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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의학칼럼] 백내장이 생기는 원인은 무엇인가요?
    √백내장이 생기는 원인은 무엇인가요? (안 좋은 습관 등) 백내장의 주요 원인은 노화입니다. 나이가 들면 몸이 늙어가 듯 눈도 노화 증상이 나타납니다. 원래 맑고 투명하던 수정체가 점점 뿌옇게 변하고 딱딱 해집니다. 뿌옇게 변한 수정체로 인해 시야가 흐리고 잘 보이지 않게 되는 것이 백내장입니다. 이 외에도 안구내 포도막염 발생, 아토피나 당뇨, 스테로이드 장기간 투약, 실외 활동이 많을 경우 자외선 노출로 인한 백내장 발병 등도 있습니다. √어떤 때 백내장을 의심해 봐야 하나요? 백내장이 오게 되면 가장 큰 변화는 시력저하 입니다. 안개가 낀 것처럼 뿌옇게 보이는 증상이 대표적인 증상입니다. 가까운 물체가 갑자기 더 잘 보이게 된다거나, 밝은 햇빛에서 볼 때 오히려 뿌옇게 보이는 경우도 있습니다. 또한 한쪽 눈을 가려도 물체가 두개로 보이는 단안 복시 현상도 백내장을 의심해 볼 수 있는 증상 입니다. √백내장 치료의 시기가 중요하다던데 왜 그런가요? 백내장은 발병 시 자연 치유가 되지 않기 때문에 반드시 전문 치료를 통해 개선해야 합니다. 백내장을 오래 방치할 경우 수정체가 점점 혼탁해질 뿐만 아니라 딱딱해지고 부풀게 됩니다. 이때 눈 속 액체인 방수가 빠져나가는 길을 막아서 안압이 올라가게되면 폐쇄각 녹내장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또한 백내장을 오래 방치하면 추후 수술 시 어려움이 많습니다. 백내장 수술은 눈 속에서 수정체를 분해하여 제거하게 되는데 딱딱해진 수정체는 분해하기 쉽지 않습니다. 만약 눈 속에서 분해가 안된다면 수정체를 그대로 빼내야 하는데 이 때 각막을 절개하기 때문에 수술부위의 통증이 발생할 수 있고, 회복시간도 오래 걸리게 됩니다. 무엇보다 각막 절개로 난시가 심해질 수 있습니다. √백내장 환자의 연령은 어떻게 되나요? 백내장은 대표적인 노인성질환으로 인식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최근 병원을 방문하는 환자들의 평균 연령대를 보면 50~60대 환자들이 가장 많습니다. 과거에 비해 수명은 늘어났지만 환경오염으로 인한 강한 자외선과 디저털기기의 대중화에 따른 생활방식의 변화로 인해 백내장 발병 시기가 점점 앞당겨지고 있습니다. 또한 사회활동이 많은 50-60대 환자들은 시야에 불편함을 느끼자마자 병원을 찾기 때문에 백내장 환자의 평균 연령대가 점점 낮아진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수술하고 났을 때 예상 시력은 어떻게 되나요? 백내장 수술은 혼탁해진 수정체를 제거하고 인공수정체를 삽입하는 방법입니다. 이 때 삽입하는 인공수정체의 종류에 따라 노안과 백내장을 동시에 치료할 수도 있습니다. 인공수정체는 원/근 거리 중에 하나에만 초점을 맞추는 ‘단초점렌즈’와 여러거리에 초점을 맞출 수있는 ‘다초점렌즈’로 크게 구분할 수 있습니다. 환자의 눈 상태와 라이프스타일등을 고려하여 인공수정체 종류를 선택하게 되는데 최근에는 레이저 장비와 렌즈 등의 개발로 백내장 수술방법이 진화하면서 시력회복의 기대치가 굉장히 높습니다. √백내장 수술에서 가장 중요하고 주의해야 하는 부분이 있나요? 수술 전 정밀 검사를 통해 현재 눈 상태에 대한 정확한 파악이 중요합니다. 백내장 수술 결과는 의료진의 경험과 기술력에 따라 달라질 수 있으므로 숙련된 의료진을 통해 자신의 눈에 맞는 치료법과 수술방법을 선택하는 것이 좋습니다. 인공수정체 선택에 있어서도 눈 상태와 생활패턴에 적합한 인공수정체를 선택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백내장 치료의 중요성 백내장은 적절한 치료시기를 놓치게 되면 수술이 더욱 까다로워지고, 녹내장 등의 질환이 합병증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특히 녹내장은 시신경이 천천히 망가져 실명까지 초래할 수 있는 질환이기 때문에 적절한 시기의 치료가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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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2-25
  • [은혜의말씀] 변론하는 기도(사 1:18-19)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누구와 논쟁하거나 변론하는 것을 별로 기뻐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바울도 사랑하는 제자 디모데에게 어리석은 변론을 피하고 버리라 권고했습니다. (딤전6:20-21上, 딤후2:23) 그런데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무엇을 변론하자는 것일까요?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변론하는 기도를 하라는 것입니다. 1. 너희 죄로 인하여 변론하자는 것입니다. 죄는 법정에 나아가서 변론하는 것이 상식입니다. 죄란, 법적으로 외면을 다루는 것이요, 도덕은 내면을 다루는 것입니다. 법은 타율적이요, 도덕은 자율적이며, 도덕은 양심, 즉 마음을 보고, 법은 외면적 행동을 봅니다. 그런데 죄를 다루는 데는, 세상 법을 집행하는 세상 법정과,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법정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법정에서 만나자는 것입니다. 사람마다 다 죄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죄는 많습니다. 그러나 죄가 많을수록 자기 죄를 잘 인정하지 않습니다. 