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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시간 기자수첩 기사

  • 담임목사 공석중인 고신교회
    최근 부산지역 고신측 교회들이 유독 담임목사 공석 중인 곳이 많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부산서면교회, 범천교회, 삼일교회, 부평교회, 항도교회 등 중형교회들이 담임목사 공석으로 어려움 속에 있다. 오랜시간 담임목사가 공석 중인 서면교회와 삼일교회는 하루속히 담임목사 청빙을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쉽지 않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특히 서면교회는 아픔 속에서 분리되는 과정도 맞이했다. 부산노회 부평교회는 후임 청빙이 내정되어 곧 청빙이 가능하지만, 항도교회는 시무장로 모두를 징계해서 후임 청빙이 쉽지 않다는 말이 나올 정도. 가장 황당한 교회는 범천교회로, 3년 전 왔던 K 목사가 다시 사랑의교회로 되돌아 가는 바람에 현재 후임자 청빙에 열중이다. 범천교회 모 장로는 “(당회원간의 갈등 같은)특별한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우리(당회)가 알기로는 오정현 목사가 다시 불러서 간 것으로 알고 있다. 솔직히 황당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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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야의 소리
    2015-08-13
  •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다”
    일광제일교회는 건축 후 재정 어려움으로 인해 교회당을 일선 교회에 여러차례 매각을 시도했었다. 김무관 목사는 “전국에 있는 대형교회를 찾아다니며, 교회당 매각을 시도했었다. 하지만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다”고 말했다. 교회당은 경매에 들어갔고, 1차 유찰이 되었다. 2차까지 유찰이 되었을 경우, 지금까지 교회를 믿고 재정적으로 도움을 준 성도들의 빚은 갚기 힘든 상황이었다고 말했다. 또 이단 하나님의 교회측의 압박도 심했다고 한다. 2차 경매에 자신들이 나서면 분명 낙찰할 것이라고 말했다. 최저가 40억보다 5억을 더 제시하겠다고 달콤한 유혹을 제기했고, 결국 일광제일교회는 그 달콤한 유혹에 빠지고 말았다. 모든 채무를 갚고, 인근에 건물을 전세내 교회를 이어갈 수 있는 여력은 만들 수 있었기 때문이다. 김 목사는 “생각하기도 싫지만, 당시 상황에서는 정말 어떻게 해야 될지 몰랐다. 나는 교회를 사임했고, 앞으로 이런 오명은 평생 따라다닐 것”이라며 자신도 마음이 편하지 않다고 고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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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야의 소리
    2015-08-13
  • 고신대 미래를 위한 15인 대책위는 무대책이 대책인가?
