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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내 남은 생애 어떻게 보낼 것인가?
    2023년 8월 23일 수요예배를 이웃에 있는 부민드림교회(권순철 담임목사)에서 드리게 됐다. 부산 강서구 신호동에 위치한 교회로 부민교회가 7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개척 설립했다. 부민드림교회가 담임목사 여름 휴가로 인해 은퇴한 내게 설교를 부탁해서 부족하기 그지없는 넋두리를 40여분동안 설교 같지 않은 내 가정사를 소개했다. 그러면서 이 세상이 마치 마지막 세대처럼 살고 있다고 했다. 부모 자식끼리 따로 생활하는 핵가족 세대, 추모일도 모시지 않고 조상 성묘도 나 몰라라 하는 마지막 세대. 오늘 21세기를 살아가고 있는 인생 한번뿐인 이 시대를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라는 제목으로 설교했다. 하지만 이 시대를 견디고 용케 살아가려면 우선 순위가 필요하다. 생각해보니 과거 부모님의 가르침이었고 성경 잠언 4장 1~9절에 나오는 지혜를 사랑하고 버리지 말아야겠다는 성경 말씀이었다. 잠언 전체 주제가 지혜이다. 그러고 보니 아무리 지식이 많아도 지혜는 지식과는 별개이고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이 곧 지혜일 것이다. 내 목소리가 옛날과는 달리 목에서 소리가 영 나오지 않는다. 나이드니 목구멍이 좁아지고 판단력도, 기억력도 흐려져 정말 나이는 못 속인다는 옛말이 실감났다. 제일 걱정스러운 것은 이 나이에 인지기능이 떨어져 치매가 올까 걱정이다. 치매 예방으로 좌판으로 두드리고 성경 필사도 하고 일간지 신문 2개를 정독하다시피 읽고 매일 아침 헬스로 근육운동을 하고 있다. 그러나 근육운동과 인지기능은 다르다는 느낌이 든다. 정신적 뇌 운동을 하루 수십번하는 것은 뇌를 움직이게 하는 운동이라 뇌 운동은 손놀림과 입안의 혀 운동이 가장 적합한 운동을 신경전문의들이 일러준다. 매일 손, 발, 눈동자, 혀를 운동하는 것으로 일명 ‘조탁법’을 실행하고 있다. 손가락 겉 부분으로 머리 위 옆을 두드리는 방법이 뇌 건강과 운동에 적합하다고 하여 반복 연습을 하고 있다. 잠언 4장 1~9절 말씀 중에 지혜를 간직하고 사랑하고 실행해야한다고 말한다. 헬라어에서 나온 영어는 ‘philosophy’인데 필로는 사랑한다이고 소피아는 지혜이다. 그래서 지혜를 사랑한다, 지혜를 사랑하면 철학자가 다 된다. 그렇게 할 때 지혜가 너를 지키고 너를 높인다, 그리고 너를 영화롭게 한다.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사랑을 받은 사람은 절대 자살하는 법이 없고 문제아가 없다는 통계에서 이를 말하고 있다. 그리고 과거는 ‘고려장’ 제도가 있었지만 현대판 고려장은 ‘노인요양원’이나 요양병원이나 그렇게 알고 가급적 가지 말라고 한다. 한번뿐인 인생을 어떻게 살고 우선 순위가 무엇일까? 그래도 지식은 배움에서 나오지만 지혜는 부모 말씀에서 생활과 사랑을 받으면서 나오고 성경에서 나온다고 삶의 우선 순위가 돈보다 건강보다 먼저 지혜를 얻어야 그 모든 것도 따라오고 갖출 수 있는 것이다. ‘죽음은 피해야 하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인이라면 하나님 앞에 가기 위한 유일한 통로’이다. 죽음을 잘 준비하는 방법은 매순간 주님 앞에 참되게 사는 것이다. 부모 앞에 보약 지어 주지 말고 부모 말씀 잘 순종하고 지혜는 부모에서 그리고 성경 말씀에서 나온다는 것을 강조했다. 지혜를 잘 간직하고 사랑하라는 것이다. 장로가 무슨 프로페셔널 설교 전문가도 아닐 바에야 평소대로 잠언 말씀 4장이 가장 유익되고 생의 양약의 말씀이라고 한 것이다. 나는 이를 위해 가정을 위하고 교회와 하나님 말씀에 실천하도록 노력하고 있는 것이 설교 메시지의 핵심이다. 물론 과거 오로지 교계 언론계 종사를 오직 한 길만 걸어 왔지만 가정과 아내와 자식들에게는 남편, 아버지 자격미달이었고 늘 미안하게 생각하여 이제 늙은이가 되어서야 철이 들어 빚을 갚고 또 용서를 빌며 매일 밥 짓고 청소하고 빨래하는 집안 잡부 노릇을 즐겁게 하고 있다. 물론 치매도 방지할겸 요양보호사 자격을 따서 아내에게 장기요양보험 등급을 신청하고는 케어할 준비는 물론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가는 것만이 아내에게 못다한 정성을 이제야 겨우 갚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 서는 날 누가 먼저갈지 몰라도 이제 가정의 소중함과 가족의 귀중함을 느끼고 있다. 손자, 손녀 그리고 외손자 딱 셋을 위해 매일 기도하고 그들이 하나님을 잘 섬기며 믿음과 신앙이 두터운 후손으로 이어가길 바랄 뿐이다. 하루하루 외부행사나 참여는 조금씩 줄이고 가정 위주로 살아갔으면 한다. 그래도 마지막 남은 소원이 있다면 한국교회 진리를 파수하는 ‘한국기독신문’이 영원하길 기도한다. 마지막 여생은 고향에 조그마한 텃밭을 가꾸어 채소나 심고 가축을 기를 수 있는 여건이 되어 맑은 공기 마시고 숲 속에서 살아갔으면 한다. 집 가까이에 묻힐 봉이 없는 조그마한 무덤 하나, 비석에는 “여기 하나님을 사랑하다가 간 사람 아무개”라고 써 놓고 죽었으면 한다. 형님도 하늘나라에 가고, 큰 누나도 가고, 둘째 누나만 있고, 큰 조카와 형수님도 가고 가는 길은 오직 한 길이다. 한번뿐인 내 인생 어떻게 살 것인가는 바로 지금하는 형태대로 살아가면 좋겠다. 내 뒤에 오는 자식들 형제간에 우애있게 살아가고 다음 기회에서 하늘나라에서 만날 수가 있으니 너무 슬퍼할 것도 없다. 그냥 이모양, 저모양 하나님만 잘 섬기며 사는 가족이 최고의 삶이 아니겠는가? 매일 아침 시편23편을 암송하고 가정과 자식, 손자, 손녀, 외손자와 국가 민족과 한국교회를 위해 기도하고는 주기도문으로 아침 하루를 출발한다. 주일날이면 본 교회에 9시 1부 예배드리고 2부 예배는 부민드림교회 집 근처에 있는 작은 교회에서 예배 드리니 마냥 즐겁기만 하다. 이렇게 남은 인생 작은 교회 봉사하면서 섬기는 한 주 한주 보내면서 인생 끝나는 날, 아! 하나님 감사하며 살았습니다. 못난 사람 그동안 생명과 호흡을 여기까지 연장하여 주심에 감사할 뿐입니다라고 눈을 감으면 참좋겠고 미련도 없이 떠나는 순간을 찬양하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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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9-08
  • [목회자칼럼] 고장 난 나침반은 떨지 않는다
