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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정칼럼] 새해, 아내와 함께한 일상
    # 아내가 말한다. “여보, 나 TV에서 서서히 벗어나기로 했어” “오랜만에 철든 소리 하네” “한꺼번에는 어렵고 서서히 끊어야겠어. 중독이야!” 그런 아내를 위해 기도한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여! 아내가 TV를 들여다본 시간보다 나와 가족들의 얼굴을 쳐다본 시간이 더 많음을 주목하게 해 주소서. 아내가 <지붕 뚫고 하이 킥>을 보다가 남편을 발로 찬 것보다 잠자리에서 나를 발로 걷어찬 것이 많음을 기억하며 진심으로 그녀를 용서하게 하소서. 장동건에게 눈길을 주고 ‘헤헤’거린 것 보다 잠자리에서 나를 향해 몸을 눕히고 입을 더 크게 벌려 침까지 흘렸던 것을 기억하며 아내를 긍휼히 여길 마음을 주소서. 아멘” 나의 이런 기도는 순전히 키에르케고르가 드렸던 기도를 따라 기도하다 얻은 영감에 기초하고 있음을 자백한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여! 우리가 지은 죄가 아닌, 우리 자신을 붙들어 주소서. 그리하여 주님에 대한 생각이 우리 영혼을 깨울 때 우리가 어떤 죄를 저질렀는지가 아니라 주님께서 어떤 죄를 용서해주셨는지 깨닫게 하소서. 우리가 어떻게 길을 잃고 헤맸는지가 아니라 주님께서 어떻게 우리를 구원해주셨는지 깨닫게 하소서!” 주여. 남의 기도를 빌려 패러디한 죄를 용서하소서. #. 아내가 묻는다. “여보, 새해의 화두는 뭐예요?” 온통 연구소의 프로젝트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던 내가 대뜸 답했다. “자연장이지 뭐” “그런 거 말고 왜…‘소통’이니 ‘선진화’니 뭐 그런 거 말이예요” “시사적인 것은 왜 물어?” “왜 알면 안돼요?” (그렇다. 알아야 한다.) “알아볼 것 없이 우리가 만들지 뭐, ‘감사’는 어때? 시인(詩人) 김현승님은 이렇게 노래했다. <감사하는 마음> 그것은 곧 아는 마음이다. 내가 누구인지를 그리고 주인이 누구인지를 깊이 아는 마음이다. #. “여보, 방송하고 올게” “응 잘 갔다 와요” 이른 아침부터 설쳐대는 남편에 대한 배웅은 침대에서 약식으로 끝난다. 이들 녀석은 소파에 누워 잠들어 있다. 아침 방송을 꼬박꼬박 챙겨 들어주는 이는 어머니 밖에 없다. 그리고 꼭 소감을 말씀해 주신다. “우리 아들 방송, 잘 들었다. 목소리도 좋고, 재미있더라” (그게 어째 내 방송인가? SBS 회장꺼지.) 나이 들어감면서 ‘덤덤’해지는 아내와 자식들과는 사뭇 다르다. 아내는 무슨 방송인지도 모른다. ‘또 방송’인가 보다 하고 끝이다. 집으로 돌아와서 늦잠을 즐긴 아내와 아들을 깨워 밥을 사 먹이러 나간다. (아침 밥상을 건너뛰는 것을 그렇게 행복해 하니…)최고의 서비스다. 그런데도 감동이 없다. ‘아침 잘 먹었네’ 의례적인 인사일 뿐 아들 녀석은 말한다. ‘이 집 잘하네요’ 갑자기 어머니에게 달려가고 싶다. 어머니는 그러실 거다. “돈 드는데 어딜 가냐? 김치하고 집에서 밥먹자” 그래, 서운해 말자. 그래서 ‘어머니’다. 난 소원한다. 내가 다시 태어난다면 꼭 여자로 태어나 내 어머니의 어머니가 한 번 되게 해 달라고, 그러면 그 빚을 갚을 수 있을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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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01-05
  • [서임중 칼럼] 2017년의 촛불을 켠다
    우리는 2017년 한해를 시작한다. 멈추어 돌아보면 지난해처럼 카오스현상이 있었던가를 생각해 본다. 그래서 언론은 건국이래 어쩌면 가장 암울한 한해라고 표현했는지도 모른다. 한 사람의 가정주부로 인한 국정농단은 대한민국의 기초부터 뒤흔든 혼돈의 역사를 초래했다. 2016년을 마지막 보내는 날 저녁에는 광화문거리에 10회째 촛불집회가 열렸고, 전국에서 ‘박근혜 대통령 탄핵과 하야’를 외치는 촛불집회의 기조가 ‘송박영신(送朴迎新), 즉 박대통령을 보내고 새해를 맞이하자’로 했는데 이 얼마나 아픈 외침인가? 이에 맞서서 대항하는 보수단체들의 촛불집회 기조는 ‘송화영태'(送火迎太), 즉 촛불을 보내버리고 태극기를 맞이하자는 외침이었다. 모두가 더 나은 대한민국을 지향하는 몸부림이지만 극과 극의 외침의 내용을 지켜보면서 새삼 촛불의 의미를 되새겨 보았다. 광화문의 촛불이 물결 되는 것을 보면서 나는 촛불의 본래 의미를 느끼지 못하고 사람들의 마음이 서릿발처럼 날카롭다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언론은 분노와 슬픔의 표출이라고 보도했나 싶었다. 올해의 대한민국 송구영신은 그렇게 아픔으로 보내고 맞이했다. 독일이 낳은 세기적 시인 괴테는 “첫 단추를 잘못 끼우면 마지막 단추를 낄 구멍이 없다”는 명언을 남겼다. 이 말의 의미는 첫째는 시작이 중요하다는 것이며, 둘째는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다는 것이다. 인생 만사 시작처럼 중요한 것은 없다. 올바른 계획을 세우고 첫 발자국부터 잘 옮길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받은 365일의 축복된 날을 어떻게 기록할 것인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사람들에게 축복을 나누면서 행복한 한 해를 살까? 이 질문에 성경적인 대답은 아주 간단하다. 