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9(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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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내산] 한 교수의 투신과 무디어진 우리 사회와 교회
    한 달 전 부산대학교 캠퍼스에서는 대학의 민주화와 우리 사회의 민주화를 외치며, 고현철 교수가 몸을 던져 산화했다. 우리 사회가 얼마나 민주화 되었는데, 지금 민주화를 위해 교수가 투신 자살을 하다니 하고 의아하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정치가 선진화되지 못하고, 돈이면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자본의 논리와 공의가 밑받침 되지 않는 권력이 야합하면서, 사람들의 민주의식은 제대로 성숙되지 못한 채 이기적 욕망만을 부추기는 사회로 전락해 가고 있다. 급격한 경제성장이 우리 사회 속에 천민자본주의적 생활 방식을 벗어나지 못하게 만든 것처럼, 급격하게 전환된 형식적 민주주의 제도는 철저한 생활 민주주의로 진전되지 못함으로써 성숙한 민주사회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인류가 최선의 삶의 방식으로 선택한 민주주의는 하루 아침에 이루어 진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현재의 민주주의 제도가 온전하게 완성된 완벽한 제도일 수도 없다. 특히 한국 사회와 같이 급격하게 민주화의 형식적 틀을 갖춘 나라는 실질적인 민주사회를 실현해 나아가기 위해서는 부단히 제도를 바꾸고 개혁하며 온전한 민주 사회로의 지향점을 향해 끊임없이 나아가야 한다. 그러나 우리 사회가 경제적으로 중산층이 사라지고, 실업율이 높아지고, 청년들의 일자리가 사라져 경제적인 문제해결이 현실적인 급선무로 등장하면서, 내실있는 민주화에 대한 의식들은 뒷전으로 밀려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경제적 민주화가 한 때는 이슈가 되긴 했으나, 민주화는 사그라지고 경제활성화만 부르짖는 사회가 되어버렸다. 온전한 민주사회를 위해서는 경제적 민주화도 중요한 한 요소이지만, 이를 포기한 것이다. 이는 바로 우리 사회가 온전한 민주주의 사회로 나아가는 길에서 후퇴하고 있음을 방증함이다. 그러나 일반 시민들은 이러한 우리 사회의 전반에 흐르고 있는 시대적 현상을 민감하게 감각하기 힘들다. 이미 우리 사회도 철저히 개인화되고 다양화된 사회로 나아가고 있어 자신의 문제와 직접 관련되지 않은 사항이나 당장 이해관계가 없는 것들에 대해서는 무관심으로 일관하는 삶에 길들여져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돈만 있으면, 자신의 삶을 마음껏 즐기면서 살아갈 수 있는 끝없는 쾌락추구의 삶을 살 수 있도록 하는 서비스 산업이 이미 우리 삶을 장악하고 있는 현실이다. 사도 바울의 경고처럼 사람들의 삶이 돈을 사랑하며, 자기를 사랑하며, 쾌락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 하는 세상에 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한국 사회의 현실을 예민한 촉수로 감각한 한 사람이 시인이었던 고현철 교수이다. 그가 남긴 유서 내용의 일절을 읽어 보자.“교육부의 방침대로 총장 후보를 선출해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 후보를 임용하지 않는 상황이라면 대학의 자율성은 전혀 없고 대학에서 총장 후보를 선출하는 과정에서부터 오직 교육부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는 점이 문제이다. 이는 민주주의 심각한 훼손이 아닐 수 없다. 더 큰 문제는 이런 상황에 대한 인식이 대학과 사회 전반적으로 너무 무뎌 있다는 점이다. 국정원 사건부터 무뎌 있는 게 우리의 현실 아닌가. 교묘하게 민주주의는 억압되어 있는데 무뎌져 있는 것이다. 진정한 민주주의가 필요하다.”고현철 교수가 일차적으로는 대학의 총장 직선제에 관심하고 있었지만, 그의 시야는 학교 안에 갇혀 있지 않았다. 우리 사회 전반의 일상에 내재해 있는 현실적 부조리와 불평등에 예리한 언어의 칼을 들이대고 있었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그가 남긴 한 권의 시집인 <평사리 송사리>에 산재해 있다. 그는 우리 사회 전체가 자신을 사랑하는데, 쾌락을 쫓아가는 데, 돈을 사랑하는데, 정신을 빼앗겨 우리 사회 구성원 모두가 함께 행복한 삶을 향유하기 위해반드시 추구해가야 할 진정한 민주주의에는 관심이 없어졌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무뎌진 이 사회 현실 속에서는 지난 민주화 시절 때와 같은 충격요법이 필요하다고 역설하고, 희생이 필요하다면 자신이 감당하겠다는 유서를 남기고 투신한 것이다. 세상살이의 큰 흐름 속에 쉽게 야합하며 무디게 살아가고 있는 부끄러운 우리의 화인 맞은 양심에 불을 지핀 것이다. 그는 1984년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고, 86년에 입대해서 군 신우회에서 열정적으로 활동했으며, 1988년 제대 이후에 개척교회인 가정 교회의 일원이 되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세워나가는 데 게으르지 않았다. 한국사회의 또 다른 차원의 민주적 성숙을 위해 몸을 던진 그의 정신을 이어가기 위해 지난 9월 18일 서울 여의도 산업은행 앞에서 전국의 교수 1천 여명이 모여 전국교수대회를 열었다. 한국교회는 이 한 교수의 투신을 어떻게 해석하며 평가할 것인가? 한국교회는 강 건너 불구경하듯 바라만 보고 있을 것인가?
