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16(화)

전체기사보기

  • “총대하기 힘드네!!”
    고신총회에 참석한 총대들은 앞으로 총회기간 자리를 이탈하기 힘들 것으로 보인다. 금년 총회부터 총회규칙 회의진행세칙 7조에는 ‘총회기간 내 무단결석 및 이탈하는 총대는 다음 총회 시 총대로 참석할 수 없다’는 규정을 적용받는다. 총회 서기 김홍석 목사는 “총회 기간 3번 정도 출결점검을 할 것”이라며 “(출석 점검을) 미리 고지해 드리겠다”며 불이익을 당하지 말 것을 당부했다. 또 첫날 유안건 보고시 ‘협력위원제도 개선과 각 위원회 구성을 위한 규칙의 개정 청원에 대한 연구’를 총회 행정위원회가 보고하면서 ‘(상임위원과 협력위원 명칭구분을 없애고)모두 위원으로 통일하며 각위원회에 불참하는 총대 명단은 해당 노회에 통지하여 다음 총회 시 총대로 참석할 수 없도록 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보고를 하자 총대들 사이에서는 “앞으로 총대로 (총회에)참석하기 힘들겠네”라며 푸념섞인 발언들이 오고갔다.
    • 오피니언
    • 기자수첩
    • 광야의 소리
    2017-09-25
  • 기계 때문에 수난
    인간이 편리하기 위해 기계를 도입했지만, 오히려 기계 때문에 인간들이 힘들어졌다. 고신총회 첫날 임원선거에서 개회선언시 총대숫자가 497명인데, 목사부총회장 후보 세명의 합친표가 534표가 나왔다. 37표가 더 나온셈. 일부에서는 부정선거를 지적하면서 선거를 처음부터 다시해야 한다는 목소리까지 나왔다. 다행히 선관위 조사 결과 우려했던 일은 없었고, 기계오류로 밝혀졌다. 결국 모든 개표상황을 수작업으로 진행했다. 합동총회도 전자 투표제가 도입됐지만, 취지가 무색해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금년 처음 전자 투표제가 도입되었는데, 총대들은 신분을 인증한 후 터치스크린으로 후보를 선택했다. 그런데 투표는 2시간이 넘어선 것. 시간을 줄여보자는 취지에서 전자투표제를 선택했지만, 시간이 평소보다 더 지체된 셈이다. 결국 9시30분 종료 예정이던 첫날 회무는 11시 20분에 마무리됐다.
    • 오피니언
    • 기자수첩
    • 광야의 소리
    2017-09-25
  • [목회자칼럼] 하나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우리나라는 지금 온 국가적으로 정말 불필요한 시간 낭비를 하고 있다. 유치하고 어리석기 그지없는 논쟁(論爭)으로 국력이 낭비되고 있다. 우리 머리 위로 가공스러운 살인 미사일과 심지어 핵무기가 쉴 새 없이 날아다니고 있는데 우리 사회는 “설마 동족인 우리를 향해 쏘겠는가? 저쪽도 사람 사는 세상인데…….” 이렇게 착하게(?) 해석하는 사람들이 우리 사회에 더러 있다. 그들은 “그러므로 사드 방어 무기를 설치 할 필요도 없고 미국의 군사력 도움을 받을 필요는 더욱 없다. 그러므로 주한미군도 철수해야 한다.” 이렇게 주장한다. 심지어 그들은 지난 8.15 서울시청 앞 광장에 모여서 『미국 놈 물러가라!』 이런 폭언까지 외쳐댔다. 어제 저녁(2017.9.17.) 4개 정당 국회의원들이 한명씩 출연해 <북한 핵 위협과 대북 제재>라는 주제로 TV토론이 있었다. 그런데 여당의 이모 국회의원은 정말 어이없게도 이런 발언을 하였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평양에서 김정일 위원장과 만나서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을 할 때 김정일 위원장은 『동북아의 힘의 균형 유지를 위하여 미군이 남한에 주둔하는 것은 괜찮을 것이다.』라고 말하였으므로 북한은 지금도 주한미군 문제를 크게 문제 삼지 않을 것이다.”??? 그 순간 야당의원들은 억장이 무너진다는 표정을 지었으며 그 시간 그 프로를 시청하고 있던 나 역시 너무 어이가 없어서 할 말을 잃었다. 그러다가 이내 억제할 수 없는 분노가 일어났다. 저 이(李) 모 의원은 순진한 것일까? 무지한 것일까? 아니면 상식적으로 문제가 있는 것일까? 우리나라의 정부 영당의 저런 시각과 사고방식에 깊이 젖어 있다니……. 어떻게 북한 통치자의 그 말을 믿는다는 말인가? <핵무기 금지 및 동결, 폐기>를 주제로 남북은 주변 강대국들을 증인 삼아 무려 20년간 끝없이 대화를 하였다. 대화뿐 아니라 저들을 달래느라고 경제적으로 수시로 도와주었다. 그러나 <대화>를 하는 지난 20년 동안 북한은 비밀리에 치밀하게 핵무기 개발을 진전시켜왔다. 그 결과가 지금 동해 바다 위로, 일본 상공으로 그리고 미국 군사기지가 위치하고 있는 괌(Guam) 섬에 도달할 수 있는 미사일을 수시로 발사한다. 그리고 최종 목표는 태평양의 하와이와 미국 본토에까지 도달할 수 있는 장거리 미사일(IRBM), 대륙간 탄도미사일(ICBM) 발사를 성공시키는 것인데 저들의 목표달성은 이제 정말 눈앞에까지 도달하고 있다. 그런데도 우리 정부는 전쟁은 없다. 『전쟁은 안 된다. 한국의 허락 없이 전쟁은 안 된다.』라고 목소리를 높인다. 전쟁이 없고 전쟁을 안 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6.25동란 이후 약 70년 만에 우리나라(남한)는 인류역사에 경이적인 사례(事例)로 기록될 <부흥과 발전>을 이룩하였다. 일제 36년 침략과 6.25 전쟁으로 전 국토가 초토화 되었었다. 온 국민은 지구상 ‘가장 가난한 백성’이라는 별칭을 들어야만 했었다. 지금의 60대 연령 이상의 국민들은 모두 산 증인들이다. 필자 역시 1950년 6.25 출생으로서 산 증인이다. 당시 우리의 국토는 전국이 <벌거숭이>이었다. 정말 어린 우리의 눈에도 보기가 민망하였다. 식목일 나무심기, 거름(퇴비) 주기, 송충이 잡기 등으로 중고등학교 시절에 ‘노력 봉사’를 자주 했었다. 실컷 배불리 먹어보는 것이 1950~1970년대 초까지 우리나라의 실상이었다. 우리보다 앞 선 세대 즉 눈물겹도록 서글펐던 <왜정시대(倭政時代)>를 살아내어야 했던 부모님들과 선배님들의 고통은 더 말 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그러했던 우리나라가 지금 전 세계 220여 국가 중 국력 10위의 자랑스러운 <대한민국 Korea>가 되었다. 세계 제2차 대전 이후 독립된 나라 가운데서 우리나라처럼 인류역사상 경이적인 <부흥과 발전>을 이룩한 나라는 전혀 없다. 그러니 <하나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달리 그 이유를 설명할 수가 도무지 없다. (다음 호에 계속)
