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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년 부활절과 부산영락교회 윤성진 목사와의 48년 목회 여정
    2024년 사순절은 2월 14일에 시작하여 3월 31일이 주일이자 부활절이다. 40일 의미는 이스라엘 백성의 광야 40일, 고난의 행군이고 사순절을 보내고 종려주일이 끝난 바로 하루 3월 마지막 주일이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매달려 무덤에서 다시 살아남을 기념하는 날이다. 10년이 4번씩이나 거듭해 오던 목회 48년이란 한국교회 그리 흔치 않는 긴 세월 동안 한 교회에서만 목회하는 것이 보기드문 역사의 현장에서 윤성진 목사(부산영락교회 담임)를 우연히 만났다. 3월 14일 오전 윤성진 목사를 오랜만에 만나 대화를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그러니까 필자 역시 교계 신문에 몸담고 있은지 근 50년 전 젊은 윤 전도사를 만난 인연이 이어져 오늘까지 지켜왔다. 부산영락교회 전도사로 초임 부임하여 부산고등공민학교와 주일 교회학교 학생들을 섬겨 왔다. 한 교회에서 이런 오랜 세월동안 부임하는 것은 한국교회에서 퍽 드문 일이다. 위임목사로 32년, 현재에도 목회 2~3년 마지막 길을 걷고 있다. 부산영락교회 하면 6.25 전쟁으로 인해 남하한 한경직 목사님과 30여명의 피난민 성도들을 중심으로 시작된 교회이다. 72년이 된 오늘에 부산영락교회는 코로나 감염 사태 전에는 성도 2500여명이 출석하는 부산의 대표적인 교회였다. 교회당 수용 인원은 불과 1000명 수준 공간이다. 이 교회는 고현봉 목사 총회장 취임 1년 전에 새 성전을 건립한 1000여평 공간에 부산 사법부가 중심이었던 서구 부민동 중간에 위치한 교회이다. 그 당시 두 개의 십자가 탑이 세워져 있어 두 십자가를 둘러싸고 성도들이 서로 싸우고 있다는 항간의 루머를 말해주듯이 한때는 분쟁의 현장이기도 했다. 고 목사를 비롯하여 윤성진 목사도 두 번씩이나 목사 징계를 당한 예장통합측 교회 가운데 경남 마산 문창교회 다음가는 교회분쟁 역사를 지니고 있는 아픔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교회이다. 결국엔 교단 탈퇴를 선언하고 백석교단으로 교단을 가입했다. 지금도 부산 안에 부민동 소재 부산영락교회와 하단동 소재 부산영락교회 같은 두 개의 이름이 존재하고 있다. 하지만 현재 이들 두 교회는 한 뿌리로서 서로 아픔을 치유하는 화해로 모든 문제를 풀고 서로를 위해 지역사회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리더들이 많이 배출된 특별한 공동체로 나아가고 있다. 지금 현재 부산영락교회 윤성진 목사는 “이제 불과 은퇴 2~3년 남겨두고 있는데 어떻게 하면 아름다운 은퇴 마무리를 짓고 물러날까 고민하고 있다”고 귀뜸 해 주었다. 가장 아쉬었던 것은 교회 옆 건물 부산은행 자리를 아깝게 구덕 신협에서 경매를 낙찰받아 사지 못하였고 바로 길 건너 골든오피스텔 건물 20층 자리도 사실상 통일교에 넘어간 상태라 이것마저 놓쳐 현 위치에서 지하 주차장과 10층 규모의 새성전을 신축하는 방안을 놓고 기도하며 당회와 숙의 중인 것으로 알고 있다. 윤성진 목사는 일찍이 거제 하청이 고향으로 어릴 때부터 하청교회에 출석하면서 부산장신대학교 통합교단에서 줄곧 학업을 연마했던 골통 통합맨이다. 지금도 적(교단)은 백석이지만 백석교단 수뇌부에서 교단 부총회장 출마 권유도 수없이 받아 왔지만 정중히 거절한채 오로지 교회 부흥에 올인하고 있다. 부산교계에 여러 연합체 대표회장 권유도 모두 사양하고 여러 교회 집회나 부흥 사경회 강사 초청도 모두 거절하고는 오로지 교회 한 곳에만 목회 전념하는 보기 드문 순수 목회자로 알려져 있다. 장로들이나 집사, 권사와 일반 성도들에게는 겸손하고 친절하며 정이 넘치는 목회자로 소문난 70대 목회자다. 아들은 서울대를 나와 장신대학원을 거쳐 서울 소망교회 부목사로 섬기다가 미국으로 학업을 위해 유학 중이고 딸도 미국에서 대학교수로 제자들을 양육하고 있다. 서울 소망교회에서 유학비를 비롯한 모든 경비 제공 약속마저 사양하고 박사과정에 몰두하고 있다. 항간에 윤목사의 뒤를 잇는 세습 운운하는 소문에 윤 목사는 “그런 기우는 내가 살아있는 한 일체 없을 것이다”고 반박했다. 일찍이 양산 지역에 큰 대지를 구입하여 양산지역 복음화에 주력하기도 했다. 양산성전도 날로 부흥하고 있다. 문제는 어떻게 현 성전을 놓고 결정 여부에 주력하면서 조용히 은퇴 마무리를 지어 소망이 실현 되도록 기도하고 있다고 윤 목사는 48년 인연이었던 필자와의 대화에 부활의 꽂망울을 피울 준비에 부담없는 담소를 나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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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25
  • [목회자칼럼] 변함에서 전함으로
    “아내와 자식 빼고 다 바꿔라” 1993년 6월 7일 독일 프랑크푸르트 회의에서 고(故) 이건희 회장은 파격적인 변화를 선언했고, 이 회장의 발언은 훗날 ‘혁신’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삼성이라는 대기업의 효과 때문인지, 혹은 시대의 흐름 때문인지 30년 전에 시작된 ‘변화’의 바람은 그치지 않고 지금은 태풍이 되어 몰아치고 있습니다. 시대 변화의 속도가 빠릅니다. 변화가 대세로 자리잡아 그 흐름을 타지 못하면 금방 도태될 것만 같습니다. 30년 전 대기업 회장은 “아내와 자식 빼고 다 바꿔라”고 했고,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변해야 살 수 있다. 혁신만이 살아남을 길이다. 변하지 않으면 곧 죽음이다”고 소리치고 있습니다. 이제 변화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인 시대입니다. 