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3-03-29(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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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강석칼럼] 바보가 될 바에는 더 큰 바보가 되라
    류시화 시인이 쓴 ‘신이 쉼표를 넣은 곳에 마침표를 찍지 말라’는 책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어느 밀림 속에서 모든 동물들이 평화롭게 지내고 있었습니다. 사건은 당나귀가 풀의 색깔을 파란색이라고 우기는 데서 시작됩니다. 당나귀가 자기 혼자 “풀이 파란색”이라고 소근 거렸으면 좋았을 텐데 아예 모든 동물들 앞에서 풀의 색깔이 파란색이라고 소리쳐 대는 것입니다. 이때 호랑이가 으르렁거리며 “풀은 파란색이 아니라 초록색이야”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당나귀는 더 소리를 높였습니다. “풀은 초록색이 아니라 파란색이라니까!” 그러자 동물들이 덩달아 편 가르기를 하였습니다. ‘초록색파’와 ‘파란색파’로, 혹은 호랑이파와 당나귀파로 나뉜 것이죠. 호랑이는 포식동물의 왕답게 으르렁대기 시작했고 당나귀는 분수를 모르고 계속 소리를 지르고 있었습니다. “초록색이 아니라 파란색이라니까!” 누군가의 중재가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동물들은 밀림의 왕 사자를 초청하여 판결을 부탁하자고 하였습니다. 호랑이도 동의를 하였습니다. 왜냐면 사자는 고양이과 동물로서 당연히 자기편이 되어줄 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사자가 나타났습니다. 먼저 당나귀의 주장에 귀 기울였습니다. 그리고 호랑이의 주장도 잘 들었습니다. 그러더니 사자는 당나귀의 말이 옳다고 판결을 내렸습니다. 풀은 초록색이 아니라 파란색이라고 말이죠. 판결 후에 호랑이가 사자에게 으르렁대며 “왜 그따위 판결을 하느냐”고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냈습니다. “너도 풀이 초록색이라는 걸 잘 알고 있으면서 왜 그렇게 오판을 했느냐”고 말입니다. 그리고 오른발로 사자를 치려고 하였습니다. 그때 사자가 지혜롭게 말을 했습니다. “어이, 호랑이. 물론 나도 풀이 초록색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어. 하지만 숲의 제왕이 되어가지고 저 하찮은 당나귀와 논쟁을 벌이다니. 논쟁을 벌이려면 적어도 자네보다 훨씬 지식과 지혜가 높은 자와 해하지. 자네는 어리석은 자와 무의미하게 논쟁을 했어. 이미 호랑이다움을 잃어버렸고 소중한 시간과 기운을 낭비한 채 오히려 세상을 더 시끄럽게 만들었다네...” 저도 어릴 때부터 우김질을 많이 했던 사람입니다. 한번 우기면 그것이 잘못된 주장인 줄 알면서도 끝까지 우김질을 했던 기질이 있었습니다. 개척교회 때는 물론, 중형교회가 되었을 때도 스티븐 코비의 주장대로 “언제나 주도적으로만 살아야 한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물론 그 주도적 의미를 아전인수격으로 생각을 했던 면도 있었겠지만요. 이런 제가 언제부터인가 한국교회 연합사역과 공적사역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앞에서 일을 하다 보니까 좋은 일을 하면서도 비판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정말 공교회를 위하여 옳은 일을 하면서도 불필요한 공격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그때마다 제 안에 있는 호랑이 본성이 발동하려고 했습니다. 게다가 코로나가 극심한 상황에 이르러서는 방역 당국과 예배 퍼센티지를 협상하는 것을 신사참배로 규정을 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어떻게든지 한 사람이라도 있으면 목회를 포기하지 말라”고 하며 격려비를 지원하는 것을 두고 차마 입에 담기에도 창피스러운 프레임으로 공격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저는 제 안에 있는 호랑이의 입을 다물도록 하였습니다. 제 스스로 말을 했죠. “기왕 바보가 될 바에야 더 큰 바보가 되자. 그리고 논쟁을 하려면 너보다 훨씬 더 유능하고, 능력 있고, 지혜 있는 현자와 하자.” 어떻게 풀이 파란색이란 말입니까? 당나귀의 주장은 말도 안 되죠. 풀은 당연히 초록색이지요. 그러나 호랑이는 호랑이답게 놀아야 했습니다. 당나귀와 논쟁을 하는 그 순간부터 호랑이는 호랑이의 자존심과 체면을 구겨버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제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공격을 받을 때 많은 분들이 저를 충동질 하였습니다. “소 목사님, 왜 가만히 계십니까? 허락만 해주시면 제가 나서서 대리 고발을 해드리겠습니다.” 그럴 때마다 제 안의 호랑이가 으르렁대려고 했습니다. 아니, 제가 나서서 법적조치를 하면 당연히 실형을 받게 할 수 있죠. 그러나 저는 저 다움과 한국교회 진정한 리더 다움을 지키기로 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저보다 훨씬 능력이 있고 지식이 넘치는 현자들을 찾아 토론하려고 했습니다. 그런 분들의 글을 읽고, 그런 분들과 만나 말씀을 듣고 때로는 토론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저만이 걸어가는 바보의 길을 걸어갔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마침내 제 앞에 골드오션(Gold Ocean)이 보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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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3-06
  • [성서연구] 거룩한 3D 업종
