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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좌충우돌 크리스천 자녀 양육기] “어마, 나느 왜 마르 모태”(1)
    쉽게 열지 못하는 상자가 있다. 손에 닿는 곳에 있고, 언젠가 한 번은 열어야 하는데 머뭇머뭇 거리며 용기를 내지 못해 마음만 졸이며 만져보지 못하는 상자. 예전에 텔레비전에서 암에 걸린 환자를 인터뷰한 내용을 본 적이 있는데, 그 환자의 말이 참 인상적이었다. 암 진단을 받기 전에 분명 몸에 이상이 있었단다. 평소와 달리 쉽게 지치고, 소화는 계속 안되고… 이런 생활을 꽤 했었는데 병원을 쉽게 갈 수가 없었단다. 예상하고 있던 대로 암이라고 판정받을까봐. 이미 몸은 이상 신호를 보내고 어디에 빨간 불이 켜졌다는 것을 끊임없이 소리치고 있었지만, 막상 그 사실을 확정받는다고 생각하니 두렵고 무서워 병원에 갈 수가 없었단다. 그 이야기를 들으며 100% 같을 수는 없지만, 그 마음이 무엇인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우리집 막내는 어렸을 때부터 또래에 비해 머리 하나가 더 있을 정도로 키가 컸다. 키가 클뿐만 아니라 공놀이도 잘하고 친구들과 달리기를 하면 늘 큰 차이를 두고 먼저 들어오곤 했다. 4살 때 간 어린이집 선생님의 말에 의하면 유아체육시간에는 독보적인 활동량을 보이며 두각을 나타낸다고 한다. 그런데, 큰 키에 비례해 말도 또박또박 하면 좋으련만, 말은 2살 아기와 비슷하게 했다. 막내 은샘이가 5살이 되었을 때이다. 새학기가 되면 어린이집 적응기간이라 일정 시간 부모와 함께 어린이집에 있어야 했다. 그 때 반에서 또래 친구와 은샘이가 노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는데, 어떤 야무져 보이는 여자 아이가 은샘이에게로 가서 무엇이라 말하고는 곧장 선생님에게로 가는 것이 아닌가! 그 여자 아이가 선생님에게 “선생님, 그런데 저 키 큰 오빠(은샘이를 가리키며)는 말을 못해요”라고 묻는 것이었다. 여자 아이는 또래에 비해 머리 하나가 더 있는 은샘이가 오빠같이 보였고, 그 오빠에게 말을 시켰는데 자기처럼 또박 또박 말하지 않자 말을 못하는 것으로 여긴 모양이었다. 사실, 그 때까지만 해도 ‘남자 아이들은 말하는 것이 늦을 수도 있지.’라며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다. 위에 형들, 누나 모두 말하는 것 때문에 어려움을 겪은 아이들이 없기에 그렇게 생각했을 수도 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자 말은 곧장 했다. 문장도 또래 아이들과 비슷하게 구사했다. 그런데 문제는 발음이었다. 6살 때까지 2살 아이의 발음처럼 옹알거리듯 말하고, 받침을 제대로 발음하지 못하는 것은 시간이 지나도 나아지지 않았다. 사실, 이쯤 되면 엄마인 나도 심각성을 느끼고 발음치료센터라도 가봐야 하는데 처음에는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지겠지”라는 마음으로, 그 다음에는 바쁘다는 핑계로, 또 그 다음에는 두려워서 섣불리 센터를 갈 용기가 생기지 않았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 은샘이가 학교 들어가기 전인 7살, 3월이 되었다. 문장은 어른처럼 사용하지만, 그 문장을 제대로 알아듣는 사람은 엄마인 나밖에 없었다. 그리고 주위에서 점점 “은샘이가 발음이…” “한번 검사라도 해봐야 하는 거 아니야” 라는 말들이 들려오면서 나는 압박을 받기 시작했다. 어떤 사람이 보면, “아픈 것도 아니고, 아예 말을 못하는 것도 아니고 그냥 가서 발음 검사만 해보는 건데, 그게 뭐가 무서워 안가고 있을까”라고 충분히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런데 몸에 분명이 이상 신호가 왔음에도 병원을 갈 수가 없었던 암환자처럼 나 역시 병원은 찾지 못하고 여러 이유로 밤잠을 설치면서까지 고민만 하는 시간이 지속되었다. 물론, 그런 고민 끝에 결국에는 언어 치료사를 찾았고, 내가 무엇을 놓쳤고,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해결 방안을 들었다. 하지만 난 이번 일을 겪으며 내 마음에 자리 잡고 있는 실체도 없는 두려움에 두려움을 품는 나를 보았다. 그리고, 이 두려움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하나님 앞으로 한 걸음 나아가고, 이 작은 발걸음으로 인해 하나님의 은혜를 느낄 수 있었다. 큰 애가 중학교 2학년이 되고, 막내가 7살 즈음 되자 이제 육아로부터 조금 여유가 생겼나보다라고 여기던 딱 그 순간에, 아이들로 인해 또 꼬꾸라지며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나를 본다. 이걸로 보아, 부인하려 해도 부인할 수 없이, 자녀 양육은 하나님으로 향하는 분명한 지름길임을 확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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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좌충우돌 크리스천 자녀 양육기
