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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강석칼럼] “당신의 가을이 더 행복하길...”
    “주여, 때가 왔습니다. 여름은 참으로 길었습니다. 해시계 위에 당신의 그림자를 얹으십시오. 들에다 많은 바람을 넣으십시오. 많은 과실들을 익게 하시고 이틀만 더 남극의 햇볕을 주시어 그들을 완성시켜 마지막 단맛이 짙은 포도주 속에 스미게 하십시오...(하략)” 이는 릴케의 ‘가을날’이라는 시입니다. 여름이 그토록 길고 폭염의 나날들이었지만 정작 가을 문턱에 서니까 그래도 남극의 여름의 햇빛을 그리워하고 있는 시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폭염으로 얼굴을 찡그리고 어떻게든지 여름 햇빛을 피하려고 하였지만, 아직도 푸른 나뭇잎들은 여름 햇빛에 환호성을 지르고 있습니다. 햇빛이 강렬할수록 더 부지런히 광합성 작용을 하며 과일들은 단맛을 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뜨거운 햇빛이 여름의 꽃들을 피어나게 하였습니다. 지금 어디를 가든지 길가엔 과꽃, 패랭이, 초롱이 꽃들로 한창입니다.아니, 제가 산행하는 길에는 벌써 앙증맞게 코스모스꽃이 피기 시작했습니다. 웬 시골 처녀가 분홍색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수줍은 듯 서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화려하고 흠모할 만한 미의 자태를 갖춘 모습은 아니지만 가을바람에 흔들리는 순결한 작은 몸짓으로 저에게 이렇게 말을 하는 듯 느껴졌습니다. “지난, 8월의 뜨거운 햇빛이 없었더라면 나는 이렇게 시원하게 될 수 없었노라고... 살아있는 모든 이들은 여름을 사랑해야 한다. 가을이 오면 올수록 지난 여름이 그리워질 것이라고...” 산행을 한 후 책상에 앉아 아까 전에 본 코스모스의 모습을 생각해 봅니다. 아니, 산 녘에 피어난 이름 모를 작은 꽃들의 모습을 생각해 봅니다. 초가을에 피어난 꽃들의 미소가 제 가슴속에 다가왔습니다. 그들이 말을 할 수는 없지만 하나님이 주신 침묵의 모국어로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습니다. “지난 여름이 폭염의 계절이었다면 지금 맞는 가을은 당신에게 정염의 계절이 되기를 바래요. 지난 여름의 폭염이 오늘의 우리들을 아름답게 피어나게 하듯이 이번에 맞는 가을은 당신에게 꼭 행복한 계절이 되기를 바래요. 가을을 행복하게 지낼 수 있어야 다시 오게 될 불볕더위도 사랑할 수 있을 거라고... 그리고 마침내 그 불볕더위가 그리워지고 그 더위 속에서도 얼굴을 찡그리지 않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을 거라고...” 갑바도기아 대교부 중 한 사람인 닛사의 그레고리가 했던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산상 보훈을 보면 마음이 청결한 자가 하나님을 볼 것이라고 했는데(마5:8), 닛사의 그레고리는 이 청결한 마음이란 에덴동산에서 창조되었을 때의 본래 마음을 회복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 마음을 회복하면 자연과 교감하게 될 뿐만 아니라 저절로 아름다운 시가 나오고 음악이 나오며 천재적 예술성을 발휘하는 영감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제가 이 신학자의 말이 아니었으면 어떻게 감히 이런 글을 쓸 수가 있겠습니까? 제가 다시 산행을 한다면 이번에는 제가 꽃들에게 말을 건네고 싶습니다. “그래, 너희들도 여름을 잘 견뎌냈지. 지난 여름에 불볕더위가 있었기에 오늘의 아름다운 꽃을 피워내지 않았느냐. 너희들도 가을이 오면 지난 여름을 더 그리워하게 될 거야. 그러나 짙은 가을이 온다고 아쉬워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거라. 아직은 가을이지만 여전히 폭염을 일으키는 저 태양의 불꽃처럼 너희들도 이글거리는 삶을 살거라. 우리 모두 함께 가을이 행복했으면 좋겠구나.” 정말 올 가을은 모두가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여름 햇볕으로 인해 모두에게 가을의 열매가 주렁주렁 맺히고 좋은 소식의 열매를 따 먹는 계절이 되면 좋겠습니다. 특별히 이 글을 읽는 당신에게 가을이 행복한 계절이 되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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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0-20
  • [성서연구]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이건 이글의 제목이며, 매우 중요한 명제입니다. 누가 물어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게 뭡니까?> 그러면 대답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이 명제는 너무 당연해서 이상하게 들릴 정도입니다. 그런데도 이런 명제를 제목으로 글을 쓰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서 예수님을 믿는다는 착각에 빠질 때가 많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본문은 매우 의미가 깊습니다. 세례 요한이 등장하셨을 때 많은 이들이 놀랐고, 감동을 받았습니다. 요한의 존재와 영향력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컸습니다.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이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보내서 그가 메시아인가를 질문했을 정도입니다. 많은 이들이 요한을 메시아로 여겼습니다. 오늘 본문도 그런 맥락의 말씀입니다. 요한의 제자들이 요한에게 매우 심각한 어조로 <선생님에게 세례를 받는 그 예수라는 이가 세례를 베푸는데, 사람들이 다 예수에게로 간다.>고 말했습니다. 요한의 제자들로서는 이런 현상이 달갑지 않았습니다. 전에는 사람들이 요한에게 몰려왔는데, 이제는 예수님에게로 가니, 마음이 불편했습니다. 본문은 이 때 요한이 제자들에게 한 말입니다. <내가 말한 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한 것을 증언할 자는 너희니라> 요한은 자신이 그리스도, 즉 메시아가 아니라고 분명하게 말했습니다. 