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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임중 칼럼]이름보다 삶이 중요하다
    전국 목회자 세미나 강사로 갔을 때 들은 이야기다. 많은 사람들이 3박 4일 일정의 강사가 광고되었는데 서임중 목사라는 이름 때문에 왔다고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말했다. “이름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서임중 목사의 삶이 중요한 것입니다.”아무리 훌륭하고 위대한 사람으로 명성이 높아도 그 사람의 이름을 알려고 하는 것보다는 그 사람의 마음을 알려고 하는 것이 더 좋은 것이다. 그 마음을 알려면 그 사람의 삶을 살펴보아야 한다. 어떤 삶인가를 알게 되면 어떤 마음의 소유자인가를 알 수 있다. 이름이란 그 사람의 모든 것이다. 그래서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작명소가 있어서 좋은 이름을 지으려고 가히 몸부림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인터넷에서도 작명소가 호황을 누린다고 한다. 이름 짓는데 수십, 수만 원까지 들여가면서 이름을 짓는 경향이 있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성경에서도 이름을 짓는 일에는 아주 신중했다. 모든 성경의 위인들이 이름대로 살다가 이름대로 죽은 경우가 많은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구약시대에는 그 이름을 지음에 있어서 생활환경, 기타에서 취한 것이 여러 가지로 보여진다.동·식물에서 이름들을 취하여 명명했는데 다말은 종려나무, 데라는 염소, 레아는 들소, 라헬은 양, 갈렙은 개, 드보라는 벌, 요나는 비둘기 등이다. 사람의 얼굴 모습이나 성질에 따라 지은 것도 있다. 에서는 털 많은 자, 십보라는 아름다움 등이다. 그리고 부모의 경건성, 감사 등에 의해 지어진 이름도 있는데 시므온은 여호와께서 들으셨다, 유다는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등이다. 사건과의 관련해서 지어진 것은 야곱이 그 막내아들의 이름을 베노니(내 슬픔의 아들), 베냐민(오른손의 아들)으로 바꾼 것은 흉조(凶兆)에서 길조의 이름으로 바꾸는 데 있었다. 그런가 하면 엘리의 며느리 비느하스의 아내가 남편의 사망 소식을 듣고 해산하여 낳은 아이를 이가봇(영광이 이스라엘에서 떠났다)이라고 한 것이 그 예다. 특별한 일로 이름이 바뀐 것도 있다. 야곱이 이스라엘로, 요셉이 사브넷바네아로, 시몬이 베드로로, 사울이 바울로 된 일들이 그것이다. 그 외에도 예언적, 상징적으로 명명된 경우도 있고, 하나님에 관계된 이름도 많으며, 가나안의 신 바알과 관계된 이름도 나타난다. 신약시대에는, 여러 나라의 국어가 사용되어 그리스명, 라틴명, 히브리명 등의 이름, 혹은 한 사람이 둘이나 세 가지 이름을 가진 경우도 있다. 그런데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은 이름도 중요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의 삶이 더 중요한 것이다. 이름을 잘 지었다고 해서 그 사람이 반드시 그 이름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 삶을 통하여 이름을 빛내는 것이 더욱 유명인(有名人)이 되는 것이다.예수라는 이름은 참으로 존귀한 이름이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삶이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들의 이름 하나하나는 존귀한 이름들이다. 그런데 더욱 중요한 것은 그들의 삶이다. 그것을 잊으면 안 된다. 삶이 이름이 되어야 한다. 예수님을 배반한 가룟 유다의 ‘유다’라는 이름은 ‘그를 찬미하자’, ‘그를 기억하자’라는 아주 좋은 의미의 뜻을 지닌 이름이다. 그런데 가룟 유다는 그의 이름값을 하지 못하고 인간으로서 가장 실패한 인생의 주인공이 되었던 것이다. 무슨 뜻인가? 이름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의 삶이 중요한 것을 시사하는 것이다. 신학적 인간론에서 인간을 Being이 아닌 Becoming으로 정의한다. 즉 존재가 아닌 존재화, 곧 되었다가 아니라 되어져 간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의 교회 지도자들의 약점이 “되었다”라는 의식에서부터 걸음이 잘못되어 가고 있기에 그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공동체의 아픔은 이루 형언할 수 없는 일들이 많이 일어나게 되는 것을 본다. 그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되어있지 않는 지도자의 지도력의 문제인 것이다. 여기서 발생하는 것이 지배자로서의 자기모순에 빠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교회에서 갖는 직분을 마치 계급사회의 직무로 오해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지도자가 아닌 지배자로 전락시키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자기 자신에 대해 정직한 이해의 부족에서 오는 현상이며 그로 인하여 공동체 전체가 아파하고 결국에는 파멸에 이르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소위 유명(有名)한 사람들의 이름이 다음 세대에까지 아름답게 우러러 존경받지 못하고 불꽃처럼 타오르다가 사그라지는 이유가 무엇인가? 이름이 자기가 아니라 자신의 삶이 자기의 이름이 되게 하여야 하지만 자기 스스로 유명인(有名人)에 도취해 분별력을 잃어버리고 삶이 이름 되게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름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삶이 중요하다. 자기 자신의 삶이 이름 되게 하여야 한다. 목사와 장로답게 살아 목사, 장로 이름이 존귀하게 되고, 그리스도인답게 살아 그리스도인의 이름이 존귀하게 되어야 한다.새해가 밝았다. 365일을 그리스도인답게 살았으면 좋겠다. 그리하여 나로 하여금,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인의 이름이 높여졌으면 좋겠다. 이 땅의 온 교회가 그렇게 아름다움을 연주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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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임중 칼럼
    2015-01-01
  • [이상규 교수]오늘의 한국교회 어찌할꼬?