    2022-04-29
  • [성서연구] 십자가 – 거꾸로 보기
    물구나무서기를 해 보셨지요? 아니면 고개를 숙여 가랑이 사이로 세상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이렇게 하면 세상이 거꾸로 보입니다. 거꾸로 보는 순간 세상이 새롭게 보이고, 새로운 안목이 생깁니다. 변화는 두 가지 차원에서 일어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를 둘러싼 환경이 변하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환경을 바라보는 우리의 생각이 바뀌는 것입니다. 거꾸로 보기를 하면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변합니다. 시각과 생각이 변하면 그는 새 사람이라 할 것입니다. 십자가는 모든 것을 거꾸로 보게 만든 사건입니다. 십자가는 기존의 질서를 반대로 뒤집었습니다. 가장 높은 분이 가장 낮아진 곳입니다. 가장 강한 분이 가장 약해진 곳입니다. 또 세상에서 가장 멸시받는 죄수가 매달리는 형틀인 십자가에 <유대인의 왕>이라 붙인 것도 역설입니다. 왕은 가장 높은 존재인데, 가장 낮은 자가 매달리는 형틀에 붙었으니, 이것도 역설입니다. 죄수가 왕이라니, 또 진정한 왕이 죄수라니, 십자가는 모든 것을 거꾸로 뒤집습니다. 또 십자가는 본래 치욕적 형틀이었는데, 이제는 거꾸로 되어 구원의 자리가 되었습니다. 예배당 첨탑을 장식한 것은 다름 아닌 십자가입니다. 가장 부끄러운 형틀이 가장 자랑스러운 것이 되었습니다. 갈라디아 6장 14절에서 바울 사도는 십자가를 자랑한다고 말씀했습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아멘. 십자가에서는 죄인이 의인이 되고, 멸망할 자가 영생을 얻고, 높았던 자가 낮아지고, 낮았던 자가 높아집니다. 세상이 십자가에서 뒤집힙니다. 세례 요한을 잉태한 엘리사벳을 찾아간 마리아는 예수님 안에서 일어난 뒤집기를 다음과 같이 노래했습니다. 누가복음 1장 51~53절입니다. <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는 빈 손으로 보내셨도다> 성도는 십자가를 통과한 사람입니다. 십자가를 통과했는지의 여부에 따라 교인과 성도가 구분됩니다. 교인은 십자가를 바라보기만 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성도는 십자가를 통과한 사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한 사람입니다. 십자가를 통과함으로써 그는 거꾸로 뒤집혔습니다. 과거에 중요하게 여기던 것이 이제는 하찮은 것이 되었습니다. 과거에 하찮게 여기던 것이 이제는 소중한 것이 되었습니다. 십자가를 통과하면 완전히 딴 사람이 됩니다. 이에 대해 고린도후서 5장 17절은 말씀하기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라고 했습니다. 십자가를 통하여 뒤집힌 사람, 그래서 세상을 거꾸로 보게 된 사람 중에 바울 사도가 있습니다. 그는 과거에 소중하게 여기던 것을 배설물로 여기게 되었고, 과거에 핍박하던 주 예수님을 삶의 모든 것으로 모시게 되었습니다. 그의 이런 고백이 빌립보서 3장 7~8절에 나오는데, 『쉬운성경』으로 적어드립니다. <그 때는 이 모든 것이 내게 너무나 소중하고 가치 있는 것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이후, 그 모든 것이 아무 쓸모 없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그것들뿐만 아니라 이 세상 그 어떤 것도 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과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나는 모든 것을 버렸습니다. 모든 것이 쓰레기처럼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것을 이제 압니다. 이로써 나는 그리스도를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문제는 여전히 세상을 거꾸로 보지 못하고, 세상 사람들이 보는 대로, 죄인이었을 때 보던 대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거꾸로 보기를 연습해야 하겠습니다. 복음 때문에 고난 당하면 오히려 기뻐하고, 사람들이 칭찬하면 오히려 불편하게 여기고, 낮아짐으로 높아지고, 섬김으로 섬김을 받는 성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세상 사람과 다르게 보는 것, 거꾸로 보는 것, 뒤집어 보는 것, 그리고 그대로 살아가는 것에 성도의 십자가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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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4-12
  • [소강석칼럼] 코로나의 바람에 흔들리고 있는 당신에게
