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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목회자칼럼] 융합형 인재
    주께서 부르시고 교회가 필요로 하는 통합형 인물 주께서는 그 시대에 그 땅에서 그 사람을 들어쓰신다. 하나님께서 부르시고 교회가 필요로 하고 시대가 요청하고 내면의 절규에 응답하는 사람이 필요하다. 세계적인 코로나 팬데믹을 지나며 대한민국은 격동의 세월을 헤쳐 나가고 있다. 저출산, 고령화, 인구절벽, 지방소멸의 시대가 눈앞에 펼쳐지고 초등학교들이 폐교, 분교의 길을 걷고 있다. 사람들은 혼밥, 혼영을 즐기며 1인 가구가 늘어나고 있다. 1인 가구 5인중 하나는 고독사 위험군으로 분류된다. 교회도 예외 없이 예배인원이 줄어들고 주일학생이 급감하고 중․고등부가 없는 교회가 많다. 신학교가 미달되고 젊은 사역자들이 전도사로 매이는 것을 싫어하고 차라리 알바를 한다고 한다. 교회마다 봉사할 일꾼이 부족하여 사람을 찾고 있지만 앞으로 시간이 더 지나도 개선의 여지가 없다는 것이 암담한 현실이다. 코로나를 지나며 소그룹이 강한 교회는 든든하다 영상예배를 드릴 수밖에 없었던 코로나를 지나며 그나마 소그룹 모임이 활성화 된 교회는 코로나의 부작용이 적은 것을 볼 수 있다. 어쩔수 없이 대면 모임이 폐지되고 축소되고 통폐합이 되었다. 주일학교가 소멸되어 가는 지경에서 다음세대의 중요성을 목 놓아 강조하지만 그 사이에 실버세대는 훨씬 더 큰 소외감을 느낀다. 그 동안 교회를 건축하고 몸 바쳐 헌신했던 기성세대가 지금은 뒷방 노인 취급을 받고 있는 것이다. 노인들을 위한 구체적인 프로그램을 만들어야 된다. 삼일기도회 찬양대를 온가족 찬양대로 구성하니 할머니와 어머니와 자녀들이 함께 찬양한다. 금요기도회도 온가족 기도회로 진행을 해서 3대가 함께 참여한 가정을 축복하고 주일학교 찬양팀이 나서고 청소년들을 응원하고 특별간식을 주니 교회 분위기가 사뭇 생기와 소망이 넘치게 된다. 농어촌 교회를 통폐합할 수는 없다. 효율을 따지며 역사를 지우는 어리석음을 범해서는 안 된다. 사람이 적다고 문을 닫을 수는 없다. 비록 작아져도 모교회는 역사와 전통을 이어가는 못자리판이다. 명절에 고향교회 사랑하기 운동을 펼치고 휴가철에 1년 동안 준비한 선물과 학용품을 가지고 모교회를 찾아가서 여름성경학교를 섬겨주면 의미심장한 휴가가 되고 농어촌 미자립교회는 소박하지만 성경학교를 열 수 있다. 도심교회와 지방교회가 자매결연을 통하여 농수산물을 직거래하는 선교바자회를 할 수 있다. 인적, 물적 교류와 은혜 프로그램을 공유할 수가 있다. 각자 도생하며 모두들 힘겹고 외롭게 살아가는 시대에 아름다운 융합, 통합사역을 기대한다. 통합예배의 필요 코로나 때 억지로 떠밀려서 영상예배를 드렸지만 뼈아픈 후유증이 남았다. 영상예배를 드린다고 핑계 대던 많은 성도들은 코로나가 끝나가는 지금도 여전히 출석을 하지 않고 있다. 코로나 기간에 대면예배와 영상예배도 드리지 못한 교회는 맥이 끊어져 회복에 상당한 어려움을 겪고 있다. 영상예배에 맛을 들인 성도들은 유튜브에 중독이 된 것처럼 전국, 아니 세계 교회를 훑어보면서 수많은 메시지를 접하다 보니 이 또한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생기고 예배의 무게감과 말씀의 진지함이 현저히 떨어지게 되었다. 온라인예배에 계속 투자하기에도 무리가 있고 중단을 하자니 그나마 소수의 인원도 단절이 된다. 대면예배를 강조하고 영상예배를 무시한들 성도들은 이미 영상예배에 익숙해져 버렸다. 어쩔 수 없이 영상예배와 대면예배를 병행해 나가야 된다. 대면예배를 강화하기 위해서는 통합예배를 드려야 된다. 온 세대가 참여하여 자녀들과 부모들이 함께 예배하며 성경봉독, 성경암송, 특송에 어린이들을 동참시켜 통합예배를 드려야 된다. 주일예배를 몇 부로 드리는 교회의 봉사하는 성도들은 예배 두 번 드리기를 통하여 원만한 봉사활동과 예배 집중력을 높일 수가 있겠다. 온 세대가 참여하면 예배 분위기도 역동적이고 활기차게 될 것이다. 어린이가 예배순서를 맡으면 할아버지, 할머니도 나온다. 교회학교 통합반 많은 교회들은 나이별로나 학년별로 반을 편성할 수 없을 정도로 주일학생 숫자가 적다. 그 동안 한국 교회가 주일학생을 너무 세부적으로 갈라놓아서 부모와 자녀들이 함께 예배드리지 못하고 주일학생들이 한 교회라는 공동체 의식이 희박하다. 옛날 주일학생이 만 명이 모였던 부산 서부교회는 통합반을 운영하였다. 학년이나 나이, 거리에 상관없이 반 편성을 하였다. 지금은 어쩔 수 없이 통합반을 운영해야 된다. 교사 중심으로 반 목회를 할 수 있다. 한 교사를 중심으로 초등학교 1학년부터 6학년까지 한 반으로 구성하니 한 반이 곧 주일학교다. 통합교육 교회마다 전도사 숫자가 적고 주일학교 교사가 부족하다. 배울 학생도 적지만 가르칠 교사도 늘 모자란다. 지도자가 없으니 학생이 없고, 학생이 없으니 지도자를 모실 수도 없다. 교인이 적으니 시설 투자도 못하고 시설이 뒷받침이 안 되니 사람들도 오지 않는 악순환이 되고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고착화 된다. 교인도 적고 일꾼도 없고 돕는 자도 없고 동역자도 없고 목회자 혼자서 해내자니 점점 지치고 힘이 빠진다. 중직자들이 은퇴를 하고 젊은 일꾼들이 수급이 안 되니 점점 고령화가 되고 지방소멸이라는 말이 남의 말이 아니다. 전문가가 필요한 시대에 교회에는 오히려 신학을 전공한 목회자 수급은 비상이 걸려있다. 이러한 답답한 현실을 타개하기 위해서라도 평신도를 깨워야 된다. 교회에 신앙이 좋고 은사가 탁월한 성도가 있으면 일정 교육을 시켜서 각 교회에서 교육전도사 수준의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평신도 일꾼들을 일으켜 세워야 된다. 훈련된 평신도를 전진 배치시킴으로 은사가 활용되고 예산이 절감되고 교회가 활성화 되고 아름다운 동역이 이루어짐으로 통합사역이 가능하겠다. 어떤 교회는 중․고등부, 청년회 모임을 토요일에 하고 주일은 중등부 이상 학생들은 교사로 투입해서 주일학교가 활성화 되었다고 한다. 학부모와 어린이와 교사, 가정과 학교와 교회가 유기적으로 연결, 연합이 되어야 된다. 사도바울이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고 한 것처럼 올라운드 플레이어, 전천후 크리스천이 되어야 된다. 모든 성도가 가르치든지 배우든지 섬기든지 기도하든지 후원하든지 전도하든지 한 가지는 동참해야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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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6-30
  • [이상규 교수의 역사탐색] 상해임시정부 군사부장 도인권 목사