    지금 한국교회는 위기에 처해있다. 한국교회 역사상 교회가 오늘처럼 사회로부터 불신을 받은 일이 없었다. 초기 한국교회는 국민적 신뢰를 받았고, 민족이 위기에 직면했을 때 교회를 향하여 도움의 손길을 애절하게 요구하고 있었다. 1890년대 초 우리나라가 시련의 와중에 있을 때 <코리안 리포지터리>(Korean Repository)는 “이 가련한 조선인들이 두 손을 뻗쳐 하나님을 찾고 있다”고 썼다. 1895년 10월 을미사변으로 백성의 체면이 처절하게 유린당하고 일본의 조선침략 야욕이 드러났을 때, 교회는 나라사랑의 노래를 지어 민족의 아픔을 평풍처럼 막고 일어섰다. 민족에 대한 충애(忠愛)로 교회는 신뢰를 받았고, <독립신문>은 기독교를 “충군애국(忠君愛國”의 종교로 인식할 정도였다. 삼일운동당시만 하더라도 기독교는 한국사회의 선한 이웃이었다. 당시 기독교 신자는 전체인구의 1%에 불과했으나 독립만세운동의 준비 및 거사 단계에서 25-30%의 역할을 감당했다. 중국 공산당운동의 아버지라 불리는 천두슈(陣獨秀, 1879-1942)는 3.1운동에 참여한 한국기독교의 역할을 알게 된 후 종교를 미신이라고 보았던 기존의 입장을 버리고, “우리는 조선의 독립운동에 참여한 사람들 중에 기독교인들이 가장 많았다는 사실을 볼 때 기독교를 경시하던 사상을 고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국 교회는 민족과 함께하는 고난 받는 교회였고, 따라서 존경과 신뢰를 받았다. 이런 전통은 해방당시까지 계속되었다. 교회는 근대학교와 서구식 병원을 세워 인재를 양성했고, 육신의 아픔을 안고 고통당하던 자들을 치료해 주었다. 금주단연운동을 전개하고 여권 신장에 기여하였고, 민주의식을 고취하고, 미신을 타파했다. 참된 효행과 바른 가정생활을 제시하였다. 뿐만 아니라 기독교는 한국의 자유민주주의 정부 수립의 근간을 제공했다. 따라서 기독교는 계몽과 계도자의 역할을 감당했다. 그런데 해방 이후 사정은 달라졌다. 신앙의 자유는 주어졌으나 해방정국의 교회는 대립하였고, 분열하기 시작했다. 친일적 기회주의자들을 해방 후에도 득세하여 교회를 혼란에 빠드렸고, 교회는 이들을 잠재우지 못함으로써 신앙적 정기(正氣)를 바로 잡지 못했다. 1950년 4월 대구제일교회당에서 모인 제36회 총회에서는 한국기독교역사상 최초로 경찰이 투입되었다. 치안(治安)을 위해서였다. 그로부터 두 달 후 6.25가 발발했다. 당시 손양원을 비롯한 많은 영적 지도자들은 한국교회의 대립과 분열이 전쟁의 내적인 원인이라고 인식했다. 1950년대 교회분열과 전쟁의 폐허 속에서 이단들이 출현하고 창궐하기 시작했고, 교회의 대 사회적 영향력은 축소되기 시작했다. 1960년대 이후 국가주도형의 성장주의에 영향으로 교회는 수적 혹은 외형적 성장에 치중하여 극심한 개교회주의에 빠졌다. 섬김과 봉사, 사랑과 배려, 절재와 검약, 겸손 등 그리스도인의 삶의 방식, 혹은 거룩한 삶에 대한 이상은 권장되지 못했다. 현세적 풍요를 신앙의 이름으로 정당화함으로써 천박한 기독교로 변질되었다. 무인가 미자격 신학교의 범람, 선교라는 이름의 상업주의, 사려깊지 못한 노상전도행위 또한 기독교의 품격을 떨어뜨리고 있다. 혹자는 무례한 기독교라고 혹평한다. 교회성장이 멈춘지 오래고 기독교 인구는 감소하고 있다. 주일학교가 사라지고 있고 교회구성원의 노령화는 심화되고 있다. 이런 판국이니 이단이 활개치고 있다. 신천지가 도래했다며 전국교회를 들쑤시고 있다. 한국교회는 위기에 직면해 있다. 오늘 한국교회는 기로의 가장 큰 문제는 지도자의 비윤리적 행태이다. 도덕의식의 상실과 함께, 성직자의 성적 타락은 심각한 수준이다. 교회의 계도적 권고는 능멸당하고 있다. 한국교회 문제는 목회자의 문제라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 무자격 신학교의 난립, 무자격 그리고 훈련되지 못한 목회자의 양산은 한국교회 근원적인 문제이다. 보다 근원적인 문제는 우리에게는 교회의 자정 능력이 없다는 점이다. 한해는 가고 새해가 되었는데, 한국교회 어찌할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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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15-01-01
  • 기독병원에 원목은 인권 사각지대