    며칠 전, 책상 정리를 하다 서랍 깊숙한 곳에 넣어 두었던 나침반을 발견했습니다. 요즘에는 핸드폰으로 길도 찾고, 방향을 알려주는 앱도 있지만 불과 몇 년 전만 하더라도 먼 길 여행을 떠날 때, 등산을 할 때에는 방향을 알려주는 나침반이 필수였습니다. 예전에는 즐겨 썼는데 어느 순간부터 쓸 일이 없어진 나침반을 발견하곤 반가운 마음에 이리저리 방향을 맞춰보니 고장이 났는지 바늘 끝이 떨지 않고 멈춰 있었습니다. 나침반은 바늘 끝을 떨고 있음으로 나침반의 사명을 감당합니다. 그러나 고장이 난 나침반은 더 이상 떨림이 없습니다. 오랫동안 서랍 속에 묵혀 두어 고장이 난 나침반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목회도, 내 사명도 어쩌면 나침반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계속되는 떨림으로 나침반이 만들어진 목적, 즉 방향을 맞추는 것에 최선을 다하듯 나 또한 끊임없는 고민과 갈등으로 목회와 사명을 감당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가끔은 너무 많은 고민과 갈등들이 목회를 더 힘들게 하는 게 아닌가라는 우려도 하지만 고장 난 나침반을 보며 나의 갈등과 고민이 바로 살아있는 증거라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오헨리의 소설 ‘마지막 잎새’의 존시는 재능 있는 화가이지만 폐렴에 걸려 삶의 의욕을 모두 잃었습니다. 그녀는 침대에 누워 빈 벽을 보며 창밖 벽에 붙어 있는 담쟁이덩굴의 잎을 세고 있습니다. 마지막 잎사귀가 떨어지면 자신도 죽을 것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어느날 폭풍이 온다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존시는 폭풍과 함께 마지막 잎새가 떨어지면 자신도 죽게 될 것이라 생각하고 더 우울함 속에 갈등을 겪습니다. 마음 속 저 깊은 곳에 웅크리고 있는 살고 싶은 마음, 하지만 살 수 없다는 현실 앞에 폭풍의 밤을 보낸 후, 다음날 떨어지지 않은 잎새를 보며(물론 어느 화가의 그림이지만...) 삶의 의지를 되찾습니다. 마지막 잎새의 존시처럼 때로는 내 안에 갈등을 통해 내가 살아있음을 느끼고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발견하기도 합니다. “과연 주님이 원하시는 방향은 무엇일까?” “어느 경계까지가 주님이 하시는 일이고, 또 어느 경계까지가 내가 하는 일일까?” 나는 오늘도 갈등 속에 떨고 있습니다. “건강한 교회를 세우기 위해 지금까지 달려왔는데, 신앙의 회복은 무엇이고, 또 참된 치유는 무엇일까?” “목회자로서 내가 추구하는 것은 주님의 뜻과 합한 것일까?” 나는 오늘도 흔들리며 떨고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성경의 인물들 중에서도 나와 비슷한 갈등을 겪은 인물이 있었음을 발견합니다. 구약의 광야길에서 여호수아와 갈렙은 이스라엘 백성과 생각이 달랐습니다. 남들은 모두 이 방향이라고 하는데, 둘만 저 방향이라고 하니 얼마나 많은 갈등과 떨림이 있었을까요? 신약의 바울을 보니 선교여행을 떠나며 동역자들과의 갈등, 복음을 전할 때 그 지역 사람들과의 갈등들을 통해 수많은 떨림이 있었을 것입니다. 여호수아와 갈렙 그리고 바울은 갈등이 있었기에 자신들의 사역을 잘 감당할 수 있었고, 떨림이 있었기에 늘 분별하는 자세로 사명을 이어갈 수 있었을 것입니다. 아마 여러분의 삶도 저와 혹은 성경의 인물들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매일 하나님의 자녀라는 정체성으로 살아가려고 애쓰지만 갈등과 떨림이 늘 동전의 양면처럼 붙어 있습니다. 부모로서 자녀를 양육할 때 무한한 사랑으로 수용해야 할 범위와 훈계와 절제를 가르치는 경계의 갈등, 공동체가 나의 사적인 영역까지 침범할 때, 어디까지 받아들여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 삶의 터전인 직장과 교회 사이에서의 시간 분배 갈등 등 나침반이 떨리듯 우리는 수많은 떨림 속에 놓여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또 이런 갈등들이 있지는 않나요?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사명을 감당한다고 목소리는 높이지만, 교회의 양적 부흥을 갈망하는 마음과 질적 성숙을 추구하는 두 마음의 갈등, 인정받고 유명해지고 싶은 솔직한 내면의 갈망과 오늘의 삶에 만족하며 자족할 줄 아는 갈망의 갈등, 목회자로서 목회에 전념하고 싶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해 이중직을 해야 하는 상황의 갈등 등 목회자로서의 갈등이 있습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고장 난 나침반은 떨지 않듯, 우리가 지금 수많은 고민과 갈등 속에 영혼이 떨고 있다면, 이는 분명 내 삶이 고장 나지 않았다는 증거요, 살아 숨 쉬며 사명을 감당하고 있다는 확신일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떤가요? 방향을 알려주는 나침반처럼 갈등 속에 떨고 있나요? 아니면 고장 난 나침반처럼 멈추어져 있나요? 뜨거운 여름을 보내며 자신에게 질문을 던져보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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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9-08
  • 부산기독교역사박물관 추진 더 이상 미루면 안된다
