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8(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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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5학년도 동서가족 연합예배 가져
    2015학년도 동서가족 연합 감사예배가 지난 11월 21일(토) 오전 11시 대학교회에서 있었다.한 해 동안 동서학원에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모든 동서가족들이 대학교회에 모여 예배를 가지는 행사이다. 특히 올해는 동서학원이 설립된 50주년이라 더욱 뜻 깊은 행사였다.대학교회 찬양단의 찬양으로 시작된 감사예배는 설립자와 이사장을 위한 합심기도, 대표기도(최훈규 대학교회 담임목사), 3개 대학 연합 성가대의 특송, 대학교회 시온성가대의 찬양이 이어졌다. 이어 강단에 오른 조정민 목사(베이직교회 담임목사, 전 MBC 뉴스데스크 앵커)는 ‘하나님의 뜻’이라는 제목으로 설교했다. 조 목사는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며, 범사에 감사해야 한다. 기록된 말씀을 무시하지 않고, 생명의 예수님을 붙잡고, 성령을 따르는 인생 그리고 동서학원이 되라”고 전했다. 축도에 이어 장제국 동서대 총장이 인사말을 전했다. 한편, 동서대 교목실이 주최한 2015학년도 성경암송대회가 11월 20일(금) 오후 1시 대학교회에서 열렸다. 올해는 로마서 12장을 암송했다. 지난해 보다 20명이 증가해 한국어 26명, 외국어 17명, 총 43명의 학생이 참가했다. 수상자는 ▲최우수:김종호(중국어) ▲우수:이유리(일본어), 김민지(영어), 김성수, 김지예(한국어) ▲장려:차지은, 허경원(한국어), 강신진, 안톤(영어) 학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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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12-02
  • 12월과 함께 구세군 자선냄비 시작
    12월 시작과 함께 구세군 자선냄비도 시작됐다. 지난 12월 1일(화) 오전 11시 롯데백화점 부산본점 정문에서 2015 구세군 자선냄비 시종식을 가졌다. 이날 시종식은 김경태 부산NCC 총무가 기도, 손석영 부산경남지방장관이 인사, 서병수 부산시장과 이해동 부산시의회의장, 김석준 부산시교육감과 안용운 부산성시화운동본부장이 축사를 전하고 이성구 부산기독교총연합회 대표회장이 축도를 했다. 이어 내빈들이 시종 및 타종시범을 선보였다. 구세군 자선냄비는 12월 31일(목)까지 한달간 진행되며, 부산경남 26개를 비롯해 전국 360여개의 자선냄비가 설치됐다. 부산경남 연 7천명을 비롯해 전국 연 6만명의 자원봉사자들이 함께 수고한다. 2015년 목표액은 부산경남지역 3억5천만원을 포함해 전국 130억원을 목표로 모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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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12-02
  • [목회자칼럼] 내 안에 숨어 있는 5가지 적(敵)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원수가 집안 식구니라”고 말씀 하신 적 있다.(마10:36) 그렇다면 나를 무너뜨리는 적도 밖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나 자신 일 수 있다. 즉 내안에 나를 무너뜨리는 적이 도사리고 있다. 그 첫번째가 ‘욕망’이요 두번째가 ‘의심’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의심하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하신다.(요20:27) 오직 믿음으로 기도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 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定)함이 없는 자로다.(약1:6~8) 주님은 의심하는 신자를 책망 하신다. 이것은 의심하는 것은 백해무익하기 때문이다. 분명한 사실이요 진실함에도 불구하고 의심하는 것은 무엇보다 자신에게 불행이다. 예를 들어 사람을 의심하는 〈의심병〉, 아내를 의심하는 〈의처증〉, 남편을 의심하는 〈의부증〉, 하나님을 의심하는 〈불신의 病〉은 정말 무서운 병이다. 이런 병은 고치기가 어렵다. 이런 병에 묶여 고통 하는 본인도 불쌍하지만 의심 많은 사람과 함께 하는 것도 매우 고통(苦痛) 스럽다. 〈의심 많은 사람〉과는 하나님께서도 함께 일 하실 수 없다. 이스라엘은 400~430년간 이집트에서 〈나그네와 노예 생활〉로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었다. 때가 되어 그들은 〈출애굽〉이라는 인류 역사에서 가장 드라마틱한 경험을 직접 체험하면서 자유와 해방을 얻었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역사였다. 그리고 출애굽은 이스라엘 백성 자신들이 눈물로 간구하고 학수고대하던 바였다.(출2:23~25) 하나님께서는 〈열 가지 재앙〉을 애굽 전역에 내리시고 엄중한 경고의 말씀을 모세와 아론을 통하여 애굽 왕(바로)에게 전달 하셨다. 그리고 마침내 「홍해를 육지처럼」건너는 대 역사를 통하여 이스라엘을 애굽으로부터 완전히 해방 시켜 주셨다. 〈홍해 기적 사건〉이 얼마나 장엄하고 감격스러운 하나님의 은총이었던지 시편 78편에는 웅장한 서사시로써 그 사건이 다시 그려지고 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이 장엄하고 분명한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서도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의심하고 원망하였다. 