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0-10-22(목)

오피니언
Home >  오피니언

실시간 오피니언 기사

  • [목회자칼럼] 성령충만한 사람의 5현
    현실에 최선을 다하라 어리석은 사람은 지나간 과거를 후회하고 다가올 미래를 걱정한다. 흘러간 물에서는 두 번 다시 수영을 할 수가 없다. 오는 사람 막지 말고 가는 사람 잡지 마라는 말이 있다. 지나간 일들을 후회한들 아무 소용이 없고 오지도 않은 미래를 사서 걱정한들 무슨 의미가 있는가? 닥치는대로 살아가라는 말이 있다. 함부로 살아가라는 말이 아니라 내일 무슨 일이 닥칠지 아무도 모르기 때문에 사람은 그때그때 닥치는대로 현실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지혜이다. 닥치는대로 하다보면 좋은 일은 습관이 되고 나쁜 일은 피할 길을 찾게 된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달란트가 무엇인지 알수가 없지만 부딪친 현실에 최선을 다하다 보면 할수록 즐거운 일이 발견되고 억만금을 주어도 하기 싫은 일을 알게 된다. 지금이 은혜 받을만한 때요 지금이 구원의 날이다. 그런고로 지금, 여기서, 이 사람이 중요하다. 순간순간에 최선을 다하다 보면 시간이 되고 세월이 되고 역사가 된다. 순간의 최선이 그 사람만의 원칙을 만들어 낸다. 현장에 달인이 되라 필자는 “현장(Field)”이라는 단어를 좋아했다. 현장에 답이 있고 현장에서 실력이 드러난다. 옛적에 선교 현장에 가서 큰 충격을 받았다. 거기 계신 하나님, 앞서 행하시는 하나님은 선교 현장에서 만나고 감동을 받았다. 책상 앞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들이 현장에서는 생생하게 나타난다. 필자는 외국 유학 경험이 없었지만 한 가지 다행한 것은 교회 현장을 한 번도 떠나본 적이 없었다는 것이다. 의과대학에서 캠퍼스 사역을 할 때에도 교회 교육 현장에서 항상 두 부서 이상을 맡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현장파악 능력이 그때 형성된 것 같다. 이론은 좋은데 현장에서 쓸데가 없으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전도를 잘하는 사람은 매주 그 시간에 그 장소라는 전도현장을 확보하고 고수한다. 현재에 감사하라 어리석은 사람은 자기 책임을지지 않고 다른 사람을 원망하고 핑계하고 변명하기를 자주 한다. 누군가를 미워하면 내 마음이 언짢아진다. 불평을 하면 내 마음에 쓴 뿌리가 생긴다. 현재에 감사하면 현찰이 많아진다. 다음에 보자는 사람 안 무섭고 다음에 잘 해준다는 사람 별 볼일 없다는 말이 있다. 과거에 미안해 하고 미래를 약속할 필요가 없다. 오늘 좋은 사람은 다음에도 좋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다. 감사가 그 사람의 수준이다. 하나님께서는 합력해서 선을 이루시기 때문에 긍정적인 사고방식을 가져야 된다. 현역에 은퇴는 없다 팔십오세의 이시형박사는 지하철을 탈때에 노인으로서 무료승차를 하지 않고 일부러 요금을 낸다고 한다. 현역에서 물러난 뒷방 노인이 아니라 자기는 팔팔한 현역이라는 것이다. 구약 성경에서 갈렙은 팔십오세에 최고의 기득권을 내려놓고 산지를 내게 달라고 하면서 특공대 자원을 하였다. 그야말로 노익장을 과시한 것이다. 사명자는 수명자라는 말이 있다. 해야할 될 사명이 있는 사람은 아프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다. 사람들이 현역에서 너무 빨리 은퇴를 한다. 성도는 주님 부르시는 날까지 주의 일을 해야 된다. 필자는 어린 시절 산골에서 자랐다. 모교회가 95년이 되었다. 그 시절에 엄집사님이라는 할아버지가 새벽마다 종을 쳤다. 할아버지 집사님은 종 치는 것이 사명이었기 때문에 오랫동안 건강하셨던 것 같다. 일 복이 많은 것이 복이 많은 것이다. 바쁠 때 진도가 팍팍나가고 힘들 때 힘줄이 불끈 생긴다. 사람은 “바쁘다”, “힘들다”, “죽겠다” 는 말을 하면 안된다. 어느 순간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시절이 온다. “있을 때 잘해 후회하지 말고” 라는 대중가요가 있다. 현저한 수준을 견지하라 좋은 사람이 아니라 탁월한 사람이 되어야 된다. 그저 좋은 곳이 아니라 위대한 곳을 만들어야 된다. 차원이 다르고 수준이 다른 현저한 모습이 되도록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 하루아침에 잘하는 사람은 없다.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실패는 해도 피드백은 남는다. 지금의 내 모습에 결코 안주하지 말고 “주님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기까지 경주를 경주해야 된다. 그래서 최상의, 최고의, 최대의, 최적의 클래스를 이루어야 된다.
