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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통일칼럼] 헌법적 요구로서의 통일
    1948년 8월 15일, 기도로 출범한 대한민국 제헌국회 제정 헌법에는, 대한민국이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임을 공언하는 내용이 표기되었고(1조,3조) 그 항목은 지금까지 72년 동안 한 번도 수정되지 않았다. 1948년 12월, 유엔은 이 헌법을 인정하고 한반도 유일한 합법정부로 선포했다. 그 항목은 다음과 같다. 제1조 “①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제3조 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한다.” 1987년에 추가된 제4조, “대한민국은 통일을 지향하며,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입각한 평화적 통일 정책을 수립하고 이를 추진한다.” 고. 첫째로, 대한민국은 민주주의 공화국을 택했으며, 공산주의나 사회주의를 택하지 않았다. 둘째로, 대한민국 영토는 남한과 북한을 아우르는 한반도 전체를 포함함을 의미한다. 남북이 유엔에 동시 가입되어 있는 독립국가임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 헌법상으로는 북한 땅은 여전히 대한민국의 영토요 북한주민도 대한민국 국민이다. 북한을 떠나 한국 땅에 입국하는 탈북자라는 이름의 모든 북한주민들에게 즉시 대한민국 여권을 발급하여 한국의 국민으로 받아들이는 근거가 바로 대한민국 헌법 3조의 정신이다. 셋째로 대한민국은 김일성주의나 공산주의나, 사회주의와 민주주의를 섞어 놓은 연방제 통일이 아니라, 오직 자유민주주의를 기본 근간으로 하는 평화적 통일국가를 지향한다. 헌법 4조의 정신이다. 그런 의미에서, 한반도 안에 김일성(독재)주의와 자유민주주의를 각각 인정하는 연방제 통일을 전제로 하는 6.15선언이나, 이것을 재확인한 10.4선언은 헌법정신에 위배되는 정책이라고 볼 수 있겠다. 통일문제는 대한민국의 합헌적, 국가적, 민족적 과제이다. 헌법 66조 대통령의 직무 3항에 “대통령은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위한 성실한 의무를 진다”고 명시하고 있다. 헌법정신에 따르는 통일 노력은 대통령의 엄중한 직무사항인 것이다. 정부는 1969년도부터 통일부를 설치하여 지금까지 초중등학교에서 통일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해마다 수백억의 세금을 별도로 책정하여 국민대상 통일교육을 실시하고 있으며, 탈북민들의 안정된 정착을 돕고 있다. 통일부장관이 있고, 시도교육청에 통일교육 담당 장학사가 있고, 교육부는 해마다 통일교육시범학교를 지정하여 학교별로 통일교육을 장려하고 있다. 통일교육은 국민적 기본교육이기 때문이다. 분단국가 대한민국 땅에 세워진 한국교회도 예외일 수가 없다. 한국교회 지도자들은 통일을 향한 북한선교 사역에 전 교회적 차원에서 진지하고 적극적인 실천을 보여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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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6-10
  • [성서연구] 시대를 위한 고민을 품고
    세상 살기가 점점 힘들어지는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 마음을 추스르기가 힘이 듭니다. 이해되지 않는 일들이 너무 많아지는 것 같습니다. 실체 없는 말들만 난무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이 죽어 장례를 하게 되었습니다. 관을 구덩이에 내리기 전에 사람들이 마지막으로 조의를 표하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풍속에 따라 1불, 혹은 10불씩 돈을 관 위에 얹으면서 조의를 표했습니다. 한 유대인 차례가 되었습니다. <이보게, 자넨 내게 정말 좋은 친구였지. 난 자네 관에 적어도 50불은 놓고 싶네. 내 마음 알거야. 현금이 없어서 수표를 놓네.> 그는 수표에 100불을 써서 관 위에 놓더니 50불을 거슬러 주머니에 넣었습니다. 어떻습니까? 그는 사람들 앞에서 50불을 냈다고 생색도 내고, 관과 함께 흙에 묻힌 수표는 돌아올 염려도 없고, 오히려 50불의 수입이 생겼으니, 그의 처신이 얼마나 약삭빠릅니까? 알맹이는 없이 공허한 논리와 체면과 말들만 난무하는 것 같습니다. 그 흐름에 삼켜지고 있는 우리 모습을 보면서 너무도 안타깝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께서 활동하시던 시대의 유대 사회를 보면 이런 실체 없는 거짓이 가득했음을 알게 됩니다. 본문은 그 대표적 예 중 하나입니다. 당시 선지자들과 제사장들은 지도자였고, 더구나 종교지도자들로서 백성들의 마음을 참되게 이끌어야 할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거짓 평강으로 백성들을 호도했습니다. 예레미야 6장 14절을 보면 <그들이 내 백성의 상처를 가볍게 여기면서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라 했습니다. 평강의 메시지는 누구나 듣고 싶어 합니다. 말하기도 좋습니다. 말하는 자나 듣는 자 모두에게 부담이 없습니다. 그러나 유다 사회에는 평강이 없었습니다. 평강은커녕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의 군대가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바벨론 군대는 하나님께서 유다를 치기 위해 사용하시는 채찍이었습니다. 얼마 후 바벨론 군대는 유다를 침략해서 약탈하고 포로를 끌어갔고, 주전 586년에는 예루살렘을 완전히 정복하여 성전과 궁궐과 성벽을 모두 허물어 폐허로 만들었습니다. 시신이 길거리에 즐비하고 피가 강물처럼 흘렀습니다. 시드기야 왕은 자식들이 죽는 것을 목도해야 했고, 그 후엔 두 눈이 뽑힌 채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그 무서운 날이 다가오는 상황에서도 지도자들은 거짓 평강을 외쳤습니다. 이 무서운 결과에 대해 6장 11-12절은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분노가 내게 가득하여 참기 어렵도다 그것을 거리에 있는 아이들과 모인 청년들에게 부으리니 남편과 아내와 나이 든 사람과 늙은이가 다 잡히리로다 내가 그 땅 주민에게 내 손을 펼 것인즉 그들의 집과 밭과 아내가 타인의 소유로 이전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처럼 거짓평강을 외친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탐욕과 거짓 때문이었습니다. 6장 13절은 <이는 그들이 가장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탐욕을 부리며 선지자로부터 제사장까지 다 거짓을 행함이라>고 했습니다. 오늘 한국 사회에도 거짓 평강이 판을 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조금만 생각해 보면 위태하기 그지없습니다. 북한 핵, 코로나 바이러스, 정직과 양심이 실종된 정치판, 세상과 다를 바 없는 모습을 보이는 교계의 상황 등이 그렇습니다. 이 와중에 교회의 메시지는 어떤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에 교회를 두신 목적은 거짓 평강을 외치면서 눈을 흐리게 하려는 게 아닐 것입니다. 오히려 잠든 자를 깨우고, 취한 자가 정신을 차리게 하고, 방향을 잃은 자에게 바른 길을 알려주고, 쓰러진 자를 일으켜 세워야 할 것입니다. 교회는 시대의 양심이어야 합니다. 변치 않는 잣대이어야 합니다. 인기가 없더라도 옳은 말을 해야 합니다. 우리의 말에는 행동이 뒷받침되어 실체가 있어야 합니다. 시대를 바라보는 고민이 깊어져야 하겠습니다. 그 고민이 기도가 되어 우리 모두가 가정과 주변에서 작은 예레미야로 살길 원합니다. 어려운 시대인데, 하나님께서 위로하시고, 힘을 주시길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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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6-10
  • [시사칼럼] 크보를 아십니까?
