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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경인물탐구] 복음을 위해 사명을 다한 디모데
    디모데는 바울의 제자이며 동역자로서 복음사역에 헌신한 사람입니다. 그는 바울에 의해 할례를 받고 그의 영적 아들이요 동역 자가 된 후 바울에 의해 데살로니가와 고린도 교회에 파송되었으며 바울의 후임으로 에베소 교회에서 사역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바울과 함께 로마 감옥에 투옥됨으로써 끝까지 복음을 위해 헌신하다가 순교하게 되었다고 전해집니다. 바울이 복음 사역을 감당할 때에 여러 동역 자들이 있었지만 그중에서도 참 제자이며 동역 자는 디모데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디모데는 바울의 전도 여행 때에 부름을 받아 바울과 동행하기 시작하여 끝까지 바울과 함께 하며 복음을 위한 고난에 동참하였습니다. 디모데가 바울에게 특별한 동역 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순수한 믿음과 인격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어릴 때부터 경건한 어머니에게서 신앙 교육을 받고 자랐습니다. 그래서 그는 신앙의 깊이를 알았고, 그러한 신앙은 바울을 도와 복음 사역에 참여하는 데 있어서 매우 긍정적으로 작용했습니다. 디모데는 순전한 믿음으로 스승 바울의 지시에 순종했습니다. 복음의 동역자의 첫째 조건은 순종입니다. 순종이 없이는 복음 전파 사역을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그 이유는 복음을 증거 하는 일이 때로는 자신이 원치 않는 방향으로 갈 때도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을 죽이는 일은 복음 사역을 감당하기 위해 준비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 중의 하나입니다. 디모데는 또한 희생함으로써 복음의 동역자의 사명을 감당했습니다. 바울이 당하는 모든 고난에 동참하였고 감옥까지 함께 하였습니다. 바울이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였는데 디모데도 바울의 고난에 동참함으로써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사도 바울과 디모데에 의해 복음이 전파되어 생겨났습니다. 디모데가 바울의 동역자로서 복음 사역에 협력한 것이 교회 개척이라는 결실로 나타났던 것입니다. 고린도 지역은 항구 도시로서 우상문화가 가득하고 성적으로 타락한 도시였습니다. 이러한 곳에 복음을 증거 하여 교회를 세우는 일이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복음을 위해 헌신한 바울과 디모데를 통해 복음의 씨앗을 이곳에 뿌리시고 그 열매가 맺게 하셨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복음의 씨가 뿌려지기 위해서는 자신을 희생하고 헌신할 사역자가 필요한데 디모데가 바로 그러한 인물이었습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서신을 보낼 때에 고린도 교회에 많은 문제가 산재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고린도 교회는 그 지역 배경 자체가 문제의 소지가 많은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복음의 씨앗이 뿌리를 내려 교회가 형성됐다는 사실은 복음의 힘과 역동성을 증명하여 줍니다. 또한 복음 사역자인 바울과 디모데가 많은 열심과 기도로 헌신하였음을 짐작케 합니다. 복음 사역자가 복음을 받는 영혼들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마음과 눈물로써 복음을 증거 할 때에 돌밭과 같은 강퍅한 심령들을 녹여서 부드럽게 만들어 복음의 씨앗이 열매 맺게 하는 것입니다. 디모데가 바울과 함께 복음을 위한 이러한 수고를 아끼지 아니하였기에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복음을 전파한 자로 자신과 실루아노와 함께 디모데를 거명하였습니다. 성도는 언제 어디서나 주와 함께 복음을 증거 하는 일을 위하여 헌신하여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3차에 걸쳐 선교 여행을 행한 동안 수없는 핍박으로 고난을 받아야 했습니다. 복음을 증거 하는 일이 보람도 있고 기쁨도 있었지만 때로는 죽음과도 같은 고통이 수반되었던 것입니다. 이는 복음을 증거 하는 일을 싫어하고 방해하는 사단의 세력이 많기 때문입니다. 사단의 세력은 예수께서 천국 복음을 증거 하실 때에도 수없는 방해와 핍박을 가하였고, 주의 사도들이 주의 명을 받아 복음을 증거 할 때에도 동일한 핍박을 가하였습니다. 이러한 사단의 방해 공작은 언제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반드시 따라 다닙니다. 디모데는 바울의 동역자로서 바울이 당한 고난에 동참함으로써 복음의 동역자로서의 역할을 다했습니다. 마가는 한때 바울의 복음의 동역자로 따라 나섰다가 시험을 이기지 못하고 낙오된 일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디모데는 시종 일관 바울의 동역자로서 동행했습니다. 디모데는 바울과 함께 복음을 위하여 고난 받음으로써 더욱 신앙의 성장을 가져올 수 있었고 복음의 열매를 맺을 수가 있었습니다. 디모데의 죽음에 대한 성경의 증언은 없지만 전승에 의하면 도미티아누스 박해 때에 순교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디모데는 복음을 위하여 죽는 데까지 바울과 같이 했고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복음을 위하여 고난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작금의 말세에 우리자신을 돌아봅니다. 우리도 디모데처럼 복음을 위해 살기를 다짐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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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4-10