    “바람에 흔들리고 있는 것은 너만이 아니다 / 눈보라가 치고 거센 폭풍이 몰아치는 날 허리가 부러지는 것도 너뿐 아니지 / 거센 눈보라와 칼바람에 마디마디가 꺾이고 찢겨질 때가 오면 / 나도 그때 상한 갈대가 되어 강바람에 쓰러지리니 / 바람이 불어도 흔들리지 않고 그냥 서 있는 것은 죽은 것이 아닌가 / 너도 나도 살아 있기에 바람에 흔들리며 상한 갈대가 되는 거지.” 이는 제가 한겨울에 갈대밭을 거닐며 쓴 ‘갈대 앞에서’라는 시입니다. 갈대가 되었건 억새가 되었건 푸르른 날 하늘을 향하여 칼을 갈기도 하고, 갈바람에 춤을 추기도 하고, 눈보라 속에서 허리가 꺾이고 백설에 자취를 감춘다 할지라도, 바람에 흔들리며 춤을 추는 모습은 참으로 아름답기만 합니다. 오히려 흔들리지 않는 것들은 죽은 것입니다. 상처 받지 않는 것들도 죽은 것입니다. 전문가들의 예측에 의하면 오미크론 확진자가 하루 60만이 넘는 숫자로 정점을 찍고 이제 조금씩 감소세로 간다고 하지만, 아직도 여전히 20만~30만명이 된다고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아직도 여전히 코로나의 바람은 불고 있습니다. 이미 코로나 확진을 받아 치료를 받았다 한들 항체가 100% 형성된다는 보장도 없고, 또 항체가 형성이 되어도 오래가지는 않는다는 뉴스를 접할 때도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모두는 여전히 코로나의 바람에 흔들리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직까지 잘 버텨왔던 사람들 가운데도 어느 날 갑자기 코가 맹맹하고 목이 아프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아닐 거야. 절대로 코로나가 아닐 거야” 그런데 여전히 코가 맹맹하고 목이 아프며 기침까지 해서 자가진단키트로 검사해보니까 두 줄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두 줄 중에 한 줄은 희미하게 나오기 때문에 “이건 코로나가 아닐 거야”하면서 퀴블러 로스가 말한 ‘부정의 단계’를 경험하게 됩니다. 그래도 행여나 해서 병원에 가서 신속 항원 검사를 해보니 양성이 나옵니다. 그래서 다시 퀴블러 로스의 이론대로 ‘분노의 단계’로 들어갑니다. “아니 어떻게 내가 코로나에 걸릴 수 있어! 감히 코로나 바이러스가 나에게 틈타다니! 하나님께서 불담과 불성곽으로 지켜주실 줄로 믿었는데 어떻게 하나님이 나를 안 지켜주실 수 있단 말인가!” 그 분노가 심하게 되면 깊은 우울감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리고 나서 마지막에 ‘수용하는 단계’에 이르기까지 시간이 짧아야 되는데 우울감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우리의 몸 뿐만 아니라 마음까지도 해칩니다. 그래서 제가 코로나로 인하여 치료를 받거나 격리 중에 있는 분들에게 이런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시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시는 분이라고 말입니다.(마12:20) 아니, 오히려 상한 갈대를 일으켜 주시고 꺼져가는 심지에 기름을 공급해 주시고 사랑과 희망의 불꽃을 타오르게 해주시는 분이라고 말입니다. 물론 코로나에 안 걸리면 더 좋죠. 그러나 그 코로나 때문에 생명이 얼마나 소중하고 건강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깨닫게 해주는 계기가 되고, 현장예배가 이렇게 소중하고 귀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면 이 모든 것도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것이지요. 또 코로나에 걸리지 않았지만 코로나의 바람에 겁이 나고 흔들리고 있는 분도 많으실 겁니다. 그분에게는 이런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죽어 쓰러진 나무는 바람이 불어도 흔들리지 않고 시들어 떨어져버린 꽃잎은 찬이슬이 내려도 떨지 않는 것처럼, 우리도 살아 있으니까 겁이 나기도 하고 흔들리게 되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우리는 코로나의 바람에 흔들리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코로나의 바람 때문에 우리의 육체가 더 강력하게 되고 생명력이 더 질기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고난의 바람 때문에 우리의 신앙이 더 강인해지고 그 어떠한 혹한의 바람과도 맞설 수 있는 전천후 신앙이 될 겁니다. 코로나로 인하여 격리되어 있는 분들, 그리고 그 바람 때문에 흔들리고 있는 당신을 하나님은 결코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비록 당신이 상한 갈대와 같은 모습이고 꺼져가는 심지의 모습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은 다시 일으켜 세워주시고 불꽃처럼 타오르게 해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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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4-12
