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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다음세대칼럼] 사랑하다가 지치지 맙시다
    어제 카톡에 익숙한 이름이 생일이라는 알림이 있었습니다. 바로 둥지청소년회복센터를 시작하는 계기가 된 아영(가명)이였습니다. “생일 축하”라는 간단한 톡을 남겼는데 조금 뒤 그 아영이로부터 이른 아침 출근하고 있다며 전화가 왔습니다. 너무 기특하여 작은 선물을 해줄테니 원하는 것을 말하라고 하자 한참 생각하더니 아웃백쿠폰을 원하는 것입니다. 사실 이 아영이와 저는 아웃백과 관련한 사연이 있습니다. 당시 저는 각 청소년회복센터를 정기적으로 방문하여 식사와 멘토링을 해오고 있었습니다. 그때 어느 여자청소년회복센터를 방문하여 함께 시간을 가지던 중 많은 아이들 가운데 유독 밝은 얼굴로 눈에 띄는 아이가 있었는데 바로 아영이입니다. 중학교 3학년 나이였던 아영이는 워낙 가정환경이 좋지 않아 학업을 중단한 채 가출을 반복하다가 재판을 받아 그 센터에서 생활 중이었는데 볼 때마다 마음이 쓰였습니다. 마침 그때도 아영이의 생일이라 스테이크가 먹고 싶다고 하여 근처 아웃백에서 특별한 식사로 함께 했습니다. “너 스테이크 좋아하니?” “아니요” “스테이크가 먹고 싶다며..” “저 오늘 스테이크 처음 먹어요” “........” “근데 대패삽겹살이 더 맛있는 것 같아요 ㅎㅎㅎ” “어쨌든 남은 센터 생활 잘 하거라” “예. 당연하죠” 그렇게 약속했던 아영이는 그 길로 센터에 복귀하지 않고 이탈하여 저의 마음이 무너지게 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다시 복귀하여 센터를 퇴소했지만, 결국 가정환경의 문제로 다시 길거리를 방황하던 아영이는 보호관찰 위반으로 다시 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런 딱한 상황에 판사님의 배려로 아영이를 위한 임시거처를 마련하였습니다. 한 지인이 자신 소유의 아파트를 임대로 세입자를 찾고 있어 비어 있는 기간에 임시로 사용키로 한 것입니다. 매월 관리비와 운영비의 부담을 느끼던 차에 아이는 다시 사고를 치는 반복된 문제로 결국 10호 처분을 받고 2년간 소년원을 가게 되었습니다. 열악한 환경의 아이들들이 결국 재판을 받고 소년원을 갈 수 밖에 없는 아쉽고 안타까운 마음에 직접 청소년회복센터를 운영하기로 하고 둥지를 시작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너 이제 몇 살이냐?” “27살요” “정말???” “저 요즘 피부미용샵에서 일하고 있어요” “그래. 올해 안에 꼭 보자” “예. 꼭 놀러갈게요” “근데 아웃백은 왜? 나는 너 때문에 아웃백 트라우마가 있는데 ㅎㅎ. 또 먹고 어디 도망가려고?” “저 사실 그 날 이후로 스테이크 먹어본 적 없어요” “그런데 왜 갑자기 스테이크?” “그냥요” 그리고 우리의 대회는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습니다. 아마도 제게는 누군가의 ‘잘해줘봐야 소용없다’는 말처럼 트라우마가 될 스테이크지만, 아영이에게는 추억의 그리움이 있는 음식이고 단어인가 봅니다. 이렇게 한 번의 베풂과 사랑이 아이들에게는 좋은 추억이 되는 것을 확인하며 힘을 얻는 날이었습니다. “야영아! 잘 살아라. 네가 잘 살아야 내가 살아온 날들이 그리고 지금 하는 일이 의미가 있지. 알겠지?” “당연하죠. 저 그때 생각하면서 잘 살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그래 고맙다” 계속 아이들을 위한 든든한 나무가 되어야겠습니다. 힘든 아이들의 나무그늘 같은 존재이고 싶습니다. 비바람치고 태풍이 몰아쳐서 버텨내는 나무가 되도록 기도부탁드립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갈 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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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다음세대
    • 다음세대 칼럼
    2023-12-01
  • [분홍목사의 다음세대이야기] 다음세대가 반응하는 교회
    현대목회환경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교회는 ‘다음세대가 반응하는 교회’입니다. 다음세대가 반응하는 교회란 다음세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주고 그들의 이야기를 경청해주고 먼저 반응하려고 노력하는 교회라는 뜻도 됩니다. 저희 교회에 가족단위로 등록하는 분들이 많이 계십니다. 그런데 이분들이 하시는 얘기가 “목사님, 우리 아이가 이 교회를 정했습니다.” 하는 것입니다. 그중에 제일 감동적인 이야기가 얼마 전에 등록하신 분인데요. 제가 “어떻게 우리 교회에 오셨어요?”라고 여쭤봤더니 그 성도분 말씀이 “우리 고1 짜리 딸이 다솔이예요. 다솔이가 여러 교회들 홈페이지를 보다가 성민교회 홈페이지에 올라와 있는 교회학교 애들 사진을 보더니 이렇게 말하지 뭐에요.”