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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앙교육나침반] 2022년 온가족 형통공식 “하나님 + 가정 = 하나님 담는 가정”
    창세기 1장 26절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말씀은 우리의 존재목적을 분명히 기록하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자로 설계되었다. 하나님의 형상자로 살지 못하면 우리는 망가지는 인생이 된다. 하나님의 형상자로 사는 것은 어떤 삶일까? 하나님의 형상자는 하나님을 드러내는 삶을 사는 사람이다. 어떻게 하나님을 드러낼 수 있을까? 하나님처럼 말하고, 하나님 닮도록 흉내 내면 하나님을 드러낼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하나님을 담아야, 하나님을 드러낼 수 있다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 담는 그릇으로 만드셨다. 우리는 내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비워내고, 하나님으로 채워야 하는 존재이다. 하나님의 생명을 담고, 하나님의 사랑을 담아야 한다. 하나님의 생명을 담는 부모는 자녀를 살리고, 이웃을 살리는 부모가 된다. 하나님의 사랑을 담는 부모는 자녀를 사랑하며, 이웃을 사랑하는 부모가 된다. 반대로 하나님의 생명을 담지 않는 부모는 죽이는 말과 행동을 서슴없이 하며, 이웃을 아프게 하는 부모가 된다. 하나님의 사랑을 담지 않는 부모는 자녀를 사랑하지 못하며, 이웃을 품지 못하는 부모가 된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어떻게 담을 수 있을까? 요한복음 1장 14절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말씀은 우리에게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어떻게 담아야 하는지 해답을 가르쳐준다. 하나님을 담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담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문자가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내 안에 가득 담는 순간, 내 안에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이 가득하게 된다. 하나님과 말씀을 담는 하루는 하나님을 담는 하루가 된다. 그 하루는 가족을 살리는 하루, 가족을 사랑으로 품을 수 있는 하루가 된다. 그 하루는 이웃을 살리는 하루, 이웃을 사랑을 품을 수 있는 하루가 된다. 향기나무 우리집 성경놀이터의 1월 주제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나를 만드셨어!”이다. 온 가족이 모여 앉아 찰흙으로 각자의 그릇을 만들어본다. 하나의 덩어리에 무언가를 담을 수 있는 그릇이 되게 하려면, 엄지손가락으로 찰흙의 도톰한 곳을 힘껏 꾹꾹 눌러서 옴폭하게 만들어야 한다. “비우자! 비우자! 나를 비우자!” 가족들은 이렇게 말하며, 찰흙으로 그릇을 만든다. 속에 가득 찬 것을 꾹꾹 누른 후 이렇게 외친다. “하나님을 담자! 하나님을 담자!” 가족들은 그릇의 옴폭한 곳에 요한복음 3장 16절 말씀이 기록된 사랑 스티커와 요한일서 5장 12절 말씀이 기록된 생명 스티커를 가득 붙여 담는다. 그리고 가족들은 나와 서로의 신체에 “하나님의 생명이 쏙, 하나님의 사랑이 쏙!”이라고 말하며, 하나님의 사랑과 생명 스티커를 붙여준다. 지치고 힘든 우리 아빠에게도 “하나님의 생명이 쏙, 하나님의 사랑이 쏙!”, 우울한 우리 엄마에게도 “하나님의 생명이 쏙, 하나님의 사랑이 쏙!”, 학업 스트레스로 늘 긴장하는 첫째에게도 “하나님의 생명이 쏙, 하나님의 사랑이 쏙!”이라고 힘차게 외친다.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은 우리를 형통하게 하는 형통버튼이다. 가족들이 서로의 몸에 붙어있는 형통버튼 스티커를 누르며 박장대소하며 웃어본다.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이 가득하면, 이렇게 모든 자극에 “하하하”로 화답할 수 있다. 어떠한 환경에도 “하하하”로 감사할 수 있다. 2022년을 시작하는 지금, 온 가족이 마주하여 하나님의 사랑과 생명의 형통버튼으로 가득 채워지는 뜻 깊은 시간을 꼭 마련해보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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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앙교육 나침반
    2022-01-07
  • 제한시간 1분 30초의 효과
    고신전국장로회 주최 ‘제34회 고신총회 지도자 초청 신년인사회’에서 1부 예배가 예상했던 시간보다 20분간 지체되자, 회장 강상균 장로는 2부 개회식에서 축사와 신년사 시간을 1분 30초로 제한했다. 강 장로는 “시간이 지체되어서 2부 순서를 30분 안에 마무리 해야 한다. 순서를 맡은 분들은 1분 30초 안에 발언을 마무리 해 달라”고 양해를 구했다. 그리고 1분 30초가 넘는 경우 마이크를 자동적으로 끄겠다고 말했다. 2부 순서를 맡은 사람은 총 17명. 과연 30분 안에 2부 순서가 마무리 될지 관심이 모아졌다. 그런데 생각보다 ‘제한시간 1:30초’의 효과는 컸다. 30분이 되기 전에 모든 순서가 마무리 되었기 때문. 첫 주자로 나선 장로부총회장 김재현 장로가 제한시간을 넘어 마이크가 멈추자, 이후 순서자들은 마이크가 멈추지 않도록 최대한 시간을 줄이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역역했다. 무엇보다 참석한 사람들의 반응들이 좋았다. “항상 이시간이 지루했는데, 오늘은 그렇지 않았다”, “시간을 맞추려고 노력하는 모습들을 보는 것도 즐거웠다”, “(신년사가)짧았지만 강렬했고, 귀에 잘 들어왔다”는 등 좋은 반응들이 쏟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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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야의 소리
    2022-01-07
  • 신천지 비대면으로 연 2만 명 증가(?)
