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0-10-22(목)

오피니언
Home >  오피니언  >  칼럼

실시간 칼럼 기사

  • [은혜의말씀] 영적권세를 사용하라(마 12:28-30)
    우리는 삼차원의 세상에서 살고 있지만 실상은 눈에 보이지 않는 4차원의 지배를 받으며 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눈에 보이는 것만 믿고 살아선 결코 안 됩니다. 우리는 보이지 않는 영적권세가 있음을 깊이 통찰하고 보이지 않는 4차원의 영적 권세를 활용해야 합니다.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영적권세는 무엇이 있을까요? 1. 죄를 사하는 권세입니다. 이 세상은 죄로 가득한 세상입니다. 하나님은 인생들이 회개하고 돌아올 때에, 먼저 그들의 죄를 용서해 주십니다. 못났고 죄짓고 불의하고 추악했던 우리, 냄새나는 누더기 옷을 입은 우리를 안아 주십니다. 이렇게 큰 용서받은 우리가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나를 용서하고 받아주신 하나님 앞에 항상 감사하는 일입니다. 그 다음엔, 나도, 타인들을 용서할 수 있는 마음, 즉, 죄를 사하는 권세를 행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이 권세를 주셨습니다. (요20:23) 2. 축복의 권세가 있습니다. 성도에겐 또 축복의 권세를 주셨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자녀가 되는 순간부터 <축복의 통로>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창12:3) 세상 사람처럼, 너무 쉽게 남을 저주하며 살면 안 됩니다. 도리어 축복하며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 자꾸 축복의 권세를 사용하십시오! 도시를 위하여 사회를 위하여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잠11:11) 3. 강한 자를 결박하는 권세입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시고 전능하시며 좋으신 아버지이십니다. 그리하여 우리에게 영원히 좋은 것으로 주시고 계시지만, 사탄은 육체에 속한 인간들을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며 끊임없이 괴롭힙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마귀의 권세에 눌려 고통당하는 우리에게 생명을 주되 풍성히 주고 계십니다. (요10:10)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능력으로 마귀권세를 완전히 깨뜨려 버렸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십자가의 권세를 가지고 강한 자 곧, 마귀사탄의 세력을 결박해야만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강한 자를 결박하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마10:1, 10:5-15) 4. 말로 명령하는 권세. 하나님께서는 말로써 천지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모세를 통하여 율법을 말씀으로 후대에 전하도록 하셨으며, 선지자들의 입을 통하여 예언을 전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신 분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계시는 불과 3년 반 동안에 수많은 말씀과 기적과 이사와 행적을 남기셨습니다. 요 21장 25절의 사도 요한이 고백한 것처럼 예수님이 하신 말씀, 예수님이 행하신 권세와 능력은 놀라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믿는 백성들은 말로써,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통하여 명령함으로써, 영적권세를 사용해야 합니다.
    • 오피니언
    • 칼럼
    • 은혜의 말씀
    2020-07-28
  • [의학칼럼] 시력교정술
    ■근시란 무엇인가요? 근시는 눈의 기능이 떨어져 가까운 물체는 뚜렷하게 잘 보이지만, 멀리 있는 물체는 또렷하게 보이지 않는 현상을 말합니다. 이런 근시를 가진 눈을 근시안 이라고 합니다. ■근시의 원인? 물체의 상이 망막 앞쪽에 생기기 때문인데 안구가 정상적인 안구보다 길거나, 각막 표면의 곡률이 너무 커서 광선이 각막을 지나면서 너무 많이 꺾이거나, 수정체가 충분히 펴지지 않아 광선이 수정체를 지나면서 너무 많이 꺾이면 근시가 나타나게 되며 오목렌즈로 교정을 할 수 있습니다. ■ 원시는 무엇인가요? 근시와는 반대로 먼 물체는 뚜렷하게 잘 보이지만, 가까이 있는 물체는 또렷하게 보이지 않는 현상을 말합니다. 원시의 원인은 물체의 상이 망막 뒤쪽에 생기기 때문이며, 안구가 정상적인 안구보다 납작하거나, 각막 표면의 곡률이 충분히 크지 않아서 광선이 각막을 지나면서 덜 꺾이거나, 가까이 있는 물체를 보려할 때 수정체가 충분히 압축되지 않아 광선이 수정체를 지나면서 덜 꺾여서 그러한 상황이 나타나게 됩니다. 이 경우 볼록렌즈로 교정이 가능합니다. ■ 난시란? 난시란 눈에 들어간 및이 각막에서 굴절되면서 한 점에서 초점을 맺지 못하고, 두 점 또는 그 이상의 초점을 갖는 눈의 굴절이상을 말합니다. 원시나 근시에서는 초점이 망막표면에 맞지 않아서 상이 흐리게 보이는 것과는 달리, 원거리의 한 점에서 나오는 빛이 각막과 수정체를 통과한 후에 어느 한 점에 상을 맺지 못하므로, 상이 흐려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어느 정도 난시를 가지고 있게 되는 경우가 많으며, 그 정도가 심할 경우 시력에 영향을 주게 되므로 안경,렌즈, 굴절교정수술 등으로 교정이 가능합니다. ■ 시력교정술이란? 시력교정술의 종류? 시력교정술은 쉽게 말해 안경이나 콘택트렌즈의 의존성을 줄이거나 없애고, 눈의 굴절 상태를 개선하는데 사용되는 안과적 수술을 모두 가리킵니다. 흔히들 아는 라식,라섹, 스마일수술을 포함해 각막수술, 백내장수술 등 다양한 방식의 수술 모두 시력교정술이라 할 수 있습니다. ■ 라식,라섹 차이점? 라식과 라섹 수술 모두 각막 실질 부위에 미리 목표한 양의 레이저를 조사항 굴절이상을 교정한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각막 실질에 레이저를 조사하기 위해서는 실질 부위를 겉으로 드러내야 하는데, 실질 부위를 노출시키는 방법이 두 수술이 가장 큰 차이점이 되겠습니다. 라식은 각막 상피를 포함하여 각막의 실질 일부까지 정해진 두께로 잘라서 각막 절편을 만드는 반면, 라섹은 실질을 포함하지 않고 각막 상피만 벗겨낸 후에 드러나는 각막의 실질에 레이저를 조사하게 됩니다. ■ 어떤 수술이 더 안전한가요? 어떠한 수술이 더 위험하거나 안전하다고 말할 수는 없으며, 각각 수술의 특징과 장단점이 있으므로 의료진과 충분한 상담을 한 뒤 적합한 수술을 받는 것이 중요합니다.