    • 오피니언
    • 칼럼
    • 목회자칼럼
    2017-09-25
  • [문화] 최병학 목사의 문화펼치기 31 : 양극화
    1. 갑질과 마름: 중간 착취자의 나라 ▲ 영화 <군함도>의 마름 최근 우리 사회에 문제가 된 ‘갑질’은 전통사회에서 양반이 상놈을 부려먹는 작태가 왜곡된 방식으로 되살아난 것이다. 그리고 상놈끼리 서로 하대하는 ‘졸질’도 있다. 상놈끼리는 상대방이 이룬 성취가 하찮아 보이기 때문에 서로가 서로를 우습게 보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의 갑질은 대부분 졸질의 변형이다. 그리고 이러한 갑질이 가능한 것은 빈부의 격차,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차별, 사회의 양극화 때문이다. 『중간착취자의 나라: 비정규 노동으로 본 민주공화국의 두 미래』 (미지북스, 2017)에서 저자인 이한 변호사는 이렇게 말한다. “비정규직 제도가 개별 기업이 비용을 줄이는 데 도움이 될 수도 있다는 점은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개별 기업이 비용을 줄인다고 해서 그것이 꼭 그 사회의 생산성이 높아진다는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와 정반대로 일자리의 대부분을 비정규직으로 채워 넣을 경우 그 사회의 생산성을 낮게 만든다는 유력한 근거들이 있다.” 이한 변호사는 이 책에서 비정규 노동과 이와 얽혀 있는 아웃소싱(외주), 파견, 위장 도급 전문 인력중개·공급업자, 그리고 그 위에 구축돼 있는 망국적 착취구조, 곧 인력중개·공급업자(업체)를 분석하며 중간착취자의 실체를 선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이를 위해 조선과 일제 강점기에 번성했던 지주-소작제의 핵심 장치였던 ‘마름’을 소개한다. 사실 마름은 소작인과 지주를 연결해주는 서비스를 제공하고 그 대가를 받았다. 가령 중개 수수료를 한 번 받고 끝나는 부동산중개업자와는 달리 마름은 중개가 끝난 뒤에도 지주-소작 관계가 유지되는 동안 계속 그 대가를 받았다. 생산과 관련해 마름이 하는 역할은 아무것도 없었다. 마름에게는 자신의 기간설비도, 장비도, 경영계획도, 노하우도, 전문기술도 없었다. 그럼에도 소작인이 지주에게 바치는 소작료에는 지주가 마름을 육성·지원할 때 들이는 비용까지 포함돼 있었다. 따라서 소작인은 지주와 마름에게 이중으로 착취당한 것이다. 이러한 가혹한 이중착취 결과로 소작인은 농업기술 혁신·숙련 등을 통해 생산성을 끌어올릴 생각 자체를 포기했다. 더 생산해봤자 지주와 마름이 다 뜯어갔기 때문이다. 겨우 먹고살 정도만 남겨두고 다 가져가기 때문에 혁신을 위한 축적의 여지도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는 생산성 발전이 없거나 아주 느리게 진행된다. 따라서 마름은 개별 지주에겐 큰 이익을 안겨주었지만, 나라 전체의 ‘국민경제’ 관점에서는 발전을 가로막은 기생적 중간착취자였을 뿐이다. 그럼에도 지주가 마름을 육성한 것은 소작인들과의 직접 대면을 피하고 그들의 교섭력을 파괴하기 위해서였다. 소작인들이 요구사항을 들고 지주를 찾아가면 지주는 이렇게 말한다. “당신들과 계약관계를 맺은 것은 내가 아니라, 마름이니 그리로 가라.” 소작인들은 마름을 찾아간다. 그러면 마름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실질적인 결정권이 없고, 당신들 요구를 들어주면 나는 마름 노릇을 할 수 없고 그렇게 되면 당신들도 소작을 부칠 수 없게 된다.” 마름은 철저히 지주의 이익을 위해 존재한다. 문제는 그런 식의 지주 이익 확보가 나라 전체의 이익과는 배치되고 사회 발전을 가로막으며, 구성원 대다수의 이익과 정의와 행복을 망가뜨린다는 데 있다는 것이다. 이한 변호사는 이렇게 말한다. “기업이 교육 훈련에 투자를 많이 하면 할수록 경제적 성과와 노동생산성이 늘어난다. 그리고 교육 훈련은 고용 관계의 안정성이 높아야 효과적으로 이루어지며, 이것은 다시 노동생산성 상승으로 이어진다. 반면에 비정규직 비율이 높으면 이직률이 높아지고, 교육 훈련율이 낮아지며, 노동생산성 향상에 부정적인 효과를 미친다. 다시 말해, 비정규직이 많아질수록 기업들의 생산성과 그 사회 전체의 생산성은 낮아진다.” 보이는가? 조선시대의 마름이 오늘날의 비정규 노동자들을 공급·관리하는 인력공급업체라는 것이? 지주는 자본가(기업), 소작인은 노동자이다. 대한민국은 이러한 ‘중간착취자의 나라’였던 것이다. 갑질은 바로 여기서 시작된다. 사실 헌법이나 근로기준법,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 직업안정법 등은 이런 중간착취를 금하고 있다. 하지만 이 원칙은 제대로 지켜지지 않고 있다. 기가 막힌 것은 중간 인력공급업체는 마름처럼 생산을 위한 아무런 자체 기간설비도, 장비도, 경영계획도, 노하우도, 전문기술도 없다. 단지 사용자 즉 원청업체의 노동자 직접 고용과 관련 법적 규제를 회피하게 해주는 사실상의 인력관리 대행업자 역할을 하면서 번성하는 ‘중간착취자’, ‘기생충’일 뿐이다. 설비도 노하우도 돈도 사실상 다 대는 원청업체가 이처럼 인력공급업체를 앞세워 간접고용 형태를 취하는 이유는 바로 노조와의 직접 대면을 피할 수 있고, 인력조정과 낮은 임금 유지에 유용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비정규직 문제도 자본(기업)과 비정규직 간 모순에서 나오는 ‘비정규직 고유의 문제’이지, 사용자와 언론이 유포한 정규직-비정규직 간 갈등이나 ‘정규직 과보호’에 따른 노동자 간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물론 비정규직 제도는 고용과 정리해고를 통해 산업구조 변화에 신속하게 대응할 수 있게 하고, 수요 변화나 생산여건 변화에 탄력적으로 대응할 수 있게 해줘 산업 활동과 취업 기회를 높이는 등의 긍정적 기능을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기간제 비정규직의 직접고용’을 통해 달성할 수 있으므로, 도급이나 파견 등 간접고용을 해야 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따라서 이한 변호사는 이렇게 말한다. “결국 경제 효율성과 정의의 원칙을 만족시키려면 이렇게 편법을 동원하는 노동압착과 착취를 타파하고, 사회 전체의 생산성을 높여 그 결과물을 모두에게 이익이 되는 쪽으로 분배해야 한다. 