    일신기독병원 원목 정인규 목사가 60대 초반 가장 어정쩡한 나이에 지난 12월30일 원목직에서 은퇴했다. 병원 원목 6년 3개월 만에 퇴임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가 어처구니없는 병원 정관 때문인 것으로 알려졌다. 병원 상임이사 임현모 장로는 “이사장 인명진 목사의 지론에 의해 병원정관 규정을 3년에 국한하고 한 번 더 연임할 수 있다는 원칙을 세웠다”고 주장했다. 인 목사의 지론은 “병원이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고 병원 운영 정신과 주인이 노동자가 아닌, 예수가 되어야 하고 새로운 정기를 마련해야 된다”는 내용이다. 하지만 병원내에서는 인권과 민주화를 위해 평생 활동한 인 목사의 주장이 이해가 안 된다는 사람도 존재한다. 한편, 이 병원에 부임하여 집행부를 위해 헌신하고 큰 문제없이 원목활동을 해 온 정 목사는 “들어온 이후 갑자기 원목규정을 만들어 퇴사 통보를 준다는 것에 어안이 벙벙할 뿐이고 그냥 순순히 병원 발전을 위해 수용할 수밖에 없다”며 평소 온순한 성격을 그대로 드러내며 퇴임에 임했다. 이 소식을 들은 부산노회장 이종윤 목사는 “인권과 민주화의 최선봉자로 자처하고 파도타기를 잘하시는 인명진 목사가 그런 인권사각지대를 만들어 영적 지도자(원목)를 노동자와 같이 천대하는 것은 문제가 아닐 수 없다”고 직언을 날렸다. 부산노회를 비롯한 부산동노회 그리고 부산남노회가 일신기독병원 정관변경을 놓고 노회와 하등관계가 없는 독자적인 정관 졸속에 이사선임을 하는데 대해 특별대책위원회를 구성해놓고 추이를 보는 상황에 놓여 있다. 어느 병원의 한 원목은 “인 목사 자신이 교단지에 기고한 글에서 ‘조기은퇴유감’이라고 쓴 내용을 보더라도 큰 문제가 없는 병원 원목을 6년 3개월 만에 퇴거시키는 것은 앞뒤가 안 맞는 행동이다”고 따끔하게 한마디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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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야의 소리
    2015-01-01
  • 박옥수 영장 기각에 A의원 배후 거론
    검찰이 청구한 기쁜소식선교회와 IYF(국제청소년연합) 설립자 박옥수 목사에 대한 구속영장이 법원에 의해 기각됐다. 지난 12월 2일 전주지방법원 영장담당 홍승구 부장판사는 “피의자(박옥수)가 주식 거래로 실제로 금전적 이득을 얻었는지 여부와 문제가 된 주식회사의 출자금의 출처, 주식의 실질적인 소유자 등의 부분에서 다툼의 여지가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며 검찰이 청구한 구속영장을 기각했다. 이런 가운데 구원파피해자모임측은 이번 구속영장 기각에 대해 배후에 A국회의원이 있다고 주장하고 나서고 있다. 구원파피해자모임 대표인 전해동 집사는 A 의원은 박옥수 목사의 친 조카와 친분이 돈독하고 자신의 88년 생 친아들을 IYF의 봉사에 보내겠다고 하는 등 구원파 신도들보다 더 열성적으로 박옥수와 함께 해외도 다니며 활동했다”고 강조했다. 전해동 대표는 “박옥수 구원파의 교세 확장에 얼굴 마담 역할을 한다는 비난을 사면서까지 박옥수 목사와 10여년 유착을 지속하고 있는 이유를 K 의원은 해명해야 할 것”이라고 덧 붙였다. 한편, A 의원은 본지 기자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와 “박옥수 씨와 IYF측과는 특별한 관계가 없다”고 해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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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야의 소리
    2015-01-01
  • 종교계 거짓 기부금 영수증 발급