회개하기만 하면 죄를 용서받을 수 있고, 회개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고,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가 있는데도 말입니다. 또한 죄의 많고 적음이 문제가 아닙니다. 진정한 회개를 했느냐 하는 것이 더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 죄를 날마다 씻기 위하여 주께 나와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해결하시는가? 오직 하나님께 나아와 변론하면, 죄가 해결됩니다.(사1:18-20) 여러분, 회개하면 질병, 저주, 패배, 어떠한 상황에도 하나님께서 용서하시고, 순종하면 축복을 베풀어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매일 십자가 앞에 나아와서 자기 죄를 자백하고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정결함을 얻어야 합니다. 2.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변론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을 하나님의 모양과 형상대로 영광스럽게 지으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를 구속하셨습니다. 더욱이 하나님의 자녀들을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기시며 사랑하십니다. (사43:1, 사43:7)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부르시고 택함 받은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사명이 있음으로, 이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변론하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변론하십시오! 반드시 하나님이 들으십니다. 3. 당면문제의 해결을 위해 변론하라! 솔로몬 왕의 기도는 <당면문제를 위한 기도>였습니다. (왕상3:7-13) 당면문제를 위해 나아갔던 솔로몬은 지혜의 왕이 되었습니다. 당면한 문제를 위하여 기도하십시오! 인간의 힘으로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위기에 직면했을 때 하나님께는 능치 못함이 없는 것을 믿고 간절히 기도하면, 하나님은 그 기도를 들으시고 그 위기에서 건져 주시고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놀라운 기적을 체험하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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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2-25
  • [소강석칼럼] 꽃씨의 꿈
    올 겨울은 유난히도 길었던 것 같습니다. 폭설이 내리고 한강이 얼지는 않았지만 겨울이 지난하게 느껴졌습니다. 초갈등의 사회 때문이었을까요? 최근에 닥친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일까요. 그래서인지 모두가 봄을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중국에 우한 폐렴을 제일 먼저 발견했던 리원량 의사도 그토록 봄이 오기를 기다리다 떠났지요. 아직 봄이 오지 않았는데도 봄을 애타게 기다렸던 개구리들이 나와 얼어 죽었다는 보도도 있었습니다. 그만큼 올해는 우리 모두가 봄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사실 이맘때면 꽃씨가 기지개를 펼 때입니다. 아니 꽃씨는 한 겨울에도 꿈을 꾸지요. 눈보라가 치고 온 땅에 얼어붙어 있을 때에도 꽃씨는 파란 잎의 꿈을 꿉니다. 또 붉고 화사하고 향기로운 꽃의 꿈을 꾸고요. 그 사이로 나비 떼가 날아오는 꿈, “아, 꽃을 피우는 건 꿈꾸는 나비지”라는 독백도 할 것입니다. 그런 꽃씨를 땅에 뿌릴 때 꽃씨는 마침내 자신의 꿈을 이루게 되는 거지요.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은 초갈등 사회입니다. 모두가 내편 네편으로 나누고 서로가 서로를 공격하는 분위기입니다. 지난 주 지방에서 목회를 잘 하시는 목사님이 저를 긴히 만나자고 하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소목사가 보수 우파인줄 알았는데 요즘은 좌파 성향을 보인다는 루머가 있어서 염려하는 마음으로 만나자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그 목사님에 이렇게 말씀을 드렸습니다. “목사님, 염려할게 뭐가 있습니까? 목사에게는 좌우보다 중요한 게 중심이죠. 목사님이야 특정지역에서 목회를 하셔서 잘 모르겠지만 수도권에서 목회하는 사람은 좌우를 다 품어야 할 상황이 많습니다. 자칫하다가 목사마저 진영논리로 편가르기를 할 수 있습니다. 목회자는 사람들의 심령 속에 생명의 꽃씨를 뿌리고 성경적 세계관과 가치관의 꽃씨를 뿌려주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알아서 스스로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열매를 맺게 되지요. 그러므로 진보적이고 좌편향적인 사람도 하나님의 사랑으로 품으며 그 마음에 사랑의 꽃씨를 뿌려주면 스스로 시대에 합당한 성령의 열매를 맺는 것을 봅니다.” 많은 이야기가 오갔지만 저도 제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이 되었고, 그 목사님도 저에게 많은 부분을 설득 당하고 가셨습니다. 당연히 기독교는 나라를 지키고 나라를 세우는 종교입니다. 그렇다고 목회자가 지나치게 이념만을 가르치고 정치를 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되지요. 