모두에게 이익이 되는 공정한 협동의 조건을 구현하기 위해서는, 증가된 생산물을 비정규 노동자처럼 불리한 여건에서 가장 많은 부담을 지는 이들에게 더 많이 배분(전체 평균의 1.3배)해야 한다.” ‘특권층이 나머지 구성원을 지배하고 억압하는 고비용 저효율의 병영국가’가 될 것인가?, ‘공정하고 협동하는 공화국’이 될 것인가? 대한민국은 지금 기로에 서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지금까지 한국 사회의 기득권층은 병영국가 쪽으로 나라를 이끌어 왔다. 그만큼 새하늘 새땅은 멀다는 이야기이다. 2. 양극화와 펭귄 프로젝트 ▲ <양극화 만평> 현재 영미권에서 가장 주목받는 사회심리학자인 조너선 하이트(Jonathan Haidt)는 도덕심리학의 세 가지 원칙을 이야기한다. “첫 번째 원칙은, 직관이 먼저고 전략적 추론이 그 다음이다.” 우리는 보통 믿고 싶은 것이 있을 때, “이걸 믿어도 될까?”라고 물으며 믿어도 되는 이유는 찾지 않고, 믿고 싶지 않은 것이 있을 때는 “이걸 믿어야 해?”라고 물으며 믿지 않을 이유를 찾으려 한다. 어떻게 보면 우리는 두 개의 별개의 믿음 매트릭스에서 살아가고 있고, 그렇기 때문에 논쟁이 늘어나는 것이다. 간단히 말하자면 직관과 추론의 분리를 뜻한다. 도덕심리학의 “두 번째 원칙은, 바른 마음에는 다양한 힘이 있다.”는 것이다. 배려(Care), 공평함(Fairness), 자유(Liberty), 충성(Royal), 권위(Authority), 신성함(Sanctity) 등 도덕의 기반이 되는 가치들은 여러 가지이다. 그리고 진보와 보수는 이 중에서 각각 선호하는 가치가 다르며 같은 가치라도 다르게 해석한다. 가령, ‘공평함’이라는 가치에 있어서 진보는 1%의 사람이 전체 부의 43%를 가지는 것이 문제라도 본다. 그러나 보수는 기여한 바에 따라 가져가는 것이 공평하며 기여하지 않은 사람에게 혜택을 주는 것이 부정한 것이라고 본다. 재미있는 것은 위 6가지 가치 가운데, 좌파는 ‘배려’를 가장 중요하게 여기고, 다른 가치들(가령, 충성이나 권위, 신성함)에 대해서는 큰 의미를 두지 않는다. 반면 보수는 6가지 가치를 모두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도덕심리학의 제3원칙이 등장한다. 하이트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바른 마음은 개인보다 집단의 차원에서 더 강력하다.” 지구상에서 혈연관계 없이도 집단적 협력을 보여주는 유일한 동물이 인간이다. 역사를 돌이켜 보면, 인류는 항상 무언가를 중심에 두고 모일 때 효과적인 팀워크를 발휘해왔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류처럼 플러스극과 마이너스극이 생기고 서로 상대방을 악마로 취급해왔다. 가령, 고대 마니교의 세계관에서 세계는 선과 악이 싸우는 전쟁터로, 선의 반대쪽인 악이 제거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하지만 이런 극단적인 대립이 심해지면 우리는 상대방과 함께 무언가를 할 수 없게 되고 민주주의는 더 이상 발전하지 못하게 된다. 따라서 하이트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양극화가 심해지면 기본적인 인간에 대한 예의가 사라진다. 그리고 사회 전체의 신뢰도가 떨어진다. 이에 대한 고민은 한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 국가들 모두 고민해야 할 문제이다.” 사실 세계적 홍보컨설팅 기업 에델만은 2000년부터 매해 각국의 정부기관, 기업, 비정부기구(NGO), 미디어 등 4개 사회주체에 대한 신뢰도를 측정해 스위스 다보스포럼에서 발표해 오고 있다. 에델만코리아의 ‘2017 에델만 신뢰도 지표 조사(2017 Edelman Trust Barometer)’ 를 보면(조사는 2016년 10월13일~11월16일 조사됐으며, 총 1150명이 참여했다.) 한국인들의 정부, 기업, 미디어, NGO 등 4개 사회주체에 대한 평균 신뢰도는 38%로 나타났다. 전 세계 편균은 47%였는데, 크게 밑도는 수준인 셈이다. 조사 대상 28개국 중 23위를 기록했다. 에델만은 이 조사에서 60~100%는 신뢰국가, 50~59%는 중립국가, 49% 이하는 불신국가로 분류한다. 즉, 한국은 불신국가에 포함됐다. 특히, 기업 신뢰도가 낮은 것으로 조사됐다. 지난해에는 33%였는데, 올해는 29%로 나타났다. 조사 대상 28개국 가장 낮은 성적이다. 기업 CEO에 대한 신뢰도 역시 24%로 나타나 지난해 35%와 비교해 11%p 떨어졌다. 정부 신뢰도도 큰 폭으로 떨어진 것으로 조사됐다. 올해 국민의 정부 신뢰도는 28%로 지난해(35%)보다 7%p 떨어졌다. 전세계 평균치는 41%인데, 절반을 조금 넘는 수준인 셈이다. 정부 신뢰도는 28개국 중 22위에 기록됐다. 정부 관계자에 대한 신뢰도는 17%로 전년(27%)보다 10%포인트 추락한 것으로 나타났다. ‘시스템이 제 기능을 하고 있다’고 답한 이들은 11%에 불과했다. 한국인 48%는 ‘사회 시스템이 실패했다’고 답했고, ‘사회 시스템에 확신이 없다’고 답한 이들도 41%에 달했다. 국민 10명 중 9명은 한국의 사회 시스템을 부정적으로 보고 있는 셈이다. 펭귄 프로젝트가 있다. 2016년 강남역 살인사건 이후 여성 혐오 문화를 바꾸기 위해 대학 캠퍼스에서 벌어진 운동이다. 성폭력, 여성혐오에 반대하며 수도권 대학 12곳의 20여 단체가 함께하는 연합운동인데, 이 운동이 특이한 것은 ‘용기’와 ‘연대’의 뜻을 펭귄의 습성에서 가져왔다는 것이다. 가령, 펭귄 가운데는 무리를 위해 먼저 바다에 뛰어드는 ‘퍼스트 펭귄’이 있는데, 이는 용기를 보여준 것이며, 또한 영하 70도 남극의 추위를 이겨내기 위해 서로 밀착하여 살을 맞대고 온도가 낮은 바깥쪽 펭귄들이 안쪽으로 조금씩 자리를 바꿔가며 이동하여 체온을 유지하는 펭귄의 ‘허들링(Huddling, 물결처럼 안과 밖의 위치를 바꾸는 것)’은 연대의 중요성을 알려준다는 것이다. 양극화의 세상이 펭귄의 용기와 연대의 정신으로 어떻게 변해야하는지를 잘 보여준다. 3. ‘멈춤, 낮춤, 갖춤, 맞춤.’ ‘멈춤, 낮춤, 갖춤, 맞춤.’ 