    1903년 미국 일리노이 출신으로 이 땅에 와서 기독청년회(YMCA) 창설을 주도한 질레트 선교사(Missionary Philip Gillet, 1872-1938)는 평소 자신이 즐겨하던 공놀이에 관심을 보이는 청년들에게 본국에서 장비를 들여와 직접 그 게임을 가르치기 시작합니다. 이렇게 해서 이 땅에 이 땅의 백성이 참여하는 야구라는 스포츠가 공식적으로 처음 등장했습니다. 2002년 개봉된 <YMCA 야구단>은 이를 배경으로 한 영화입니다. 그리고 115년이 흘러 우리는 한국 야구 역사에 신기원을 이룬 해를 맞았습니다. 야구의 종주국이라 할 수 있는 미국에서 한국프로야구(KBO) 경기가 생중계 되어 많은 이들의 관심과 주목을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전염병의 영향으로 세계적으로 각종 스포츠 리그가 중단되면서 비록 관중은 없지만 공식적으로 치러지며 생중계를 해 주는 몇 안 되는 예외가 한국프로야구(KBO)이기에 일어난 작은 기적입니다. 사실 협상 초기만 해도 미국방송사(ESPN) 측에서 무료중계권을 요구할 만큼 호기심 반 기대 반으로 진행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크보(KBO)’를 향한 관심과 인기가 장난이 아니랍니다. 그간 ‘크보(KBO)’는 몇 번의 중대한 변곡점을 거쳤습니다. 첫 번째가 프로야구의 출범입니다. 1982년 3월, OB 베어스와 MBC 청룡(이상 서울), 삼미 슈퍼스타즈(인천), 삼성 라이온즈(대구), 해태 타이거즈(광주), 롯데 자이언츠(부산), 이상 6개 팀으로 출발한 프로야구는 당시 군부 정권이 시민들의 눈과 귀를 돌리기 위해 주도한 3S 정책(Screen, Sex, Sports) 일환이었다는 견해가 우세합니다. 하지만 프로야구의 출범은 어린이들을 비롯해서 전 국민의 폭발적인 관심과 호응을 이끌어 내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기독청년회 야구팀이 발족한 때는 바야흐로 을사늑약(乙巳勒約) 즈음으로 이후 YMCA 야구단은 번번이 일본팀과 싸웠습니다. “우리가 승리할 때마다 사람들은 정말 하나가 됐소!” 앞서 소개한 영화 속 주인공 이호창(송강호 배우)의 대사입니다. 그렇게 일본과 야구 경기는 일종의 민족 대리전 성격을 띠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고교야구의 인기도 한 몫을 담당했습니다. 현대화 물결에 따라 이촌향도 현상이 발생하면서 고향 생각하는 이들에게 전국고교야구선수권대회의 인기가 하늘을 찌르던 시절입니다. 이후로도 ‘크보(KBO)’는 발전을 거듭했습니다. 그러나 종주국 미국은 물론 일본프로야구의 수준에도 못 미쳤던 것이 사실입니다. 1992년 제1회 한일프로야구 슈퍼게임이 단적인 예가 되겠습니다. 선동열(투수), 고(故) 장효조, 이만수(이상 타자) 등 당대의 스타들이 참가했지만 최정예도 아니었던 일본에 시리즈 전적 2승 4패를 거두며 실력 차이를 확인하고 분루(憤淚)를 삼켜야 했습니다. 그래도 굴하지 않고 꾸준히 실력을 쌓은 한국야구는 마침내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서 큰 사고(?)를 치고 말았습니다. 야구가 정식 종목으로 채택되면서 금메달을 목표로 미국 메이저리그 선수들과 일본 프로야구 선발 그리고 아마 야구 최강으로 불리던 쿠바까지 총출동했던 올림픽에서 9승 전승 우승이라는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어려운 금자탑을 쌓아올렸던 것입니다. 반짝 우승도 아니었습니다. 올림픽 전후에 있었던 각종 국제대회에서 괄목한 성과들을 거두고 있었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합니다. ‘크보(KBO)’ 선수들의 해외 진출도 활발해졌고, 마침내 작년 류현진 선수는 메이저리그 방어율 수위를 차지하기도 했습니다. 이번에 ‘크보’가 미국 방송사뿐만 아니라 전 세계 100개국이 넘는 곳에 강제 진출되는 쾌거가 또 다른 변곡점이 되리라 예상합니다. 물론 아직도 규모나 실력 면에서 최상이라 할 수는 없습니다. ‘크보’에서 연봉 최고액은 이대호 선수(롯데 자이언츠)의 220만 달러인데 비해, ‘메이저리그(MLB)’에서 연봉 최고액은 마이크 트라웃(LA 에인절스)의 3,766만 달러라는 사실만 해도 그렇습니다. 하지만 ‘크보’는 메이저리그에도 없는 몇 가지를 가졌습니다. 첫째, ‘빠던(배트던지기, bat flip)’으로 상징되는 역동성입니다. 둘째, 발달한 영상 기법이나 다양한 먹을거리 등으로 인한 재미입니다. 셋째, 응원 문화의 힘입니다. 야구의 본산 메이저리그가 이번에 ‘크보’를 보면서 자신들의 노후 현상을 목격하고 난리입니다. 대부분 젊은 팬들이 경기장을 가득 채우고 함께 응원하는 모습을 부러워한다는 후문입니다. ‘크보’를 보면서 젊은이들이 외면하는 교회를 돌아봅니다. 바로 지금 이 순간이 새로운 변곡점이 되기를 희망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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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6-10
  • [목회자칼럼] 성령충만한 사람의 5현