    부산교계의 오랜 숙원사업이었던 부산기독교역사박물관이 작년 (재)한호기독교선교회의 좌천동 일신기독병원 부지 300평을 부산시에 기부채납 의사를 밝히면서 급물살을 타게 됐다. 박형준 부산시장도 “부지만 있다면 부산시가 박물관을 지어 주겠다”고 화답한 상태다. 그런데 교계의 한목소리를 모으는 과정에서 부산기독교총연합회(이하 부기총)가 현재 이 사업을 주도하고 있다. 그 과정에 대해서는 양측의 의견이 다르기 때문에 이 자리에서는 언급을 자제하고자 한다. 중요한 사실은 (부기총 주장대로)작년 12월 ‘부기총 중심으로 부산기독교역사박물관 건립을 추진하기로 했다’면 현재 사업이 어느정도 진척이 되고 있는지 교계에 알리고 협조를 구해야 한다. 3개 안(1. 복병산 부지, 2. 동래중앙교회 사립박물관을 공립박물관으로, 3. 일신기독병원 부지) 중 어떤 안이 가장 현실적으로 가능성이 있고, 어떻게 추진되고 있는지 명백히 밝혀야 되지만 지난 9개월 동안 그런 과정이 전무하다. 무엇보다 부기총은 부산크리스마스트리문화축제의 운영 잘못으로 작년 관계자 3명이 검찰에 송치되어 각각 200만원 벌금형을 받았고(이중 한명은 현재 재판중) 금년에도 관계자 4명이 기소의견으로 검찰에 송치되어 현재 검찰조사를 받고 있는 상황이다. 또 지난 10여년간 운영해 왔던 트리축제도 작년부터 중구청이 주도하는 ‘광복로 겨울빛 트리축제’로 전락한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이런 상황에서 부기총이 중심이 되어 부산기독교박물관 건립추진을 한다는 것에 대해 부산교계가 얼마나 많은 신뢰를 보낼지 의문이다. 작년 300평 부지를 기부하겠다던 한호기독교선교회 관계자도 “교계가 강력하게 요청하면 고려해 볼 수 있지만, 지금은 기독교박물관 건립에 대한 큰 관심은 없다”고 발을 빼는 상황이다. 부기총이 부산의 대표기관이라고 생각한다면, ‘나 아니면 안돼’가 아닌 지금은 양보와 배려의 미덕을 발휘할 때다. 그리고 부산의 교회와 성도들, 그리고 다음세대를 위해 큰 결단을 내려 줄 것을 당부한다. 그것이 부기총이 다시 신뢰를 얻고, 진정한 부산의 대표기관으로 자리매김 할 수 있는 길이다. 부산기독교박물관 추진을 위해서 부기총이 백의종군하는 자세를 보여주길 다시한번 부탁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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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9-08
  • 성(聖) 총회가 되자
    9월은 각 교단 총회가 있는 달이다. 총회는 산하 교회와 기관의 상황을 살피고, 지도 감독하는 중요한 결정을 내리는 곳이다. 나아가 진리를 파수하고 궁극적으로 교회가 부흥 발전하고 그리스도의 복음이 땅 끝까지 전파되도록 하기 위해 모이는 공회이다. 그래서 ‘거룩한 모임’ 곧 ‘성(聖) 총회’라 부르기도 한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거룩한 모임’에 대한 실망하는 목소리들이 높아가고 있다. 각 노회를 대표해서 교회를 살피는 책임을 가져야 할 총대들이 특정 계파나 특정 세력에 동조하거나 거수기 역할에만 충실하거나, 총회 첫날만 참석하고 자리를 비우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차라리 동료에게 총대권을 양보하는 것이 노회와 교회를 위한 올바른 결단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금번 총회에 참석하는 총대들은 다음 몇 가지 사항에 꼭 관심을 가져주기 바란다. 첫째는 정책 총회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해 주기 바란다. 총회는 산하 교회의 부흥과 발전을 위해 공통의 비전과 정책을 제시해 줄 수 있어야 한다. 총대원들의 관심이 마치 임원 선출에만 있는 것처럼 부각된다면 성총회를 바라보는 성도들은 정말 실망하게 될 것이다. 둘째는 성경적 윤리를 실천하는 총대원들이 되기를 바란다. 총대원들은 모두 교회에서 존경받는 목사와 장로들이다. 그러므로 이들의 모임은 그 어느 모임보다도 상식이 통하고 언행에 있어서 고상한 윤리성을 보여주어야 한다. 서로가 서로를 존중하고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성경적 윤리를 실천하는 성숙한 모습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 셋째는 은혜가 넘치는 총회 분위기를 만들어 주기 바란다. 교회의 머리는 예수 그리스도심을 우리 모두는 고백한다.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가 되신다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모든 지체를 다스리신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총대원들이 자신의 관점만을 고집하기 보다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면서 그리스도의 뜻을 이루기 위해 기도하는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 때 은혜가 넘치는 총회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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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9-08
  • [손영광 대표] 오펜하이머의 원자폭탄을 압도하는 파괴적인 무기, 다름 아닌…
    최근 북미에서 영화 <바비>가 커다란 흥행을 거두었다. 한국에서는 힘겹게 60만명의 관람객을 동원하는데 그쳤지만, 전세계 박스오피스에서 9월 4일 기준 13억 8100만 달러의 매출을 달성하며 올해 월드와이드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했다. 영화 <바비>는 정치적 올바름과 페미니즘과 관련된 메세지를 담고 있는 것으로 유명세를 떨치고 있다. 노골적으로 관객을 훈계하려 드는 장면으로 논란을 빚기도 했다. 이에 젠더 이데올로기의 문제를 꼬집은 다큐멘터리 <여자란 무엇인가? (What is a woman?)>로 유명한 맷 월시 감독은 영화 <바비>를 동시기에 상영중인 영화 <오펜하이머>와 비교하며 트위터에 “지금은 페미니즘이 원자폭탄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을 죽였다는 것을 기억하기 딱 좋은 때”라고 논평했다. 놀랍게도 맷 월시의 논평은 과장이 아니다. 페미니즘은 수많은 태아들을 죽였다. 빛을 보지도 못한 채 존귀하고 무고한 한 생명이 죽음을 맞이하는 것, 그것이 낙태의 현실이다. 태아는 수정 시점부터 지구상의 그 누구와도 구별되는 유일한 유전자를 가진다. 또 겨우 임신 6주차 즈음부터는 태아의 심장박동이 시작된다. 엄연한 생물학적 사실이다. 이러한 과학적 사실에 따라 미국의 많은 주는 심장박동이 확인된 이후 낙태를 금지하는 소위 심장박동법을 제정하여 태아를 살인하지 못하도록 법제화하고 있는 추세이다. 그러나 오늘도 페미니즘 진영은 ‘나의 몸은 내가 선택한다(My Body, My Choice)’라는 구호를 외치며, 태아는 세포덩어리일 뿐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심지어 후기 낙태의 합법화까지 밀어부치고 있는 모양새다. 개인의 자유와 권리, 물론 중요하지만 다른 사람의 생명을 빼앗으면서까지 자신의 권리를 주장할 수는 없다. 