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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서연구] 엇갈림
    통일찬송가 311장은 <내 너를 위하여>입니다. <프랜시스 해버갈, Frances R. Havergal, 1836-1879>이 1858년에 작사했습니다. 해버갈 양은 당시 독일에 유학하고 있었는데, 휴양을 위해 여행을 하던 중, 뒤셀도르프에 있는 친구네 집에서 스턴버그가 그린 <이 사람을 보라, Ecce Homo>라는 제목의 그림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 사람을 보라, Ecce Homo>는 빌라도 총독이 예수님을 고발하는 유대 지도자들에게 예수님을 보여주며 예수님에게서 죄를 찾지 못했다고 말하는 대목에서 나옵니다. 결국 유대인들의 고발을 이기지 못한 빌라도는 자신의 안위를 위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했습니다. 해버갈 양이 본 그림의 아래에는 <나는 너를 위해 이 일을 행하였거늘 너는 날 위해 무엇을 하였느냐?>라는 글귀가 적혀 있었는데, 그녀는 감동을 받아 메모를 했고, 그것을 근거로 찬송시를 썼습니다. <내 너를 위하여 몸 버려 피 흘려 / 네 죄를 속하여 살길을 주었다 / 너 위해 몸을 주건만 날 무엇 주느냐 / 너 위해 몸을 주건만 날 무엇 주느냐> 그러나 해버갈 양은 막상 그다지 만족하지 못했던지 원고를 난로에 던져 버렸다고 합니다. 그런데 불이 약해서 몇 군데 그슬리기만 했는데, 얼마 후 그녀의 부친이 시를 완성하면 곡을 붙여 주겠다고 해서 시를 완성했다고 합니다. 불속에서 살아남은 찬송가라 하겠습니다. 불속에서 살아남은 것은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죄악으로 인해 멸망의 불에 들어갈 존재였는데, 예수님께서 우리를 십자가에서 구원하심으로 멸망의 불길에서 구원을 받았습니다. 우리 중 구원이 필요 없을 정도로 완벽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고, 은혜 없이 구원 받은 사람 역시 한 사람도 없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구원 받을 자격이 없는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사랑 받을 자격이 없는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예수님께 어떻게 했습니까? 우리는 예수님을 배신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마음과 우리의 마음은 늘 엇갈렸습니다. 본문을 보면 예수님의 사랑과 가룟 유다의 마음이 엇갈림을 보여줍니다.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라> 십자가를 질 때가 다가옴을 아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시간에 유다는 예수님을 팔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정반대로 마음이 엇갈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복음이 위대한 것은 그 엇갈림을 사랑으로 포용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치 세상의 정의처럼, 혹은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식의 탈리오의 법으로 우리를 대하지 않으셨습니다. <네가 이렇게 나오면 나도 다 생각이 있다>는 식으로 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네가 그렇게 한다 하더라도, 난 너를 사랑하겠다.>는 것이 예수님의 마음이요, 그게 사랑의 복음이 위대한 이유입니다. 복음은 엇갈림을 극복하는 힘이라 하겠습니다. 저는 이런 의미에서 앞의 찬송가에 동의하면서도 일부 동의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대가를 계산하듯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분이 아니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받은 사랑만큼 드리지 못해 죄송하지만, 그렇다고 우리를 물리치는 분도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사랑은 늘 대가를 계산합니다. 계산하는 사랑은 타락한 사랑입니다. 그러나 부모님의 사랑을 보세요. 대가를 계산하지 않습니다. 자녀가 섭섭하게 해도 계속 사랑합니다. 그런 사랑이 오가는 가족이 귀합니다. 그런데 요즘 세상에서는 가족 간의 사랑에도 대가를 계산하는 듯하여 마음이 쓸쓸합니다. 상대방의 배신으로 인한 엇갈림까지 포용하신 예수님의 위대한 사랑을 배울 때입니다. 그리고 먼저 가정 안에서부터 이런 사랑을 실천하고, 나아가서 주변에서도 실천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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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5-12
  • [시사칼럼] 포스트 코로나 국가 (Post Corona Nations)
    최근에도 역사적으로 중대한 변화의 순간들이 있었습니다. 1940년대 세계 대전과 브레튼 우즈 체제(Bretton Woods System)의 발족, 1973년 1차 오일 쇼크, 1985년 플라자 협정(Plaza Agreement), 2001년 9.11 테러, 2008년 리먼 사태(Lehman shock) 등이 그러합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앞서 거론한 사건들 못지않게 중요한 격변의 시기로 후대에 기록될 것이 분명한 뜻밖의 사태를 체험하고 있습니다. 많은 분석과 진단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사실만은 누구에게나 분명해 보입니다. 이제 인류는 이전으로는 다시 돌아갈 수 없고, 앞으로는 모든 영역에서 새로운 질서와 체제가 세워지리라는 전망입니다. 국가도 마찬가지입니다. 격변하는 시대에 이후로는 어떤 나라들이 생존하고 번영하며 역사의 주역으로 우뚝 서게 될까요? 이미 우리는 범세계적인 감염사태 속에서 이에 대한 답을 희미하게나마 보았습니다. 