  • [교회학교를 살린다] 부활의 소망을 노래하라
    요즘 사람들 사이에 퍼지는 말 중에 하나는 코로나 블루이다. 장기화되는 코로나19 사태로 인해서 저마다 사람들 마음속에 우울한 모드가 계속 이어지고 있다는 말이다. 어떤 이는 어린 자녀를 돌보느라 두 달 째 집 밖에 나가지 않고, 어떤 이는 생계 곤란으로 몸과 마음이 피폐해져가고 있다. 부활절이 되어도 우리의 마음은 당장의 불안감을 떨치지 못하고 있다. 21세기 첨단과학의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인류가 눈에 보이지도 않는 바이러스로 인해 이렇게 속수무책으로 당하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던 일이다. 아니, 사실은 예측했던 이들이 있었지만 대부분의 인류는 이러한 비관적인 예측들은 가볍게 무시하고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던 중이었다. 세계 유수의 학자들이 사회의 급격한 변화를 예고했었고, 교회의 생태계가 변화할 것을 말한 사람들도 많이 있었다. 사회의 주요한 변화는 환경의 변화로 인해 인류가 받게 될 위협이나 테러와 살상으로 자행될 인간성 상실 문제 등이 있다. 어떤 이들은 오늘날 코로나19 사태는 인간의 오만함이 낳은 지극히 당연한 결과라고도 이야기한다. 인간이 교만하여 자연을 못살게 군 결과라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그 말이 맞다. 이 일이 벌어지고 모든 이들이 고통 받는 가운데 오히려 자연은 회복과 자정을 하고 있으니 말이다. 이 변화의 물결은 교회를 가만두지 않고 있다. 앞으로 이런 판데믹이 또 찾아오지 않으리라는 보장도 없고, 그때마다 교회는 예배를 모이지 못할 수도 있다는 심각한 우려 속에 있다. 이제 사회의 생태계만 바뀌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생태계, 교회의 환경도 달라질 것이다. 변화하는 세상 속에서 교회와 신앙인은 어떻게 적응하고 살아야 할 것인가? 그리고 우리의 다음세대들이 부흥은 고사하고 살아남는 자가 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이러한 묵직한 질문들이 계속해서 이 코로나 사태 속에 우리 모두의 마음에 숙제를 남기고 있다. 과연 우리는 어디로 가야하는 것인가? 부활절을 맞이하며 우리는 부활의 소망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미래의 소망과 대안을 찾기를 간절히 바란다. 코로나19 사태로 인한 사회적 교회적 변화에 대한 몇 가지 대안이 있을 수 있을 것이다. 먼저는 모이는 교회가 약해질 때, 우리는 흩어지는 교회에 주목해야 한다. 가정에서의 신앙교육은 더욱 강조되어야 할 것이다. 모이는 교회는 끊임없이 흩어지는 교회인 개인과 가정에 신앙 활동의 소스를 제공해야 하고, 흩어지는 교회인 개인과 가정은 이를 바탕으로 소규모 신앙생활을 보다 알차게 이어나가야 할 것이다. 그래서 오히려 가정에서 온 가족이 예배하며 성경을 읽는 등 모이는 교회가 했던 일들을 위임받아서 더욱 알차게 해나가야 할 것이다. 또한 하드웨어보다 소프트웨어에 더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교회라는 건물에 집착해왔었다. 그러나 그보다 중요한 것은 그 건물의 구성원들 한 명 한 명의 신앙상태이다. 이제는 숫자보다 한명의 성숙한 신앙인을 키워내는데 집중해야 한다. 그 한 명이 교회와 사회 속에서 선한 영향력을 드러내며 살아갈 수 있도록 돕는 신앙교육이 필요하다. 그리고 또 다른 신앙의 장인 미디어를 잘 활용해야 할 것이다. 전교인 온라인 예배라는 사상 초유의 사태 앞에서 미리 준비된 교회는 시행착오를 줄이며 시작할 수 있었지만 많은 교회가 미디어를 활용하는데 익숙하지 않아서 우왕좌왕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오늘날 다음세대들의 손에 들린 스마트폰은 세상과 연결되는 다양한 역할을 하는데, 교회는 미디어의 영역에서 그동안 너무나 뒤쳐져있었다. 이제는 다음세대가 살아가는 또 다른 장인 미디어의 세상을 이해하고 활용할 필요가 절실해졌다. 4월이다. 부활절이다. 예전 같은 기쁨과 감격의 모임이 없다 할지라도 우리의 마음속에 여전히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붙잡고 희망을 노래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 노래는 준비하는 자의 것이다. 주님이 우리의 한국교회를 불쌍히 여기시고 부활의 소망을 주시기를 기도한다. 그리고 그 부활의 소망이 우리의 마음에 한 싹을 틔워서 우리의 다음세대를 향한 비전으로 나타나기를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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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4-10
  • [의학칼럼] 시력저하의 원인과 예방법에는 어떤 것이 있나요?