    고신대 미래를 위한 15인 대책위원회(위원장 김철봉 총회장)는 부위원장 신상현, 김종인, 서기 신수인, 회계 양재한, 위원 김성복, 한진한, 배광수, 정수생, 전원호, 곽수관, 전우수, 장태휘, 임명곤, 최우수를 두고 조직하기 위해 한번 모이고 그 외 2번 모였을 뿐 현재까지 9월 총회에 보고 할 아무런 채택 보고서가 없다는 것이 여기에 참석한 분들의 이야기다. 그동안 고려총회와 합동하는데 시간과 모임을 할애했을 뿐 실제 중요한 총회 산하 고신대 미래를 위한 방향 설정과 대안은 없이 시간만 흘러 총회에 보고할 사항이 없다고 한다. 지금 중국 조선족 교회 목회자 신학 강의차 중국에 출국 중인 총회장의 소집이 쉽지 않을 듯하다. 총회에 가면 다시 1년간 더 연구하라는 것이 뻔 할 것이라는 말에 수긍이 간다. 무대책이 대책이라는 것을 내어 놓을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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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야의 소리
    2015-08-13
  • 교계기자생활 45년을 돌아본다
    △가난한 기자시절 1960년대부터 80년대까지 근 30년의 한국교계 풍속도는 황폐한 광야생활이었다. 대형교회는 전무하고 1000명가량 모이는 교회면 큰 교회였고 성공한 목회자로 인정받았던 시대였다. 그 당시 교계기자생활이란 하루살이로 살아가는 춥고 배고프고 고달픈 생활이었다. 지금의 기독교신문 전신인 교회연합신보에서 있었던 일을 한 토막 소개하면 故 강수악 사장과 편집국장인 장충협 장로는 회사 수금은 안 되고 구독료 가지곤 회사 운영도 못 할 지경이었는데 돈이 될 만한 광고를 게재하게 되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사장과 편집국장이 동시에 광고주에게 들이닥친 웃지 못 할 해프닝이 연출됐었다. 급료가 있으면 다행인 교계신문사의 형편이었다. 당시 기자들은 감사의 뜻으로 촌지 몇 푼 받으며 살아갔다. 기자들은 한결같이 가정을 제대로 이끌어 나가기 힘들어 부인들이 나가서 직장생활 하던지, 나처럼 처가생활로 붙어살면서 이 눈치 저 눈치 보며 살았었다. 쌀 서말만 있어도 처가살이는 안한다는 말이 있지만 도저히 제대로 돈을 가져가는 날이 없었으니 어찌 할 방도가 없었다. 첫째와 둘째 아이를 출산 할 때도 외상이 아니라 무료 병원 신세를 졌던 기억이 난다. 누구 한 사람 따뜻하게 손을 내미는 인사가 없었다. 하지만 기자정신 만큼만은 투철했다. 1976년 여름철이 지나가는 8월 하순경이었다. 부산에서 최초로 민간 아파트건설에 부산시 자금으로 저리로 빌려주는 제도가 막 통과됐을 때였다. 당시 한국 재계에서 반도목재 강석진 사장과 겨누는 상대가 바로 성창기업목재주식회사 정태성 장로였다. 그는 초량교회 시무장로였고 부산YMCA이사장으로 재직했다. 그가 Y이사장으로 재직할 때에 시공업자를 같은 경북 봉화 동향인에게 믿고 맡겼다. 아파트공사를 하기 위해 인근 Y땅을 매입하면서 그곳에 신우아파트를 짓게 됐다. 그런데 자금으로 부산시로부터 거액의 융자를 받는데 필요 서류를 마치 Y가 시공하는 양 Y직인을 이사회결정도 없이 사용해서 막대한 융자를 받아 냈다. 또 Y기금을 자신의 사돈 백흥섬유에 빌려줘 부도를 맞아 한 푼도 건지지 못했다.(뒷날 변재함) 그리고 통일교 성지순례 미끼에 놀아 난 부산 교계 중진 합동 측 목회자들이 중도에 이 사실을 알고 하와이 중간지점에서 돌아온 ‘성직자의 함정’ 등 가차 없이 보도한 용기 있는 기자 정신만큼은 가난해도 살아 있었다. △교회 권력(교권) 80년대 초 부산교계의 교회권력층이라면 부산시 시경 경목이었다. 그 당시 경목실장은 지프차를 타고 다닐 정도로 막강한 교회와 사회 권력을 지니고 있었다. 경목증명서 한 장이면 사소한 교통위반에는 무사 통과였을 정도였다. 그래서 그 놈의 ‘경목증’ 하나 얻는 게 하늘의 별 따기였고, 경목 하는 것에 목을 멜 정도로 각광을 받았다. 유신시대 교계도 유신지지 경목들이 줄을 서고 지지성명을 낼 정도였다. 여름철 경목 세미나가 있던 해운대 미진장호텔을 취재 갔던 기억이 난다. 취재를 마친 쉬는 시간에 시경 경목실장인 故 채종묵 목사가 같은 동료 목사에게 하는 말을 듣고 자존심이 상했던 일이 지금도 지워지지 않는다. “저 신 기자 식사 먹여 보내세요.” 