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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시간 칼럼 기사

  • [함께 생각해 봅시다] 나이가 아니라 마음이 문제다
    내가 이 나이에 어떻게 그러지말고 내 나이가 어때서 이렇게 생각해야 노인학교에 나가서 잡담을 하거나 장기를 두는 것이 고작인 한 노인이 있었다. 어느 날 장기를 둘 상대자가 없어 그냥 멍하니 있는데 한 젊은이가 지나가다가 말했다. “할아버지 그냥 그렇게 앉아계시느니 그림을 그리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내가 그림을? 나는 붓을 잡을 줄도 모르네” “그것이야 배우면 되지요” “그러기엔 너무 늦었어. 나는 이미 일흔이 넘었는걸” “제가 보기엔 할아버지의 연세가 문제가 아니라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할아버지의 마음이 더 문제인 것 같은데요” 젊은이의 핀잔은 곧 그 할아버지로 하여금 화실을 찾게 했다. 그림을 그리는 일은 생각했던 것만큼 어렵지 않았고 더욱이 그 연세가 가지는 풍부한 경험으로 인해 성숙한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붓을 잡은 손이 약간 떨렸지만 그는 매일 그르지 않고 그림을 그렸다. 이 새로운 시도는 그의 마지막 인생을 더욱 풍요롭게 장식해주었다. 그가 누군고 하니 바로 평론가인 ‘미국의 샤갈’이라고 극찬을 받은 해리 리버만이다. 그는 많은 이들의 격려 속에서 수 많은 그림을 남겼다. 그는 101세에 22회째인 그림전시회를 마지막으로 생을 마감했다. 이런 일들을 보면 문제는 나이가 아니라 마음이 문제이다. 지난 해 신문에 게재된 기사를 보니 인도의 만카우르(여)는 1916년생으로 나이 100세인데 그는 92세에 달리기운동을 시작했다. 그는 꾸준히 노력한 결과 지금까지 미국과 중국 등 세계 각국을 돌며 목에 건 메달이 무려 20개가 넘는다고 한다. 2016년 캐나다 밴쿠버 육상 여자부(70세 이상 부문) 100m 경주에서는 우승을 차지했다. 앞서 창던지기와 포환던지기에서도 정상에 올라 이 할머니는 이 대회 3관왕이 됐다. 역시 신문기사에서 본 것이다. 전북 완주군 소양면 차사순(69)씨는 운전면허 도전 5년만에 드디어 면허증을 획득했다고 한다. 그는 필기시험은 960번 만에 합격하고 도로주행시험은 10번만에 합격했다고 한다. 그는 중고차라도 사서 장사도 하고 아들과 딸 집에도 차로 갈 수 있어 기쁘다고 말했다. 이런 사례들을 보면 문제는 나이가 아니다. 마음의 자세가 문제다. 뭐든 못하는 것은 나이가 많아서가 아니라 이젠 나이가 많아서 못하겠다는 마음 때문이다. 여간 나이가 많아도 “나는 늙었다” “내가 이 나이에 어떻게” 이 같은 생각을 버리고 “내 나이가 어때서” 이렇게 생각을 바꾸고 뭐든 못할 것이 없다고 생각해야 한다. 뭐든 못하는 것은 나이 때문이 아니고 생각 때문이고 마음 때문이다. 독자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한지요. 함께 생각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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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01-19
  • [시사칼럼] 기억과 거짓말
    이른바 <국정농단청문회>가 끝났습니다. ‘농단(壟斷)’이란 말을 사전에서 찾아보니 “이익과 권력을 교묘한 수단으로 독점함”이라는 뜻을 가졌습니다. 본래 『맹자(孟子)』에 나오는 말이라고 합니다. “옛날에 시장에서 하는 일은 자기가 가진 것으로 가지지 못한 것을 바꾸는 것이었고, 관리하는 사람은 다만 그것을 살필 뿐이었다. 그런데 천한 사람이 나타나 우뚝 높은 언덕(롱, 壟)에 올라가 좌우를 살펴보고는 시장의 이익을 그물질해 버렸다. 사람들은 모두 이를 천하게 여겼다.”(맹자 공손추하(公孫丑下) 편) 그런데 이번 청문회를 보니 농단이라는 말도 아깝다는 생각이 듭니다. 오히려 ‘기억상실청문회’ 혹은 ‘거짓말청문회’라는 이름을 붙여야 하지 않을까요? 허버트 마르쿠제(Herbert Marcuse)는 망각이란 복종과 포기를 지속시키는 정신능력이라고 했습니다.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그런 기억이 없습니다.” 일관하는 청문회 증인들을 보면서 떠오른 문장입니다. 공부도 많이 하고 경험도 풍부한 분들인데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일종의 집단기억상실증에 빠지게 했을까요? 독일 신학자 얀 아스만(Jan Assmann)는 말했습니다. “전체주의는 망각과 결탁한다.” 혹시 항거할 수 없는 거대한 집단의 힘이나 구조적인 압력이라도 있었던 걸까요? 청문회 현장에 선 의도적인 혹은 무의식적인 기억상실증에 걸린 사람들을 보면서 조지 산타야나(George Santayana)가 남겼다는 명언이 새삼스럽게 다시 떠올랐습니다. “과거를 망각하는 자는 그것을 반복하도록 심판 받을 것이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번 청문회를 보면서 묘한 기시감(dejavu)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청문회 현장에서 자신이 발언했던 앞 뒷말이 모순되어서 거짓말을 하고 있음이 바로 탄로 난 경우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당장에는 교묘한 말로 진실과 거짓을 분간하기 어렵게 만든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그래도 진리는 반드시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성경도 등불을 다 숨길 수 어렵고 감춰진 것은 반드시 알려지고 나타나기 마련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엠마누엘 카레르(Emmanuel Carrere)라는 작가가 실화를 바탕으로 쓴 『적』이라는 글이 있습니다. 