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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합동-통합 만났다
    예장합동과 예장통합 총회 임원들이 5월 17일 앰버서더 서울풀만호텔에서 만남을 가졌다. 이날 만남은 예장통합측 초청으로 이뤄졌다. 양 교단의 만남은 시종일관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이어졌다. 통합 총회장 류영모 목사는 “배광식 총회장과 알게 된 지 1년이 조금 넘었는데, 짧은 시간이지만 귀한 친구를 얻은 기분이다. 덕분에 이번 회기 동안 양 교단이 한 마음 한 뜻으로 한국교회를 섬길 수 있었다”며 친근감을 표시했다. 합동 총회장 배광식 목사도 “예장합동과 예장통합이 손을 잡으면 한국교회가 평안하고, 우리나라 복음화에 크게 기여할 수 있다. 어떤 사안이라도 양 교단이 협력하면 안 될 일이 없다고 본다. 특별히 류영모 총회장이 한교총을 통해 좋은 리더십을 보여주고 있어 감사한 마음이다”며 “앞으로도 양 교단이 한국교회의 기대를 저버리지 말고, 아름다운 교류가 이어지길 바란다”고 말했다. 양 교단은 사학법 문제, 차별금지법 제정 문제 등 한국교회 앞에 놓인 많은 현안 과제에 대해 함께 논의해 나가자고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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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야의 소리
    2022-05-20
  • 우리나라 대학교 중에 미국 하버드대학교와 같은 대학은 없는가?
    사립계 학교로 인해 오늘날 대한민국이 경제 및 정치적으로 민주화와 경제 부흥을 이룩한 것이 바로 전능하신 하나님을 섬기고 근면한 국민성이 있었기 때문에 0ECD 가운데 10위권에 진입할 수 있지 않았을까? 이 국민성의 마음 바탕은 그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하나님의 믿음과 미션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진실하게 살아가며 열심히 이웃을 돕고 이웃과 국가를 사랑하는 순수한 사랑을 실천하는 기독교 사립대학들이 있어 받아 들일 수 있는 것도 기독교가 말하는 감사하는 마음의 텃밭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국의 하버드대학교는 많은 사람에게 선망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것은 전 세계적인 학교가 부러워하고 있다. 모두가 거의 경외의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다. 그들의 눈에 비친 하버드대학교 졸업은 명예의 부를 약속하는 ‘보증서’나 다름없다. 우리나라 청년 정치인 ‘이준석’ 국민의 당 대표가 하버드 출신이다. 젊은 30대에 벌써 야당 당대표에 올랐다. 그가 이끈 당에서 윤석열 대통령이 나왔다. 하버드 생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강의 중에 탈 벤 샤하르 교수의 “긍정 심리학”은 명강의 중에서도 명강이고 ‘행복학’이라 불리는 이 강의는 학술적 영역에서도 학생들의 인생 좌우명으로 삼는데 큰 지렛대로 삼고 있다. 필자는 최근 “마음의 속도를 늦춰라”는 (장사오형 지음 최인애 옮김) 일반서점가에서 베스트셀러에 올라 처음 구입하여 열독했다. 이미 나이 80세, 이 책에서 얻을 지혜는 때가 나에게는 지나고 훨씬 늦깍기 인생이어서 도움보다는 다음세대 청년들에게 다소 보탬이 될까 싶어 이 글을 남기고 싶다. 하버드대학교에서 역대 가장 환대 받은 교수이자 ‘인생의 스승’으로 간주하는 교수가 탈 벤 샤하르이다. 처음에는 ‘긍정의 심리학’ 강의는 첫 수업에 온 학생은 겨우 여덟명에 불과했다. 그 중 두명은 강의 신청을 철회했다. 그런데 두 번째 강의를 열었을 때 무려 400여명이 신청했으며 세 번째 학기는 855명이 몰려왔다. 샤하르 교수의 행복학 강의는 매스컴에 보도된 후에는 전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았다. 사실 행복은 언제나 우리 곁에 있는 것을 모른채 살아가고 있다. 조금만 생각을 바꾸면 조금만 미소를 지으면 행복은 어렵지 않게 우리 곁에 다가 올 수 있는 것을 그냥 모르고 지나가는 바람과 같은 것인데 조금만 신경 안쓰면 행복은 우리 곁을 바람과 같이 스쳐간다. ▲감사하는 마음 미국 미시간 대학교 연구센터는 수천명을 대상으로 10년간 추적 조사를 진행했다. 그 결과 감사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은 생활 만족도가 높고 평균수명이 긴 것으로 나타났다. 반대로 감사의 마음이 없는 사람은 인간관계에서 많은 문제를 겪으며 비교적 고독하게 살았고 조기 사망률도 1.5배이상 높았다. 감사는 삶의 질을 높여준다는 결론을 알았다. 길러 주신 부모님께 감사하고 스승의 가르침에 감사하고 배우자에게도 감사하고 친구의 우정에도 감사하는 것은 우리들의 삶을 한층 더 빛나게 해 주지만 그것보다 가장 감사해야 할 대상은 거룩하신 하나님 아버지인 것을 모르고 산다는 것 이것이 문제이다. 하버드대학교는 하나님 아버지를 가장 으뜸으로 섬기며 사는 교훈이 바로 세계적인 대학으로 이름이 난 것이다. 감사는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게 만드는 마법의 주문이다. 감사하는 마음을 늘 간직하며 살아갈 때 우리는 비로소 진실하게 살아가며 열정적으로 남을 돕고 순수하게 사랑을 받아들일 수 있다. 이게 바로 기독교에서 말하는 감사 속에서 ‘믿음 소망 사랑’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다고 하는 그 마음의 밑바탕은 하나님께 먼저 감사한다면 사랑을 간직할 수도 있고 행동에 실천하는 삶으로 살아갈 수 있다. 그래서 하버드대학생들은 이같은 인문학 강의를 많이 듣고 난 다음에 자신의 전공을 연구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지금 우리나라에 가장 정치계를 어지럽히고 망치게 하는 그룹들이 명문 서울대, 고대, 연대(스카이대)이다. 왜 명분 수재들이 낭패를 당하고 있느냐하면 대학에 들어가서는 오로지 법관, 변호사가 되기 위해 사법시험에만 매달리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대학 중 사립대학 대부분은 미션학교일 뿐더러 중고교 절반 이상이 미션계 학교다. 