그리고 요한의 제자들은 그 사실을 사람들에게 증언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장차 요한의 제자들은 이렇게 말해야 하겠지요. <여러분, 더 이상 우리 요한 선생님을 찾지 마세요. 우리 선생님은 예수님의 길잡이일 뿐입니다. 진정한 메시아는 예수님이니, 그 분에게로 가세요.> 이렇게 말하는 것은 요한의 제자들에게는 매우 불편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요한의 위대함은 바로 여기 있다고 생각합니다. 요한의 위대함은 그가 빈들에서 성장한 것, 약대 털옷을 입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은 것, 능력의 말씀을 전해서 사람들의 마음을 뒤흔들고, 그들에게 회개의 세례를 준 것 등이 아닙니다. 요한의 진정한 위대함은 자신이 그리스도가 아니며, 예수님이 그리스도시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정체성을 분명히 알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메시아이심을 분명히 알았습니다. 그리고 알고만 있었던 게 아니라, 본인의 입으로, 그리고 자기 제자들의 입으로 온 세상에 공표했습니다. 이것은 요한의 위대함이며, 동시에 요한이 후세에 끼친 최고의 공로입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구주가 아닌 이를 구주로 혼돈하여 잘못 믿는 것을 방지하고, 올바른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바르게 믿도록 인도한 것입니다. 그가 침묵했다면, 사람들은 요한을 메시아로 믿었을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도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예수님을 믿는 본질적인 것보다 비본질적인 것에 매달릴 때가 많습니다. 초기교회 성도들은 예배당 건물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예배당을 짓는데, 물질, 마음, 시간을 많이 사용합니다. 그리고 예배당 유지 보수에 열을 올리는데, 문제는 그 과정에서 예수님을 믿는 본질에서 벗어난다는 것입니다. 예배당 유지 보수 위원회를 만들고, 운영규정을 만들고, 인선을 해서 조직을 갖춥니다. 그 과정에서 갈등과 다툼이 일어나고, 예수님을 믿는 기쁨과 감사는 사라집니다. 열심히 회의를 모이고, 일을 하지만, 구원받은 기쁨이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 주변의 변두리적인 것에 매이지 말아야 합니다. 교회 재정과 시설물 관리, 선교와 봉사를 위한 조직 운영, 노회와 총회 조직 운영 등은 예수님을 믿는 본질은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하나님 아들이심과 우리의 구주되심과 왕이심을 믿고, 천국의 백성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예수님께만 집중하길 원합니다. 바울은 빌립보 감옥의 간수에게 말했습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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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0-20
  • [시사칼럼] 시월을 마지막으로 살다간 사람들
    시월입니다. 노랫말과 비슷하게 최근 시월을 마지막으로 보내고 떠난 분들이 여럿 있습니다. 10월 6일에는 예수전도단(YWAM)의 창시자 로렌 커닝햄(Loren Cunningham)이 8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지난 3월 폐암 4기 진단을 받았지만 이후로도 변함없이 주님과 가족과 친구와 비전 안에 살았노라고 가족들이 전한 바 있었지요?(CT) 청년 시절 바하마 여행 중 다음과 같은 환상을 보고 사역을 시작했다 했습니다. “그날 밤 나는 선교사 사택에 누워 성경을 펼쳤고, 늘 하던 대로 주께서 내 마음에 말씀해 주시도록 기도했다. 그러나 곧 이어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났다. 세계 지도를 바라보고 있는데 그 지도가 살아 있는 것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벌떡 일어나 앉았고, 머리를 흔들고, 눈을 비비며 다시 보았다. 파도가 해변에서 대륙으로 들어왔다가 밀려 나가고 그리고 더 깊이 밀려들어와서 그 대륙을 완전히 덮는 것이었다. 숨을 죽였다. 장면이 바뀌어 그 파도들은 청년이나 더 어린 소년들로 변하여 그 대륙들을 덮고 있었다. 거리나 음식점, 혹은 집집마다 찾아가서 복음을 전하고 사람들을 돌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장면은 사라졌다.”(『하나님 정말 당신이십니까?』중에서) 일평생 생생했던 그 비전을 붙잡고 주권국가든 종속국가든 거의 모든 나라를 방문한 유일무이한 존재였던 그가 이제 여권 말미에 마지막 스탬프를 받았습니다. 굿바이, 로렌! 10월 9일에는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한 노인이 92세로 세상을 떠나자 곧바로 “2만 원짜리 시계 차던 억만장자 영면에 들다”, “방 2칸 소형아파트에서 억만장자가 잠들다”와 같은 헌사들이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35년 간 10조를 기부한 키다리아저씨”라 일컬어지던 척 피니(Charles Francis Feeney)였습니다. 면세점 사업(DFS)으로 큰돈을 벌었지만 구두쇠요 괴짜라 불리며 기인처럼 살다가 1997년 우연히 정부의 세무조사를 받다가 엄청난 기부왕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며(15년간 2,900회 40억 달러) 세간의 화제가 되었고, 2016년 마침내 당시 소유하던 거의 모든 재산을 기증했는데 그 총액이 80억 달러 즉 한화로 10조가 넘어 놀라움을 선사했던 장본인입니다. 그는 또 “대부호들의 영웅”이라고도 불리는데, 선하고 막강한 영향력을 끼쳤기 때문입니다. 그를 숭상하던 주식왕 워렌 버핏은 2006년부터 510억 달러(66조)를 기부했고, 역시 그를 흠모하던 컴퓨터왕 빌 게이츠는 2022년 기준으로 자신이 설립한 재단에만 591억 달러(80조)를 기부했습니다. 그렇게 놀라운 일을 피니는 어떻게 시작했을까요? 아일랜드에서 건너 와 가난했지만 독실한 기독교인이자 숨은 봉사자였던 어머니의 영향이 지대했다고 합니다. 평소 그가 남긴 말들입니다. “오늘(today) 하는 기부가 훨씬 좋다(so much good)”, “돈이 필요한 이유는 편하기 위함인데 나는 지금 너무나 평안하니 더 이상 돈이 필요 없다!” 