세상은 이미 변화와 혁신의 중요성을 알고 하루, 분, 초 단위로 시대의 흐름을 반영하는데, 그렇다면 교회는 지금 어떤 변화를 맞이하고 있으며, 이 시대 교회의 생존 방법이 무엇이라 생각하는 것일까요? ‘변화’는 사물의 성질, 모양, 상태가 달라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교회도 과거와 비교하면 교회를 구성하는 성도들의 상황, 세상이 인식하고 있는 교회의 모습 등이 많이 달라졌습니다. 세상의 변화 앞에 교회도 변화의 길을 가야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렇다면, 교회는 무엇을 변해야 할까요? 이불변응만변以不變應萬變 이란 말이 있습니다. “변하지 않는 것으로 만가지 변화에 대응한다“는 뜻입니다. 세상은 매일 만가지 변화를 겪습니다. 사람들은 세상의 변화 속도에 맞추기 위해 급급하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교회는 세상의 수만은 변화보다 더 중요하면서도 결코 변하지 않는 진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바로 복음입니다. 세상은 변하지만, 변하는 세상에 대응할 수 있는 것, 만가지 변화를 한 번에 바꿀 수 있는 것은 바로 변하지 않는 복음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세상의 변화를 따라가거나 혹은 변화를 또 다시 바꾸기보다는 변하지 않는 복음을 전하는 일에 더 집중해야 합니다. 우리 주위에 인생의 참 의미를 알지 못한 채 변화의 소용돌이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교회는 이들에게 인생의 의미, 복음의 가치, 참된 행복이 무엇인지를 전해야 합니다. 만족이 없고, 변화를 위한 변화만 계속되는 현실에서 하루 하루 자족하는 삶이 어떤 것인지, 구원의 감격으로 나와 이웃을 섬기는 삶이 어떤 행복을 가져다 주는지를 알려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의 사명입니다. 교회의 가장 본질적이면서도 핵심적인 사역인 ‘영혼구원’이야말로 세상의 변화에 가장 ‘혁신적’으로 대응하는 방법일 것입니다. 이 일을 소홀히 한다면 교회는 더 이상 교회가 아닙니다. 교회는 교양을 쌓는 곳도, 친목 도모를 하는 곳도, 공부를 하는 곳도 아닙니다. 복음의 꽃을 피우는 곳이 바로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이 진리를 아는 성도들은 교회의 파수꾼 역할을 해야 합니다. 파수꾼은 첫째, 깨어있어야 합니다. 파수꾼은 경계하여 지키는 사람입니다. 지키는 사람이 졸거나 제대로 감시하지 않으면 경계는 무너지고 안전은 위협 받습니다. 이 시대 파수꾼의 역할을 하는 성도들은 깨어있으면서 복음의 진리를 지켜야 합니다. 이미 많은 부분에서 세속화된 한국 교회가 더 이상의 경계가 허물어지지 않도록 깨어서 지켜야 합니다. 두 번째는 깨어나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파수꾼의 역할을 하는 성도는 본인도 깨어있어야 하고 더불어 잠자고 있는 성도들도 깨워야합니다. 그래서 다시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교회와 성도가 잠을 자면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지 않습니다. 혹시, 최근에 하나님의 말씀이 잘 들리지 않는가요? 그렇다면, 내가 영적으로 잠자는 상태는 아닌지, 우리 교회가 영적으로 깊은 잠에 빠진 것은 아닌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세 번째는 전해야 합니다. 파수꾼은 지키면서 동시에 전하는 사람입니다. 성도는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나의 삶으로 복음을 전하는 것이 사명이자 핵심입니다. “저는 죄인이라서 너무 많은 죄를 지어서 제대로 전하지 못하겠어요”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분들은 우리가 죄를 지어서 죄인인 것이 아니라 죄인이기에 죄를 짓는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기에 죄를 지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매일 십자가 앞에서 내 모습을 그대로 올려드리기에 죄인임에도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다. 누군가 말했습니다. “안된다고 말할 때가 가장 적합한 시기”라고. 예수 그리스도가 전파되는 교회, 복음의 생명력이 흘러 넘쳐 성도의 삶으로 나타나는 교회, 그래서 복음을 전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가 없는 교회가 지금 이 시대에 필요합니다. 이 복된 복음을 바쁘다는 핑계로 잊고 있지는 않습니까? 다시 복음의 본질로 돌아가 전할 수 있는 시기가 바로 지금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과 이심전심으로 하나가 될 때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놓고 복음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 역시 예수님과 한마음이 되어 복음의 파수꾼으로 지키며 전하는 삶. 진정한 변화와 혁신은 바로 복음을 전하는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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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25
  • [이상규 교수의 역사탐색] 공주제일교회 양두현 장로와 그 후손들