    흔히 <3D 업종>이란 말이 있습니다. 인터넷의 설명을 참조하면 3D란 어렵고(Difficult), 더럽고(Dirty), 위험한(Dangerous)으로서 사람들이 기피하는 업종을 의미한다고 되어있습니다. EBS의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인 극한직업이 바로 이 3D 업종을 다루는 프로그램이지요. 교회에서의 3D 업종은 무엇일까요? 교회 안의 여러 봉사 중에도 사람들이 회피하는 일이 있을 것입니다. 새벽의 주차 봉사, 주방 봉사, 청소 봉사 등이 여기 해당할 것입니다. 요즘엔 전도사와 목사 직분이 3D 업종처럼 여겨지는 것 같습니다. 우선 신학대학교 입학생이 급감하고 있습니다. 모 교단은 신학대학원 정원이 100명인데, 50명만 입학했고, 그중에는 안수를 받지 못하는 여성이 20명이라고 합니다. 이대로라면 2030년에는 교회수보다 목회자 수가 적어 목회자가 없는 교회가 출현할 가능성도 있다고 합니다. 또 신학교에 다니는 이들 중에는 교회에서 교사나 교육전도사 사역을 하지 않는 이가 많다고 합니다. 이유는 아르바이트가 더 소득이 많고, 교회학교 부장이나 교사들의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최근에는 제게 배운 사람이 목회를 중단하고 다른 일을 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교회에서 성도들에게 시달리기 싫어서입니다. 정말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목회가 쉽지 않다는 것은 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사명까지 저버린 채로 편하려고 하니, 정말 걱정입니다. 이렇게 보면 한국교회의 목회자는 3D 업종인 셈입니다. 걱정은 이것만이 아닙니다. 최근 들어 교회마다 항존 직분을 맡으려는 이들이 줄어들고 있습니다. 이러다가는 장로, 안수집사, 권사를 맡아 달라고 따라 다녀야 할 판입니다. 이 모두가 편하게 믿으려는 생각이지요. 힘든 것을 피하고 편하게 살려는 마음으로 결혼도 하지 않고, 자녀도 낳지 않으려는 우리 사회의 우려되는 경향과 일맥상통합니다. 갈수록 사람들은 게을러지고, 편안하려고만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보람 있는 삶의 열매는 힘든 일을 할 때 얻어집니다. 오히려 힘든 일을 하는 사람이 있기에 공동체가 유지됩니다. 세상에서 가장 힘든 3D 업종 중 하나는 <엄마> 직(?)이라고 생각합니다. 엄마는 근무 시간이 정해진 것도 아니고, 보수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도 몇 달, 몇 년만 하면 끝나는 것도 아닙니다. 평생 해야 합니다. 자녀를 결혼시킨 후에도 마치 애프터 서비스를 하듯이, 자녀의 삶을 돌보고, 손주를 봐 주기도 합니다. 그러면서도 그다지 대접받지도 못하는 현실입니다. 그래도 이 땅의 무수한 엄마들이 늙은 어머니가 되시기까지 최선을 다하셨기에 우리가 존재하고, 가정이 유지되고, 사회가 이루어져 왔습니다. 세상에서 최악의 3D 업종은 <메시아 직>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에게 이 직분을 맡기셔서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메시아 직은 세상에서 가장 어렵고, 가장 추하고, 가장 위험한 직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비난받으셨고, 미움 당하셨으며, 마지막엔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3D 업종인 메시아 직을 감당하신 덕에 우리가 구원을 받았습니다. 하루는 고 이중표 목사님께서 교회 계단을 내려가시는데, 청소를 맡은 여집사님이 계단에 앉아 목사님이 뒤에서 듣는 줄도 모른 채 팔자타령을 하고 있었습니다. 목사님께서는 집사님을 위로하며 말씀하셨습니다. <집사님, 계단 청소는 천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들을 위한 섬김이요, 이 계단으로 예수님이 오르내리신다고 생각하면 영광스러운 일이지요. 집사님은 귀한 일을 맡으셨어요> 그 후 이분은 생각을 바꾸어 기쁨으로 하셨다고 합니다. 본문 2절은 이렇습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십자가를 참고 견디며 끝까지 사명을 다합시다. 그렇게 할 때 진정한 주님의 사람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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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3-06
  • [시사칼럼] 흐르는 강물처럼
    결혼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아내를 데리고 철새도래지로 유명했던 을숙도를 방문한 적이 있었습니다. 차도 없을 때여서 택시를 타고 갔는데 도착해보니 참새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아 아내가 무척 실망하는 바람에 난감하기 이를 데가 없었습니다. 아마도 그 원인이 되었을 낙동강 하구언 수문을 작년 이맘 때 35년 만에 상시 개방하기로 했고, 이제 일 년의 시간이 흘러 생태보고서가 나왔습니다. 한국수자원공사 낙동강유역본부 부산권지사가 22일 공개한 지난 1년간 생태 모니터링 결과를 보면 일단 하굿둑 상류의 회유(回遊)성 어류 분포 범위가 확대되었는데, 그 중에서도 연어는 무려 70km 이상 강을 거슬러 올라가 창녕함안보 하류에서 발견되었다 합니다(부산일보 2. 22). 어찌 물고기뿐이겠습니까? 막혔던 강물이 바다를 만나고 바다는 잠시라도 강물을 거슬러 여행할 수 있게 되었으니 이 둘은 또 얼마나 기쁘고 감격스럽겠습니까? 이제 신혼부부가 그토록 찾아 헤맸던 철새뿐만 아니라 어느 순간부터 사라져버린 재첩과 장어니 농어가 돌아오고 생태계가 다 회복되길 바라는 마음 간절합니다. 물은 참으로 신비한 피조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기야 창조주께서 만드신 것들 중에 경이롭지 않는 존재가 하나라도 있겠습니까마는, 물은 그 중에서도 특별하고 특별합니다. 그 특별함을 눈치 챈 사람들이 일찍부터 물을 논했습니다. 고대 그리스의 탈레스(Thales)가 물을 만물의 근원이라 주장하면서 서양철학이 시작되었습니다. 노자(老子)의 도덕경에도 바로 이 ‘물’을 묘사하는 유명한 문구가 있습니다. ‘상선약수’입니다. “가장 좋은 것은 물과 같다. 물은 온갖 것을 이롭게 하면서도 다투지 않고, 모든 사람이 싫어하는 낮은 곳에 머문다. 그러므로 도에 가깝다. 살 때는 물처럼 땅을 좋게 하고, 마음을 쓸 때는 물처럼 그윽함을 좋게 하고, 사람을 사귈 때는 물처럼 어짊을 좋게 하고, 말할 때는 물처럼 믿음을 좋게 하고, 다스릴 때는 물처럼 바르게 하고, 일할 때는 물처럼 능하게 하고, 움직일 때는 물처럼 때를 좋게 하라. 