첫째, 민주주의적 가치와 절차를 존중하는 나라가 살아남고 발전하게 될 것입니다. 3월 중순에 유발 하라리(Yuval Harari)가 파이낸셜 타임즈에 기고한 글 중에서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이 폭풍은 지나가겠지만, 이후에 만나는 세상은 지금 우리가 무엇을 하고 있느냐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코로나 사태를 맞아 몇 가지 유형의 국가별 대처 방식이 등장했습니다. 첫째는 자유방임입니다. ‘집단 면역’이라는 논리를 중심으로 시민의 자율에 맡기고 정부는 적극적인 개입을 포기하는 방식이었습니다. 둘째는 전체주의적 통제입니다. 체제와 무관하게 도시를 봉쇄하고 이동을 제한하는 방식이 전격적으로 등장하지 않았습니까? 셋째는 민주주의적 방식입니다. 일부 국가는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무엇보다도 존중하면서 민주적 절차에 의해 사태를 파악하고 분석하며 핵심 역량을 강화하고 집중하여 대처해 나갔습니다. 그리고 세계는 지금 그 중간 결과를 보고 있습니다. 민주주의의 위대한 승리를 말입니다. 둘째, 형평과 선(ex aequo et bono)을 실천하는 나라가 살아남고 발전하게 될 것입니다. 칼 폴라니(Karl Polani, 1886-1964)는 “거대한 전환(The Great Transformation)”을 말하면서 “공동체가 우리를 구원할 것이다”라고 선언했지만, 이번 위기 앞에서 각국은 저마다의 민낯을 드러내고 말았습니다. 비용 때문에 검사조차 받을 수 없는 국가, 노숙자나 이주민 같은 이들은 애초부터 배제해 버린 국가, 다른 이유들 때문에 국민의 건강과 생명을 도외시하다가 엄청난 결과를 초래하고 만 국가들을 우리는 보았습니다. “형평과 선”은 국제법상의 원칙으로, 하나님 나라의 핵심 원리인 “의와 공도”와 무관하지 않습니다(창 18:19). 성경은 나그네와 이방인, 고아와 과부, 가난한 자에 대한 돌봄과 배려를 “공의와 정의”라고 부릅니다(출 22:21, 25; 23:6, 11). 앞으로는 형평과 선의 원리가 살아있고 공의와 정의가 제대로 작동하는 나라는 생존하고 발전하는 반면, 그렇지 않은 나라는 결국 도태되고 말 것입니다. 셋째, 신뢰를 소중히 여기는 나라는 틀림없이 생존하고 발전합니다. 우리는 그 동안 인류가 축적해온 기반들, 예를 들면 도시화, 세계화, 신자유주의, 금융자본주의 등이 송두리째 흔들리는 현장을 목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와중에도 정보와 결과를 신속하고 투명하게 공개하면서 대처한 나라는 승리의 길을 걸어가는 반면, 여러 명분으로 비밀주의를 고수하면서 은폐와 조작을 자행한 나라들은 가시적인 성과는 남겼을지 몰라도 수많은 비판에 직면한 모습을 우리는 또한 지켜보고 있습니다. “포노사피엔스(phono sapience)”라고 불리는 세대에 비밀과 조작은 더 이상 통하지 않습니다. 신뢰를 소중히 여기는 공동체가 앞으로 생존하고 번성합니다. 그런 나라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우리는 어떠합니까? 세상이 신뢰하는 교회입니까? 십계명의 마지막 두 계명은 신뢰에 기초합니다(출 20:16, 17). 신뢰의 절정이 바로 언약입니다(막 14:24). 주님의 신뢰를 저버리지 말고, 세상의 신뢰도 회복하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보다 더 투명하고 신속하며 공개적인 교회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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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5-12
  • [성경인물탐구] 하나님이 쓰신 선지자 에스겔
    에스겔은 유대의 제사장 가문에서 태어나고 자란 제사장이었지만 유대인들이 바벨론의 포로가 되어 끌려갈 때 함께 바벨론으로 잡혀 갔습니다. 에스겔은 그 곳에서 22년 간 선지자로 사역하면서 실의와 좌절 속에 빠진 유대 백성들에게 소망의 메시지를 외치며 증거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언약을 지키지 않고 범죄를 일삼는 것에 대하여 징벌을 내리셔서 바벨론의 포로가 되게 하셨지만, 그들을 완전히 버리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에스겔과 같은 포로기의 선지자들을 통하여 구원의 메시지를 계시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구원의 메시지는 가까이는 포로 70년 후에 있을 포로귀환에 관한 내용이었으나, 궁극적으로는 메시야를 보내시어 온 인류를 구원하실 구원 계획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소망을 가지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믿음의 신앙으로 돌아오라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의 혀를 그의 입천장에 붙게 하여 그가 벙어리가 되게 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의 입술을 주관하고 계심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패역한 이스라엘 백성에 대하여 에스겔을 통하여 책망하시면서 잠시 동안 에스겔의 입을 봉하셨다가 입을 열게 하심과 동시에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을 증거 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하심은 에스겔이 증거 하는 말씀은 에스겔의 말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임을 분명하게 알리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백성들은 패역하여 에스겔이 증거 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지 않는 자들도 많이 있을 것임을 예언하셨습니다. 아무리 하나님께서 표적을 보여 주시면서 죽은 자들을 살리고 병든 자들을 고치고 바다를 가르고 온 자연을 다스리시는 이적과 기적을 보여 주시며 복음을 증거 해도 패역한 자들은 그 복음을 거부할 뿐 아니라 적대적인 반응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께서 이 땅에서 복음을 증거 하실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아무리 초자연적인 능력을 행하시며 말씀을 증거 해도 하나님을 떠나 자신의 욕심을 추구하는 자들은 그 말씀 듣기를 거부하였습니다. 