또한 페미니즘은 가족을 해체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차일드 트렌드(Child Trends)에 따르면 페미니즘이 등장하기 전인 1960년대 초에는 미국에서 한부모 가정에서 자라는 어린이가 9%에 불과했다. 하지만 2012년에는 그 수치가 30%까지 증가했다. 196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미국의 이혼율도 2배 이상 증가했다. 1세대 페미니즘이 여성인권 증진에 기여한 공로를 무시할 수는 없다. 하지만 공로가 있다고 무작정 미화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출발부터 불안했다. 페미니즘 운동은 우생학과 성해방을 주장하는 운동가들과 뒤엉키며 반가족적이고 반남성적인 기조가 강했다. 이후 2세대 페미니즘은 더욱 노골적으로 가족의 해체를 주장했다. 2세대 페미니스트들 중 한 명이었던 케이트 밀레는 그녀의 논문 ‘성 정치(Sexual Politics)’를 통해 “성 혁명은 전통적인 성적 억압의 종식을 요구한다. 특히 가부장적 일부일처 결혼을 가장 위협하는 동성애, 청소년기의 성관계, 혼전 및 혼외성관계 등을 금기시하는 것을 철폐하라”고 주장했다. 또한 그녀는 가족의 존재가 여성의 사회진출을 가로막는 장애물이라고 믿었다. 그녀를 포함한 대부분의 2세대 페미니스트들은 낙태의 열렬한 지지자이기도 했다. 현재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트랜스젠더리즘 역시 페미니즘의 탄생과 함께 등장하였다. 남성과 여성은 생식기만 다를 뿐 모든 면에서 실질적으로 동일하다고 처음으로 주장했던 사람들이 바로 페미니스트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모든 성역할은 일종의 고정관념이고 사회적으로 만들어졌다고 생각했다. 이것을 계승한 것이 바로 트랜스젠더 운동가들인 것이다. 페미니즘의 산물인 트랜스젠더리즘은 아이러니하게도 여성을 역차별하는 결과를 낳고 있다. 생물학적으로 남성인 트랜스젠더들이 여성 운동 대회에 참가해 메달을 휩쓸거나 탈의실, 화장실 등 여성의 공간을 침범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결국 페미니즘은 전 세계에 큰 파괴와 혼란을 가지고 왔다. 아래는 오펜하이머가 트리니티 핵실험에 대해 언급하며 힌두교 경전인 바가바드 기타의 한 구절을 인용한 것이다. 나는 이제 죽음이요, 세상의 파괴자가 되었다. Now I am become Death, the destroyer of worlds 그러나 해당 대목에 더욱 잘 어울리는 것은 원자폭탄이 아닌 페미니즘인지 모른다. 대한민국도 페미니즘이라는 강력한 살상무기에 의해 초토화되고 있다. 특히 젊은 세대의 남녀갈등은 날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고, 결혼과 출산율 역시 바닥을 모른 채 감소하고 있다. 저출산과 대한민국 소멸의 해결책을 찾으려면 그 원인을 잘 파악해야 한다. 결정과 행동을 이끌어내는 것은 생각과 가치관이다. 남녀 갈등과 가정 해체를 부추기는 페미니즘 운동에 관심을 가지고 예의주시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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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9-08
  • [이상규 교수의 역사탐색] 기도로 출범한 구미위원부와 이대위 목사
    1948년 5월 10일 선거를 통해 198명의 제헌국회의원을 선출하고, 5월 31일 오전 10시 구 중앙청 회의실에서 대한민국 국회를 개원했을 때 임시의장이었던 이승만은 서울 종로 갑구에서 당선된 이윤명 목사에게 기도를 부탁한 일은 널리 알려져 있다. “이 우주와 만물을 창조하시고 인간의 역사를 섭리하시는 하나님이시여, 이 민족을 돌아보시고 이 땅에 축복하셔서 감사에 넘치는 오늘이 있게 하심을 주님께 저희들은 성심으로 감사하나이다”로 시작되는 이 기도문은 대한민국 공문서 1호라고 할 수 있는 국회속기록 제일 앞 부부분에 기제 되어 있다. 공식 순서에도 없는 기도를 부탁한 것은 “종교사상이 무엇이든지 누구나 오늘을 당해가지고 사람의 힘으로만 된 것이라고 우리가 자랑할 수 없을 것이라”는 이승만의 신앙적 확신에서 나온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런 정사(政事)에 앞선 이승만의 기도요청이 처음이 아니라는 사실이 최근 김정민 박사에 의해 공개되었다. 연세대학교에서 이승만 연구로 박사학위를 수득한 김정민 박사는 「월드뷰」 2023년 4월호에 기고한 “대한민국임시정부 독립외교의 시작은 기도였다”라는 글에서 1919년 8월 27일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외교를 전담했던 구미위원부 출범식에서도 이승만은 이대위 목사에게 기도를 요청했다고 한다. “이대위 박사께서 목사로서 기도로 구미위원부 창립식을 열어주시겠습니다.” 이 요청에 따라 이대위 목사는 회의에 앞서 1,854자에 이르는 긴 기도로 회의를 시작했다고 한다. 영문으로 기록된 이 기도문 전문이 김정민 박사에 의해 번역되어 위의 잡지에 처음으로 공개되었다. 3.1운동 이후 독립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었고 국내외에서 명칭을 달리하는 여러 개의 임시정부가 조직되었는데, 1919년 9월 11일에는 국내외 7개의 임시정부들이 통합되어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개편되었다. 초대 대통령은 이승만이었고, 이후 김구, 이승만, 박은식 등이 임정의 수반을 거쳤다. 그런데 통합된 임시정부가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선출하기 약 2주일 전인 1919년 8월 25일 이승만은 한성정부(漢城政府) 집정관 총재 자격으로 구미위원부(Korean Commission)를 설치했다. 민족의 대표성을 지닌 외교기관의 출범이 시급하다고 본 것이다. 위원장은 김규식이었고 위원은 송헌주와 이대위였다. 그런데 이 구미위원부가 공식 출범하게 된 8월 27일 공식적인 회의에 앞서 이승만은 이대위 목사에게 시작하는 기도를 요청한 것이다. 이런 점을 보면 이승만에게는 역사의 주관자는 하나님이라는 확신과 기독교 이념에 기초한 건국 이상을 지닌 분임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이때 기도했던 이대위(李大爲, David Lee, 1878-1928) 목사는 어떤 인물이었을까? 김정민 박사에 의하면 이대위는 1878년 평안북도 강서에서 출생하였으니 이승만 보다 3살 아래였다. 