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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영규 관장] 장기려 장로가 추구한 삶
    이번 12월 25일이면 장기려 장로가 세상을 떠난 지 20주기가 된다. 그래선지 최근 작은 예수로 살다간 그의 삶이 매스컴을 통해 새롭게 조명되고 있다. 하지만 ‘안 본 용은 그려도 본 뱀은 못 그린다. (好畵未見龍)’는 말처럼, 자칫 후세 사람들이 고인을 설화 속 위인으로 만드는 것은 경계해야 할 듯하다. 얼마 전 이상규 교수님이 본란에 기고한 “장기려 박사는 월담을 권했는가?”가 그 전형적인 예이다. 며칠 전, 모처럼 청십자 옛 멤버들과 자리를 함께해서 수다를 떨었다. 오가는 얘기라야 뭐 그리 대단한 내용은 아니고, 그저 사소한 옛날 추억담이었다. 다만, 가치가 있다고 한다면 모두 사실이라는 점이다. 문득, 함께했던 지난 세월의 편린이 떠오른다. 결혼식 때 일이다. 중직자 자녀가 아닌 일개 청년의 결혼식이라 그런지, 청소하기 힘들다는 모 실세 권사님의 억지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예식장에서 하게 되었다. 그러자 청십자 식구들이 난리였는데, 장기려 선생님을 모시고 있던 간호사도 거들었다. “박사님이 평소 박 선생님 주례하고 싶어 하셨는데, 핑계김에 잘됐네요…” 하지만 담임목사가 엄연히 있는데 장로가 주례할 수는 없는 법, 게다가 불민한 신앙이지만 그래도 기복신앙에 길들여진 터라 머뭇거리자, 장기려 선생님은 “아냐, 그렇다고 똑같이 그러면 평화가 깨지는 거야” 그러면서 당시 부산에서 제일 좋다는 광복동 ‘새부산예식장’ 사장을 잘 아신다며 융숭한 결혼식을 준비해 주셨다. 게다가 주례를 못하니 대신 기도를 하시겠다는 거다. 천하의 장기려 박사가 직원 결혼식에서 기도순서를 맡는다는 게 상식적으로 가능한 일인가? “주님의 사랑을 실천하고 주님의 평화를 누려서 이 사회에 본이 되게 해 주옵소서”라던 기도소리가 아직 생생하다. 장기려 장로는 사랑의 대명사로 알려졌지만, 그건 그의 삶 자체를 보고 남들이 하는 헌사이고, 사실 그가 강조한 것은 평화였다. 1979년, 필자가 대학 시절 주도했던 모임에서 장기려 장로는 ‘진정한 평화’라는 제목으로 강연한 적이 있다. 그는 분열의 주된 원인은 “인간이 평화의 주이신 하나님을 거역한 까닭”이라고 했다. 즉, 사람이 자기 설 자리에 서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질서를 파괴한 까닭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평화가 깨어지고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 사이에 평화가 없어졌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의 근본 치유책은 “사람들이 죄를 깨닫고 하나님에게로 돌아와 평화의 주를 믿고 순종하는 것”인데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그의 은혜와 사랑 속에서 살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데, 이는 그리스도의 영적 교회의 일원이 되는 것으로, 개인적으로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성령의 전이며 그들의 가정은 예수님을 주님으로 하는 가족 공동체여서 사회에 사랑과 평화를 제공하는 사회적 단위를 이루게 되고 나아가서는 국가와 사회에 자유와 평화를 전달하는 원동력으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아울러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율법주의자들과 싸웠듯이 불의나 비진리와 맞서고, 악마의 유혹과 시험을 쳐부수고 승리하는 삶이 곧 진정한 평화의 길”이라고 역설하였다. 당시 유신 말기라는 시대적 상황에 비춰 상당히 민감한 사안이었음에도 진리에 기초한 자유로운 말씀이었다. 이렇듯 그는 평화에 대한 열망이 컸다. 아마 한국전쟁으로 인한 가족 간의 이별도 영향이 컸으리라 생각하지만, 어쨌든, 평화의 사도 장기려 장로는 1979년 8월 31일, ‘막사이사이상’ 수상소감에서 마지막을 이렇게 마무리했다. “나의 평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평화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므로 앞으로 나의 온 힘을 평화운동에 기울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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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15-12-22
  • [시내산] 성탄절의 역사와 문화
    우리는 매년 12월 25일을 성탄절, 즉 예수님이 태어난 날로 기념하고 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예수의 탄생일이 12월 25일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성경에도 탄생 날짜가 기록되어 있지 않고, 그 어떤 기록에서도 태어난 정확한 날짜를 확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초기 기독교에서 예수님의 탄생 축일은 없었다. 이런 연유로 초기 기독교에서는 1월 1일, 1월 6일, 3월 27일 등이 탄생기념일로 지켜지기도 했다. 그러다가 서기 313년 콘스탄틴 대제의 밀라노 칙령 이후 로마제국에서 기독교가 국가 종교로 자리 잡게 되자 예수의 탄생일을 국가적 축일로 하는 문제가 대두되었다. 당시 로마제국에서는 동짓날부터 태양이 힘을 발휘한다고 생각해 온 국민이 12월 25일을 무적의 태양신 축일로 기념하는 풍습이 있었다. 그런데 예수가 태양에 비유되면서 자연스럽게 이날이 예수의 탄생 축일로 정해지게 되었다. 이후 서기 350년 로마의 주교 율리우스 1세가 공식적으로 12월 25일을 예수의 탄생일로 선포한 것으로 기록되었다. 이런 역사적 배경을 지니고 있었기에 성탄절은 축제적 성격을 지닐 수밖에 없었다. 