    • 오피니언
    2015-09-24
  • [이용희 교수] 동성애의 물결을 막아서는 방파제, 거룩한 대한민국
    2015년 6월 26일, 미국 연방대법원이 동성결혼 합법화 판결을 내림으로써 전 세계 200여 개 국가들 중 현재 동성결혼을 합법화한 국가는 21개국이 되었다. 반면, 동성애를 반대하거나 법적으로 죄라 규정하는 나라는 약 80개국에 이른다. 동성애를 가장 강력하게 막아서고 있는 나라들은 아프리카 국가들로 아프리카 55개국 중 38개국이 동성결혼을 불법으로 규정하고 있다. 아프리카는 에이즈로 인해 지난 20여 년간 약 2천 5백만 명 이상이 사망했고, 에이즈로 부모를 잃어 생긴 고아만해도 약 2천만 명에 달한다. 이처럼 에이즈로 인해 많은 고통을 받은 아프리카 국가들은 에이즈의 근본 원인인 동성애에 대해 강력한 처벌 규정 만들었다. 미국 질병관리본부는 청소년·청년(만13~24세) 신규 남성 에이즈 감염자 약 94%가 동성 간 성행위로 감염된다고 밝혔다. 성과학연구협회는 공식적으로 “동성애는 에이즈를 전파하는 위험행동”이라고 발표했다(2014.11). 지난 10년 간 우리나라의 에이즈 감염자 수는 4배가 증가했으며 특히 청소년 감염자수는 8배나 증가했다. 2013년 우리나라의 에이즈 감염자 수는 1만 명을 넘어 공식적으로 에이즈 확산 위험국가가 되었다. 동성애가 합법화 된 선진국 사례를 보면 캐나다 온타리오주에서 2015년 새롭게 개정한 성교육 커리큘럼에 의하면 3학년(만8세)은 동성결혼이 정상이라고 배운다. 6학년(만 12세)때는 자위행위를 학습하고 7학년(만 13세)때는 항문성교와 구강성교를 학습한다. 더 나아가 동성애 합법화는 비정상적인 성적 결합도 허용하게 만든다. 동성애가 합법화된 네덜란드, 덴마크, 독일 등 유럽 국가들에서는 동성애뿐 아니라 근친상간, 소아성애(아동과 성행위), 그리고 수간(동물과 성행위)까지 합법화되었다. 헝가리, 핀란드, 루마니아, 네덜란드, 독일 등은 동물매춘을 합법적으로 하고 있는 나라로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2007년, 2010년, 2013년 세 차례에 걸친 동성애 합법화를 위한 차별금지법 입법 움직임이 있었다. 2013년에 발의된 차별금지법안에 따르면 동성애에 대해 부정적이거나 비윤리적이라 말할 경우, 2년 이하의 징역 또는 1천만원(5회 반복, 강제이행금 3천만원 추가) 이하의 벌금에 처하도록 하는 조항이 포함되어 논란이 됐었다. 다행히 헌신된 성도들의 노력과 희생으로 막았지만 통과될 경우 동성애를 ‘죄’로 명문화하고 있는 성경은 불법한 책이 되며 동성애가 ‘죄’라고 성경대로 가르치는 교회는 불법 집단이 되고 공인된 학교에서 성교육 시간에 이성 간 성행위뿐만 아니라 동성 간 성행위인 항문성교와 구강성교를 배워야만 한다. 동성애에 대해 부정적인 말을 할 수 없으므로 에이즈에 대한 감염 노출도 높아지게 된다. 거룩한 대한민국을 만들기 위해선 다음 6가지 방안이 시급히 요청되는 상황이다. 첫째, 성과학 연구소를 설립하여 동성애는 결코 유전이 아니며 하나님이 주신 생명과 가정을 손상시킨다는 것을 과학적으로 입증할 수 있어야 한다. 둘째, 동성애의 폐해에 대해 바르게 알리고 홍보하는 국민교육과 계몽, 홍보 활동이 필요하다. 셋째, 동성결혼 합법화를 시도하는 모든 법적 소송에 대항할 수 있는 기독교 법률단이 세워져야 한다. 넷째, 동성애를 미화, 조장하는 언론, 대중매체를 모니터링하며 국민 다수가 동성애에 대한 바른 인식과 반응을 이끌어 낼 SNS 대응팀이 조직되어야 하며 더 나아가 동성애의 실체를 바르게 알리고 성윤리를 계몽하는 언론, 미디어가 창출되어야 한다, 다섯째, 고통 받는 동성애자들의 내적 치유와 중독 치유를 위한 동성애 치유프로그램을 개발, 운영해야 한다. 여섯째, 미국의 오바마 대통령과 반기문 UN 사무총장 그리고 서구에서 동성애 합법화를 위해 앞장서는 세력들에 대항하기 위해 동성애를 법으로 금지한 80개국들 간의 국제적 연대가 필요하다. 서구에서 동성애가 합법화 됐다고 한국이 따라할 필요는 전혀 없다. 동성애로 인한 가정 붕괴와 에이즈 확산 그리고 이에 따른 세금폭탄, 그리고 자녀들이 학교에서 의무적으로 배워야만 하는 동성애 교육 등 심각한 사회적 문제들을 꼭 감안해야 한다. 대한민국은 서구에서 몰려오는 동성애의 물결을 막아서는 방파제가 되고 전 세계를 선도하며 ‘성결의 빛’을 비추는 거룩한 나라가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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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15-09-24
  • [목회자 칼럼] 총회신학원 초대 원장 임기를 마치며
    어느덧 임기 연임을 마치고 무거운 짐을 내려 놓게 된다. 개인적으로 나의 목회 은퇴도 몇 년을 남겨둔 가운데 있다. 내년 3월에 초대 총신원 원장직을 마치면서 어제와 오늘을 생각하며 소감을 나눈다. 어려서부터 통합, 합동에 속한 교회에서 자랐다. 영국에서 국제장로교단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10년 가까운 해외생활을 마감하고 한국행을 준비하는 가운데 한국 최초의 여자 목사인 최덕지 선생의 전기인, <이 한 목숨 주를 위해>(저자:최종규 목사)를 읽으면서 재건교회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한국교회에도 이런 위대한 의인이 있었다니! 이런 분이 사랑한 재건교회라면 일할 가치가 있지 않겠는가? 비록 지금은 미미할지라도 뿌리가 좋고 그루터기가 남아 있을텐데...”(사6:13, 사42:8, 왕상19:18) 영국에 살던 우리 가족은 1989년 7월에 마산재건교회로 부름 받았다. 그러나 재건교회에서의 목회는 녹록치 않았다. 교단 안팎으로 헤쳐 나가야할 장애물들이 많았다. 타 교단과는 지역 목회자들과의 꾸준한 사귐, 연합사역, 방송설교, NGO사역 등으로 재건교회 이미지를 바르게 인식시켜 나갈 수 있었다. 그러나 정작 교단 안에서는 재건교회 출신이 아니라는 뿌리 때문에 오랜 세월 논란이 많았다. 그로 인한 곤고함, 외로움, 크고 작은 상처들이 많았다. 그런 나와 우리 가족에게 마산재건교회는 큰 위로와 버팀목이 되어 주었다. 총회와 관련된 직책은 2001년 총회 서기로 선출된 것이 처음이었다. 그러나 “본류가 아닌 자가... 드디어 총회에 구린내가 나는구나”, 그런 비난의 소리에 나는 불과 4개월 만에 그 직책에서 스스로 물러났다. 그런 나에게 2007년에 믿지 못할 사건이 발생했다. 제89회 총회에서 뜻밖에 총회장으로 뽑힌 것이다. 