창조적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1:1)는 말씀은 창조주 하나님의 전부가 담겨 있는 하나님 마음의 표현이다. 그것은 ‘창조’라는 말에는 아주 중요한 메시지가 있기 때문이다. 히브리어로 창조는 ‘바라’다. 이 단어는 문자적으로는 무에서 유의 개념이지만 구체적 개념으로는 ‘하나님이 존재케 하셨다, 하나님이 번성케 하셨다, 하나님이 정돈케 하셨다’는 것이다. 이 하나님의 창조의 섭리와 이치를 깨닫게 될 때 비로소 사람답게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바울이 이것을 깨달았을 때 삶의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고 고백할 수 있었고 욥이 이것을 깨달았을 때 주신분도 거두시는 분도 하나님이라고 고백하면서 모든 것을 감사함으로 수용할 수 있었다. ‘향나무는 자기 몸을 도끼로 찍을 때 향을 발한다.’ ‘양초는 자기 몸을 녹일 때 주위를 밝힌다.’ 이는 자기희생을 말할 때 자주 상용하는 말이다. 촛불은 전통적으로 의례와 종교적 의식에서 사용되면서 세속을 초월한 숭고한 불빛이라는 상징성을 갖고 있다. 프랑스 철학자인 ‘가스통 바슐라르’(Gaston Bachelard)의 촛불의 미학을 통해 촛불은 시적 정서와 몽상, 내면적인 명상적 아름다움을 불러일으키는 이미지가 되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촛불은 열망을 대변하는 불꽃이 되면서 사회적 통합과 정의를 향한 외침을 대변하는 의미의 기능을 하게 되었다. 촛불이 주는 메시지는 스스로의 몸을 태우면서 주위를 밝히는 것, 즉 누군가 무엇인가의 시중드는 것을 필요로 하지 않는 지고한 자기희생이다. 촛불은 한자로 ‘촉화(燭火)'라고 하며 영어로는 candle 혹은 candlelight 라고 한다. 아름다운 촛불을 ‘난촉(蘭燭)'이라고 하고, 촛불의 그림자를 ‘촉영(燭影)' 이라고 한다. 결혼식때 켜는 촛불을 ‘화촉(華燭)'이라 하여 결혼을 ‘화촉을 밝힌다'라고도 한다. 우리의 전통적인 제사를 지낼 때도 촛불을 켜 놓았고, 법당에도 항상 촛불이 꺼지지 않을 뿐 아니라 해외여행을 할 때 성당에 들어서면 어김없이 촛불이 켜져 있음을 볼 수 있다. 생일을 축하할 때도, 연회장에서도, 결혼식장에서도 어김없이 켜는 촛불은 중세 독일에서는 ‘생명의 등불’을 의미했다. 광화문 거리에서 촛불집회를 바라보면서 나는 촛불의 의미를 다시 생각했다. 대통령의 즉각 하야와 탄핵을 외치는 소리와, 탄핵은 정치 쿠데타라고 외치는, 소위 보수와 진보의 외치는 소리를 들으면서 남과 북의 찢겨진 아픔보다 더 아픈 통증을 느꼈다. 모두가 더 나은 대한민국을 지향하는 몸부림이지만 극과 극의 외침의 내용을 지켜보면서 거기에 합류하지 못하고 길거리에서 그 양측 장면을 보면서 괜스레 양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이 얼음처럼 차갑게 느껴졌다. 정녕 촛불집회에 촛불의 의미를 알고 촛불을 든 사람은 얼마나 될까? 촛불의 주체처럼 떳떳하게 살 수 있을까? 촛불의 대상처럼 부패하게 살지 않을 각오가 되어 있는가? 그러기에 2017년은 분노와 슬픔의 촛불을 켜는 것이 아니라 평화와 사랑의 촛불을 켜고 우리의 다음세대에 번영과 평화, 생명과 감동을 경험하게 하는 한해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간절한 소망이 입술의 기도가 되었다. 그것은 자아성찰(自我省察)을 통해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설 줄 아는 지혜로, 네가 있기에 내가 있다는 보편적 공존의 의미를 깨달아, 내가 먼저 내려놓고 비우고 낮아지고 섬길 때 그 시작이 되는 것이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이며, Good News 곧 복음이며, 진정한 평화이며 생명이며 교회의 본질이다. 우리 모두 그렇게 2017년의 촛불을 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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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01-05
  • [성서연구] 보고 들음을 넘어서(이사야 11장 1-5절)
    한 잡지에서 읽은 글입니다. 한 사람이 버스에 타서 뒷자리에 앉았습니다. 앉아서 보니 앞쪽에 머리칼이 어깨를 덮은 여인이 앉아 있는 게 보였습니다. 머릿결도 아름답고 자태가 너무 고왔습니다. 드물 게 보는 미녀로 여겨졌습니다. 그런데 잠시 후 버스가 정류장에 멈춰 서고 여인이 내리기 위해 몸을 돌렸을 때, 그는 깜짝 놀랐습니다. 알고 보니 그녀는 거의 앞을 보지 못하는 시각장애인이었습니다. 지팡이에 의지하여 더듬거리며 버스에서 내리는 것이었습니다. 뒷모습의 자태가 그토록 곱던 여인이 그렇게 힘든 장애를 가지고 있는 사람일 줄 누가 짐작을 했겠습니까? 이처럼 우리가 보는 것은 정확하지 않습니다. 얇은 종이 한 장만 눈앞을 가려도 종이 너머를 볼 수 없습니다. 아주 가까이 있어도, 아주 멀리 있어도 볼 수 없는 게 우리 눈입니다. 너무 작아도, 지구처럼 너무 커도 볼 수 없습니다. 그게 우리 한계입니다. 귀로 듣는 것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아주 작아도 못 듣습니다. 너무 커도 못 듣습니다. 우리는 깊은 산골짝에서 쉬면서 <역시 시골이 좋아. 