    앞에서 공주지방 선교사였던 프랭크 윌리엄스(禹利岩, Frank Earl Williams)와 그의 아들 조지 윌리엄스(禹光福, George Zur Williams)에 대해 소개했는데, 이번에는 프랑크 윌리엄스, 곧 우리암 선교사에 의해 발전된 공주읍교회와 이 교회 발전에 크게 기여한 양두현(梁斗炫) 장로와 그 후손에 대해 소개하고자 한다. 공주읍교회는 후일 공주제일교회로 불리게 되는데, 스크랜튼 선교사를 한강이남 지역 관리자로 임명하면서 공주지역 선교활동이 시작되었고, 1898년 스크랜튼에 이어 수원, 공주 지역 관리자로 임명된 스웨어러(W. C. Swearer, 1871-1916) 선교사는 1902년 가을 김동현 전도사를 파송하여 초가 1동을 구입하여 예배를 드린 것이 공주읍교회의 시작이었다. 이 교회가 남부지역 최초의 감리교회였다. 1903년에는 원산에서 활동하던 의료선교사 맥길(W. B. McGill, 1859-1918)과 이용주 전도사가 전도활동에 동참하였다. 그러다가 1905년 샤프(R. A. Sharp, 1872-1906) 선교사가 공주로 오면서 선교활동이 확대된다. 즉 로버트 샤프는 명설학당을, 부인 엘레스 샤프는 명선학당을 설립했다. 그런데 샤프 선교사가 순회전도 여행 중 발진티푸스에 감염되어 1906년 3월 5일 급사했고, 대신 프랭크 윌리엄스 선교사가 1906년 공주로 오게 되는데, 그는 이전 학교를 수습하여 영명학교를 설립하게 된다. 이 학교가 후일 공주 지역 만세운동의 진원지가 되었고 이 학교에서 수학한 이가 유관순 의사였다. 감리교 공주선교부 거점 교회로 출발한 공주읍교회는 건실하게 성장하였고, 안창호, 윤성렬 목사, 황인식 등은 초기 교회 지도자들이었다. 그런데 이 교회에서 크게 기여한 인물이 양두현, 지누두 부부였다. 이들은 우리암 선교사를 통해 기독교 신자가 되었고, 공주제일교회 출석하며 믿음으로 살았는데, 새벽기도회 참석, 십일조 헌금 등 당시 성도들에게 본을 보았고, 교회와 이웃에게 사랑과 선행을 행하며 교회를 섬겨 공주교회의 기둥과 같은 인물이 되었다. 그는 자신의 재물을 드려 전도사업을 전개하게 했고 교회의 필요를 채워 주었다. 그를 잘 아는 우리암 선교사는 양두현, 지누두 부부가 회심하고 독실한 신자가 되는 과정, 그리고 교회를 위해 헌신하고 토지를 기증하려는 의지 등에 대해 선교사들이 발간하던 영문 잡지 Korea Mission Field 1924년 12월호(254-5쪽)에 소상하게 소개했다. 양두현은 1938년(소화 13년)에는 전답 20,963평을 교회에 기증했다. 당시로 볼 때 엄청난 재산을 교회에 희사한 것이다. 이때 감리교 총리사 양주삼 명의로 포상장을 수여했는데, 내용은 이러했다. “포상장 공주지방 공주읍교회 양두현. 우인(右人)이 자기의 소유 재산인 전답 20,963평을 본 교회 천국사업에 봉헌하였음으로 그 봉사적 성의를 표창하기 위하여 자에 은제(銀製)상패 1개를 수여함. 소화13년(주후1938)년 10월 1일. 기독교조선감리회 총리사 양주삼.” 이런 헌신을 고려하여 공주대학교 총장을 역임한 서만철 박사는, “양두현은 공주지역의 대지주로서 공주감리교회의 기반을 마련해 주었다”고 평가했다. 양두현 장로의 아들이 양재순(梁載淳, 1901-1998) 박사인데, 공주 영명학교를 제10회로 졸업하고 1922년에는 연희전문학교 문리학(文理學科)에서 1년 간 수학한 후 1923년 세브란스 의전에 다시 입학하여 1925년 졸업과 동시에 의사시험에 합격하여 의사가 되었다. 세브란스 병원에서 근무하기 시작하여 함흥 자혜병원, 군산 구암병원 등에서 수련과정을 마치고 1927년에는 공주에서 공제(公濟)의원을 개업했다. 공주에서의 제1호 양의사였다. 이때부터 70여 년간 인술을 베풀며 지역사회를 위해 봉사했다. 특히 그는 선대에 이어 공주읍교회를 섬겼고, 1958년에는 장로로 장립 받아 봉사했다. 그는 공주제일교회를 위해서도 재산을 헌납했지만 특히 1980년에는 공주시 계룡면 화은리에 화은감리교회를 사비로 신축하고 그 교회와 인근 주민들에게 20여 년 간 무료진료를 하기도 했다. 우리암 선교사가 194년 일제에 의해 한국을 떠나게 되었을 때 “영명학교는 양재순, 당신이 맡아야 해”라고 하여 양재순 박사는 1940년부터는 모교인 영명학교(영명중고등학교) 이사장으로 봉사했고, 이보다 앞서 1946년에는 충청남도보건후생국장을 맡아 도정에도 관여한 바 있다. 양재순 박사의 넷째 아들이 부산교계에 널리 알려진 양덕호(梁德鎬, 1934- ) 박사인데, 공주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문리과 대학에서 3년간 수학 한 후 선대의 유지를 따라 의사가 되고자하여 부산대학교 의과대학에서 수학하고 의사가 되었다. 그 후 장기려 박사의 사랑받는 제자가 되어 고신대학교 복음병원 외과과장으로 근무하며 여러 의료기관 사회봉사기관에서 활동했다. 1982년에는 부산 산정현교회 장로가 되어 3대째 장로로 주님을 섬겼다. 특히 그는 장기려 박사가 시작한 부산 청십자사회복지회 대표이사로 25년간 봉사했다. 양덕호 장로는 선친의 공제의원과 그 주변 땅을 공주제일교회에 헌납하여 교회의 재건축을 가능하게 했다. 양덕호 박사의 아들이 양한광 박사인데, 서울의대 출신인 그는 위암수술의 권위자로 서울대 암센터장으로 일하고 있다. 워싱턴포스트지가 선정한 세계 50대 의사 중 한 사람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우리암 선교사로부터 받은 복음이 양두원- 양재순- 양덕호- 양한광으로 이어지며 인술을 더하여 우리 시대에 선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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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상규교수의 역사탐색
    2024-03-25
  • 부활의 능력과 소망