지난 19년 가까이 재건교회 목사로 일하면서도 늘 국외자(outsider)와 같았던 나! 사양하고 싶은 마음이 많았으나 그때 받은 위로와 기쁨은 매우 컸다. ‘아, 드디어 나를 재건교회 목사로 인정해 주시는구나.’ 2010년에 또 한 차례 그런 위로와 기쁨을 맛보았다. 종래의 총회신학교를 총회신학원으로 승격시키면서 이사회와 총회는 재건교회 정통성, 믿음, 인격, 실력면에서 그저 그런 나에게 총회신학원 초대원장이란 직책을 맡겨 주었을 때이다. 이때에는 사양하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었고 목회자 양성은 교단 발전에 절대적인데 최선을 다해 보자는 마음이 나를 지배했다. 그리고 그때 그 말이 머리에 떠올랐다. 언젠가 교단의 지역 연합부흥사경회의 강사로 초빙 받았는데 사회를 맡은 김00 목사의 강사 소개는 이러했다. “오늘 말씀을 선포하실 양영전 목사님은 재건교회 목사 가운데서 진짜 재건교회 목사이십니다.” 4년 재임 기간 중에 잊지 못할 감사의 제목들이 많다. 하나님의 도우심과 은혜에 감사와 찬송을 올려 드리며 관계된 하나님의 사람들과 교회에 감사를 드린다. 첫째, 총회신학원 부지마련과 건물신축이다. 둘째, 학교를 위해 수고한 이사회와 교수진 셋째, 전국재건교회와 마산재건교회를 생각하면 감사할 뿐이다. 부족이 많은 목사였으나 나름대로 하나님의 나라와 재건교회, 총회신학원을 위해 나를 사용해 주신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께 감사 드린다. 여러 직책을 맡고, 또 임기가 끝나 그 직책을 내려놓을 때마다 느끼는 것은 혼자서는 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이다. 어느 기관의 대표였지만, 늘 함께 수고하는 동역자들과 보이지 않는 곳에서 기도하는 숨은 일꾼들, 무엇보다 우리보다 앞서 행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모든 일이 이뤄진다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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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 목회자칼럼
    2015-09-24
  • [기독교 교양 읽기 ⑦] “순례는 영원한 삶을 위한 큰 투자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길 위에서 완성된다” 《여행》이란 제목만 보고 이 책을 선택하면 후회할 수도 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여행이나 관광에 관한 책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책은 신학적이고 정치적인 관점에서 여행을 이야기한다.저자는 여행은 아브라함이 고향을 떠난 것을 비롯해 사도 바울의 전도 여행에 이르기까지 기독교 전통과 깊은 관련을 가지고 있음을 전제한다. 그래서 서두에 ‘기독교 신앙은 길 위에서 완성된다’며, 기독교는 ‘길 위의 신학’임을 강조한다.저자가 이야기하는 여행의 범주는 관광에서부터 피난에 이르기까지 그 폭이 상당히 넓다. 여행, 관광, 이주, 순례, 방랑, 선교여행, 단기 집중여행 등 다양한 형식의 여행에 대해 언급한다. 그러나 여행의 목적은 분명하다. 단순히 관광하며 즐기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 숨어 있는 권력관계까지 들여다 볼 것을 요구한다.특히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제국주의의 연성(軟性) 권력에도 휘둘리지 말아야 하고, 궁극적으로 신학적, 정치적 저항 행위가 되어야 제대로 된 여행이 된다고 주장한다. 그렇기에 ‘순수한 신학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신학자는 결코 중립적일 수 없다’는 입장을 견지한다.그러나 일반인들이 이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이기에는 힘겹다. 그렇기에 여행을 떠나되, 지금부터라도 좀 더 보람 있는 여행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자는 의미로 받아들이고 싶다.◈ 저자인 요르그 리거(Joerg Rieger)는 미국 달라스에 있는 남감리교 대학교 퍼킨스 신학대학의 구성신학 교수이다. 독일 태생으로 신학을 전공하기 위해 미국으로 이민했다. 원제 Traveling. 포이에마, 2015. 9,800원. [좌담: 김길구 전 부산YMCA 사무총장, 김수성 경성대 외래교수, 김현호 기쁨의집 기독교서점 대표] 여행! 언제 들어도 가슴 설레는 낱말이다. 최근 뉴스에 따르면, 메르스 사태 이후 해외여행이 봇물 터지듯 급상승했다고 한다. 이제 우리의 삶에서 여행이 하나의 트렌드로 자리 잡은 것 같다. 일상에서 벗어나 낯선 곳에서 이색적인 것을 접할 때 느끼는 신선함이 우리를 떠나게 하는 건 아닐까. 그런데 이번에 읽었던 책, 《여행, 관광인가 순례인가》는 그것만으로는 모자란다고 역설한다. #여행은 구약-기독교 전통과 연결돼김길구 : 이 책을 열자마자 이런 말이 나옵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위대한 여행의 모험에 관해 얘기하면서 이 세상은 거대한 책이라 했고 여행자만큼 이 책을 많이 공부한 사람은 없다고 말했다. 꼼짝 않고 자기 집에만 박혀 있는 사람은 이 책을 한 페이지만 읽은 것이다.” 상당히 인상적인 말입니다.김현호 : 저자는 기독교 신앙에 있어 여행이란 구약-기독교 전통과 깊이 잇대어 있으며 신앙을 실천하는 현장은 바로 길 위에서 일어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순례로서의 여행은 ‘길 위의 신학’이라고 정의합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말을 신학과 관련지어 표현한 것 같습니다.김길구 : 아브라함이 우르를 떠난 것에서부터 광야 생활, 바벨론 포로 생활, 예수의 사역과 바울의 전도 여행 등 모두가 정적인 신앙이 아니라 끊임없는 길 위의 신앙입니다. 그렇기에 여행은 ‘나를 따르라’는 초대의 말씀을 다시 들을 수 있게 된다고 강조합니다.김수성 : 그런데 이 책에서는 ‘여행’을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여행이나 관광보다는 훨씬 넓은 의미로 사용했습니다. 