그런데 이 나라의 다음세대를 위해 힘을 쏟은 사립계 대부분은 그야말로 이 나라의 젊은 세대와 일꾼을 키워왔다 해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고 윤인구 박사는 미국 프린스대학을 나와 국립 부산대학의 기초를 닦았으며 연세대 총장을 비롯하여 장로회 부산신학교(현 부산장신대 전신)에 교장으로 젊은 세대 지금의 70대 목회자들과 지도자들을 양성한 공로자이다. 뿐만아니라 서울 한양대학교는 고 김연준 장로가 세운 미션계 종합대학이다. 이 학교는 사랑의 실천이 대학의 교훈이고 목표다. 하나님의 사랑을 이 땅에 실천하는 것이 곧 작은 예수의 가르침이다. 부산 경성대학교는 고 김길창 목사가 한성여대로 출발하여 지금의 종합대학인 경성대학교로 자리매김 했다. 고 장성만 목사가 세운 동서대학교는 그야말로 믿음에 찬 사랑을 실천하는 봉사 정신이 묻어 있다. 우리가 추구하는 대학이 하버드대학이라면 이 땅의 하버드로 정착할 대학들이 없지는 아니할 것이다. 이 모든 사립대학들이 미국에서 공부한 목사 장로들로써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대한민국에 일꾼을 양성해 왔는데 어찌하여 미국 하버드대학과 같은 대학이 없단 말인가? 우리나라의 교육계는 어떠한가? 바라건데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은 걱정과 고민이라는 덫에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 근본적으로 모든 걱정과 고민은 자신이 자초한 것이나 다름없다.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삶의 수많은 감사거리를 발견하고 감사할 줄 아는 마음이다. 조금만 생각을 바꾸면 우리 주변에 온통 감사할 이유가 넘쳐난다. “감사함으로 그의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의 궁정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 그의 이름을 송축할지어다”(시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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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5-20
  • [목회자칼럼] “혹시, 부모 자격증이 있나요?”
    5월 가정의 달을 맞아 어린이주일, 어버이주일, 스승의주일 등을 보내며 교회들이 가정의 소중함을 새롭게 여깁니다. 이번 글은 35년 동안 ‘십대의벗’이란 청소년교육센터에서 부모와 청소년들을 상담, 교육해 온 청소년 사역자인 저자가 <자녀를 어떻게 키워야 할지 모르는 막막한 초보운전 부모들, 자녀와 소통이 안되어 답답한 분들, 부모교육과 다음세대에 관심있는 분들, 믿음의 유산을 자녀에게 꼭 잘 물려주고 싶은 부모들>에게 전하는 ‘가정의 달, 부모 자격증’에 관한 메시지입니다. 사실, 저도 결혼이 뭔지, 자녀를 낳고 키운다는 것이 어떤 일인지 알지 못하고 결혼하며 아이를 낳았습니다. 잘 키우고 싶었지만 어떻게 키우는 것이 잘 키우는 것인지도 모른 채 정신없는 시간들을 보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단순한 문제이고, 별일 아닌 것 같은데 아이가 어릴 때는 부부도 아직 성숙하지 못해서 그런지 참 많은 갈등이 있었습니다. 사역한다고 온종일 교회서 시간을 보내고 자정 무렵에 집에 들어가면 아내는 육아로 인해 녹초가 되어 있는 상태였습니다. 그때, 내가 조금 힘을 내서 아내의 마음을 읽어주고, 공감해주며, 위로해줘야 하는데 나도 에너지가 바닥인 상태라 내 감정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해 아내와 다투기 일쑤였습니다. 매일 싸우는 부모의 모습을 보는 자녀들은 어떨까요? 이때 자녀들은 그 순간순간을 눈으로 찰칵찰칵 사진을 찍어 모아서 머릿속에 자신의 앨범을 만듭니다. 부모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를 머릿속에 차곡차곡 저장시킨 자녀들은 정서적으로 불안과 두려움이 쌓여갑니다. 그리고 이런 사건이 길어지면 결국 자녀들은 부정적 자아상이 형성되어 삶의 태도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치기도 합니다. 자녀의 어린 시절 부모의 관계 및 갈등이 이렇게 큰 영향이 있다는 것을 부모로서 미리 알았다면 좋았을 것을, 어째서 다 키우고 난 뒤에 깨달았는지... 후회도 되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이제라도 늦지 않았음을 알고 부모로서 성숙할 수 있는 훈련이 필요함을 깨닫습니다. 그렇다면, ‘부모 자격증’을 얻으려면 어떤 지혜가 필요할까요? 첫째, 자녀의 마음을 얻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부모로서 자녀에게 가장 기본적인 ‘의식주’를 제공한다고 부모 역할 다 했다며 자녀의 마음을 얻는 것은 아닙니다. 부모는 보이지 않는 자녀의 마음속에 자라고 있는 감정을 만질 줄 알아야 하며, 생각을 읽어줘야 합니다. 어쩌면 부모도 모르는 사이에 자녀의 마음속에 부모가 던진 수많은 화살이 박혀 있을지도 모릅니다. 둘째, 때로는 자녀 옆에서 침묵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제발, 내 옆에서 조용히 있어 주세요” 아이들이 부모에게 가장 하고 싶은 말이 이 말이라고 합니다. 부모는 자녀에게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은데 자녀는 자신이 이야기하고 싶을 때까지 기다려달라고 합니다. 때로는 부모의 속도보다 자녀의 속도에 맞추는 것이 지혜임을 알아야 합니다. 셋째, 전문적인 대화와 소통의 지혜가 필요합니다. 부모 입장에서는 사랑을 담아 잔소리, 훈육을 하지만 그 말이 자녀에게는 독이 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자기 전에 양치를 해야 한다”는 부모의 요구가 있습니다. 1. <명령형, 강요형의 부모> “이, 꼭 닦고 자” / 2. <논리형 부모> “이 상하면 너만 고생한다” / 3. <설교형, 훈계형> “밥 먹고 나면 양치질해야 해. 