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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병학 목사] 견리망의 시대, 절대적 환대 요청
    “환대란 시(詩)적인 행위이다.” 해체주의 철학자 자크 데리다의 말입니다. 데리다는 손님의 이름도 묻지 않고, 보답도 바라지 않으며, 모든 것을 주는 환대를 ‘절대적 환대’라고 불렀습니다. 절대적 환대는 주인이 주체가 되는 ‘초대의 환대’가 아니라, 예상치 않은 방문과 기대치 않은 방문자를 아무 조건 없이 맞이하고 환영하는 ‘방문의 환대’입니다. 데리다는 이렇게 말합니다. “절대적 환대는 도래자(방문자)에게, 마치 그가 구원자나 해방자라도 되듯, 나를 점령하고 내 안에 자리를 잡으라라고 말하는 것이다.” 환대(hospitality)는 라틴어 ‘hospes’에는 주인(host)과 손님(guest), 두 뜻이 동시에 담겨 있습니다. 주인이 손님이고, 손님이 주인이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주인과 손님이 따로 정해진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데리다는 ‘절대적 환대’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적의(敵意)’가 판을 치기 때문입니다. 데리다는 결국 환대로 충만한 세상을 갈망하다, 환대가 사라지는 세상에서 영원한 환대가 가능한 하늘나라로 갔습니다. 지금 시(詩)적인 행위들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시인(詩人)들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환대가 사라지고 각자도생이 판을 칩니다. 전국의 교수들이 선택한 올해의 사자성어는 “이익을 보자 의로움을 망각하다.”라는 뜻의 견리망의(見利忘義)입니다. 「교수신문」은 전국의 대학교수 1,315명을 대상으로 ‘2023년 올해의 사자성어’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 견리망의가 396표(30.1%)로 가장 많은 선택을 받았다고 밝혔습니다. 견리망의는 논어 「헌문편(憲問篇)」에 처음 등장한 견리사의(見利思義)에서 유래합니다. “이로움을 보면 의로움을 생각하라.”라는 말인데, 견리망의는 반대의 뜻입니다. 이러한 견리망의를 잘 보여주는 그림이 있습니다. 19세기 말 러시아 최고의 ‘리얼리즘화가’로 러시아의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시초를 연 선구적인 작가 일리야 레핀(Ilya Yefimovich Repin, 1844-1930)의 <쿠르스크 지방의 종교 행렬>(1880~1883)이라는 그림입니다. 레핀은 톨스토이와 더불어 러시아 국민들이 국보로 여기는 예술가입니다. 세밀화, 인상주의, 성화(聖畵) 등의 다양한 장르로 작품을 남겼습니다. 레핀의 작품에 공통적으로 표현된 세밀한 표정과 찰라의 순간 등을 역동적인 구조로 표현한 작품들을 보면 디지털시대인 현대 화가들이 컴퓨터 그래픽 기술로 그려도 쉽지 않을 만큼 뛰어난 작품입니다. 상황은 ‘쿠르스크의 성모’라는 이콘화를 코레나야 수도원에서 쿠르스크 시내로 옮기는 행사 모습입니다. 행렬에는 이콘화가 실린 화려하게 장식된 꽃가마를 어깨에 얹은 수도사들을 선두로, 농민들, 거지, 장애인을 포함한 수많은 사람이 뒤를 따르고 있고, 경찰부터 군인, 귀족 등 중요 인물들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어느 평론가는 이 그림을 “다양한 러시아 사회의 구성원들이 먼지가 풀풀나는 헐벗은 풍경을 가로질러 불편하게, 하지만 끊임없이 그리고 아무 생각 없이 아무도, 심지어는 화가 자신도 볼 수 없는 미래를 향해 앞으로 나가는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그림”이라고 평합니다. 꽃가마를 진 수도사들은 마치 술 취한 사람들같이 무심하고 흐리멍텅한 표정을 짓고 있습니다. 그림의 한 가운데는 화려한 예복을 입은 사제가 혼자 걸어가는데, 시선은 그림을 보는 관중을 힐끗 바라보면서 손으로 자신의 금발을 넘기고 있습니다. 종교적인 엄숙과는 전혀 상관이 없이 행사가 지루해 죽겠다는 표정입니다. 왼쪽에 말을 타고 있는 경찰 앞으로 수도사들이 손을 마주 잡고 군중들이 가마에 접근하는 것을 막고 있습니다. 맨 앞 수도사는 목발을 집고 있는 장애인이 가마 쪽으로 가는 것을 지팡이로 막고 있습니다. 행렬 중간 중간 꽃가마 뒤쪽에 하얀 유니폼을 입은 기마 군인 하나가 행렬을 방해하는 듯한 사람에게 회초리를 크게 휘두르고 있습니다. 지금 한국교회의 상황을, 아니 이 시대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환대가 사라지고, 시인들이 죽어가고, 이익을 보자 의로움을 망각한 종교인들이 판을 치는 세상입니다. 아기 예수께서 오시는 이 계절에 다시 절대적 환대가 시인들을 부활시키고 참종교인을 회복시키며 견리사의하는 세상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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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3-12-20
  • [이상규 교수의 역사탐색] 호주선교부의 미우라 고아원 출신 김순복 여사2
