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8(목)

오피니언
Home >  오피니언  >  칼럼

실시간 칼럼 기사

  • [성서연구] 거룩한 3D 업종
    흔히 <3D 업종>이란 말이 있습니다. 인터넷의 설명을 참조하면 3D란 어렵고(Difficult), 더럽고(Dirty), 위험한(Dangerous)으로서 사람들이 기피하는 업종을 의미한다고 되어있습니다. EBS의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인 극한직업이 바로 이 3D 업종을 다루는 프로그램이지요. 교회에서의 3D 업종은 무엇일까요? 교회 안의 여러 봉사 중에도 사람들이 회피하는 일이 있을 것입니다. 새벽의 주차 봉사, 주방 봉사, 청소 봉사 등이 여기 해당할 것입니다. 요즘엔 전도사와 목사 직분이 3D 업종처럼 여겨지는 것 같습니다. 우선 신학대학교 입학생이 급감하고 있습니다. 모 교단은 신학대학원 정원이 100명인데, 50명만 입학했고, 그중에는 안수를 받지 못하는 여성이 20명이라고 합니다. 이대로라면 2030년에는 교회수보다 목회자 수가 적어 목회자가 없는 교회가 출현할 가능성도 있다고 합니다. 또 신학교에 다니는 이들 중에는 교회에서 교사나 교육전도사 사역을 하지 않는 이가 많다고 합니다. 이유는 아르바이트가 더 소득이 많고, 교회학교 부장이나 교사들의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최근에는 제게 배운 사람이 목회를 중단하고 다른 일을 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교회에서 성도들에게 시달리기 싫어서입니다. 정말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목회가 쉽지 않다는 것은 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사명까지 저버린 채로 편하려고 하니, 정말 걱정입니다. 이렇게 보면 한국교회의 목회자는 3D 업종인 셈입니다. 걱정은 이것만이 아닙니다. 최근 들어 교회마다 항존 직분을 맡으려는 이들이 줄어들고 있습니다. 이러다가는 장로, 안수집사, 권사를 맡아 달라고 따라 다녀야 할 판입니다. 이 모두가 편하게 믿으려는 생각이지요. 힘든 것을 피하고 편하게 살려는 마음으로 결혼도 하지 않고, 자녀도 낳지 않으려는 우리 사회의 우려되는 경향과 일맥상통합니다. 갈수록 사람들은 게을러지고, 편안하려고만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보람 있는 삶의 열매는 힘든 일을 할 때 얻어집니다. 오히려 힘든 일을 하는 사람이 있기에 공동체가 유지됩니다. 세상에서 가장 힘든 3D 업종 중 하나는 <엄마> 직(?)이라고 생각합니다. 엄마는 근무 시간이 정해진 것도 아니고, 보수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도 몇 달, 몇 년만 하면 끝나는 것도 아닙니다. 평생 해야 합니다. 자녀를 결혼시킨 후에도 마치 애프터 서비스를 하듯이, 자녀의 삶을 돌보고, 손주를 봐 주기도 합니다. 그러면서도 그다지 대접받지도 못하는 현실입니다. 그래도 이 땅의 무수한 엄마들이 늙은 어머니가 되시기까지 최선을 다하셨기에 우리가 존재하고, 가정이 유지되고, 사회가 이루어져 왔습니다. 세상에서 최악의 3D 업종은 <메시아 직>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에게 이 직분을 맡기셔서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메시아 직은 세상에서 가장 어렵고, 가장 추하고, 가장 위험한 직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비난받으셨고, 미움 당하셨으며, 마지막엔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3D 업종인 메시아 직을 감당하신 덕에 우리가 구원을 받았습니다. 하루는 고 이중표 목사님께서 교회 계단을 내려가시는데, 청소를 맡은 여집사님이 계단에 앉아 목사님이 뒤에서 듣는 줄도 모른 채 팔자타령을 하고 있었습니다. 목사님께서는 집사님을 위로하며 말씀하셨습니다. <집사님, 계단 청소는 천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들을 위한 섬김이요, 이 계단으로 예수님이 오르내리신다고 생각하면 영광스러운 일이지요. 집사님은 귀한 일을 맡으셨어요> 그 후 이분은 생각을 바꾸어 기쁨으로 하셨다고 합니다. 본문 2절은 이렇습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십자가를 참고 견디며 끝까지 사명을 다합시다. 그렇게 할 때 진정한 주님의 사람이 될 것입니다.
    • 오피니언
    • 칼럼
    • 성서연구
    2023-03-06
  • [시사칼럼] 흐르는 강물처럼
    결혼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아내를 데리고 철새도래지로 유명했던 을숙도를 방문한 적이 있었습니다. 차도 없을 때여서 택시를 타고 갔는데 도착해보니 참새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아 아내가 무척 실망하는 바람에 난감하기 이를 데가 없었습니다. 아마도 그 원인이 되었을 낙동강 하구언 수문을 작년 이맘 때 35년 만에 상시 개방하기로 했고, 이제 일 년의 시간이 흘러 생태보고서가 나왔습니다. 한국수자원공사 낙동강유역본부 부산권지사가 22일 공개한 지난 1년간 생태 모니터링 결과를 보면 일단 하굿둑 상류의 회유(回遊)성 어류 분포 범위가 확대되었는데, 그 중에서도 연어는 무려 70km 이상 강을 거슬러 올라가 창녕함안보 하류에서 발견되었다 합니다(부산일보 2. 22). 어찌 물고기뿐이겠습니까? 막혔던 강물이 바다를 만나고 바다는 잠시라도 강물을 거슬러 여행할 수 있게 되었으니 이 둘은 또 얼마나 기쁘고 감격스럽겠습니까? 이제 신혼부부가 그토록 찾아 헤맸던 철새뿐만 아니라 어느 순간부터 사라져버린 재첩과 장어니 농어가 돌아오고 생태계가 다 회복되길 바라는 마음 간절합니다. 물은 참으로 신비한 피조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기야 창조주께서 만드신 것들 중에 경이롭지 않는 존재가 하나라도 있겠습니까마는, 물은 그 중에서도 특별하고 특별합니다. 그 특별함을 눈치 챈 사람들이 일찍부터 물을 논했습니다. 고대 그리스의 탈레스(Thales)가 물을 만물의 근원이라 주장하면서 서양철학이 시작되었습니다. 노자(老子)의 도덕경에도 바로 이 ‘물’을 묘사하는 유명한 문구가 있습니다. ‘상선약수’입니다. “가장 좋은 것은 물과 같다. 물은 온갖 것을 이롭게 하면서도 다투지 않고, 모든 사람이 싫어하는 낮은 곳에 머문다. 그러므로 도에 가깝다. 살 때는 물처럼 땅을 좋게 하고, 마음을 쓸 때는 물처럼 그윽함을 좋게 하고, 사람을 사귈 때는 물처럼 어짊을 좋게 하고, 말할 때는 물처럼 믿음을 좋게 하고, 다스릴 때는 물처럼 바르게 하고, 일할 때는 물처럼 능하게 하고, 움직일 때는 물처럼 때를 좋게 하라. 그저 오로지 다투지 아니하니 허물이 없다(上善若水 水善利萬物而不爭 處衆人之所惡 故幾於道 居善地 心善淵 與善仁 言善信 正善治 事善能 動善時 夫唯不爭 故無尤).” 하지만 이렇게 좋은 물이라도 고이면 썩기 마련이고 막히면 악이 되는 이치를 우리는 배웠습니다. “흐르는 강물처럼”이라는 영화를 보셨나요? 1992년 개봉되어 명배우 브래드 피트의 젊은 시절을 볼 수 있는 작품이기도 합니다만, 지금까지도 이 영화가 널리 회자되는 이유는 낚시를 소재로 찍은 그 아름다운 강물과 자연 그리고 그 안에 녹아있는 삶의 의미 때문입니다. 극중 아버지 맥클레인은 목사입니다. 하지만 두 아들 노만과 폴은 개성도 다르고 인생의 여정도 달라집니다. 안정적인 큰 아들과 달리 도전과 모험을 좋아하던 폴은 잠시 막혀버린 물처럼 방황하다가 결국 비참한 죽음에 이르고 맙니다. 아들 장례식에서 아버지 목사님의 말씀이 보는 이들의 가슴을 먹먹하게 하지요. “사랑하는 이가 곤경에 처한 순간, 도우려 하나 무엇을 해야 할지 알지 못하고, 때로는 우리가 주려고 하는 것을 거절당하기도 합니다. 