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0-07-1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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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독교인문학] 이웃을 거부하는 제국의 신들인가?
    월터 브루그만의 《하나님, 이웃, 제국》하나님의 신실하심과 공동선 창조 교양 있는 그리스도인의 서재에 한 권쯤 꽂혀 있을 법한 20세기 가장 위대한 기독교명저 100선에 오른 《예언자적 상상력》의 저자 월터 브루그만의 풀러신학교 초청강연을 한 권의 책으로 묶었다. 평생 성경본문을 붙들고 씨름한 저명한 노 성서학자이자 설교가인 저자의 신학을 접할 수 있는 좋은 기회. 무한경쟁의 소비사회에서 번영신학에 물든 현대 그리스도인에게 고대 중동사막의 먼지바람 속에서 외치는 예언자들의 거친 숨결을 느낄 수 있다. 예언자적 상상력에서 시적 상상력과 애통의 파토스로, 무감각한 이 세대에 희망을 선포한 그는, 이 책에서 신실한 하나님과 관계맺음으로 구약을 관통하는 정의, 은혜, 율법이 어떻게 하나 되는지를 보여준다. 현 시대를 향한 예언자의 예리한 통찰이 녹아있다. ◈ 저자소개 ∥월터 브루그만 Walter Brueggemann: 1933년 미국에서 출생, 엘머스트대학을 졸업하고 에덴신학교와 유니언신학교에서 신학박사, 세인트루이스대학교에서 철학박사를 받았다. 세계적인 구약신학자이자, 탁월한 설교가. 에덴신학교와 컬럼비아신학교에서 구약을 가르쳤고, 지금은 은퇴하여 명예교수로 활발한 언론활동과 반 바로협회를 통해 미국사회에 만연한 소비주의문화에 저항하는 기독교사회운동에도 열심인 행동하는 지성이다. 성서유니온 간 / 2020. 4. / 16,000원 ◇ 같이 읽으면 좋은 책 《하나님 편에 서라》 / 짐 월리스 지음 / IVP 《칼뱅과 공공선》 / 송요원 / 2020 / IVP 《공공선을 추구하는 비즈니스》 컨맨 웡, 스콧 래 공저 / 2020 / 아비서원 이웃을 거부하는 제국의 신들인가? 해방과 언약의 하나님인가? ▌좌담: 김길구 전 부산YMCA 사무총장, 김현호 기쁨의집 대표, 김형기 팔복교회 목사 끊임없이 들으라, 지키라“이웃을 거부하는 제국의 신들인가, 해방과 언약의 하나님인가? 우리는 그들의 추종자요 착취와 상품화 이데올로기의 하수인인가 아니면 이웃의 위상을 복원하는 하나님께 속한 자유인인가?” 김길구 무례한 기독교란 말들이 이 땅에 회자될 때 시작한 본 시리즈 ‘기독교교양읽기’의 코너 이름을 독자들의 요청에 따라 기독교인문학으로 바꿨습니다. 오늘은 예고한대로 월터 브루그만의 「하나님, 이웃, 제국」입니다. 읽으신 소감이 어땠어요?김형기 저자가 33년생이니 올해로 87살이 되었네요. 그 연세에 여전히 거인다운 풍모를 잃지 않아 좋았습니다. 그러나 평신도들이 접하기에는 이 책이 다소 지루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김현호 풀러신학교에서 행한 브루그만을 위한 맞춤형 초청강연의 주제라 그럴 거예요. 요즘처럼 강단에서 거시담론이 사라진 때에, 모래바람 이는 고대 중동지역의 광야에서 들음직한 말씀의 생생함이 있잖아요.김형기 브루그만의 매력은 고대 중동을 연구하면서 그 말씀의 적용을 화석화된 과거에 머물게 하지 않고 21세기 현재 우리가 발 딛고 선 이 땅의 삶의 영역에서 기독교적 대안을 모색하는데 있습니다. 그래서 은퇴 뒤에도 반 바로협회란 조직에서 기독운동체로서 사회적 액션(social action)을 쉬지 않는 노익장이죠. 대표작 《예언자적 상상력》김길구 브루그만 하면 떠오르는 것이 1978년 출판되어 크리스천 투데이에서 선정한 20세기 가장 위대한 기독교도서 100선에 오른 대표작 「예언자적 상상력」일 것입니다. 