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12(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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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독교인문학] 포스트모더니즘과의 대화는 가능한가?
    제임스 K.A. 스미스의 누가 포스트모더니즘을 두려워하는가? - 데리다, 리오타르, 푸코를 교회로 데려오기 - 20세기 후반부터 합리성에 기반한 근대적 사유를 비판하면서 예술을 비롯한 다양한 분야에서 일기 시작한 포스트모더니즘이란 단어가 한동안 맹위를 떨치다 요즘은 조금 잦아들고 있다. 그러나 그에 대한 영향력은 알게 모르게 우리 사회 곳곳에 뿌리내려 우리 삶의 일부로 일상화된 느낌이다. 저자는 포스트모던적 근대성 비판에서 일종의 동료의식을 가지고 기존의 질서와 토대를 해체해 가는 포스트모더니즘의 거두 삼인방의 핵심논제(텍스트 바깥에는 아무 것도 없다-데리다, 메타내러티브는 모두 사라졌는가?-리오타르, 권력/지식/훈육 –푸코)를 예리한 통찰력으로 소개, 분석하고 대화를 모색하고 있다. 딱딱한 주제를 매 장 서두에 소주제에 맞는 영화를 선정하여 해설함으로써 이해를 높이고 있다. ◇ 저자소개 ∥ 제임스 K. A. 스미스 James K. A. Smith 캐나다 출신으로 워털루대학교와 엠마우스성경대학을 졸업하고 기독교학문연구소(철학 석사)와 빌라노바대학교(철학박사)에서 수학했다. 현대프랑스 사상을 연구하고 아우구스에서 칼뱅, 에드워즈와 카이퍼에 이르는 신학적 문화 비평의 전통에서 영향을 받은 그는 철학, 신학, 윤리학, 미학, 과학, 정치학의 경계를 넘나들며 학계와 사회와 교회를 이어주는 교량 역할을 통해 이 분야의 선구적 사상가로 평가를 받는 등 대중 지식인이자 문화 비평가로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 저서∥《하나님 나라를 욕망하라》, 《하나님 나라를 상상하라》, 《왕을 기다리며》, 《습관이 영성이다》 등이 있다. ◇ 같이 읽으면 좋은 책 《철학한다는 것》 표정훈, 강영안 / 홍성사 / 2021 《현대사상입문》 지바 마사이 / 아르테 / 2022 《푸코, 바르트, 레비스트로스, 라캉 쉽게 읽기》 우치다 타츠루 / 갈라파고스 / 2010 《포스트모더니즘의 이해》 스탠리 그렌치 / WPA / 2010 기독교인문학 〈50〉 포스트모더니즘과의 대화는 가능한가? - 열린대화와 비판적 전유 - 근대성에 대한 포스트모던적 비판에 주목 “그리스도인이 근대성에 대한 포스트모던적 비판에서 동맹을 찾을 수 있으며, 이러한 비판은 교회가 인간 번영에 대한 성경의 비전과 일치하지 않는 근대성과 공모해 온 방식을 깨닫도록 돕는 치료제 역할을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포스트모더니즘은 다가올 왕국을 갈망하는 고대의 하나님 백성이 되는 방법을 기억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다.” 김길구 저번 호에 다룬 R.C. 스프로울의 ≪서양철학 이야기≫는 사상가들의 이름만 나열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어 죄송하기도 하고 아쉬웠는데, 다행히 이 논의를 이어갈 책이 눈에 띄어 급하게 선정했습니다. 작년 8월 인문학&신학연구소 에라스무스와 도서출판 100이 우정의 연대를 통하여 새롭게 재번역하여 출간된 ‘데리다, 리오타르, 푸코를 교회로 데려오기’란 부제가 붙어있는 ≪누가 포스트모더니즘을 두려워하는가?≫라는 다소 도발적인 제목의 책입니다. 김현호 이 책은 2006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서는 2009년에 살림출판사에 의해서 소개되었으나 최근 탄탄한 인문학적 훈련과 사유를 겸비한 종교개혁자 에라스무스의 전통을 이어 인문학과 신학 양자 간의 자유로운 대화와 비판적 전유를 목표로 한 에라스무스 총서 중에 하나로 최근 기획 출간된 책입니다. 류지원 이 책은 포스트모더니즘이 역사적 그리스도교 및 정통의 역사와 양립될 수 없다는 선입견을 가진 복음주의 교인들에게 포스트모더니즘의 비판적 분석을 통하여 그 위험성을 지적하면서도 그리스도인이 관심을 가져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근대성과 탈근대성 사이에는 상당한 영속성이 있지만 탈근대성과 포스트모던니즘 사이에는 불연속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대화의 여지가 있다는 것이지요. 이 책은 그 점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포스트모더니즘 김길구 우선 용어의 정의부터 얘기해 보죠? 우선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말은 계몽주의 이후에 나타난 모더니즘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나타난 철학의 흐름이요, 문화적 현상을 말합니다. 주로 1960년대부터 1990년대의 프랑스 철학자들이 주축이 된 현대사상을 말해요. ‘포스트’라는 접두어에는 ‘후기’나 ‘탈’의 의미를 지니고 있어 연속의 의미와 단절의 의미가 같이 있어요. 류지원 현재 두 가지 맥락에서 사용된다고 보면 됩니다. 하나는 새로운 예술 사조를 지칭하는 말이고, 다른 하나는 합리성에 기반한 근대적 사유를 비판하면서 여기에 맞선 개념으로 등장한 사상적 흐름을 말해요. 이 둘은 모두 근대성에 대한 반성이라는 점에서 같지만, 구체적으로 들어가면 여러 갈래도 많고 너무 복잡하고 난해합니다. 김현호 저자는 이 책에서 탈근대성은 문화현상의 집합을 가리키는 반면 포스트모더니즘은 20세기 후반의 철학적 흐름을 가리키는 용어로 구분해서 쓰고 있습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의 거장들 김현호 제가 맡은 철학자는 2장에 나오는 ‘텍스트 바깥에는 아무 것도 없다’는 핵심적 명제를 남긴 데리다 입니다. 데리다는 텍스트를 작성한 저자의 정체성과 의도는 그 텍스트의 해석과는 전혀 상관없는 것이며 나아가 그 텍스트 속에는 어떤 식이든지 불변의 의미를 발견할 수 없다는 ‘해체이론’을 펼쳤습니다. 텍스트 독해에 있어서 작가의 전기적 사실과 작품의 역사적 사회적 배경 등, 텍스트 외부를 일체 고려하지 않고 어디까지나 텍스트만을 분석의 대상으로 삼아 텍스트가 지닌 모순, 다의성 등을 드러내어 하나의 의미로 독해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들어 텍스트의 한계를 드러내고, 텍스트에 편입하지 않은 타자성과 만나게 하는 것입니다. 데리다의 텍스트의 해석과 연결되는데 텍스트 바깥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주장은 모든 것이 다 텍스트라는 말로, 이 말은 모든 것이 책이라거나 우리가 거대한 모든 것을 에워싼 책 안에 살고 있다 는 뜻이 아니라 오히려 모든 것은 경험하려면 모두가 다 해석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성경텍스트 너머에 있는 역사적 사실의 객관성을 확신할 수 없으므로 성경 중심성을 강조하는 교회의 입장과 다르며, 따라서 교회는 그 텍스트를 통한 성경의 내적 역사에 치중해야 합니다. 류지원 리오타르는 <포스트모던의 조건>이란 책에서 근대이성이 기반하고 있는 ‘큰 이야기’(거대담론)의 효과가 상실됐음을 선언했는데요. 