교회권력에 사무쳐, 부산남교회를 다녔던 필자가 기장 측 중부교회로 옮겼을까? 보수에서 진보진영의 에큐메니칼로 신앙을 옮겼다. 그때부터 나도 모르게 이 땅의 민주화를 위해 뒤에서 조용히 돕고 살았던 중부교회 10년 생활. 그때 김광일 변호사를 알았고, 최성묵 목사를 힘닿는 대로 도왔고 Y운동과 와이즈멘 운동의 멤버가 되기도 했다. 지금은 통합 측 교단으로 돌아왔지만 육사27기를 수석 졸업한 잘 나가던 군인 동생 때문에 보안사 요원으로부터 중부교회에서 떠나라는 말을 들었다. 동생의 대령진급을 위해 교회를 옮긴 것이 계기가 되어 바로 은성교회 故 최상식 목사의 참신한 목회자상을 보았다. 길·흉사 때마다 이웃을 위해 방문하는 최 목사가 은퇴하고 떠나는 김해공항엔 이웃의 믿지 않는 사람들이 몰려 온 것을 보고 이 땅의 작은 예수로 존경받는 것을 알았다. 은퇴 후 서울에서 독립 교회 설교 목사로 있다가 서울대 출신 아들에게 맡기고 하늘나라로 갔다. △지방화 시대 신문 창간 이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할 수 있다. 지방화 시대를 열고 풀뿌리 민주주의가 꽃 피던 1995년 4월 부산기독교신문을 창간했다. 제호를 한국기독신문으로 바꿔 재도약할 수 있도록 교계와 여러 믿음의 인사들을 통하여 20년을 줄곧 달려올 수 있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한량없는 은혜요, 갚을 수 없는 은혜이다. 이제 서산에 황혼에 지는 노을과 같이 뉘엿뉘엿 세월이 71km로 달려가고 있다. 지금도 한국교계는 새로운 교권이 판을 치고 문제를 야기하고 세상이 걱정을 하는 세속적인 형편에 접어들고 있다. 하비콕스의 세속도시와 같이 세속 대형교회가 말썽을 부리고 있다. 하지만 이것도 하나님께서 주는 준엄한 채찍으로 새로운 제2의 부흥을 위한 도약이고 진통으로 간주하라는 경고 메시지다. 지난 45년은 나에겐 한없는 광야의 생활에서 온갖 비바람과 땡볕을 이겨내 한 송이 ‘인동초’에 불과했다. 언제까지 대기자 생활을 지탱 할런지는 오로지 한분이신 하나님만 알고 계신다. 따라서 나는 지난 45년 동안 지은 죄들과 잘못을 후회하면서 용서를 새벽재단에서 빌고 또 빈다. 하나님이 하늘나라로 소풍 삼아 데리고 가는 날이면 미운 정 고운 정 무딘 필봉도 끝날 날이 오겠지 라고 오늘도 어제처럼 살아가고 있다. 여름휴가를 얻어 경주 대명콘도에서 나의 달려 온 45년을 뒤돌아보는 한여름 밤에 이 글을 쓴다. 신이건 장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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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8-13
  • 故 곽삼찬 목사에 대한 이야기
    故 곽삼찬 목사(예장고신 증경총회장) 마산동광교회를 36년간 시무했던 故 곽삼찬 목사가 하늘나라로 간지 만 1주기가 된다. 유독 곽 목사에 대해서는 연민의 정을 느꼈던 필자로서 그가 남긴 아름다운 정신적 유산을 잊을 수가 없다. 곽삼찬 목사는 과거 경남노회의 정신적 지주였던 故 송상석 목사에게 고신교단의 크고 작은 사건 사고마다 문제를 풀어나가고 수습하는 방법을 많이 배웠다고 필자에게 얘기했던 기억이 난다. 교단에 큰 어려움을 가져 왔던 고신대복음병원 법인이 관선 체제에서 탈피 할 때에 곽 목사가 고신 총회장에 재직했다. 그 때의 일이다. 2014년 여름 고려학원을 팔자고 한 김민남 관선 이사장과 몇몇 교단 인사들이 총회장 동의를 얻기 위해 마산동광교회로 곽 목사를 찾아왔다. 곽 목사는 “내가 살아 숨 쉬고 있는 한 그렇게는 할 수 없다”며 한마디로 잘라 돌려보냈다. 그러고 나서 필자에게 전화를 걸어 “어때요? 잘 했지요?”