인간의 욕심에서 비롯된 계란 파동에 관해 대증요법(symptomatic therapy)이나 미봉책으로 어물쩍 넘기지 말고 근본대책을 강구해야한다며 한양대 유영만 교수가 제안한 네 가지 ‘춤’이다. 이것은 계란 파동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아주 중요한 인문학적, 신앙적 통찰이 될 것이다. 첫째, 멈춤. 유영만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춤은 멈춤의 연속이다. 멈춤이 없이 추는 춤은 춤이 아니다. 끊임없이 물 흐르듯 이어지는 춤은 사실 멈춤의 연속이다. 멈춤은 다음 동작을 위한 짧지만 깊은 성찰의 시간이자 어디로 가야 할지 방향을 결정하는 결연한 순간이다. 멈춰 있지만 사실은 치열하게 고민하고 사유하는 시간이다.” 그렇다. 검도에도 ‘중단 겨눔’이 있다. 멈춰 있지만 상대의 마음을 읽어내는 치열한 전투의 시간이다. 다음 전투를 위한 치열한 멈춤이자 푹풍전야의 긴장감이 감도는 순간인 것이다. 둘째 낮춤. “모든 춤은 자신을 낮추면서 세상을 끌어안고 우주에게 마음을 열고 자연과 대화하는 몸동작이다. 나를 낮추고 상대를 높이면 저절로 나도 높아진다. 자세를 낮추면 자신의 인격은 올라간다. 낮춤은 겸손함을 표현하는 자세이자 다름을 포용하겠다는 태도다. 낮춤 없이 추는 춤은 허공에 들떠 떠다니는 환상이나 망상의 춤이다.” 세 번째 갖춤. “모든 춤은 춤의 기술과 기교 이전에 갖춰야 될 게 있다. 춤의 본질에 대한 깊은 이해는 물론 춤을 추는 사람의 자질과 품격이다. 격이 있는 춤은 기법과 기교의 산물이 아니라 춤에 임하는 사람의 자세와 자질, 품성과 인격의 문제다. 춤은 나를 세상에 드러내는 매개체다. 내가 추는 춤이 바로 나다. 춤은 내가 살아온, 살아가는, 살아가고 싶은 삶을 표현하는 욕망의 분출구다.” 네 번째 맞춤. “맞춤은 상대의 아픔에 귀 기울이고 들어보려는 경청의 자세이자 상대의 마음을 헤아려 하모니를 이루어보려는 노력이다. 맞춤은 나를 먼저 드러내기보다 상대를 위해 내가 무엇을 도와주고 지원해줄 수 있을지 알아보려는 애쓰기다. 맞추지 않고 추는 춤은 자기 욕구만 일방적으로 발설하는 난장판의 춤이다.” 우리의 신앙에 이 네 가지 춤이 필요할 것이다. 니체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한 번도 춤을 추지 않는 날은 헛된 날이 되게 하라.” 우선, 멈춤은 인간의 욕망에 대한 멈춤일 것이다. 그리고 낮춤은 인간의 교만에 대한 적절한 대안이다. 갖춤은 인간을 넘어 종들 간에 대한 예의를 갖추는 것이며, 맞춤은 사람다운 세상을 위해 필요한 덕목들을 갖추는 것이다. 따라서 갑의 갑질도 없어야 되겠지만, 을들이 을들끼리 서로에게 졸질 하는 세상이 아니라, ‘최고의 갑중에 갑’이신 창조주께서 ‘을 중의 을’이 되신 성육신 사건의 중요성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또 며느리는 나이 드신 시부모에게 갑질 하지 않는 것, 친구들끼리 갑질 하지 않는 것, 조금 불편한 사람을 다르다고 갑질 하지 않는 것, 땀 흘려 일하시는 노동자들의 그 땀 냄새가 역겹다고 갑질 하지 않는 것, 아파트 입주민들이 경비원 아저씨에게 반말하며 갑질 하지 않는 것, 주유소나 편의점 등에서 알바하시는 분들, 비정규직이라고, 전임이 아니라고 갑질 하지 않는 것, 직분 받았다고, 출세했다고 갑질 하지 않는 것 이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언젠가 정말 큰 갑질은 최고의 갑인 신께서 반드시 심판 하실 것이다. 최 병학 목사 (남부산용호교회 담임) *이 글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문화
    2017-09-25
  • [시사칼럼] 시장실패, 정부실패, 시민실패
    홍 씨는 성탄절을 맞아 아들 선물로 최근 아이들이 열광하는 장난감을 사기 위해 매장을 찾았습니다. ‘이렇게 큰 도시에서 오직 한 군데서만 판매를 하다니’ 속으로 투덜거리며 매장으로 가는 길에 홍 씨는 깜짝 놀라고 말았습니다. 진입하는 도로부터 그야말로 인산인해(人山人海), 도무지 끝을 알 수 없는 긴 줄에서 몇 시간을 기다려야 했기 때문입니다. 마침내 아내가 귀띔해준 장난감을 집어 들고 가격표를 본 순간 또 한 번 깜짝 놀라고 말았습니다. “아니, 무슨 아이들 장난감이 이렇게 비싸요?” “이 물건은 오직 우리 회사, 오직 이 매장에서만 팔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경제학에서 말하는 ‘독점(獨占)’을 설명하려고 만든 이야기입니다. 한 때 사람들은 시장에 대한 확신이 있었습니다. 이른바 ‘보이지 않는 손(invisible hand)’이 수요공급의 법칙에 의해 모든 경제현상을 최적화한다는 믿음이었습니다. 하지만 독점이나 환경문제가 등장하면서 신뢰가 깨졌습니다. 이를 ‘시장실패(Market Failure)’라 부릅니다. 박 과장이 팀장으로 있는 정부 산하 부동산정책 기획본부(가칭)는 투기 조짐이 보이는 아파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대출제한, 전매제한 등 특단의 조치를 전격 발표했습니다. 예상 밖의 특별조치는 부동산이상열기를 어느 정도 가라앉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그로부터 1년이 지난 시점에서 이례적인 경기침체와 함께 예상치 못했던 많은 부작용이 속출했습니다. 결국 박 과장은 정책 실패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사임합니다. 가상의 이야기지만 이처럼 20세기 경제대공황을 겪으면서 ‘정부에 의한 시장 개입’이 세계 각국에서 보편화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정부 주도의 인위적인 조치는 예상치 못한 결과들을 양산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대한민국이 지금 겪고 있는 저출산문제도 어쩌면, 1970년대부터 인구급증으로 말미암아 정부가 밀고 나갔던 강력한 산아제한정책의 부메랑효과일지도 모릅니다. 경제학에서는 이러한 현상을 ‘정부실패(Goverment Failure)’라 부릅니다. 최근 M 신문은 1면에 이런 기사를 발표했습니다. “지난 3월 여성환경연대는 K대에 의뢰한 연구용역보고서를 바탕으로 “생리대 10종에서 유해물질이 검출되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인체 유해성에 대한 객관적 기준이 없는 상태에서 이 같은 결론을 낸 것에 대한 논란이 불거졌다. 