지금 당장” / 4. <비난형, 비판형> “입에서 냄새 나면 누가 너와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하겠니?” / 5. <거부형, 반대형> “양치 하기 싫으면 저리가” / 6. <조롱형, 욕설형> “양치도 제대로 못하는 주제에... 습관이 얼마나 중요한데...” 혹시, 여러분은 위에서 열거한 6가지 유형 중 어디에 속하는가요? 나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사랑과 수용의 언어가 아닌 명령, 논리, 설교, 비난 등의 대화를 하고 있지는 않은가요? 넷째, 쉬지 않고 무언가를 배울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자녀를 키우는 면허증을 장롱에 오랫동안 묻어 두지는 않았습니까? 이제는 끄집어내서 실전에서 써먹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또한 자녀를 어느 정도 길렀다고 배움을 멈춰버린 것은 아닌가요? 우리의 배움은, 특히 부모와 관련된 배움은 끝이 없습니다. 쉬지 않고 배워야 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다섯째, 말씀과 예배를 통한 부모 면허증을 획득할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자동차가 달릴 수 있는 에너지의 힘은 엔진에 있듯 우리 자녀의 힘은 말씀과 예배에 있습니다. 자녀들이 스스로 말씀을 보고 묵상하면 좋지만, 사실 쉽지가 않습니다. 부모들이 끊임없이 자녀들을 독려하고, 말씀의 자리로 갈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부모가 먼저 말씀과 예배의 자리에 있어야 합니다. ‘말씀과 예배의 부모 면허증’ 이제 한 번 따보시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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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5-20
  • [전영헌 목사] 이 맘때면 생각나는 제자가 있습니다
    수업 시간마다 굉장히 독특한 반응을 하는 H가 있었다. 말하는 것도 삐딱하고, 친구들에게 비아냥거리고, 어쨌든 굉장히 독특한 캐릭터를 가진 아이였다. 그래서 ‘참 묘한 녀석이다’라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날은 수업 시간에 ‘나의 강점과 약점’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시간이었다. 학급의 친구들에게 자신을 오픈하고,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퍼즐 조각을 맞추듯 조화를 이루는 학급이 되도록 하자고 하는 것이 그날 주제였다. 여러 학생이 자신의 강점으로 ‘끈기, 운동 잘하는 것, 말 잘하는 것, 아무 곳에서나 잘 자는 것, 수학, 영어 말하기, 리더십, 긍정적인 생각 등’ 다양한 답을 했다. 자신의 약점으로는 ‘끈기 부족, 집중력, 성적, 가정환경, 외모, 키 등’으로 대답을 했다. 그런데 H는 ‘나의 약점은 오른손인데요’라고 대답을 했다. “H야 넌 왜 오른손이 너의 약점이니?” 하고 물으니, 뒤쪽에 같은 중학교를 나온 아이들이 픽픽하고 웃었다. “H야 왜 오른손이 너의 약점이라고 생각하니?” 재차 물었다. H가 책상 밑에 있던 오른손을 올리더니 “나는 내 오른손이 저주받은 손이라고 생각합니다. 중학교 때 이 손에 카트 칼을 들고 친구를 찌르려고 했던 손입니다. 나는 이 손이 저주스럽습니다.” 같은 중학교를 나온 아이들이 “우~~~”하고 야유 섞인 소리를 내었다. 진정시키고 수업을 마친 후 H를 교목실에 불렀다. “너 중학교 때 무슨 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 안 좋은 일이 있었니?” “학교에서 수업을 마치고 버스를 기다리는데 친구들이 자꾸 놀렸습니다. 저는 외모 콤플렉스도 있고, 목소리도 이상해서 늘 움츠리고 있는데 그날도 계속 친구들이 나에게 찌질하다고 놀리는데 너무 화가 나서 가방에 있던 칼을 꺼내 휘둘렀습니다. 목사님 그런데요 그날부터 나는 화만 나면 칼을 찾습니다. 오늘도 교복 호주머니에 칼을 넣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이런 내가 너무 싫습니다. 안 그래야지 하는데 또 그러고 있습니다. 한 번은 제 오른손이 너무 싫어서 칼로 제 오른손을 그은 적도 있습니다. 그래서 친구들이 나를 더 피하는 것 같습니다. 저도 이런 제가 싫습니다.” 외모도 투박하고, 목소리도 독특하고 대인관계에 어려움이 있어서 안 그래도 친구들의 타겟이 되기 쉬운 아이였는데 중학교 때 일이 계속 H의 발목을 잡고 있는 것이 안타까웠다. “목사님이 네 손을 잡고 기도해주고 싶은데 괜찮을까?” “네” “하나님, H의 마음을 위로해 주시기 원합니다. H의 답답한 마음의 소리를 들어 주시기 원합니다. 무엇보다 오래전의 일이 H의 마음을 짓누르고 있습니다. 도와주시기 원합니다. 상처 있는 손이 사람을 살리는 손으로 바뀔 수 있도록 도와주시기 원합니다. H의 손이 외로워하는 친구에게 위로의 손이 되게 하시고, 넘어진 사람을 일으킬 수 있는 소망의 손이 되게 해주십시오. 하나님이 H의 손을 붙잡아 주십시오.” 녀석은 기도하는 내내 가슴을 주먹으로 치며 “윽~윽”소리를 내며 울분을 토하고 있었다. 나보다 덩치가 큰 녀석을 안아주었다. 물론 H의 상처가 바로 회복된 것은 아니었다. 졸업하기 전에도 학교에서 한 번 소동이 일어났던 적도 있다. 지금 나는 H가 어떻게 지내는지 잘 모른다. 소식이 닿지를 않는다. 그런데 문득문득 기억나는 제자 중 하나이다. 그냥 가슴 한켠에 아픔으로 남아있는 아이이다. 빠른 시간에 반응하고 바뀌는 아이들도 있지만 긴 시간이 지나서야 바뀌는 아이들도 있다. 나는 H가 20대를 지나가는 동안 좋은 사람들을 만나서 더 이상 자신의 손을 저주하고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약점이었던 오른손이 자신의 가장 강점이 되는 손이 되길 축복하며 기도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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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5-20
  • [부산기독교이야기] 한상동 목사는 이승만 대통령을 강단 아래에서 인사하게 했는가?