    호주 장로교의 커를 의사를 따라 진주로 이주하게 된 박순복은 남편 박성애 조사와 함께 커를 의사가 준비한 진주면 성내4동 정경철 씨 소유의 초가에서 거주하게 된다. 이곳이 호주선교부의 첫 거점이 되었고, 바로 이곳에서 교회와 학교를 설립하게 된다. 처음에는 거주지에 주택 한 켠에 서적고를 설치하고 성경 보급을 시작했는데 이것이 시작이 되어 1905년 10월 22일 진주교회가 탄생했다. 이 교회가 진주지방 첫 교회이자 서부경남지방 첫 교회가 된다. 1906년에는 대안면 2동에 8칸의 예배당을 건축하고 이동하였고, 1916년에는 도동면 옥봉리 비봉산 아래에 예배당을 신축하고 이전했는데, 이때부터 옥봉리교회라고 불리게 된다. 이곳에서 커를 의사를 도와 진주지방 첫 근대학교를 설립하게 되는데, 개교식은 1906년 4월 15일 거행되었고, 첫 입학생은 21명이었다. 학교 이름은 안동남학교였다. 설립자 겸 교장은 커를 선교사, 교감은 김경숙, 학감은 박성애, 교사는 안헌이었다. 안헌(安憲, 1886-1946)은 후에 안확(安廓)으로 개명하는데, 후일 그는 마산 창신학교 교사가 된다. 일본에서 유학 한 이후 독립운동에 관여하고, 문명개화론을 주창했던 인물이었다. 또 그는 국문학자이자 역사가로 명성을 얻었다. 이 학교의 교과는 성경, 국어, 산수, 역사, 지리, 한문, 습자, 체조, 창가, 그리고 영어였다. 남학교가 설립된 지 4개월 후인 그해 8월, 커를 선교사 부인 에셀 커를의 주도로 사립 정숙학교라는 이름의 여자학교가 설립되었다. 이때 김순복은 교사기 되었다. 정식 개교식은 9월 3일 거행되었는데 교과목은 성경과 국어, 산수, 역사, 지리, 한문, 습자, 침공(바느질) 등이었다. 학비가 면제되었기 때문에 진주지역 뿐 만 아니라 인근 고성, 산청, 하동 지역에서 오는 학생도 있었다. 이렇게 설립된 안동남학교와 정숙학교는 1909년 2월 통합되어 사립광림학교가 된다. 각종학교로 인가를 받기 위한 조치였다. 비록 학교는 통합하였으나 남자부와 여자부로 나누어 수업했는데, 학급은 심상과(尋常科) 4년, 고등과(高等科) 2년으로 편성하였다. ‘심상 尋常’이라는 말은 평범한 것, 보통의 것이라는 의미인데 일본의 교육제도의 소학교, 곧 초등학교 과정을 의미했다. 1910년 당시 이 광림학교의 교직원은 6명이었고, 학생 정원은 40명이었으나 실제로는 80명 이상 재학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남자부 사립 광림학교는 재정 문제로 1929년 폐교되고, 여자부는 1921년 시원여학교로 개칭되는데 이 학교는 신사참배 문제로 1939년 7월 31일자로 폐교되고 만다. 진주에서 첫 근대의료 기관인 배도병원이 설립된다. 호주장로교 여전도회연합회는 1906년 6월 병원 설립 기금으로 825 파운드를 진주로 보냈고, 커를 의사는 1907년 12월 병원 설립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을 수립하였다. 이렇게 되어 현재의 진주교회 뒤편 삼전아파트 자리에 임시 진료소를 설치하였는데, 이것이 진주지방에서의 병원 설립의 시작이 된다. 이 모든 과정에서 커를의 조사였던 박성애와 부인 김순복 여사가 동역하였다. 1910년 10월에는 병원 건축을 시작하였고, 1913년 11월에는 50개 병상을 갖춘 병원을 설립하게 된다. 이런 학교와 병원 설립의 뒷바라지를 한 이가 김순복 여사였다. 남편 박성애 조사는 1911년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였고, 1915년에는 진주교회 장로가 된다. 1917년에는 신학교를 졸업하고 1919년 1월 목사 안수를 받고 진주교회 첫 담임목사가 된다. 따라서 김순복은 남편을 도와 목회자의 아내로 살게 된다. 그런데 광림학교 교사로 일하던 김순복은 평양을 다녀온 남편 박성애 목사의 주선으로 김 마리아 등이 조직한 ‘대한민국애국부인회’와 ‘대한적십자회’에 가입하여 진주지부 초대 지부장으로 추대되었다. 김순복은 진주지방의 여성동지를 규합하고, 상해임시정부의 독립자금 모금과 항일광복운동과 항일사상을 고취하는 일을 맡았다. 그런데 1919년 11월 28일 서울에서 대한민국애국부인회 활동이 발각되어 전국 조직 지도자들이 모두 체포, 수감되었는데 진주의 김순복도 박보렴, 박덕실(朴德實)꽈 함께 체포되어 대구 지방검사국으로 송치되었다. 이 때의 대한민국애국부인회 활동에 대해서는 「매일신보」 1919년 12월 19일자 등에 보도된 바 있다. 박순복 여사는 목사의 아내로서 민족과 애국, 독립운동에도 관여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남편 박성애 목사가 1920년 창원교회로 이동하게 되자 박손복 또한 창원으로 이동하여 그곳에서 ‘창원여자야학교’를 설립하여 후학 양성에 이바지하였다. 이때의 헌신이 널리 알려져 1922년 8월 8일자 「동아일보」는 ‘박순복 여사의 열정’이라는 기사를 게재하여 그의 봉사를 기념하였다. 이상과 같이 독립운동과 애국운동에 기여한 공로로 김순복 여사는 2021년 3월 1일에 독립유공자 대통령 표창이 추서되었다. 이 처럼 고아 소녀로 성장했으나 호주선교부의 사랑으로 양육을 받았고, 부산과 진주에서 개척자의 길을 가며 하나님의 교회를 위해 헌신했던 김순복 여사는 55세를 일기로 1942년 10월 6일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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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상규교수의 역사탐색
    2023-12-20
  • [소강석칼럼] 국기원에서 태권도를 재발견하다
    얼마 전에, 우리교회에 출석하시는 최규옥 회장님이 점심을 초대하여 갔습니다. 거기는 이수성 전 총리님이나 백성학 회장님 등 여러 고명하신 분들이 함께한 자리였습니다. 식사가 끝나고 함께 자리를 했던 우리교회 협동장로이자 국기원 원장이신 이동섭 장로님이 국기원이 이곳에서 가까우니 잠시 방문을 해 줄 수 있느냐고 하셨습니다. 사실 국기원은 세계 태권도의 메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천주교인들에게는 바티칸이고 기독교인들에게는 예루살렘과도 같은 곳이죠. 차를 타고 정문인 일주문을 지나는데 태권도의 위엄이 벌써부터 느껴지기 시작했습니다. 이 국기원은 김운용 초대 원장에 의해 1971년 겨울 강남의 언덕배기에 기공식으로 시작된 곳인데요. 본관은 한옥의 멋과 풍류를 고스란히 반영한 건물이었습니다. 특별히 청와대를 본떠서 지붕이 청기와로 덮여 있었습니다. 본관 앞에 도착하니 210개국의 국기가 걸려 있었습니다. 그 210개국의 2억 명이 넘게 태권도 수련을 하였고, 1100만 명 이상의 유단자와 20만 명 이상의 사범이 배출되었다는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나라는 태권도를 통해서 210여개국 이상에 정신적, 무도적 영향을 미치고 지배를 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동섭 국기원 원장님의 안내로 박물관 관람부터 하였습니다. 