이해하기 어려운 사람을 그대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리고 사랑해야 합니다.” 쓸쓸함과 그리움 그리고 그 모든 기억들을 하나로 합쳐서 흐르는 강물처럼 말입니다. 예수님은 물의 메시지를 두 차례나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한 번은 사마리아 우물 가 여인을 통해서인데,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다시 목마르지 아니하리라’는 말씀이었고, 또 한 번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나를 믿는 자는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주님이 약속하신 물은 타는 목마름을 잠시 해갈하는 그런 정도의 물이 아니었습니다. 주님이 약속하신 물은 변질되거나 부패하는 그런 종류의 물이 아니었습니다. 그 물은 주님으로부터 나와서 결코 고이거나 막히는 법 없이 그를 믿는 자를 뚫고서 흘러내려, 언제나 땅을 좋게 하고 더러움을 씻어 내리고 모든 것을 이롭게 하지만 결코 다투지 아니하고 교만하지 아니하며 언제나 낮은 곳으로 흐르는 겸손의 물이요 생명의 물이기 때문입니다. 살아가면서 수많은 존재들이 명멸합니다. 우리를 웃기고 울리는 일들이 나고 사라집니다. 하지만 우리의 심령이 흐르는 강물과 같다면, 모든 것은 결국 그 안에 합쳐져서 하나가 되어 흘러가게 될 것입니다. 어쩌면 막혀버렸을지도 모르는 우리 안의 물줄기 혹은 사람들 사이의 수로가 주 안에서 시원하게 뚫리는 은혜의 역사가 있기를 바랍니다.
    • 오피니언
    • 칼럼
    • 시사칼럼
    2023-03-06
  • [은혜의말씀] 광야에서 배우는 교훈(신 8:2-3)
    광야는 나지막한 언덕들이 끝없이 펼쳐진 ‘빈들’입니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고 참 조용한 곳입니다. 가끔 바람 소리, 새 소리 들이 간간이 들릴 뿐입니다. 하나님은 이 광야에 기가 막힌, 축복의 비밀들을 숨겨놓으셨습니다. 광야는 히브리어로 [미드바르]라고 하는데, 미(어떤 장소, 곳), 다바르(말씀)의 합성어입니다. 그러니까 광야는 ‘말씀을 듣는 곳, 하나님과 마주 보고 이야기 하는 곳’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사실 오늘 우리는 너무나 바쁜 일상을 보내고 있습니다. 너무 바빠서 기도할 시간이 없습니다. 말씀을 들을 시간이 없습니다. 그런데 광야는 하던 일을 멈추고 조용한 빈들에서, 하나님과 홀로 독대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은혜의 장소’입니다.(신 8:16) 오늘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무엇 때문에 광야 길로 그들을 인도하셨는지, 그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겸손함으로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믿음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2절) 40년이라는 짧지 않은 시간, 광야의 삶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의 생각과 자신의 선택을 내려놓고,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만을 붙들게 되는 ‘훈련의 시간’이었다는 것입니다. 내 주장과 내 생각은 내려놓음으로 겸손하게 되고, 말씀을 온전히 따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화되는 축복이, 이 광야를 통해 일어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나의 옛 자아는 부서지고, 새로운 나를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저와 여러분이 꼭 붙들어야 할 한 가지가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대한 전적인 신뢰 입니다. 광야 길을 걷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스스로 들어간 것도 아닙니다. 광야는 하나님께서 걷게 하시는 길입니다. 그러면, 내가 지금 광야를 걷고 있다면,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향한 특별한 뜻이 있다는 것입니다. 뭐죠? 하나님만 바라보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너무나 쓸데없는 것에 관심이 많습니다. 너무나 세상적인 것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하지만 광야에서는 하나님만 바라볼 수밖에 없습니다. 광야는 우리를 고독하게 함으로 하나님과의 관계에 집중하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광야를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가득한 은혜의 장소로 고백하게 되는 축복이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 진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먹는 것임을 알고 말씀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3절) 광야는 ‘말씀을 듣는 곳, 하나님과만 마주 보고 이야기 하는 곳’이라고 했습니다. 광야에 서면, 우리 삶에 무엇이 가장 중요한지 깨닫게 됩니다. 우선순위가 분명해 집니다. 우리는 떡을 먹야 사는 줄 압니다. 돈이 있어야 사는 줄 압니다. 힘이 있어야 사는 줄 압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먹는 것입니다. 여러분, 잘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께서 40년 동안 광야를 걷게 하신 것이, 우리의 마음을 알고 싶으셔서 그러셨겠습니까? 아닙니다.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누구인지,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 알게 하시려고 광야를 걷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말씀을 먹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존재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복이 아니면 살 수 없는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의 사람은 말하는 것보다 듣는 것에 익숙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광야의 조용한 시간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시간입니다.(시 46:10) 그러므로, 이 광야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버리신 장소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만나는 장소였고, 하나님을 만나는 지성소와 같은 장소였다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께서도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셨고, 말씀으로 이기셨습니다.(마 4:1-4)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믿음의 사람은 말씀이 양식입니다. 말씀으로 살아 갑니다. 저는 모든 성도님들이, 광야의 고요함을 통해 오직 하나님께 집중하는 광야의 축복을 누리시고, 광야와 같은 세상에 말씀의 생명의 물을 흘려 보내는 축복의 통로가 되시길 축복합니다.