    우리에게 익숙치 못한 인물이지만 독립운동에 투신하고 공산주의와 싸웠던 기독교계 인물이 있다. 그가 감리교의 도인권 목사(都寅權, 1880-1969)이다. 오늘은 그가 걸어갔던 자취를 소개하고자 한다. 1880년 1월 17일 평안남도 용강(龍岡)에서 태어난 그는 어려서 한문교육을 받으며 성장했으나, 10살에 아버지를 잃고 스스로의 길을 개척하여 14세 때는 평양으로 이주하였다. 24세가 되던 1904년 대한제국 기에 무관학교 군사특별과에 입학하였고 졸업 후 교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런데 1907년 군대가 해산이 되자 교육운동에 투신하였다. 용강에 충일학교를 설립하고 황해도 재령(載寧)의 문창학교와 안악(安岳)의 양산학교에서 교직생활을 시작하였다. 여기서 김구(金九)와 만나면서 독립운동에 더 적극적으로 가담하게 된다. 1910년 국권피탈이 되자 기독교에 소망이 있다고 판단하여 기독교에 귀의하였고 미국북장로교회 선교사 밀러(F. S. Miller, 민노아)에게 세례를 받았다. 그는 1892년 11월 내한하여 언더우드가 설립한 예수교학당(후에 경신학교로 발전한다)에서 일했고, 서울 연못골 일대, 황해도와 충청도 일대에서 사역했던 인물이다. 1910년 12월에는 안중근(安重根)의 동생 안명근(安明根)의 독립운동자금모금사건이 탄로되자 도인권은 김구 및 해서교육총회 지도자들과 함께 투옥되었다. ‘해서교육총회’란 1908년 황해도 지역의 교육을 위해 조직된 교육계몽단체인데, 황해도 각처에 설립되어 있는 구식 서당을 근대적 학교로 전환시키고 교육기관을 유기적으로 연결하여 교육활동을 촉진하자는 것이 설립 목적이었다. 이 조직의 학무총감이 김구였다. 그런데 안명근이 군자금 모금을 빌비로 민족지도자들과 접촉했다는 이유로 황해도 일대의 민족지도자들을 체포하거나 구금했는데, 해서교육총회 지도자들도 이 사건으로 모두 검거된 것이다. 이것이 이른바 해서교육총회사건인데, 안악사건(安岳事件)으로 불리기도 한다. 이때 도인권은 10년 형을 언도받고 6년간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그가 감옥에 있을 때 일본 경찰관이 불당(佛堂)을 건축하고 모든 죄수들에게 분향배례(焚香拜禮)를 요구했으나 도인권은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로 이를 거부하여 구타를 당하기도 했다. 가출옥 조치를 허락했으나 출옥시키지 않으면 나가지 않겠다고 고집하여 형기를 다 채우고 풀려났다. 출감한 도인권은 평양교회를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계속하다가 1918년 상해(上海)로 망명하여 상해임시정부 군사국장, 무관학교 교관·학도대장, 임시의정원 부의장, 상해거류민단장 등을 역임하였다. 1921년에는 고려혁명위원회에 가입하여 시베리아로 가서 공산주의자들과 대결하고 독립운동을 하였다. 1922년 10월부터 남감리교회에 소속하여 외수청(外水淸) 구역을 담임하였고, 이후 시베리아지방의 선교사업에 투신하였다. 1929년에는 소련 공산정권의 종교 핍박을 피해 교인들과 함께 중국 훈춘(만주 간도)의 동흥진으로 도피하여 여기서 6개의 교회와 5개의 학교를 설립하는 한편 동흥진교회의 담임으로 시무하였다. 1931년 만주사변 당시에는 무장을 하고 떠를 지어 다니던 공산당 비적(匪賊)들에게 잡혀 사형 직전까지 갔다가 일본군 토벌대장의 도움으로 석방된 일도 있다. 이때 도인권 목사와 교회는 도인권 목사를 구해준 토벌대장인 다케모도(竹本) 헌병대장에게, ‘일본 황군 헌병대장 다께시모(竹下)에게 감루(感淚)를 금치 못하며’ 라는 제목의 감사장을 보낸 바도 있다. 이를, 일제의 가혹한 정치보다 공산당의 잔혹이 더 심했다는 의미라고 민경배 교수는 해석했다. 또 일본 감리교 신자로서 훈춘 영사관 부영사로부터 파괴된 예배당 재건비 60만 원을 받아 교회당을 재건축하였다고 한다. 만주에서 공산주의를 경험한 도인권 목사는 반공주의자였다. 그는 고난 중에서도 구령사업을 계속하여 많은 신자를 얻었고, 그가 관여한 동흥학교도 크게 발전하였다. 10년간 동흥진에서 일한 도인권 목사는 1939년 6월 간도의 연길구역으로 파송되어 연길교회와 유치원을 설립하여 해방 당시까지 시무하였다. 해방되던 해 10월 귀국한 그는 3.1동지회를 조직하여 대표로 일하다가 황해도 옹진으로 가 한국독립당 옹진지당부 지도책임,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옹진지부장으로 봉사했고 또 옹진중학교도 설립하였다. 1947년에는 옹진읍교회를 담임하며 목회하다가 1950년 6.25전쟁 당시 공산학정을 피해 월남하였다. 감리교의 제주도 선교사업이 시작되면서 제주도로 이동한 그는 1957년 4월까지 7년간 시무하면서 제주중앙교회 등 7개 처에 교회를 설립하였고 제주지방 감리사로 재직하였다. 민족의 수난기에 한국과 만주, 황해도와 제주도에서 반공주의 신념으로 살았던 한 목회자의 여정을 이해하는 것은 우리 민족과 교회의 역사를 헤아리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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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상규교수의 역사탐색
    2023-06-30
  • [소강석칼럼] 오야마 레이지를 추모한다
    일본의 과거사 사죄 운동에 앞장서 온 오야마 레이지 목사가 하나님의 품에 안겼다. 그의 나이 96세. 그의 삶은 한·일 간의 진정한 용서와 화해를 위한 한 알의 밀알과 같았다. 새에덴교회는 3·1절이나 8·15광복절이 되면 일본의 양심적인 인사들을 초청해 함께 예배를 드렸다. 오야마 목사님은 두 번이나 우리 교회를 방문해 사죄의 절을 했다. 뿐만 아니라 2015년, 30만명 넘게 모인 광복절 집회에도 참석해 엎드려 사죄의 절을 했다. 필자가 초청할 때마다 기꺼이 한국을 찾아준 그에게 빚진 마음이 가득하다. 이런 훌륭한 사람이 어디 있는가. 그분이라고 왜 민족애와 조국애가 없겠는가. 그러나 그는 일본 기독교의 양심이고 최후의 보루였다. 그렇기에 수많은 오해와 수모, 박해를 감내하면서도 일본의 진정한 반성과 사죄를 위해 노력해 온 것이다. 별세 소식을 듣고 조전이나 조화로 대체할 수 있지만 직접 찾아뵙는 것이 그분에 대한 예의이고 보답이며 한·일 간 화해의 징검다리를 놓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필자는 일찍이 김영진 전 국회의원과 함께 한·일 간 화해와 평화를 위해 한일기독의원연맹 지도목사로 섬겨왔다. 당시 만난 분이 도이 류이치 의원이었다. 그는 일본 민주당 원내대표이자 7선 국회의원을 지낸 유력 정치인이었다. 그런데 그는 2011년 3·1절에 우리 교회를 방문해 독도의 한국 영유권 주장을 담은 한·일 공동선언문을 낭독하고 서명한 사건 때문에 큰 고초를 겪고 정치생명뿐 아니라 모든 것을 잃어야 했다. 