  • [시사칼럼] 용산의 부활
    대통령 당선인이 집무실과 거처를 기존의 청와대에서 다른 장소로 옮기겠다고 발표하고 의욕적으로 추진하는 과정에서 많은 논쟁이 야기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대상 지역이 우여곡절 끝에 “용산”으로 확정되었습니다. “용산” 하면 생각나는 이미지가 적지 않습니다만, 그래도 비교적 최근인 2009년에 일어났던 이른바 “용산 참사”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적지 않은 인명 피해를 동반했던 현대사의 비극 중 하나인지라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기억을 회피하고 싶어 합니다. 현재 각종 미디어에서 용산을 엄청나게 언급하지만 그때 일만큼은 거론하는 경우가 드물지 않습니까? 하지만 당시 희생자의 가족과 같은 사람들에게는 “내 시계는 2009년 1월 20일에 멈췄다”고 할 만큼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사건입니다(고 양회성 씨의 부인 김영덕 씨의 말, 2019. 1. 20, 중앙일보). 푸코(Foucault)는 이런 경우를 ‘대항기억(counter-memory)’이라고 불렀습니다. 권력의 중심이 용산으로 이동한다면 역사에서조차 소외되어 가는 이런 존재들이 다시 주체성을 되찾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한편 용산 이전과 관련해서 당선인이 던진 “공간이 의식을 지배한다”는 말도 회자되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무슨 의미로 썼는지 알 길이 없으나, 이를 각각 건축의 측면이나 전통 사상의 맥락 혹은 공간과 마음의 상호작용에 관한 신경과학의 관점에서 파악하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한 가지만은 분명합니다. 공간이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을 결코 경시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이 분야에서 빠뜨릴 수 없는 인물이 앙리 르페브르(Henry Lefebvre, 1901-1991)입니다. 그는 일찍부터 “공간”을 중시하여 현대사회는 공간의 지배를 받고 있으며, 독특한 공간 구조(공간의 재현) 안에서 생존하는 사람들은 그러한 공간에 적응하거나 저항한다(재현된 공간)고 보았습니다(『공간의 생산』). 용산에 존재했던(하는) 군사기지와 빈민촌을 생각해 보십시오. 각각의 공간에 적응한 사람들도 있었던 반면 저항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런 “공간의 실천”을 통해 용산에는 눈물과 이윤과 축제와 비극이 교차해 왔습니다. 이번 일을 계기로 용산이 새로운 화해 공간으로 부활하기를 바랍니다. 대통령 집무실의 용산 이전은 국가 안보나 국민 소통의 측면에서 중요하다는 사실을 모르는 이가 없습니다. 하지만 용산과 그 주변에 사는 사람들 관심사는 오로지 한 곳에 몰려 있는 듯합니다. 이와 관련해서 한 일간지가 내보낸 기사를 보십시오(매일경제, 4. 1). “대통령 집무실이 들어서는.. 부동산 투자 가치도 올라가지 않을까요. 핵심 개발 프로젝트를 비롯해 재건축, 리모델링 사업이 속도를 낼 것으로 기대됩니다”(서울 용산구 이촌동 주민 A씨), “아무래도 대통령 안보, 경호 문제로.. 청와대 주변처럼 용산도 부동산 개발 사업이 막히지 않을까 걱정됩니다”(원효로 B공인중개사사무소 대표). 그야말로 권력이 아니라 재산이 문제입니다! 십여 년 전 용산의 비극도 같은 원인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빈곤에 저항하는 그리스도교”의 저자 탁장한은 용산의 ‘쪽방촌’ 같은 낙후 지역을 “역유토피아(Dystopia)”라 부르고 이를 둘러싼 재개발이 초래한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 원주민추방)”이 용산 비극의 주범이라는 취지의 글을 쓴 바 있습니다. 이번 일을 계기로 이제는 용산이 욕심을 못 박는 땅, 그래서 무욕의 십자가와 같은 상징적인 땅으로 부활하기를 원하는 마음 간절합니다. 그 동안 현대의 도시는 “시민에게 도시를” 혹은 “인간과 함께 하는 도시”를 지향하는 방향으로 발전해 왔습니다. 1960년대 자동차가 지배하는 미국의 도로를 보고 충격 받은 콜롬비아의 한 청년이 시작한 운동이 “자전거도로(Ciclovia)”를 만들게 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아예 도로를 자동차와 자전거가 공유(share)하자는 움직임이 일고 있는데, 그 표지판 모양이 화살(arrow)을 닮았다 해서 미국의 덴버 시는 이를 “셰로우(Sharrow)”라 부르고 있습니다. “자동차 없는 도시(Carfree Cities)”를 주창하던 사람(J. H. Crawford)의 꿈은 오늘날 많은 곳에 “차 없는 도로”를 낳았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아예 도로를 일종의 ‘공유 공간’으로 만들어서 자동차와 자전거와 보행자와 동물(시낸스로프)까지도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도로를 만들자는 시도가 생겨나고 있는 추세입니다. 