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3-05-26(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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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명성교회 최종승소
    세습논란이 일었던 명성교회 김하나 목사의 대표 자격이 대법원에서 최종 승소했다. 대법원 1부(주심 김선수 대법관)는 명성교회평신도연합회 정태윤 집사가 "김 목사에게 대표자 지위가 없다는 사실을 확인해달라"며 명성교회를 상대로 제기한 소송을 원고 패소 판결한 원심을 최근 심리불속행 기각으로 확정했다. 정 집사는 교단이 정한 세습금지법을 어기고 담임목사가 된 김하나 목사에게 자격이 없다는 소송을 제기했다. 1심에서는 김하나 목사를 위임목사로 청빙한 것이 세습방지법을 위반해 위임목사의 지위가 존재하지 않는다며 정 집사의 손을 들어줬다. 하지만 2심은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가 '전임 목사의 은퇴 후 5년이 지난 때부터는 직계비속을 위임목사에 청빙해도 세습방지법에 어긋나지 않는다'고 유권해석을 내린 점을 들어 김하나 목사의 위임목사 임직 효력을 인정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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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야의 소리
    2023-03-06
  • 1만명 참여하는 ‘부활절 퍼레이드’
    금년 부활절(4월 9일)에는 1만 명이 참여하는 ‘부활절 퍼레이드’가 펼쳐질 예정이다. 한국교회총연합(대표회장 이영훈 목사)은 지난 28일 부활절퍼레이드조직위원회 출범 기자회견을 열고, 다음달 9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서울광장까지 약 1.7km를 행진하는 기독교 문화 행사를 진행한다고 밝혔다. 이 행사에는 약 1만 여명이 참여할 예정이며 행렬의 선두에는 양각 나팔수들이 이끌고, 그 뒤는 언약궤와 부활 음악을 연주하는 마칭밴드, 한교총 소속 교단장등이 행렬을 따른다고 밝혔다. 또 구약존, 신약존, 근현대(부활)존, 다음세대 존으로 나뉘어 성경과 한국교회 역사를 만나볼 수 있도록 다양한 퍼포먼스를 준비할 계획이다. 이영훈 대표회장은 “부활절퍼레이드를 통해 시민들이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며 소통할 수 있기를 소망한다”고 말했고, 실무대회장인 소강석 목사(새에덴교회)도 “부활의 행진을 한다는 것 자체가 기쁨이고 가치 있는 일이다”이라며 한국교회 뜻깊은 행사로 기록될 것이라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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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야의 소리
    2023-03-06
  • 각 교단 총회 부총회장 후보 윤곽
    금년 총회 각 교단 부총회장 후보들의 윤곽이 드러나고 있다. 9월 열리는 예장통합 부총회장 후보에는 목사부총회장에 김영걸 목사(포항동부교회), 장로부총회장에 윤택진 장로(대전제일교회)가 각각 단독으로 예비후보로 등록했다. 후보자들은 봄 노회에서 추천을 받아 총회 개회 60일 이전 부총회장에 최종 등록을 하게 된다. 예장합동도 출마자들의 윤곽이 드러나고 있다. 목사부총회장에는 김종혁 목사(울산 명성교회)와 남태섭 목사(대구서부교회)가 등록할 예정이고, 장로부총회장에는 김영구 장로(장위제일교회), 이이복 장로(성남제일교회)가 물망에 오르고 있다. 5월23일 신길교회에서 열리는 기성총회도 목사부총회장 후보로 류승동 목사(인후동교회)와 정성진 목사(열방교회)가 격돌한다. 장로부총회장은 김복은 장로(북교동교회)와 김정호 장로(구성교회), 노성배 장로(임마누엘교회) 3파전이 치러질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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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야의 소리
    2023-03-06
  • [목회자칼럼] 원하는 것 또는 필요한 것 what you want or need
    실제 광야에 서 본 적이 있는가? 광야에 가면 끝도 없이 펼쳐진 길, 사방을 둘러보아도 손에 잡힐 만한 것이 없다. 광야에서는 먹을거리도, 잠을 잘 곳도 찾지 못하고 생존이 막막할 때는 그저 하늘을 보며 도움을 구할 수밖에 없다. 과거에 내가 얼마나 많이 가졌는지, 예전에 내가 얼마나 화려하게 살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광야에서는 그저 생존을 위해 가장 필요한 것만 있으면 된다. 인생의 광야에 서 본 적이 있는가? 인생의 광야에 서면 끝도 없이 펼쳐진 삶의 막막함, 주위를 둘러봐도 도움을 받을 만한 것이 없다. 관계도 막히고 물질도 막히고 심지어 내일의 희망조차 막혀버린 인생의 광야에서 할 수 있는 거라곤 그저 하늘을 보며 지금 당장 생존을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을 구하는 일 밖에 없다. 