    국세청이 불성실기부금수령단체 102곳을 발표했다. 국세청에 따르면 불성실기부금수령단체 102곳 중 불교사찰과 암자나 단체가 88곳으로 나타나 압도적인 수를 차지했다. 기독교계도 교회와 선교회 등 4곳이, 대순진리회도 1곳이 적발당했다. 기독교계 4곳은 거짓영수증을 발급한 3곳인 성남 C교회(149건, 6억원), 군산 D교회(14건, 5천여만원), 일산 E선교회(21건, 1억여원)과 상속세 및 증여세법상 의무위반으로 증여세 1억여원이 추징된 부평 F교회 1곳인 것으로 밝혀졌다. 반면 천주교는 아무런 위반 단체가 없어 불교, 기독교와 대조를 보였다. 국민 신뢰도 1위 답다라는 여론이 인터넷 네티즌들을 통해 퍼지고 있어, 교계의 신뢰도와 더 큰 격차를 벌릴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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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1-01
  • 조용히 물러난 정종성 원로 장로 은퇴 스토리
    정종성 장로는 정대성 장로의 친 아우로 형제간의 우애는 남이 부러워 할 만큼 남다르다. 동생 정종성 장로는 통합 교단 총회 첫 장로 부총회장을 역임하고 전국장로회연합회가 총회에 건의해서 장로부총회장 제도를 만든 후 첫 번째 장로부총회장이다. 정 장로 덕에 장로들의 표상과 위상이 높아졌다. 동생은 지난 12월 둘째주일이었던 14일, 오후예배시간에 자신이 개척하다시피 한 가나안교회의 설립 32주년 기념행사를 마친 후 원로 장로 은퇴식으로 조용히 마무리했다. 그것도 그 자리에서 교회를 설립할 당시와 지금까지의 신앙 간증을 전하면서 교인들로부터 뜨거운 박수를 받았다. 호적상으로는 1945생이나 본래 나이는 1944년 2월 생으로 만 70세에 은퇴한 셈이다. 자신은 금년 2014년부터 일체의 노회 총대도 나가지 않고 조용한 은퇴를 하기로 마음먹고 실현했다.의좋은 형제 둘은 동생은 총회 장로부총회장에, 형은 전국장로회연합회와 전국남선교회연합회에 회장을 역임한 교회적으로 성공한 형제들이다. 백제의 후예 호남 출생으로 영남지역인 부산에 근 40년을 살면서 거의 부산사람이 되다시피 한 두 형제에게는 지역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순수한 부산사나이들이다.동생은 부산장신대학교를 교육부로부터 정규 대학인가를 받고 첫 법적 이사장이 되어 영예로운 선지동산을 세운 공로는 과히 기념비적이다. 그래서 지금도 이성만 장로와 함께 명예 이사장이다. 이 학교를 김해에 땅을 물색하여 지금의 학교에서 토지를 매입할 당시 별의별 구설수에 올랐다. 그래서 학교 동문들이 땅 매입에 의혹을 제기하는 바람에 할 수 없이 북부경찰서에 M목사를 걸어 명예훼손죄로 고발했다. 결과는 북부서의 경목이라는 명분도 작용해서 ‘명예훼손에 해당되지만은 동문회 회장을 역임한 연고로 학교를 사랑하는 뜻에서 한 소행으로 처벌을 할 수 없다’고 혐의 없음으로 결정났다. 그 당시 M목사에게 허위로 사실과 다른 정보를 제공한 사람이 이 학교의 몇몇 교수요, 이를 받아 유인물과 소문을 퍼뜨린 장본인이 이 학교 개방이사를 추천한 평의회 인사로 밝혀졌다. 단지 공소권 없는 이유로 무고죄가 성립되지 않는 까닭에 그냥 넘어갔지만 이 일로 인해 M목사는 그들과 정반대로 다른 사람을 명예 훼손하도록 거짓 정보를 준 그들과 결별하는 한편, 그들 편에 선 인사들은 척결하는데 앞장을 서고 있다. 오늘의 친구가 내일의 적이 되는 정·반원리를 실감하고 있다.한때 정종성 장로는 학교를 사랑하는 뜻에서 무심코 던진 말이 최무열 총장은 액면그대로 받아 부산동노회 개회시에 그대로 설명하는 바람에 임원선거개입을 했다는 누명을 신문에 광고하면서 정종성 장로 이름을 걸고 들어가는 엄청난 데미지를 입힌 해프닝을 연출하기도 했다. 정종성 장로는 교단적으로 최고의 영예를 누렸고 부산동노회 장로 노회장으로, CBS부산방송 운영이사장으로 형, 동생이 역임하였다. 또한 부산장신대 이사장으로 세상안의 영광을 모두 누렸다고 해서 하나님 앞에 하나도 자랑스런일이 못되니 은퇴는 조용히 물려나기로 마음먹고 이번 장로은퇴는 외부일체 광고 없이 교회 안에서만 공로패 하나 받고 물러났다. “이렇게 물러나니 마음이 가볍고 이제 하나님 앞에 가서 상급 받는 것이지 세상 모든 영예는 전도서에서 말한 것처럼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다”고 말했다.형 정대성 장로와 함께 해외선교를 위해 남은 재산을 선교 법인으로 만들고 해외 개척하는데 힘쓰는데 사용하면서 남은여생을 조용히 보내고 있다. 겸손한 그 아름다움이 하나님이 기뻐하실 것으로 믿고 무한한 박수를 보내고 싶다. 누가 그들에게 돌을 던질 수가 있겠는가? 그 겸손함이 천사들의 나팔소리로 찬양받을 수 있지 않을까?신이건 장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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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1-01