자,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무얼 위해 살아가고 있습니까? 바로 그 다음 날인 10월 10일에는 1927년 생 김남조 시인이 향년 96세로 소천했습니다. 이구동성으로 이분을 ‘사랑의 시인’이라 칭합니다. 평생 사랑을 노래하는 시를 가장 많이 지었고, 2020년 마지막으로 낸 19번째 시집 이름도 『사람아, 사랑아』일 정도니 그보다 어울리는 별명이 없어 보입니다. 그런데 보통 사랑이 아니라 신적 사랑을 바탕으로 삼았습니다. 어릴 적 국어교과서에 실렸던 고인의 시들을 별 생각 없이 공부했었는데 이제 알고 보니 기독교인이셨네요. 사랑만 그렸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가 남긴 <겨울 바다> 중 일부를 소개합니다. “겨울 바다에 가 보았지/ 미지의 새/ 보고 싶었던 새들이 죽고 없었네.. 나를 가르치는 건/ 언제나 시간/ 끄덕이며 끄덕이며 겨울 바다에 섰었네/ 남은 날은 적지만/ 기도를 끝낸 다음 더욱 뜨거운/ 기도의 문이 열리는/ 그런 영혼을 갖게 하소서”, 겨울 바다와 남은 시간을 생각하며 “기도”를 떠올리다니 참으로 신선한 발상이 아닙니까? <너를 위하여>라는 작품도 있는데, “나의 밤 기도는 길고/ 한 가지 말만 되풀이한다.. 너를 위하여 나 살거니/ 소중한 건 무엇이나 너에게 주마/ 이미 준 것은 잊어버리고/ 못다 준 사랑만을 기억하리라..”고 합니다. 이쯤 되면 ‘기도의 시인’이란 별명도 하나 더 붙여드려야 하겠습니다. 그처럼 사랑과 기도로 일관했으니 그보다 더 유의미한 인생이 얼마나 더 있겠습니까? 그러나 모든 이들이 저들처럼 아름답게 스러져갈 수만은 없는 법입니다. 10월 7일에는 축구계의 박종환 감독이 87세를 일기로 사망하였습니다. 1983년 당시로서는 우리나라에서 전대미문이었던 세계청소년축구 4강 신화를 창조했던 장본인입니다. 한국축구에 ‘붉은 악마’라는 타이틀을 안겨다 준 장본인이기도 하지요. 하지만 화려했던 전성기와는 달리 불우한 말년을 보냈습니다. 지인들에게 사기를 당하고 아내를 먼저 보내며 집도 없이 떠돌다가 지독한 생활고 속에 외로움으로 인한 우울증까지 시달렸다 합니다. 그러던 마지막 순간 그를 돌봐 준 사람은 가족도 지인도 아닌 한 기독교인이었네요. “자살하려고 해서 깜짝 놀라 찾아갔다. 저분을 도울 수 있는 부분이 없을까 싶어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조선일보 2월 14일 보도). 수많은 사람들을 거짓 뉴스와 악의적인 보도로 괴롭힌 혐의로 조사를 받던 가로세로연구소의 김용호 씨는 10월 12일 해운대의 한 호텔에서 극단적인 선택으로 47년의 짧은 생을 마감하고 말았습니다. ‘남의 눈에 피눈물 나게 한 인생을 살다간 고인의 명복을 빌고 싶지 않다’는 피해자들의 글들이 줄지어 올라옵니다. 아, 인생이란 무엇입니까? 어떻게 살다가 어떻게 가야 합니까? 범상치 않은 생각에 잠기게 하는, 시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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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0-20
  • [은혜의말씀] 바디매오가 눈을 떴다네!(막 10:46-52)
    여리고 길가에, 한 거지가 앉아 동냥을 구걸하고 있습니다. 그는 앞을 보지 못하는 시각장애인입니다. 그의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 동냥으로 근근이 생계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의 이름은 바디매오. 오늘도, 찌그러진 동냥 그릇을 앞에 두고 엎드려 있습니다. 그런데 평소와는 다르게 수많은 사람의 발자국 소리가 들립니다. 바디매오가 사람들에게 묻죠? “여보시오, 어딜 그리 바삐 가시오? 무슨 일이라도 있소?” 그러자 사람들은 “나사렛 예수라는 분이 우리 마을을 지나가신다네.”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예수님이라는 말에, 바디매오는 깜짝 놀랐습니다. 그리고는 소리칩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그러자 사람들은 조용히 하라고 야단을 칩니다. 그러나 바디매오는 더욱 큰 소리로 예수님을 부릅니다. 이 소리를 들은 예수님은 지나가시던 걸음을 멈추시고, 바디매오를 부르십니다. 바디매오는 벌떡 일어나, 겉옷을 벗어 던지고는 예수님 앞으로 달려갑니다. 예수님께서 인자한 음성으로 물으십니다.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네 선생님, 보기를 원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능력의 말씀을 선포해 주십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그 시로, 바디매오의 눈이 번쩍 뜨여졌습니다. 그리고 그는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었습니다. 자 오늘, 바디매오가 고백한 믿음, 예수님이 칭찬하신 구원 얻는 믿음이 무엇인지 살펴보길 원합니다. 1. 바디매오의 믿음은, 은혜의 때(기회)를 놓치지 않는 것입니다.(47절) 바디매오는 예수님이 지나가신다는 소리를 듣자,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기회만을 기다렸을지 모릅니다. 그리고 드디어, 그날이 오고야 말았습니다. 예수님이 오셨을 때 기회는 시작되는 것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기회를 포착합니다. 여러분, 은혜받을 기회를 붙잡으십시오. 오늘, 지금, 이 시간이, 내 인생의 최고의 기회이며, 또한 최후의 기회라는 긴장을 가지고, 믿음으로 움직여야 합니다.(고후 6:2) 2. 바디매오의 믿음은, 최선을 다해 부르짖는 것입니다.(47절) 맹인으로서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은 부르짖는 것입니다. 바디매오는 자기 힘으로 어쩔 수 없는 문제를 가지고 주님께 부르짖었습니다. 여러분, 우리 주님은 부르짖는 자의 탄식을 외면하지 않는 분이십니다. 탄식이 탄식으로 끝나지 않게 하십니다.(렘 33:3) 우리 주님은 우리의 부르짖음 뒤에, 말로 다할 수 없는 아픔, 눈물, 남에게 말하지 못하는 소리도 들으십니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기도하십시오. 낙심하지 말고 부르짖으십시오. 우리가 소리쳐 부를 때 주님은 부르짖는 자를 지나쳐 가지 않으십니다. 지금, 바디매오의 기도를 가지고 주 앞에 서십시오. 3. 바디매오의 믿음은, 난관을 돌파하는 것입니다.(48절) 사람들이 꾸짖어 잠잠하라 하였지만, 바디매오는 더욱 크게 소리 질렀습니다. 그때 바디매오가 기가 꺾여서 주저앉아 버렸다면, 그것으로 끝입니다. 