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8(목)

오피니언
Home >  오피니언  >  칼럼

실시간 칼럼 기사

  • [이상규 교수의 역사탐색] 호주선교부의 미우라 고아원 출신 김순복 여사2
    호주 장로교의 커를 의사를 따라 진주로 이주하게 된 박순복은 남편 박성애 조사와 함께 커를 의사가 준비한 진주면 성내4동 정경철 씨 소유의 초가에서 거주하게 된다. 이곳이 호주선교부의 첫 거점이 되었고, 바로 이곳에서 교회와 학교를 설립하게 된다. 처음에는 거주지에 주택 한 켠에 서적고를 설치하고 성경 보급을 시작했는데 이것이 시작이 되어 1905년 10월 22일 진주교회가 탄생했다. 이 교회가 진주지방 첫 교회이자 서부경남지방 첫 교회가 된다. 1906년에는 대안면 2동에 8칸의 예배당을 건축하고 이동하였고, 1916년에는 도동면 옥봉리 비봉산 아래에 예배당을 신축하고 이전했는데, 이때부터 옥봉리교회라고 불리게 된다. 이곳에서 커를 의사를 도와 진주지방 첫 근대학교를 설립하게 되는데, 개교식은 1906년 4월 15일 거행되었고, 첫 입학생은 21명이었다. 학교 이름은 안동남학교였다. 설립자 겸 교장은 커를 선교사, 교감은 김경숙, 학감은 박성애, 교사는 안헌이었다. 안헌(安憲, 1886-1946)은 후에 안확(安廓)으로 개명하는데, 후일 그는 마산 창신학교 교사가 된다. 일본에서 유학 한 이후 독립운동에 관여하고, 문명개화론을 주창했던 인물이었다. 또 그는 국문학자이자 역사가로 명성을 얻었다. 이 학교의 교과는 성경, 국어, 산수, 역사, 지리, 한문, 습자, 체조, 창가, 그리고 영어였다. 남학교가 설립된 지 4개월 후인 그해 8월, 커를 선교사 부인 에셀 커를의 주도로 사립 정숙학교라는 이름의 여자학교가 설립되었다. 이때 김순복은 교사기 되었다. 정식 개교식은 9월 3일 거행되었는데 교과목은 성경과 국어, 산수, 역사, 지리, 한문, 습자, 침공(바느질) 등이었다. 학비가 면제되었기 때문에 진주지역 뿐 만 아니라 인근 고성, 산청, 하동 지역에서 오는 학생도 있었다. 이렇게 설립된 안동남학교와 정숙학교는 1909년 2월 통합되어 사립광림학교가 된다. 각종학교로 인가를 받기 위한 조치였다. 비록 학교는 통합하였으나 남자부와 여자부로 나누어 수업했는데, 학급은 심상과(尋常科) 4년, 고등과(高等科) 2년으로 편성하였다. ‘심상 尋常’이라는 말은 평범한 것, 보통의 것이라는 의미인데 일본의 교육제도의 소학교, 곧 초등학교 과정을 의미했다. 1910년 당시 이 광림학교의 교직원은 6명이었고, 학생 정원은 40명이었으나 실제로는 80명 이상 재학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남자부 사립 광림학교는 재정 문제로 1929년 폐교되고, 여자부는 1921년 시원여학교로 개칭되는데 이 학교는 신사참배 문제로 1939년 7월 31일자로 폐교되고 만다. 진주에서 첫 근대의료 기관인 배도병원이 설립된다. 호주장로교 여전도회연합회는 1906년 6월 병원 설립 기금으로 825 파운드를 진주로 보냈고, 커를 의사는 1907년 12월 병원 설립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을 수립하였다. 이렇게 되어 현재의 진주교회 뒤편 삼전아파트 자리에 임시 진료소를 설치하였는데, 이것이 진주지방에서의 병원 설립의 시작이 된다. 이 모든 과정에서 커를의 조사였던 박성애와 부인 김순복 여사가 동역하였다. 1910년 10월에는 병원 건축을 시작하였고, 1913년 11월에는 50개 병상을 갖춘 병원을 설립하게 된다. 이런 학교와 병원 설립의 뒷바라지를 한 이가 김순복 여사였다. 남편 박성애 조사는 1911년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였고, 1915년에는 진주교회 장로가 된다. 1917년에는 신학교를 졸업하고 1919년 1월 목사 안수를 받고 진주교회 첫 담임목사가 된다. 따라서 김순복은 남편을 도와 목회자의 아내로 살게 된다. 그런데 광림학교 교사로 일하던 김순복은 평양을 다녀온 남편 박성애 목사의 주선으로 김 마리아 등이 조직한 ‘대한민국애국부인회’와 ‘대한적십자회’에 가입하여 진주지부 초대 지부장으로 추대되었다. 김순복은 진주지방의 여성동지를 규합하고, 상해임시정부의 독립자금 모금과 항일광복운동과 항일사상을 고취하는 일을 맡았다. 그런데 1919년 11월 28일 서울에서 대한민국애국부인회 활동이 발각되어 전국 조직 지도자들이 모두 체포, 수감되었는데 진주의 김순복도 박보렴, 박덕실(朴德實)꽈 함께 체포되어 대구 지방검사국으로 송치되었다. 이 때의 대한민국애국부인회 활동에 대해서는 「매일신보」 1919년 12월 19일자 등에 보도된 바 있다. 박순복 여사는 목사의 아내로서 민족과 애국, 독립운동에도 관여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남편 박성애 목사가 1920년 창원교회로 이동하게 되자 박손복 또한 창원으로 이동하여 그곳에서 ‘창원여자야학교’를 설립하여 후학 양성에 이바지하였다. 이때의 헌신이 널리 알려져 1922년 8월 8일자 「동아일보」는 ‘박순복 여사의 열정’이라는 기사를 게재하여 그의 봉사를 기념하였다. 이상과 같이 독립운동과 애국운동에 기여한 공로로 김순복 여사는 2021년 3월 1일에 독립유공자 대통령 표창이 추서되었다. 이 처럼 고아 소녀로 성장했으나 호주선교부의 사랑으로 양육을 받았고, 부산과 진주에서 개척자의 길을 가며 하나님의 교회를 위해 헌신했던 김순복 여사는 55세를 일기로 1942년 10월 6일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 오피니언
    • 칼럼
    • 이상규교수의 역사탐색
    2023-12-20