주인공 장클로드 로망은 의대에 입학한 지 2년 후 예과 시험에 나타나지 않습니다. 부모에게는 시험을 잘 치렀으며 본과로 넘어가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 이후로 15년을 이어지는 거짓말의 시작이었습니다. 결혼을 하고 자녀를 갖지만 계속해서 거짓 인생을 살아갑니다. 그리고 결국 모든 것이 드러날 위기에 처하자 가족을 죽이고 비참한 파국을 자초하고 만다는 내용입니다. 스위스 출신의 페터 비에리(Peter Bieri)는 거짓말은 무엇보다도 자신의 존엄성과 타인의 존엄성을 해치는 행위라고 평했습니다. 이번에 증인이나 참고인으로 등장했던 사람들 중에는 모르기는 해도 그리스도인들도 여럿 있었을 것입니다. 신자는 정직해야 한다는 성경 구절을 모를 리가 없는 분들입니다. 아마도 개인적으로는 자성하며 지금쯤은 회개의 눈물을 흘리고 있을 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러나 더욱 안타까운 것은 대부분이 사람들이 가짜 기억을 만들어내고 거짓말하는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대하고 있는 이 사회의 정서와 풍조입니다. 정직은 성경의 가치만은 아닙니다. 정직은 어떤 사회든 자손들에게 물려주어야 할 인류의 자산입니다. 기억도 마찬가지입니다. 정확한 사실에 기초한 정확한 기억은 역사를 발전시켜가는 도구입니다. 왜곡된 기억과 굴절된 거짓이 난무하는 사회는 반드시 퇴행과 갈등의 역사를 반복하게 되어 있습니다. 정유년입니다. 멀리서 새벽을 깨우는 닭울음소리가 들려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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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01-05
  • [목회자 칼럼] 다음 세대를 염려하면서 (1)
    최근 우리나라 인구는 5천만명을 넘어섰다. 전 세계적으로 28위에 드는 인구 강국이다. 물론 남북을 합하면 7300만명으로 터키 다음으로 21위가 된다. 인구가 많은 것은 강점이다 중국이 세계 2위의 강대국으로 지위를 굳히고 있는 것도 세계 최대의 인구를 가진 덕택임을 누구도 부인 할 수 없다. 그러나 슬픈 사실은 우리나라 인구는 2030년에 5296만명으로 최절정에 도달할 것이고 그 뒤로는 점점 줄어든다는 것이 인구 학자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줄어드는 속도가 얼마나 빠른지 100년 후가 되는 2115년경에는 2580만명으로 우리나라 인구가 반 토막 난다고 한다. 그동안 오랜 세월 매년 출산으로 신생아가 100만명 가량이었으나 지금은 한 해에 40만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그 결과 예를 들면 서울 교동초등학교는 한창 왕성하던 시절에는 전교생이 5천명을 넘었는데 지금은 단지 118명이라고 한다. 지금 청년 대학생들의 34%가 결혼에 대하여 소극적이거나 부정적이며 막상 결혼을 한 신혼부부들의 43%가 ‘당장 출산할 계획이 없다’라고 대답한다. 일컬어 딩크족(族) (DINK = Double Income No Kids ‘부부가 같이 직업을 가짐으로 수입은 두 배로 늘리고 아기는 갖지 않겠다는 사고를 가진 젊은이들’ 이라는 뜻임) 이 확산되는 추세에 있다. 이 같은 현상은 우리나라 미래의 교육위기, 경제위기, 국방위기를 몰고 오고 있다. 교육 위기란 취학 아동수가 해마다 급격하게 줄어들므로 폐교, 폐 교실이 빠르게 늘어나고 있다. 그 결과 앞으로 전국의 대학들이 정원보다 훨씬 못 미치는 입학생 수 감소로 말미암아 대학 운영이 심각한 위기를 맞이하고 있다. 경제 위기란 생산 공장의 인력이 태부족하게 되므로 후발 신흥 경제 도약 국가들에게 경쟁력을 추월 당 할 수 있다. 국방 위기란 강대국들의 틈바구니에 위치 해 있는 것이 우리 한반도이므로 기본적인 국방 인력이 항시 준비 돼 있어야 하는데 그 ‘절대적인 수치 유지’에 위험 신호가 켜지고 있다고 한다. 다음 세대를 전망 할 수 있는 〈오늘의 우리나라 종교 현황〉은 어떠할까? 종교를 가진 자가 44%, 무종교라고 답하는 국민이 56%이다. 대표적인 종교 현황을 보면 기독교 967만명 (전 인구의 19.7%), 불교 761만명 (15.5%), 로마교 389만명 (7.9%) 이다. 참으로 다행스럽고 감사한 것은 그 동안 침체되고 위축 돼 오던 우리 기독교가 상당한 회복을 이루었다는 점이다. 한 때 800만명 이하로 떨어졌다거나 심지어 600만에도 미치지 못 할 것이라는 우려의 목소리들이 컸었는데 이번에 정부 통계청이 가장 정확한 방법으로 조사 연구하여 발표한 결과이므로 그 어느 때 보다 〈신뢰도〉가 높다. 우리 기독교가 그 동안의 우려와 달리 많이 회복 되었다고 하나 오늘의 현상은 마치 〈살얼음판〉을 딛고 있는 것과 같다. 하도 예측 할 수 없는 돌발 사태와 변수들이 많이 일어나는 복잡한 시대이므로 우리는 겸손하게 조심 또 조심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교회만이 이 땅의 희망〉임을 진실과 정직과 깨끗한 삶을 통하여 세상에 보여 주어야 한다. (마 5:13~16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 고후 2:15 “우리는 구원 받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고후 3:3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쓴 것이며 또 돌판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마음판에 쓴 것이라” / 벧전 2:12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오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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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01-05