에스겔은 하나님께 이끌림을 당하여 골짜기가운데 가서 뼈가 심히 많은 광경을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뼈가 심히 많은 것을 목격한 에스겔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여 다시 살아날 것을 명하라고 지시하셨습니다. 에스겔이 하나님의 지시를 따라 뼈들을 향하여 대언할 때에 그 뼈들은 서로 연락하고 힘줄이 생기고 살이 오르며 그 위에 가죽이 덮여졌습니다. 그리고 에스겔이 하나님을 대언하여 생기에게 명할 때에 생기가 그 시체에 들어가서 지극히 큰 군대를 이루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보여 주신 이러한 광경은 마치 마른 뼈같이 되어 버린 이스라엘을 다시 회복시키실 것임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 만물의 창조주로써 무에서 유를 말씀으로 창조하시는 능력이 있으시므로 죽은 자를 살리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닌 것입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을 통해 죄 아래 죽었던 자들에게 새 생명을 불어 넣어 영생의 복을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상징적으로 나타낸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는 영생의 신앙으로 승리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오늘도 하나님 우편에서 연약한 우리를 위해 기도하고 계십니다. 그 예수님이 재림의 심판 주로 오실 때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고 충성되게 준비된 자로 나설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천국을 소망하며 어떠한 상황이나 환경에서도 흔들림 없이 신실하게 사시기를 바랍니다. 코로나19로 인해 힘이 들고 불안하지만 늘 예수님 때문에 기뻐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사랑합니다. 늘 승리하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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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5-12
  • [교회학교를살린다] 다음세대를 위해 사이버세상을 지켜라
    오늘날 현대인들에게 가장 가까운 친구는 단연코 스마트 폰일 것이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언제 어디서나 손에 쥐고 있으며 어디를 가든지 함께 한다. 쉴 틈만 있어도 스마트 폰을 들여다보는 사람도 많고 어색한 분위기를 벗어나기 위해서도 스마트 폰을 켜기도 한다. 이 작은 네모상자는 어느덧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우리 생활에 가장 중요한 친구가 되었다. 그러나 중요하고 가까운 친구인 것은 사실이지만 좋은 친구인지 나쁜 친구인지는 아직 미지수이다. 우리에게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지만 정작 우리는 스마트 폰으로 대변되는 사이버 세상을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모르면서도 그 안에서 살아가고 있다. 요즘 특히나 다음세대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사이버세상 이야기가 핫이슈이다. 사이버 성범죄에 대한 기사가 계속 매체를 통해 전달되고 있다. 또한 온라인 개학이라는 사상 초유의 사태 속에서 우리의 다음세대들은 사이버세상에서 개학을 하여 수업에 참여하고 있다. 이렇듯 사회적인 문제가 되기도 하고 상황에 따라 적절히 활용되기도 하는 사이버 세상을 좀 더 알고 이해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이다. 특히나 앞으로의 사회가 사이버 세상에 대한 확대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신앙교육에 있어서도 더더욱 관심을 갖고 알아야 할 것이다. 전통적으로 기독교교육이 일어나는 중요한 장, 공간을 교회, 가정, 학교, 사회로 보아왔다. 그런데 요즘에는 다섯 번째 장으로서 사이버 공간을 꼽고 있다. 이 사이버세상, 또는 뉴미디어 세상 또는 가상의 공간이 오늘날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는 공간이자, 또한 신앙교육이 일어날 수 있는 중요한 공간가운데 하나라는 것이다. 사실 이 이야기는 꽤 오래전부터 예견되었으나 교회와 신앙공동체가 미쳐 신경을 못 써온 공간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사이버 세상은 이미 우리의 다음세대들에게 교사의 역할까지 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먼저는 이 사이버 세상을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사이버 세상은 매우 복잡하고 난해한 공간이라 잘 알아야 선용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이는 사이버 세상, 미디어 세상을 숲이라고 표현을 했다. 사이버 세상은 거대한 숲과 같이 우리를 둘러싼 환경 그 자체이기 때문에 이 사이버 세상 속에서 우리는 반드시 길을 찾아내야만 한다. 그렇다면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까? 먼저는 사이버세상을 바라보는 관점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 항상 그렇듯이 ‘교육은 가치의 문제’이기 때문에 그렇다. 어떤 가치가 전수되는가 하는 게 교육에 있어서 핵심이고 신앙교육도 마찬가지이다. 예전에는 이 사이버세상을 별 관심 없이 대해왔다. 