쥐 죽은 듯 고요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조용하다고 말하는 그 순간 풀벌레들이 우리가 듣지 못하는 작은 소리를 내고 있고, 지구는 어마어마한 굉음을 내면서 공전과 자전을 하는 중입니다. 너무 작거나 너무 커서 듣지 못할 뿐입니다. 저도 새벽기도 시간에 앞에 앉아 있노라면 목사님들이 말씀하는 <찬송가 ***장 부르겠습니다!>라는 말이 정확히 들리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찾아보면 가운데 숫자가 틀리거나 끝 숫자가 다릅니다. 구석 자리 특유의 공명 때문이겠지요. 이처럼 분명히 자신의 귀로 들었지만 다 정확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보는 것과 듣는 것에 근거하여 단정적으로 말하지 말아야 합니다. 본문은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주신 메시아 예언들 중 하나입니다. 메시아께서 이새의 줄기에서 나실 것이라는 예고와 함께 메시아께서 하실 일들을 말씀합니다. 물론 메시아는 예수님을 가리키고, 이 말씀을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어떻게 하실지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3절 중간에 보면 놀라운 말씀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의 눈에 보이는 대로 심판하지 아니하며 그의 귀에 들리는 대로 판단하지 아니하며........>라는 부분입니다. 얼마나 멋집니까? 예수님께서는 보이는 대로 심판하지 않고, 들리는 대로 판단하지 않으신다고 했습니다. 그 분은 보이지 않는 뒷면을 보시는 분이시며, 들리지 않는 침묵의 소리를 듣는 분입니다. 그러기에 그 분은 눈앞에 보이는 대중의 숫자나 그들이 외쳐대는 소음에 휩쓸리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보이지도 않고 들리지도 않지만, 진실을 따라 판단하셨습니다. 요즘 우리나라는 정말 시끄럽습니다. 온갖 말들이 난무합니다. 정치인은 정치인대로, 언론은 언론대로, 국민들은 국민들대로 많은 말들을 쏟아놓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말들 대부분은 흙탕물처럼 여겨지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그 중 진실은 얼마나 될까요? 이럴 때 우리는 들리는 말대로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보이는 것만으로 판단하면 안 됩니다. 언론이 보도하고 사람들이 말한다고 해서 다 들으면 안 됩니다. 보는 것을 다 믿어서는 안 됩니다. 보이는 것과 들리는 것의 이면을 보는 눈과 듣는 귀를 가져야 합니다. 2017년에는 모든 것을 좀 더 신중하고 조용하게 천천히 판단하길 원합니다. 부디 진실을 보는 눈과 침묵 안의 외침을 듣는 귀를 가지길 원합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다른 이들을 억울하게 하지 않을 것이며, 진리의 바른 길을 걷게 될 것입니다. 주님, 저희 마음의 눈과 귀를 열어 진실을 보고 듣게 하옵소서! 2017년을 바르게 살고자 하는 그리스도인의 기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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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01-05
  • [함께 생각해 봅시다] 나이 90세가 되고보니
    사람의 나이는 하나의 숫자에 불과해 노년이 되어도 정신연령은 늘 젊어야 오늘은 새해 1월 1일이다. 내 나이 앞에 늘 붙어있던 ‘8’자가 어디로 날아가 버리고 난데없이 ‘8’자 대신 ‘9’자가 앞에 붙어 있다. 벌써 내 나이가 90이 된 것이다. 가는 세월을 누가 붙들겠으며 오는 세월을 누가 막겠는가. 우탁의 시조가 생각난다. ‘한 손에 가시들고 또 한 손에 막대 잡고 늙는 길 가시로 막고 오는 백발 막대로 치려터니 백발이 제 먼저 알고 지름길로 오더라’ 필자가 전날 나이 70을 앞두고 ‘나이가 80이면 어떤가’란 제목으로 본지에 글을 게재했었는데 어느새 80이 아니라 90이 되었다. 사람들이 나에게 묻기를 ‘곧 90이 되는데 소감이 어떠냐”고 했다. 나의 소감은 다른 것이 아니고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것이었다. 솔직히 필자는 아직 내가 늙었다는 생각을 갖지 않는다. 내가 어디든 강사로 가면 어떤 목사는 나를 교회 앞에 소개하면서 “오늘은 은퇴하신 연로한 목사님이 강사로 오셨습니다. 이 연로한 목사님이 직접 운전까지 하시면서..” 이렇게 잠시 소개하면서 ‘연로’란 말을 두번 세번한다. 나는 의자에 앉아 속으로 ‘연로 좋아하시네. 연로하면 어떻단 말이요. 내가 당신이 하는 인도를 못하냐, 설교를 못하냐’하며 혼자 빙그레 웃는다. 그리스도인은 노년이 될지라도 정신연령은 늘 젊어야 한다. 시편 110편을 보라. 그리스도인의 병칭이 청년이다. 그럼에도 어떤 이들은 왜 그런지 이해가 안된다. 은퇴하고나면 마치 모든 것이 끝나버린 것처럼 의욕을 상실하고 하루하루를 무의미하게 살아가고 있다. 은퇴가 삶의 마침표인가. 새로운 삶의 시작이다. 영어로 은퇴가 ‘Retire’아닌가. 새로 다시 달리기위해 타이어를 교체하는 것이 은퇴이다. 그래서 필자도 은퇴하는 그 해 운전교육을 받아 면허를 획득했고 컴퓨터를 구입하여 배우기 시작했고 취미생활로 사진을 촬영하기 시작했다. 