그저 오로지 다투지 아니하니 허물이 없다(上善若水 水善利萬物而不爭 處衆人之所惡 故幾於道 居善地 心善淵 與善仁 言善信 正善治 事善能 動善時 夫唯不爭 故無尤).” 하지만 이렇게 좋은 물이라도 고이면 썩기 마련이고 막히면 악이 되는 이치를 우리는 배웠습니다. “흐르는 강물처럼”이라는 영화를 보셨나요? 1992년 개봉되어 명배우 브래드 피트의 젊은 시절을 볼 수 있는 작품이기도 합니다만, 지금까지도 이 영화가 널리 회자되는 이유는 낚시를 소재로 찍은 그 아름다운 강물과 자연 그리고 그 안에 녹아있는 삶의 의미 때문입니다. 극중 아버지 맥클레인은 목사입니다. 하지만 두 아들 노만과 폴은 개성도 다르고 인생의 여정도 달라집니다. 안정적인 큰 아들과 달리 도전과 모험을 좋아하던 폴은 잠시 막혀버린 물처럼 방황하다가 결국 비참한 죽음에 이르고 맙니다. 아들 장례식에서 아버지 목사님의 말씀이 보는 이들의 가슴을 먹먹하게 하지요. “사랑하는 이가 곤경에 처한 순간, 도우려 하나 무엇을 해야 할지 알지 못하고, 때로는 우리가 주려고 하는 것을 거절당하기도 합니다. 이해하기 어려운 사람을 그대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리고 사랑해야 합니다.” 쓸쓸함과 그리움 그리고 그 모든 기억들을 하나로 합쳐서 흐르는 강물처럼 말입니다. 예수님은 물의 메시지를 두 차례나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한 번은 사마리아 우물 가 여인을 통해서인데,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다시 목마르지 아니하리라’는 말씀이었고, 또 한 번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나를 믿는 자는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주님이 약속하신 물은 타는 목마름을 잠시 해갈하는 그런 정도의 물이 아니었습니다. 주님이 약속하신 물은 변질되거나 부패하는 그런 종류의 물이 아니었습니다. 그 물은 주님으로부터 나와서 결코 고이거나 막히는 법 없이 그를 믿는 자를 뚫고서 흘러내려, 언제나 땅을 좋게 하고 더러움을 씻어 내리고 모든 것을 이롭게 하지만 결코 다투지 아니하고 교만하지 아니하며 언제나 낮은 곳으로 흐르는 겸손의 물이요 생명의 물이기 때문입니다. 살아가면서 수많은 존재들이 명멸합니다. 우리를 웃기고 울리는 일들이 나고 사라집니다. 하지만 우리의 심령이 흐르는 강물과 같다면, 모든 것은 결국 그 안에 합쳐져서 하나가 되어 흘러가게 될 것입니다. 어쩌면 막혀버렸을지도 모르는 우리 안의 물줄기 혹은 사람들 사이의 수로가 주 안에서 시원하게 뚫리는 은혜의 역사가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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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3-06
  • [은혜의말씀] 광야에서 배우는 교훈(신 8:2-3)
    광야는 나지막한 언덕들이 끝없이 펼쳐진 ‘빈들’입니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고 참 조용한 곳입니다. 가끔 바람 소리, 새 소리 들이 간간이 들릴 뿐입니다. 하나님은 이 광야에 기가 막힌, 축복의 비밀들을 숨겨놓으셨습니다. 광야는 히브리어로 [미드바르]라고 하는데, 미(어떤 장소, 곳), 다바르(말씀)의 합성어입니다. 그러니까 광야는 ‘말씀을 듣는 곳, 하나님과 마주 보고 이야기 하는 곳’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사실 오늘 우리는 너무나 바쁜 일상을 보내고 있습니다. 너무 바빠서 기도할 시간이 없습니다. 말씀을 들을 시간이 없습니다. 그런데 광야는 하던 일을 멈추고 조용한 빈들에서, 하나님과 홀로 독대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은혜의 장소’입니다.(신 8:16) 오늘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무엇 때문에 광야 길로 그들을 인도하셨는지, 그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겸손함으로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믿음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2절) 40년이라는 짧지 않은 시간, 광야의 삶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의 생각과 자신의 선택을 내려놓고,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만을 붙들게 되는 ‘훈련의 시간’이었다는 것입니다. 내 주장과 내 생각은 내려놓음으로 겸손하게 되고, 말씀을 온전히 따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화되는 축복이, 이 광야를 통해 일어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나의 옛 자아는 부서지고, 새로운 나를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저와 여러분이 꼭 붙들어야 할 한 가지가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대한 전적인 신뢰 입니다. 광야 길을 걷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스스로 들어간 것도 아닙니다. 광야는 하나님께서 걷게 하시는 길입니다. 그러면, 내가 지금 광야를 걷고 있다면,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향한 특별한 뜻이 있다는 것입니다. 뭐죠? 하나님만 바라보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너무나 쓸데없는 것에 관심이 많습니다. 너무나 세상적인 것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하지만 광야에서는 하나님만 바라볼 수밖에 없습니다. 