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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목회자칼럼] 감정과 행동 사이에는 ( 괄호 )가 있다
    신약과 구약 사이에는 신구약 중간사가 있고, 눈과 눈 사이에는 미간이 있다. 그렇다면 사건과 행동 사이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감정과 행동 사이에 무엇이 있는지 알기 위해서는 먼저 감정에 대해 이해할 필요가 있다. 회사를 마치고 막 집으로 돌아온 남편이 들어오자마자 아내에게 짜증을 내면서 투정을 부린다. 이런 상황일 경우, 아내의 행동은 크게 두 가지 정도로 나타난다. 하나는 “아니, 하루 종일 밖에서 잘 있다가 집에 오자마자 아무런 이유 없이 왜 짜증을 내요? 내가 집에서 얼마나 힘들었는지도 모르고... 내가 당신의 짜증을 받아주는 사람이에요?”라며 오히려 더 큰 소리로 화를 내는 경우이고, 또 다른 하나는 “회사에서 속상한 일이 있었는가보네요. 일단 내가 준비한 맛있는 저녁 먹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 차근차근 이야기 해봐요”라며 남편의 마음을 읽고 감정을 풀어주는 경우이다. 전자의 경우, 아내가 더 큰 소리로 화를 내자 남편은 마음의 문과 함께 자신의 방문도 닫아버리며 화가 난 행동을 보였고, 후자의 경우, 감정이 풀어지자 다시 온화한 모습으로 아내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다시 일상의 저녁으로 돌아왔다. 이 예시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바로 감정을 받아주면 행동이 달라진다는 사실이다. 물질, 시간과 같은 환경이 달라져서가 아니라 단지 화나고 억울한 감정을 읽어주고 풀어주는 것만으로도 행동이 달라짐을 알 수 있다. 의미치료(logo therapy)의 주창자는 빅터 플랭크는 자신의 책 ‘죽음의 수용소’에서 자극과 반응 사이에는 공간이 있고, 그 공간에는 반응을 선택할 힘, 자유 의지 등의 선택이 있으며 우리가 성숙해 가는 과정에 행복이 결정된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다시 처음에 던져진 명제 앞에 돌아가 생각해보자. 빅터 플랭크가 말한 것처럼 자극과 반응 사이에 인간이 선택할 수 있는 수많은 것들이 있고, 결국 그 선택으로 인해 인간이 행복해 진다면, 감정과 행동 사이 역시 선택이 존재해 그 선택으로 우리 인생이 달라질 수 있다. 어린 자녀를 키우는 엄마가 온 종일 아이 기저귀를 갈아주고 분유를 먹이며 자신의 시간은 전혀 없이 아이를 위해 희생하며 “내가 왜 이런 고생을 사서 하지?” “앞으로 내 인생은 어떻게 될까?” “평생 이렇게 살아야 하나?” 등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며 복잡해 질 때, 즉 슬픔과 절망이라는 감정과 앞으로 살아야 할 행동 그 사이에는 자신이 택할 수 있는 선택 사항이 수없이 많이 있다. 슬프기 때문에 ‘더 슬퍼하고 더 괴로워 할’ 것을 택하면 행동 또한 나아지지 않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슬프고 절망적이기 때문에 오히려 ‘지금 이 상황을 이겨내기 위해 발전적인 무언가를 할 것’을 택하면 행동 또한 건설적인 방향으로 바뀔 것이다. 감정을 떼어낸 후, 현재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수많은 선택들을 생각한 후, 행동을 내린다면, 즉 감정과 행동 사이에 선택을 넣고 그 선택에 따라 행동이 결정되어진다면 해결의 실마리가 보일 것이다. 나는 젊은 시절, ‘청소년 교육과 치유’란 뜻을 세웠다. 그리고 어떤 상황 앞에 감정과 행동 사이에 갈등할 때마다 청소년의 뜻을 생각한다. 목회가 힘들어 쉬고 싶을 때에도 ‘청소년 교육과 치유’라는 선택을 생각하고, 앞을 향해 한창 달려가고 있을 때도 틈틈이 ‘청소년 교육과 치유’라는 선택을 돌이켜본다. 결국, 이 선택이 상황을 뛰어 넘어 내일을 바라볼 수 있게 만든 힘의 원동력이었다. 여러분들은 어떠한가? 감정과 행동 사이에 있는 이 괄호( )가 여러분들의 내일을 결정지을 수 있음을 알고 바른 선택의 분별력을 가지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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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 목회자칼럼
    2022-06-24
  • 침묵과 무관심이 낳은 결과
    이단 구원파 박옥수가 설립한 IYF(국제청소년연합)가 7월 3일부터 9일까지 부산 벡스코 제1전시장과 광장, 오디토리움에서 월드캠프를 개최한다. 최근에는 코로나19의 영향으로 온라인 월드캠프를 개최해 왔지만, 사회적 거리두기 해제 이후 다시 오프라인으로 대회를 준비중이다. 박옥수는 한국교회 중요 교단들이 이단으로 규정하고 있지만, 정작 지역교계는 이단의 대형 행사에 무관심과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 IYF가 월드캠프를 부산에서 처음 개최한 해는 2010년도였다. 이전까지는 강원도와 제주도에서 행사를 개최해 오다가 13회 대회(2010년)부터 부산 벡스코에서 대회를 진행해 왔다. 부산으로 이전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박옥수가 부산대회를 치루고 난 이후부터 줄곧 부산에서 행사를 가져왔다. 지역교계의 침묵과 무관심이 일조를 했다고 주장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행사 규모도 더 늘어났다. 2010년(13회) 참가국이 30개국 3,025명이었던 대회가 2011년(14회) 40개국 3,500명, 2012년(15회) 44개국(2,882명), 2013년(16회) 53개국(2,562명), 2014년(17회) 50개국(3,500명)으로 늘어났다.