    현실에 최선을 다하라 어리석은 사람은 지나간 과거를 후회하고 다가올 미래를 걱정한다. 흘러간 물에서는 두 번 다시 수영을 할 수가 없다. 오는 사람 막지 말고 가는 사람 잡지 마라는 말이 있다. 지나간 일들을 후회한들 아무 소용이 없고 오지도 않은 미래를 사서 걱정한들 무슨 의미가 있는가? 닥치는대로 살아가라는 말이 있다. 함부로 살아가라는 말이 아니라 내일 무슨 일이 닥칠지 아무도 모르기 때문에 사람은 그때그때 닥치는대로 현실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지혜이다. 닥치는대로 하다보면 좋은 일은 습관이 되고 나쁜 일은 피할 길을 찾게 된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달란트가 무엇인지 알수가 없지만 부딪친 현실에 최선을 다하다 보면 할수록 즐거운 일이 발견되고 억만금을 주어도 하기 싫은 일을 알게 된다. 지금이 은혜 받을만한 때요 지금이 구원의 날이다. 그런고로 지금, 여기서, 이 사람이 중요하다. 순간순간에 최선을 다하다 보면 시간이 되고 세월이 되고 역사가 된다. 순간의 최선이 그 사람만의 원칙을 만들어 낸다. 현장에 달인이 되라 필자는 “현장(Field)”이라는 단어를 좋아했다. 현장에 답이 있고 현장에서 실력이 드러난다. 옛적에 선교 현장에 가서 큰 충격을 받았다. 거기 계신 하나님, 앞서 행하시는 하나님은 선교 현장에서 만나고 감동을 받았다. 책상 앞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들이 현장에서는 생생하게 나타난다. 필자는 외국 유학 경험이 없었지만 한 가지 다행한 것은 교회 현장을 한 번도 떠나본 적이 없었다는 것이다. 의과대학에서 캠퍼스 사역을 할 때에도 교회 교육 현장에서 항상 두 부서 이상을 맡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현장파악 능력이 그때 형성된 것 같다. 이론은 좋은데 현장에서 쓸데가 없으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전도를 잘하는 사람은 매주 그 시간에 그 장소라는 전도현장을 확보하고 고수한다. 현재에 감사하라 어리석은 사람은 자기 책임을지지 않고 다른 사람을 원망하고 핑계하고 변명하기를 자주 한다. 누군가를 미워하면 내 마음이 언짢아진다. 불평을 하면 내 마음에 쓴 뿌리가 생긴다. 현재에 감사하면 현찰이 많아진다. 다음에 보자는 사람 안 무섭고 다음에 잘 해준다는 사람 별 볼일 없다는 말이 있다. 과거에 미안해 하고 미래를 약속할 필요가 없다. 오늘 좋은 사람은 다음에도 좋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다. 감사가 그 사람의 수준이다. 하나님께서는 합력해서 선을 이루시기 때문에 긍정적인 사고방식을 가져야 된다. 현역에 은퇴는 없다 팔십오세의 이시형박사는 지하철을 탈때에 노인으로서 무료승차를 하지 않고 일부러 요금을 낸다고 한다. 현역에서 물러난 뒷방 노인이 아니라 자기는 팔팔한 현역이라는 것이다. 구약 성경에서 갈렙은 팔십오세에 최고의 기득권을 내려놓고 산지를 내게 달라고 하면서 특공대 자원을 하였다. 그야말로 노익장을 과시한 것이다. 사명자는 수명자라는 말이 있다. 해야할 될 사명이 있는 사람은 아프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다. 사람들이 현역에서 너무 빨리 은퇴를 한다. 성도는 주님 부르시는 날까지 주의 일을 해야 된다. 필자는 어린 시절 산골에서 자랐다. 모교회가 95년이 되었다. 그 시절에 엄집사님이라는 할아버지가 새벽마다 종을 쳤다. 할아버지 집사님은 종 치는 것이 사명이었기 때문에 오랫동안 건강하셨던 것 같다. 일 복이 많은 것이 복이 많은 것이다. 바쁠 때 진도가 팍팍나가고 힘들 때 힘줄이 불끈 생긴다. 사람은 “바쁘다”, “힘들다”, “죽겠다” 는 말을 하면 안된다. 어느 순간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시절이 온다. “있을 때 잘해 후회하지 말고” 라는 대중가요가 있다. 현저한 수준을 견지하라 좋은 사람이 아니라 탁월한 사람이 되어야 된다. 그저 좋은 곳이 아니라 위대한 곳을 만들어야 된다. 차원이 다르고 수준이 다른 현저한 모습이 되도록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 하루아침에 잘하는 사람은 없다.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실패는 해도 피드백은 남는다. 지금의 내 모습에 결코 안주하지 말고 “주님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기까지 경주를 경주해야 된다. 그래서 최상의, 최고의, 최대의, 최적의 클래스를 이루어야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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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6-10
  • [부산기독교이야기] 피난지 부산
    부산은 마지막 피난처였다. 각지에서 피난민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부산으로 온 첫 피난민은 6월 28일 서울을 떠난 군인가족이었다고 한다. 그 후 전세의 급전에 따라 부산으로 피난민이 몰려들었고 부산 인구는 급증했다. 1945년 당시 부산 인구는 40만 명, 전쟁 발발 직전에는 45만 명에 불과했으나 부산 거주 인구는 급증했다. 피난민들이 몰려왔으나 수용할 수 있는 시설이 없었고, 정부로서는 피난민들에게 신분증을 발급하는 것 외에는 당장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곧 정부와 부산시는 급한 대로 피난민들을 수용할 수 있는 교회당이나 극장, 공장 등을 차출하였고, 임시수용시설을 마련했다. 대표적인 곳이 남구 적기에 위치한 일제 강점기 소(牛) 수출 검역소, 영도의 대한도기, 영도 해안가, 영도 청학동, 대연 고개, 남부민동, 괴정 당리 등 40여 곳에 임시수용소를 만들었다. 그러나 이 모든 곳을 합쳐도 수용할 수 있는 인구는 7만 명 정도에 불과했다. 다수의 피난민들은 거처를 얻지 못해 임시변통으로 천막을 치거나 땅굴을 파고 살았다. 양식은 물론이지만 식수와 전력 부족으로 생활은 극도로 궁핍했다. 국군과 유엔군은 마지막 낙동강 전선에서 저항하고 있었으나 전세의 큰 변화를 가져온 것은 1950년 9월 15일 금요일 감행된 인천 상륙작전이었다. 콜린스 미육군참모총장은 이 작전을 반대했고, 셔먼 해군참모총장은 인천으로의 상륙 성공률 5천분의 1이라고 하면서 반대했다. 미합참도 반대했다. 그러나 맥아더 장군은 작전을 성공으로 이끌었다. 국군과 유엔군은 곧 인천을 점령하고 9월 28일에는 서울을 탈환했다. 