    • 오피니언
    • 칼럼
    • 목회자칼럼
    2020-06-10
  • [김영일 목사] '타산지석(他山之石)' 의 교훈
    최근 우리는 연일 매스컴을 통해 '정의연(정의기억연대)'에 대한 보도들이 주를 이루고 있다. 가장 큰 이슈는 '주객의 전도' 와 '도덕적 해이' 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치욕스런 일제강점기의 아픈 상처를 어루만져주고 치유하겠다는 목적에서 정신대와 위안부로 끌려가서 짓밟힌 어르신들에게 희망의 메시지가 되겠다고 나선 모임이 바로 이 정의연이 아니던가! 그런데 거의 절규에 가까운 이용수 할머니의 기자회견과 연일 보도되는 의혹들은 이 정의연의 원래의 목적이 무엇이었던가를 생각하게 하는 것이었다. 할머니들의 절규 속에는, 어느 코미디언의 '그것은 그들을 두 번 죽이는 거예요.' 라고 말하고 싶을 정도였다. 본래 출발할 때 가졌던 그 마음들이 변해서는 안 되고, 주된 목적과 목표를 놓치고 엉뚱한 데 관심을 갖는 것은 우리를 실망시키기에 충분한 것이다. 게다가 어린 아이들로부터 시작하여 어르신들에게 이르기까지, 심지어 위안부 할머니의 피땀이 섞인 모금들, 국가의 세금으로 지원받은 것이 어떻게 정확하게 집행되었는지조차 알 수 없는 애매한 기록들은 우리를 더욱 아프게 만들었다. 물론 그들이 의도적으로 악한 모습을 행하였다는 것은 확인할 수 없지만, 적어도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미숙함과 소홀함은 도덕적인 해이까지도 의심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이런 사회적인 문제들을 보면서 그것을 비난하는데 이 글의 방향으로 삼고 싶지 않다. 다만 이런 사회적인 이슈를 보면서, 오늘날의 교회와 성도들이 바른 길을 가고 있는지를 돌아보는 계기가 되어야 하겠고, 또 문제점이 있다면 뼈를 깎는 심정으로 하나님 앞에 바르게 세워지도록 해야 한다. 이 문제로 남을 탓하기 전에 필자의 마음과 삶을 돌아보고 고치는 기회로 삼아야 할 것을 마음에 새겨본다. 교회가 무엇인가? 교회는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모여 하나님의 이름을 높여 예배하고, 세상 속에서 주님의 증인으로 살아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가는 것이 아니겠는가? 교회를 목양하도록 세움받은 자로서, 오직 하나님과 그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마음을 다해야 하는 목사로서, 이런저런 감투에 휘둘리는 모습은 주객이 전도된 모습을 보이는 것이다. 주된 사역이 아닌 것들에 집중하다가, 정말 잘 감당해야 할 사명을 놓치는 부끄러운 목사로 사는 모습에 깊은 한숨과 통회가 이어진다. 오직 주님만 바라보고 주를 위하여 살겠다고 고백하며 출발하였지만, 이런저런 물질의 노예처럼 변해가는 자신의 모습에 한없이 부끄러워지기도 한다. 어느 신실한 집사의 입에서 나온 자연스런 한 마디는 슬프게 한다. '목사님은 대접을 받으셔야 하는 분인데, 어떻게 대접을 한다는 말입니까?' 우리는 이 말에 너무나 익숙해져 있다. 만약 영원히 대접을 받아야 하는 분이 있다면 우리 주님이 아니던가? 이미 목사로서 필자는 받는 것에 익숙해져서, 섬기고 또 섬겼던 주님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는 것이 아닌가?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마7:3-4)' 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 앞에서, 필자는 이미 '타산지석의 교훈' 이 아니라, 이미 그들보다 더 추악한 모습으로 변해가고 있었던 자신을 보지 못했을 뿐이었다. 왜 그들은 그럴 수밖에 없었는지를 생각해보니, 처음부터 그런 목적은 아니었을 것인데, 시간이 지나면서 변질된 것이 답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그리스도인이 어찌 의도적으로 악을 행할 수가 있겠는가! 그러나 영적으로 깨어서 주와 동행하는 모습이 식어지면, 멀찍이 주를 따르던 베드로가 주를 모른다 저주맹세했듯이, 지금 우리도 주님을 멀찍이 따르는 연유로 우리의 삶도 변질되는 것이며,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부르신 소명, 그 진실한 소명에 대해 주객이 전도된 모습, 주의 은해에 대해 배은망덕의 도덕적 해이를 보이는 것이라 생각한다. 깰 수 있을 때 완전히 깨고, 팔 수 있을 때 완전히 파서, 고칠 것을 고치고 새롭게 할 것은 새롭게 해서 바르게 세워야 할 것이다. 주님의 부름에 합당하게 그 목적과 목표를 바로잡고, 입술과 심령에 감사로 채워 주님과 함께 하는 삶으로 이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이 되도록 다시 서기를 바란다.