실제 광야든, 인생의 광야든 광야라는 막막함 속에 들어서면 구하는 것은 오직 단 하나다. ‘살기 위해 필요한 것’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것만 생각하다보면 지금까지 내가 얼마나 많은 것들을 누리고 살았는지, 구하고 살았는지, 원하고 살았는지 깨닫게 된다. 심지어 내가 원하는 것을 갖기 위해 하나님까지 이용한다는 사실도 광야에 들어서면 알게 된다. 그렇기에 광야에 서면 예전에는 보이지 않는 것들이 새롭게 보이는 은혜가 임한다. 지난 주 금요 기도회에서 부르짖었던 기도가 사실은 나의 필요가 아닌 나의 원함에서 오는 사치라는 것, 내가 눈물을 흘리며 구했던 것이 나의 편함과 나의 안위라는 사실이 광야에서는 보이게 된다. 이쯤 되면, 광야에 서있지 않더라도 고개를 갸웃거리며 내 모습을 돌아보게 된다. 지금 나는 어떤 생각에 물들며 살아가고 있는가? 지금 내가 발판으로 삼는 가치관들은 어떤 모양을 가지고 있는가? 아니 더 나아가 예수를 믿는다고 고백하면서 지극히 인본주의, 물질주의, 개인주의로 살아가는 나에게 벗어나는 길은 무엇일까? 첫째, 광야가 필요하다. 광야에 들어선다는 말은 다시 말하면 세상에 속한 일상에서 벗어남을 의미한다. 그런데 우리는 자발적으로 광야에 발을 들이기를 두려워하고, 무서워한다. 무엇보다 광야로 들어갈 필요를 느끼지도 않는다. 어쩌면 그렇기에 광야가 더 필요할 수도 있다. 현대 사회에서 할 수 없는 멈춤, 쉼, 깊은 생각, 변화를 위해서는 광야가 필요하다. 둘째, 다시 생각해야 한다. 예전에는 정답이라 생각한 것이 시간이 지나고 보면 오답일 수 있고, 그토록 열심히 한 일이 한 순간에 헛수고라 여겨질 때가 있다. 우리가 종종 범하는 어리석음 중 하나는 “지금, 내가 생각하는 게 맞다”라고 단정짓는 행동이다. “내 생각이 틀릴 수 있다”고 여기며 다시 생각하는 태도, 굳어지지 않고 살아가는 자세이다. 셋째, 새로운 일을 시작할 준비를 해야 한다. 변화는 필요, 결핍에서 만들어진다. 내가 생각하는 필요, 우리에게 없는 결핍이 무엇인지 발견이 변화의 시작점이 된다. 살아있는 생명이나 사회는 새 변화를 원한다. 특히 지금처럼 복잡한 사회는 단순함, 순결함을 원하기에 이 필요에 맞춰 새로운 일을 시작할 준비를 해야 한다. 넷째, 하늘의 뜻을 발견해야 한다. 이 땅에 발을 딛고 살아가는 우리가 여기에 함몰되면 마치 천국은 없는 듯, 이 세상이 영원한 듯 분별하지 못하고 살 수 있다. 이럴 때, 여기가 광야라고 생각하고 하늘을 쳐다보아야 한다. 진리를 향해 한 걸음 나아가며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사는 삶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하다. 이제 다시 우리는 세상 속에 광야에 서있다. 내버려두면 끊임없이 하고 싶은 대로 달려가는 ‘자기중심성’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세상 속에 광야에서 다시 물어야 한다. “나는 지금 무엇을 바라고 있는가?” “내가 추구하는 것은 필요한 것인가? 원하는 것인가?” 이 질문에 솔직히 답하는 것을 시작으로 3월, 봄을 향해 한걸음 나아가길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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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목회자칼럼
    2023-03-06
  • [김정환 사무총장] 하나님 주신 세상, 그 안에서 안전한 살 우리의 권리
    2015년 부산 시민은 힘을 합하여 30년 수명 후 10년을 더 사용한 뒤 다시 10년의 수명을 더 연장하여 사용하려고 했던 고리1호기를 마침내 폐로하였습니다. 수명이 다한 원전은 폐로가 답임을 믿고 있었던 약속은 몇 년 지나지도 않아 정권이 다르다는 이유로 다시 바뀌었고 한국수력원자력(이하 한수원)은 40년의 수명을 다한 고리 2호기의 수명을 연장하려고 계획하고 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고리원전 부지 내 건식저장시설을 확정했으며 이는 부산을 영구적인 핵폐기장으로 만들 수 있는 발전소 부지 내 건식 임시저장시설이 추진되고 있는 것입니다. 부·울·경 지역은 세계 제1의 원전 밀집도뿐 아니라 노후원전 및 영구적인 핵폐기장까지 떠안게 되는 상황에 처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일본은 후쿠시만 방사능오염수를 해양으로 흘려보내려고 합니다. 그 어느 것도 시민들에게 정확히 공개하고 있지 않으며 대상 지역의 주민들에게만 거듭된 희생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고리에서 반경 20km 이내에 해운대가 있고 30km이내에 서면이 있습니다. 방사선 비상계획구역 내에 부산·울산·경남 시민 380만명 거주하고 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중대 사고가 발생할 경우에 적용될 동시 대비 계획은 사실상 전무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한수원은 고리2호기 수명연장을 위해 방사선환경영향평가 공람과 공청회를 지역을 돌면서 진행하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보여준 한수원의 모습은 많은 논란의 소지를 제공하였고 공청회 과정에서 보여야 할 시민과의 소통과 교감은 갈등과 대결의 모습으로 나타났습니다. 고리2호기에 이어 후속으로 3호기, 4호기 등 원전이 계속 설계 수명이 만료되는 시점이 다가오고 있는 상황에서 국민의 일원으로 부산 시민으로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아야 하며 꼼꼼히 검토해야 할 것입니다. 