그러나 이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이미 우리는 이 사이버 세상이라는 공간 속에서 살아가고 숨 쉬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벗어날 수 없는 현실이다. TV를 비롯하여 컴퓨터, 스마트 폰과 같은 뉴미디어가 만들어내는 가상의 공간이 우리가 살아가는 데 절대시간을 차지하고 있다. 필자는 미디어에 대한 경각심이 막 일어났던 20여 년 전에 초등학교 5,6학년들을 대상으로 겨울방학 때 미디어캠프를 진행한 적이 있다. 그때의 다음세대들에게는 TV와 컴퓨터 게임이 제일 큰 골칫거리였다. 그래서 미디어를 잘 알자는 취지에서 미디어캠프를 열었었다. 캠프를 시작하며 제일 먼저 한 것은 미디어중독 자가 점검이었다. 스스로 체크를 해보면 내가 얼마나 미디어에 빠져 사는지를 알 수 있는 점검표를 작성했는데, 놀라운 사실은 대부분의 아이들이 미디어 중독 상태라는 결과가 나온 것이다. 매일 한 시간 이상을 연속적으로 소모하는 경우 중독이라는 결과가 나오는데, 대부분의 다음세대들이 한 시간 이상을 연속적으로 미디어를 접하였던 것이다. 치명적인 문제를 일으키는 중독이 비단 도박중독, 알코올 중독과 같은 끔찍한 것들 뿐 만 아니라 미디어를 접할 때도 일어난다는 것을 자각하는 의미 있는 시간이 되었다. 현실을 직시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필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이 사이버세상이 아주 넓고 위험한 아마존 정글이라는 사실을 다음세대들과 대화를 통해 나누어할 것이다. TV를 보더라도 그냥 멍하니 수용하고 있지 말고 서로 이야기를 나누며 보는 것이 필요하다. 뉴스를 보더라도 이 뉴스가 맞는지 팩트 체크하는 것도 필요하고, 광고를 보더라도 과장광고인지 너무 선정적인 건 아닌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드라마나 유튜브를 보더라도 현실을 지나치게 왜곡하고 잘못된 가치관을 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하는 훈련이 필요하다. 이걸 미디어 비평교육이라 할 수 있다. 이제는 교회와 가정에서도 이러한 교육이 절실하게 필요하다. 나도 모르게 나를 가르치는 교사, 나도 모르게 내가 지금 살아가고 있는 곳, 사이버 세상이 우리의 다음세대들에게 좋은 교사의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어른들이 나서서 정화해나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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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5-12
  • [의학칼럼] 알레르기 질환
    “봄만 되면 눈물, 콧물이 쏟아져서 휴지를 손에서 놓을 수가 없어요”, “환절기만 되면 감기에 걸리고, 감기약을 먹어도 잘 낫지도 않아요”, “전 1년 내내 감기를 달고 사는 것 같아요” 라고 하소연 하는 사람들을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이런 경우 일반적인 감기인 경우도 있습니다만, 대개 알레르기 질환을 단순 감기로 착각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감기는 열이 있고, 인후통과 두통, 근육통 등을 동반하며, 일주일 정도 지나면 자연 치유가 되는 반면, 2~3주 지속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기 때문입니다. 이런 경우 알레르기 질환인 경우가 많습니다. 알레르기 질환에는 어떤 질환이 있나요?알레르기는 꽃가루나 미세먼지, 음식, 약물 등과 같은 특정한 원인 물질에 민감하여 다른 사람에 비해 과민한 반응을 보이는 경우를 말합니다. 알레르기 질환은 일반적으로 유전적 요소와 함께 환경 요인의 복합 작용에 의해 과민 반응이 발생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최근 환경 오염과 기후 변화, 스트레스 등의 증가로 인해 알레르기 질환이 급격히 증가하고 있으며, 인구의 10~20%가 알레르기 질환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고되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알레르기 질환으로는 기관지 천식, 알레르기 비염 및 결막염, 아토피 피부염 등이 있으며, 이외에도 약물 알레르기, 음식물 알레르기, 곤충독 알레르기 등 다양한 질환이 있습니다. 알레르기 질환을 의심할 수 있는 증상에는 어떤 것이 있나요?감기 후에 기침이 오래 지속되는 경우나, 야간이나 새벽에 기침이나 호흡곤란이 심해지면서 가슴이 답답한 증상이 동반되는 경우나, 숨쉴 때 쌕쌕 거리는 소리(천명음)가 들리는 경우 기관지 천식을 의심해 볼 수 있습니다.또한, 재채기, 코 가려움증, 맑은 콧물, 코막힘 등의 증상이 반복적으로 발생할 때는 알레르기 비염을 의심해 볼 수 있습니다. 알레르기 비염의 경우 입천장, 목 속, 귀 속 가려움을 호소하기도 하며, 간혹 콧물이 목구멍 뒤로 넘어가는 증상을 호소하기도 합니다. 오랫동안 비염을 앓은 사람은 눈 주위가 퍼렇게 착색되어 보이거나 감색으로 보이기도 하고, 코 간지러움으로 코를 문지르는 행동을 반복하며 콧잔등의 주름이 관찰되기도 합니다.알레르기 결막염은 알레르기 비염이나 기관지 천식과 흔히 동반되어 나타나며, 눈 가려움, 눈 충혈, 눈물, 눈부심 등의 증상을 호소 할 때에 의심해 보아야 합니다. 알레르기 질환은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나요?일반적으로 알레르기 질환은 자주 재발하면서 만성화하는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특히, 원인이 되는 알레르기 물질(알레르겐)에 노출되거나 온도 변화, 감기, 스트레스 등에 의해 쉽게 악화되지만, 치료 후에는 호전되는 양상을 보입니다. 또한, 이런 알레르기 질환들은 각각 단독으로 나타나기도 하지만 기관지 천식, 비염, 결막염, 아토피 피부염 등이 함께 나타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따라서 각각의 질환에 대해 치료를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여러가지 알레르기 질환을 동일 질환으로 보고 함께 치료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알레르기 질환의 진단을 위해서는 어떤 검사가 필요한가요?