광야는 우리를 고독하게 함으로 하나님과의 관계에 집중하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광야를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가득한 은혜의 장소로 고백하게 되는 축복이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 진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먹는 것임을 알고 말씀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3절) 광야는 ‘말씀을 듣는 곳, 하나님과만 마주 보고 이야기 하는 곳’이라고 했습니다. 광야에 서면, 우리 삶에 무엇이 가장 중요한지 깨닫게 됩니다. 우선순위가 분명해 집니다. 우리는 떡을 먹야 사는 줄 압니다. 돈이 있어야 사는 줄 압니다. 힘이 있어야 사는 줄 압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먹는 것입니다. 여러분, 잘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께서 40년 동안 광야를 걷게 하신 것이, 우리의 마음을 알고 싶으셔서 그러셨겠습니까? 아닙니다.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누구인지,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 알게 하시려고 광야를 걷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말씀을 먹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존재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복이 아니면 살 수 없는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의 사람은 말하는 것보다 듣는 것에 익숙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광야의 조용한 시간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시간입니다.(시 46:10) 그러므로, 이 광야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버리신 장소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만나는 장소였고, 하나님을 만나는 지성소와 같은 장소였다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께서도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셨고, 말씀으로 이기셨습니다.(마 4:1-4)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믿음의 사람은 말씀이 양식입니다. 말씀으로 살아 갑니다. 저는 모든 성도님들이, 광야의 고요함을 통해 오직 하나님께 집중하는 광야의 축복을 누리시고, 광야와 같은 세상에 말씀의 생명의 물을 흘려 보내는 축복의 통로가 되시길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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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3-06
  • [교회음악칼럼] 찬송(예배)하며 사는 사람들 3
    처음 기독신문에 글을 올릴 때가 작년 사순절 기간이었는데 한해가 흘러 다시 사순절 기간을 맞았다. 시간은 참으로 무정하게 지나간다. 매정하게 느껴질 정도다. 매년 맞이하면서도 늘 올해는 좀 더 의미가 있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진다. 주께서 이 땅에 오셔서 고난 받으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우리의 죄악을 담당하시고 구원을 이루신 참 의미를 곱씹으며 다시금 깊은 묵상의 시간을 가져보기를 원한다. 나를 전부라도 태워 님의 시린 손 녹여 줄 따스한 사랑이 되고 싶었습니다. 그리움으로 충혈된 눈 파랗게 비비며 님의 추운 겨울을 지켜 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함박눈 펑펑 내리는 날, 님께서 걸어가실 가파른 길 위에 누워, 눈보다 더 하얀 사랑이 되고 싶었습니다. 언젠가 시카고에서 한국으로 오는 비행기 속에서 읽은 ‘연탄길’이라는 책머리에 걸려있었던 시이다. 그냥 읽으면 느껴지는 것이기에 부연하여 이야기하는 것이 오히려 이상할거 같다. 시어 그대로 마음에 담으면 그저 뭉클함이 가슴 저편으로부터 미어저 옴을 느낀다. 두 손 모아 기도하며 노래해 본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구원의 주로 오신 주의 뜻이 실천되는 사순절이자 올 한해가 되기를 말이다. 찬양대 연습을 하면서 가끔 하는 이야기인데 신앙적으로 우리는 크게 무엇인가 해야만 한다는 강박관념을 가지고 그래서 그것이 무거운 짐이 되고 때론 자격지심이 되어 자신을 괴롭게 할 때가 왕왕 있는 것 같다. 주변 가까이에서 또 자그마한 것에서부터 사랑을 실천하고, 진심으로 격려하고 나누기를 즐거워한다면 이보다 더 기쁘고, 행복하고, 감사한 일이 있을까? 우리의 공동체들이 이러한 마음들을 모으고 묶어서 주께 드린다면 이것이 진정한 예배요 찬양이지 않을까 생각된다. 그런 시간들이기를 소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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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3-06
  • [분홍목사의 다음세대이야기] 공부냐 신앙이냐, 이것이 문제로다
    제가 다음세대 사역을 오래 하면서 가장 많이 받은 질문이 있다면 “여름 수련회를 가야 하나요? 보충수업을 가야 하나요?” 이 질문입니다. “목사님! 수련회 가야 해요? 공부해야 해요?” 이거 물어보거든요. 이 질문을 받을 때 제가 하는 말이 있어요. “얘야! 수련회에 가면 그만큼 너는 시간을 손해 볼 수밖에 없다. 2박 3일이든, 3박 4일이든 그래! 너는 시간을 손해 보게 될 거야. 자, 게다가 말이다. 네가 수련회에 그 시간을 쏟잖아? 쏟는 동안에 분명히 다른 애들은 그만큼 공부를 더 할 거야. 그치? 그 아이들은 보충수업에 나와서 하루 종일 공부를 할 거란 말이야. 자, 그러면 너는 그만큼 뒤쳐질 거야. 분명히 알아. 너는 3일만큼, 4일만큼 뒤쳐질 거야. 그건 하나님 만드신 법칙이야!”라고 얘기해 줘요. 그러면 애가 얼굴이 노래지기 시작합니다. “어? 이게 아닌데?” 이런 분위기로 저를 봐요. 그러면 저는 얘기를 해요. “네가 그 공부를 덜한 만큼을 충분히 다녀와서 더 열심히 해서 만회할 수 있다고 하면 너는 가도 좋아! 