    6.25 전쟁기 부산에서 체류하는 기간 이승만은 주로 미8군 교회당으로 가 예배를 드렸으나, 감리교도였던 그는 보수감리교회당에서 예배드린 일도 있고 부산 초량교회에서 예배드린 일도 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앞에서 이미 지적했지만 한 가지 정리해 둘 것이 있다. 이승만 대통령은 전화(戰禍)에 지친 피난민들을 만나고 격려해 주는 것이 좋겠다는 양성봉 경남지사의 건의에 따라 1951년 4월 마지막 주일인 29일 주일 낮 예배 때 부산시 동구 초량동에 위치한 초량교회 예배에 참석했다. 양성봉 장로는 이 교회 시무 장로였기에 대통령을 초량교회로 모시고 온 것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이 난을 통해 이미 소개한 바 있다. 이날 한상동 목사는 신명기 11장 1절에서 9절까지 긴 본문을 읽었다. “그런즉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여 그가 주신 책무와 법도와 규례와 명령을 항상 지키라. … 너희가 여호와께서 행하신 이 모든 큰일을 너희의 눈으로 보았느니라. 그러므로 너희는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하는 모든 명령을 지키라. 그리하면 너희가 강성할 것이요 너희가 건너가 차지할 땅에 들어가서 그것을 차지할 것이며, 또 여호와께서 너희의 조상들에게 맹세하여 그들과 그들이 후손에게 주리라고 하신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너희의 날이 장구하리라.” 한상동 목사가 즐겨 봉독하던 본문이었다. 이 본문을 읽은 후 한상동 목사는 하나님 여호와의 법도와 규례를 지킬 때 축복을 받고 나라가 강성해지며 전쟁에서도 이길 수 있다는 내용으로 설교했다. 설교 후 3장 찬송을 불렀다. “이 천지간 만물들아 복 주시는 주 여호와 전능 성부성자 성령 찬송하고 찬송하세.”라는 가사였다. 이어 담임목사의 축도로 예배를 폐했다. 예배를 폐한 후 이 대통령은 담임목사의 안내를 따라 인사하게 되었는데, 그가 강단으로 올라가려 하자 한상동 목사는 ‘아래 강단에서 인사하십시오.’라고 하여 대통령은 강단에 서지 못하고 강단 아래에서 인사했다고 알려져 있고, 이 일을 두고 한상동 목사는 대통령이라 할찌라도 강단에 세우지 않았던, 그래서 강단의 권위를 지켰던 목사로 널리 회자 되었다. 이 일은 한상동 목사의 미담으로 알려져 부흥사들의 예화로 원용되기도 했다. 그렇다면 이것이 사실일까? 이 점을 심각한 왜곡으로 본 이가 초량교회 김성태(金性太) 장로였다. 1905년 7월 29일 경남 충무의 문화동 80번지에서 출생하신 김성태 장로는 교회 인근의 부산 초량동 824번지로 이주하셨고, 1947년 2월 25일에는 일신여학교 출신인 구소명(具小命) 여사와 혼인했다. 그의 가족은 오랫동안 초량교회에 출석했는데, 특히 이승만 대통령의 초량교회 예배 참석시의 목격자였다. 그는 그때의 광경을 이렇게 기술했다. “한상동 목사는 종전과 같이 하나님의 장중에 든 군의 필승을 역설, 강조하였고, 이날 부른 찬송가는 필승과 북진통일을 염원하는 삼천만 겨레의 우렁찬 합창곡과도 같았다.” 그런데 그는, 이승만 대통령을 한상동 목사가 강단에 세우지 않은 것이 아니라 이승만 대통령 스스로 강단에 서지 않고 아래 강단에서 인사했다고 말한다. 한상동 목사는 이 대통령에게 강단에서 인사하도록 말했으나 이 대통령이 강단은 목회자가 서는 곳인데 감히 내가 설 수 없다며 사양하고 스스로 아래 강단에서 인사했다고 증언한다. 도서출판 광야를 운영하던 최수경 사장은 ‘한상동 목사의 생애와 신앙’에 대한 책을 편집하면서 『초량교회 80년사』를 집필했던 김성태 장로의 한상동 목사 관련 글을 전재(轉載)하기 위해 1986년 초에 김성태 장로를 만났을 때 그가 이 점을 증언한 것이다. 그는 최수경 사장에게 이렇게 증언했다. “이 대통령은 미8군 군인교회 예배에 참석하시는 것이 상례였으나 종종 우리교회에 오셨지요. 당시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목사님과 장로님들은 6.25 동란이라는 민족상잔의 비극을 맞아 통회와 승리를 구하는 애끓는 기도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한번은 이 대통령께서 예배가 끝나고 자기 심중의 기원을 이야기할 때 한 목사님은 강대상에 이 대통령을 모시려고 하셨지요. 이때 대통령은, ‘주의 종이 말씀을 전하는 강단에 감히 설 수 없다’고 사양하여, 강단 아래에 서서 말씀하셨습니다. 한 목사님이 강단에 세우지 않았다는 것은 왜곡된 사실입니다.” 당시 상황에 대한 목격자인 김성태 장로의 증언은 신뢰할 만하고, 그의 영애인 김성로 교수의 증언에 의하면 김 장로는 소천하기까지 기억력이 흐려지지 않았다고 한다. 김성태 장로는 부산대학교 사범대학 교수로 일생동안 가르쳤던 학자이기도 하다. 그는 신앙과 학자적 양심으로 사실을 증언함으로 왜곡을 바로잡으려고 하신 것임을 알 수 있다. 소소한 일화라고 여길지 모르지만 진실보다 소중한 것은 없다. 이런 점에서 로마인들은 “진실은 모든 것을 이긴다.”(Omnia vincit veritas)라고 말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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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산기독교이야기
    2022-05-20
  • [서임중칼럼] 작은 자는 누구인가?