그리고 그때 받은 충격과 극심한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PTSD)로 힘든 나날을 보내다 결국 고인이 되셨다. 그러나 그분은 마지막까지 조금도 원망하는 마음 없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작게나마 실천했을 뿐”이라고 고백했다. 오야마 목사 역시 진정한 용서와 화해를 위해 일생을 바치신 분이다. 그는 목회자가 된 후 일본인 최초로 아시아 각국에 사죄운동을 전개했다. 제암리학살사죄위원회를 발족해 1000만엔을 모아 제암리교회 재건과 순교기념관 건립을 지원하면서 사죄의 마음을 행동으로 옮겼다. 우리 교회를 방문했을 때도 사죄의 절을 하며 이런 말을 남겼다. “여러분의 조상을 고통에 빠뜨린 데 대해 아무리 사죄의 말씀을 드려도 부족합니다. 여러분들이 ‘이젠 됐어요’라고 말씀하실 때까지 사죄하겠습니다.” 그분의 생애를 생각하면 저절로 머리가 숙여지고 숙연해진다. 그래서 월요일 첫 비행기를 타고 일본으로 갔다. 친구인 하요한 선교사의 안내로 상주인 오야마 세이지 목사를 찾아 조의를 표했다. 그리고 귀빈에게만 공개하는, 특별안치실에 가 고인의 잠든 얼굴을 뵈었다. 가슴이 울컥했다. 고인의 환한 안빛과 웃는 모습이 참으로 평안하게 보였다. 나는 그곳에서 먼저 기도를 하고 상주인 세이지 목사님이 기도를 했다. 우리는 포옹하며 약속했다. 그는 끝까지 아버지의 유훈을 이어받아 일본 안에서 올바른 역사 인식이 세워지도록 노력하고 한국을 향해서는 끊임없이 사죄하는 운동을 전개하겠다고 했다. 나는 그 사과와 사죄를 받아들이며 한·일 간 화해와 평화의 다리를 놓는 운동을 하자고 제안했다. 우리 둘 다 눈물을 훔쳤다. 살아 있는 자는 서로 울컥했지만 정작 잠든 분의 얼굴은 너무나 환하게 웃고 있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할 일을 다 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주일예배를 다섯 번 인도하고 월요일 새벽에 일어나 일본에 간 나의 결단도 컸지만, 그냥 조문만 받지 않고 부친이 잠들어 있는 특별안치실로 인도해 주신 상주 세이지 목사님의 특별한 배려도 고맙게 느껴졌다. 일본은 역사를 왜곡해서는 안 된다. 한국을 향해 사과하고 사죄하는 의식을 가져야 한다. 동시에 한국은 과거에만 매여 있지 말고 미래로 나가야 한다. 특별히 한국교회는 오야마 목사님의 정신과 가치를 존중히 여기면서 양국에 화해의 징검다리를 놓고 대한해협에 ‘피스 브리지’(peace bridge)를 놓는 일에 앞장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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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6-09
  • [성서연구] 대주재 하나님
    누구나 요즘의 한국교회가 위기라고 합니다. 각 교단에서 발표하는 교인이 줄고, 신학교 입학생이 줄고, 분규를 겪는 교회가 늘고 있습니다. 이와 함께 사회적 영향력도 급감하고 있습니다. 정부를 비롯한 여러 사회 단위들이 기독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포괄적 차별금지법이나 사학법 개정과 관련한 우리의 호소를 무시합니다. 구한말에서 일제시대를 거치면서 한국교회는 교인은 적었지만, 민족의 견인차였습니다. 그러나 현재는 교회가 감당하던 교육, 봉사 등의 모든 영역을 정부와 기타 사회단체에 넘겨준 채, 입지가 점점 좁아지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기독교인의 자부심도 위축되고 있습니다. 자신이 기독교인임을 자신 있게 밝히지 못하고 얼버무립니다. 왜 이렇게 마음이 약해졌을까요?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시시한 신이기 때문일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본문은 예루살렘 교회의 믿음의 선배들이 가진 신앙을 보여줍니다. 오순절에 있었던 성령강림 사건은 정말 놀라운 열매를 가져왔습니다. 예수님의 사람들은 예루살렘 전체 주민에 비하면 극히 소수였지만, 성령이 임하신 후에 그들은 권능을 받았습니다. 권능이란 뒤나미스, 즉 다이너마이트 같은 폭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성도들은 겉으로는 계란처럼 약해 보여도, 속에는 폭탄을 품고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성도들의 기도와 말씀 선포 앞에서 예루살렘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이런 와중에 베드로와 요한은 성전 미문의 앉은뱅이 장애인을 일으키는 엄청난 이적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행했습니다. 그는 태어나서 단 한 번도 일어서지 못한 불쌍한 사람이었는데, 예수님의 이름으로 일어나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면서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이들은 놀라서 모인 사람들에게 솔로몬 행각에서 설교했습니다. 자신들이 일으킨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죽으셨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걷게 된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을 전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던 산헤드린 공회 사람들이 사도들을 가두었고, 이튿날 이들은 공회 앞에 끌려갔습니다.그러나 공회원들도 이들을 어쩔 수 없었습니다. 워낙 담대하게 외쳤을 뿐만 아니라, 걷게 된 사람이 사도들 옆에 서 있었기 때문입니다. 공회원들은 할 수 없이 다시는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 말라고 위협하여 풀어주었습니다. 풀려난 사도들은 동료들에게 갔고, 이들은 합심하여 부르짖어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기도의 첫 부분이 매우 인상적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이시여>라고 시작하지 않고, <대주재여>라고 시작했습니다. 여기 <대주재>로 번역된 단어는 <데스포테스>로서 주인, 소유자, 통치자를 의미하며, 그보다 더 큰 이를 상상할 수 없는 가장 크고, 가장 위대한 절대 존재를 말합니다. 그러면서 성도들은 대주재를 창조주로 고백했습니다. 