    • 오피니언
    • 정론
    2020-06-10
  • [부산기독교이야기] 피난지 부산
    부산은 마지막 피난처였다. 각지에서 피난민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부산으로 온 첫 피난민은 6월 28일 서울을 떠난 군인가족이었다고 한다. 그 후 전세의 급전에 따라 부산으로 피난민이 몰려들었고 부산 인구는 급증했다. 1945년 당시 부산 인구는 40만 명, 전쟁 발발 직전에는 45만 명에 불과했으나 부산 거주 인구는 급증했다. 피난민들이 몰려왔으나 수용할 수 있는 시설이 없었고, 정부로서는 피난민들에게 신분증을 발급하는 것 외에는 당장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곧 정부와 부산시는 급한 대로 피난민들을 수용할 수 있는 교회당이나 극장, 공장 등을 차출하였고, 임시수용시설을 마련했다. 대표적인 곳이 남구 적기에 위치한 일제 강점기 소(牛) 수출 검역소, 영도의 대한도기, 영도 해안가, 영도 청학동, 대연 고개, 남부민동, 괴정 당리 등 40여 곳에 임시수용소를 만들었다. 그러나 이 모든 곳을 합쳐도 수용할 수 있는 인구는 7만 명 정도에 불과했다. 다수의 피난민들은 거처를 얻지 못해 임시변통으로 천막을 치거나 땅굴을 파고 살았다. 양식은 물론이지만 식수와 전력 부족으로 생활은 극도로 궁핍했다. 국군과 유엔군은 마지막 낙동강 전선에서 저항하고 있었으나 전세의 큰 변화를 가져온 것은 1950년 9월 15일 금요일 감행된 인천 상륙작전이었다. 콜린스 미육군참모총장은 이 작전을 반대했고, 셔먼 해군참모총장은 인천으로의 상륙 성공률 5천분의 1이라고 하면서 반대했다. 미합참도 반대했다. 그러나 맥아더 장군은 작전을 성공으로 이끌었다. 국군과 유엔군은 곧 인천을 점령하고 9월 28일에는 서울을 탈환했다. 이름 그대로 서울 수복이었다. 9월 29일 낮 12시에는 서울 환도식(還都式)을 거행했다. “오늘의 승리는 오로지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이제 서울시민들은 공산군의 입제에서 해방돼 자유와 인권을 되찾았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의 연설이었다. 여세를 몰아 북진하여 한국군 3사단 23연대는 최초로 10월 1일 38선을 돌파하였다(그래서 1956년 9월 14일 국무회의는 이날을 기념하여 ‘국군의 날’로 제정 공포하게 된 것이다), 10일은 원산을, 19일에는 평양을 점령하였고, 26일에는 초산의 압록강까지 진격하여 통일을 눈앞에 두는 듯 했다. 그런데 38선을 돌파하자 김일성과 박헌영은 마오쩌둥에게 긴급 지원을 요청했고, 중국공산당은 10월 5일 한국전 참전을 결정했다. 항미원조(抗美援朝)라는 이름으로. 중공군의 공격은 1950년 10월 25일 본격적으로 개시되었다. 이제 전쟁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고 동족 간의 살육은 중공군에 의해 더욱 심화되었다. 국군과 유엔군은 다시 후퇴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른바 1.4후퇴였다. 서울은 다시 공산군의 수중에 들어갔다. 다시 부산으로 피난민이 몰려들엇다. 1.4후퇴 이후를 흔히 제2차 피난이라고 부른다. 이 시기 부산인구는 84만명으로 불어났다. 이 보다 더 많은 피난민들이 부산으로 오고 싶었으나 정부의 부산 유입 제한 조치로 다소 억제되었으나 생사의 기로를 막을 수 없었다. 1951년 봄 전세는 다시 역전되었다. 국군과 유엔군은 3월 18일 다시 서울을 탈환하였고, 3월 22일에는 38선 이남을 모두 탈환하였다. 그러나 38선을 사이에 두고 남과 북은 치열한 전투를 벌였고 밀고 당기는 장기적인 소모전에 몰입하였다. 전쟁이 교착상태에 빠지자 내외로부터 휴전에 대한 요구가 대두되었다. 마침내 유엔군과 공산군은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에 조인함으로서 3년 1개월간 계속되던 전쟁은 종식되었다. 피난지 부산이 임시수도가 되는데, 전쟁이 발발하자 수도는 6월 27일 대전으로, 7월 16일에는 대구로 이전하였고, 8월 18일 부산으로 수도를 옮겼다. 인천 상륙 작전으로 전세가 역전되자 환도하였는데, 1950년 8월 18일부터 10월 27일까지 70일이 1차 임시 수도였고, 중공군의 전쟁 개입으로 다시 서울을 내줄 수밖에 없었던 1·4 후퇴 하루 전부터 휴전 협정 체결로 환도할 때까지, 곧 1951년 1월 3일부터 1953년 8월 15일까지 부산은 제2차 임시수도였다. 그래서 부산은 2년 10개월7일간 임시수도였는데, 1, 2차를 합쳐 통상 ‘임시 수도 부산 1000일’로 일컬어지고 있다. 부산이 임시 수도일 때, 정부 청사는 경남 도청[현 동아대학교 박물관] 본관에, 보건부와 문교부는 옛 부산시청에, 상공부는 남선전기 사옥[현 한전 토성동 지점]에 자리 잡았다. 교통부 청사는 부산진구 범천동 범곡교차로 인근에 있었기 때문에 아직도 이 일대를 ‘교통부’라 부르고 있다. 국회는 처음에 부산 극장을 의사당으로 사용하다가 후에는 경남도청 상무관(경남도청 체육관)으로 옮겼다. 경남도청 본관 뒤편의 도경찰국은 군경합동 작전사령부로 사용되었다. 경남도지사 관사는 대통령 관저[현 임시 수도 기념관]가 되었고, 남포동 소화장 아파트는 국회의원들의 관사가 되었다. 이런 부산에서 기독교회에는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 오피니언