이 책은 이례적으로 2000년 개정판을 내어 달라진 시대의 변화를 반영했는데, 우선 이 책부터 얘기해 보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김형기 저자는 미국의 자본주의 소비문화에 교회가 순응하게 된 원인을 성서의 예언자 신앙전통을 저버린 결과로 진단하고, 이를 극복하려면 지배문화의 의식과 인식에 맞설 수 있는 대안의식을 끌어내고 키우고 발전시키는 예언자적 목회를 제안했는데 그 대안의식이 바로 예언자적 상상력의 롤 모델로 모세의 대항공동체와 특히 예언자 예레미야 등의 역할에 주목했습니다. 김현호 이 이유가 근원적 비판을 넘어 창조적인 희망을 선포하였기 때문이예요. 그 희망의 정점에 예수의 십자가가 있다는 것입니다.김길구 ‘예언자적 상상력?’ 브루그만 다운 표현입니다. 예수 사역의 핵심은 기존질서의 단순한 해체가 아니라 절망의 세상 속에서 온전히 이루시는 새로운 하나님나라의 희망으로 오늘의 주제인 「하나님, 이웃, 제국」도 이 책의 예언자적 상상력과 맞닿아 있습니다. 정의, 은혜, 율법김형기 브루크만은 이 책에서 정의, 은혜, 율법이라는 서로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논쟁적 주제들이 어떻게 관계를 맺고 있는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선 정의는 애굽의 바로와 같이 위로부터의 제국의 왕으로 상징되는 정의와, 모세와 같이 통제와 독점, 폭력에 맞서 하나님의 결단과 인간의 행함이 연대하는 이웃을 향한 해방공동체인 아래로부터의 정의가 있는데 물론 브루그만은 후자를 참 정의라고 주장합니다.김현호 은혜에 있어서도 당시 고대 중동의 만연한 인과응보의 ‘공통신학’처럼. 순종하면 복을 받고, 불순종하면 심판을 받는다는 가혹한 언약을 넘어 하나님의 변함없는 신실하신 사랑의 은혜의 윤리가 사회적 관계를 새롭게 규정하였다는 것입니다.김길구 이런 점은 구약의 율법에 있어서도 드러나는데 제국의 법은 절대적이라 고칠 수 없고, 철회할 수 없으나, 야웨의 법은 자신이 세운 법마저도 긍휼과 환대라는 회복적 정의로 법을 너머서 고통 받고 있는 이웃을 향해 열려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이 고정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매순간 이웃의 외침에 귀기우려야 하며, 그들과 함께하라는 것입니다. 그의 신학적 급진성을 엿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김현호 저자는 분배의 맥락에서 사회구성원 모두가 안전과 존엄과 행복을 누리며 살도록 보장한다는 뜻으로 정의justice를 정의하면서 “공동선은 사라지고 마거릿 대처가 촉발한 공동체 해체는 점점 만연해지며, 민영화라는 전염병이 우리 주위에 창궐한다”며 인간의 욕망을 극대화시킴으로 한계에 이른 신자유주의에 대한 위험성을 경고하고 있습니다.김형기 우리사회도 이런 극심한 소득의 불균형으로 인한 사회의 양극화로 갈등이 고조되고 있습니다. 저명한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도 「자본과 이데올로기」에서 ‘정의란, 한 사회에서 구성원 전체가 기본재화인 의료, 교육, 주거 등에 소외 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기독교인이라면 한번쯤 오늘 우리사회의 문제를 성찰해 봐야겠지요. 행동하는 그리스도인김길구 지금도 방송과 반바로협회 활동 등을 통하여 미국사회의 소비문화에 대하여 예언자적 상상력을 가지고 사회에 경종을 울리며 기독교대항운동을 펼치는 그가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사회의 불평등과 우리나라의 부동산 정책에 대하여 일갈한다면 어떤 주장을 할까 궁금합니다. 아마 싱가포르처럼 고세율정책이나, 토지공개념개념 같은 주장을 펼칠지 모르겠네요? 김형기 재미있는 것은 그의 책 예언자적 상상력의 실천 후기편에 “예언자적 상상력”을 한낯 “멋진 생각”에 불과한 것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며, “예언적 상상력은 애통과 희망이 지배문화의 굴레를 깨뜨린다는 확신을 지닌 참된 신앙인들이 행하는 구체적인 실천이다”이라고 실천을 강조하고 있습니다.