더군다나 10종 중 유독 L 업체만 언론에 공개되면서 다른 업체와의 공정성 시비도 잇따랐다. 놀라운 것은 관리감독 주무부처인 식품의약품안전처의 처신이었다. (중략) 일부 시민단체에 휘둘린 정부 부처가 사회적 갈등을 확대재생산하고 있다는 지적이 쏟아졌다.” 그러면서 이를 최근 사회 일각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드배치반대와 탈원전운동과 건강보험 보장성 강화 주장 등과 함께 일종의 ‘시민실패(Citizen Failure)’로 보았습니다. “시민 이익 대변을 자처하는 일부 시민단체 등의 무책임하고 과격한 주장이 정부와 시장의 기능을 왜곡, 퇴행시켜 국가적 실패를 초래하는 현상”이라는 설명과 함께 말입니다. 시장실패든 정부실패든 시민실패든 본질은 하나입니다. 시장에 대한 맹신, 정부에 대한 과신, 시민에 대한 지나친 의존성, 즉 무언가가 가진 힘과 능력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일종의 우상화 현상입니다. 우주와 사회와 역사를 다스리고 움직여가는 주체는 제도나 기관이나 이념이 아닙니다. 보이지 않는 손(Adam Smith)이나 절대정신(Hegel) 따위도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만이 만유(萬有)를 조성하고 조정할 수 있습니다. 시장실패와 정부실패는 시장과 정부를 창조주 대신 무한신뢰했던 교만의 대가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다만 시민실패라는 개념은 아직은 시기상조인 느낌이 듭니다. 최근에야 일어난 현상이며 그에 대한 분석과 평가 작업이 제대로 이루어지지도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만은 분명합니다. 시민이라도 주님을 대신할 수는 없다는 사실입니다. 솔로 크리스토(SOLO CHRISTO)!
    • 오피니언
    • 칼럼
    • 시사칼럼
    2017-09-25
  • [교회학교를 살린다] “간절히 원한다면 바뀌어야 한다”
    최근 교회 내부에서 나오는 화두중 하나는 항상 다음세대를 살리자는 것이다. 다음세대를 살리지 못하면 미래 교회에 희망이 없다는 자료들이 쏟아져 나왔기 때문이다. 실제로 작년 말에 발표된 통합 교단의 자료에 의하면 교회에서 청년부를 포함한 다음세대의 비율이 16.5%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게다가 부산의 복음화율은 최근 많이 올라서 11%이다. 그렇다면 부산지역의 다음세대 복음화율은 2%가 안 된다는 결론이 나온다. 일반적으로 복음화율 5% 이하를 미전도종족으로 보는 관례에 따르면 부산의 다음세대는 절대적인 미전도종족이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학교에서 예수 믿는 아이를 발견하기가 어렵다는 얘기이다. 오죽하면 청소년부 교사를 ‘외계인 선교사’라고 부르겠는가. 그만큼 한국교회 다음세대 복음화 과제는 현재 심각한 위기에 봉착해있다. 많은 담임 목사님들이 개 교회의 다음세대를 살리는 일에 관심과 열정을 쏟고 있음을 익히 들어 알고 있다. 그런데 정작 이 분들의 고민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누군가 알려주었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그 해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인적 자원과 물적 자원에 과감한 투자를 해야 한다는 교과서적인 답이다. 먼저 인적 자원은 다음세대 뿐만 아니라 전 세대를 신앙으로 교육하는 일이 필요하다. 다음세대를 둘러싸고 있는 전 세대가 건강한 신앙인으로 함께 상장해가지 않으면 다음세대만 살리는 일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교회는 교육 목회적 관점에서 성인교육을 강화해야 한다. 봉사에 집중된 성인사역의 구조에서 봉사와 친교, 교육 등의 사역이 골고루 이루어질 수 있도록 변화가 필요하다. 또한 신학교와 교단차원의 교육지도자 교육이 백업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 의미에서 총체적 노력이 동시 다발적으로 투입되지 않으면 살려내기 힘든 분야가 다음세대 교육이다. 장로회 통합 측은 최근 총회에서 다음세대특별위원회를 조직하기로 결의하였다. 이런 노력들이 공허한 모임으로 끝나지 않고 교단과 신학교와 노회, 교회들이 서로 힘을 합한 종합적인 열매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두 번째로 물적 자원의 투자는 예산의 집중이다. 이제 10월부터 각 교회는 내년도 정책을 수립한다. 이 때 과감하게, 그리고 목적을 세우고 예산을 투입해야 한다. 청소년들을 위한 농구골대를 설치하기 위한 것인지, 어린 아이들을 위한 놀이터를 만들 것인지, 청년들의 비전트립을 위한 것인지 정확한 출처를 상정할 필요가 있다. 각 가정에서는 부모가 벌어서 자녀세대가 쓴다. 교회의 예산 사용도 동일해야 한다. 필자가 섬기는 성민교회에서는 올해를 ‘다음세대를 부지런히 세우는 해’로 정하고 특별 예산을 수립하여 집행하였다. 어린이 놀이터를 만들었고, 아동부 책상을 좋은 것으로 바꾸었다. 인원이 증가하여 예산이 부족해진 부서에 예산을 집행하였다. 가정예배를 꾸준히 드리는 가정을 한 달에 한 번씩 시상하여 격려하기도 하였고, 단기선교에 참여한 다음세대들의 경비를 지원하였다. 사실 이런 일들은 교회를 건축하는 일에 비하면 적은 예산이 들어가는 일이다. 그러나 큰 효과를 볼 수 있는 일들이다. 이 일들이 이루어졌을 때 다음세대들은 자연스럽게 자신들이 교회 안에서 중요한 일원으로서 존중받고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고, 부모세대는 교회학교에 자녀를 믿고 맡길 수 있게 되었다. 정말 간절히 교회학교의 부흥을 원한다면, 지금 시작해야 한다. 당장 변화해야 한다. 교사들만 모여서 교사교육을 받고 미래를 걱정하는 수준이 아니라 담임목회자와 전교역자, 교회의 리더들, 부모들이 함께 다음세대 교육에 대한 관심과 교육을 받고 지금 당장 달라지려는 절박한 행동이 필요하다. 그 변화를 내년도 교회학교를 위한 달라진 예산 편성으로 보여주길 바란다.