기적은 없는 것이지요. 응답이 있을 때까지, 목표를 이룰 때까지, 계속 부르짖어야 합니다. 정말 믿음이 있는 사람은 방해물이 있어도 포기하지 않습니다. 포기하지 않는 이유는 주님이 들으신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4. 바디매오의 믿음은, 예수님만이 내 문제의 해결자이심을 확신하는 것입니다.(47절) 바디메오는 '나사렛 예수'라 들었지만, '다윗의 자손'이라고 외쳤습니다. 그는 예수님이야말로 구약시대부터 계속 예언되어 온 “메시야”이심을 확신했습다.(렘 23:5,6) 바디매오는 예수님이 바로 자신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구원자로 고백하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예수님을 누구라고 이야기합니까?(마 16:16) 예수님만이 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구원자이십니다. 결국 이런 바디매오의 믿음을 보신 예수님은 그를 불러 주십니다. 그리고 그에게 눈을 뜨는 기적을 선물해 주셨습니다. 그는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따르는 제자가 되었습니다. 믿음이란 내 삶 가운데 바꿀 수 없는 것을 예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믿고, 나의 인생을 주님께 위탁할 때 응답을 받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결단하며 일어설 때 주님의 주시는 기적이, 여러분의 삶에 나타나시길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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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0-20
  • [교회음악칼럼] 찬송(예배)하며 사는 사람들 8
    아직 다소 이르긴 하지만 차를 타고 다니다 보면 가을이 성큼 다가왔음을 금방 느끼게 된다. 아직 푸르름이 남아있지만 그 가운데 작은 변화를 통해 우리는 그것을 느끼게 되는 것 같다. 나의 눈이, 귀가 그리고 감각이 반응하며 변함없이 주께서 이루어 가시는 섭리를 깨달아 알게 하심에 감사하며 찬송을 드린다. 마트를 가면 햇과일들로 넘쳐 난다. 이 수확의 계절에 내가 거둬들일 열매는 얼마나 될까? 사람은 누구나 주변의 여러 것들이 자신에게 무엇인가를 기대하는 만큼 해 주기를 바라는 존재인 것 같다. 뿐만 아니라 모두에게 주목받고, 인정받기 또한 원한다. 세상에서만 아니라 교회공동체 내에서도 다를 바 없이 똑같은 기대를 하며 살아간다. 사실 씨를 뿌리지 않고 얻을 열매는 없다. 더욱이 베풀지 않고 나에게 올 것을 기대하기만 한다면 그것은 염치없는 일이다. 우리가 말씀과는 달리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긴 하나 아직 덜 성숙하여 그러노라고 하면 달리 무어라 할 말이 없지만 언제까지나 그럴 수는 없지 않은가? 주께서 우리에게 그러했듯이 내가 누군가에게 베풀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를 한번쯤 생각해 볼 수만 있다면 오히려 불평, 불만, 서운함을 갖기 보다는 격려, 배려, 위로를 줌으로서 그 가운데서 얻게 될 기분 좋은 기쁨을 맛보게 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결국 남을 나보다 더 생각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의 원초적 실천을 의미하는 것인데 최소한 우리가 이것만 삶속에서 이룰 수 있다면 개인의 행복은 물론이거니와 주변을 변화시키고 진정 성숙한 삶의 노래를 하나님께 드릴 수 있을 것이다. 세계가 매우 힘들다. 우리가 살고 있는 주변 모두가 어렵다. 그래서 도무지 그런 영적인 여유를 부릴 수 없을 만큼 우리의 삶이 팍팍하고 고달플지라도 변함없으시고, 신실하신 주님을 의지하고 믿음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 옛날 하박국 선지자가 노래하였듯이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이 노래가 우리의 고백이 되어 주께 드려지기를 소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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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0-20
  • [목회자칼럼] 시계형 VS 나침반형
    시계로 살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시와 분을 아껴 부지런히 초바늘을 움직입니다. 혹시라도 구멍난 시간이 있으면 그 틈을 참지 못하고 다른 일로 채우며 하루 24시간, 일주일 168시간을 쉬지 않고 살아갑니다. 순간 순간 파도처럼 거대한 일이 밀려오더라도 거뜬히 일들을 처리하며 일상을 묵묵히 이겨냅니다. 반면, 나침반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나침반이 목적을 향한 방향을 가리키듯, 인생에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일관성있는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목적이 분명하기에 철학이 있고, 길이 있으며, 그 길 위에서 자신만의 은사를 펼치고 살아갑니다. 유명한 경영학자 피터 드러커(Peter Drucker)는 “인류는 지식의 작용으로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 더 나은 시대를 열어간다”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모두 더 나은 미래를 향해 꿈을 꾸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방법이 모두 다릅니다. 오늘도 열심히 지식을 쌓아가는 시계형 사람과 지식이 나아가는 방향을 보고 살아가는 나침반형 사람 모두 더 나은 세상을 꿈꾸고 있습니다. 이런 관점으로 볼 때, 현재 우리나라는 어떠한가요? 먼저, 시계형으로 한 번 살펴보겠습니다. 한국은 세계 10위 내외의 경제 성장과 수출입 7위의 규모, K팝과 K한류 문화로 선진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잘 사는 국가가 되었습니다. 열심히 살았고 ‘빨리 빨리’ 문화답게 빨리 성장을 이루었습니다. 전쟁 후 70년 동안 괄목한 만한 성장을 이끌며 선두 그룹에서 리드하고 있습니다. 반면 나침반형으로 한국을 보겠습니다. OECD 국가 중 자살률 1위, 저출산율 1위, 교통사고율 1위입니다. 