    방역법 위반 혐의로 사회적 지탄을 받아왔던 신천지가 비대면으로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고 있어 교회의 주의가 요구되고 있다. 최근 신천지 홍보부는 각 언론사에 보도자료를 배포하고, ‘비대면으로 연 2만 명이 증가했다’고 홍보하고 있다. 보도자료에는 지난 달 26일 시온기독교선교센터 112기 온라인 수료식을 개최하고 총 1만 8천838명(국내 1만 1천162명, 해외 7천676명)의 수료생을 배출한 내용을 담고 있다. 그리고 이같이 신천지 성도수가 늘고 있는 것은 성경 말씀 위주의 전도 방식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신천지의 이같은 주장에 대해 부산성시화운동본부 이단상담소(소장 탁지일 교수) 조하나 실장은 “예전에 신천지가 10만명 수료식을 대대적으로 보도한 적 있지만, 사실과 달랐다. 2만 명 증가 보도도 숫자를 과장한 측면이 많은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또 전면 비대면은 사실이지만, 신천지에 대해 잘 모르는 해외쪽이 많은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최근 신천지 특이 동향에 대해서는 “과거처럼 오프라인 모임을 활발하게 하지 못하기 때문에 온라인으로 포교활동을 강화하는 것 같다”며 교회의 각별한 주의를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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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야의 소리
    2022-01-07
  • 개신교 여전히 비호감 1위
    지난달 한국리서치가 발표한 ‘2021년 주요 종교 호감도 및 종교 효능감’ 조사 결과 발표를 살펴보면 국내 4대 종교 가운데 개신교가 지난해에 이어 비호감 종교 1위에 올랐다. 개신교는 작년 보다 다소 상승했지만 여전히 국민들로부터 비호감 종교로 인식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종교 호감도는 매우 차갑고 부정적인 경우 0점, 긍정적인 감정이라면 100점을 평가하는데 개신교는 지난해 28점에 비해 3.6점 상승한 31.6점을 받아 불교, 천주교에 비해 20점 가량 낮았다. 다만, 개신교인이 평가한 호감도가 지난해 62.3점에서 9점 가량 상승한 것으로 조사됐다. 종교의 영향력을 묻는 질문에는 종교가 내 삶에 영향을 준다는 응답이 37%로 전년 대비 4% 포인트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고, 개신교인의 83%, 천주교 62%, 불교 신자 45%가 삶에 영향을 준다고 응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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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1-07
  • [목회자칼럼] 작년 그리고 올해
    송구영신, 어제의 마지막과 오늘의 시작, 12월 31일 밤12시와 1월 1일 새벽0시는 무엇이 다를까? 12월 31일에 떠오르는 해를 보기 위해서 사람들이 움직이지는 않지만, 1월 1일의 일출을 보기 위해서는 저 멀리 있는 동해나, 저 높은 곳의 산을 오르는 것도 주저하지 않는다. 어제의 해와 오늘의 해는 똑같은 해인데 과연 무엇이 다르기에 사람들의 반응도 다른 것일까? 해의 무게가 늘어난 것도 아니고, 둥근 원이 더 커진 것도 아니며 하물며 해의 주변에 새로운 물체가 생겨 변화한 것은 더더욱 아니다. 다른 것은 바로 12월 31일과 1월 1일, 단지 시간 차이이고, 이 하루의 시간 차이가 사람에게 다른 의미를 가져다 준다. 사람들은 자기가 알든 알지 못하든 의미를 추구하며, 자신에게 의미가 있는 일이면 곧바로 행동하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1월 첫 주, 내 삶의 변화를 이끄는 의미에 대해 생각해보았으면 한다. 첫째, 의미가 무엇인가? 의미는 인간만이 만들어 낼 수 있는 생각의 결과이고 철학의 산물이라 볼 수 있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시간을 보내고 있더라도 그 속에서 의미를 발견하면 고생이 기쁨으로, 고난이 견딜 수 있는 훈련의 과정으로 변한다. 자녀를 출산하고 양육하는 것을 생각해보자. 의미가 없으면 자녀를 양육하는 것은 내가 없어지며 모든 에너지를 자녀에게 쏟아 부어야 하는 고난의 지름길이다. 그러나 의미가 부여되면 어떠한가? 나에게 허락된 최고의 선물, 기쁨이 바로 자녀이고, 삶의 이유가 자녀 양육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생각을 더 확장시켜 오늘 내 삶의 행복과 기쁨이 어디서부터 오는지 살펴볼 수 있다. 