  • [시내산]순환하는 교회
    ▲송시섭 교수(동아대 법대) 자본주의는 역사상 오랫동안 존재하였던 ‘교환’이라는 개념을 ‘화폐’를 매개로 하는 ‘자본주의적 교환’으로 대체하였다. 모든 것이 돈으로 계산되는 세상 속에서 개인의 사적소유와 그에 기한 배타적인 향유, 그리고 그를 뒷받침하는 민법상의 ‘소유권’, 그에 기한 헌법상의 ‘기본권’등을 그 바탕으로 하는 제도라 할 수 있다. 한편, 성경, 특히 구약성경은 오랜 기간 하나님을 중심으로 하는 엄격한 ‘위계질서’에 기초한 선형적인 구조를 이루면서 선택된 공동체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 그에 반하는 인간의 우상숭배, 그에 따른 심판과 회개 그리고 돌이킴 등을 주제로 한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야기이다. 위 둘을 결합한 이른바 ‘위계적 교환’은 베버의 말대로 ‘프로테스탄트’라는 독특한 공동체를 통하여 결합되었고, 이른바 프로테스탄트가 중심이 되는 서유럽의 국가들에서 괄목할만한 자본주의의 성장을 보면서 ‘소명의식’을 통한 ‘부의 축적’이 근대자본주의의 맹아였음을 베버는 간파하였다. 이는 개신교의 ‘합리성’, ‘청빈주의’가 자본주의와 친숙할 수 있음을 잘 보여준 연구였다고 생각한다. 그런 이유에서인지 개신교는 자본주의와 친숙한 종교로서 인식되었고, 이는 우리나라의 경우에도 다르지 않다고 본다. 그러나 자본주의와 연결된 자유주의, 나아가 최근 전 세계를 휩쓰는 세계화, 그에 이은 신자유주의는 아무리 생각해도 자본주의화된 개신교와 친숙할지는 몰라도, 성경적인 가치와는 일정한 거리감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러한 괴리감의 원천은, 자본주의가 돈을 매개로 한 ‘교환’이라는 가치를 지향하는데 반하여, 성경은 공유와 협력을 통한 ‘순환’을 그 기본사상으로 하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즉 성경은 ‘교환’이 대세인 사회보다는 ‘순환’이 주된 흐름인 사회, 그리고 그러한 공동체를 지지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프랑스 철학자 들뢰즈(Gilles Deleuze)는 사회의 변천과정을 ‘위계질서적 사회’나 ‘동심원적 사회’에서 ‘리좀적 사회’로 변화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리좀(rhizome)이라는 개념은 원래 그 아이디어를 ‘스스로 뿌리이자 줄기를 이루는 식물의 덩이줄기모습’에서 가져온 것으로, 이는 중심과 주변이 구별 없는 무한증식의 구조를 염두에 두고 있다. 리좀적 사회란, 초점을 ‘소수자’에 맞춘 것으로, 이들은 ‘평균적인 정상’을 기준으로 삼는 다수자 세계에 속하지 않으며 끊임없는 모색을 통해 새로운 자기만의 세계를 창조하는 집단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러한 소수자들이 근대적인 ‘다수자’ 중심의 위계적 이분법을 깨고 수많은 다양한 중심들을 생성하며 접속하여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 리좀적 체계를 형성한다고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을 현대교회에까지 확대적용해보면, 미래교회는 종전 성속을 엄격히 구분하고, 강단과 청중을 교환적으로 이해하는 전통적인 설교와 선포, 즉 위계적 이분법의 강단에서 벗어나서 종전 설교의 청중이었고, 때로는 교회내 다수의 결정에서 다소 소외되었던 소수자들(여성, 청소년, 새신자들)의 생각을 반영하고 이를 경청하는 나눔의 교회, 즉 리좀적 교회이어야 하지 않을까 한다. 나아가 교회내에서만 주고 받는 교환이 아니라, 우리가 속한 공동체 전체인 몸을 도는 순환을, 수목형(tree)구조가 아니라 리좀형 구조를, 다수자가 아니라 소수자를 지향하는 방향으로의 시선의 전환을 말하는 것으로, 이는 바로 초대교회가 꿈꾸던 교회의 모습이 아닐까 한다. 이제 우리는 성경의 가르침을 다시 한 번 새롭게 재해석하여 우릴 낮은 곳으로, 소수자의 세계로, 쌍방의 교환을 넘어 온몸의 순환으로 초대하는 목소리를 들어야 하지 않을까 한다. 그리하여 새해에는 교회 내 온 지체가 서로 끈끈하게 연결되어 상합하며, 교회 안팎이 끊임없이 순환하는 미래형 공유교회가 더 많이 등장하게 되길 간절히 소망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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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1-01