  • [성경인물탐구] 이스라엘이 최고라 생각하는 요한 (3)
    요한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으로부터 택함 받은 선민이요, 따라서 이스라엘이 최고의 민족이라는 특권 의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과 더불어 사마리아로 지나 가다가 사마리아 사람들을 보고는 아주 심한 저주의 말을 내뱉었습니다. 이처럼 그릇된 특권 의식, 그릇된 선민의식을 가진 자는 매우 위험스럽습니다. 옛날 독일의 히틀러는 게르만 민족이 세계의 제일이라 주장하며 다른 모든 민족들을 무시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런 잘못된 생각으로 200만 명이나 되는 유태 민족을 학살하였습니다. 이렇게 위험스런 특권이나 선민의식은 하나님의 교회를 분열시키고, 나아가서 주의 나라를 파괴하는 매우 위험스런 생각임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그릇된 선민의식에 사로잡힌 요한은 모든 이방인은 멸망 받을 존재인 줄로 알았습니다. 사마리아 사람 역시도 이방인들과 혼혈 민족을 이루었기에 이런 심판을 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에게 불 심판을 요구하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받지 않는 것은 민족과 국가의 차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에 있습니다. 그러기에 성도된 우리들은 이렇게 외모로, 혹은 성별로, 혹은 재산으로 사람을 판단해서도, 경멸해서도 안 됩니다. 오직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모든 사람은 직업의 유무, 빈부귀천, 지위 고하, 남녀 성별에 관계없이 동일한 한 형제요, 또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입니다. 롬 10:12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저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 도다. 요한은 참으로 다른 제자에 비해 유달리 특권 의식과 계급의식이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예수께서 십자가 사역을 위해 예루살렘으로 향하실 때도 그 어머니를 통해 예수님의 오른팔에 해당하는 직책을 부탁하였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살아 계시는 동안은 이렇게 특권 의식에 젖어 있었고, 또 지나친 계급의식에 젖어 있었습니다. 우리들도 하나님의 교회에서 섬김과 봉사를 위해 주어진 직분을 이렇게 상하를 구분하는 계급으로 그릇 오해하는 어리석음을 범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마 20:20-21 그때에 세베대의 아들의 어미가 그 아들들을 데리고 예수께 와서 절하며 무엇을 구하니 예수께서 가라사대 무엇을 원 하느뇨 가로되 이 나의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 엡 4:12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요한은 매우 성급한 성격의 소유자였습니다. 얼마나 성격이 급하고 불과 같았던지, 그는 형제 야고보와 더불어 '우뢰의 아들' 즉 보아너게라는 별명을 가질 정도였습니다. 이렇게 성급한 성품을 빗대는 그의 별명은 바로 여기 본문의 사건과 관계가 있습니다. 하늘에서 불을 내려 사마리아 사람을 태워 버리자는 그의 이 요구 속에서 우리는 그가 얼마나 성급하고 혈기 왕성한 사람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요한은 비록 주님의 제자가 되었지만, 그 신앙 인격이 성숙되지 못한 제자였습니다. 막 3:17 또 세배대의 아들 야고보와 야고보의 형제 요한이니 이 둘에게는 보아너게 곧 우뢰의 아들이란 이름을 더하셨으며 우리도 각자의 성품이 있습니다. 온전히 주님을 만남으로 주님을 닮은 성숙한 신앙인들이 다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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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01-05
  • [교회법률상식] 장로교 총회 명칭의 변천사
    한국 장로교회가 원래는 하나의 장로교회였다. 그런데 1950년 6·25동란을 전후하여 장로교가 분열로 이어졌다. 하나였던 장로교가 둘로 분열된 후에는 연이어 분열하다가 핵분열 하듯 현재에는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라는 명칭을 가진 교단이 일백 수 십 개의 교단이 된다는 어떤 통계를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모르기는 해도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일 때만 해도 장로교는 하나이었는데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로 명칭이 변경된 이후부터 장로회 총회가 헤아릴 수 없이 급격히 나누어진 것으로 생각된다. 장로교 명칭의 변천사를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1. 