아무 생각 없이 단순하게 밤이 지나고 아침이 되었으니 하루가 왔다고 해서 그냥 저냥 하루를 보내면 의미있는 삶을 살아내기 힘들다. 어제 죽은 누군가에게 오늘은 꼭 살고 싶은 하루였을 것이니, 이 하루 내가 어떤 의미를 부여하며 살아가는 것에 따라 행복과 기쁨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올 것이다. 둘째, 의미는 누가 만드는가? 내 삶의 의미는 당연히 나 자신이 만든다. 내가 겪은 일이 어떤 이유 때문에 왔으며, 이 일로 인해 내가 어떻게 될 것이라는 것에 대해 나 외에 다른 사람이 정확히 알기란 힘들다. 그러기에 무엇보다 내 삶의 의미는 내가 가장 잘 알고 있다. 내가 이 땅에서 태어나 나 중심으로 살다보면 내가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에 보이지 않는 함정이 숨어 있다. 사실, 인생의 주인공은 나고, 내 의지와 힘으로 하루를 살아가는 것 같지만 나를 만드신 분, 내 삶을 이끄는 분의 도움이 없이는 삶을 지속할 수가 없다. 겉으로 봐서는 내 삶의 의미를 내가 만드는 것 같지만, 결국 삶의 의미를 부여하고, 의미를 지속시키는 것은 내가 아닌 나를 창조하신 하나님이란 말이다. 이런 맥락으로 볼 때, 내가 이 땅에 태어나 삶이 주어진 것은 창조주에 의한 섭리이고 뜻이자 의미로운 사건이다.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나는 목회가 만만치 않아 삶에 의미를 갖기 보다는 힘들고 어려운 시간들이 많았다. 행복, 감사, 기쁨은 나와 먼 단어처럼 느껴졌다. 그러다 성경 속에서 인생의 답을 찾았다. “나는 여수룬, 행복자입니다” 내가 어디로부터 와서, 어디로 가고 있으며, 어디가 인생의 종점인지 알기에 오늘도 의미있는 삶을 살 수 있게 된 것이다. 의미가 무엇이고, 누가 의미를 만드는 것인지 알았다면, 마지막으로 의미있는 일이 무엇일까? 바로 살리는 일이다. 오래 전에 ‘낭만닥터 김사부’라는 드라마가 많은 사랑을 받았다. 그 드라마의 명대사 중 하나는 김사부가 후배 의사에게 “의사는 돈, 명예보다 사람을 살리는 것이야”라고 말한 장면이다. 사람을 살리는 일이 육을 치료하는 의사에게만 해당되겠는가? 영혼을 치료하는 목회자들, 성도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될 것이다. 성도는 개인의 삶을 살리고, 이웃을 살리며, 사회를 살리는 사람들이다. 작년과 다른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되었다. 여러분들은 이제 어떤 의미를 갖고 살아갈 것인가? 나는 올해도 작은 촛불처럼 나를 태워 청소년을 살리고, 청년을 살리고, 장년들을 살리려고 기도하고 있다. 비록 이 일이 쉽지 않지만, 의미있는 일이고 가치있는 일이기에 다시 힘차게 한 걸음 내딛는다. 여러분도 다시 한 번 의미를 생각해보자. 2022년, 함께 사람을 살리고, 성령으로 교회를 살리는 이 일에 새 의미를 만들어보자. 그래서 2022년 12월 31일에는 “의미 있는 한 해를 보냈다”고 고백할 수 있는 시간이 되기를 소망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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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 목회자칼럼
    2022-01-07
  • [김기현 목사] 태초에
    새해니, 뭐니 하는 것에 시큰둥한 이들이 있다. 어제와 오늘이 무엇이 다르며, 작년과 올해가 어떻게 구분되겠나. 나 역시 그렇다. 다를 것 하나 없다. 똑같다. 괜히 요란 떨 것 없다. 그럴수록 남는 것은 허탈함 뿐. 실망만 더 커진다. 그럼에도 사람들이 인위적으로 제정한 새해 첫날에 의미가 없지 않다. 왜 그런가? 그것은 요한복음 1장 1절의 첫 단어가 입증한다. “태초에” 아니 2022년을 맞이하는 것에도 토를 다는 이들이 허다한데, 웬 고려적 이야기도 아니고 원시 시대로 돌아가느냐고 타박할는지 모르겠다. 요한복음 1장 1절부터 5절을 읽어보면, 성경을 조금이라도 아는 이들은 데자뷔를 느낄 것이다. 많이 들었고 보았던 본문이다. 신년 첫날만 되면 펼치던, 올해는 꼭 성경 일독하리라 마음먹고 열었던 그 본문, 바로 창세기 1장 1절이고, 좀 더 넓게 펼치면 창세기 1장 전체다. ‘태초에’로 시작하고, 천지창조를 이야기하는 바로 그 성경 말이다. 그렇다. 사도 요한의 의도는 예수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창세기 1장에 기대고, 끌어와서 자신이 말하는 바를 강화하고 논증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태초의 바로 그분이고, 창조주이기에, 지금도 창조자라고. 