  • [함께 생각해 봅시다]현역은 모르는 은퇴목사의 심경
    현역은 은퇴목사의 심경을 몰라은퇴한 후 비로소 실감하게 돼다음과 같은 노래가 있지 않은가. “해는 져서 어두운데 찾아오는 사람없어 밝은 달만 쳐다보니 외롭기 한이 없네 내 동무 어디 가고 나 홀로 앉아서 이 일 저 일을 생각하니 눈물만 흐른다” 어느 은퇴 목사는 이 노래를 은퇴 목사의 주제곡이라고 했다. 왜일까. 은퇴하고 나면 갑자기 주변환경이 어두워지는 느낌이 든다. 주변에 그토록 많던 사람이 하룻밤 사이에 없어지고 찾아오는 사람이 없다. 외로히 혼자 앉아 지나온 일들을 생각하면 외롭기 한이 없다. 여러 해 전 얘기다. 은퇴한 P 목사에게 현역으로 있는 후배들이 물었다. “목사님, 은퇴를 해보니 소감이 어떻습니까?” 그의 대답은 “말도 마세요. 말로는 어떻다고 형언할 수 없습니다. 앞으로 한번 겪어보세요” 하더니 그 건강하던 분이 은퇴 후 얼마 살지 못하고 세상을 떴다. 목사들이 누구나 은퇴하기 전에는 은퇴목사의 심경을 이해하지 못한다. 마치 젊음을 경험한 노인들은 젊은 이들을 이해하지만 늙어본 경험이 없는 젊은 이들은 노인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과 흡사하다. 솔직히 저부터 그러했다. 은퇴목사 한 분이 사직동교회에 출석하셨다. 주일마다 설교하던 목사가 매주일 예배참석만 하고 가는 것을 보면서도 은퇴목사의 심경을 헤아리지 못했다. 내가 은퇴한 후에 생각하니 그 어른의 따분한 마음을 위로해 드리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고 후회된다.그러면 은퇴목사가 극복하기 어려운 점이 뭔가. 사람마다 다를 수 있지만 공통적인 점은 은퇴하고 나면 고독하고 적적하다는 것이다. 시무할 때에는 연일 해야할 일이 있고 가야할 곳도 많고 초대를 받기도 하고 매일 시간을 쪼개어 일정을 소화한다. 은퇴하고 나면 하룻밤 사이에 사정이 달라진다. 누구 한 사람 차 한 잔 같이 하자는 사람이 없다. 찾아오는 사람도 없고 전화도 오지 않는다. 그렇다고 교회가 운영하는 노인대학에 다닐 수도 없는 노릇이다. 시무할 때엔 모든 교인들의 관심이 담임목사에게 집중되어 있었는데 하룻밤 사이에 모든 교인들의 관심 밖으로 밀려나고 교인들의 관심은 새 담임목사에게 집중된다. 공예배 시간에 기도할 때에도 멀리 해외에 가 있는 선교사를 위해 기도하면서 은퇴목사를 위해서는 기도하지 않는다. 그건 새 담임목사가 듣고 어떻게 생각할런지 몰라서 그런다는 말이 있다. 끝으로 은퇴목사에게 가장 위로가 되는 큰 대접은 무엇인가. 그건 그에게 설교를 부탁하는 것이다. 이것 역시 현역으로 있는 동안에는 느끼지 못한다. 자기가 은퇴를 해 봐야 비로소 실감이 나게 될 것이다. 독자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한지요. 함께 생각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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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1-01
  • [사설]부울경과 전국교회, 2015년 새해에 거는 기대
