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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자 제발 좀” 우려하는 목소리
    오는 9월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측 부총회장 선거에 5명의 후보가 출사표를 던져 유례없는 5자구도가 됐다. 문제는 최근 총대들이 휴대전화 문자나 카카오톡으로 하루 10여통의 메시지가 날아들어 몸살을 앓고 있는 지경이라고 하소연을 하고 있다. 한 총대는 각 후보 진영의 참모들의 지지호소 문자 살포로 인해 문자를 받는 쪽에서는 심각한 고통이라고 호소했다. 또 다른 총대는 스팸문자로 차단했다고 말하며 “제발 보내지 마시라”고 사정을 했다고 한다. 이미 어떤 후보는 아는 지인을 통해 전국을 순례하며 영향권 있는 총대들을 만나는 광경이 포착되기도 했다. 새 선거 풍속도에 통합 교단도 합동 교단처럼 제비뽑기로 해야 되지 않겠냐는 우려의 목소리까지 나올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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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수첩
    • 광야의 소리
    2017-06-12
  • 1987년 6월 항쟁은 부산에서 일어난 민주화 운동
    △문재인 변호사, 최성묵 목사와의 첫 만남 문재인 대통령은 1982년 8월 부산에서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했다. 개업 무렵 재야의 고 김광일 변호사, 이흥록 변호사, 송기인 신부, 심응섭 목사, 임기윤 목사, 최성묵 목사 등을 중부교회 바로 앞 큰 대로변에 있는 유기선의원의 이층 원장실에서 처음 만났다. 당시 사법연수원을 마치면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판·검사로 임용이 되던 시절이었으나 문재인 변호사는 판·검사를 거치지 않고 바로 변호사로 개업했다. 유신시대 학생 운동을 하며 구속, 재적됐던 전력 때문에 판사 임용을 받지 못한 것이다. 그때 부산은 부림사건과 미문화원 방화사건의 재판이 아직 끝나지 않는 상태로 시국이 민감하고 늘 정보과 형사들의 감시를 받던 시절이었다. 그런 가운데 개신교의 진보적 교단인 기장의 심응섭, 최성묵 목사와 통합의 박광선 목사, 감리교 임기윤 목사, 복음교단의 전병호 목사와 가톨릭의 송기인, 오수영 신부 등 용기 있는 재야의 인물들이 민주화운동의 싹을 키웠다. 그 당시 대표적인 만남의 장소와 집회의 중심은 부산 중구 보수동 소재 헌책방 골목에 있는 중부교회로 담임목사였던 최성묵 목사는 늘 감시의 대상이었다. 그때 관의 억압과 탄압을 견딘 재야인사들이 민주화 운동 단체를 복원하고 서서히 논의하면서 모이기 시작한 것이 1985년 부산민주시민협의회(부민협)의 결성으로 이어졌다. 부민협은 부산에서 식어가는 민주화의 열기를 재생산하고 부산지역의 최초로 민주적이고, 통일적인 민주화 운동의 산실로 태동된 단체로서 부산 민주화 운동의 지휘부 역할을 했을 만큼 그 결성은 대단한 파급 효과를 가져왔다. 문재인 변호사는 그때 그 단체의 논의과정에서 참여한 막내였는데, 노무현과 문재인을 끌어들인 인물이 김광일 변호사였다. 김광일, 이흥록, 문재인은 모두 경남 고교 출신으로 선, 후배 사이였다. 그 후로 부민협이 먼저 결성하자, 개신교에서는 부산NCC인권위원회, 민주헌법 쟁취국민운동부산본부(부산국본) 등의 활동을 했다. 문재인 변호사는 부산지역의 민주화운동의 가장 커다란 족적을 남긴 시대적 상황을 몸으로 체험한 것이다. 송기인 신부는 타의에 의해 미국에 유학을 떠나고 중부교회가 6월 항쟁의 본부로 역할을 했다. 1987년 고 이태춘 열사의 노제 때 부산 최초 6월 항쟁 가두시위에 노무현 변호사는 이태춘 열사의 사진을 들었고, 그 옆에 문재인 변호사가 섰다. 고 최성묵 목사 바로 뒷편에는 황대봉 목사와 박찬종 변호사가 서서 거리로 나선 광경을 필자가 교계기자로 사진에 담고 직접 눈으로 체험했다. 문재인 변호사는 당시 상임위원, 인권위원, 상임집행위원 등의 직책을 맡아 활동했으며, 이흥록 변호사는 김희욱 집사와 더불어 양서협동조합의 이사장, 총무일 맡았다. 문재인 변호사는 6월 항쟁이후 민족학교와 한겨레신문 창간에 후원회로 참가한바 있다. 고 최성묵 목사의 추모집 ‘그의 부활을 기다리며’ 속에 ‘6월 항쟁의 중심’이란 글을 통해 “돌이켜 보면 시대가 필요로 하였던 그런 일들을 그와 함께 할 수 있었던 것이 나의 인생에서 크나큰 행운이었다”고 소회를 적어 놓았다. △6월 항쟁의 시작은 서울이 아닌 부산이다 6월 항쟁은 직선제 개헌이란 목표를 처음부터 명확하게 설정한 가운데 전국적인 연대 투쟁 기구를 결성하고 그 지휘부하에 사전 계획된 대규모 대중 집회 시위로 조직적으로 민중의 힘으로 전개했다. 강력한 군사 독재정권을 굴복시키고 목표를 쟁취함으로서 민중의 힘으로 세워진 문민정부와 국민의 정부로 이어지는 민주화의 밑거름이 되었다. 1987년 2월 박종철 군의 사건에서 시작된 부산의 6월 항쟁을 이끌어 마침내 6.29선언을 받아내는 기폭제 역할을 한 것이다. 6월 항쟁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한 부민협은 부산민주화운동의 산실로서의 역할이 컸다고 고 김광일 변호사가 훗날 자서전에 기록했다. 금요기도회 등 서울 등지에 중도 재야인사들을 초청했다. 집회 장소는 중부교회였고, 박형규 목사, 문익환 목사, 문동환 목사, 강원용 목사, 이문동 교수, 서남동 교수, 한완상 교수 등이 주요 강사였다. 