이교적 문화와 기독교 문화의 결합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런데 기독교 역사가 진행되면서, 이러한 성탄절에 습합되어 있는 이교도의 축제성은 프로테스탄트의 등장과 함께 공격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축제의 진행 가운데 등장하는 폭음, 댄스, 도박, 대소동 등이 악으로 연결되는 구실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퓨리탄들은 <크리스마스는 주예수의 탄생을 축하하는 날이 아니라, 바쿠스 신의 축제이다. 이교도는 이를 보고 예수는 탐식한 향락주의자, 음주가, 악마의 친구라고 생각할 것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라고 전한다. 이런 연유로 한 때 스코틀랜드에서는 크리스마스를 완전히 금지한 역사를 기록하기도 했다. 간략한 성탄절에 얽힌 역사를 떠올리면서, 우리는 진정한 성탄절의 의미를 새롭게 다져야 할 시점에 놓여 있음을 절감하게 된다. 이 땅의 성탄절도 예수의 탄생이 지니는 진정한 의미는 뒷전으로 밀려나고 상업성과 인본주의에 오염된 인간의 절기로 변한 지 오래 되었기 때문이다. 성탄절의 의미를 여러 가지 측면에서 생각해 볼 수도 있겠지만, 역사 속에서 부단히 세속화되어 온 성탄절을 통해서 우리는 기독교 문화의 진정성을 다시한번 생각하게 된다. 아담 이후 인간은 창조주로부터 ‘이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라’는 문화 명령을 받았기에 문화를 생성·발전시켜 나갈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 땅의 문화를 만들어 나가는 인간은 타락한 존재이기에, 모든 문화는 현재 세계 내에 있는 다른 모든 것들과 마찬가지로 죄에 의해 부패되어져 왔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일반은총으로 인해 이 땅의 문화 중 일정 부분은 부패와는 거리를 유지하고 있는 영역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창조주가 바라는 온전함에는 이를 수가 없다. 하나님 안에서 거듭난 주체가 되지 않으면, 문화의 궁극적 주인인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참된 문화를 키워나갈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타락한 인간들이 인간을 위해서 만들어 놓은 이 땅의 문화를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문화로 그 토대를 근본적으로 바꾸어 나가기 위해서는 문화의 창조적 변혁을 부단히 시도하지 않으면 안 된다. 특히 성탄절의 시작과 같은 이교문화에 습합된 경우는, 이교문화를 초극하고 새로운 하나의 기독교 문화가 제대로 자리 잡으려면, 이교문화 속에서 배제시켜나가야 할 부분들에 대한 엄정한 분리와 청산이 필요하다. 여기에는 전쟁과 같은 피흘림이 수반될 때도 있다. 문화의 변혁은 그만큼 힘든 과정이다. 변혁만으로 기독교 문화가 제 자리를 잡아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변혁된 문화를 지키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침투해 들어오는 이교문화의 유혹과 오염을 막아나가는 문화적 전사로서의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 그러므로 현재 우리가 향유하고 있는 성탄절 문화 속에서 청산해야 할 이교적 요소와 지켜나가야 할 성탄절의 본질적 요소를 깊이 성찰해 보아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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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12-22
  • [목회자칼럼] “서울에서 감사, 일산에서 그리움”
    어제 오전, 제경숙 집사로부터 모친(강정순 집사, 86세)의 소천소식을 듣고 오후 3시경 여러 성도들과 문상 길에 올랐다. 서울을 거쳐서 일산으로 가는 여정이어서 우리는 먼저 최근에 뇌출혈로 쓰려져 마산삼성병원에서 치료받다 삼성서울병원으로 옮긴 김민진 집사(강복수)를 문병갔다. 최근에 메르스 사태로 큰 홍역을 치룬 병원인지라 면회시간은 저녁 8시까지! 서울이 가까이 올수록 어찌나 차량들로 막히던지 조마조마했으나 하나님의 은혜로 7시 40분경에 도착했다. 친정 어머니(권사)께서 딸을 돌보고 계셨다. 머리에 수술부위가 길게 보이는데 먼 길을 찾아 문병 온 우리들을 바라보는 김 집사의 얼굴! 그처럼 환한 미소의 얼굴은 사고 이전에도 볼 수 없었던 그런 모습에 아, 얼마나 감사하고 감사하고 기쁘고 기쁜지. 현대의학의 도움도 많지만 그동안 딸의 회복을 위해 간절히 기도해 나오는 우리 성도들의 기도에 대한 응답이란 확신이 들었고 우리 모두의 입술에선 감사가 절로 나왔다. 머지않아 사고 이전의 상태로 정상회복되리라는 확신이 들었다. 김 집사와 현재 암으로 투병 중에 있는 지체들을 생각하며 딸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다. 렘17장 14절, “여호와여 주는 나의 찬송이시오니 나를 고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낫겠나이다. 나를 구원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구원을 얻으리이다”. 사53장 5절,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늦은 밤9시경에 일산장례식장에 도착했다. 고인께서는 이십여년전 마산에 사실 때에 권현+제경숙, 두 자녀 영민+현진 온 가족이 우리 교회에 등록하여 서울로 이사 가시기 전까지 오랜 세월을 함께 신앙생활을 해 나왔다. 딸만 다섯이고 다섯 사위들을 친아들처럼 사랑했고 다섯 사위들도 장모님을 어머니처럼 공경하며 사랑했다. 특히 둘째 따님인 제 집사(경남대유아교육과 교수)는 남편과 함께 어머니에 대한 효성은 귀감이다. 고인께서는 우리 가족에게도 어머니 같으셨다. 허물 많은 목사임에도 얼마나 사랑하고 존경해 주시던지 서울로 이사 가신 후에도 우리 마산재건교회를 그토록 그리워 하셨다. 몇 개월 전에 새 성전에서 함께 예배 드리고 싶은 마음에서 불편한 몸을 이끄시고 내려 오셔서 기쁨의 시간을 가진바 있다. 고인의 영정사진은 본교회의 제4기 베델성서대학 졸업식(1년반 과정, 1998년)때 찍은 학사모를 쓰고 밝게 웃는 졸업사진이어서 더욱 고인을 그립게 만든다. 빈소에서 조문 후에 유족들을 끌어안고 기도를 드릴 때에 고인에 대한 감사와 그리움에 두 눈에서 눈물이 흘러 내린다. 하루의 심방길, 서울의 문병에서 감사가 많았고 일산의 문상에서 고인과의 생전의 사귐과 그리움에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는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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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 목회자칼럼