(주최측 발표) 이후 코로나 이전까지 50개국, 4천명 수준을 꾸준히 유지한 것으로 알려졌다. 박옥수는 자신의 입지도 높여갔다. 월드캠프 기간 중 세계청소년부장관포럼 및 대학생리더스컨퍼런스 대회를 개최하면서 정치권과 교육계, 기업 등의 관심을 받아왔다. 세계 각국 장관과 차관 등이 참석하기 때문에 국회가 이들을 초청했고, 또 외교통상부의 특별초청, 현직 장관 초청, 기업초청 등이 이어졌다. 월드캠프가 박옥수라는 인물의 입지를 높이는데 큰 역할을 해 왔던 것이다. 현재 교계가 이 행사를 물리적으로 대응하기는 사실상 힘든 상황이다. 골든타임이었던 초창기 행사를 방치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할 수 있는 것은 1인 시위 수준이다. 하지만 포기해서는 안된다. 한국교회에서 박옥수라는 인물이 어떤 인물인지 시청과 교육청, 그리고 각 언론사 및 정치권, 기업까지 실체를 알려 나가는 최소한의 노력이 필요하다. 그것마저 하지 않는다면 훗날 더 큰 댓가를 치러야 할 것이다. 이제는 관심을 갖고 행동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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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설
    2022-06-24
  • 재개하는 서울퀴어문화축제를 반대한다
    코로나19로 중단됐던 ‘퀴어문화축제’가 3년 만에 다시 개최한다고 밝혀 한국 교계가 우려하고 있다. 서울시 열린광장운영시민위원회는 서울퀴어문화축제 조직위원회가 신청한 서울광장 사용 안건을 가결했다. 그러나 몇 가지 조건이 붙었다. 퀴어축제 측에서 신청한 7월 12~17일 총 6일간의 행사 기간을 줄여 7월 16일 하루만 허가한다는 것이다. 다만 전날 오후부터 무대 설치 등 행사준비는 가능하게 했다. 또 다른 조건은 이번 축제에서 신체를 과도하게 노출하거나 청소년보호법상 금지된 유해 음란물을 판매하거나 전시하지 말라는 조건을 붙인 것이다. 이에 양측 모두 반발하고 있다. 일부 언론은 반쪽 승인이라며 비판했고, 퀴어축제 조직위원회는 “이번 결정 또한 다섯 해째 반복된, 전혀 나아진 바 없는, 객관적인 근거나 실체가 없는 기준을 들이댄 차별적 행정”이라고 비판했다. 한국교회 역시 서울시 결정을 강력히 비판했다. 동성애반대국민연합 등은 “오세훈 서울시장이 동성애퀴어짓 광장사용신고를 수리한 부당한 결정을 즉각 철회할 것을 다시 강력히 요구한다”고 밝혔다. 퀴어축제는 노골적으로 과도한 신체를 노출 시켜 시민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또 음란한 물건들을 판매해 자녀들의 눈을 가려야 했다. 단순한 종교적 갈등이 아니다.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도 볼 수 있듯이 많은 학부모들이 퀴어축제에 불만을 나타낸다. 선을 넘은 노출, 성기를 묘사한 쿠키 판매 등 인권, 평등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하지만 대다수의 시민들이 불쾌해 한다. 특히 자녀를 둔 학부모들은 하나같이 ‘아이들이 볼까 무섭다’는 반응이다. 수많은 국민들이 이용하는 공공장소에서 굳이 퀴어축제를 열어야 하는가? 광장 사용조건으로 내건 과도한 노출금지, 음란물 배포금지 등 조건이 전혀 지켜지지 않는 모습을 올해도 보게 될 것이다. 시내 한복판에서 다수의 국민들이 불편해하는 행사를 허가하는 것이 옳은 일인가? 서울시는 광장사용 승인을 철회하여 국민과 한국교회 목소리에 귀기울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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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설
    2022-06-24
  • [강규철 장로] 한번 생각해 봅시다
    오늘의 교회에는 많은 갈등과 분란이 내재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중에 목사님과 장로님간의 갈등이 가장 큰 요인으로 대두되고 있습니다. 특히 장로님들 중에는 장로가 되기 전에는 정말 열심히 섬기며 교회의 모범이 되었던 분이 장로안수 받고 난 뒤에는 교회의 걸림돌이 되어버린 경우가 종종 들려지곤 합니다. 이는 이분들이 장로가 되기 위해 하나님의 뜻을 알고자 하는 믿음의 깊이와 신앙적인 훈련보다는 외적으로 잘 나타나는 활동과 봉사, 그리고 인맥과 재물의 우위를 통해 장로가 되니 원래의 모습이 드러난 것이라 생각합니다. 무엇보다 장로가 되고자 하는 열망은 많았지만 장로가 되고나서 교회와 성도들을 어떻게 섬겨야 하는 것에 대한 생각은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 처음 기독교가 들어 왔을 때 교회의 장로는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믿음이 깊고 신망이 있는 성도를 투표하여 결정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사회에서 천시 받던 백정도 장로가 되었으며 신분이 미천한 머슴이 양반인 상전을 제치고 장로가 되기도 했습니다. 놀라운 것은 이런 현상을 모든 성도들이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고 그 결과에 순종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훌륭한 전통과 신앙의 선배들이 한국교회의 굳건한 초석을 세웠으며 오늘의 한국교회를 이루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의 한국교회의 현실은 어떠하리라 생각하십니까? 