대한국예수교장로회 노회(1907년 제1회 독노회) “하나님께서 은혜를 풍부히 주심으로 수년 젼에 미국 남 쟝로교회와 북 쟝로교회와 영국 오스드렐냐 쟝로교회 가나다 쟝로교회 이 네 곳 총회에셔 특별히 대한국 쟝로회 노회를 세우기로 허락한 고로 쟝로 공의회 회쟝 마포삼열 목사께서 네 곳 총회의 권을 엇어 한국 교회에 로회 되난 취지를 설명하시되 이 로회는 교회의 머리되시난 쥬 예수 그리스도를 힘립어 십자가를 튼튼히 의지하고 견고하여 흔들니지 말고 셰샹사람 압혜 영화로운 빗치 되며 하나님 압혜 거룩하고 정결한 로회를 일우어야하겠다 하시고 쥬 강생 일천 구백 칠년 구월 십칠일 오졍에 한국로회를 셜립한 후에 대한에 신학교 졸업 학사 닐곱 사람을 목사로 쟝립하고 “대한국 예수교 쟝로회 로회라 하셨스니 이는 실노 대한국 독닙 로회로다. 할넬누야 찬숑으로 셩부 셩자 셩신님께 셰셰토록 영광을 돌리세 아멘”(독노회록p.3). 2. 예수교장로회조선 총회(1912년 제1회 총회) 독노회 회의록은 원문대로 기록하였으나 총회록은 현대어로 기록하였다. “주후 1912년 9월 1일 상오 10시 30분에 예수교장로회조선 총회 제일회로 평안남도 평양 경창문 안(內) 여성경학원에서 전 회장 리 눌서 씨가 히브리서 12장에 ‘장자회’라는 문제로 강도함으로 개회한 후에 마포삼열 씨는 떡을 가지고 원두우 씨는 포도즙을 가지고 축사함으로 성찬례를 거행하고 정회하였다가 하오 2시 30분에 계속하여 김석창 씨의 로마서 8장에 ‘나는 괴롭다’는 문제로 강도한 후에 김종섭 씨의 기도로 폐회하다. 서기 한석진”(제1회 총회록p.1). 3.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1915년 제4회 총회) “1915년 9월 4일 하오 8시에 조선예수교장로회 제4회 총회가 전주부 서문 밖 예배당에 회집하여 회장 배유지 씨가 기도하고 부회장 양전백 씨가 딤전4:1-16을 낭독함으로 개회하다”(제4회 총회록p.1). “예수교장로회조선 총회”에서 “조선”만 앞으로 옮겼다. 4.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1949년 제35회 총회) “조선예수교장로회는 금후로는 대한예수교장로회로 함이 가한 줄 아오며”(제35회 총회록 p.51) 여기에서는 “조선”을 “대한”으로 변경했다. 한국 장로교회는 선교 1세기를 지난 후 제2세기를 향한 시점에서 서구 교회의 사양화와는 반대로 놀라운 양적 성장에 대하여는 긍정적으로 평가할만하다. 그러나 장로교의 분열은 주로 선교 정책과 신사 참배의 신학적 차이점 WCC적 에규메니컬 운동 등으로 처음에는 고려파, 기장, 통합, 합동 등의 4대 교단으로 나뉘었다가 현재는 수도 헤아릴 수 없이 일백 수십 개 교단으로 분열되었다. 그 분열의 배경을 간단히 요약하면 ① 역사적 정치적 배경과 지역성 ② 정치적 갈등 ③ 유교의 배타성을 꼽고 있다.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국외적 배경으로 미국의 교파 중심적 선교와 선교지 분할 정책, 그리고 신학적 상이성을 들 수 있다. 그리고 국내적으로는 신사 참배 문제 보수주의와 자유진보주의 및 사회 참여 신학적 배타성 WCC적 에규메니컬 운동의 찬반 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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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01-05
  • [성공칼럼] 원함을 이루는 힘
    매년 새해가 되면 많은 사람들이 해를 보러 달려가서 소원을 빈다. 어떤 사람은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며 소원을 담은 기도를 드린다. 또 어떤 사람들은 상대방의 소원이 이루어지기를 위해 기도한다. 이처럼 사람들은 여러 모습으로 자신의 원함이 이루어지는 것을 바라고 원한다. 이렇게 자신의 원함과 소망이 이루어져야 힘이 생기고 밝아지고 행복해지며 삶이 부유해지기 때문이다. 자신의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소원을 이루는 원천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그 원천은 해처럼 빛나는 사랑이신 하나님이시며, 그 빛을 받은 선한 마음을 가진 사람인 것이다. 삶 속에서 원하는 것을 이루어주도록 비는 해의 역할을 하는 것, 하나님으로부터 원함을 이루는 힘을 가져오는 방법, 사람들에게서 원함을 이룰 힘이 나오게 하는 가장 중요한 원천은 무엇일까? 그 원천은 내가 누구이든, 무엇을 원하든, 어떤 상황에 처하든 사랑과 선을 보여주겠다고 결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랑이란 하나가 되는 것을 목적으로 상대방이 목적이 되고 자신은 수단이 되는 것이다. 선이란 사랑이 상대방에게 표현될 때는 선으로 나타나는 것이며, 상대방을 힘 있게 하고 유익하게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상대방의 소원을 이루어주려면 사랑과 선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사랑과 선을 행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얼마나 큰 능력이 있는지 시간이 지날수록 더 많이 경험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신입사원이 한 명 있다고 하자. 이 사원은 나이도 어리고 실력과 직책도 낮다. 그런데 상사가 “이 따위로 일하려면 회사 그만 둬!”라고 하며 무시를 했다고 하자. 이 순간 사랑과 선을 행하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일까? 