    부활절의 날이 밝았다. 올해도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셨고, 우리를 위해 부활하셨다.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셨고, 우리를 위해 부활하셨다. 십자가의 주님은 우리에게 낮아짐을, 부활의 주님은 우리에게 새로운 희망을 선사하신다. 2024년 세계 곳곳에서 전쟁과 기근과 온갖 재앙이 있지만 그럼에도 우리가 낙심하지 않는 것은 부활의 능력을 붙들기 때문이다. 이 부활의 능력. 화해의 능력. 용서와 사랑의 능력이 어느 때보다 필요한 시점이다. 세상은 무력과 폭력으로 자기를 성취하려고 한다. 자신이 드높아 지기 위해서라면 타인을 짓밟는 것도 서슴지 않는다. 그래서 분열과 분리가 일어난다. 반면, 오직 유일하게 예수 그리스도만이 자신을 낮추시고, 약해지심으로 세상을 섬기시고 사랑하셨다.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은 세상의 관점에서 볼 때 ‘약함’이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약함’의 영적 실상은 ‘강함’이다. 부활은 영혼을 새롭게 하고, 육체를 새롭게 하고, 삶을 새롭게 하고, 역사를 새롭게 하며, 자연을 새롭게 하는 생명을 드러내는 단어이다. 옛 것을 다시 형상화 시키는 것이 부활이 아니라 완전히 새롭게 거듭남을 입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새로운 것이 아닌 옛것에 집착하고 있지 않은가 돌아보자. 부활의 의미를 무엇보다 제대로 정립해야하는 기독교가 진정한 의미를 잃어 가고 있는 것을 볼 때 안타까울 따름이다. 세상의 변화의 중심에 기독교가 서야 한다. 부활을 맞아 우리가 먼저 의식을 깨어 구태의연한 과거에 연연해하지 않는 부활의 참 의미를 되새기자. 이러한 부활의 소망이 위대한 미래를 건설할 것이다. 옛 것이 아니라 새로움으로 도약하고자하는 우리들의 진정한 소망은 이 시대뿐만 아니라 후대에까지 건전한 영향력으로 전해지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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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25
  • 교회여 공직선거법을 준수하자
    4월 10일, 제22대 총선이 눈 앞에 다가왔다. 총선을 앞두고 최근 기윤실이 ‘공직선거법준수캠페인’을 제안하며, 예배, 헌금, 기부, 말, 통신, 명함, 사진 총 7개 분야에서 교회가 지켜야 할 선거법을 제시했다. 예를들어 ‘교인인 후보자의 출마를 통상적으로 간단히 소개하는 것은 가능하나 학력/경력 등을 소개하거나 인사 기회를 주는 것은 금지’, ‘교인이 정해진 일정에 따라 기도/간증하는 것은 가능하나 선거기간에 급조해 기도/간증하는 것은 금지’, ‘교회를 방문한 후보자의 참석을 알리는 것은 가능하나 출마사실을 알리거나 지지를 유도하는 것은 금지’ 등이다. 이렇게 공직선거법이 교회내에서 강조되는 이유는 선거철마다 다수의 목회자들이 공직선거법 위반으로 고발을 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코로나 이후 각 교회마다 온라인 방송이 강화됐고, 더 이상 목회자의 설교를 현장에서만 청취가 가능한 세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특히 최근들어 ‘교파라치’(교회+파파라치) 활동도 활발하다. 일부 기관과 시민단체들이 예배시간, 설교시간 불법선거운동을 제보받고, 그 내용을 토대로 고발을 일삼으면서 제보자들에게는 소정의 포상도 지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선거법 위반은 개교회에도 상처가 되지만, 이를 통해 한국교회에 대한 신뢰도에도 나쁜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다. 한국교회가 정파나 이념, 종교적으로 치우치지 않고, 공직선거법을 준수하여 공정하고 깨끗한 선거문화를 만드는 22대 총선이 되길 간절히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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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25
  • [김철봉 목사] 거듭되는 교황의 실언과 오류
    성경은 지도자 특히 영적 지도자의 책임감의 무거움에 대하여 매우 강한 어조로 경고하고 있다. 영적 혜안과 통찰력이 턱없이 부족한 자가 무리를 인도한다면 양자 모두 구렁텅이에 빠지게 된다. 이런 자가 지도자 노릇을 하면 천국 문을 닫아버려서 자신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한다. 교인 한 사람을 얻기 위하여 나름 노력하여 생겨나면 오히려 자신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기도 한다. 지도자는 여간 깨어있지 아니하면 회중들의 시선을 의식하여 잔과 대접의 겉을 깨끗이 하는 즉 외양을 그럴듯하게 꾸미느라 신경 많이 쓰다보니 막상 자기 내면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해질 수 있다. 누구든 자기 내면을 깨끗이 해야 겉도 깨끗해질 수 있다. 지도자들은 권력과 명성으로 치장되다보니 외양은 회를 칠해놓은 무덤처럼 아름답게 보이지만 그럴수록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게 된다. 예수님께서는 정체성을 상실하여 영적 지도력이 혼돈을 거듭하고 있는 지도자들을 향하여 아주 엄중하게 경고하신다.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마 23:33)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기점으로 하여 출발한 기독교 역사는 2천년을 맞고 있다. 기독교회 시작 445년 만에 ‘교황’이라는 칭호가 버젓이 사용된다. 그 해 6월 6일, 황제 Valentianus 3세는 로마 제국의 수도 로마에 위치한 교회(성 베드로 교회)를 담임하는 Leo 1세 감독에게 ①로마 교회 감독은 베드로의 후계자이다. ②성령의 특별한 보호에 의하여 ②로마제국의 수도에 위치한 교회의 감독이라는 비중을 감안하여 「교황 칭호를 허락하노라」는 칙령을 내린다. 알렉산드리아 교회, 프랑스 지역 교회 감독들은 로마 교회 감독이 단지 제국의 수도 로마에 위치해 있다고 해서 ‘감독의 동등성’을 무사하고 <로마교회 감독 수위권>을 주장하는 것은 성경적으로나 상식에 맞지 않으므로 엄중히 반대한다고 저항하였으나 세속 황제라는 절대 권력의 비호를 이길 수 없었다. 