    • 칼럼
    • 부산기독교이야기
    2020-06-10
  • [교회학교를살린다] 신앙의 플렉스
    요즘 젊은이들 사이에 유행하는 단어가 있다. 바로 ‘플랙스’란 말이다. 이 말은 원래는 힘을 주어 구부리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힙합장르에서 주로 사용되면서 물질로 자신의 힘을 과시하는 모습으로 주로 사용되고 있다. 그리고 요즘은 너나할 것 없이 “플렉스 했지 뭐야”를 외치며 마치 오늘만 살 것처럼 소비하고 이를 자랑하는 것으로 인생의 낙을 삼는 경우가 많다. 최근에 한 백화점 문 앞에서 있었던 짧은 동영상은 웃지 못 할 현상을 보여주었다. 그 동영상은 백화점 셔터가 채 올라가지도 않았는데 마치 림보를 하듯이 사람들이 그 낮은 셔터 사이로 비집고 들어가서는 백화점의 한 명품 매장을 향해 필사적으로 뛰는 풍경이었다. 곧 가격이 인상되기 전에 구매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처절한 몸부림이었다. 코로나19 사태로 인해 이런 저런 삶의 제약에 부딪힌 사람들이 보복 소비를 한다는 기사를 본적도 있다. 면세점에서 쌓인 명품 재고를 온라인으로 팔자 순식간에 다 팔렸다고 한다. 플렉스가 보여주는 현상은 주로 명품, 사실은 사치품과 같은 고가 물품들로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는 것이라 많은 사람들이 안 좋게 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인생에 한번쯤은 저렇게 “플랙스 해버리고 싶다.”는 마음을 많이들 갖고 있다. 이처럼 어떤 사람들은 사치품으로 플렉스 해버리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명예나 성공에 모든 것을 걸기도 하며 인생의 쾌락을 찾아 헤메기도 한다. 누구나 저마다 자신이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것에 인생을 쏟으며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진짜 중요한 것은 무엇으로 자신을 보여주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많은 이들이 신앙적으로 무가치한 것을 잡고 살아간다. 배금주의는 그 대표적인 지푸라기이다. 그 모습을 보면서 예수님의 말씀이 떠올랐다. 사람은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누가 주인인가 하는 문제는 결정적인 순간에 드러난다. 혹자는 코로나19 사태로 인해 위기 속에서 성도들의 참 모습을 보게 되었다고 한다. 사상 초유의 상황 속에서 어떤 이들은 오히려 신앙적인 깊이가 더해지고 다시 한 번 유한한 인생을 되돌아보는 기회를 갖기도 하는 반면, 어떤 신앙인들은 몸이 멀어지자 마음도 멀어지며 신앙생활에 나태한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다음세대들의 경우는 더욱더 극단적이다. 위기 속에서 보이는 부모님과 어른들의 모습 속에서 우리의 다음세대들은 자연스럽게 학습이 된다. 어떤 가정은 온라인 예배도 각자 드려서 다음세대들이 예배를 제대로 드렸는지 확인이 안 되는 경우도 있고 연락두절이 되는 등 오히려 신앙생활이 헤이해지는 경우도 생겨났다. 그러나 어떤 가정은 온 가족이 함께 온라인으로 예배하는 기쁨을 만끽하고, 부모님과 함께 한 성경공부 활동 과제를 성실하게 수행하면서 가족 구성원간에 더 끈끈한 관계가 형성되고 한층 더 의미 있는 신앙생활을 하는 경우도 늘어났다. 이 힘든 시기를 다른 그 어떤 것보다도 신앙에 쏟아 부으며 이겨내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플렉스’라는 용어가 나쁜 의미로만 사용되는 것은 아니다. 과감하게 이웃을 위해 기부하는 경우에도 사용되고 있고, 누군가를 위해서 아낌없이 쏟아부어버리는 이타적인 행위를 나타낼 때도 활용되고 있다. 지금 우리 다음세대들에게 필요한 것은 신앙의 플렉스이다. 신앙의 플렉스란 신앙에 자신의 삶을 전적으로 걸고 살아가는 것이다. 자신을 신앙인으로 규정하며 드러내고 살아가는 것이다. 움츠려드는 신앙생활을 활짝 펼쳐서 신앙의 가치관으로 세상 속에서 당당히 살아가는 것이다. 선한 영향력을 끼치며 이 땅의 유한한 것들에 연연하지 않고 행복한 바보가 되어 살아가는 것이다. 신앙의 플렉스를 위해서 이 위기의 시간을 잘 활용해야 할 것이다. 곧 여름성경학교 시즌이 다가온다. 모이는 게 위험한 시대 속에서 과연 여름행사가 가능할 것인가 걱정하는 이들이 많다. 사회에 근심거리가 되지나 않을까 조심하는 분위기이다. 그러나 이럴 때일수록 신앙의 플렉스를 기획해보자. 모이기 어려우면 각 가정에서 비대면으로 할 수 있다. 교회에서는 잘 준비된 성경학교 킷트를 가정에 배달해주자. 교회학교 교사들은 다양한 sns를 활용하여 신앙교육자료를 제공해주고 지속적으로 인간적인 연락을 주고받으며 관계를 이어가자. 교회의 어른들은 재택기도회를 통해 다음세대와 여름행사를 위한 기도의 열기를 계속 이어가보자. 가정에서는 매일매일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가정예배 하는 신앙인의 일상생활을 자녀와 함께 시작해보자. 신앙의 위기 순간에 오히려 신앙에 플렉스하는 어른들의 모습을 통해 우리의 다음세대들이 진짜 신앙이 무엇인지 이 기회에 제대로 배울 수 있을 것이다.