일찍이 기독교를 받아드리고 유학차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때는 1903년이었다. 이때부터 동포사회에 관심을 가지고 단합을 모색했고, 1905년 4월에는 민족운동 기관인 공립협회 설립을 주도하였다. 이런 와중에서도 학업에 정진하여 1908년 포틀랜드 아카데미를 졸업하고 6월 22일 샌프란시스코로 돌아왔고, 그해 가을 UC 버클리대학교 역사학과에 입학하였다. 이때부터 이대위는 <공립신보>, <대도>, <신한민보> 등에 글을 발표하는 한편 민족운동을 전개하였다. 1909년 2월에는 국민회의 설립에 관여하였고, 1910년 1월에는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 부회장으로 국민회의의 기초를 닦았다. 그해 일본이 조선을 강점하자 애국동맹단을 조직하여 저항하였다. 그런데 그가 신학공부를 시작하기도 전인 1911년 2월 32살의 나이로 상황한인(감리)교회 전도사로 부임했다. 윤병구 전도사의 후임이었다. 이때부터 50세가 되는 1928년 6월 세상을 떠날 때까지 17년 간 이교회에서 목회자로 활동했다. 그런데 1912년에는 집사목사(deacon) 안수를 받았고, 1913년 5월 14일에는 버클리대학교를 졸업했다. 이 대학에서 한국인 최초로 학사학위(Social Science)를 받았다고 한다. 1918년 4월 25일에는 산 안셀모에 있는 센프란시스코신학교를 졸업하고 신학사 학위를 받았다. 1918년의 일이었다. 그해 10월 10일에는 미국남감리교 태평양 연회에서 드 보세(Du Bose) 감독에게 '장로목사'(elder) 안수를 받았다. 이처럼 면학과 목회활동과 함께, <대도>와 <신한민보>의 주필로서의 문필활동, 그리고 민족 독립운동에도 깊이 관여하였다. 그래서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 총회장으로 선임되었고, 1919년 3월 미국에서 독립선언서에도 이승만 안창호 박용만 등과 같이 서명하였고, 1919년 8월에는 구미위원부 위원으로 선임되었다. 그래서 그 출법식에 대표기도하게 된 것이다. 이승만은 제헌국회 개원식에서만이 아니라 임시정부 시절에도 기도로 회무를 시작하였고, 이를 통해 이대위라는 한 인물과 조우하게 된다. 그러기에 역사연구란 사건과 인물과의 만남(encounter)이라 하지 않았던가! (2023.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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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상규교수의 역사탐색
    2023-09-08
  • [서임중칼럼] 진실과 사실과 왜곡의 줄타기
    유구무언(有口無言)이란 입이 있어도 할 말이 없다는 뜻이다. 너무도 과분한 은혜를 입을 때도 그렇고, 기가 막혀 어처구니없는 일을 당할 때도 그렇고, 잘못을 저지르고 사실이 드러날 때도 그렇다. 살아가노라면 진실과 사실과 왜곡에 혼돈되어 정사(正邪)를 분별 못 하고 우(愚)를 범할 때가 있다. 요셉이 보디발 장군 아내의 유혹을 거절하고 감옥에 갔을 때의 당시 상황에 접근해 보면 어떤 사람은 노예 주제에 분수를 모르고 주인마님을 엿보다가 옥살이한다고 진실을 왜곡하여 비난하고, 어떤 사람은 요셉이 주인마님 방에서 황급히 뛰쳐나오는 것은 사실이 아니냐고 역설한다. 그런데도 요셉은 어떤 변명도 항변도 하지 않았으니 사실일 것이라고 비난을 더 한다. 그러나 그 사건의 진실은 하나님과 요셉과 보디발의 아내만 아는 것인데 보디발의 아내가 왜곡하여 보디발에게 이야기하여 요셉이 감옥에 가게 된 왜곡의 대표적 사건이다. 세상 방법의 법리적 결론은 왜곡이 진실을 이긴 것 같다. 약자로서의 요셉은 강자로서의 보디발의 아내를 이길 수 없었다. 그래서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이 회자한다. 그러나 우리가 주목할 것은 하나님은 이 상황을 다 보고 계신다는 것이며, 진실은 반드시 밝혀진다는 것이다. 네델란드의 국립박물관에 소장된 루벤스의 작품 <simon과 pero> 명화(名畫)가 있다. 그림의 내용을 모르면 춘화도 같다고 왜곡한다. 그림의 내용으로서는 노인이 젊은 여인의 젖을 물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그 그림의 진실은 아사(餓死)로 죽어가는 아버지를 향한 딸의 지극한 효성의 마음을 표현한 루벤스의 작품이다. 진실을 알기 전에는 사실로 평가하고 더 나아가 왜곡하여 비난하게 되지만 진실을 알고 나면 숙연해지는 것이다. 은퇴 후 9년을 지나면서 전국 600여 교회 부흥사경회를 인도했다. 크고 작은, 도시와 농어촌, 산골과 개척교회를 다니면서 듣고 보고 느낀, 지상교회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분쟁이었다. 그 중심에는 언제나 드러나지 않은 진실과 함께 사실과 왜곡의 줄타기로 인한 것이 대부분이다. 은혜와 평강으로 거룩한 동행을 노래하던 교회가 한 순간에 분쟁으로 벌판이 되어가고, 헐뜯고 비방하는 아귀다툼이 되고, 결국에는 산산조각이 난 그릇처럼 되는 것을 본다. 그 분쟁의 중심에는 진실을 추구하는 의지는 찾아볼 수 없고, 사실과 왜곡의 줄타기로 인하여 벌판이 되어가는 것이다. 지금도 유명인들의 경찰, 검찰 조사와 관련된 보도가 항상 쏟아지고 있다. 유튜버들은 자기 입맛에 맞추어서 내용을 퍼 나르는데 객관적인 측면에서 볼 때 사실과 왜곡의 줄타기를 보는 것 같다. 진실은 법정에서 마무리되지만, 법리적으로 진실이라고 마무리된 사건도 몇 년, 몇십 년이 지난 후 그 사건의 진실이 밝혀지면서 억울하게 옥살이한 예도 우리는 언론을 통하여 접한다. A 목사의 경우, 예산위원회 예산 당회 제직회 공동의회를 통과하여 집행한 특별항목의 지출을 횡령이라고 SNS를 통해 유포되어 A 목사를 바라보는 대부분 사람의 시선이 차갑고, 그 아름답던 인간관계가 뒤틀려진 상황에서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기막힌 일을 당했다. 진실은 모든 회의의 기록이 있고, 사실은 그 금액이 집행되었고, 왜곡은 횡령이라는 단어로 A 목사를 죄인으로 만들고 공동체는 벌판이 되어갔다는 것이다. 결론은 모든 것이 왜곡으로 드러나고 진실이 밝혀졌지만, 그동안 A 목사가 겪어야 했던 고통과 그로 인한 교회의 혼란과 그 가족들이 받아야 했던 아픔은 그 누구도 보상하지 않았다. 진실은 언젠가는 드러난다. B 장로의 경우, 개인 사업을 하면서 예배당 건축위원장의 직무를 맡아 교회 건축을 하면서 장로님 개인 돈을 더 많이 들여 건축하였는데, 건축비 횡령으로 고발되어 구치소에 갇히었다. 