모두가 자유롭게 다닐 수 있도록 일체의 신호나 표지를 두지 않는다 해서 “아무것도 없는 도로(Naked Street)”라 하고, 이런 도로가 있는 곳을 “공간 공유 마을(Shared Space Village)”이라 부르기도 합니다(『도시의 보이지 않는 99%』). 금번 “용산 이전”은 대단한 결단과 엄청난 역량이 필요한 사건입니다. 그렇다면 이번 기회를 통해 용산이 부디 ‘시민과 인간의 도시’로 부활하기를 소망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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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4-12
  • [은혜의말씀] 평강이 있을지어다(요 20:19-20)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 제자들은 어디서, 어떤 모습을 하고 있었는지 아십니까? 골방에 꽁꽁 숨어 있었습니다.(19절) 왜냐하면, 유대인이 자기들을 예수님처럼 붙잡아 십자가에 못 박을지도 모른다 생각하니 두려움이 몰려왔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두려움에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이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말씀하십니다. 또, 손과 옆구리의 상처를 보여주십니다.(19,20절) 그제서야 제자들은 말로만 듣던 예수님의 부활을 믿게 되었으며, 두려움이 기쁨으로 변하게 되었습니다. 자, 그러면 우리가 가진 두려움은 무엇입니까? 그리고 어떻게 이 두려움을 벗고 ‘평강-샬롬’을 노래할 수 있습니까? 우리가 가진 두려움은 죽음으로부터의 두려움입니다. 인간의 가장 근원적인 두려움의 뿌리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죽음입니다. 우리에게는 죽음을 이길 힘이 없습니다. 죽음 앞에서 인간은 참으로 비참하고 초라해집니다. 이 땅은 죽음이 지배하고 왕노릇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두려움의 뿌리, 죽음을 누가 깨뜨려 주셨습니까?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이십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이 말씀은, 인간이 가장 두려워하는 죽음을 깨뜨리시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우리의 죽음에 대한 두려움마저도 벗겨 주시고, 우리에게 ‘평강–샬롬’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부활하신 예수님이 저와 여러분에게 말씀하십니다.(요 11: 25, 26) 여러분, 오늘 우리가 죽음을 두려하지 않는 용기를 가질 수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주신 영원한 ‘생명–샬롬’이 있기 때문입니다.(요 14:26, 16:33)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망의 권세를 이기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날 때, 죽음의 두려움에서 해방되어, 영원한 ‘평강–샬롬’을 노래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죽음이 준비되셨습니까? 기억하십시요! 우리는 죽음을 이긴 자들입니다. 우리 사직동 모든 성도님들이, 이 죽음의 두려움을 이기고, 부활의 ‘생명–샬롬’을 노래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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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4-12
  • [분홍목사의다음세대이야기] 우리 신앙의 에스프레소