    • 오피니언
    • 칼럼
    • 교회학교를 살린다
    2020-06-10
  • ‘확찐자’ 예방하려면 아침 2 : 점심 3 : 저녁 1 비율로 드세요
    생활환경이 편리해지면서 현대인의 체형은 팔다리가 가늘어지고 올챙이 배처럼 배가 볼록하게 나오는 복부비만형으로 바뀌고 있다. 특히 최근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한 외부활동 제한 요인으로 운동량이 줄어든 탓에 ‘확찐자’라는 우스갯소리가 등장할 만큼 비만은 우리사회에 큰 이슈로 떠오르고 있다. 대한비만학회는 한국인의 허리둘레가 남자는 90㎝(35.4 인치), 여자는 85㎝(33.4 인치) 이상일 때 복부비만으로 규정했다. 특히 근육량이 적은 노인이나 체중 감소를 유발하는 질환을 가진 환자에게 복부내장지방의 적절한 지표인 허리둘레 측정은 아주 중요하다. 뱃살 빼는 지름길에 대해 알아보자. Q1) 남녀의 복부비만은 다른가? 복부비만은 지방의 분포 양상에 따라 내장지방형과 피하지방형으로 구분한다. 내장지방형은 복벽 내 장기 사이에 지방이 축적되는 경우로 중장년 남성에서 흔하며 피하지방형은 배의 피부를 잡았을 때 두께가 느껴지는 경우로, 중년 여성에게 많다. 당뇨병, 고지혈증, 고혈압 등 성인병과 그에 따른 합병증의 발생 가능성이 큰 후자가 더 위험하다. Q2) 많이 먹지도 않는데 왜 살이 찌고 배가 나오나? 먹는 양보다 활동량이 적거나, 먹는 양은 적지만 지방섭취량이 많기 때문이다. 남성들이 회식 때 마신 술은 간에서 지방합성을 촉진시키고 고지방의 안주는 간의 지방합성을 활성화해 지방간, 혈중 콜레스테롤과 중성지방을 늘려 복부비만이 되기 쉽다. 스트레스 또한 복부지방이 느는 원인이 될 수 있다. Q3) 뱃살을 빼기 위해 저녁을 잘 거르는데 효과가 조금씩 나타난다. 계속해도 되나? 일시적인 현상이다. 굶게 되면 우리 몸은 맨 먼저 에너지 효율이 낮은 근육량부터 줄여나가기 때문에 체중이 준다. 이때 체중감소는 근육량의 감소이지 체지방량의 감소가 아니다. 결국 체지방량을 감소시키기 위해선 끼니를 거르면 안 된다. 굶으면 에너지 부족의 위기 상황에 대비해 본능적으로 섭취한 열량을 에너지 효율이 가장 높은 지방 형태로 저장하는 항상성을 유지하는 것이 우리 몸이다. 내장지방량을 즐이기 위해서는 꼭 식사를 하되 아침 점심 저녁을 2대 3대 1의 비율로 먹자. Q4) 윗몸일으키기, 훌라후프를 하면 배가 들어간다는데? 윗몸일으키기는 근육을 키우는 무산소운동으로, 지방보다는 탄수화물이 운동에너지로 많이 소비되면서 젖산이 축적돼 피로를 느끼게 한다. 반면 걷기, 수영, 에어로빅댄스, 자전거 등 몸 전체를 율동적으로 움직이는 유산소운동을 하면 지방이 에너지로 소비되기 때문에 체지방 감량에 효과적이다. 복부비만 조절을 위해선 운동 강도보다는 시간을 증가시키는데 중점을 둬야 효과적이다. 보통 30~60분 실시하며, 20~30분씩 2회에 나눠 하는 것이 좋다. 훌라후프 돌리기는 배의 근육과 장을 자극해 혈액순환을 원활하게 해주고 변비예방에 효과가 있다. Q5) 복부 비만으로 병원을 방문하면 어떤 검사를 받나? 신체계측기를 이용한 비만도 측정, 체지방 측정기를 통한 체구성 정도를 알아보고, 일반혈액검사와 호르몬검사 등으로 기저질환이나 합병증의 동반여부 확인과 복부 CT촬영을 이용한 체지방축적 정도를 확인한다. Q6) 복부비만 치료는 어떻게 이루어지나? 식생활습관 교정과 운동이 가장 중요하다. 약물치료, 지방분해술, 지방흡입술 등은 보조수단이다. 복부비만의 치료 목표는 3~6개월간 허리둘레의 5~10% 정도를 줄이는 것이다. 이 정도 줄인다고 해서 정상 허리둘레가 되진 않지만 그 과정에서 식생활습관이 교정되기 때문에 복부비만으로 인한 동반질환의 위험도가 낮아져 복용 중인 약도 줄일 수도 있다.
    • 오피니언
    • 칼럼
    • 의학 칼럼
    2020-06-10
  • [은혜의말씀] 기도는 만사를 변화시킨다(눅 18:1-8)
    이 세상은 끝없는 변화를 필요로 합니다. 우리의 믿음의 생활도 고인 물이나 썩은 낙엽처럼 방치되어 있어서는 안 됩니다. 변화가 필요합니다. 우리를 변화시키는 것 중에 <기도>가 있습니다. 바로 그 기도는, 만사를 변화시킵니다. 1. 기도는 나를 변화시킨다. 기도는 제일 먼저 기도하는 그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눅18:1) ‘예수께서 그들에게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비유로 말씀하여 이르시되’ 1) 기도는 주님의 명령을 순종하게 되는 것이요, 2) 기도는 내 마음 속에 있던 염려와 낙심이 물러갑니다. 3) 기도하면, 전능하신 하나님께 가까이 하는 길이 되며, 4) 기도할 때, 소원을 응답받고 구원받게 됩니다. 5) 기도할 때 내가 하나님의 보호와 사랑을 받습니다. (시145:18-20) ‘야훼께서는 자기에게 간구하는 모든 자 곧 진실하게 간구하는 모든 자에게 가까이 하시는도다. 그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들의 소원을 이루시며 또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사 구원하시리로다. 야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은 다 보호하시고 악인들은 다 멸하시리로다’ 기도는 먼저 기도하는 그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2. 기도는 사람들을 변화시킨다. 기도는 다른 사람들을 변화시킵니다. 곤란한 상대와 대적까지도 변화시킵니다. 기도는 재판장의 마음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눅18:2-4) ‘이르시되 어떤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한 재판장이 있는데 그 도시에 한 과부가 있어 자주 그에게 가서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 하되 그가 얼마 동안 듣지 아니하다가 후에 속으로 생각하되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나’ 3. 기도는 환경을 변화시킨다. 기도는 절대 안 될 처지에 있는 환경을 변화시킵니다. 과부의 간청이 재판장을 움직이자, 그 과부의 문제는 해결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눅18:5-6)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하였느니라. 주께서 또 이르시되 불의한 재판장이 말한 것을 들으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기도는 환경까지 변화시킵니다. 4. 기도는 하나님을 감동시킨다. 기도는 결국, 하나님을 감동시키며 역사하게 하십니다. (눅18:7-8)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결국, 어떤 기도가 만사를 변화시킵니까? 1) 낙심하지 않고 드리는 기도입니다. 2) 강청하는 기도입니다. 3) 원한의 기도입니다. 4) 응답받을 때까지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기도입니다. 기도할 수만 있다면, 무슨 문제를 만나든지 우리는 두려워할 것도 없고 염려할 것도 없습니다. 기도는 만사를 변화시키기 때문입니다. 문제를 만나면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나아가는 기회로 삼고 간절히 매달리십시오!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고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주실 줄 믿습니다.