    불혹의 나이에 목사 안수를 받고 포항중앙교회 담임목사로 부임을 하였다. 무엇부터 담임사역을 시작할까 생각하면서 첫 심방을 교회 성도 가운데 가장 어려운 생활을 하고 있는 영세민 아파트 거주 가정부터 심방을 시작했다. 그 시간들 가운데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 것이 있다. 10평이 안 되는 방 한 칸에 대여섯 식구가 사는데 가장(家長)이 지체장애인이라 환경은 말할 수 없이 열악했다. 한 가정을 심방할 때면 으레 준비한 찬송가와 성경본문으로 시작을 하지만 이 심방은 형식을 깨고 먼저 그 한 가정 한 가정을 통해 30 여분 가량 이야기 듣는 것으로 시작했다. 그들의 아픔을 듣고 나누며 함께 끌어안고 울고 또 울었다. 그렇게 돌아온 날이면 늦은 밤까지 기도실에서 침묵으로 홀로 오랜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시작한 목회 사역 1호가 사랑의 주일이었다. 1년 중 다섯 번째 주일이 있는 주일을 ‘사랑의 주일’로 명명하고 특별헌금을 하여 소외계층을 돕는 사역으로 현재까지 진행되고 있다. 2호 사역이 장애인 초청주일이었다. 포항시내 여러 장애인단체와 연결하여 매년 4월 셋째주일에 1천여 명의 장애인을 초청하여 함께 하는 위로와 희망의 날이었다. 이 또한 지금도 계속되는 ‘함께’라는 공동체의 아름다운 사역 중 하나다. 이어서 세계선교위원회를 발족하여 44개국에 선교사를 파송하고 16개 국가에 협력선교를 하며, 국내 선교의 일환으로 9개 교회를 개척설립하고, 택시 타기 주일, 천사운동, 합동결혼식, 동호인선교회, 사랑의 순교현장, 목회자 세미나, 장학위원회, 노인대학, 여성대학, 100여 곳 미자립교회 후원, 중앙장터, 재활용센터, 만나의 집, 중앙도서관, 월간목회 보내기, 소년소녀가장 돕기, 영세가정 후원, 다문화가정 후원, 청소년 공부방, 선한이웃 진료소, 엘림복지재단 설립 운영, 그리고 마지막으로 목회 문화선교 연구소를 건립하여 다음 세대를 위한 사역을 준비하던 중 은퇴를 하게 되었다. 이 모든 사업의 중심은 ‘작은 자’였다. ‘작은 자’란 누구인가? 주님은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를 통해 작은 자를 가르쳐 주셨다. 그것은 비교법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창조법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곧 <지금 나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작은 자다. 성경은 어디서도 비교법을 사용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것은 그 존재로서 가치가 있다. 그래서 창세기 1:1절의 창조가 ‘빠라’ 곧 무에서 유의 개념이고, 창1:21절의 창조가 개조창조이며, 창1:27절의 인간 창조가 모방창조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모양과 형상대로 지음 받았다. 그러므로 그 존재 자체로서 존귀한 것이다. 무한한 가능성과 무진장의 가치성과 유일한 독특성이 인간 창조, 곧 ‘야차르’의 내용이다. 곧 인간은 존재 그 자체로 유일한 독특성을 지닌 것이다. 높고 낮음, 잘나고 못남은 나의 상(想)이 상(像)을 만들어 낸 인식의 차이다. 즉 좋은 사람 나쁜 사람이란 내 인식이 상대방을 그렇게 만들어 버린 것이다. 사물은 흰색인데 파란 안경으로 보면 파랗고 빨간 안경으로 보면 빨간 것이다. 그래서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인 것이다. 여기서 ‘틀린 것이 아니라 다르다’는 개념이 성립되고 그리할 때 인간관계가 원만해지는 것이다. 즉 이해와 관용과 용서와 사랑이라는 복음의 삶이 연주되는 것이다. 4월을 보내면서 포항중앙교회 장애인 주일 설교를 하고 귀가했다. 코로나로 인하여 ‘장애인 초청 주일’ 행사는 하지 못했지만 성도님들에게 장애인들에 대한 올바른 인식과 사랑의 관계는 잊어도 잃어도 안 됨을 역설했다. 아직도 곳곳에서 장애인들을 비교법으로 보는 것, 그것이 얼마나 무서운 정신적 장애인이 되는 것인가를 간과해서는 안 된다. 대상이 누구이든 나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작은 자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마태복음 25장에서 3가지 비유를 통해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삶의 내용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가르치셨다. 첫째는 주의 재림을 준비하는 마음 자세를 열 처녀 비유로 깨우쳤고, 둘째는 구체적인 삶의 자세로 달란트 비유를 하셨으며, 셋째는 심판에 대한 비유로 양과 염소의 비유를 하셨다. 그 말씀의 절정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나에게 한 것이라고 말씀하시고 구체적인 표현을 하면서 ‘작은 자’를 사랑하고 ‘작은 자’에게 관심을 가지고 살아야 함을 교훈하셨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크게 두 가지로 대별된다.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성도와 불순종하는 사람의 차이에 대한 것으로 순종하는 사람을 양으로, 불순종한 사람을 염소로 비유했다. 그리고 양은 오른 쪽에 염소는 왼쪽에 분류를 하고 오른쪽에 축복을 왼쪽에 저주를 선언하신 것이다. 다른 하나는 사랑을 실천하는 성도와 그렇지 못한 사람의 차이에 대한 것으로 그 구체적인 내용이 아주 리얼하게 기록되어 있다. 즉 내가 주릴 때에, 내가 목마를 때에, 내가 나그네 되었을 때에, 내가 벗었을 때에, 내가 병들었을 때에, 내가 옥에 갇혔을 때에 함께 해준 사람들과 외면한 사람들을 분류하고 축복하고 저주하셨다. 오른편 사람들이나 왼편 사람들이 공히 ‘언제? 우리가? 그렇게? 했느냐?’고 질문했을 때 결정적인 말씀으로 마무리가 되었다.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하지 아니한 것이, 나에게 한 것, 나에게 하지 않은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 나에게 작은 자는 누구이며 나는 지금 어느 편에 서 있는가? ‘톨스토이’의 유명한 단편 소설 <세 가지의 질문>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많은 생의 의미를 깨우치고 있다. “이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때가 언제인가? 현재다. 이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사람이 누구인가? 지금 내가 만나고 있는 사람이다. 