    • 오피니언
    • 칼럼
    • 은혜의 말씀
    2023-03-06
  • [교회음악칼럼] 찬송(예배)하며 사는 사람들 3
    처음 기독신문에 글을 올릴 때가 작년 사순절 기간이었는데 한해가 흘러 다시 사순절 기간을 맞았다. 시간은 참으로 무정하게 지나간다. 매정하게 느껴질 정도다. 매년 맞이하면서도 늘 올해는 좀 더 의미가 있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진다. 주께서 이 땅에 오셔서 고난 받으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우리의 죄악을 담당하시고 구원을 이루신 참 의미를 곱씹으며 다시금 깊은 묵상의 시간을 가져보기를 원한다. 나를 전부라도 태워 님의 시린 손 녹여 줄 따스한 사랑이 되고 싶었습니다. 그리움으로 충혈된 눈 파랗게 비비며 님의 추운 겨울을 지켜 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함박눈 펑펑 내리는 날, 님께서 걸어가실 가파른 길 위에 누워, 눈보다 더 하얀 사랑이 되고 싶었습니다. 언젠가 시카고에서 한국으로 오는 비행기 속에서 읽은 ‘연탄길’이라는 책머리에 걸려있었던 시이다. 그냥 읽으면 느껴지는 것이기에 부연하여 이야기하는 것이 오히려 이상할거 같다. 시어 그대로 마음에 담으면 그저 뭉클함이 가슴 저편으로부터 미어저 옴을 느낀다. 두 손 모아 기도하며 노래해 본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구원의 주로 오신 주의 뜻이 실천되는 사순절이자 올 한해가 되기를 말이다. 찬양대 연습을 하면서 가끔 하는 이야기인데 신앙적으로 우리는 크게 무엇인가 해야만 한다는 강박관념을 가지고 그래서 그것이 무거운 짐이 되고 때론 자격지심이 되어 자신을 괴롭게 할 때가 왕왕 있는 것 같다. 주변 가까이에서 또 자그마한 것에서부터 사랑을 실천하고, 진심으로 격려하고 나누기를 즐거워한다면 이보다 더 기쁘고, 행복하고, 감사한 일이 있을까? 우리의 공동체들이 이러한 마음들을 모으고 묶어서 주께 드린다면 이것이 진정한 예배요 찬양이지 않을까 생각된다. 그런 시간들이기를 소망해 본다.
    • 오피니언
    • 칼럼
    2023-03-06
  • [목회자칼럼] 원하는 것 또는 필요한 것 what you want or need
    실제 광야에 서 본 적이 있는가? 광야에 가면 끝도 없이 펼쳐진 길, 사방을 둘러보아도 손에 잡힐 만한 것이 없다. 광야에서는 먹을거리도, 잠을 잘 곳도 찾지 못하고 생존이 막막할 때는 그저 하늘을 보며 도움을 구할 수밖에 없다. 과거에 내가 얼마나 많이 가졌는지, 예전에 내가 얼마나 화려하게 살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광야에서는 그저 생존을 위해 가장 필요한 것만 있으면 된다. 인생의 광야에 서 본 적이 있는가? 인생의 광야에 서면 끝도 없이 펼쳐진 삶의 막막함, 주위를 둘러봐도 도움을 받을 만한 것이 없다. 관계도 막히고 물질도 막히고 심지어 내일의 희망조차 막혀버린 인생의 광야에서 할 수 있는 거라곤 그저 하늘을 보며 지금 당장 생존을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을 구하는 일 밖에 없다. 실제 광야든, 인생의 광야든 광야라는 막막함 속에 들어서면 구하는 것은 오직 단 하나다. ‘살기 위해 필요한 것’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것만 생각하다보면 지금까지 내가 얼마나 많은 것들을 누리고 살았는지, 구하고 살았는지, 원하고 살았는지 깨닫게 된다. 심지어 내가 원하는 것을 갖기 위해 하나님까지 이용한다는 사실도 광야에 들어서면 알게 된다. 그렇기에 광야에 서면 예전에는 보이지 않는 것들이 새롭게 보이는 은혜가 임한다. 지난 주 금요 기도회에서 부르짖었던 기도가 사실은 나의 필요가 아닌 나의 원함에서 오는 사치라는 것, 내가 눈물을 흘리며 구했던 것이 나의 편함과 나의 안위라는 사실이 광야에서는 보이게 된다. 이쯤 되면, 광야에 서있지 않더라도 고개를 갸웃거리며 내 모습을 돌아보게 된다. 지금 나는 어떤 생각에 물들며 살아가고 있는가? 지금 내가 발판으로 삼는 가치관들은 어떤 모양을 가지고 있는가? 아니 더 나아가 예수를 믿는다고 고백하면서 지극히 인본주의, 물질주의, 개인주의로 살아가는 나에게 벗어나는 길은 무엇일까? 첫째, 광야가 필요하다. 광야에 들어선다는 말은 다시 말하면 세상에 속한 일상에서 벗어남을 의미한다. 그런데 우리는 자발적으로 광야에 발을 들이기를 두려워하고, 무서워한다. 무엇보다 광야로 들어갈 필요를 느끼지도 않는다. 어쩌면 그렇기에 광야가 더 필요할 수도 있다. 현대 사회에서 할 수 없는 멈춤, 쉼, 깊은 생각, 변화를 위해서는 광야가 필요하다. 둘째, 다시 생각해야 한다. 예전에는 정답이라 생각한 것이 시간이 지나고 보면 오답일 수 있고, 그토록 열심히 한 일이 한 순간에 헛수고라 여겨질 때가 있다. 우리가 종종 범하는 어리석음 중 하나는 “지금, 내가 생각하는 게 맞다”라고 단정짓는 행동이다. “내 생각이 틀릴 수 있다”고 여기며 다시 생각하는 태도, 굳어지지 않고 살아가는 자세이다. 셋째, 새로운 일을 시작할 준비를 해야 한다. 변화는 필요, 결핍에서 만들어진다. 내가 생각하는 필요, 우리에게 없는 결핍이 무엇인지 발견이 변화의 시작점이 된다. 살아있는 생명이나 사회는 새 변화를 원한다. 특히 지금처럼 복잡한 사회는 단순함, 순결함을 원하기에 이 필요에 맞춰 새로운 일을 시작할 준비를 해야 한다. 넷째, 하늘의 뜻을 발견해야 한다. 이 땅에 발을 딛고 살아가는 우리가 여기에 함몰되면 마치 천국은 없는 듯, 이 세상이 영원한 듯 분별하지 못하고 살 수 있다. 이럴 때, 여기가 광야라고 생각하고 하늘을 쳐다보아야 한다. 진리를 향해 한 걸음 나아가며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사는 삶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하다. 이제 다시 우리는 세상 속에 광야에 서있다. 내버려두면 끊임없이 하고 싶은 대로 달려가는 ‘자기중심성’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세상 속에 광야에서 다시 물어야 한다. “나는 지금 무엇을 바라고 있는가?” “내가 추구하는 것은 필요한 것인가? 원하는 것인가?” 이 질문에 솔직히 답하는 것을 시작으로 3월, 봄을 향해 한걸음 나아가길 기대해본다.