하시는 겁니다. 궁금해진 제가 다시 여쭤봤습니다. “뭐라고 하던가요?” 그랬더니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다솔이가 말했답니다. “아빠! 교회를 가려면 이런 교회를 가야 해!” 그래서 그 성도분이 “왜?” 라고 물었더니 “애들 표정을 봐! 살아 있잖아! 이런 아이들 키우는 부모들은 얼마나 좋겠어? 이런 아이들 키우는 선생님들은 또 얼마나 행복하겠어? 이렇게 아이들부터 어른들까지 모두가 행복한 교회를 가야 해, 아빠! 우리 이 교회 가자.” 그리고는 다솔이네 가족 모두가 우리 교회로 정하고 나왔다는 거예요. 다솔이는 제가 너무 너무 사랑하는 아이입니다. 여러분, 우리 모두 이런 교회, 다음세대가 반응하는 교회를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러려면 무엇이 중요할까요? 유명한 과학자 아인슈타인이 한 말입니다. “어제와 똑같이 살면서 다른 미래를 기대하는 것은 정신병 초기 증세이다.” 너무 충격적인 말인가요? 대단히 죄송합니다만 이 말은 절대로 심한 말이 아닙니다. 많은 교회가 작년과 똑같은 예산, 똑같은 분위기, 똑같은 인력으로 올해에는 부흥할 거래요. 어떻게요? 아무것도 안 달라졌는데 무슨 수로요?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합니다. 어쩌다 세미나 한두 번 열고는 그걸로 다 되지는 않는단 말이에요. 분명히 달라져야 해요. 뭐가 달라져야 할까요? 이 지면에 연재되고 있는 ‘분홍목사의 다음세대이야기’를 참고하셔도 좋고, 제가 쓴 『분홍목사의 교회교육 레시피』나 이승연 목사님의 『코로나시대 기독교교육으로 묻고 답하다』 등의 책들을 보셔도 좋습니다. 또는 유튜브나 각종 미디어에서 소개되고 있는 다음세대 목회의 노하우들을 관심있게 지켜보셔도 좋습니다. 오늘날은 정보의 홍수입니다. 정보가 없어서 기갈이 아니라 그 정보들을 붙잡아서 우리 교회의 장점으로 살려내지 못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여러분, 그중에서 나 개인이 할 수 있는 게 있어요. 엄마로서, 교사로서, 아빠로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두 번째는 내가 반 담임으로서 우리 반이 할 수 있는 게 있어요. 세 번째는 우리 학년이, 네 번째는 우리 부서가, 그리고 다섯 번째는 우리 교회 학교가 할 수 있는 게 있습니다. 그리고 여섯 번째는 우리 교회가 전체적으로 할 수 있는 일들이 있을 겁니다. 이런 내용들을 체크해 보셔서 여러분들이 그 일 하나하나를 한번 시도하고 도전하고 바꿔 나가보시면 반드시 2024년 여러분의 교회학교는 하나님의 부흥케 하시는 은혜가 임할 줄로 믿습니다. 전 자신 있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해봤거든요. 하고 있거든요. 아직도 부족한 것이 많지만 저희 교회의 실예를 하나씩 들어서 알려드리고자 합니다. 그중 첫 번째는 “다음세대표로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저희 교회는 어른들이 아이들의 이름을 불러주는 교회입니다. 어떻게 이름을 불러줄까요? 바로 본당 앞에 다음세대표가 있어요. 모든 부서 다음세대 아이들의 얼굴과 이름을 기록한 그리고 기도 제목을 기록한 표가 저희 본당 바로 앞에 있습니다. 이런 판이 많은 교회에 대부분 어디 있을까요? 부서실에 붙어 있어요. 그런데 그러면 소용없습니다. 본당 앞에 있어야 해요. 교회에서 제일 중요한 자리잖아요. 보통 거기가 역사가 중요한 교회는 역대 교회 사진이나 교역자분들 사진 붙어있는 자리입니다. 선교 열심히 하는 교회는 세계 선교 지도가 붙어 있고, 출석이 중요한 교회에는 주보꽂이가 있습니다. 근데 저희 교회는 아이들의 얼굴과 이름이 붙어 있어요. 그리고 이름 불러주기 운동을 하는 거예요. 그냥 “얘!”가 아니라 “원준아!”라고 불러주면 애들이 눈빛이 달라져요. 처음 아이를 부르고 해주는 말이 있거든요. 좀 긴데 “얘야! 너 참 예쁘다. 얘! 정말 멋지다. 참 귀하다. 네가 있어서 우리 교회는 너무너무 행복해. 혹시 배고프니? 뭐 사줄까? 뭐 먹을래?” 여기까지거든요. 조금 길죠? 그런데 이거를 저희 교회는 다 해요. 여러분, 이거를 애들 입장에서 들었다고 생각해 보세요. 처음 들으면 간지러워 합니다. 어색하고 닭살이 막 돋아요. 그런데 세 번 정도 계속 들으면 “이게 뭐지? 어른들이 안 하던 걸 하네?”하구요, 10번 듣잖아요? 자기도 모르게 “아이스크림!”, “돈까스!” 이렇게 나온다니까요. 이게 희한해요. 10번 들으면 진심이 다가와요. 믿어지는 거예요. 이게 진짜구나. 우리 교회 어른들은 정말 날 사랑하는구나. 그때부터 입을 열기 시작하면 교회는 달라집니다. 다음세대가 반응하는 교회가 됩니다. 꼭 한 번 시도해 보시길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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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분홍목사의 다음세대 이야기
    2023-12-01
  • [목회자칼럼] 지금 나는 무엇을 하고 있나?