라고 말하던 곽 목사는 고려학원에 법인 이사장으로 있었던 연유도 있었으나 매우 애착을 가진 것으로 판단된다. 곽 목사는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일이라면, 그 어떤 압력이 들어 와도 굽힐 줄 몰랐다. 그런 그의 배짱과 용기는 오랜 영성에서 묻어나온 신앙의 저력 때문일 것이다. 고려신학대학원을 천안으로 이전하고, 교지와 건물 짓는 것도 그의 끈기 있는 믿음의 행동이었다. ‘바르다, 옳다’ 하면 하나님께 기도하고는 저돌적으로 밀어 붙이는 행동목회가 그의 장점이며, 교단에 길이 남는 이정표가 되기도 했다. 곽 목사와는 반대로 고신의료원 시절 원장을 지낸 박영훈 장로는 정면에 대고 거절을 잘하지 못하는 분이었다. 그래서 고려신학대학원을 천안으로 옮기기 위해 대지 구입 계약금이 필요할 때마다 박 원장은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래서 곽 목사는 이사장으로서 명령을 구두로 내렸다. 행정처장인 김만규 장로에게 “계약금 얼마를 수표로 가져와라, 만일 안 가져 올 때는 인사상의 불이익을 당할 줄 알아라”고 명령했다. 그래서 김만규 장로가 박 원장의 허락을 받아 계약금을 가져와 지금의 고려신학대학원이 착공 할 수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시공업자가 동광교회로 곽 목사를 찾아왔다. 시공업자가 곽 목사에게 돈 뭉치를 건네자 “어디서 함부로 매수하려고 하냐”면서 부실공사를 사전에 막아야겠다고 문전에서 돌려보냈다. 이 일로 신대원이 부실 공사가 되지 않고 잘 지어진 것을 오늘에서야 확인할 수가 있었다. 곽 목사는 평소, 자녀들 중에 복음병원 행정처장으로 있는 곽춘호 피택장로를 마음 한구석에 담아두고 있었다. 어떻게든지 아들이 잘 되기를 기도했다. 또 괴정제일교회에서 신앙생활을 잘 하기를 늘 소망한다고 필자에게 자주 말했다. 그렇게 기도를 부탁하던 곽 목사를 보면서 자식에 대한 애착은 누구나 동일하다는 생각을 했다. 곽 처장은 2013년도까지 고신의대 교무과장으로 15년 넘게 있었다. 그러나 김종인 장로가 이사장으로 온 뒤 병원 행정처장으로 전격 발탁했다. 필자는 곽삼찬 목사에게 빚을 지고 있다. 2000년도 고신 총회석상에서 본지를 향해 신문 불매 운동을 결의 한 사실이 있다. 기독교보 교단지에서 본지를 향해 소위 황색 신문으로 얼마나 매도하던지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보도 했다. 그러나 곽 목사는 언론의 정도와 도의를 알았든지 총회 석상에서 “초교파 신문을 불매 운동하면 더 많이 읽히고 더 유명세를 만들어주게 된다. 그리고 언론과 싸우는 교단이 유치하게 비춰질 수 있으니 이를 해제하자”고 통 큰 발의를 하는 바람에 족쇄가 풀리게 된 사연이 있다. 옳고 그른 것을 분간 할 줄 아는 곽 목사는 동광교회가 둘로 갈라질 때도 중립을 지켰다. 어느 쪽에도 서지 않고, 어느 한편을 들지 않고 침묵으로 일관했다. 곽 목사는 “제 부덕의 소치”라며 오히려 자신을 겸손한 마음으로 다스려가는 것을 보고 감동했다. 곽 목사가 하늘나라로 간 지난 1년 전, 복음병원 영안실에는 수북이 쌓인 조화와 조문객들이 줄을 이었다. 정승이 죽으면 거지들도 오지 않는 옛말이 있지만, 그렇게 많은 조문객들을 보고 평소에 많이 베풀었던 곽 목사의 삶이 증명되는 듯 했다. 은퇴 이후에도 자주 통화하면서 교단의 이모저모를 이야기하며 필자에게 멘토 역할을 하곤 했다. 과거 역사를 알아야 현재와 미래를 열어가는 지혜를 배울 수 있다. 아름다운 신앙의 선배 이자 큰 어른으로 유산을 남긴 그의 흔적들이 이따금씩 되새겨 진다. 그럴 때 마다 故 곽삼찬 목사가 그립다. 좀 더 가까이 하지 못하고, 식사 한 끼라도 대접 못한 것이 후회된다. 고통과 근심걱정 없는 하늘나라 가서 만나겠지. 신이건 장로가 드리는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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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8-05