그때 필자는 교계신문기자이자 중부교회 집사였는데 중부교회를 중심으로 한 재야운동인사들의 활동을 현장에서 취재했던 산 증인이 되었다. 1975년 변호사 개업 당시 고 김광일 변호사는 ‘동아가 죽으면 나라가 죽고 동아가 살면 나라가 산다. 부산지방변호사회 변호사 김광일’이라고 격려 광고를 실었던 관계로 요산 김정한 선생, 노경규 선생, 임기윤, 최성묵, 심응섭, 유기선 장로들과 만났고, 가톨릭에서 송기인, 오수영 신부, 이홍록 변호사, 언론계에서 윤경규 국제신문 논설위원, 조갑제 기자, 김재규, 김희욱, 박상도, 김형기 목사, 고호석 등 민주운동의 대표적 인사들과 결집할 수 있었다. 고 최성묵 목사, 고 김광일 변호사가 만나지 못했다면 6월 항쟁은 실패로 돌아갈 수도 있을 것으로 필자는 진단하고 싶다. 신이건 장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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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역사현장
    2017-06-12
  • [이상규 교수의 부산기독교이야기 8] 부산에서의 에비슨 가족
    부산에 도착한 에비슨은 아내와 3아이를 데리고 곧장 서울로 가려했으나 베어드 집에서 마침 서울을 떠나 일본으로 가는 길에 부산에 들른 감리교 선교사 벙커(Bunker)를 만나게 되었다. 서울은 신임선교사를 맞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고, 특히 폭서로 서울에 있는 선교사들도 피서지로 가는 형편인데 서울로 가기 어렵다는 점을 알게 되었다. 마침 베어드 집에서 같이 있자고 하여 일단 부산에 당분간 체류하기로 했다. 사실 베어드 집에는 브라운 의사(Dr Hugh Brown) 부부도 자기들의 집이 완공될 때까지 머물고 있어 거주할 방이 없는 상태였다. 할 수 없이 베어드의 서재를 임시거처로 쓰게 되었다. 몇일 뒤에는 예고도 없이 서울에 있던 마펫(Samuel Austin Moffett)이 여름휴가를 보내기 위해 부산의 베어드 집으로 왔다. 베어드와 매코믹신학교 동문인 동시에 친구였던 그는 아직 그는 독신이었으므로 마펫은 침실이 없어 식당 창문 옆에 돗자리를 깔고 지내게 했다. 그런데 에비슨 부인은 부산에 도착한지 꼭 일주일이 되는 1893년 6월 23일, 4번째 아이 더글러스(Douglas, 1893-1952)를 출산했다. 그가 [1892년 7월 5일 출생한 베어드의 첫 딸 낸시 로즈(Nancy Rose)에 이어] 부산에서 출생한 두 번째 선교사 자녀였다. 부산에서 태어난 3번째 선교사 자녀는 1894년 10월 12일 출생한 베어드의 장남 존 아담스(John Adams)였다. 그런데 부산에서 출생한 더글러스는 후일 아버지처럼 토론토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의사가 되어 1920년 내한하여 선천선교부(1920-23)를 거쳐 세브란스의전에서 가르치고 후에는 원장으로 봉직한다. 에비슨 부부가 아이를 출산한 이상 일정기간 부산에 머물 수밖에 없었는데, 결국 6주간 부산 베어드 집에 체류하게 된다. 이 기간 동안 부산지방을 둘러보았으나 언어불통으로 대화를 할 수 없었다. 이 기간에 대한 기록으로는 에비슨이 영어로 쓴 회고록(Memoirs)이 있고, 또 1933년 1월호 「신동아」에 쓴 회고기가 있다. 또 윌리엄 베어드의 아들 리차드 베어드가 편집한 William M. Baird of Korea, a Profile에 보면 에비슨의 ‘초창기 한국생활’이 소개되어 있어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그런데 에비슨이 부산에 체류하는 동안 방문했던 가장 흥미로운 곳은 300년 전 임진왜란 당시 축조했던 성이었다고 한다. 잡초가 우거지고 성은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고 썼는데, 아마도 좌천동 뒷산에 있었던 증산 왜성을 말하는 듯하다. 부산에 당분간 체제하게 되는 에비슨에게 베어드 부인은 언어공부를 시작하도록 충고하였고 자신의 어학 선생 고서방을 붙여 주었다. 그 고서방이 바로 고학윤(高學崙)이었다. 그가 후일 세브란스의 외과학 교수가 되는 고명우 박사의 부친인데 그는 영어를 전혀 몰랐다. 에비슨은 한국말을 전혀 몰랐다. 이런 가운데서 복잡한 한국어를 공부하기 시작했으니 1890년대나 있을범한 일이었다. 이때의 일에 대해 이렇게 회고했다. “그 6주 동안을 이용하여 나는 처음으로 조선어를 공부하게 되었다. 그 때 나에게 조선어를 가르쳐 준 첫 사람이 현재 세브란스 의전의 교수로 있는 고명우(高明宇) 씨의 부친이었다. 나의 첫 어학교사의 아들이 후에 나와 함께 한 학교에서 일하게 되었다는 것은 기이한 인연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흥미로운 일은 그해 여름 곧 1893년 8월 6일 주일, 부산에서 첫 세례식이 있었다. 이 세례식은 한국인들에 대한 첫 세례가 아니라는 점에서 주목 받지 못했지만 선교사 자녀들을 위한 세례식이었다. 그러나 부산지방에서 행해진 첫 세례식이라고 할 수 있다. 이날 베어드의 사랑채에서 진행된 예배에서 한국인들도 참석했지만 서울서 휴가 차 온 마펫은 베어드의 첫 딸 낸시 로즈(Nancy Rose)에게 유아세례를 베풀었다. 그리고 베어드는 얼마 전에 태어난 에비슨 의사의 넷째 아들 더글러스에게 유아세례를 베풀었다. 낸시 로즈는 1892년 7월 5일 출생했는데, 첫 돐을 맞아 세례를 받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로부터 약 10개월 후인 1894년 5월 13일 뇌척수막염으로 사망했고 그도 복병산에 묻혔다. 