현역으로 시무할 때엔 한 곳에 매여 하고 싶어도 못하는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는데 이젠 자유로이 뭐든 할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은가. 내가 뭘 하든 간섭하는 이도 없고 흉을 보는 이도 없다. 도리어 사람들이 나를 보고 박수를 보내며 격려해준다. 나는 틈이 나는대로 카메라 가방을 짊어지고 들로, 산으로, 바닷가로 때로는 다른 작가들과 함께 외국에도 간다. 은퇴하기 전엔 어림도 없는 일 아닌가. 자유롭게 다니면서 어떤 때는 속으로 ‘이게 은퇴가 아니라 금퇴다’ 이렇게 생각하며 혼자 웃기도 한다. 은퇴는 분명히 새로운 삶의 시작이다. 결코 모든 것의 끝이 아니다. 독자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한지요. 함께 생각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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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01-05
  • [시사칼럼] 작은 마을의 기적
    1973년 에른스트 슈마허(E. F. Schumacher, 1911-1978)는 『작은 것이 아름답다(Small is Beautiful)』라는 책에서 세계화와 경쟁력을 부르짖으며 줄곧 ‘큰 것이 좋다’를 외쳐왔던 세태를 비판합니다. 끊임없이 성장해야만 한다는 주장과 오직 수치에 의해서만 정당화되는 성공은 결국 환경에 대한 무지와 함께 인간 스스로에게도 좌절과 불안과 우울증과 소외만 안겼을 뿐이라는 그의 지적은 21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더욱 깊은 반향을 일으킵니다. 기원전 4년, 유대의 통치자 헤롯 왕은 관료들에게 물었습니다. “유대의 왕이 나신다니 그곳이 어디냐?” 그는 어쩌면 다른 대답을 기대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모두들 이구동성으로 말했습니다. “베들레헴 에브라다입니다.” 다른 여지를 고려할 수 없을 정도로 뚜렷하고 단호하게 성경이 예언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실 베들레헴은 라헬의 묘소가 있고 다윗의 고향이라는 점에서 유서 깊은 동네이기는 하지만 10리 인근의 예루살렘과 비교하면 작은 마을에 불과합니다. 하기는 베들레헴을 그리스도의 탄생지로 예언한 미가서 자체도 작은 선지서에 불과합니다. 이사야나 예레미야와 같이 가문 좋고 학식과 식견이 뛰어나고 사람들에게도 널리 알려졌던 예언자가 아니라 무명소졸이나 다름없는 미가를 통해 메시아 탄생지가 계시되었다는 사실도 생각해 보면 참 기이하기 짝이 없는 노릇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성탄뿐만 아니라 성경 전체를 아우르는 중요한 주제 중 하나입니다. 소위 <마리아 노래 신학(magnificat theory)>에 따르면 하나님은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시며 비천한 자를 높이십니다”(눅 1:52). 이러한 관점으로 성경을 보면 예수님을 포함해서 믿음의 조상들은 대개 애를 못 낳은 여인들에게서 우여곡절 끝에 태어났고(사라, 라헬, 한나, 엘리사벳), 장자보다는 차자나 막내가 선택된 경우가 많고(아벨, 야곱, 요셉, 에브라임, 모세, 다윗), 이스라엘을 선민으로 택하셨으며(이집트, 앗시리아, 바벨론, 페르시아, 그리스, 로마와 같은 강대국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계보에 오른 다섯 여인을 보더라도 참으로 기구한 인생을 살았던 여인들이었을 뿐만 아니라(다말, 라합, 룻, 밧세바, 마리아), 구원의 도구 십자가는 인류 최악의 형벌이었고 이를 통해 결국 세상에서 작은 자와 고난당하고 핍박 받던 자들이 천국에서 높임을 받게 된다는 이야기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져 있음을 알게 됩니다(계 7장). 베들레헴 에브라다에서 세상을 구원할 구주(救主)가 나셨습니다. 작은 마을에서 일어난 기적입니다. 그러나 지금도 베들레헴 작은 마을의 기적은 날마다 계속되어야 합니다. 성탄절 때만 노래와 연극과 축제를 통해서만 되살아나는 추억의 이야기가 되어서는 아니 된다는 뜻입니다. 오늘날의 베들레헴 에브라다는 교회입니다. 교회를 만유의 주인이신 그리스도께서 지배하고 다스리실 때, 교회를 통해 그리스도가 다시 드러나십니다. 크리스마스마저도 세상에 뺏기고 교회도 언제부터인가 세속에 물들고 있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통치하셔야 합니다. 교회에서 예수만 나와야 합니다. 또한 오늘날의 베들레헴 에브라다는 성도입니다. 예수께서 내 삶의 주인으로 나를 다스리셔야 합니다. 내 말과 행동을 통해 오직 예수만 드러나야 합니다. 내 생활의 태도와 습관을 통해 예수만 나와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현대판 베들레헴 에브라다 이야기입니다. 이것이 바로 21세기 작은 마을의 기적입니다. 올 성탄절에는 그리고 다가오는 새해에는 이러한 작은 마을의 기적이 교회마다 가정마다 성도들 각자의 삶을 통해서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시공을 초월해서 인류를 다스리시는 절대자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다는 사실을 크리스마스는 물론이요 언제 어디서나 만민이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그런 날이 속히 오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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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12-22