  • [소강석칼럼] 국기원에서 태권도를 재발견하다
    얼마 전에, 우리교회에 출석하시는 최규옥 회장님이 점심을 초대하여 갔습니다. 거기는 이수성 전 총리님이나 백성학 회장님 등 여러 고명하신 분들이 함께한 자리였습니다. 식사가 끝나고 함께 자리를 했던 우리교회 협동장로이자 국기원 원장이신 이동섭 장로님이 국기원이 이곳에서 가까우니 잠시 방문을 해 줄 수 있느냐고 하셨습니다. 사실 국기원은 세계 태권도의 메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천주교인들에게는 바티칸이고 기독교인들에게는 예루살렘과도 같은 곳이죠. 차를 타고 정문인 일주문을 지나는데 태권도의 위엄이 벌써부터 느껴지기 시작했습니다. 이 국기원은 김운용 초대 원장에 의해 1971년 겨울 강남의 언덕배기에 기공식으로 시작된 곳인데요. 본관은 한옥의 멋과 풍류를 고스란히 반영한 건물이었습니다. 특별히 청와대를 본떠서 지붕이 청기와로 덮여 있었습니다. 본관 앞에 도착하니 210개국의 국기가 걸려 있었습니다. 그 210개국의 2억 명이 넘게 태권도 수련을 하였고, 1100만 명 이상의 유단자와 20만 명 이상의 사범이 배출되었다는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나라는 태권도를 통해서 210여개국 이상에 정신적, 무도적 영향을 미치고 지배를 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동섭 국기원 원장님의 안내로 박물관 관람부터 하였습니다. 그곳에는 2천 6백여 점의 자료가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국내와 세계의 주요 대회에서 시상한 우승컵, 상장, 메달, 우승기 등이 진열되어 있었습니다. 이동섭 장로님은 “목사님이 지금까지 몰라서 그렇지, 국기원 원장 자리는 가톨릭으로 말하자면 교황과 같은 자리입니다. 그러므로 저야말로 태권도의 교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말을 듣자, 저는 교회에서 늘상 보던 장로님과 국기원에서의 장로님이 사뭇 다르게 보였습니다. 참으로 엄청난 거인 앞에 제가 서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장로님은 국기원 원장실로 저를 안내하시더니 먼저 기도부터 해달라고 부탁하셨습니다. 저의 기도가 마치자, 장로님께서는 태권도의 C.I.를 비롯해 수련의 목적을 설명하였습니다. “태권도는 단순히 무술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심신 수련과 인성교육에 더 큰 역점을 두고 있습니다. 수련 과정에서 쌓이는 정신 수양은 인의와 예의, 관용과 생명, 인격, 인내력과 의협심을 가져다주고 덕을 가져다줄 뿐만 아니라 인격을 완성하게 해줍니다.” 이런 태권도의 황제인 이동섭 장로님이 20대 국회의원으로 계실 적에 국회의원 225명의 서명을 받아 태권도를 대한민국의 국기로 지정하는 법을 만드셨습니다. 한마디로 국기 태권도를 법제화한 것이죠. 왜 그것이 그렇게 중요하냐면, 중국이 태권도의 동북공정을 할 뿐만 아니라 일본은 올림픽 경기에서 태권도를 제외시키고 가라테로 교체하려고 하는 시점에서 국기 태권도법을 입법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 위대한 거인을 옆에 두고도 저는 이제야 거인을 다시 볼 수 있었습니다. “아, 내가 왜 국기원을 방문하지 않았던가. 진작 국기원을 방문하였을 걸...” 국기원 수련장을 둘러보니 전국에서 모인 수련생들이 대련(시합)을 하고 있었습니다. 순간 저의 어린 시절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습니다. 저는 어린 시절 워낙 시골 깡촌에서 자라서 태권도 도장에는 한 번도 못 가보고 학교 운동장에서 태권도를 배웠습니다. 빨간 띠까지는 읍내에 있는 관장님이 학교로 오셔서 심사를 하였습니다. 저는 품새도 잘했을 뿐만 아니라 대련에서 누구에게 한 번도 져본 적이 없었습니다. 드디어 검은 띠를 딸 때가 되었습니다. 사범님으로부터 예비심사에 합격을 하고 읍내에 가서 관장님 앞에 심사만 받으면 검은 띠를 딸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유단자가 되려면 그때 당시 심사비를 꽤 많이 냈던 것 같습니다. 그 이유로 어머니가 절대로 유단증을 못 받게 하였습니다. “검은띠는 큰 형으로도 족하다. 너는 어딜 가나 누구에게도 안 맞고 다니지 않느냐. 태권도만 잘하면 되지 검은띠가 무슨 필요가 있느냐. 너까지 검은 띠를 따게 해 줄 수는 없다.” 그래서 저는 실질적으로는 유단자였지만 심사를 못 봐서 검은띠를 못 땄습니다. 그러나 지금 돌이켜보면 제가 죽기 살기로 도전을 했더라면 뭘 못했겠습니까? 제가 마당에 엎어져서 뒹굴고 엉엉 울어댔으면 어머니도 어찌하셨겠습니까? 그러나 저는 태권도 말고도 돈이 들어가지 않는 백일장 대회나 웅변대회에 가서 상을 받아오는 것으로만 만족을 해야 했습니다. 그런 제가 국기원에서 공인 9단이요, 세계 태권도의 교황 앞에 서서 제 자신을 바라보니 너무나 작아지는 느낌이었습니다. 특별히 옛날에는 안 맞고 다니고 싸움을 잘하기 위해서만 배우려고 했던 태권도가 심신 수련과 인성교육, 덕과 인격 완성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우리의 국기인 태권도가 새삼스럽게 위대하고 자랑스럽게 느껴졌습니다. 태권V 이동섭 국기원 원장님이 더 거인으로 보였고, 이제는 옛날에 배웠던 태권도를 복습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심신 수련과 덕과 인격 완성의 과정을 삼아볼까 합니다.