    부산과 울산, 경남은 그렇게 멀리 있는 지역이 아닌 가깝게 인접해 있다. 서로 남이 아닌 행정적으로 공존하면서 상호 협조적인 형태로 이어온 것이다. 특히 교계의 부울경은 남선교회나 남?여전도회 등 교회적인 연합 기도회나 행사 공유로 유기적 발전을 거듭해 오면서 한 울타리 아래 공조해 온 것과 다름없다. 다르게 말하면 지역적으로 떨어져 있으나 영적으로는 한 공동체이고 하나의 연관된 조직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예장통합 교단의 유일한 부산장신대학교가 경남 김해시에 위치해 있으면서 부울경 지역 교회, 노회에서 이사를 파송해 오고 있는 실정이다. 고신 역시 부산에 고신대학교를 두고 있으면서도 근거리인 경남, 울산에서 대부분 학생들이 모여들고 있다. 오히려 천안 고려신학대학원의 재학생 3분의 2가 부울경 학생이라는 점에서 지역의 편차는 부울경이 한 울타리로 이웃 사촌과 더욱 가깝다. 그래서 부울경이 연대하면 교단에 영향을 끼칠 수가 있는 잠재적 힘이 되고 단합하면 큰 정치적 파워를 형성하여 주도권을 행사할 수 있다. 새해는 무엇보다 전라도라는 말보다 호남인 그리고 백제들의 후예들로 바꾸지 않는 한 하나님께서 이 나라의 통일은 주지 않을 것이다. 지역 갈등을 부추기는 용어부터 새해는 긍정적으로 바꿔 나가야 한다. 동서도 화합하지 않는데, 어찌 남북이 하나가 되고 민족의 숙원인 통일을 기약할 수 있겠는가? 새해는 이 나라의 염원인 민족 통일의 길이 한 발자국 다가오는 느낌을 받게 될 수 있다. 미국과 일본, 중국이 모두 북한의 핵과 인권유린에 대한 UN의 인권수호 결의를 위해 하나의 목소리로 다가가는데 북한이 버티기 쉽지 않을 것이다. 북한이 제 아무리 핵 우산 아래 힘을 발휘한다 해도 인권이 유린되는 사회, 민족은 망할 수 밖에 없고 외침이 아니라 내침에 의해 붕괴되는 것은 고구려, 백제, 신라의 역사에서 배워왔다. 그렇기 위해 민족 통일을 염원하는 길도 이제 북한을 위한 식량 등 도와줄 것은 도와주되 인권신장을 위해 한국교회가 앞장서야 할 때가 되었다. 식량을 주고 물질을 제공하면서 인간다운 삶을 살기를 원하고 바란다면 그들 내부 국민들도 서서히 인간의 존엄성과 가치를 깨우쳐 나갈 것이다. 혹자는 말하기를 결단코 정권 유지를 위해 핵 무기는 버리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면 핵무기 축소를 외치고 바라기 전 민족의 인권을 더욱 소리치고 그들 속에 심어준다면 핵과 정권은 그들 스스로 무너지고 말 것이다는 신념을 가질 때 우리가 바라는 조국 통일은 이룰 수가 있을 것이다. 한국교회 먼저 새해부터는 북한의 인권을 위해 관심을 갖고 기도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이미 경험한 대로 지난 2014년 한 해를 세월호 참사를 비롯한 크고 작은 사건 사고로 힘들었다. 이 모든 것은 욕망, 탐심에서 비롯되어 눈이 어두워진 인간이 저지른 참혹한 결과였다. 그들이 목이 곧고 교만하여 방종하고 교만과 불의를 거듭하며 맘몬을 섬기고 부정과 부패로 타락한 것은 근본적인 인간성 회복에서부터 잘못된 데서 비롯되고 있다. 인간의 존엄성과 인권회복은 남을 배려하고 자신을 비워 존중하는 이타심에서 자유가 신장되고 사회가 밝아지게 되는 이치를 깨달을 수 있는 2015년 한 해가 되었으면 하는 기대가 크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처럼 불안하고 암울해도 세상을 구원해야 할 교회마저 분별 못하고 혼탁한 세상이 되어 버린다면 그 사회는 악의 소굴이나 다름이 없다. 교회에 존망의 대상이고 대형적인 교회들의 지도자 붕괴가 한국교회 미래에 대한 징계의 경고를 하나님께서 하신 것으로 보면 된다. 이제 교회 지도자들이 2015년 한해만이라도 진실되고 정직한 지도자로 거듭난다면 억압받고 소외당한 자의 위로가 될 것이다. 북한의 통일과 한국교회 제2의 부흥의 길을 열어 줄 것으로 기대된다. 하나님을 닮은 거룩한 영적 회복과 인간의 존엄성이 회복되는 한 해가 되기를 간절히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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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1-01
  • [성서연구]다시 원점에 서서(엡 6:24)