  • 영남신대 총장선출, 다음 달로 연기
    영남신학대학교(이사장 김수읍 목사)는 지난 20일(월)에 가진 이사회에서 제7대 총장 선출을 다음 달인 8월 14일로 연기하기로 했다. 당초 이날 이사회에서 새 총장을 선출할 것으로 알려졌지만, 총장인선위원회는 인선의 폭을 넓히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에 따라 연기하기로 결정했다. 이에 이사회는 후보로 등록했던 이춘길 교수, 최무열 교수, 최인기 교수에게 동의를 받아 총장초빙 재공고를 내기로 했다. 김수읍 이사장은 “동문회비상대책위와 이사들이 새 총장을 자유롭게 추천, 인사의 폭을 대폭 넓혀 일괄적으로 선출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영남신대 법인이사회 관계자는 “학내 문제가 아직 수습되지 않은 상황에서 분열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그렇게 결정 한 것 아니겠는가”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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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야의 소리
    2015-07-23
  • IYF가 남기고 간 것들
    구원파 박옥수가 설립한 IYF가 지난 7월5일부터 16일까지 한국교회에서 월드문화캠프를 개최했다. 이번 캠프에 참석한 숫자는 세계 50여 개국 4천 명이라고 IYF측에서 발표했다. 특히 첫 일주일은 부산에서 모든 행사를 진행했다. IYF측은 캠프뿐만아니라 지난 5년 동안 세계청소년부 장관들을 초청해 장관포럼을 개최하고, 세계 각국 총장들로 구성된 총장포럼도 개최하고 있다. 이런 이유로 김재경 의원이 국회에 이들을 초청하고 만찬을 했으며, 서병수 부산시장도 개막식 참석과 이들을 부산시청에 초청해 만찬을 나누기도 했다. 특히 박옥수는 “세계 여러곳을 다녔지만, 부산만큼 좋은 곳이 없다. 서 시장님이 IYF에 마음을 많이 써 주셔서 감사하다. 앞으로 부산에 머무를 시간이 많을 것 같다”고 화답했다. 예년에 비해 명사 강의 등이 비중이 줄어들었지만, 박옥수의 입지는 계속 늘어만 가고 있다. 특히 부산시장과 지역 학계, 재계, 정치권 인사들과 관계를 돈둑히 하는 등 부산에 높은 관심을 드러내고 있다. 교계의 대응이 요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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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야의 소리
    2015-07-23
  • 총회 임원회의 이상한 행보
    고려학원 이사장 강영안 장로에 대한 총회 재판이 지난 29일 부산 성산교회에서 열렸다. 총회 임원회가 스스로 결정해 총회재판국에 기소시킨 내용을 다시 해당노회로 환송하라는 것은 오히려 총회 임원회가 ‘직무유기’하는 느낌이 들고 있다. 이미 총회재판이 한창 진행되고 있는 사안을 놓고 서류 반납 요청은 앞뒤가 안 맞다는 지적이다. 지난 4월 총회운영위에서 총회 임원회의 분위기는 강 이사장 편을 들고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총회장의 설교 내용에서부터 사회보는 것까지.... 이사장에 비판적인 인사의 발언권을 제지하면서, 참석 대상자도 아닌 학교법인 감사에게 발언권까지 주면서 강 이사장 ‘이사장 추인’ 통과에 열을 올렸다. 