    • 오피니언
    • 칼럼
    • 목회자칼럼
    2023-03-06
  • [이상규교수의 역사탐색] 마산의 기독교 지도자 이승규 장로
    마산문창교회(혹은 제일문창교회)는 마산지역 최초의 기독교회이자 호주장로교 선교부의 마산지역 거점교회였다. 한국장로교회의 첫 목사였던 한석진을 비롯하여 후에 부통령이 되는 함태영, 위대한 순교자 주기철, 고신의 지도자 한상동과 송상석, 이금도 목사 등이 시무했던 교회였다. 이 교회는 마산에서 사역했던 미국북장로교회의 시릴 로스(노세영)와 호주장로교회의 앤드류 아담스(손안로) 두 선교사에 의해 1901년과 1902년 시작된 교회가 1903년 3월 19일 통합되어 구마산(舊馬山)교회, 마산포교회, 마산교회, 그리고 상남동교회 등으로 불리다가 1919년 새로운 석조 예배당을 건축하면서 지역 이름을 따서 문창(文昌)교회로 불리게 된다. 물론 크고 작은 시련이 없지 않았으나 형식상 50년간 평화를 누리던 이 교회는 백리언 목사 부임 이후 내분이 일어나 1951년 결국 문창교회와 제일문창교회로 분리하게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런데 문창교회 설립초기에 주도적인 역할을 한 이가 이승규(李承奎, 1860-1922)라는 인물이었다. 그는 이병직과 김주은 아들로 1860년 서울에서 출생했다. 그런데 이들 가족이 천주교를 신봉한다하여 종중(宗中)에서 축출 당하게 되자 밤중에 서울을 떠나 경상도 지방으로 향해 순례길을 떠나 아무 연고도 없는 부산 동래에 정착했다. 이승규가 6살 때였다. 이곳에서 이승규는 김영유(金永柔)와 혼인하였고, 한약을 공부하여 한의사가 되었다. 근면했던 그는 명의라는 명성을 얻었고 상당한 재산도 모았다. 그가 불혹의 40살이 되었을 때, “이전까지는 나 자신을 위해 살며 재산을 모았지만 이제는 남을 위해 살며 남을 위해 재물을 써야겠다.”고 다짐하고 자신의 뜻을 펼칠 곳을 찾다가 부모를 모시고 경상남도 마산으로 이거하여 상남동 지역에 정착하게 된다. 바로 이곳에서 이승규는 커다란 변화를 겪게 된다. 그의 어머니 김주은(金主恩)은 호주 선교사 앤드류 아담스(손안로)를 통해 전도를 받고 신자가 되었고, 김주은의 인도로 아들 승규 또한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였다. 이 때부터 이승규는 호주 선교사 손안로를 도와 전도에 협력하여 마산지방 첫 교회인 마산포교회를 성호리에 설립하게 된다. 어떤 점에서 그를 문창교회 설립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 선교사와 더불어 마산포교회당에서 작은 독서숙(讀書塾)을 설립했는데 이것이 마산지방 첫 근대학교인 창신학교로 발전했다. 이승규는 교회를 위해 헌신적으로 일했고 자신의 재물을 교회를 위해 기꺼이 헌납하였다. 그의 아들이 노산 이은상(李殷相, 1903-1982)인데, 이은상은 젊은 날을 회고하면서, “구마산역에서 북마산역으로 뚫린 큰 길이 전부 우리집 마당이었다.”라고 말했을 만큼 이승규는 부유한 재력가였다. 그는 용하다는 한의사였고 지역 사회에서 존경을 받았고, 교회를 위해서도 기꺼이 헌신했다. 마산포교회를 설립하고 예배처소로 한옥을 구입할 때도 이승규가 감당했다. 그런데 마산포교회의 첫 장로로 피임된 이는 의외의 인물 최경호였다. 그는 1912년 3월 6일 대구 남문내교회에서 모인 제2회 경상도노회에서 문답을 받고 3월 17일 장로로 장립을 받았다. 그래서 마산포교회가 당회를 구성하게 된다. 손안로 목사가 당회장이 되었고 당회원은 손안로의 동료 선교사였던 왓슨(왕대선) 목사, 그리고 최경호 장로였다. 그로부터 약 2년 후인 1914년 1월 18일 이승규는 두 번째 장로가 된다. 제일문창교회 120년사를 쓰면서 나에게 한 가지 의문이 있었다. 어떻게 교회의 설립자라고 할 수 있고 교회의 기둥 같은 인물이었던 이승규가 첫 장로가 되지 못했을까? 당회록을 보면 처음으로 장로로 피택된 이는 생각지도 못한 ‘이경중’이라는 인물이었다. 교회기록을 보면 여러 인물들이 거명되기 마련인데 이경중은 처음 언급되는 인물이고 그 이후 교회기록에 다시 언급되지 않았다. 당회록 등 교회 기록에 단한 번 등장하는 이경중, 그가 어떻게 피택 장로가 되었을까? 그런데 그는 왜 장립되지 못했을까? 그는 왜 교회 기록에서 다시 언급되지 못했을까? 그렇다면 타지로 옮겨 간 것인가? 여러 가능성을 생각해 보았으나 분명한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러든 중 송상석 목사의 ‘법정소송과 종교재판’이라는 책을 읽던 중 ‘이경중’은 ‘이승규’의 별명이었다는 점을 확인하게 되었다. 대수롭지 않는 언급이 역사적 사실을 확인하는 단서가 된 것이다. 그렇다면 왜 문창교회 당회록에서 이승규라는 공식 이름을 기재하지 않고 일부의 사람만 알고 있던 이경중이라는 별명으로 기재했을까? 이승규는 아들을 불신혼인하게 하여 6개 월 간 책벌을 받았고 그 일로 장로 장립을 받지 못한 것이다. 영예롭지 못한 일이기에 당회록은 의도적으로 ‘이승규’라고 기록하지 않고 ‘이경중’이라는 별명을 기록한 것이다. 6개월간의 책벌기간이 경과한 후 손안로 선교사는 그의 해벌을 노회에 보고하였으나 노회원들은 “더 기다려주기를 가결하여” 장로 장립은 다시 미루어졌고, 최경호 보다 2년 후 장립을 받게 된 것이다. 당회 기록을 보면서 세 가지를 생각하게 되었다. 첫째, 당시 교회는 불신 결혼은 성도들이 피해야 할 중한 죄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둘째, 교회의 법은 지키면서도 교회는 치리 받은 사람도 보호해 주려는 애정어린 배려를 볼 수 있다. 셋째, 이승규는 치리에 복종하고 인내하였고 비록 후배 보다 늦게 임직을 받았으나 변함없는 마음으로 주님을 섬겼다는 사실이다. 그러기에 그는 존경과 신뢰를 받았고, 그의 믿음의 여정은 오랜 세월이 지났으나 아름다운 유산으로 남아 있다.
    • 오피니언
    • 칼럼
    • 이상규교수의 역사탐색
    2023-03-06
  • [서임중칼럼] 오늘 하루도 나는 살아 있다
