벨트가 대통령에 당선되었던 시기에 마침 경제공황이 미국 전역을 강타해 미국은 그야말로 파산, 도산, 폭락 등 몸살을 앓았다. 고통과 절망에 빠져 있을 때 그는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기를 “하나님 저에게 국가를 건질 지혜를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했다. “우리가 겪고 있는 고난은 그저 물질적인 부분일 뿐이며, 이 때문에 고통스러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나쁜 절망보다 잘 될 수 있다는 긍정으로 살아갈 수가 있다고 역설하여 이후 그는 놀라운 에너지로 ‘뉴딜정책’을 펼쳐 이내 미국은 위기에서 벗어날 수가 있었다. 우리나라도 1997년 IMF 왔을 때 김대중 대통령은 온 국민에게 호소했다. “금 모으기로 경제 도탄에 빠진 나라를 구합시다”라고 하여 금 12만 톤을 모아 난국을 극복했다. 실제로 대선 정국에 있는 우리나라는 한 대통령이 당선되는 날에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마음가짐에 달려 있다. 그러나 의혹과 신뢰가 없는 지도자는 국민이 신뢰할 수가 없으므로 반드시 신뢰하고 정직한 지도자를 뽑아야 이 나라를 건질 수가 있다. 어느 신문 김대중칼럼에 “우리가 앞으로 중국에 종속이 되느냐 아니면 미국에 동맹국으로 살아남아 신뢰를 회복하느냐의 중요한 기로가 이번 대선에 임하는 길이다”고 역설한 글에 감동한 국민이 많았을 것이다. 이 나라를 건질 지도자는 국민의 신뢰와 정직의 바탕에서 선택해야 불행한 역사의 종지부에서 벗어날 수가 있을 것이다. “하나님이 보호하사 우리나라 만세” 애국가가 새삼 기억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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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2-11
  • “반성이 없으니 이제는 고발로 간다”
    부산자유기독인총연합회와 부기총 증경회장단협의회가 작년 12월 15일 경찰청과 검찰청에 부산크리스마스트리문화축제 의혹에 대한 진정서를 제출한 바 있다. 최근 진정인 조사가 이뤄지는 상황에서 특정인에 대한 고발장도 준비 중인 것으로 확인됐다. A 목사는 “진정서는 부기총이라는 단체가 대상이었다면, 고발장은 특정인에 대한 것”이라고 설명하면서 “전혀 문제가 없다고 주장하니, 이제는 개인을 상대로 고발 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A 목사는 “처음 진정할 당시 (부기총이)반성하고, 재발 방지를 약속할 것을 기대했다. 하지만 들려오는 소식들을 들어보면, 끝까지 문제가 없다고 발뺌하면서 반성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부산교계를 위해서라도 끝까지 책임을 물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고발 자료는)충분하다. 4-5명을 대상으로 준비 중”이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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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야의 소리
    2022-0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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