    • 오피니언
    • 칼럼
    • 소강석 칼럼
    2023-12-01
  • [성서연구] 혼란 시대의 그리스도인
    5 유대 왕 헤롯 때에 아비야 반열에 제사장 한 사람이 있었으니 이름은 사가랴요 그의 아내는 아론의 자손이니 이름은 엘리사벳이라 6 이 두 사람이 하나님 앞에 의인이니 주의 모든 계명과 규례대로 흠이 없이 행하더라 7 엘리사벳이 잉태를 못하므로 그들에게 자식이 없고 두 사람의 나이가 많더라 요즘 우리 기독교인들은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현실에 당황하고 있습니다. 코로나 19만 겪어보지 못한 일이 아니라, 한국교회의 현실 또한 겪어보지 못한 일입니다. 교세가 감소하고, 신학생이 줄어들고, 한국교회의 목소리가 대한민국 사회에서 먹혀들지 않고, 소수로 전락하는 일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1960년대 이후 한국교회는 세계가 주목할 정도로 급성장했고, 대형교회가 가장 많은 나라가 되었습니다. 한국교회는 힘이 있었고, 대한민국 사회의 여론 지도층 대부분이 기독교인이었습니다. 이런 데 익숙한 우리에게 오늘의 찬 바람 부는 현실은 겪어보지 못한 어색하고 힘든 상황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기독교인들은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요? 우리는 먼저 생각부터 바꿔야 합니다. 그것은 교회와 성도는 본래 소수였음을 상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겨우 열두 제자를 부르신 이후 예수님을 따르는 참 성도는 늘 소수였습니다. 기독교 국가이던 중세 유럽에서도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중생한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소수였습니다. 우리나라도 복음이 들어온 초기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기독교가 다수였던 적은 없었습니다. 단지 힘이 좀 있다 보니 다수인 듯 착각했을 뿐입니다. 본래 믿음의 선배들은 불신앙의 거대한 세상에 에워싸여 고난을 받았습니다. 그러면서도 믿음의 정절을 굽히지 않고 그리스도인답게 꿋꿋이 살았습니다. 그게 우리 선배들이 혼란 시대를 살아가는 방식이었습니다. 이런 면에서 사가랴와 엘리사벳은 좋은 모델입니다. 누가복음 1장 5절은 <유대 왕 헤롯 때에 아비야 반열에 제사장 한 사람이 있었으니 이름은 사가랴요 그의 아내는 아론의 자손이니 이름은 엘리사벳이라>고 두 사람을 소개합니다. 눈길을 끄는 것은 <유대 왕 헤롯 때에>라는 구절입니다. 이것을 각색한다면 <더 악할 수 없을 정도로 악한 세상에서>라고 하겠습니다. 헤롯은 로마와의 인연으로 분봉왕이 되어 유대를 다스린 에돔 출신의 광포한 사람이었는데, 아내들과 친아들들을 죽였을 정도로 악했습니다. 헤롯에게 베들레헴의 아기들을 죽이는 것쯤은 일도 아니었습니다. 사가랴 부부는 로마의 식민지요, 헤롯 같은 악한이 다스리는 시대에 살았습니다. 게다가 인간적으로 낙도 없었습니다. 누가복음 1장 7절은 <엘리사벳이 잉태를 못하므로 그들에게 자식이 없고 두 사람의 나이가 많더라>고 했습니다. 세상이 악해도 자녀가 있다면 낙이 있을 텐데, 이들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삶은 놀라웠습니다. 누가복음 1장 6절은 <이 두 사람이 하나님 앞에 의인이니 주의 모든 계명과 규례대로 흠이 없이 행하더라>고 되어있습니다. 사가랴 부부는 헤롯 왕이라는 눈앞의 권력자가 아닌, 하나님께 맞춰 살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 의인이었습니다. 더구나 주의 계명과 규례대로 고집스럽게 흠 없이 살았습니다. 세상이 악해도 그들은 그들의 믿음의 외길을 걸었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이렇게 산 끝에 세례 요한을 낳았습니다. 앨런 크라이더는 『초기교회와 인내의 발효』에서 로마 시대의 초기교회가 로마 전역으로 확산된 비결은 어려운 핍박의 상황에서도 묵묵히 인내한 것과, 세상의 조롱을 받으면서도 말씀에 따라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고집한 데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 모습에 감동된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고 설명했습니다. 오늘 우리의 해결책은 여기 있습니다. 세상의 편법을 따르지 말고, 하나님만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 맞춰야 합니다. 그리고 묵묵히 그리스도인답게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지켜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시간이 걸리겠지만, 하나님의 뜻이 우리를 통해 이루어질 것입니다. 고독하고 힘들지만, 묵묵히 믿음의 길을 걸어가길 원합니다.
    • 오피니언
    • 칼럼
    • 성서연구
    2023-12-01
  • [시사칼럼] 타락한 지도자들, 빛과 같은 백성들
    총체적 난국이란 말이 있습니다. 사방이 어려운 국면에 빠져 타개할 길이 보이지 않고 해결할 실마리를 찾을 수 없는 상황을 가리킵니다. 하마스와 전쟁 중에 있는 예루살렘을 보십시오. 지금도 그러하지만 그 옛날도 예루살렘은 총체적 난국에 빠져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이 어떤 곳입니까? 평화의 도성인 동시에 하나님의 성전이 자리 잡고 있던 거룩한 땅이었습니다. 그런데 선지자들이 전하는 예루살렘의 모습을 보십시오. “패역하고 더러운 곳, 포학한 그 성읍이 화 있을진저”(습 3:1). 패역이란 하나님을 향한 교만과 불순종을, 더럽다는 말은 도덕적 타락을, 포학하다 함은 정의와 인자의 실종을 의미합니다. 한 개인의 편견이 아니었습니다. 예레미야도 “그 성중에 오직 포학한 것뿐이니라”(렘 6:6)라고 증언했습니다. 도대체 왜 이런 일이 생겼을까요? 결정적인 이유가 등장합니다. “방백들은 사자요, 재판장들은 이리요, 선지자들은 간사하며, 제사장들은 성소와 율법을 범했다”(3-4절)고 합니다. 한 마디로, 당시 지도자들이 완전히 부패하고 타락해버렸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도 “선지자와 제사장이 다 사악하여 내 집에서도 악이 가득하구나”라는 하나님 말씀을 전했습니다(렘 23:11). 역시 동시대에 활동했던 에스겔 또한 “제사장들이 불법을 범하고 사람들의 눈을 가리워 하나님께서 더럽힘을 당한다”고 고발하고 있습니다(겔 22:26). 결국 예루살렘에 “화 있을진저”라는 신탁(Woe Oracle)이 붙었습니다. 선지서에 자주 등장하는 이 문구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고 대적하는 이민족을 향해 주께서 분노에 차서 선포하던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나 총체적 난국 가운데 한 줄기 빛이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 계시는 여호와는 의로우사 불의를 행하지 아니하시고 아침마다 빠짐없이 자기의 공의를 비추시거늘..”(습 3:5). 그렇습니다. 사방이 캄캄한 어둠뿐이라 해도 언제나 한 줄기 빛이 존재합니다. “아침마다 비추시는 하나님의 빛”입니다. 말라기 선지자도 선포하지 않았습니까?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공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비추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말 4:2). 총체적 난국에 처했더라도 우리는 이사야처럼 이 빛을 기다리고 바라봐야 합니다(사 8:17). <바보 예수>로 유명한 서울대 명예교수요 가좌대 석좌교수인 ‘김병종’ 화백이란 분이 있습니다. 