어떤 목사님은 자기 교회 성도 중에 명문대 출신의 학벌 좋은 사람이 많이 출석하고 있으며 특히 대학교수와 의사들이 많음을 자랑하고 이에 대해 상당한 자부심을 갖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게다가 이들이 장로가 되도록 애쓰는 모습도 보였습니다. 현재 많은 교회에서 재산이 많다고 해서 혹은 사회적 권력을 가졌다고, 신앙의 연륜과 교회에서의 헌신과 봉사와 관계없이 빠르게 장로가 되고 있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마도 교회를 빠르게 성장시키고 싶고 경제적으로 안정되길 원하는데 필요하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개인적으로는 화려한 교회당을 지어서 대외적으로 자랑하고 싶은 마음도 있을 것입니다. 물론 학식과 경제적 능력을 무시하는 것은 아닙니다. 뛰어난 학식과 경제능력을 갖춘 분이 깊은 신앙과 믿음을 가졌다면 이는 교회의 큰 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장로님들 중에 병든 성도들을 위해 손잡고 기도 할 수 있고 지친 몸과 마음으로 교회에 나온 성도들을 위로하며 보살피고 교회 장년들의 성경공부를 담당하며 그들의 신앙을 지도할 수 있는 분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사실 장로가 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장로로서 어떻게 섬겨야 할 것인가가 더욱 중요합니다. 많은 교회가 그렇게 가고 있는데 뭘 유별스럽게 할 필요가 있느냐고 하면서 그 시류에 편성하여 따라가다 보니 오늘날의 한국교회가 세속주의다 또는 물질만능주의가 팽배해 있다는 비판을 받고 있으며 많은 분란과 갈등이 생기게 된 계기가 된 것 같습니다. 큰 나무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깊은 뿌리가 땅속에서 뻗어 있습니다. 아무리 비바람이 들이치고 눈보라가 몰아쳐도 그 큰 나무가 굳건하게 서 있는 것은 그 존재감을 자랑하지 않는 뿌리 때문입니다. 교회의 뿌리는 묵묵히 교회 곳곳에서 겸손하게 헌신하고 있는 평신도들입니다. 오늘날 교회의 성장이, 웅장한 교회의 건축이 나의 업적이라고 생각하는 교회의 지도자들이 너무 많은 것 같습니다. 수많은 성도들이 흘린 많은 헌신, 수고의 땀과 기도를 하찮게 여기며 소수의 교회 지도자들이 모든 영광을 가져가는 모습에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교회의 머리는 오직 예수님이십니다. 목사나 장로가 교회의 머리가 될 수 없습니다. 똑똑하다고 해서 혹은 재물이 많다고 해서 지위가 높은 것은 더욱 아닙니다. 모두가 한 지체이고 단지 맡은 역할이 다를 뿐입니다. 예수님은 과부의 두 렙돈을 더 귀하게 보시고 성전 구석에서 죄인이라며 흘리는 눈물의 기도를 더 높이 평가하셨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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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2-06-24
  • [부산기독교이야기] 전쟁기 부산 교계: 기도운동
    6.25전쟁 기간 중 부산에서 시작된 두 가지 사역은 회개와 자숙을 포함한 거 교회적 구국기도회였고, 다른 한 가지는 대한민국을 공산지배로부터 보호하며 전쟁의 승리와 통일을 이룰 수 있도록 후원하는 구국운동이었다. 또 이 시기 시작된 군목 활동은 그 이후의 한국교회 성장에 상당한 영향을 주었다. 이런 점에 대해 순차적으로 소개하고자 한다. 6.25 전쟁이 발발하자 피난지 부산에서 거 교회적 기도운동 그리고 회개운동이 일어났다. 수도 서울을 적에게 빼앗긴 후 후퇴를 거듭하여, 대전(1950. 6. 27), 대구(7. 16)를 거쳐 8월 18일부터 부산이 임시 수도가 되었다. 대구와 경상남도의 일부지역을 제외한 전 국토가 공산당의 수중에 들어가자 부산에는 각처로부터의 피난민이 몰려들어 피난민들의 도시가 되었다. 1951년 8월 당시 정부가 집계한 피난민은 380만 명, 가옥과 재산을 잃은 전재민은 402만 명으로 파악하고 있었다. 이들의 대표적인 피난처가 부산이었다. 부산은 피난민들의 도피처였고 신자들에게는 이른바 ‘의의 피난처’였다. 그런데 부산의 초량교회와 중앙교회 등에서 기도회가 개최되고 회개운동이 전개되었다. 한상동 목사가 시무하던 초량교회에는 한상동 목사와 친분 있는 목회자들이나 성도들, 그리고 해방 후 교회 쇄신운동을 지지하던 이들이 주로 회집했고, 부산중앙교회에는 한경직 목사를 비롯한 그 외의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목회자들이 중심을 이루고 있었다. 이런 전란의 와중에서 회개와 자성이 일어났고 자연스럽게 기도회 혹은 구국기도회가 개최되었다. 이때는 서울이 함락된 후 인민군이 파죽지세로 남하하여 부산과 그 인근지역만이 적의 수중에 놓이지 않았던 위난한 때였다. 이때의 기도회를 혹은 ‘회개기도회’ ‘회개운동’ 혹은 ‘구국기도회’라고 말하지만 따지고 보면 두 가지 형태였다. 첫째는 목회자만이 아니라 각처에서 피난 해 온 성도들, 그리고 피난교역자들이 포함된 회개집회 및 기도회였고, 다른 한 가지는 이름 그대로 전란(戰亂)에서 나라를 구해 달라는 ‘구국기도회’였다. 전자의 경우 중심지역이 초량교회였고, 후자의 중심교회가 부산중앙교회였다. 물론 이 두 기도운동을 구분하기 어려운 점이 없지 않다. 전시 하에서의 기도회가 위기에 처한 국가를 위한 기도가 제외될 수 없었고, 구국기도회에서도 회개와 자성 그리고 성령의 역사가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초량교회 양성봉(梁聖奉) 경남도지사가 부산 초량교회 장로였으므로 초량교회에는 많은 신자들이 모여들었고 이곳을 중심으로 나라를 위해 기도하는 운동이 일어났다. 기도회는 1950년 8월 말 시작되었는데, 집회시간은 일주일로 하되 새벽기도, 낮 성경공부, 저녁 집회로 진행되었다. 