과정들을 살펴보면 총회 임원회가 오해를 받을 수 있는 소지가 충분하다. 여기에 지난 21일 모인 임원회에서는 법인 이사 4인이 행정소송한 건에 대해서도 ‘일단 사실여부를 확인 한 다음에 총회재판국에 보낼 지 판단한다’고 결의한 후 유보한 상태다. 총회 임원회의 노골적인 이사장 감싸기가 이제는 도를 넘고 있다는 지적이다. 학교법인 문제를 좀 더 신중하게 다루자는 취지는 이해하지만, 지금까지 총회 임원회가 걸어온 길을 살펴보면 ‘이사장 감싸기’라는 오해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도 알아야 한다. ‘과한것은 부족한 것만 못하다’는 사실을 왜 모르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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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야의 소리
    2015-07-23
  • 신원그룹 회장 박성철 장로 이야기
    △노사분규 없는 신원그룹 평소 신원그룹에 대해 잘 몰랐던 사람이 이 회사를 방문하면 어리둥절할 것이다. 엘리베이터를 타면 성가곡이 흘러나오고, 벽면에는 ‘월요예배순서’가 붙어 있다. 사옥에는 예배실과 기도실, 신학연구소와 성가단의 간판까지 볼 수 있다. 교회인지, 회사인지 고개가 갸우뚱해지지 않을 수 없다. 국내 굴지의 의류업체인 (주)신원은 자타공인 믿음의 기업이다. 경영이념의 첫 번째가 믿음 중심이고 다음이 고객중심, 미래지향이다. 매주 월요일 아침이면 전 세계의 신원 직원들이 예배를 드린다. 회사 입구에는 ‘주일은 주님과 함께’라는 문구가 크게 붙어 있다. 이유를 막론하고 주일에 쉬는 것은 박성철 회장(서울 신길성결교회 원로장로)이 창업부터 지켜온 그의 철칙이다. 박 회장은 신앙으로 운영되는 기업을 만들겠다는 꿈을 품고 신원통상을 설립했다. 섬유수출과 의류사업으로 승승장구했던 회사는 금융, 레저산업까지 진출하며 국내 16개, 해외 8개 계열사를 둔 대기업으로 성장했다. 그러나 지난 97년말 외환위기 때 빚을 제때 갚지 못하고 경영권이 채권단으로 넘어가고, 워크아웃(기업개선작업)에 들어갔다. 의류와 관련 없는 사업은 모두 접었다. 다행히 해직된 직원들 대부분 다른 업체에 재취업을 했다. 신원 직원이면 믿을 수 있다는 평판이 큰 힘이 됐다. 박성철 회장은 신원이 워크아웃에 들어간 책임을 지고 보유 지분 전량을 회사에 무상증여, 월급쟁이 회장이 됐다. 박 회장은 방만했던 경영을 스스로 반성하고 재점검하며, 회사 회생을 위해 1000일 기도에 들어갔다. 직원들은 보너스, 영업비를 스스로 반납했고, 주일을 지키기 위해 평소에 더 열심히 일해야 한다며 야근도 자처했다. 박 회장은 지방으로 내려가 직원들을 설득했다. “주일은 무슨 일이 있어도 쉬어야 합니다”면서 주일성수는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했다. 놀랍게도 이들 영업점들이 주일에 문을 닫으면서 매출과 영업이익이 오히려 15%나 늘었다. 신원은 해고된 직원들에게 명절이면 지갑이나 벨트 등 선물을 보내기도 했는데 ‘저희는 아직도 당신을 기억하고 있습니다’는 뜻을 이와 같이 성결교 증경총회장 이재완 목사가 위와 같이 담아 글을 올렸다. 전국CBMC 중앙회장을 역임하기도 한 박성철 장로는 지난 4월 국세청으로부터 조세포탈 협의로 고발당했다. 지난 7월 9일 사기 회생 및 조세포탈 등의 혐의로 구속됐다. △‘썩은 사과’ 신원 박성철의 추락(이 글은 동아일보 권순활 논설위원이 지난 7월 15일자에 실은 칼럼 내용이다.) 미국 컬럼비아대 조지프 스티글리츠 교수는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 ‘이익의 사유화, 손실의 사회화’란 표현을 썼다. 임직원들에게 도를 넘은 연봉과 상여금을 뿌리던 미국 금융회사들이 경영이 어려워지자 정부에 손을 내밀어 공적자금을 지원받은 행태를 비판했다. 