  • [목회자칼럼] 순종에 대한 묵상 (2)
    주후 2016년 성탄절을 맞이하면서 성탄의 주인공이신 예수님을 성경을 통해 깊이 주목하면서 묵상하고 싶다. 인류 역사에서 가장 장엄하고 충격적이고 감동적인 사건이 무엇일까? 단연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을 찾아오신 것이다. 이 사건 말고 다른 사건이 있다고 자신 있게 주장할 수 있다면 얼마든지 제안해주기를 요청한다. 올해는 2016년이다. 이 연호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2016년 전 저 이스라엘 땅 베들레헴 한 여관의 마굿관에서 탄생하신 때를 기준한 숫자이다. 이 연호를 지구상 75억 인류가 자연스럽게 사용하고 있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사건이 인류 역사 최대의 감동적인 사건임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온 인류에게 <사랑과 생명과 우정>을 보급하고 증진시키는 최고 아름다운 국제기구가 「만국적십자사=국제 적십자 본부」이다. 그리고 이 국제기구의 상징모양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이다. 그러하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하여 예루살렘 골고다(해골) 언덕에서 십자가에 높이 매달려 붉은 피를 흘리면서 죽으셨는데 이 ‘십자가 죽음’ 또한 인류 역사에서 위대한 사랑과 희생을 웅변해주는 최대의 사건이기 때문에 인류의 사랑과 생명존중을 목적으로 하는 적십자사(Red Cross)가 그 문양을 <십자가十字架>로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73억 인류 중 20억 인구가 내면의 진실성에는 다소 차이가 있겠으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엄숙하게 부르고 있다. 성경은 가장 오랜 세월동안 가장 많이 출간될 뿐 아니라 가장 많이 읽히고 있는 <영원한 인류의 책>이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점, 우리가 깊이 감동하면서 들여다 보아야 할 점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인들이 살고 있는 ‘이 지구촌 이 세상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이다(요 1:14, 딤전 1:15, 히 5:7~10). 필자는 이 사실에서 내 생애 최대의 전율을 느낀다. 왜?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하나님과 동등 되시며 하나님이신> 그 분께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탈도 많고 문제도 많은 이 지구촌을 찾아오셨다니! 그것도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 그것도 어린 태아와 아기로, 그것도 베들레헴의 어느 여관집에서 방 하나 구할 수 없어서 그 집 마굿간에서 태어나시고 가축이 먹이를 먹는 <구유>에 누이시다니! 우리 인류 역사에서 이 같이 자신을 끝없이 낮추고 또 낮춘 <눈물겹도록 아름답고 감동적인 이야기>를 들어 본적이 있는가? 이 분 예수 그리스도는 소년 시절에는 <순종하여> 받드셨고(눅 2:51), 청년기부터는 우리가 밟고 겪는 <고달픈 인생현장>을 그대로 밟아가셨다. 이 희귀한 사실을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히 4:15) 올해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탄을 맞이한다. 2016회째의 예수 그리스도의 성탄(Holy Birth)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의 영광스러운 보좌를 떠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고달프고 문제 많은 지구촌으로 내려오시고 찾아주시는 탄생(강림)의 역사와 사건에서 우리가 반드시 주목하고 깊이 깨달아야 할 한 가지 단어가 있다. 무엇일까? 그것은 ‘순종’이다. 그 분의 <순종>이 그 분의 탄생과 고난과 그리고 우리의 구원을 가능하게 하였다. 우리 모두 이번 2016 메시아 성탄에는 <순종>이라는 단어를 오래, 깊이 묵상하면서 은혜를 받자. 그 분의 ‘순종’이 가슴 저미게 다가오는 몇 관련 성구를 소개하고 싶다. 함께 깊이 묵상하면서 음미해보자. ①이사야 53:2~3 ②요 1:14 ③딤전 1:15a ④눅 2:6,7,51 ⑤마 8:20 ⑥마 20:28 ⑦마 26:39,42 ⑧히 5:7 ⑨ 히 5:8~9 필자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고마우신 성탄을 기념하고 감사하면서 올해는 우리 그리스도인들 모두가 우리를 가슴 저미게 만드는 그 분의 ‘순종’ 이 두 글자에 우리의 눈과 마음을 고정시켜 보자! 묵상을 통한 이 깨달음이야 말로 분명코 주께서 기뻐 받으시는 구주 성탄 예물이 될 것이다. 히브리서 5:8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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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12-22