    • 오피니언
    • 칼럼
    • 은혜의 말씀
    2020-06-10
  • [성경인물탐구] 뽕나무 위의 세리 장 삭개오
    예수님 당시의 유대는 로마의 속국이었고 속국인 유대는 로마에 많은 액수의 세금을 바쳐야 했습니다. 로마가 유대인에게 세금을 걷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들이 바로 세리였습니다. 그러나 세리는 동족들로부터 돈을 착취하여 로마에 아부하고 그 자신들도 부를 쌓았기 때문에 보통 사람들로부터 창기와 같은 죄인으로 취급받았습니다. 삭개오는 그의 이름이 <순결>이라는 뜻이었으나 세리장이 되기까지 더욱 열성적으로 세리의 일을 하였고, 그래서 부자가 되었지만 사람들로부터는 따돌림을 받는 외로운 사람이었습니다. 부자였지만 외로운 사람이었던 그는 다른 사람의 따뜻한 말 한 마디와 자신에 대한 인정을 갈구했습니다. 그러던 중 그에게 반가운 소식이 들려왔는데, 그것은 세리도 마다하지 않고서 친구처럼 가까이하는 사람이 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예수라는 사람은 세리인 마태라는 사람도 자기 제자로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삭개오의 관심은 자연히 예수에게 쏠리게 되었고, 그러던 중 예수가 그의 마을인 여리고를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삭개오는 예수님을 만나고자 했습니다. 최소한 그가 어떠한 사람인지 보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도저히 예수님께 가까이 갈 수가 없었습니다. 사람도 많거니와 평소에 삭개오를 미워하던 사람들이 길을 열어 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키가 작았던 삭개오는 궁여지책으로 뽕나무 위로 올라가게 되었습니다. 이미 그에게 세상에서의 재물과 명예는 무의미한 것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의 마음에는 예수님과 그분을 보고자 하는 생각만이 가득 차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열정을 가지고 자신을 보고자 하는 삭개오를 이미 알고 계셨고 어쩌면 예수께서 여리고로 지나가신 것도 삭개오를 만나시기 위한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삭개오가 있는 나무를 향해 다가오셨고 그를 쳐다보시며 내려오라는 말씀과 함께 스스로 삭개오의 집에 유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행동은 삭개오를 비롯한 모든 사람들이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요청에 대한 삭개오의 반응은 순수하면서도 신속한 것이었습니다. 이제껏 사람들로부터 멸시와 소외를 당해 왔던 그로서는 예수님의 말씀이 놀림으로 들릴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의 마음을 조금도 의심치 않았습니다. 그는 기뻐하며 즐겁게 예수님을 영접했습니다. 그는 나무에서 급히 내려왔고 곧바로 예수님을 자신의 집에 영접했습니다. 그 광경을 보던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이 죄인의 집에 자청하여 들어갔다고 서로 수군대기 시작했습니다. 그들 중 어떤 이들은 예수님의 행동 때문에 실망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삭개오의 한 영혼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그런 오해도 불사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자신의 집에 영접해 들인 삭개오는 어떤 특별한 가르침을 받지도 않았지만, 새로운 삶을 살고자 하는 결단을 내렸습니다. 그는 먼저 자신이 불의한 방법으로 모았던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자에게 주겠다고 말합니다. 또한 그가 토색한 것이 있으면 그것의 4배를 갚겠다고 약속합니다. 삭개오는 예수님을 만남으로써 예수님의 행동에서 복음의 의미를 발견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결단을 확실히 하기 위하여 자신의 입으로 예수님 앞에서 선언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삭개오의 마음을 아셨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믿음과 회개가 분명히 드러나지 않았지만, 그의 결단에는 분명한 회개의 열매가 나타나 있습니다. 그의 회개와 결단은 바리새인의 것보다 수준 높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삭개오의 고백이 그가 구원받은 증거라고 보셨고, 그의 구원을 선언하신 것입니다. 그의 결단은 성령의 역사가 아니고서는 결코 되어 질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삭개오가 세리로서 죄인 취급받고 따돌림을 당해 왔지만 그도 역시 아브라함의 자손으로서 구원의 반열에 참가할 자임을 선언하셨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세리나 창기를 죄인 취급하고, 이방인들을 개와 같이 여기면서 자신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자랑하였습니다. 그러나 세례요한과 사도 바울은 신앙과 행위가 따르지 않는 한 아브라함의 혈통적 후손이라는 사실은 무의미하다고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삭개오는 죄인 취급받는 자였으나 예수를 믿음으로써 진정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예수님으로부터 인정받았습니다. 예수님은 삭개오 사건을 계기로 자신이 세상에 오신 목적을 분명히 밝히십니다, 그것은 잃어버린 자, 죄인, 약하고 병든 자를 찾아 치유하고 구원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는 자, 스스로 높이는 자는 예수님께 걸려 넘어지게 됩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당시의 신앙 좋은 사람들보다 세리와 창기가 먼저 구원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종교적인 행위나 관습은 그 안에 진정한 믿음을 담기 전에는 무의미합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종교인보다 겸손한 죄인을 부르시기 때문입니다. 낮고 겸손한 자로 예수님만이 인생의 길이요 진리임을 알고 삶으로 승리하시기를 소망합니다.