    1397년 5월 15일, 지구의 한 곳에 한 생명, 아기가 태어났습니다. 그 후 약 150년이 흐른 후 1545 4월 28일, 지구의 한 곳에 한 생명, 아기가 태어났습니다. 이 두 사람은 현재 ‘경제규모 13위 부유국가, 7위 소비국가’인 대한민국과 무슨 상관이 있을까요? 첫 번째 한 생명, 아기는 잘 자라서 훌륭한 공무원이 되고, 두 번째 한 생명, 아기는 잘 자라서 군인이 되었습니다. 여기까지 말씀드리면 이 글을 읽고 있는 여러분들은 다들, 눈치를 채셨겠지요? 아니면 아직도 고개를 갸우뚱 거리며 예상을 못하고 있는지요? 첫 번째 한 생명, 어린 아기는 자라서 훗날 한글을 창제한 조선 4대 왕인 세종대왕이 됩니다. 그리고 두 번째 한 생명, 어린 아기는 우리나라가 일본으로부터 어려움을 당할 때, 바다를 지키며 임진왜란을 승리를 이끌고 23전 23승이라는 기적같은 전직을 세운 이순신 장군입니다. 만약, 이 두 생명, 두 어린 아기가 없었다면 오늘날의 대한민국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세종대왕은 한글을 만들면서, 훗날 조선을 넘어 대한민국의 후손들이 한글을 자랑스러워하며 민족의 정신이 담긴 글로 받아들이며 잘 사용할 것이라는 것을 예상하고 만들었을까요? 이순신 장군 역시, 500년이라는 긴 시간이 흐른 후 지긋지긋한 일본의 괴롭힘 속에 벗어나 이제는 일본과 경제, 문화 분야에 어쩌면 더 뛰어난 성장을 이룰 것을 알고 치열하게 싸운 것이었을까요? 아마, 아닐 것입니다. 세종대왕이나 이순신 장군 모두, 100년 후 혹은 500년 후를 미리 알고 그 일들을 한 것이 아니라 지금 당장 자신에게 주어진 일들을 의미를 찾아내서 했기에 가능했을 것입니다. 세종대왕이 중국의 눈치를 보며 한글을 창조한 이유는 ‘백성을 향한 사랑’이었습니다. 이순신 장군은 오자병법과 손자병법을 뛰어 넘는 전술로 전쟁을 했습니다. 이순신 주위의 모든 사람들은 “적의 숫자가 아군보다 더 많으면 절대로 싸우지 말아야 한다”고 말했지만, 이순신은 13척의 배를 갖고 명량해전을 치루었습니다. 오자병법, 손자병법을 넘어서는 결정을 하며 해전을 치룬 이유는 무엇인가요? 바로 어려움을 겪는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 이었습니다. 이제 시선을 돌려 나를 향하여 바라봅시다. 지금 나는 어떤 삶을 살고 있는가요? 혹,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이 결과가 나오지 않고, 별다른 성과가 없어 힘들어 하고 있지는 않는가요? 연말을 맞이해 일년을 결산하면서 날씨도 춥고 경제도 추운데 이뤄놓은 것도 없어 마음까지 추운 분은 없는지요? 지금도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어느 곳에서 이름도 없이 묵묵히 자기의 일을 감당하며 뚜벅뚜벅 걷고 있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비록 빛도 없고, 이름도 없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사랑을 갖고 다가서는 그 자리에 100년 후, 500년 후에 대한민국과 하나님 나라가 있을 것입니다. 2000년 전, 1월 1일에 태어난 한 생명 예수가 오늘날 전세계 75억 가운데 30억의 가슴 속에 하늘 나라의 사랑을 심어 놓았습니다. 그리고 그 중 한 명이 바로 나이고, 나같은 사람을 그분의 사랑으로 변화시키셨습니다. 뉴턴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나 자신도 사랑이라는 바다에 한 발 조차 담그지 못한, 모래 밭에서 놀고 있는 어린 아이와 같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바다를 눈과 가슴에 품어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내 눈동자와 가슴 속에는 바다가 넘실거리고 있습니다. 언젠가는 나는 그 바다에 나 자신을 내던질 것입니다. 나 스스로를 사라이랑는 바다에 던지려는 순간, 무수히 많은 사람이 곁에 있지 않을까요?” 사랑으로 시작했는데 지쳐버린 영혼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당신이 걷고 있는 그 길이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당신이 걷고 있는 그 길이 미래와 하나님 나라를 만들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알아주지 않더라도, 지금 내가 걷고 있는 이 길이 바로 미래의 출발점임을 아는 것, 지금 내가 섬기고 있는 단 한 사람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의 시작점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 2023년을 보내며 다시 한 번 점검해야 할 나의 태도와 자세일 것입니다. 2023년, 마지막 한달을 남겨 놓고 있는 이 시점, 다시 사랑에 물들고 싶고 사랑으로 견디고 싶고 사랑으로 승리하고 싶습니다. 지쳐버린 영혼이 있다면 다시 사랑으로 일어나길, 다시 하나님의 소망으로 세워지길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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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2-01
  • 엑스포 유치 실패에 부산교계 충격
    부산이 2030엑스포 유치에 실패했다. 발표 이전만 하더라도 부산교계는 엑스포 유치가 가능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정부 예상처럼 접전을 벌이다, 2차 투표에서 역전할 수 있을 것이라고 낙관했다. 하지만 큰 득표차이로 실패하자 실망하는 분위기가 역력한 상황. 그도 그럴것이 그동안 부산교계는 엑스포 유치에 한 목소리를 냈다. 2030 부산세계박람회 선교협의회, 2030 기독교 봉사단 등을 조직해 엑스포 유치를 위해 기도회, 발대식, 축제 등 다양한 사업을 전개해 왔다. 모 관계자는 “(결과에)실망스럽지만, 최선을 다했다는 점에서 큰 후회는 없다. 다만 모처럼 교계가 한 목소리를 내고, 힘을 모았다는 점에서 (결과가)아쉬운 것은 사실”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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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야의 소리