누구도 예측할 수 없었던 체르노빌과 후쿠시마, 그리고 크고 작은 원전 사고는 엄청난 인명과 재산, 자연을 순식간에 훼손시킵니다. 이런 현실 속에서 명확한 근거와 자료를 제시하지 않고 연장 해도 문제없고 안전하다고만 하는 한수원의 말을 우리는 신뢰 할 수가 없습니다. 지금을 사는 우리를 위해서, 또 앞으로 살아갈 미래의 후손들을 위해서 우리는 용기를 내어 참여하고 말하고 실천해야 할 것입니다. 후쿠시마 사고가 일어난 지 12년이 되었지만 그 피해는 여전히 진행 중입니다. 그 어떤 정치적 견해도 생명보다 귀하지 않습니다. 미리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한 걱정이 아니라 이미 발생했고 진행 중인 경험들을 바라보며 우리의 생명의 안전을 위해 안전이 도시 부산을 위해 고리2호기 수명연장과 영구화될 고준위 핵폐기장 계획은 함께 힘을 모아 반드시 막아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을, 생명을 더 이상 망가뜨리는 우리가 아니라 생명이 숨쉬는 안전한 세상을 만들어 가며 그 속에서 하나님께서 권리를 누리는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 함께 참여하고 행동해 주기를 소망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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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3-03-06
  • [이상규교수의 역사탐색] 마산의 기독교 지도자 이승규 장로
    마산문창교회(혹은 제일문창교회)는 마산지역 최초의 기독교회이자 호주장로교 선교부의 마산지역 거점교회였다. 한국장로교회의 첫 목사였던 한석진을 비롯하여 후에 부통령이 되는 함태영, 위대한 순교자 주기철, 고신의 지도자 한상동과 송상석, 이금도 목사 등이 시무했던 교회였다. 이 교회는 마산에서 사역했던 미국북장로교회의 시릴 로스(노세영)와 호주장로교회의 앤드류 아담스(손안로) 두 선교사에 의해 1901년과 1902년 시작된 교회가 1903년 3월 19일 통합되어 구마산(舊馬山)교회, 마산포교회, 마산교회, 그리고 상남동교회 등으로 불리다가 1919년 새로운 석조 예배당을 건축하면서 지역 이름을 따서 문창(文昌)교회로 불리게 된다. 물론 크고 작은 시련이 없지 않았으나 형식상 50년간 평화를 누리던 이 교회는 백리언 목사 부임 이후 내분이 일어나 1951년 결국 문창교회와 제일문창교회로 분리하게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런데 문창교회 설립초기에 주도적인 역할을 한 이가 이승규(李承奎, 1860-1922)라는 인물이었다. 그는 이병직과 김주은 아들로 1860년 서울에서 출생했다. 그런데 이들 가족이 천주교를 신봉한다하여 종중(宗中)에서 축출 당하게 되자 밤중에 서울을 떠나 경상도 지방으로 향해 순례길을 떠나 아무 연고도 없는 부산 동래에 정착했다. 이승규가 6살 때였다. 이곳에서 이승규는 김영유(金永柔)와 혼인하였고, 한약을 공부하여 한의사가 되었다. 근면했던 그는 명의라는 명성을 얻었고 상당한 재산도 모았다. 그가 불혹의 40살이 되었을 때, “이전까지는 나 자신을 위해 살며 재산을 모았지만 이제는 남을 위해 살며 남을 위해 재물을 써야겠다.”고 다짐하고 자신의 뜻을 펼칠 곳을 찾다가 부모를 모시고 경상남도 마산으로 이거하여 상남동 지역에 정착하게 된다. 바로 이곳에서 이승규는 커다란 변화를 겪게 된다. 그의 어머니 김주은(金主恩)은 호주 선교사 앤드류 아담스(손안로)를 통해 전도를 받고 신자가 되었고, 김주은의 인도로 아들 승규 또한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였다. 이 때부터 이승규는 호주 선교사 손안로를 도와 전도에 협력하여 마산지방 첫 교회인 마산포교회를 성호리에 설립하게 된다. 어떤 점에서 그를 문창교회 설립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 선교사와 더불어 마산포교회당에서 작은 독서숙(讀書塾)을 설립했는데 이것이 마산지방 첫 근대학교인 창신학교로 발전했다. 이승규는 교회를 위해 헌신적으로 일했고 자신의 재물을 교회를 위해 기꺼이 헌납하였다. 그의 아들이 노산 이은상(李殷相, 1903-1982)인데, 이은상은 젊은 날을 회고하면서, “구마산역에서 북마산역으로 뚫린 큰 길이 전부 우리집 마당이었다.”라고 말했을 만큼 이승규는 부유한 재력가였다. 그는 용하다는 한의사였고 지역 사회에서 존경을 받았고, 교회를 위해서도 기꺼이 헌신했다. 마산포교회를 설립하고 예배처소로 한옥을 구입할 때도 이승규가 감당했다. 그런데 마산포교회의 첫 장로로 피임된 이는 의외의 인물 최경호였다. 그는 1912년 3월 6일 대구 남문내교회에서 모인 제2회 경상도노회에서 문답을 받고 3월 17일 장로로 장립을 받았다. 그래서 마산포교회가 당회를 구성하게 된다. 손안로 목사가 당회장이 되었고 당회원은 손안로의 동료 선교사였던 왓슨(왕대선) 목사, 그리고 최경호 장로였다. 그로부터 약 2년 후인 1914년 1월 18일 이승규는 두 번째 장로가 된다. 제일문창교회 120년사를 쓰면서 나에게 한 가지 의문이 있었다. 어떻게 교회의 설립자라고 할 수 있고 교회의 기둥 같은 인물이었던 이승규가 첫 장로가 되지 못했을까? 당회록을 보면 처음으로 장로로 피택된 이는 생각지도 못한 ‘이경중’이라는 인물이었다. 교회기록을 보면 여러 인물들이 거명되기 마련인데 이경중은 처음 언급되는 인물이고 그 이후 교회기록에 다시 언급되지 않았다. 