사랑이란 결합하고 상대방이 목적이 되는 것이라고 했으니 내 창피함이나 모멸감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그러기에 상사의 말을 정중하게 받고 요구가 무엇인지 찾고 내가 일을 잘못해서 화가 나게 한 것에 미안함을 표시하면서 상사의 원함을 찾는다. 그리고는 여유 있고 빠르게 행동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사랑과 선을 목적으로 하는 것을 최상의 목적으로 하면 상사가 온갖 귀찮고 성가신 일을 시킨다고 해도 힘들지 않게 이겨낼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세월을 보내다 보면 자연스럽게 실력이 키워지고 힘이 생기면서 자신의 원함을 이루게 되고 높은 직책에 올라 더 큰 사랑과 선을 행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먼저 사람이 있어야 한다. 사람이 없으면 자신의 그 어떤 소원도 이룰 수 없기 때문이다. 돈이 필요한 사람들도 처음에는 돈을 벌어볼 목적으로 모이지만 그 조직에 사랑이 가득하고 진실하고 선한 것이 있을 때 오랫동안 결합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결합할 때 서로의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다. 보통 돈은 아래로부터 위로 올라가지만 정신은 위에서 아래로 내려간다. 즉 사람들이 많이 생겨야 아래에서 위로가면서 돈이 생기고, 위에 있는 사람들이 아래에 있는 사람들을 존중하고 고마워하고 힘을 줄 때 사람들은 계속해서 모여들고 일하게 된다는 것이다. 2017년 1월부터 나는 서울 강남으로 두 회사의 그룹을 키우기 위해 매주 강의하러 간다. 몇 년 전 강의는 강사료를 받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목적이 달라졌다. 돈 버는 것이 목표인 사업자들의 마음속에 사랑과 선을 목적으로 하도록 하는 것에 있다. 요즘은 사람들을 모으려고 해도 모을 수가 없다. 돈을 준다고 해도 모이지 않는다. 더군다나 돈을 목표로 하고 사람들을 이용하려는 이기적인 마음으로는 사람이 모여질 수 없는 것이다. 내 원함은 그 사람들의 원함을 이루어주는 것이며 그들 속에 사랑과 선을 목적으로 하는 마음을 갖게 하는 것이다. 이럴 때 돈은 저절로 따라오게 될 것이다. 그 일을 내가 시작하려고 하는 것이다. 이 일을 아주 오랫동안 하는 것이 내 기도제목이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과 선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원함의 원천이다. 이제는 이 원천을 가슴에 품고 상대방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내가 먼저 사랑과 선을 행하는 자로 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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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01-05
  • [은혜의 말씀] 일천번제 일천감사 (열왕기상 3장 3~15절)
    왕의 지혜에 대해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사람이 살아갈 때 가장 필요, 충분, 완전한 것은 지혜입니다. 역사상 오늘 성경말씀에 보면 “네 앞에도 이런 왕이 없었고 네 뒤에도 이런 왕이 없을 것이다.” 그런 전무후무한 지혜의 왕이 솔로몬입니다. 솔로몬은 왜 그렇게 지혜를 얻어서 전무후무한 왕이 되었을까요? 그것은 솔로몬은 예배에 성공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예배라는 것은 주님과 만나는 것이고, 주님을 섬기는 것이고, 주님을 높이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본문은 꿈 이야기입니다. 마지막 15절에 보면 ‘솔로몬이 깨어보니 꿈이더라’.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에게 복을 주시기 전에 꿈을 먼저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응답을 주시기 전에 소원을 주시고 소원의 항구로 확 밀어 붙이십니다. 기도의 마음을 주시고 응답을 주시는 겁니다. 바라봄의 법칙이라고 하나님께서는 그 꿈을 주시고, 그 꿈을 바라보며 기도하면,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기 때문에 5년, 10년 시간이 지나면 실제상황이 되어버리는 겁니다. 여기 솔로몬에게 하나님은 꿈을 주십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무엇을 줄꼬, 너는 구하라” 하나님은 항상 우리에게 물어보시는 하나님, 질문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물어보고 “내가 너희에게 무엇을 주기를 원하느냐?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 이렇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나의 필요를 아시고 내 소원을 들으시고 맞춤형 복을 주십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복을 주시기 전에 기도할 마음을 주시고, 기도할 때에 소원대로, 말한 대로, 꿈꾼 대로 주십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응답을 하실 때 “말한 대로 하겠다. 네가 꿈꾼 대로 주겠다”고 하십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에 기도제목을 자꾸 추려야합니다. 중언부언하지 말고 기도의 제목을 다이어트해서 기도제목을 잘 간추려서 “주님! 