김현호 그러한 사례로 도시가정상담목회, 음식과 숙박을 제공하면서 예배와 돌봄을 함께 베푸는 교회, 지미카터의 퇴임 후 사랑의 집짓기운동 등의 여러 미국의 사례를 소개하여 한 때 많은 목회자들에게 영감을 주었던 그의 상상력이, 성장이 멈춰버린 한국교계의 사역자들에게 다시금 희망의 불씨가 되었으면 좋겠네요.김길구 마지막으로 각자가 느낀 인상적이었던 대목들을 소개해 주시죠? 저는 서론에 있는 “구약성경은 끊임없이 이어지는 제국의 한 가운데서 옛 이스라엘을 위한 ‘대항 텍스트’countertext가 되었다”란 대목인데, 신앙적 고민 없이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인 경쟁을 부추기며 이웃을 배제하는 우리의 소비문화와 구약을 단지 물질적 축복의 책으로 호도하는 요즘 세태에 경종을 주는 대목 같아 좋았습니다.김현호 혐오와 배제가 일상화된 우리를 돌아볼 때 “이제 구약 저 너머를 바라보자 우리는 교회가 베드로의 환상체험과 바울의 증언에 자극받아 이방인들을 향해 과감히 문을 연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이것은 교회가 스스로를 ‘타자화’othering한 가장 극적인 사례다”라는 대목인데 좀 더 열린사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김형기 저는 “이스라엘에서 율법은 곧 대화다. 은혜와 정의의 하나님이 사람과 나누시는 대화다. 이 대화가 이끌어 내는 순종에는 청신함과 기쁨과 자유가 충만하게 깃든다”는 구절이 마음에 들어요. 율법을 굴레로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는 생각에서죠. 김길구 장시간 수고 많으셨습니다. 이 장마철에 무거운 얘기로 독서를 하신다고 수고가 많으셨습니다. 책을 읽으면서 오랜만에 학생이 된 기분이었습니다. 덕분에 그동안 멀게만 느껴졌던 구약의 본문이 성큼 우리에게 살아있는 말씀으로 다가오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다음 호에는 여름 휴가철이라 여러분들의 독서부담을 덜어드리고자 문학평론가이신 남송우 前 부산문화재단 대표이사를 모시고 2회에 걸쳐 고진아 시인의 시세계를 중심으로 기독교시의 가능성을 모색해보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정리 : 김길구 】
    • 문화
    • 기독교 교양 읽기
    2020-07-14
  • 슬기로운 ‘여름’ 위해 머리 맞대자
    교회 핵심 사역이라 불리는 여름사역에 비상이 걸렸다. 안 그래도 코로나19 때문에 여름사역을 어떻게 할지 고민이었는데, 지난 8일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가 발표한 전국교회 핵심 방역수칙 의무화에 충격과 함께 분노를 느껴야만 했다. 특히 여름사역을 준비하던 교회들의 고충은 더 깊어졌다. 한국교회는 이번 여름을 어떻게 보내야 할까? 손 놓고 있어야 하는가? 어느 교회는 여름사역을 모두 취소했다며 자랑스럽게 말한다. 여름사역을 취소하는 그들의 마음도 이해되고, 교회가 여름사역을 진행할까 전전긍긍하는 성도들과 지역주민들의 마음도 이해된다. 그러나 돌파구를 찾아보자는 다음세대 사역자들의 말에 귀를 기울였으면 한다. 아이들이 즐거운 여름이 되기 위해 고민하고 방법을 찾아보자. 안전하면서도 즐거운 시간을 어떻게 보낼 수 있을까? 혼자 고민하면 어렵지만 여럿의 의견이 합쳐지면 더 나은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개 교회의 사역으로 그치지 않고 다음세대 사역자들이 함께 의견을 나눌 수 있는 나눔터가 있길 바란다. 최근 교회학교 사역자들을 만나면 이번 여름사역에 대해 서로 묻는다. 이런 고민과 대안들을 서로 나눌 수 있는 공간이 있다면, 이번 여름을 슬기롭게 이겨낼 수 있지 않을까?