이름 그대로 서울 수복이었다. 9월 29일 낮 12시에는 서울 환도식(還都式)을 거행했다. “오늘의 승리는 오로지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이제 서울시민들은 공산군의 입제에서 해방돼 자유와 인권을 되찾았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의 연설이었다. 여세를 몰아 북진하여 한국군 3사단 23연대는 최초로 10월 1일 38선을 돌파하였다(그래서 1956년 9월 14일 국무회의는 이날을 기념하여 ‘국군의 날’로 제정 공포하게 된 것이다), 10일은 원산을, 19일에는 평양을 점령하였고, 26일에는 초산의 압록강까지 진격하여 통일을 눈앞에 두는 듯 했다. 그런데 38선을 돌파하자 김일성과 박헌영은 마오쩌둥에게 긴급 지원을 요청했고, 중국공산당은 10월 5일 한국전 참전을 결정했다. 항미원조(抗美援朝)라는 이름으로. 중공군의 공격은 1950년 10월 25일 본격적으로 개시되었다. 이제 전쟁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고 동족 간의 살육은 중공군에 의해 더욱 심화되었다. 국군과 유엔군은 다시 후퇴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른바 1.4후퇴였다. 서울은 다시 공산군의 수중에 들어갔다. 다시 부산으로 피난민이 몰려들엇다. 1.4후퇴 이후를 흔히 제2차 피난이라고 부른다. 이 시기 부산인구는 84만명으로 불어났다. 이 보다 더 많은 피난민들이 부산으로 오고 싶었으나 정부의 부산 유입 제한 조치로 다소 억제되었으나 생사의 기로를 막을 수 없었다. 1951년 봄 전세는 다시 역전되었다. 국군과 유엔군은 3월 18일 다시 서울을 탈환하였고, 3월 22일에는 38선 이남을 모두 탈환하였다. 그러나 38선을 사이에 두고 남과 북은 치열한 전투를 벌였고 밀고 당기는 장기적인 소모전에 몰입하였다. 전쟁이 교착상태에 빠지자 내외로부터 휴전에 대한 요구가 대두되었다. 마침내 유엔군과 공산군은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에 조인함으로서 3년 1개월간 계속되던 전쟁은 종식되었다. 피난지 부산이 임시수도가 되는데, 전쟁이 발발하자 수도는 6월 27일 대전으로, 7월 16일에는 대구로 이전하였고, 8월 18일 부산으로 수도를 옮겼다. 인천 상륙 작전으로 전세가 역전되자 환도하였는데, 1950년 8월 18일부터 10월 27일까지 70일이 1차 임시 수도였고, 중공군의 전쟁 개입으로 다시 서울을 내줄 수밖에 없었던 1·4 후퇴 하루 전부터 휴전 협정 체결로 환도할 때까지, 곧 1951년 1월 3일부터 1953년 8월 15일까지 부산은 제2차 임시수도였다. 그래서 부산은 2년 10개월7일간 임시수도였는데, 1, 2차를 합쳐 통상 ‘임시 수도 부산 1000일’로 일컬어지고 있다. 부산이 임시 수도일 때, 정부 청사는 경남 도청[현 동아대학교 박물관] 본관에, 보건부와 문교부는 옛 부산시청에, 상공부는 남선전기 사옥[현 한전 토성동 지점]에 자리 잡았다. 교통부 청사는 부산진구 범천동 범곡교차로 인근에 있었기 때문에 아직도 이 일대를 ‘교통부’라 부르고 있다. 국회는 처음에 부산 극장을 의사당으로 사용하다가 후에는 경남도청 상무관(경남도청 체육관)으로 옮겼다. 경남도청 본관 뒤편의 도경찰국은 군경합동 작전사령부로 사용되었다. 경남도지사 관사는 대통령 관저[현 임시 수도 기념관]가 되었고, 남포동 소화장 아파트는 국회의원들의 관사가 되었다. 이런 부산에서 기독교회에는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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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6-10
  • [교회학교를살린다] 신앙의 플렉스
    요즘 젊은이들 사이에 유행하는 단어가 있다. 바로 ‘플랙스’란 말이다. 이 말은 원래는 힘을 주어 구부리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힙합장르에서 주로 사용되면서 물질로 자신의 힘을 과시하는 모습으로 주로 사용되고 있다. 그리고 요즘은 너나할 것 없이 “플렉스 했지 뭐야”를 외치며 마치 오늘만 살 것처럼 소비하고 이를 자랑하는 것으로 인생의 낙을 삼는 경우가 많다. 최근에 한 백화점 문 앞에서 있었던 짧은 동영상은 웃지 못 할 현상을 보여주었다. 그 동영상은 백화점 셔터가 채 올라가지도 않았는데 마치 림보를 하듯이 사람들이 그 낮은 셔터 사이로 비집고 들어가서는 백화점의 한 명품 매장을 향해 필사적으로 뛰는 풍경이었다. 곧 가격이 인상되기 전에 구매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처절한 몸부림이었다. 코로나19 사태로 인해 이런 저런 삶의 제약에 부딪힌 사람들이 보복 소비를 한다는 기사를 본적도 있다. 면세점에서 쌓인 명품 재고를 온라인으로 팔자 순식간에 다 팔렸다고 한다. 플렉스가 보여주는 현상은 주로 명품, 사실은 사치품과 같은 고가 물품들로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는 것이라 많은 사람들이 안 좋게 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인생에 한번쯤은 저렇게 “플랙스 해버리고 싶다.”는 마음을 많이들 갖고 있다. 이처럼 어떤 사람들은 사치품으로 플렉스 해버리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명예나 성공에 모든 것을 걸기도 하며 인생의 쾌락을 찾아 헤메기도 한다. 누구나 저마다 자신이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것에 인생을 쏟으며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진짜 중요한 것은 무엇으로 자신을 보여주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많은 이들이 신앙적으로 무가치한 것을 잡고 살아간다. 