제가 한 가지 소원이 있습니다”라고 정확하게 말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성공이 아니고 성실입니다. 적은 일에 충성, 성실할 때 많은 것을 맡기십니다. 하나님께 쓰임 받은 사람은 ‘착충지부’ 착하고 충성되고 지혜롭고 부지런한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할 때 에덴동산에서 추방당한 아담과 같이 되지 말고 장자권을 빼앗긴 에서와 같이 되지 말고 촛대를 옮겨버린, 하나님의 영광을 거두어 가신 엘리 집안과 같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솔로몬은 자녀가 있는 어른인데도 불구하고 겸손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왕이 되었는데도 “저는 작은 어린애입니다. 저는 철도 없습니다. 백성들은 큰 백성이고 나는 조그만 아이이니 하나님, 이 백성들을 재판할 수 있는 듣는 마음을 종에게 주사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주시옵소서” 이렇게 구했습니다. 얼마나 지혜롭습니까? 복 있는 사람은 그 출입을 아는 지혜가 있는 겁니다. 지키면 쓰임 받고 행하면 복을 받는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율법을 주시고 이 율법의 말씀을, 계명을, 성경을 지키면 쓰임 받고 행하면 복을 받는다고 하셨습니다. 아무리 어렵고 힘들어도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기 때문에 어떤 일이 있어도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감사함으로 받으면 하나님의 평강이 우리 마음과 생각을 지켜주십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항상 좋은 꿈을 꾸어야 합니다. 나쁜 것은 말도 하지 말고 생각도 하지 말고 항상 축복하고 은혜를 흘려보내야 합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는 생전에 없던 지진들이 일어나고 영적인, 정치적인, 군사적인, 경제적인 쓰나미가 몰려오는 시대가 되어버렸습니다. 이시대야 말로 하나님 앞에서 중심을 잡고 지혜롭게 살아가야 합니다. 잔머리를 굴리는 것이 아니고 지혜가 부족하면 후히 주시고 꾸지람도 하지 않으시는 하나님께 구하고 하나님께서 물으실 때 지혜로운 대답을 해야 합니다. 일천기도, 일천찬양, 일천감사를 한 솔로몬처럼 말입니다. 솔로몬이 역사상 전무후무한 지혜로운 왕이 된 이유를 기억하고 우리의 집안이 친정처럼 편안하고 기적의 현장이 되고 은혜의 동산이 되며 가정의 살림살이 모녀관계, 부녀관계가 모두 감사와 찬송과 은혜와 진리가 넘치는 그런 가정을 이루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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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01-05
  • [가정칼럼] 새해, 아내와 함께한 일상
    # 아내가 말한다. “여보, 나 TV에서 서서히 벗어나기로 했어” “오랜만에 철든 소리 하네” “한꺼번에는 어렵고 서서히 끊어야겠어. 중독이야!” 그런 아내를 위해 기도한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여! 아내가 TV를 들여다본 시간보다 나와 가족들의 얼굴을 쳐다본 시간이 더 많음을 주목하게 해 주소서. 아내가 <지붕 뚫고 하이 킥>을 보다가 남편을 발로 찬 것보다 잠자리에서 나를 발로 걷어찬 것이 많음을 기억하며 진심으로 그녀를 용서하게 하소서. 장동건에게 눈길을 주고 ‘헤헤’거린 것 보다 잠자리에서 나를 향해 몸을 눕히고 입을 더 크게 벌려 침까지 흘렸던 것을 기억하며 아내를 긍휼히 여길 마음을 주소서. 아멘” 나의 이런 기도는 순전히 키에르케고르가 드렸던 기도를 따라 기도하다 얻은 영감에 기초하고 있음을 자백한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여! 우리가 지은 죄가 아닌, 우리 자신을 붙들어 주소서. 그리하여 주님에 대한 생각이 우리 영혼을 깨울 때 우리가 어떤 죄를 저질렀는지가 아니라 주님께서 어떤 죄를 용서해주셨는지 깨닫게 하소서. 우리가 어떻게 길을 잃고 헤맸는지가 아니라 주님께서 어떻게 우리를 구원해주셨는지 깨닫게 하소서!” 주여. 남의 기도를 빌려 패러디한 죄를 용서하소서. #. 아내가 묻는다. “여보, 새해의 화두는 뭐예요?” 온통 연구소의 프로젝트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던 내가 대뜸 답했다. “자연장이지 뭐” “그런 거 말고 왜…‘소통’이니 ‘선진화’니 뭐 그런 거 말이예요” “시사적인 것은 왜 물어?” “왜 알면 안돼요?” (그렇다. 알아야 한다.) “알아볼 것 없이 우리가 만들지 뭐, ‘감사’는 어때? 시인(詩人) 김현승님은 이렇게 노래했다. <감사하는 마음> 그것은 곧 아는 마음이다. 내가 누구인지를 그리고 주인이 누구인지를 깊이 아는 마음이다. #. “여보, 방송하고 올게” “응 잘 갔다 와요” 이른 아침부터 설쳐대는 남편에 대한 배웅은 침대에서 약식으로 끝난다. 이들 녀석은 소파에 누워 잠들어 있다. 아침 방송을 꼬박꼬박 챙겨 들어주는 이는 어머니 밖에 없다. 그리고 꼭 소감을 말씀해 주신다. “우리 아들 방송, 잘 들었다. 목소리도 좋고, 재미있더라” (그게 어째 내 방송인가? SBS 회장꺼지.) 나이 들어감면서 ‘덤덤’해지는 아내와 자식들과는 사뭇 다르다. 아내는 무슨 방송인지도 모른다. ‘또 방송’인가 보다 하고 끝이다. 집으로 돌아와서 늦잠을 즐긴 아내와 아들을 깨워 밥을 사 먹이러 나간다. (아침 밥상을 건너뛰는 것을 그렇게 행복해 하니…)최고의 서비스다. 그런데도 감동이 없다. ‘아침 잘 먹었네’ 의례적인 인사일 뿐 아들 녀석은 말한다. ‘이 집 잘하네요’ 갑자기 어머니에게 달려가고 싶다. 어머니는 그러실 거다. “돈 드는데 어딜 가냐? 김치하고 집에서 밥먹자” 그래, 서운해 말자. 그래서 ‘어머니’다. 난 소원한다. 내가 다시 태어난다면 꼭 여자로 태어나 내 어머니의 어머니가 한 번 되게 해 달라고, 그러면 그 빚을 갚을 수 있을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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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01-05