뿐만 아니라 이태리 볼로냐 교회 감독을 비롯하여 절대 다수의 교회 감독들은 대세에 편승하여 교황제도를 옹호하였다. 그 결과 급기야는 Gregory 1세 교황에게는 「대교황. 大敎皇」이라는 칭호까지 붙여주었다(AD 590). 이렇게 하여 로마교황은 세속 황제들과 ‘성직과 왕직’우열 다툼을 하면서 인류 역사를 호령해왔다. 그러다보니 교황의 한마디 말, 사용하는 단어 하나가 엄청난 위력을 갖게 되고 급기야 교황의 발언, 성경해석, 발표문은 ‘신적 권위’를 가지기 시작하였다. 하나님이 주시는 권위가 아님은 물론이지만 로마교 성직자들이 그렇게 분위기를 만들어 갔으며 동시에 세속 나라의 황제들과 왕들도 그 분위기에 눈 감아주거나 힘을 실어주었다. 급기야는 1870년 7월 8일, 교황 비오(pius) 9세가 주재한 제 1차 바티간 공의회에서는 “교황은 실수하지 않는다. 오류를 범하지 아니한다”라고 하는 「교황 무오류성」을 결의, 채택하였다. 이것이 교황을 신격화(神格化)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이번에 ‘무오류 하다’는 로마교황 프란시스코는 두 가지 분명한 실언(失言)을 하였다. 첫 번째는 지난 해(2023년 12월) 연말 성탄 축하 발표를 하면서 바티칸 광장에 운집한 무리를 향하여 “동성애 커플을 축복하노라”고 공표(公表)하였다. 한국 천주교는 많이 난감하였던지 2개월 동안 숙고, 고민하다가 이번 3월 초에 교황의 그 발표문과 동일한 내용을 공표하였다. 실언하지 않는다는 교황이 성경의 가르침(롬 1:26~27)과 정면 배치되는 주장을 공표하였으니 이 일을 어찌한단 말인가? 통재로다. 두 번째는 얼마 전(2024년 3월 10일) 스위스 방송(RTS)과의 대담에서 “우크라이나 젤렌스키 대통령은 전쟁 상황을 보며 국민을 생각하여 백기를 들고 협상할 수 있어야 하고 그럴 때 가장 용감한 사람이 된다고 믿는다. 상황이 더 나빠지기 전에 ‘협상하는 것’을 부끄러워 하지 말라” 참 어리석고 무지한 실언이다. 침략자 러시아의 푸틴을 향해 책망하면서 ‘무조건 철군하라’고 강권해도 모자랄 판에 이런 해괴한 말을 하다니... 당신들이 굳게 신봉하는 <교황 무오류성>이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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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4-03-25
  • [성서연구] 하나님의 긍휼이 머무는 곳
    나사렛의 처녀 마리아는 천사 가브리엘로부터 하나님의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수태고지를 받았습니다. 큰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마리아는 늙은 친척 엘리사벳도 하나님의 능력으로 임신했다는 말을 듣고 찾아갔습니다. 엘리사벳을 만난 마리아는 하나님을 찬송했습니다. 마리아의 찬양 중에 다음 구절이 있습니다. <긍휼하심이 두려워하는 자에게 대대로 이르는도다>(눅 1:50) 여기 긍휼이라 번역된 단어는 <엘레오스>로서 구원의 은총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긍휼이 머무는 자리가 어디일까요? 마리아는 두려워하는 자에게 임한다고 말했습니다. 마리아의 이 말은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한 것입니다. 천사 가브리엘이 나타나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지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라고 인사했을 때, 그녀에게는 큰 두려움이 임했습니다. 그때 가브리엘은 < 사가 이르되 마리아여 무서워하지 말라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느니라>고 했습니다.(눅 1:30) 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를 찾아온 이유는 마리아가 예수님의 모친으로 선택되었기 때문이고, 이것은 큰 은혜였습니다. 그런데 그 은혜가 임할 때 마리아는 두려워했습니다. 두려워하는 자에게 은혜가 임한 것입니다. 여기서 두려움과 은혜의 상관관계를 알게 됩니다. 두려워하는 자에게 은혜가 임하고, 은혜가 임할 때 두려워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마리아는 왜 두려워했을까요? 그것은 인간은 누구나 하나님 앞에서 두려워하는 게 마땅하기 때문입니다. 마리아는 나사렛의 평범한 처녀였습니다. 내세울 게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천사가 나타났으니, 어찌 두렵지 않겠습니까? 이 과정을 통해서 마리아는 분명히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긍휼은 두려워하는 자에게 임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말을 거꾸로 하면 두려워하지 않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긍휼이 임하지 않는다는 말씀이 됩니다. 그렇다면 누가 두려워하지 않을까요? 그것은 자부심이 큰 사람들입니다. 그 마음이 교만한 자들입니다. 마리아는 계속해서 말했습니다. 누가복음 1장 51~53절입니다. <51 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 52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53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는 빈손으로 보내셨도다> 하나님께서는 두려워하는 자에게는 긍휼을 베푸시지만, 교만한 자는 흩으십니다. 권세 있다고 자부하는 자는 내리치십니다. 부자를 빈손이 되게 하십니다.