그곳에는 2천 6백여 점의 자료가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국내와 세계의 주요 대회에서 시상한 우승컵, 상장, 메달, 우승기 등이 진열되어 있었습니다. 이동섭 장로님은 “목사님이 지금까지 몰라서 그렇지, 국기원 원장 자리는 가톨릭으로 말하자면 교황과 같은 자리입니다. 그러므로 저야말로 태권도의 교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말을 듣자, 저는 교회에서 늘상 보던 장로님과 국기원에서의 장로님이 사뭇 다르게 보였습니다. 참으로 엄청난 거인 앞에 제가 서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장로님은 국기원 원장실로 저를 안내하시더니 먼저 기도부터 해달라고 부탁하셨습니다. 저의 기도가 마치자, 장로님께서는 태권도의 C.I.를 비롯해 수련의 목적을 설명하였습니다. “태권도는 단순히 무술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심신 수련과 인성교육에 더 큰 역점을 두고 있습니다. 수련 과정에서 쌓이는 정신 수양은 인의와 예의, 관용과 생명, 인격, 인내력과 의협심을 가져다주고 덕을 가져다줄 뿐만 아니라 인격을 완성하게 해줍니다.” 이런 태권도의 황제인 이동섭 장로님이 20대 국회의원으로 계실 적에 국회의원 225명의 서명을 받아 태권도를 대한민국의 국기로 지정하는 법을 만드셨습니다. 한마디로 국기 태권도를 법제화한 것이죠. 왜 그것이 그렇게 중요하냐면, 중국이 태권도의 동북공정을 할 뿐만 아니라 일본은 올림픽 경기에서 태권도를 제외시키고 가라테로 교체하려고 하는 시점에서 국기 태권도법을 입법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 위대한 거인을 옆에 두고도 저는 이제야 거인을 다시 볼 수 있었습니다. “아, 내가 왜 국기원을 방문하지 않았던가. 진작 국기원을 방문하였을 걸...” 국기원 수련장을 둘러보니 전국에서 모인 수련생들이 대련(시합)을 하고 있었습니다. 순간 저의 어린 시절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습니다. 저는 어린 시절 워낙 시골 깡촌에서 자라서 태권도 도장에는 한 번도 못 가보고 학교 운동장에서 태권도를 배웠습니다. 빨간 띠까지는 읍내에 있는 관장님이 학교로 오셔서 심사를 하였습니다. 저는 품새도 잘했을 뿐만 아니라 대련에서 누구에게 한 번도 져본 적이 없었습니다. 드디어 검은 띠를 딸 때가 되었습니다. 사범님으로부터 예비심사에 합격을 하고 읍내에 가서 관장님 앞에 심사만 받으면 검은 띠를 딸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유단자가 되려면 그때 당시 심사비를 꽤 많이 냈던 것 같습니다. 그 이유로 어머니가 절대로 유단증을 못 받게 하였습니다. “검은띠는 큰 형으로도 족하다. 너는 어딜 가나 누구에게도 안 맞고 다니지 않느냐. 태권도만 잘하면 되지 검은띠가 무슨 필요가 있느냐. 너까지 검은 띠를 따게 해 줄 수는 없다.” 그래서 저는 실질적으로는 유단자였지만 심사를 못 봐서 검은띠를 못 땄습니다. 그러나 지금 돌이켜보면 제가 죽기 살기로 도전을 했더라면 뭘 못했겠습니까? 제가 마당에 엎어져서 뒹굴고 엉엉 울어댔으면 어머니도 어찌하셨겠습니까? 그러나 저는 태권도 말고도 돈이 들어가지 않는 백일장 대회나 웅변대회에 가서 상을 받아오는 것으로만 만족을 해야 했습니다. 그런 제가 국기원에서 공인 9단이요, 세계 태권도의 교황 앞에 서서 제 자신을 바라보니 너무나 작아지는 느낌이었습니다. 특별히 옛날에는 안 맞고 다니고 싸움을 잘하기 위해서만 배우려고 했던 태권도가 심신 수련과 인성교육, 덕과 인격 완성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우리의 국기인 태권도가 새삼스럽게 위대하고 자랑스럽게 느껴졌습니다. 태권V 이동섭 국기원 원장님이 더 거인으로 보였고, 이제는 옛날에 배웠던 태권도를 복습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심신 수련과 덕과 인격 완성의 과정을 삼아볼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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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2-01
  • [성서연구] 혼란 시대의 그리스도인
    5 유대 왕 헤롯 때에 아비야 반열에 제사장 한 사람이 있었으니 이름은 사가랴요 그의 아내는 아론의 자손이니 이름은 엘리사벳이라 6 이 두 사람이 하나님 앞에 의인이니 주의 모든 계명과 규례대로 흠이 없이 행하더라 7 엘리사벳이 잉태를 못하므로 그들에게 자식이 없고 두 사람의 나이가 많더라 요즘 우리 기독교인들은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현실에 당황하고 있습니다. 코로나 19만 겪어보지 못한 일이 아니라, 한국교회의 현실 또한 겪어보지 못한 일입니다. 교세가 감소하고, 신학생이 줄어들고, 한국교회의 목소리가 대한민국 사회에서 먹혀들지 않고, 소수로 전락하는 일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1960년대 이후 한국교회는 세계가 주목할 정도로 급성장했고, 대형교회가 가장 많은 나라가 되었습니다. 한국교회는 힘이 있었고, 대한민국 사회의 여론 지도층 대부분이 기독교인이었습니다. 이런 데 익숙한 우리에게 오늘의 찬 바람 부는 현실은 겪어보지 못한 어색하고 힘든 상황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기독교인들은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요? 우리는 먼저 생각부터 바꿔야 합니다. 그것은 교회와 성도는 본래 소수였음을 상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겨우 열두 제자를 부르신 이후 예수님을 따르는 참 성도는 늘 소수였습니다. 기독교 국가이던 중세 유럽에서도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중생한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소수였습니다. 