당회록 등 교회 기록에 단한 번 등장하는 이경중, 그가 어떻게 피택 장로가 되었을까? 그런데 그는 왜 장립되지 못했을까? 그는 왜 교회 기록에서 다시 언급되지 못했을까? 그렇다면 타지로 옮겨 간 것인가? 여러 가능성을 생각해 보았으나 분명한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러든 중 송상석 목사의 ‘법정소송과 종교재판’이라는 책을 읽던 중 ‘이경중’은 ‘이승규’의 별명이었다는 점을 확인하게 되었다. 대수롭지 않는 언급이 역사적 사실을 확인하는 단서가 된 것이다. 그렇다면 왜 문창교회 당회록에서 이승규라는 공식 이름을 기재하지 않고 일부의 사람만 알고 있던 이경중이라는 별명으로 기재했을까? 이승규는 아들을 불신혼인하게 하여 6개 월 간 책벌을 받았고 그 일로 장로 장립을 받지 못한 것이다. 영예롭지 못한 일이기에 당회록은 의도적으로 ‘이승규’라고 기록하지 않고 ‘이경중’이라는 별명을 기록한 것이다. 6개월간의 책벌기간이 경과한 후 손안로 선교사는 그의 해벌을 노회에 보고하였으나 노회원들은 “더 기다려주기를 가결하여” 장로 장립은 다시 미루어졌고, 최경호 보다 2년 후 장립을 받게 된 것이다. 당회 기록을 보면서 세 가지를 생각하게 되었다. 첫째, 당시 교회는 불신 결혼은 성도들이 피해야 할 중한 죄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둘째, 교회의 법은 지키면서도 교회는 치리 받은 사람도 보호해 주려는 애정어린 배려를 볼 수 있다. 셋째, 이승규는 치리에 복종하고 인내하였고 비록 후배 보다 늦게 임직을 받았으나 변함없는 마음으로 주님을 섬겼다는 사실이다. 그러기에 그는 존경과 신뢰를 받았고, 그의 믿음의 여정은 오랜 세월이 지났으나 아름다운 유산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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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상규교수의 역사탐색
    2023-03-06
  • 지금 바로 행동하라, 이것이 성공의 지름길이라는 하버드대 출신의 특강
    계획을 아무리 거창하게 세울지라도 행동하지 않으면 안하는 것만도 못하는 것이다. 좋은 아이디어와 좋은 계획을 실천에 옮겨야 훨씬 가치를 낼 수 있다. 뜻을 이루지 못해 실의에 빠진 한 젊은이가 있었다. 그는 매주 복권에 당첨돼 일확천금을 얻는 행운을 꿈꾸며 살았다. 그러면서 그는 2~3일에 한번씩 교회로 가 기도를 드렸다. “주님! 주님을 향한 저의 마음이 이리 독실하고 절실하니 부디 제가 복권에 당첨될 수 있게 해 주세요!”라고 기도를 간절히 드렸다. 하지만 이 일이 반복했지만 그는 한번도 복권에 당첨되지 못했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자 젊은이는 조금 화가 나기 시작했고, 기도를 할 때도 불만이 먼저 튀어 나왔다. “주님! 왜 제 기도를 들어주지 않으시는 겁니까?” 이때, 낮고 힘 있는 음성이 들려왔다. “그동안 너의 기도를 모두 듣고 있었느니라. 그러나 적어도 네가 먼저 복권을 사야 하지 않겠느냐!” 램 차란은 하버드대 경영대학원 MBA와 DBA 학위를 보유한 베스트셀러 작가이자 휼륭한 교수이다. 그는 지금 바로 행동하지 않으면 모든 이상이 전부 아무런 가치가 없게 되고 목표에도 도달할 수 없다고 말한다. 행동이 그만큼 중요한 이유는 이것이 계획과 결과 사이를 이어주는 다리이기 때문이라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하버드대 출신의 엘리트들이 자아실현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애초에 정확한 이상 또는 목표를 정했고 그들이 바로 이를 위한 행동에 나서고 꾸준히 움직였기 때문이다. 자카르타의 한 초등학교에서는 학생들에게 ‘나의 꿈:나는 커서 무엇이 되고 싶은가?’를 제목으로 글짓기를 시키고 있다. 학생들 중에는 과학자가 꿈인 아이도 있고, 선생님이나 의사를 꿈꾸는 아이도 있었다. 그런데 한 남학생은 커서 대통령이 되고 싶다고 썼다. 남학생의 장래희망을 들은 같은 반 친구들은 모두 크게 웃었다. 남학생이 실현 가능성이 없는 터무니없는 꿈을 꾸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선생님 역시 그가 그저 말해본 것이라고 생각해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하지만 남학생은 그냥 한번 해 본 말이 아니었다. 그 후 그 남학생은 누구보다도 더 열심히 공부했고, 결국 하버드대 로스쿨에 입학해 나중에 인권 변호사가 되었다. 그리고 그는 미국 대통령 선거에 참가하기 시작했다. 가정 형편이 평범한 그는 경선 비용을 얻기 위해 아파트를 담보로 잡았고 열심히 몇 주를 돌며 기업과 대학 등에서 자신의 관점을 널리 알렸다. 결국 그는 미국 제44대 대통령에 당선되어 미국 역사상 첫 흑인 대통령이 되어 그의 꿈을 실현했다. 바로 미국 대통령 버락 오바마의 성공 스토리다. 행동은 빈 말 보다 강한 힘을 발휘한다. “말만 하지 말고 행동에 옮겨라”, 이것이 중요한 실천이다. 누구나 성공을 갈망한다. 하지만 탁상공론만 하며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는다면 분명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 제대로 실천에 옮겨라! 좋은 아이디어와 좋은 계획을 제대로 실천에 옮기는 것이 좋은 아이디어 천개를 생각해내는 것보다 훨씬 가치가 있다. 이에 대해 미국 ABB의 회장 퍼시 바네빅은 “성공의 5퍼센트는 전락이고 95퍼센트는 행동이다”라고 지적한 바 있다. 