  • [교회법률상식] 미조직 교회에 담임 목사 위임예식 불가
    [질의] 서울 선천교회(곽효근 목사 시무) 사건입니다. 선천교회는 오랫동안 어떤 교단 어떤 노회도 가입하지 않고 독립 교회로 있다가 얼마 전에 합동측 삼산 노회에 가입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선천교회는 시무 장로가 한 사람도 없고 선천교회가 위임 목사를 노회에 청원한 일도 없었는데도 불구하고 삼산 노회 윤남철 목사가 다른 목사 4명을 대동하고 선천교회에 와서 곽효근 목사를 위임 목사로 위임예식을 하였습니다. 선천교회는 미조직 교회인데도 목사 위임예식을 하는 것이 합법인지 불법인지 목사님의 법리적인 답변을 부탁드립니다. (서울 평신도 올림) [답] 삼산 노회와 선천교회의 자세한 상황을 알 수가 없어 질의자가 질의한 내용 문장에 따라 위임 목사의 청빙 청원과 위임예식의 요건에 관하여 법리적으로 답한다. 1. 반드시 조직 교회이여야 한다. 정치 제4장 제4조 1항(위임 목사)에 “한 지교회나 1구역(4지교까지 좋으나 그 중 조직 교회가 하나 이상 됨을 요함)의 청빙으로 노회의 위임을 받은 목사니 특별한 이유가 없으면 그 담임한 교회를 만 70세까지 시무한다. 목사가 본 교회를 떠나 1년 이상 결근하게 되면 자동적으로 그 위임이 해제된다.”라고 규정하였다. 지교회의 위임 목사 청빙 청원과 위임예식의 절대적 요건은 반드시 조직 교회이어야 함이 필수 요건이다. 이는 장로교회는 정치 총론 5. (장로회 정치)에 “이 정치는 지교회 교인들이 장로를 선택하여 당회를 조직하고 그 당회로 치리권을 행사하게 하는 주권이 교인들에게 있는 민주적 정치이다.”라고 규정한 대의 민주정치이기 때문이다. 2. 목사 청빙을 위한 공동의회에 대하여 정치 제21장 제1조(공동의회) 5항에 “일반 의결은 과반수로 하되 목사 청빙 투표에는 투표수 3분의 2 이상의 가와 입교인 과반 수 이상의 승낙을 요하며”라고 규정하였다. 목사 청빙을 위한 공동의회는 일반 공동의회와는 달리 투표수 3분의 2 이상의 가표를 받고 입교인 과반 수 이상의 서명을 받아 노회에 청빙허락 청원서를 제출하여 노회의 허락과 노회가 일임한 위임국에 의하여 위임예식을 행하여야 한다. 즉 조직 교회의 공동의회에서 투표하여 청빙하고 위임예식에서 치리에 복종하겠다고 서약한 위임 목사에게 치리권이 발생한다는 말이다. 3. 세례 교인이 25인 이상에 대하여 정치 제9장 제1조(당회의 조직)에 “당회는 지교회 목사와 치리 장로로 조직하되 세례 교인 25인 이상을 요하고(행 14:23, 딛 1:5) 장로의 증원도 이에 준한다.”라고 규정하였다. 근본적으로 위임 목사를 청빙 청원할 수 있는 절대적 요건은 조직 교회이어야 한다. 그런데 장로 1인을 임직하여 조직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세례 교인 25인이 절대 필수 요건이다. 따라서 위임 목사의 청빙 요건에도 세례 교인 25인이 절대적인 것처럼 오해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이는 미조직 교회가 최초로 당회를 조직 하는 경우를 의미하고 이미 당회가 조직되어 있는 교회의 경우에는 세례 교인이 사망 또는 이명해간 결과로 세례 교인이 25인 미만일지라도 조직 교회 즉 시무 장로가 있기 때문에 위임 목사를 청빙할 수 있다. 4. 결론 본건 선천교회는 시무 장로가 없는 미조직 교회로서 삼산 노회에 가입한 후 위임 목사 청빙 허락 청원을 위한 공동의회도 하지 않았고 노회에 목사 청빙 청원서를 제출하지도 않았는데 윤남철 목사가 목사 4인을 대동하고 선천교회에 와서 목사 위임예식을 거행한 것이 사실이라면 이는 범죄 행위요, 목사 위임예식은 당연 무효이다. 이에 대한 후속 조치로 노회는 정기 노회 시에 당회록 검사부가 선천교회 당회록을 검사하여 미조직 교회 여부와 공동의회 여부와 위임예식 여부를 확인하여 관계자를 문책해야 하고, 총회는 총회의 노회록 검사부로 하여금 본건 사실에 관계되는 삼산노회 노회록에 선천교회 위임목사 청빙 허락 여부를 검사하여 불법 사실이 확인되면 총회는 권징조례 제76조에 규정한 대로 총회가 직접 변경 처리하든지 하회에 환송하여 처단할 것을 지시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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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12-22
  • [성공칼럼] 공평(公平)과 의(義)
    성경이나 영화나 T.V.에 나오는 죄악의 종류는 걱정, 분노, 우울함, 증오, 미움, 거짓말, 폭력, 자기를 높이는 것, 권력 추구, 돈, 건물 등의 소유욕, 성적인 쾌락, 지배욕, 자기숭배 등이다. 이 모든 것을 행하게 되면 몸이나 마음, 영이 죽어가고, 자기도 죽고 그 주변의 사람들이나 환경도 망가지는 것이기에 피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나쁜 줄 알면서도 여러 가지 이유로 이런 죄악들을 선택하고 행동으로 옮긴다. 이런 죄악들은 몸과 관계와 사회를 망가뜨리게 된다. 이것을 막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공평과 의라고 할 수 있다. 공평과 의가 있으면 함께하는 삶이 사랑이 되고 기쁨이 되는 것이다. 