자살률, 출산율 등은 인간의 삶의 질과 관련된 지표입니다. 자살률과 저출산율 1위는 “지금 대한민국은 살만한 곳이 아닙니다”라는 것을 단적으로 나타내는 수치입니다. 얼마 전 한 매체에서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대한 답은 한국의 현실을 바로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 질문에 대해 소위 선진국이라 하는 미국 유럽의 여러 나라들은 “가족, 관계, 행복, 건강” 등을 답으로 꼽았는데, 한국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물질” 즉 돈으로 꼽았습니다. 이와 같은 지표가 계속 보이면, 우리는 한번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시계형 속도인지, 아니면 나침반형 방향인지를 말입니다. 어쩌면 우리 모두 알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속도도 방향도 모두 중요하지만, 이제는 속도가 아니라 방향을 다시 점검해야 할 때라는 것을. 우리 사회와 비슷한 우리 인생도(삶) 한 번 점검해 봅시다. 지금까지의 ‘내’가 만들어지기 까지 수많은 교육, 미디어를 통한 메시지 등은 부흥, 성장, 열심, 열정의 시계형 속도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진짜 ‘내’가 누구인지, 나는 어디에 목적과 가치를 두고 살아가야 하는지 나침반형 방향이 필요합니다. 한국교육, 한국 기독교 교육은 어떤가요? 지배욕과 호기심, 혹은 지적 욕구만을 채우는 결과 중심의 교육, 즉 시계형 교육이 아니었나요? 교육의 목적이 사랑하며 섬기고 배려하는 인간을 만들어가는 가치와 철학이 있는 나침반형 교육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38년 동안 청소년들을 섬기는 십대의벗을 하다보니 한 해 한 해 보이는 것이 다른데, 특히 올해는 사회가 나아가야 하는 방향, 교회가 추구해야 하는 방향이 나침반으로 정확히 보이는 듯합니다. 나이가 들면서 철도 함께 드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벌레만도 못한 인간을 사랑해서 지금까지 사랑의 나침반으로 인도하신 주님이 앞으로도 그 사랑의 나침반으로 인도하실 것이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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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0-20
  • [이상규 교수의 역사탐색] 한국기독교여자절제회 100주년
    금년은 우리나라 ‘대한여자절제회’가 발족한지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절제(節制)라는 말이 ‘정도를 넘지 않도록 알맞게 조절함’이라는 의미이므로 절제운동이란 우리의 일상에서 근검절약하고 매사에 지나치지 않고 자족하는 안분(安分)한 생활을 생각하겠지만, 물론 이런 정신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사실이지만 보다 직접적으로 말하면 술과 담배를 금하는 절제가 중심을 이루고 있다. 세계기독교여자절제회(WCTU: World Women's Christian Temperance Union)는 1883년 미국에서 시작되었는데 독실한 감리교 신자였던 프란시스 윌라드(Frances Willard) 여사에 의해 일리노이주 에반스톤에서 시작되었다. ‘하나님과 가정과 나라를 위하여’라는 목표로. 특히 술과 담배, 마약의 해독을 일깨우는 계몽운동으로 출발했지만 그 정신은 성령의 열매인 절제생활을 권장하고 보다 성결한 삶을 살게 하기 위한 시민운동이었다. 이 운동은 미국사회에 큰 호응을 받았고, 곧 영국, 호주, 뉴질랜드 등 영어권과 스웨덴, 일본 등지로 확산되었다. 이 절제운동은 따지고 보면 미국에서 일어난 제2차 각성운동의 영향이라고 할 수 있는데, 당시 미국 사회에서 음주와 이로 인한 폐해가 심각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대각성운동의 지도자였던 리만 비치(Lyman Beecher)는 미국절제협회(Americal Temperance Movement)를 조직하고 금주단연운동을 전개하였다. 1820년대 술(위스키) 가격은 차나 커피, 맥주, 그리고 우유보다 싸게 판매되는 품목이었다. 그러다보니 과도한 음주가 사회 문제가 되었다. 1830년 당시 1인당 80프루프짜리 술을 1주마다 1.7병씩 마심으로써 연간 순수 에탄올 섭취량이 7갤런에 달했다고 한다. 이런 과도한 음주는 미국 사회의 가장 위험한 적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의식 있는 여성들도 절제운동에 동참하게 된 것이다. 그것이 세계기독교여자절제회의 창립이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는 흡연, 마약, 기아, 매춘, 폭력 등 사회적인 문제의 근원은 음주라고 보아 음주와 흡연을 반대하는 일을 중요한 과제로 삼게 된 것이다. 이를 통해 생활 개선을 고취하고 가난과 질병, 무지를 해결하고 순결과 평화를 이루며 국제간의 상호 이해와 평화를 증진시키려는 고상한 이상을 가지고 조직된 것이다. 이 여자절제운동이 1923년 9월 우리나라에서도 시작되었는데 이것이 대한여자절제회였다. 세계여자절제회의 팅링 여사가 1923년 6월 한국을 방문하고 6개월간 체류하면서 여러 지역을 다니며 학교와 교회에서 강연을 실시하여 이 운동의 필요성을 고취하였고, 홍에스더, 유각경, 최활란 3 여성을 발기인으로 하여 조선기독교여자절제회를 조직하게 된 것이다. 1924년부터는 전국을 순회하며 강연회를 개최하여 계몽운동을 실시하였고 각 지회를 조직하여 1926년에는 전국에 26개 지회를 조직하게 되었고, 약 3천명의 회원을 확보하게 되었다. 경남지방의 경우, 부산, 마산, 통영에, 경북지방에는 대구, 포항, 김천에 지부가 조직되었다. 1930년 1월에는 절제회의 회보라 할 수 있는 ‘절제’라는 잡지 창간호가 발간되고 1930년대에는 보다 적극적으로 절제운동을 전개하여 시내 행렬, 전단지 배포, 금주단연 강습회 개최 등을 통해 이 운동을 확대했다. 절제회보는 1938년까지 8호를 발간했는데, 1935년부터는 절제운동도 일제의 탄압을 받게 된다. 금주 강연금지령이 내려졌고, 절제회의 활동이 제약을 받게된다. 1939년에는 절제회의 명칭도 일제의 강요로 교풍회(矯風會)로 개칭된다. 이런 절제운동은 기독여성들만이 아니라 한국교회적으로 확대되어 장로교의 송상석 목사를 중심으로 1930년대 초부터 절제운동을 전개하여 1932년 5월 ‘조선기독교절제운동회’가 공식 창립되었다. 이 절제운동회는 다양한 방법으로 금주단연운동을 실시하였고, 1933년에는 ‘절제시보’를 창간하고 주일학교를 위한 ‘절제공과’를 제작하여 국민정신을 계몽하였다. 