그의 핵심 명제 ‘메타내러티브를 불신하라’는 것의 참 의미는 이념이나 이데올로기, 자유, 구원, 계급, 진리 같은 큰 이야기를 믿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포스트산업사회에서는 한 가지의 진리, 한 가지의 이념에 기반한 이야기는 존재하지 않고 유효하지도 않다는 주장 때문입니다. 근대이성이 구축한 서양철학은 그 큰 이야기 속에 보편성과 절대진리를 표방함으로써 이성 그 자체에 내재하는 폭력성을 은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념의 이름으로 치러진 전쟁, 종교의 이름으로 치러진 전쟁을 우리는 자주 보았기 때문이죠. 이에 반해 저자는 서사와 내러티브를 구분하면서 기독교를 보편적 이성으로 입증 가능한 진리와 사상의 체계로 간주하는 근대적 기독교 이해에 반대하여 기독교의 계시는 본질상 서사라며 계시가 이야기의 형태로 주어진 것은 신앙의 핵심적 과제가 진리에 대한 입증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의 이야기 속에 참여하여 세상을 향해 복음의 이야기를 살려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포스트모던 교회는 성경의 내러티브를 중심으로 이야기 하는 교회일 뿐 아니라 살아내는 것입니다. 우리의 스토리텔링은 우리가 이야기를 살아냄으로서 뒷받침 되기 때문입니다. 또한 진정한 예배는 구도자에게 다가가는 것과 성도를 세우는 것입니다. 김길구 푸코가 말한 ‘권력은 지식이다’라는 주장은 근대사회의 기반에는 그물망처럼 촘촘한 권력관계가 작동하고 있으며, 이런 권력을 유지하고 있는 힘은 지식체계라는 거예요. 국가는 법률이나 규칙 등 외부의 제도뿐만 아니라 훈련으로 형성된 도덕과 윤리로도 국민을 지배한다는 것이죠. 우리는 자율적으로 그것이 좋은 일이므로, 혹은 도덕적임으로 자연스레 행동한다지만 그것도 훈련을 통해 학습된 새로운 지배형태라는 것입니다. 마치 정상인이지만 정신병원에서 길들여지는 과정과 권위주의에 맞서서 자유를 찾아 탈출하는 내용을 다룬 영화 <뻐꾸기 둥지 위를 날아간 새>처럼 이러한 담론을 생산하고, 통제하고, 선택하고, 조직화하고 배분하는 과정을 통해 인간은 스스로 ‘규율의 내면화’와 보이지 않은 권력을 통하여 자율적인 순종을 강요하는 체계에 숙련됨으로써 권력의 체계를 받아들이고 이때 지식의 주체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에 저자는 그리스도인은 훈육을 통한 통제와 형성을 인정하면서도 권력의 부정적인 측면인 억압적이고 자본주의적인 소비문화의 훈육에는 거부하고, 성경적인 대안, 전통적인 교회의 훈육방법인 영성훈련과 봉사활동 등은 활용하라고 권면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적인 대안문화를 실천하는 제자도의 삶을 살려면 성화의 연습을 통해 훈육되어야 합니다. 훈육을 통한 형성이 구조적으로 선함을 인식하고 기도와 금식, 묵상, 검약, 단순한 삶의 영적 훈련 전통을 회복하고 몸의 의례를 통하여 영혼을 빗어내는 수단으로 삼아야 한다고 합니다 김길구 이머징교회는 생략하도록 하겠습니다. 이 책의 마무리인데 아쉽습니다.그동안 두 차례에 걸쳐서 ≪서양철학이야기≫, ≪누가 포스트모더니즘을 두려워 하는가?≫란 책을 통하여 철학과 신앙에 대한 문제를 다루어 봤습니다. 이를 통해서 지금 여기 우리가 발 딛고 있는 세상을 둘러보고 사유하는 힘을 길러보았습니다. 낯선 경험이었습니다. 3월은 사순절 기간이라 경건한 삶을 실천한 열여덟 분의 일대기를 다룬 이정후 교수님의 ≪기독교 영성이야기≫란 책을 선정했습니다. 신앙과지성사가 10년전에 발간 했습니다. 감사합니다. 【정리 김길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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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04
  • [성서연구] 하나님의 긍휼이 머무는 곳
    나사렛의 처녀 마리아는 천사 가브리엘로부터 하나님의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수태고지를 받았습니다. 큰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마리아는 늙은 친척 엘리사벳도 하나님의 능력으로 임신했다는 말을 듣고 찾아갔습니다. 엘리사벳을 만난 마리아는 하나님을 찬송했습니다. 마리아의 찬양 중에 다음 구절이 있습니다. <긍휼하심이 두려워하는 자에게 대대로 이르는도다>(눅 1:50) 여기 긍휼이라 번역된 단어는 <엘레오스>로서 구원의 은총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긍휼이 머무는 자리가 어디일까요? 마리아는 두려워하는 자에게 임한다고 말했습니다. 마리아의 이 말은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한 것입니다. 천사 가브리엘이 나타나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지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라고 인사했을 때, 그녀에게는 큰 두려움이 임했습니다. 그때 가브리엘은 < 사가 이르되 마리아여 무서워하지 말라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느니라>고 했습니다.(눅 1:30) 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를 찾아온 이유는 마리아가 예수님의 모친으로 선택되었기 때문이고, 이것은 큰 은혜였습니다. 그런데 그 은혜가 임할 때 마리아는 두려워했습니다. 두려워하는 자에게 은혜가 임한 것입니다. 여기서 두려움과 은혜의 상관관계를 알게 됩니다. 두려워하는 자에게 은혜가 임하고, 은혜가 임할 때 두려워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마리아는 왜 두려워했을까요? 그것은 인간은 누구나 하나님 앞에서 두려워하는 게 마땅하기 때문입니다. 마리아는 나사렛의 평범한 처녀였습니다. 내세울 게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천사가 나타났으니, 어찌 두렵지 않겠습니까? 이 과정을 통해서 마리아는 분명히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긍휼은 두려워하는 자에게 임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말을 거꾸로 하면 두려워하지 않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긍휼이 임하지 않는다는 말씀이 됩니다. 그렇다면 누가 두려워하지 않을까요? 그것은 자부심이 큰 사람들입니다. 그 마음이 교만한 자들입니다. 마리아는 계속해서 말했습니다. 누가복음 1장 51~53절입니다. <51 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 52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53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는 빈손으로 보내셨도다> 하나님께서는 두려워하는 자에게는 긍휼을 베푸시지만, 교만한 자는 흩으십니다. 