목사는 먼저 성도들에게 생명의 꽃밭을 일구어주고 초갈등사회일수록 화해의 꽃씨를 뿌려줘야 합니다. 봄이 오기를 고대하는 마음이다 보니 마치 꽃씨가 기지개를 켜고 있는 듯 느껴집니다. 겨우내 꾸었던 꿈을 이루고 싶어서죠. 저는 한결같이 꽃밭을 일구며 꽃씨를 뿌리는 사역을 해 왔습니다. 세종도서문학나눔에 선정된 제 에세이책의 제목도 ‘꽃씨 심는 남자’입니다. 여러분 안에는 꽃밭이 어떻게 일구어져 있는가요. 사방이 비난과 공격, 증오와 분열, 에덴의 동쪽의 가시들로 가득한 때에 이제 우리 안에 있는 생명의 꽃씨, 꿈의 꽃씨, 화해의 꽃씨가 깨어나야 할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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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2-25
  • [함께생각해봅시다] 설교는 되도록 쉽게 해야
    설교는 되도록 짧아야하는 동시에 되도록 쉬워야 한다. 어렵게 하는 설교를 좋아할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믿은지 오래된 사람도 목사도 신학교 교수도 설교만은 쉬운 것을 좋아한다. ○○○교수는 신학교를 졸업했다. 교회직분은 장로인데 설교할 기회가 종종 있었다. 한번은 유년주일학교 학생들과 장년반이 함께 예배하는 시간에 설교를 하게 되었다. ○○○장로가 어린 아이들이 알아듣기 쉽도록 설교수준을 마치 아동설교 하듯이 했다. 예배 후에 장년반 교인들이 “장로님, 장로님의 설교를 수없이 들어봤지만 오늘 가장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라고 하였다. ○○○장로는 설교를 아동설교 하듯이 쉽게 하면서 장년반 교인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있었는데 장년반 교인들이 그날 설교를 가장 감명 깊게 들었다는 반응을 보여 크게 깨달은 바가 있었다고 한다. 깨달은 것이 뭔고 하니 누구 앞에서든지 설교만은 쉽게 해야겠다는 것이었다. 교인들은 쉬운 설교를 좋아한다. 실제로 목회에 대성한 목사 중에 설교를 어렵게 하는 이가 있는가 보라. 하나같이 쉽게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강단에서 신학적인 용어나 철학적인 용어 등을 많이 쓸 때에, 또 형이상학적이니 형이하학적이니, ○○적, ○○적 이렇게 말할 때에 그 말을 듣고 교인들이 감동을 받겠는가. 어떤 이는 설교하면서 영어를 너무 자주 쓰고 헬라어, 히브리어도 필요이상으로 많이 하는 것 같다. 교인들이 싫어할 뿐 아니라 ‘아는 체 한다’ 하더라구요. ○○교회 목사는 박사인데 설교 때문에 교인들의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왜 불만인지 알아보니 설교가 어렵다는 것이었다. 교인들은 어려운 설교를 듣고 은혜를 받는 것이 아니라 쉬운 설교에 은혜를 받는다. 그런데 어떤 이는 말하기를 “설교는 쉽게 하기는 어렵고 어렵게 하기는 오히려 쉽다”고 한다. 실제로 그럴는지 모른다. 설령 그럴지라도 노력해서 설교만은 쉽게 해야 한다. 교인들이 은혜를 받아야 할 것 아닌가. “우리 목사님은 학식이 많은 박사이기 때문에 설교 수준이 높다”는 말보다는 “우리 목사님은 박식이지만 설교는 아주 쉽게 하신다”는 말을 듣도록 노력해야 한다. “우리 목사님의 설교는 수준이 높고 고상하다” 이 말은 “별로 은혜가 안 된다”는 말에 가깝다고 보면 틀림없다. 독자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한지요. 함께 생각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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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2-25
  • [성서연구] 알지 못하는 이들의 축제를 바라보며
    잠언은 지혜의 책입니다. 지혜가 무엇인가를 보여줍니다. 잠언에서 지혜는 여성형으로 묘사될 때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8장 2절의 <그가 길의 높은 곳과 네거리에 서며>라고 할 때의 <그>는 사실은 여성형입니다. 지혜를 여성형으로 묘사하는 이유는 사람들을 꼬여 멸망하게 하는 음녀와 대립시키기 위해서라고 생각됩니다. 본문은 지혜의 반대되는 개념으로 <미련한 여인>을 등장시킵니다. 미련한 사람의 특징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시끄럽게 나대는 것>입니다. 13절은 <미련한 여인이 떠들며>라고 했고, 14-15절을 보면 <자기 집 문에 앉으며 성읍 높은 곳에 있는 자리에 앉아서 자기 길을 바로 가는 행인들을 불러 이르되>라고 했습니다. 미련한 여인은 사람들 앞에서 떠듭니다. 대문 앞에, 그리고 고대에 사람들이 모이던 장소였던 성읍 높은 곳에 앉아서 <자기 길을 바로 가는 행인들>을 부릅니다. 간혹 이런 부름에 솔깃해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미련한 여인은 그들에게 17절의 말씀처럼 <도둑질한 물이 달고 몰래 먹는 떡이 맛이 있다>고 부정한 이익과 쾌락을 속삭입니다. 알지도 못하면서 떠드는 모습, 결말도 모르면서 힘을 주는 모습은 왠지 낯설지 않습니다. 총선이 다가오면서 정치판에는 이런 이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정당을 기웃거리는 이들 중에는 전과자, 심지어 파렴치범들도 있다고 합니다. 부끄러움이 없습니다. 오히려 사람들 앞에서 목소리를 높입니다. 이런 모습은 정치판에만 있는 게 아닙니다. 교계에도 많고, 교회에도 많습니다. 정작 지혜로운 사람들은 조용히 있습니다. 이런 이들은 말하기 전에 깊이 생각합니다. 말을 해도 좋을지에 대해 숙고합니다. 자신의 말이 사람들에게 유익할지를 고민합니다. 