    오늘 식사 맛있게 하셨습니까? 식사하시고 커피도 한 잔 하셨겠죠? 요즘은 밥값보다 비싼 커피가 그렇게 많더라구요. 그런데요. 커피를 마시러 가면 바리스타가 우리에게 “어떻게 드릴까요?”라고 꼭 물어봐요. “무엇으로 드릴까요?” “커피 달라니까요!” “아니, 그러니까 무슨 커피냐고요?” 물어봐요. 옛날에는요, “커피 주세요.” “어떻게요?” “맛있게 타 주세요.” 그러면 됐어요. 이제는 그게 아니죠. “아메리카노 드실래요? 카페라떼 드실래요? 카페모카로 드실래요? 아니면 돌체라떼나 마끼야또로 드실래요?” 복잡해요. 그만큼 커피 종류가 다양해졌어요. 자기 취향에 따라서 골라 먹을 수가 있어요. 저도 참 많은 커피를 종류별로 다 먹어본 것 같아요. 그런데 그중에서 희한한 커피가 있어요. 바로 에스프레소라는 커피인데 주는 것도 아주 조금 줘요. 무슨 간장 종지 같은 컵에다가 좁쌀만큼 주는데 엄청 진하고 맛은 별로 없어요. 인상을 쓰게 될 정도로 아주 씁니다. 그런데 참 이상한 게 있어요. 커피전문점을 가면 아메리카노, 까페라떼, 카페모카, 돌체라떼, 마끼야또, 이런 거는 간혹 없는 곳도 있어요. 그런데 어디를 가나 반드시 있는 커피는 바로 주기도 조금 주고 맛도 없는 쓴 커피, 에스프레소입니다. 희한하죠? 이걸 누가 먹는다고 커피전문점마다 있나? 왜 그럴까요? 이것이 바로 모든 커피의 기본 베이스이기 때문입니다. 이 에스프레소가 없으면 다른 커피를 못 만듭니다. 에스프레소에다가 물을 부으면 아메리카노가 되고요, 에스프레소에다가 우유를 부으면 까페라떼가 되고요, 여기에다가 쵸콜렛을 부으면 카페모카가 되고요, 연유를 넣으면 돌체라떼가 되고요, 여기에다가 카라멜을 부으면 카라멜 마끼야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에스프레소 커피가 아무리 보잘것없어 보여도 그 커피가 없으면 모든 커피는 하나도 만들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디를 가나 반드시 있어야 하는 커피는 무슨 커피라구요? 바로 에스프레소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다른 커피는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은데 에스프레소는 반드시 있어야 하고 이것만 있으면 얼마든지 다른 커피를 다 만들 수 있다고 한다면 다음세대를 양육하는 우리의 교회에 있어서 신앙의 에스프레소는 무엇인가? 라는 생각을 해보아야 합니다. 저는 지금까지 사역하면서 수많은 청소년들을 만나고 어린이를 만나고 청년들과 교사들을 만났습니다. 초청받아서 설교나 강연을 하러갈 때마다 고민을 했습니다. 이분들한테 무슨 얘기를 해 줘야 하나? 지혜를 강조해야 하나? 용기를 강조해야 하나? 아니면 사랑하라고 해야 하나? 그런데 항상 돌아오는 결론은 한 가지입니다. 그게 무엇인가? 바로 부활하신 예수님입니다. 교회가 교회 되는 핵심이 무엇인가? 에스프레소 커피처럼 모든 커피를 커피 되게 하는 커피의 원재료처럼 우리가 우리 되게 하는, 사람이 사람 되게 하는, 특히 하나님의 가능성으로 똘똘 뭉친 우리 10대들이 인생을 살아감에 있어서 붙들어야 할 단 하나의 가치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부활하신 예수님입니다. 우리의 다음세대들이 살아가면서 아무리 큰 절망에 처해도 부활하신 예수님만 바르게 알고 만날 수 있다면 그 절망을 이겨내고 더 크고 넓은 세상으로 나아갈 소망을 얻을 수 있습니다. 아무리 꿈이 보이지 않고 비전이 사라졌다고 해도 예수님이 나를 위해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이 가치만 놓치지 않으면 이 아이들은 자신에게 실망하지 않을 수 있고 지금 살아가고 있는 생명의 소중함을 붙잡고 더 나은 내일을 꿈꿀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부활을 교회에서 설교하고 가르치고 전하고 나누는 것입니다. 해마다 부활절이 다가오니까 하는 설교나 가르침이 아니라 정말 설교자의 인생을 뒤바꾼 사건으로, 한 사람의 인격을 통과한 능력의 이야기로 예수님의 부활이 선포되어야 합니다. 한 명의 교사의 생을 완전히 바꾸어 놓은 가장 크고 아름다운 스토리로 예수님의 부활이 고백되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 아이들의 인생은 예수님의 부활로 물들게 될 것입니다. 마치 에스프레소가 물이나 우유, 연유나 카라멜과 하나가 되어 새로운 커피의 맛을 창조하듯 그렇게 예수님의 부활도 우리 다음세대들의 삶에 녹아들어 그들의 생을 향기롭게 하고 그들로 세상을 변화시키는 주님의 백성들이 되게 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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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분홍목사의 다음세대 이야기
    2022-04-12
  • “우리는 학교에서도 예배합니다!”(2)
    지난번 글에서 위축 되고 있는 한국교회와 다음세대사역의 부흥을 위한 대한으로서 학교복음화의 중요성에 대해서 제안을 했다. 기독교복음사역의 여러 영역들이 모두 소중하고 필요하나 시대를 회복 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이고 필요한 사역의 영역은 “학교복음화”이다. 한국교회의 미래와 다음세대사역을 회복과 부흥을 위한 학교복음화 사역의 효과적인 사역들을 소개하려한다. “학교 국기게양대기도”와 “인근학교 영적입양사역”을 통한 다음세대복음화 전략이다. 한국교회 다음세대의 현황과 미래에 대해서 ‘2020, 2040 한국교회 미래지도’라는 한국 교회 미래학 보고서를 출판하며 한국 교회의 미래를 예측, 진단했던 아시아미래인재연구소 소장 최윤식 박사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한국 교회는 위기에 휩싸이겠지만 위기의 끝도 아니며 몰락을 몰고 오지도 않을 것이다. 