이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일이 무엇인가? 현재 내가 만난 그 사람에게 선을 베푸는 일이다.” 그 사람이 작은 자다. ‘헤밍웨이’는 선에 대하여 “뒷맛이 좋은 것”이라고 갈파했다.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뒷맛 좋은 삶을 사는 것보다 아름다운 것은 없다. 사랑보다 아름다운 것은 없다.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는다. 작은 자를 사랑하는 것이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작은 자가 누구인가? 지금 나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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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4-29
  • [성서연구] 역사의 흐름을 인지하며
    유다 왕 여호야김 왕 4년에 향후 세계 판도를 바꿀만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느부갓네살이 바벨론의 왕으로 즉위한 것입니다. 느부갓네살은 주전 605년부터 562년까지 재위하였습니다. 그는 갈그미스에서 이집트 군대를 격파하여 대제국의 기초를 닦았습니다. 그 후 그는 갈대아 제국의 가장 위대한 왕이 되었습니다. 이런 느부갓네살이 왕이 되었을 때, 유다에서는 알았을까요? 어쩌면 정확히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바벨론에서 주변 국가들에 새로운 왕의 즉위를 알리고 축하 사절을 청하는 사신을 보냈을지도 모르니까요. 그러나 어쩌면 나중에서야 알았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아버지 나보폴라살이 죽은 후 전선에 나가 있는 느부갓네살이 서둘러 돌아와서 불과 3주 후에 즉위한 것을 보면 주변 국가들에 알릴 시간적 여유가 없었을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느 시점에 느부갓네살의 즉위를 알았는가> 하는 것보다 훨씬 중요한 것은 <새로운 왕의 즉위를 어떻게 해석하고 받아들였는가> 하는 점입니다. 언제나 중요한 것은 발생한 사건 자체 보다 그 사건이 가진 의미, 그 사건이 가져올 파장을 잘 분석하여 대처하는 것입니다. 아메리카 대륙의 인디언들은 백인들을 처음 보았을 때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고, 아무 대처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인디언들은 자신들의 영토를 백인들에게 내어준 채 초라하게 전락했습니다. 느부갓네살이 왕이 되었을 때, 유다는 어떻게 했을까요? 그냥 <주변 나라에 왕이 바뀌었는가 보다>라고 안연하게 생각했을까요? 아니면 미칠 파장을 예의 주시하고 대처했을까요? 아마도 그들은 그 새 왕 느부갓네살이 자신들의 생명을 빼앗고, 나라를 유린하고, 예루살렘을 폐허로 만들 것이라는 사실을 제대로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느부갓네살이 즉위하던 해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하여 유다 백성들에게 그의 즉위가 가져올 파장에 대하여 경고하셨습니다. <보라 내가 북쪽 모든 종족과 내 종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을 불러다가 이 땅과 그 주민과 사방 모든 나라를 쳐서 진멸하여 그들을 놀램과 비웃음거리가 되게 하며 땅으로 영원한 폐허가 되게 할 것이라> 이것은 역사의 흐름에 대하여 무심하지 말고 대처할 것을 촉구하신 말씀입니다. 역사는 이런 점에서 역설적이고도 재미있습니다. 전에 고유가로 인해 세계가 몸살을 앓을 때, 이로 인해 생각지 못한 일들이 일어났는데, 뜻밖에도 일자리가 늘어났다고 합니다. 기계로 하던 일 중 일부가 기계를 가동하는 데 너무 많은 에너지가 필요하기 때문에 오히려 사람을 동원하는 경우가 생겼다는 것입니다. 역사란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지금 지구 반대편에서 일어난 일이 한국 땅의 우리에게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코로나와 우크라이나 전쟁이 우리에게 미칠 파장이 걱정입니다. 그렇다면 그 역사의 소용돌이에 빠져 익사하지 않고, 잘 대처하는 방법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본문 5절을 보면 <그가 이르시기를 너희는 각자의 악한 길과 악행을 버리고 돌아오라 그리하면 나 여호와가 너희와 너희 조상들에게 영원부터 영원까지 준 그 땅에 살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구원의 길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은 소용돌이치는 역사의 주인이시기 때문입니다.모든 역사가 그분의 손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느부갓네살이 왕이 되었다는 사실이 유다를 위협할 때, 그들이 해야 할 일은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역사에 대처하는 가장 현명한 방법이었던 것입니다. 오늘 소용돌이치는 역사 상황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더 간절히 의지하도록 촉구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혼란 속에서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는 우리가 되길 원합니다. 아울러 세계사적 흐름을 깊이 인식하면서 간절히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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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4-29
  • [독일이야기] “통일을 위한 교회의 역할(3)”