김치선, 박윤선, 박형룡, 한상동 목사가 강사였다. 오종덕 이학인 목사 등도 설교자로 동참했다. 이 집회의 모든 경비는 밥 피어스(Bob Pierce, 1914-1978) 목사가 부담했다. 이 비상기도회에서 특히 박윤선 목사가 일제하에서의 신사참배 강요와 이에 대한 저항의 과정을 설명하자 신사참배에 대한 회개와 해방 후의 교회 분열과 대립, 그리고 신자답게 살지 못한 일에 대한 회개와 통회 운동이 일어났다. 박윤선은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다. “이날 새벽기도회 담당이었던 나는 설교도중 한부선 선교사의 신사참배 반대투쟁에 대해, 즉 그가 총회석상에서, 만주에서, 옥중에서 목숨을 아끼지 않고 싸운 사실을 증거 하였다. 그 시간에 나는 한부선 선교사에게 직접 들었던 말을 거의 그대로 소개하였다.” 이 때 강력한 회개의 역사가 나타났다고 한다. “그 자리에 참석했던 교역자들이 한 사람씩 한 사람씩 회개하는 기도로 이어져서 그 집회 분위기는 더욱 뜨거워졌다. 이때에 성령의 도우심으로 설교하는 나 자신부터 내 죄를 회개하면서 증거 하게 되었으니 감사한 일이었다. 즉 나도 단 한번이지만 신사참배를 한 범과가 있으므로 나는 언제나 이 일로 인하여 원통함을 금할 수 없었는데, 이때에 그 죄를 회중 앞에 공적으로 고백하였던 것이다.” 원래 기도회는 1주일간 예정되어 있었으나 참석자들은 집회의 연장을 원했다. 그래서 집회는 일주일 연장되었다. 이때는 부산만이 아니라 울산과 온산 지방 교역자들도 합류한 가운데 계속되었다. 부산중앙교회에서의 기도회 또한 비슷한 시기에 진행되었고, 박형룡은 이곳에서도 강사로 활동했다. 초량교회에서의 약 2주간에 걸친 기도회가 끝나는 날 신문 호외가 배포되었는데, 인천 상륙작전 성공을 알리는 호외였다. 그래서 기도회에 참석했던 이들은 성공률 5천분의 1이라는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한 것은 성도들의 간절한 기도의 결과라고 믿었다. 1.4 후퇴 이후에도 부산에서는 기도운동이 일어났고, 초량교회에서의 나라를 위한 기도회는 수일간 계속되었다. 1951년 4월 마지막 주일 이승만 대통령이 초량교회 주일 예배에 참석하여 위기에 처한 나라를 위해 기독교인이 기도해 줄 것을 부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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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산기독교이야기
    2022-06-24
  • [독일이야기] “오씨와 베씨”
    독일통일에서 제대로 예상 못한 것은 경제 문제만이 아니었다. 서독인과 동독인은 자신들도 모르게 너무도 다른 사람들로 변해있었다. 슈피겔지가 통일 2년차인 1992년 말에 조사한 바에 따르면 “서독의 69%, 동독의 79%가 서로 이렇게 다른 줄 몰랐다”는 것이다. 같은 언어를 쓰고 같은 문화를 이루어온 같은 민족임에도 불구하고, 서로 다른 이념과 체제 속에서 45년간 살아온 동독과 서독주민들은 예상 밖의 이질감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경쟁이 불필요한 국가계획경제와 권위주의적인 독재정권 아래서 굳어진 사고방식과 생활습관이, 치열한 경쟁을 전제로 하는 자유시장경제와 민주주의 아래서 형성된 그것과 같을 수는 없는 것이다. 당시 서독은 세계적으로 생산성이 높은 나라로, 높은 임금을 위해 근무시간에는 쉴 틈을 주지 않고 고되게 일을 시켰다. 그런데 동독은 열심히 일해도 자기에게 돌아오는 것이 없다보니 시간 때우는데 익숙해져 있었다. 당시 많은 동독인들이 일자리를 찾아 서독으로 왔지만, 기업들은 열심히 일하지 않는 이들을 외국노동자보다도 선호하지 않았다. 과거 분단시절 국경선을 맞대고 통일을 갈망할 때는 같은 동족으로서의 동질감과 연대감을 강하게 느꼈지만, 막상 뒤섞여 살다보니 오히려 많은 이질감을 느끼면서 서로에 대한 불평이 쏟아져 나왔다. 그래서 나온 말이 동독놈이라는 뜻의 오씨(Ossi)와 서독놈이라는 뜻의 베씨(Wessi)였다. 서독인들은 동독인들을 게으른 2류 독일인이라 무시했고, 동독인들은 서독인들을 돈만 아는 돈벌레라고 비아냥댔다. 통일된 지 30년이 지난 지금은 많이 극복되었지만, 초기만 해도 동서간의 이런 심각한 갈등상황이 과연 제대로 극복되어 국민적인 통합이 가능할까에 대한 의문이 많이 제기 되었다. 물론 서독인들에게도 문제가 있었지만, 통일독일의 주인행세를 하는 그들의 눈에 동독인들의 이해되지 않는 점은 한 둘이 아니었다. 서독의 정신과 의사로 동독사람들에 대해 연구한 마츠는 ‘감정정체론’이라는 말을 썼다. “동독인들은 오랜 세월 권위주의적인 환경에서 살다 보니 자기표현을 못한다. 정말 자신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모른 채, 타인의 요구를 충족시키는데서 행복을 느끼고 존재의 의미를 부여하는 일종이 자기소외의 경향을 갖는다.” 동독의 권위주의적인 사회, 말 한마디 잘못했다가는 쥐도 새도 모르게 붙잡혀가는 그런 사회 속에서 오랫동안 살아온 사람들은 솔직한 자기표현이 쉽지 않았다. 이들은 자기가 무시당하거나 소외를 당하지 않을까 눈치를 살피고 남과 비교하면서 타인으로부터 인정을 받고 애정받기를 요구한다. 그런 욕구가 충족되지 못하면 불안과 공포를 갖게 되고 이것이 타인에게 대해 공격적인 성향으로 나타나며 또래 집단 즉 동독사람들끼리만 뭉치는 내집단성향을 갖게 되는 데 마츠는 이것을 감정정체론이라는 말로 표현했다. 이것이 자유롭게 자기의 의사를 표현하며 남의 눈치를 보지 않고 나름의 자존감과 자신감을 갖도록 교육받고 자라난 서독인들에게 이해되지 않는 모습이었다. 만약에 남북통일이 이루어진다면 우리는 어떨까? 남한주민과 북한주민들 사이의 괴리감은 동서독보다 덜할까 더할까? 우리는 이질감을 잘 극복하고 서로 융화하여 통합된 사회로 잘 나아갈 수 있을까? 오씨와 베씨가 우리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준다.