    • 오피니언
    • 사설
    2020-07-14
  • 국민청원 하루만에 20만 넘어
    8일 정부의 방역수칙 의무화 발표 이후 ‘정부의 교회 정규 예배 이외 행사 금지를 취소해주세요’라는 청와대 국민청원이 제기됐다. 이 청원은 빠르게 전파되어 하루만에 정부답변 요건인 20만을 넘어섰다.(9일 오전 8:50분 현재 266,199명) 하지만 일부에서는 큰 실효성이 있는지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사실상 정부에게 시간을 벌어주는 행위라는 것이다. 청와대 국민청원은 30일 동안 20만명 이상 추천해야 정부 및 청와대 책임자가 답변하는 형식이다. 기본적으로 한 달이라는 시간을 정부가 벌 수 있고, 교회 현장만 혼란스러워 질 전망이다. 실제 예로 지난 2월 22일 제기된 ‘신천지 강제해산 청원’의 경우 3월23일 청원(청원자 144만 9,521명)이 마감되었지만, 정부는 마감일보다 한 달 더 늦은 4월 21일 입장을 발표했다. 정부의 답변도 원론적인 수준이었다는 지적이다. 당시 정동일 사회정책비서관이 나와 “사안의 중대함을 인식하여 관련 법률을 위반하였는지에 대해 면밀한 조사와 그에 상응하는 처벌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답변했다. 결국, 혼란과 고통은 고스란히 교회 현장의 몫이 될 전망이 우세하다. 일부에서는 이 정부 들어 교회를 압박하는 수준이 지나칠 정도라는 불만의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흘러 나올 정도다.
    • 오피니언
    • 기자수첩
    • 광야의 소리
    2020-07-14
  • 당혹스러운 교회 현장
    정부가 8일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 브리핑을 통해 전국 교회를 대상으로 한 방역수칙 의무화 조치를 발표한 데 대해 교회 현장에서는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당장 10일 오후 6시부터 예배를 제외한 구역예배, 성경공무모임, 성가대 연습 같은 소모임과 교회내 식사 금지, 예배 때 찬송도 자제(마스크 착용)해야 하고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르거나 말하는 행위(통성기도)도 금지된다. 교회학교도 비상이다. 사실상 여름수련회 일정 등에 큰 차질이 있을 전망이다. 모 교회 관계자는 “수련회 일정을 모두 세워두었는데, 현재로서는 수정이 불가피할 전망”이라고 말했다. 다른 교회 모 관계자는 “정부 발표는 사실상 수련회를 하지 말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며 현재 수련회 일정 취소를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다고 말했다.
    • 오피니언
    • 기자수첩
    • 광야의 소리
    2020-07-14
  • 교회 다녀? 진료 거부
    부산 A교회 성도가 갑작스레 찾아온 요로결석으로 통증을 호소했다. 구급차에 실려 인근에 위치한 B병원에 도착했다. 그러나 진료 전 의료진으로부터 “혹시 교회에 나가십니까?”라는 질문을 받았고, 그렇다고 답하자 진료를 거부당했다. 다시 근처 C병원으로 옮겼는데 여기서도 똑같이 교회 출석 여부를 물었고, 사실대로 답하자 진료 거부를 당해 세 번째 찾은 병원에서 겨우 치료를 받을 수 있었다. A교회 성도는 통증이 심한 와중에도 교회를 다닌다는 이유로 진료 거부를 두 번이나 당해야만 했다. 한국교회 성도는 때아닌 믿음의 시험을 당하게 생겼다. 교회 출석으로 직장에서 배척당하고, 아파도 진료를 받을 수 없다는 현실에 당혹스럽기만 하다.
    • 오피니언
    • 기자수첩
    • 광야의 소리
    2020-07-14
  • [서임중칼럼] 코로나19가 그렇게 무서운가?