    2015-12-22
  • [교회법률상식] 지역노회가 사라져 가고 있다
    -지역노회가 무지역노회화 되는 것 전적인 총회의 책임-지역 노회 경내의 타 노회 교회 해 지역노회로 이적해야 [질의] 우리 노회는 얼마 동안 노회 내부의 정치적인 분란으로 다툼을 하다가 지역도 나누지 않고 노회분립청원을 하여 총회가 노회를 분립해 주었습니다. 총회가 지역도 없이 끼리끼리 노회를 분립해 주는 것도 합법인지요? 목사님의 헌법적인 답변을 바랍니다. (합동 K목사) [답] 질의자가 합동 교단의 목사이므로 합동측 헌법으로 답한다. 1. 노회 조직의 요건 정치 제10장 제2조(노회 조직)에 “노회는 일정한 지방 안에 모든 목사와 각 당회에서 총대로 세례교인 200명 미만이면 1인, 200명 이상 500명 미만이면 2인, 500명 이상 1000명 미만이면 3인, 10000명 이상은 4인씩 파송하는 장로로 조직한다. 단, 21당회 이상을 요한다”라고 규정하였다. 본 규정에서 하나의 노회를 조직하기 위한 절대적 요건은 ① 일정한 지역 ② 법이 정한 목사 ③ 지역 내의 각 지교회가 파송한 총대장로 ④ 21당회 됨을 필수요건으로 하고 있다. 2. 노회 분립 절차 노회 분립 절차 역시 기존 노회가 분립노회와 전통노회의 ① 일정한 지역 경계를 나누어 정하고 ② 각 지역 안에 있는 목사와 ③ 각 지역 안에 있는 총대 장로로 조직하되 ④ 양 노회 각각 21당회 이상이 되어야 하고 ⑤ 양 노회간 재산 분할과 양 노회 중 정통노회를 정하고 분립노회의 명칭(가칭)이 결정 합의되면 총회에 분립 청원한다. 총회는 분립 청원 서류를 검토하여 전통노회와 분립노회가 다 같이 정치 제10장 제2조(노회 조직)의 규정대로 위의 ①-⑤항의 요건이 갖추어진 것을 확인한 후 총회가 노회 분립 허락을 결의하고 노회분립위원을 선정 파송하면 노회분립위원회는 분립청원서 내용대로 전통노회는 그대로 두고 분립노회만 제1회 노회로 조직해 준다. 그리고 전통노회는 스스로 임시노회를 소집하여 노회 분립으로 인하여 결원된 임원을 보선하고 노회분립으로 인하여 개정이 필요한 부분을 개정하고 시찰회와 상비부를 조정한다. 3. 지역노회가 무지역노회화 되는 것 총회의 책임. 근간에 총회 산하의 노회 중 일부 지역노회가 얼마동안 정치적인 갈등으로 분쟁을 하다가 최후의 수단으로 지역은 종전 그대로 두고 서로 마음에 맞는 교회들끼리 헤쳐모여 식으로 총회에 노회 분립청원을 하면 총회가 받아 분립을 허락한 결과로 한 지역 안에 지역 경계도 없이 2개의 노회가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 실례로 수원에 있는 S노회와 대구에 있는 S노회와 부산에 있는 N노회 등으로 기억된다. 이상과 같은 결과는 전적으로 총회의 책임이다. 그 이유는 노회가 노회 분립 요건을 갖추지도 못한 노회분립청원서를 총회에 제출하거나 위헌적인 불법 긴급동의안을 받아 지역 경계가 정해졌는지 양 지역의 조직교회가 몇 개인지 확인해 보지도 않고 분쟁하는 노회를 나누어 노회 분란을 해결해 주자는 식으로 노회분립위원회를 조직하여 내보내면 노회분립위원회는 거액의 돈을 받으면서(한국기독신문 제746호 참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심지어는 조직교회의 수가 모자라면 꾸어주는 식으로 짜 맞추어서 불법으로 노회를 분립하여 주는 것이 현실이다(한국기독신문 제758호 참조). 이와 같이 총회가 분립하여 준 한 지역에 지역경계도 없이 두 노회로 존재하는 노회도 과연 지역노회인지 총회는 반드시 답해야 한다. 이북 피난 노회가 전국적으로 여러 교회가 섞여 있는 노회처럼 한 지역에 두 노회의 교회가 섞여 있는 노회도 위헌적인 무지역노회가 아니겠는가? 뿐만 아니라 각 지역노회 역시도 교회가 타 노회 지역으로 이전을 하면 이전 허락 결의만 하고 해 지역 노회로 이명을 해 주지 않는가하면 해 노회 역시도 자기 노회 지역에 타 노회에서 교회당을 이전하고도 종전 노회에 그대로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의를 제기하지 아니하므로 전국 노회가 무지역노회화 되어가고 있음에 한몫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모르기는 해도 전국 노회들이 타 지역노회의 교회가 자기 지역 노회 경내에 하나도 없는 노회는 거의 없을 것 같아 보인다. 따라서 전국 노회가 무지역노회화 되고 있다는 말이다. 4. 후속 조치 총회는 혹 노회의 분쟁이 지속된다고 할지라도 한 지역에 두 개의 노회를 분립하는 것은 위헌적인 처사이므로 자제해야 한다. 또한 전국 노회를 실사하여 지역노회에 타 지역노회의 교회들은 해 지역노회로 이적조치 할 것을 지시하고 해 교회와 해 노회들은 총회의 지시를 따라 지역노회 경내에 타 노회의 교회가 하나도 없도록 정리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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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2015-12-22
  • [성공칼럼] 숫자 세는 순간