애굽의 바로 왕 손아귀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해내셨다면 〈여호와이신 하나님(출3:13~15)〉께서 어렴 약속의 땅으로 인도해 주지 않으시랴! 그럼에도 이스라엘은 광야 길에서 끝없이 의심하고 불평하였다. 그 결과 이스라엘은 외부의 적 때문에 망한 것이 아니고 자신들의 〈의심 병〉 때문에 광야에서 다 망하고 말았다. 출애굽 세대는 오직 〈여호수아와 갈렙〉만이 흔들리지 않는 〈확신 ; 여호와 신앙〉을 붙들고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갔다. 그리고 출애굽 이후 광야에서 태어난 다음 세대들이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들어가서 이스라엘의 새로운 역사를 쓰기 시작 하였다. 그렇다 의심은 무서운 질병이다. 이 병은 원래 마귀가 퍼뜨린 전염병이다. 순식간에 널리 퍼져 나가는 무서운 병이다. 그러므로 〈의심병 환자〉를 경계하고 피해야 한다. 의심 병은 옆에 있는 사람을 정말 못 살도록 하고 숨통을 막는다. 의심 병은 하나님으로부터 내려오는 수많은 은총과 축복들에 눈을 감게 한다. 그리고 자신의 인생을 초라하고 빈곤하고 비참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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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12-02
  • [문화] 최병학 목사의 문화펼치기⑩
    “눈이 있는 한 인간의 세계는 파국을 면할 길이 없다. 종교적 용어를 구사한다면 인간에게 구원은 없다.” (임철규,『눈의 역사 눈의 미학』)“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고린도후서 4장 18절) 1. 눈의 역사에서 사람만이 ‘보는 것’을 통해 사유를 한다. 따라서 인식의 전제조건인 보는 것이 없다면 인간의 모든 사유, 역사, 문명은 불가능 할 것이다. 이해를 청각을 통해 수용했던 히브리인들과 달리 그리스인들은 시각을 통해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그리스어 ‘나는 안다(oida)’는 ‘나는 본다(eidon)’의 과거로 ‘나는 보았다’와 같은 뜻이다. 즉 보는 순간 안다, 보는 것이 아는 것, 감각 작용이 바로 인식작용으로 이어진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티마이오스』에서 플라톤은 시각을 가장 고귀한 감각이라 부르며 자연계에 대한 가장 명확한 지식은 시각에서 나오며 인간은 시각을 통해 제반 지식과 지혜를 얻는다고 생각했다. 사실 플라톤의 이데아(idea)도 ‘내가 보다(horao)’의 제2단순과거 부정사인 ‘보여진 것(idein)’의 과거분사가 아니던가! 그러나 우리가 어떤 대상을 인식할 때 대상 전체를 인식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우리가 안다고 할 때 ‘보지 못하는’ 것을 배제하게 된다. 보지 못하는 것, 알지 못하는 것을 타자화하고, 비(非)동일적인 것으로, 반(反)정체성으로 규정하는 인식의 폭력은 이렇게 눈의 역사와 함께 진행된다. 대지에 발을 붙이고 하늘을 응시하고 있는 거대한 눈과 같은 저 로마의 원형극장을 보라.『참회록』에서 “눈의 음욕”을 경계한 어거스틴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중세 시대는 성인들과 순교자들의 삶을 성상과 스테인드글라스, 프레스코화, 목판화 등을 통해 눈에 보이도록 만들었다. 눈의 이성적 능력을 비판한 바울의 가르침(고후 4:18)을 따라 종교개혁가 칼빈은 ‘믿음이 눈을 감게 하고 귀를 뜨게 한다’고 말하며 청각만이 구원의 영원성을 담보할 수 있다고 했으나, 가톨릭은 성상, 성화, 십자가 이외에도 눈부신 성당, 각종 대회, 축제, 가면, 장관을 이루는 분수 등의 볼거리를 통해 시각문화를 창조했다. 이후 18세기 계몽주의 시대는 시각을 가장 고귀한 감각으로 평가하며 ‘영혼과 가장 빠른 교섭을 가지는’ 시각에 대해 예찬한다. 그러나 낭만주의에 이르러 눈의 잔치는 종교개혁 이후 최대의 총체적 반격을 받게 된다. 윌리엄 워즈워스는 자서전적인 시집『서곡』에서 이렇게 눈의 폭력을 지적한다. “우리들 감각들 가운데 가장 폭군적인 감각”이며 “그 힘이 잠들 수 있는 어떠한 표면도 발견할 수가 없었다”고 애통해 한다. 『실낙원』의 저자 존 밀턴 역시 바깥을 향한 육체의 눈은 언제나 진정한 실체를 보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진정한 실체를 볼 수 있는 것은 내면을 향한 눈이며 이러한 눈은 신의 은총으로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대, 천상의 빛이여 마음속에 빛나라, 그리고 마음의 모든 능력을 비추어라. 거기에 눈을 심고, 거기서 모든 안개를 말끔히 거두어내라. 인간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것들을 내가 보고 말할 수 있도록.” 실존주의에 와서는 타자의 시선은 지옥으로 변한다. 타자는 자신의 시선을 통해 나를 바라보면서 나의 세계를 훔쳐가고 동시에 나에게 객체성을 부여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타자는 항상 나와 투쟁 관계에 있을 수밖에 없다.『밀폐된 방』에서 사르트르는 가르생의 목소리를 통해 이렇게 말한다. “나를 잡아먹을 듯 한 이 시선들… 아! 당신들은 고작 두 명뿐이었는가!… 훨씬 더 많다고 생각했는데. (그는 웃는다.) 이것이 지옥이지. 전에는 전혀 생각을 하지 못했었지… 당신들도 기억하겠지. 유황, 장작더미, 쇠꼬챙이… 아! 