    √시력저하의 원인과 예방법에는 어떤 것이 있나요? 가장 큰 시력저하의 원인은 근시 입니다. 근시의 원인은 보통 유전적이지만 후천적인 요인도 있을 수 있습니다. 망막과 수정체 사이의 거리는 일정하게 유지되는 것이 좋은데, 실내 활동 시간이 길면 망막과 수정체 사이의 거리가 멀어질 수 있습니다. 이로 인해 점점 사물이 흐릿하게 보이는 근시가 찾아 올 수 있습니다. 또한 장시간 노트북이나 스마트폰 등의 전자기기를 사용하는 것도 시력저하의 원인이 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적당한 실외활동을 해주는 것이 좋고 특히 눈의 피로를 풀 수 있도록 산이나 나무가 많은 야외활동이 좋겠습니다. √수술을 많이 하는 연령대는 어떻게 되나요? 보통 20대~30대 환자가 가장 많습니다. 간혹 10대의 어린 학생들이 수술 문의를 하기도 하는데, 각막을 깎거나 렌즈를 삽입하여 근시, 원시, 난시를 교정하는 수술인 만큼 눈의 성장이 다 끝난 이후 수술을 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수능을 끝낸 학생들의 경우 6개월 간 시력저하가 없고 눈에 특별한 이상이 없다고 하면 수술이 가능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다양한 수술 방법 중 스마일라식은 어떤 사람에게 효과적인가요? 스마일이 기존수술과 가장 큰 차이점이 각막절편과 상피층제거 과정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각막이 약하거나 얇은 분들에게 추천드릴 수 있습니다. 또한 외부 충격에도 강하기 때문에 경찰관, 운동선수와 같은 특수직업층의 분들에게도 만족도가 높은 수술입니다. √스마일 라식의 장점에 대해 알려주세요 스마일의 가장 큰 장점은 빠른 회복속도에 있습니다. 수술 다음날 바로 세안이나 화장과 같은 일상생활이 가능하기 때문에 휴가를 내기 어려운 직장인들에게 적합합니다. 스마일은 약 2mm정도의 최소절개창을 통해 각막실질을 제거하는 수술법이기 때문에 기존 라식에 비해 약 90% 가량 각막손상이 줄고, 기존의 각막 구조를거의 그대로 보존할수 있어서 각막 절편과 관련된 후유증이 매우 적은 장점이 있습니다. √스마일 라식은 어떻게 진행되나요? 스마일은 각막 표면을 절삭하거나 표면을 열지 않습니다. 스마일 수술은 각막의 표면을 투과하는 팸토초 레이저 기술을 이용해 각막 실질에 조사하고, 약 2mm의 아주 작은 절개창을 내어 교정량만큼 분리를 합니다. 수술 시간은 양안 기준 약 10분을 넘기지 않습니다. √수술 후 관리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 스마일수술 후에는 1주일 가량 음주나 과격한 운동은 삼가해 주는 것이 좋습니다. 다른 수술에 비해 일상생활 복귀가 매우 빠르기 때문에, 세안이나 샤워, 화장과 같은 활동에는 무리가 없으나 눈을 세게 비빈다거나 눈에 자극이 가는 활동은 삼가는 것이 좋습니다. √시력교정 수술의 중요성 시력교정술은 점점 그 기술과 장비들이 빠르게 발전해오고 있습니다. 그만큼 본인에게 가장 잘 맞는 방식이 무엇인지를 알아보고 필요한 방식을 선택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각 방식들마다 서로 다른 장단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정밀검사와, 눈 상태에 대한 정확한 이해 후 전문가와의 상담을 통해 시력교정술 종류를 선택하는 것이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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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4-10
  • [은혜의말씀] 무너지는 여리고성(수 6:1-5)
    오늘 성경은 여리고성 함락을 보여줍니다. 승승장구하며 가나안 땅까지 달려온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는 여리고라는 큰 장벽이 가로막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여리고성의 위용>을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오늘날 우리 앞길에도 난공불락의 철벽성이 기다릴 때가 많습니다. 굳게 닫힌 여리고성 여리고 성내는 오아시스지역으로 물 샘이 많고 곡식이 풍부하여 항아리마다 곡식을 가득 채우고 살 정도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성문만 닫아걸면 수년 동안 어떤 군사도 무너뜨릴 수 없는 난공불락의 성’입니다. 성서고고학자 브라이언트 우드박사는 ‘외적이 침공해 올 때, 여리고성에서 육중한 성문만 닫아 걸면 그 성은 무너질 수 없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철벽성 여리고 성문이 굳게 닫혀 버린 것입니다. 2. 여리고성을 네 손에 넘겨주셨다 하심 (2절) ‘야훼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여리고와 그 왕과 용사들을 네 손에 넘겨주었으니’ 하나님의 언약만 있으면 무엇이든 가능합니다. 하나님은 언약을 세우시고 지키시는 전능자 야훼이십니다. 이미 하나님이 주셨다함은 끝난 전쟁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이미 예수 그리스도에게 넘겨주셨다고 하셨습니다. 3. 여리고성을 매일 돌라 제사장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법궤를 메고 나팔을 불며 매일 여리고성을 한번씩 6일 동안 돌다가 마지막 7일에는 일곱 번을 돌다가 함성을 지르라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전략입니다. 4. 