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 즉 비천하고 주리는 자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그러므로 답이 분명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지 않다면 모르지만, 정말로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원한다면 하나님 앞에서 두려워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설 자격이 없음을 고백해야 합니다. 비록 좀 배웠고, 가졌고, 힘이 있다 해도 하나님 앞에서는 버러지와 같을 뿐임을 깨닫고 고백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두려움을 상실했습니다. 겁 없이 설쳐댑니다. 교단 일을 하는 이들은 대개 어느 정도 목회나 삶에 성공한 분들이라 여겨지는데, 그래서인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기색이 잘 보이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냄새나는 거래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이루어집니다. 보기 민망합니다. 교회 안에서도 목에 힘을 주는 이들은 목회자, 중직자인 경우가 많습니다. 힘이 있는 사람일수록 그렇습니다. 연약함 때문에 떠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강한 자보다 차라리 약한 자, 높은 자보다 차라리 낮은 자, 가진 자보다 차라리 부족한 자가 되는 게 낫습니다. 예수님께서 낮은 세상에 오신 이유, 십자가에까지 낮아지신 이유는 낮은 자에게 은혜를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높은 자에게 은혜를 주시려 했다면 굳이 그렇게 낮은 자리에까지 오지 않으셔도 좋았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가장 낮은 자리인 십자가에까지 내려오셨기 때문에 예수님과 같은 높이에 있던 행악자가 긍휼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기억합시다. 두려워하는 자에게 긍휼이 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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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04
  • [소강석 칼럼] 우리들만의 교회는 아니었는가
    견리망의(見利忘義)라는 말이 있다. 교수신문에서 지난해를 정리한 사자성어였는데 이익을 보고 올바름을 잊어버린다는 말이다. 최근 목회데이터연구소(대표 지용근)의 ‘한국교회 명목상 교인 실태 및 신앙 의식’에 대한 설문조사 결과를 접하고 어처구니가 없었다. 최근 10년간 20~40대 개신교인 절반가량이 감소됐다는 것이다. 나부터 우물 안의 개구리였던 것 같다. 우리 교회는 청년부도 건재할 뿐 아니라 30~40대가 주를 이루고 코로나 이후에도 상승세를 타고 있는 교회이기에 전혀 감지를 못했는데 통계가 그렇게 나온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왜 그랬을까. ‘교회 3.0’ 저자 닐 콜은 ‘종교 없음’이라는 결론을 냄으로써 미래 시대일수록 인간이 종교와 멀어질 것이라고 예견했다. 독일의 신학자 한스 큉은 미래엔 종교적 영성은 목말라 하지만 제도적인 교회를 향해서는 거부감을 갖게 될 것이라고 일찍부터 조망했다. 그러나 이건 해도 너무한 것이 아닌가. 20~40대 지성인들이 한국교회를 외면하는 현상을 어떻게 봐야 하는가. 우리가 정말 반성하고 따져볼 필요가 있다. 이런 현상은 코로나19 기간을 거치면서 더 그랬다고 한다. ‘정말 우리만의 교회는 아니었는가.’ 한국교회는 그간 엄청난 비판을 받아왔다. 그 비판 중에 ‘네오마르크시즘’ 사상으로 인한 전략적 공격도 있었지만 더 큰 것은 ‘그들만의 교회’, ‘그들만의 카르텔’을 이뤘다는 점에서 비판을 받아왔다. 우리가 복음을 잘못 전했던지 아니면 교회다운 모습을 보이지 못했던지가 그 이유일 것이다. 역사의 거울을 다시 한번 볼 필요도 있다. 유럽에 흑사병이 창궐할 때 교황 클레멘트 6세는 무조건 성당으로 모이라고 했다. 모여서 믿음으로 흑사병을 이기고 물리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성당이 집단 감염의 진원이 되어 어른 아이 노인 할 것 없이, 심지어는 성직자들까지 흑사병에 걸려 죽었다. 그러자 많은 사람들이 신의 존재를 부인하거나 교회를 희화화하기 시작했다. ‘도대체 하나님이 살아있다면 왜 저 사람들이 저렇게 죽어가도록 놔두신단 말인가. 왜 죄 없는 어린아이가 저렇게 죽어가고 심지어는 성직자들까지도 죽게 놔둔단 말인가.’ 보카치오가 쓴 ‘데카메론’에 보면 이렇게 신을 우롱하고 교회를 희화하는 이야기들이 많이 나온다. 그러면서 인문주의와 르네상스가 태동하게 됐다. 그러나 종교개혁자 장 칼뱅은 달랐다. 먼저 구빈원을 만들어 사회봉사를 실천했다. 그리고 흑사병이 왔을 때 구빈원 자체가 격리시설로 사용됐다. 구빈원뿐 아니라 노약자와 일반 성도들은 교회로 오지 말고 집에 머물라 했다. 대신 성직자들이 찾아가 예배를 드려 주도록 했다. 소수이긴 하지만 현장예배는 끝까지 지켰다. 이처럼 칼뱅은 예배의 존엄성을 지키면서도 이웃 사랑과 생명 사랑을 실천했다. 그래서 칼뱅의 종교개혁 운동은 제네바 시민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으며 발전을 거듭했다. 일대일 영혼 구원도 중요하다. 개교회 성장도 중요하다. 나 역시 내 교회라고 하는 우물에 갇혀 이렇게까지 된 줄은 몰랐다. 정말 심각한 문제가 아닌가. 한국교회가 사회를 따듯한 사랑으로 감싸는 ‘선샤인처치’(Sunshine Church)가 되고 ‘허들링처치’(Huddling Church)가 돼야 하는데 그렇게 되지 못한 결과 아닌가. 이렇게 되면 우리도 결국 시대로부터 외면당한 유럽 교회를 따라갈지도 모른다. 다시 생각해보자. 우리가 복음을 잘못 전하지는 않았는지, 아니면 견리망의처럼 우리만의 교회를 이루었던 것은 아닌지 말이다. 우리 모두 다시 일어나 바른 복음을 전할 뿐만 아니라 교회다운 모습을 보여주자. 교회는 진리 때문에 박해를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의 행실 때문에 비난을 받아서는 안 된다. 다시 선샤인처치, 허들링처치로 돌아가자. 젊은이들에게 교회다운 모습을 보여주자. 차갑게 얼어붙은 사람들의 마음에 햇살을 비추고 허들링을 하자. 우리만의 교회가 아닌 소통과 공감, 사랑과 섬김의 교회를 이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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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04