다 쓸데없는 얘기야. 쇠꼬챙이 같은 것은 필요 없어. 지옥, 그것은 타인들이야.” 2. 예술의 눈으로 타자가 갖는 이 새로운 지위를 보여주기 위해 사르트르는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에서 내가 나에 관한 진실을 알기 위해서는 반드시 ‘타자를 거쳐야만 한다’고 말한다. “무엇이건 나에 관한 진실을 얻으려면 나는 반드시 타자를 거쳐야만 한다. 타자는 나의 존재에 필수불가결하다. 그뿐만이 아니라 내가 나에 대해 가지는 인식에서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따라서『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마르셀 프루스트는 이렇게 말한다. “오로지 예술을 통해서만 우리가 보고 있는 세계와는 다른, 딴 사람의 눈에 비친 세계에 관해서 알 수 있다.” 철학자 강신주 박사의 부연 설명에 의하면 ‘기형도의 시를 통해 요절한 그의 속내를 이해하는 것’, ‘카프카의 소설을 통해 여린 작가의 고통에 참여하는 것’, ‘고다르의 영화를 통해 현대 문명을 진단하는 영화감독의 시선을 맛본다는 것’, ‘피카소의 회화를 통해 그의 울분에 공명한다는 것’, ‘슈베르트의 피아노 소나타를 듣고 그의 고독을 맛보는 것’은 바로 지금 내가 보고 있는 세계와 다른 세계를 보는 것이라는 말이다. 그러나 이러한 ‘동일한 세계를 달리 표현하는 타자와 만나는 게 얼마나 힘든가.’ 눈의 역사를 통해 드러나듯 타인을 지옥으로 만드는 것이 눈이며 이러한 눈이 선한 눈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잃어버린 시간과 눈을 되찾아야할 것이다. 거기에 예술의 길이 준비되어 있다. 문화신학자 폴 틸리히(P. Tillich)는 예언자들이 경험하는 신적 현전(Divine Presence)과 예술적 경험 사이에는 유비(analogia)가 존재한다고 믿는다. “예술은 궁극적 실재에 대한 한 개인의 체험의 표현”이라는 말은 바로 그러한 맥락 하에 나온 말이다. 예술 작품을 보고, ‘계시적 탈자(revelatory ecstasy)’를 경험하며, 그 작품의 아름다움 안에 ‘아름다움 그 자체(Beauty itself)’가 있었다고 말하는 틸리히는 “그 순간은 나의 삶 전체를 감동시키고, 인간 실존의 해석의 열쇠를 주었다. 그것은 내게 생명의 기쁨과 정신적 진리를 가져다주었다”고 한다. 사실 시각예술과는 거리가 먼 개신교 신학자인 틸리히는 개신교는 ‘말’에 묶여 있으며 시각예술과는 극히 의심스런 관계에 있다고 지적하며 “개신교의 역사를 보면, 종교음악과 찬미시에서는 초기교회와 중세교회의 성취를 능가하기도 했으나, 시각예술에서는 그 창조적인 힘을 잃었다. 그러나 청각과 시각은 똑같이 중요한 것”이라는 말은 오늘 우리가 선한 눈을 찾는 지름길이 될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눈의 예술에 대한 개신교의 거부 배경에는 우상숭배로 되돌아가는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다. 그러나 영의 본성은 그 현존의 체험에서 눈의 배제를 반대한다. 왜냐하면 영은 모든 차원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폴 틸리히는 다음과 같이 눈의 예술, 혹은 예술의 눈을 간과한 개신교의 역사를 통탄한다. “개신교적 삶의 맥락 안에서, 눈의 예술의 결핍은 역사적으로는 이해할 수 있지만, 체계적으로는 지지할 수 없는 것이며, 실천적으로는 후회스런 것이다.” 3. 구별하는 눈과 공생하려는 눈 사이 나치즘을 공공연하게 대변한 유명한 정치학자이자 공법학자인 독일의 카를 슈미트의 대표적인 저작『정치적인 것의 개념』은 ‘정치적인 것은 적과 동지를 구별하는 것’이라는 명제를 우리들에게 보여준다. “도덕적인 것에는 ‘선과 악’의 대립, 미학적인 것에는 ‘미와 추’의 대립이 그 본질적인 규준이 되듯, 정치적인 것은 ‘적과 동지’의 구별과 대립을 그 본질로 삼는다”는 슈미트의 말에서 적이란 ‘사적인 경쟁 상대’가 아니라, ‘공적인 투쟁의 대상’으로, 철저하게 현실적이고 실제적인 존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반면 물소신학(Water Buffalo Theology)으로 유명한 태국의 일본인 선교사 코스케 코야마(Kosuke Koyama)는 “모든 것은 거미줄처럼 연결되어 있습니다. 고립된 문화, 언어, 종교는 없습니다. 이 연결되어 있음은 생태학, 도덕, 신학의 양식입니다. 나는 ‘내가 내 형제를 지키는 자입니까?’라는 물음에 단언하여 말하고자 합니다. 내 자매와 형제로부터 분리된 ‘나’는 없습니다”라고 말한다. 구별하는 눈을 넘어 공생하려는 눈을 제시한 것이다. 코야마 박사가 언어, 문화, 종교의 경계를 넘어 소통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가난하고 약한 이들의 고난에 동참하려 했던 그의 삶 때문이었다. 시속 3마일로 걸어가시는 분이라는 물소신학을 통해 태국적인 상황 신학인 ‘물소신학’은 불교라는 종교 문화적 전통사회에서 기독교적 토착신학을 발전시키려는 변증법적이며 선교적 신학이었다. 한완상 전 부총리는 한때 원수와의 선한 관계, 곧 평화의 관계를 만들기 위해서 이렇게 말한바 있다. “악이 우리 속에도 존재하듯이, 원수 속에도 선이 존재한다는 진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만일 냉전근본주의 기독교인들이 확신하듯이 우리만 선이고 원수는 악이라면, 예수께서 원수를 사랑하라고 명령하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명령은 악을 사랑하라는 뜻이 되기 때문이다. 오히려 원수를 사랑함으로써 원수와 선한 관계, 곧 평화의 관계를 만들라고 한 것이다.” 사실 사도 바울도 원수를 사랑할 때 나타나는 놀라운 효과를 ‘머리 위에 숯불을 쌓는 것’이라 말한바 있다. 원래 머리 위에 숯을 얹는 행위는 죄를 강제로 자백받기 위한 고문행위였다. 