배금주의는 그 대표적인 지푸라기이다. 그 모습을 보면서 예수님의 말씀이 떠올랐다. 사람은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누가 주인인가 하는 문제는 결정적인 순간에 드러난다. 혹자는 코로나19 사태로 인해 위기 속에서 성도들의 참 모습을 보게 되었다고 한다. 사상 초유의 상황 속에서 어떤 이들은 오히려 신앙적인 깊이가 더해지고 다시 한 번 유한한 인생을 되돌아보는 기회를 갖기도 하는 반면, 어떤 신앙인들은 몸이 멀어지자 마음도 멀어지며 신앙생활에 나태한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다음세대들의 경우는 더욱더 극단적이다. 위기 속에서 보이는 부모님과 어른들의 모습 속에서 우리의 다음세대들은 자연스럽게 학습이 된다. 어떤 가정은 온라인 예배도 각자 드려서 다음세대들이 예배를 제대로 드렸는지 확인이 안 되는 경우도 있고 연락두절이 되는 등 오히려 신앙생활이 헤이해지는 경우도 생겨났다. 그러나 어떤 가정은 온 가족이 함께 온라인으로 예배하는 기쁨을 만끽하고, 부모님과 함께 한 성경공부 활동 과제를 성실하게 수행하면서 가족 구성원간에 더 끈끈한 관계가 형성되고 한층 더 의미 있는 신앙생활을 하는 경우도 늘어났다. 이 힘든 시기를 다른 그 어떤 것보다도 신앙에 쏟아 부으며 이겨내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플렉스’라는 용어가 나쁜 의미로만 사용되는 것은 아니다. 과감하게 이웃을 위해 기부하는 경우에도 사용되고 있고, 누군가를 위해서 아낌없이 쏟아부어버리는 이타적인 행위를 나타낼 때도 활용되고 있다. 지금 우리 다음세대들에게 필요한 것은 신앙의 플렉스이다. 신앙의 플렉스란 신앙에 자신의 삶을 전적으로 걸고 살아가는 것이다. 자신을 신앙인으로 규정하며 드러내고 살아가는 것이다. 움츠려드는 신앙생활을 활짝 펼쳐서 신앙의 가치관으로 세상 속에서 당당히 살아가는 것이다. 선한 영향력을 끼치며 이 땅의 유한한 것들에 연연하지 않고 행복한 바보가 되어 살아가는 것이다. 신앙의 플렉스를 위해서 이 위기의 시간을 잘 활용해야 할 것이다. 곧 여름성경학교 시즌이 다가온다. 모이는 게 위험한 시대 속에서 과연 여름행사가 가능할 것인가 걱정하는 이들이 많다. 사회에 근심거리가 되지나 않을까 조심하는 분위기이다. 그러나 이럴 때일수록 신앙의 플렉스를 기획해보자. 모이기 어려우면 각 가정에서 비대면으로 할 수 있다. 교회에서는 잘 준비된 성경학교 킷트를 가정에 배달해주자. 교회학교 교사들은 다양한 sns를 활용하여 신앙교육자료를 제공해주고 지속적으로 인간적인 연락을 주고받으며 관계를 이어가자. 교회의 어른들은 재택기도회를 통해 다음세대와 여름행사를 위한 기도의 열기를 계속 이어가보자. 가정에서는 매일매일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가정예배 하는 신앙인의 일상생활을 자녀와 함께 시작해보자. 신앙의 위기 순간에 오히려 신앙에 플렉스하는 어른들의 모습을 통해 우리의 다음세대들이 진짜 신앙이 무엇인지 이 기회에 제대로 배울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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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6-10
  • ‘확찐자’ 예방하려면 아침 2 : 점심 3 : 저녁 1 비율로 드세요
    생활환경이 편리해지면서 현대인의 체형은 팔다리가 가늘어지고 올챙이 배처럼 배가 볼록하게 나오는 복부비만형으로 바뀌고 있다. 특히 최근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한 외부활동 제한 요인으로 운동량이 줄어든 탓에 ‘확찐자’라는 우스갯소리가 등장할 만큼 비만은 우리사회에 큰 이슈로 떠오르고 있다. 대한비만학회는 한국인의 허리둘레가 남자는 90㎝(35.4 인치), 여자는 85㎝(33.4 인치) 이상일 때 복부비만으로 규정했다. 특히 근육량이 적은 노인이나 체중 감소를 유발하는 질환을 가진 환자에게 복부내장지방의 적절한 지표인 허리둘레 측정은 아주 중요하다. 뱃살 빼는 지름길에 대해 알아보자. Q1) 남녀의 복부비만은 다른가? 복부비만은 지방의 분포 양상에 따라 내장지방형과 피하지방형으로 구분한다. 내장지방형은 복벽 내 장기 사이에 지방이 축적되는 경우로 중장년 남성에서 흔하며 피하지방형은 배의 피부를 잡았을 때 두께가 느껴지는 경우로, 중년 여성에게 많다. 당뇨병, 고지혈증, 고혈압 등 성인병과 그에 따른 합병증의 발생 가능성이 큰 후자가 더 위험하다. Q2) 많이 먹지도 않는데 왜 살이 찌고 배가 나오나? 먹는 양보다 활동량이 적거나, 먹는 양은 적지만 지방섭취량이 많기 때문이다. 남성들이 회식 때 마신 술은 간에서 지방합성을 촉진시키고 고지방의 안주는 간의 지방합성을 활성화해 지방간, 혈중 콜레스테롤과 중성지방을 늘려 복부비만이 되기 쉽다. 스트레스 또한 복부지방이 느는 원인이 될 수 있다. Q3) 뱃살을 빼기 위해 저녁을 잘 거르는데 효과가 조금씩 나타난다. 계속해도 되나? 일시적인 현상이다. 굶게 되면 우리 몸은 맨 먼저 에너지 효율이 낮은 근육량부터 줄여나가기 때문에 체중이 준다. 이때 체중감소는 근육량의 감소이지 체지방량의 감소가 아니다. 결국 체지방량을 감소시키기 위해선 끼니를 거르면 안 된다. 굶으면 에너지 부족의 위기 상황에 대비해 본능적으로 섭취한 열량을 에너지 효율이 가장 높은 지방 형태로 저장하는 항상성을 유지하는 것이 우리 몸이다. 내장지방량을 즐이기 위해서는 꼭 식사를 하되 아침 점심 저녁을 2대 3대 1의 비율로 먹자. Q4) 윗몸일으키기, 훌라후프를 하면 배가 들어간다는데? 윗몸일으키기는 근육을 키우는 무산소운동으로, 지방보다는 탄수화물이 운동에너지로 많이 소비되면서 젖산이 축적돼 피로를 느끼게 한다. 반면 걷기, 수영, 에어로빅댄스, 자전거 등 몸 전체를 율동적으로 움직이는 유산소운동을 하면 지방이 에너지로 소비되기 때문에 체지방 감량에 효과적이다. 복부비만 조절을 위해선 운동 강도보다는 시간을 증가시키는데 중점을 둬야 효과적이다. 