알레르기 질환은 질환의 종류 및 그 원인이 개개인마다 다르므로 정확한 진단과 함께 자신의 알레르기 원인 물질(알레르겐)을 알아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알레르기 원인 규명을 위해서는 피부 반응 검사와 혈액 검사 등을 시행하며, 때로는 약제나 식품첨가제, 방부제 등과의 관련성을 확인하는 유발검사를 시행합니다. 알레르기 질환의 치료 및 예방법에는 어떤 것이 있나요?일반적으로 많은 환자분들께서는 ‘알레르기 질환은 어차피 치료해도 낫지 않는다’ 라는 통념 때문에 치료를 기피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치료를 하지 않을 경우 비부비동염(축농증), 중이염, 폐렴 등의 합병증을 유발할 수 있으며, 일상적인 활동이나 학업, 직장생활에 어려움을 겪을 수도 있습니다. 또한, 어린이의 경우 성장 장애로 이어질 수도 있으므로 적절한 치료를 받는 것이 중요합니다.알레르기 질환의 치료는 원인이 되는 알레르기 원인 물질(알레르겐)을 피하고 주위환경을 청결하게 유지하는 것부터 출발합니다. 이와 함께, 약물 치료와 면역 치료를 시행해볼 수 있습니다. 면역 치료는 환자의 알레르기 원인 물질(알레르겐)을 낮은 농도부터 소량씩 주입하여 알레르기 원인 물질에 대해 알레르기 반응이 일어나지 않도록 면역체계를 변화시켜 주는 근본적인 치료법입니다. 알레르기 질환은 악화와 호전을 반복하는 만성 경과를 취하므로 지속적인 관리와 치료가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의사와 상의할 필요가 있으며, 알레르기 질환을 예방하기 위해서 아래의 방법이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부모가 알레르기 질환이 있다면, 생후 6개월간 모유수유가 권장된다. ◇금연을 한다.◇깨끗한 실내 환경을 유지한다.◇실내에서는 애완 동물을 기르지 않는다.◇황사나 꽃가루가 날리는 날에는 외출을 자제하고 마스크를 쓴다. ◇감기에 걸리지 않도록 주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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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5-12
  • [은혜의말씀] 부족함이 없는 삶(시 23:1-6)
    인생을 살다보면 항상 부족함을 느낍니다. 옛날 가난하게 살 때에 비해, 지금은 월등하게 부유한 환경과 혜택을 누리면서도 많은 사람들은 더 큰 부족감을 느낍니다. 왜, 그럴까요? 사람의 마음속에는 근원적으로 채울 수 없는 공허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부족함이 없는 삶을 어디서 찾을 수 있습니까? 오늘 시편 23편은 시골소년 다윗이 발견한 <부족함이 없는 삶>의 비결을 보여 줍니다. 1. 하나님이 나의 목자가 되시면 부족함이 없습니다. (시23:1) ‘야훼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야훼 하나님을 목자로 삼으면, 아무런 부족함이 없고, 더 이상 원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선한 목자가 되셔서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기 때문에 더욱 진정한 선한 목자가 되십니다. 주님은 우리의 목자가 되시되, 풍요한 삶으로 이끄십니다. (시23:2)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 도다‘ 양떼에게 <푸른 풀밭>은, 배부르게 마음껏 먹을 수 있는 진수성찬의 식탁이요, 매일 매일의 소원의 장소입니다. 또한 양떼에게 <쉴만한 물가>는, 목마름을 해갈함에 지나 아무도 헤치지 않는 물가에서 양껏 마시고 얼마든지 누워서 쉴 수 있는 금상첨화의 천국 같은 환경입니다. 우리가 야훼 하나님을 목자로 삼으면, 모든 삶을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신다는 것입니다. 2. 하나님 이름 때문에 우리의 부족함을 채우십니다. 야훼를 믿으면, <이름 때문에> 우리의 영혼을 날마다 소생시켜 주실 뿐만 아니라, 자기 이름 때문에 불의한 우리를 의롭게, 추한 우리를 거룩하게 인도하십니다. (3절)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 도다’ (출20:7) ‘너는 네 하나님 야훼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 야훼는 그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는 자를 죄 없다 하지 아니하리라’ 하나님은 자기 이름을 위하여 우리에게 놀라운 일을 행하십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그 이름이 영광받기를 원하십니다. 3. 주께서 함께 하시면 부족함이 없습니다. (신2:7) ‘네 하나님 야훼께서 네가 하는 모든 일에 네게 복을 주시고 네가 이 큰 광야에 두루 다님을 알고 네 하나님 야훼께서 이 사십 년 동안을 너와 함께 하셨으므로 네게 부족함이 없었느니라 하시기로’ 하나님은 복의 근원이십니다. 복의 근원과 함께 있으면, 우리도 자연히 복덩어리로 변화됩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이 하는 모든 일에 복을 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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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은혜의 말씀
    2020-05-12
  • [부산기독교이야기] 부산에서 일한 북장로교 선교사들, 인노절