서초동 사랑의교회 지하 4층 예배당 벽면에는 그가 그린 55미터의 대형 그림이 벽면을 가득 메우고 있습니다. 원래 작품 이름은 “바람이 임의로 불 때-송화분분”이지만 교회 측에서는 그림을 ‘기도와 묵상의 길’이라 부릅니다. 김 교수의 고백입니다. “사람들이 버스나 지하철에서 내려 우르르 예배당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창조주를 예배하러 가기 위해 옷깃을 여밀만한 준비와 여유 공간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옛날 어머니와 손잡고 들길을 걸어 교회에 갔던 일을 떠올리며 제작했습니다.” 성경은 주께서 아침마다 빛을 어김없이 비추신다 말합니다. 하지만 끝내 외면하는 자들이 존재합니다. 반면 그 빛을 찾아가는 그림 속 모자(母子) 같은 이들도 있습니다. 선지자는 그들을 “겸손한 자들”(2:3) 혹은 “유다 족속의 남은 자”(2:7)나 “나의 남은 백성”(2:9) 내지 “곤고하고 가난한 백성”(3:12) 또는 “시온의 딸, 예루살렘의 딸”(3:14)이라고 불렀습니다. 지도자들이 타락하고 그 때문에 한 사회가 총체적 난국에 빠져도, 결국은 이런 사람들이 빛이 되는 법입니다. 최근 한 지역방송국에서 제작한 다큐멘터리 한 편이 뒤늦게 입소문을 타며 화제몰이 중에 있습니다. 진주에서 평생 한약방을 운영하던 분 이야기인데, 그분 이름을 딴 제목이 “어른 김장하”입니다. 그는 모은 재산으로 학교를 세우고 사회에 기증했고 장학금을 주며 어려운 이웃을 돌보고 살폈습니다. 젊은 감독은 선생의 모습을 취재하며 감탄한 나머지 “살아 움직이는 사회보장제도”라는 격찬을 남깁니다. 하지만 본인은 소문내지 않고 너무나 검소하게 살아왔습니다. 그렇게 후원 받은 사람들 중에 헌법재판관도 나오고 의사도 나오고 했다 합니다. 그런데 방송 중에 한 사람이 “선생님 장학금을 받고도 특별한 인물이 못 되어 죄송합니다.” 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그 때 어른의 대답에 깊은 울림이 있었습니다. “그런 걸 바란 게 아니야. 그리고 우리 사회는 평범한 사람들이 지탱하고 있는 거야.” 우리 지도자들을 보면 한숨만 나올 때가 많습니다. 정치인들만큼이나 성직자들도 부패하고 타락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거룩함을 소중히 여기고 겸손할 줄 아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둠 속에서도 빛을 기다리며 묵묵하게 살아가는, 온통 혼탁하고 세속적인 분위기 가운데에서도 신을 경외하며 그 교훈을 소중하게 여기며 살아가는, 어떤 상황 속에서도 끝까지 하나님의 선하심을 소망으로 삼고 살아가는, 비록 유명하지 않아도 영향력이 없어 보여도 한 줄기 빛과 같은 평범한 인생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아직 희망이 있습니다.
    • 오피니언
    • 칼럼
    • 시사칼럼
    2023-12-01
  • [은혜의말씀] 무화과 나무가 마르다(막 11:12-14)
    베다니에서 하룻밤을 보내신 예수님은 이른 아침, 다시 예루살렘으로 들어오십니다. 그런데 배가 좀 고프셨나 봅니다. 멀리 무화과나무 잎사귀가 풍성한 것을 보시고는, 열매를 얻을까 하여 가까이 가십니다. 그런데 잎사귀만 무성하지 아무런 열매가 없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그 나무를 저주하십니다. “이제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먹지 못하리라” 오늘 본문은 좀 이해하기 힘지요? 이 본문은, 이스라엘의 대표적 나무인 무화과나무에 대해 좀더 자세히 알 필요가 있습니다. 무화과나무의 본격적인 수확기는 6월에서 7월입니다. 그러나 나무에 따라서는 좀 이른 시기인 3-4월에 열매를 맺기도 하고, 반대로 좀 늦은 시기인 9-10월에 열매를 맺기도 합니다. 그리고 무화과나무는 열매가 먼저 맺히고, 잎은 나중에 무성해집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길을 가시다가 잎이 무성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열매를 구하러 다가가신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나무를 저주까지 할 필요는 있느냐 하는 의문이 생깁니다. 예수님이 나무를 저주하시는 것은 하나의 ‘상징적인 행위’입니다. 바로 허울뿐인 이스라엘 백성들의 잘못된 신앙을 책망하시는 것입니다. 지금 이스라엘의 신앙이 잎만 무성하고, 열매는 하나도 없는 껍데기 신앙과 같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자, 우리가 무화과나무를 통해서 배워야되는 교훈은 이것입니다. 1. 잎만 무성하고 열매는 없는 껍데기 신앙 – 종교 외형주의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당시 바리새인의 모습을 연상케 합니다. 그들은 겉으로 보면 대단했습니다. 종교적 열심은 타의 추종을 불허합니다. 그러나 실상은 껍데기만 그럴듯하게 포장을 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보다 사람을 더 의식했습니다. 자, 오늘 우리도 마찬가집니다. 보여지는 것에 신경을 쓰고, 사람들의 시선에는 집중하지만, 하나님과의 영적인 관계가 멀어져 있다면, 잎만 무성하고 열매는 없는 신앙입니다. 입술로는 ‘주여, 주여’ 하는데, 행동은 도무지 주님의 뜻과는 관련이 없다면, 그게 열매 없는 허울뿐인 신앙, 종교의 외형주의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신앙은 어떻습니까? 혹시 바깥으로 기울어져 있지 않습니까? 저는 여러분의 신앙이, 외형이 아닌 내면이 단단하고 꽉 차 있는 진짜 신앙이 되시길 축복합니다. 2. 무화과나무를 통해서 배우는 교훈은 - 예수님은 우리 삶에 열매를 찾으신다는 것입니다. 무화과나무는 꼭 한 가지 목적을 위해서 존재합니다. 바로 열매입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 삶에 정직과 신실함과 의의 열매가 풍성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 삶이 예수 향기를 나타내는 거룩한 열매가 풍성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면, 어떻게 열매를 맺습니까? 아니, 왜? 열매를 맺지 못할까요? 가장 중요한 첫 번째 이유는, 주님에 대한 신뢰가 없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의심하지 않고, 그분을 온전히 신뢰하는 것입니다. 기적을 믿는 게 아니라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두 번째 이유는, 기도가 없기 때문이다. 기도가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엎드리는 순간, 기도하는 순간, 살아계신 주님의 능력이 임할 줄 믿습니다. 열심히 기도하는데도, 기도 응답의 경험이 없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의 기도가 막혔는지도 모릅니다. 인간관계의 갈등입니다. 내 마음속에 이웃을 향해서 미움이 있다면, 그것이 기도를 막는 것입니다. 용서는 하나님의 중요한 성품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용서해주셨습니다. 복음의 한가운데는 용서가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도, 한없이 하나님의 용서를 받으며 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나도 용서를 실천해야 합니다. 모든 성도님들이, 세상 속에서 날마다의 삶이 거룩한 예배가 되도록 하시길 축복합니다. 세상 속에서 거룩하게 살므로, 풍성한 열매를 맺으며 살 수 있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 오피니언
    • 칼럼
    • 은혜의 말씀
    2023-12-01