자, 그런데 네가 만약 그렇지 않다고 하면 다녀와서 그 3, 4일을 보충할 수 없다고 하면...” 여기까지 가면 이 아이가 울먹이기 시작합니다. “아니, 목사님! 그걸 물어본 게 아니잖아요! 그 얘기 하는 게 아니잖아요.” 그 아이는 저에게 뭘 기대했을까요? 이런 것을 기대를 했겠죠. “야! 당연히 수련회에 가야지! 야! 성적? 걱정하지 마! 하나님이 다 책임져 주셔! 야! 수련회에 가면 하나님이 다 책임져! 걱정하지 마! 너 갔다 오면 100점 맞아! 걱정하지 마! 가! 가!” 이런 말을 기대하지 않았을까요? 아마도 그 아이가 기도한 내용을 한번 살펴보면 그 아이는 이런 기도를 하고 왔을 거예요. “하나님! 내가 믿음으로 수련회 갈 테니까 성적은 하나님이 알아서 만회해 주세요.” 여러분, 이 마음이 어디서 왔을까요? 이게 다 저희한테 온 것입니다. 어른들한테 온 거예요. 어른들이 그렇게 가르쳤어요. 은혜 받으면 다 된다. 하나님이 하시면 된다. 그냥 다 맡겨두면 하나님이 다 알아서 하실 거다. 이렇게 가르친 거에요. 그러니까 애들이 수련회에 가면 “하나님 다 해주시겠지! 머! 당연히 해주시겠지. 좋은 게 좋은 거지.” 이렇게 생각을 해요. 갔다 오면 당연히 1등하고, 당연히 뭐 하나님 날 높여 주시고. 그러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지만 저는 얘기합니다. “야! 그거 억지다. 그리고 무지한 거다. 야!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니야! 야! 그렇게 생각하면 큰일 나!”라고 얘기해 줘요. 그럼 뭘까요? “자, 봐봐. 공부하면 100점 맞을 수 있어. 그거 맞지? 그런데 공부 안 하면 빵 점 맞는 거, 그것도 당연한 거야. 왜? 하나님이 모든 사람에게 주신 자연법칙이자, 일반 은총에 해당하는 거야. 아주 당연한 거야. 너 그거를 모르면 안 돼. 그거 억지를 쓰면 안 돼. 그거 모르면 무지한 거다. 자, 그런데 말이다. 그런데 여기부터 중요해. 잘 들어봐. 그런데 하나님은 자연법칙만 만드신 게 아니야. 하나님은 영적인 법칙도 만드셨어. 사람들이 이걸 모르지만 우린 이걸 알잖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 그래서 하나님을 의지하고 수련회에 나오고, 내 인생을 주님 앞에 드리면서 헌신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은 특별한 사명과 목적을 깨닫게 해 주셔. 그러니까 수련회를 왜 가나? 가는 만큼 공부에서 손해를 볼 거야. 그래서 가는 만큼 더 열심히 해야 해. 그러나 왜 가야 하는가?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사명을 발견하게 돼! 목적을 분명하게 보게 돼! 그러니까 우리가 그 자리에서 완전히 달라져! 그걸 깨닫는 자리가 수련회야! 그래서 수련회가 중요한 거야. 너 공부가 걱정되니? 공부가 밀릴까 걱정이 되니? 그거 걱정하지 말고 네 인생의 새로운 사명과 목적을 주시는 그 하나님을 기대해! 그리고 그만큼 더 깨달은 만큼 더 열심히 공부할 마음을 가지고 수련회에 가야 해!”라고 말합니다. 즉, ‘수련회냐? 공부냐?’ 가 아닌 것입니다. 수련회에 가서 하나님을 만나고 주의 영광을 보고 나면 그만큼 더 하나님의 자녀로서, 믿음의 학생으로서 거룩한 옷을 입고 즐거이 헌신하는 게 맞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야기합니다. ‘수련회냐? 공부냐?’ 가 아니라 수련회를 가기 때문에 더 열심히 공부한다. 그래서 “수련회 다녀와서 더 은혜 받고, 더 열심히 공부해서 하나님이 너를 통해서 목적하는 바를 반드시 이루실 줄로 나는 믿는다!”라고 얘기해 줍니다. “그러니 수련회를 가라!” 이것이 저의 결론입니다. 우리가 믿음의 선택을 하면 남들보다 분명 더 노력하고 수고해야 합니다. 여러분, 이게 중요해요.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만큼, 하나님이 일하실 만큼, 우리도 일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감당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그 말씀대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성적이 떨어지는 게 맞는 겁니다. 공부하지 않고 노력하지 않았다면 세상에 밀리는 게 맞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다 해주신다? 아닙니다. 그 하나님을 믿고 변화된 우리, 예배의 은혜를 받은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는 노력과 수고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도움이 되시고 우리의 앞날을 놀랍게 열어가실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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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분홍목사의 다음세대 이야기
    2023-03-06
  • [다음세대칼럼] 참 제자가 되는 길
    필자는 집나온 아이들을 집으로 돌려보내고, 학교 안다니는 아이들을 학교로 돌려보내는 사역을 하고 있습니다. 궁극적으로 교회를 나와서 방황하는 청소년들을 교회로 돌려보내기도 합니다.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도 합니다. 청소년을 대상으로 복귀시키고, 회복시키고, 보호하고 복음전하는 사역을 하고 있습니다. 매일 100여명의 청소년들을 만납니다. 집나온 아이들, 학교 안다니는 아이들을 매일매일 반복적으로 만납니다. 저도 사람이라 매일매일 반복된 삶에 지치고 힘이 듭니다. 이번 주에도 힘든 일들이 많았습니다. 두 명의 집나온 아이들을 집으로 돌려보냈습니다. 그런데 다른 아이들 세 명이 집을 나갔습니다. 다른 두 명의 아이들을 학교로 돌려보냈는데, 학교폭력으로 신학기를 앞두고 강제전학과 퇴학이 결정되었습니다. 내가 왜 이 일을 하는가? 하며 실망이 컸습니다. 거의 탈진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한통의 편지를 받았습니다. 정심여자중고등학교에서 온 편지입니다. 정심여자중고등학교는 안양에 있는 소년원입니다. “쌤 저 상아에요 보고 싶어요.”라는 글로 편지가 시작되었습니다. 이 친구는 중학교 1학년 때부터 필자가 챙기고 교육했던 아이입니다. 지금은 20살이 되었습니다. 재판을 받지 않고, 집을 나가 있다가 필자에게 도와달라고 온 아이입니다. 