백성들의 외침에 무너지는 여리고성 ‘일곱째 날에는 그 성을 일곱 번 돌며 그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 것이며 제사장들이 양각 나팔을 길게 불어 그 나팔 소리가 너희에게 들릴 때에는 백성은 다 큰 소리로 외쳐 부를 것이라 그리하면 그 성벽이 무너져 내리리니 백성은 각기 앞으로 올라갈 지니라 하시매’ 그리하여 하나님의 말씀대로 백성들은 크게 소리 질러 외치니, ‘성벽이 무너져 내린지라.’ 여리고성은 결국 무너져 버렸습니다. 여러분 앞에 있는 여리고성도 결국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 먼저 굳게 닫힌 여리고성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들이 먼저 당신 앞에 떨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먼저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문제의 여리고성을 매일 하루 한번씩 도십시오! 그리고 힘껏 외치십시오! 그리하면 반드시 여리고성은 무너질 줄로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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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4-10
  • [시사칼럼] 춘래불불사춘
    중국 고사에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란 말이 있습니다. 직역하면 ‘봄은 왔는데 봄 같지 않구나’ 정도가 될까요? 중국 한나라 때 천하미색으로 중국 4대 미인 중 하나라고도 알려진 한 여인(王昭君)이 낯선 땅으로 붙들려가 맞이한 봄의 소회를 노래한 시구라고 합니다. 삭풍(朔風) 대신 산들바람이 불어오고 사방이 온통 꽃천지일지라도 마음에 봄이 찾아올 수가 없는데 어찌 봄이라고 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우리가 지금 비슷한 계절을 맞이한듯합니다. 분명히 봄은 봄인데 도무지 봄 같지 않은 그런 봄, 살갑게 부대끼며 온몸으로 만끽해도 시원찮을 텐데 서로 가까이 갈 수 없고 가벼운 콧노래라도 함께 부르지 못하는 그런 봄 말입니다. 원래는 곳곳에 꽃망울 터지는 소리 때문에 가만히 있기가 너무 힘이 드는 그런 날들인데, 입을 굳게 다물 수밖에 없는 마스크 탓에 본의 아니게 침묵의 계절이 되어버린 일생 동안 다시 겪지 못할 것 같은 그런 나날들을 보내고 있는 우리입니다. 봄에는 꽃만 피는 게 아니죠. 난생 처음 책가방을 메고 콩당거리는 가슴으로 엄마 손 꼭 잡고 입학하는 새싹들이 피어납니다. 겨우내 움츠렸던 살림살이들도 이제 활짝 피어날 부푼 꿈을 안고 기지개를 켜기도 하고, 괜히 구석이라도 쓸고 닦으며 왠지 분주해질 것만 같은 기대감으로 가게를 지키고 있다가 크게 한번 내지르는 주인아저씨의 하품까지도 여유가 넘쳐흐르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이번 봄에 들려오는 먹거리·살거리·놀거리 이야기들은 그렇게 기쁜 소식이 별로 없습니다. 아련하고 뭉클하게 피어오르던 아지랑이 너머로 불황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 있습니다. 한 동안 플러스 외길만을 달려왔던 경제지표들이 마이너스를 기록한다고 하니 산비탈에서 쑥을 캐는 아주머니들의 손바람도 예전만은 못해 보입니다. 뜻밖에 길어지는 바이러스 사태로 말미암아 나들이조차 마음대로 할 수 없어서 봄은 왔으되 봄기운 대신 답답하고 우울한 마음만 가득한 이웃들이 많습니다. 생각해 보면 아시아라 불리는 땅 너머 그 어딘가 이천 년 전 어느 해 봄에도 유사한 증상들이 있었습니다. 따뜻한 봄이 되자 기승을 부리는 전쟁과 기근과 전염병으로 다들 몸서리를 쳤습니다. 우뚝 세워질 줄로만 알았던 나무 한 그루에 한 줄기 희망마저 무참하게 꺾여버리자 마지막 봄까지 다 빼앗겨 버리고 말았습니다. 희부연한 봄의 하늘을 온통 가려버리는 흑암 속에서 다시는 봄을 보지 못할 것만 같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문득 새날이 밝았습니다. 죽음을 뚫고 새 생명의 싹이 움터 올랐습니다. 그렇게 영원히 돌아오지 않을 것만 같던 봄날이 되살아난 날, 그날을 우리는 부활의 아침이라 불렀습니다. 봄이 왔으되 봄이 오지 않은 줄만 알았더니, 봄이 왔으되 봄이 오지 않는 일이 다시는 없을 것이라는 가슴 벅찬 소식을 들었습니다. 부활은 그렇게 춘래불사춘이 아니라 춘래불불사춘으로 이 세상에 나타났던 것입니다. 유래 없는 현상 속에서 근심은 깊어만 가고, 불안과 공포가 더 큰 혼란을 야기하려는 시절입니다. 그러다가 문득 부활의 봄날을 맞이합니다. 주님은 죽음을 딛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부활의 봄날들을 사시다가 흩날리는 꽃눈처럼 승천하셨습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살아계십니다. 살아계셔서 만물을 다스리시고 우리를 위해 기도하고 역사하며 계십니다. 본래 부활의 성도들 마음에는 주님이 봄처럼 활짝 피어 있었습니다. 그러니 사라진 봄 때문에 상심하신 분들이여, 내 마음 속에 충만한 부활의 봄기운을 되찾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스스로 봄이 되시기 바랍니다. 서로에게 봄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모두 봄이 되어서 다시 만납시다. 우리가 봄이 되어 다시 만날 때 우리는 멋지게 회복되리라 방초 같은 신념을 가집시다. 아무도 흔들 수 없는 나의 봄, 아무도 빼앗을 수 없는 우리의 봄, 그 부활의 봄날 모든 것이 다시 새롭게 되리라 확신하며 나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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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4-10
  • [소강석칼럼] 코로나 이후를 생각해야 할 때