    2023-12-01
  • 징역 30년 구형받은 JMS 정명석
    한국교회 주요 교단으로부터 이단으로 규정된 바 있는 JMS 정명석이 검찰로부터 징역 30년을 구형받았다. 정명석은 과거 예장고신(1991년), 예장통합(2002년), 예장합동(2008년) 기독교감리회(2014)등에서 ‘이단’으로 규정 받은 바 있다. 대전지법 제12형사부(재판장 나상훈)는 준강간, 준유사강간, 준강제추행, 강제추행 혐의로 기소된 JMS 정명석에 대한 결심 공판을 지난 11월 21일 진행했다. 이 자리에서 검찰은 “종교 단체 교주인 피고인이 스스로 메시아 행세하며 JMS 조직을 이용해 다수의 여신도를 상대로 성범죄를 저지르는 등 매우 중대한 범죄를 저질렀다. 피고인과 JMS 내 여성 간부들은 피해자들에게 피고인을 메시아로 믿도록 세뇌한 뒤 피해자들의 신뢰를 악용해 성범죄를 저질렀으며 피해자들이 강력한 처벌을 원하고 있다”라며 정명석에게 징역 30년을 구형했다. 정명석의 1심 선고는 오는 12월 22일 오후 2시에 내려질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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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2-01
  • 퀴어축제와 반동성애 집회
    지난 25일 경남 창원시에서 제3회 경남퀴어문화축제가 개최됐다. 교계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퀴어축제를 강행 한 것. 경남 퀴어축제는 코로나 팬데믹 이후 4년 만에 개최되었는데, 2020년에는 온라인에서 열렸고 2021년과 2022년에는 개최되지 못했다. 퀴어축제가 강행되자 경남기독교총연합회와 바른가치수호경남도민연합은 창원시 성산아트홀 인근 도로에서는 ‘퀴어 반대 연합 집회’를 개최됐다. 행사 전 창원중부경찰서는 양측의 충돌을 우려해 경찰관 1000명을 투입해 안전 펜스를 설치하는 등 집회 관리에 나선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경찰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양측의 충돌은 없었다. 퀴어축제에 참여한 인원이 예상보다 적었기 때문. 경찰은 당초 1,000명 이상이 참여할 것으로 생각했지만, 퀴어축제에 200여명(오후 2시 기준, 경찰추산) 만이 참석했다. 반면 반대집회의 경우 2,000 여명이 참석해 동성애 반대를 외쳤다. 반대집회에서 말씀을 전한 박석환 목사(소금과빛교회)는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파괴하는 악법과의 싸움은 영적 싸움”이라며 “진리와 말씀으로 싸우고, 기도로서 승리하자”고 권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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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2-01
  • 시작하는 출발보다 뒷모습이 아름다운 정인규 목사
    “그 잃어버린 자를 내가 찾으며 쫓기는 자를 내가 돌아오게 하며 상한 자를 내가 싸매주며 병든 자를 내가 강하게 하려니와 살진 자와 강한 자는 내가 없애고 정의대로 그것들을 먹이리라” (에스겔 34:16) 부산에 6.25 피난 시절 1951년 1월 4일 북한에서 믿음을 지켜 오던 많은 피난민들이 월남하여 부산 서구 남부민동 산의 465번지의 피난민촌 주변에 한양공대 가교사를 짓고 그 곳에서 한양공대 설립자 고 김연준 장로(지금의 한양대학교)와 몇 몇 공대 교수들이 중심이 되어 1952년 3월 2일 초대 목사로 염명수 목사를 모시고 첫 예배를 드린 것이 한양교회와 남부민교회의 효시로 분리 했다가 다시 두 교회가 합병한 것이 오늘의 은성교회로 서구 해돋이로 22번길 3-4 자리에 안착 한 것이 71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러니까 순전히 함경도 출신과 평안도 출신들 끼리 물과 기름과 같이 모여 합친 곳이 은성교회로 출발한 것이다. 그것도 한양교회는 함남노회 소속이고 남부민교회는 경남노회 소속이었는데 통합 부산노회로 귀착되어 오늘에 이른 것이다. 은성교회로 합병한 그 당시 담임목사가 정연승 목사이고 전도사가 전동윤 목사이다. 그 후 최상식 목사(고인)가 18년 시무하였고 3대 구영철 목사가 7년간 시무하였고 4대 안영서 목사가 4년간 시무하고 5대 문경모 목사가 5년간 시무하고 2008년에 6대 여충호 목사(현 노량진교회 담임)가 3년간 시무하고 2012년에 7대 김태승 목사가 11년간 시무하고 2023년 6월말 사임 후 임시당회장으로 오신 분이 정인규 목사이다. 약 7개월 여정에서 서로 마음의 상처를 싸매고 치유하며 화합을 이루면서 새 담임목사 청빙할 때까지 주일날 메시지가 서로 용서하고 사랑하며 화합을 도모하는 메시지가 주축을 이루었다. 정인규 목사(68세)는 소속된 부산노회 안에서 교회 담임목사가 공석일 경우 임시당회장 혹은 대리당회장의 적임자로 내세우는데 우선 주자로 모시며 파송 받는 목사이기도하다. 일찍이 성지학교 출신 졸업생으로 모교의 첫 번째 교목실장을 13년간 역임하기도 하였다. 그의 제자들 가운데 20여명의 목사가 나오기도 했다. 대남로교회, 성덕교회에서도 목회 시무도 했을 뿐더러 교회 내분이 있는 교회에 임시당회장으로 파송 받으면 항상 중립에 서서 당회 운영을 하고 있다는 정평이 나 있다. 이번 은성교회 임시당회장 시에 담임목사 청빙 과정에서 친한 친구 목사가 추천하는 친구 아들을 두고 친구가 원수가 되어도 좋으니 정중히 거절하고 중립에서 당회 운영을 해 왔다고 솔직한 고백을 들었다. 부산에서 태어나서 가야교회(고 이신용 목사 시무)가 모교회이며 정 목사의 사모는 한식요리사, 요양보호사, 운전면허증, 부산YMCA에서 운영하는 산후도우미 베이비시터 과정을 수료하여 자격증을 취득한 전업주부이다. 슬하에는 1남 1녀로 여식은 한동대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생식 전문회사 미래 전략실에 7년간 재직한 후 미국 뉴욕 포담대학교 로스쿨을 하여 국제변호사 시험에 합격하여 워싱턴 DC 항소법원 소속 변호사로 활동하고 있다. 2014년 혼인한 사위는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성악을 전공한 후 미국에서 고든-콘웰 신학교에서 교역학 석사 학위 취득 후 현재 미국 뉴욕 소재 웨스트체스터연합교회 전도사로 시무하고 있다. 