한국교회 전국차원의 몰락은 2028년경이 될 것이다.”했다. 그가 컴퓨터 시뮬레이션으로 분석한 미래의 개신교는 엄청난 감소를 보였다. 그것도 교회의 주력구성원들이 고령자와 은퇴자 위주로 분포를 보인다는 것이다. 2013년의 예측에 코로나19라는 악재가 겹치면서 더 속도는 빨라지고 감소의 폭은 커지고 있는 현실이다. 그러나 전제가 있다. ‘지금처럼 계속 간다면... 이다.”라고 주장했다. 그는 “앞으로 10년이 한국 교회의 마지막 골든타임이 될 것이다. 절망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아직도 마지막 희망이 있다는 호소이다.”라며 한국교회가 골든타임에 적절하게 대처할 것을 권고하고 있다. 그는 이것을 해결할 수 있는 여러 가지 방안 가운데 중요한 방안으로 다음세대의 회복을 얘기한다. “다음세대(Next Generation)를 키우기 위해 그들에게 줄 비전과 역동성, 뼈를 깎는 교회의 개혁이 필요하다. 다음세대에게 세속적인성공에 대한 비전이 아니라 하나님의 비전을 심어 주어야 한다.”고 말했다. 비단 미래학자의 진단이 아니더라도 한국 교회의 미래 현실은 암담함 그 자체이다. 경제적인 어려움이나 프로그램의 부재 혹은 교회의 좋지 못한 사건사고로 인한 비난으로 인해서 교회 부흥이 저해가 되고 침체하는 것 보다 더욱 심각한 일은 다음세대들이 교회를 떠난다는 사실이다. 한국교회 미래의 가장 절박하고 시급한 문제는 다음세대사역의 회복이다. 현재 한국교회에서 쏟아내고 있는 자료들을 보면 현저한 인구 감소는 물론이고 특히 연령별인구비례를 볼 때 심각한 상황이다. 현재 연령별 인구 구조는 역삼각형 구조로 나타난다. 노년층 장년층에 비해서 젊은이 어린이들이 적어 미래가 어둡다는 것이다. 심지어 역삼각형을 넘어 팽이구조로 바뀌는 현실이다. 이미 교회 내에 주일학교가 없는 교회가 50%가 넘어 섰고 주일학교가 있는 교회들도 대부분 장년 숫자의 10% ~ 20%를 넘지 않는 가슴 아픈 상황이다. 특히 청소년 복음화 율은 지역별로 차이는 있지만 3% ~ 5% 수준에 그치고 있다. 그야말로 미전도 종족 수준이다. 이대로 20년 후의 한국교회는 상상하기도 두렵다. 필자가 사역을 하고 있는 부산을 중심으로 다음세대사역의 상황은 더욱 열악하다. 중 고등학교 학생들 중에 개신교회를 다니는 청소년들은 약1만 명 정도인 것으로 파악이 되고 있다. 전국적인 청소년복음화 율이 3%라고 얘기하는데 부산은 그에 훨씬 미치지 못하는 상황인 것이다. 청년그룹은 더 심각한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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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리는 학교에서도 예배합니다
    2022-04-12
  • [신앙교육나침반] 온가족이 함께 경험하는 부활절!
    안타깝게도, 많은 아이들이 청년이 되면서 자연스럽게 교회를 떠나거나, 교회를 다닌다고 해도 뜨거운 헌신과 열정이 없는 아웃사이더로 전락한다. 왜 그럴까? 교회는 참으로 많은 예산을 투자하여 다음세대를 위해 특별 절기마나 연극과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방학이 되면 복음캠프와 수련회를 열었다. 그런데 왜 교회를 떠나는 것일까? 왜 복음을 떠나는 것일까? 이유는 간단하다. 정작 자신들이 먹고, 자고, 공부하고, 노는 일상 속에서 전혀 복음의 능력을 경험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아이들에게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은 교회에서 듣는 거룩한 이야기이며, 치열하게 살아가는 일상과는 동떨어진 이야기일 뿐이다. 아이들은 생각한다. ‘예수님이 나의 죄를 모두 가져가셨는데, 그래서 그게 내 삶에 무슨 영향력이 있다는 거지?’ 부모들이 자녀에게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는 시간을 마련해보라. 부모의 눈빛, 몸짓, 언어습관, 가치관 등 모든 것은 아이들의 일생에 최고의 영향력이다. 부모의 입술에서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로 인하여 자신의 삶이 완전히 뒤바뀌었다는 사실을 고백해보라. 자녀들은 부모의 삶을 뒤흔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인 것을 온 몸으로 경험하게 될 것이다. 이때 언어적, 인지적 방법만이 아닌, 부모와 자녀가 온 몸으로 복음을 함께 경험한다면, 아이들은 부모와 함께 경험하는 시간 속에서 열린 마음으로 참여하면서, 복음이 얼마나 놀라운 능력이 있는지 깨닫게 될 것이다. ✱나에게 죄가 있어요! 자신의 죄가 어떤 크기와 무게일지 생각해보고, 생각나는 죄의 무게나 크기와 비슷한 사물을 집에서 찾아서 가지고 오게 한다. 죄가 크고 무겁다면 크고 무거운 물건을 가지고 오고, 작고 가벼울 거 같다면, 그와 같은 물건을 가지고 온다. 모두 가져온 후에 왜 그러한 물건을 가져왔는지 이야기 나누며, 자신의 죄를 고백한다. “아빠는 식탁 의자를 가져왔어. 사실 냉장고를 가지고 왔어야하는데, 너무 무거워서 대신 의자를 가져왔단다. 예배시간에 졸 때가 많아. 