    구약성경에 사탄이 일어나 이스라엘을 대적하고 다윗을 충동하여 이스라엘을 계수하게 한 사건이 발생한다. 하나님께서 이것을 악하게 여겨서 그 벌로 이스라엘 백성 칠 만 명이 죽게 된다. 그럼 숫자를 센다는 것이 왜 하나님께 이토록 악한 일인가? 숫자를 센다는 것은 숫자를 의존한다는 것이며 과거를 가지고 현재를 지배하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사랑을 잃어버리는 행위이며 마귀의 시험에 빠졌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악하게 보시는 것이다. 부부사이나 부모, 자녀사이나 많은 관계 속에서 하나가 되고, 가족으로 행복하고 자유롭고 평화롭고 사랑과 감사가 가득하기 위해서는 서로 동등해야 한다. 소유나 지위 등의 숫자 때문에 누구는 위고 누구는 아래면 거기에는 이미 진정한 사랑과 자유는 존재하지 않는다. 당연히 부부와 부모와 자녀는 구별이 있으며, 자녀는 부모를 받들고 존경해야 하며 부모는 자녀를 사랑하고 위해주어야 한다. 그러나 서로간은 동등해야 하는 것이다. 사랑과 신뢰가 넘치는 부부는 존중하되 친구 같은 관계이며, 부모와 자녀는 존경과 서로 친구 같은 친밀함이 있어야 한다. 이런 관계 안에는 숫자가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님을 택할 것인가? 숫자를 택할 것인가? 한국의 부모와 학생들은 좋은 대학에 가기 위해 오랜 시간 준비하고 노력을 기울인다. 학원을 가고 밤잠을 자지 못하고 긴장 속에서 수년을 보낸다. 좋은 성적을 위해 즐거움을 마다하고 보약을 먹이고 온갖 투자를 한다. 그런데 수능을 보았는데 평소의 실력보다 훨씬 점수가 적게 나왔다면 숫자가 엉망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때 당신이 낮은 점수를 받은 수능생의 부모라면 어떻게 반응했는가? 부모의 목표가 사랑과 선(善)이면 이 낮은 점수를 받아들이고 새로운 삶을 준비해야 한다. 그러나 숫자가 목표였다면 낮은 점수를 받은 자녀에게 화를 내며 “그동안 너에게 들인 돈이 얼마인데 이것밖에 받지 못했느냐!”하며 무시하고 비난을 할 것이다. 이렇게 숫자가 우선이면 사랑도, 이해도, 자녀도, 자신의 기쁨도, 선함도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성경에서 죽는다는 것은 새로운 존재로의 부활을 말하며, 늙음이란 예전의 옷을 벗고 새로운 옷을 입는 것을 말한다. 늙는다는 것은 육체적인 것을 벗어나서 내면적인 것들이 빛을 발하기 시작하는 나이를 말한다. 그런데 새로운 옷을 입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들은 나이가 들면서 자연스럽게 자신이 가진 숫자로 힘을 발휘하고 싶어 한다. 예를 들어, “내가 너보다 몇 살이나 많은데 나에게 이렇게 대우하는가?” 또는 “내가 너에게 잘해준 것이 몇 번인데.. ”내가 너와 함께 산 세월이 얼마인데...”라고 주장한다. 숫자를 말한다는 것은 과거의 옷을 걸치고 새로운 내면의 세계는 포기하겠다는 것이다. 또 과거를 갖고 현재를 지배하고 군림하겠다는 것이다. 숫자란 그동안에 노력하고 선을 행하고 사랑한 것에 대한 열매인데 이제는 이 숫자를 근거로 상대방을 서운해하고 원망하고 비난하면 그동안의 사랑과 선을 헛된 것으로 만들겠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다윗왕의 명령으로 세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의 숫자는 그동안 다윗이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으로 얼마나 거대한 것을 이루어냈는지의 열매라고 할 수 있다. 옛날에 다윗이 얼마나 자기 백성을 사랑했으며, 백성에게 선을 행했으며, 자신으로 인해서 백성이 자유롭고 힘 있게 살았다는 증표이다. 그러나 숫자를 세는 순간 모든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내가 한 것이며, 내 능력이며, 내 말을 들어야 하며, 나에게 잘해야 하는 것으로, 악한 것으로 바뀌게 되는 것이다. 다윗왕은 숫자를 세는 자신의 모습을 회개하고 돌이켜서 그 모든 힘으로 솔로몬 성전을 준비하는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진짜 영적인 세계는 늙어서 아무것도 없을 그 때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육체의 시대가 끝나고 더 깊은 세계인 사랑의 세계로 들어가려는 사람들은 돈도 없고, 힘도 없고, 사람도 없고, 할 일도 없는 지금부터 “옛날에 내가 ~ 을 했다.”라는 과거의 숫자를 세는 일을 중단하고 숫자를 만들어냈던 예전처럼 사랑하고 선을 행하는 사람으로 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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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2015-12-22
  • [가정칼럼] 미혼모 딸의 ‘황금 결혼식’삶과 믿음
    “아빠, 저 임신했어요.” 19세의 딸, 고등학교 졸업식도 치르기 전이다. 6개월째란다. 이 소식을 들은 부모는 얼마나 황당했을까? 그러나 사실이었다. 임신을 시킨(?) 녀석은 군에 입대하고 없었다. ‘어쩌다 이런 일이…’. 아무리 곱씹어 보아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불면의 밤이 계속되었다. 하지만 생명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둘의 사랑을 확인했다. 결혼 의사도 분명했다. 그렇게 해서 딸의 부모는 내게 주례를 부탁해 왔다. 난감하기는 나도 마찬가지였다. 오래 전 SBS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에서 상담을 맡았던 커플 중 하나도 ‘리틀 맘(mom), 리틀 팝(pop)’이었다. 중학교에 다니다 ‘사고’를 쳤다. 둘은 학교에서 쫓겨났다. 중국집 배달원으로, 점포 점원으로 고달픈 생활이 시작됐다. 죄 없는 아이는 할머니를 어머니로 착각해 산다. 기막힌 노릇이었다. 더 이상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아이의 미성년 부모도 사회로부터 ‘성인’의 한 사람으로 인정받을 필요가 있었다. 떳떳하게 아빠·엄마 자리를 부여해줘야 했다. 멀리 진주까지 가서 주례를 섰다. 그때 나누었던 주례사 한마디. “온실 속 화초로 자라려 하지 말고 들녘에서 모진 비바람을 이겨내 남을 이롭게 하는 약초로 피어나렴.” 그리고 두 번째 리틀 맘, 리틀 팝. 무슨 말을 할까? 되레 딸 아이의 아빠에게 부탁했다. 편지 형태로 하고 싶은 말을 써 보면 어떠냐고? 