    나는 늙어가는 별 볼일 없는 사람이다. 그래도 하나님은 필요한 곳이 있는지 말씀 대언의 사역을 계속하게 하신다. 친구들이 나에게 붙여준 작금의 닉네임이 ‘서삿갓’, ‘바울사도’다. 아마도 전국을 다니며 말씀사역을 하는 나의 일상을 빗댄 것이리라. 그러나 내가 동의하지 않는 것은 김삿갓의 삶은 ‘죽장에 삿갓 쓰고 술 한잔과 방랑 삼천리’한 것이고, 나는 ‘복음의 신을 신고 구원의 투구를 쓰고 목적 있는 삼천리’이기에 그렇고, 바울은 ‘이름만 읊조려도 무릎이 꺾어지는 위대한 복음전도’가 그 삶이었기에 나 같은 미말의 목사가 바울사도의 이름 곁에 붙여지는 것 자체가 황송하고 어불성설이기에 그렇다. 그럼에도 작금의 나의 일상은 일 년 내내 농어촌, 산골, 개척교회를 다니면서 복음을 전한다. 그런 차원에서라면 떠도는 내용은 다르지만 상황은 김삿갓처럼, 바울 사도처럼이기에 동역자들이 그렇게 표현하는 것이리라. 지난 3월부터 코로나19의 정부 방역대책에 교회도 앞장 서 협력하면서 주일예배도 온라인예배로 드리는 상황이었다. 이런 가시적 상황에 사람들의 불안과 걱정은 그야말로 ‘온 세계 코로나19 멘붕(mental collapsing) 상태’의 지속이다. 한마디로 카오스 현상이다. 이런 때에 그리스도인들은 영적 상황인지력과 예지력을 가져야 한다. 코로나19 팬데믹의 두려움에 함몰되는 영적생활이 아니라 극복할 수 있는 일상생활이어야 한다. 상황인지력이란, 코로나19 시대에 소위 ‘믿습니다’를 앞세워 정부 방역 대책에 불응하는 신앙관이 아니라 WHO와 질병관리본부의 방역대책에 순응하며 자기관리, 집단관리로 순리를 따르는 것이다. 예지력이란, 성경적 관점에서 질병의 발생 원인과 대응, 그에 따른 영적 반응을 이름이다. 질병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질병에 대한 이해와 극복하는 자세를 통해 질병을 통한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고 한 차원 더 나아가는 신앙생활을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잠언 4:23절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는 인간생활에서 마음관리가 얼마나 귀한 것인가를 더욱 깊이 교훈하는 말씀이다. 전국 교회를 다니면서 말씀 사역을 하는 동안 듣는 모든 목회자의 공통된 아픔이 예배출석과 헌금이 줄어드는 상황에 현실적으로 어려움이 한두 가지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런 답답한 속내의 솔직한 목회내용을 점검해 보면 ‘교회 출석이 가능한데도 코로나19를 앞세워 예배 출석을 안 한다. 따라서 교회 전반적인 교육 행정 선교가 멈추는 듯한 상황’이다. 그럴 때마다 조언해 주는 것은 목회자부터 코로나19에 대한 무의식적 불안과 걱정과 두려움에서 벗어나야함을 강조한다. WHO는 코로나19가 우리의 삶에서 쉬 멀어지지 않을 것으로 예견한다. 수많은 사람이 세계 곳곳에서 죽어가고 있고 바이러스는 변종으로 더욱 우리의 생활을 위축시키며 불안하게 하는 상황에서 스스로를 지키는 수단은 손 씻기, 사회적 거리두기, 마스크 착용하기 뿐이다. 이미 이것이 오늘의 일상생활이 되었다. 이런 때에 그리스도인의 생활습관도 영적으로 자연스럽게 더욱 승화되어 내 영혼을 지키기 위한 영적 손 씻기와 마스크 착용, 사회적 거리두기를 할 수 있어야 한다. 육신의 죽음은 두려워하면서 영원한 죽음은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신앙인이 아니다. 가시적 코로나19 바이러스를 두려워하면서 죄의 무서운 바이러스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면 믿음 있는 사람이 아니다. 야고보 4:8절에서는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고 권고하셨다. 코로나19 때문에 손 씻기가 일상이 되듯 손으로 지은 죄를 깨끗이 할 수 있어야 한다. 야고보서 1:26절에서는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물리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했다. 마스크를 쓰는 것은 일상화하면서 자기 입에 재갈을 씌우지 못하면 헛된 신앙이다. 사도행전 15:29절에서는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멀리하라. 이에 스스로 삼가면 잘 되리라.”고 했다. 요한1서 5:21절에서는 “자녀들아 너희 자신을 지켜 우상에게서 멀리하라.”고 했다. 