    CTS ‘한국교회를 논하다’라는 프로그램에서 ‘주일예배가 회복되어야 한다’는 주제로 생방송 토론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사회자가 저에게 갑자기 “코로나 사태 이후에 우리 사회와 한국교회가 어떻게 달라지겠습니까?”라고 물어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답변을 했습니다. “코로나 이후에 우리 사회의 라이프 스타일이 많이 바꿔질 것입니다. 집단공동체 생활 보다는 재택근무나 개인주의 사회로 변모할 것이고, 사회적 거리두기 분위기는 더 높아질 것입니다. 그 영향이 교회로도 들어올 것입니다. 먼저 교회관과 예배관이 투철한 성도는 코로나로 인하여 그동안 공동체예배를 드리지 못한 목마름과 갈망 때문에 예배가 얼마나 소중하고 귀중한 것인가를 더 절실하게 깨닫고 예배를 사모하게 될 것입니다. 애가 아프고 나면 더 건강해지고 쑥쑥 잘 크듯이 더 건강하고 성숙한 신앙인으로 돌아와서 교회 부흥의 불쏘시개가 되고 헌신적인 사명자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관과 예배관이 투철하지 못한 성도는 온라인예배를 드리면서 ‘아, 이렇게 예배를 드려도 되는 것이구나’라는 생각을 하기도 할 것입니다. 그래서 더 교회에 거리를 두고 가정이나 콘도 같은 곳으로 가서 온라인예배를 드리는 영적 병리 현상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저는 지금 온라인예배가 정당한가, 정당하지 않는가를 이야기하고 싶지 않습니다. 온라인예배가 최선은 아니지만, 국민보건과 사회공익을 위해서 과도기적으로 전환한 한 방법일 뿐입니다. 그런데 정말 더 큰 문제는 코로나 이후에도 성도들이 온라인예배의 매너리즘 빠져서 공동체예배를 회복하지 못할까 하는 것입니다. 최근에 경기도에서 ‘종교집회 전면금지 긴급명령’ 여론조사를 했을 때 기독교인들 가운데도 찬성하는 사람들이 많더라는 것입니다. 물론 교단 본부에서 여론조사를 했다면 다르겠지만, 아무튼 우리의 부끄러운 민낯이 드러난 것 같아 너무 안타까웠습니다. 정말 한국교회가 그동안 성경공부나 제자훈련을 열심히 한다고 했지만 무엇이 남았습니까? 이번 코로나 위기를 계기로 한국교회는 다시 건강한 교회관과 예배관을 회복해야 합니다. 성도들의 심장에 교회가 얼마나 소중하고 예배가 얼마나 가치 있는 것인가를 새겨주어야 합니다. 거대한 폭풍이 일고 나면 바다가 깨끗하게 정화 되듯이 코로나 이후에 한국교회가 다시 정화되고 새롭게 태어나는 계기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이번 신천지 사태를 보면서 진리 전파와 사수의 사명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가 얼마나 안일하고 사람들의 영적인 욕구를 해결해 주지 못했으면 신천지 같은 이단들이 잘못된 욕망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폐허로 만들고 상처를 주었습니까? 그리고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지자체 단체장들이 유독 교회의 집회만 물고 늘어지는 것입니다. 이단 신천지와 교회를 같이 보는 우를 범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동안 한국교회는 우리 사회의 영적인 빈 공간을 채워주지 못했던 것을 자성해야 합니다. 한국교회는 일제감정기에도 민족의 소망이 되었고 근대화, 산업화의 정신적, 사상적 지주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코로나 위기 속에서, 아니 코로나 이후에도 한국교회가 더 우리 사회를 일으켜 세우는 영적, 정신적 동력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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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4-10
  • [서임중칼럼] 마음을 찢으라
    요엘 2:12~14절을 읽으면서 저절로 무릎이 꿇어진다.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는 이제라도 금식하며 울며 애통하고 마음을 다하여 내게로 돌아오라 하셨나니,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지어다. 그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나니, 주께서 혹시 마음과 뜻을 돌이키시고 그 뒤에 복을 끼치사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 소제와 전제를 드리게 하지 아니하실는지 누가 알겠느냐” 전국이 코로나19로 카오스 현상이다. 온 세계가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있다. 확진자 수가 기하급수로 늘어나고 사망자가 늘어나고 있다. 2019년 12월 중국 우한시에서 발생한 바이러스성 호흡기 질환인 코로나19 바이러스는 정치 경제 교육 사회를 겨울 벌판처럼 만들어 간다. 정부대책은 갈팡질팡이다. 세계 100여국 이상이 한국출입을 통제하는 기막힌 외교적 수모를 당하고 있다. 이러할 때 4.15 총선을 앞두고 정치권은 당리당략에 이 기막힌 상황을 이용하려는 치졸스럽고 파렴치한 상황도 전개된다. 마스크대란으로 국민정서는 폭발직전이다. 주말이면 대형마트는 전쟁준비를 하듯 사재기가 그야말로 전쟁을 불사한다. 대구는 말할 것 없고 모든 도시 거리에 차량도 사람도 잘 보이지 않고, 상가는 폐허처럼 변해가고, 사람이 사람을 만나면 서로를 피하는 마치 영화에서나 볼 수 있었던 상황이 작금의 현실이다. 두려움이 국민정서가 되어가고 있다. 이 모든 것이 우연일까? 그런데 정작 온 몸이 떨리는 두려움은 그런 것이 아니다. 사이비 이단으로 규정하고 있는 신천지 모임에서 확진자 발생이 구체적으로 심화되면서 교계를 바라보는 국민정서가 곱지 않다는 걱정을 했는데 정부는 예방대책의 실패를 은근슬쩍 신천지에 떠넘기는 현상이 여기저기 감지되면서 정치권에서 여야공방으로 정쟁이 되어가는 현상이다. 