  • [시사칼럼] 쇼펜하우어와 키르케고르
    요즘 서점가에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책의 주인공이 있습니다. 독일의 철학자 ‘아르투어 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er, 1788-1860)입니다. 화제의 『마흔에 읽는 쇼펜하우어』(유노북스, 2023)는 교양서적으로서는 최초로(그것도 철학책으로!)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망라하고 종합 베스트셀러 1위를 질주하고 있습니다. 전혀 팔릴 것 같지 않아 출판사에서 들어온 제의조차 처음에는 거절했다는 저자(강용수 고려대 교수, 독일 뷔르츠부르크 대학 박사)의 말이 아니더라도, 본인이 활동할 당시에도 대중적인 인기가 없었음은 물론 학계에서는 거의 따돌림을 당하다시피했던 보통은 염세주의자로 잘 알려진 이 철학자가 이토록 지금 이 시대의 한국 사회에서 각광을 받는 이유는 도대체 무엇일까요? 사실 쇼펜하우어의 가장 위대한 학문적 업적은 헤겔의 낭만주의적 이성주의 철학에 반기를 들고 발표한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Die Welt als Wille und Vorstellung)』(1819)입니다(발간 후 100권밖에 팔리지 않자 실망함). 하지만 21세기 한국에서 그는 다음과 같은 말들로 유행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행복을 가로막는 두 가지 적수가 고통과 무료함인데, 우리의 인생이란 이 두 가지 사이를 오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마흔에..”, 36). “자신이 하고자 하는 것(욕망)과 자신이 할 수 있는 것(능력)을 분별하는 자기 인식이 행복의 전제 조건이다”(71). “미래가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라 오직 현재만이 진실하고 현실적이고 확실하다”(201). 쇼펜하우어 하면 동시대를 살았고 성향 자체도 일견 유사해 보이는 또 한 사람의 철학자가 생각납니다. 쇼펜하우어보다 25년 늦게 태어나서 5년 먼저 사망한 덴마크의 사상가 키르케고르(Søren Kierkegaard, 1813-1855)입니다. 두 사람은 당대 주류 중의 주류였던 헤겔에 대한 반감과 근대 과학의 오만함에 대한 비판 같은 측면에서, 그리고 ‘고통’(쇼펜하우어)과 “불안”(키르케고르) 같은 실존적인 개념을 자기 철학의 핵심 키워드로 삼았다는 점에서도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정작 키르케고르는 죽기 얼마 전에야 쇼펜하우어의 책을 읽었다니 의외이긴 하지만 말입니다. 두 사람의 영향력이 사후에 오히려 더 크게 발휘되었다는 점도 비슷한데, 쇼펜하우어는 니체와 러셀과 비트겐쉬타인 같은 철학자뿐만 아니라 프로이트 및 융에게도 심대한 영향을 끼쳤고 나아가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 같은 작가들이나 바그너 같은 음악가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키르케고르는 야스퍼스와 하이데거로 이어지는 실존주의와 현상학의 출발점이라 불러도 좋을 만큼 현저한 영향력을 행사했고, 칼 바르트와 위르겐 몰트만 그리고 폴 틸리히에도 크게 영향을 끼친 것으로 유명합니다. 그런데 쇼펜하우어가 득세하는 반면 키르케고르는 왜 여전히 인기가 별로 없을까요? 아마도 인간은 누구든지 『절망에 이르는 병』(1849)을 면할 길이 없는데,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믿음’이라고 했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이것이냐 저것이냐』(1843)과 『공포와 전율(두려움과 떨림)』(1843)에서부터 모색해 오던, 철학적 이성의 길이 아니라 종교적 신앙의 길에서 키르케고르는 인생과 철학에 대한 답을 찾았기 때문 아닐까요? 우리는 지금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는 시대적 흐름 속에 갇혔습니다. 20세기 말에 선각자로 자처하던 인물들이 이른바 “제3의 길”(Anthony Giddens)을 제창했었는데, 이제는 그나마 ‘제4의 길’이나 ‘제5의 길’이라도 제시하려는 시도조차 보이지 않습니다. (물론 강원대의 이현훈 교수 같은 분은 2년 전『예정된 미래: 네 가지 뉴노멀과 제4의 길』(파지트)이라는 책을 통해 이제 인류는 “디지털사회”, “노인사회”, “양극화사회”, “홀로세(holocene)”를 극복할 수 있는 ‘제4의 길’을 가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습니다.) 게다가 점차 일상이 되어가는 전쟁과 기후변화와 환경재앙과 국내적 정쟁 등으로 인해 현대인들은 답답함과 우울함에서 오는 압박을 견뎌나가야 하는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이럴 때 속이라도 시원하게 “남에게 보여주려고 인생을 낭비하지 말라”거나 “당신의 인생이 왜 힘들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합니까?”