권세 있다고 자부하는 자는 내리치십니다. 부자를 빈손이 되게 하십니다.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 즉 비천하고 주리는 자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그러므로 답이 분명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지 않다면 모르지만, 정말로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원한다면 하나님 앞에서 두려워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설 자격이 없음을 고백해야 합니다. 비록 좀 배웠고, 가졌고, 힘이 있다 해도 하나님 앞에서는 버러지와 같을 뿐임을 깨닫고 고백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두려움을 상실했습니다. 겁 없이 설쳐댑니다. 교단 일을 하는 이들은 대개 어느 정도 목회나 삶에 성공한 분들이라 여겨지는데, 그래서인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기색이 잘 보이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냄새나는 거래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이루어집니다. 보기 민망합니다. 교회 안에서도 목에 힘을 주는 이들은 목회자, 중직자인 경우가 많습니다. 힘이 있는 사람일수록 그렇습니다. 연약함 때문에 떠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강한 자보다 차라리 약한 자, 높은 자보다 차라리 낮은 자, 가진 자보다 차라리 부족한 자가 되는 게 낫습니다. 예수님께서 낮은 세상에 오신 이유, 십자가에까지 낮아지신 이유는 낮은 자에게 은혜를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높은 자에게 은혜를 주시려 했다면 굳이 그렇게 낮은 자리에까지 오지 않으셔도 좋았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가장 낮은 자리인 십자가에까지 내려오셨기 때문에 예수님과 같은 높이에 있던 행악자가 긍휼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기억합시다. 두려워하는 자에게 긍휼이 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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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04
  • [소강석 칼럼] 우리들만의 교회는 아니었는가
    견리망의(見利忘義)라는 말이 있다. 교수신문에서 지난해를 정리한 사자성어였는데 이익을 보고 올바름을 잊어버린다는 말이다. 최근 목회데이터연구소(대표 지용근)의 ‘한국교회 명목상 교인 실태 및 신앙 의식’에 대한 설문조사 결과를 접하고 어처구니가 없었다. 최근 10년간 20~40대 개신교인 절반가량이 감소됐다는 것이다. 나부터 우물 안의 개구리였던 것 같다. 우리 교회는 청년부도 건재할 뿐 아니라 30~40대가 주를 이루고 코로나 이후에도 상승세를 타고 있는 교회이기에 전혀 감지를 못했는데 통계가 그렇게 나온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왜 그랬을까. ‘교회 3.0’ 저자 닐 콜은 ‘종교 없음’이라는 결론을 냄으로써 미래 시대일수록 인간이 종교와 멀어질 것이라고 예견했다. 독일의 신학자 한스 큉은 미래엔 종교적 영성은 목말라 하지만 제도적인 교회를 향해서는 거부감을 갖게 될 것이라고 일찍부터 조망했다. 그러나 이건 해도 너무한 것이 아닌가. 20~40대 지성인들이 한국교회를 외면하는 현상을 어떻게 봐야 하는가. 우리가 정말 반성하고 따져볼 필요가 있다. 이런 현상은 코로나19 기간을 거치면서 더 그랬다고 한다. ‘정말 우리만의 교회는 아니었는가.’ 한국교회는 그간 엄청난 비판을 받아왔다. 그 비판 중에 ‘네오마르크시즘’ 사상으로 인한 전략적 공격도 있었지만 더 큰 것은 ‘그들만의 교회’, ‘그들만의 카르텔’을 이뤘다는 점에서 비판을 받아왔다. 우리가 복음을 잘못 전했던지 아니면 교회다운 모습을 보이지 못했던지가 그 이유일 것이다. 역사의 거울을 다시 한번 볼 필요도 있다. 유럽에 흑사병이 창궐할 때 교황 클레멘트 6세는 무조건 성당으로 모이라고 했다. 모여서 믿음으로 흑사병을 이기고 물리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성당이 집단 감염의 진원이 되어 어른 아이 노인 할 것 없이, 심지어는 성직자들까지 흑사병에 걸려 죽었다. 그러자 많은 사람들이 신의 존재를 부인하거나 교회를 희화화하기 시작했다. ‘도대체 하나님이 살아있다면 왜 저 사람들이 저렇게 죽어가도록 놔두신단 말인가. 왜 죄 없는 어린아이가 저렇게 죽어가고 심지어는 성직자들까지도 죽게 놔둔단 말인가.’ 보카치오가 쓴 ‘데카메론’에 보면 이렇게 신을 우롱하고 교회를 희화하는 이야기들이 많이 나온다. 그러면서 인문주의와 르네상스가 태동하게 됐다. 그러나 종교개혁자 장 칼뱅은 달랐다. 먼저 구빈원을 만들어 사회봉사를 실천했다. 그리고 흑사병이 왔을 때 구빈원 자체가 격리시설로 사용됐다. 구빈원뿐 아니라 노약자와 일반 성도들은 교회로 오지 말고 집에 머물라 했다. 대신 성직자들이 찾아가 예배를 드려 주도록 했다. 소수이긴 하지만 현장예배는 끝까지 지켰다. 이처럼 칼뱅은 예배의 존엄성을 지키면서도 이웃 사랑과 생명 사랑을 실천했다. 그래서 칼뱅의 종교개혁 운동은 제네바 시민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으며 발전을 거듭했다. 일대일 영혼 구원도 중요하다. 개교회 성장도 중요하다. 나 역시 내 교회라고 하는 우물에 갇혀 이렇게까지 된 줄은 몰랐다. 정말 심각한 문제가 아닌가. 한국교회가 사회를 따듯한 사랑으로 감싸는 ‘선샤인처치’(Sunshine Church)가 되고 ‘허들링처치’(Huddling Church)가 돼야 하는데 그렇게 되지 못한 결과 아닌가. 이렇게 되면 우리도 결국 시대로부터 외면당한 유럽 교회를 따라갈지도 모른다. 다시 생각해보자. 우리가 복음을 잘못 전하지는 않았는지, 아니면 견리망의처럼 우리만의 교회를 이루었던 것은 아닌지 말이다. 우리 모두 다시 일어나 바른 복음을 전할 뿐만 아니라 교회다운 모습을 보여주자. 교회는 진리 때문에 박해를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의 행실 때문에 비난을 받아서는 안 된다. 다시 선샤인처치, 허들링처치로 돌아가자. 젊은이들에게 교회다운 모습을 보여주자. 차갑게 얼어붙은 사람들의 마음에 햇살을 비추고 허들링을 하자. 우리만의 교회가 아닌 소통과 공감, 사랑과 섬김의 교회를 이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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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04
  • [시사칼럼] 쇼펜하우어와 키르케고르