단순한 관광보다는 순례, 방랑, 이주, 피난 등 자의적 여행은 물론 어쩔 수 없이 정주지를 떠나 이국땅에 머무는 것까지도 포함합니다.김길구 : 저자는 ‘길 위의 신학’과 ‘사유화(思惟化) 신학’을 대립시켜 여행을 이야기합니다. 궁극적으로 여행은 ‘좁은 길로 들어가는’ 여정이라는 것입니다. 이에 비해 정주하는 신학은 자칫 안정을 유지하는 ‘넓은 길’이 될 수도 있음을 언급합니다.김현호 : 교회가 일정 지역에 자리를 잡더라도 안주할 것이 아니라, 안디옥교회와 같이 끊임없이 인근 지역에 복음의 씨를 뿌리고 지원하는 동적인 모습을 보여야 할 것입니다. 최근 교계에서는 선교사를 지원하는 젊은이들이 대폭 줄어 걱정입니다. 헌신보다는 안주를 원하는 경향이 두드러지고 있는 거라 할 수 있습니다.김길구 : 여행은 장차 들어갈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임을 새삼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현실의 안락함을 버리고 길에서 만남 사람들과 함께하는 신앙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죠. ▲ 여행은 구약-기독교 전통과 깊이 잇대어 있다. 신앙을 실천하는 현장은 바로 길 위에서 일어나는 것이기에 순례로서의 여행은 ‘길 위의 신학’이라 할 수 있다. 〈그림은 Rene Magritte의 ‘The pilgrim’(1966)〉 # 길에서 자기를 찾고 하나님 만나야김수성 : 사실 저자가 강조하는 여행은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즐기는 여행과 많은 차이가 납니다. 아직까지 우리나라는 패키지관광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데, 저자가 이야기하는 것은 자유여행 스타일입니다.김길구 : 우리나라도 조금씩 변하고 있죠. 여태까지 구경꾼에 그쳤다면, 최근에는 직접 체험하는 순례나 트레킹으로 변하고 있고, 특히 젊은 층에서는 벌써부터 자유여행이나 배낭여행 붐이 불고 있습니다.김현호 : 문화관광부 통계에 따르면, 이스라엘 인근으로 성지 순례를 다녀오는 사람이 연간 2만 명에 달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성지 순례를 어떻게 봐야 할 것인가 의문을 표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단순히 관광에 치우친 면이 많다는 것이죠.김수성 : 조지 리처의 책 《맥도날드 그리고 맥도날드화》에 보면, ‘맥도날드화된 관광’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여행사는 관광지의 사람, 문화, 제도와의 접촉을 최소화하도록 하고, 자유시간은 거의 없도록 빡빡하게 일정을 짠다는 것이죠.김길구 : 그렇더라도 주위에서 성지 순례를 다녀와 달라졌다는 분이 많은 것을 보면, 너무 부정적으로만 볼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물론 달라져야 할 부분도 많지만, 현재의 흐름을 보면 머지않아 바람직한 방향으로 나아갈 것입니다. 순례는 ‘영원한 삶을 위한 큰 투자’라는 말이 실감나는 날이 올 것입니다.김현호 : ‘관광객은 요구하고 순례자는 감사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돈만 지불하면 되는 관광은 편리함과 돈에 따른 대가보다 더 많은 것을 누리려고 합니다. 이에 비해 순례 정신으로 길을 떠나는 사람은 조그마한 것에서도 감사하게 됩니다.김수성 : 산티아고 순례를 다녀오신 분들의 말을 들으면, 엄청난 고생을 하였지만 기회만 된다면 또 가고 싶다고 합니다. 길 위에서 자기를 찾고 하나님을 만나기 때문이 아닐까요.김현호 : 저는 가끔 제주도 올레길을 걷습니다. 이 길을 만든 서명숙 씨는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만난 독일인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올레길을 만들 결심을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성지가 따로 없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주변에 있는 갈맷길, 초량 산복도로 길이라도 순례의 정신이라면 하나님을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김길구 : 최근 부산에서도 기독교 순례 길을 개척하는 노력이 꾸준히 전개되고 있습니다. 부산장신대에서 ‘부산의 기독교 유적지’ 가이드북을 만들어 순례길을 안내하는가 하면, 부산기독교총연합회에서는 몇 년째 부산의 선교 역사를 돌아보는 심포지엄을 개최하고, 광복로 입구에 초기 선교사 첫 기착지 표지석을 세우기도 했습니다. #부산의 신앙 성지 순례길 만들어야김현호 : 저는 몇 해 전부터 타 지역 기독인들과 부산의 청소년들에게 부산의 기독교역사를 간직한 초량교회, 장기려기념관, 부산진교회, 일신여학교기념관과 일신병원, 수정동성결교회, 삼일교회 등을 연결하는 지역 순례길을 몇 차례 안내해 왔습니다. 누군가가 나서 이런 순례를 정례화하고 좀 더 전문화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항상 가지고 있습니다.김길구 : 김현호 대표의 노력에 큰 박수를 보냅니다. 그리고 그동안 우리 교회가 이런 노력을 제대로 기울이지 않았던 것을 반성해야 할 것입니다. 지금이라도 초기 부산에서 활동했던 선교사들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선교여행이나 순례를 체계적이고 조직적으로 전개할 필요가 있을 겁니다. 그것이 우리 길을 성지로 삼는 작업이라고 생각합니다.김현호 : 필요하다면 도시 교회가 기독교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지역의 농촌이나 어촌 교회와 연계하여 순례하는 방법도 모색할 수 있을 것입니다. 책 한 권 들고 떠나는 신앙의 유적 탐사도 좋은 순례길이 될 것입니다.김수성 : 저는 교회의 여름학교가 이런 프로그램으로 방향을 바꾸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실내에서 벗어나 길 위에서 하나님을 찾는 순례 프로그램 같은 것으로 말입니다. 개 교회에 부담이 된다면 지역 교회가 공동으로 이런 프로그램을 진행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김길구 : 어떤 분은 일본의 저력을 소위 ‘오타쿠’ 문화에서 찾기도 합니다. 개개의 민간인들이 하나의 주제나 관심사에 대해 평생 파고들어 전문가보다 더 깊이 있는 공부를 하는 문화이죠. 북유럽의 힘도 이와 비슷한 민간인들의 평생공부에서 비롯된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이런 열풍이 불었으면 하는 바람 간절합니다.다음 달에는 피터 스카지로가 쓴 《정서적으로 건강한 영성》을 읽고 함께 이야기를 나누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정리: 김수성] ◇ 같이 읽으면 좋은 책《흔들리며 걷는 길》 / 김기석 / 포이에마《信行여행, 한국기독교유적지 137》 / 이성필 / 세줄《부엔 카미노! 산티아고를 걷다》 / 구철헌 / 예영커뮤니케이션