그건 정말 무거운 죄일 거야.” “엄마는 작은 쌀알을 아주 많이 가져왔어. 날마다 너희들에게 화를 내는 것이, 작은 죄이지만 계속 반복적으로 짓는 죄인 거 같아.” ✱무덤에서 생명으로! 이불로 죄의 물건을 덮고, 가족 모두 안으로 들어간다. 이불 안에서 부모가 팔을 올려서 예수님의 무덤 모양이 되게 한다. 예수님의 무덤 이야기를 들은 후, 첸트(여우야, 여우야 노래 개사)를 주고받으며 놀이한다. 술래(대답하는 사람)가 마지막에 “살았다!”라고 하면, 온 가족이 밖으로 나오고, 술래는 한 사람을 잡으러 간다. “예수님은 이렇게 많은 우리의 죄를 가지고 십자가에 달리셨어! 우리의 죄도 예수님과 함께 죽었어. 그동안 우리를 짓누르고 다스렸던 죄가 완전히 죽었어. 예수님의 시체가 무덤 속에 안치되었어. 죽은 죄도 무덤에 함께 들어갔어. 3일 후 예수님이 살아나실 때, 나도 새사람으로 살아났어! 우리 가족 모두 새사람으로 살아났어!” “OO야, OO야! 뭐하니?” (무덤 왔다~) “누구 무덤?” (예수님 무덤~) “살았니? 죽었니?” (살았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살고! 이불 위에 온 가족이 둥글게 앉은 후, 공(또는 풍선)을 옆 사람에게 전달하면서 로마서 6장 8절 말씀의 내용을 전달한다. 처음에는 말로만 하며 전달하고, 점차 다양한 동작을 하면서 전달한다. 다음 사람은 이전 사람의 말과 행동을 그대로 따라한다. “예수님이 왜 다시 살아났을까? 로마서 6장 8절 말씀 속에 정답이 숨어 있단다. ❶만일 우리가 ❷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❸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❹믿노니 로마서 6장 8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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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앙교육 나침반
    2022-04-12
  • 둘로 나뉘어진 부산지역 부활절연합예배
    부산지역 부활절연합예배가 두 곳으로 나뉘어져 드려진다. 부산기독교총연합회(대표회장 이현국 목사)는 17일 오후 3시 30분 포도원교회(김문훈 목사)에서 1부 연합예배와 2부 가스펠 문화축제로 개최된다. 이날 이철 목사(감리교 감독회장)가 강사로 말씀을 전하고, ‘3대가 함께 부활의 기쁨을!’이라는 주제로 개최된다. 다른 한곳은 부산교회총연합이 주최하는 2022 부산부활절연합예배다. ‘부활의 기쁜소식 오늘의 희망’이라는 주제로 고신교회(김경헌 목사)에서 오후 5시 개최된다. 강사는 부산복음화운동본부 총본부장 윤종남 목사(순복음금정교회 원로)가 수고한다. 지역교계에서는 부활절이라는 기독교 최대명절에 부산교계가 둘로 나뉘어진 상황에 대해 안타까움을 감추지 않고 있다. 모 교계인사는 “서로 관계가 좋지 못해도 부활절만이라도 함께 예배를 드렸다면 좋았을 것”이라고 안타까워 했고, 다른 관계자는 “양쪽에서 예배를 드리기 때문에 부산시장만 양쪽으로 왔다갔다 하는 수고를 하게 됐다”며 불신자들에게 비춰지는 교회의 모습을 걱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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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야의 소리
    2022-04-12
  • 신천지 상대 ‘청춘반환소송’ 줄이어..
    신천지의 모략전도가 종교선택의 자유를 침해한다는 법원 판결이 이어지자, 신천지를 상대로 ‘청춘반환 소송’이 줄을 이을 전망이다. 현재 1, 2차 소송이 진행됐고, 최근 신천지 탈퇴자들이 3차 소송을 준비중에 있다. 또 소송과 더불어 종교 사기 포교의 피해 방지와 처벌을 위한 법적 근거를 마련하기 위해 노력할 예정이다. 현재 1차 청춘반환소송이 1심과 2심에서 피해자들에 대한 물질적 배상 뿐만 아니라, 신천지의 모략전도가 종교선택의 자유를 침해한다는 법원의 판결을 이끌어 냈고 현재 대법원 판결을 기다리고 있는 상황이다. 2차 소송은 현재 진행중에 있다. 지난 1일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열린 유사종교피해대책범국민연대 기자회견에서 3차 청춘반환소송에 나선 신천지 탈퇴자는 "지난 9년 동안 신천지에 철저히 세뇌돼 모든 인생을 바쳤다"며 "신천지에 빠졌다는 사실이 너무나 창피해 탈퇴 후 조용히 살아가려고 했지만, 거짓말로 신천에 끌어들인 수많은 이들이 있어 회개하고 용서를 구하는 심정으로 이번 소송에 나섰다"고 밝혔다. 3차 청춘반환소송은 4월 한 달 동안 각 지역 이단상담소와 청춘반환 지원센터에서 탈퇴자들의 소송참여 접수를 받고, 이후 피해사실 확인과 심층상담 등을 거쳐 본격 진행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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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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