    요즘 서점가에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책의 주인공이 있습니다. 독일의 철학자 ‘아르투어 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er, 1788-1860)입니다. 화제의 『마흔에 읽는 쇼펜하우어』(유노북스, 2023)는 교양서적으로서는 최초로(그것도 철학책으로!)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망라하고 종합 베스트셀러 1위를 질주하고 있습니다. 전혀 팔릴 것 같지 않아 출판사에서 들어온 제의조차 처음에는 거절했다는 저자(강용수 고려대 교수, 독일 뷔르츠부르크 대학 박사)의 말이 아니더라도, 본인이 활동할 당시에도 대중적인 인기가 없었음은 물론 학계에서는 거의 따돌림을 당하다시피했던 보통은 염세주의자로 잘 알려진 이 철학자가 이토록 지금 이 시대의 한국 사회에서 각광을 받는 이유는 도대체 무엇일까요? 사실 쇼펜하우어의 가장 위대한 학문적 업적은 헤겔의 낭만주의적 이성주의 철학에 반기를 들고 발표한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Die Welt als Wille und Vorstellung)』(1819)입니다(발간 후 100권밖에 팔리지 않자 실망함). 하지만 21세기 한국에서 그는 다음과 같은 말들로 유행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행복을 가로막는 두 가지 적수가 고통과 무료함인데, 우리의 인생이란 이 두 가지 사이를 오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마흔에..”, 36). “자신이 하고자 하는 것(욕망)과 자신이 할 수 있는 것(능력)을 분별하는 자기 인식이 행복의 전제 조건이다”(71). “미래가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라 오직 현재만이 진실하고 현실적이고 확실하다”(201). 쇼펜하우어 하면 동시대를 살았고 성향 자체도 일견 유사해 보이는 또 한 사람의 철학자가 생각납니다. 쇼펜하우어보다 25년 늦게 태어나서 5년 먼저 사망한 덴마크의 사상가 키르케고르(Søren Kierkegaard, 1813-1855)입니다. 두 사람은 당대 주류 중의 주류였던 헤겔에 대한 반감과 근대 과학의 오만함에 대한 비판 같은 측면에서, 그리고 ‘고통’(쇼펜하우어)과 “불안”(키르케고르) 같은 실존적인 개념을 자기 철학의 핵심 키워드로 삼았다는 점에서도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정작 키르케고르는 죽기 얼마 전에야 쇼펜하우어의 책을 읽었다니 의외이긴 하지만 말입니다. 두 사람의 영향력이 사후에 오히려 더 크게 발휘되었다는 점도 비슷한데, 쇼펜하우어는 니체와 러셀과 비트겐쉬타인 같은 철학자뿐만 아니라 프로이트 및 융에게도 심대한 영향을 끼쳤고 나아가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 같은 작가들이나 바그너 같은 음악가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키르케고르는 야스퍼스와 하이데거로 이어지는 실존주의와 현상학의 출발점이라 불러도 좋을 만큼 현저한 영향력을 행사했고, 칼 바르트와 위르겐 몰트만 그리고 폴 틸리히에도 크게 영향을 끼친 것으로 유명합니다. 그런데 쇼펜하우어가 득세하는 반면 키르케고르는 왜 여전히 인기가 별로 없을까요? 아마도 인간은 누구든지 『절망에 이르는 병』(1849)을 면할 길이 없는데,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믿음’이라고 했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이것이냐 저것이냐』(1843)과 『공포와 전율(두려움과 떨림)』(1843)에서부터 모색해 오던, 철학적 이성의 길이 아니라 종교적 신앙의 길에서 키르케고르는 인생과 철학에 대한 답을 찾았기 때문 아닐까요? 우리는 지금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는 시대적 흐름 속에 갇혔습니다. 20세기 말에 선각자로 자처하던 인물들이 이른바 “제3의 길”(Anthony Giddens)을 제창했었는데, 이제는 그나마 ‘제4의 길’이나 ‘제5의 길’이라도 제시하려는 시도조차 보이지 않습니다. (물론 강원대의 이현훈 교수 같은 분은 2년 전『예정된 미래: 네 가지 뉴노멀과 제4의 길』(파지트)이라는 책을 통해 이제 인류는 “디지털사회”, “노인사회”, “양극화사회”, “홀로세(holocene)”를 극복할 수 있는 ‘제4의 길’을 가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습니다.) 게다가 점차 일상이 되어가는 전쟁과 기후변화와 환경재앙과 국내적 정쟁 등으로 인해 현대인들은 답답함과 우울함에서 오는 압박을 견뎌나가야 하는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이럴 때 속이라도 시원하게 “남에게 보여주려고 인생을 낭비하지 말라”거나 “당신의 인생이 왜 힘들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합니까?”라고 일갈하는 ‘꼰대 철학자’ 쇼펜하우어에게 대중들은 “자기계발서의 거짓 위로에 지쳤는데 철학책에 위로 받았다” 혹은 “거침없는 팩폭에 감동했다”는 반응을 보이며 열광하는 겁니다. 하지만 실존적인 위기에 직면한 인간에게 주어진 최고선은 바로 인간의 실존 가운데로 직접 뛰어드신 하나님의 실존인 그리스도이며, 그를 믿는 신앙만이 인생의 궁극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키르케고르의 사상이 사실은 핵심을 더 찌르지 않았습니까? 어느 때보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를 많이 묵상할 이 계절에, 대중들에게는 쇼펜하우어보다는 차라리 키르케고르가 이제는 더 가까이 다가서길 바라는 마음을 가져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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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04
  • [은혜의말씀] 아름다운 소식 (왕하 7:3-10)
    사마리아성에 극심한 기근이 시작되었습니다. 바로 아람 왕 벤하닷과 그의 군대가 이스라엘의 수도 사마리아를 완전히 포위해 버렸기 때문입니다. 먹을 것이 바닥난 성내는 그야말로 지옥이나 다름없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비참한 현실 앞에 엘리사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습니다.(7:1) 하나님의 말씀이 내일은 기적을 보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돌아보실 때 놀라운 은혜의 역사, 기적의 역사가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모든 문제의 열쇠는 하나님께 있음을 믿습니다. 다음 날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그대로 성취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성취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사마리아의 상황이 우리의 현실이라는 것입니다. 