법정에서 판결로 마무리된 일이지만 진실은 건축비 중 5천만 원을 어음 처리를 위해 당회장에게 허락받고 며칠 사용하였는데 이 사실을 횡령으로 소위 광고지를 예배당 안에 뿌리는 그것이 발단되어 결국 법정으로 가게 되었다. 그런데 어처구니없는 것은 담임목사가 증인석에서 진실보다 교회 상황에 얽매여 5천만 원 사용을 모른다고 하여 B 장로는 피고인으로 재판정에 서야 했다. 재판 결과는 반대로 진실이 밝혀지면서 장로는 억울함이 벗겨지고 대신 목사가 위증으로 처벌받게 된 사건이었다. 진실은 장로가 건축을 위해 최선을 다한 헌신이었고, 사실은 5천만 원을 며칠 사용한 것이고, 왜곡은 그것을 뒤집어 찌라시를 만들어서 뿌리고 담임목사가 거기에 맞추어 동조함으로 교회가 풍비박산이 된 것이다. 그런데도 B 장로는 탄원서를 써서 담임목사의 위증에 대한 처벌을 선처해 달라고 판사에게 간청했다. 그리고 사건이 마무리 된 후 B장로는 조용히 그 교회를 떠났다. 유구무언이다. 진실과 사실과 왜곡의 줄타기다. 더 중요한 것은 이러한 상황에 접근방법을 분석해 보면 대부분 사람은 진실은 고사하고 사실 확인도 없이 왜곡에 관심을 더 두고 비난하고 정죄한다는 것이다. 그 대부분의 이유는 이해관계로 진실과 사실과 왜곡의 줄타기를 하는 것이다. 그런데 분명한 것이 있다. 진실은 반드시 밝혀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진실이 밝혀지기까지 그 이해관계 당사자로서는 그 상황의 여정이 여간 힘든 것이 아니지만 그것이 인간관계의 보편적이라면 극복하는 지혜를 요셉과 다윗을 통해 배워야 한다. 즉 아프지만 침묵하며 자기의 삶을 아는 것은 자기 자신과 하나님뿐임을 확신하는 마음가짐에서 어둠에서 빛으로의 전환을 믿고 대처하며 인내하는 것이다. 요셉도 그랬고, 다윗도 그랬고, 사도 바울도 그랬다. 어쩌면 소나기가 쏟아질 때는 비를 피하지 말고 맞으라는 교훈이리라. 필자의 저서 가운데 <성도입니까?>가 있다. 세례받고 교적부에 등재되면 교인이 된다. 사전적으로 말하면 종교를 믿는 사람이다. 성도는 사전적으로 말하면 기독교 신자의 존칭, 천주교에서는 특히 공덕이 높은 신자라고 표기한다. 제자는 스승에게서 가르침을 받는 사람이다. 그런데 교인도 성도도 제자도 진실과 사실과 왜곡의 줄타기를 한다. 나는 어떤 줄타기를 하고 있는가? 진실은 묻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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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8-18
  • [성서연구] 시세를 아는 사람들
    역대상은 읽기 어려운 성경으로 인식됩니다. 족보부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족보에서 시작된 역대상은 11장에 오면 다윗이 왕이 된 것을 알리고, 다윗을 도운 용사들을 거명합니다. 12장에는 다윗의 편에 가담한 사람들을 나열합니다. 다윗이 왕이 되는 과정은 단순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사울의 장군이요, 사위였지만, 사울은 그를 정적으로 인식하여 죽이려고 시도했고, 다윗은 여러 해 동안 도망자로 살아야 했습니다. 후에 사울이 블레셋과 전쟁 중 전사한 후에도 다윗이 곧바로 왕이 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우선 헤브론에서 유다 지파의 왕이 되었는데, 이는 다윗이 유다 지파였기 때문입니다. 나머지 지파들은 모두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을 왕으로 받들었습니다. 칠년 육 개월 동안 이스라엘에는 두 명의 왕이 있었던 셈입니다. 이런 상황이 사무엘하 2장 8~11절에 나옵니다. <8 사울의 군사령관 넬의 아들 아브넬이 이미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을 데리고 마하나임으로 건너가 9 길르앗과 아술과 이스르엘과 에브라임과 베냐민과 온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았더라 10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이 이스라엘 왕이 될 때에 나이가 사십 세이며 두 해 동안 왕위에 있으니라 유다 족속은 다윗을 따르니 11 다윗이 헤브론에서 유다 족속의 왕이 된 날 수는 칠 년 육 개월이더라> 그런데 다윗과 사울의 가문의 긴 전쟁과 대립의 와중에 점점 다윗에게로 오는 사람이 많아졌습니다. 사무엘하 3장 1절을 보면 이에 대해 <사울의 집과 다윗의 집 사이에 전쟁이 오래매 다윗은 점점 강하여 가고 사울의 집은 점점 약하여 가니라>고 했습니다. 역대상 12장에는 이 무렵 다윗에게로 온 사람들을 나열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 중에 잇사갈 자손 중에 이백 명이 다윗에게로 왔는데, 본문이 이들에 대한 언급입니다. 본문을 보면 <잇사갈 자손 중에서 시세를 알고 이스라엘이 마땅히 행할 것을 아는 우두머리가 이백 명이니 그들은 그 모든 형제를 통솔하는 자이며>라고 했습니다. 여기 <시세를 알고>란 대목이 나옵니다. 『NIV성경』에서는 <understand the times>라고 했고, 『쉬운성경』에서는 <때를 분간할 줄 아는>이라고 번역했습니다. 『현대인의성경』은 <그 시대의 흐름을 이해하고>라고 번역했습니다. 모든 사람은 시대의 자녀입니다. 특정 시대에 태어나 시대의 영향을 받으며 삽니다. 시대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주어진 시대에 올바른 삶의 열매를 맺으려면 시세를 아는 것이 필수적입니다. 때에 대해 전도서 3장 1~8절은 유명하지요. <1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 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 2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3 죽일 때가 있고 치료할 때가 있으며 헐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으며 4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으며 5 돌을 던져 버릴 때가 있고 돌을 거둘 때가 있으며 안을 때가 있고 안는 일을 멀리 할 때가 있으며 6 찾을 때가 있고 잃을 때가 있으며 지킬 때가 있고 버릴 때가 있으며 7 찢을 때가 있고 꿰맬 때가 있으며 잠잠할 때가 있고 말할 때가 있으며 8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 전쟁할 때가 있고 평화할 때가 있느니라> 때를 모르는 사람은 어리석은 처신을 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2023년은 한국교회 성도들에게 어떤 때일까요? 