아들은 동아대학교에서 경영정보 전공으로 외국계 회사에 재직 중에 있다. 내가 아는 정인규 목사는 (사)부산십대선교회(YFC) 이사장으로 있으면서 청소년들에게 아버지처럼 다정다감하며 십대 청소년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쳤다. (재)21세기포럼 문화재단이 주최하는 ‘제9회 기독문화대상’(교육부분)에서 부산십대선교회(YFC)가 상을 받기도 했다. 이제 불과 2년밖에 남지 않은 은퇴를 앞두고 마지막이 될 것 같은 임시당회장으로 헌신하면서 그때 맞는 말씀으로 주일 설교를 하여 교회 내의 갈등이 있을 경우 잘 조정하고 화합으로 상처를 치유하는데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평을 받고 있다. 정인규 목사는 “앞모습보다, 뒷모습이 아름다운 사람으로 남을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다”고 피력했다. ‘은퇴란 삶으로 보여주는 마지막 설교’라고 말했듯이 남은 2년 어간을 유종의 미를 거두어 내는 삶으로 살아가기를 기도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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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2-01
  • [이상규 교수의 역사탐색]호주선교부의 미우라 고아원 출신 김순복 여사
    김순복, 결혼 후에는 남편의 성을 따라 박순복으로 불린 한 여성의 삶의 여정은 초기 경남지방 교회 역사의 한 단면이자 한 여성의 변화된 삶의 행로를 보여주는 역사의 흔적으로 남아 있다. 김순복은 어떤 여성이었을까? 1892년 10월 12일 내한한 호주장로교 제2진 5명 중 여선교사 멘지스와 진 페리, 그리고 퍼셋은 부산진 죄천동에 거주하면서 한국인들과 접촉하기 시작했고, 전도하기 시작했지만 이들의 첫 번째 사역은 고아원의 운영이었다. 처음부터 의도한 사업은 선교사 집에 버려진 아이 때문에 1893년 고아원을 시작하게 되었다. 이 고아원이 부산경남지방 최초의 사회복지시설이라고 할 수 있는 미우라(Myoora)고아원이었다. 버려진 한 아이로 출발했으나 점점 수가 증가되어 2년 후에는 13명으로 늘어났다. 그 중의 한 아이가 김순복(金順福, 1887-1942)이었다. 6살 혹은 7살 정도 되었을 때 이 고아원에 오게 된 것으로 보이는데, 그의 부모도 알 수 없고, 어떤 환경에서 고아원에 수용되었는지도 알 수 없다. 그러나 미우라에 와서 서양 선교사들을 만난 덕에 신앙교육을 받게 되었고, 멘지스가 시작한 일신여학교에서 공부할 수 있게 되었다. 감히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이렇게 성장한 김순복은 1905년 호주선교부를 도우며 매서전도인으로 활동하던 박성애(朴晟愛, 1877-1961) 라는 청년과 혼인하게 되었다. 이때가 1905년 2월 15일이었고 18살 때였다. 남편 박성애는 28세였으니 순복이 보다 10살 연상이었다. 박성애의 혼인은 약간 늦었으나 당시에 기독교 신앙을 가진 처녀를 찾기 어려웠다. 이런 상황에서 맨지스는 자신이 양육한 순복이와의 혼인을 주선한 것이다. 결혼 예식을 주례한 이는 왕길지 선교사였다. 이때의 예식은 호주장로교 휘하의 주일학교를 위한 잡지인 「레코드 The Record」 18권 2호(1906. 2) 표지와 내지(10쪽)에 게재되었고, 신부 김순복이 에벤에셀교회 주일학교에 보낸 짧은 편지도 소개되어 있다. “친애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그간 어떻게 지내시는지요? 저는 여러분들이 베풀어 주신 후원에 힘입어 평안하게 살고 있습니다. 저는 가련한 소녀였으나 여러분들의 자상한 도움으로 좋은 음식과 좋은 옷을 입고 잘 살고 있고, 주야로 여러분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무엇보다도 주님을 알게 된 점에 대하여 더 큰 감사를 드립니다. ... 비록 우리가 서로 얼굴을 보지 못하지만 우리의 마음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하나가 되어 있습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항상 주의 은혜를 누리시기를 간절히 기대하며, 이 세상에서도 여러분들의 얼굴을 보게 되기를 기대합니다. 저를 위해서도 기도해 주십시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여러분 모두와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박순복.” 이때부터는 남편의 성을 따라 박순복으로 불렸다. 남편은 1877년 5월생으로 부산진구 범일동에서 4남매의 장남으로 출생했는데, 한문 사숙에서 수학하고 가업에 종사하던 중 내한한 서양 사람들에 대한 관심에서 지금의 부산 동구 좌천동의 호주선교부를 방문하게 되는데, 이것이 그의 삶의 행로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게 된다. 청년 박성애는 호주 선교사들과 접촉하게 되고 결국 기독교 신앙을 받아드리게 되지만 처음에는 서양에 대한 호기심뿐이었다. 선교사들과 접촉하게 되지만 자기를 들어내려 하지 않았기에 여선교사들은 그를 ‘니고데모’라고 불렀다. 그러나 24세가 되던 1901년 초에는 분명한 기독교 신자가 되었고, 부산진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했다. 1901년 2월 10일에는 왕길지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게 되는데, 자신의 아내가 될 김순복도 이 때 세례를 받았다. 그후 왕길지 선교사의 주선으로 대영성서공회 매서인으로 활동하게 된다. 그리고 부산진교회 수요 예배 인도자로 임명되었다. 이렇게 변화된 길을 가자 호주선교사 멘지스와 왕길지는 그를 순복이에게 소개하고 혼인하게 이끌어 간 것이다. 그런데 박성애는 호주의 첫 의료선교사인 휴 커를의 조수로 채용되었고, 커를 이사는 의사나 병원이 없는 서부 경남의 진주에 가서 일하고자 했다. 