    부산에 왔던 또 한사람의 목사가 로저 윈(Roger Earl Winn(1882-1922), 곧 인노절(印魯節) 선교사였다. 1882년 5월 16일 미국 일리노이 게일즈벅그에서 출생한 그는 엠퍼린대학에서 수학하고 자신을 생애를 선교사로 헌신하기로 하고 매코믹신학교에 진학하였다. 매코믹신학교는 선교적 이상을 가지고 선교사양성을 중요한 사명으로 설립된 학교였다. 실제로 이 학교 출신이 한국교회에 큰 영향을 끼쳤고 이 학교 출신 선교사들이 한국에서의 신학교육을 주도했다. 평양신학교 설립자이자 초대 교장 마포삼열을 비롯하여 소안론(W L Swallen), 배위량(W B Baird), 곽안련(C A Clark), 이길함(G Lee), 남장로교의 최의덕(L B Tate) 등이 다 매코믹신학교 출신이었다. 이 신학교는 경건주의적 성격을 지닌 온건한 칼빈주의 신학을 지향했고, 또 전천년주의 종말론을 지지했으므로 이런 천년기 이해가 한국교회에도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이 학교에서 신학교육을 받은 로저 윈은 1909년 한국선교사로 파송을 받아 부인 캐더린 루이스(Catherin Lewis, 1883-1955)와 함께 1909년 9월 16일 내한하였다. 이때부터 그는 부산지부에 배속되어 1914년까지 심익순 목사 부부, 도리스 양과 더불어 부산지부 관할지역인 부산과 밀양지역에서 활동했다. 그러다가 미국북장로교가 호주장로교외의 선교지역 분담협정에 따라 부산에서 철수 하게 됨에 따라 1913년 말까지 부산에서 활동하고 1914년 안동지부로 이동했다. 따라서 부산에서 사역한 기간은 약 4년이었다. 그는 안동지부로 이동하여 사역하던 중 1922년 11월 22일 안동에서 이질로 사망하게 되는데, 한국에서 사역한 기간은 13년 정도였다. 그의 안동지부에서의 중요 사역은 안동 예천 의성 등지역의 개척선교와 지역 순례, 그리고 성경학교 사역이었고, 또 경안노회 조직에도 기여하였다. 부인은 남편이 사망한 이후에도 안동지부에 남아 1923년까지 여자성경학교 등 여성 중심의 사역을 펼치다가 평양지부로 이동하였으나 1925년 6월 29일 선교사직을 사임하고 귀국하였고, 1953년 6월 4일 캔사스 중 엠포리아(Emporia)에서 73세의 나이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인노절 선교사의 부산에서의 사역기가 짧았기 때문에 영향력이 크지는 못했으나 이 지방 기독교 형성에 기여한 점은 부인하지 못한다. 그의 주된 사역은 지역교회 순회와 감독이었다. 그 외에도 경상노회 목사회원으로서의 역할이 주요한 임무였다. 그는 1911년 12월 6일 부산진교회당에서 소집된 경상노회 창립회에 참석하였고, 제2회 노회(1912년 3월 대구 남문내교회)에서는 위철치 선교사가 담당했던 구역, 곧 창녕군의 토산당회와 창녕군 및 영산지역을 책임 맡도록 배정되었다. 1912년 12월 소집된 제5회 경상노회는 인노절 목사에게 생활, 마천, 웅천읍, 경화, 가음정교회 등 5개 처 교회 동사목사로 일하도록 위촉했다. 웅천읍교회의 경우 1914년 김기원 목사의 안수와 부임과 동시에 인노절은 동사목사로 사역하게 되었다. 그 외에도 1912년 부산 동래의 원림교회를 순회한 기록이 있고, 1912년 11월 당시에는 밀양 부내면(府內面)에 거주하면서 밀양읍교회도 관할했다고 한다. 당시 밀양에는 부산지부 휘하의 소 지부(sub station)가 있었기에 밀양에서 거주하면서 경남 지역 교회를 순회했음을 알 수 있다. 정리하면 인노절 선교사는 웅천 창원 진해 창녕 지방을 중심으로 사역했음을 알 수 있다. 그가 안동지부로 전임한 이후에도 여전히 경상노회 관할 하에 있었기 때문에 경상노회 휘하에서 지역교회를 순회하고 노회 여러 업무에 관여하게 된다. 그가 안동지부에서 23개 지역 교회를 보살폈는데, 그 휘하에 권수기, 김인옥 등과 같은 한국인 전도자들이 있었다. 경상노회원으로서 그는 안ㄷ종지부의 오월번, 권찬영 등 선교사와 동역하면서 노회 안수위원, 전도위원, 당회록 검사위원, 혹은 시취 위원 등으로 활동했다. 그런대 그가 1922년 11월 22일 40세의 젊은 나이로 이질에 감염되어 사망하자 경안노회는 그의 선교 업적을 기리면서 1923년 1월 12일 경안노회 제3회 노회에서 추모식을 거행하였고, 그를 기념하여 ‘윈 기념 성경학교’ (Roger Earl Winn Memorial Bible Institute)를 건립했다. 그의 묘비에는 이름과 생몰연대를 기록하고, “그는 죽지 않고 잠자고 있다. He is not dead but sleepeth”라고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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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5-12
  • [성서연구] 부활, 고통인가 기쁨인가
    며칠 전 성도님들에게 다음과 같은 말씀을 드렸습니다. <3월의 대한민국과 한국교회 모두에게 잔인한 달이었습니다. 그러나 4월에는 예수님의 부활을 축하하는 부활절이 들어 있으니, 4월에는 가정과 교회와 대한민국에 회복과 기쁨이 충만하길 빕니다.> 아닌 게 아니라 예수님의 부활은 제자들에게 기쁨을 가져왔습니다. 누가복음 24장 52-53절을 보면 <그들이 (그에게 경배하고) 큰 기쁨으로 예루살렘에 돌아가 늘 성전에서 하나님을 찬송하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부활절이 있는 4월에 모든 것이 회복되어 우리도 기뻐하길 바라는 마음이 간절한 것입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면 참 이상한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부활 후, 제자들은 더 큰 고통에 시달리다가 죽었다는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부활하시지 않았다면 제자들은 고향에 돌아가서 어부, 혹은 다른 일에 종사하면서 살았을 것입니다. 종종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나고, 행하신 이적이 눈앞에 선하고, 떼어 주시던 떡과 생선이 입안에서 씹혀지는 듯이 느껴졌을 것입니다. 그리고는 한숨을 내쉬며 다시 바다로 나가 그물을 던졌을 것입니다. 어쩌면 종종 함께 만나 근황을 나누며 함께 슬퍼했을지 모르겠습니다. 슬프지만, 평온하게 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부활하시자 그들은 평온한 삶을 누릴 수 없었습니다. 고향으로 돌아갈 수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평온한 고향 갈릴리가 아닌, 살벌하기 이를 데 없는 예루살렘에 그대로 남았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되는 사명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대제사장, 백성의 장로들을 비롯한 막강한 세력들과 맞서야 했습니다. 이로 인해 그들은 끌려다녔고, 감옥에 갔고, 얻어맞았으며, 위협을 당했고, 나중에는 서로 다른 나라로 흩어져 복음을 전하다가 죽었습니다. 그것도 평안히 죽은 게 아니라, 십자가에 못 박히거나, 참수되거나, 톱으로 켬을 당하거나 기름 가마에서 죽었습니다. 