두어 해 전부터 나는 한나 아렌트를 틈틈이 읽고 있다. ‘악의 평범성’으로 잘 알려진 이 정치철학자는 곳곳에서 ‘탄생성’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하나의 정치 공동체가 이전과는 다른, 즉 나치즘과 전체주의, 아우슈비츠와는 무한한 질적인 차이를 지닌 새로운 공동체로 태어나기 위한 그녀의 염원이 담긴 말이다. 끝도 없이 뱅뱅 도는 시간 속에서 새롭게 태어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궁구했다. 그 단어는 성 아우구스티누스에게서 온 것이다. 그렇게 연원을 추적하면 성경에서 나온 개념이 ‘탄생성’이고 명확하게 짚는다면, 창세기 1장 1절과 요한복음 1장 1절의 이 단어, ‘태초에’이다. 사도 요한이 말하려는 바는, 태초, 즉 시작점이 있다는 것이다. 진정한 의미의 ‘창조’가 인류 역사와 공동체, 그리고 개인에게 가능하다, 현실적이다, 그렇게 말한다. 다만, 조건이 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다. 시작을 가능케 하는 원동력과 설계도는 예수이다. 그냥 예수라고 하면 안 된다. 특정해야 한다. 구체적으로 손가락으로 특정한 대상을 가리켜야 한다. 저것은 아니고 바로 이것이라고 하는 그것을 지시해야 한다. 예수라는 인격 앞에 어떤 단어를 붙이든가, 아니면 ‘=’ 부호를 사용해야 한다. 예수 = ??일까? 그렇다. 예수 = 말씀이다. 말씀인 예수이다. 그리고 여기서 말은 인간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이다. 기독교인들에게 하나님이 세상을 어떻게 창조하셨나요? 라고 물으면 열이면 열, ‘말씀요’라고 한다. 말씀을 듣는 것을 성서가 그토록 강조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성경을 낭송하는 것, 묵상하는 것, 암송하는 것, 바로 그것이 우리에게 새로운 시간을 부여한다. 말씀인 예수를, 말씀 = 예수를 주야로 묵상할 때, 내 삶에, 내 공동체가 재탄생한다. 성경을 읽기로 마음먹고, 묵상하는 바로 그날이 새해 첫날이고, 태초의 그날이다. 어제나 오늘이나 내일도 태초의 시간이다. 돌고 도는 시간이 아니라 날마다 새로운 시간을 선물로 받고자 하는 이에게 단 하나의 선택과 결정은 성경 묵상이다. 아, 태초의 그 날이 오늘이었구나. 잘 읽자! 잘 살자!! (요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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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2-01-07
  • [부산기독교이야기] 전쟁기 구호단체들: 기독교아동복리회2
    CCF의 한국에서의 사역은 6.25전쟁기 보다 구체화된다. 전쟁기 고아들이 급증하자 구호는 절실해 졌고 CCF는 이런 현실에 부응하게 된다. 당시에는 전쟁고아들도 있었지만 버려지는 아이들도 없지 않았다. 이런 참혹한 상황을 알게 된 밀즈 목사는 CCF 클라크총재로부터 일단 5천명d에 대한 재정 지원을 약속 받았고, 이 약속을 가지고 1950년 9월 한국으로 왔고, 9. 28 서을 수복 때 서울에 입성한 최초의 민간인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의 한국에서의 사역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1951년 4월 부산에서 CCF한국위원회를 조직했는데, 위원은 아펜젤러(H. P. Appenzeller), 휘치(George A. Fitch), 레인(Harold Lane), 아담스(Edward Adams), 언더우드(John T. Underwood) 목사, 그리고 오긍선, 이용설 박사였다. 위원장은 사우어(史越, Charles A. Sauer, 1891-1972) 목사였다. 1921년 미국감리교 선교사로 내한한 그는 영변, 공주 등지에서 일했고 1941년 3월 강제로 한국을 떠났으나 1949년 재내한 하여 교회 복구사업에 헌신했는데, 그의 아들 로버트 사우어(史路德, Robert G. Sauer, 1925-?) 또한 한국 선교사로 일했다. 초대 지부장은 알렌 시틀러(Arlene Sitler), 실행 총무는 노진박(盧鎭璞)) 이었다. 첫 사무실은 호주장로교 선교사이자 CCF한국위원회 위원인 레인의 동구 좌천동의 사택이었는데(1951. 4- 1953. 3), 후에는 동구 초량동 프랑스영사관이 있던 건너편 건물이었다(1953.3-1954.5). 서울 수복 후에는 사무실이 서울 정동 구세군 본영으로 이전하였다. CCF 한국위원회는 아동보호시설의 CCF 지원 대상 기관 가입업무를 시작하였고, 부산의 아동보호시설인 새들원, 박애원, 영아보호시설인 애린원, 순천의 인애원, 대구의 대구육아원 등을 CCF후원시설로 받아 들였고 이런 후원 시설은 점차 확대되었다. 