    • 문화
    • 기독교인문학
    2015-09-24
  • [교회법률상식] 헌법 개정안 공청회 자료에 대한 소고(1)
    -헌법개정위원회의 개정안은 헌법으로서의 품위가 없어-헌법 개정안 공청회 자료 내용은 장로교 헌법일 수 없어 누군가인지 헌법 개정안 공청회 자료를 보내왔기에 위원회의 개정안을 읽고 소감을 피력하고자 한다. 합동 총회가 헌법개정위원회를 조직하여 계속 3년이나 위탁하였으나 개정 초안이 미흡하여 총회가 2회 연속 채택하지 못하였는데 제100회 총회에 제출할 개정 초안 역시도 헌법으로서의 권위와 품위가 없어 보이고 탈 장로교 헌법 초안이 되어 유감스럽기 그지없다. ◎ 교리 편에 대하여 국문법상 문제가 되는 것은 1. 신도게요 제24장 (결혼과 이혼에 관하여) 1에 “… 어떤 남자라도 동시에 한 명 이상의 아내를 두는 것이나 어느 여자라도 동시에 한 명 이상의 남편을 두는 것은 합법적이 아니다”에서 “한 명 이상의”를 “한 명을 초과하여” 혹은 “두 명 이상의”로 교정해야 하고(그대로 두면 독신으로 살아야 한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2. 성경 대요리문답 제139문의 답에 “한 아내나 한 남편 이상을 두는 것”에서도 역시 독신으로 살아야 한다는 의미이므로 용어를 교정해야 한다. 고신 총회는 필자가 공개적으로 신문에 지적한 후 “두 사람 이상의 아내나 남편을 동시에 두는 것”이라고 개정하였다. 교리 편은 이상의 두 곳만 교정하면 무난해 보인다. ◎ 그 외의 교회 정치 개정안을 살펴보면 차라리 현행 헌법을 그대로 두는 것이 오히려 더 나아 보인다. 헌법 개정안은 단 한곳만 흠결이 있어도 그 개정안은 채택할 수 없는 중요한 일이다. 그런데 일일이 지적하려면 지면이 부족할 정도이지만 몇 군데 정도 소감을 피력하므로 재고를 촉구한다. 1. 제3장 제1조와 제3조와 제4장 제4조에 “그 시무연한은 만 70세 마지막 날까지로 한다.”는 개정안은 제93회 총회가 “만 1세”는 “365일간”, 즉 “1년 동안”이라고 도표까지 그리면서 설명한 “엉터리 해석”을 그대로 옮겨 놓았으니 가히 초등학생들이 보아도 깔깔대며 웃을 일이다. 만 1세는 두 번째 생일인 첫 돌 전날 하루뿐인 것을 헌법개정위원들 중에 한 사람도 아는 이가 없었단 말인가? 따라서 만 70세는 71번째 생일 전날 하루뿐인 것이 법리이다. 이에 대하여 세인들은 “하버드대학교 박사 출신 최현서 씨가 26세 4개월의 최연소 나이로서 카이스트교수로 임용 되었다.”라고 하여 만 26세는 27번째 생일 전날 하루뿐임을 입증하였다(교회법률 상식 pp.220-226 참조). 2. 제3장 제3조에 “교인의 안수 없는 종신직”은 절대로 있을 수 없는 법리이다. 헌법 개정위원들은 교회 직원론에 있어서 항존(恒存)직과 종신(終身)직, 그리고 임시직을 구별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 보여 유감이다. 3. 제4장(목사) 제4조(목사의 칭호)에 11. 무임목사를 “정년 은퇴한 목사이다”라고 해 놓고, 13. 은퇴목사를 “연로하여 시무를 사면한 목사이다”라고 하였으니 무임목사와 은퇴목사를 어떻게 이해해야할지 어리둥절하다. 필자는 백번 읽고 또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는 문장이다. 4. 제9장(당회) 제1조(당회 조직)와 제2조(당회 성수)와 제3조(당회장 및 대리 당회장)의 각 항은 모순투성이여서 손을 댈 수조차도 없다. ① 어찌 “노회가 파송한 임시목사와 치리장로”로 당회를 조직할 수 있단 말인가?(노회가 파송한 “임시목사”의 칭호는 개정 초안 어디에도 없다. 위원들은 그 조문을 밝혀 보라!) ② 제1조 1항에는 전임목사가 노회 허락 없이도 당연직 당회장인 것처럼 규정해 놓고, 제3조 1항에서는 “노회결의로 전임목사도 시무 중에 당회장이 된다”고 했으니 어느 장단에 춤을 추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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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9-24
  • [성공칼럼] 자기 내면 살피기
    살다보면 사람들과 갈등하는 일이 생길 수 있다. 그러면 이 갈등으로 그동안 이뤄놓은 삶은 망가지게 된다. 부모와 자녀관계, 부부라고 하더라도 상대방이 지저분하고 거짓말하고 때때로 폭력적이고 자기중심적이라면 그 사람과 얼마동안 함께하고 싶겠는가? 가족이라서 얼마간 참기는 하지만 마음은 이미 함께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 그러기에 기업이나 가정, 교회, 몸, 건물, 조직은 갈등하지 않고 결속력을 오랫동안 유지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이게 된다. 갈등이란 관계 속에 결합하지 못하게 하는 요인을 갖고 있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모든 관계에서 어느 누구든 걱정하고 분노하고 무시하고 이해하지 않고 속이고 소리치면 함께 있을 수 없다. 그리고 밝고 따뜻하고 지혜롭고 솔직하고 사랑하고 좋은 것을 주려고하고 상대방을 존중하는 태도가 있으면 그 사람과는 오랫동안 함께하고 싶을 것이다. 그러므로 갈등을 해결하려면 내 속에 오랫동안 함께 있고 싶은 요인을 갖추면 되는 것이다.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이미 자신 안에 갈등요소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보통 대화를 하다가 쉽게 약속을 한다. 