    • 오피니언
    • 칼럼
    2017-09-25
  • [은혜의 말씀] 처할 줄 아는 비결(빌4장10~14절)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알기 전 유대교에 정통한 학자로 로마시민권을 가진 부족할 것 없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 그에게 그리스도인들을 잡아 가두고 핍박하는 것은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어느 날 예수님은 바울에게 빛으로 찾아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울이 그토록 미워하고 박해하던 예수라고 자신을 얘기합니다. 바울은 자신이 지난날 대체 무슨 짓을 한 것인지 두려움과 부끄러움을 느끼며 예수님을 더 이상 부인할 수도, 거부할 수도 없게 됩니다. 지난 날 자신이 그토록 자랑스럽게 여긴 지식과 부요함과 권리가 이제 더 이상 중요하지 않습니다. 진짜를 만나고 나니 그저 배설물에 지나지 않는다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그는 예수님을 전하는 일에 그의 남은 삶을 드리게 됩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쫓아가는 길은 평탄하지 않았습니다. 매를 맞고 핍박을 당하고 쫓겨나고 모욕을 당하는 그 길은 너무나 힘든 길이였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목숨을 건 전도여행으로 말미암아 교회가 생기고 믿는 자들이 늘어나 그들이 믿음 안에서 자라나는 것을 볼 때 바울은 너무 기뻤습니다. 예수님을 만나 알고 난 뒤 바울은 완전히 새로운 사람이 된 것입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그는 자신을 얽매이는 모든 것에서 진정한 자유를 맛보게 됩니다. 진리 되신 예수님을 위해 받는 모욕과 핍박도 그저 자랑스럽습니다. 풍부에 처할 줄도, 비천에 처할 줄 알게 된 그는 하나님 주시는 능력 안에서 모든 것을 감당하는 자가 되어 갔습니다. 바울이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그의 삶을 어떠했을까요? 한평생 호위호식하며 존경받고 교만에 빠져 살았을지도 모릅니다. 세상의 기준으로 보자면 행복하고 성공한 삶이라 여겨지기도 합니다. 예수님을 몰랐을 때라면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진리를 알고 나니 행복한 삶이라 여겨진 그의 나날이 사실은 지옥을 향해 가고 있었음을 알게 됩니다. 예수님을 만나지 못한 자들은 절대 이해할 수도, 상상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자들은 예수님을 믿음으로 어떠한 상황에서도 감사와 기쁨을 잃지 않습니다. 예수님께 맡기고 나아갈 때 주시는 위로와 평안을 누리기 때문입니다. 기도함으로 나아갈 때 우리의 걸음을 인도해 주실 하나님을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 하나님을 기대하며 하나님께서 주신 현재, 오늘이라는 선물을 기쁨으로 누려야 합니다. 예수님을 만나 그 분과 날마다 교제하며 지내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지옥이 아니라 천국을 향해 잘 가고 있으니 우리의 걱정, 근심, 불안이라는 짐을 예수님께 맡기고 어떠한 상황에서도 용기를 잃지 말아야 합니다. 바울처럼 일체의 비결을 습득해야 합니다. 하나님 주시는 능력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하나님을 찾고 찾아야 합니다. 그분을 만났으면 힘써 알아가야 합니다. 알아갈 때 우리는 그분을 인격적으로 만남으로 새롭게 태어나 새로운 인생을 살아갈 일체의 비결을 터득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을 배우고 예수님을 잘 알고 예수님을 품고 예수님을 닮아 주를 따라가는 우리 성도님들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 오피니언
    • 칼럼
    • 은혜의 말씀
    2017-09-25
  • [교회법률상식] 총회 재판국 왜 이러십니까(2)
    3. 총회 재판국의 불법 재판에 대하여 제101회 총회 재판국이 불법 재판을 하여 판결한 판결문 및 판결문 교부 문서는 다음과 같다. “문서 번호 : 제101-1358호(2017.8.14.), 수신 : 서울북노회장, 제목 : 총회 재판국 판결문 교부,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재판국장 관인) 재판국장 윤○세 서기 배○철, 판결문, 서울북노회 광탄중앙교회 정○호 씨의 서울북노회 김○호 씨 외 6인에 대한 상소건, “주문 1. 김○호 씨의 광탄중앙교회 위임 목사직은 상실 되었다. 2. 2016년 11월 6일 광탄중앙교회에서 가진 임직식은 무효이다. 3. 임직식(주일) 순서를 담당한 김○호, 김○진, 정○진, 정○철, 김○귀, 김○영, 류○수 씨를 서울북노회는 치리하고 2017년 9월 5일까지 총회에 보고하라. 4. 재판 비용은 피상소인들이 부담하라. 5. 위 사항을 이행치 않을 시 서울북노회의 모든 행정을 중지한다.”로 되어 있다. 1) 하회가 재판도 하지 아니한 상소건을 재판한 총회 재판국 총회 재판국이 거명한 7인의 목사들은 서울북노회로부터 재판을 받은 사실이 없다. 그런데 광탄중앙교회 정○호 씨는 7인의 목사들을 고소하면서 총회에 상소장을 제출하였고, 총회 재판국은 어떤 절차에 의해서 상소장을 넘겨 받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절대로 해서는 아니 되는 불법 재판을 하고 말았다. 이는 총회 재판국이야말로 교회 헌법 권징 조례에 대한 기초적 상식도 없는 문외한(門外漢)들이라 아니할 수 없어 보인다. 2) 재판할 서류도 없이 재판 한 총회 재판국 총회 재판국은 증거조를 폐하고(권징 조례 제94조 2항) 법률심으로 판결하는 대법원과 같은 최종심이다. 