보통 30~60분 실시하며, 20~30분씩 2회에 나눠 하는 것이 좋다. 훌라후프 돌리기는 배의 근육과 장을 자극해 혈액순환을 원활하게 해주고 변비예방에 효과가 있다. Q5) 복부 비만으로 병원을 방문하면 어떤 검사를 받나? 신체계측기를 이용한 비만도 측정, 체지방 측정기를 통한 체구성 정도를 알아보고, 일반혈액검사와 호르몬검사 등으로 기저질환이나 합병증의 동반여부 확인과 복부 CT촬영을 이용한 체지방축적 정도를 확인한다. Q6) 복부비만 치료는 어떻게 이루어지나? 식생활습관 교정과 운동이 가장 중요하다. 약물치료, 지방분해술, 지방흡입술 등은 보조수단이다. 복부비만의 치료 목표는 3~6개월간 허리둘레의 5~10% 정도를 줄이는 것이다. 이 정도 줄인다고 해서 정상 허리둘레가 되진 않지만 그 과정에서 식생활습관이 교정되기 때문에 복부비만으로 인한 동반질환의 위험도가 낮아져 복용 중인 약도 줄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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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6-10
  • [은혜의말씀] 기도는 만사를 변화시킨다(눅 18:1-8)
    이 세상은 끝없는 변화를 필요로 합니다. 우리의 믿음의 생활도 고인 물이나 썩은 낙엽처럼 방치되어 있어서는 안 됩니다. 변화가 필요합니다. 우리를 변화시키는 것 중에 <기도>가 있습니다. 바로 그 기도는, 만사를 변화시킵니다. 1. 기도는 나를 변화시킨다. 기도는 제일 먼저 기도하는 그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눅18:1) ‘예수께서 그들에게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비유로 말씀하여 이르시되’ 1) 기도는 주님의 명령을 순종하게 되는 것이요, 2) 기도는 내 마음 속에 있던 염려와 낙심이 물러갑니다. 3) 기도하면, 전능하신 하나님께 가까이 하는 길이 되며, 4) 기도할 때, 소원을 응답받고 구원받게 됩니다. 5) 기도할 때 내가 하나님의 보호와 사랑을 받습니다. (시145:18-20) ‘야훼께서는 자기에게 간구하는 모든 자 곧 진실하게 간구하는 모든 자에게 가까이 하시는도다. 그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들의 소원을 이루시며 또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사 구원하시리로다. 야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은 다 보호하시고 악인들은 다 멸하시리로다’ 기도는 먼저 기도하는 그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2. 기도는 사람들을 변화시킨다. 기도는 다른 사람들을 변화시킵니다. 곤란한 상대와 대적까지도 변화시킵니다. 기도는 재판장의 마음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눅18:2-4) ‘이르시되 어떤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한 재판장이 있는데 그 도시에 한 과부가 있어 자주 그에게 가서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 하되 그가 얼마 동안 듣지 아니하다가 후에 속으로 생각하되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나’ 3. 기도는 환경을 변화시킨다. 기도는 절대 안 될 처지에 있는 환경을 변화시킵니다. 과부의 간청이 재판장을 움직이자, 그 과부의 문제는 해결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눅18:5-6)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하였느니라. 주께서 또 이르시되 불의한 재판장이 말한 것을 들으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기도는 환경까지 변화시킵니다. 4. 기도는 하나님을 감동시킨다. 기도는 결국, 하나님을 감동시키며 역사하게 하십니다. (눅18:7-8)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결국, 어떤 기도가 만사를 변화시킵니까? 1) 낙심하지 않고 드리는 기도입니다. 2) 강청하는 기도입니다. 3) 원한의 기도입니다. 4) 응답받을 때까지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기도입니다. 기도할 수만 있다면, 무슨 문제를 만나든지 우리는 두려워할 것도 없고 염려할 것도 없습니다. 기도는 만사를 변화시키기 때문입니다. 문제를 만나면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나아가는 기회로 삼고 간절히 매달리십시오!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고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주실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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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6-10
  • [성경인물탐구] 뽕나무 위의 세리 장 삭개오