그게 다 따져보면 예수님께서 부활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없었다면 그들은 고생도 안 하고, 비참하게 죽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부활 때문에 그들은 정말 힘들게 지내다가 죽었습니다. 이렇게 말해 놓고 보면 예수님의 부활이 정말 기쁜 일인지, 아니면 힘든 일인지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지금 우리도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시지 않았다면, 복음도 없고, 교회도 없고, 성도도 없고, 선교사도 없고, 힘들게 헌금을 드리지도 않을 것이고, 봉사와 헌신을 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입니다. 여러 가지 불편한 것을 감수하거나, 사회에서 비난받는 일도 없었을 것입니다. 하고 싶은 대로 하고, 먹고 싶은 대로 먹으면서 자유롭게 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부활 때문에 우리는 참 힘들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보면 예수님의 부활이 가져오는 기쁨의 본질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을 왜 기뻐하는 것일까요? 더 이상 고생이나 시련이 없기 때문일까요? 예수님의 부활 이후 세상의 모든 고통이 사라졌나요? 아닙니다. 오히려 더 심해졌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활을 기뻐하는 이유는 환경이 좋아지기 때문이 아닙니다. 부활이 가져온 변화는 외부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에게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을 믿음으로 생기는 핍박도 견딜 수 있는 힘이 생기는 것, 삶이 주는 온갖 어려움도 참을 수 있게 되는 것, 세상에서 어떤 일이 벌어져도 묵묵히 천국을 향해 갈 수 있게 되는 것, 그러면서 세상에 대한 사명을 다하게 되는 것, 죽음 앞에서도 담담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부활은 환경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변화시킵니다. 그런 의미에서 부활은 우리 안에서 먼저 일어나야 합니다. 코로나 19 바이러스로 인해 점차 낙심과 좌절로 죽은 심령처럼 되고 있지만,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 우리 심령이 먼저 살아나길 원합니다. 2020년의 부활절에는 그렇게 우리 자신이 영적으로 강해짐으로써 기쁨을 얻는 절기가 되길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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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4-10
  • [부산기독교이야기] 부산에서 일한 북장로교 선교사들, 도신녀 (Anna Dorris)
    부산에서 사역했지만 우리에게 잊혀진 인물들이 있다. 그 한 사람이 안나 도리스(Anna S. Doriss, 1876-1965), 곧 도신녀(都信女)로 불린 미혼 여성 선교사이다. 1908년 11월 19일 내한하여 부산과 평양에서 일하고 1941년 귀국했으니 33년 간 한국에서 일했으나 그에 대해서는 아는 이들이 거의 없다. 미국북장로교 선교부의 계획에 따라 청주지부 사역자로 임명받고 1908년 11월 19일 내한한 그는 내한한 이후 청주지부 개척자인 밀러(閔老雅, Rev F. S. Miller, 1866-1937) 목사 부부와 함께 일했다. 청주지부 설치계획은 1902년부터 시도되었고, 1905년 6월 밀러 목사는 청주로 이동했지만 1908년 8월 1일 공식적으로 설치되었다. 새로 개척된 지부에 사역자가 필요했기 때문에 도리스를 청주로 파송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도리스는 이곳에서 짧은 기간 동안 밀러의 두 번째 부인 수잔 도티(Susan Doty)와 함께 일했다. 그러다가 1909년에는 부산으로 재배치되었다. 1909년 당시 부산의 북장로교 선교부에는 심익순 목사 부부만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보담 부부는 1907년 8월 안식년으로 귀국한 이후였고 심익순 선교사 혼자 부산지부 사역을 감당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도리스는 1909년 부산으로 재배치되었고, 이때부터 1913년까지 약 4년간 부산과 밀양에서 일하게 된다. 도리스가 부산으로 옮겨 오던 해에 위철치 목사와 인노절(Rodger E. Winn) 목사 부부도 부산지부로 오게 된다. 참고로 부연하면, 도리스와 함께 1908년 11월 19일 한국에 도착한 동료가 북장로교 선교부의 회계 전문가인 평신도선교사 김소(金昭, John F. Genso, 1884-1950), 그리고 목사인 국유치(鞠裕致, W. T. Cook, 1878-1952) 부부였다. 하루 전날에는 블랑게 에시크 양(Miss Blanche Essick, 1883-1955)이 내한했는데, 1910년 위철치(George H. Winn) 목사와 결혼하여 남편과 함께 부산에서 일하게 된다. 그런데 도리스는 체이스 양에 이어 부산지부에서 일한 두 번째 미혼 여성이자, 마지막 미혼여성이었다. 그가 부산에 체류하는 기간 동안 북장로교와 호주선교부 간의 지역 분담 합의가 이루어져 1911년 여름 밀양의 선교사 안식관을 열게 되었는데, 그해 11월에는 위철치 가족과 도리스 양이 밀양으로 옮겨가 지내게 되었다. 1912년 연례회의에서 오랜 토론 끝에 북장로교가 밀양을 포기하게 되자 위철치는 다시 부산으로 돌아왔으나 도리스는 건강 때문에 휴가(병가)로 미국으로 갔다. 이런 점을 고려할 때 도리스양이 부산에서 일한 기간은 3년 정도 밖에 안 된다. 이런 점을 감안하더라도 그의 부산에서의 사역에 대한 정보는 매우 빈약하다. 앞에서 여러번 소개한 바와 같이 북장로교와 호주장로교 선교부 간의 선교지역 분담 협의가 이루어져 1913년 말로 미국북장로교가 부산에서 철수하게 됨에 따라 도리스도 1913년 말 부로 평양지부로 배속되어 부산을 떠나게 된 것이다. 