  • [교회음악칼럼] 찬송(예배)하며 사는 사람들 9
    미국에서 살 때 아들의 성화에 못 이겨 런닝머신을 들여 놓았다. 그것만 있으면 살을 뺄 수 있다는 것이다.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살도 못 빼고 머신은 장식품으로 전락했다. 운동을 하면서 느낀 것인데 억지로라도 운동을 하기 위해 머신에 올라갔을 때 제일 힘든 점은 지루함이다. 절박함이나 목표가 없어서이기도 하지만 좁은 실내공간에서의 운동은 답답하기까지 했다. 비겁한 변명이긴 하지만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미있는 것을 발견했다. 30분정도 걸으니까 몸이 데워지고 근육과 관절이 부드러워 지면서 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이 지루한 30분이 문제였다. 이것을 극복할 수만 있다면 지속적인 운동이 가능하겠구나 생각하게 되었다. 우리가 무엇인가는 시작하면 얼마가지 않아 어려움에 봉착할 때가 있다. 나의 전공인 음악분야를 예를 들면 아이들이 피아노를 시작하게 되면 바이엘이라는 교본으로 시작을 하는데 반쯤 진도가 나가면 힘들어 하면서 하기 싫어하는 것을 보게 된다. 나름 힘든 장애물을 만난 것이다. 이 고비를 넘기지 못하면 포기하게 된다. 상당한 수준의 경지에 이르기까지 이와 같은 어렵고 힘든 고비를 수도 없이 견디고 넘어야한다. 쉽지 않은 일이지만 이겨내야만 목표한 바를 이룰 수 있는 것이다. 성악도 가르쳐 보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짧은 시간에 결과를 얻고자 한다. 바꾸어 말하면 길게 인내하며 지속적으로 오래하기를 원치 않는 것이다. 세상에 어떤 열매도 지난한 고난의 시간을 견뎌내지 않고 얻을 수 없다. 어디 이뿐이겠는가 우리가 삶을 살아가는 모든 여정가운데 이것은 늘 경험해 온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즉 지속적이고 꾸준함이란 참으로 고통스럽고 힘든 것임에 틀림이 없는 것 같다. 우리의 신앙생활을 돌아봐도 능히 느낄 수 있다.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 푯대를 향한 우리의 걸음이 바르고 꾸준하였는지, 어렵고 힘들어서 주저앉아 걷기를 포기한 적은 없었는지, 또 지금 나는 인내하고 참으며 지속적으로 푯대를 향한 걸음을 계속하고 있는지, 아니면 안개 속에 길을 읽고 헤매고 있지는 않은지 한번쯤 돌아보며 점검해 봤으면 좋겠다. 시대의, 세월의 흐름에 맡기고 살아도 될 만한 세상이 아닌 거 같다. 찬송과 예배가 강력하게 살아나서 힘들고, 악하고, 유혹이 많은 이 땅위를 살아가는 동안 우리가 소망하는 푯대를 향한 걸음에 멈춤이 없고 변함없는 꾸준함으로 쉼 없이 걸어갈 수 있기를 기도하며 하루하루 주님을 향한 사랑과 감사의 노래가 우리 입술을 통해 끊임없이 고백되고 선포되어지기를 소원해 본다..
    • 오피니언
    • 칼럼
    2023-12-01
  • [목회자칼럼] 지금 나는 무엇을 하고 있나?
    1397년 5월 15일, 지구의 한 곳에 한 생명, 아기가 태어났습니다. 그 후 약 150년이 흐른 후 1545 4월 28일, 지구의 한 곳에 한 생명, 아기가 태어났습니다. 이 두 사람은 현재 ‘경제규모 13위 부유국가, 7위 소비국가’인 대한민국과 무슨 상관이 있을까요? 첫 번째 한 생명, 아기는 잘 자라서 훌륭한 공무원이 되고, 두 번째 한 생명, 아기는 잘 자라서 군인이 되었습니다. 여기까지 말씀드리면 이 글을 읽고 있는 여러분들은 다들, 눈치를 채셨겠지요? 아니면 아직도 고개를 갸우뚱 거리며 예상을 못하고 있는지요? 첫 번째 한 생명, 어린 아기는 자라서 훗날 한글을 창제한 조선 4대 왕인 세종대왕이 됩니다. 그리고 두 번째 한 생명, 어린 아기는 우리나라가 일본으로부터 어려움을 당할 때, 바다를 지키며 임진왜란을 승리를 이끌고 23전 23승이라는 기적같은 전직을 세운 이순신 장군입니다. 만약, 이 두 생명, 두 어린 아기가 없었다면 오늘날의 대한민국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세종대왕은 한글을 만들면서, 훗날 조선을 넘어 대한민국의 후손들이 한글을 자랑스러워하며 민족의 정신이 담긴 글로 받아들이며 잘 사용할 것이라는 것을 예상하고 만들었을까요? 이순신 장군 역시, 500년이라는 긴 시간이 흐른 후 지긋지긋한 일본의 괴롭힘 속에 벗어나 이제는 일본과 경제, 문화 분야에 어쩌면 더 뛰어난 성장을 이룰 것을 알고 치열하게 싸운 것이었을까요? 아마, 아닐 것입니다. 세종대왕이나 이순신 장군 모두, 100년 후 혹은 500년 후를 미리 알고 그 일들을 한 것이 아니라 지금 당장 자신에게 주어진 일들을 의미를 찾아내서 했기에 가능했을 것입니다. 세종대왕이 중국의 눈치를 보며 한글을 창조한 이유는 ‘백성을 향한 사랑’이었습니다. 이순신 장군은 오자병법과 손자병법을 뛰어 넘는 전술로 전쟁을 했습니다. 이순신 주위의 모든 사람들은 “적의 숫자가 아군보다 더 많으면 절대로 싸우지 말아야 한다”고 말했지만, 이순신은 13척의 배를 갖고 명량해전을 치루었습니다. 오자병법, 손자병법을 넘어서는 결정을 하며 해전을 치룬 이유는 무엇인가요? 바로 어려움을 겪는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 이었습니다. 이제 시선을 돌려 나를 향하여 바라봅시다. 지금 나는 어떤 삶을 살고 있는가요? 혹,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이 결과가 나오지 않고, 별다른 성과가 없어 힘들어 하고 있지는 않는가요? 연말을 맞이해 일년을 결산하면서 날씨도 춥고 경제도 추운데 이뤄놓은 것도 없어 마음까지 추운 분은 없는지요? 지금도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어느 곳에서 이름도 없이 묵묵히 자기의 일을 감당하며 뚜벅뚜벅 걷고 있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비록 빛도 없고, 이름도 없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사랑을 갖고 다가서는 그 자리에 100년 후, 500년 후에 대한민국과 하나님 나라가 있을 것입니다. 2000년 전, 1월 1일에 태어난 한 생명 예수가 오늘날 전세계 75억 가운데 30억의 가슴 속에 하늘 나라의 사랑을 심어 놓았습니다. 그리고 그 중 한 명이 바로 나이고, 나같은 사람을 그분의 사랑으로 변화시키셨습니다. 뉴턴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나 자신도 사랑이라는 바다에 한 발 조차 담그지 못한, 모래 밭에서 놀고 있는 어린 아이와 같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바다를 눈과 가슴에 품어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내 눈동자와 가슴 속에는 바다가 넘실거리고 있습니다. 언젠가는 나는 그 바다에 나 자신을 내던질 것입니다. 나 스스로를 사라이랑는 바다에 던지려는 순간, 무수히 많은 사람이 곁에 있지 않을까요?” 사랑으로 시작했는데 지쳐버린 영혼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당신이 걷고 있는 그 길이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당신이 걷고 있는 그 길이 미래와 하나님 나라를 만들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알아주지 않더라도, 지금 내가 걷고 있는 이 길이 바로 미래의 출발점임을 아는 것, 지금 내가 섬기고 있는 단 한 사람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의 시작점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 2023년을 보내며 다시 한 번 점검해야 할 나의 태도와 자세일 것입니다. 2023년, 마지막 한달을 남겨 놓고 있는 이 시점, 다시 사랑에 물들고 싶고 사랑으로 견디고 싶고 사랑으로 승리하고 싶습니다. 지쳐버린 영혼이 있다면 다시 사랑으로 일어나길, 다시 하나님의 소망으로 세워지길 간절히 바랍니다.