    • 오피니언
    • 독일이야기
    2022-06-15
  • [서임중칼럼] 무엇을 중히 여기는가?
    제 8대 6.1 지방선거가 끝났다. 언제나 그렇지만 선거도 희비의 쌍곡선을 긋는다. 이즈음이면 먼저 떠오르는 사자성어 새옹지마(塞翁之馬)가 있다. 승패야 선거의 결과지만 과정을 지켜보면 헛웃음이 나오는 경우가 흔하다. 이기기 위하여 분수를 잊고 도를 넘어 난장판이 되는 경우는 이젠 식상하기까지 하다. 8대 지방선거의 선거운동도 이맛살을 찌푸리게 하는 추태는 여전했다. 그러기에 역대 가장 낮은 투표율을 기록했고 언론은 ‘정치무관심증의 국민정서’라고 평했다. 4년전 지방선거결과의 지형은 한반도가 ‘파란색’으로 뒤덮였었다. 그런데 4년이 지난 오늘에는 붉은색으로 그 지형의 색상이 바뀌었다. 그냥 모든 것이 헛웃음만 나오는 한국정치의 단면도를 보면서 마음이 슬프다. 여러 평론 가운데 패자에 대한 언론보도의 머리글들이 눈에 들어왔다. <명분 없는 출마, 이변 없는 패배, 빛바랜 희생론, 반성 없는 사과>라는 내용의 제목들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대부분의 내용은 <내 탓이오>는 보이지 않고 <네 탓이오>였다. 선거 결과는 승패를 따라 희비가 이어지겠지만 승자가 패자를 위로하고 패자가 승자를 축복하는 진정한 민주주의의 꽃은 아직도 피지 않음에 국민은 아파한다. ‘명분(名分)’이란 ‘신분이나 이름에 걸맞게 도덕적으로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를 뜻한다. 명분을 거꾸로 읽으면 분명이다. 분명이란 틀림없이 반듯하다는 뜻이다. 여기서 정시(正視), 정사(正思), 정언(正言), 정도(正道), 정행(正行)이 일상이 된다. 사람마다 삶에서 중히 여기는 것이 있다. 그것이 무엇이냐에 따라 그 사람의 일생이 좌우될 수도 있다. 곧 흥망성쇠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시간을 중히 여기는 사람은 촌음(寸陰)을 아껴 쓴다. 신용을 중히 여기는 사람은 자신의 범사가 힘들어도 신의(信義)를 생명처럼 여긴다. 돈을 중히 여기는 사람은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라면 부모도 팔아먹는다는 속언(俗言)이 있다. 사랑을 중히 여기는 사람은 사랑을 위해 죽는 것 또한 행복으로 여긴다. 권력을 중히 여기는 사람은 권모술수(權謀術數)를 당연시한다. 명분을 중히 여기는 사람은 대의(大義)를 생명처럼 여긴다. <명분 없는 출마, 이변 없는 패배, 빛바랜 희생론, 반성 없는 사과>를 읽으며 가슴 아픈 싸한 통증을 쓸어내린다. 어느 때보다 이순신 장군의 <필사즉생 필즉사생(必死卽生 必卽死生)>의 명언이 생각난다. 공자보다 약 100여년쯤 후의 인물로서 맹자처럼 전국시대에 활약한 사상가 장자는 호방자재(豪放自在)한 명문(名文)으로 장자 33편을 남겼다. 각의편에서 장자는 이렇게 깨우쳤다. ‘衆人重利 廉士重名 賢士尙志 聖人貴精, 즉 대중들은 이익을 중시하고, 청렴한 사람들은 자기 이름을 존중하여 남에게 손가락질 받지 않도록 명예와 염직(廉直)을 중시하며, 현인들은 높은 뜻을 세우고 그 뜻을 중시하며, 성인들은 정(精) 곧 정신이 순수무잡(純粹無雜)하며 깨끗하고 맑고 참되고 높은 경지에 도달한 것을 뜻하는 문장으로써 이를 중시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는 무엇을 중히 여기며 살고 있는가? 무슨 일에든지 유혹이 있다. 유혹을 이겨내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명분을 중시함으로 유혹을 극복하지만 명분을 중시하지 않으면 온갖 유혹에 스스로의 삶을 무너뜨리게 된다. 가인은 장자의 명분보다 팥죽 한 그릇을 중시했고, 엘리는 제사장의 명분보다 패역한 아들들을 중시했다. 삼손은 사사의 명분보다 들릴라의 악한 꾐에 넘어갔고, 발람은 발락의 물질에 현혹되어 넘어졌으며, 웃시야는 직분의 명분보다 분향에 유혹 되었고, 가룟 유다는 제자도의 명분보다 은 30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여 넘어졌다. 그러나 어떤 상황에서도 명분을 중시했던 노아는 세상즐거움을 거절했고, 요셉은 보디발 아내의 유혹을 거절했으며, 다니엘은 고량진미(膏粱珍味)의 유혹을 거절했고, 사도 바울은 세상적인 부귀영화를 거절했다. 무엇을 중히 여기는가에 따라 인생의 성패가 판가름 난 역사의 교훈이다. 은퇴 후 농어촌 산골 개척교회 자비량집회를 인도하면서 후배들의 목회현장 아픈 이야기들을 많이 듣는다. 즉 명분 없는 논쟁에 지치고 사사로운 감정에 대의를 접어야 하는 일들을 겪을 때는 성의(聖衣)를 벗고 싶을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컨대 십일조라면서 매월 1천원을 하면서 목회걸림돌 역할을 하다가 항존직분 피택 조건에 교인의 의무조항에서 십일조를 했다는 경우, 설교하고 강단을 내려오는데 국문학적으로 볼 때 어순도 맞지 않아 듣기 힘들었다는 경우, 봉고승합차를 운행할 때는 열차의 운임은 거리의 함수를 이야기하면서 매월 주행거리와 주유금액을 계산하는 경우, 교인들 가정 심방이나 길흉사를 집례한 후 사례비를 받은 것은 목자가 아니라는 경우,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명분 없는 논쟁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답이 없다는 아픈 이야기들이다. 소리 없는 한숨과 젖어드는 눈을 보면서 나는 언제나 동일한 한 마디로 권고해 준다. “그래도 목사는 채찍질 당하면서, 얼굴에 침 뱉음의 수모를 당하면서, 피범벅이 되어 쓰러져도 또 일어나서 골고다를 향해 한 걸음씩 올라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주님이 가신 길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것만이 목사의 명분입니다.” 