아빠가 준비한 말을 보내왔다. “나의 사랑하는 딸 ○○아! 먼저 결혼을 축하한다. ○○이는 아빠를 놀라게 하는 특기가 있는 것 같구나! 처음에는 아빠도 많이 힘들었는데 생각을 바꾸기로 했다. 지금은 갑자기 아들 둘이 생긴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이 너는 하나님의 사람이다. 그리고 너는 하나님의 축복이다. 그러므로 ○○이 너는 축복을 창조해 가는 사람이 되어라.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믿음의 가정, 서로 존중해 주고 사랑하는 아름다운 가정을 가꾸기 바란다. 나의 사랑하는 아들 ◇◇아! 얼마 전, ○○이가 배 속에 있는 아기 이름을 지어달라고 해서 ‘당’이라고 이름을 지으라고 했더니 ‘아빠! 당이 무슨 뜻이야’라고 묻길래 ‘네 남편 성이 황씨니까 성을 붙여보면 뜻을 알 수 있다고 했지!’ ‘그러면 이름이 황당!’ 하고 ○○이가 깔깔대고 웃더구나. 내 심정이 그런 마음이었지. 너를 받아들이기가 매우 힘들었는데, 지금은 너를 인정하고 받아들이기로 했다. 이제 너의 모습이 든든하게 보이는구나! ◇◇아! 성경에 나오는 야베스가 처음에는 수고의 사람, 고통의 사람, 고난의 사람이었는데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을 통해 축복의 사람, 존귀한 사람, 하나님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된 것처럼 축복의 지경을 넓혀가는 그런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 내 딸을 너에게 맡긴다. 소중하게 여기고 사랑해 주어라. 그리고 항상 가정을 먼저 생각하고 아름답게 잘 가꾸기 바란다. ◇◇이 너는 하나님이 함께하는 사람이다. 너는 많은 사람들이 복을 받게 하는 축복의 통로다. 아! 마지막, 내 사위 키가 나보다 조금 더 커서 다행이다. 다시 한번 ◇◇이와 ○○이의 혼인을 축하한다.” ‘황당’이 ‘황금’으로 변하는 순간, 함께했던 가족과 친척·하객들은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그 순간 나는 이보다 더 아름답고 고귀한 주례사를 찾을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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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2015-12-22
  • [은혜의 말씀] 이상한 전쟁 (막13장 20~27절)
    이상한 전쟁이라는 제목으로 함께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우리가 이 험한 세상을 살아가다보면 이해할 수없는 일들이 일어납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렇게 평안하게 잘 지내다 인생의 풍파가 일어나고, 순적하게 사업을 하던 사람이 졸지에 망하게 되고, 그런 이해할 수 없는 어려운 일들이 일어날 때 왜 그럴까요? 저는 그것이 이상한 전쟁이 있다고 봅니다. 이 세상에는 인간의 지혜로 설명할 수 없는 그런 이상한 일들이 많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사는 삶이 영과 육으로 되어 있어서 영적인 세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모든 건 영적이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잘 나가던 사람이 갑자기 뭐에 붙들린 듯이 이상한 짓을 하고, 행복한 가정이 깨어지고, 왜 사람들의 삶속에 많은 문제가 일어날까요? 성경에 보면 베드로전서 5장 8절에「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키 자를 찾나니」 성경이 얘기할 때 사탄, 마귀는 악하고 더럽다는 형용사를 갖다 붙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창세기부터 보면 좋으신 하나님, 합력해서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이라면, 마귀는 악하고 성도들을 괴롭히는 겁니다. 에베소서 6장 11절에 보면 「궤계를 부린다.」 간계를 부린다. 이 한자 뜻이 간사하게 속인다는 겁니다. 마귀는 속이는 자입니다. 여러분 성공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고, 저와 여러분이 왜 성공적으로 목회를 할까요? 첫째는 하나님의 은혜요, 둘째는 하나님이 많이 봐주셔서 그렇고, 셋째는 하나님이 엄청 많이 봐주셔서 그렇고, 넷째는 하나님이 엄청 속아주시고 기다려 주시고 참아주시고 돈도 안 되는 자식을 끝까지 그저 밀어주고 끝까지 참아주고 속아주고 그 아버지 하나님의 망극하신 사랑, 무한하신 사랑입니다. 세월이 흘러갈수록 내가 잔머리 굴려서 사업을 하고 내가 운동해서 생명을 연장하고 그런 것 아닙니다. 생로병사, 흥망성쇠, 희노애락, 생사화복 중에 이상한 놈도 있고 어떻게든지 이것을 막으려고 하는 사탄이, 악한세력이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 하나님은 택하신 자들을 절대로 포기하지 않으시고, 무섭고 끔찍한 일을 당할 때 환란은 벗어나게 하시고, 피할 길은 열어주시고 그래도 못 버틸 때는 하나님께서 그 세월을 고통의 세월, 무서운 세월, 빚지고 쫒기는 끔찍한 시간을 감축하여 주시기까지 하십니다. 그래서 긴 세월 살아가면서 ‘참 집사님 복도 많다.’ 할 때 그 복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피할 길을 열어주시고 환란을 벗어나게 하시고, 무서운 것이 지나가게 하는 겁니다. 여러분 세례를 받는다, 피 씻김을 받는다는 것은 유월절 어린양을 잡아서 문설주에 붉은 피를 칠해놓으면 죽음의 사자가, 그 어린양의 피가 있는 집은 통과 해버리는 것 같은 것입니다. 그 집에는 다시 사망의·흑암의·어둠의 권세가 없습니다. 할렐루야! 그래서 주께서 사랑하는 여러분들, 사랑하는 성도들, 믿음의 사람으로 택하신 자들을 생명싸개로 지키시고 보호하시는데, 미련한 저와 여러분이 자주 쓰러지고, 자빠지고, 오판을 하고, 영분별을 못해서 엉뚱·생뚱맞은 짓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합력해서 선을 이루시고 여러 가지 시험을 통해서 우리를 단련 하시고, 철들게 하시고, 그래도 안 될 때 하나님은 그 고통의 때를, 무서운 시간을, 그 끔찍한 시절을, 빚지고 쫒기고 밤에 잠을 못자는 그런 불면의 시간을 하나님이 감축하여 주시기까지 하십니다. 