    참으로 세월이 유수(流水)같다. 엊그제 송구영신예배를 드린 것 같은데 벌써 2월을 보내고 있으니 말이다. 올 겨울은 유난히도 매섭게 추운 것이 비단 날씨 때문만은 아니다. 정치권의 찬바람이 국민들 가슴을 더욱 시리게 했고 국제정세와 맞물려 국민을 위한다고 호언하던 사람들의 정책부재로 인한 난방비의 인상이 가히 상상을 초월하며 서민들의 버거운 삶은 고드름이 되었다. 매일처럼 들려오는 여의도 1번지의 그 잘난 분들의 언행은 우리의 마지막 남은 온기마저 앗아가는 올 겨울 한파에 혹한의 부채질을 더한다. 내 마음도 그랬다. 삼성병원 암병동을 출입하는 것이 3년째다. 그곳을 출입할 때에도 언제나처럼 입으로는 평행감축을 노래하지만 솔직히 내가 맞이하고 보내는 시간들은 참 시린 날들이다. 그럼에도 마음의 온기를 잃지 않는 것은 엎드림의 시간마다 주님의 말씀을 듣는 은총이 큰 까닭이리라. 그래서인가, 감사한 것은 3개월마다 출입하던 검진 간격이 6개월로 늦춰진 것이다. 암병동 복도를 스치는 사람들의 얼굴에서는 웃음기를 본적이 거의 없다. 그래서 나는 복도를 걸을 때마다 아픈 사람들에게 결례가 되지 않을 만큼의 미소만 머금고 걷는다. 대기실에 앉아 있을 때와 진료실을 출입할 때도 마찬가지다. 그런 어느 날 40대쯤으로 보이는 젊은 여인이 초췌한 얼굴로 다가와 곁에 앉아도 되겠느냐고 조용히 묻는다.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니 곁에 앉으며 “몇 차례 지나면서 뵈었는데 어르신은 얼굴에 늘 미소가 있는 걸로 보아 환자는 아닌 것 같고 다른 누가 아프신가요?” 하고 묻는다. 아내가 그녀의 어깨를 어루만지며 “목사님인데 뇌신경 암으로 진료 받으러 다니고 있어요.” 라고 대답을 했다. 말을 듣자 흠칫 놀라며 “어떡해...” 한마디를 삼키듯 내뱉는 그녀의 눈에 금방 눈물이 맺히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흐르는 눈물을 닦는다. 그녀는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한다. 그럼에도 나의 아픈 이야기를 듣자 눈시울이 젖는 사람이니 마음이 따뜻한 사람임에 틀림없다. 이 분을 내 곁에 인도하신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생각에 가만히 휴대폰을 열어 성경 한 구절을 보여주면서 직접 읽으라고 했다.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언4:23).”와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를 마르게 하느니라(잠언 22:17).”는 말씀이다. 나는 목사로서 매일 이 말씀을 되새기면서 내 마음의 즐거움을 찾고 주님이 주시는 평안을 지킨다고 했다. 말없이 나를 바라보던 그녀는 무슨 뜻인지 알 것 같다고 하며 목례를 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저만치 걸어가는 그녀를 바라보며 주님이 그분의 마음에 평안을 주시기를 기도했다. 김희목 님의 시 한 구절이 생각난다. <잠에서 깨어나니 당신이 있어 기쁩니다. 아침 태양은 찬란히 빛나고 나는 여기 있습니다> 요즈음 내가 자주 읊조리는 시다. 잠에서 깨어났다는 것은 다시 하루를 살아간다는 것이다. ‘당신이 있어 기쁨’의 의미는 내게 있어 아내에게만 한정하였는데 요즘은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이다. 아침 태양의 찬란히 빛남은 하나님의 창조의 절정을 깨닫고 느끼고 경험하게 한다. 그리고 나는, 지금, 여기, 있다. 여기서 멈추어 뒤를 돌아보니 솔로몬의 고백이 묵상된다. 앞을 보니 바울사도의 걸음이 어렴풋이 보인다. 살아있으니 앞으로 가야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오늘도 나는 앞으로 나아간다. 그래서 통감(通鑑)의 지혜가 더욱 필요하다. 지나온 역사를 거울로 볼 수 있는 혜안(慧眼)과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보는 영안(靈眼)과 나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주님처럼 볼 수 있는 심안(心眼)이 열려야 앞으로 나아가는 나의 삶이 탐진치(貪瞋痴)가 아닌 너의 유익을 위한 나의 삶이 되리라. 아들 같은 목사님이 찾아왔다. 교회에서 사임종용을 받았다는데 그 이유가 그야말로 기가 막혔다. 그냥 싫으니 사임하라는 것이란다. 아는 곳도 갈 곳도 없어 하늘만 바라보고 기도하지만 하나님은 침묵하시고 기한은 다가오니 목회는 고사하고 살고 싶은 마음이 사라지고 있단다. 나는 누가, 왜, 무엇 때문에? 라고 묻지를 않았다. 가슴이 먹먹해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아 커피 머신으로 가서 커피 두 잔을 내려왔다. 마시지 않는 차를 앞에 두고 침묵만 흐른다. 그러다가 내가 살아온 날들, 내가 오늘도 살아있음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마태복음 8:20절을 펴 놓고 같이 읽자고 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 결국 그는 탁자 위에 엎디어 흐느꼈다. 바라보는 나도 소리 없이 울었다. 여기를 바라보시는 주님은 또 얼마나 아프실까? 무릎을 꿇은 아들 같은 목사의 머리에 손을 얹고 기도할 때 눈물이 흘러 목사의 머리에 떨어졌다. 기도를 끝내고 품에 안아주며 내가 한 말은 “이것까지 참으라.”였다. 베드로가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귀를 쳐 떨어뜨렸을 때 그 귀를 만져 낫게 하신 주님의 말씀이다. 하나님은 2개월 후 그 목사를 그 교회에서 다른 곳으로 인도해 주셨다. 그 목사가 떠난 이후 촛대가 옮겨지는 이야기를 들었다. 유머 한편이 생각났다. 하나님이 짐승을 지으실 때 사람을 위하여 일하게 하시며 또 수명도 정해 주셨다. 소를 만드시고 60년만 살아라 하시니 소는 30년만 살겠다고 했다. 개를 만드시고 수명을 30년을 명하셨는데 개는 15년만 살겠다고 했다. 원숭이를 만드시고 너도 30년만 살아라 하시니 개처럼 15년만 살겠다고 했다. 하나님은 사람을 만드시고 사람에게는 생각할 수 있는 머리를 주신 후 25년만 살아라 하셨다. 그러자 사람은 하나님께 소가 버린 30년, 개가 버린 15년, 원숭이가 버린 15년을 자기에게 다 달라고 했다. 그래서 25세까지는 그냥 사람으로 살고, 그후 55세까지는 소처럼 일을 하며 살고, 그후 70세까지는 퇴직 후 개처럼 집 지킴이로 살고, 그후 85세까지는 손자들 앞에서 원숭이처럼 재롱을 떨면서 살다가 죽는다는 것이다. 유머일 뿐이지만 왜 사느냐에 대한 질문의 대답이 될 수도 있는 수긍이 되는 유머가 아닌가. 그래서 사도 바울의 고백을 읊조린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14:8).” 이것이 내가 사는 이유다. 오늘, 지금 이 하루도 나는 살아있다.