우리나라도 복음이 들어온 초기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기독교가 다수였던 적은 없었습니다. 단지 힘이 좀 있다 보니 다수인 듯 착각했을 뿐입니다. 본래 믿음의 선배들은 불신앙의 거대한 세상에 에워싸여 고난을 받았습니다. 그러면서도 믿음의 정절을 굽히지 않고 그리스도인답게 꿋꿋이 살았습니다. 그게 우리 선배들이 혼란 시대를 살아가는 방식이었습니다. 이런 면에서 사가랴와 엘리사벳은 좋은 모델입니다. 누가복음 1장 5절은 <유대 왕 헤롯 때에 아비야 반열에 제사장 한 사람이 있었으니 이름은 사가랴요 그의 아내는 아론의 자손이니 이름은 엘리사벳이라>고 두 사람을 소개합니다. 눈길을 끄는 것은 <유대 왕 헤롯 때에>라는 구절입니다. 이것을 각색한다면 <더 악할 수 없을 정도로 악한 세상에서>라고 하겠습니다. 헤롯은 로마와의 인연으로 분봉왕이 되어 유대를 다스린 에돔 출신의 광포한 사람이었는데, 아내들과 친아들들을 죽였을 정도로 악했습니다. 헤롯에게 베들레헴의 아기들을 죽이는 것쯤은 일도 아니었습니다. 사가랴 부부는 로마의 식민지요, 헤롯 같은 악한이 다스리는 시대에 살았습니다. 게다가 인간적으로 낙도 없었습니다. 누가복음 1장 7절은 <엘리사벳이 잉태를 못하므로 그들에게 자식이 없고 두 사람의 나이가 많더라>고 했습니다. 세상이 악해도 자녀가 있다면 낙이 있을 텐데, 이들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삶은 놀라웠습니다. 누가복음 1장 6절은 <이 두 사람이 하나님 앞에 의인이니 주의 모든 계명과 규례대로 흠이 없이 행하더라>고 되어있습니다. 사가랴 부부는 헤롯 왕이라는 눈앞의 권력자가 아닌, 하나님께 맞춰 살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 의인이었습니다. 더구나 주의 계명과 규례대로 고집스럽게 흠 없이 살았습니다. 세상이 악해도 그들은 그들의 믿음의 외길을 걸었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이렇게 산 끝에 세례 요한을 낳았습니다. 앨런 크라이더는 『초기교회와 인내의 발효』에서 로마 시대의 초기교회가 로마 전역으로 확산된 비결은 어려운 핍박의 상황에서도 묵묵히 인내한 것과, 세상의 조롱을 받으면서도 말씀에 따라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고집한 데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 모습에 감동된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고 설명했습니다. 오늘 우리의 해결책은 여기 있습니다. 세상의 편법을 따르지 말고, 하나님만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 맞춰야 합니다. 그리고 묵묵히 그리스도인답게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지켜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시간이 걸리겠지만, 하나님의 뜻이 우리를 통해 이루어질 것입니다. 고독하고 힘들지만, 묵묵히 믿음의 길을 걸어가길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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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2-01
  • [시사칼럼] 타락한 지도자들, 빛과 같은 백성들
    총체적 난국이란 말이 있습니다. 사방이 어려운 국면에 빠져 타개할 길이 보이지 않고 해결할 실마리를 찾을 수 없는 상황을 가리킵니다. 하마스와 전쟁 중에 있는 예루살렘을 보십시오. 지금도 그러하지만 그 옛날도 예루살렘은 총체적 난국에 빠져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이 어떤 곳입니까? 평화의 도성인 동시에 하나님의 성전이 자리 잡고 있던 거룩한 땅이었습니다. 그런데 선지자들이 전하는 예루살렘의 모습을 보십시오. “패역하고 더러운 곳, 포학한 그 성읍이 화 있을진저”(습 3:1). 패역이란 하나님을 향한 교만과 불순종을, 더럽다는 말은 도덕적 타락을, 포학하다 함은 정의와 인자의 실종을 의미합니다. 한 개인의 편견이 아니었습니다. 예레미야도 “그 성중에 오직 포학한 것뿐이니라”(렘 6:6)라고 증언했습니다. 도대체 왜 이런 일이 생겼을까요? 결정적인 이유가 등장합니다. “방백들은 사자요, 재판장들은 이리요, 선지자들은 간사하며, 제사장들은 성소와 율법을 범했다”(3-4절)고 합니다. 한 마디로, 당시 지도자들이 완전히 부패하고 타락해버렸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도 “선지자와 제사장이 다 사악하여 내 집에서도 악이 가득하구나”라는 하나님 말씀을 전했습니다(렘 23:11). 역시 동시대에 활동했던 에스겔 또한 “제사장들이 불법을 범하고 사람들의 눈을 가리워 하나님께서 더럽힘을 당한다”고 고발하고 있습니다(겔 22:26). 결국 예루살렘에 “화 있을진저”라는 신탁(Woe Oracle)이 붙었습니다. 선지서에 자주 등장하는 이 문구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고 대적하는 이민족을 향해 주께서 분노에 차서 선포하던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나 총체적 난국 가운데 한 줄기 빛이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 계시는 여호와는 의로우사 불의를 행하지 아니하시고 아침마다 빠짐없이 자기의 공의를 비추시거늘..”(습 3:5). 그렇습니다. 사방이 캄캄한 어둠뿐이라 해도 언제나 한 줄기 빛이 존재합니다. “아침마다 비추시는 하나님의 빛”입니다. 말라기 선지자도 선포하지 않았습니까?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공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비추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말 4:2). 