듣는 목사님들 대부분은 흑- 하면서 엎어지기도 하고 유구무언이 되어 멍하니 천정을 올려다보기도 한다. 그렇다. 세상적인 모든 것을 가지고 부귀영화를 누리면서 자기 義가 기준이 되어 살다가 예수님을 만나 자신의 명분을 깨닫는 순간 그 모든 것을 분토처럼 버리고 오직 예수만 중히 여기는 삶을 살았던 바울처럼 우리도 그렇게 살아야 한다. 잠깐 후면 아무것도 아닌 좁쌀만 한 작은 무엇 하나를 갖고 안하무인, 오만불손, 경거망동의 삶을 살아서는 안 된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주님의 가르침을 중히 여겨야 한다. 이해하고 관용하며 용서하고 사랑하는 복음의 삶이 바로 그것이다. 그것이 명분을 중히 여기는 그리스도인의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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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6-10
  • [성서연구] 은혜가 숙성되기까지
    예수님께서는 한 나병환자를 치료하셨습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4절을 보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삼가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고 다만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모세가 명한 예물을 드려 그들에게 입증하라 하시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왜 이렇게 말씀하셨을까요? 혹시 당신께서 고치신 것을 비밀로 하기 위함이었을까요? 그건 아닙니다. 이미 많은 무리가 그 자리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1절은 <예수께서 산에서 내려오시니 수많은 무리가 따르니라>고 했습니다. 또 제사장에게 입증하러 가면 어차피 알려질 일이 아닙니까? 그러니 비밀 유지를 위한 것도 아닙니다. 그렇다면 혹시 너무 많은 환자가 몰려올까 염려하셨기 때문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을 부르신 분이시며, 마태복음 8장 16~17절은 <저물매 사람들이 귀신 들린 자를 많이 데리고 예수께 오거늘 예수께서 말씀으로 귀신들을 쫓아내시고 병든 자들을 다 고치시니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주신 말씀에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고 기록하고 있는 바, 예수님께서는 병자를 환영하셨고, 연약한 것과 병을 짊어지는 것은 메시아 사역의 핵심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많은 환자가 올 것은 염려했기 때문이라는 것도 이유는 못됩니다. 오히려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하신 데는 본문에 드러나지 않은 숨은 이유가 있다고 여겨집니다. 이 사람이 제사장에게 찾아가 병이 나았음을 확인받고 제물을 드려 입증하려면 시간이 필요할 것입니다. 먼저 집에 가서 가족에게 자신의 몸을 보이고, 이젠 격리되지 않고 함께 살 수 있음에 감사하고, 제물을 준비하여 가족과 함께 제사장에게 가는 시간이 필요할 것입니다. 그가 먼 동네 사람이라면 시간이 더 많이 필요할 것입니다. 그 시간 동안 그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 대신 그는 자기 자신과 대화를 나누어야 합니다. 특히 <왜?>라고 물어야 합니다. <사랑이 구주를 죽게 했네 왜 날 사랑하나 겸손히 십자가 지시었네 왜 날 사랑하나>로 시작하는 찬양이 있습니다. 그도 이렇게 물어야 했습니다. <왜 이런 놀라운 은혜를 주시는가, 이제 어떻게 살아 은혜에 보답할 것인가>라고 질문하고, 그에 대한 답을 발견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은혜를 받은 후의 삶을 결단해야 합니다. 오스카 와일드의 작품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한 주정꾼을 만나셨는데, 그는 과거에 예수님께 저는 다리를 고침받은 자였습니다. 그는 다리가 회복된 후 직업을 얻지 못해 타락했다고 말했습니다. 그 다음엔 창녀를 만났는데, 예수님께 용서를 받은 여인이었습니다. 여인은 창녀 생활을 청산했지만, 고독하고 생계가 막막하여 다시 그 길로 들어섰다고 했습니다. 또 이웃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사람을 만났는데, 그는 맹인이었다가 예수님에 의해 눈을 뜬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막상 눈을 뜨니, 자신을 분노하게 하는 것이 너무 많아 참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이들은 은혜를 받았으나, 은혜에 대한 응답의 방법을 알지 못했습니다. 은혜를 받는 것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은혜를 받은 후에 가질 태도와 삶을 깨닫는 것입니다. 은혜를 받았다고 생각없이 가볍게 떠버리면 안 됩니다. 그동안 개척하여 교인이 좀 늘면, 능력을 좀 받으면, 프로그램 하나가 성공하면, 대단한 것을 이룬 것처럼 사방으로 떠버리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금방 유명해졌으나, 종말도 빨리 왔습니다. 