그런데 바울은 이를 양심을 움직이는 사랑의 행위로 재해석하였다. 쉽게 말하자면, 원수 속에 꽁꽁 얼어붙다시피 한 선한 마음, 곧 양심이 상대방의 사랑을 받음으로써 제대로 작동하게 된다는 진실을 부각시킨 것이다. 이런 양심의 작동은 원수 간의 증오의 관계를(곧 구별하는 눈) 대화와 화해의 관계(공생하려는 눈)로 바꾼다. 그래서 악순환은 선순환이 되고, 적대적 공생관계가 우호적 상생 관계로 아름답게 변화되는 것이다. 따라서 구별하려는 눈이 공생을 지향하는 눈으로 변화되어야만 참된 신앙의 경지에 이르는 것이 아닐까? 여기서 예수의 눈이 우리들을 바라본다. 4. 예수의 눈: 바보의 눈, 역설의 눈 한완상의 『바보예수』에는 바보들의 특징을 이렇게 말한다. “보통 사람들, 특히 영악한 보통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는 사람입니다. 보통사람들이 듣지 못하는 것을 듣고, 말하지 못하는 것을 용기 있게 말하는 사람입니다.” 사실 성경에는 수없이 많은 ‘바보 예수’의 이야기들이 있다. 예수의 비유 말씀에는 꼴찌에 대한 진한 사랑의 표현이 있다. 탕자 같은 존재, 경멸받았던 이방인, 여성, 죄로 인해 중병에 시달리는 죄인들, 지체장애자로 절망 속에 사는 사람들에 대한 예수의 지극한 배려와 사랑은 당시 율법주의자들과 기득권층에게는 바보스런 편애로 인식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가장 심각한 바보다운 선택은 스스로 죽으러 가는 메시아임을 선포한 것이다. 원래 메시아란 칭호는 당당하게 승리하는 지도자, 용기 있게 해방시키는 지도자, 신적 권위로 세상을 통치하는 지도자의 뜻을 담고 있다. 따라서 패배하는 메시아는 상상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는 자신을 승리자 메시아로 착각하는 제자들에게 ‘우아한 패배’를 역설하였다. 기독교 복음의 진수는 이것이다. “원수를 사랑하라고 산 위에서 바보처럼 말씀하셨던 예수께서 골고다 언덕에서 몸소 그 사랑을 실천하시어 바보가 되신 것”, 지금 만신창이가 된 한국 기독교에 필요한 가치가 바로 이것이 아닌가? 우리 모두가 우아한 패배의 길을 선택해야 한다. 한완상의 말처럼 모두가 승리하려 한다면 우리 안의 악이 더욱 활개 치게 되니(發惡), 우아한 패배를 선택하여 우리 안의 숨겨진 선을 발선(發善)해야 한다. 이때 평화가 깃들며 함께 이기는 상승(相勝)과 함께 사는 상생(相生)이 이뤄질 것이다. 3세기경 외전인 『요한행전』에 의하면 예수는 단 한 번도 눈을 감아본 적이 없다고 한다. 최후의 심판을 위해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을 낱낱이 지켜보는 예수의 이러한 감시의 눈은 중세 사람들은 ‘정의의 눈’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예수가 지상에서 보낸 삶은 가난한 이들, 땅의 사람들(암하레츠)을 위한 것으로 보면 예수는 그들의 고통에 단 한 번도 눈을 감을 수 없었던 것은 아닐까? 도처의 인간들이 경험하는 숱한 고통 때문에 눈을 감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 고통이 전하는 아픔과 비통함에 눈을 감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십자가에서 예수는 마침내 눈을 감았다. 선한 눈을 죽인 인간들의 악한 눈이 이제 세계를 지배하게 되었다. 철학자 아도르노는 ‘암흑과 절망적인 사태에 직면했을 때 책임 있는 철학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시도는 그 사태를 구원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이라고 말한다. 파국으로 치닫는 역사의 수레바퀴에서 부활의 신앙을 외치는 그리스도인들이야말로 암흑과 절망을 구원으로 바라보는 역설의 눈을 가졌다. 어거스틴의 다음의 말은 따라서 역설의 눈을 가진 자가 어떻게 삶을 살아가야 하는지를, 눈을 어떻게 떠야하는지를 잘 보여준다. “모든 이는 자기가 사랑하는 존재와 똑같은 존재가 된다. 그대가 땅을 사랑하는가? 그대는 땅이 될 것이다. 그대가 신을 사랑하는가? …… 그대는 신이 될 것이다.” 최병학 목사 (남부산용호교회 담임, 경성대 사회과학연구소 학술연구 교수)
    • 문화
    2015-12-02
  • [김기현 목사] 책 읽는 자녀로 키우는 법
    뜻하지 않게 자녀 양육 강사 노릇을 하는 중이다. 아들과 함께 「그런 하나님을 어떻게 믿어요?」(SFC)를 쓴 다음, 이곳저곳에서 어떻게 하면 책 읽는 자녀로 키우느냐며 강의를 부탁한다. 그러니까 ‘그런 하나님을 어떻게 믿어요?’ 라고 쓰고는 ‘그런 아들을 어떻게 키워요?’ 로 읽는 형국이다. 아들의 이러저러한 신앙 고민에 대한 신앙 변증서가 자녀 양육서가 되었다고 출판사 편집자랑 같이 웃었다. 첫째는 태교부터 시작했다. 한의대를 다니던 선배의 조언을 따라 매일 10분가량 아내의 배에 손을 대고 이야기를 해 주었다. 그게 태담이라는 것을 최근에 알았다. 아내는 성경과 잔뜩 빌려온 동화책을 많이 읽었다. 특히 시편과 잠언, 그리고 신약성경을 반복해서 낭독했다. 나는 커리큘럼을 만들었다. 예컨대, 월요일에는 철학, 화요일은 신학, 수요일은 문학, 목요일은 역사, 금요일은 음악, 토요일은 성경, 일요일은 예배, 뭐 이런 식이었다. 태아 때부터 온갖 철학자와 신학자 이야기를 들어서 그런지 아들은 결국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하고 영문학을 복수전공하여 신나게 놀면서 즐겁게 공부한다. 둘째, 말을 많이 해 주었다. 아이가 처음 집에 왔을 때, 아들을 가슴에 안고 온 방안을 돌아다녔다. 이 방은 엄마, 아빠의 침실이란다. 여기는 화장실인데 얼굴과 몸을 씻는 곳이고, 네가 여기서 목욕을 할 거야. 아, 저 끝 방은 아빠가 책을 보고 글을 쓰고, 설교를 준비하는 곳이야, 라며 귀에 대고 속삭여주었다. 내 품에 안겨 잠이 들 때는 ‘사랑의 주님이 날 사랑하시네’를 주구장창 불렀고, 잠이 깰 때는 내가 생각한 것, 본 것, 그리고 지금 주변의 풍경과 상황에 대해 내 나름의 관찰과 해석을 곁들여 속살거렸다. 