    예수님 당시의 유대는 로마의 속국이었고 속국인 유대는 로마에 많은 액수의 세금을 바쳐야 했습니다. 로마가 유대인에게 세금을 걷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들이 바로 세리였습니다. 그러나 세리는 동족들로부터 돈을 착취하여 로마에 아부하고 그 자신들도 부를 쌓았기 때문에 보통 사람들로부터 창기와 같은 죄인으로 취급받았습니다. 삭개오는 그의 이름이 <순결>이라는 뜻이었으나 세리장이 되기까지 더욱 열성적으로 세리의 일을 하였고, 그래서 부자가 되었지만 사람들로부터는 따돌림을 받는 외로운 사람이었습니다. 부자였지만 외로운 사람이었던 그는 다른 사람의 따뜻한 말 한 마디와 자신에 대한 인정을 갈구했습니다. 그러던 중 그에게 반가운 소식이 들려왔는데, 그것은 세리도 마다하지 않고서 친구처럼 가까이하는 사람이 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예수라는 사람은 세리인 마태라는 사람도 자기 제자로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삭개오의 관심은 자연히 예수에게 쏠리게 되었고, 그러던 중 예수가 그의 마을인 여리고를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삭개오는 예수님을 만나고자 했습니다. 최소한 그가 어떠한 사람인지 보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도저히 예수님께 가까이 갈 수가 없었습니다. 사람도 많거니와 평소에 삭개오를 미워하던 사람들이 길을 열어 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키가 작았던 삭개오는 궁여지책으로 뽕나무 위로 올라가게 되었습니다. 이미 그에게 세상에서의 재물과 명예는 무의미한 것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의 마음에는 예수님과 그분을 보고자 하는 생각만이 가득 차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열정을 가지고 자신을 보고자 하는 삭개오를 이미 알고 계셨고 어쩌면 예수께서 여리고로 지나가신 것도 삭개오를 만나시기 위한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삭개오가 있는 나무를 향해 다가오셨고 그를 쳐다보시며 내려오라는 말씀과 함께 스스로 삭개오의 집에 유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행동은 삭개오를 비롯한 모든 사람들이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요청에 대한 삭개오의 반응은 순수하면서도 신속한 것이었습니다. 이제껏 사람들로부터 멸시와 소외를 당해 왔던 그로서는 예수님의 말씀이 놀림으로 들릴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의 마음을 조금도 의심치 않았습니다. 그는 기뻐하며 즐겁게 예수님을 영접했습니다. 그는 나무에서 급히 내려왔고 곧바로 예수님을 자신의 집에 영접했습니다. 그 광경을 보던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이 죄인의 집에 자청하여 들어갔다고 서로 수군대기 시작했습니다. 그들 중 어떤 이들은 예수님의 행동 때문에 실망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삭개오의 한 영혼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그런 오해도 불사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자신의 집에 영접해 들인 삭개오는 어떤 특별한 가르침을 받지도 않았지만, 새로운 삶을 살고자 하는 결단을 내렸습니다. 그는 먼저 자신이 불의한 방법으로 모았던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자에게 주겠다고 말합니다. 또한 그가 토색한 것이 있으면 그것의 4배를 갚겠다고 약속합니다. 삭개오는 예수님을 만남으로써 예수님의 행동에서 복음의 의미를 발견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결단을 확실히 하기 위하여 자신의 입으로 예수님 앞에서 선언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삭개오의 마음을 아셨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믿음과 회개가 분명히 드러나지 않았지만, 그의 결단에는 분명한 회개의 열매가 나타나 있습니다. 그의 회개와 결단은 바리새인의 것보다 수준 높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삭개오의 고백이 그가 구원받은 증거라고 보셨고, 그의 구원을 선언하신 것입니다. 그의 결단은 성령의 역사가 아니고서는 결코 되어 질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삭개오가 세리로서 죄인 취급받고 따돌림을 당해 왔지만 그도 역시 아브라함의 자손으로서 구원의 반열에 참가할 자임을 선언하셨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세리나 창기를 죄인 취급하고, 이방인들을 개와 같이 여기면서 자신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자랑하였습니다. 그러나 세례요한과 사도 바울은 신앙과 행위가 따르지 않는 한 아브라함의 혈통적 후손이라는 사실은 무의미하다고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삭개오는 죄인 취급받는 자였으나 예수를 믿음으로써 진정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예수님으로부터 인정받았습니다. 예수님은 삭개오 사건을 계기로 자신이 세상에 오신 목적을 분명히 밝히십니다, 그것은 잃어버린 자, 죄인, 약하고 병든 자를 찾아 치유하고 구원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는 자, 스스로 높이는 자는 예수님께 걸려 넘어지게 됩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당시의 신앙 좋은 사람들보다 세리와 창기가 먼저 구원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종교적인 행위나 관습은 그 안에 진정한 믿음을 담기 전에는 무의미합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종교인보다 겸손한 죄인을 부르시기 때문입니다. 낮고 겸손한 자로 예수님만이 인생의 길이요 진리임을 알고 삶으로 승리하시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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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6-10