그래서 커를은 박성애 부부에게 진주로 같이 가서 일하자고 제안했고, 이 제안에 따라 이들은 1905년 10월 18일 부산을 떠나 진주로 향했다. 고아소녀였던 김(박)순복은 호주장로교선교부의 진주지방 개척에 동참하게 된 것이다. 이때 부산을 떠난 이들로는 커를 의사와 그 부인 앤스티, 부산에서 얻는 큰 딸 사라와 둘째 딸 프란시스, 박성애 가족으로는 어머니 양주련, 박성애와 부인 김순복, 박성애의 남동생 박자룡 두 여동생 박은실과 박보렴 등 6 사람이었다. 선교사 가족 4사람과 총 10 사람이 늦은 가을 낙엽이 거리를 부산을 뒤로 하고 진주로 향한 것이다. 마산까지는 기차로 갔고 마산에서는 가마꾼의 도움을 받아 진주로 향해 20일 저녁 9시 30준 진주에 도착했다. 이날이 음력으로 9월 22일이었다. 이들 일행은 진주 성내면 4동 북만 안에 있는 정경철씨 소유 초가집에 임시로 거주하게 되었다. 김순복의 인생에 있어서 두 번째 전기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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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상규교수의 역사탐색
    2023-12-01
  • [박정곤 목사] 다(多)문화·다(多)민족·통일(統一)시대의 한국교회 선교에 대한 제언
    조선일보 11월 8일자 기사에 의하면 국내 거주 외국인 인구가 226만명을 기록했다고 합니다. 대한민국 전체 인구의 4.4% 수치입니다. 경제협력개발기구 OECD기준에 의하면 총 인구 중 외국인, 이민 2세, 귀화자 등 ‘이주배경인구’가 5%를 넘으면 다문화, 다인종 국가로 분류합니다. 2024년이 되면 외국인 또는 외국출신인구가 공식적으로 5%를 초과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습니다. 즉, 2024년을 기점으로 대한민국은 더 이상 단일민족(One Nation) 국가가 아니라 공식적인 다문화국가, 다민족국가가 될 전망입니다. 이미 세계화(Globalization)의 추세에 따라 국기에 대한 맹세 문구도 바뀌었습니다. 1972년에 수정된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라는 문구가 2007년도 개정안에는 “자유롭고 정의로운 대한민국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로 바뀌었습니다. 단일민족사상에 근거한 ‘조국’과 ‘민족’이라는 표현대신에 ‘대한민국’으로 바뀐 것입니다. 이미 앞으로의 대한민국은 단일민족국가의 정체성 보다는 다양한 출신의 사람들이 하나의 국민이 되는 ‘대(大)한민국’을 전망했던 것입니다. 2008년 11월 미국 국가정보위원회(NIC)는 오는 2025년에 남북한이 통일될 가능성이 있다고 전망했습니다. 그러나 통일연구원(KINU) 2023 한반도 정세 전망 보고서에 따르면 여전히 남북관계가 개선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고 전망했습니다. 그러나 향후 5년안에, 북한체제가 무너지든지, 남북한이 통일이 되든지, 통일이 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불가항력적 상황에서 북한의 문이 열리게 되는 모습으로 변화가 일어날 것으로 전망하는 1998년 CIA 보고서의 ‘북한붕괴론’이 다시 조명을 받고 있습니다. 세계화시대 그리고 남북통일시대에 한국교회는 어떤 선교적 전략을 가지고 앞으로의 상황을 대비해야 할까요? 먼저 새터민 선교와 디아스포라 외국인 선교를 중심으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첫 번째로 새터민 선교입니다. 한국에도 다양한 나라의 사람들이 다양한 이유로 몰려들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우리가 먼저 주의깊게 살펴봐야 할 사람들은 탈북한 새터민들입니다. 헌법 3조에 의하면 북한의 주민들도 우리 대한민국 국민입니다. 그래서 탈북한 북한의 주민들에게도 대한민국정부는 합법적으로 대한민국 국민의 지위와 자격을 부여해 줍니다. 성경에는 성도가 가장 우선적으로 사랑을 실천해야 할 대상을 ‘형제’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요일3:10;4:20). 물론 여기에서 ‘형제’는 믿음으로 하나님안에서 한 가족이 된 ‘성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 가족을 돌아보지 않으면 불신자보다 더 악하다는 바울사도의 경고도 함께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딤전5:8). 탈북민들은 같은 민족이며 같은 언어를 사용하고 있지만, 선교적 관점으로 접근해야 합니다. 고려인, 조선족들도 같은 동포들이지만 100여년이라는 세월동안 떨어져 지내다 보니 언어와 사상과 관습에 극복하기 어려운 차이점들이 많이 생겨납니다. 남북한도 다른 체제에서 70년 이상을 떨어져지내다 보니 같은 민족이라는 동질감보다는 이질감이 더 많아진 상황입니다. 또한 선교는 세상 나라의 사람들이 하나님나라로 들어오게 되는 영적(靈的)이민의 도구이기 때문에 언어와 문화적차이를 극복하기 위한 이해와 인내심이 더 많이 필요합니다. 2022년 6월 기준 한국으로 입국한 탈북민 수가 33,981명입니다. 사망자와 이민자를 제외하면 현재 약 2만 7천명의 탈북자가 거주 중인 것으로 추산됩니다. 한국교회는 이 탈북새터민들을 얼마나 잘 돌아보고 있을까요? 북한기독교총연합회가 발표한 '2023년 전국 탈북민교회 기본 현황'을 보면 올해 탈북민교회는 72개로 지난해보다 4곳 늘었습니다. 2000년 이전 2곳에 불과했던 남한 탈북민교회는 2000년대엔 18개, 2010년대 51개, 2020년대엔 19개가 들어섰습니다. 뉴코리아교회 정형신 목사는 “탈북민교회가 세워진 지역의 탈북민 거주 현황을 대조해보면 인구대비 교회 숫자는 제주도가 157명당 1개로 가장 높고, 경남이 1,082명당 1개로 가장 낮았다”고 말했습니다. 우리교회가 있는 부산, 경남지역엔 탈북민교회가 부산에 1개, 경남에 1개입니다. 탈북민선교에 대한 교회들의 관심은 증가하고 있으나 실제적으로 새터민 중심의 탈북민 선교센터와 교회가 필요한 상황입니다. 두 번째로 이주 외국인 선교입니다. 교통과 통신이 발달함에 따라 전세계가 일일(一日) 생활권이 되는 일이 가능해졌습니다. 아메리칸드림을 꿈꾸며 미국에 몰려든 많은 이민자들의 성공신화를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습니다. 