    • 오피니언
    • 칼럼
    • 목회자칼럼
    2023-12-01
  • [이상규 교수의 역사탐색]호주선교부의 미우라 고아원 출신 김순복 여사
    김순복, 결혼 후에는 남편의 성을 따라 박순복으로 불린 한 여성의 삶의 여정은 초기 경남지방 교회 역사의 한 단면이자 한 여성의 변화된 삶의 행로를 보여주는 역사의 흔적으로 남아 있다. 김순복은 어떤 여성이었을까? 1892년 10월 12일 내한한 호주장로교 제2진 5명 중 여선교사 멘지스와 진 페리, 그리고 퍼셋은 부산진 죄천동에 거주하면서 한국인들과 접촉하기 시작했고, 전도하기 시작했지만 이들의 첫 번째 사역은 고아원의 운영이었다. 처음부터 의도한 사업은 선교사 집에 버려진 아이 때문에 1893년 고아원을 시작하게 되었다. 이 고아원이 부산경남지방 최초의 사회복지시설이라고 할 수 있는 미우라(Myoora)고아원이었다. 버려진 한 아이로 출발했으나 점점 수가 증가되어 2년 후에는 13명으로 늘어났다. 그 중의 한 아이가 김순복(金順福, 1887-1942)이었다. 6살 혹은 7살 정도 되었을 때 이 고아원에 오게 된 것으로 보이는데, 그의 부모도 알 수 없고, 어떤 환경에서 고아원에 수용되었는지도 알 수 없다. 그러나 미우라에 와서 서양 선교사들을 만난 덕에 신앙교육을 받게 되었고, 멘지스가 시작한 일신여학교에서 공부할 수 있게 되었다. 감히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이렇게 성장한 김순복은 1905년 호주선교부를 도우며 매서전도인으로 활동하던 박성애(朴晟愛, 1877-1961) 라는 청년과 혼인하게 되었다. 이때가 1905년 2월 15일이었고 18살 때였다. 남편 박성애는 28세였으니 순복이 보다 10살 연상이었다. 박성애의 혼인은 약간 늦었으나 당시에 기독교 신앙을 가진 처녀를 찾기 어려웠다. 이런 상황에서 맨지스는 자신이 양육한 순복이와의 혼인을 주선한 것이다. 결혼 예식을 주례한 이는 왕길지 선교사였다. 이때의 예식은 호주장로교 휘하의 주일학교를 위한 잡지인 「레코드 The Record」 18권 2호(1906. 2) 표지와 내지(10쪽)에 게재되었고, 신부 김순복이 에벤에셀교회 주일학교에 보낸 짧은 편지도 소개되어 있다. “친애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그간 어떻게 지내시는지요? 저는 여러분들이 베풀어 주신 후원에 힘입어 평안하게 살고 있습니다. 저는 가련한 소녀였으나 여러분들의 자상한 도움으로 좋은 음식과 좋은 옷을 입고 잘 살고 있고, 주야로 여러분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무엇보다도 주님을 알게 된 점에 대하여 더 큰 감사를 드립니다. ... 비록 우리가 서로 얼굴을 보지 못하지만 우리의 마음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하나가 되어 있습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항상 주의 은혜를 누리시기를 간절히 기대하며, 이 세상에서도 여러분들의 얼굴을 보게 되기를 기대합니다. 저를 위해서도 기도해 주십시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여러분 모두와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박순복.” 이때부터는 남편의 성을 따라 박순복으로 불렸다. 남편은 1877년 5월생으로 부산진구 범일동에서 4남매의 장남으로 출생했는데, 한문 사숙에서 수학하고 가업에 종사하던 중 내한한 서양 사람들에 대한 관심에서 지금의 부산 동구 좌천동의 호주선교부를 방문하게 되는데, 이것이 그의 삶의 행로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게 된다. 청년 박성애는 호주 선교사들과 접촉하게 되고 결국 기독교 신앙을 받아드리게 되지만 처음에는 서양에 대한 호기심뿐이었다. 선교사들과 접촉하게 되지만 자기를 들어내려 하지 않았기에 여선교사들은 그를 ‘니고데모’라고 불렀다. 그러나 24세가 되던 1901년 초에는 분명한 기독교 신자가 되었고, 부산진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했다. 1901년 2월 10일에는 왕길지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게 되는데, 자신의 아내가 될 김순복도 이 때 세례를 받았다. 그후 왕길지 선교사의 주선으로 대영성서공회 매서인으로 활동하게 된다. 그리고 부산진교회 수요 예배 인도자로 임명되었다. 이렇게 변화된 길을 가자 호주선교사 멘지스와 왕길지는 그를 순복이에게 소개하고 혼인하게 이끌어 간 것이다. 그런데 박성애는 호주의 첫 의료선교사인 휴 커를의 조수로 채용되었고, 커를 이사는 의사나 병원이 없는 서부 경남의 진주에 가서 일하고자 했다. 그래서 커를은 박성애 부부에게 진주로 같이 가서 일하자고 제안했고, 이 제안에 따라 이들은 1905년 10월 18일 부산을 떠나 진주로 향했다. 고아소녀였던 김(박)순복은 호주장로교선교부의 진주지방 개척에 동참하게 된 것이다. 이때 부산을 떠난 이들로는 커를 의사와 그 부인 앤스티, 부산에서 얻는 큰 딸 사라와 둘째 딸 프란시스, 박성애 가족으로는 어머니 양주련, 박성애와 부인 김순복, 박성애의 남동생 박자룡 두 여동생 박은실과 박보렴 등 6 사람이었다. 선교사 가족 4사람과 총 10 사람이 늦은 가을 낙엽이 거리를 부산을 뒤로 하고 진주로 향한 것이다. 마산까지는 기차로 갔고 마산에서는 가마꾼의 도움을 받아 진주로 향해 20일 저녁 9시 30준 진주에 도착했다. 이날이 음력으로 9월 22일이었다. 이들 일행은 진주 성내면 4동 북만 안에 있는 정경철씨 소유 초가집에 임시로 거주하게 되었다. 김순복의 인생에 있어서 두 번째 전기가 된다.