「그런 하나님을 어떻게 믿어요?」에서 아들의 어휘력과 문장력에 대해 감탄하는 것을 보면 분명 효과가 있었지 싶다. 셋째, 입이 아프도록 책을 읽어주었다. 무릎에 앉히고는 다리가 저리도록, 입이 아프도록 읽고 또 읽었다. 예외 없이 경험하지 않는가. 아이들은 반복을 사랑한다. 수십, 수백 번을 읽다보면 나는 지쳐도 아이는 즐겁다. 동화책 속의 인물의 목소리나 동물 소리를 어설프게나마 흉내 내며 읽노라니 턱이 얼얼하다. 종종 귀찮다고 짜증을 부렸다. 하도 읽어 달라 졸라 대는 통에 졸곤 했다. 10분만 더 읽자는 것이 한 시간도 되고, 딱 한 권만 더 읽자고 했는데 서너 권이다. 그랬더니 스스로 몇 시간이고 꼼짝 않고 앉아서 책만 읽는다. 피곤하지도 지치지도 않는가 보다. 마지막으로 도서관에서 빌려주었다. 가난해서 책을 많이 못 사준 것이 아쉽다. 남들에 비하면 평균 이상이겠지만 말이다. 해서, 도서관을 애용했다. 우리 네 가족 모두 한 사람당 3권씩 12권을 빌렸다. 갖고 오는 족족 읽어대는 통에 도서관을 뻔질나게 드나들었다. 나중에는 각 10권씩, 총 40권을 대출해 주었다. 가파른 언덕 위 도서관을 무려 40권을 양 손 가득 들고 숨을 헐떡거리며 여름이고 겨울이고 오르락내리락했다. 그러다가 도서관의 추천으로 ‘책 읽는 가족’이라는 작은 상도 받았다. 그래서 그런가, 책을 정말 사랑하고 깨끗하게 읽는다. 행여 교회에서 누군가 책을 밟고 지나가거나 책 위를 넘어갈라치면 아들은 이상히 여기곤 했다. 어떤 때는 화를 낼 정도이었으니까.이것은 초등학교 저학년 때까지의 일이다. 초등학교 졸업할 때는 수천 권은 족히 읽었을 것이다. C. S. 루이스의 「나니아 연대기」는 수십 번을, 조정래의 「한강」도 탐독했다. 글쓰기 대회에서 상도 곧잘 받았다. 그렇게 책을 끔찍이도 좋아하더니 중학교 들어가서 이러저러한 반항도, 방황도 하고, 음악과 운동에 푹 빠져 지냈다. 그러다가 고등 2학년 때, 그런다. ‘나도 아빠처럼 책 읽고 글 쓰고 가르치는 인문학자가 될래요.’ 내게 방점은 ‘아빠처럼’이었다. 그래, 아빠처럼 말이다. 영리한 녀석은 내가 반대 못하게 그렇게 말했을는지 몰라도 나는 말 안 했지만 속으로 기뻐 울었다. 결국 내 아들, 딸이 책 읽는 자녀로 자라기를 바란다면, 닦달하지 말고 아빠부터 책 먼저 읽기! 그것이 책 읽는 자녀로 자라도록 하는 최고이자 최선의 방법이다.
    • 오피니언
    • 정론
    2015-12-02
  • [시내산] 보이지 않는 손길
    금년 11월은 장마철 같다는 생각이 들만큼 비가 자주 왔다. 가뭄이 심해 곳곳에서 식수난을 겪었으니 비 오는 날이 고마웠다. 만약, 4대강 개발이 아니었다면 가뭄피해는 더욱 심했을 것이라 생각하며 비오는 추수감사절을 보내면서 지난 일 년을 돌아볼 수 있어 좋았다. 이 고마운 비가내리는 날, 서울 광화문은 폭력이 난무하는 시위로 전쟁터와 같았다. 그리고 멀리 파리에는 IS의 테러로 온 세계를 긴장시키기도 하였다. 그런 토요일에 세브란스병원 암 병동에서 창밖에 내리는 비를 보면서 환우들을 위해 동료 장로님들과 찬양을 하였는데 이를 들으려 가족의 부축을 받기도하고 휠체어를 타고 방 밖으로 일부 환우들이 나오시기도 하였다. 6개 층 복도를 돌면서 순회찬양을 하는데 아련히 떠오른 생각은 오 헨리(O Henry)의 “마지막 잎새”였다. 허름한 옥탑 방에서 비바람이 심하게 몰아쳐 젖은 이파리들이 떨어지고 있는 광경을 폐렴에 걸린 존시가 바라보며 남은 이파리들을 헤아리는 힘없고 쓸쓸한 목소리가 들리는 듯 하고, 이런 존시를 간호하는 슈의 마음이 생각 속에 들어왔기에, 누가 이 환우들에게 희망을 줄 것인가를 생각하며 더욱 진지하게 찬양을 올렸다. 찬양이 끝난 후에도 계속 헨리의 그 소설이 스친다. 이웃한 동료, 최상의 걸작을 쓸 것이라 호언하여 허풍쟁이라 취급받는 버그만을 사용하였다. 비바람 치는 음산한 밤에 담쟁이 잎을 그리게 하여, 다음 날 찬란한 햇빛이 아침을 밝힐 때 슈와 존시가 잎이 떨어지지 않았다는 광경에 환호하며 삶의 희망을 갖고 일어났다는 내용이다. 물론 비바람 속에서 담쟁이 잎을 그린 버그만은 존시처럼 폐렴을 앓다가 죽었다. 이것은 친구를 위한 최상의 사랑이다.(요15:13) 지난 19일 ‘프리미어 12’ 야구 준결승 한일전이 일본 도교 돔에서 있었다. 우리나라는 9회에 극적인 역전승을 하였다. 8회까지는 승산 없을 것 같이 보였는데, 결국 위대한 승리로 감격을 누렸다. 일본은 온갖 수단을 동원하여 우리 선수단을 힘들게 하였지만 그 모든 농간을 넘은 결과이기에 더욱 감사했다. 마치 성경 에스더서에 기록 된 ‘모르드게를 죽이려든 하만의 교활한 계획’을 뒤집어, 그의 머리를 장대에 매단 것과 같은 승리였다. 우연일까? 올림픽에서도, WBC에서도 극적인 승리를 누리게 하였던 것은 자세를 낮추고 최선을 다하여 집중하였기 때문이다. 오만과 이권과 불의와 태만을 용서하지 않는 진리를 우리에게 다시 보여준 하나님의 손길이라 생각한다. 요즘 나라는 역사교과서 국정화문제로 소란스럽다. 그러나 핵심을 피한 논쟁이라 유감스럽다. 이 일의 핵심은 “국정화와 검인정”이 아니라 학생을 가르치는 내용인데, 반대 측은 그 내용은 덮어두고 계속 검인정으로 하고, 국정화는 ‘친일 독재정권의 횡포이며 그 정권을 위한 추종세력의 발로’라는 것이다. 국정화 찬성 측의 궁극적 목적은 ‘역사왜곡과 좌편향에 대하여 국가 정체성과 자긍심과 진실’인데. 이에, 반대 측이 그에 대한 언급은 않고 현행대로 검인정만 주장하는 것인바, 그 논리는 설득력이 없고, 한 나라의 국어와 국사를 중구난방 식으로 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뜻이다. 또 혹자는 건드리지 말아야 할 것을 건드렸다고 하는데, 이는 반대보다 못한 비겁이다. 일부 정치인과 지식인들과 반대론자, 우리 자녀들이 무엇을 어떻게 배우는가를 알지도 않고 낡은 이념을 학습하고 투쟁하는 역사가 우리의 역사인 냥 침묵하는 것은 직무유기다. 북의 김씨 왕조나 인권이나 빈곤과 투쟁적인 국가경영은 호도하고 우리의 근대화과정이나 경제부국을 위해 쏟은 땀방울은 무시해도 된다는 것인가? 또 구한말 신문화를 가르친 학교와 병원과 복지시설을 세우고 남녀평등 사상과 3.1운동과 성경보급을 통한 한글보급으로 개화의 공을 세운 기독교의 영향이 삭제되어도 말 않는 기독교 지도자들, 거기다 국정화 반대까지 외친 것을 보면 참으로 한심하여 존경할 수가 없다. 그러나 한일전 야구처럼 자세를 낮추고 겸손하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손길이 역사하실 것이다. 역사를 보는 기본과 공정과 진실과 정의가 공정하게 담긴 책을 출판하여 자녀들을 바로 가르쳐 자긍심을 심어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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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12-02