기근과 굶주림으로 사람을 삶아먹는 비참하기 짝이 없었던 지옥과도 같았던 사마리아성의 상황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의 모습은 아닐까요? 영적으로 보면, 이 세상은 하나님의 은혜와 영원한 생명, 구원에 대한 소망을 알지 못한 채, 인간의 욕심과 욕망, 자신의 이익을 위해 끊임없이 투쟁하지마는 끝내 공허함과, 굶주림, 채우지 못하는 쾌락 앞에, 사람들은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구원의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셨습니다. 내일이면 사마리아가 구원을 받을 것이라는 복된 소식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마리아는 구원을 받았습니다. 아름다운 소식은 구원의 소식입니다. 죄로 말미암아 죽을 밖에 없는 우리들을 위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영원한 생명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이것이 복음이요, 아름다운 소식입니다. 그러면 이 아름다운 소식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 1. 내게 주신 구원의 은혜를 누리십시오. 성안은 굶주림과 기근으로 죽음의 공포가 엄습하고 있었지만, 이 네 명의 나환자들 구원의 기쁜 소식을 보고 체험하고 누리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루어 놓으신 구원의 기쁨을 거저 가서 보고, 누리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한 자만이 그 은혜를 전할 수 있습니다. 2. 나만 누리는 것은 죄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나환자들은 이런 아름다운 소식을 자신들만 누리고 침묵하는 것은 죄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아름다운 소식-복음을 전하지 않는 침묵은 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와 복을 나 혼자만 누리고 죽어가고 있는 자들이 있는 것을 뻔히 보고 있으면서도 알리지 않는다면 우리는 옳지 못한 것입니다. 이제 나를 위한 구원에서 남을 위한 구원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3. 우리는 복음을 전하는 사명자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먼저 부르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복음을 전하는 사명자로 삼기 위해서입니다. 영적인 눈으로 지금도 지옥을 향해 죽어가는 수많은 영혼들을 보십시오. 이 복음은 죽은 영혼을 살리는 생명의 능력입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 이 아름다운 소식이 온 세상에 전파되길 원하십니다. 나를 통해 이 생명의 복음이 또 다른 사람에게 전해질 수 있도록, 복음 전도자의 사명을 다하는 여러분 되시길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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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04
  • [위드애] 장애인과 일
    [장애인식개선칼럼 - 위드애(with 愛)] <미움받을 용기>의 저자 기시미 이치로는 <일과 인생>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신발을 만드는 사람은 ‘신발을 만든다’는 ‘행동’을 통해 공동체에 유익한 존재가 될 수 있다. 그리고 자신이 ‘공공에 도움이 된다는 감각’, 즉 ‘공헌감’을 느낌으로써 ‘열등감을 줄이’고 자신이 ‘가치 있다’고 느낄 수 있다. 자신이 가치 있다고 느끼고 용기를 낸다면 인간관계 안에 들어갈 수 있다. 인간관계 안에 들어가면 마찰을 피할 수 없겠지만,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인간관계 안에 들어가야 사는 기쁨을 느끼고 행복해질 수 있다.” 사람에게 ‘공헌감’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것은 저자의 말대로 자신을 가치 있는 존재로 느끼게 합니다. 열등감을 줄이고 자신감을 가지게 합니다. 그래서 사람에게 일이 중요합니다. 일이란 그저 밥벌이 수단이 아닙니다. 자신이 가치 있는 존재라는 것을 느끼고 인식하게 하는 중요한 도구입니다. 장애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장애인도 이 세상을 사는 동안 일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것을 통해 장애인도 이 세상을 살아갈 의미와 용기를 가지게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 주변에서 일하는 장애인의 모습을 쉽게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 그런가요? 이 세상이 생산성을 내세워 장애인을 소외시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하여 '장애인의무고용제'를 마련하여 일정 비율 장애인을 고용하도록 법으로 강제하고 있지만, 많은 기업이 장애인 고용 의무를 회피하고 있습니다. 이런 현실을 보면서 누군 ‘고용 부담금’을 더 높여야 한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그런다고 기업들이 장애인을 더 고용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이런 현실에서 우리 장애인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냥 그렇게 살아가야 할까요? 현실이 어떻든 어떤 모양으로든 자신의 존재 가치를 부지런히 계발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것, 할 수 있는 것, 잘할 수 있는 것, 그것을 찾아 하면서 그 속에서 보람을 느끼고 공헌감도 느끼며 살아가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자신의 가치를 찾아 나가면 좋겠습니다. 세상은 생산성을 따져 그 사람의 가치를 매기기를 잘합니다. 그런 것이 아니어도 좋습니다. 그것이 아예 없어도 좋습니다. 그저 오늘을 감사하며 행복하게 사는 것, 위로와 격려가 필요한 사람 곁에 함께하는 것, 곁의 사람이 되는 것, 저는 그것 또한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한 해가 새롭게 시작되었습니다. 지난 한 해를 돌아봅니다. 나는 가치 있는 존재로 살았나... 그런 생각하면 한편으론 주눅 들기도 합니다. 그런데 누군가 그랬지요, 사람은 누구나 그 존재 자체로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존재라고요. 그렇습니다. 당신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의미 있고 가치 있습니다. 당신이 곁에 있어 고맙고 행복합니다. 더욱 용기를 내어 사람들 사이에서 즐겁고 행복하게 살아가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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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04