    • 오피니언
    • 칼럼
    • 이상규교수의 역사탐색
    2023-12-01
  • [서임중칼럼] 인생의 초겨울을 느낀다
    가을 단풍이 좋다는 지인들의 노래를 따라 한나절 산행을 했다. 그렇게 가을이구나! 했는데 겨울바람이 어느 새 문풍지를 흔든다. 이제는 단풍도 빛바랜 풍광을 보며 만상(萬象)이 떠오른다. 이전엔 법주사 앞을 지나려면 통행세를 내야만 했다. 그러나 그것이 폐지된 지 반년이 지나면서 법주사 방문객과 등산객이 15% 증가했다는 보도를 듣는다. 자연이 무상으로 국민의 품으로 돌아온 것은 참으로 감사할 일인데 그곳의 불법주차와 쓰레기도 함께 늘었다는 뉴스를 듣자니 우리의 문화생활은 아직도 멀었다는 생각이 든다. 일본에 대한 우리 국민정서가 여전히 곱지 않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들의 문화생활, 공중 생활이 질서정연하다는 것을 부인할 순 없다. 35년 전 한일 역사 연구를 위해 3주간 일본에 체류할 때였다. 공중전화통 위에 지갑을 놓고 깜빡 잊고 나온 것이 생각나 4시간 만에 다시 가 보았다. 지갑은 놓아둔 그대로 있었다. 무척 감동을 받았던 터라 지금도 잊을 수 없는 기억이다. 대중목욕탕에서도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수건을 2장 이상 사용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다음 사용자를 위한 배려로 자기가 사용한 곳을 말끔하게 정리정돈 하는 모습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다. 대중식당에서나 공공장소에서는 큰소리 내는 일이 없고, 대화도 옆 사람에게 결례되지 않도록 조용조용 하는 것은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일본의 한 모습이다. 스위스에서 본 일례로 비가 오는 날이었다. 식당에 일본인 단체 손님이 들어오는데 우산을 순서대로 줄을 세워 보관하는 것이었다. 보기 드문 모습에 말문이 막혔다. 산행을 하며, 불법주차에 불법 쓰레기 투여, 시골 장터 같은 카페 등 얼굴이 화끈거리다 못해 속까지 참담해지는 장면들을 흔히 볼 수 있는 우리의 모습을 다시 한번 돌아본다. 가을 단풍이 아름답다는 표현처럼 우리의 삶도 아름답게 물들었으면 좋겠다. 가을이 익어간다는 말처럼 우리의 삶도 성숙하게 다듬어져 갔으면 좋겠다. 문득 내 나이를 생각한다. 인생의 초겨울을 맞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겨울이 깊어 가면 푸름을 자랑하던 모든 식물은 그 빛을 아주 잃고 생존한 일이 없는 듯하다. 그러나 봄이 오면 얼어붙던 땅을 헤집고 새로운 움을 틔우며 새 생명으로 탄생한다. 그 한 포기 풀을 통해서도 내 삶을 반추한다. 내 인생 또한 겨울을 맞이하면 이 땅에서의 내 삶도 마무리될 것이다. 나는 부활의 아침을 확신하는 믿음으로 그 나라에서의 삶을 기대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땅에서의 내 삶은 초겨울을 느낀다. 초겨울의 오늘을 나는 어떻게 보내야 할까? 계절의 겨울이 깊어 가듯 인생의 겨울도 깊어 가는데 더 많이 이해하고 사랑하며 축복하고 감사하는 말을 하면서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란다. 포항중앙교회에서 시무하던 때였다. 주일 예배를 마치고 퇴근할 무렵이면 예배당 마당 한켠에서 나를 기다리는 분이 계셨다. 어느 한 주일도 예외가 없다. 입고 있는 옷은 1년 365일 똑같은 옷, 역사에 관한 것이라면 천재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해박한 사람, 그러나 아이들 말로는 항상 2% 부족함을 드러내는 분이다. 내가 현관에 나타나면 한달음으로 달려와 반갑게 인사를 한다. 그러면 나는 지갑에서 만원을 꺼내 그분 손에 쥐어드리고 어깨를 한 번 감싸 두드려 주며 “밥 잘 잡숫고, 항상 감사하고, 아셨지?” 하면 얼굴이 환하게 밝아지면서 쏜살같이 돌아서 달음질하곤 했다. 목사를 보고 싶어 하는 그분, 손에 만원을 쥐어 드리면 금방 얼굴이 환해지면서 천진스럽게 어린아이처럼 인사하고 돌아서는 그 분의 모습은 수천만 원을 주고도 살 수 없는 인간애(人間愛), 순수함 그것이다. 나는 주일마다 그렇게 그분을 만났다. 말 한마디 없는 그 분은 수천만 마디를 눈빛과 표정으로 목사에게 말한다. 그러던 분이 어느 주일에 보이지 않았다. 덜컥 가슴이 내려앉는 느낌이었다. 혹여 늦나 싶어 차 안에서 잠깐 기다려 보지만 나타나지 않았다. ‘어디 편찮으신가?’ ‘설마…?’ 그러다가 다음 주일에 나타난 그 분을 보면서 괜스레 눈시울이 젖었다. “아픈 데 없지? 괜찮지?” 그러면서 그날은 2만 원을 손에 쥐어 드렸다. 목사는 그렇게 주일만 되면 만원으로 행복을 경험했다. 그분은 나에게 있어서 오늘의 예수님이었다. 그래서 그분이 나를 보고 싶어 한걸음에 달려올 때 나는 주님을 보듯 반기고, 그것이 매 주일의 행복한 시간이 되었고 나도 매 주일 그분을 주님처럼 생각하며 보고 싶어진 것이다. 은퇴 후에는 그분을 다시 만나지 못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던 당부, 갇힌 자들을 돌아보고, 목마른 자에게 한 잔의 냉수라도 내어주며, 헐벗은 자를 입히고, 아픈 자를 찾아 위로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해 주는 것은 유별난 행동이 아니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것을 하는 것이다. 그것이 따뜻한 위로의 한 마디일 수도 있고, 때로는 문안 전화 한 통화일 수도 있으며, 흔히 쓰는 문자 메시지 한 줄일 수도 있다. 내가 기도할 때 한 마디의 중보일 수도 있고, 내가 먹는 것을 함께 나누는 것일 수도 있다. 그것이 사랑의 연주다. 그것이 나눔의 축복이다. 그것이 행동하는 믿음이다. 사랑한다는 것은 유별난 계획을 세워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하는 것이다. 그 때 우리는 날마다 오늘의 예수님을 만나게 된다. 계절의 겨울이 깊어 가듯 우리네 인생의 겨울도 깊어 간다.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사랑하며 사는 것이 아니겠는가. 언젠가 갔었던 동경의 ‘고시래’ 식당이 떠오른다. 수많은 손님이 식당 주인 배우 욘사마, 배용준 씨를 그리워하면서 ‘그분은 언제 오실까?’ 고대하는 마음으로 그 비싼 음식을 주문하여 먹고 있었다. 계절의 초겨울에 내 인생의 초겨울을 생각한다. 계절의 겨울이 깊어 가듯 인생의 겨울도 깊어 가는데 더욱 사랑하면서 살아야겠다는 마음을 다시 한번 다짐해 본다. 그러다가 다시 오시는 그 분을 만나고 싶다.