때로는 전쟁이나 기근, 국가부도와 같은 불가항력적인 상황 때문에 베트남의 보트피플이나 우크라이나 난민들처럼 대규모 이민이 발생하기도 합니다. 부산 경남에 합법적으로 체류중인 외국인 인구가 20만명이 넘었습니다. 10년전에 5만명이 채 안되었으나 현재 한국인의 고령화와 저출산으로 인한 인구감소로 인해 외국인 인구가 급격하게 증가하고 있습니다. 대형교회 중심으로 영어예배나 한글학교를 운영하는 교회들이 있지만, 실제로 외국인들이 참여하는 예배는 거의 전무한 실정입니다. 일본의 고령화에 대해 이야기를 하지만, 더 심각한 것은 한국사회의 인구절벽입니다. 그 와중에 지속해서 인구가 늘어나는 계층이 다문화가정입니다. 2022년 통계청자료에 의하면 2022년 국제결혼이 17,000건으로 2021년보다 27.2% 증가했습니다. 국제결혼의 비중이 전체 커플의 11%를 넘어서고 있습니다. 이러한 다문화가정에 대한 정부의 교육, 경제적 지원등 여러 정책들이 있지만, 실제적으로 2세들의 교육과 국방의 의무, 정체성 문제에 대한 교회의 역할이 절실한 상황입니다. 외국인 노동자들의 장기체류도 증가하고 있습니다. 5년이상, 10년이상, 영구정착하는 외국인들이 증가하고 있습니다. 교회에서도 이들을 외국인이 아닌 대한민국에 함께 살아갈 이웃으로서의 인식을 가지고 선교적 전략을 세워야 합니다. 각 나라, 각 민족의 언어와 문화를 가진 현지 사역자, 지도자 양성 및 외국인 교회 개척, 설립이 필요합니다. 김해시에 네팔인 목사가 운영하는 외국인센터에 2-300명의 외국인들이 모이고 있습니다. 밀양에는 다카공동체같은 일부 모범적인 선교사례가 있긴 하지만, 수 많은 외국인들에게 각 나라와 각 민족의 언어로 복음을 증거하는 일에 지역 교회들의 더 많은 관심과 지원이 필요한 상황입니다. 마지막으로 다문화, 다민족, 통일시대의 디딤돌과 걸림돌 문제입니다. 한민족(韓民族)은 수 천년에 걸쳐 하나의 문화와 언어로 형성된 단일민족(單一民族)집단입니다. 현재 중국땅에서 수십개의 나라와 수백개의 민족들이 비교적 짧은 주기의 나라의 역사를 가지고 세워졌다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우리 조상들이 한 번 세운 나라는 수 백년, 거의 천년가까운 세월을 유지했습니다. 그것은 배타성이 아닌 다양성 속의 하나됨을 추구했기 때문입니다. 언어와 문화가 다른 다양한 나라의 외국인들이 우리나라에 들어와 있습니다. 로마에서는 로마의 법을 따라야 합니다. 비록 자신들의 출신과 언어와 문화가 다르다 하더라도 한국에서는 대한민국의 법을 따라야 할 뿐 아니라, 대한민국에 어느정도 함께 맞추어 살아야 할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서 법무부에서 운영하는 사회통합프로그램 같은 정부기관의 공신력있는 활동에도 참여해야 하지만, 민간외교차원에서 특히 교회에서 ‘한국어 학당’, ‘한글교실’ 같은 외국인을 위한 프로그램을 활성화 시켜야 합니다. 이것을 계기로 외국인들이 한국의 언어와 문화를 자연스럽게 익히도록 하고, 교회의 섬김과 헌신을 통한 선교적 열매도 기대해 볼 수 있습니다. 국제 외교는 상호주의 원칙이 적용됩니다. 국가간 등가인 것을 교환하거나 동일한 행동을 취하는 주의로 외교의 기본적 원리의 하나입니다. 이슬람권에서 자유롭게 복음을 전하거나 예배당을 합법적으로 세우는 일 등도 이에 해당합니다. 그러나 이슬람권에서는 법으로 기독교나 타종교 전도를 불법으로 금지시켜 놓았습니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자신들의 기도할 권리, 선교할 권리, 모스크를 지을 권리등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상호호혜주의 원칙에 어긋납니다. 이러한 여러 이유들로 인해, 일본은 기독교 국가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상호 호혜주의 원칙을 지키지 않는 이슬람 이민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습니다. 한국교회도 무슬림들을 사랑하며 이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런 외교의 기본적인 원칙하에 이들을 우리 이웃으로 받아들이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경제적인 이유로 무분별하게 외국인들을 받아들이면 서구권에서 겪었던 사회적 갈등과 혼란을 우리도 동일하게 겪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을 경계해야 합니다. 그러나 또한 외국인들이 통일시대에 미치는 긍정적인 영향력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선교적으로 우리가 선교사를 보내기 힘든 지역에서 우리나라에 다양한 외국인들이 몰려오는 것은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공산권, 힌두교, 불교권, 이슬람권의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좋은 기회입니다. 또한 대한민국은 좌우(左右)대립, 동서(東西)대립등 지역감정과 지역불균형의 정치적, 경제적 갈등이 있습니다. 통일시대에 이 땅에 들어온 이민자와 외국인들로 인한 다극화 상황은 남한과 북한이라는 양극화의 긴장상태를 완화시켜줄 수 있는 좋은 대안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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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2-01
  • [서임중칼럼] 인생의 초겨울을 느낀다