이들은 자신을 드러내기보다 공동체의 선을 추구합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런 이들로부터 나오는 무르익은 말들은 미련한 사람들의 떠드는 소리에 묻힙니다. 그래서 세상은 시끄럽고 옳은 것을 찾기는 점점 어렵습니다. 그렇다면 미련한 사람들은 왜 이처럼 나서길 좋아하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13절에서도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라고 했습니다. 더구나 18절에서는 <오직 그 어리석은 자는 죽은 자들이 거기 있는 것과 그의 객들이 스올 깊은 곳에 있는 것을 알지 못하느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아무 것도 알지 못하면서 자신감에 넘쳐 나대는 모습은 요한계시록 3장의 라오디게아교회의 교인들에게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3장 17절을 보면 그들은 자신들에 대해 대단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으나, 주님께서는 그들의 실상이 비참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라오디게아는 면직과 모직 산업이 발전하여, 주후 60년경의 지진 때도 자력으로 복구했을 정도로 부유했는데, 주님께서는 곤고하고, 가련하고, 가난하다고 하셨습니다. 또 라오디게아는 안약 연고가 유명했는데, 주님께서는 눈이 멀었다고 하셨습니다. 더구나 옷감 산업이 발전했으니 좋은 옷들을 입었을 텐데, 주님께서는 벌거벗었다고 지적하셨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현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요한계시록 3장 15절을 보면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진면목을 알지 못했으나, 주님께서는 그들을 정확히 알고 계셨습니다. 알지도 못하면서 나대고 떠드는 이들로 인해 온통 시끄럽습니다. 이럴 때 주님 앞에 조용히 머물길 원합니다. 다 아시는 주님 앞에 알지 못하는 우리 자신을 내놓길 원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음성을 듣길 원합니다. 그리고 말을 하려거든 모든 것을 걸 각오를 가지고 말하길 원합니다. 더 깊고, 더 간절하고, 더 진실한 사람들이 필요한 시대입니다.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이 그렇게 되길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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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2-25
  • [성서연구] 간구하는 자의 하나님
    우리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런데 정작 우리는 하나님께서 얼마나 위대한 분인가를 잘 모르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하나님은 실제의 하나님보다 너무도 작은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상상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위대한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영원 전부터 영원까지 계시는 분으로서 존재에 있어서 가장 위대하십니다. 그 분은 온 세상의 창조주로서 행위에 있어서 가장 위대하십니다. 또 하나님께서는 죄인을 구원하시는 분으로서 사랑에서 있어서 가장 위대하십니다.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면 그 믿음은 헛것이 되고 말 것입니다. 다윗은 성경에서 빼놓을 수 없는 탁월한 신앙인입니다. 우리는 그에게서 여러 가지 아름다운 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 중 하나가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풍성하게 알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하나님께 대해 다윗만큼 풍성한 고백을 드린 이는 없을 것입니다. 다윗의 시들을 읽어보면 그가 얼마나 하나님께 대해 구체적이고 다양하며 풍성한 고백을 하고 있는지 알게 됩니다. 예를 들어 시편 18편 1-2절을 보면 <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라고 했는데, 삶의 구체적 상황에서 체험한 하나님을 다양하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다윗은 하나님을 다양하게 고백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자신의 왕으로 높이고 있습니다. 본문 1절에서 그는 < 왕이신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를 높이고 영원히 주의 이름을 송축하리이다>라고 했습니다. 다윗은 왕이었습니다만, 진정한 왕은 하나님이심을 알고 있었고, 하나님을 주로 높이고, 송축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는 크게 찬양받으실 위대한 분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3절에서도 그는 <여호와는 위대하시니 크게 찬양할 것이라 그의 위대하심을 측량하지 못하리로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무리 위대하시다 해도 우리와 무관하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기독교 신앙의 위대함은 바로 여기 있습니다. 