하버드대에서 자주 언급되는 ‘실천’에 관한 이야기가 있다. 앤서니 자나가 하버드예술단의 뮤지컬 배우로 활동할 당시 그녀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아름다운 꿈을 이야기 하곤 했다. “대학 졸업 후 저는 여행을 떠날 거예요. 그런 다음 뉴욕 브로드웨이로 가서 훌륭한 주연배우가 될 것입니다” 이튿날, 지나의 지도교수가 그녀에게 날카로운 질문을 던졌다. “자네에게 여행 후 브로드웨이를 가는 것과 졸업 후 브로드웨이에 가는 것은 무슨 차이가 있나?” 생각해 보니 별 차이가 없다고 느낀 그녀는 1개월 후 브로드웨이에 가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교수는 그녀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물었다. “필요한 생활 용품은 브로드웨이에 가서도 전부 살 수 있는데 다음 주에 가는 것과 오늘 가는 건 무슨 차이가 있나?”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때 교수가 말했다. “브로드웨이의 제작자가 고전 레퍼토리를 무대에 올리려고 준비 중이라고 하더군. 그래서 전국에서 수백 명의 예술가가 주연 배역을 따내려고 오디션을 본다더라고. 내가 이미 자네 대신 내일 출발하는 비행기 표를 예약해 두었으니 어서 꿈을 실현하러 움직이게.” 이튿날 그녀는 세계 최고 예술의 전당, 브로드웨이로 날아가 수백대 일의 힘겨운 오디션을 치렀다. 그리고 브로드웨이에 입성해 인생에서의 첫 빨간 토슈즈를 신었다. 그 후 그녀는 조금씩 브로드웨이에서 젊고 명성 높은 연기자 중 한명이 되어 갔다. 자신의 성공에 대해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제가 성공의 길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행동한 덕분이었어요.” 바로 지금부터 자신을 바꿔라. 말로만 하지 말고 지금 바로 행동에 옮겨라. 그리고 끊임없이 노력하라. 그러면 반드시 자신만의 성과를 거두고 하버드대 출신의 엘리트들처럼 자아를 실현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 내용의 글은 책 ‘어떻게 인생을 살 것인가?’(쑤린 지음, 원녕경 옮김)에서 나온다. 20만부 팔린 이 책은 ‘무엇이 하버드대학을 글로벌 인재의 요람으로 만들었나?’에서 얻은 영감으로 이 글을 썼다. 쑤린은 중국계 미국인으로 세계 500대 기업의 관리 자문 및 기업 훈련 서비스를 진행하고 있다. 쑤린이 개설한 EQ(감성지수)관리 과정이 뉴욕 · 워싱턴 · 로스앤젤레스를 중심으로 선풍적 인기를 끌고 있는데, 마이크로소프트, 지멘스, 구글, 시스코시스템스 등 세계적인 기업의 고위층 임원을 비롯하여 이미 6만 명이 넘는 기업인들이 수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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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역사현장
    2023-03-03
  • [서임중칼럼] 오늘 하루도 나는 살아 있다
    참으로 세월이 유수(流水)같다. 엊그제 송구영신예배를 드린 것 같은데 벌써 2월을 보내고 있으니 말이다. 올 겨울은 유난히도 매섭게 추운 것이 비단 날씨 때문만은 아니다. 정치권의 찬바람이 국민들 가슴을 더욱 시리게 했고 국제정세와 맞물려 국민을 위한다고 호언하던 사람들의 정책부재로 인한 난방비의 인상이 가히 상상을 초월하며 서민들의 버거운 삶은 고드름이 되었다. 매일처럼 들려오는 여의도 1번지의 그 잘난 분들의 언행은 우리의 마지막 남은 온기마저 앗아가는 올 겨울 한파에 혹한의 부채질을 더한다. 내 마음도 그랬다. 삼성병원 암병동을 출입하는 것이 3년째다. 그곳을 출입할 때에도 언제나처럼 입으로는 평행감축을 노래하지만 솔직히 내가 맞이하고 보내는 시간들은 참 시린 날들이다. 그럼에도 마음의 온기를 잃지 않는 것은 엎드림의 시간마다 주님의 말씀을 듣는 은총이 큰 까닭이리라. 그래서인가, 감사한 것은 3개월마다 출입하던 검진 간격이 6개월로 늦춰진 것이다. 암병동 복도를 스치는 사람들의 얼굴에서는 웃음기를 본적이 거의 없다. 그래서 나는 복도를 걸을 때마다 아픈 사람들에게 결례가 되지 않을 만큼의 미소만 머금고 걷는다. 대기실에 앉아 있을 때와 진료실을 출입할 때도 마찬가지다. 그런 어느 날 40대쯤으로 보이는 젊은 여인이 초췌한 얼굴로 다가와 곁에 앉아도 되겠느냐고 조용히 묻는다.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니 곁에 앉으며 “몇 차례 지나면서 뵈었는데 어르신은 얼굴에 늘 미소가 있는 걸로 보아 환자는 아닌 것 같고 다른 누가 아프신가요?” 하고 묻는다. 아내가 그녀의 어깨를 어루만지며 “목사님인데 뇌신경 암으로 진료 받으러 다니고 있어요.” 라고 대답을 했다. 말을 듣자 흠칫 놀라며 “어떡해...” 한마디를 삼키듯 내뱉는 그녀의 눈에 금방 눈물이 맺히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흐르는 눈물을 닦는다. 그녀는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한다. 그럼에도 나의 아픈 이야기를 듣자 눈시울이 젖는 사람이니 마음이 따뜻한 사람임에 틀림없다. 이 분을 내 곁에 인도하신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생각에 가만히 휴대폰을 열어 성경 한 구절을 보여주면서 직접 읽으라고 했다.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언4:23).”