참고로 부기하면 한국인에 대한 첫 세례식은 1894년 4월 22일 호주선교부가 얻은 3사람, 심상현, 이귀주, 이도념에 대한 세례였고, 부산에서 두 번째 세례식은 약 3개월 후인 7월 15일 베어드가 얻는 첫 개종자들에게 베푼 세례였다. 8월말까지 부산에 체류하던 에비슨 가족은 부산에서 배를 타고 재물포를 거쳐 서울로 갔다. 우연하게도 그 배 안에서 고종 황제의 명으로 미국 시카고에서 열리는 세계박람회에 참석한 한국 사절단과 함께 미국을 방문하고 돌아오는 알렌 의사를 만났다. 그래서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서울로 행했고, 그때로부터 42년간 한국을 위해 봉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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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상규교수의 역사탐색
    2017-05-29
  • [시사칼럼] 빅 피플(big people)
    2015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Svetlana Alexievich)가 최근 ‘2017 서울국제문학포럼’에 참석하기 위해서 방한했습니다. 우크라이나에서 태어나고 벨라루스에서 활동하는 그녀는 일명 ‘목소리 소설(Novels of Voices)’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한 장본인입니다. 여기서 “목소리”란 작가가 직접 인터뷰한 사람들의 목소리를 의미합니다. 보통 작품 한 편을 집필하는데 200-500명을 인터뷰하고 그것을 기반으로 탄생하는 소설이기 때문에 ‘소설 합창(chorus)’이라는 재미있는 별명이 붙어있기도 합니다. 여간 힘든 작업이 아닙니다. 몇 번씩이나 같은 사람을 찾아갈 때도 있고, 그렇게 해서 모인 자료를 정리하고 편집하는데 5-10년이 걸릴 때도 있다고 하니 말입니다. 한국에는 노벨상 수상 직후에 『세컨드 핸드 타임』(김하은 옮김, 이야기가 있는 집)이라는 책이 번역·출간되었습니다. 부제(副題)가 “호모 소비에티쿠스(homo sovieticus)의 최후”입니다. 그렇습니다. 소련 공산주의의 쇠퇴와 몰락이 배경입니다. 그러다 보니 러시아 내부적으로는 ‘안티’가 월등히 많다고 합니다. “일부는 위대한 소련을 깎아내리고 그 더럽고 비참한 실상을 낱낱이 드러내 보여 얻고자 하는 것이 무엇이냐며 목소리를 높이고, 더러는 이건 문학이 아니라 기획취재라며 힐난한다.”(김하은, 659 p.) 하지만 이 책은 평단이나 작가의 말이 아니라, 실제로 역사의 현장을 살아낸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퇴직 노동자, 건축가, 작가, 의사, 평범한 여대생 등의 이야기로 가득합니다. 작가는 말합니다. “평범한 사람들의 역사가 그냥 사라지지 않도록 하는 게 나의 임무다.” 참으로 역설적이지 않습니까? ‘호모 소비에티쿠스’란 말은 ‘사회주의적 인간’이란 뜻입니다. 마르크스-레닌주의자들은 옛사람 아담을 새로운 유형의 인간으로 개조할 수 있다는 신념으로 또한 실제로 개조하려는 실험에 막대한 시간과 물질과 장비와 인력을 쏟았지만 결국은 역으로 자신들이 신봉했던 이념의 몰락이라는 결과를 자초하고 말았습니다. “국가는 역사 속에서 서민들을 이용하고 죽게 만들었다. (하지만) 내 책에 나와 있는 작은 사람들은 역사의 영웅들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스몰 피플(small people)’이란 말 대신 ‘빅 피플(big people)’이란 말을 쓰고 싶다.”(작가와의 인터뷰 중에서 인용) 그렇습니다. 역사를 움직이는 주체는 조지 오웰이 『1984』에서 언급한 ‘빅 브라더’도 아니요, 무라카미 하루키가 『1Q84』에서 풍자적으로 묘사한 ‘리틀 피플’도 아니요, 평범해 보이는 진정한 영웅들 곧 ‘빅 피플’이라는 알렉시예비치의 견해는 거대한 변화를 겪고 있는 작금의 우리에게 공감되는 바가 큽니다. 그런데 소개한 책 후반부에는 뜻밖에 이런 내용이 등장합니다. “난 독방에서 사형을 기다리고 있었어요. 생각을 많이 했어요. 사면이 벽인 이곳에서 누가 날 도와주겠어요? 그런 곳에 있으면 더 이상 시간은 무의미해지고 뭔가 추상적인 개념이 되어버려요. 난 아주 큰 공허함을 느꼈어요.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나도 모르게 내 속에서 소리가 터져나갔어요. ‘주님, 만약 계시다면 도와주세요! 날 버리지 마세요! 난 기적을 바라는 게 아니에요. 나한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이해할 수 있게 해 주세요.’ 그리고는 무릎을 꿇고 기도를 했어요. 주님은 주님을 구하는 자들을 오래 기다리게 하지 않으세요.”(625 p.) 단순한 개인들의 합만으로는 될 수 없고, 오직 주님 안에서만 그리될 수 있다는 고백처럼 들립니다.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고후 6:9-10) 그렇습니다. 주님 안에 있을 때 지극히 작은 자들이야말로 동시에 지극히 큰 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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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사칼럼
    2017-05-29
  • [교회학교를 살린다] “교사가 부모다.”