24절은 이렇습니다. <그들이 듣고 한마음으로 하나님께 소리를 높여 이르되 대주재여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은 이시요> 우리는 하늘과 땅과 바다를 알지 못합니다. 그 가운데 존재하는 만물을 제대로 알지 못합니다. 우리 입의 침 한 모금에 무려 5억 이상의 미생물이 있고, 우리 몸에는 3킬로 이상의 미생물이 있다고 합니다. 우리는 이 미생물들을 평생 몸안에 가지고 있습니다. 연세대학교 김응빈 교수님은 이들을 <반려 미생물>이라고 우습게 표현했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아주 미세한 것부터 광대한 우주에 이르기까지 제대로 모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모든 것을 지으신 가장 위대한 분입니다.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이 <대주재여>라고 부르면서 기도를 시작한 배경은 아무리 예루살렘에 빌라도 총독과 헤롯 왕과 이방인들과 이스라엘 사람들이 연합하여 주님을 대적하더라도, 하나님이 최후의 승리자가 되실 것을 고백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시시한 신을 믿는 게 아니라, 대주재이신 하나님의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당당해야 합니다. 현재의 한국교회 상황이 어렵더라도 주눅 들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뒤에는 대주재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기억하고 당당합시다. 우리는 대주재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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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6-09
  • [시사칼럼] 명태
    “검푸른 바다, 바다 밑에서 줄지어 떼 지어 찬 물을 호흡하고 길이나 대구리가 클 대로 컸을 때 내 사랑하는 짝들과 노상 꼬리치며 춤추며 밀려다니다가 어떤 어진 어부의 그물에 걸리어 살기 좋다는 원산 구경이나 한 후 에집트의 왕처럼 미이라가 됐을 때 어떤 가난한 시인이 밤늦게 시를 쓰다가 쐬주를 마실 때 그의 시가 되어도 좋다 그의 안주가 되어도 좋다 쫙쫙 찢어지어 내 몸이 없어질지라도 내 이름만 남아 있으리라 명태 명태라고 이 세상에 남아 있으리라”(양명문 시). 작고한 성악가 오현명 씨가 자주 부르던 <명태>라는 가곡입니다. 이 노래는 6. 25 전쟁 기간에 만들어졌는데, 당시 젊은 오현명은 대구에서 공군정훈음악대원으로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UN 제 7군단의 연락장교로 복무하고 있던 변 훈이라는 작곡가가 건네준 종이뭉치에 이상한 노래가 한 곡 있더랍니다. 처음에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죠? “악보를 보니 그게 아무래도 노래가 될 것 같지 않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야, 이거 무슨 노래가 이래?’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노래의 멜로디 같지도 않은 멜로디가 그 가사와 함께 내 머리에서 떠나지를 않았다. 나도 모르게 자꾸 흥얼거리게 되는 것이, 시간이 지날수록 왠지 정겹게 느껴지게 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오현명은 부산의 해군정훈음악대로 옮기게 되었고, 당시 임시국회의사당으로 사용하던 한 극장에서 이 노래를 초연하게 됩니다. 그러나 반응은 혹독했습니다. 평론가들도 대중들도 이게 무슨 가곡이냐며 ‘노래 같지도 않은 엉터리’라는 비난을 퍼부었던 것입니다. 노래 부른 사람도 사람이지만 정작 충격을 받은 이는 작곡가 변 훈이었고, 그 길로 그는 음악계를 은퇴하고 다른 인생(외교관)을 살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오현명은 이상하게도 애착이 가는 이 노래를 포기하지 않고 기회 닿는 대로 소개하다가 마침내 1964년 청년들을 대상으로 음악회를 열었을 때 엄청난 반응을 얻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재탄생한 <명태>는 어떤 노래도 따를 수 없는 독보적인 존재감으로 지금 이 순간까지도 그리고 한국을 넘어 마침내 세계를 향해서도 힘차게 울려 퍼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더 이상 명태는 한국에서 잡히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계신지요? 한국 근해에서 명태가 실종된 지 어언 30년이 흘렀다고 합니다. 아마도 환경 문제 특히 기후 변화가 연관이 있지 않겠습니까? 지금은 명태가 제일 많이 잡히는 바다가 바로 일본의 후쿠시마 앞바다라고 합니다. 그리고 일본인들은 명태를 그리 잘 먹지 않기 때문에 대부분 한국으로 수출한다고 하고, 그 결과 현재 우리나라에서 유통되고 있는 생태는 거의 모두 일본산이라는 조사 결과가 있습니다. 국내에서 유통되고 있는 수산물을 조사해 보았더니 유독 명태에서 방사능 검출 확률이 높았다는데,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말린 명태도 시원한 생태탕도 마음 놓고 먹기 어려운 시대입니다. 가슴 아픈 현실입니다. 얼마 전 한일 정상회담이 열렸고, “후쿠시마 오염수 관련 한국 전문가들의 현장시찰단 파견에 합의했다”는 발표 내용에 따라 5월 하순에 21명의 시찰단이 현장을 방문하였습니다. 그 이후로 이런 저런 이야기가 들려옵니다. 일본 정부는 자신하고 있지만, 후쿠시마의 원전사고는 그렇게 쉽게 생각할 일이 절대 아닙니다. 2011년 3월 11일 진도 9.0의 엄청난 지진으로 인해 파괴된 후쿠시마 원전의 복구를 위해 걸리는 시간을 전문가들은 100년으로 보고 있습니다. 아직도 녹아버린 핵연료에 대한 어떠한 대책도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그런데도 일본 정부는 오염수를 바다로 방류하겠다고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우려하고 있지만, 일각의 주장대로 이 모든 우려가 단지 기우에 불과하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모두가 간과하고 있는 사실 하나가 있습니다. 언제부터인가 삶의 터전을 빼앗긴 것만 해도 억울한데, 이제는 세슘이니 플로토늄이나 스트론튬과 같은 듣도 보도 못한 물질들의 위험 아래 살아가야만 하는 당사자인 명태의 고충 말입니다.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롬 8:21) 아는 이가 몇이나 되겠습니까? 그냥은 생태로, 말려서 명태로, 얼려서 동태로, 어린 대로 노가리로, 아낌없이 다 주었던 명태들의 헛헛한 노랫소리가 들리는 듯합니다. “명태(허허허) 명태라고(음하하하) 이 세상에 남아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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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6-09