부산의 새들원은 안음전 여사에 의해 설립되었는데 CCF의 특별한 지원을 받았다. 이 무렵 부산에는 순교한 목사들의 유족과 그 자녀들을 돕기 위한 미실회((美實會)가 설립되었는데, 부녀자 복지사업의 효시라고 불리기도 한다. 이 미실회는 부산 범천동 가야산 아래 미실회 건물이 있었고, 순교자 유가족들이 살고 있었다. 미실회 설립과 운영 또한 CCF의 지원을 받았다. 1953년에는 김응상 나판수 은영기 한정교 홍성유 원장 등 당시 37개 CCF가입시설 원장들을 CCF한국지부와 업무협의를 위한 의도로 기독교아동복리회 한국연합회를 구성하였다. 이런 가운데 피 지원 기관이 확대되어 1955년에는 74개 시설로 증가되었고, 지원받는 아동수는 9,078명에 이르렀다. 1958년에는 77개 시설, 10,696명이 수혜 대상자였다. 그런데 CCF의 지원시설의 확대, 사무실의 서울 이전 등과 더불어 아동복지 전문학자인 헨리 티즌(Henry Tieszen)의 내한을 계기로 보다 조직화되고 체계화 되었다. 아동들의 생계를 위한 시혜에 머물지 않고 보다 전문적이고 체계적인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이를 시행하게 되었다. 헨리 티즌은 메노나이트계 인물로서 아동학 관련 전문 학자였고 후일에는 연세대학교 교수로 활동했다. CCF의 부산에서의 할동과 관련하여 말한다면 부산 동래 새들원을 특별히 지원했는데, 동래에 토지 10,400평 건물 515.228평 그리고 대청동의 토지 152평, 건물 258.97평을 증여했다. 또 송도의 맹인아동들을 위한 시설인 라이트하우스에 토지 736평, 건물 251.79을 증여했다. 특히 CCF는 부산 송도에 아동병원을 건립했다. CCF는 처음에는 보호받지 못하는 아동들의 의식주 문제 해결을 시급한 과제로 여겼으나 아동들의 의료 문제 해결 또한 중요한 과제로 인식했다. 그래서 1955년 1우얼 부산 서구 초장동 3-43번지에 부산보건원(Pusan Health Home)을 설립하여 아동의 입원 치료를 시작했다. 그러나 시설이 부족하여 1957년 7월에는 서구 아미동 2의 126번지의 건물을 매입하고 보건원을 이전하였으나 시설 부족 현상을 해결하지 못해 다시 서구 암남동 18번지의 대지 약4천 평을 매입하여 1964년 2월 병원 신축을 시작하였고 그해 11월3일 총건평 449평의 현대식건물을 완성했다. 75명의 아동이 입원하여 치료받을 수 있는 병원이었다. 이것이 부산아동병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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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산기독교이야기
    2022-01-07
  • 2022년 한국교회 미래는 어둡기만 할까?
    마지막에 웃는 자가 진정으로 웃는 자다. 2021년 한 해는 전염병과 전쟁을 치르다가 덧없이 넘어 갔다. 새로운 코로나 변이 바이러스가 계속 심화될 경우 2022년에도 사회 전반적으로 긴장을 늦추어서는 안 되는 해가 될 것이다. 한 조사기관에 따르면 지난 2년간 코로나로 인해 한국교회 작은 교회 약 7천개가 사라졌다고 한다. 처음 겪은 일이라 교회 부흥은 커녕 작은 교회들이 매우 고통을 당하거나 없어지고, 작은 교회끼리 합병하는 시도를 했다. 새해 2022~2023년 사이에도 중간층 교회들이 차츰 붕괴가 시작될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다. 지난 10월에 있었던 어느 노회 재정 현황을 봐도 노회 상회에 내는 부담금 미수금만 보아도 약 4천여만원이 미납됐다. 이렇게 가증된다면 한국교회의 2022년은 더욱 어두워질 가능성이 짙어졌고, 중간층이 붕괴될 조짐이 보이기 시작할 수도 있다고 목회자 대다수가 걱정을 하고 있다. 한국교회 역시 이미 메가 처치는 이제 서서히 감소 추세를 보이기 시작하였고 증간층 교회들 마저 감소 현상을 보이고 있다. 코로나 새로운 변이 오미크론바이러스가 차츰 심화 되고 약 2만명 가까운 확진자로 질병 관리청이 발표하는 것을 볼 때에 교회 역시 교인들이 교회 출석은 더욱 어려워지고 헌금도 급격히 줄어든 현상이 전망된다. 한국교회 그 찬란하던 부흥의 일천만명을 자랑하던 시대는 붕괴 현상을 보여 반토막이 되지 않는다고 어느 누가 장담하겠는가? 특별히 한국교회가 해외 선교국 2번째로 세계에서 자랑하였지만 이제 해외 선교사들의 지원비가 줄어 20%가 이미 철수하고 임지가 없어 생존 기반이 흔들린다는 보고가 있다. 국제와이즈멘클럽, 한국기독실업인회, 한국기드온캠프의 개체 수가 급격히 줄어들어 해체되는 단체들이 늘어만 가고 있는 현상이 코로나가 몰고 온 결과이다. 이 전염병이 언제 종식 될 것인지는 의료전문가도 예측하지 못하는 실정이다. 더구나 정치계의 대선이 불과 3개월 밖에 남지 않아 대한민국은 그야말로 혼돈의 길을 가고 있다. 