  • [서임중 칼럼] 2017년의 촛불을 켠다
    우리는 2017년 한해를 시작한다. 멈추어 돌아보면 지난해처럼 카오스현상이 있었던가를 생각해 본다. 그래서 언론은 건국이래 어쩌면 가장 암울한 한해라고 표현했는지도 모른다. 한 사람의 가정주부로 인한 국정농단은 대한민국의 기초부터 뒤흔든 혼돈의 역사를 초래했다. 2016년을 마지막 보내는 날 저녁에는 광화문거리에 10회째 촛불집회가 열렸고, 전국에서 ‘박근혜 대통령 탄핵과 하야’를 외치는 촛불집회의 기조가 ‘송박영신(送朴迎新), 즉 박대통령을 보내고 새해를 맞이하자’로 했는데 이 얼마나 아픈 외침인가? 이에 맞서서 대항하는 보수단체들의 촛불집회 기조는 ‘송화영태'(送火迎太), 즉 촛불을 보내버리고 태극기를 맞이하자는 외침이었다. 모두가 더 나은 대한민국을 지향하는 몸부림이지만 극과 극의 외침의 내용을 지켜보면서 새삼 촛불의 의미를 되새겨 보았다. 광화문의 촛불이 물결 되는 것을 보면서 나는 촛불의 본래 의미를 느끼지 못하고 사람들의 마음이 서릿발처럼 날카롭다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언론은 분노와 슬픔의 표출이라고 보도했나 싶었다. 올해의 대한민국 송구영신은 그렇게 아픔으로 보내고 맞이했다. 독일이 낳은 세기적 시인 괴테는 “첫 단추를 잘못 끼우면 마지막 단추를 낄 구멍이 없다”는 명언을 남겼다. 이 말의 의미는 첫째는 시작이 중요하다는 것이며, 둘째는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다는 것이다. 인생 만사 시작처럼 중요한 것은 없다. 올바른 계획을 세우고 첫 발자국부터 잘 옮길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받은 365일의 축복된 날을 어떻게 기록할 것인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사람들에게 축복을 나누면서 행복한 한 해를 살까? 이 질문에 성경적인 대답은 아주 간단하다. 창조적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1:1)는 말씀은 창조주 하나님의 전부가 담겨 있는 하나님 마음의 표현이다. 그것은 ‘창조’라는 말에는 아주 중요한 메시지가 있기 때문이다. 히브리어로 창조는 ‘바라’다. 이 단어는 문자적으로는 무에서 유의 개념이지만 구체적 개념으로는 ‘하나님이 존재케 하셨다, 하나님이 번성케 하셨다, 하나님이 정돈케 하셨다’는 것이다. 이 하나님의 창조의 섭리와 이치를 깨닫게 될 때 비로소 사람답게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바울이 이것을 깨달았을 때 삶의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고 고백할 수 있었고 욥이 이것을 깨달았을 때 주신분도 거두시는 분도 하나님이라고 고백하면서 모든 것을 감사함으로 수용할 수 있었다. ‘향나무는 자기 몸을 도끼로 찍을 때 향을 발한다.’ ‘양초는 자기 몸을 녹일 때 주위를 밝힌다.’ 이는 자기희생을 말할 때 자주 상용하는 말이다. 촛불은 전통적으로 의례와 종교적 의식에서 사용되면서 세속을 초월한 숭고한 불빛이라는 상징성을 갖고 있다. 프랑스 철학자인 ‘가스통 바슐라르’(Gaston Bachelard)의 촛불의 미학을 통해 촛불은 시적 정서와 몽상, 내면적인 명상적 아름다움을 불러일으키는 이미지가 되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촛불은 열망을 대변하는 불꽃이 되면서 사회적 통합과 정의를 향한 외침을 대변하는 의미의 기능을 하게 되었다. 촛불이 주는 메시지는 스스로의 몸을 태우면서 주위를 밝히는 것, 즉 누군가 무엇인가의 시중드는 것을 필요로 하지 않는 지고한 자기희생이다. 촛불은 한자로 ‘촉화(燭火)'라고 하며 영어로는 candle 혹은 candlelight 라고 한다. 아름다운 촛불을 ‘난촉(蘭燭)'이라고 하고, 촛불의 그림자를 ‘촉영(燭影)' 이라고 한다. 결혼식때 켜는 촛불을 ‘화촉(華燭)'이라 하여 결혼을 ‘화촉을 밝힌다'라고도 한다. 우리의 전통적인 제사를 지낼 때도 촛불을 켜 놓았고, 법당에도 항상 촛불이 꺼지지 않을 뿐 아니라 해외여행을 할 때 성당에 들어서면 어김없이 촛불이 켜져 있음을 볼 수 있다. 생일을 축하할 때도, 연회장에서도, 결혼식장에서도 어김없이 켜는 촛불은 중세 독일에서는 ‘생명의 등불’을 의미했다. 광화문 거리에서 촛불집회를 바라보면서 나는 촛불의 의미를 다시 생각했다. 대통령의 즉각 하야와 탄핵을 외치는 소리와, 탄핵은 정치 쿠데타라고 외치는, 소위 보수와 진보의 외치는 소리를 들으면서 남과 북의 찢겨진 아픔보다 더 아픈 통증을 느꼈다. 모두가 더 나은 대한민국을 지향하는 몸부림이지만 극과 극의 외침의 내용을 지켜보면서 거기에 합류하지 못하고 길거리에서 그 양측 장면을 보면서 괜스레 양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이 얼음처럼 차갑게 느껴졌다. 정녕 촛불집회에 촛불의 의미를 알고 촛불을 든 사람은 얼마나 될까? 촛불의 주체처럼 떳떳하게 살 수 있을까? 촛불의 대상처럼 부패하게 살지 않을 각오가 되어 있는가? 그러기에 2017년은 분노와 슬픔의 촛불을 켜는 것이 아니라 평화와 사랑의 촛불을 켜고 우리의 다음세대에 번영과 평화, 생명과 감동을 경험하게 하는 한해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간절한 소망이 입술의 기도가 되었다. 그것은 자아성찰(自我省察)을 통해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설 줄 아는 지혜로, 네가 있기에 내가 있다는 보편적 공존의 의미를 깨달아, 내가 먼저 내려놓고 비우고 낮아지고 섬길 때 그 시작이 되는 것이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이며, Good News 곧 복음이며, 진정한 평화이며 생명이며 교회의 본질이다. 우리 모두 그렇게 2017년의 촛불을 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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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01-05