총체적 난국에 처했더라도 우리는 이사야처럼 이 빛을 기다리고 바라봐야 합니다(사 8:17). <바보 예수>로 유명한 서울대 명예교수요 가좌대 석좌교수인 ‘김병종’ 화백이란 분이 있습니다. 서초동 사랑의교회 지하 4층 예배당 벽면에는 그가 그린 55미터의 대형 그림이 벽면을 가득 메우고 있습니다. 원래 작품 이름은 “바람이 임의로 불 때-송화분분”이지만 교회 측에서는 그림을 ‘기도와 묵상의 길’이라 부릅니다. 김 교수의 고백입니다. “사람들이 버스나 지하철에서 내려 우르르 예배당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창조주를 예배하러 가기 위해 옷깃을 여밀만한 준비와 여유 공간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옛날 어머니와 손잡고 들길을 걸어 교회에 갔던 일을 떠올리며 제작했습니다.” 성경은 주께서 아침마다 빛을 어김없이 비추신다 말합니다. 하지만 끝내 외면하는 자들이 존재합니다. 반면 그 빛을 찾아가는 그림 속 모자(母子) 같은 이들도 있습니다. 선지자는 그들을 “겸손한 자들”(2:3) 혹은 “유다 족속의 남은 자”(2:7)나 “나의 남은 백성”(2:9) 내지 “곤고하고 가난한 백성”(3:12) 또는 “시온의 딸, 예루살렘의 딸”(3:14)이라고 불렀습니다. 지도자들이 타락하고 그 때문에 한 사회가 총체적 난국에 빠져도, 결국은 이런 사람들이 빛이 되는 법입니다. 최근 한 지역방송국에서 제작한 다큐멘터리 한 편이 뒤늦게 입소문을 타며 화제몰이 중에 있습니다. 진주에서 평생 한약방을 운영하던 분 이야기인데, 그분 이름을 딴 제목이 “어른 김장하”입니다. 그는 모은 재산으로 학교를 세우고 사회에 기증했고 장학금을 주며 어려운 이웃을 돌보고 살폈습니다. 젊은 감독은 선생의 모습을 취재하며 감탄한 나머지 “살아 움직이는 사회보장제도”라는 격찬을 남깁니다. 하지만 본인은 소문내지 않고 너무나 검소하게 살아왔습니다. 그렇게 후원 받은 사람들 중에 헌법재판관도 나오고 의사도 나오고 했다 합니다. 그런데 방송 중에 한 사람이 “선생님 장학금을 받고도 특별한 인물이 못 되어 죄송합니다.” 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그 때 어른의 대답에 깊은 울림이 있었습니다. “그런 걸 바란 게 아니야. 그리고 우리 사회는 평범한 사람들이 지탱하고 있는 거야.” 우리 지도자들을 보면 한숨만 나올 때가 많습니다. 정치인들만큼이나 성직자들도 부패하고 타락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거룩함을 소중히 여기고 겸손할 줄 아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둠 속에서도 빛을 기다리며 묵묵하게 살아가는, 온통 혼탁하고 세속적인 분위기 가운데에서도 신을 경외하며 그 교훈을 소중하게 여기며 살아가는, 어떤 상황 속에서도 끝까지 하나님의 선하심을 소망으로 삼고 살아가는, 비록 유명하지 않아도 영향력이 없어 보여도 한 줄기 빛과 같은 평범한 인생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아직 희망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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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2-01
  • [은혜의말씀] 무화과 나무가 마르다(막 11:12-14)
    베다니에서 하룻밤을 보내신 예수님은 이른 아침, 다시 예루살렘으로 들어오십니다. 그런데 배가 좀 고프셨나 봅니다. 멀리 무화과나무 잎사귀가 풍성한 것을 보시고는, 열매를 얻을까 하여 가까이 가십니다. 그런데 잎사귀만 무성하지 아무런 열매가 없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그 나무를 저주하십니다. “이제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먹지 못하리라” 오늘 본문은 좀 이해하기 힘지요? 이 본문은, 이스라엘의 대표적 나무인 무화과나무에 대해 좀더 자세히 알 필요가 있습니다. 무화과나무의 본격적인 수확기는 6월에서 7월입니다. 그러나 나무에 따라서는 좀 이른 시기인 3-4월에 열매를 맺기도 하고, 반대로 좀 늦은 시기인 9-10월에 열매를 맺기도 합니다. 그리고 무화과나무는 열매가 먼저 맺히고, 잎은 나중에 무성해집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길을 가시다가 잎이 무성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열매를 구하러 다가가신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나무를 저주까지 할 필요는 있느냐 하는 의문이 생깁니다. 예수님이 나무를 저주하시는 것은 하나의 ‘상징적인 행위’입니다. 바로 허울뿐인 이스라엘 백성들의 잘못된 신앙을 책망하시는 것입니다. 지금 이스라엘의 신앙이 잎만 무성하고, 열매는 하나도 없는 껍데기 신앙과 같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자, 우리가 무화과나무를 통해서 배워야되는 교훈은 이것입니다. 1. 잎만 무성하고 열매는 없는 껍데기 신앙 – 종교 외형주의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당시 바리새인의 모습을 연상케 합니다. 그들은 겉으로 보면 대단했습니다. 종교적 열심은 타의 추종을 불허합니다. 그러나 실상은 껍데기만 그럴듯하게 포장을 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보다 사람을 더 의식했습니다. 자, 오늘 우리도 마찬가집니다. 보여지는 것에 신경을 쓰고, 사람들의 시선에는 집중하지만, 하나님과의 영적인 관계가 멀어져 있다면, 잎만 무성하고 열매는 없는 신앙입니다. 입술로는 ‘주여, 주여’ 하는데, 행동은 도무지 주님의 뜻과는 관련이 없다면, 그게 열매 없는 허울뿐인 신앙, 종교의 외형주의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신앙은 어떻습니까? 