한국교회는 전염병 감염 소식이나 대선이란 큰 기둥 앞에 헤쳐 나갈 길이 보이지 않지만, 그래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 고난을 극복할 밝은 길을 열어 줄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는다. 먼저 한국교회 지도자들이 겸손히 하나님 앞에 엎드려야 한다. 미스바의 광장에 모여 이스라엘 백성이 회개한 것처럼 통회하고 죄를 자복 할 때 가능할 것이다. 어느 시인이 말했듯이 종소리가 멀리 들리기 위하여 종은 더 아파야 한다고 했다. 영국의 극작가 세익스피어는 “세상의 일은 시작도 중요하지만 끝이 더 중요하다. 마지막에 웃는 자가 진정으로 웃는 자”라고 했다. 2022년 새 날을 주시는 것은 어제의 연장 선상이 아니라 새 일, 새 생각을 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 날마다 변화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과거의 것은 버리고 주님이 원하시는 새로운 자리로 나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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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1-07
  • 한국 교계 언론인으로서 한 길만 걸어온 한 평생
    땅 속에 묻힐 묘지 게임에서 누가 웃을까? 기독교 유독 개신교 기자로서 살아온 한 평생을 뒤돌아 볼 때 후회가 없다면 거짓이고 그저 살다 보니까 79세 거의 희년까지 살아 왔다. 아홉수가 썩 좋은 것은 아니지만 2022년 흑범이라는 임인년은 매사에 언행을 조심하라는 각오를 다짐할 수밖에 없다. 교계기자는 무엇으로 기사를 써 왔는가? FM대로 말하면 기자는 ’사실‘을 근거로 쓰는 직업이다. 그러나 때로는 사실이 진실이 아닐 때도 있고 진실이 다 옳은 것이 아닐 때도 있더라. 그래도 기자는 사실에 충실하게 글을 써야 한다. 얼마 전 교계 한 지인이 하늘 나라에 갔다. 평소 매우 친한 교계 어른이고 교단과 교회에서도 존경을 받으며 90세 장수한 어른이다. 이 어른 교회였던 A씨와 다른 교단 B씨가 지금으로부터 약 30년전 한 교회 집사와 다른 교회 직분자와의 관계에서 동업을 했다. 동업에 투자한 지인은 그때 돈 5천만원을 투자했다. 얼마 못 가서 동업 계약은 깨어져 헤어질 때 투자한 지인에게 이것 저것 다 공제하고 3300만원을 주는 대신 부산에서 매우 가까운 거리의 S공원 묘지 가장 좋은 위치의 묘지 1000평을 돌려 받기로 약속하는 조건으로 두 분 사이는 끝이 났다. 그런데 묘지를 소지한 측은 집사가 다니던 교회 장로이고 그 장로는 얼마 전에 세상을 떠난 분인데 갑자기 30년 전에 자필로 쓰고 인감 도장을 찍은 서류가 발견되어 알았던 사실이다. 투자 했던 그 지인한테 주기로 한 묘지 1000평도 안주고 양도증에 날인한 약속은 아예 무시하여 투자한 지인은 당국에 고소한다고 하니까 묘지를 소유한 장로는 같은 교회 집사, 즉 동업했던 집사가 묘지 소지한 장로에게 4000평을 사 주면서 3000만원을 교회에 묘지 값으로 지불했다는 것이다. 시일이 지나서 동업한 지인이 “왜 묘지 1000평을 주지 않느냐”고 독촉하니 “묘지 10평만 받으라” 사정 사정해서 또다시 약속하는 양도증 문서를 남겼다. 그런데 3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하늘로 가신 장로님으로부터 두분(교회에 묘지 4000평 사서 3000만원 준 집사와 동업하여 5000만원 준 지인) 모두에게 하나도 이행하지도 않고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이것이 서류가 말하는 ‘사실’내용이다. 일생을 기자로 일해 경험에 비추어 볼 때 기자에게는 ‘사실’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30년이 지난 오늘에 와서 보니 그것이 허위이고 날조고 거짓이었다. 이제 와서 소천한 분은 재산을 다 자녀에게 넘겨 한 푼도 없는 빈털털이 신용 불량자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면 두분 모두가 다 소천한 장로에게 고의든 아니든 거짓에 넘어간 순수한 피해자라고 할 수 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팩트라는 결과만 보도하는 것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것을 터득했다. 