    필자가 강의를 하러 갈 때면 교회마다 같은 질문을 받곤 한다. “교회학교를 살리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할까요?” 기독교교육학을 전공하고 교회교육의 현장을 경험을 했던 필자의 대답은 늘 한결같다. 교사다. 좋은 교사가 있어야 한다. 물론 좋은 교역자도 있어야 하고, 좋은 교회시설도 반드시 필요하지만 결정적인 요소로서 좋은 교사들이 많이 있을 때, 교회학교는 부흥한다. 그렇다면 좋은 교사란 어떤 사람일까? 지난 해 장로회신학대학교에서 기독교교육과 1학년 새내기들과 교육심리학 수업을 함께 할 때의 일이다. 수업 중 좋은 교사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 있었다. 당시 우리 클래스에서는 어린이들과 청소년들에게 최고의 인기를 자랑하는 조앤 롤링의 베스트셀러 소설 해리포터 시리즈에 등장하는 교사들을 분석하고 어떤 교사가 과연 좋은 교사인지 연구해서 발표하는 시간을 가졌다. 여러 신입생들의 풋풋하고 재기발랄한 발표가 이어졌다. 그런데 뜻밖의 결과가 나왔다. 맥고나걸 교수나 루핀 교수처럼 실력 있고 잘 가르치는 여러 교사들을 제치고 거인 해그리드가 가장 좋은 교사로 평가받은 것이다. 그 이유는 해그리드가 비록 실력은 떨어질지 모르나 주인공 해리 포터를 자식처럼 사랑하고 격려하고 위로하는 등 주인공의 인생에 큰 영향을 주었다는 점에서 높은 점수를 얻은 것이었다. 다른 여타의 과목들과는 달리 기독교교육을 수행하는 교사에게 가장 필요한 조건은 ‘사랑’이라는 사실을 이제 막 기독교교육학을 시작한 학부 1학년 학생들도 이미 잘 알고 있다는 사실에 필자는 매우 안도감을 느꼈다. 일반적으로 교사라 함은 지식과 방법론 등 전문성을 갖춘 프로페셔널한 사람을 떠올린다. 그리고 실제로 사회는 이러한 교사를 좋은 교사라고 지칭한다. 그러나 교회학교 교사는 어떠한가? 교회학교 교사들은 전문가라기보다는 아마추어이다. 그러나 아마추어란 말의 어원이 ‘사랑’이듯이 아마추어 교사들은 열정과 사랑이라는 측면에서는 전문가를 훨씬 뛰어넘는다. 어린 시절 나를 가르쳐주셨던 선생님들은 일주일 내내 직장생활을 하시고도 주일 아침이면 어김없이 성경공부 자료를 가지고 나타나셨다. 뿐만 아니라 주중에는 전화도 주시고, 때로는 선물이나 간식까지 자비로 사주기도 하셨다. 여름성경학교를 위해 일 년 치 휴가를 다 쏟기도 하시고, 무더운 여름 비 오듯 땀을 흘리시며 함께 찬양과 율동을 하시는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수많은 교회의 중직자들이 교회학교 선생님들의 손에 자라서 지금도 교회에 기둥처럼 쓰임 받고 있지 않은가? 실제로 교회학교 교사들을 대상으로 ‘내 인생의 선생님’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어보면 좋은 교사에 대한 기억들은 그분들이 가르쳐주신 내용이 아니라 그분들이 베풀어주신 사랑과 관심이었다. 우리는 아이를 입양할 때 ‘가슴으로 낳은 아이’라는 표현을 하곤 한다. 신앙교육 또한 입양과도 같다. 교회학교 교사는 부모이며 교회학교 학생은 가슴으로 낳은 내 아이이다. 예전에는 믿지 않는 가정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경우가 많았고, 믿는 가정일지라도 부모님이 신앙에 영향을 주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다음세대들이 교회학교 교사들의 헌신적인 사랑과 가르침으로 신앙인으로 바르게 자라게 되었다. 물론 가정에서 철저한 신앙교육이 수행되면 참 좋겠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라도 절망할 필요는 없다. 교회학교 교사들이 신앙의 멘토가 되어서 반 아이들을 ‘가슴으로 낳은 아이’로 여기고 돌보아줄 때, 교회학교는 스마트폰이나 게임이 줄 수 없는, 재미를 뛰어넘는 사랑과 감동으로 가득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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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05-29
  • [교회법률상식] 제101회 총회 재판국의 현상을 진단한다(1)
    -상소 건의 재판은 반드시 하회 서기가 보낸 서류로 재판해야 -상소 건은 하회가 재판한 사실이 없으면 성립되지 않아 모 신문사가 보도한 기사 내용들을 통하여 오랫동안 말만 무성했던 합동 총회 재판국의 현상을 진단함으로 총회의 개혁을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그 이유인즉 총회 재판국이 헌법대로 재판을 하지 않으면 어떤 방법으로도 교단의 개혁은 요원하고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1. 사실 관계 합동 교단 제101회 총회 재판국은 “김제노회 하○○ 씨 외 1인의 김제노회 백○○ 씨에 대한 상소” 건을 재판했다고 하면서 그 “판결문”을 일개 상비부장에 불과한 총회 재판국장의 명의로 치리회장인 김제노회장을 수신인으로 하여 아래와 같이 하달하였다. “문서 번호 : 본부 제101-866호, 시행 일자 : 주후 2017. 4. 21. 수신 : 김제노회장, 제목 : 총회 재판국 판결문 교부 (첨부 : 판결문) 판결문 (김제노회 원평교회 하○○ 씨 외 1인의 김제노회 백○○ 씨에 대한 상소) 1. 김제노회는 피상소인 백○○ 씨의 목사직을 면직하고 출교하라. 2. 