신이 버티고 있고, 인간들이 그 앞에서 애원하는 구조가 아닙니다. 오히려 한없이 크고 존귀하신 하나님께서 먼저 인간들에게 다가오시고, 사랑하십니다. 다윗은 본문 8-9절에서 하나님의 이러한 면을 다음과 같이 노래했습니다.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며 긍휼이 많으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자하심이 크시도다 여호와께서는 모든 것을 선대하시며 그 지으신 모든 것에 긍휼을 베푸시는도다> 가장 크신 분이 가장 미천한 우리를, 가장 거룩하신 분이 가장 더러운 죄인인 우리를 사랑하여 다가오십니다. 얼마나 놀라운 사랑입니까? 이제 우리가 할 일은 그 위대하신 하나님을 우리 자신의 하나님으로 모시고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더 밀접한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그 분께 연결되고, 그 분의 사랑을 받을 수 있습니까? 그것은 그분께 간구하며 나아가는 것입니다. 본문 18-19절입니다. <여호와께서는 자기에게 간구하는 모든 자 곧 진실하게 간구하는 모든 자에게 가까이 하시는도다 그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들의 소원을 이루시며 또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사 구원하시리로다> 기도야말로 가장 위대하신 하나님을 자신의 하나님으로 모시는 비결입니다. 우리 모두 깊이 기도합시다. 하나님께 진실하게 간구합시다. 그것이 우리의 경외함을 표현하는 방식입니다. 그렇게 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소원을 이루시고 구원하실 것입니다. 이 세상이 소음으로 가득하지만, 그 한복판에서 하나님을 향한 작지만 간절한 기도를 올리는 성도들이 되길 원합니다. 하나님의 눈길은 그러한 이들을 향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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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2-11
  • [서임중칼럼] 제2의 목회를 한다
    나는 포항중앙교회에서 65세 조기은퇴를 했다. 그 이유는 유별난 것이 아니라 개인적인 목회관이며 개인적인 삶의 의미를 다듬으면서 기도해 왔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조기은퇴는 자랑할 것도 비판할 것도 아닌 그 상황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것이 아름다운 관계개념이 아닌가 생각한다. 한 교회에서 시무할 때를 제 1의 목회라 한다면 나는 지금 은퇴 후 제 2의 목회를 하고 있다. 나의 조기 은퇴에 대한 개인적인 소회(所懷)가 있다. 첫째는 헌법이 정한 정년을 어기는 것은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지만 ‘박수칠 때 떠나라’는 말처럼 교회가 가장 건강하게 성장하고 목회가 가장 평행감축(平幸感祝)의 상황이 될 때 정년 관계없이 은퇴하고, 오늘의 세대에 맞는 다음 세대를 이끌어 갈 목사가 담임하게 될 때 더 교회는 성장하고 성숙하리라는 개인적인 교회관, 목회관이 조기은퇴를 결정하게 된 이유이며 그로 인하여 포항중앙교회가 지속적인 성장과 성숙을 이룩하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었다. 둘째는 말씀사역의 중심이 시무교회에서도 최선을 다하는 것이지만 은퇴 후에도 하나님이 주신 은사대로 전국 방방곡곡 부흥사경회를 인도하는 것 또한 사명이라고 생각하고 오늘에 이르렀다. 시무할 때는 어쩔 수 없이 중대형교회 중심의 부흥사경회가 진행되어 농어촌 산골 개척교회를 섬길 기회가 거의 없었기에 은퇴 후에는 이 부분을 관점을 가지고 사역하고 싶었다. 이것은 불혹의 나이에 목사로 임직을 받을 때의 마음가짐의 하나였다. 그렇게 아름다운 제 2의 목회 그림을 그리고 감동과 축복으로 원로목사로 추대 받은 후 소설을 써도 그럴 수 없는 황당한 일을 겪었다. 내 삶을 다 쏟아 부은 牧會를 찬바람 부는 벌판 같은 凩會로 걸레처럼 만들어버린 사람들이 있었다. 이것이 조기은퇴의 보상인가 싶은 아픔이 깊어 잠간이지만 목회도 삶도 마른 나뭇가지 꺽 듯 하고 싶었지만 전도서 3:11절에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다.”는 말씀 앞에서 무릎을 꿇고 숨을 몰아쉬면서 누가복음 22:51절에서 주님이 말씀하신 “이것까지 참으라.”는 말씀을 읊조리면서 하루하루를 열고 닫았다. 그 중심에는 모해와 위증과 거짓과 인격살인과 말할 수 없는 억울한 일을 당하면서도 원망 불평 비판 정죄하지 않고 하나님만 바라보고 믿음을 지켰던 요셉과 다윗과 바울 사도의 신앙과 삶이 나에게 거울이 되었고 나 또한 그렇게 걸어가리라는 신앙적 결단과 고백 때문이었다. 그러면서 은퇴 후 한 주도 쉼 없이 작은교회의 초청을 받아 사역을 하면서 여기까지 이르렀다. 은퇴한지 5년, 고희(古稀)를 보내면서 20여년을 운전하지 않았던 내가 다시 운전대를 잡고, 아내와 함께 번갈아 운전하면서 다니다 보니 대형 사고도 당하여 목숨까지 위태로운 일을 겪기도 하고,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비빔밥 1인분 시켜 아내와 함께 먹으며, 커피 한잔으로 입맞추듯 나누어 마시며, 바퀴벌레 나오는 모텔에 잠을 자고, 그렇게 파주에서부터 해남까지 안 가본 곳이 없이 사역을 했다. 그러다가 종종 대형교회 부흥사경회 강사로 초청을 받고 현실적 위로를 받기도 한다. 그렇게 만감이 교차되는 제 2의 목회를 한 주도 쉼 없이 약속된 일정으로 헌신하면서 그야말로 눈물행전을 쓴다. 