사회적 거리두기는 잘 지키면서 죄악된 것들에서 거리를 두지 않는 생활을 하면 코로나19로 죽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영원한 생명이 죽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역대하 7:13~14절에서 “혹 내가 하늘을 닫고 비를 내리지 아니하거나 혹 메뚜기들에게 토산을 먹게 하거나 혹 전염병이 내 백성 가운데에 유행하게 할 때에,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들의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낮추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찾으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들의 죄를 사하고 그들의 땅을 고칠지라.”고 말씀하신 하나님 앞에 우리는 죄를 회개하고 무릎을 꿇어야 한다. WHO를 중심으로 온 세계가 코로나19 백신개발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 백신이 개발되면 또 다른 질병이 발생한다. 하나님은 근원적인 백신을 바울을 통하여 말씀하셨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1:17).”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1서 1:7).” “이와 같이 주께서도 복음 전하는 자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명하셨느니라(고전9:14).” 코로나19가 그렇게도 무서운가? 영혼을 죽이는 죄의 바이러스가 더 무서운 것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를 영원히 살리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백신을 널리 전파하는 복음 전파를 통해 생명을 살리는 ‘여호와 라파’를 노래하자.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마10:28).”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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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임중 칼럼
    2020-07-14
  • [성서연구] 주 예수를 믿으라
    코로나19는 익숙하던 많은 것을 빼앗았습니다. 예배당에서 모이지 못하니 예배당이 없는 것과 비슷합니다. 구역, 남녀선교회, 교회학교, 소그룹 등이 중단되었습니다. 이 상황은 초대교회 당시와 흡사합니다. 초대교회도 예배당, 남녀선교회, 노회, 총회도 없었습니다. 평소에 초대교회로 돌아가야 한다거나 초대교회에서 배워야 한다고 말해 왔는데, 지금이야말로 초대교회를 배울 최적의 기회입니다. 코로나19 상황에서 초대교회의 신앙을 깨닫는다면, 코로나19를 축복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본문은 초대교회의 신앙을 이해하는 통찰력을 제공합니다. 바울과 실라는 빌립보에서 점치는 귀신들린 여종을 온전하게 했는데, 이로 인해 매를 맞고 착고에 채워져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러나 이분들은 하나님을 원망하기는커녕 밤중에 일어나 찬송하고 기도했는데, 그 밤에 엄청난 일이 일어났습니다. 지진이 일어나 터가 흔들리고 옥문이 열리고 착고가 벗겨졌습니다.(행 16:25-26) 간수는 죄수들이 도망한 줄 알고 자결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바울과 실라는 그대로 있었습니다. 이들에게 마음으로 굴복한 간수는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라고 물었고, 바울과 실라는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고 대답했습니다.(행 16:31) 이 대답은 초대교회 신앙의 핵심입니다. 모든 것은 주 예수님을 믿는 데서 출발합니다. 기독교 신앙이란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성도입니다. 교회란 주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성령님 안에서 사랑과 기도로 연결된 공동체입니다. 초대교회 선배들은 예배당도, 교회 조직도 없었지만, 각자의 자리에서 예수님을 구주로 믿었습니다. 그 믿음으로 기도했고, 전도했고, 말씀을 따라 살려고 힘썼고,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지키려고 순교까지 했습니다. 