은혜는 받았는데, 오히려 그것 때문에 교만해져 종말을 재촉했습니다. 히스기야는 15년의 생명이 연장되는 은혜를 입었으나, 교만하여 바벨론 사신 앞에서 하나님 영광 대신 자신의 부유함을 자랑하다가 유다가 바벨론에게 멸망하게 되는 불행의 씨앗을 뿌렸고, 그 15년 동안에 태어난 아들 므낫세가 유다를 완전히 수렁에 빠지게 했습니다.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아야 합니다. 은혜를 받았다면, 침묵하고 깊이 기도하면서 은혜를 내면에서 숙성시켜야 합니다. 은혜를 받았다면, 깊은 묵상과 겸손한 엎드림이 필요합니다. 은혜를 받을수록 침묵하고, 기도하고, 더 깊어져야 합니다. 풍성한 은혜를 받길 원합니다. 그리고 은혜의 이유를 깊은 기도 중에 발견하고, 은혜에 보답하는 겸손하고 경건한 삶을 살길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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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6-10
  • [시사칼럼] 이십 대는 요리사다?
    최근 아주 유명해진 이십 대 여성이 한 명 있습니다. 야당의 공동비대위원장으로 활약했던 박지현 씨가 그 주인공인데, 1996년 3월생이라고 하니 한국 나이로 만 26세에 해당합니다. 그녀는 소위 ‘n번 방 사건’을 추적해서 그 전모를 밝혀낸 성과로 약관의 나이에 70년 역사를 자랑하는 민주당의 수장이 되었고, 최근 치러진 지방선거를 진두지휘하면서 공개적으로 586 세대의 퇴진을 요구하여 한국사회에 일대 충격을 안겨다 주기도 했습니다. 물론 작년에 이준석 씨가 30대의 나이로 당내 선거를 통해 당시 야당의 대표에 취임하고 또 대통령선거까지 승리하게 함으로써 정계를 넘어 한국사회 전체에 먼저 충격파를 던진 사례가 있습니다. 하지만 김영삼 전 대통령을 비롯해서 이십 대의 나이로 국회의원에 당선된 경우는 종종 있어도 공당(公黨)의 대표성을 가진 자리에 이십 대가 등용된 일은 없었습니다. 정치 영역에서만 일어날 수 있는 기적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최근 이십 대의 기세가 심상치 않습니다. 이십 대와 관련해서 등장한 신조어를 하나 소개하겠습니다. 각기 다른 영어 단어들의 앞 글자를 따서 만든 ‘CHEBB’가 바로 그 주인공입니다. 요리사를 뜻하는 말로 이제는 하나의 고유명사처럼 사용되는 ‘셰프(chef)’를 잘못 쓴 것 아니냐고 되묻는 분들이 많을지 모르겠습니다. 이십 대를 앞에 붙이면 ‘이십 대는 요리사다?’라고 생각하는 이들도 많을 듯합니다. 실상은 이러합니다. “글로벌 주류 겨눈 90년대생... ‘쳅(CHEBB)’에 걸었다, [90년대생 창업자가 온다]”와 같은 기사(중앙일보 5월 3일)에서 언급한 것처럼 이 말은 이십 대가 주로 창업에 뛰어드는 새로운 영역들을 상징하는 축약어입니다. ‘커머스(Commerce)’, ‘헬스케어(Healthcare)’, ‘에듀테크(Edu-tech)’, ‘B2B SaaS’, ‘블록체인(Block chain)’, 이렇게 다섯 분야에서 최근 이십 대들의 활약이 눈부십니다. 하기야 이 단어들을 제대로 제시한들 도대체 무슨 뜻인지 알 수 있는 기성세대가 얼마나 되겠습니까? 알만한 분야에 대한 설명은 생략하고 나머지만 간단하게 소개하자면, 먼저 ‘커머스’는 ‘깊고 뾰족한 상거래’라는 ‘딥버티컬 커머스’(deep vertical commerce)의 줄인 말로 틈새시장을 공략하는 의미라고 보면 되겠습니다. 음식 사업을 해도 간편식 시장을 노린다거나 인테리어 영역에 뛰어들 때도 동남아시아 인테리어 사업을 구상한다든지 이런 식을 의미합니다(간편식 커머스 윙잇, 동아시아 식기 커머스 서울번드 등). 한편 ‘B2B SaaS’는 태생적으로 디지털에 익숙한 이십 대(디지털 전환 루키)들이 기업에서 업무용으로 필요한 소프트웨어를 구독서비스 형태로 제공하는 사업을 의미합니다. 마지막으로 ‘블록체인’이라는 말은 이제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 블록체인의 핵심은 역시 가상화폐라 할 수 있는데, 최근 비트코인 폭락 사태가 한국에서 촉발되어 화제가 되었습니다. 애플 엔지니어 출신인 권도형 씨가 이십 대 시절부터 준비해서 발행한 ‘루나와 테라’가 한때 상종가를 치다가 최근 가치가 99% 폭락하면서 주된 거래자인 수많은 청춘들이 일대 혼란에 빠졌고(“천만 원 잃고 떠난다”, “원금은 못 찾더라도 이혼은 막아야지”..), 이 여파는 세계가상화폐 시장에도 미쳐서 하루만에 257조가 증발하는 사태가 발생해 외신들 사이에 ‘코인런’ 논란이 일기도 했습니다. 핵심은 이들 신종 사업을 주도하는 주류가 이십 대들이라는 사실입니다. 경제적인 의미에서만 이들이 신인류로 자리 잡아 가는 것이 아닙니다. 이번 지방자치선거에서 19세의 천승아 당선인을 포함해 80여 명의 이십 대들이 당선되어 풀뿌리민주주의 현장에서 활약하게 되었습니다.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는 말이 더 이상 지금의 이십 대에 어울리지 않는 세상이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교회에서 이십 대의 형편은 어떠할까요? 최근 네 번째로 추기경을 배출해 경사가 난 천주교계는 연이어 발표한 소식으로 충격에 빠졌습니다. 작년에 신규 사제 숫자가 111명에 불과했고, 최대교구에 위치한 서울 소재 신학교에 입학한 학생은 고작 7명에 불과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습니까? 정치경제문화체육 분야의 전 방위에 걸쳐 세계적으로 이름을 드높이는 이십 대들이 속출하고 있는 이 때 유독 교회에서만 이십 대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있다 하지 않습니까? 이십 대들이 문제라는 착각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20대 당대표와 스타트업 창업자가 속출하는 현실을 자각하고 교회가 먼저 이십 대처럼 변해야 합니다. 망설일 시간이 없습니다. 작은 일부터 빨리 시작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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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6-10