더 나아가 교회 예배를 중심으로 한 각종 모임이 자의반 타의반으로 축소되고 하나님과의 관계단절의 현상을 보면서 사단의 전략을 느낀다. 무서운 것은 이러할 때 교회가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지 못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보지 못하는 영적 우맹(愚氓)이 되지 않을까 그것이 더 두렵고 무섭다. 더 놀라운 것은 대한민국 국회는 신종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위해 종교집회 자제를 촉구하는 결의안을 재석 157인 중 찬성 146인, 반대 2인, 기권 9인으로 의결했다. 이 뉴스를 보던 나는 순간에 무릎이 꺾어지면서 “주여 용서하여 주옵소서.”라고 울음이 터졌다. 종교집회 자제는 법으로 결의하면서 문화 예술의 집회 자제는 왜 결의하지 않는가? 이 모든 것이 우연일까? 급기야 교회는 주일예배 모임을 자제해야 한다는 여론이 쓰나미처럼 언론을 통해 휩쓸더니 한국 천주교회는 236년 역사상 처음으로 16개 모든 교구의 미사를 전면 중단을 공지하고 개신교회도 여기저기 예배당을 폐쇄하고 주일예배를 온라인 예배를 드리게 되는 현상이 전개되었다. 이렇게 되다보니 교계에서도 찬반론이 전개되면서 예배 신학의 논쟁이 전개되고 이로 인해 마치 신사참배로 교회가 분열된 지난 역사의 아픔이 재현되는 듯한 현상을 보면서 통증을 느낀다. 이처럼 온라인 예배에 관해 의견이 분분할 때 한국교회 예배와 설교학의 권위자로서 선구자적 사명을 수행하시는 정장복 명예총장(장신대, 한일장신대 명예교수)은 타이밍을 놓치지 않고 <예배없는 예배당을 보면서>라는 한국기독공보 특별기고를 통해 한국교회가 이런 상황에 어떻게 해야 함을 일깨운 것은 감동적이다. 그러면 오늘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코로나19에 대한 정부의 초보 수준도 못 미치는 대처 능력이 그렇고, 그렇다고 사건 사건마다 문제의 본질을 해결하려는 자세보다는 당리당략에 골몰하는 정치권이 그렇고, 사건의 관계개념을 떠나 무능한 정부를 부각시키며 대통령 하야를 외치며 사회혼란을 부추기는 일부 사회단체나 지도층의 상황이 그렇고, 문제의 해결을 위한 살신성인의 정신이 부재한 현실이 그렇다고 좌절하거나 질타할 때가 아니라 지금은 마음을 찢으며 엎드릴 때다. 서민경제 상황은 세월호 침몰 사건 못지않게 바닥을 친다고 아우성이고 여기 저기 물고기가 물을 만난 듯 유언비어를 만들어 내고 사회를 불안하게 하는 세력들의 말들이 봇물처럼 쏟아지고 있다. 이러할 때 우리 모두가 해야 할 일이 있다. 무엇보다 교회가 해야 할 일이 있다. 전화위복이라 했지 않은가. 위기는 또 다른 기회라 했지 않은가. 온라인 예배를 드리면서 예배당에서 예배드림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깨닫는 기회로 삼고, 몇 주 온라인 예배를 드린다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됨이 아니라 성경읽기와 개인 기도로 더욱 가까워질 수 있는 기회로 삼고, 모임이 어려우면 전화는 물론 문자메시지를 통해 서로 위로하고 격려함으로 아름다운 관계의 더 깊어지는 기회로 삼고, 목회자는 심방을 비롯한 목회 활동이 좁혀지면 말씀연구의 깊은 학문적 성숙의 기회로 삼으면서 위기를 기회로 바꾸어 가는 지혜로운 깨달음을 가져야 한다. 그러면서 불평 원망 비판 정죄하지 말고 엎드려 기도할 때다. 옷을 찢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찢을 때다.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하고 낙성식을 마쳤을 때 하나님이 솔로몬에게 임재하여 말씀하셨다. “혹 내가 하늘을 닫고 비를 내리지 아니하거나 혹 메뚜기들에게 토산을 먹게 하거나 혹 전염병이 내 백성 가운데에 유행하게 할 때에,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들의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낮추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찾으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들의 죄를 사하고 그들의 땅을 고칠지라.(역대기하 7:13~14)” 숨이 헉 막히고 저절로 무릎이 꺾어지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우리는 지금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을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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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3-17
  • [성서연구] 누구의 명령이기에
    바울 사도는 가장 미스터리한 인생을 사신 분이라고 생각됩니다. 누구나 세월과 함께 조금씩 변한다고들 합니다만, 바울은 한 순간에, 그것도 백 팔십 도로 완전히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 복음과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는 사람이었던 그가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복음을 전파하며, 예수님의 사람들을 형제자매로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더구나 그 무렵 어떤 사람으로부터 예수님에 대한 태도를 바꾸도록 설득을 당하고 있었던 것도 아닙니다. 그가 뿌리치기 어려운 이들, 예컨대 부모님이나, 존경하는 스승이 그에게 예수님을 믿으라고 권하고 있었던 게 아닙니다. 오히려 당시 바울은 당대 최고의 학자인 가말리엘의 제자로서 신뢰를 받았고, 유대 지도자들인 대제사장들은 그를 특히 총애했고, 다메섹의 그리스도인들을 잡아 오도록 공문을 주어 파송할 정도로 기대를 걸었습니다. 