  • [은혜의말씀] 네 가지 땅에 떨어진 씨(막 4:1-9)
    한 농부가 씨를 뿌리는데, 어떤 씨는 길가에 떨어져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고, 어떤 씨는 돌밭에 떨어져 흙이 깊지 않아서 뿌리가 없으므로 해가 돋은 후 말라버렸고, 어떤 씨는 가시떨기에 떨어져 자라긴 자랐으나 가시가 기운을 막아 결실하지 못하였고, 어떤 씨는 좋은 땅에 떨어져 무성하게 자라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 비유에 대해서 자세하게 설명해 주십니다. 이 비유에는 중요한 세 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하나는 씨, 하나는 밭, 하나는 열매입니다. 씨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킵니다. 천국의 모든 축복이 하나님의 말씀 안에 다 들어있습니다. 여러분, 말씀의 능력을 믿습니까? 말씀이 뿌려질 때 하늘나라의 놀라운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런데, 똑같은 씨가 밭에 떨어졌는데, 어떤 밭에서는 열매를 맺습니다. 그러나 어떤 밭에서는 전혀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밭의 상태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이 밭은 바로 우리의 ‘마음의 밭’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오늘 네 종류의 밭에 대해서 살펴보면서, 우리 마음의 밭은 어디에 속할지 점검해 보겠습니다. 1. 길가입니다. (15절) 길가는 사람들이 자주 다녀서 딱딱하게 굳어진 땅입니다. 마음이 길가와 같다는 말은 늘 세상일에 바쁘고 분주하기 때문에, 마음이 거기에 다 가 있기 때문에, 말씀에 대해서는 아무 관심이 없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예배의 자리에는 나와 있지만, 말씀에 대한 열정도 없고, 말씀에 대한 사모함도 없습니다. 여러분, 기억하세요! 말씀이 선포되는 그 순간에 사탄은 우리를 뚫어지게 주목하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말씀이 그 사람의 심령에 뿌리내리지 못하도록 즉시로 와서 말씀을 빼앗습니다. 왜 이렇게 사탄이 즉시 움직일까요? 말씀의 위력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말씀에 무관심하면 안 됩니다. 마음 문을 꽁꽁 닫아버리고, 냉담하게 있으면 안 됩니다. 반응을 하십시오. 2. 돌밭입니다. (16,17절) 돌밭에 씨가 떨어지면, 싹은 금방 틔우는데 오래가지를 못하고, 금방 시들어버립니다. 그러니까 돌밭은 뿌리가 깊지 못하다는 게 문제이지요. 말씀을 듣기는 아주 잘 듣습니다. ‘아멘’하고 반응도 합니다. 그런데 지나놓고 보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금방 식어버립니다. 말씀이 그 속에 뿌리를 내리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뿌리가 없으니 신앙이 감정으로 흐릅니다. 여러분, 신앙은 단순히 감정적인 것으로 끝나서는 안 됩니다. 뿌리는 무엇입니까? 말씀에 대한 지식과 훈련을 통한 성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안에 성장의 이야기가 있어야 합니다. 뿌리가 약할 때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견디지만, 잠깐 견디는 것입니다. 외부적 상황에 금방 영향을 받습니다. 뿌리가 깊으면 어려움이 와도 끄떡없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의 영혼 깊이 뿌리내리게 하시길 축복합니다. 3. 가시떨기입니다. (18,19절) 말씀에 대한 사모함도 있습니다. 그리고 뿌리도 어느 정도 내려서 자랍니다. 그러나 세상에 대한 염려, 재물에 대한 욕심이 더 커요. 세상을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욕심이 너무 많아서, 말씀이 결실을 맺지 못하는 것입니다. 결국 이 세상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는 사람입니다.(요일 2:15) 세상 염려, 돈, 자식, 건강, 이런 단어들에 매여 있습니다. 여러분, 마음속의 잡초를 좀 정리할 필요가 있지 않습니까? 잡초 때문에 말씀이 역사하지 못하고 있다면, 그런 잡초는 뽑아버려야 합니다. 4. 좋은 땅입니다. (20절) 무슨 말씀을 받든지, 그대로 순종하는 삶을 살고, 세상 어떤 것보다 말씀을 더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아멘’으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조금 더 정확하게 이해하려면, 눅 8:15을 보는 것이 좋습니다. 여기서 말씀을 듣고, 그 다음에 받았다는 단어 대신에 어떤 단어를 쓰고 있습니까? '지키어' 이것이 중요합니다. 말씀을 내 생활에 옮겼는가? 내가 들은 바 이 말씀을 붙들고 사는가? 순종이 필요합니다. 말씀을 들으셨습니까? 말씀을 붙들고 사셔야 합니다. 나를 보내시는 그 삶의 한 복판에서, 말씀을 붙들고 살기 위하여, 몸부림 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30, 60, 100배의 결실을 맺는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좋은 밭이란 처음부터 그런 것이 아닙니다. 쟁기로 갈고, 거름을 주고, 부드럽게 했기 때문에 옥토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 모든 성도님들은 좋은 밭이 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에 있는 잡초, 가시, 돌들을 걷어 내십시오. 좋은 밭이 되도록 사모하십시오. 모든 성도님들이, 옥토와 같은 마음이 되어서 날마다 말씀의 능력 속에 살아가는 축복을 누리시길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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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6-09