그의 부산 체류가 길지 았았다는 점을 갑안하더라도 노해리의 북장로회교의 한국선교사에서 도리스의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다. 1905년 11월 창간되어 1941년 11월에 폐간되는 재한 선교사들의 영문잡지 Korea Mission Field에도 도리스가 쓴 글은 단 한편 발견했는데(“평양여자성경학교서의 오락기” KMF, June, 1919, 127-8쪽) 그것은 평양지부에서 사역할 때의 기록이다. 도리시의 부산에서의 사역은 우선 언어공부에 집중했을 것이고, 그를 부산으로 보낸 것은 여성사역을 위한 것이었음으로 여성들을 위한 성경공부 인도, 교회에서의 여성들을 위한 사역에 집중했을 것이다. 특히 도리스는 규범학교 교사로 활동했다. 북장로교가 운영하던 여자 학교인 규범학교는 어빈의 부인이 한국을 떠나 일본으로 간 이후 다소 경영에 어려움을 겪었으나 북장로교 선교부가 계속 운영하였고, 도리스는 학교의 마지막 기간 이 학교를 위해 헌신했다. 그러다가 선교부의 부산 철수로 그도 1913년 말 평양지부로 이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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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4-10
  • [목회자칼럼] ‘내가 기준이다’라고 하는 세상에서
    한 경매장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누구도 사지 않을 낡아빠진 바이올린이 경매장에 나왔습니다. 경매인도 시간 낭비라고 생각하여 빨리 판매해 버리고 싶은 마음에 10달러부터 경매를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옆에 있는 사람이 20달러를 불렀고, 마지막 사람이 25달러를 불렀습니다. “더 없습니까?” 아무도 25달러 이상으로 살 사람이 없었습니다. 이때, 한 노인이 걸어 나와 그 낡은 바이올린을 잡았습니다. 그리고 먼지를 털고 후후 불더니, 느슨해진 줄을 팽팽하게 조율했습니다. 그리고 아주 멋진 곡을 연주하기 시작했습니다. 장내에 분위기가 조용해졌습니다. 얼마나 감동적인 연주였는지 모릅니다. 연주가 끝나고 경매인이 떨리는 목소리로 다시 경매를 시작했습니다. “얼마에 구매하시겠습니까?”라고 경매인이 외치자 여기저기에서 1천 달러, 2천 달러, 3천 달러.. 결국 3천 달러에 낙찰되었습니다. 방청객에서 소리가 들렸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대체 무슨 이유로 이런 가격에 낙찰이 됩니까?” 누군가가 대답하였습니다. “그 바이올린은 잘 아는 주인의 손을 스쳐왔기 때문입니다.” 경매장의 사람들은 무엇을 기준으로 바이올린을 평가했습니까? 처음에는 외형이었고 연주한 뒤에는 소리였습니다. 그럼 그 소리의 기준은 무엇입니까? 바이올린을 켜는 주인공에 달려있습니다. 다시 바이올린의 기준은 무엇이라 정할 수 있을까요? 누가 바이올린을 켜느냐에 따라 바이올린의 소리는 달라집니다. 우리는 흔히 바이올린만을 기준으로 삼으려 합니다. 그러나 진짜 기준은 바이올린 연주자입니다. 이제 이 바이올린 이야기를 두고, 함께 세 가지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1) 바이올린이 스스로 기준을 정할 때 우리들은 스스로 기준이 되려고 합니다. 자기 생각이 옳다거나 자신의 경험이 정확하다고 생각합니다. 저 자신도 젊을 때 얕은 지식과 적은 경험으로 판단하거나 평가하며 말했습니다. 시간이 지나고 보니, 그것이 얼마나 편협하고 편향되었던 것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조금 더 넓고 다양하게 말하고 볼 수 있었는데, 나의 기준에 대한 확신 때문에 그렇게 앞만 보고 달렸습니다. 지나니 우습고 부끄러운 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나의 외고집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힘들어했을까... 제아무리 비싼 바이올린이라도 연주할 수 없는 사람의 손에 있다면 무슨 소용일까요. 바이올린은 누구 손에 있는지가 값어치를 결정합니다. 2) 내가 기준인 시대 우리는 자기중심주의에 잡혀 살아갑니다. 어렸을 때는 우리 가정의 습관이 옳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나의 삶의 방식도 맞다고 여겼습니다. 교회를 다니면서는 우리 교회가 기준이 되었습니다. 찬양, 기도, 말씀 등 내가 다니는 교회에서 정해놓은 것만이 바른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학교에 들어가서 여러 친구들을 만나고 사회 속에서 다양한 사람들의 생각을 접하며 내가 고집한 삶의 방식, 내가 맞다고 생각한 교회의 모습들이 옳았을 수도 있지만 틀렸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때, 다 옳다라고 여겼던 ‘나 자신’의 기준이 무너지고 확장이 일어났습니다. 나의 생각이 변하고 나의 기준이 바뀌어야 함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변하지 않으려 합니다. 이것이 다툼과 갈등으로 이어져 사회가 변질되어 갑니다. 3) 주인의 손에 달린 평가 요즘은 물질, 소유, 지식, 정보의 양으로 판단 기준을 삼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그 사람의 인격과 성향을 판단하는 기준으로 삼습니다. 바이올린은 켤 줄 알아야 가치가 있는 것처럼 가진 것을 잘 활용할 수 있는 사람이 기준이 됩니다. 그렇게 때문에 기준은 그 사람의 자신에 두는 것이 아니라, 주인의 손에 닿을 때 달라지는 것입니다. 우리 사람은 창조주의 손에 달려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손길이 닿을 때 그 사람은 새롭게 변화됩니다. 나 자신이 값어치가 있다 없다고 평가하지 말길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일으켜 세우신다면 당신은 가치 있는 사람이 됩니다. 오늘도 내 모습이 어떠하든지, 하나님 손에 다룸을 받아 아름다운 소리를 흘려보내는 바이올린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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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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