혹시 바깥으로 기울어져 있지 않습니까? 저는 여러분의 신앙이, 외형이 아닌 내면이 단단하고 꽉 차 있는 진짜 신앙이 되시길 축복합니다. 2. 무화과나무를 통해서 배우는 교훈은 - 예수님은 우리 삶에 열매를 찾으신다는 것입니다. 무화과나무는 꼭 한 가지 목적을 위해서 존재합니다. 바로 열매입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 삶에 정직과 신실함과 의의 열매가 풍성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 삶이 예수 향기를 나타내는 거룩한 열매가 풍성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면, 어떻게 열매를 맺습니까? 아니, 왜? 열매를 맺지 못할까요? 가장 중요한 첫 번째 이유는, 주님에 대한 신뢰가 없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의심하지 않고, 그분을 온전히 신뢰하는 것입니다. 기적을 믿는 게 아니라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두 번째 이유는, 기도가 없기 때문이다. 기도가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엎드리는 순간, 기도하는 순간, 살아계신 주님의 능력이 임할 줄 믿습니다. 열심히 기도하는데도, 기도 응답의 경험이 없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의 기도가 막혔는지도 모릅니다. 인간관계의 갈등입니다. 내 마음속에 이웃을 향해서 미움이 있다면, 그것이 기도를 막는 것입니다. 용서는 하나님의 중요한 성품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용서해주셨습니다. 복음의 한가운데는 용서가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도, 한없이 하나님의 용서를 받으며 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나도 용서를 실천해야 합니다. 모든 성도님들이, 세상 속에서 날마다의 삶이 거룩한 예배가 되도록 하시길 축복합니다. 세상 속에서 거룩하게 살므로, 풍성한 열매를 맺으며 살 수 있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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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2-01
  • [교회음악칼럼] 찬송(예배)하며 사는 사람들 9
    미국에서 살 때 아들의 성화에 못 이겨 런닝머신을 들여 놓았다. 그것만 있으면 살을 뺄 수 있다는 것이다.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살도 못 빼고 머신은 장식품으로 전락했다. 운동을 하면서 느낀 것인데 억지로라도 운동을 하기 위해 머신에 올라갔을 때 제일 힘든 점은 지루함이다. 절박함이나 목표가 없어서이기도 하지만 좁은 실내공간에서의 운동은 답답하기까지 했다. 비겁한 변명이긴 하지만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미있는 것을 발견했다. 30분정도 걸으니까 몸이 데워지고 근육과 관절이 부드러워 지면서 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이 지루한 30분이 문제였다. 이것을 극복할 수만 있다면 지속적인 운동이 가능하겠구나 생각하게 되었다. 우리가 무엇인가는 시작하면 얼마가지 않아 어려움에 봉착할 때가 있다. 나의 전공인 음악분야를 예를 들면 아이들이 피아노를 시작하게 되면 바이엘이라는 교본으로 시작을 하는데 반쯤 진도가 나가면 힘들어 하면서 하기 싫어하는 것을 보게 된다. 나름 힘든 장애물을 만난 것이다. 이 고비를 넘기지 못하면 포기하게 된다. 상당한 수준의 경지에 이르기까지 이와 같은 어렵고 힘든 고비를 수도 없이 견디고 넘어야한다. 쉽지 않은 일이지만 이겨내야만 목표한 바를 이룰 수 있는 것이다. 성악도 가르쳐 보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짧은 시간에 결과를 얻고자 한다. 바꾸어 말하면 길게 인내하며 지속적으로 오래하기를 원치 않는 것이다. 세상에 어떤 열매도 지난한 고난의 시간을 견뎌내지 않고 얻을 수 없다. 어디 이뿐이겠는가 우리가 삶을 살아가는 모든 여정가운데 이것은 늘 경험해 온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즉 지속적이고 꾸준함이란 참으로 고통스럽고 힘든 것임에 틀림이 없는 것 같다. 우리의 신앙생활을 돌아봐도 능히 느낄 수 있다.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 푯대를 향한 우리의 걸음이 바르고 꾸준하였는지, 어렵고 힘들어서 주저앉아 걷기를 포기한 적은 없었는지, 또 지금 나는 인내하고 참으며 지속적으로 푯대를 향한 걸음을 계속하고 있는지, 아니면 안개 속에 길을 읽고 헤매고 있지는 않은지 한번쯤 돌아보며 점검해 봤으면 좋겠다. 시대의, 세월의 흐름에 맡기고 살아도 될 만한 세상이 아닌 거 같다. 찬송과 예배가 강력하게 살아나서 힘들고, 악하고, 유혹이 많은 이 땅위를 살아가는 동안 우리가 소망하는 푯대를 향한 걸음에 멈춤이 없고 변함없는 꾸준함으로 쉼 없이 걸어갈 수 있기를 기도하며 하루하루 주님을 향한 사랑과 감사의 노래가 우리 입술을 통해 끊임없이 고백되고 선포되어지기를 소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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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2-01
  • [좌충우돌 크리스천 자녀 양육기] 책맹인류 시대에 책 읽는 아이들로 양육하기(2)