올해는 광복 78주년이며, 한국전쟁의 정전협정 70주년입니다. 아직 우리는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로 고통당하고 있고, 전쟁 위협은 점증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창조질서를 거부하는 동성애를 비롯한 성적 지향의 문제로 사회가 어지럽고, 흉기를 들고 불특정 다수를 공격하는 말기적 증세를 보고 있습니다. 자연 파괴로 인한 기후 이상은 우리를 막다른 골목으로 몰고 있습니다. 교회의 타락과 부패는 우리를 힘들게 합니다. 우리도 시세를 분별할 때가 왔습니다. 지금은 더 이상 게으를 때가 아닙니다. 눈앞의 일에만 매달릴 때가 아닙니다. 개인의 작은 이익을 추구할 때가 아닙니다. 평소처럼 행동할 때가 아닙니다. 우리 자신에게 비상 상황을 선포할 때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신랑을 빼앗긴 날과 같아서 금식할 때입니다. 지금은 잘못된 다수가 아닌, 의로운 소수와 뜻을 함께할 때입니다. 우리 모두 깨어 일어나야 하겠습니다. 다시 허리띠를 동여매고, 출발선에 서야 합니다. 다시 새벽을 깨워야 합니다. 정신을 차리고 하나님 앞에 엎드려야 합니다. 우리 모두 시세를 아는 현명한 성도가 되길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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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8-18
  • [시사칼럼] 더 이상 금모으기 없는 세상을 꿈꾸며
    말도 많고 탈도 많던 국제새만금잼버리대회가 무수한 얘깃거리를 양산하면서 마침내 끝이 났습니다. 그 가운데 돌연 ‘금모으기운동’이 소환이 되어 많은 이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들었지요. 시설 및 여타 준비 소홀과 태풍으로 인한 기상악화로 인해 야영을 비롯한 본래 행사가 조기종료가 되면서 수만 명에 이르는 참가자들을 위한 후속조치가 문제로 대두되었을 때, 집권여당의 정책위의장이라는 사람이 느닷없이 “금반지 정신으로 돌아가면 못할 게 없다”는 취지의 발언을 남겼기 때문입니다. 역시 여당의 한 국회의원은 일부 멤버가 군 복무 중인 비티에스(BTS)를 동원하자는 발언으로 파장을 일으켰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세계적으로 인기를 끌고 있는 또 다른 가수 몇이 참가하는 케이팝(K-pop) 콘서트가 열려 행사의 대미를 장식하면서 다시없을 잼버리로 역사에 길이 남게 되었습니다. 결과적으로 대한민국은 색다른 금모으기운동의 모습을 한 차례 더 보여주었습니다. 대기업들 특히 삼성은 음료와 의료진 심지어 신입사원까지 투입했고, 엘지와 포스코 그리고 현대그룹 등이 각종 물품과 인원을 지원했으며, 이마트와 파리바게트 등 유통업계도 이에 질세라 뛰어들었고, 대한상공회의소와 전국경제인연합회도 이런저런 후원에 나섰습니다. 종교계도 가만있지 않았습니다. 대형교회를 중심으로 숙소 지원에 나섰고, 사찰 또한 템플스테이 같은 다양한 문화콘텐츠를 제공했습니다. 무엇보다 국가적 위기 순간에 거짓말처럼 등장하는 대한국민들의 감동적인 사연이 이어졌습니다. 대원들을 알아보고 마치 자기 잘못인 양 ‘미안하다’를 거듭하며 물이라도 한 병 건네고 과자를 사 주며 물건이나 음식 값을 깎아주고 보듬어주고 두드려주고 위로하고 격려하는 가슴 뭉클한 시민들이 속출하면서 ‘아, 대한민국~!’ 가슴 벅찬 구호를 거리마다 소리 없이 울려 퍼지게 하는 장관을 연출했습니다. 원래 금모으기운동의 시작은 1907년 국채보상운동이 효시입니다. 일단 남성들 중심으로 3개월간 금연하며 모은 돈으로 나라 빚을 갚자는 움직임이 일어났는데, 보다 더 대범한 여성들이 가락지와 패물을 모으자는 운동을 일으켰다 합니다. 남녀노소 신분고하 종교신앙을 막론하고 전국민이 참여하여 심지어는 도적떼까지 모인 금붙이들을 훔치기는커녕 자신들 것까지 보탰다는 전설 같은 일화들이 넘쳐납니다. 1997년 11월 국제통화금융(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하면서 나라가 또 다시 부채의 위기에 몰리자 우리 국민들이 보여주었던 모습도 장엄했습니다. 차고 다니던 목걸이나 가락지는 물론 장롱에 두었던 돌반지나 심지어 우승메달까지 금으로 된 것이면 무엇이든 자발적으로 내놓는 시민들의 발걸음이 금물결이 되어 방방곡곡을 수놓았습니다. 그 결과 이듬해 1월에서 4월까지 석 달 동안 미국 자유의 여신상 무게와 같은 225톤의 금이 걷혔다고 했습니다(경향, 구혜영). 어쩌면 금보다도 더 귀한 무언가를 모은 사건도 잊을 수 없습니다. 2007년 12월 삼성중공업 소속 선단과 홍콩 선적의 유조선이 충돌하여 원유 12,547리터가 유출되면서 순식간에 태안 앞바다가 기름으로 뒤덮이는 대참사가 발생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지금까지도 믿기지 않는 놀라운 일이 이후 벌어졌지요. 어느 순간부터 전국 각지에서 다양한 연령과 직업을 가진 시민들이 자원봉사자로 나서서 양동이로 기름을 퍼 나르고 흡착포나 헌 옷가지 등으로 바위나 토사에 묻은 기름을 직접 닦아내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참여한 인원이 물경 123만 명에 이르렀고, 그들이 손에 손을 잡고 어깨에 어깨를 이어 시커먼 바닷가를 가로지르며 만들어냈던 ‘인간띠’는 그 어떤 화가가 그린 선이나 획보다 더 눈부시고 아름다웠습니다. 복구에 수십 년도 모자란다던 내외신의 평가가 무색하게 국민들의 고귀한 땀방울들로 씻긴 바다는 불과 10년 만에 제 모습을 되찾았다고 했습니다. 그래도, 그래도 말입니다. 이제는 이런 소망을 가져봅니다. 더 이상 금모으기 운동 따위는 필요 없는 세상이 되면 좋겠다고, 누군가 책임 있는 자들이 저지른 과오의 결과 초래된 재앙을 순진무구한 시민들이 대신 나서서 감당해야 하는 그런 일들은 이번 잔치(“잼버리” 뜻)가 마지막이면 좋겠다는 그런 소망 말입니다. 한국만의 상황도 아닌 것이, 성경에도 일종의 금모으기 운동들이 등장합니다! 예수께서는 목자를 잃은 양같이 고생하던 백성들을 애(腸)를 태우며(스플랑크니조마이, 막 6:34) 바라보셨는데, 그런 와중에도 성전을 위해 가진 바 전부인 두 렙돈을 내놓은 과부를 칭찬하셨고(눅 21:4), 배고픈 사람들을 위해 자기 도시락을 아끼지 않고 기꺼이 내놓은 소년을 영원히 기억되도록 하셨습니다(요 6:9). 반면에 나라를 엉망으로 만들어놓고도 호의호식하던 무리들을 거침없이 “독사의 자식들”이라 부르셨고(마 12:34), 교인이라 하면서도 불의에 가담할 뿐 도무지 책임의식조차 없는 자들을 “회칠한 무덤”이라고 준엄하게 꾸짖으셨습니다(마 23:27). 분명히 그런 자들이 다시는 등장하지 않고 그런 일들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그래서 착하기만 한 백성들로 하여금 더 이상 짐을 지게 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엄중한 경고의 말씀이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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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8-18