    • 오피니언
    • 칼럼
    • 서임중 칼럼
    2023-02-10
  • [성서연구] 마하나임
    야곱은 형님 에서의 축복을 가로채기 위해 아버지 이삭을 속이기까지 했습니다. 이 일을 두고 좋게 말하면 축복을 사모했다고 할 수 있지만, 나쁘게 말하면 인간적 위계로 살아간 잘못된 태도였다고 하겠습니다. 야곱이 복을 받은 것은 형님의 복을 가로챘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가 태어나기 전, 태중에 있을 때 이미 하나님께서는 작은 자가 더 큰 복을 받을 것이라고 하신 바가 있습니다. 복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지, 사람이 쟁취하는 게 아닙니다. 이 일로 야곱은 형님 에서의 분노를 피하여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도피했고, 20년을 머물렀습니다. 그 기간에 가정을 이루고 자녀를 얻었고, 짐승 떼를 얻어 부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을 오랫동안 짓누르는 무거운 짐이 있었는데, 다름 아니라 형님 에서와 조우하는 일이었습니다. 20년 후 외삼촌의 집을 떠나 돌아올 때 그 짐은 점점 더 무거워졌을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길을 가다가 야곱은 하나님의 사자들을 만났습니다. <사자>라고 번역된 단어는 <천사>라고도 번역됩니다. 하나님의 사자를 본 것은 야곱뿐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천사는 한둘이 아니었고, 그 수가 엄청나게 많았던 것 같습니다. 그 이유는 야곱이 이들을 본 후에 그곳을 <마하나임>이라 했는데, 그 의미가 <하나님의 군대>이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두려운 형님 에서를 만나기 전에 먼저 하나님의 사자들을 만난 것입니다. 우리도 언제나 먼저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야곱이 외삼촌의 집으로 갈 때도 그는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들판에서 노숙할 때 하나님께서 나타나셨고, 은혜의 사다리를 내려보내시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오르내리면서 그를 지켰습니다. 그리고 축복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을 먼저 만났고,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기에 외삼촌의 집에서 무사하게 잘 지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돌아오는 길에도 에서를 만나기 전에 먼저 하나님을 만난 것입니다. 우리도 매사에 먼저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늘 하나님께 먼저 묻고, 하나님의 인도를 받아야 합니다. 또 야곱은 <하나님의 군대>라는 의미로 <마하나임>이라 했는데, 더 정확히 말하면 <두 군대>라는 뜻입니다. 마하나임은 군대, 진영을 의미하는 마하네의 쌍수로서 둘을 말합니다. 야곱은 하나님의 두 군대를 본 것이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두 군대의 진영을 보게 하셨을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한 군대는 그의 뒤를 지키고, 한 군대는 그의 앞을 인도하는 것을 보이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의 뒤를 지키고 계셨습니다. 야곱이 인사도 없이 떠난 것을 알았을 때 라반은 분노했습니다. 그는 길을 재촉하여 야곱을 추격했습니다.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야곱을 덮치기 전날 밤에 하나님께서는 라반에게 경고하셔서 야곱을 해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창세기 31장 24절을 보면 <밤에 하나님이 아람 사람 라반에게 현몽하여 이르시되 너는 삼가 야곱에게 선악간에 말하지 말라 하셨더라>고 했습니다. 이뿐 아닙니다. 야곱의 아들들이 다말이 겁탈당한 일로 세겜 남자들을 죽인 후 야곱이 그곳을 도망할 때, 하나님께서는 주변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주셔서 야곱을 추격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한 군대는 그의 뒤를 지키셨던 것입니다. 후에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널 때 하나님의 불기둥이 이스라엘과 애굽 군대 사이를 막아 이스라엘을 추격하지 못하게 하신 적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도 이런 은혜를 베푸십니다. 우리가 저지른 과거의 죄는 무섭습니다. 학교 폭력을 저지른 오래전 일 때문에 인생의 고통을 겪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보혈은 우리의 모든 과거의 죄를 씻어 다시는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지 못하게 하십니다. 우리에게도 뒤를 지키는 군대가 있는 셈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군대는 야곱의 앞을 인도하셨습니다. 무장 군인 사백 명을 거느리고 오는 에서의 마음의 분노를 녹이셨고, 에서와 야곱이 사랑으로 포옹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앞길을 인도하시길 소원합니다. 우리 앞으로 다가오는 원수를 격파하시고, 길을 열어 주시길 소원합니다. 2023년 한 해 동안 하나님의 두 군대가 앞뒤를 지키는 가운데 강건한 삶을 누리길 소원합니다. 주여, 저희와 한국교회와 대한민국을 보호하옵소서.