  • [성서연구] 보고 들음을 넘어서(이사야 11장 1-5절)
    한 잡지에서 읽은 글입니다. 한 사람이 버스에 타서 뒷자리에 앉았습니다. 앉아서 보니 앞쪽에 머리칼이 어깨를 덮은 여인이 앉아 있는 게 보였습니다. 머릿결도 아름답고 자태가 너무 고왔습니다. 드물 게 보는 미녀로 여겨졌습니다. 그런데 잠시 후 버스가 정류장에 멈춰 서고 여인이 내리기 위해 몸을 돌렸을 때, 그는 깜짝 놀랐습니다. 알고 보니 그녀는 거의 앞을 보지 못하는 시각장애인이었습니다. 지팡이에 의지하여 더듬거리며 버스에서 내리는 것이었습니다. 뒷모습의 자태가 그토록 곱던 여인이 그렇게 힘든 장애를 가지고 있는 사람일 줄 누가 짐작을 했겠습니까? 이처럼 우리가 보는 것은 정확하지 않습니다. 얇은 종이 한 장만 눈앞을 가려도 종이 너머를 볼 수 없습니다. 아주 가까이 있어도, 아주 멀리 있어도 볼 수 없는 게 우리 눈입니다. 너무 작아도, 지구처럼 너무 커도 볼 수 없습니다. 그게 우리 한계입니다. 귀로 듣는 것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아주 작아도 못 듣습니다. 너무 커도 못 듣습니다. 우리는 깊은 산골짝에서 쉬면서 <역시 시골이 좋아. 쥐 죽은 듯 고요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조용하다고 말하는 그 순간 풀벌레들이 우리가 듣지 못하는 작은 소리를 내고 있고, 지구는 어마어마한 굉음을 내면서 공전과 자전을 하는 중입니다. 너무 작거나 너무 커서 듣지 못할 뿐입니다. 저도 새벽기도 시간에 앞에 앉아 있노라면 목사님들이 말씀하는 <찬송가 ***장 부르겠습니다!>라는 말이 정확히 들리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찾아보면 가운데 숫자가 틀리거나 끝 숫자가 다릅니다. 구석 자리 특유의 공명 때문이겠지요. 이처럼 분명히 자신의 귀로 들었지만 다 정확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보는 것과 듣는 것에 근거하여 단정적으로 말하지 말아야 합니다. 본문은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주신 메시아 예언들 중 하나입니다. 메시아께서 이새의 줄기에서 나실 것이라는 예고와 함께 메시아께서 하실 일들을 말씀합니다. 물론 메시아는 예수님을 가리키고, 이 말씀을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어떻게 하실지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3절 중간에 보면 놀라운 말씀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의 눈에 보이는 대로 심판하지 아니하며 그의 귀에 들리는 대로 판단하지 아니하며........>라는 부분입니다. 얼마나 멋집니까? 예수님께서는 보이는 대로 심판하지 않고, 들리는 대로 판단하지 않으신다고 했습니다. 그 분은 보이지 않는 뒷면을 보시는 분이시며, 들리지 않는 침묵의 소리를 듣는 분입니다. 그러기에 그 분은 눈앞에 보이는 대중의 숫자나 그들이 외쳐대는 소음에 휩쓸리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보이지도 않고 들리지도 않지만, 진실을 따라 판단하셨습니다. 요즘 우리나라는 정말 시끄럽습니다. 온갖 말들이 난무합니다. 정치인은 정치인대로, 언론은 언론대로, 국민들은 국민들대로 많은 말들을 쏟아놓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말들 대부분은 흙탕물처럼 여겨지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그 중 진실은 얼마나 될까요? 이럴 때 우리는 들리는 말대로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보이는 것만으로 판단하면 안 됩니다. 언론이 보도하고 사람들이 말한다고 해서 다 들으면 안 됩니다. 보는 것을 다 믿어서는 안 됩니다. 보이는 것과 들리는 것의 이면을 보는 눈과 듣는 귀를 가져야 합니다. 2017년에는 모든 것을 좀 더 신중하고 조용하게 천천히 판단하길 원합니다. 부디 진실을 보는 눈과 침묵 안의 외침을 듣는 귀를 가지길 원합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다른 이들을 억울하게 하지 않을 것이며, 진리의 바른 길을 걷게 될 것입니다. 주님, 저희 마음의 눈과 귀를 열어 진실을 보고 듣게 하옵소서! 2017년을 바르게 살고자 하는 그리스도인의 기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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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0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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