    서독교회가 동독교회와 ‘특수공동체’로서의 동역관계를 유지하면서 음으로 양으로 지원하는 가운데, 동독교회는 인동초와 같이 외적인 억압을 이겨내며 서서히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80년대에 들어오면서부터 동독교회들은 동독민주화운동의 중심지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목회자들이 인권과 민주를 앞세우면서 반정부집회와 사회개혁의 리더가 되었다. 2017년까지 독일대통령직을 맡았던 가우크(Gauck) 역시 과거 동독의 개신교 목회자이며 인권운동가였다. 특별히 라이프찌히에 있는 니콜라이교회에서 1982년부터 매주 평화를 위한 기도모임이 열렸다. 당시 이 기도모임을 주도했고 2015년 내한했던 보네베르거 목사에 의하면, 1982년에 시작한 월요기도회에서는 반전운동을 비롯해 인권, 여성, 환경 문제 등에 대한 기도가 드려졌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성니콜라이교회 월요기도회에서는 기도만 드려진 것이 아닙니다. 국민들은 ‘교회’라는 지붕 아래서 동독 독재 정치에 항거하는 목소리를 냈고, 정치적 이슈를 놓고 토론회를 벌이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니콜라이교회를 비롯한 동독의 개신교회는 동독의 민주주의를 키워가는 중요한 모태의 역할을 했던 것이다. 이 집회는 1989년부터는 무언의 촛불시위로 발전해 갔고, 그 수가 점차로 늘더니 마침내 12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참여하는 대규모 시위가 되었다. 그리고 그 시위는 전국적으로 확산되었고 그 결과는 당시 동독 수상인 호네커의 실각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니콜라이교회를 중심으로 일어난 촛불시위의 힘은 엄청난 것이었다. 베를린장벽이 무너진 뒤 동독공산정권은 자신들에게 유리한 선거결과를 기대하면서 선거일정을 앞당겼다. 그러나 이 선거에서 동독 국민 다수가 서독과의 즉각적인 통일을 앞세운 정당을 선택했다. 이렇게 해서 세워진 새로운 동독정권은 서독의 콜정권과 통일을 위한 합의과정에서 서독 마르크와에 비해 1/4가치 밖에 되지 않았던 동독 마르크화를 1:1로 교환하기로 하고, 동독주민을 서독의 사회복지제도에 편입시키는 등 동독에 유리한 결과를 도출해 내었고, 결국 1990년 합법적인 통일이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이처럼 동서독의 통일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듯이 베를린 장벽이 무너짐과 동시에 동독 정권이 와해되고 그래서 서독에 의해서 일방적으로 흡수된 그런 흡수통일이 아니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뒤 약 1년 후에 통일이 이루어졌는데, 그 과정에서 동독국민들은 선거를 통해 즉각적인 통일을 선택했고, 그러한 민의를 바탕으로 양쪽 정권이 합의하며 통일을 이루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 동독의 민의를 형성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 동독의 개신교회였고, 그것을 또한 가능하도록 도와준 것이 서독의 개신교회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독일 통일에 있어서 서독교회의 역할은 매우 큰 것이었고, 그것을 해나가는데 있어서 서독교회는 인내와 포용의 성숙한 자세를 보여주었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이러한 자세를 배워야 한다. 당시 동서독의 상황과 현재 남북한의 상황은 많이 다르지만, 서로가 이념에 의해서 너무도 다르게 변해버렸다는 것은 공통된 것이다. 그 서로 다른 국가가 다시 하나로 합치기 위해서는 많은 인내와 수고와 노력이 필요하다. 여기에 자칫 경직된 정치이념에 물들어버린 교회는 통일의 걸림돌이 될 수 있다. 서독교회의 역할을 찬찬히 돌아보면서 한국교회가 통일의 걸림돌이 아니라, 디딤돌의 역할을 할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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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4-29
  • [시사칼럼] 세습사회
    언제부터인가 우리에게 매우 익숙해져버린 개념이 하나 있습니다. “세습”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기독교인들을 의미합니다. 최근 몇 년 동안 “우리”는 한국에서 가장 큰 교회 중의 한 군데가 세습 문제 때문에 얼마나 큰 물의(物議)를 빚고 있는지를 목격해 왔기 때문입니다. 한 작업장에서 큰 사고 하나가 발생하기 전에 동종의 크고 작은 사고가 수십 · 수백 번 이미 발생한다는 ‘하인리히 법칙(1 : 29 : 300)’은 산업재해 분야의 고전이지만 인간사회의 여타 영역에도 적용될 수 있다고 봅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유독 그 교회만 세습이 문제가 된 것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에 교계 전반에 걸쳐 아름답지 못한 세습이 만연하다가 마침내 교회를 넘어서 하나의 사회문제가 되고 말았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일반사회는 과연 “세습”으로부터 자유로울까요? 교회에서조차 세습이 문제가 되는 시대라면(1:), 이미 그 사회에는 결코 아름답지 않은 세습 현상이 많은 영역에서(29 : 300) 횡행하고 있다는 증거가 아닐까요? 최근 새로운 정권이 들어서면서 새로운 인선(人選)이 한창입니다. 그런데 새로운 각료 후보자들 하마평이 오르내리면서 집중적으로 부각되고 있는 사실들이 있지요. 바로 ‘자녀’ 문제입니다. 보건복지부 장관으로 내정된 의사 출신의 한 인사는 자질 논란도 일었지만 결정적으로 자녀의 이례적인 의대 편입 및 자신이 병원장으로 근무하던 곳에서 인턴 과정을 거친 점 등이 집중적인 성토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외교부 수장으로 거론되는 인물 역시 한 자녀가 이중국적을 가진 채로 특례입학을 했다는 문제 등이 불거져서 홍역을 치르고 있습니다. 판사 출신인 행정안전부 장관 후보자 역시 슬하의 아들과 딸이 ‘아빠 찬스’를 십분 활용해서 자신과 관련 있는 기관이나 회사에서 인턴 활동을 하거나 아예 취직의 기회를 얻지 않았나 하는 거센 의구심에 직면했습니다. 이러니 앞서 유사한 문제로 실각하거나 처벌을 받았던 사람들이 자신들은 ‘들킨 죄’밖에 없다는 항변을 하는 것입니다. 차라리 이번 기회에 유사한 사례들을 전수(全數) 조사해 보자는 파격적이지만 메아리 없는 제안이 쏟아져 나오는 이유도 여기 있습니다. 영국의 토마 피케티(Thomas Piketty)는 『21세기 자본』(2014)에서 이미 현 시대를 ‘세습자본주의(patrimonial capitalism)’ 시대로 규정하고 필연적으로 다가올 ‘세습사회’를 경고한 바 있습니다. 한국도 얼마 전 한 잡지에 “우리는 ‘세습사회’에 살고 있다”는 제목의 기고문이 실렸습니다(김정헌, 2020. 2). 