성경에 ‘하나님께서 공의로 심판 하신다’ 또는 ‘공평과 정의’라는 말씀이 많이 나온다. 천국은 어떤 곳일까? 공평과 의가 있는 곳이라고 말할 수 있다. ‘공평’이란 공정한 분배를 말하고 ‘의롭다’라는 말은 사랑과 선이 있다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공의로 심판하신다고 하는데 이 ‘공의로 심판 한다’는 말이 무엇일까? 예를 들어, 담배를 피우면 몸이 망가지고 다른 사람에게도 피해를 준다. 그래서 담배를 피우면 안 된다는 것이 공평하고 의로운 법이다. 그런데 담배를 피우는 사람이 “그래? 담배가 그렇게 나빠? 그러면 끊어야지!”라고 하면서 담배를 끊으면 이 사람은 공의로운 사람이다. 그러나 “담배가 얼마나 유익한데.. 담배는 끊을 수 없어... 담배는 어떤 이유에서든 절대 못 끊어. 난 그냥 일찍 죽을 거야.” 하며 계속 담배를 피우는 것이 공의를 외면하는 것이며 결국은 공의의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얼마 전에 30년 동안 삼촌의 명의로 되어있는 아버지의 땅이 팔릴 것이라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러면서 삼촌과 아버지께서 나에게 이 돈의 분배를 맡겼다. 나는 공평과 의로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으로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를 위해서 나는 이 돈에 대해 조금의 바람도 없어야 했다. 내가 이 돈에 조금이라도 욕심을 부리면 공의로운 분배는 가능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돈을 어떻게 분배할까? 공평하게 나누고 이 돈으로 인해 형제간에 사랑이 더 깊어져야 했다. 먼저, 이 땅의 법적인 소유자는 삼촌이었다. 그러나 실제 소유자는 아버지다. 삼촌이 “이 땅은 법적으로 내 것이다.”라고 주장하면 삼촌이 100% 이긴다. 공평하다. 그러나 형제사이는 멀어지게 될 것이다. 즉 공평하기는 하지만 의를 잃게 되는 것이다. 다행히도 삼촌과 아버지는 서로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 주장을 한다. 형제끼리의 사랑이 가득한 의로운 모습이다. 그러나 돈을 분배할 수 없기 때문에 공평함은 잃는다. 나는 삼촌과 아버지에게 반반씩 할 것을 제안했다. 그러자 두 분이 다 좋아하셨다. 이제 남은 것은 아버지와 어머니와 우리 삼남매의 분배가 남았다. 돈에는 자유와 행복을 누릴 수 있는 힘이 있기에 돈이 생기면 자연스럽게 욕심이 생기게 된다. 어떻게 해야 할까? 그 방법도 공평과 의를 잃지 않는데 있는 것이다. 나는 일단 부모님이 다 가지시고 저금해 놓고 노후에 사용하시라고 했다. 우리 형제들도 동의했다. 그런데 부모님은 “싫다.”고 하시면서 “너희가 가지라”고 하셨다. 여러 가지 의견이 분분했지만 나는 공평과 의라는 초점으로 부모님의 통장에 일부를 저금하고 세 자녀들에게는 아들, 딸 구별 없이 똑같이 나눌 것을 요구했고. 우리 삼남매는 자기가 받은 돈에서 일부를 나중에 부모님이 편찮으실 때나 돈이 필요할 때 사용할 수 있도록 가족통장에 넣어놓을 것을 제안했다. 그러자 모두가 좋다고 했다. 우리가족은 돈으로 인해 공평과 의로움을 잃지 않았으며 더욱 신뢰하고 서로를 위하는 가족이 되었다. 나는 이 돈의 분배를 경험하면서 공의로 심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다. 자신의 가족이나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를 천국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내 것이 아닌 것에는 마음을 두지 않아야 한다. 그리고 공평한 분배로 인해 서로 간에 사랑과 신뢰가 넘치는 하나가 되어 공평과 의를 소중히 여기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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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12-22
  • [은혜의 말씀] 알고도 하나님께 감사 하였더라 (다니엘 6장 10절)
    다니엘은 최악에서 최상으로 살아간 사람입니다. 그 환경, 배경 조건에 흔들리지 않고 환경에 위축되지 않고 선명한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갈 때 실패하는 사람들의 열 가지 특징을 살펴보면 첫째, 부정적입니다. 둘째, 옷을 잘 못입습니다. 셋째, 친구관계가 소홀 합니다. 넷째, 사소한데 목숨을 겁니다. 다섯째, 원망과 핑계와 변명이 많습니다. 여섯째, 정확한 목표가 없습니다. 일곱째, 과거에 집착 합니다. 여덟째, 쉽고 편한 길을 가려 합니다. 아홉째, 의소소통능력이 없습니다. 열 번째, 매사에 의욕이 없고 무기력합니다. 실패하는 사람의 10가지 특징은 우리 속에서도 쉽게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다니엘 스타일은 이 10가지 특징과 거의 반대입니다. 다니엘 스타일은 긍정중독이라고 보면 됩니다. 전에 하던 대로 그대로 하루에 세 번씩 기도합니다. 좋은 중독인거죠. 그 기도의 결론이 중요합니다. 기.승.전. 감사. 자기한테 불리한 일들이 벌어질 것을 미리 알고도 일단 감사함으로 나아가는 겁니다. 이것이 다니엘의 힘입니다. 나라가 뒤숭숭한 이때에 우리가 감사절을 지내면서 감사할 건더기가 없는데 다니엘 스타일을 보면서 최악에서 최상으로 전혀 환경과 배경 조건이 뒷받침이 안 되는데도 일단 감사, 평생감사, 선불감사 해야 합니다. 