모든 ‘결과’에 ‘과정’이 있듯이 사실이 반드시 진실이 아니라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오늘에 와서는 그 당시 양도증에 찍힌 도장이 자기 것이 아니라고 우기는 것과 실제 투자 금액이 5천만원이 아니고 겨우 4백만원이라고 우기는 집사가 30년이 지난 오늘에 와서는 장로로 은퇴하여 있는 그 당시 집사(지금은 은퇴장로)는 완전 오리발 내밀면서 소천한 장로의 자녀를 상대로 소송해서 자기의 지분을 찾겠다고 하는 것이 과연 누구 말이 진실인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누군가 양심에 비추어 보고는 하늘 나라에 가기 전에 죄책 고백을 하고 용서를 구해 떳떳하게 하늘 나라에 가서 하나님이 계시는 보좌 근처라도 앉을 수 있지 않겠는가? 기자는 육감으로 기사 쓸 때가 많다. 육감은 논리적이지 않다. 실제 옳은 기자는 경험이 많은 기자가 진실을 쓸 때가 많다. 그것은 이른바 취재 소스로 이루어 진다. 그 인맥은 신뢰로 지켜지는 것이다. 이처럼 하나의 기사는 정의감과 신뢰를 바탕으로 연륜에 따라 인맥과 경험과 육감으로 탄생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필자는 거의 반 평생을 오직 한 길만 걸어 오면서 누가 사실이고 진실로 말하는지 육감으로 파악할 수가 있다. 위의 하나의 실제 팩트를 예로 들면서 글을 쓰는데 이행하지 못하고 하늘 나라에 간 장로는 하늘 나라에서 심판 받겠지만 두 분의 남은 장로는 살아 생전에 양심 고백을 할 과제가 남았다. 투자한 장로 지인 장로는 마음을 비우고 살고 있지만 나머지 한 분은 자녀를 상대로 묘지를 찾겠다고 세상 법정에서 진실이 가려지고 자기가 가지고 갈 몫이 돌아 올런지는 두고 봐야 할 것이다. 진실과 허위 이 두가지는 오징어 게임보다 더 실감나는 실존하고 실제 있었던 사건으로 그야말로 마지막 자기가 땅으로 와서 땅으로 돌아가 묻힐 묘지 게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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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1-07
  • [서임중칼럼] 임마누엘의 은총
    인류의 문화를 발전시키고 인류 구원에 크게 기여한 위대한 인물 가운데 ‘알베르트 슈바이처’를 우리는 잊지 못한다. 지금은 프랑스 영토지만 1875년 당시 독일의 영토이던 ‘알사스’ 지방에서 목사의 아들로 그는 태어났다. 5살 때부터 아버지에게서 피아노를 배웠고, 장성하여 스트라스부르대학에 입학, 신학과 철학, 음악을 공부하였는데, 24살 때 철학 박사가 되어 스트라스부르대학 신학부의 교수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파리의 유명한 파이프 오르간 연주자인 샤를 비도르에게서 연주를 배워 성 빌헬름 교회에서 파이프 오르간 연주자로도 활동했다. 신학자, 철학가, 음악가로 이름을 날린 그였지만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에 대한 미안한 마음이 있었고 자신이 누리는 행복을 모든 사람들과 나누고 싶어 했다. 천재이자 목사의 아들인 그는 부유한 나라, 부유한 집에서 태어나 안락하고 윤택한 생활을 하였지만 생각하는 것은 달랐다. 온갖 물질적 혜택을 누리며 살았지만 이런 문명의 혜택을 누리지 못하는 아프리카 사람들에 대한 생각으로 늘 마음이 무거웠다. 그들을 위해 무엇인가 하지 않는다면 자신도 결국 성경속의 부자와 나사로 같은 부자일 뿐이라는 생각이 그를 힘들게 했다. 종내 그는 고난 받는 작은 자들을 위해 살기로 결심하기에 이르고 30세에 의과대학에 들어가 8년 동안 의학을 공부를 한다. 부와 명예, 세상의 온갖 좋은 것을 다 뿌리치고 그는 간호사가 된 아내와 함께 마침내 아프리카로 들어갔다. 부유한 자가 빈한한 삶을 산다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러나 그는 부유한 자였으나 빈곤한 자들을 위해 스스로 가난한 자가 되었다. 후에 세계 평화에 기여한 그의 공로를 기리며 노벨 평화상이 내려졌다. 한 해의 마지막 캘린더를 보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이 빨간색으로 표시된 25일이다. 예수 그리스도 우리 구주께서 세상에 오신 날이다. 천사들은 노래하기를 ‘하나님께는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라고 했다. 그러나 이 노래를 곰곰이 묵상해 보면 참으로 ‘아픔’이 담긴 노래다. ‘아픔’이란 예수님이 하늘 영광을 포기하고 더럽고 추하고 죄 많은 세상에 오시되 누구도 관심 가지지 않는 초라한 마구간에서 태어나셨기 때문이며, 하나님께도 아픈 날이기 때문이다.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셔서 결국 십자가 참혹한 죽임을 당하게 하셔야 했기에 큰 고통을 안고 세상에 보내신 날이기 때문이다. 