  • [분홍목사의 다음세대이야기] 통계로 본 한국교회의 현재와 미래
    다음세대 사역의 의미를 이야기할 때 우선적으로 중요한 것은 교회의 전반적인 건강성입니다. 그래서 다음세대 사역은 항상 한국교회가 지금 얼마나 견고한 상태에 있는가를 먼저 점검한 후에 계획을 짜게 됩니다. 그래서 지난 시간부터 객관적인 통계자료를 바탕으로 한국교회의 건강성을 점검하고 다음세대 사역의 기초를 다시금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교회의 건강성은 어디서부터 시작될까요? 올해 우리의 교회가 어떤 방향으로 바뀌어 갈 것인가를 전망할 때 일단 중요한 자료는 우리나라의 종교인 비중이 얼마나 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지금 한국교회의 탈종교화가 가파른 속도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탈종교화라는 얘기는 전 국민 중에서 종교인의 비중입니다. 현재 한국 사회는 종교인의 비중이 점점 떨어지고 있습니다. 한국갤럽이 발표한 갤럽리포트 ‘한국인의 종교 1984-2021’ 자료에 보면 우리나라의 종교인 비율은 2004년부터 점점 내려오기 시작해서 지금은 37%밖에 안 됩니다. 한국의 종교인이 이제는 37%밖에 안 된다는 것입니다. 무종교인인 불신자가 63%입니다. 이들은 어느 종교에도 속해 있지 않습니다. 아무것도 믿지 않는다는 것이죠. 이 속도는 엄청나서 특히 10대와 20대, 또는 30대가 가지고 있는 신앙의 정도, 기독교를 포함한 모든 종교의 비율은 20%밖에 되지 않습니다. 이 종교인의 비율을 가지고 지금 천주교, 개신교, 불교, 원불교, 그 외 이단들이 다 싸우는 것입니다. 80%의 비종교인은 어느 종교에도 관심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이제 종교가 더 이상 한국 사회의 주류 세력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예전에는 ‘교회’ 그러면 사람들이 전이해가 있었습니다. 이를 테면 우리가 “교회 가자!” 할 때 이게 뭐 하자는 얘기인지 알았어요. 그런데 이제는 모른다는 겁니다. “교회가 뭐야?” 80%는 교회를 모릅니다. “예배가 뭐야?” “찬양이 뭐야?” “예수님이 뭐야?” 성탄절은 알아도 교회는 모르는 지금 이 80대 20의 시대가 찾아왔습니다. 게다가 지난 10년 사이에 개신교 인구도 매우 큰 규모로 감소했습니다. 한국기독교목회자협의회에서 발표한 ‘한국기독교분석리포트’ 2023년 한국인의 종교생활과 의식조사 결과를 보면 2012년에서 2022년, 10년 사이에 한국의 기독교인구는 22%에서 15%로 뚝 떨어졌습니다. 현재 기독교인 수는 700만 명 정도입니다. 전에 1,200만 명까지 우리가 올라갔다고 좋아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허수가 많았습니다. 정확한 조사에 의하면 770만 명 정도입니다. 그럼 이게 2032년이 되면, 앞으로 10년 후가 되면 어떻게 될까요? 이 추세대로라면 10.2%로 줄어들게 될 것입니다. 반면에 가나안 성도는 지난 10년 사이 18%가 늘었습니다. 그런데 이대로 가면 가나안교인은 2032년이 되면 52.4%까지 늘어난다는 것입니다. 즉, 기독교를 믿는 사람 중에서 교회 안 나오는 사람이 절반을 넘어서는 시대가 올 것이다, 이게 지금 통계가 보여주고 있는 우리의 미래입니다. 그렇다면 교회의 숫자와 교인 수는 어떻게 변화되고 있을까요? 저희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교단의 경우 지난 10년새에 8,165개 교회에서 9,419개 교회로 전체 교회숫자가 늘었습니다. 통계수치만 보면 15.4%가 늘어난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이를 교회에 모이는 교인의 숫자와 연계해서 보면 30명 이하의 교회가 82%, 아주 많이 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31명부터 50명 사이의 교회도 18.3% 늘어났습니다. 이것이 무엇이냐 하면, 50명보다 작은 교회가 늘어났다는 말은 이보다 큰 교회는 다 줄었다는 얘기입니다. 큰 교회들이 인원이 줄어들어서 쪼그라들었다는 결과입니다. 그래서 작은 교회들이 늘어나서, 지금 전체 교회 수는 늘어났지만 이제 교회는 5년 이내 위기를 맞이할 교회가 지금 13% 정도 보는데 그럼 나머지는 10년 안에는 많으면 30%, 15년 안에는 70~80% 교회가 사라질 위기가 있다고 하는 것이 현재 통계가 보여주는 위기감입니다. 그럼 누가 교회를 안 나오고 있을까요? 앞으로 누가 안 나오게 될까요? 한국기독교목회자협의회에서 2023년 6월에 발표한 ‘한국기독교분석리포트’에 실린 통계자료에 따르면 개신교인이 아니었다가 개신교로 유입되는 사람들이 16.4% 정도 되는데, 개신교에서 다른 종교로 가는 사람들 또는 교회를 안 나오게 되는 사람들이 19.2%로 더 많은 추세를 보이고 있습니다. 밖에서 개신교로 들어오는 사람보다 빠져 나가는 사람이 더 많다는 겁니다. 같은 자료에서 살펴보면 여기서 제일 문제가 되는 건 30~40대입니다. 20대보다 더 빠르게 지금 교회를 빠져나가고 있는 30대와 40대, 이것이 오늘날 한국교회의 주요 이슈입니다. 보통 30대와 40대는 우리가 20대만큼 걱정은 하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래도 이들쯤 되면 믿음이 있겠지! 결혼도 시켰고, 애도 낳았고, 직장생활도 하니까.’ 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더 바쁘고, 더 핑계가 많고 더 모이지 않는 것입니다. 저희 교회에서 지금 40대로 구성된 제3남선교회가 제일 위기입니다. 전체 부서 중에 제일 위기는 제3남선교회입니다. 그리고 같은 연령대의 제3여전도회가 2위를 달리고 있습니다. 이 부서들이 한 달에 한 번씩 설거지를 하는데 매번 설거지할 사람이 없어서 난리통을 겪습니다. 그리고 선교회에 모여서 연말에 임원을 세우는 총회가 개최되기 어렵습니다. 서로 임원 맡기를 꺼리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이 세대의 특징입니다. 나이대로 모이는 모임에 적극적이지 않습니다. 이들은 성가대를 하던, 교사를 하던, 목적을 가지고는 모이지만 친교를 위해서는 모이지 않는 세대가 된 것입니다. 모여서 다 핸드폰만 하고 있습니다. 서로 얼굴을 보고 할 얘기가 없다는 겁니다. 그렇게 된 30~40대를 어떻게 해야 할지, 이 부분이 해결되어야 한국교회의 다음세대도 대안이 나올 수 있는 현실이 되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다음 시간에 계속 살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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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분홍목사의 다음세대 이야기
    2024-03-04
  • [다음세대칼럼] ‘아름다움’은 ‘앓음다음??’