  • [교회회계] 교회 내부통제제도의 구축과 운영
    내부통제제도(internal control system)란 한 조직이 목적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생길 수 있는 회계적 오류나 부정 등을 사전에 방지하기 위해 설정한 절차로써, 교회회계에도 적용할 수 있다. 즉 두 사람 이상이 상호 견제 속에 업무를 분담하고, 또 실무상 내부적으로 필요한 매뉴얼이 준비되어 있을 때 효과가 배가 되어, 교회 사역이 더욱 원활하게 움직여 갈수 있다는 점이다. 본 칼럼의 목적은 교회회계 집행과정에서 일반적으로 발생할 수 있는 실무사항들을 내부통제제도의 관점에서 매뉴얼을 정리, 제시하는 데에 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회계업무의 분담과 부서 간 구분이다. 회계장부기록자와 재정집행자는 2명이상으로 하여 상호 견제 속에 업무를 추진하도록 한다. 현금은 도난, 분실, 횡령 등 다양한 위험요소를 지닌 자산이므로 사고 예방차원에서 반드시 필요하다. 회계부서는 교회규모에 따라 다를 수 있으나, 부서를 적절히 분장해 위험이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도록 편성한다. 예를 들어 전체를 관할하는 경상부서를 중심으로 건축부, 선교부, 전도부, 장학부등으로 나눔이 바람직하다. 즉 업무는 부서별로 나누어 집행하고, 재무제표는 경상부서에서 통합하여 작성하도록 한다. 둘째, 헌금계수와 수입관리이다. 주일 오전예배 후 재정부원(위 편성시 약10명)은 정해진 장소에서 헌금을 계수하고 십일조, 감사, 건축, 선교, 전도, 장학, 구제, 절기, 주일헌금 등의 금액을 확인한 후, 온라인 헌금과 합산(새벽기도회 등 모든 주중헌금 포함)하여 부서별 수입을 기록한다. 기록은 전산회계 프로그램이나 엑셀 등을 사용한다. 또한 헌금수입은 전액 월요일 오전 중으로 금융기관에 입금하고, 가능한 한 교회가 법인등록을 하여 모든 부서통장이 체계적이며 투명하게 관리될 수 있도록 한다. 법인등록이 어려운 교회는 재정부장 또는 회계담당자의 책임하에 공인인증을 개설, 관리한다. 셋째, 지출의 신청, 결재와 집행이다. 회계담당자는 사례비와 같이 매주 발생하는 고정비용을 포함해, 교육기관 등 각 부서에서 신청한 지출항목을 주일 오전 중으로 집계, 집행에 필요한 전표를 작성한다. 전표는 오후예배 후 회계담당자, 재정부장, 담임목사의 순으로 사인을 하여 최종결제가 이루어지며, 이때 주별 수입과 지출을 모두 표시한 주간 보고서가 동시에 작성된다. 결제가 완료되면 회계담당자는 주일저녁, 인터넷을 통해 각 기관과 거래처에 신청된 금액을 온라인 송금하여 회계업무를 종료한다. 즉 교회의 수입과 지출 관리는 모두 온라인 형태로 이루어져 감사자료를 확보하고, 누락이나 오류가 발생 시 언제든지 확인할 수 있는 체제를 갖춘다. 주일 현금거래는 외부강사 사례비 지급 등을 제외, 가급적 피하도록 한다. 전기료, 인터넷, 수도광열비와 같은 제세공과금은 자동이체를 하는 것이 편리하다. 넷째, 예산 및 결산과의 관계이다. 교회는 매년 11월30일을 회계년도 결산일로 하는 경우가 대부분으로, 재정부는 12월 첫째 주 예산심의 기초소위원회, 둘째 주 예결산위원회, 셋째 주 제직회 및 공동의회를 통해 예결산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준비를 하여야 한다. 또한 이때 편성된 예산은 다음연도 수입?지출 집행의 중요 기준점이 된다. 즉 예산과 비교해 각 헌금의 수입목표 달성률을 분기별로 확인하고, 지출내역 및 부서의 재정신청이 예산범위에서 이루어지고 있는지를 확인하는 중요 자료가 된다. 또한 재정부는 교회시설을 관리하는 관리부와 긴밀하게 협조하여, 건축, 사택, 차량운반구, 방송음향시설 등 교회 재산의 구입과 폐기처분, 감가상각 등의 자료를 공유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하여 효율적 관리가 이루어지도록 한다. 다섯째, 감사와 공시, 보고체제이다. 감사는 11월말 결산 후, 경상부서부터 교육기관까지 교회의 재정후원을 모든 기관과 부서를 대상으로 ①장부상의 현금예금과 기말 통장잔액 일치, ②재무제표 작성과 회계장부 표시, ③재정집행과 지출, ④영수증과 감사증거 자료의 적정성 등을 확인할 수 있도록 내부통제제도 체제를 갖춘다(제8회 칼럼 “교회 회계감사의 방법과 절차”참조). 공시와 보고는 재무제표와 주요 회계자료에 관한 정보를 교회 이해관계자에게 제공하기 위한 것으로, 제직회와 공동의회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그러나 가능하다면 당일 외에도 희망 시 관련 자료를 열람(최소 3년)할 수 있도록 비치할 필요가 있다. 다음호는 교회와 세금에 대해 설명한다. <문의 sblee6@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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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12-02
  • [시사칼럼] 우리의 성지(聖地)는 어디인가?