    • 오피니언
    • 칼럼
    • 의학 칼럼
    2020-07-28
  • [서임중칼럼] 코로나19가 그렇게 무서운가?
    나는 늙어가는 별 볼일 없는 사람이다. 그래도 하나님은 필요한 곳이 있는지 말씀 대언의 사역을 계속하게 하신다. 친구들이 나에게 붙여준 작금의 닉네임이 ‘서삿갓’, ‘바울사도’다. 아마도 전국을 다니며 말씀사역을 하는 나의 일상을 빗댄 것이리라. 그러나 내가 동의하지 않는 것은 김삿갓의 삶은 ‘죽장에 삿갓 쓰고 술 한잔과 방랑 삼천리’한 것이고, 나는 ‘복음의 신을 신고 구원의 투구를 쓰고 목적 있는 삼천리’이기에 그렇고, 바울은 ‘이름만 읊조려도 무릎이 꺾어지는 위대한 복음전도’가 그 삶이었기에 나 같은 미말의 목사가 바울사도의 이름 곁에 붙여지는 것 자체가 황송하고 어불성설이기에 그렇다. 그럼에도 작금의 나의 일상은 일 년 내내 농어촌, 산골, 개척교회를 다니면서 복음을 전한다. 그런 차원에서라면 떠도는 내용은 다르지만 상황은 김삿갓처럼, 바울 사도처럼이기에 동역자들이 그렇게 표현하는 것이리라. 지난 3월부터 코로나19의 정부 방역대책에 교회도 앞장 서 협력하면서 주일예배도 온라인예배로 드리는 상황이었다. 이런 가시적 상황에 사람들의 불안과 걱정은 그야말로 ‘온 세계 코로나19 멘붕(mental collapsing) 상태’의 지속이다. 한마디로 카오스 현상이다. 이런 때에 그리스도인들은 영적 상황인지력과 예지력을 가져야 한다. 코로나19 팬데믹의 두려움에 함몰되는 영적생활이 아니라 극복할 수 있는 일상생활이어야 한다. 상황인지력이란, 코로나19 시대에 소위 ‘믿습니다’를 앞세워 정부 방역 대책에 불응하는 신앙관이 아니라 WHO와 질병관리본부의 방역대책에 순응하며 자기관리, 집단관리로 순리를 따르는 것이다. 예지력이란, 성경적 관점에서 질병의 발생 원인과 대응, 그에 따른 영적 반응을 이름이다. 질병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질병에 대한 이해와 극복하는 자세를 통해 질병을 통한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고 한 차원 더 나아가는 신앙생활을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잠언 4:23절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는 인간생활에서 마음관리가 얼마나 귀한 것인가를 더욱 깊이 교훈하는 말씀이다. 전국 교회를 다니면서 말씀 사역을 하는 동안 듣는 모든 목회자의 공통된 아픔이 예배출석과 헌금이 줄어드는 상황에 현실적으로 어려움이 한두 가지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런 답답한 속내의 솔직한 목회내용을 점검해 보면 ‘교회 출석이 가능한데도 코로나19를 앞세워 예배 출석을 안 한다. 따라서 교회 전반적인 교육 행정 선교가 멈추는 듯한 상황’이다. 그럴 때마다 조언해 주는 것은 목회자부터 코로나19에 대한 무의식적 불안과 걱정과 두려움에서 벗어나야함을 강조한다. WHO는 코로나19가 우리의 삶에서 쉬 멀어지지 않을 것으로 예견한다. 수많은 사람이 세계 곳곳에서 죽어가고 있고 바이러스는 변종으로 더욱 우리의 생활을 위축시키며 불안하게 하는 상황에서 스스로를 지키는 수단은 손 씻기, 사회적 거리두기, 마스크 착용하기 뿐이다. 이미 이것이 오늘의 일상생활이 되었다. 이런 때에 그리스도인의 생활습관도 영적으로 자연스럽게 더욱 승화되어 내 영혼을 지키기 위한 영적 손 씻기와 마스크 착용, 사회적 거리두기를 할 수 있어야 한다. 육신의 죽음은 두려워하면서 영원한 죽음은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신앙인이 아니다. 가시적 코로나19 바이러스를 두려워하면서 죄의 무서운 바이러스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면 믿음 있는 사람이 아니다. 야고보 4:8절에서는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고 권고하셨다. 코로나19 때문에 손 씻기가 일상이 되듯 손으로 지은 죄를 깨끗이 할 수 있어야 한다. 야고보서 1:26절에서는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물리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했다. 마스크를 쓰는 것은 일상화하면서 자기 입에 재갈을 씌우지 못하면 헛된 신앙이다. 사도행전 15:29절에서는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멀리하라. 이에 스스로 삼가면 잘 되리라.”고 했다. 요한1서 5:21절에서는 “자녀들아 너희 자신을 지켜 우상에게서 멀리하라.”고 했다. 사회적 거리두기는 잘 지키면서 죄악된 것들에서 거리를 두지 않는 생활을 하면 코로나19로 죽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영원한 생명이 죽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역대하 7:13~14절에서 “혹 내가 하늘을 닫고 비를 내리지 아니하거나 혹 메뚜기들에게 토산을 먹게 하거나 혹 전염병이 내 백성 가운데에 유행하게 할 때에,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들의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낮추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찾으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들의 죄를 사하고 그들의 땅을 고칠지라.”고 말씀하신 하나님 앞에 우리는 죄를 회개하고 무릎을 꿇어야 한다. WHO를 중심으로 온 세계가 코로나19 백신개발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 백신이 개발되면 또 다른 질병이 발생한다. 