    “얘들아, 각자 읽을 책 한 권씩 가지고 와” 엄마의 말이 끝나자 마자 저마다 읽고 싶었던 책을 집어옵니다. 집에 있는 책이 정해져있기에 그 책이 그 책이고, 어제 읽은 책이 오늘 읽을 그 책이지만 그래도 아이들은 뭐든 골라서 자리에 앉습니다. 한 손에는 맛있는 간식을 입으로 넣고, 또 한 손으로는 책장을 넘기며 눈을 책에서 떼지 못하고 흥미로운 시간을 보냅니다. 어느날 저녁, 저희 아이들의 모습입니다. 이제는 제법 책읽기의 즐거움, 글 속에서 만나는 신나는 세상에 대해 알아가는 듯 보입니다. 여전히 “엄마, 나는 만화책 보고 싶어요. 만화책 딱 한 권만 보면 안될까요?”라며 글이 많은 책보다는 그림 위주의 책을 선호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만화책 비율보다 글 책을 고르는 비율이 계속 늘고 있는 것을 보면 희망적입니다. 물론, 우리 아이들이 처음부터 아주 원활하고 즐겁게 저녁 시간을 책으로 보내지는 않았습니다. 오랜 시간 시행착오를 겪었고, 아이들과 함께 매일 매일 책에 대해 이야기하고, 책과 친근해지기 위해 서점에도 자주 가는 등 시간을 쏟고, 의지를 들여서 이제 조금 자연스럽게 책과 보내는 시간이 많아졌습니다. 먼저, 우리집에는 없는 것이 있습니다. 그 중 첫 번째는 텔레비전과 아이들 소유의 스마트기기입니다(큰 아이가 중학교 3학년인데, 중학교 1학년 때 처음 핸드폰을 사주었습니다). 텔레비전과 스마트기기가 없다는 것은 요즘 아이들의 표현을 빌리자면 ‘놀 게 없다. 할 일이 없다’는 것과 같습니다. 맞습니다. 우리 아이들은 학교를 마치고 집에 오면 딱히 할 일이 없습니다. 때로는 자기들끼리 놀고 싸우고 먹고 울고 그러다 또 놀고 싸우고를 반복하고, 또 때로는 뒹굴뒹굴 거리며 엄마가 주는 간식만 기다리고 있습니다. 할 게 없으니 집에 있는 것으로 뭐라도 해야겠지요? 그래서 거실 한 편에 빼곡히 꽂혀있는 책을 펴고 긴 시간을 보내는 방법을 차츰 배웠습니다. 아이들이 심심하다 그러고, 학교 친구들이 대부분 유튜브를 보니까 자기들도 보여달라고 항의하는 등 고비가 있었지만, 영상물에 대한 원칙, 핸드폰에 대한 원칙을 가지고 있었기에 우리집에서는 ‘텔레비전과 스마트기기는 없다’고 필요할 때마다 설명했고, 오래 시간이 지나 가랑비에 옷이 젖듯, 아이들은 받아들이며 심심할 때 무엇을 해야 할지, 책을 통해 어떤 즐거움을 얻을 수 있는 지 조금씩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엄마, 서점가요” “온라인서점에서 이 책 사주세요” 등 책을 사고 읽는 것이 생활의 일부가 되었습니다. 텔레비전과 스마트기기를 버리고 책 읽기의 즐거움을 얻었습니다. 대신, 우리집에는 있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독서 후 나눔입니다. 저는 우리 아이들이 무슨 책을 읽는 지 거의 다 압니다. 왜냐하면, 제가 읽어보고(혹은 줄거리를 보고) 괜찮은 책을 사주거나 아니면 아이들 책을 사준 후 나도 꼭 읽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에게 책을 읽으라고 한 후 그 책 내용을 엄마가 모르고 있다면 독후 이야기 및 활동을 할 수 없기에 저도 아이들과 책을 꼭 읽습니다. 아이들과 책을 읽고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아이들이 책 읽는 방법을 스스로 터득함을 알 수 있습니다. “엄마, 나는 이 책에서 이런 것을 새로 알았어요” 책을 통해 지식이나 정보를 습득하는 법. “엄마, 이 책 주인공은 너무 불쌍해요. 친구들 때문에 얼마나 마음이 아팠을까?” 책을 통해 다양한 감정을 느끼는 법. “엄마, 이 책은 딱 내 이야기인 것 같아요. 진짜 웃겨요.” 책을 통해 공감하는 법. 굳이 아이들에게 가르치지 않아도 책을 읽는 순간, 뇌에서 모든 활동이 이뤄져 지식, 정서 등을 채워가는 것을 볼 때 책 읽기가 얼마나 중요한 지 다시 한 번 깨닫습니다. 책맹인류 시대에 책 읽는 아이들로 양육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엄마가 포기해야 할 것, 버려야 할 것이 있고 반면 세워야 할 것, 지켜야 할 것, 가르쳐야 할 것 또한 만만치 않기 때문입니다. 이 과정이 농부가 1년 농사를 짓는 것처럼 시간과 정성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포기할 수 없기에 부모가 먼저 책읽기의 중요성을 마음에 새기고 나의 자녀들과 함께 실천해 나가길 바랍니다. 부모가 책읽기의 즐거움을 보이면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책과 친해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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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좌충우돌 크리스천 자녀 양육기
    2023-12-01
  • [신앙교육나침반] All Generation 복음놀이 리부트 50
    현대인들에게 세대 담론이 뜨겁습니다. 갈수록 세대와 세대 간에 선명한 차이가 두드러지게 나타나기 때문일 것입니다. 출생 연도별로 세대를 지칭하는 이름들이 다양해진 것을 보면, 세대 간의 격차가 얼마나 큰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확신합니다. 세대 간의 격차가 아무리 극명해도, 이들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절대적인 가치는 복음입니다. 더욱이 온 세대를 향한 복음이 “놀이”를 통해 경험된다면, 복음은 조금의 틈새도 없이 전 세대를 그리스도의 한 몸이 되도록 할 것입니다. 향기나무 사람들은 이러한 비전을 품고 코로나로 인한 팬데믹 3년 동안 “온 세대를 위한 복음놀이”를 쉼 없이 개발하였습니다. 목마르고 배고픈 자녀를 배부르게 하고픈 부모의 마음으로 고립된 곳, 소외된 곳, 아픈 곳에 복음놀이를 열심히 전파하였습니다. 감사하게도, 현재 많은 교회와 가정이 성경 놀이터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마주하며 놀이하는 것이 일상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리부트(reboot)란 컴퓨터에서 사용자의 실수나 프로그램의 오류로 시스템이 가동되지 않을 경우에, 실행중인 시스템을 의도적으로 다시 시작하는 작업을 의미합니다. 