김제노회가 이를 순종하지 아니 하거나 부주의로 처결하지 않을 시는 총회가 직권으로 주문 1행대로 처결하고 김제노회의 총대권을 3년간 중지토록 한다. 주후 2017년 4월 20일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 재판국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 재판국장 직인) 재판국장 윤○○ (인) 서기 배○○ (인)”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김제노회는 하○○ 씨 외 1인이 김제노회 백○○ 씨에 대한 고소장에 대하여 김제노회는 노회를 소집하여 재판국을 설치하려고 토의하는 중에 재판국을 설치하지 않고 고소장을 반려하였는데 본 건 고소인들은 총회에 고소장을 제출하였고, 총회가 파한 후에 하회가 재판도 하지 아니한 사건을 제101회 총회 파회 시에 없어진 헌의부(아무리 총회 결의 운운해도 헌법 권징 조례 제134조와 상충되므로 총회 결의는 시행할 수 없다.)가 재판국으로 보낸 것을 총회 재판국은 제101회 총회의 위탁을 받지도 않은 사건이요 재판할 수도 없는 사건에 대하여 재판을 했다고 하면서 판결문을 작성하였다. 보다 더 엄청난 총회 재판국의 부패 현상은 재판국 내부의 금품수수에 관계되는 전화 통화 내용으로서 다음은 이○○ 목사와 김제노회의 증경 노회장인 김○○ 목사와의 대화 중 요약된 내용은 아래와 같다. “여보세요, 예예 이○○ 목사님 맞으시지요? 나 김○○ 목사거든요 원평교회 목사님을 설득했어요. 그러니까 하겠다고 말하더라고요. 얼마 선을 하면 될까 하는 것을 목사님 지도를 받고 싶어요, 저는 재판국원을 하면서 정치의 흐름을 압니다. 국장님과 서기는 아무리 어려워도 영향력이 있어요. 국장하고 서기에게 전화를 걸어가지고 만나자면 안 만날 거예요. 어디냐고 물어서 직접 만나세요. 보통 국장하고 서기는 반값을 주셔야 합니다. 최저로 이야기하면 3 정도는 생각해야 할 거예요., 도시 교회 같으면 5천 이상해야 할 텐데 여기는 농촌이라 2천정도 이렇게 말을 해 보았어요., 예예 고 선에서 국장을 직접 만나서 하나를 딱 내 놓으세요. 딱 밀어버리세요., 무슨 말입니까?, 하나, 아아아아, 천, 예 알겠습니다., 나머지는 나중에 쓰고 수표를 주면 안 됩니다. 현금으로 딱 내 놓으시고 죄는 주시되 이 사람이 이 곳에서 근신하면서 일을 하게 해 주세요 그러면 감을 잡습니다. 그 사람이 우리에게 정치를 합니다. 윤○○ 씨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내가 또 알아서 할게요, 배○○ 목사에게는 어떻게?, 그것은 나중에 하고요., 예예 알겠습니다., 우리 소위원들이 5명 아닙니까? 그들에게도 교통비라도 쓰세요. 하고 20만원씩이라도 돌리면 효과가 있을 것입니다., 윤○○한테 먼저 추라이하고 그리고 소위원은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예예 감사해요,” 이상과 같은 녹음 파일이 필자에게도 전달이 되었으니 정치권에도 이미 알려졌으리라고 짐작이 된다. 위의 전화 내용대로 금품 수수에 관한 사실 여부에 관계없이 어떤 방법으로든지 본 건은 철저히 조사 처리할 대상이라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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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05-29
  • [중독칼럼] 짝퉁을 명품보다 더 값비싼 댓가를 치르는 세대
    지난 칼럼 내용 중 ‘게임은 많은 시간을 빼앗기는 것을 넘어서서, 이상하리만큼 한국에서 현질(현금을 지르다의 준말)을 유도하여 엄청난 이익을 남기고 있다. 지난 달 삼성이 1분 순수 이익이 11조였는데 규모가 1만분의 1도 안되는 게임 회사가 1년 동안 벌어들인 수익이 1조원이 넘습니다. 약 3조의 매출을 통해 그들은 어디에 지출을 했을까요? 거의 대부분 광고 생각됩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배를 불리고 있습니다.’ 이번 대선 결과로 게임 산업에 변화가 온다. 이제 더 이상 사행성처럼 조장되는 매월 적게는 몇 십만원 많게는 몇 억씩 쓰는 게임 소비자들이 줄어 들 전망이다. 왜냐하면 로또 복권식 아이템 등급 조정에 대한 법적 제재가 들어가기 때문이다. 이 소식은 오랫동안 기도해 오던 부모들의 가장 큰 골칫거리를 해소해주는 법안이다. 그러나 법안이 통과 되고 게임사들이 어떤 방식으로 소비자들에게 다가 가는지를 확인해야할 사안이다. 왜냐하면 핸드폰 보조금 제재 법안도 결국 의미 없었으며 회사만 배불리는 결과를 낳았기 때문이다. 리니지 레볼루션, 이달에는 리니지M이라는 이름으로 스마트폰용 새로운 게임이 매달 출시되고 있다. 그리고 연간 출시되는 스마트폰 게임 앱은 50만개 넘는다고 한다. 이 통계는 2-3년전 통계다. 인디게임이라는 산업을 통해 더 많이 출시 될 것이다. 그러나 사업자들은 이익을 추구하기 때문에 끊임없이 광고 투자와 정치적 로비 등을 통해 사회 잇슈를 만들어낸다. 소송도 그 방법 중 한가지이다. 즉, 노이즈 마케팅이다. 그러나 이러한 상술에 청소년들은 노출 되어 있고 자신들이 짝퉁을 명품보다 더 값비싼 댓가를 치르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이태백(20대 태반이 백수다.) N포세대, 혼족문화, 그리고 요즘 유행하는 것은 YOLO족이다. You Oly Live Once의 약자다. 