일이 많을 때 피곤을 느끼지 말고 일복이 많은 게 복이 많다 그것이 감사한 일입니다. 우리는 사람을 만날 때 감동을 주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사람을 만날 때 감동을 주는 사람이 되고 역사를 주관하시고 세계를 경영하시고 운행 하시고 섭리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감격 시대를 살아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첫 번째 추수감사절을 지낸 청교도들이 추위와 배고픔에 시달려야 했지만 일곱 가지 감사를 했습니다. 작은 배라도 주셨으니 그것 타고 대서양을 건너게 되니 감사, 117일간 계속 항해를 할 수 있었으니 감사, 두 사람이 항해 중에 죽었지만 어린아이가 태어났으니 감사, 닻이 부러졌으나 파산되지 않았음을 감사, 파도에 휩쓸린 사람들이 구출되었으니 감사, 호의적인 원주민을 만나 상륙지점을 잘 만났으니 감사, 한명도 다시 영국으로 돌아가자는 사람이 없으니 감사. 이 상황에서 감사할 분위기가 전혀 아니지만 일곱 가지 감사를 하고 살아간 것입니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우리 하나님은 협력해서 선을 이루시는 분이니깐 궁극적으로 우리에게 영생의 복을 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의 삶의 염려와 걱정을 태산같이 하고 우울하게 보낼 일이 아닙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마라, 감사함으로 아뢰면 하나님의 평강이 우리 마음과 생각을 지킬 것입니다. 감사가 일상이 되고 성품이 되기까지 몸과 마음을 늘 새롭게 하여 우울한 현식 속에서 기가 막힐 일들이 닥칠 때마다 눈을 들어 주를 바라보고 항상 우리에게 복 주실 주님을 대망하면서 현실의 고단함을 떨치고 일어나는 주의 백성들이 되시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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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12-22
  • [중독칼럼] 온라인 중독 문화가 어디까지 우리 삶에 침범할 수 있을까?
    온라인 문화에 이미 익숙하거나 별 생각이 없는 부모세대들이 사실 많다. 특히 pc방 1세대라 할 수 있는 7080세대다. 이들 부모들은 스마트폰 세대의 자녀를 두고 있다는 것이 특징인 동시에, 육아를 스마트폰으로 한 경우가 허다하다. 거의 대부분의 부모들은 이 온라인 중독 문화도 사람들이 쉽게 극복할 것이라는 생각으로 살아간다. 그러나 PC방 폐인 생활의 경험과 다섯 아이를 키우고 있는 환경 속에서, 중독 문화 치유 사역을 하며 공부하고 체험한 결과, 그 내용 중에 경각심을 일으킬 만한 심각한 내용을 한 가지 소개하고자 한다. 공부도 잘하고 말 잘 듣는 신앙의 가정의 고등학생 아들을 둔 부모의 이야기다. 평범한 아이, 자기 할 거 잘 하니까, 스마트폰도 별 문제 없겠지 하고 2-3년이 흘렀다. 그런데 온라인 스포츠 도박에 빠진 것이다. 쉽고 빠르게 승부를 볼 수 있다는 점에 끌려, 잘하면 한 방에 대박 날 수 있다는 생각에, 친구들에게 돈을 빌리거나, 알바하면서 모은 돈을 다 탕진했다. 결국 부모의 돈을 손대기 시작했고, 알바하면서 사장에게 급전을 선불하기도 했다. 그는 대학생이 되어서 급기야 사채까지 손을 되어 낭패를 보게 되었다. 짧은 시간에 일확천금을 노리는 마음이 결국 한 청년을 깊은 수렁에 빠지게 한 것이다. 이러한 상황이 연출 되어 진 것은 이 청년의 뇌 구조가 달라졌기 때문이다. 1. 세상 문화의 방식으로 바뀌었고 2. 성공 출세 쉬운 방법을 선호하기 시작했다. 3. 충동적이고 중독성이 강한 류에 끌리기 시작했다. 4. 점점 자아의 정체성을 확립하기 보다는 세상 가치관에 우선 순위를 뒀기 때문이다. 어떤 중독 치료사들이 이렇게 말한다. ‘결국 중독증을 극복하려면 자기 내면의 주체성을 확립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여기에 중요한 것이 빠져 있다. 인간의 타락한 죄성, 그런 자아에 대한 깨달음 없이는 청소되어지고 나면 더 강하고 더 더러운 것들에 사로잡힐 수 있다는 것을 간과한다. 청소되어진 그 내면에 성령의 충만함으로 채우지 않는다면 결국 똑같거나 더 강한 중독에 빠지게 되는 것이 인간이다. 자기 내면의 주체성을 확립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 없이는 불가능하다. 이것이 인간의 한계다. 또한 이 말씀을 주입하기 위해 동기 부여가 필요하다. 때론 간접적인 경험이 필요하다. “P폐나목”(나침반출판사)의 저서를 읽어보라. 참고로, 본 저자는 그 동기 부여의 한 방법으로 “프로게이머육성 발굴 대회(vol.1)”를 준비하고 있다. 칼럼8번째에 이미 언급했지만, 음지의 있는 청소년들을 양지로 끌어내기 위한 사역 중 하나다. 그 통과는 1순위가 교회를 통해서 이루어진다면 멘탈의 중요성이 강조되는 현 시점에서 교회는 가장 훌륭한 후견이 될 수 있다. 이 사역에 대해서는 다음 칼럼에서 좀 더 구체적으로 언급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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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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