  • [은혜의말씀] 우리의 작은 헌신으로(막 6:34-43)
    오늘 본문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오병이어’ 기적입니다.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남자만 오천 명이 먹고, 12 바구니가 남았다는 것입니다. 34절을 보면, 예수님은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셨다고 합니다. 불쌍히 여긴다는 것은 ‘가벼운 동정심’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고통 하는 곳에 깊이 들어가, 그 사람과 함께 고통을 나눈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우리의 아픔을 아시고, 우리와 함께해 주시는 사랑과 긍휼의 주님이신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해는 저물어가고, 제자들도 많은 무리로 인해 걱정이 앞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나아와 무리를 보내어 자기들이 뭔가를 사 먹도록 하자고 제안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뭐라고 하십니까?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 하십니다. 여러분, 이 사고의 차이를 보십시오. 제자들은 자신들과는 상관없는 일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다르십니다. 그들의 고통을 함께 지라는 것입니다. 사랑은 짐을 져 주는 것입니다. 말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함께 아파해 주고, 함께 눈물을 흘려주고, 함께 짐을 져 주는 것입니다. 앞으로 우리 교회는 빈들에 처한 사람들과 함께 짐을 지기 위해, 사랑의 마음으로 달려 나가는 일에 힘을 써야 할 것입니다. 자, 예수님의 말씀에 제자들이 다시 질문합니다. ‘우리가 가서 이백 데나리온의 떡을 사다 먹이리까’ 제자들은 이것은 도저히 안 되는 일이라며, 단정 짓고 있습니다. 제자들의 실수가 무엇입니까? 그들은 자기 안에 있는 자원만을 보았습니다. 그 자원을 가지고, 계산만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는 안되지요. 자기의 능력만을 볼 것이 아니라, 주님을 의지해야지요. 그런데, 제자들만 탓할 것이 아닙니다. 우리도 어려운 문제에 부딪치면 어떻게 합니까? 머리 굴리기 바쁘지 않습니까? 사람 찾아다니기 바쁘고, 이리저리 끌어 막기 바쁘고 그러지 않습니까? 그 순간 주님께 모든 것을 의탁하고 기도하십니까? 주님을 놓치면, 그때부터는 제자들같이 ‘부족합니다, 안 됩니다.’ 하게 됩니다. 부족할 그때가 바로 믿음의 눈으로, 살아 역사하시는 주님을 바라보아야 할 때입니다. 여러분, 주님의 일은 내 자원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예수, 한 분만을 바라봅시다. 주님이 공급해주실 것입니다. 주님과 제자들의 대화를 통해 배우는 교훈은, 우리의 인생에 부족함과 어려움이 있을 때, 우리의 상황이 아니라 주님의 계획이 무엇인지 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 대답을 가지고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답이 무엇인지 물어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 말씀에 제자들이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구해왔습니다. 그것은 어린아이의 한 끼 도시락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것을 받아 축사하시고, 떼어주십니다. 그랬더니, 떼어도 떼어도 끝없이 양이 늘어납니다. 남자만 5천 명이 배부르게 먹고도, 12 바구니가 남았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우리가 빈들에 처한 사람들을 위해 함께 짐을 진다면, 필요한 자원은 우리 주님이 책임져주신다는 말이지요. 우리 주님이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채워주신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을 보면, 이 오병이어를 드린 소년이 나옵니다. 이 아이는 작은 자기 도시락을 주님께 바친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 드릴 때, 그 음식은 작은 것이 아니라, 기적의 산실이 되었습니다. 한 아이가 드린 오병이어가 주님의 손으로 옮겨지는 순간, 땅의 일이 하늘의 사건으로 변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탁월한 능력이나 은사가 없어도, 겸손히 순종하고자 애 써는 그 열심을 주님은 귀하게 보시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작지만 큰 헌신이 주님의 손에 들려져 큰 역사가 일어날 줄 믿습니다. 우리 교회도 조용하게 교회와 주님의 일에 헌신하는 신실한 일꾼들이 많아지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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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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