    • 오피니언
    • 칼럼
    • 서임중 칼럼
    2023-11-10
  • [시사칼럼] 디아스포라가 우리의 희망입니다
    지난 주간에 중국의 동북부에 위치한 헤이룽장성(黑龍江省)에 충격적인 한파가 밀어닥쳤습니다. 불과 며칠 전만 해도 늦여름 날씨가 지속되다가 돌연 기온이 영하 25도까지 떨어지면서 폭설이 내려 도시 전체가 마비되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세간의 화제가 된 이 지역을 한민족이라면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바로 이곳이 ‘간도’ 지방이기 때문이고, 그 중심에 안중근 열사의 의거가 일어났던 하얼빈 시가 있기 때문이며, 지금도 많은 동포들과 그 후손들이 터를 잡고 살아가고 있는 땅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고 보니 이 ‘간도’ 땅을 향해 요즘만큼 한국인들의 관심이 집중된 적이 드문듯합니다. 홍범도 장군도 관련이 있습니다. 육사 교정에 있는 흉상 철거 문제로 여전히 논란의 중심에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덕분에 엄청난 홍보 효과가 있었습니다. 1920년 6월 7일에 일어났던 봉오동 전투 말인데, 소수의 대한독립군 부대를 이끌고 일본군 제19사단 월강추격대대를 무찌르고 큰 승리를 거두었던 이곳은 오늘날 지린성(吉林省)으로 불리지만 역시 대표적인 ‘간도’ 지방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당시 이 일대에 거주하던 한인들의 규모는 『백범일지』에도 소개되어 있는데, 독립자금과 관련해서 김구 선생은 “동북3성(흑룡강, 길림, 요녕)에 250만, 러시아에 150만, 일본에 40-50만 명의 동포가 있으나 각각의 사정으로 기댈 수 있는 형편이 아니고 오직 미국 본토와 하와이, 멕시코, 쿠바를 아우르는 일만 명의 동포 성금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토로한 바 있습니다. 당시 벌써 500만 명이 넘는 한인 디아스포라(diaspora)가 있었다는 얘기인데, 정확한 수치는 누구도 알 수 없으나 가난과 압제와 구직 등 이런 저런 사정으로 고국을 떠나 낯선 땅에서 그래도 한민족의 정체성을 간직한 채 살아가던 숱한 동포들이 존재했던 것만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7년 기념일에 관한 규정에 의거하여 10월 5일을 ‘세계 한인의 날’(World Korean Day)로 지정하고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미국(260만), 중국(235만), 일본(82만), 캐나다(24만) 등 현재 세계 각국에 거주하고 있는 한인들은 약 730만 명이라고 합니다. 이 땅에 살고 있는 한국인 5,100만과 비교할 때 거의 15%에 달하는 수치입니다. 올해 초에 부산 지역의 청년 인구에 관한 유의미한 통계조사 결과가 처음으로 나왔습니다(2023. 2. 22, 부산시). 이에 따르면 2011년 11월 기준 만 18세에서 34세까지의 부산 인구는 총 68만 9천 명으로 전체 인구의 20%를 차지했고 전년도에 비해 2.1% 감소한 수준으로 2015년 이후에는 계속해서 감소하는 추세입니다. 이대로라면 20년 후인 2040년대에는 40만 명대가 예상됩니다. 일자리를 좇아 수도권으로 이동하는 비율도 높지만 혼인율 자체가 낮고 특히 해당 연령대 청년 출산율은 0.476명으로 심각한 수준이라 앞으로 반등의 기대가능성조차 별로 없는 실정입니다. 물론 부산 지역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날이 갈수록 인구절벽의 전망이 불안한 심리에서 기정사실로 바뀌어 가고 있습니다. 전체 인구가 감소하는 자체가 문제입니다. 이제는 ‘둘만 낳아 잘 기르자’ 대신 ‘인구는 경제력이고 국력이다’라는 말을 귀담아 들어야 할 때입니다. 더군다나 생산가능연령의 인구가 줄어들고 있으니 산업현장에 인력이 제대로 공급되지 않을뿐더러 사회 각 분야에서 ‘일할 사람이 없다’라는 아우성이 울려 펴지게 생겼습니다. 그렇다면 희망은 없을까요? 문제 해결의 단서를 우리는 성경 속 이스라엘을 통해 발견할 수 있습니다. 나라가 망하고 어쩔 수 없이 거대한 디아스포라가 되고 말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느 곳에 거하든 민족과 신앙의 정체성을 잃지 않으려 애썼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때가 차면 그들 중 일부는 기꺼이 다시 돌아와 조국과 성전의 재건을 위해 헌신하였습니다. 주전 6세기 바벨론에 살고 있던 백성들 중 5만에 가까운 이들이 귀환하여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다시 일으켜 세웠습니다. 놀랍게도 현대에 와서도 같은 현상이 발생합니다. 1882년부터 1948년까지 유대인 디아스포라 가운데 50만 명 이상이 다시 돌아와 현대 이스라엘 국가를 건립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한인 디아스포라는 그 규모와 영향력에 있어서 결코 유대인 못지않습니다. 만일 이들 중 일부만이라도 통일된 조국으로 돌아온다면, 그래서 현재 51,430,000명인 대한민국과 25,750,000명으로 파악되는 북한의 인구에 합쳐진다면 물경 8천만에 가까운 세계 20위권의 인구 대국으로 일어설 수 있습니다. 더욱 고무적인 사실은 고향으로 되돌아오는 대부분의 인구는 청년을 비롯한 생산가능연령대일 거라는 점이지요. 그렇다면 소멸하는 인구 문제로 걱정하는 우리에게도 한 줄기 빛이 보이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예비해 놓으신 답을 바로 이번 간도 땅 ‘디아스포라’를 통해서 바라봅니다. 할렐루야!
    • 오피니언
    • 칼럼
    • 시사칼럼
    2023-11-10
비밀번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