    가을 단풍이 좋다는 지인들의 노래를 따라 한나절 산행을 했다. 그렇게 가을이구나! 했는데 겨울바람이 어느 새 문풍지를 흔든다. 이제는 단풍도 빛바랜 풍광을 보며 만상(萬象)이 떠오른다. 이전엔 법주사 앞을 지나려면 통행세를 내야만 했다. 그러나 그것이 폐지된 지 반년이 지나면서 법주사 방문객과 등산객이 15% 증가했다는 보도를 듣는다. 자연이 무상으로 국민의 품으로 돌아온 것은 참으로 감사할 일인데 그곳의 불법주차와 쓰레기도 함께 늘었다는 뉴스를 듣자니 우리의 문화생활은 아직도 멀었다는 생각이 든다. 일본에 대한 우리 국민정서가 여전히 곱지 않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들의 문화생활, 공중 생활이 질서정연하다는 것을 부인할 순 없다. 35년 전 한일 역사 연구를 위해 3주간 일본에 체류할 때였다. 공중전화통 위에 지갑을 놓고 깜빡 잊고 나온 것이 생각나 4시간 만에 다시 가 보았다. 지갑은 놓아둔 그대로 있었다. 무척 감동을 받았던 터라 지금도 잊을 수 없는 기억이다. 대중목욕탕에서도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수건을 2장 이상 사용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다음 사용자를 위한 배려로 자기가 사용한 곳을 말끔하게 정리정돈 하는 모습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다. 대중식당에서나 공공장소에서는 큰소리 내는 일이 없고, 대화도 옆 사람에게 결례되지 않도록 조용조용 하는 것은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일본의 한 모습이다. 스위스에서 본 일례로 비가 오는 날이었다. 식당에 일본인 단체 손님이 들어오는데 우산을 순서대로 줄을 세워 보관하는 것이었다. 보기 드문 모습에 말문이 막혔다. 산행을 하며, 불법주차에 불법 쓰레기 투여, 시골 장터 같은 카페 등 얼굴이 화끈거리다 못해 속까지 참담해지는 장면들을 흔히 볼 수 있는 우리의 모습을 다시 한번 돌아본다. 가을 단풍이 아름답다는 표현처럼 우리의 삶도 아름답게 물들었으면 좋겠다. 가을이 익어간다는 말처럼 우리의 삶도 성숙하게 다듬어져 갔으면 좋겠다. 문득 내 나이를 생각한다. 인생의 초겨울을 맞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겨울이 깊어 가면 푸름을 자랑하던 모든 식물은 그 빛을 아주 잃고 생존한 일이 없는 듯하다. 그러나 봄이 오면 얼어붙던 땅을 헤집고 새로운 움을 틔우며 새 생명으로 탄생한다. 그 한 포기 풀을 통해서도 내 삶을 반추한다. 내 인생 또한 겨울을 맞이하면 이 땅에서의 내 삶도 마무리될 것이다. 나는 부활의 아침을 확신하는 믿음으로 그 나라에서의 삶을 기대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땅에서의 내 삶은 초겨울을 느낀다. 초겨울의 오늘을 나는 어떻게 보내야 할까? 계절의 겨울이 깊어 가듯 인생의 겨울도 깊어 가는데 더 많이 이해하고 사랑하며 축복하고 감사하는 말을 하면서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란다. 포항중앙교회에서 시무하던 때였다. 주일 예배를 마치고 퇴근할 무렵이면 예배당 마당 한켠에서 나를 기다리는 분이 계셨다. 어느 한 주일도 예외가 없다. 입고 있는 옷은 1년 365일 똑같은 옷, 역사에 관한 것이라면 천재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해박한 사람, 그러나 아이들 말로는 항상 2% 부족함을 드러내는 분이다. 내가 현관에 나타나면 한달음으로 달려와 반갑게 인사를 한다. 그러면 나는 지갑에서 만원을 꺼내 그분 손에 쥐어드리고 어깨를 한 번 감싸 두드려 주며 “밥 잘 잡숫고, 항상 감사하고, 아셨지?” 하면 얼굴이 환하게 밝아지면서 쏜살같이 돌아서 달음질하곤 했다. 목사를 보고 싶어 하는 그분, 손에 만원을 쥐어 드리면 금방 얼굴이 환해지면서 천진스럽게 어린아이처럼 인사하고 돌아서는 그 분의 모습은 수천만 원을 주고도 살 수 없는 인간애(人間愛), 순수함 그것이다. 나는 주일마다 그렇게 그분을 만났다. 말 한마디 없는 그 분은 수천만 마디를 눈빛과 표정으로 목사에게 말한다. 그러던 분이 어느 주일에 보이지 않았다. 덜컥 가슴이 내려앉는 느낌이었다. 혹여 늦나 싶어 차 안에서 잠깐 기다려 보지만 나타나지 않았다. ‘어디 편찮으신가?’ ‘설마…?’ 그러다가 다음 주일에 나타난 그 분을 보면서 괜스레 눈시울이 젖었다. “아픈 데 없지? 괜찮지?” 그러면서 그날은 2만 원을 손에 쥐어 드렸다. 목사는 그렇게 주일만 되면 만원으로 행복을 경험했다. 그분은 나에게 있어서 오늘의 예수님이었다. 그래서 그분이 나를 보고 싶어 한걸음에 달려올 때 나는 주님을 보듯 반기고, 그것이 매 주일의 행복한 시간이 되었고 나도 매 주일 그분을 주님처럼 생각하며 보고 싶어진 것이다. 은퇴 후에는 그분을 다시 만나지 못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던 당부, 갇힌 자들을 돌아보고, 목마른 자에게 한 잔의 냉수라도 내어주며, 헐벗은 자를 입히고, 아픈 자를 찾아 위로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해 주는 것은 유별난 행동이 아니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것을 하는 것이다. 그것이 따뜻한 위로의 한 마디일 수도 있고, 때로는 문안 전화 한 통화일 수도 있으며, 흔히 쓰는 문자 메시지 한 줄일 수도 있다. 내가 기도할 때 한 마디의 중보일 수도 있고, 내가 먹는 것을 함께 나누는 것일 수도 있다. 그것이 사랑의 연주다. 그것이 나눔의 축복이다. 그것이 행동하는 믿음이다. 사랑한다는 것은 유별난 계획을 세워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하는 것이다. 그 때 우리는 날마다 오늘의 예수님을 만나게 된다. 계절의 겨울이 깊어 가듯 우리네 인생의 겨울도 깊어 간다.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사랑하며 사는 것이 아니겠는가. 언젠가 갔었던 동경의 ‘고시래’ 식당이 떠오른다. 수많은 손님이 식당 주인 배우 욘사마, 배용준 씨를 그리워하면서 ‘그분은 언제 오실까?’ 고대하는 마음으로 그 비싼 음식을 주문하여 먹고 있었다. 계절의 초겨울에 내 인생의 초겨울을 생각한다. 계절의 겨울이 깊어 가듯 인생의 겨울도 깊어 가는데 더욱 사랑하면서 살아야겠다는 마음을 다시 한번 다짐해 본다. 그러다가 다시 오시는 그 분을 만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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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임중 칼럼
    2023-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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