젊은이들은 도시로 다 나가버리고 교회를 지키는 산골 농어촌 교회의 어르신들의 예배상황은 청년 때 고향교회를 방문한 듯한 감정으로 눈시울이 젖으며 말할 수 없는 예배의 감동을 경험한다. 80이 넘으신 은퇴 장로님이 찬양인도를 하고 회중석의 가장 젊은 성도가 예순이 넘었다. 농어촌 산골교회를 담임하는 목사님 전도사님들의 목회 현장은 도시목회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열악한 상황이지만 순박하고 성실한 목회현장의 사명수행의 면면이 온 몸으로 느껴지면서 내 눈은 저절로 젖어든다. 그렇게 은퇴 후의 말씀 사역은 대형교회 담임목사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예배의 감동, 만남의 기쁨, 섬김의 축복, 헌신의 감격을 경험한다. 목회 현장이야 어딘들 다를 바 있겠는가? 때때로 주저앉아 일어설 기력도 없는 후배 목회자들에게 牧會와 凩會의 경험담을 들려주어 위로와 격려와 함께 새로운 목자로서의 정신자세를 회복하게 해 주고, 종종 사모님과 아이들에게 용돈을 주고, 내 품에 안고 축복기도를 하고, 점심식사 시간이면 국밥이든 국수이든 교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다보면 시무했던 교회 목회추억이 떠오르고 그러다 보면 몇 숟가락을 뜨다가 밀려오는 감정을 주체할 수 없어 그냥 식탁에 엎드려 흐느껴 울어버리는 일도 있다. 그런 시간이면 서로가 말이 없지만 손을 잡아주면서 말 없는 위로와 사랑을 나누면서 진정한 교회 공동체의 아름다움을 공유한다. 이 모든 감동과 행복은 은퇴후에 경험되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다. 그렇다. 톨스토이가 만년에 쓴 ‘세 가지 질문’에서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때가 언제냐? 지금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사람이 누구냐? 지금 내가 만나는 그 사람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일이 무엇이냐? 지금 내가 만난 그 사람에게 선을 베푸는 것이다.>라는 깨우침을 나의 삶에서 실천한다는 것 보다 귀한 것은 없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작은자란 ‘지금 나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말한다. 그 사람이 밉든 사랑스럽든 나에게 유익하든 해악스럽던 그가 나를 필요로 할 때 그를 도울 수 있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다. 나의 필요에 따라 가까이 했다가 필요치 않을 때 어김없이 멀리하고 아프게 하는 치졸스러운 삶에서 은혜와 사랑의 가치개념을 논할 수는 없다. 이해타산에 빠르고 주판 굴리는데 빠른 삶이란 십자가 사랑의 아름다움이 연주될 수 없다. 오늘도 해는 뜨고 진다. 겨울이 멀어지고 봄이 가까이 오고 있다. 주님이 오실 날이 가까워지는 느낌을 지울 수 없는 요즈음 내 삶이 얼마나 남아있을지는 모르지만 제 2의 목회사역을 어제처럼 오늘도 오늘처럼 내일도 감당하며 행보한다. 은퇴시에 언론사 인터뷰를 하면서 내가 들려주었던 ‘목사의 직무는 은퇴가 없습니다.’는 말을 오늘도 마음속으로 읊조리면서 이 번 주일도 몇십명 모이는 교회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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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2-11
  • [함께생각해봅시다] 설교는 되도록 짧아야(4)
    “설교는 짧아야한다면서 글을 길게 쓰면 어떻게 되는 거야”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면서 이 문제에 관해 한 번 더 쓴다. 이유는 설교를 길게 하는 것이 여간 큰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교회에서 있었던 얘기다. 장로들이 “목사님 목회자 세미나에 가시든지 어디 가서 설교를 좀 더 짧게 하면서 은혜를 끼치는 법을 배워 오시면 좋겠습니다. 어디 다녀오십시오” 하면서 건의했다고 한다. 목사가 그 건의를 듣고 기분이 어떻겠는가. ○○교회에서는 장로 한분이 얼마 후에 은퇴하게 되는데 그가 말하기를 “우리 목사님 설교 길게 하는 것을 고칠 도리는 없고 교인들은 싫어하니 내가 은퇴할 때에 목사님도 조기은퇴를 하면 얼마나 좋겠는가. 앞으로 정년은퇴까지는 ○년이 남았는데 교회 일이 큰일입니다” 하더란 말을 들었다. 나는 이와 비슷한 말들을 너무도 많이 듣고 있다. 이같이 설교가 너무 길어서 교인들이 싫어한다는 말은 많이 듣고 있으나 설교가 짧아서 교인들이 싫어한다는 말은 지금까지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다. 설교가 짧아서 좋다는 말은 수없이 들어왔다. 근래에도 ○○교회가 하는 말이 “우리 교회 목사님은 설교가 짧으면서도 던져주는 것이 있는데 너무 너무 은혜가 되고 교인들이 모두 좋아합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다. 사람이 한 가지 일에 정신을 계속 집중하는 시간은 대체로 30분 이내라는 말이 있다. 그래서 그런지 모르겠으나 설교도 30분 가까이 되면 시계를 보기도 하고 주보를 펴서 읽어보기도 하고 분위기가 조금씩 산만해지기 시작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 까닭에 나는 “설교에 관한 특별한 은사를 받았으면 모르겠으나 설교를 되도록 짧게 하는 것이 좋다”고 말한다. 설교를 잘 하면서도 길게 하면 손해를 보는 경우가 있다. 다른 교회 교인에게 “우리 목사님은 설교를 길게 하신다” 이렇게 말하면 단순히 시간적으로 길다는 뜻인데도 듣는 이는 달리 듣는다. 설교가 은혜가 되면 길다고 하지 않을 텐데 설교가 은혜가 안되는가 보다 이렇게 생각한다. 그러므로 어느 면으로 보든지 설교는 되도록 짧게 해야지 길게 할 필요가 없다고 본다. 여기서 내가 하는 말은 설교학적으로 하는 말이 아니다. 90이 넘도록 들은 대로 하는 말이고 겪어본 대로 하는 말이다. 독자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한지요. 함께 생각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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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2-11