한번 뿐인 인생 내 마음대로 살아 보겠다는 의미가 깊게 박혀 있는 철학이다. 방송사들은 이 욜로족의 의미를 잘 포장하여 전달하려 한다. 그러나 인간은 죄인이다. 거룩한 의미에서 인생을 살아가려 하지 않는다. 이들에게 새로운 가치관의 변화는 결국 말씀을 듣지 않으면 그들은 기회를 놓치게 될 것이다. “엑사고라조메노이(엡5:16)” 댓가를 치르고 기회를 붙잡아야한다. 젊은이들은 자신의 가장 아름다운 삶인 10대와 20대의 삶을 방종으로 치닫고 있다. 이 문제의 대한 해답은 우리가 그들에게 얼마나 슈르드하게 다가가느냐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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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05-29
  • [은혜의 말씀] 틈새 신앙(막16장9~16절)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어떤 사람들에게 나타나셨을까요? 예수님의 죽음 이후 낙심하고 실의에 빠진 사람들은 자신들이 있던 곳으로 돌아갔습니다. 예수님께서 과연 자신들이 바라던 메시야가 맞는지 의구심마저 듭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죽음 앞에 떳떳치 못한 자신들의 모습이 부끄럽고 죄송합니다. 능력이 많으신 예수님이 그렇게 처참하고 허망하게 돌아가신 것이 어쩐지 석연치 않습니다. 예수님 옆에 있으면서 출세도 명예도 기대했건만 하루아침의 물거품이 되어 버린 현실이 믿기지 않습니다. 자신들이 헛된 시간을 보낸 것이 아닌가 하며 낙심하며 낙망해 있을 때 주님은 그들을 찾아오셨습니다. 제자들의 믿음 없음을 질책치 않으시고 함께 음식을 잡수시고 얘기 나누시며 부활을 확증시켜 주십니다. 그제야 예수님이 진실한 구세주이심을 확신하게 된 제자들은 예수님의 승천하시기 전 당부대로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전하며 제자를 삼고 주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지키게 하는데 자신들의 목숨조차 아까워하지 않고 사역을 감당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 이후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도 나타나셨습니다. 그들이 알아 볼 수 없는 모습으로 나타나셔서 주님의 고난과 부활과 그로 인해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셨음을 설명하며 슬퍼하며 낙심하고만 있지 말라고 하십니다. 마음의 위로를 주시고 기쁨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실의에 빠져 주저앉아 있는 이들을 찾아오셨습니다. 언제까지 슬퍼하고 낙심해 있을 거냐며 그들을 일으켜 세우십니다. 희망이 사라진 이들에게 절망가운데 소망을 되어 주셨습니다. 이처럼 주님의 부활은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감격과 기쁨 이상이고 살아갈 이유이며 그들로 주님을 전하지 않고 그냥 있을 수 없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 영광을 버리시고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죽음으로 우리를 향한 사랑을 확증하셨고, 부활하심으로 의로 우심을 취하셨으며, 믿는 우리를 의로 우심에 동참케 하십니다. 이보다 더 복되고 기쁜 소식이 어디 있을까요? 오늘 이 시대 많은 사람들이 낙망에 빠져 지쳐 있습니다. 우리는 살아 숨 쉬는 날 동안 누구나 크고 작은 힘든 일들을 겪게 됩니다. 수고와 슬픔이 많습니다. 희망이 보이지 않는 현실 앞에 낙심하여 주저앉아 헤맵니다. 사람이 싫고 하나님이 원망스럽습니다. 내 마음의 감정 속 틈새가 벌어지면 사소한 것이라도 천당과 지옥을 갈라놓습니다. 내 마음의 신앙의 틈이 생길 때 마귀는 우는 사자와 같이 삼킬 자를 두루 찾듯이 우리를 넘어뜨리기 위해 사력을 다합니다. 마귀에게 틈을 주어서는 안 됩니다. 암담한 현실 너머 부활의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부활하시어 낙심한 제자들을 찾아주신 주님께서 오늘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떨치고 일어나 힘을 내어 주님을 바라보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주님께 무거운 짐을 내려놓을 때 쉼을 얻음으로 평안함을 누릴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신 감격과 기쁨이 오늘 우리의 삶 가운데 회복되어 이 암담한 시대에 굴하거나 두려워 말고 슬픈 기색과 우울함은 떨쳐 버리고 부활의 찬란한 빛을 감당하는 우리 성도님들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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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05-29
  • [기성준 작가의 시골교회 이야기] “꿈같은 일들을 하나님께서 해주셨어요!”