그러다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하면 수시로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서 이유와 핑계를 대는 습관을 갖고 있다면 혹은 다른 사람이 볼 때는 밝은 척, 정직한 척, 사이좋은 척하지만 사람들이 없을 때는 정반대로 행동하는 겉과 속이 다른 모습을 습관처럼 갖고 있다면 이 습관은 다른 사람보다 자신이 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또 겉으로는 모든 사람을 위한다고 하면서 마지막에는 자신의 이익을 챙기는 습성을 몸에 갖고 있다면 또 그 외에 말은 옳지만 그 말 속에 서운함과 분노와 부정적 감정을 숨겨져 있다면 내가 갈등의 요소를 이미 갖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모든 갈등은 자기애와 세상의 소유를 추구하는 마음 때문에 생기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자기애 때문에 거짓말을 옳다고 생각하게 되고, 자기를 높이고 돈과 지배욕을 소유하기 위해서 갈등이 유발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이웃끼리 모여서 대화하는 중에 그 집 자녀는 공부도 잘하고 취직도 잘하는데 우리 집 아이는 그렇지 않아서 자존심이 상한다 하자. 그러면 자신의 아이에게 화가 나고 이웃에게는 불쾌한 마음이 들 수 있다. 이럴 때 내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부정적인 생각이나 부정적 감정은 이웃이나 자녀 때문에 생기는 것이 아니라 이미 내 속에 있었던 것이다. 즉 사랑보다는 자기사랑, 사람보다는 자기 욕망이 우선이었기 때문이다. 이 자기 사랑을 옹호하는 거짓말을 옳다고 여기는 태도가 상황이 되어서 나타나는 것 뿐이다. 그러므로 갈등은 자기사랑 보다 상대방을 목적으로 여기는 사랑과 선한 행동을 하고 진리 안에 있을 때 해결된다. 옳음 주장은 옳음이 아니다. “내가 옳다!”고 주장하면서 서로 갈등하거나 싸우면 이 옳음 때문에 사랑하는 마음과 상대방과의 좋은 관계를 잃어버리게 되니 옳지 않는 것이 된다. 옳음이란 머릿속으로 ‘옳다. 그르다’의 옳음이 아니라 사랑과 선한 모습을 갖고 오는 것이 진짜 옳은 것이다. 성경에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말이 있다. 이것은 지식적으로 의로움을 아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통해 서로 간에 신뢰가 생기고, 사랑이 생겨서 영원한 결합이 일어날 때 의롭게 된다고 하는 것이다. 실제로 옳음은 자신의 옳음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틀렸으며 상대방이 옳다고 하거나 내 입장보다 상대방의 입장을 더 이해하는 것이 사랑이며 진리 안에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기에 사람들이 의롭다고 하면서 또는 진리를 안다고 하면서 사랑과 선한 모습을 보여주지 않으면 그는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갈등을 해결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 내 안에 있는 갈등 요소 즉 나는 말과 행동이 같은 겉과 속이 같은 사람인지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내면이 솔직하고 밝은 사람인지 또 나는 수단이고 상대방을 목적으로 생각하는 사랑이 있는 사람인지를 알아야 할 것이다. 또 나는 돈이나 내 이익보다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인지 자신의 내면을 잘 살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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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9-24
  • [은혜의 말씀] 감정풀기 (창32장 6~12절)
    야곱에 대한 말씀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성경에 많은 인물들 중 가장 인간적인 사람이 야곱입니다. 야곱은 엄마 뱃속에서부터 쌍둥이 형님과 싸움을 하고 태어날 때도 형님 발을 붙잡고 태어났습니다. 평생을 속고 속이는 너무도 인간적인 욕심꾸러기, 남에게 지기 싫어하고 야망에 불타는 일생을 살았던 사람이 야곱입니다. 평생 인간적인 방법을 쓰고, 속이고 도망가고 피난 가던 야곱이 하나님 얼굴 뵈올 때 까지 그 씨름의 과정을 거쳐 얍복강에서 브니엘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뵈옵고 나니까 영원한 야곱 인생의 숙제와 같은 형님의 문제가 해결 되고 형님을 만납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이 살아가면서 인간적인·조작적인·인위적인·인보적인 그런 삶을 살아가면서 끊임없이 자기왕국을 구축하고, 끊임없이 속고 속이며 인간바벨탑을 쌓아보지만 다 부질없다는 것입니다. 사상누각에 불과합니다. 야곱이 엄청난 거부가 되어서 고향땅으로 돌아오지만 가슴속에 해결하지 못한 수십 년 된 숙제가 있습니다. 형님 에서가 군사 사백 명을 앞세우고서 작살내려고 기다리는데 이 문제를 어떻게 풀어갈까요? 창세기 32장 20절에 보면 「내 앞에 보내는 선물로 형의 감정을 푼 후에 대면하면 혹시나 형이 나를 받아 주리라」 야곱은 살아가면서 어떤 문제가 오면 인간적으로 풀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제목이 야곱의 감정풀기 입니다. 결론적으로 야곱의 감정풀기는 의미가 없습니다. 문제가 있을 때 인간적인 것은 더 헝클어지고 복잡하게 할 따름입니다. 야곱은 끝까지 인간적인 수단으로 선물공세를 해서 형님과의 관계를 해결하려 하고, 꼬인 실타래와 같은 감정을 풀어가려 했습니다만 하나님 앞에서는 다 부질없습니다. 인간 바벨탑을 쌓고 빛 좋은 개살구 같은 그런 모습은 큰 부자가 되어도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시편 37편에 보면 「행악자로 인해서 불평하지마라.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이 잘 되는 것을 부러워 하지마라. 속히 베임을 당하리라. 