    • 오피니언
    • 칼럼
    • 성서연구
    2023-02-10
  • [시사칼럼] 감성을 장착한 인공지능, 인간을 능가할 것인가?
    얼마 전 테슬라의 일론 머스크(Elon Musk)가 컴퓨터공학을 전공한 샘 올트먼(Sam 미스무)과 공동으로 설립한 <오픈 AI>에서 공개한 신제품(?) 하나가 세계적인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영어로 정식 명칭은 “CHAT Generative Pre-Trained Transformer”(줄여서 ‘챗GPT’)라고 하는데, 쉽게 말하면 ‘잡담하는 로봇’(챗봇, chat-bot) 혹은 ‘생성 AI’ 즉 생성 능력이 있는 인공지능이라 할 수 있는 온라인 서비스 말입니다. 작년 12월 1일 공개된 이후 고작 두 달 만에 사용자가 천만 명을 돌파하면서 구글(Google)의 자리마저 위협하지 않을까 할 정도의 파죽지세(破竹之勢)를 보이고 있습니다. 이 “챗봇”은 질문이나 검색어를 입력하면 관련 자료나 지식을 단순하게 나열하는 기존의 검색엔진과 달리, 이름의 뜻 그대로 ‘생성적 사전 학습 수행’ 능력을 발휘하여 관련된 정보를 요약하고 정리하는 일은 물론이요 답안지나 보고서를 작성하는 수준마저 능가합니다. 미국 펜실베이니아대학교 와튼스쿨의 맥 혁신경영연구소는 최근 ‘챗GPT가 와튼 MBA를 수료할 수 있을까’라는 제목의 논문을 발표하면서, 챗GPT가 필수 교과목인 ‘운영관리’ 기말시험에 응시하여 ‘B-’에서 ‘B’ 학점 사이를 받았다고 알려왔습니다. 상당히 준수한 성적입니다. 경영 실력이 이 정도라면 로스쿨은 어떨까요? 비슷한 시기의 NBC 뉴스 보도에 따르면 챗GPT는 미네소타주립대에서 치러 진 로스쿨시험마저 거뜬히 통과하는 기염을 토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어렵기로 소문난 의사 시험도 문제가 될 것 같지 않습니다. 최근에 미국 캘리포니아의 의료 스타트업인 앤서블헬스 연구진은 챗GPT가 미국의사면허시험(USMLE)에 응시한 결과 모든 시험에서 50% 이상의 정확도를 보이며 합격가능한 점수를 받았다고 발표했습니다(이상 매일경제 2023월 1월 26일 기사에서 발췌). 물론 아직까지는 언어의 문제점이라든지 여러 가지 한계가 드러났습니다. 하지만 이번에 발표한 모델은 ‘GPT-3.5’ 버전으로서, 향후 한 단계 업그레이드 한 ‘GPT-4.0’가 출시된다고 합니다. 286에서 시작했던 컴퓨터가 얼마나 놀라운 발전을 거듭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단순 컴퓨터와 비교할 수도 없는 인공지능이니, 앞으로 어떻게 얼마만큼 진화할지 상상이 가질 않습니다. 물론 비판적인 시각도 있습니다. 장은수는 한 칼럼(챗GPT와 창의성)에서 독일 철학자 리하르트 프레히트의 『인공 지능의 시대, 인생의 의미』(열린책들 펴냄)의 한 대목을 소개하는데, 인공지능에게 “어떻게 하면 사랑을 잘할 수 있나요?”라고 묻자 “대화 잘하고, 공감 잘하고, 자주 고마움을 표하고, 어려울 때 흔쾌히 도우라”는 식의 다소 지루하게 들리는 답을 내놓았다고 하면서, “틀리지는 않지만 흥미롭지도 않다. 사랑을 잘하려면 무수히 변하는 상황에서 연인의 감정과 기분, 생각과 뜻을 살펴 그때그때 눈치껏 잘해야 한다. 그래서 사랑이 어렵고 피곤하며, 진정한 모든 관계는 사적이다.”라고 썼습니다. 로고스(logos)는 몰라도 인간적인 파토스(pathos)는 어림도 없다는 뜻으로 들립니다. 종교적인 분야에서는 말할 나위도 없겠지요. <크리스채너티투데이> 역시 편집자 발 기사에서 “챗봇은 연구도 할 수 있고, 글도 쓸 수 있으며, 웅변까지도 할 수 있겠지만, 설교는 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러셀 무어, 1월 26일). 마음은 물론 영성은 절대로 갖출 수 없을 거라는 확신들도 많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어떨까요? 지난 신년 첫 날 뉴욕주 햄튼 유대교회당에서 조시 프랭클린이라는 랍비가 메시지를 전한 후 감동을 받았다는 청중들에게 사실은 자신이 아니라 챗봇이 작성한 설교문을 읽었노라고 밝혀서 충격을 선사한 바 있습니다. 최근 챗봇이 썼다는 “선임장로님의 장례식 설교문”은 어떻습니까? “친애하는 여러분, 우리는 지난 30년 동안 이 교회와 지역사회에 많은 것을 바친 사랑하는 선임장로님의 삶과 유산을 축하하기 위해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그의 죽음은 큰 손실이지만 그가 우리 모두에게 미친 영향을 기억하고 적절한 방식으로 그를 기리는 기회이기도 합니다. 그는 이 교회 건축에 헌신했고, 사람들이 예배와 공동체에서 함께 모일 수 있는 장소를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습니다. 그는 항상 자신보다 다른 사람을 우선시했습니다. 그의 친절과 관대함, 교회에 대한 변함없는 헌신은 결코 잊혀지지 않을 것입니다”(최승현). 솔직히 감동적이지 않습니까? 게다가 소수자보호와 같이 사회적으로 민감한 질문을 던지자 “혐오와 차별을 조장할 수 있는 질문에는 답변하지 않습니다”라고 했다 합니다. 무분별한 조롱과 악의적인 댓글 그리고 ‘카더라’ 통신과 ‘아니면 말고’ 식의 논설이 난무하는 인간의 로고스와 파토스와 에토스는 챗봇이 쳐다보지도 못할 그런 지경에 있다고 우리는 과연 자신 있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 오피니언