    이번 글에서 소개해 줄 교회는 제주도에 위치한 교회이다. 제주도는 청정지역이고 천의 자연을 가진 축복받은 곳으로 널리 알려있다. 그러나 제주도 속 가까이 다가가 보면 많은 아픔과 상처들이 있었다. 제주도 토박이 복음율은 굉장히 낮다고 한다. 심지어 이혼율은 우리나라에서 제일 높은 곳이다. 특히 육지에서 온 사람들에게 받은 상처들이 많다고 한다. 그래서 외부사람들에 대해서 폐쇄적인 부분이 많다고 한다. 겉으로 보지 못했던 제주의 모습들, 그 속에서 선교적 사역을 감당하고 있는 제주 꿈의교회 임영모 목사님의 아름다운 사역 이야기로 떠나보자. ▲ 제주 꿈의교회 제주도에서 어떻게 목회를 시작하셨나요? “한라산 기도원에 올라가서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 기도를 하는데 하나님께서 제주도민들, 토박이들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을 주셨어요. 제주도에 교회가 446개 정도가 있는데, 복음율이 10% 가까이 되어간다고 해요. 복음율이 이 정도 되는 이유가 육지에서 이주 해온 사람들 중에 크리스찬들이 많다고 합니다. 그런데 제주도 토박이 복음율은 채 1%도 안 됩니다. 교회에 100명이 있다면 제주토박이 크리스찬이 10명도 안 되는 교회가 많다는 거지요. 실제 제주토박이 인구에 비하면 복음화율이 너무 낮은 거예요. 기도를 하면서 그게 너무 선명하게 보였어요. 목사 안수 받을 때 논물 쓸 때 ‘제주 복음화율 1%의 향상을 위한 방안 제시’ 라는 주제로 논문을 썼어요. 책도 많이 보고 제주 선교 역사도 살펴보니까 제주 토박이들 복음화율이 낮았어요. 그리고 제주도에는 18000여개의 잡다한 신이 있어요. 그러니 우상숭배도 심하고 잡신에 이게 내 마음에 너무 안타까움으로 남았습니다. 제주 토박이 영혼 구원을 해야겠다. 그래서 이제 제주 토박이가 제일 많다는 이 지역으로 왔어요.” 한라산 기도원을 찾아 온 성도들과 함께 꿈의 교회를 개척하였다. 돈도 없고, 땅도 건물도 없이 무작정 교회를 개척하기로 하였다. 부동산을 찾아가서 땅을 알아보다가 외곽지역을 저렴한 땅이라고 소개받은 것이 바로 집 앞의 땅이었다. “땅을 계약을 하고 건물을 지을 돈이 없었어요. 땅값은 대출받았는데 돈이 한 푼도 없었지요. 건물은 지어야 되는데 생각해보니 옛날에 교회 개척하면 도와준다던 장로님 한 분이 생각났어요. 그분이 땅을 알아보더니 땅이 너무 좋다고 했어요. 목사님 땅 정말 잘 샀다고, 자기가 교회를 지어주겠다고 했어요. 대출을 받은 중 남았던 2~3천만원을 계약금으로 주고 건축을 시작했어요. 공사가 다 끝나고 이 건물로 대출을 받아보니까 그분께 건축비를 드리고도 남을 정도로 대출이 되었어요. 교회가 생각지도 못한 극단의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준비해주셔서 그때 그때 사람도 준비해주시고 만들어 가셨어요. 그러고 건물이 만들어 지고 하니까 성도들이 헌금도 하고 교회 안에 들어 갈 비품, 교회 의자들은 성도님들이 헌신하셨죠. 생각해보면 하나님께서 다 하셨죠.” “1년을 그렇게 하다보니까 그 해 2015년 첫해에 40~50명이 모이더라고요. 사람을 막 보내주셨어요. 여기에 이제 목사가 교만함이 생겼어요. 교만함이 뭐였냐면 한 사람 한 영혼을 전도해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대로 이 영혼을 새 생명으로 살려 나가는 그런 어떤 영혼에 대한 깊은 열정과 사랑. 그 마음이 없었어요. 너무 쉽게 뭐가 되어버리니까 사람 귀하다는 걸 몰랐습니다. 그러던 차에 문제가 하나씩 교회에 생겼어요.” 목회를 하면서 사람들에게 상처도 받고, 오해도 받고, 심지어 교회가 가압류까지 당한 적이 있다. 이런 일들을 경험하면서 깨달은 사실이 있다고 한다. “은행 대출은 늘어났고, 원금까지 갚는다는 조건으로 대출을 받은 거라 한 달에 이자만 200만원을 갚아야했어요. 한 달 헌금으로는 부족하고, 사례비 역시도 터무니없이 부족했지요. 이거 교회 할 수 있겠나라는 인간적인 생각이 너무 많아졌어요. 괴롭고 힘들고 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기보다는 계산을 먼저 했습니다. 정말 고민이 되고 힘들 때는 기도가 안 되었어요. 마음을 내려놓게 되었어요. ‘인간인 내가 망하는 게 아니라 망해도 하나님이 망하는데 왜 그러냐 내려놓아라’라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그 음성을 듣고 가만히 생각해보니 하나님이 망하실 분은 아닌 거예요. 그래 이거 하나님 알아서 하시겠다하면서 마음을 내려놓으니 기도가 되었습니다. 하나님 하실 것이라는 확신으로 기도를 하면서 그냥 정말 몇 명 안 되는 이 한 사람에게 마음을 쏟게 하셨어요. 돈에 대한 생각은 전혀 없이 한 명이라도 바르게 세우자, 한 명이라도 제대로 예수님 믿게 해주자. 그게 내 사명이다. 토박이 전도에만 마음을 다 심자. 지금까지 거기에 집중하면서 가정교회를 시작하기 시작했습니다." ▲ 꿈의교회 임영모 목사님과 함께 지역을 섬기며 좋은 소문이 나는 꿈의 교회! “의성교회에서 해마다 해외로 선교를 나가다 국내 선교로 전향을 하면서 인연이 되었어요. 첫 해에 와서 교육관 컨테이너로 만들어주고 컨테이너 안에 작은 방 하나 벽지조차도 시트지로 벽 화이트보드가 되어있고 스크린과 50인치TV, 에어컨 등등 주민들을 봉사하는 의료, 미용, 경락마사지 팀들이 왔지요. 그랬더니 첫해에 지역주민들이 정말 좋아했어요. 이후로 미용팀이 꾸준히 봉사를 오면서 제주지역에서 소문이 나기 시작했어요. 꿈의 교회는 사람들을 섬기는 교회다라고요. 개척 첫해부터 초등학교, 중학교에 장학금을 주고, 그리고 의탁노인이나 한부모 가족들에게 쌀을 주고 하니 좋은 소문이 나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미용봉사와 집회를 하면서, 마을사람들을 위한 잔치도 열어요. 그렇게 지역을 섬기는 일에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연결 시켜주셔서 문제없이 잘 되게 하십니다.” 꿈같은 일들이 일어나는 꿈의 교회 “이번에도 우리가 교회 행사를 하고 주일학교 잔치를 하는데, 전단지, 현수막을 하는 비용을 연락이 끊겼던 장로가 된 친구가 무료로 전부 인쇄를 해준다고 했어요. 교회 이름도 꿈의 교회지만 정말 꿈같은 일들을 하나님께서 해주셨어요.” 꿈의 교회 로고는 무지개 색깔의 막대기가 있다. 