라고 일갈하는 ‘꼰대 철학자’ 쇼펜하우어에게 대중들은 “자기계발서의 거짓 위로에 지쳤는데 철학책에 위로 받았다” 혹은 “거침없는 팩폭에 감동했다”는 반응을 보이며 열광하는 겁니다. 하지만 실존적인 위기에 직면한 인간에게 주어진 최고선은 바로 인간의 실존 가운데로 직접 뛰어드신 하나님의 실존인 그리스도이며, 그를 믿는 신앙만이 인생의 궁극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키르케고르의 사상이 사실은 핵심을 더 찌르지 않았습니까? 어느 때보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를 많이 묵상할 이 계절에, 대중들에게는 쇼펜하우어보다는 차라리 키르케고르가 이제는 더 가까이 다가서길 바라는 마음을 가져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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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04
  • [은혜의말씀] 아름다운 소식 (왕하 7:3-10)
    사마리아성에 극심한 기근이 시작되었습니다. 바로 아람 왕 벤하닷과 그의 군대가 이스라엘의 수도 사마리아를 완전히 포위해 버렸기 때문입니다. 먹을 것이 바닥난 성내는 그야말로 지옥이나 다름없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비참한 현실 앞에 엘리사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습니다.(7:1) 하나님의 말씀이 내일은 기적을 보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돌아보실 때 놀라운 은혜의 역사, 기적의 역사가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모든 문제의 열쇠는 하나님께 있음을 믿습니다. 다음 날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그대로 성취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성취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사마리아의 상황이 우리의 현실이라는 것입니다. 기근과 굶주림으로 사람을 삶아먹는 비참하기 짝이 없었던 지옥과도 같았던 사마리아성의 상황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의 모습은 아닐까요? 영적으로 보면, 이 세상은 하나님의 은혜와 영원한 생명, 구원에 대한 소망을 알지 못한 채, 인간의 욕심과 욕망, 자신의 이익을 위해 끊임없이 투쟁하지마는 끝내 공허함과, 굶주림, 채우지 못하는 쾌락 앞에, 사람들은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구원의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셨습니다. 내일이면 사마리아가 구원을 받을 것이라는 복된 소식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마리아는 구원을 받았습니다. 아름다운 소식은 구원의 소식입니다. 죄로 말미암아 죽을 밖에 없는 우리들을 위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영원한 생명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이것이 복음이요, 아름다운 소식입니다. 그러면 이 아름다운 소식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 1. 내게 주신 구원의 은혜를 누리십시오. 성안은 굶주림과 기근으로 죽음의 공포가 엄습하고 있었지만, 이 네 명의 나환자들 구원의 기쁜 소식을 보고 체험하고 누리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루어 놓으신 구원의 기쁨을 거저 가서 보고, 누리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한 자만이 그 은혜를 전할 수 있습니다. 2. 나만 누리는 것은 죄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나환자들은 이런 아름다운 소식을 자신들만 누리고 침묵하는 것은 죄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아름다운 소식-복음을 전하지 않는 침묵은 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와 복을 나 혼자만 누리고 죽어가고 있는 자들이 있는 것을 뻔히 보고 있으면서도 알리지 않는다면 우리는 옳지 못한 것입니다. 이제 나를 위한 구원에서 남을 위한 구원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3. 우리는 복음을 전하는 사명자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먼저 부르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복음을 전하는 사명자로 삼기 위해서입니다. 영적인 눈으로 지금도 지옥을 향해 죽어가는 수많은 영혼들을 보십시오. 이 복음은 죽은 영혼을 살리는 생명의 능력입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 이 아름다운 소식이 온 세상에 전파되길 원하십니다. 나를 통해 이 생명의 복음이 또 다른 사람에게 전해질 수 있도록, 복음 전도자의 사명을 다하는 여러분 되시길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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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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