특히 1935년 10월 15일에는 윤치호를 위원장으로 ‘미성년자음주금지법실시촉성회’를 조직하여 1938년 ‘미성년자 금주금연법’을 제정하게 만들었다. 또 구세군이 중심이 되어 절제운동을 조직적으로 추진하기도 했다. 구세군은 ‘금주신문’을 창간하고 여러 문서를 통해 절제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여자절제회가 먼저 조직되었고 이들의 활동이 한국 사회 전반에 영향을 주었다. 그 결과 우리나라에서 금주단연가(禁酒斷煙歌)가 만들어지고 심지어는 찬송가에 편입되기도 했다. 이때 만들어진 금주가 중에는 영문학자 양주동 교수가 쓴 이런 가사도 있었다. 1절: 꿈을 깨어라 동포여/ 지금이 어느 때라 술먹나/ 개인과 민족 멸망케 하는 자/ 그 이름 알콜이라/ 2절: 입에 더러운 담배를 왜대리/ 용단하라 형제여/ 몸과 정신을 마비케 하는 것, 담배란 독약이다/ 후렴: 술판을 깨치라/ 담배대를 꺽어 버려라/ 이천만 사람의 살길은 절제운동 만만세. 이런 절제회의 활동이 금주 단연을 당연시한 오늘의 한국교회를 건설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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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상규교수의 역사탐색
    2023-10-20
  • [서임중칼럼] leader는 있고 leadership은 없다
    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는 지도자는 많은데 지도력 부재의 시대라고 아파한다. 지도자다운 지도자가 없다는 말이다. 국가 지도자든 사회지도자든 종교 지도자이든지를 무론하고 우리는 참 ‘지도자’가 그립다. 요즈음 듣는 여의도 1번지 이야기는 속이 뒤집혀 먹던 것도 내뱉고 싶은 충동을 느끼지 않는 사람이 별로 없을 것이다. 정말 해도 너무 한다. 소위 선량(選良)이라는 분들의 사고력(思考力)이나 언행이 그것밖에 안 되는 것이라면 정치인들에게서 어떻게 국태민안을 기대하겠는가. 마음이 천근만근이 된다. 모두가 ‘내 잘못은 없고 네 잘못 뿐’이라는 논리를 당연시하는 정치 지도자들의 의식은 도대체 어디서 온 것일까를 생각하며 그들을 선택한 국민으로서 자괴지심에 고개를 들 수가 없다. 오죽하면 ‘내로남불’의 발상지가 여의도 1번지라는 말이 회자(膾炙) 될까. 야당대표가 생사를 건 단식투쟁을 한다. 그를 두고 개인비리를 덮으려고 국정을 마비시키는 꼼수라며 매정하게 논평하는 여당 지도자들, 그것이 국정쇄신을 위한 애국충정이라고 옹호하는 야당 지도자들, 이들의 언행을 보면 어린아이도 돌아서서 코웃음을 칠 상황이 아닌가. 그들의 행태를 보면 문제를 풀어내고 화해와 상생의 멋을 이끌어내는 지도력을 가진 사람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찾을 수가 없다. 너 죽고 나 죽자는 희한한 판을 보는 것 같아 가슴이 아프다. 어느 기자가 보도한 대로 “코미디도 이렇지는 않다”는 말이 가슴을 후벼 판다. 경제가 곤두박질을 치고, 학원이 막판 장터가 되었으며, 사회가 시궁창 냄새를 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누구 하나 ‘내 탓이오’하고 나서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 슬프기만 하다. 모두가 ‘네 탓’이다. 카톨릭의 신뢰 회복 운동의 하나인 ‘내 탓이오’ 캠페인은 1990년부터 시작된 것이다. 사회적으로 불신과 갈등이 만연하게 된 원인이 모두 자기 자신에게서 비롯됨을 자각하고 자기반성 운동으로 전개되어 왔다. 그래서 고 김수환 추기경이 승용차에 ‘내 탓이오’스티커를 붙인 것을 시작으로 전 카톨릭 신자는 승용차에 “내 탓이오”스티커를 부착하여 사회 정화 및 자기반성 운동으로 솔선수범을 해왔다. 고 김수환 추기경의 이와 같은 리더십에 우리는 박수를 보냈고 동참했다. 이 아름다운 운동이 확산되어 개신교인들은 ‘익수스(Ιχθυς)’ 물고기 모양의 스티커를 승용차에 붙이고 자신이 그리스도인임을 공표하면서 모든 사회생활에 귀감이 되기를 다짐하는 것도 같은 의미에서 이해되는 것이다. 그런데 정작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은 그런 스티커를 부착한 승용차들이 신호를 위반하고 교통질서를 무시하고 운전을 하는 것을 심심찮게 보는 것이었다. 그래서일까, 양심의 소리에 그나마 부끄러워져서일까? 이제는 ‘내 탓이오’도 ‘익수스’도 일상에서 볼 수가 없다. 요즈음 시대를 유튜브 범람 시대라 한다. 공적으로 사적으로 유튜브 방송이 미디어의 판도를 바꿔놓았다. 그런데 이 유튜브가 우리의 마음을 감동케 하고 삶의 질을 다듬어주기보다는 정사(正邪)가 분별되지 않는 자극적이고 무분별한 내용으로 여과없이 쏟아지고 있다. 사리판단은 뒷전이다. 그러다 보니 자신이 선호하고 믿고 싶은 대로 생각이 기울어져 흑을 백이라 해도 박수를 보내고, 백을 흑이라 해도 박수를 보내는 기이한 현상이 나타난다. 그러니 우리 사회가 흑백으로 나뉘어져 나만 옳고 너는 틀렸다는 공멸을 향해 달음질하고 있다. 그것이 두려운 것이다. 간디는 일찍 우리를 파멸하게 하는 일곱 가지를 갈파했다. 원칙 없는 정치, 근로 없는 축재, 도의 없는 기업, 인격 없는 지식, 인간성 없는 과학, 양심 없는 쾌락, 희생 없는 신앙이 그것이다. 오늘 우리의 삶의 현장에 이 일곱 가지가 현존하기 때문에 우리는 천천히 천천히 공멸해 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것이 두려운 것이다. 논어 위령공편(衛靈公篇)에 보면 살신성인(殺身成仁)의 가르침이 있다. 자신을 죽여서라도 인(仁)을 이룬다는 뜻인데, 높은 뜻을 지닌 선비와 어진 사람은 삶을 구하여 ‘인’을 저버리지 않으며 자신을 죽여서라도 ‘인’을 이룬다‘(志士仁人, 無求生以害仁, 有殺身以成仁)고 했다. 이 가르침으로 우리의 선조들은 공(公)을 위해 사(私)를 희생하는 것을 최고의 삶의 가치로 알았고 이를 수행하는 것이 지고한 군자의 길임을 가르쳤다. 이에서 진정한 지도자의 지도력이 나왔다. 언론에 오르내린 수많은 잘난 분들, 조금만 힘이 있어도 그 힘을 못 써먹어 안달하는 소인배, 좁쌀만 한 명예와 권력이 있거나 관계되면 별별 희한한 짓을 당연한 듯 행사하는 졸부들이 지도자로 있는 한 공리(公利)는 요원하다. 세월이 그래서인가? 요즘 사람들의 삶의 모습에는 ‘내 탓이오’가 없다. 모두 너의 잘못으로 돌리면서 ‘나는 소크라테스요 너는 돼지’라는 논리를 펼친다. 예수님이 그토록 경계하셨던 바리새인의 모습을 재현하고 있는 이 세태가 걱정스럽기만 하다. 이 황량한 사막 같은 삶의 현장일지라도 그리스도인만큼은 오늘의 난국이 나의 잘못임을 고백할 수 있는 겸손함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엎드림의 삶이 절실히 요구된다. 