작년 9월 재판을 받고 2년간 소년원에 가는 처분을 받았습니다. 갈 집이 없어 방황했던 아이에게 모든 책임을 지우는 것이 왠지 부당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이 아이는 12년 전에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5년 전에 어머니마저 돌아가셨습니다. 아버지는 심장마비로 어머니는 사고로 돌아가셨습니다. 아무도 돌보는 사람이 없어 결국은 소년원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필자는 편지를 계속 읽어 내려갔습니다. “마지막 10대를 소년원에서 보내는 것이 안타까운 일 일수도 있지만 저는 오히려 기회라고 생각하고 10대를 잘 마무리할까 합니다. 저 여기서 종교 기독교에서 말씀 주일마다 들으며 저 성경책도 가지고 있습니다. 소년원 주일 예배에서 ‘주님은 나의 목자이시니’라는 말씀을 들었어요. 이 말씀을 들으면서 제 이야기가 생각났어요. 선생님~ 양을 돌보는 목자는 양 뒤에서 양을 몰아주며 양이 위험한 길로 빠지면 떨어지지 않게 양을 안전한 길로 몰아주는거 또한 목자의 일입니다. 저를 안전한 길로 몰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선생님은 주님의 참 제자같아요.” 이렇게 이 아이에게 주님의 참 제자로 인정을 받았습니다. “선생님은 주님의 참 제자같아요.” 이 글이 계속해서 저의 마음에 남아 지친 몸과 마음에 큰 위로가 되었습니다. 이 아이의 편지를 통해 위로를 받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신앙생활하면서 주님의 제자, 참된 제자로 인정받고 싶지 않으십니까? 주님의 참 제자가 되는 길이 무엇입니까? 마가복음 8장 34절에서 예수님은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모아놓고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무리들과 제자들 사이에 차이를 두지 않으십니다. 제자들이 지금까지 3년 가까이 예수님을 쫓아다닌 것이 예수님의 참 제자가 되는 데 특권이 없다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이라는 말씀은 “너희들이 지금 나를 떠나도 좋다. 그러나 만약 나를 쫓아오려거든” 이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을 가지고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예수님의 제자로 초대하십니다. 누구도 좋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따라오고자 한다면 다음의 조건을 채워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인격적인 초청이요 부르심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길은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게 열려있습니다. 주께로부터 직접 세움을 받은 12제자라 해도 특권은 없습니다. 마가복음 8장 34절 말씀은 전체 마가복음 중에 가장 빛나는 보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주님께로 나아오는 모든 죄인들이 반드시 들어야 할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처럼 올바른 신앙고백을 하고 주님을 따르길 원하는 사람들이 반드시 들어야 할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참 제자가 되길 원하는 사람들을 향한 주님의 초청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이 말씀을 묵상하시면서 자기 자신을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의 참 제자, 믿을만한 목사와 장로, 진실된 제직, 참된 성도가 되길 간절히 바래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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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3-06
  • [신앙교육나침반] generation to generation
    교회(ἐκκλησία)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믿음으로 응답하는 사람들이, 성령의 능력 안에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배드리기 위하여 부름 받은 공동체입니다. 교회는 신분, 성별, 연령을 초월하여 하나 된 예수 그리스도의 한 몸 공동체입니다. 16세기 개혁교회 주일학교는 교회의 이러한 본질을 회복하는 세대통합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들은 유아, 어린이, 청소년, 장년, 노년이 모두 함께 모여 ‘그리스도의 한 몸을 세우는 예배’를 드렸습니다. 부모세대와 자녀세대가 매 주일, 복음을 ‘함께’ 듣고, ‘함께’ 은혜 받으며, ‘함께’ 결단하였습니다. 교회의 본질을 회복하면, 자연스럽게 부모세대와 자녀세대간의 신앙전수가 활발해집니다. 존 웨스터호프3세는 신앙 전수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온 세대가 함께 예배드리며, 함께 복음을 경험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부모세대와 자녀세대가 함께 복음을 받고, 함께 복음을 경험하는 시간 속에서, 자녀세대들은 자신이 누구이며, 어느 공동체에 속해있는지에 대한 정체성이 수립됩니다. 온 세대가 함께하는 예배와 프로그램은 세대와 계층과 문화를 뛰어넘고, 언어와 인종을 초월하여 하나 되는 신비와 기쁨을 공유하는 시간입니다. 교회가 이러한 예배와 프로그램을 의도적이고, 정기적으로 마련한다면, 자녀세대들은 교회와 한 가족이 되는 경험을 하게 될 것입니다. 자녀세대들은 ‘함께함’의 경험 속에서, 자신이 ‘교육부서의 학생’이 아닌, ‘교회의 참된 성도, 참된 지체’임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얼마 전, 향기나무교육개발원은 100년의 역사가 넘는 시골의 어느 교회를 만났습니다. 그 교회는 수많은 세월 속에, 여러 가지 어려움으로 인하여, 300여명 모였던 교회가 현재는 60명 남짓 남게 되었습니다. 