그런 날이, 바로 그 날이 인간에게는 하나님을 만나는 기쁜 날인 성탄일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에게 주어진 ‘임마누엘의 은총’이다. ‘임마누엘’이라는 단어는 예수를 가리키는 고유명사라기보다는 성부 하나님께 대한 성자 하나님으로서의 位格과 사역의 한 단면을 암시하는 용어다. ‘임마누엘’은 ‘함께(with)’라는 뜻의 히브리어 ‘임(עמ)’과, ‘우리와(us)’라는 뜻의 ‘마누(מנו)’, ‘하나님(God)’이라는 뜻의 ‘엘(אל)’이 결합된 형태로서 곧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God with us)’ 분이심을 강조한 호칭이다. 즉 하나님께서 높고 높은 하늘에 계시지 않고, 낮고 천한 이 세상에 몸소 내려오셔서 우리와 함께 해 주시는 것이 임마누엘이다. 이사야 9:6절에는 임마누엘의 다른 이름들의 기록이 있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 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라는 기록이다. 여기 기묘자는 ‘아름다운 분(Wonderful)’, 모사는 ‘상담하시는 분(Counsellor)’, 전능하신 하나님은 ‘못하시는 일이 없으신 분(The Mighty God)’이다. 영존하시는 아버지는 ‘영원부터 영원까지 계시는 아버지(The everlasting Father)’, 평강의 왕은 ‘평강을 주도하시는 왕(The Prince of Peace)’이다. 신약에서도 예수님에 대한 이름이 다양하게 표현되어 있다. 그리스도는 ‘기름부음 받은 자(Messiah)’, 인자는 ‘사람의 아들(son of man)’, 예수(Jesus)는 ‘죄인을 죄에서 구원할 자’이다. 선한 목자는 ‘양을 기르고 먹이는 자, 양을 위하여 죽는 자(Good shepherd)’이다. 이 모든 이름의 뜻과 능력을 가진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함께 하심이 ‘임마누엘’의 은총이 된 그 날이 12월 25일이다. 하나님이 인간이 되시고 함께 하시는 은총은 어떻게 누리는가? 그것은 나와 함께 하시고자 오신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이다(요1:12). 영접하게 되면 삶의 가치관의 변화가 있다(빌3:5~9, 롬14:7~8). 거기에는 일치와 화합이 있다(행2:42~47). 이것이 임마누엘의 은총을 누리는 것이며 찬양하는 교회의 모습이다. 예수님의 탄생은 하나님과 인간의 높은 담을 헐어버리고 인간과 인간의 불신의 벽을 허물어 버리는 것, 곧 일치와 화합의 은총이다. 신분과 세력, 학력과 성격적인 특성을 뛰어넘은 일치가 실현된 것, 이것이 바로 임마누엘의 은총이다. 인간과 인간 사이의 화합뿐만 아니라 인간과 물질과의 조화가 이루어졌으며, 인간과 하나님과의 일치가 이루어졌다. 하나님과의 일치라는 것은 이로부터 하나님께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역사가 시작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과 물질과의 조화라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실현하기 어려운 재산의 공유라는 것이다. 즉 가난한 자를 위하여 나의 재산을 아낌없이 사용하는 아름다운 역사의 시작이다. 인간과 인간과의 화합이라는 것은 이로써 이해와 관용과 용서와 사랑이 실천되었으며 미움도 갈등도 다툼도 그리스도 안에서는 사라지고 아름다운 복음의 역사가 실현되는 것이다. 이것이 교회다. 임마누엘의 은총을 입은 성도들의 아름다운 오늘의 삶의 현장이 교회다. 곧 일치와 화합을 통한 천국을 경험하는 삶의 장이다. 그러나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지금도 세상은 여전히 소란하다. 대선을 앞둔 여의도 정계는 날마다 분쟁이다. covid 19는 우리 사회를 카오스 상황으로 만들어 놓았다. 경제 현장도 소란스럽기는 마찬가지다. 임마누엘의 은총을 통해 이 모든 상황을 일치와 화합으로 만들어야 하는 것이 교회다. 그런데 교회들마저도 많은 것이 소란스러운 것을 본다. 명목상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이 들썩거리기에 그렇다. ‘임마누엘의 은총이 있는 곳’은 일치와 화합과 조화가 있다. 그러나 ‘임마누엘의 은총이 없는 곳’은 분쟁과 분열이 있다. 2021년의 성탄절을 맞으면서 온 누리에 임마누엘의 은총이 가득하기를 충심으로 간절히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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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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