    • 오피니언
    • 칼럼
    • 성경인물탐구
    2020-06-10
  • 긴장 늦출 때 아니다
    코로나19 바이러스는 아직도 기승인데 더위는 성큼 다가왔다. 조금 움직여도 땀이 흐르는데 바이러스 차단을 위해 마스크까지 착용하니 숨이 턱 막힌다. 장시간 마스크 사용으로 귀도 아프고 피부에 트러블도 나고 땀이 송골송골 맺혀 곤혹스럽다. 그래서인지 조금씩 마스크 착용을 느슨하게 하는 사람들이 있다.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면서 마스크를 내리기도 하고, 땀 흘리는 학생들에게 괜찮다며 마스크를 내려도 된다고 말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아직 끝난 게 아닌데도 말이다. 지금 ‘교회발 감염’으로 수도권이 비상이다. 특히 인천 개척교회에서 시작된 코로나19는 사흘 만에 50명을 넘었다. 중앙방역대책본부에 따르면 5월 이후 수도권 내에서 종교 모임・활동 등을 통해 코로나19에 확진된 사례가 100명을 넘어섰다고 한다. 예배를 멈출 수 없다는 목회자들의 주장에 공감한다. 예배당에 모여 드리는 예배의 중요성에 대해 더 이상의 찬반 논란은 의미가 없다. 한국교회는 코로나19와 함께 다각적 측면에서 충분히 논의해 왔다고 본다. 이제 각 교회 목회자들의 선택만이 남았다. 생활방역으로 전환하면서 교회에 모여 예배를 드리는 것에 동의한다. 그러나 아직 마스크를 벗을 때는 아니다.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어린 영유아들도 어린이집에서, 유치원에서 마스크를 하루 종일 착용한 채 생활한다. 그런데 하나님을 사랑해서,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모였다는 성도들이 잠깐의 불편함을 못 참고 마스크를 벗어서야 되겠는가? 하나님을 향한 사랑은 있고, 이웃을 향한 사랑은 없는지 묻고 싶다. 학교의 순차적인 등교가 진행되면서 부모들은 전전긍긍하고 있다. 지역사회 내 코로나19 확진자가 발생하진 않았는지 신경을 곤두세운다. 학생들은 쉬는 시간에도 친구들과 뛰어놀지도 못하고 대화도 자제하며 생활하는데, 어른들이 모범을 보여야 하지 않겠는가? 다른 곳도 아니고 ‘교회발’이 일어나지 않도록 긴장을 늦추지 말고 방역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 오피니언
    • 사설
    2020-06-10
  • 만우(송창근 목사)와 장공(김재준 목사)의 만남은 우연이 아니다
    지난 2020년 2월 24일 오후 3시 한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장공관 3층 국제회의실에서 27명의 기장 인사들이 모여 만우기념사업회를 조직한 가운데 만우 송창근 박사의 연구 발표가 있었다. 더구나 송창근 목사는 6.25사변 시절 인민군으로 부터 납북 되어 생사를 알지 못한 채 유일한 아들 고 송윤규 장로(소아과 의사, 부산아동병원 원장과 이사장을 역임)와 딸이 있다. 필자는 송윤규 장로로 부터 아버지에 대해 조금 이야기를 들었던 기억이 있다. 만우 송창근 목사는 1898년 10월 5일 함경북도 경흥에서 출생하여 1910년 북간도 명동소학교, 명동중학교, 광성중학교에서 공부하다가 1914년 독립운동가 이동휘 선생을 만나 “너는 본국에 돌아가서 목사가 되라”는 말을 듣고 1916년 서울 피어선 성경학원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그 이후 남대문교회 조사를 하다가 독립운동을 했다는 이유로 감옥살이를 6개월 했다. 그리고 일본과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신학박사를 받고 귀국하여 1939년 조선신학원 설립에 착수하여 1940년 4월 19일 정식 조선신학원이 설립 되었다. 이 뿐 아니라 신학계의 거목 한신대의 학장을 지낸 정대위 박사와 김정준 박사를 인물로 끼웠다. 만우 장학회가 있어 금년에도 김평화 대학원생이 받았다. 송창근이 없었다면 김재준 목사도 없었고 오늘의 기독교장로회 교단이 생기지도 아니 했을 것이다. 기념사업회 회장이 서재일 목사(원주영강교회 원로)이고 공동회장이 신익호 목사(초동교회 원로)와 송유정 이사(애광원), 박진구 목사이다. 실행위원장이 김원배 목사(꿈동산교회 원로)다. 한국의 에큐메니칼의 선구자 강원룡 목사는 “한국교회사에 길이 남을 인사는 송창근 목사와 김재준 목사의 만남이다. 오늘의 한국 정치사에 민주화의 초석이 되고 밑거름이 되어 한국사회와 교계에 끼친 영향은 기념비적 인물로 길이 남을 인물이 틀림이 없다”고 그의 영향력은 위대하다고 격찬한 강연을 들었던 적이 있다. 이들이 남긴 인물은 한국 교계에 위대한 믿음의 유산을 남기고 하늘나라에 소풍 갔을 것이다. 만우 송창근의 전기편에서 극작가 주태익씨는 “만우는 유능한 젊은이를 찾아 인재를 양성한 것은 마치 예수가 사람을 낚는 어부 베드로를 제자 삼았던 거와 비슷하다”고 말하고는 “민족의 앞날에 인재가 필요함을 일찍이 예견했던 분이다”고 말했다. 