  • [교회음악칼럼] 찬송(예배)하며 사는 사람들 5
    사실 애굽에서 가나안에 이르는 길은 며칠이면 되는 거리이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은 40년이란 긴 세월을 광야에서 수많은 힘든 시간들을 보내고서야 들어갈 수 있었다. 심지어 그들의 위대한 지도자 모세는 그 땅을 밟지도 못했다. 우리는 성경을 읽으면서 이스라엘의 만행을 이해할 수 없어하며 분노하였을 것이다. 도대체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과 인도하심을 직접적으로 보고 경험하였음에도 어떻게 저럴 수가 있지 하면서 말이다. 인간은 누구나 동서고금을 다 통틀어서 자기중심적 생각으로 삶을 살아가는 것 같다. 그것이 때로는 옳은 경우도 있지만 많은 경우 이기적인 판단으로 결론을 내려서 주변을 불편하게 하는 것을 흔히 보게 된다. 우리는 누구도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은 환경에서 살아보지 못했다. 가볍고 단순하게 판단해 버릴 그런 사안이 아니다. 현재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를 보라. 말씀을 따라 구원받은 백성답게 신실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그렇게 긴 시간 광야를 맴돌게 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 중 중요한 한 가지가 교만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하나님께서는 교만을 싫어하신다. 교만은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자기중심적인 이기심과 욕심, 아집 등을 포함한 말이다. 우리가 아무리 좋은 것으로 포장하여 자신과 이웃을 혹 속일 수 있을지 모르나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을 기만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마음으로 예배하고 찬양하는 것 받길 원치 않으신다. 성경에 엄청난 제물과 멋진 모양으로 난리를 치며 제사를 드려도 교만한 자들의 예배는 받으시지 않는다고 했다. 전에 한번 언급하였지만 멋진 성전과 화려한 예복 그리고 숙련된 전문가들이 준비하여 드리는 그럴듯한 예배를 그치게 하라고 하나님은 호세아 선지자에게 명령하셨다. 도무지 들어줄 수가 없다는 말씀이다. 그분이 원하시는 예배(찬양)는 상한 심령으로 드리는 겸손한 예배, 진실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외하는 마음으로 드리는 제사를 바라신다는 의미일 것이다. 한번 씩 옛날 신앙 생활했던 때를 떠올리며 많이 변하고 달라진 거 같다. 문제는 좋은 쪽으로 보다 반대의 경우로 흘러가고 있는 모습이어서 안타까운 마음이다. 다시 한 번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을 일깨워 주셔서 교만을 떨쳐버리고 겸손함으로 회복의 노래를 힘차게 부르기를 소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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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6-09
  • [목회자칼럼] 목회에도 맷집이 필요하다
    목회를 하다 보면 종종 가슴 아픈 사연들을 만난다. 어제도 성도를 떠나보낸 선배 목사님의 아픈 이야기를 들으며, 남의 일 같지가 않았다. 오랫동안 열심히 영혼을 섬겼건만, 떠나면서는 “모두 목사님의 잘못이에요”란 원망만 돌아왔을 때 목사의 마음은 와르르 무너져 버린다. 선배 목사님이 눈물을 머금고 말하는 이야기가 개척 목사는 충분히 공감이 되고 이해가 간다. 또 이렇게 목회의 한 페이지가 눈물로 쓰여진다. 우리의 삶은 평가를 받는다. 나 스스로에게 평가를 받기도 하고, 타인에게 평가를 받기도 한다. 또한, 우리 삶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직접 우리를 평가하시기도 한다. 먼저, 내 자신이 나를 평가할 때, 객관적으로 나를 바라보는 것은 쉽지 않다. 때로는 교만이 또 때로는 자기연민이 나를 쉽게 유혹한다. 나의 죄와 연약함에는 한없이 너그러운 모습을 보이는 반면 내가 타인을 평가할 때는 나에게 재던 기준과 원칙보다는 훨씬 더 엄격하게 적용한다. 내가 하면 괜찮고, 잘하며, 로맨스가 되고 타인이 하면 원망하고, 잘못하며, 스캔들이 되어 버린다. 죄인인 인간은 나를 평가할 때도 철저히 자기중심성을 고집한다. 그래서 사실 자신을 잘 보지 못하고, 평가하지 못한다. 둘째, 타인의 평가이다. 자신을 평가함에 있어서는 항상 편견이 존재한다. 그러나 교사 혹은 친구 등 비교적 가까이에 있는 사람이 나를 볼 때는 장점뿐만 아니라 단점도 본다. 타인이 오히려 나를 더 객관적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최고의 신학자, 최고의 목회자인 바울은 타인이 평가하는 것 또한 불완전하다고 한다(고전 4:3). 평가받는 것이 작은 일이라 말하면서. 목회자는 타인의 소리를 들을 때 수용성도 있어야하지만 동시에 맷집도 필요하다. 성도들에게 말씀을 가르칠 때는 기꺼이 미움을 받을 용기가 필요하다. 예수님도 미움을 받았고, 제자들도 그러했다. 물론 바울도 마찬가지였다. 모두 맷집이 대단한 분들이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타인으로부터 인정과 사랑을 받고 싶었을 것이다. 사도바울도 사람이기에 마찬가지이고, 목회자도 동일하게 교인들로부터 인정과 칭찬을 받고 싶다. 그러나 모든 사람으로부터 인정과 칭찬을 받을 수는 없다. 그렇기에 오늘도 나를 향한 평가는 필요하지만, 불완전하다. 그래서 가장 중요한 평가는 하나님의 평가다. 나를 가장 잘 아시는 분은 주님이시다. 주님은 “얼마나 빨리”를 말하며 날 속도로 평가하지 않으신다. 주님은 “얼마나 많이”를 말하며 날 양으로 평가하지 않으신다. 주님의 나의 삶을, 나의 삶의 방향을 인정해주시면서 그대로 평가해주신다. 내가 초등학교 다닐 때, 성적은 ‘수우미양가’로 평가되었다. 