하나님은 근원적인 백신을 바울을 통하여 말씀하셨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1:17).”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1서 1:7).” “이와 같이 주께서도 복음 전하는 자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명하셨느니라(고전9:14).” 코로나19가 그렇게도 무서운가? 영혼을 죽이는 죄의 바이러스가 더 무서운 것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를 영원히 살리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백신을 널리 전파하는 복음 전파를 통해 생명을 살리는 ‘여호와 라파’를 노래하자.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마10:28).” 아멘
    • 오피니언
    • 칼럼
    • 서임중 칼럼
    2020-07-14
  • [성서연구] 주 예수를 믿으라
    코로나19는 익숙하던 많은 것을 빼앗았습니다. 예배당에서 모이지 못하니 예배당이 없는 것과 비슷합니다. 구역, 남녀선교회, 교회학교, 소그룹 등이 중단되었습니다. 이 상황은 초대교회 당시와 흡사합니다. 초대교회도 예배당, 남녀선교회, 노회, 총회도 없었습니다. 평소에 초대교회로 돌아가야 한다거나 초대교회에서 배워야 한다고 말해 왔는데, 지금이야말로 초대교회를 배울 최적의 기회입니다. 코로나19 상황에서 초대교회의 신앙을 깨닫는다면, 코로나19를 축복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본문은 초대교회의 신앙을 이해하는 통찰력을 제공합니다. 바울과 실라는 빌립보에서 점치는 귀신들린 여종을 온전하게 했는데, 이로 인해 매를 맞고 착고에 채워져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러나 이분들은 하나님을 원망하기는커녕 밤중에 일어나 찬송하고 기도했는데, 그 밤에 엄청난 일이 일어났습니다. 지진이 일어나 터가 흔들리고 옥문이 열리고 착고가 벗겨졌습니다.(행 16:25-26) 간수는 죄수들이 도망한 줄 알고 자결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바울과 실라는 그대로 있었습니다. 이들에게 마음으로 굴복한 간수는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라고 물었고, 바울과 실라는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고 대답했습니다.(행 16:31) 이 대답은 초대교회 신앙의 핵심입니다. 모든 것은 주 예수님을 믿는 데서 출발합니다. 기독교 신앙이란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성도입니다. 교회란 주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성령님 안에서 사랑과 기도로 연결된 공동체입니다. 초대교회 선배들은 예배당도, 교회 조직도 없었지만, 각자의 자리에서 예수님을 구주로 믿었습니다. 그 믿음으로 기도했고, 전도했고, 말씀을 따라 살려고 힘썼고,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지키려고 순교까지 했습니다. 이게 초대교회의 신앙이었습니다. 당시의 예수님을 믿는 신앙은 단순했지만, 강력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주 예수님을 믿는 신앙>이 흐려지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은 조직을 만들고, 거기 사람을 배치하는 일에 집중했습니다. 조직에 들어가 일을 많이 하면 믿음이 좋다고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주 예수님을 믿는 것보다 거기 붙어있는 군더더기가 더 중요해지는 왜곡이 일어났습니다. 이런 일은 오늘날 더 극심합니다. 목사를 소개할 때도 몇 대째 믿는 가정 출신인지, 학벌은 어땠는지, 신학교 성적은 어땠는지, 그 후 어느 교회에서, 어떤 사역을 했는지를 장황하게 소개할 뿐, 얼마나 주님을 간절히 믿고 사랑하는지, 말씀대로 살고자 노력하는지 등은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으세요>는 말 대신 <교회에 다니세요>라고 말하게 되었습니다. 이러다 보니 교회는 다니는데, 예수님은 안 믿는 사람이 생겼습니다. 이런 이들이 세속적 사고로 교회 일을 하니 교회가 타락하고 세속화되는 비극이 생깁니다. 기억합시다. 기독교 신앙은 주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코로나 때문에 예배당에 자주 모이지 못해도, 아니 전혀 모이지 못해도 얼마든지 예수님을 믿을 수 있습니다. 코로나 시대는 본질보다는 조직과 제도에 매였던 것에서 벗어나 예수님께 더 집중할 기회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그 믿음에 근거하여 가정에서, 직장에서, 이웃 사이에서 예수님의 뜻대로 사는 진정한 신앙을 훈련할 기회입니다. 이렇게 되면 신앙 생태계가 완전히 달라질 것입니다. 지금까지 중요하게 여겼던 것은 주변으로 밀려날 것이며, 지금까지 흐릿해졌던 주 예수님을 믿는 신앙은 또렷해질 것입니다. 우리는 교회에 다니기 때문에 성도인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성도입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이 단순하고도 분명한 메시지를 다시 새길 기회입니다. 코로나19 시대를 통하여 한국교회가 정말 초대교회를 닮게 되길 원합니다.