예수님께 기울기는커녕 오히려 자신의 신념이 더 굳어져 예수님의 적으로 살아갈 상황이었습니다. 이런 그가 어떻게 하루아침에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바뀔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오직 예수님 안에서만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다메섹의 그리스도인들을 잡으러 가는 그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어떤 사람을 보내신 게 아니라, 예수님께서 직접, 강력하게 나타나셨습니다. 더 이상 기다릴 수 없고, 더 이상 그를 방치할 수 없다는 생각으로 그를 태양빛보다 더 밝은 빛으로 사로잡으셨습니다. 그만큼 그를 향한 사랑이 뜨거웠던 증거입니다. 이처럼 그는 처음부터 어떤 사람을 통해서가 아니라, 예수님께 직접 사로잡혔습니다. 그를 부르시고, 눈에 낀 비늘 같은 것이 떨어지게 하시고, 그를 이방인의 사도로 파송하신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바울은 이 사실을 깊이 깨닫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서신을 보낼 때마다 이 사실을 언급하곤 했습니다. 본문 디모데전서 1장 1절에서도 <우리 구주 하나님과 우리의 소망이신 그리스도의 예수의 명령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이라고 자신을 소개했습니다. 그는 <나는 예수 그리스도께 명령을 받은 사람>이라는 자의식이 분명했습니다. 그 후의 바울의 삶은 정말 고단했습니다. 고린도후서 11장 23-28절까지를 보면 이렇습니다. <그들이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정신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는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아직도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이런 고단하고 위험한 삶, 목숨을 걸어야 하는 삶을 살면서도 그가 끝까지 달려갈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을 사도로 부르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셨음을 잊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절대 존재였습니다. 그 분께 받은 은혜를 생각하면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분이고, 그 분께서 자신의 삶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보면 최고의 존재이시기에 거절을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주님은 머릿속에만 계신 개념이 아니라, 살아서 바울과 동행하시고, 매 순간 역사하시는 분이셨습니다. 생생한 주님이셨습니다. 그런 주님의 명령이었기에 그는 평생을 사도로 살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존재입니까? 우리는 주님을 어느 정도의 비중으로 생각합니까? 기억하십시오. 우리도 주님으로부터 명령을 받았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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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3-17
  • [함께 생각해봅시다] 칼럼 연재를 마치면서
    ‘함께 생각해 봅시다’를 2000년 1월 15일부터 오늘까지 매주(근래엔 격주) 게재하였는데 어언 20년이 지났다. 십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했으니 강산이 두 번이나 변한 셈이다. 그간 부족한 사람의 글을 읽어주신 분들에게 심심한 감사를 드린다. 어떤 이는 ‘함께 생각해 봅시다’를 읽기 위해 신문이 오는 시간이 기다려진다고 말하고 어떤 이는 칼럼을 스크랩하여 간직한다는 말도 들었다. 목사님 한분은 칼럼을 크게 확대하여 교회 현관 게시판에 붙여 놓고 있는 것을 보았다. 또 어떤 분들은 ‘함께 생각해 봅시다’를 책으로 만들어달라고 요청한다. 나는 그때마다 그건 생각해 보겠다고 말했다. 그간 부족한 사람의 글을 읽어주신 분들에게 심심한 감사를 드리고 하나님의 은총이 가정과 교회에 가득하기를 기원한다. 오늘은 마지막으로 짧은 글 한편을 게재한다. 제목은 ‘설교는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다’ 이런 글이다. 목회자는 설교원고 작성이 끝나면 설교하는 시간이 기다려진다. 그러면 설교는 원고대로만 전하면 은혜를 끼칠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 설교내용이 좋고 준비한대로 전달이 잘 되어도 교인들이 은혜를 받지 못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왜 그런가? 설교는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떤 이의 설교는 내용이 알차고 적어둘만한 것이 많으나 말씀이 가슴에 와 닿진 않는다. 왜 그런가? 설교는 강연이나 강의와는 달라서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설교는 목사의 전 인격으로 하는 것이고 그의 생활로 하는 것이고 그의 품행으로 하는 것이다. 가령 어떤 목사가 언행이 일치하지 않는다고 하자. 그의 설교를 듣고 교인들이 은혜를 받겠는가. ○○교회에서 이런 일이 있었다. 목사가 주일 아침에 사소한 일로 인해 부인에게 화를 내면서 분위기가 저기압이 되게 했다. 그날 목사의 설교가 공교롭게도 가정의 평화를 역설하는 것이었다. “가화만사성이라는 말의 뜻을 아시죠?’ 실제로 가정이 화목해야만 일만가지가 다 잘 됩니다. 