  • [시사칼럼] 우한은 말이 없다
    작년 12월 12일부터 중국에서 시작된 일명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한 감염 질환 때문에 최초 발원지로 추정되는 중국의 우한(武漢)에 지구촌의 이목이 집중되었습니다. 지리적으로나 역사적으로도 ‘중국의 배꼽’이라 불리던 지역이 갑자기 세상의 중심이 된 느낌입니다. 인구 1,000만이 넘는 이 거대도시는 이로써 <우한 폐렴>이라고 하는 그리 달갑지만은 않은 족적을 역사에 추가하게 되었습니다. 우한 일대는 양쯔강(장강)과 한수(한강)가 만나는 지역이기도 합니다. 흐르는 강물은 말이 없습니다. 얼마나 많은 일들이 수천 년 동안 일어났을까요? 얼마나 많은 민족이 명멸을 거듭하고, 얼마나 많은 크고 작은 전장(戰場)이 벌어졌다가 치워지고를 반복해 왔을까요? 도도한 물줄기는 그 모든 기억을 품고 흘렀습니다. 땅도 강을 닮아서인지 일체 말이 없습니다. 땅은 강과는 다른 방식으로 기억을 저장합니다. 무너진 성곽 바위와 고색이 창연한 한적한 거리 어딘가에 분명히 품고 있을 그 기억 속에서, 우한은 말이 없습니다. 본래 우한은 하나의 도시가 아닙니다. 무창(武昌), 한구(漢口), 한양(漢陽)의 세 지명이 홀연 합쳐져서 탄생한 메가시티(megacity)입니다. 천재지변이나 피치 못할 사정으로 하나 된 것이 아닙니다. 1949년 중국 공산당이 승리하면서 세워진 일종의 정치적 기념비 같은 상징이 우한입니다. 아직도 각각의 도시들을 잊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무창(武昌)하면 청나라 왕조를 무너뜨린 1911년 신해혁명의 도화선이 된 곳으로 유명합니다. 1927년 무렵에는 국공합작과 국민당 파벌 투쟁의 진원지였습니다. 우리와 관련된 도시도 있습니다. 한구(한커우)입니다. 1932년 윤봉길의 의거 이후 대한민국임시정부가 대장정을 떠나면서 잠시 정착했던 도시 중 하나가 한구입니다. 1938년 동래 출신의 여성독립운동가 박차정 여사가 부군 김원봉과 함께 조선의용대를 창립한 곳이기도 합니다. 또한 한양과 한수(한강)는 조선의 한양과 한강을 연상시키는데, 그 옛날 어디가 어디에 먼저 영향을 주었는지, 우한은 역시 말이 없습니다. 우한 일대는 중국 기독교 역사에서 있어서도 중요한 지역입니다. 공산화 이전 이 일대에서 허드슨 테일러의 내지선교회(CIM)가 심혈을 기울인 결과 조선의 평양과 같이 중국 복음의 중심지 역할을 감당하던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1950년대 반기독교 정책으로 말미암아 삼자교회 몇 곳(救世堂, 荣光堂, 武昌堂, 青山堂)을 제외한 나머지 교회는 완전히 와해되고 말았습니다. 오랜 세월이 흘러 1990년대 중국이 개혁개방노선을 취하면서 우한 일대는 다시 한 번 복음의 저력을 보여주기 시작합니다. 선교사들이 다시 들어왔고 수십 개의 교회들이 생겨나면서 신도 수가 급증했습니다. 그러다가 결국 2019년 우한은 종교정책 시범지로 지정되어 지하교회 폐쇄, 교회당 파괴, 성경 소각, 십자가 철거, 교회당 내 CCTV 설치와 국가 주석 사진 게양, 집회 봉쇄, 지도자 수감, 선교사 추방 등 일련의 조치들이 내려졌습니다. 불과 100년 동안 일어났던 복음의 밀물과 썰물을 오늘도 우한은 말없이 그저 바라보고만 있습니다. 이와 같이 산하(山河)는 백년도 못살 인생들이 일으키는 삶의 급류를 그저 말없이 굽어봅니다. 산하조차 그러하다면 산하의 주인은 어떠하겠습니까? 무한은 유한을 그저 바라볼 뿐이고, 영원은 순간을 그저 품을 뿐입니다. 이 땅에 친히 오신 산하의 주가 보여주신 모습이 그랬습니다. 예수님은 제자 중 많은 사람이 떠나가는 모습을 묵묵히 바라보셨고(요 6:66), 빌라도의 법정에서 대제사장들이 각종 죄목을 들어 고발할 때도 아무 대답 없이 그저 침묵하셨고(막 15:5), 십자가 위에서 숨을 거두시는 순간까지 형장의 모든 이들을 그저 묵묵히 지켜보고 계셨습니다(눅 23:34-35). 삼국시대의 전투들, 20세기의 순교, 부흥과 박해, 그리고 코로나(왕관) 바이러스, 우한이라는 땅을 무대로 벌어졌던 이 모든 역사 가운데 왕의 왕께서는 말이 없으시지만, 모든 일은 결국 주의 섭리와 경륜을 따라 흘러가게 되지 않겠습니까? 우한이 말이 없는 까닭입니다. 격류가 일고 있는 이 산하 또한 말이 없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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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2-11
  • [성경인물탐구] 하나님의 영광을 본 자 아론