그것이 오늘 이상한 전쟁 속에서 우리가 이기는 방법입니다. 힘들수록 어려울수록 더욱 더 주를 의지하고, 내 자신을 과신하지 말고, 마귀의 역사를 과소평가하지 말고, 이상한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일마다 때마다 하나님을 붙드시고, 의지하고, 그 분을 사랑하고, 그 분께 예배하며 승리하는 우리 성도님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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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12-22
  • [시사칼럼] 크리스마스 장식
    성탄절을 앞두고 교회뿐만 아니라 세상 건물이나 거리에도 크리스마스트리를 비롯한 장식이 만발했습니다. 공공장소라 할 수 있는 부산역 광장이나 광복동 거리에도 크리스마스 장식이 아름답게 빛나고 있습니다. 그렇게 본다면 우리 사회는 성속(聖俗)을 냉정하게 구별하고 분리하는 농도가 아직은 그리 진하지 않는 듯합니다. 하지만 이맘때면 TV나 영화관을 통해 거침없이 기독교 드라마나 영화가 상영되던 불과 20년 전을 생각한다면(‘나는 할렐루야 아줌마였다’(1981), ‘낮은 데로 임하소서’(1982년), ‘죽으면 살리라’(1982년), ‘새벽을 깨우리로다’(1989년)) 격세지감(隔世之感)이라 느낄 만한 것 또한 사실입니다. 공교롭게도 미국에서 크리스마스 장식이 법적 이슈가 된 때도 비슷합니다. 1984년 린치 대 도넬리 사건(Lynch v. Donnelly : 465 U.S. 668)에서 미국 연방대법원은 예수 탄생 장면을 포함하는 크리스마스 장식을 시(市) 당국이 시(市) 예산으로 설치하는 것을 헌법에 위배되지 않는다고 보았습니다. 1989년 앨리게니 대 ACLU 사건(Allegheny County v. Greater Pittsburgh ACLU)에서는 군 법원 계단에 예수탄생화를 걸어 전시한 일과 정부청사 앞에 세워진 대형 크리스마스트리와 촛대 장식이 문제 되었는데 연방대법원은 예수탄생화에 대해서는 위헌(違憲), 크리스마스트리와 촛대장식에 대해서는 합헌(合憲) 결정을 내린 바 있습니다. 지금도 미국은 연방정부청사 앞에까지 대형 크리스마스트리를 장식합니다. 그러면 그 옆에 무신론자들이 ‘신은 죽었다’(니체)나 ‘종교는 아편이다’(마르크스)라는 문구가 새겨진 팻말을 세워놓곤 합니다. 낯선 풍경이지만 머지않아 겪게 될 한국의 현재형 미래라 할 수 있습니다. 크리스마스 장식과 관련해서 우리가 직시해야 할 또 하나의 불편한 진실이 있습니다. 최근 수년 간 갑자기 교회의 십자가 불빛이 도시 미관 상 과하다거나 일반 시민들의 수면에 장애요소가 된다는 주장이 공공연하게 제기되기 시작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교회마다 외벽에 웅장하게 늘어뜨리는 밝은 조명 장식도 장차 문제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또한 환경이 중요한 키워드로 등장하면서 특히 가로수나 화단에 설치하는 작은 꼬마전구가 식물에 미치는 부정적인 영향을 강조하는 견해가 늘었습니다. 장식용 꼬마전구의 발열량이 식물을 고사시킬 정도는 아니라는 공식 연구 결과가 있지만(산림청 임업연구원, 2013), 낮엔 광합성을 하고 밤에는 호흡을 해야 하는 나무의 생체적 리듬을 깨뜨려 결국 성장을 저해한다는 혐의만큼은 면할 길이 없어 보입니다. 그렇다면 교회 앞에 심어 놓은 나무나 화단에 지나치게 화려한 조명 장식을 설치하는 일 또한 한번쯤은 재고(再考)해야 할 시점입니다. 석유 한 방울 나지 않는 에너지 부존 국가에서 과도한 크리스마스 조명은 불필요한 전력 낭비가 아닌가 하는 사회적 비판 앞에서도 조금은 겸허해질 필요가 있겠습니다. 크리스마스트리나 장식은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구원해 주신 사실을 기억하고 감사하는 상징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세상 사람들과 함께 이 땅에 구주 오심을 축하하기 위해 설치하는 상징물이기도 합니다. 성경적인 것도 아니요 신학적인 이유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만일 크리스마스트리나 장식이 오히려 사람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고 교회에 대해 부정적 이미지를 갖게 만드는 요소가 된다면 문제 아니겠습니까? 구세군 자선냄비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얼마나 따뜻한지와 한 번 비교해 보십시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성탄절에도 교회마다 크리스마스트리와 아기 예수를 기념하는 상징과 장식 설치하는 일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하지만 절제와 검약의 정신이 필요합니다. 사실 예수님은 베들레헴 작은 마을 구유에서 나시지 않았습니까? “(전략)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것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고후 6:10). 예수님의 모습이면서 교회가 지향해야 할 모습이요 특별히 성탄절에 우리가 보여주어야 할 진면목이 바로 여기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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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12-22
  • [서임중 칼럼] 우리는 오늘의 예수가 되어야 한다.