서로가 참고 화를 내지 말아야합니다” 하며 화평을 강조했다. 그때 듣고 있던 목사부인이 자기도 모르게 큰 소리로 “말이사” 그랬다. 그래놓고는 손으로 입을 막았지만 이미 그 소리를 옆에 있는 교인들이 다 들었다. 후회한들 소용이 있겠는가. 설교는 절대로 말로서만 해선 안 된다. 설교자의 전 인격으로 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그러므로 생각해볼수록 설교 이상으로 하기 어려운 것이 없다. 독자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한지요. 함께 생각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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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3-17
  • [시사칼럼] 코로노미(Coronomy)
    아파트 뒤편에 위치한 약국에 마스크(mask)를 사기 위해 잠시 들렀습니다. 하나 둘 셋 그리고 일곱 여덟, 대기하는 사람들 숫자가 생각보다는 그리 길지 않아 다행이라고 여기면서, 그래도 이게 무슨 난리야 혼잣말 속에 일인당 두 장 그것도 신분증 없으면 팔지도 않는다는 그 귀한 마스크 구입에 성공하고 돌아오다가는 그만 나도 모르게 흘러나온 콧노래에 흠칫 놀라버렸습니다. 지천으로 널렸던 마스크에 공적 판매니 복지적 배급이니 하면서 중앙부처까지 팔을 걷어붙일 수밖에 없었던 까닭은,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가 장기화되면서 매점매석이나 사재기로 인해 품귀 현상이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일인당 국민소득 3만 불 시대를 맞이하면서 소문난 맛 집에 끝을 모르게 늘어서곤 하던 줄을 텅 빈 거리에 굽이굽이 마스크 사려고 기다리는 사람들이 재현할 줄 몰랐습니다. 골목마다 국숫집, 다방, 미용실, 인쇄소, 핸드폰 가게 가릴 것 없이 손님은커녕 왕래하는 사람 찾기도 쉽지 않은 이 때 말입니다. “코로노미(Coronomy)”는 21세기 들어 맹위를 떨치고 왕관을 닮았다 해서 붙인 바이러스의 이름 코로나(corona)와 경제를 가리키는 이코노미(economy)를 합쳐서 지어본 말입니다. 이제는 판데믹(pandemic/세계적 대유행)이 아닌가 하는 우려가 점차 확산되고 있지요? 이탈리아에서는 거의 모든 도시에 일종의 봉쇄 조치가 내려졌고, 미국에서도 일부 주에서는 비상사태가 선포되는가 하면, 비교적 안전지대라고 느끼는 나라들은 저마다 출입국통제에 여념이 없습니다. 마스크뿐만 아니라 휴지를 비롯해서 생필품 시장도 혼돈 상태에 빠져 전시에나 볼 수 있는 가격 통제 혹은 강력한 세무조사가 등장하는 뉴스를 나라 안팎에서 대합니다. 인류가 이전에는 결코 경험한 적이 없는 현상입니다. 전염병이 지금보다 더 심각하게 창궐했던 중세의 경우 경제 규모가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이 작았기 때문에 바이러스가 미치는 영향은 크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 어느 때보다 정보가 빠른 시대에 그 어느 것보다 전염력이 강한 바이러스가 등장하면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새로운 국면을 맞았습니다. 아시아와 유럽 증시가 폭락하더니 최근 코로나가 본격적으로 상륙한 미국마저 2주 연속 증권시장이 ‘블랙먼데이’를 맞았고, 1997년 이후 처음으로 일시적 거래중단조치(서킷브레이크)가 발동되기도 했습니다. 이 와중에 일부 중동 국가가 수출 가격을 내리면서 국제 유가는 한 때 1997년 이래 최대인 30% 폭락을 기록했습니다. 전형적인 불황의 조짐들입니다. 반면에 마스크나 휴지 등 생필품 가격이 뛰고, 이동 제한으로 말미암아 물류 가격도 상승하면서 인플레이션의 조짐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총체적 경제 위기를 촉발한 셈입니다. 5년 전 빌 게이츠의 말이 다시 화제입니다(TED). “인류에게 가장 두려운 재난은 핵폭탄도 기후변화도 아닌 글로벌 전염병이며, 전염병 확산은 전시 상황(war time)이다.” 2002년 사스, 2009년 신종플루, 2012년 메르스 때 세계 경제가 몸살을 앓았고, 사스 후 한국의 경제성장률 또한 전년 대비 –4.6, 신종 플루 후에는 –0.4 포인트 하락했습니다(한국은행). 그러면 더 민감하고 오래가리라는 이번 사태의 여파는 어디까지일까요? 그런 가운데서도 우리는 빛을 보았습니다. 가장 심각한 피해를 입은 지역에서 치킨집도 과일가게도 칼국수점도 재료가 다 소진되었다는 아름다운 소식을 들었습니다. 어려운 사정을 알게 된 시민들의 너도 나도 ‘제값에 사겠다’는 주문이 폭주했기 때문이라죠? 국회에서 ‘타다금지법’이 통과되는 와중에, 위기 속에서 자생적 공유경제가 꽃보다 먼저 봄의 포근함을 알려줍니다. 그뿐입니까? 이번에도 생업조차 내려놓은 채 속속 현장으로 모여드는 의료진들, 수많은 봉사자들, 그리고 생사를 도외시하는 관계자들의 헌신이 있습니다. 경제학 이론으로는 도무지 설명할 수 없는 이런 일들이 수치를 자랑으로 바꾸고 위기를 기회로 바꾸는데 일조합니다. ‘경제’란 단어가 본래 헬라어 ‘오이코노미아’에서 오지 않았습니까? 이 말을 성경은 ‘경륜’으로 번역합니다(엡 3:2, 9). 경제는 결국 하나님의 ‘나누어주고 베풀어주심(dispensation)’에 기초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경륜이 이번에도 뚜렷하게 드러나기를, 그래서 만인이 경제를 움직이는 ‘보이지 않는 손’을 찬양하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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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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