    1970-80년대를 거치면서 명동성당은 민주화의 성지(聖地)로 불렸습니다. 크고 굵직한 시국 사건 때면 으레 오갈 데 없는 사람들이 명동성당으로 피신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곳에 김수환 추기경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한국 천주교(天主敎)는 국내외 언론과 통신에 수없이 반복적으로 노출되었습니다. 만일 경제적으로 환산한다면 측정이 불가능할 정도의 엄청난 마케팅 효과를 누린 셈입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한국 천주교 신자는 인구 비율로는 1985년 4.6%에서 1995년 6.6% 그리고 2005년 10.9%, 숫자로는 20년 동안 186만 명에서 515만 명으로 급증했습니다(통계청 인구센서스 자료). 물론 정치적 요인이 천주교 급성장의 절대유일의 원인은 아니겠습니다만, 이미지 시대라 해도 과언이 아닌 지금 민주화를 거치면서 명동성당이라는 상징이 쌓은 강력한 이미지가 천주교 부흥의 중요한 열쇠 중 하나였다는 사실을 부인하기란 매우 어려울 것입니다. 2009년 김수환 추기경의 사망을 정점으로 명동성당은 서서히 정치적 도피처의 역할을 지양(止揚)해 왔습니다. 대신 불교의 조계사가 그 후임을 자처하고 나섰습니다. 1990년대 중반부터 각종 파업을 주도하고 쫓기던 노조원들이 숨어든 곳이 조계사였으며 최근 국사 교과서 국정화 반대 시위를 주도한 혐의로 쫓기고 있는 인사들이 피신한 곳도 역시 조계사입니다. 한 때는 “산사에 찾아온 짐승도 쫓지 않고 먹이를 주는 게 불교 정신”임을 강조하더니 언제부터인가 조계사를 ‘현대판 소도(蘇塗)’로 비유하는가 하면 이번에는 원효대사의 ‘화쟁(和諍)’ 사상을 강조하고 나왔습니다. 현재 한국 사회의 가장 뜨거운 이슈로 인한 사회 갈등을 화해하고 소통하는 중재자 역할을 자청하고 나선 겁니다. 당연히 조계사는 지금 국내외 언론에서 가장 빈번하게 언급되는 현장이 되었습니다. 조계사 내부에서 신도회가 반발하고 있습니다만 그것마저도 비중 있는 기사로 다루어지는 형편입니다. 팩트(fact)는 쉽게 사라지고 이미지(image)는 끈질기게 잔존합니다. 첫인상이 나쁘면 두고두고 그 사람에 대한 평가가 인색해지는 이유도 여기 있습니다. 무엇 때문에 명동성당이, 조계사가 논쟁의 중심지가 되었는지 사람들은 금방 잊습니다. 대신 ‘민주화의 성지’, ‘불교 정신’, ‘화쟁과 화해’와 같은 이미지만 남게 되어 있습니다. 작년 4월 실시한 한국 갤럽의 최근 조사 결과를 보면 ‘가장 호감 가는 종교’로 불교 25%, 천주교 18%, 기독교가 10%였습니다. 10년 전인 2004년에는 불교 37%, 천주교 17%, 개신교 12%였습니다. 민주화의 성지는 사라졌어도 천주교는 여전히 약진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불교계는 10년 간 잃어버린 지지율을 만회하기 위해 작금의 조계사를 상징으로 삼아 다시 한 번 이미지 전략을 세우고 실제로 이미지 구축 작업을 진행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간 외국인 승려를 부각시킨다든지 청년 멘토를 자처하는 젊은 학승(學僧)들을 중용한다든지 하는 인적 이미지 작업과 템플 스테이(temple stay)를 중심으로 하는 물적 이미지 작업을 지켜보았기 때문에 내리는 결론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성지(聖地)는 어디 있습니까? 다윗이 아둘람 굴에 피했을 때 빚진 자 원통한 자 소외된 자들이 모여들었습니다(삼상 22:1-10). 좁은 이스라엘 땅에 도피성을 여섯 개나 예비했던 것도 같은 취지였습니다(수 20:1-9). 세계에서 가장 큰 대형교회 중 몇 개가 있다고 자랑하는 한국 교회입니다. 그럴싸한 외양에 아름다운 부대시설을 갖춘 교회가 즐비한 21세기 한국 교계입니다. 그런데 왜 쫓기는 자, 피난하는 자들이 교회를 찾지 않고 다른 곳으로 향하는 것입니까? 성지(聖地)와 화해(和解)와 피난처(避難處)는커녕 왜 이토록 부정적인 이미지만 잔뜩 득템하고 있을까요? 바야흐로 이미지 전쟁의 시대라고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굳이 이미지 전략을 따로 세울 필요도 없습니다. 그저 십자가 주님의 희생과 겸손의 모습으로 돌아가 정작 잃어버린 우리의 본질적인 이미지를 회복하는 교회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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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12-02
  • [성경인물탐구] 베드로의 신앙과 성품(5)
    베드로는 예수의 수제자로서 사랑을 많이 받은 자였습니다. 그는 한때 예수를 세 번씩이나 부인하는 실수를 범하기도 했으나 예수 부활 후 성령의 능력을 받아 담대하고 헌신적인 신앙으로 사역을 감당했습니다. 베드로가 성령 충만을 받아 예수의 복음을 담대히 증거 할 때에 많은 사람이 회개하고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위기의식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자신들이 정죄하여 십자가에 처형한 예수가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야이시며, 부활하셔서 승천하셨다는 제자들의 주장이 사람들에게 사실로 받아들여질 경우 자신들이 하나님을 대적한 악한 세력으로 드러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을 함부로 어찌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놀라운 표적과 기사를 행하는 것을 모든 사람들이 보았으며, 자신들도 부정할 수가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복음이 더 이상 사람들에게 퍼지지 못하도록 복음 증거자들을 협박하여 복음을 증거 하는 것을 막기로 했습니다. 그들은 베드로와 요한을 불러 경계하여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고 지시했습니다. 그때에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말하기를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행 4:19)고 하였습니다. 또한 자신들은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고 단호히 말하였습니다. 베드로의 담대함은 생명을 건 순교의 신앙으로 말미암은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베드로의 신앙은 예수를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했던 과거의 연약한 모습과는 대조적입니다. 예수의 부활하심 속에서 영생에 대한 확실한 소망을 소유할 때 세상의 어떠한 위협도 그의 신앙을 꺾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담대한 신앙은 베드로를 비롯한 모든 복음 증거자들의 신앙이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서신을 통해 자신을 소개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종' 이라고 했습니다. 베드로는 원래 자신을 내세우기를 좋아하고 으뜸이 되고 싶어 하는 성격의 소유자였습니다. 그는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실 것을 말씀하실 때에도 자신이 그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막겠다는 의사를 강력하게 표시하다가 예수께 책망을 듣기도 하였습니다. 예수께서 잡히실 때에도 베드로는 칼을 들어 말고의 귀를 자름으로써 자신의 힘으로 예수를 지켜보겠다는 만용을 부렸습니다. 