와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를 마르게 하느니라(잠언 22:17).”는 말씀이다. 나는 목사로서 매일 이 말씀을 되새기면서 내 마음의 즐거움을 찾고 주님이 주시는 평안을 지킨다고 했다. 말없이 나를 바라보던 그녀는 무슨 뜻인지 알 것 같다고 하며 목례를 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저만치 걸어가는 그녀를 바라보며 주님이 그분의 마음에 평안을 주시기를 기도했다. 김희목 님의 시 한 구절이 생각난다. <잠에서 깨어나니 당신이 있어 기쁩니다. 아침 태양은 찬란히 빛나고 나는 여기 있습니다> 요즈음 내가 자주 읊조리는 시다. 잠에서 깨어났다는 것은 다시 하루를 살아간다는 것이다. ‘당신이 있어 기쁨’의 의미는 내게 있어 아내에게만 한정하였는데 요즘은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이다. 아침 태양의 찬란히 빛남은 하나님의 창조의 절정을 깨닫고 느끼고 경험하게 한다. 그리고 나는, 지금, 여기, 있다. 여기서 멈추어 뒤를 돌아보니 솔로몬의 고백이 묵상된다. 앞을 보니 바울사도의 걸음이 어렴풋이 보인다. 살아있으니 앞으로 가야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오늘도 나는 앞으로 나아간다. 그래서 통감(通鑑)의 지혜가 더욱 필요하다. 지나온 역사를 거울로 볼 수 있는 혜안(慧眼)과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보는 영안(靈眼)과 나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주님처럼 볼 수 있는 심안(心眼)이 열려야 앞으로 나아가는 나의 삶이 탐진치(貪瞋痴)가 아닌 너의 유익을 위한 나의 삶이 되리라. 아들 같은 목사님이 찾아왔다. 교회에서 사임종용을 받았다는데 그 이유가 그야말로 기가 막혔다. 그냥 싫으니 사임하라는 것이란다. 아는 곳도 갈 곳도 없어 하늘만 바라보고 기도하지만 하나님은 침묵하시고 기한은 다가오니 목회는 고사하고 살고 싶은 마음이 사라지고 있단다. 나는 누가, 왜, 무엇 때문에? 라고 묻지를 않았다. 가슴이 먹먹해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아 커피 머신으로 가서 커피 두 잔을 내려왔다. 마시지 않는 차를 앞에 두고 침묵만 흐른다. 그러다가 내가 살아온 날들, 내가 오늘도 살아있음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마태복음 8:20절을 펴 놓고 같이 읽자고 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 결국 그는 탁자 위에 엎디어 흐느꼈다. 바라보는 나도 소리 없이 울었다. 여기를 바라보시는 주님은 또 얼마나 아프실까? 무릎을 꿇은 아들 같은 목사의 머리에 손을 얹고 기도할 때 눈물이 흘러 목사의 머리에 떨어졌다. 기도를 끝내고 품에 안아주며 내가 한 말은 “이것까지 참으라.”였다. 베드로가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귀를 쳐 떨어뜨렸을 때 그 귀를 만져 낫게 하신 주님의 말씀이다. 하나님은 2개월 후 그 목사를 그 교회에서 다른 곳으로 인도해 주셨다. 그 목사가 떠난 이후 촛대가 옮겨지는 이야기를 들었다. 유머 한편이 생각났다. 하나님이 짐승을 지으실 때 사람을 위하여 일하게 하시며 또 수명도 정해 주셨다. 소를 만드시고 60년만 살아라 하시니 소는 30년만 살겠다고 했다. 개를 만드시고 수명을 30년을 명하셨는데 개는 15년만 살겠다고 했다. 원숭이를 만드시고 너도 30년만 살아라 하시니 개처럼 15년만 살겠다고 했다. 하나님은 사람을 만드시고 사람에게는 생각할 수 있는 머리를 주신 후 25년만 살아라 하셨다. 그러자 사람은 하나님께 소가 버린 30년, 개가 버린 15년, 원숭이가 버린 15년을 자기에게 다 달라고 했다. 그래서 25세까지는 그냥 사람으로 살고, 그후 55세까지는 소처럼 일을 하며 살고, 그후 70세까지는 퇴직 후 개처럼 집 지킴이로 살고, 그후 85세까지는 손자들 앞에서 원숭이처럼 재롱을 떨면서 살다가 죽는다는 것이다. 유머일 뿐이지만 왜 사느냐에 대한 질문의 대답이 될 수도 있는 수긍이 되는 유머가 아닌가. 그래서 사도 바울의 고백을 읊조린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14:8).” 이것이 내가 사는 이유다. 오늘, 지금 이 하루도 나는 살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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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2-10
  • [성서연구] 마하나임