古稀의 중반을 넘기면서도 나는 1년에 70여 교회의 초청을 받으며 말씀사역을 하고 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시끄럽고 벌판이 되어가는 교회의 중심에는 항상 목사와 장로라는 지도자들이 있다는 것이다. 교회에서 갖는 직분을 마치 계급사회의 직무로 오해하면서 자기 자신을 지도자가 아닌 지배자로 여기고 있는지도 모른다. leader는 있는데 leadership이 없다면 결과는 언제나 공동체 전체가 아파하게 되고 결국에는 파멸에 이른다는 것을 간과하면 안 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리더십의 내용은 긍휼과 겸손과 섬김이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리더십의 방법은 이해와 관용과 용서와 사랑이었다. 진정한 leadership을 가진 leader가 있을 때 그 조직과 공동체는 평행감축(平幸感祝)의 장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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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9-22
  • [성서연구] 성도가 알아야 할 것
    본문은 바울 사도께서 에베소교회 성도들을 위해 드린 기도입니다. 이때 바울은 감옥에 계셨습니다. 그는 감옥의 고통 중에도 성도를 위해 기도를 쉬지 않았습니다. 정말 주님의 충성된 종이요, 성도를 사랑하는 목자였습니다. 그는 육체의 안락함과 세상의 부귀영화 따위에 눈길을 주지 않았습니다. 오직 하나님 나라를 위해, 복음을 위해 모든 것을 드렸습니다. 바울은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바울이 분명하게 알고 있는 것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울 사도께서 알고 있었던 것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그것을 바울이 에베소교회 성도들을 위해 드린 기도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본문에는 반복되는 표현이 있는데, <알게 하소서>입니다. 성도는 알아야 합니다. 무엇보다 진리를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알았고, 에베소교회 성도들이 알아야 했고, 우리가 알아야 할 진리는 무엇일까요? 첫째,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신앙의 기본은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종교개혁자 칼빈은 『기독교강요』제1권에서 창조주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대해 말합니다. 사람은 자신을 위한 이기적 동기에서 움직이게 되는데, 하나님을 믿는 것도 자신에게 유익하다고 여길 때 열심을 내게 됩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사람에게 결정적으로 유익합니다. 하나님의 존재, 사랑과 능력을 알 때, 그분이 온갖 우상과는 다른 유일한 참 신이심을 알 때 비로소 하나님을 믿게 됩니다. 에베소서가 기록되던 당시 로마 세계에는 온갖 우상숭배가 판을 쳤습니다. 바울은 성도들이 하나님이 우상과 다른 분임을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셨는데, 그 부르심 안에 있는 소망이 얼마나 위대한지 알아야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부르심의 말씀입니다. 우리를 생명으로 부르셨고, 믿음으로 부르시고, 사명으로 부르십니다.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가나안으로 갔습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실 때는 그 안에 엄청난 복이 예정되어 있습니다. 그게 부르심 안에 있는 소망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을 때, 장차 얻게 될 복을 소망해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큰 민족의 조상이요, 믿음의 조상이 되는 복을 받았습니다. 또 성도는 주님께서 주시는 기업의 영광이 얼마나 풍성한지를 알아야 합니다. 여기 기업이란 궁극적으로 하나님 나라를 말합니다. 장소적 개념을 추구한다면 천국을 생각해도 좋습니다. 장차 주실 천국이 얼마나 영광스럽고 풍성한 것인지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함께 계시고, 아픈 것, 눈물, 죽음이 없는 영생의 나라입니다. 그것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또 성도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능력이 얼마나 큰지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천지를 창조하신 능력입니다. 그 누구도 대항할 수 없는 능력입니다. 홍해를 가르치고, 어린 다윗이 골리앗을 이기게 하시는 능력입니다. 하나님의 능력 안에서 우리는 사탄을 이길 수 있습니다. 바울은 이런 것들을 알았습니다. 그랬기에 감옥에서도 굴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로마 황제보다 크심을 알았고, 하나님 나라가 로마 제국을 백 개 이상 합친 것보다 크심을 알았고, 하나님의 부르심 안에 있는 엄청난 복과 그 능력을 알았습니다. 비록 현실이 성도를 억압하지만, 그건 잠시뿐임을 알았기에 그는 철저한 믿음으로 하나님을 의지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성도가 알아야 할 것을 모르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을 부르면서도 악을 행하고, 하나님 아닌 것들을 의지합니다. 목회자와 교회 중직자 중에도 하나님의 부르심 안에 있는 영광과 소망을 바라보는 게 아니라, 세상의 것을 의지하여 교회와 교단과 교계의 권리를 얻으려고 온갖 추한 일을 서슴지 않습니다. 아마 이 세상이 영원할 줄로 착각하기 때문이 아닐까요? 아무리 교회가 커도 하나님 나라에 비할 수 없을 텐데, 교회를 사유화하여 마음대로 주무르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게 아니라, 세상을 믿는 것이요, 자신을 믿는 것이요, 사단을 믿는 것입니다. 진실로 바울의 기도에 나오는 것들을 우리 모두가 알길 원하고, 그것으로 기뻐하면서, 세상을 극복하길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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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9-22