그 때는 ‘수’와 ‘우’만 좋은 점수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아름다울)미도 나쁘지 않고. (양호할)양도 좋은 점수다. (가능할) 가는 희망을 말하기에 오히려 미래를 향해 나아갈 수 있는 힘을 준다.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영혼은 오늘도 내일도 가능성을 본다. 요시아는 8세에 왕으로 올라 39세까지 31년 온 인생을 바쳐 종교개혁을 성실히 임했지만 므깃도에서 허무하게 죽음을 맞이한다. 그의 죽음을 보고 어떤 사람은 “허무하게 죽고, 종교개혁도 완성시키지 못했으니 무슨 의미가 있냐?”고 평가할 수도 있다. 하지만, 요시아가 율법책을 발견하고 제대로 된 말씀을 가르칠 때, 그 말씀에 은혜를 입은 부모가 다니엘을 나았고, 또 에스겔이 그 시기에 태어났다. 당장은 현실이 바뀌지 않는 것 같지만 그 때 태어난 다니엘과 에스겔에 의해 포로 귀환 이후 이스라엘은 성전을 다시 건축하고, 말씀을 다시 전하는 진짜 개혁을 맞이한다. 이렇게 보니, 요시아에 대한 평가가 달라지지 않는가? 사람은 지금 당장의 모습을 보고 평가할 수 있지만 하나님의 평가는 사람과 다르다. 언약의 관점으로 얼마나 순종했느냐가 평가의 기준이 된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한 영혼을 위해 순종하며 다시 걷는다. 맷집을 기르며 동시에 순종의 자세도 다지며 역사의 주인이시자 인생의 주인이신 주님의 평가를 기다리며 오늘도 묵묵히 이 길을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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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6-09
  • [이상규 교수의 역사탐색] 만주의 사도바울 한경희 목사2
    1915년 후반 한경희 목사는 서간도(西間島)의 전도목사로 임명되어 온 가족이 유하현(柳河縣) 삼원포(三源浦)로 이사하여 삼원포, 해룡(海龍), 동풍(東豊), 서풍(西豊), 휘남현(輝南縣)의 5개현을 담당하였다. 개척 전도자 한경희 목사는 고결한 인품으로 많은 이들의 존경을 받았고, 나중에는 방기전(方基典, 1861-1920)이 1912년 10월 설립한 은양학교(恩養學校)의 2대 교장으로 추대되기도 했다. 그는 교회 개척과 전도 외에도 교육사업에 관여하였고, 독립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특히 1920년 중국거주 한인들에 대한 일제의 개입이 노골화 되자 한경희 목사는 만주에 거주하는 한인들의 중국국적 취득활동을 벌이게 되고 이것이 문제가 되어 한경희 목사를 감시하던 일제가 그를 구속수감하기에 이르렀다. 즉 한경희 목사는 1929년 3월 ‘독립운동’의 죄명으로 3년 2월 간 신의주 감옥에 수감되기도 했다. 이때 ‘아리랑’이란 소설로 유명한 김산도 신의주 감옥에 수감되어 있었다고 한다. 1932년 1월 29일 출옥한 이후 창성읍(昌城邑) 교회와 평로동(坪路洞) 교회에서 임시목사로 시무하였다. 한경희 목사는 길림성 동북쪽에 위치한 호림(虎林), 요하(饒河), 수원현(綏遠縣) 등에서 사역자를 구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접하고 이곳으로 자원하여 갔다. 친구들은 그곳은 공산당과 비적들이 많아 위험하니 가지 말라고 만류했으나 “나라를 잃고 해외에 망명하여 슬퍼하는 동포에게 복음을 전하여 새 생명을 주고 위로하며 독립정신을 키워주는 만주선교가 나의 사명이다”라고 여기고 1933년 북만주로 파견되었다. 이곳에서 헌신적으로 일하던 그는 1935년 1월 1일, 교인 4명과 함께 북만주 호림현 지방교회 순방길을 떠났는데, 교회에서 설교하고 김창근 등 제직 네 사람과 함께 설차(雪車)라고 불리는 눈썰매를 타고 오소리강(烏蘇里江) 소목하(小木河)으로 향하던 중 40여 명의 공산당원들에게 잡혔다. 중국인 공비는 돈 1천원을 요구했으나, 조선인 공산당원은 목사인 것을 확인하고는 한경희 목사에게 일본의 스파이라는 누명을 씌우고 2시간 동안 구타하고 그와 동행한 교인을 총살하고 시체를 얼어붙은 강 속에 던졌다. 이대 유일한 생존자인 이낙섭 집사는 한경희 목사는 “오, 주여 이 작은 영혼을 받으시옵소서”라고 세 번 외치고 죽음을 맞았다고 증언했다. 「신학지남」에는 한경희 목사에 대한 조사가 실려 있다. “불 수레를 타고 하늘에 오르는 선배 엘리아를 쳐다보며 홀로 땅에 남겨서 ‘아버지여! 이스라엘의 병거 이스라엘의 기사여!’하고 슬퍼하는 엘리샤의 심정이 다시금 새롭습니다. 이제 한경희 목사님을 보내는 북만의 교도들은 한숨으로 한울을 쳐다보며 ‘오 북만의 병거, 북만의 기사여!’하고 가슴을 치며 울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한 목사님은 일찍이 남만에 건너가셔서 그 난마(亂麻)와 같은 사회에서 기다(幾多)의 위험과 곤고를 겪으시며 오로지 구령사업에 힘쓰시는 중 남만노회장의 중직에 있은지도 여러 차례셨습니다. 전도의 사명을 받들고 살벌(殺伐)의 세계, 성풍이 아직도 코를 찌르는 북만의 광야를 찾아오시니 목능, 밀산, 호림, 요하 등에 산재한 수천의 양 무리는 목사님을 통해서 배부름을 얻었으며 목사님을 따라 쉴 자리를 찾았었습니다. 그리하여 핍박받는 교도를 찾아 돌아다니시는 중 1935년 1월 1일 비적에게 잡혀 마침내 순교의 피를 뿌리셨습니다. 열에 가까운 유족을 무엇으로 위로하오리까? 그러나 ‘순교자의 피는 교회의 터’ 이오매 목릉하에 뿌리신 목사님의 붉은 피 방울마다 꽃펴 이 땅을 꾸미리이다.” 한경희 목사의 순교는 조선 전역의 기독교인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후에 손양원 목사는 설교하면서 한경희 목사를 자주 언급했다고 한다. 그가 신사참배 거부로 1941년 11월 4일 피체되어 광주 지방법원에서 재판 받을 때, 판결문에도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중략) 참 신앙은 고난이라 시련을 겪은 다음에 비로소 얻는 것인 고로 우리들은 이 고난을 이기고 신앙을 점점 공고히 하지 않으면 아니 된다. 이런 때를 당하여 현하(現下) 교회는 사랑과 지혜와 용맹을 가지고 일하는 교역자를 요구한다. 우리 조선 기독교 교역자는 모두들 순교자 한경희 목사와 같이 순교 정신으로 선교에 종사하지 않으면 아니 된다.” 한경희 목사는 공산주의자에 의해 죽임을 당한 ‘만주의 사도바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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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상규교수의 역사탐색
    2023-06-09
  • [서임중칼럼] 아버지의 눈빛을 보았니?