    성탄절은 해마다 어김없이 찾아오는데 성탄의 의의는 변함이 없되 어쩐 일인지 우리들의 마음은 성탄절의 깊은 의미와는 무엇인지 모를 벽이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은 웬일인지 모르겠다. 예수 없는 성탄절을 세속적인 성탄절이라 한다. 예수 없는 성탄절은 예수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이 맞이하여 지키는 성탄절 행사인데, 놀라운 것은 오늘 교회 안에서조차도 예수 없는 성탄절 행사가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교회 안에서 예수 없는 성탄절 행사라는 말은 성탄절의 진정한 의미를 알지 못하고 성탄절을 맞는 것을 뜻한다. 성탄의 진정한 의의는 무엇인가? 죄로 죽어 가는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인간비하(人間卑下)다. 그러기에 진정한 성탄의 의미를 깨달아 축하할 수 있는 삶이란, 바로 그리스도 예수가 사람의 몸을 입고 낮아지심처럼 그리스도인은 보다 낮아지는 삶으로의 전환, 그 자체가 진정한 성탄의 의의를 깨달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자세다. 2011년도에 출간된 ‘엘버트 놀런’의 저서 <오늘의 예수>가 있다. 이 책을 짧게 요약하면 1부에서는 시대의 징표를 요약한 후에 오늘의 의미를 정립하고, 2부에서는 예수님의 고유 영성에 대하여, 3부에서는 예수님의 영성에 맞추어서 오늘 우리들이 어떻게 할 것인가를 조명하고 있다. 이 책이 강조하는 근본은 예수님의 관점은 사람이었고, 인간이 이와 같은 근원적 자유함을 경험할 수 있기 위하여 예수님은 스스로 먼저 사람을 사랑하셨고, 사람을 위하여 자기 자신을 내려놓고 비우고 마지막에는 자기 자신까지도 버릴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인간은 본성적으로 타인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사랑하면서 타락해 간다. 그것의 근원이 ego, 자아(自我)다. 인간생활에 가장 무서운 것은 ‘에고이즘’(egoism), 곧 이기주의, 자기중심적인 성향이다. 이것은 자기 자신 말고는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다. 자기 자신의 필요와 자신의 만족만을 갈구한다. 인간에 대한 연민이나 공감이 완전히 결여된다. 타인에게 유난스레 잔인할 수 있고, 그것이 발전되면서 타인을 고통에 빠뜨리는 인간이 되어 간다. 그러면서 자기가 하는 모든 것은 정의(正義)라고 착각한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근원적인 자유함이 없다. 이와 같은 환경에 살아가는 인간을 인간답게 살게 하신 분이 예수님이다.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은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그 사랑은 비교원리가 아니라 창조원리에서 해석되는 것이다. 즉 있고 없고, 많고 적고, 높고 낮고의 관계를 넘어 서로를 돌보아 주고, 서로를 공감하고, 서로를 보호해주고, 서로 가진 것을 나누는 관계다. 예수님이 원하시는 것은 이것이었다. 이것을 이루기 위하여 스스로 낮아지고, 가난하게 되고, 섬기고, 마지막은 죽기까지 하신 것이다. 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다. 그리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한 가지 분명하게 마음에 담아 두어야 할 것 있다. 그것은 너를 자유하게 하고, 너를 기쁘게 하고, 너를 행복하게 하려면 내가 아프고, 내가 힘들고, 내가 고통 해야 하는 상황에서도 이해하고, 관용하고, 용서하고, 사랑하면서, 더 낮아지고, 더 내려놓고, 더 인내하는 삶이다.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이 오늘의 예수다. 너를 아프게 하고, 너를 힘들게 하고, 너를 불행하게 하면서, 내가 행복하고, 내가 자유 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이 아니다. 그 삶은 하나님과는 전혀 상관없는 삶이다. 그런데 오늘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의 삶이 언제부터인가 나의 기쁨을 위하여, 나의 행복을 위하여 너를 아프게 하고 너를 힘들게 하면서 자기는 정의라고 부르짖는 타락한 삶에 물들어가는 데 아픔이 있다. 그것은 성탄 이전의 인간의 삶이다. 성탄 이후의 삶은 그런 삶이 아니다. 나의 방송설교를 듣고 상담을 해 온 교수님의 고뇌의 한마디를 잊지 못한다. “나는 61년 신앙생활을 하면서 아직도 교회에서 사람이 그립습니다. 우리교회는 하나님만 모여 있습니다.”라고 아파하면서 “내말이 맞다, 내 생각이 옳다, 내가 말 하는 대로 되어야 한다, 라는 논리만 전개하는 그분들은 허물과 실수와 잘못이 전혀 없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런데 우리교회는 왜 평안하지를 않습니까? 그러기에 자신의 허물과 실수도 볼 줄 알고, 자신의 부족함과 잘못도 인정할 줄 알고, 자신도 죄인임을 인정할 줄 아는 사람이 그립습니다.” 그렇다. 교회에서조차 사람의 소리가 어느 때보다 높아지는 요즈음, 권력과 명예를 얻기 위하여 쟁투하는 소리가 끊어지지 않는 요즈음, 서로 높아지려고 다투는 분쟁의 소리가 요란한 요즈음, 모두가 자기의 일이 가장 옳은 일이라고 떠들면서 하나님 없는 신앙을 생활하는 시끄러운 요즈음, 우리는 성탄의 깊은 의미를 바르게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은 지금 보다 더 낮아지는 것이다. 네 탓이 아니라 내 탓, 나만 옳은 것이 아니라 너도 옳다는 것을 인정할 수 있는 마음, 거기서 서로를 공감하고 넉넉한 마음으로 더불어 살아감이 실천될 때, 거기서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을 수 있다. 거기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다. 그것이 곧 우리 자신이 더 낮아지는 삶으로 나아가는 것이며, 그것이 오늘의 예수가 되어 가는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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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12-22