모든 세대를 위한 《복음놀이 리부트 50》은 지금까지의 언어적이고 인지 중심적인 복음 전달 방식에서 탈피해, 온 세대 놀이를 통해 복음을 경험하는 새로운 교육 방식으로 교회와 가정의 신앙교육 현장을 재가동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복음놀이 리부트 50》은 가정예배를 리부트합니다. 이 책을 만난 부모들은 자녀들에게 복음을 일방적으로 주입하지 않고, 자녀와 함께 복음놀이를 통해 복음을 즐겁고 역동적으로 경험하면서 신앙을 전수하게 될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지루하고 힘들었을 가정예배가 온 세대의 가족 구성원 모두에게 매력적이며 실제적인 복음으로 경험될 것입니다. 《복음놀이 리부트 50》은 세대통합 사역을 리부트합니다. 이 책을 통해 교회는 부모 세대와 자녀 세대를 분리하는 사역을 본질로 삼는 것을 멈추고, 온 세대가 한 몸이 되어 예배하고 복음을 경험하는 사역이 본질이 되도록 세워갈 것입니다. 온 세대가 함께 복음을 받아들이고 경험하면서, 부모로부터 자녀 세대로의 신앙의 전수가 활성화되며 교회와 가정이 복음 안에서 하나가 될 것입니다. 특히 이 책은 무기력하고 수동적인 1세대들의 내면에 숨겨진 불꽃이 다시 뜨겁게 살아나도록 도울 것입니다. 《복음놀이 리부트 50》은 선교 사역을 리부트합니다. 이 책을 만난 디아스포라 한인교회와 선교지는 언어와 문화가 다른 민족에게 다양한 복음놀이를 통해 복음을 전파하게 될 것입니다. 세계 모든 열방이 복음놀이를 통해 복음을 훨씬 더 매력적이고 강력히 경험할 것입니다. 본서는 올해 연말에 교회와 가정을 리부트할 수 있는 귀한 복음의 도구로 출간될 예정입니다. 많은 기도와 성원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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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앙교육 나침반
    2023-12-01
  • [다음세대칼럼] 사랑하다가 지치지 맙시다
    어제 카톡에 익숙한 이름이 생일이라는 알림이 있었습니다. 바로 둥지청소년회복센터를 시작하는 계기가 된 아영(가명)이였습니다. “생일 축하”라는 간단한 톡을 남겼는데 조금 뒤 그 아영이로부터 이른 아침 출근하고 있다며 전화가 왔습니다. 너무 기특하여 작은 선물을 해줄테니 원하는 것을 말하라고 하자 한참 생각하더니 아웃백쿠폰을 원하는 것입니다. 사실 이 아영이와 저는 아웃백과 관련한 사연이 있습니다. 당시 저는 각 청소년회복센터를 정기적으로 방문하여 식사와 멘토링을 해오고 있었습니다. 그때 어느 여자청소년회복센터를 방문하여 함께 시간을 가지던 중 많은 아이들 가운데 유독 밝은 얼굴로 눈에 띄는 아이가 있었는데 바로 아영이입니다. 중학교 3학년 나이였던 아영이는 워낙 가정환경이 좋지 않아 학업을 중단한 채 가출을 반복하다가 재판을 받아 그 센터에서 생활 중이었는데 볼 때마다 마음이 쓰였습니다. 마침 그때도 아영이의 생일이라 스테이크가 먹고 싶다고 하여 근처 아웃백에서 특별한 식사로 함께 했습니다. “너 스테이크 좋아하니?” “아니요” “스테이크가 먹고 싶다며..” “저 오늘 스테이크 처음 먹어요” “........” “근데 대패삽겹살이 더 맛있는 것 같아요 ㅎㅎㅎ” “어쨌든 남은 센터 생활 잘 하거라” “예. 당연하죠” 그렇게 약속했던 아영이는 그 길로 센터에 복귀하지 않고 이탈하여 저의 마음이 무너지게 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다시 복귀하여 센터를 퇴소했지만, 결국 가정환경의 문제로 다시 길거리를 방황하던 아영이는 보호관찰 위반으로 다시 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런 딱한 상황에 판사님의 배려로 아영이를 위한 임시거처를 마련하였습니다. 한 지인이 자신 소유의 아파트를 임대로 세입자를 찾고 있어 비어 있는 기간에 임시로 사용키로 한 것입니다. 매월 관리비와 운영비의 부담을 느끼던 차에 아이는 다시 사고를 치는 반복된 문제로 결국 10호 처분을 받고 2년간 소년원을 가게 되었습니다. 열악한 환경의 아이들들이 결국 재판을 받고 소년원을 갈 수 밖에 없는 아쉽고 안타까운 마음에 직접 청소년회복센터를 운영하기로 하고 둥지를 시작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너 이제 몇 살이냐?” “27살요” “정말???” “저 요즘 피부미용샵에서 일하고 있어요” “그래. 올해 안에 꼭 보자” “예. 꼭 놀러갈게요” “근데 아웃백은 왜? 나는 너 때문에 아웃백 트라우마가 있는데 ㅎㅎ. 또 먹고 어디 도망가려고?” “저 사실 그 날 이후로 스테이크 먹어본 적 없어요” “그런데 왜 갑자기 스테이크?” “그냥요” 그리고 우리의 대회는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습니다. 아마도 제게는 누군가의 ‘잘해줘봐야 소용없다’는 말처럼 트라우마가 될 스테이크지만, 아영이에게는 추억의 그리움이 있는 음식이고 단어인가 봅니다. 이렇게 한 번의 베풂과 사랑이 아이들에게는 좋은 추억이 되는 것을 확인하며 힘을 얻는 날이었습니다. “야영아! 잘 살아라. 네가 잘 살아야 내가 살아온 날들이 그리고 지금 하는 일이 의미가 있지. 알겠지?” “당연하죠. 저 그때 생각하면서 잘 살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그래 고맙다” 계속 아이들을 위한 든든한 나무가 되어야겠습니다. 힘든 아이들의 나무그늘 같은 존재이고 싶습니다. 비바람치고 태풍이 몰아쳐서 버텨내는 나무가 되도록 기도부탁드립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갈 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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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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