    야곱은 형님 에서의 축복을 가로채기 위해 아버지 이삭을 속이기까지 했습니다. 이 일을 두고 좋게 말하면 축복을 사모했다고 할 수 있지만, 나쁘게 말하면 인간적 위계로 살아간 잘못된 태도였다고 하겠습니다. 야곱이 복을 받은 것은 형님의 복을 가로챘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가 태어나기 전, 태중에 있을 때 이미 하나님께서는 작은 자가 더 큰 복을 받을 것이라고 하신 바가 있습니다. 복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지, 사람이 쟁취하는 게 아닙니다. 이 일로 야곱은 형님 에서의 분노를 피하여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도피했고, 20년을 머물렀습니다. 그 기간에 가정을 이루고 자녀를 얻었고, 짐승 떼를 얻어 부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을 오랫동안 짓누르는 무거운 짐이 있었는데, 다름 아니라 형님 에서와 조우하는 일이었습니다. 20년 후 외삼촌의 집을 떠나 돌아올 때 그 짐은 점점 더 무거워졌을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길을 가다가 야곱은 하나님의 사자들을 만났습니다. <사자>라고 번역된 단어는 <천사>라고도 번역됩니다. 하나님의 사자를 본 것은 야곱뿐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천사는 한둘이 아니었고, 그 수가 엄청나게 많았던 것 같습니다. 그 이유는 야곱이 이들을 본 후에 그곳을 <마하나임>이라 했는데, 그 의미가 <하나님의 군대>이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두려운 형님 에서를 만나기 전에 먼저 하나님의 사자들을 만난 것입니다. 우리도 언제나 먼저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야곱이 외삼촌의 집으로 갈 때도 그는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들판에서 노숙할 때 하나님께서 나타나셨고, 은혜의 사다리를 내려보내시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오르내리면서 그를 지켰습니다. 그리고 축복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을 먼저 만났고,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기에 외삼촌의 집에서 무사하게 잘 지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돌아오는 길에도 에서를 만나기 전에 먼저 하나님을 만난 것입니다. 우리도 매사에 먼저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늘 하나님께 먼저 묻고, 하나님의 인도를 받아야 합니다. 또 야곱은 <하나님의 군대>라는 의미로 <마하나임>이라 했는데, 더 정확히 말하면 <두 군대>라는 뜻입니다. 마하나임은 군대, 진영을 의미하는 마하네의 쌍수로서 둘을 말합니다. 야곱은 하나님의 두 군대를 본 것이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두 군대의 진영을 보게 하셨을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한 군대는 그의 뒤를 지키고, 한 군대는 그의 앞을 인도하는 것을 보이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의 뒤를 지키고 계셨습니다. 야곱이 인사도 없이 떠난 것을 알았을 때 라반은 분노했습니다. 그는 길을 재촉하여 야곱을 추격했습니다.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야곱을 덮치기 전날 밤에 하나님께서는 라반에게 경고하셔서 야곱을 해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창세기 31장 24절을 보면 <밤에 하나님이 아람 사람 라반에게 현몽하여 이르시되 너는 삼가 야곱에게 선악간에 말하지 말라 하셨더라>고 했습니다. 이뿐 아닙니다. 야곱의 아들들이 다말이 겁탈당한 일로 세겜 남자들을 죽인 후 야곱이 그곳을 도망할 때, 하나님께서는 주변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주셔서 야곱을 추격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한 군대는 그의 뒤를 지키셨던 것입니다. 후에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널 때 하나님의 불기둥이 이스라엘과 애굽 군대 사이를 막아 이스라엘을 추격하지 못하게 하신 적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도 이런 은혜를 베푸십니다. 우리가 저지른 과거의 죄는 무섭습니다. 학교 폭력을 저지른 오래전 일 때문에 인생의 고통을 겪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보혈은 우리의 모든 과거의 죄를 씻어 다시는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지 못하게 하십니다. 우리에게도 뒤를 지키는 군대가 있는 셈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군대는 야곱의 앞을 인도하셨습니다. 무장 군인 사백 명을 거느리고 오는 에서의 마음의 분노를 녹이셨고, 에서와 야곱이 사랑으로 포옹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앞길을 인도하시길 소원합니다. 우리 앞으로 다가오는 원수를 격파하시고, 길을 열어 주시길 소원합니다. 2023년 한 해 동안 하나님의 두 군대가 앞뒤를 지키는 가운데 강건한 삶을 누리길 소원합니다. 주여, 저희와 한국교회와 대한민국을 보호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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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2-10
  • [시사칼럼] 감성을 장착한 인공지능, 인간을 능가할 것인가?