  • [성서연구] 무서운 일이 은총의 일로!(마태복음 1장 1-25절)
    모름지기 세상의 모든 아름다운 일들은 하나님을 통하여 시작되고 이루어집니다. 사람들은 그 과정에서 놀라고 당황하고 실수하고 방해하고 두려워할 뿐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이러한 모든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생명의 이야기, 구원의 이야기, 화해와 사랑의 이야기가 가능한 것은 사람들의 연약함 가운데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탄생하신 과정도 그러하였습니다. 나사렛이란 마을의 요셉이란 총각과 마리아란 처녀가 약혼을 했습니다. 요셉은 착실한 목수였고, 마리아는 단정한 처녀였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두 사람의 약혼을 축하해 주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얼마 후 요셉은 마리아가 잉태한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가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평소와 다른 마리아의 몸매를 보고 눈치를 챈 것인지, 아니면 누군가가 은밀히 말해 주었는지, 혹은 마리아가 용기를 내서 가브리엘 천사가 했던 말과 함께 자신의 몸의 변화에 대해 요셉에게 고백을 한 것인지 잘 알 수 없습니다. 어쨌든 요셉은 마을 사람들 모두가 이 일을 알기 전에 조용히 해결하길 원했습니다. 마리아의 잉태 사실을 알게 된 후 요셉을 겪었을 혼란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사자를 요셉에게 보내 이루어지고 있는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계획 아래서 성령을 통해 이루어지는 일임을 알려주셨습니다. 그러면서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마리아가 잉태하여 배가 불러오는 일, 그리고 그 여인을 데려와야 하는 일은 생각하기에도 <무서운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요셉에게 <무서워하지 말고 하나님의 계획에 참여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때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들은 처음엔 <무서운 일>로 보입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계획에 참여하는 일을 두려워하고, 망설이고, 뒤로 후퇴합니다. 이게 우리의 연약한 감정들입니다. 그러나 이런 감정들에 흔들린다면 결코 위대한 일은 일어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참 다행스럽게도 하나님께서는 연약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일에 참여하도록 격려하시고 이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요셉에게 용기를 주시기 위해 이 모든 일들이 구약성경의 예언대로 이루어지는 것임을 알려주셨습니다. <이 모든 일이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이르시되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22-23절) 요셉은 자신에게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통해 하신 말씀이 성취되는 거룩한 일>에 참여할 기회가 주어진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그 무서워 보이는 계획에 자신을 바치기로 작정하였습니다. 그는 마리아를 데려왔고, 최선을 다해 섬겼습니다.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요셉은 무서운 일의 희생자가 된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구원 사역의 한 모퉁이를 감당하는 하나님의 종이 되었고, 예수님의 성탄을 이야기할 때마다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처음에 무섭게 보이던 그 일들이 나중에는 <은혜의 일>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의 혼란, 당황, 두려움, 망설임 등의 온갖 연약한 감정 사이를 뚫고 당신의 확고하고도 분명한 계획을 이루십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하나님의 계획에 참여하는 것을 무서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용기를 내어 우리를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미디안 광야의 모세에게 <바로에게 가서 내 백성을 인도하라>고 하셨을 때, 그 일은 심히 무서운 일이었지만, 모세는 그 하나님의 계획에 뛰어들었고, 그는 위대한 인생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을 잡아오기 위해 다메섹으로 가던 청년 사울이 태양빛보다 더 밝은 빛 아래 쓰러진 것은 분명히 무서운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그 무서운 일에 참여하게 되었을 때, 그는 바울이란 이름으로 빛나는 신앙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언제나 신앙인에게는 <무서움을 극복하고 하나님의 계획에 자신을 드릴 결단>이 요구되고 있습니다. 우리의 결단에 따라 우리 삶은 그 격이 달라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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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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