그러므로 하회 서기가 보내온 하회 재판에 관계된 모든 서류만을 가지고 재판해야 한다(권징 조례 제94조, 제101조). 그런데 하회가 재판을 한 흔적도 없으니 하회 서기는 하회 재판에 관계된 서류를 상회 서기에게 교부하지 아니했을 것은 기정사실일진대 총회 재판국은 재판하여 판결문까지 작성 교부했으니 상소인이 제출한 상소장을 근거로 재판을 했을 것이 불을 보듯 뻔하다. 총회 재판국은 상소인이 제출한 상소장을 가지고 재판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회 서기가 제출한 ①재판사건 진행전말서 ②상소장 ③상소 이유 설명서만을 가지고 재판하는 것이 현행 헌법이다(권징 조례 제96조, 제99조). 그런데 본건 총회 재판국은 위 ①,②,③항의 서류가 하나도 없이 재판을 하였으니 원천무효이다. 더욱 기가 막힌 것은 상소장 내용이 상소인(원고)과 피상소인(피고)만 상소장의 요식을 갖추었고 알맹이는 고소장으로 되어 있어 마땅히 각하해야 할 사건을 판결문대로 재판하여 교부했으니 상소장의 서류 검토도 제대로 못하는 총회 재판국원들이야 말로 재판관으로서 수준미달이라 할 수밖에 없다. 3) 총회재판국의 월권 제101회 총회가 파회된 후의 모든 재판 관계 서류는 제102회 총회 재판국이 제102회 총회로부터 위탁을 받은 사건만 심리 판결해야 한다(권징 조례 제134 2항). 그런데 본 건 상소장은 2017년 1월 3일이 시행일자인 문서이기 때문 제101회 총회 재판국은 받아 처리할 수 없는 서류임이 명백하다. 혹 총회가 급행료(?) 400만원을 받고 상설 재판을 해주기로 결의 운운하는 것은 헌법과 상충되는 결의이므로 상위법 우선의 원칙에 의하여 시행할 수 없는 결의임을 아는가 모르는가? 4) 총회 재판국장이 서울북노회장에게 지시한 공문에 대하여 설령 본 건의 재판을 인정한다고 가정할지라도 일개 상비부장에 불과한 총회 재판국장이 감히 치리회장인 노회장에게 약 20일 간의 여유만을 주고 해 노회원 7인을 치리하고 총회로 보고하라는 명령을 내린 것은 천지가 개벽할 일이다. 이를 두고 “하루 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 했던가? 합법적인 재판이라 할지라도 총회 재판국의 판결은 예심 판결로서 판결문을 교부하는 것은 쌍방을 구속(현상 동결)할 뿐이요(권징 조례 제138조), 총회에 보고하여 총회가 채용할 경우 상회 치리회장인 총회장이 하회 치리회장인 노회장에게 공문을 하달하는 것은 지극히 상식적인 법리이다. 그런데 총회에 보고도 하기 전에 총회 재판국장이 노회장에게 판결문 내용을 시행하라는 협박식의 지시 공한을 발송하는 행위는 절대로 용납할 수 없는 무례한 범죄 행위에 다름 아니다. 4. 결론 서울북노회가 D목사에게 위임목사 신분을 2년간 연장한 결의는 잘못이다. 그러나 무임목사도 지교회 당회장으로 파송할 수 있으므로 D목사가 당회장으로서 파송을 받아 장로 1인, 권사 10인을 법절차에 따라 공동의회의 투표를 거쳐 임직 및 취임식을 거행한 것은 합법이요, 노회가 제3의 당회장을 파송하여 그 당회장이 D목사를 K교회에 시무목사 청빙을 위한 공동의회를 행한 것도 합법이다. 그러나 총회 재판국이 본 건을 심리 판결한 것은 법도 아니고 재판도 아니고 초등학생들의 낙서와 같아 보인다. 오직 총회 재판국의 상소건 판결은 ①취소하든지 ②변경하든지 ③하회로 갱심하게 하든지 하는 것뿐임(권징 조례 제99조 4항)을 아는가 모르는가? 을 아는가 모르는가?
    • 오피니언
    • 칼럼
    2017-09-25
  • [중독칼럼] 시간이 필요한 자녀 문제 해결 방법
    [칼럼7]에서 중독문화-자녀 문제 해결 방법을 통해 1차로 썼지만, 한 번 더 정리하여 보충이 필요합니다. 그 중에서 진보적 성향의 분들이 저에게 문의 하는 내용 중에 어떤 게임을 가장 위험한가라는 질문을 해 올 때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너무나 많은 게임이 광고를 통해 유혹하고, 예전과 다르게 – 예전에는 스타크래프트를 위시하여 몇몇 게임들이 정해져 있었지만 – 오늘날은 하루가 멀다하고 새로운 게임이 나타나고 있고 듣도 보도 못한 게임들이 등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정리해 봅니다. 1. ‘현질’하는 게임은 금지하십시오. 현금을 지른다의 준말이 현질이라고 일전에 말씀 드린 것처럼 현금을 유도하는 게임들은 대부분 사행성과, 발런스가 맞지 않습니다. 돈있는 유저들은 쉽게 렙업하여 시간과 공을 들인 유저들을 쉽게 앞지를 뿐 아니라 노력을 산물이 될 수 없기에 또다른 패배주의에 봉착하게 됩니다. 또한 이런 게임은 수명이 그다지 길지 않습니다. 유행을 강하고 짧게 타다 사라지기 때문에 지금까지 수고한 모든 것이 더 헛됨을 느끼기에 박탈감이 더 강해 질 수 밖에 없고 모든 것에 있어서 해롭습니다. 2. 시간을 많이 들여서 하는 RPG게임은 금지해야 합니다. 일명 역할 게임인데, 기사가 되어 괴물을 처치하면서 아이템을 수집하고 발전하는 게임입니다. 이런 게임은 끝이 없습니다. 순간순간 성장할 때 쾌감을 느끼지만 결국 시간이 흐르면 이것도 무의미함을 뼈져리게 느끼게 됩니다. 긴 시간 게임을 해 본 대부분의 (아니 모든)유저들이 느끼는 후회입니다. 3. 혼자서 하는 게임입니다. 사람의 터치 받지 않고 인터넷과 라면만 있으면 돼라고 느끼는 자녀들은 가장 큰 위험한 환경에 쳐해 있습니다. 현실을 도피에 빠져 있는 그들을 살펴야 합니다. 이런 세대들은 공동체(교회, 예를 들어 온힐센터)같은 특수한 환경 속에서 기독교 가치관을 배우지 않으면 어디로 범죄 할지 모르는 가장 위험한 상태 놓여져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들은 인간 관계의 오프라인 상태를 가장 무서워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에게는 특별한 조치가 필요합니다. 특히, 아이를 하나를 낳아 기르는 부모들은 이 문제의 대한 심각성을 느껴야 합니다. 말 못하는 어린 시절부터 스마트폰으로 유아를 하고 있다면 미래에 심각한 과몰입 상태에 놓여질 가능성이 100배(?)이상 된다고 저는 소견을 남깁니다.