  • [은혜의말씀] 애굽에 내린 재앙(2) (출8:20~24)
    우리는 지금 애굽에 내린 10가지 재앙에 대해 살펴보고 있습니다. 오늘은, 네 번째 재앙입니다. 네 번째 재앙은 ‘파리’가 애굽 전역을 덮는 것입니다.(24절) 여기서 말하는 파리는 우리가 알고 있는 밥상 위에 앉아서 “워이워이” 하면 도망가는 순한 파리가 아니라, 사람이나 짐승의 피까지 빨아먹는 아주 독한 ‘쇠파리’를 말합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침실에 순한 파리, 몇 마리만 있어도 밤잠을 설치는데, 새까만 쇠파리 떼가 무수히 날아와서 사람에게 들러붙어 피를 빨고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끔찍합니까? 애굽 사람들은 날아다니는 파리가 자신의 운명을 지배하는 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케프리’라는 신입니다. 그들은 파리 모양의 ‘신상’을 만들어 놓고 숭배까지 했는데, 그 숭배하던 신이 자신들을 공격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네 번째 재앙에서 독특한 것이 발견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는 고센 땅을 구별하여 파리가 없게 하겠다고 하십니다.(22절) 이로 인해 여호와가 참 하나님이신 것을 알게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때로 그리스도인들도 이 세상에서 불신자들과 똑같이 어려움을 당합니다. 불경기에는 똑같이 경제적인 어려움을 당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어떤 ‘결정적인 때’는 구별하십니다. 특히 하나님이 심판하시는 순간에는 구별하십니다. 이런 구별이 가장 잘 나타난 것이 바로 열 번째, 죽음의 재앙에서 이집트의 장자들을 죽이시고, 이스라엘 장자는 살린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사람은 누구나 저주를 받고 심판을 받는 것이 당연합니다.(롬 3:23) 그런데, 롬 3:24에 뭐라고 말씀합니까?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다시말하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를 대신하여 죄값을 치러주심으로, 우리는 구별되어 의롭게 되어서, 영원한 심판에서 영원한 저주에서 해방되었다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심판의 날에 불신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떨어집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의 피로 구별되어,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가는 줄 믿습니다. 그런데, 이제 신분이 바뀌었다면 우리의 수준도 바뀌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 백성과 구별하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뭘 하길 기대하셔요? ‘예배’하길 원하십니다. 출애굽 하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예배’하는데 있습니다.(20절) 이제, 우리 삶의 목적은 구원받은 자 답게, 하나님을 예배하는 예배자로 사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 자리에서 예배하고 있다는 것이 세상과 구별되었다는 것이요. 그런데, 바로의 반응이 어떻습니까? 25,28절을 보면, 이 땅에서 예배드리라고 합니다. 너무 멀리는 가지 말라고 합니다. 이 말을 오늘로 바꾸면, 삶의 원리. 가치관은 여전히 세상적으로 가지고 있으면서, 주일 예배만 드리면 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어도 너무 깊이 빠지지는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예배가 어떤 예배여야 합니까?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 여호와를 예배하는 것입니다.(신명기 6:4-5) 하나님께서는 바르게 예배하는 자를 찾으십니다.(요 4:23-24) 모든 성도님들이, 우리 삶의 목적인 예배자로 삶의 제자리를 찾아, 하나님이 찾으시는 한 사람, 신실한 예배자가 다 되시길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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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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