    5월이면 생각나는 이야기가 있다. 회사에 다니는 아버지에게 늘 불만인 아들이 있었다. 주일 아침에 교회에 가자는 아버지의 말씀을 뒤로하고 아들은 휑하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다음 날도 학교에 가기 전에 용돈을 달라고 투정을 부리다가 도시락도 버려두고 학교로 가버렸다. 아들의 어머니는 ‘돈이 중하냐? 아들이 중하냐?’ 하고 남편에게 핀잔을 주었다. 아버지는 무거운 마음으로 출근을 했다. 하루 종일 불편하게 지낸 아들이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아파트 건축 현장 앞을 지나는데 자기 눈을 의심할 일이 벌어졌다. 자신의 아버지가 공사판에서 벽돌을 짊어지고 가는 것이 아닌가! 황급히 다음 정류장에서 내린 아들은 되돌아 건축 현장으로 가보았다. 분명 아버지였다. ‘회사에 출근하신 아버지가 왜 저기서…?’ 아들은 집으로 돌아와 어머니에게 이 사실을 말했다. 어머니도 몹시 놀라 회사로 전화를 했다. “김 계장님 지난 달에 명예퇴직 하셨는데 사모님은 아직 모르고 계셨어요?” 여직원의 답변을 들은 아내는 너무도 황당했고, 아들과 함께 어쩔 줄을 몰라했다. 남편은 퇴직한 사실을 숨기고 막노동판에서 일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날 저녁, 말쑥한 정장을 입은 남편이 약간의 취기에 어려 돌아왔다. 아내가 자리에 앉는 남편 앞에 무릎걸음으로 다가가 말했다. “여보, 미안해요. 오늘 동혁이가 당신이 건축현장에서 일하는 것을 봤어요. 당신은 가족을 놀라게 하지 않으려고 회사를 그만 둔 사실을 말하지 않았더군요. 가족 간의 진정한 사랑이란 힘든 것도 함께 하는 것인데 왜 그렇게 혼자 힘든 시간을 보낸 거예요.” 아버지 앞에 아들이 무릎을 꿇었다. “아빠, 죄송해요. 열심히 공부할게요. 그리고 교회도 나갈게요.” 아버지는 아들의 손을 잡고 너털웃음을 웃으며 취기어린 한 마디를 한다. “미안하다 아들아, 남들처럼 훌륭한 애비가 못되어서…” 사서삼경(四書三經)의 하나인 시경(詩經)에 부모님의 은혜에 대한 교훈이 있다“父兮生我, 母兮鞠我, 哀哀父母. 生我劬勞, 慾報深恩, 昊天罔極<아버지 나를 낳으시고, 어머니 나를 기르시니, 아아 애달프고 슬프도다. 나를 낳아 기르시느라 애쓰고 수고하셨도다. 그 깊은 은혜를 갚고자 한다면 하늘도 다함이 없도다>.” 이 애틋한 마음을 한자에서는 親(어버이 친)이라 한다. 어버이 친자는 나무(木) 위에 올라서서(立) 아들(子)을 보고 있는(見) 모습을 뜻한다. 얼마나 아름다운 형상인가? 어버이 친(親)에 버금가는 한자가 ‘효도 효(孝)'자다. 즉 노인을 업고 오는 아들의 모습이다. 이러한 한자의 모습, 親 자와 孝 자가 가정에 있을 때 그 가정은 복을 받지 않을 수 없다. 자녀는 부모님의 마음을 편하게 해 드리는 것이 지고한 효도다. 기분 좋고 마음 내킬 때 부모님께 잘 해 드리기는 쉽다. 그러나 끝까지 편하게 모시기는 참으로 어렵다. 가끔 찾아뵙고 잘 대접하기는 쉽다. 그러나 매일처럼 찾아뵙고 대접하는 일은 쉽지 않다. 효도는 관계가 아닌 이해에서 진정한 효행이 시작된다. 나에게는 김기수 목사님이 믿음의 아버지이다. 나의 약혼과 결혼주례를 해 주셨는데 어르신이 소천하실 때까지 35년간 늘 찾아뵙고 축복기도를 받는 것이 나의 결혼기념일 행사였다. 관계보다 이해의 행동하는 효도였다. 지난 삼월과 사월은 미국에서 부흥사경회를 인도하고 귀국하니 5월이다. 담임목사로 사역을 하면서 맺은 부목사님들과의 관계로 그들은 모두가 내 아들 딸이었다. 어버이날, 스승의 날이라고 해마다 찾아온다. 언제나 그렇지만 만감이 교차된다. 지극함으로 뒷바라지를 했던 자식 같은 아이들은 소식이 없지만 제대로 돌보아 주지도 못했던 아이들은 해마다 변치 않고 찾아주니 그렇다. 섬김과 사랑은 관계가 아닌 이해에서 행동하는 사랑이 되는 것이다. 오래 전 어느 추운 겨울날 한 밤중이었다. 장로님의 아들이 술을 마시고 목사관을 찾아왔다. 아버지에 대한 불평과 원망이 정수리부터 발끝까지 차서 넘치고 있었다. 그 아들을 붙들고 밤이 깊도록 이야기를 했다. 그 때 내가 그 청년을 품에 안고 던진 마지막 질문 하나가 있다. “아버지 눈을 들여다본 적이 있니?” “……?” 서서히 술이 깨던 아들은 아무 말이 없었다. “나는 너의 아버지의 눈빛을 들여다본 적이 있다. 외롭고 쓸쓸하고 고뇌에 찬 눈빛을 나는 보았다. 장로님이고 사회적으로도 괜찮은 위치에 있으며 돈도 많고 모든 면에서 부러울 것이 없는 아버지의 눈빛이 왜 그리도 외롭고 쓸쓸할까? 나는 많은 생각을 했는데 오늘에서야 그 이유를 알겠구나. 그것은 바로 너를 향한 아버지의 마음이라는 것을…….” 그 아들은 내 품에서 울기 시작했다. 언제 술에 만취가 되었던가 싶게 정신을 가다듬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 후 그의 아버지가 달라진 것을, 그 아들도 달라진 것을 나는 나의 목회 현장에서 경험했다. 오늘의 아들 딸들은 아버지의 눈빛을 보지 못하고 살아간다. 어쩌면 죽을 때까지 못 볼지도 모른다. 아니 아버지도 어머니도 자식들의 눈빛을 보지 못하고 살아간다. 하루에도 수천만 마디의 말을 쏟아내지만 부모와 자식 간의 따뜻한 눈빛교감은 전혀 없이 살아간다. 죽고 난 후 눈을 감고 관에 누워 있는 아버지를 보는 아들딸들은 아버지의 눈빛을 한 번도 보지 못하고 일생을 살아가는지도 모른다. 단 한번만이라도 아버지 어머니의 눈빛을 본 자식이라면, 자식들의 눈빛을 본 부모님이라면 그 다음 말은 생략해도 좋을 것이다. 눈은 마음의 창이라 한다. 눈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눈보다 정직한 표현을 하는 지체는 없다. 전국교회 초청을 받아 말씀 사역을 하면서 내가 하는 마지막 한마디가 있다. 목사에게 묻는다. “성도들의 눈빛을 보았느냐?”고, 성도들에게 묻는다. “목사의 눈빛을 단 한번이라도 보았느냐?”고. 질문을 들은 회중들 대부분이 눈을 감는다. 그리고 고개가 숙여지고 눈시울이 젖어들고 여기저기서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는다. 산발랏과 도비야와 게셈 같은 자들의 당이 만들어지면 그들은 철연장으로 소란을 피우고 망치로 두드리고 도끼로 찍는 그런 공통점이 있다. 상황에 함몰되어 말씀을 잊어버리고 서로의 눈빛조차 한 번도 제대로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눈빛을 보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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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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