송창근 목사는 “십년지계를 위해서 나무를 심고 백년지계를 위해 사람을 기르자”는 말을 자주 인용했다고 한다. 그의 제자들을 보면 그의 말의 참 뜻을 이해하고도 남는다. 훗날 부산 동래산성 출신 김정준 박사는 “송창근이란 인물에 대해 미쳐있었다”고 할 만큼 흠뻑 젖어 있었다. 송 목사의 아들 송윤규 장로도 아동병원을 위해 미국 자선 단체로 부터 많은 기부금을 받아왔다. 장기려 박사가 이사장한 후에 바통을 받아 이사장을 하면서 지금은 부산 기장 정관에 사회복지법인으로 전환하여 김동수 장로가 이사장으로 노인양로원을 만들어 이광혁 장로(93세)가 맡아 성실히 운영하고 있다. 이를 잘 아는 분은 부산기독교사회관 관장을 역임했던 박순옥 감리교 권사로, 이사를 맡아 오랫동안 교분이 있어 송윤규 박사에 대한 가족력을 잘 알고 있다. 송 장로도 미국으로 가서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는데 부산영락교회를 박영희 장로와 한경직 목사가 6.25 부산 피난 시절에 교회를 개척한 일대 사역자들이다. 만우 송창근 목사가 있어서 장공 김재준 신학자로 인해 오늘날 한국신학대학 지금의 한신대학교가 되었고 그 첫 밑거름이 된 것이 만우 송창근 목사가 아니었던가. 이 두 분의 만남은 우연이 아니라 하늘이 맺어준 계획과 섭리로 하나님의 예정된 시간표가 아닌가 생각할 수 있다. 그래서 부족한 필자는 잠시 부산중부교회에 몸담았던 기장 정신이 “행동하는 독일의 신학자 본 회퍼 목사와 같이 70~80년대 살아있는 이 시대의 예언자 교단인데 지금은 약효가 다 되었는지 이 시대적 사명 앞에 정치적 감투나 명예 앞에 맥을 못 추고 나약한 약골로 변신 된 것이 몹시 안타까울 뿐이다. 지금이야 말로 사회주의로 가는 여당 행태에 “여기 어느 누구 사람 없소”하고 송창근 목사가 장공과 같은 사람을 찾고 있었던 것 아닌가? 아예 이 민족의 흘려가는 사회적 정치적 상황에서 그 어느 누구 하나 소리치고 민주화 외침 때에는 그렇게 흔하게 감옥에 갔던 그런 용기 있는 기장 지도자들은 다 어디에 무얼 하는지? 한심하고 통탄할 지경이다. 아벨을 죽인 가인에게 “너 아우 아벨이 지금 어디 있느냐 할 때 내가 아벨의 지키는 자입니까?”로 들릴지 모를 것이다.
    • 오피니언
    • 기자수첩
    • 역사현장
    2020-06-10
  • 다시, 본질로 돌아가자
    한국기독교총연회 대표회장인 전광훈 목사가 지난 18일 서울중앙지법으로부터 “전광훈은 한기총 대표회장 직무를 집행해서는 안된다”는 판결을 받았다. 그 동안 교계 내에서도 무성했던 한기총 대표회장의 자격에 대해 법원이 제동을 건 것이다. 이번 판결은 사회적, 교계적으로 의미가 있다. 먼저, 문재인 정부 들어 한기총 대표회장 자격으로 전광훈 목사가 걸어온 행보는 사회적으로 수많은 논란을 일으키며 물의를 빚어왔다. 광화문에서 험한 말들을 쏟아내며 정부를 비판한 것을 비롯 코로나가 한창인 시기에 집회를 열며 불안을 조성한 행위는 국민들의 공감을 얻지 못하며 원성을 샀다. 또한 교계 내에서도 전광훈 목사의 활동에 문제를 제기하는 목소리는 끊임없이 계속됐다. 특히 그가 대표회장으로 취임한 후 한국기독교총연합회의 위상이 예전과 같지 않고 통합, 고신 등 주요 교단들도 한기총을 탈퇴해서 한교총이 세워지는 등 전광훈 목사로 인해 한국 기독교 대표기관이 쪼개어지는 일도 발생했다. 이런 상황에서 법원이 전광훈 목사에게 집무 정지를 내린 것은 교계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코로나 19로 인해 교회를 향한 세상의 비판이 거세지고 조금이나마 남아 있던 좋은 이미지들이 무너지면서 교회는 더 이상 떨어질 곳 없는 나락에 있다는 말들이 나오고 있다. 물론 코로나라는 대재앙 앞에 피해갈 수 없는 위치에 교회가 있다고는 하지만 비판의 수위를 보면 오래 전부터 교회에 가져온 반감의 반증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이제 교회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전광훈 목사의 사건을 통해 결국 교회가 해야 할 일은, 목회자가 가르쳐야 할 것은 본질이라는 것을 다시 깨닫게 된다. 교회가 세상에 바른 복음을 전하고 목회자가 하나님 말씀을 정확하게 선포하는 것, 이것이 뿌리가 되어 진정으로 이웃을 사랑할 때 세상은 다시 교회에 마음을 열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코로나 이후 교회의 역할과 사명에 대해 고민한다. 변화의 갈림길에 서 있는 이 때, 교회는 다시 본질로 돌아가 사명을 감당해야 할 것이다. 전도의 문은 막히고, 사람들의 시선은 곱지 못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가 본질을 회복하며 소명을 묵묵히 감당할 때 다시 희망의 싹이 피리라 기대해본다.
    • 오피니언
    • 사설
    2020-05-28
비밀번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