    • 오피니언
    • 칼럼
    • 성서연구
    2020-07-14
  • [통일칼럼] 독재자들의 평화협정
    ‘뮌헨의 교훈’(Lesson of Munich)이라는 국제정치학 용어가 있다. 독재자들은 평화협정 체결을 침략전술의 하나로 이용한다는 의미이다. 대화주의자 영국 체임벌린수상은, 체코를 침공한 히틀러에게 평화협상을 제안했다. 히틀러는 즉시 응답했고, 프랑스의 에두아르 달라디에 총리, 이탈리아의 베니토 무솔리니 총리, 체임벌린 영국총리 등 4개국 대표는 독일 뮌헨에 서 역사적 평화협정에 서명했다. 1938년 9월30일, 체임벌린 총리는 협정문을 흔들면서 “앞으로 유럽에서 전쟁은 없다. 우리시대의 평화가 도래했다”고 선언했다. 체임벌린은 대화를 통해 유럽을 전쟁의 위기에서 구해낸 영웅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그러나 6개월 후인 1939년 3월, 히틀러는 체코전역을, 9월에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뮌헨평화협정문을 휴지조각으로 만들어 버렸다. 1973년 월맹(북베트남)은 미국에 평화협정을 제안했고, 미국이 이를 받아들여 1월27일 파리평화협정이 체결됬다. 그러나 1974년에 미군이 철수하자 월맹은 곧바로 남베트남을 침공했고, 1975년 4월30일에 대통령궁 철문을 탱크로 밀고 들어가 남베트남을 공산화했다. 파리평화협정 후 벌어진 일이다. 파리평화협정 체결 당시 미국무장관이었던 키신저는 월맹군의 말을 믿고 평화협정체결 한 것을 가장 뼈져리게 후회한다고 훗날 술회했다. 최근 공개된 러시아 비밀문서에 의하면, 김일성은 1950년 6.25 남침하면서 세 단계 전략을 세웠다고 한다. 첫 번째 단계가 38선 인근에 병력을 우선적으로 집결시키는 것, 두 번째단계가 6월7일, 평화통일호소문 발표와 동시에 남북한 총선거 제안이다. 광복 5주년을 기념하여 8월5일부터 8일까지 남북한 동시 총선거를 실시하여 최고입법기관회의를 구성하고, 8월15일에 서울에서 첫 회의를 갖자고 했다. 세 번째 단계로, 이것을 의논하느라 어수선해진 틈을 타서 남한을 기습공격을 한다는 전략이다. 김일성은 평화통일을 호소한 뒤에 무력으로 남한을 침략한 것이다. 그 역시 독재자들의 수법을 그대로 답습한 것이다. 처칠은 전체주의 독재자들과 물질제공 협상이나, 굴복 혹은 그들과 평화협정을 맺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은 없다고 했다. 역사는 이를 증명했다. 최근, 미국 트럼프대통령은 김정은과 평화를 위한 대화에 응할 의사가 있다고 밝혔다. 김정은도 속내로는 체제보장과 경제적 지원을 전제로 미국과 정전협정 혹은 평화협정을 맺고 싶어한다. 우리정부도 최근 북한 대화론자들을 국정원장, 통일부장관과, 국가안보실장 등으로 지명하면서 북한과 평화(정전)협정을 위한 대화를 이어가겠다고 선언했다. 북한은 아직도 김일성의 유훈을 헌법상 그들의 국가이념으로 받들고 있는 김일성주의 독재국가이다. 뮌헨의 교훈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한국교회와 교회지도자들도 우리가 원하는 평화통일이 누구를 위한 통일이어야 하는가를 매우 진지하게 고민하면서, 정부의 동향을 주시해야만 한다. 자유와 민주주의가 없는 사회에서는 신앙의 자유도, 복음전도의 자유도 없기 때문이다.
    • 오피니언
    • 칼럼
    • 통일칼럼
    2020-07-14
  • [시사칼럼] 창과 방패 같은 차별 금지
    춘추전국시대 초(楚)나라에 한 장사꾼이 살았습니다. 한 날은 그가 팔던 방패를 소개하면서 하도 단단하게 만들어져 천하에 무엇으로도 뚫을 수 없노라 했습니다. 뒤이어 같이 팔던 창 한 자루를 들고는 천하에 어떤 물건이라도 뚫지 못함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구경꾼 하나가 만일 그 창으로 그 방패를 찌르면 어떻게 되느냐고 묻자 답을 하지 못했다는 이야기가 중국 고전『한비자(韓非子)』에 전합니다. ‘모순(矛盾)’이라는 말이 여기서 유래했는데, 모(矛)란 창이요 순(盾)이란 방패를 가리키는 한자라서 그렇습니다. 이처럼 모순은 일견 보기에도 또한 듣기에도 서로 양립할 수 없는 두 가지 사실이나 의견이 공존하려 할 때 나타나는 비논리적 현상입니다. 모순 현상이 발생하면 특히 발화하는 사람이 주장하는 바가 설득력을 잃게 됩니다. 물론 모순의 성질을 일부러 이용하여 자기 의견의 타당성을 극적으로 배가시키려는 기법도 존재합니다. 아이러니(irony)와 패러독스(paradox)가 그러합니다. 그렇지 않을 경우라면 모순은 의견이나 주장에 아주 치명적인 요소로 작용할 때가 많습니다. 바이러스 사태가 장기화되고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면서, 이제는 ‘코로나 20’이라고 명명해도 어색하지 않을 상황이 되었습니다. 7월 8일 중앙방역대책본부는 세계보건기구(WHO)의 수장 후보로까지 거론되고 있는 정은경 질병관리본부장을 통해 교회를 향한 담화문을 발표했습니다. “7월 10일 18시부터 정규 예배 외 모임 · 행사 금지, 단체 식사 금지, 상시 마스크 착용 등 방역 수칙 준수를 의무화한다... 교회 내에서도 찬송 자제, 통성 기도 및 큰 소리 금지, 음식 금지, 마스크 착용과 거리두기의 수칙을 준수해야 한다... 이를 어길 경우 벌금 및 집합금지명령을 발할 수 있다.” 당장 교계는 반발하고 나섰습니다. 사회적 안전을 위한 취지를 십분 공감하더라도 왜 교회만 특별한 제한과 제재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반발이었습니다. ‘역차별(reverse discrimination)’을 거론하는 분도 있지만 취약 계층에 대한 ‘적극적 우대조치(affirmative action)’ 때문에 초래되는 불이익이라 볼 수는 없기 때문에, 정확하게 정의하자면 ‘개신교에 대한 차별’이라는 용어가 보다 적합합니다. 