    얼마 전 테슬라의 일론 머스크(Elon Musk)가 컴퓨터공학을 전공한 샘 올트먼(Sam 미스무)과 공동으로 설립한 <오픈 AI>에서 공개한 신제품(?) 하나가 세계적인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영어로 정식 명칭은 “CHAT Generative Pre-Trained Transformer”(줄여서 ‘챗GPT’)라고 하는데, 쉽게 말하면 ‘잡담하는 로봇’(챗봇, chat-bot) 혹은 ‘생성 AI’ 즉 생성 능력이 있는 인공지능이라 할 수 있는 온라인 서비스 말입니다. 작년 12월 1일 공개된 이후 고작 두 달 만에 사용자가 천만 명을 돌파하면서 구글(Google)의 자리마저 위협하지 않을까 할 정도의 파죽지세(破竹之勢)를 보이고 있습니다. 이 “챗봇”은 질문이나 검색어를 입력하면 관련 자료나 지식을 단순하게 나열하는 기존의 검색엔진과 달리, 이름의 뜻 그대로 ‘생성적 사전 학습 수행’ 능력을 발휘하여 관련된 정보를 요약하고 정리하는 일은 물론이요 답안지나 보고서를 작성하는 수준마저 능가합니다. 미국 펜실베이니아대학교 와튼스쿨의 맥 혁신경영연구소는 최근 ‘챗GPT가 와튼 MBA를 수료할 수 있을까’라는 제목의 논문을 발표하면서, 챗GPT가 필수 교과목인 ‘운영관리’ 기말시험에 응시하여 ‘B-’에서 ‘B’ 학점 사이를 받았다고 알려왔습니다. 상당히 준수한 성적입니다. 경영 실력이 이 정도라면 로스쿨은 어떨까요? 비슷한 시기의 NBC 뉴스 보도에 따르면 챗GPT는 미네소타주립대에서 치러 진 로스쿨시험마저 거뜬히 통과하는 기염을 토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어렵기로 소문난 의사 시험도 문제가 될 것 같지 않습니다. 최근에 미국 캘리포니아의 의료 스타트업인 앤서블헬스 연구진은 챗GPT가 미국의사면허시험(USMLE)에 응시한 결과 모든 시험에서 50% 이상의 정확도를 보이며 합격가능한 점수를 받았다고 발표했습니다(이상 매일경제 2023월 1월 26일 기사에서 발췌). 물론 아직까지는 언어의 문제점이라든지 여러 가지 한계가 드러났습니다. 하지만 이번에 발표한 모델은 ‘GPT-3.5’ 버전으로서, 향후 한 단계 업그레이드 한 ‘GPT-4.0’가 출시된다고 합니다. 286에서 시작했던 컴퓨터가 얼마나 놀라운 발전을 거듭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단순 컴퓨터와 비교할 수도 없는 인공지능이니, 앞으로 어떻게 얼마만큼 진화할지 상상이 가질 않습니다. 물론 비판적인 시각도 있습니다. 장은수는 한 칼럼(챗GPT와 창의성)에서 독일 철학자 리하르트 프레히트의 『인공 지능의 시대, 인생의 의미』(열린책들 펴냄)의 한 대목을 소개하는데, 인공지능에게 “어떻게 하면 사랑을 잘할 수 있나요?”라고 묻자 “대화 잘하고, 공감 잘하고, 자주 고마움을 표하고, 어려울 때 흔쾌히 도우라”는 식의 다소 지루하게 들리는 답을 내놓았다고 하면서, “틀리지는 않지만 흥미롭지도 않다. 사랑을 잘하려면 무수히 변하는 상황에서 연인의 감정과 기분, 생각과 뜻을 살펴 그때그때 눈치껏 잘해야 한다. 그래서 사랑이 어렵고 피곤하며, 진정한 모든 관계는 사적이다.”라고 썼습니다. 로고스(logos)는 몰라도 인간적인 파토스(pathos)는 어림도 없다는 뜻으로 들립니다. 종교적인 분야에서는 말할 나위도 없겠지요. <크리스채너티투데이> 역시 편집자 발 기사에서 “챗봇은 연구도 할 수 있고, 글도 쓸 수 있으며, 웅변까지도 할 수 있겠지만, 설교는 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러셀 무어, 1월 26일). 마음은 물론 영성은 절대로 갖출 수 없을 거라는 확신들도 많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어떨까요? 지난 신년 첫 날 뉴욕주 햄튼 유대교회당에서 조시 프랭클린이라는 랍비가 메시지를 전한 후 감동을 받았다는 청중들에게 사실은 자신이 아니라 챗봇이 작성한 설교문을 읽었노라고 밝혀서 충격을 선사한 바 있습니다. 최근 챗봇이 썼다는 “선임장로님의 장례식 설교문”은 어떻습니까? “친애하는 여러분, 우리는 지난 30년 동안 이 교회와 지역사회에 많은 것을 바친 사랑하는 선임장로님의 삶과 유산을 축하하기 위해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그의 죽음은 큰 손실이지만 그가 우리 모두에게 미친 영향을 기억하고 적절한 방식으로 그를 기리는 기회이기도 합니다. 그는 이 교회 건축에 헌신했고, 사람들이 예배와 공동체에서 함께 모일 수 있는 장소를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습니다. 그는 항상 자신보다 다른 사람을 우선시했습니다. 그의 친절과 관대함, 교회에 대한 변함없는 헌신은 결코 잊혀지지 않을 것입니다”(최승현). 솔직히 감동적이지 않습니까? 게다가 소수자보호와 같이 사회적으로 민감한 질문을 던지자 “혐오와 차별을 조장할 수 있는 질문에는 답변하지 않습니다”라고 했다 합니다. 무분별한 조롱과 악의적인 댓글 그리고 ‘카더라’ 통신과 ‘아니면 말고’ 식의 논설이 난무하는 인간의 로고스와 파토스와 에토스는 챗봇이 쳐다보지도 못할 그런 지경에 있다고 우리는 과연 자신 있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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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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