그렇다면 어떤 “세습”일까요? “한편에서는 부모가 사교육, 인맥, 문화자본 등을 통해 자식에게 학벌과 일자리를 물려주는 현상이 뚜렷해지고 있다. 또 한편에서는 이보다 더 직접적이고 손쉬운 계층의 대물림이 심화되고 있다. 자산을 물려주는 것이다.. 바야흐로 ‘상속의 시간’ 곧 ‘부동산 세습사회’가 다가오고 있다.”(안선희, 2020. 10) 현대사회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세습은 이와 같이 전(全)방위적입니다. 사회 계층에도 영향력을 행사합니다. 예일대학교의 대니얼 마코비츠(Daniel Markovits)는 “엘리트 세습”을 강조하면서 새로운 귀족주의(A New Aristocracy)가 중산층을 붕괴시킬지 모른다고 했습니다. 반면 “문제는 세대가 아니라, 세습이다!”라고 일갈하면서 한국은 중산층이 자신의 지위를 자녀에게 세습하려 한다는 견해도 등장했습니다(조귀동, 『세습중산층사회』) “세습”이 무조건 악하다는 명제는 항상 옳지만은 않습니다. “3대 째”라는 말만 검색해도 “3대 째 금하칠보 장인”, “3대 째 화살 만드는 가족” 등 “세습(?)”을 칭송하는 많은 기사를 찾을 수 있기에 그렇습니다. “4대 째 한지 명인”, “4대 째 나침반 장인” 그리고 “5대 째 옹기 장인”은 어떻습니까? 이런 세습은 재산과 권세가 아니라 가난과 희생을 수반합니다. 따라서 이기적이고 탐욕적인 동기에서, 타인이나 공동체는 전혀 고려하지 않는, 그런 세습과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도 “세습”이 있었습니다. 귀족사회였으니 계층의 세습은 당연했습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고넬료(Cornelius)”(행 10:1)나 “글라우디오(Claudius)”(행 11:28, 23:26)는 당대 최고의 로마 귀족 가문들이었습니다. 계층뿐만 아니라 신분을 세습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대제사장 가야바는 직전대제사장 안나스의 사위라고 하지 않았던가요?(요 18:13) 하지만 예수께서 질책하셨던 세습이었습니다. 반면 예수께서도 세습을 하셨습니다. 요셉 대신 목수로서 가계를 책임지셨기 때문입니다. 피할 수 없다면, 우리는 어떤 세습을 택해야 하겠습니까? 우리는 어떤 사회를 만들어가야 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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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4-29
  • [은혜의말씀] 순종의 첫 걸음(출4:18~31)
    드디어 모세는 이스라엘 구원을 위한 첫걸음을 내딛습니다. 이렇게, 모세가 순종할 때 하나님은 모세에게 두 가지 문제를 해결해주셨습니다. 첫째는, 장인의 허락을 받게 하십니다.(18절) 그리고 둘째는, 모세의 마음에 과거의 두려움을 제거해 주십니다.(19절) 우리도 간혹 과거의 상처와 실패의 늪에 빠져, 영적 침체를 경험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과거 때문에 약해져서는 안 됩니다. 말씀에 순종하면, 우리 마음속에 있는 과거의 두려움도 하나님께서 해결해 주실 줄 믿습니다. 이제 회복의 날개를 폅시다. 모세는 아내와 두 아들을 나귀에 태우고 애굽으로 돌아갑니다. 그런데, 모세가 애굽으로 가는 모습을 이야기하면서,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았더라”고 했습니다.(20절) 사실 이 지팡이는 모세가 미디안 광야에서 양을 칠 때 들고 다녔던 마른 막대기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여 애굽으로 가는 모습을 그리면서 ‘하나님의 지팡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제 그 지팡이는 이스라엘을 애굽으로부터 구원해 내는 하나님의 도구로 쓰여질 것입니다. 지팡이 같은 우리도 하나님께 드려지면 능력의 사람이 됩니다. 그런데, 광야의 한 숙소에서 여호와께서 나타나셔서 모세를 죽이려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왜 모세를 죽이려고 하시는 것입니까?(24-26절) 할례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때 십보라가 급히 아들에게 할례를 행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모세를 놓아주신 것입니다. 지금 모세는 하나님의 종으로,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을 이루어야 할 사람입니다. 지도자가 될 사람이 하나님의 언약을 지키지 않은 채, 사람들 앞에 서는 것을 하나님은 기뻐하지 않으셨습니다. 사명보다 중요한 것은 거룩입니다. 일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하나님 앞에서 은밀한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무엇으로 가능합니까? 예수 그리스도, 보혈의 피로 가능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죄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십자가에서 해결해 주셨습니다.(요일 1:7) 예수님의 보혈로 과거의 모든 아픔과 상처, 모든 은밀한 죄를 해결하고, 믿음으로 순종의 길을 걷는 여러분 되시길 축복합니다. 이 일 때문에 아내 십보라와 두 아들은 미디안으로 돌아가고, 모세는 혼자 애굽으로 갑니다. 그런데 혼자가 아닙니다. 모세가 애굽에 도착하기 전에 하나님께서는 [아론]에게 광야로 가서 모세를 맞이하라고 말씀하십니다.(27절) 그리고 어디 아론만 모세와 동행했습니까? ‘내가 정녕 너와 함께 있으리라’ 약속대로, 하나님께서 한시도 모세를 떠나지 않으셨습니다.(3:12) 사명을 향해 가는 길은 그렇게 외로운 길이 아님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걸음을 준비하고 계십니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함께하시고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은혜의 길을 걸어가게 될 줄 믿습니다. 우리 사직동 모든 성도님들이, 순종의 첫걸음을 내딛는 여러분 되시길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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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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