  • [목회자칼럼] 뉴트로(New-tro)를 신앙의 본질로
    ‘내 손에 잡은 것이 많아서 손이 아픕니다. 등에 짊어진 삶의 무게가 온 몸을 아프게 하고, 매일 해결해야 하는 일 때문에 내 시간도 없이 살다가 평생 바쁘게 걸어 왔으니 다리도 아픕니다…’ - 노사연, 바램 중 어디선가 노사연의 ‘바램’이라는 곡이 나오는데, 익숙한 여성의 목소리가 아닌 남성의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아니, 누가 이렇게 노래를 불렀지?” 바로 미스터트롯의 임영웅이라는 가수였습니다. 미스터트롯은 최근 최고의 시청률을 올린 새로운 트롯 오디션 형식의 예능 프로그램입니다. 그 순간 저의 머릿 속에는 새로운 혼란이 일어났습니다. “저 노래는 노사연의 노래인 걸로 아는데..?” 분명 가사와 멜로디는 중년 여자 가수인 노사연의 곡 ‘바램’인데 귀에 들리는 남자 가수의 트로트 ‘바램’은 완전히 다른 형식에 새로운 옷을 입고 젊은이들의 귀에 속삭이듯 부르는 노래였습니다. 트로트의 새 영웅, 임영웅을 배출한 프로그램 미스터트롯이 제작되기까지 50~60명의 방송 인력이 투입되고, 3개월을 준비했으며, 참가자를 면접하는 기간 역시 3개월이 걸렸다고 합니다. 미스터트롯을 통해 자신의 노래 실력을 검증받기 위해 모인 사람들은 약 12,000명 정도이며, 이 중 100명만 선발되어 노래와 함께 눈물겨운 사연이 전파를 탔습니다. 특히, 이 프로그램의 최종 결선에서는 70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동시에 실시간 문자투표를 해 서버가 다운되기도 한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저는 소위 말하는 미스터트롯 현상을 지켜보며 다음세대를 향한 새로운 도전을 받았습니다. 뉴트로(New-tro)가 무엇일까요? 새로움(New)이 복고(Retro)가 합쳐진 신조어로 옛 것을 새롭게 즐기는 경향을 말합니다. 유행은 돌고 돈다는 말처럼 실제로 과거에 유행했던 노래,디자인, 패션 등이 현대에 맞게 다시 돌아와 새 옷을 입는 것을 의미합니다. 특히, 뉴트로는 문화 부분에서 디지털 시대에 아날로그적 감성을 최첨단 기술과 접목하여 중, 장년층에게는 추억과 향수를 전하고 다음세대인 젊은이들에게는 새로움과 재미를 안기며 나타났습니다. 그것이 바로 ‘미스터 트롯’이라는 형태로 보여준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신앙도 코로나19의 어려운 시기에, 뉴트로(New-tro) 현상이 일어난다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다면, 먼저 우리는 지금을 진단하고 가야 합니다. 현 시대에 신앙의 문제점은 무엇일까요? 첫째, 개인주의와 자기중심적인 문화로 대면적인 관계 단절이 심한 시대에 더욱 심화되어 나타나는 경향입니다. 둘째, 오랫동안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집단 공동체성이 약해지고 온라인이나 SNS과 같은 가상공간이 활성화 되므로 현장성이 약해졌습니다. 셋째, 정신적·예술적·종교적 부분에서 육신적·건강 우선주의로 변화되는 현상입니다. 넷째, 나눔과 돌봄이 어려워지고 개인과 집단 우선주의 상황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뉴트로(New-tro) 신앙의 방향을 잡을까요? 첫째, 다음세대의 입장에서 교회다운 교회로 연습해 봅시다. 기성교인 중심의 신앙에서 다음세대를 위해 새로운 표현과 문화, 습관을 적용시켜 봅시다. 한 달에 한번은 다음세대를 위해 영화 예배를 드리거나 찬양 콘서트를 하며 다음세대가 예배를 친근히 할 수 있도록 도울 수 있습니다. 둘째, ‘새로운 창조적 교회 경험하기’입니다. 코로나19로 현장예배가 중요성을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나를 이곳으로 부르신 하나님, 이곳에서 공동체를 만드신 하나님, 이 공동체에서 예배를 드리는 나 자신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새롭게 인식하면서 하나님이 만드신 공동체를 뉴트로 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교회의 이미지를 리뉴얼해야 합니다. 코로나19로 인해 교회는 이기적인 집단이라는 프레임이 씌어졌습니다. 지금까지 잘못한 것들은 과감히 반성하며 지금부터 다시 본질로 돌아가 교회의 이미지를 바꿔야 합니다. 이를 위해 온,오프라인을 활용하여 교회의 본질적 요소를 알리는 것도 중요합니다. 교회가 교회다울 때, 교회가 복음을 안고 공동체를 살릴 때 다시 세상이 교회를 찾게 될 것입니다. 미스터트롯의 인기와 뉴트로라는 시대적 흐름으로 인해 트로트가 새로운 전성기를 맞이한 것처럼, 코로나19를 통해 한국교회가 위축되는 것이 아닌 우리의 정체성을 회복하고 교회 밖을 사랑으로 섬기며 뉴트로의 신앙을 회복되기를 소망합니다. 사랑하는 독자 여러분, 어려운 말 같아 보이지만 그럼에도 한 번 더 오늘 다시 뉴트로(New-tro)를 꿈꿔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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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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