그러나 그는 비자 앞에서 예수를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하는 자신의 모습 속에서 한없이 약한 모습을 발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베드로는 그때에 자신의 교만했던 모습을 하나님 앞에 철저히 회개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자신의 연약함을 깨달았다고 해서 겸손해질 수는 없습니다. 베드로가 본래의 교만한 성품을 꺾고 겸손하여질 수 있었던 것은 성령 충만을 받고서였습니다. 베드로는 이제 더 이상 예수의 수제자라는 이유로 교만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더 큰 사명이 있음을 인하여 하나님만을 더욱 의지하는 겸손한 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충만히 받을 때만이 사람이 본질적으로 겸손해질 수 있는 것은 죄악성이 억제되고 성령의 열매가 맺어져야만 겸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의 겸손한 자아의식은 모든 복음 사역자가 갖추어야 할 덕목입니다. 하나님의 종으로서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의 백성을 섬기는 것이 복음 사역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겸손의 모습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자리까지 낮아지심으로 본이 되셨습니다. 베드로는 예수께서 제자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며 자신의 물과 피를 다 쏟으시기까지 사랑하심같이 예수의 양들을 사랑하여 헌신적으로 복음 사역을 감당했습니다. 베드로는 결국 예수를 따라 복음 사역을 위해 순교하기까지 헌신하였습니다. 이러한 사도들의 헌신이 기반이 되어 복음이 온 세계에 전파되어 세상 모든 만민이 복음을 믿고 구원받은 것입니다. 성도는 이러한 신앙의 선배들을 본받아 헌신적인 신앙생활을 함으로 천국을 소유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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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12-02
  • [은혜의 말씀] 보물찾기 (요 14:6)
    신앙생활도 질문과 응답이다. 하나님께 물어보고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 하나님께서 부르시면 선뜻 대답하고, 질문과 응답이 신앙생활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사람은 평생 사람을 찾습니다. 짝지를 찾아서, 사람을 찾아 헤매는 것입니다. 구하고 찾고 두드리고. 여러분 좋은 사람을 만나면, 임자 만나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람을 찾아서 헤매고 사람을 찾고 구하고 두드리고 하지만 사람 때문에 우리가 상처를 받고 사람 때문에 힘든 것입니다. 우리의 일생은 참된 나를 찾아가는 여행이라 하는데, 늘 길을 묻고 ‘이리 갈까 저리 갈까 차라리 돌아서 갈까’, ‘이 산이 아니네, 아까 저 산 인가보다.’ 그게 인생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우리는 무엇인가를 찾아서 보물 찾듯이 찾아가고 무언가를 위해서 나가지만, 성경은 허물과 티가 없는 영웅들이 아니고 별별 인간들이 다 예수님을 만나서, 변화가 되고 회개하고 돌이켜서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 성공적인 인생을 살아간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만남과 만짐과 만듦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임자를 만난 것이고, 길이고 진리고 생명이고 부활이 예수님이니까 예수님을 만나면, 예수님이 그 사람의 마음을 터치해주시고 만져주셔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성형되어지고 빚어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을 만나고 주님을 모셔드리고 주님을 따라가고 주님하고 친해져야 됩니다. 주님과의 친밀감, 연합이 되는 게 성도의 목적입니다. 하나님 말씀이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한 말씀, 진리의 말씀이 한 구절 와 닿으면 병이 뚝 떨어지고 십년 묵은 체증이 쑥 내려가고, 그래서 우리 주님의 말씀을 진리라고 합니다. 진리를 만났으니, 진리를 알았으니 후회도 없고 틀림이 없습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생명보다 귀한 것이 어디 있습니까? 사람이 천하에 어떤 자리를 꿰 찰지라도 죽으면 그만입니다. 생명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살아있다는 것이 얼마나 황홀한 것입니까? 예수님 따라가면 죽어도 살고 살아도 살고 생명을 얻습니다. 부활, 부활신앙, 많은 병자들이 일어나고, 많은 사람들이 부활신앙 하나가지고 나갑니다. 예수님의 ‘나는 부활이다’라는 그 한마디를 붙들고 사망, 흑암, 어두움, 죽음, 무덤의 권세를 파해 이기고, 나는 알았네, 나는 보았네, 나는 찾았네, 이렇게 살아가니까 사람이 바뀌어 버리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어떤 존재도 그렇게 말하는 존재가 없습니다. 예수님만이 ‘내가 길이다. 내가 문이다. 내가 선한 목자다. 내가 진리다. 내가 생명이다. 내가 부활이다.’ 하십니다. 예수 믿는 것이 어떻게 보면 서글프고 시대에 뒤 떨어지는 것 같고, 왕따 당하는 것 같고, 멋도 없고 맛도 없는 것 같지만 아닙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성경 말씀에 ‘내가 진리다.’하십니다. 길을 찾아 방황하지 마세요. 진리를 찾아 기웃거리지 마세요. 세상에 어떤 것도 일리는 있지만 진리가 아닌 게 많습니다. 예수님만이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부활을 일으키시는 분은 주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 요한복음에 나오는 주님은 누구신가? 주님을 알아가고 주님을 찾아가고 주님을 만나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다 했으니까 예수님을 아는 사람은 다릅니다. 그 맛을 아는 사람, 예수님을 따라가고 예수님을 의지하고 예수님을 신뢰하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길을 찾은 것이고, 진리를 얻은 것이고, 생명을 확보한 것이고, 이 부분에서 틀림이 없기에, 이 말 듣고 이리가고 저 말 듣고 저리가고 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세상풍조에 휩쓸릴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주 만 바라보고 오직 예수 한분, 예수님만으로 필요충분 완전한 삶을 살아드리고, 주를 따라가는 주를 사랑하는 주와 닮아가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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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은혜의 말씀
    2015-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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