    신앙이란 변하는 것들 속에서 변치 않는 것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변치 않는 것만이 진리요, 진리만이 영원합니다. 신앙생활이 어려운 이유는 온 세상이 변질되는 것으로 가득하기 때문이요, 우리의 본성이 변질되는 것들에 더 쉽게 동화되는 특징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류의 첫 타락도 그렇습니다. 하와는 이미 에덴동산에 있는 많은 과실들을 먹고 있었지만, 그것들로 만족하지 못하여 사탄의 꼬임에 빠져 하나님께서 금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에 손을 뻗었고, 그로 인해 인류는 타락했습니다. 사람은 뭔가 새로운 것들을 접해보고 싶은 본능을 가진 것 같습니다. 뜨겁게 사랑해서 결혼한 부부가 권태를 느끼면서 한눈을 팔게 되는 것이라든지, 첫 출근하면서 감격하던 직장에 싫을 느끼고 다른 곳을 기웃거리는 마음 역시 그렇습니다. 신앙에 첫 눈을 떴던 교회에 대해 이런 저런 비판을 하다가 급기야는 다른 교회를 옮겨가는 일이 비일비재한 현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것들로 만족하지 못하고, 하나님께서 주신 것들을 끝까지 지켜내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우리는 처음 걷던 길에서 너무 많이 벗어난 듯이 보입니다. 마치 아침저녁으로 늘 걷던 산책로에 싫증을 느껴 새로운 길로 접어든 사람과 같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새로운 길이 우리를 낭떠러지로 끌고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동안 하나님을 말하면서도 실상은 사람 중심으로 판단하고 행동해 온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말씀의 능력을 믿기보다는 말씀을 전하는 사람의 테크닉에 더 의존한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복음을 말했지만, 복음은 포장지일 뿐 그 안에는 세속적 욕망을 채우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의 자기 비움과 겸손의 모범을 말하면서도 속 깊은 곳에서는 한 계단이라도 더 높이 서려는 욕망이 부글대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사랑을 실천하기도 하지만, 그 사랑은 우러난 것이 아니라 기획된 냄새가 날 때도 많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소자 한 사람의 가치를 알면서도 소자를 외면해 왔습니다. 이런 모든 것들이 다 처음 걷던 길에서 벗어난 것들입니다. 문제는 이로 인해 지금 우리는 점점 낭떠러지로 가까이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2015년을 시작하면서 다시 원점에 서길 원합니다. 2천여 년 전 갈릴리로 돌아가 거기서 말씀하시고 병자들을 어루만지시던 예수님을 바라보길 원합니다. 화려한 예루살렘 성전을 보시면서 돌 위에 돌 하나도 덧놓이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시던 예수님, 그리고 예루살렘을 보시며 흘리시던 그 눈물을 다시 주목하길 원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타고 흘러내리던 그 보혈이 얼마나 붉고 진한 사랑인가를 다시 느껴보길 원합니다. 아울러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면서 생명의 능력을 가진 교회가 되길 원합니다. 에베소교회는 첫 사랑을 잃어버림으로 책망을 받았습니다. 이제 우리 그 첫 사랑의 원점에 다시 서길 원합니다. 처음 예수님을 영접하던 그 날로, 세례를 받던 그 날로, 직분을 받던 그 날로, 안수를 받고 임직하던 그 날로, 목회지에서 첫 설교를 하던 그 날로 돌아가 그 원점에서 다시 시작해 봅시다. 곁길로 나오라고 유혹하는 사탄을 뿌리치고, 오직 예수님만 향해 나아가길 원합니다. 그리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변함없이 사랑하는 모든 자에게 은혜가 있을지어다(엡6:24)’란 말씀을 기억하면서 그 첫 사랑이 변치 않도록 살아봅시다. 2015년, 다시 원점에서 출발하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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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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