그런데 최근 이른바 ‘차별금지법안’이 국회의원 10인의 발의로 다시 등장하면서 이를 둘러싼 교계의 반발이 다시 격화되었습니다. “다시”란 말을 반복하는 이유는 이 문제가 지난 2017년부터 국회 제정 법률뿐만 아니라 지방자치단체 제정 조례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다투어져 왔기 때문입니다. 교계에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초대형 교회 목회자들 몇 분은 설교를 통해 차별금지법 반대 의견을 피력하고 성도들에게도 이에 동참해줄 것을 호소하기도 했습니다. 21대 국회 개원 이후 ‘차별금지법 반대’가 첫 번째 국민 청원이 되면서 벌써 10만 명 이상이 찬성 버튼을 누른 상태입니다. 하나님의 창조 질서에 반하는 내용이 있을 때, 아무리 법률의 이름으로 선다고 할지라도 그리스도인이라면 반대하는 목소리를 내야 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하지만 법안의 이름이 ‘차별금지법’입니다. 이런 말이 인터넷에 떠돌아다닙니다. “우리는 차별주의자가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차별금지법은 반대한다.” 두 문장은 상호 모순이 아닌가, 비아냥거리는 사람들이 올려놓은 우스갯소리랍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형이상학(Metaphysics)』에서 ‘제일학문의 공리’로 모순율을 제시하며, “어떤 것이 동시에 존재하며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어떤 것이 동일한 것에 동일한 관계에서 동시에 속하며 속하지 않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라 했습니다. 우리가 어떤 이유를 달고 아무리 그럴 듯한 설명을 해도, A의 부정의 부정은 A일 수밖에 없다고 여기는 현실 앞에 서 있습니다. 또한 지금 교회에 대한 차별을 반대하면서, 동시에 차별금지법에 대해 반대하는 주장은 설득력을 잃어버리거나 타당성을 희석시킬 가능성이 다분합니다. 성경은 차별을 조장하는 책이 아니지 않습니까? 우리 주님은 몸소 십자가를 지시고 중간에 막힌 담을 허무셨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도 교회가 차별을 일삼는 집단으로, 교인들이 차별주의자로 여김 받는 낙인 효과가 발생할까봐 우려됩니다. 그 어떤 때보다 성경적 지혜가 필요하며, 어젠다(agenda)의 재정비와 홍보전의 역량 강화가 절실한 시점입니다.
    • 오피니언
    • 칼럼
    • 시사칼럼
    2020-07-14
  • [목회자칼럼] 필복, 필성, 필상, 필통, 필립
    필복 내가 반드시 너에게 복주고 복주며 너를 번성하게 하고 번성하게 하리라(히6:14) 하나님의 본심은 저주가 아니고 축복이다. 심판이 아니고 구원이다. 어떤 아버지가 자식이 생선을 달라는데 뱀을 주고 떡을 달라는데 돌을 주겠는가?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내가 반드시 너에게 복을 주고 복을 주겠다고 약속하셨다. 사람은 식언하지만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다. 시편 첫장, 첫문장은 복있는 사람으로 시작이 된다. 행복한 사람, 다복한 사람, 인복이 많은 사람, 일복이 많은 사람이 유복한 사람이다. 연속해서 행운이 따르는 것은 그 사람의 실력이고 계속해서 실패가 오는 것은 그 사람의 습관이다. 야곱은 장자권을 팥죽을 팔아서라도 샀다. 성도는 면류관을 빼앗겨서는 안된다. 복을 받고 복을 나누어주는 축복의 통로가 되어야 된다. 필성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내가 너를 번성하게 하고 번성하게 하리라고 약속하셨다. 백세에 아들을 낳은 아브라함이지만 지금 아브라함의 후손은 하늘의 별과 같이 바닷가의 모래와 같이 많아져서 세계에 37억이나 된다. 창세기에 하나님께서 주신 문화명령이 생육하고 번성하고 충만하고 정복하고 다스리라는 것이다. 생명이 있는 존재는 반드시 자란다. 아기는 태어나면 키가 자라고 식물은 심으면 반드시 성장한다. 의인은 종려나무와 같이 번성하며 레바논의 백향목 같이 성장한다. 될성부른 나무는 축복의 DNA가 있어서 성장본능을 따라 반드시 생육하고 번성한다. 필상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11:6) 믿음의 사람은 일평생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이다. 믿음찬 사람은 은혜의 보좌앞에 담대히 나아간다. 불퇴전의 믿음을 가지고 뒤로 물러서지 않는다. 살아계신 주님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반드시 상을 주신다. 믿음의 선배들은 죽도록 충성해서 썩을 것이 아닌 생명의 면류관을 받았다. 상을 받는 것은 보람차고 자랑스럽고 기쁜 일이다. 필통 사람은 필통을 가지고 다녀야 한다. 여기에서 필통은 세 가지가 반드시 통해야 된다는 것이다. 첫째는 필통(必通) 즉, 반드시 통해야 된다는 것이다. 삶에는 소통과 공감과 나눔이 절실하다. 소통이 안되면 고통이 오고 불통하면 불행하기 때문이다. 뜻이 통해야 한편이 되고 말이 통해야 행복하고 피가 통해야 건강하고 돈이 통해야 부자가 된다. 둘째는 필통(Feel 通) 즉, 느낌이 통해야 된다는 것이다. 사람도 주파수가 맞는 사람이 있다. 