    “큰일 났어요. 빨리 와보세요” 초희의 다급한 연락을 받고 저는 놀란 마음에 아직 흥분해 있는 아이들에게 이끌려 정아가 있는 방으로 갔습니다. “왜 무슨 일이야?”라며 문을 열자 손 끝으로 붉은 피가 뚝뚝 떨어지는 손목을 붙잡고 어쩔 줄 몰라 고개를 숙이고 있는 정아가 한쪽 구석에 있었습니다. 정아는 4살 때 부모님이 이혼한 후에 할머니와 지내다가 재혼한 아버지와 다시 함께 지내게 되었지만 새 어머니의 눈치에 마음 편히 지내기가 어려웠습니다. 너무 마음이 힘들면 할머니집과 이모집을 오가기도 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아버지가 알 수 없는 일로 교도소에 들어가게 되고 새 어머니는 자연스레 정아 곁을 떠나갔고 마음 둘 곳 없이 친구들과 어울려 돌아다니게 되었습니다. 우연히 알게된 남자 친구들과 술을 마시다가 몸을 잘 가누지 못할 정도로 취해버린 정아를 모텔로 데리고 간 2명의 남자 친구들은 정아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습니다. 그 일 이후 정아는 도망자처럼 학교를 그만두었고 불쑥불쑥 힘든 마음이 들 때면 자해하는 습관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그 동안 참 힘들었겠구나”라는 저의 말에 정아는 말 없이 고개를 숙이고 눈물만 뚝뚝 흘렸습니다. 조금 전 핏방울이 뚝뚝 떨어지듯이 표현하지 못한 내면의 고통으로 굵은 눈물이 핏방울처럼 뚝뚝 흘러내렸습니다. 다음날 정아와 신경정신과 병원을 찾았습니다. 의사는 긴 시간 정아의 상태를 살피고 면담을 나눈 후 “지금 당장 입원해야 할 상태입니다. 이 아이가 지금까지 살아온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지금 이 상태로 있는 것 조차도 감사한 일입니다. 더 큰 일이 생기기 전에 당장 입원해야 할 것 같습니다”라는 한 마디로 상태의 심각성을 알렸습니다. 그 말을 들은 정아는 자신이 정신병원에 입원해야 한다는 사실이 더 괴로웠는지 “저 이젠 자해하지 않을게요. 한 번만 기회를 주세요”라며 간곡히 사정을 했고, 원장님은 간곡하게 매달리는 정아에게 “그럼 당분간 약물복용을 하면서 상태를 지켜보자”고 하였는데, 약 때문인지 마음이 편해져서인지 정아는 눈에 띄게 밝아지고 잘 적응하였습니다. 어느 날 정아는 “저 있잖아요.... 처음엔 둥지 오게 된 것이 너무 싫었는데 지금은 너무 좋고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그리고 제가 전에 자해했을 때 둥지 애들이 이상한 눈빛으로 보는게 아니라 힘내라고도 하고... 그러지 말고 힘들 때 얘기해라고 말해줘서 너무 고마웠어요. 병원 원장님께서 입원하는 것보다는 둥지에서 함께 부대끼며 마음의 힘을 길러가는게 더 좋을 것 같다고 말씀하셨잖아. 저 이제 그 아이들 정식으로 고소하고 싶어요. 그동안 그 사실이 너무 싫어서 도망 다니고... 힘들면 자해하고 그랬는데..... 그 아이들은 밖에서 웃고 돌아다니고.... 제게 진심으로 사과한 적도 없고........ 오히려 저를 이상한 아이로 학교에 소문내서 더 힘들게 하고........ 이젠 더 이상 아닌 것 같아요. 정식으로 고소하고 싶어요” “정아야! 네 생각이 그렇다면 방법을 찾아보자. 근데 시간도 지났고 사건도 어떻게 됐는지 모르기 때문에 확인도 해야 해. 그리고 그 아이들이 어떤 처벌을 받던 그것보다 난 네가 이 일에서 도망치지 않고 정면으로 부딪히고 대면하는 게 더 중요한 것 같다. 이렇게 모든 문제를 직면하고 해결책을 찾아가는 용기가 너무 좋다” “저도 그 아이들을 어떤 벌을 주라는 것이 아니고 무슨 돈을 받으려는 것도 아니고 진정한 사과를 받고 싶어요” “그래. 한 번 알아보자” 며칠 후 저는 정아를 데리고 한 변호사사무실을 찾았습니다. 그 곳은 비행청소년 위기청소년들에게 많은 관심을 가지시고 평소에도 도움을 주시는 변호사님이 계시는데 정아의 이야기를 듣고 기꺼이 무료변론을 해주시겠다고 하신 것이다. 정아의 이야기를 들은 변호사님은 정아에게 미리 준비한 한 권의 시집을 건네셨다. 그리고 “정아야! 그건 너의 잘못이 아니야. 그리고 너는 공장에서 생산된 제품이 아니란다. 마트에서 판매하는 상품이 아니란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하나 밖에 없는 걸작품이다. 소중하게 너 자신을 다루어라”며 따뜻한 말을 건네셨고 정아는 밝게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그리고 “나는 비싼 변호사란다. 이거 공짜 아니야. 30년 뒤에 빚을 꼭 갚아야 한다”고 하자 정아는 한참을 생각한 뒤 “예... 얼만데요?”라고 목소리를 죽여 물었습니다. “액수는 말하지 않겠지만.... 나중에 빚을 갚을 때 넌 나에게 말고 너와 같은 아이에게 꼭 베푸는 것으로 갚아야 한다”며 환하게 웃으주셨습니다. 정아도 그러겠다고 약속하며 훨씬 가벼워진 걸음으로 나왔습니다. “정아야! 아름다움은 앓음다음이란 말이 있단다. 그 동안 많이 아프고 힘들었을텐데 이 시간을 잘 극복해 보낸 다음에 더 아름다워질거야. 힘내라” “예? 아프고 난 다음에 더 아름다워진다고요? 너무 좋은 말이네요” “그렇지.... ” “그럼 전 이제 아름다워질 일만 남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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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04
  • [신앙교육나침반] 복음놀이리부트 50 (2)
    문> 이 책 상용이라할까 활용 방법에 대해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답> 《복음놀이 리부트 50》은 가정예배를 리부트합니다. 이 책으로 일주일에 한번만이라도 자녀들과 복음을 놀이하며 가정예배를 드려보세요. 이 책을 만난 부모들은 자녀들에게 복음을 일방적으로 주입하지 않고, 자녀와 함께 복음놀이를 즐겁고 역동적으로 놀이하면서 신앙을 전수하게 될 것입니다. 지금까지 지루하고 힘들었을 가정예배가 온 세대의 가족 구성원 모두에게 매력적이며 실제적인 복음으로 경험될 새로운 시간이 될 것입니다. 《복음놀이 리부트 50》은 세대통합 사역과 교회교육을 리부트합니다. 이 책을 통해 교회는 부모 세대와 자녀 세대를 분리하는 사역을 본질로 삼는 것을 멈추고, 온 세대가 한 몸이 되어 예배하고 복음을 경험하는 사역이 본질이 되도록 세워갈 것입니다. 온 세대가 복음을 놀이하면서, 부모로부터 자녀 세대로의 신앙의 전수가 활성화 될 것입니다. 또한 교회교육 현장은 학교교육 체제의 영향으로 인한 지식 전달 위주의 교육방식을 지양하고, 다음세대에게 모든 감각통로를 통하여 경험되어지는 강력한 복음을 전하게 될 것입니다. 《복음놀이 리부트 50》은 선교 사역을 리부트합니다. 이 책을 만난 디아스포라 한인교회와 선교지는 언어와 문화가 다른 민족에게 다양한 복음놀이를 통해 복음을 전파하게 될 것입니다. 세계 모든 열방이 복음놀이를 통해 복음을 훨씬 더 매력적이고 강력히 경험할 것입니다. 문> 혹시 이 책을 출판하기 전에 임상실험이라할까 어느 교회나 단체에서 사용한 적이 있나요? 있었다면 그 반응이 어떠했나요? 답> 2023년 5월, 서울 모교회에서 주일 말씀을 전하였습니다. 말씀 제목은 ‘다음 세대를 잃어버리지 않기 위한 핵심전략’이었습니다. 다음 세대를 지키기 위해서는 부모 세대와 자 녀 세대가 함께 복음을 경험하는 자리를 의도성과 반복성을 가지고 마련해야 함을 강조하 였습니다. 