    • 칼럼
    • 시사칼럼
    2023-02-10
  • [교회와세금] 종교인소득 과세의 실무적 영향
    2018년부터 시행된 종교인 과세 소득세법령이 적용된 지 5년이 지났다. 종교인소득 과세는 종교단체에서 활동을 하는 종사자의 소득에 세금을 부과하는 것으로 기타소득과 근로소득 중 선택하여 세금을 납부하고, 연말정산을 통해 부족 부분은 추가 납부하거나 환급받을 수 있게 하는 제도이다. 또 이로서 종교인소득이 투명하게 전산화되며 종교단체나 종교인이 부담해야 건강보험과 국민연금 등이 달라지고, 근로가족 장려금 수혜에도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즉 목회자 소득에 대한 과세가 법률로 정해짐에 따라 교회가 부담해야 할 사례비와 급여항목 체계가 달라지고, 목회자의 보험료와 국민연금, 근로가족장려금 등 수혜금액에도 변화가 생겨난 셈이다. 교회와 세금, 오늘은 제9회 칼럼으로 종교인소득 과세가 교회의 실무에 미친 영향을 알아본다. 또한 그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 종교인소득은 소득세법상 “기타소득”으로 분류하고, 원천징수를 하거나 과세표준확정신고를 하는 경우 해당소득을 “근로소득”으로 선택할 수 있다(소득세법 제21조3항). 과세대상 소득은 종교활동과 관련하여 받은 생활비, 상여금, 격려금 등 매월 또는 정기적으로 지급되는 수당 등을 포함하며, 비과세소득을 차감한다. 비과세소득은 과세대상이 되지 않는 항목으로 학자금(본인), 식사(월10만원 이하), 실비변상적 성질 지급액(일직료, 여비 등 20만원 이하), 출산보육수당(10만원 이하), 사택제공이익 등이 포함된다. 과세표준은 과세기간에 받은 지급액에서 비과세소득과 필요경비 또는 근로소득공제, 소득공제, 세액을 차감하여 계산한다. 둘째, 종교인소득 과세 납부와 관련하며 다음과 같이 원천징수세액을 계산하고 신고한다. ①소득지급액- ②필요경비 = ③소득금액 - ④기본공제 - ⑤연금소득공제 = ⑥과세표준 × 세율(종교인소득원천징수세율 20%) = ⑦산출세액 - ⑧세액공제* = ⑨결정세액 ÷ 12개월 *세액공제: 총지급액 7천만 원 이하인자는 총지급액의 2.3%(초과자는 정액 161만원)+산출세액의 10%(90만 원 한도)=종교인이 일반인보다 기부금 등의 지출액이 높은 수준을 감안하여 산정 셋째, 종교인소득이 투명하게 신고되며, 교회 목회자도 근로·자녀장려금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근로장려금은 근로소득이 적은 경우 이를 지원하기 위한 것으로, 부부합산 총소득이 단독가구 2천만원, 홀벌이 가구 3천만원, 맞벌이 가구 3600만원 미만이며, 가구원 전원의 재산합계액이 2억원 미만의 경우 신청이 가능하다 (조세특례제한법 제100조). 자녀장려금은 저소득 가구의 자녀양육 부담을 경감하기 위한 것으로, 18세 미만 부양자녀가 있고, 부부합산 총급여액이 4000만원 미만인 경우 자녀 1명당 최대 70만원을 받을 수 있다. 넷째, 종교인소득이 전산화되며, 4대보험(국민건강보험, 국민연금, 산재보험, 고용보험) 납부에 변화가 발생하였다. 4대보험은 국가의 책임하에 질병, 노령, 실업 등 사회적 위험으로부터 국민의 건강과 일정 이상의 소득 보장을 위하여 보험에 가입하도록 하는 제도로서, 기타소득의 경우 건강보험과 국민연금, 근로소득의 경우 4개 모두를 납부하여야 한다. 그리고 건강보험은 직장가입자와 지역가입자로 구분하여 전자는 보수월액에 6.46%의 건강보험료율을 곱하여 산정하고, 후자는 추가로 주택, 차량 등 재산을 반영하여 산출한다. 국민연금은 가입자의 기준소득월액에 연금보험료 9%(교회 부담 4.5%, 본인 부담 4.5%)를 곱하여 산출된다. 아울러 퇴직연금 지급을 의해 금융기관에 예치하는 경우, 퇴직기여제도를 선택해 퇴직금 운용에 대한 리스크를 종교인 개인이 부담하는 경우 교회는 지출을 비용으로 처리하면 되나, 퇴직급여제도를 선택해 운용 리스크를 교회가 부담하는 경우 퇴직급여부채와 이를 위해 적립한 퇴직연금자산을 관리하고 회계장부인 재무제표에 표시하여야 한다.
    • 오피니언
    • 칼럼
    2023-02-10
비밀번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