탈세 및 사기 혐의 등으로 그제 구속된 박성철 신원그룹 회장을 보면서 경제학자의 질타를 눈여겨 봐야한다. 신원그룹은 1998년 1조 원의 차입금을 안고 워크아웃(기업구조개선작업)을 신청해 대상기업으로 선정됐다. 외환위기 충격으로 수많은 기업이 사라지고 직장인들이 줄줄이 해고된 ‘고통의 시절’에 신원은 공적자금 투입에 따른 부채 상환 유예와 탕감, 추가 융자를 받았다. 특혜에 가까운 혜택이었다. 박 회장은 대주주 지분은 포기했지만 퇴진 약속을 뒤집고 회장 자리를 지켰다. 그는 워크아웃 기간에 재산이 전혀 없는 ‘가난한 전문 경영인’의 이미지를 풍기려고 애썼다. 하지만 2002년 국회 공적자금 국정조사특위가 공개한 자료에서 전혀 다른 모습이 드러난다. 박 회장 일가는 1998년 이후 11번이나 해외에 나가 귀금속 쇼핑 등에 2711만 원을 썼다. 국내에서도 신용카드로 2억8600만 원을 사용했다. 검찰과 국세청은 워크아웃을 악용해 회사 빚을 떠넘겼던 그가 당시 300억 원의 재산을 숨긴 사실을 최근 밝혀냈다. 박 회장은 가족 명의로 소유한 광고대행사를 통해 신원 주식을 사들여 경영권을 되찾으면서 증여세 등 30억 원대의 세금을 포탈했다. 기업 부실은 국민의 세금으로 해결한 뒤 ‘말끔한 회사’의 대주주로 당당하게 복귀한 셈이다. 2011년에는 또다시 개인 재산이 한 푼도 없는 것처럼 법원을 속이면서 개인 회생을 신청해 250억 원의 개인 채무를 면제받았다. 100억 원대의 회삿돈을 횡령한 혐의도 수사 대상에 올라 있다. 아무리 생각해도 박 회장은 ‘썩어도 한참 썩은 사과’다. 틈만 나면 나랏돈을 빼먹으면서 자기 주머니는 몰래 챙긴 행태는 죄질이 특히 나쁜 악성 경제 범죄다. 이런 양심불량 기업인 때문에 ‘기업은 망해도 기업주는 떵떵거리며 산다’는 속설이 여전히 힘을 얻고 있다. 박 회장은 10년 넘게 법의 빈틈을 악용해 이익은 사유화하면서 손실은 국가와 국민에게 전가했다가 결국 추락했다. △박성철 장로의 ‘야누스의 얼굴’ 긍정과 부정을 엮은 두 편의 글을 읽고 느낀 것은 부끄러움뿐이다. 누가 누구를 정죄하랴. 하지만, 호남출신이자 자수성가한 대표적인 인물인 박성철 장로는 한국교회에 엄청난 충격을 가져다 줬다. 대형사고가 터졌다고 하면 그 중심에 크리스천이 있다는 사실에 한국교회는 휘청거리며 위기를 맞고 있다. 야누스의 두 얼굴을 본 것 같은 충격이다. 신이건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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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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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4월 14일 제180회 통합 부산노회(노회장 이종윤 목사)에서 노회회관 건립 준비위에서 발의한 회관건립은 현 좌천동 소재 부산노회 회관 자리에 조사 용역을 허락하기로 결의했다. 그런데 이 논의 과정에서 위원장이 “회관 건립 기금 19억원을 출자한 교회가 나눠 갖지 않으면 위원장직을 사임하겠다”는 내용이 지난 <광야의 소리>란에 보도된 바 있지만 확인결과 사실과 달랐다. 위원장이 한 말이 아니라 지난해 가을노회 때 북부시찰 J 목사가 한 말을 마치 위원장이 한 말인것처럼 한데 대해 부산노회 임원회가 정정을 요구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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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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