느낌이 좋은 사람이 있다. 인간관계에는 영이 통하는 영성, 활기가 통하는 야성, 느낌이 통하는 감성이 중요하다. 셋째는 필통(필기도구를 넣는 통)을 가지고 다녀야 된다. 적자생존이다. 적는 자만이 살아남는다는 뜻이다. 성공하는 사람들은 필기광이다. 기억보다 오래 가는 것이 기록이다. 사람들이 행동은 앞서지만 기록을 남기는 것이 대체적으로 약하기 때문에 삶이 규모가 없기 쉽다. 필립 악인의 팔은 부러지나 의인은 여호와께서 붙드시는도다(시37:17) 의인은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여호와께서 그의 손으로 붙드심이로다 내가 어려서부터 늙기까지 의인이 버림을 당하거나 그의 자손이 걸식함을 보지 못하였도다(시37:24~25) 성도는 쓰러지고 넘어지나 주께서 일으켜 세우시기 때문에 반드시 일어난다. 필립(必立)이다. 필리핀의 이름은 필립왕에게서 따 온 것이다. 성도는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사람들이다. 교회를 무너뜨리는 존재가 아니라 교회를 세워가는 사람들이다. 하나님께서는 명령과 동시에 함께 하심을 약속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반드시 일어날 것이다. 일어나 새벽을 깨우리로다. 일어나 건너가라. 일어나 함께 가자. 청년아 일어나라. 달리다굼 소녀야 일어나라.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 오피니언
    • 칼럼
    • 목회자칼럼
    2020-07-14
  • [부산기독교이야기] 6.25전쟁기의 한경직 목사
    1950년대 이후 서울의 영락교회는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교회였다. 영락교회는 우리나라 최초의 대형교회였고 외국의 교회 지도자들이 내한하면 영락교회에서 예배드리거나 설교하고 인사하는 것을 자랑으로 여겼다. 1945년 12월 설립된 영락교회는 1950년 전쟁이 일어났을 당시 성인 출석교인 750명, 각종 교회학교 인원을 포함하면 2천6백 명의 교회로 성장했다. 그해 5월에는 아름다운 석조예배당을 건축하고 6월 4일 입당예배를 드렸다. 그런데 불과 한 달이 못되어 전쟁이 시작되었고, 6월 25일 주일 예배를 드린 후 새 예배당을 뒤로하고 피난을 떠나게 된 것이다. 전쟁 직후 한경직 목사가 중심이 되어 ‘대한기독교구제회’를 결성했으나 전쟁 3일 만에 서울이 적의 수중에 들어가게 되자 구제회는 활동을 시작도 못했다. 무엇보다 새로 지은 석조 교회당을 뒤로 하고 서울을 떠날 때 교인들의 기도와 눈물로 건축한 예배당의 안위가 걱정이었다. 간신히 서울을 빠져 나온 한경직 목사는 대전으로 피난을 갔다. 7월 3일에는 피난 온 여러 목회자들이 대전제일교회에서 회합하고 ‘대한기독교구국회’를 조직했다. 목회자가 앞장서 나라를 구해야한다는 취지에서 결성한 조직이었다. 한경직은 회장으로 추대되었고, 첫 행사는 시국강연회였다. 조직의 이름처럼 구국을 위한 선봉에 서야한다는 취지의 강연을 하게 된 것이다. 구제사역을 통한 전도도 기독교구국회의 중요한 사업이었다. 그러나 전세는 이런 사업을 수행하기 어렵게 만들어 다시 남하하여 대구로 피난했다. 대구 YMCA사무실이 구국회의 본거지가 됐다. 그러나 계속 북한군에 밀려 다시 부산까지 피난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때 한경직 목사도 부산으로 내려왔다. 이런 연유로 1950년 8월 말과 9월 초 부산중앙교회에서 개최된 회개집회에 강사로 서게 된 것이다. 그간 국군은 수세에 몰려 고전하고 낙동강 전선까지 내려왔으나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1950년 9월 28일 서울을 수복했을 때 흩여진 영락교인들은 다시 서울로 모여들었다. 이때 한경직 목사도 서울로 돌아갔다. 그런데 서울을 수복한 이후 국군과 유엔군은 북진하여 10월 1일에는 38선을 넘고, 19일에는 평양을 탈환하였다. 이때 한경직은 윤하영 이인식 김양선 등 이북 출신 목회자들과 같이 평양으로 가 10월 29일 주일 오후 2시 서문밖교회에서 집회를 열었다. 감사와 감격의 예배였고 많은 신자들이 모여들었다. 이날 김영준 목사의 인도로 한경직 목사는 이사야 60장 1절을 본문으로 “일어나 빛을 발하라”는 감격적인 설교를 했다. 이날 회중이 힘차게 불렀던 찬송이 “내주는 강한 성이요, 방패와 병기되시니”였다. 감격적인 승전도 잠시. 국군과 유엔군은 압록강까지 진출했으나 중공군의 개입으로 다시 밀려 남하하기 시작했다. 이른바 1.4후퇴였다. 그해 겨울은 유난히 추웠다, 이때 영락교회 교인들도 피난길에 올라 대구로, 부산으로 그리고 제주도로 흩어졌다. 대구에 정착인 이들이 대구영락교회를, 부산에 정착한 이들이 부산영락교회를. 제주도로 간 이들은 제주영락교회를 설립하게 된다. 그런데 1.4후퇴로 부산으로 온 영락교회 출신 30여명의 성도들은 부산에 도착한 첫 주일인1951년 1월 7일 생활의 터전도 정비`되지 못했으나 광복동 1가 7번지의 고려신학교 교사에 함께 모여 한경직 강신명 목사와 같이 예배를 드렸다. 이것이 부산영락교회의 시작이었다. 이때 “피난 중에는 영락교회 당회를 부산에 둔다.”고 결의하고 14일 주일부터는 대청동 새들원(고아원, 지금의 새들맨션 자리) 강당에 모여 예배드리기로 했다. 성도들은 주일마다 늘어나고 공간은 협소했다. 천막을 치고 예배공간을 확장했으나 근원적인 해결이 되지 못했다. 이런 중에 약 두 달이 지난 3월 한경직 목사는 미국을 방문하게 되었고, 전화에 지친 한국을 어떻게 도울 것인가를 설교하며 여러 지역을 순회하며 5개월간 체류했다. 이 기간동안 강신명 목사가 대구와 부산을 오고가며 교회를 돌보았다. 그러다가 그가 유학차 미국으로 떠나게 되자 1951년 7월에는 이응화 목사가 부임했다. 피난민들은 계속 늘어났고 부산영락교회도 수적으로 성장했다. 서울로 돌아갈 수 없으나 두고 온 돌로 지은 예배당을 사모하는 성도들은 부산에서도 예배당을 건축하기로 하고, 부산 서구 부민 1가 22번지(지금의 영락교회 자리)의 180평의 대지를 매입했다. 이런 와중에서 전황이 호전되고 서울을 되찾게 되자 다수 성도들이 서울로 돌아갔다. 그러나 남은 성도들은 피난의 고통 가운데서도 눈물어린 헌금을 하고 힘을 쏟아 1953년 6월 105평의 단층 석조 예배당을 준공하였다. 휴전 한 달 전의 일이었다. 7월에는 입당하였다. 전쟁 와중에서 이룬 믿음으로 이룬 결실이었다.