남은 성도들은 상처와 아픔으로 인하여 무기력하게 쓰러지고, 후회와 원망으로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곳에 향기나무 사역팀을 보내셨습니다. 처음에는 주일학교 아이들만을 대상으로 한, 겨울성경학교를 계획하였습니다. 그러나 담임목사님과 사모님은 저희 사역의 본질인 ‘세대통합’의 가치를 들으시고, 방향을 완전히 바꾸셔서 세대통합 겨울성경학교를 하기로 결정하셨습니다. 담임목사님의 사모님은 저희 팀과 함께 준비 기도회 중, 간절히 거듭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교회가 향기나무 집회와 성경놀이를 통해서 따뜻해지면 좋겠습니다!” ‘따뜻해지면 좋겠습니다!’ 이 한 말씀 붙잡고 기도하며 나아갔습니다. 온 세대가 함께하는 복음집회와 복음 성경놀이터의 결과는 어땠을까요?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성령 하나님이 강하게 임재하셔서, 서로를 마주보게 하시고, 서로에게 미소를 짓게 하시고, 서로를 감싸 안게 하셨습니다. 그 날 참 추웠던 날씨였지만, 교회 예배당 안은 유아, 아동, 청소년, 청년, 장년, 노년, 모든 세대가 복음 안에서 기쁨으로 하나 되니, 그 온기로 인하여 참 많이도 따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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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앙교육 나침반
    2023-03-06
  • [기독교인문학] “우리는 하늘의 시민이다”
    톰 라이트의 바울 평전(Ⅱ) 성서의 인물 중에 바울처럼 논쟁의 한 가운데 선 인물도 드물다. 현존하는 최고의 바울해석자가 쓴 최고의 바울평전이란 평을 받고 있는 이 책은 역사가이자 신약학자인 저자가 1세기 초기기독교의 역사적 탐구를 통하여 얻은 해박한 지식과 안목으로 바울의 생애와 사상을 생생하게 구현하고 있다. 학문성과 대중성을 두루 갖춰 출간 초기부터 큰 반향을 일으킨바 있는 저자는 지금의 시각이 아닌 타임머신을 타고 2,000년 전으로 돌아가 한 인간이자 유대인이며 기독교인인 인간 바울을 입체적으로 이해할 때 비로서 예수에 대한 그의 새로운 틀과 사상을 이해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저자와 함께 선교 여정을 걷다 보면 온갖 고난을 이겨내며 꿈꿨던 새 폴리스, 새로운 인류의 인간을 향한 불굴의 의지를 가진 이방인의 사도, 바울을 만날 수 있다. ◇ 저자소개 ∥ 톰 라이트 저명한 신약학자이자 초기 기독교 역사에 정통한 역사학자. 1948년 생으로 영국에서 태어나 옥스퍼드에서 수학하고 케임브리지, 맥길,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신약학을 가르쳤으며, 웨스트민스터 참사회원, 영국 성공회 사제로 더럼 주교를 역임했다. ‘기독교의 기원과 하나님의 문제’를 다룬 6부작 시리즈로 학계에 큰 영향을 끼치며 ‘역사적 예수 연구’와 ‘바울신학’ 분야의 독보적인 학자로 인정 받았다. ◇ 저서∥ 《마침내 드러난 하나님 나라》, 《광장에 선 하나님》, 《이것이 복음이다》, 《혁명이 시작된 날》 등이 있다. ◇ 같이 읽으면 좋은 책 《단숨에 읽는 바울》 존 M.G. 바클레이 지음 / 새물결플러스 / 2018 《신약학 강의노트》 니제이 K. 굽타 지음 / 감은사 / 2020 《로마세계의 초기 기독교 이해》 브루스 W.롱네커 / 새물결플러스 / 2022 “우리는 하늘의 시민이다” - 메시아 안에 있는 아브라함의 새로운 백성 - 새 세상을 꿈꾸며 “바울과 그밖의 모든 초기 그리스도인이 중요하게 여긴 것은 ‘구원받은 영혼’이 이 세상에서 건짐을 받아 저 먼 ‘천국’으로 옮겨지는 것이 아니라, 하늘과 땅 자체가 온 우주의 갱신이라는 위대한 행위를 통해 하나가 되고 이 온 우주의 갱신 안에서 인간의 몸도 다시 새롭게 되어 새 세계에 자리하게 되는 것이었다.” 김길구 지금은 사순절 기간입니다. 국내·외적으로 어려운 때 옷깃을 여미고 예수의 고난과 부활의 의미를 되새겨 보는 경건의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세계사를 바꾼 바울의 일대기를 다룬 《바울평전》을 읽으면서 사도 바울이 발견한 복음의 의미를 찾아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라 생각됩니다. 이 책은 아마존 베스트셀러 종합 1위,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 영국 기독교서점협회 선정 ‘올해의 책’에 오를 정도로 호응이 컸던 책입니다. 독자가 느끼는 740쪽의 두께에 대한 부담감도 크지요. 그러나 저명한 학자요, 국제적인 강연자이자 대중적인 작품과 주석들을 쓴 저술가로 타임지의 표지 인물로 나온바 있는 톰 라이트의 내공을 느낄 수 있는 책입니다. 지난 호에는 지면 관계로 다 못한 얘기를 오늘 이어가 보기로 하겠습니다. 10.19.(제37호)자에 게재된 바울평전 제1부는 바울을 둘러싼 몇 가지 오해와 편견을 중심으로 얘기해 봤는데, 이번 호에는 본론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김현호 이 책의 특징 중에 하나는 라이프스토리 중심의 전기에 비해 논증과 추리가 많이 들어가 있어 독자들의 인내심을 시험을 하는데, 이런 면이 이 책이 주는 매력이라 생각합니다. 류지원 이런 대작을 쓰기 위해서는 바울 당시의 자료와 시대상을 반영하는 종교사회적 자료가 많아야 하는데, 부족한 자료의 빈 공백을 논증과 추리로 고대 1세기 그 역사의 현장을 재현한 것은 톰 라이트라서 가능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다메섹의 회심- 개종 VS 소명 김길구 교회의 박해자 사울이 사도바울이 된 계기가 다메섹 도상에서의 회심입니다. 서양회화에서 카르바조를 비롯한 많은 대가들이 그 역사적 현장을 그림으로 남긴 유명한 장면이죠. 김현호 바울에 대한 논란 중에 하나는 바울의 회심을 어떻게 보느냐 논쟁이 있어요. 개종이냐 아니면 유대교의 전통을 계승한 소명이냐는 문제인데, 이 책의 서론 격인 제1부 시작의 첫 제목이 열심입니다. 하나님과 율법을 열렬히 따랐던 3명의 인물을 소개하지요? 비느하스, 엘리야, 유다 마카베오입니다. 류지원 비느하스는 음란한 짓을 한 시므온 지파의 시므리와 미디안족속의 수르왕의 딸 고스비를 창으로 찔러 죽여 레위지파의 저주를 사라지게 했던 대제사장, 혼자서 이세벨 왕비가 데려온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는 사제 850명과의 갈멜산상의 대결에서 승리한 엘리야 선지자, 그리고 유다 마카베오는 박해에 저항하여 이민족 군대와 셀레우코스 군대를 격파하고 형제들과 함께 성전을 봉헌, 수전절의 유래가 된 인물입니다. 