    아담과 하와의 범죄로 말미암아 인간은 하나님과 멀어지게 되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 하기 이전에는 언제나 인간은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한 인간이 죄라는 거대한 장애물이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가로 놓여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가 없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러한 인간의 상태를 그냥 두시지 아니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 안에 선택된 자들은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올 수 있도록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하나님께 선택된 자들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자격을 부여받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선택된 자들은 성결함을 입어야 합니다. 구약에서 제사장들이나 레위인들, 그리고 이스라엘 자손들이 하나님께 나아가려면 반드시 짐승을 잡아 자기 죄를 대속해 성결함을 입어야 했습니다. 신약에 사는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성결함을 입었고 의롭다 함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 선택함을 받고 성결케 된 자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행위나 자세가 없으면 이 사람 역시 하나님 앞에 가까이 갈 수가 없습니다. 순종은 선택받고 성결함을 입은 사람에게 마땅히 있어야 할 것입니다. 성경은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좋은 제사라고 하여도 그 제사를 드리는 사람이 순종의 사람이 아니라면 모든 것이 헛된 일인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따르는 자만이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본 자는 하나님의 사람 모세였습니다. 하나님은 많은 사람 중에서 모세를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모세에게는 많은 은총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모세는 하나님과 대면하여 이야기를 한 사람이었습니다. 이러한 그가 하나님의 영광을 본 것은 어쩌면 지극히 당연한 것이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시내 산에 올라 하나님의 영광을 본 자는 모세를 비롯하여 아론과 그의 두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있습니다. 아론은 모세의 형으로서 이스라엘의 대제사장으로 하나님께 세움을 입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두 아들도 제사장으로 세움을 입었습니다. 이들은 백성의 죄를 하나님 앞에 가져가서 사죄 받도록 하는 중보의 역할을 담당하였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한 특권을 받은 자들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인도하심을 계속 받을 수 있는 민족으로 계속 유지되도록, 성결케 하는 일들을 하였습니다. 이러한 그들도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자리에 참예한 것입니다. 칠십 인의 장로들은 모세를 중심으로 이스라엘 공동체의 신앙과 삶을 이끌어 갈 지도자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모세와 아론이 이끌어 가는 데 여러모로 협력해야 할 존귀한 자들로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던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스스로 긍지를 가지게 되고 또한 백성들로부터 존경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모세와 아론을 비롯하여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본 곳은 시내 산이었습니다. 시내 산은 하나님께서 여러 번 강림하신 성산이었습니다. 시내 산에 올라간 모세와 아론, 그의 두 아들과 칠십 인의 장로들은 이 땅에서는 도저히 볼 수 없는 찬란한 영광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이스라엘 하나님을 보니 그 발아래에는 청옥을 편 듯하고 하늘같이 청명하더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발아래의 상태는 영광으로 가득 찬 것입니다. 이렇듯 하나님의 통치 세계는 영광에서 영광으로 이르는 세계입니다. 그들은 지금까지 경험해 보지 못한 영광의 세계를 바라보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우리 성도들이 장차 들어갈 천국의 모습이 영광과 찬양과 기쁨으로 가득한 곳이라고 성경은 우리에게 말해 주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지도자들은 시내 산에서 찬란한 하나님의 영광된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온 우주의 주관자이신 여호와 하나님과 함께 먹고 마시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을 보고 먹고 마셨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매우 존귀히 여겼다는 말과 같습니다. 하찮고 보잘 것 없는 우리 인간을 하나님께서 존귀히 여기시고 사랑해 주신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가슴이 벅 차는 놀라운 축복입니다. 우리도 이 축복의 대열에 다 참여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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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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