한 순간에 심판이 오는데 너희는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의지하고 신뢰하고 위탁하고 주님께 맡기면 하나님께서 너희 모든 경영하는 것을 이루어 주시리라」 평생의 욕심, 평생의 스타일, 평생 인간적인 모습을 내려놓고 그가 얍복강에서 큰 변화를 받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자세히 보면 하나님은 내 교만은 꺾으시고, 내 욕심은 내려놓게 만들고 내 인간적인 야망은 반드시 손을 보십니다. 그런데 눈물의 기도는 반드시 응답을 해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야망을 품고, 계산해서 하나님을 이길 수가 없습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은 욕심스럽고 교만한 사람을 거침없이 꺾으시고, 기도하는 사람과 눈물로 엎드리는 사람에겐 늘 하나님이 져주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이 복잡한 시대에 성도들의 삶이 천차만별입니다. 건강의 문제, 자녀의 문제, 사업·직장의 어려움 때문에 하나님 앞에 몸부림치고 그러면서도 수박겉핥기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건성건성· 얼렁뚱땅 구렁이 담 넘어 가듯이, 수박 겉을 핥지 말고 수박을 팍삭 깨뜨려서 통째로 드십시오. 언제까지 그렇게 야곱스럽게 살아갈 것입니까? 주님 앞에 항복하면 행복하고, 주님 앞에 회개하면 회복이 됩니다. 그 야곱이 험악한 세월 속에서 성형이 되고, 조율이 되고, 튜닝 되면서 마침내 ‘이스라엘’이 되어 집안을 회복하고 마지막에 아버지를 잘 모시지 않습니까! 인간적인 야곱을 통해서 하나님은 욕심과 야망을 넘어 하나님의 나라를 만들어 가십니다. 그런 거짓이 없는·속고 속이는 전쟁이 없는 하나님나라 천국을 만들어 가시고, 우리 하나님의 구원 역사 속에 사랑하는 성도여러분이 중심에 우뚝 서서 하나님 보시기에 의인, 하나님 앞에서 이긴 자의 삶을 살아드리기를 우리 주의 이름으로 당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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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9-24
  • [가정칼럼] 내 인생의 밑줄이셨던 선생님
    The Survey Q 3R 선생님은 그렇게 다가오셨다. 무슨 암호냐고? 고등학교에 입학한 까까머리 소년은 이 기호부터 배웠었다. S는 Survey(관측)다. Q는 Question(질문)이다. 그리고 3R이란 Reading(읽기)과 Recite(Recall, Recording-암기, 기록) 그리고 Review(되풀이, 반복, 복습, 재음미)를 말한다. 독서법이었다. 난 지금까지 이 독서법을 놓쳐본 일이 없다. 그 독서법이 재미있어 읽고 또 읽었다. 다치바나 다카시는 “책이란 만인의 대학”이라고 했다. 나는 한 해도 아닌 두 해를 월반(?) 했고 대학 캠퍼스를 누비고 다녔다. 활자는 이해력, 상상력, 집중력, 어휘력, 기억력 등 종합적인 사고 능력을 깨우쳐 준 스승이었다. 잘 고른 한 권의 책은 스스로를 격려하고 채찍질하는 좋은 길잡이였다. 한 번 붙잡은 책은 여지없이 밑줄이 그어졌다. 밑줄이 그어질수록 나의 세계는 확장되어 갔다. 선생님은 입시공부보다 더 중요하게 책 읽기를 강조했다. 선생님의 그 원려(遠慮)를 깨우치는 데는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추사 김정희(金正喜)는 글씨를 잘 쓰려면 “오천 권의 문자가 가슴에 있어야 한다.”는 말로 책읽기를 장려했다. 다산 정약용(丁若鏞)은 유배지 강진에서 두 아들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너희들이 독서하는 것은 내 목숨을 살려주는 것”이라면서 폐족으로서 책읽기를 통해 집안을 일으키라고 당부했다. 책을 붙잡고 누비지 않은 세상이 없었다. 밟지 않은 땅이 없었다. ‘밑줄 인생’은 그렇게 시작 되었다. 밑줄이란 중요한 것에 대한 표시다. 잊어서는 안 되는 것에 다짐이다. 다시 돌아보고자 하는 자신과의 약속이다. 때로는 자신을 향한 마음의 박수가 되기도 한다. 밑줄을 많이 그으면 그을수록 인생은 빛난다. 밑줄은 끝내 자신의 인생의 훈장이 된다. 밑줄만이 아니었다. 선생님은 내 인생의 부호(符號)였다. 선생님은 때로 의문표였고 쉼표였고 느낌표였으며 Apostrophe(')가 되기도 했다. 나는 선생님에게서 질문하는 법을 배웠고 감탄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익혔다. 불가능(Impossible)을 가능(I'm possible)으로 만드는 열쇠가 지혜임도 알았다. 그리고 어느 날 학창시절에는 물 건너 먼 산 쳐다보듯 바라다보던 모교의 스피릿(교훈)이 선생님의 철학이고 삶이었음을 안다. 여느 학교의 교훈과 달리 스스로의 고백 문으로 작성된 ‘나는’으로 시작되어 ‘되련다.’는 고백으로 끝나는 교훈이 지금은 나의 삶의 교훈과 철학이 되어 있다. 1. “나는 하나님과 사람과 자연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련다.” 2. “나는 마음껏 자라며 마음껏 생각하며 마음껏 일하는 사람이 되련다.” 3. “나는 웃는 자와 함께 웃고 우는 자와 함께 우는 사람이 되련다.” 나는 지금껏 내가 밑줄을 긋고 또 밑줄을 그은 문장들 중에 이보다 더한 명문장을 찾아본 일이 없다. 아니 선생님이 바로 내 인생의 밑줄이었다. 덤으로 얻게 된 물음표와 쉼표 그리고 감탄사와 어퍼스트로피 조차도 내 삶을 풍요롭게 만든 선생님의 편린(片鱗)들이었음을 안다. 이제는 안다. 선생님을 대신해서 나도 누군가의 인생에 밑줄이 되고 부호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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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9-24
  • [이단피해] “사람의 힘으로는 이길 수 없습니다”