    • 오피니언
    • 칼럼
    • 부산기독교이야기
    2020-07-14
  • [교회학교를살린다] 0의 교육과정
    교육학에서는 우리가 가르치는 교육과정을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 소개해준다. 첫 번째는 공식적 교육과정이다. 이는 교과서, 수업계획안과 같이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교육과정을 의미한다. 기독교교육에 있어서는 공과가 대표적이다. 공과가 공동교육과정을 줄인 말이기 때문에 그 말 안에 이미 공통적인 공식적 교육의 내용이 들어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교회에서도 제일 관심을 갖는 교육과정이 공과이다. 다른 그 어떤 시간보다도 공과를 중요하게 생각하며 이를 잘 수행했으면 그날의 교육과정은 완수했다고 생각한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기독교교육적 관점에서 생각해볼 때 공과는 신앙교육에 있어서 지극히 일부일 뿐이다. 우리의 살아가는 모든 순간순간이 신앙의 나날들이고 우리가 선 모든 곳이 신앙의 여정 가운데 있는 신앙교육의 공간이기에 우리는 보다 넓은 시야로 기독교교육을 바라볼 필요가 있다. 그래서 공식적 교육과정 중에서도 지극히 일부인 공과만을 붙잡고 기독교교육을 다 했다고 만족할 것이 아니라 교육과정의 두 번째 영역에 보다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이 두 번째 영역은 비공식적인 교육과정이자 잠재적 교육과정 또는 숨겨진 교육과정이다. 이것은 교육의 대상을 둘러싼 모든 환경에 대한 관심을 갖는 일이다. 물리적인 환경뿐만 아니라 정서적인 환경을 모두 포함하는 개념이다. 그래서 환대의 분위기를 형성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우리의 다음세대들이 교회에 와서 편안한 마음을 갖고 스스로가 이 공간 안에서 받아들여지고 사랑받는다는 신앙의 안정감을 형성하는 것이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숨겨진 교육과정인 것이다. 이렇게 되기 위해서 겉으로는 보이지 않는 모든 성인들의 부단한 노력들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거듭거듭 해왔다. 신앙공동체 전체가 다음세대를 품고 기도하고 사랑으로 키워내는 노력들 말이다. 그런데 이러한 노력에 찬물을 끼얹는 엄청난 사건이 연초에 터졌다. 바로 코로나19 사태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이 코로나19 사태는 세상을 완전히 뒤바꾸어놓았다. 평범한 일상은 먼 옛날이야기가 되어버렸고, 신앙인들도 신앙생활이 매우 움츠러들었다. 다음세대의 신앙교육은 그야말로 아사 직전이다. 교회의 소모임과 여름행사가 모두 취소되는 상황이다. 공식적 교육과정이나 잠재적 교육과정도 어찌 보면 모여야 어떻게든 가르칠 수 있는 것인데, 이 사상초유의 상황 속에서는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어 보인다. 그래서 교회들은 선택의 여지없이 제3의 교육과정을 수행중이다. 바로 0의 교육과정이다. 원래 0의 교육과정은 말 그대로 제로의 교육과정이다. 의도적으로 가르치지 않는 교육과정이 있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 우리는 교회에서 의도적으로 타종교에 대한 교육을 수행하지 않는다. 신앙과 성경에 대해서 가르치는 것만으로도 시간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이렇듯 의도적으로 교육과정에서 빼버리는 것을 0의 교육과정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경우는 가르쳐지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그 의미가 가르쳐지는 것이다. “왜 선생님이 그 내용에 대해서 안 가르쳐 주시지? 아! 그다지 중요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구나.”라고 아이들 스스로 알게 되는 것이다. 만약에 가르쳐지지 않는 내용이 있다면, 중요도가 떨어지거나 지금 배울 필요가 없다고 교사가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0의 교육과정은 가르쳐지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교육적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것이다. 현재 우리는 코로나19라는 상황 때문에 비자발적으로 0의 교육과정을 수행하고 있지는 않은가? 많은 교회가 소모임이 중단되고 여름행사가 막히는 이 상황 속에서 어쩔 수 없이 아무것도 못하는 것을 선택하고 있다. 그러나 더 심각한 것은 0의 교육과정은 이런 상황 속에서도 여전히 가르쳐진다는 것이다. 이런 한계상황에서 아무것도 안 하고 손 놓고 있는 모습을 보이면 그 모습은 고스란히 우리의 다음세대들에게 가르쳐진다. 현재 우리는 아무것도 가르치지 않음으로서 가르치고 있는 중인 것이다. 우리는 이 비상시국에 무엇이라도 가르쳐야만 한다. 비록 교회에 모일 수 없지만 가정에서의 신앙교육은 더욱 빛을 발할 수 있기 때문에 이번 여름행사는 가정에서라도 해야 한다. 열심히 참여한 모습을 피드백 받고 공유하며 서로서로 힘을 낼 수 있도록 격려해야 한다. 이 처절한 노력이 이번 여름 우리에게 주어진 교육과정이다.