  • [시사칼럼] 삼십 퍼센트의 진실
    집권한 지 1년이 지난 현재 대한민국 대통령의 국정지지도를 바라보면서 의아한 점이 한 가지 생겼습니다. 온갖 억측을 불러일으켰던 용산으로 관저 이동, 이태원 참사의 후속처리 과정에서 보여주었던 과오, 가족의 비리 문제, 국제잼버리대회 졸속 운영 문제, 양평고속도로 사태, 해병대 수사단장 박 대령 사건 등 숨 돌릴 틈조차 없이 이어진 연이은 사건사고 속에서도 콘크리트 같은 30% 지지율을 고수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민주 정부가 시작되면서 들어섰던 전직 대통령들 모두 저마다의 암초를 만나 지지층 급락을 경험한 바 있습니다. 고 김영삼 전 대통령의 경우 IMF 사태, 고 김대중 정부의 경우 두 아들의 구속,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경우 FTA 체결과 이라크 파병, 이명박 전 대통령의 경우 광우병 사태와 BBK 문제, 박근혜 정부의 국정농단, 문재인 정부의 경우 부동산 문제 등이 불거져 나올 때마다 국정지지도가 추락하는 수모를 겪지 않았습니까? 그런데도 현재 대통령은 굵직굵직한 문제들이 줄지어 발생하는데도 굳건한 지지층을 확보하고 있으니 신기한 일입니다. 그 이유는 어디에 있을지 나름대로 분석을 시도합니다. 마침 올해가 파레토(Vilfredo Pareto, 1848-1923) 사망 100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해서 먼저 ‘파레토 법칙’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탈리아 출신의 정치경제학자였던 그는 자국 내 부(富)의 분배 상황을 연구한 후 20% 인구가 80% 부(富)를 차지하고 있다는 결과를 발표했는데 이를 후학들이 ‘파레토 법칙’이라 명명하면서 유명해진 이론입니다.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파레토 법칙은 오늘날에도 많은 분야에서 적용되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상위 20% 소득자가 전체 세금의 80% 이상을 부담하고, 백화점 20% 고객이 전체 매출의 80%를 책임지며, 일반적으로 발견되는 20%의 버그를 수정하면 오류 및 충돌의 80%가 해결된다거나(Microsoft), 심지어 평소 즐겨 입는 옷조차도 옷장 속 20%에 불과하다든지 하는 식으로 다양한 통계적 사실들을 말할 때 곧잘 파레토 법칙을 거론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래서 마케팅 전략을 세울 때 이러한 20%를 공략하라는 선택과 집중의 원리를 내세우기도 합니다. 다방면에서 상당히 수긍이 가는 이론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정치 분야에서는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엄청난 지지율을 자랑했던 전직 대통령들이 상기한 여러 문제로 인해 한 자릿수의 처참한 지지율을 기록했던 사실을 우리는 생생하게 기억하기 때문입니다. 이론이 아니라 경험적으로 ‘30% 원리’를 주장하는 사례들도 존재합니다. ‘패션의 70/30 법칙’이라는 말을 들어보신 적이 있습니까? 패션계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경험에서 비롯된 말인데, 브랜드의 상위 30% 스타일에서 전체 매출의 70%가 나오더라는 얘기입니다. ‘연애 강자 3할의 법칙’도 있습니다. 연애 잘 하는 사람은 전체의 30%에 불과하더라는 의미입니다. 주로 일본 쪽에서 많이 나오는 말인데(일본인구문제연구소), 『솔로사회가 온다』(북바이북, 2022)의 저자 아라카와 가즈히사에 의하면 연애를 하든지 이미 결혼을 했든지 불문하고, 심지어 바람을 피우는 사람들 중에서도 연애 강자의 비율이 30%를 차지하고 있더랍니다. 야구의 경우에도 타격을 잘 하는 기준이 3할입니다. 즉 세 번 나와서 한 번꼴로 살아나가면 훌륭한 타자라는 칭송을 받습니다. 이처럼 30%라는 비율은 정확하게 설명할 길은 없어도 우리 일상에서 실질적으로 임상적으로 체험하는 경험적인 수치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정치 영역만큼 경험치가 무의미할 때가 많은 분야가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원리 역시 지금 대통령의 지지율 30%의 정밀한 기반이 된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그렇다면 ‘30%’ 견고한 장벽의 근거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요? 얼마 전 대통령의 발언과 최근 벌어지고 있는 일련의 움직임으로부터 단서를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즉, 윤석열 대통령은 최근 1년 전과 달리 ‘문제는 이념이다’라는 발언을 했습니다. 새는 두 날개로 나는 법이지만 같은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고도 하셨습니다. 지금 첨예하게 벌어지고 있는 ‘홍범도 장군’ 같은 논쟁이 이로부터 기인한다고 봅니다. 독립전쟁의 영웅이지만 공산주의는 안 된다는 시각에서 촉발된 논쟁이 아닙니까? 공산주의 세력과 맞서 싸우는 것이 중요하므로 한-미 동맹 강화가 가장 중요한 정책일 수밖에 없고, 필요하다면 일본과도 손을 잡고 반공을 위해서라면 강제징용이나 오염수 같은 문제에 있어서 조금은 양보해도 좋다는 인식이 나타나지 않나 합니다. 올해로 어느덧 휴전 70년을 맞이합니다. 그러나 6. 25 세대들에게 전쟁은 아직도 실제적으로 현재진행형입니다. 전쟁을 직접 경험하거나 전쟁 종료 후 약 10년 안에 태어나 전쟁의 참상을 그대로 학습한 세대가 바로 나이 60대 이상이며 현재 전체 인구의 30%에 육박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들이 바로 견고한 콘크리트 지지층의 중요한 기반 중 하나가 아닐까요? 이념이 물론 중요합니다. 우리 현실에서 반공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민주나 민생과 같은 모든 가치를 집어삼키는 리바이어던을 정당화시켜줄 수는 없습니다. 반공은 국시일 수 있으되 우상이 되어서는 곤란합니다. 신앙인으로서 이러한 영적인 하한선만은 반드시 지키며 분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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