    대학교에서 친구를 따라 동아리에 간다고 했던 딸. 다른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겠다며 장문의 편지까지 썼다. 연락이 안됐던 어느 주일 저녁, 귀가한 딸의 가방에서 설교가 요약된 종이를 발견했다. A씨는 딸에게 뭐냐고 물었고 딸은 그저 다른 교회의 예배 설교 내용이라고 말했다. 그때부터 딸과의 갈등이 시작됐다. 이상한 느낌을 받은 A씨는 인터넷을 뒤졌고, 이단 상담소를 찾았다. 애교 많고 살가운 성격이었던 딸은 점점 짜증이 많아지고 가족들과 싸우는 일도 잦아졌다. 신천지에 빠진 딸과 이단 상담소를 찾았지만 신천지 측의 방해에 상담을 제대로 진행하지 못했다. 보호자라는 사람들이 딸을 데려가겠다고 경찰을 불렀고, 사람이 감금됐다며 소방차를 부르기도 했다. A씨는 딸이 휴학 중 전공 관련 연수를 가겠다고 하고 부산 어느 고시원에 살고 있었던 것을 뒤늦게 알았다면서 그때 신천지로부터 집중교육을 받은 것 같다고 말했다. 현재 A씨의 딸은 주일 오전에는 A씨와 함께 교회를 나가고 오후에는 신천지 측 교회를 간다고 한다. 예배 중에 울면서 가지 말라고 붙잡았지만 딸은 A씨에게 화장지를 건네고 나가버렸다. A씨는 지금은 딸과 휴전상태라고 했다. 직장을 다니는 딸이 부모에게 용돈을 주기도 하고 언니와 동생과도 잘 지낸다고 한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선이 있어 예전처럼 허물없이 지내지 못한다며 안타까워했다. A씨는 무엇보다 딸이 자기 신앙이 아닌 껍데기만 있는 상황이라면서 그것이 가장 힘들다고 말했다. 그리고 교계도 신천지의 위험을 알지만 체감하지는 못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딸을 위해 이단 상담 과정을 공부했다는 A씨는 사람의 힘으로는 할 수 없다면서 신앙으로 무장되어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 이단
    • 신천지회심자
    2015-09-24
  • [시사칼럼] 독서의 계절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계절은 무엇일까요? 가을입니다. 한 설문조사 결과 연령 불문하고 응답자의 44.2%가 선호하는 계절로 가을을 꼽았다고 합니다(2014.10. 한국갤럽조사연구소). 그래서인지 가을 하면 유독 아련히 떠오르는 이미지들이 많습니다. 국화, 코스모스, 단풍, 낙엽, 황금들판, 보름달, 추석, 가족, 천고마비(天高馬肥), 집 나간 며느리도 돌아오게 만든다는 가을 전어(錢魚), 그리고 독서의 계절, 그렇습니다. 누군가 ‘가을은?’이라고 물으면 자기도 모르게 ‘독서의 계절’이라고 답하는 분들이 많을 겁니다. 하지만 정작 책을 읽을 시간도 여유도 많이 부족한 계절이 가을이라는 사실이 함정입니다. 직장인들은 연말 인사고과에 반영될 실적 올릴 마지막 기회를 잡기 위해 분주하고, 주부들은 추석 명절 준비하느라 정신없고, 수험생은 수능시험 때문에 독서란 말 자체가 언감생심(焉敢生心)입니다. 하지만 독서는 환경이 아니라 습관이 더 중요합니다. 찰스 두히그(Charles Duhigg)는 『습관의 힘』에서 바이러스성 뇌염을 앓고 기억을 잃어버린 ‘E. P.’라는 환자를 통해 이루어진 ‘기억은 사라져도 습관은 남는다’는 발견을 소개합니다. 이를 독서에 적용한다면, 계절이나 환경과 관계없이 어떻게 독서하는 습관을 기르느냐가 중요하다는 결론을 도출할 수 있습니다. 알베르토 망구엘(Alberto Manguel)이 쓴 『독서의 역사』 첫 페이지는 위대한 독서가들 사진이나 그림을 18장 소개하고 있는데 그 가운데에는 시각장애인이었던 루이스 보르헤스(Jorge Luis Borges, 1899~1966)가 누군가 책 읽어주는 소리를 경청하는 사진도 있습니다. 이러한 모습들이 독서를 습관적 행동이 되게끔 만들어주는 선한 동기와 열망과 공감대로 기능합니다. 기독교인들에게도 책읽기는 중요합니다. 『그리스도를 본받아(De imitatione Christi)』를 쓴 토마스 아 켐피스(Thomas A Kempis)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대들이 책을 손에 쥘 때는 시므온이 아기 예수를 품에 안고 입을 맞추려 할 때처럼 행동하라. 그리고 그대들이 책 읽기를 끝낼 때면 책장을 덮고 하나님의 입을 통해 나온 그 모든 단어들에 감사를 표하라. 그 이유는 그대들이 하나님의 영역에 숨겨져 있던 보물을 발견해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일반은총을 생각한다면 충분히 이해가 가는 발언입니다. 칼 바르트(Karl Barth)도 아마도 비슷한 취지로 1966년 한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습니다. “Wir brauchen doch-die Bibel und die Zeitung.” 직역하자면 “우리는 성경과 신문 양자를 다 필요로 한다”가 되겠지만 이보다는 ‘한 손에는 성경을, 한 손에는 신문을’이라는 경구로 더 잘 알려져 있는 명언입니다. 어디 신문뿐이겠습니까? 책도 읽어야 하고, 때로는 바닷물에 손을 담그고 대자연도 읽어내야 하고, 때로는 남들 이야기를 들어주면서 사람들도 읽어야 하는 것이 어쩌면 그리스도인들에게 더욱 특별히 부여된 사명과 책임이라는 생각입니다. 1976년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소웨토 봉기’가 일어났습니다. 아파르트헤이트(인종차별) 백인 정권의 강압적인 교육정책에 반발한 소웨토(Soweto) 지역 흑인 학생들이 일으킨 시위로 600명이 죽고 수천 명이 도피했던 사건입니다. 이어진 암울한 80년대를 거쳐 1994년 마침내 넬슨 만델라가 집권하는 흑백연합정부가 들어섰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현대사를 통해 종교적 죄의식과 역사적 부담감으로 고민하던 작가들이 나타났습니다. 접근하는 방식이나 사회를 바라보는 시각은 달랐지만 이러한 작가군 중에서 나딘 고디머(Nadine Gordimer)가 1991년, J. M. 쿳시(Coetzee)가 2003년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되었습니다. 언제부터인가 가을이 오면 올해에는 한국에도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나올까가 초미의 관심사가 되었습니다. 성인 1인당 평균 독서량 9.2권(월 0.76권), 기독교인 중 1년에 신앙서적 한 권 읽지 않는 사람의 비율이 60%가 넘는 나라입니다. 바야흐로 독서의 계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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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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