김현호 이들은 힘으로 이방인들을 무찌른 민족의 영웅들 입니다. 바울이 예수따름이들을 열심히 핍박한 것도 그 열심의 연장선상에서 한 행동이라는 것입니다. 구약에 충실했던 바울의 이러한 열심은 다메섹 도상의 회심을 통해서 구약의 모든 약속이 예수 안에서 성취되었다는 깨달음을 얻은 순간 박해자에서 이방인의 사도로서의 급격한 소명의식은 개종이 아니라 사도적 사명에 대한 위임이라는 확신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새 관점 학파에 대하여 김길구 이 책은 ‘새 관점 학파’의 시각으로 집필된 책이라 이에 대한 선이해를 가지고 책을 대하면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됩니다. 류지원 〈바울에 관한 새 관점〉(NPP)이란 어구는 1983년 제임스 던의 같은 이름의 강연에서 유래되었는데 그 이전인 1977년에 샌더슨이 〈바울과 팔레스타인의 유대교〉란 책에서 바울 당대 유대교는 선행을 축적하는 데에 기초한 율법주의적인 종교를 가리키고 있지 않았으며, 오히려 ‘언약적 율법주의’-“유대교가 율법주의에 관심을 둔 것은 율법주의나 행위에 의한 의의 문제가 아니라 은혜 안에서 하나님에 의해 이미 주어진 언약의 틀 안에서 보아야 한다”고 주장 하였는데 이를 동조하는 일군의 학자들을 ‘새관점 학파’라고 불리게 되었습니다. 저자인 톰 라이트도 주요 멤버입니다. 김현호 율법에 대한 바울의 부정적 진술들은 16세기 종교개혁자 루터로 하여금 ‘율법’과 ‘복음’이라는 대립적 관계로 보게 되었어요. 이러한 이분법의 부작용으로 마틴 루터의 유대인 혐오는 히틀러의 홀로코스트에 불을 붙였고, 왜곡된 이신칭의 값싼 은혜는 영화 ‘밀양’에서 보듯 우리 사회에 만연한 기독교 희화화의 단골 메뉴가 되었으니까요. 물론 그것이 팩트가 아니라도요. 김길구 〈새 관점 학파〉의 출현 배경에는 2차 세계대전 이후의 사회적 분위기와도 관련이 있어요. 1947년에 발굴된 사해사본의 연구성과를 비롯한 고고학적 성과를 통해 고대 유대교에 대한 평가가 달라지기 시작했고, 나치에 의한 유대인 학살의 실상이 밝혀지면서 인간의 야만성과 유대인에 대한 일종의 죄책감 같은 분위기도 한몫 했으니까요. 김현호 그 결과 아우구스티누스→마틴 루터로 이어지는 정통 개신교의 지금의 시선이 아닌 고대 1세기 팔레스타인 지역을 중심으로 바울 당대의 종교사회적 환경 내에서 이해 되어야 한다는 저자의 생각이 이 작품에 충실히 반영되어 있습니다. 류지원 오늘 이 자리가 신학을 논하는 자리가 아니지만, 바울의 새 관점에 대한 반론도 만만치 않아요. 그러나 니제이 K. 굽다처럼 “유대인들의 초기 유대 문헌에도 여호와가 자신의 백성들에게 보이는 자비와 헌신된 사랑의 요소가 강하게 나타난다는 사실을 확인한 점”과 바울이 “신학자일 뿐 아니라 사회적인 옹호자 및 대리자로 하나님의 백성, 곧 하나님의 구원 계획 안에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의 연합을 주요한 관심사 부각시켰다”는 긍정적인 평가도 있어요. 기억에 남는 대목이 있다면 김길구 “유대인과 이방인이 함께 어우러진 공동체, 한 분 예수님의 아들인 예수 안에서, 예수를 통해 그리고 영의 능력 안에서 한 분 하나님을 예배하는 공동체”를 꿈꿨던 거인. 류지원 “바울과 그 밖의 모든 초기 그리스도인이 중요하게 여긴 것은 ‘구원받은 영혼’이 이 세상에서 건짐을 받아 저 먼 ‘천국’으로 옮겨 가는 것이 아니라, 하늘과 땅 자체가 온 우주의 갱신이라는 위대한 행위를 통해 하나가 되고 이 온 우주의 갱신 안에서 인간의 몸도 다시 새롭게 되어 새 세계에 자리하게 되는 것이었다. (바울은 ‘우리는 하늘의 시민입니다’라고 말한 뒤, 곧바로 예수가 하늘에서 오시지만, 우리를 거기로 다시 데려가시지 않고 현재 존재하는 세계와 우리를 함께 변형시키리라고 말한다)는 대목인데 온 우주와 온 역사를 아우르는 21세기 현재에도 호출되는 사회, 문화 비평가로서의 사도 바울을 생각하며^^ 김현호 “하나님은 마지막에 온 세상을 바로잡을 것이다. 그는 예수 안에서 그리고 그 죽음과 부활을 통해 이미 그 일 가운데 큰 작업을 마치셨다. 이제 하나님은 복음과 영을 통해 사람들을 바로잡으심으로써, 이 사람들이 복음을 행하는 일의 본이 되게 하시고 하나님의 세계를 더 깊이 있게 변화시켜 가는 대리인이 되게 하신다. 이것이 바울의 유명한 ‘칭의론’의 핵심이다.”라는 대목이 인상 깊어요.. 김길구 장시간 수고하셨습니다. 바울은 신학뿐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 윤리와 부부생활 등 거의 모든 영역으로 오지랖을 널폈던 큰 산맥이란 생각이 들어요. 바울 선생님이 오늘 이 자리에 오셔서 지금 우리 모습을 본다면 무슨 말씀을 하실까? 고린도후서에서 회고한 그가 겪은 수많은 고난을 초인적인 힘으로 견뎌내며 이루려고 했던 새 백성, 새 공동체, 새 세상에 대한 비전을 생각해 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다음호에는 칼바르트의 글을 현실에서 구현해낸 인물이라는 평을 받고 있는 평신도신학자 월리엄 스트링펠로우의 《사적이며 공적인 신앙》이란 책을 통해 우리의 신앙을 점검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 정리 : 김길구 】
    • 문화
    • 기독교인문학
    2023-03-06
  • 명성교회 최종승소
    세습논란이 일었던 명성교회 김하나 목사의 대표 자격이 대법원에서 최종 승소했다. 대법원 1부(주심 김선수 대법관)는 명성교회평신도연합회 정태윤 집사가 "김 목사에게 대표자 지위가 없다는 사실을 확인해달라"며 명성교회를 상대로 제기한 소송을 원고 패소 판결한 원심을 최근 심리불속행 기각으로 확정했다. 정 집사는 교단이 정한 세습금지법을 어기고 담임목사가 된 김하나 목사에게 자격이 없다는 소송을 제기했다. 1심에서는 김하나 목사를 위임목사로 청빙한 것이 세습방지법을 위반해 위임목사의 지위가 존재하지 않는다며 정 집사의 손을 들어줬다. 하지만 2심은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가 '전임 목사의 은퇴 후 5년이 지난 때부터는 직계비속을 위임목사에 청빙해도 세습방지법에 어긋나지 않는다'고 유권해석을 내린 점을 들어 김하나 목사의 위임목사 임직 효력을 인정한 바 있다.
    • 오피니언
    • 기자수첩
    • 광야의 소리
    2023-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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