막대기는 하나씩 누워있는 사람, 키 큰 사람, 키 작은 사람 색깔도 다양 각양각색의 사람들을 뜻하며, 이 사람들이 십자가를 중심으로 모인 교회를 뜻한다. “로고처럼 하나님이 원하시는 무지개 꿈을 이루어 드리고, 성도들이 신앙생활하면서 정말 행복한 꿈을 꾸는 그런 교회가 꿈의 교회입니다. 그리고 우리 아이들의 꿈이 이루어지는 교회가 꿈의 교회이고 그래서 지금까지 하나님이 우리 꿈의 교회를 통해서 일하시고 계십니다.” 꿈의 교회 옆모습이 로고처럼 생겼다. 십자가 중심으로 각양각색이 모여 하나님을 섬기는 교회가 바로 꿈의 교회이다. 앞으로 꿈의 교회에서 꿈같은 일들이 더 많이 일어나길 기대한다. 그리고 이 글을 보는 이들에게 꿈의 교회를 위한 중보와 따뜻한 섬김이 이어지기를 소망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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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05-29
  • [성서연구] 산 같은 사람(다니엘서 6장 25-28절)
    주전 626년에 나보폴라살은 신 바벨론 제국을 세웠고, 주전 605년에 이 나라를 이어받아 주전 562년까지 43년 동안 통치하면서 전성기를 연 사람은 느부갓네살이었습니다. 그러나 초강대국 바벨론은 느부갓네살 이후 4대만인 주전 539년, <나보니두스> 때에 메대와 바사에 의해 무너졌습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나보니두스가 나오지 않고 <벨사살>이 등장하는데, 일반 역사 기록에 벨사살이 없다 보니 일부에서는 성경을 믿을 수 없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19세기에 고고학자들은 나보니두스가 17년 동안의 재위 기간 중 10년 정도의 시간을 <아라비아의 테이마>에 거주하면서 통치를 맏아들인 벨사살에게 맡겼다는 증거를 찾아냈습니다. 다니엘서 5장은 벨사살이 다스리던 바벨론 제국이 메대와 바사의 연합군에게 무너지고, 나라가 다리오에게 넘어가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때가 주전 539년 10월 12일이었습니다. 본문은 이 다리오가 다스리던 때의 일입니다. 다리오는 전국의 백이십 도를 세 명의 총리로 관할하게 했는데, 이 제도를 바꾸어 군계일학인 다니엘에게 전국을 다 맡길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나머지 두 총리와 신하들이 다니엘을 제거할 음모를 꾸미게 되었고, 아무리 뒤를 캐도 고발거리를 찾지 못하자 그들은 다니엘의 신앙을 이용하기로 했습니다. 대개 영웅은 교만으로 인해 어리석기 쉬운데 다리오도 그러했습니다. 간교한 신하들은 삼십 일 동안 그 어떤 신에게도 기도하지 말고 다리오에게만 기도하게 하고, 어기면 사자굴에 넣게 하자고 아부했고, 다리오는 그만 이 어리석은 법에 어인을 찍어 반포하였습니다. 그리고 다니엘은 그들의 음모대로 걸려 들었습니다. 다니엘 6장 10절은 그 모습을 이렇게 기록하였습니다. <다니엘이 이 조서에 왕의 도장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윗방에 올라가 예루살렘으로 향한 창문을 열고 전에 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의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 고발을 받은 다리오는 자신의 어리석음으로 아끼는 신하를 죽이게 된 것을 탄식했습니다. 그런데 왜 다니엘은 왕명을 어기고 하나님께 기도했을까요? 그 이유는 <다니엘에게는 왕이 따로 계셨기 때문>입니다. 다니엘은 다리오 왕을 섬겼지만, 그의 진정한 왕은 여호와 하나님이셨습니다. 다니엘은 메대와 바사 제국에 살았지만, 그가 속한 진정한 나라는 하나님의 나라였습니다. 그는 믿음의 지조를 꺾어서라도 권력을 유지하기 원하는 불나방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지상의 법보다는 영원하신 하나님의 법에 순종하길 원했습니다. 그는 왕궁 옥좌에 앉아 있는 왕이 아닌, 하늘 보좌에 계신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는 생각과 결정과 행동의 기준을 세상 나라에 두지 않고, 하나님의 나라에 두었습니다. 그는 세상 나라의 법을 어겨 죽임을 당하더라도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삶을 얻길 원했습니다.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는 그를 사자굴에서 지키셨고, 그 결과로 본문에서 보듯이 다리오왕이 여호와 하나님만이 참 신이며, 그의 나라만이 무궁함을 찬양하게 되었고, 다니엘 자신은 네 나라와 여덟 왕이 바뀌는 역사의 소용돌이 한 복판에서도 태산처럼 우뚝 서서 형통하였습니다. 새 대통령과 새 정부가 들어섰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일희일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지상의 통치자와 나라보다 더 높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나라에 마음을 두고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지상의 정부가 어떻게 변화되든지 우리는 진정한 왕이신 하나님의 통치를 받으며 살아야 합니다. 때로 이로 인해 사자굴에 들어간다 하더라도 우리의 기준은 하나님이십니다. 부디 지금도 우리를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그 분께 모든 것을 맡기고 초연하게 살길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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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0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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