    • 오피니언
    • 칼럼
    • 교회학교를 살린다
    2020-07-14
  • [성경인물탐구] 베다니 마리아(나사로의 동생)
    마리아는 예루살렘 교외의 베다니 출신으로서 마르다의 동생이며 나사로의 누이입니다. 그녀는 예수님께 헌신적이었는데 특히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붓고 머리털로 닦아 드린 그녀의 행위는 예수님에 대한 신앙의 참모습을 보여 줍니다. 마리아의 오빠인 나사로가 병에 걸려 죽게 되자 마리아와 마르다는 예수님께 그 사실을 알렸습니다. 그만큼 예수님과 나사로의 가정은 가깝게 지내며 예수님을 의지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예수님께서 나사로의 병을 반드시 고칠 수 있다고 믿었고 또한 예수님께서 속히 오셔서 오라비의 병을 고쳐 주실 것을 믿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급히 오셔서 나사로의 병을 고쳐 주시지 않고 나사로가 죽어 무덤 속에 들어간 후에야 오셨습니다. 그때에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리어<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라고 말하며 통곡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리아의 우는 것을 보시고 통분히 여기시고 민망히 여기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리아와 주위 사람들의 애통함을 보시고 죽음 앞에 무력한 인류의 불쌍한 모습을 보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사로의 무덤 앞에 서서 그를 부르심으로써 죽은 나사로를 살리셨습니다. 예수님의 역사는 마리아와 마르다 가정의 슬픔을 기쁨으로 변화시켰고 세상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며 부활이 되심을 증거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가 가까웠을 때 베다니에 이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잔치에 참여하셨을 때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씻었습니다. 마리아는 죽은 오라비 나사로를 예수님께서 살려 주신 데 대한 감사의 뜻으로 예수님께 이와 같이 행했던 것 같습니다. 가룟 유다가 가난한 자들에 대한 구제를 말하며 마리아의 행위를 책망할 때에 예수님께서는 <저를 가만 두어 나의 장사할 날을 위하여 이를 두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리아는 감사와 헌신의 뜻에서 그렇게 행하였지만 이는 예수님의 죽음이 가까워 왔음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었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에 대한 감사와 사랑을 물질로써 표현하였는데 예수님께서는 그녀의 중심을 보시고 그 행위를 칭찬하셨습니다. 가룟 유다는 회계를 맡은 자로서 헌금을 훔치는 도적이었습니다. 마리아가 예수를 위하여 비싼 향유를 부었을 때 그는 마리아를 책망하면서 그 돈으로 가난한 자들을 위해 사용할 것이지 낭비하였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마리아의 행위를 칭찬하시면서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리아가 비싼 향유를 당신을 위해 사용하는 그 마음을 보셨던 것입니다. 자신을 향한 진정한 사랑이 있는 예물을 예수님께서는 기쁘게 받으셨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중심을 받으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부자들의 많은 헌금보다도 전부를 드린 과부의 두 렙돈을 더 많다고 평가하시며 칭찬하셨습니다. 성도는 주를 향한 진정한 마음으로 주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임을 인정하고 헌신하는 삶을 살아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여야 합니다. 성도의 물질에 대한 바른 행동은 주어진 일을 사명으로 받아드리고 열심히 일을 해서 얻은 물질을 자신만을 위해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어려운 자들을 돌아보며 복음의 증인된 삶을 사는 것이 복 받은 바른 삶인 것입니다. 이런 삶으로 하나님께 충성된 종이라고 칭찬 받은 여러분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 오피니언
    • 칼럼
    • 성경인물탐구
    2020-07-14
비밀번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