설교가 마친 후, 담임목사님과 많은 성도들은 온 세대가 함께 복음을 놀이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지 매우 궁금해 하셨고, 교회는 그 해 여름에 열리는 전교인 수양회를 통해서 온 세대 복음놀이를 경험하기로 하셨습니다. 2023년 여름, 전교인 수양회에는 미래를 꿈꾸는 3세대와 현재를 열정으로 살아가는 2세대와 과거 역사의 유산과 지혜를 품은 1세대가 한 자리에 모였습니다. 특히 이 교회는 1세대 실버 어르신들이 절반 이상의 많은 비중을 차지하였습니다. 머리가 희끗희끗하신 실버 어르신들은 대부분 관절이 불편하셔서 의자에 앉으셨습니다. 겉으로 보기에 힘도 없으시고, 표정도 없으셨습니다. 전교인을 대상으로 진행된 복음놀이터의 결과는 한마디로 미라클이었습니다. 향기나무의 세대통합 복음말씀이 시작되자, 온 세대가 숨죽여 매력적인 복음에 사로잡혔습니다. 복음은 연령과 성별과 직분을 초월하여, 모든 이들에게 은혜와 감동을 선사하였습니다. 2세대와 3세대가 주도할 거라는 예상을 뒤엎고, 1세대 실버부대의 함성소리가 온 강당에 울려 퍼졌습니다. 왕년에 교회를 섬기셨던 뜨거운 열정이 복음놀이를 하면서 다시 활활 불타올랐습니다. 1세대들은 그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즐거워하며 복음놀이에 참여하셨습니다. 2세대와 3세대는 1세대의 열정과 천진난만함을 보며, 새로운 모습에 감격했습니다. 향기나무 사역팀은 강남일 교회 외에도 수영로교회, 향상교회, 울산교회, 울산시민교회, 대연중앙교회, 세계로교회, 제주연동서부교회, 김제동부교회, 함양 참좋은 우리교회, 밀양태동교회, 고남교회, 호치민 하늘꿈교회 등 수많은 교회에서 온세대를 대상으로 한 복음놀이 사역을 진행하였습니다. 문>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나 한국교회나 기독교 지도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답> 자녀세대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남겨주신 귀한 생명의 씨앗입니다. 주님을 찾고 구하는 믿음의 세대가 머지않아 사라지지 않을까 염려됩니다. 아무도 십자가 붙잡고 살아가지 않는 황폐화된 땅에서, 복음을 향한 열망을 품고 간절히 부르짖는 자녀세대들이 일어나길 소망합니다. 아무도 교회로 발길을 돌리지 않는 그 길에, 갈급함으로 교회를 향해 달려오는 자녀세대들이 일어나길 기대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겨주신 귀한 자녀세대를 한 영혼도 잃어버리지 않고 지켜내고픈 간절함으로, 이 책에 모든 복음의 도구를 아낌없이 담았습니다. 부디 많은 분들이 이 책을 통하여 믿음의 가정을 세우고, 교회의 한 몸된 본질을 회복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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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앙교육 나침반
    2024-03-04
  • [목회자칼럼] 렌탈 인생의 마감 시한
    미국인들의 인생에 대해 정의한 명제 중에 “렌탈 인생”이라는 것이 있다. 미국인만이 아니라 현대인들은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대부분의 것들을 빌려서 사용하고 있다. 죽는 날까지 갚아야 할 할부금과 대여료를 안고 살아가는 것이다. 가계부채도 결국은 빌린 것이다. 불교는 생의 윤회를 말한다. 이것은 현재의 삶은 과거의 자신이 뿌린 씨앗에 대한 열매이고, 미래에 주어질 삶을 잠시 빌려서 사용하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유교는 삶의 근원이 부모라고 말한다. 이것은 조상들이 뿌린 씨앗의 열매를 지금의 내가 가지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다르게 말하면 지금 나의 삶이 후손들의 삶을 결정할 수 있는 매개가 되기에 실상은 후손들의 삶을 빌리는 것과 같은 의미다. 기독교는 창조주 하나님께서 생명을 주셨다고 말한다. 그래서 생명을 선물로 받은 사람들은 자신만을 위한 삶이 아니라 청지기의 삶을 살아야 한다. 왜냐하면 삶이 마감되는 그날, 하나님 앞에서 반드시 계산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삶이란 하나님이 부여하신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잠시 동안만 허락된 나의 삶을 주체적으로 내가 영위하는 것이다. 흘러가는 인생이 아니라 목적을 향해 나아가는 삶이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정치인들의 권력도, 기업 총수의 권한도, 선생님의 권위도, 법관들의 위엄도 실상은 자신의 것이 아니라 대상자들로부터 위임받은 것, 즉 부여받은, 빌린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객전도의 모습으로 채무자가 채권자를 윽박지르는 형국이 되어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연민의 정을 느끼지 않을 수 없고 불쌍하기 그지없다. 총선의 정국에서 지도자를 잘 선택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종교지도자들에게로 향하는 아주 작은 마음으로의 인정이 있다면 사실 그것도 신앙을 가진 자들과 일반적 양식을 가진 자들에 의해 주어진 것, 즉 빌려진 것이다. 그런데 마치 자신이 절대 권력과 능력을 가진 것처럼 행세하는 성직자들과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안하무인격으로 대하는 지도자들을 볼 때마다 어쩔 수 없이 나를 돌아보게 된다. 처음부터 내 것은 없었는데 착각하며 산 것은 아닐까? 지위와 자리는 하나님과 사람들이 잠시 맡겨준 사명의 자리다. 때가 차면 그 짐과 무게 그리고 아주 작은 권위를 다시 돌려줘야 한다. 채무변제에는 정해진 시한이 있기에 빌린 것은 반드시 돌려줘야 한다. 자원해서 돌려주지 않으면 강제로 차압을 당하게 된다. 왜냐하면 빌린 것은 처음부터 내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혜로운 자라면 마감 시한을 선용하여 무엇을 할 수 있을 때 유익과 영향을 남겨야 한다. 또한 빌린 것에는 본질에 대한 댓가 즉 이자가 부과된다. 처음부터 내 것이었을 때는 파생과 소멸 그 자체로 모든 것이 끝이 나지만 빌린 것에는 사용료를 지불해야 한다. 이것도 반드시 지불해야 한다. 우리의 삶이 끝날 때 계산의 시간이 찾아온다. 내 인생의 유예기간은 언제까지일까? 부채와 이자를 갚을 만큼의 삶의 흔적은 가졌는가? LIFE, 처음부터 내 것이 아닌 것을 남용하거나 탕진해서도 안 된다. 소중한 것은 소중하게 여길 때 그것의 진정한 가치가 나타난다. 부활주일이 다시 다가오고 있다. 사심과 교만을 내려놓고 부산의 모든 성도들이 하나님만 바라보고 함께 달려가기를 소원해 본다. 나의 인생이 마감되고 내가 가진 자리의 유한성이 소멸되기 전에 허락하신 하나님을 바라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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