    • 오피니언
    • 칼럼
    2017-09-25
  • [기고] 故 유은(唯恩) 박영훈 長老님
    ▲ 故 박영훈 장로 1981년 고신대 의과대학 설립을 주도하신 고인을 고신의대의 교목이기 때문에 가까이서 뵐 수 있었던 것은 참으로 감사한 일이었고, 고인을 뵐 때 마다 존경하는 마음으로 많은 것을 느끼고 배웠다. 고인을 처음 뵌 것은 1995년 10월 하순경이었다. 고신대 의학부 교목으로 부임하여 업무 파악을 하던 때였는데 교목실 전화 벨이 울렸다. “예 교목실 황수섭입니다.” “황수섭 교목님이지요? 박영훈 원장입니다. 지금 어디 계세요?” “예 교목실에 있습니다.” “목사님. 그대로 계세요. 바로 가겠습니다.” “아닙니다. 제가 가겠습니다.” “그러실랍니까? 연구실이 2동에 있습니다.” 연구실 위치를 확인한 후 2동으로 갔다. 그런데 2동 현관 밖에서 박원장님이 기다리시고 계시는 거 아닌가. 노타이 흰 셔츠 팔을 걷어 붙이시고 웃으시면서 악수로 반겨 주셨다. 솥두껑만한 손인데 보들보들한 촉감과 온기를 느꼈었다. 연구실로 들어 가자 말자 작은 냉장고에서 쥬스를 꺼내 주셨다. 쥬스를 마시기는 했지만 내심 많이 놀랐었다. 그 당시 소문으로 듣던 박원장님과 너무 달랐기 때문이었다. 비서도 없는 작은 연구실, 꾸밈 없는 소박한 장식장. 천진난만한 느낌의 웃으시는 표정, 비음이 섞인 부드러운 목소리... 자리에 앉으신 박원장님께서는, '복음병원과 고신대 의학부(의대. 간대)가 고신교단이나 우리 나라에서 참 중요하니까 학생들 신앙으로 잘 지도해 주시고, 교직원들 주님의 사랑으로 목회 잘 하시라.'는 덕담을 해 주셨다. 연구실을 나서는데도 현관까지 배웅을 해 주시면서, “고맙습니다. 즐거웠습니다. 다음에 또 만납시다.” 신임 교목을 환영해 주신 것 같았다. 그 당시 고인께서는 의대 교수직을 정년퇴임하셨던 해였지만 고신의료원(복음병원과 의학부)의 어른이셨는데 40세 채 안된 교목에게 관심을 주신 것이었다. 그런데 세월이 지나면서 더 놀랍고 존경하는 것은 그 이후에 공사간 많이 뵈었었지만 1995년 그 날 처음 뵙던 그 모습이 변함없으셨다는 것이다. 전화를 받으시든 전화를 하시든 첫 마디 말씀은 항상 “목사님 어디 계십니까? 바로 그리로 갈게요.” 헤어질 때는, “고맙습니다. 즐거웠습니다. 다음에 또 만납시다.” 돌아 가시기 전 병석에 누워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셨지만 역시 비음 섞인 부드러운 목소리로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고인의 신앙과 삶을 다 기록할 수 없지만 몇가지만 쓰고자 한다. 고인은 목사를 귀하게 여기시고 예우하신 분이셨다. 한상동 목사님. 박윤선 목사님. 한명동 목사님,... 고신 교단의 초창기 많은 목사님들을 진심 존경하고 귀하게 여기셨다. 송도제일교회를 세우실 때 목적 중 하나가 목사님을 최고로 대우하는 교회를 만들자고 하셨단다. 훌륭한 목회자 양성을 위하여 신학대학원을 지원해야 한다는 부담을 늘 가지셨다. 아들 연배인 저를 한번도 '오라' '가라' 하시지 않으신 것도 목사로 예우하셨기 때문이라고 짐작한다. 고인은 감사의 마음이 충만하신 분이셨다. 약간의 도움만 드려도 ‘고맙습니다.’ 푸른 산, 하얀 구름을 보시면서도 ‘주님 고맙습니다.’ 항만, 뻥 뚫린 도로, 달리는 자동차를 보시면서 연신 ‘주님 감사합니다.’라고 말씀하셨다. ‘불과 4,50년 전만해도 벌거숭이 산이었고 먹을 게 없어서 굶주렸는데 이렇게 우리 나라가 부요해졌어요. 하나님께서 우리나라에 복을 얼마나 많이 주셨는지 참 감사한 일이죠.’ 고인은 낭만적인 분이셨다. 드라이브를 하다가 좋은 경관이 보이면 ‘잠간 내렸다가 갑시다. 참 멋진 곳이네요.’ 젊은 시절엔 교회 성가대 지휘를 하셨고 피아노로 찬송가 반주를 하실 정도였다. 한번은 강당을 열어 달라고 하시더니 혼자서 피아노로 찬송을 연주하며 콧노래를 부르셨다. 헤어질 때의 인사말씀은, ‘즐거웠습니다.’ 식사든 드라이브하셨든지 간에 즐거웠다고 표현하시는 낭만적인 분이셨다. 고인은 주님의 은혜를 고백하신 분이셨다. 고신의료원(복음병원, 고신의대, 간호대)의 역사와 발전상을 말씀하실 때나 ‘원장님 정말 큰 일하셨습니다.’라는 말을 들으실 때에 늘 하시는 말씀은, ‘내가 뭐 압니까? 저는 벅수, 바보입니다. 주님께서 은혜를 주셔서 아이디어도 생기고 좋은 협력자들을 주셨고 교단 지도자들이 믿고 적극 도와 주셔서 맡은 일 한 것 뿐입니다. 모든 게 다 주님의 은혜 뿐입니다.’(*그래서 號가 唯恩. 오직 恩惠) 고인은 소박하고 검소하게 사신 분이셨다. 화려한 옷차림이나 명품을 본 적이 없었다. 콤비를 입으시고 시내버스를 타시고, 무슨 음식이든지 잘 드셨다. 검소한 삶이 몸에 베여 있었다. 그렇게 사시면서 저축한 거금을 2013년에는 후학을 위하여 기부하셔서 고신의대 <유은홀>이 만들어졌다. 그런 삶을 배운 자녀들도 고인의 장례식을 거창하지 않게 가족장으로 치뤘다. 부고도 별로 하지 않고 ‘부의금은 정중히 사양합니다.’ 고인은 참으로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삶, 세상으로 나아 가는 개혁주의 신앙이 무엇인지를 보여 주시며 실천하시면서 사신 분이셨다. 고인의 생애에서 부산 송도를 뺄 수 있을까? 암남동 34번지에서 고인의 업적을 뺄 수 있을까? 고신대학교 복음병원 의과대학 간호대학에 고인의 손길 가지 않은 곳, 눈길 머물지 않은 곳 있을까? 모든 직을 내려 놓으신 뒤에도 홀로 병원 구석 구석 의대 간대 층층에 쌓인 추억을 더듬으시면서 기도하셨던 고인의 소원이 응답되는 날이 속히 오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고신의료원은 주님의 뜻이 담겨 있고, 고신 교단 어르신들의 눈물이 있고, 여러 사람의 수고로 이만큼 일궈진 병원과 대학입니다. 더 발전하여 고신 교단과 이 나라에 크게 쓰임 받으면 참 좋겠습니다.’
    • 기고/강연
    • 기고
    2017-09-25
비밀번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