이게 초대교회의 신앙이었습니다. 당시의 예수님을 믿는 신앙은 단순했지만, 강력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주 예수님을 믿는 신앙>이 흐려지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은 조직을 만들고, 거기 사람을 배치하는 일에 집중했습니다. 조직에 들어가 일을 많이 하면 믿음이 좋다고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주 예수님을 믿는 것보다 거기 붙어있는 군더더기가 더 중요해지는 왜곡이 일어났습니다. 이런 일은 오늘날 더 극심합니다. 목사를 소개할 때도 몇 대째 믿는 가정 출신인지, 학벌은 어땠는지, 신학교 성적은 어땠는지, 그 후 어느 교회에서, 어떤 사역을 했는지를 장황하게 소개할 뿐, 얼마나 주님을 간절히 믿고 사랑하는지, 말씀대로 살고자 노력하는지 등은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으세요>는 말 대신 <교회에 다니세요>라고 말하게 되었습니다. 이러다 보니 교회는 다니는데, 예수님은 안 믿는 사람이 생겼습니다. 이런 이들이 세속적 사고로 교회 일을 하니 교회가 타락하고 세속화되는 비극이 생깁니다. 기억합시다. 기독교 신앙은 주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코로나 때문에 예배당에 자주 모이지 못해도, 아니 전혀 모이지 못해도 얼마든지 예수님을 믿을 수 있습니다. 코로나 시대는 본질보다는 조직과 제도에 매였던 것에서 벗어나 예수님께 더 집중할 기회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그 믿음에 근거하여 가정에서, 직장에서, 이웃 사이에서 예수님의 뜻대로 사는 진정한 신앙을 훈련할 기회입니다. 이렇게 되면 신앙 생태계가 완전히 달라질 것입니다. 지금까지 중요하게 여겼던 것은 주변으로 밀려날 것이며, 지금까지 흐릿해졌던 주 예수님을 믿는 신앙은 또렷해질 것입니다. 우리는 교회에 다니기 때문에 성도인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성도입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이 단순하고도 분명한 메시지를 다시 새길 기회입니다. 코로나19 시대를 통하여 한국교회가 정말 초대교회를 닮게 되길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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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7-14
  • [통일칼럼] 독재자들의 평화협정
    ‘뮌헨의 교훈’(Lesson of Munich)이라는 국제정치학 용어가 있다. 독재자들은 평화협정 체결을 침략전술의 하나로 이용한다는 의미이다. 대화주의자 영국 체임벌린수상은, 체코를 침공한 히틀러에게 평화협상을 제안했다. 히틀러는 즉시 응답했고, 프랑스의 에두아르 달라디에 총리, 이탈리아의 베니토 무솔리니 총리, 체임벌린 영국총리 등 4개국 대표는 독일 뮌헨에 서 역사적 평화협정에 서명했다. 1938년 9월30일, 체임벌린 총리는 협정문을 흔들면서 “앞으로 유럽에서 전쟁은 없다. 우리시대의 평화가 도래했다”고 선언했다. 체임벌린은 대화를 통해 유럽을 전쟁의 위기에서 구해낸 영웅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그러나 6개월 후인 1939년 3월, 히틀러는 체코전역을, 9월에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뮌헨평화협정문을 휴지조각으로 만들어 버렸다. 1973년 월맹(북베트남)은 미국에 평화협정을 제안했고, 미국이 이를 받아들여 1월27일 파리평화협정이 체결됬다. 그러나 1974년에 미군이 철수하자 월맹은 곧바로 남베트남을 침공했고, 1975년 4월30일에 대통령궁 철문을 탱크로 밀고 들어가 남베트남을 공산화했다. 파리평화협정 후 벌어진 일이다. 파리평화협정 체결 당시 미국무장관이었던 키신저는 월맹군의 말을 믿고 평화협정체결 한 것을 가장 뼈져리게 후회한다고 훗날 술회했다. 최근 공개된 러시아 비밀문서에 의하면, 김일성은 1950년 6.25 남침하면서 세 단계 전략을 세웠다고 한다. 첫 번째 단계가 38선 인근에 병력을 우선적으로 집결시키는 것, 두 번째단계가 6월7일, 평화통일호소문 발표와 동시에 남북한 총선거 제안이다. 광복 5주년을 기념하여 8월5일부터 8일까지 남북한 동시 총선거를 실시하여 최고입법기관회의를 구성하고, 8월15일에 서울에서 첫 회의를 갖자고 했다. 세 번째 단계로, 이것을 의논하느라 어수선해진 틈을 타서 남한을 기습공격을 한다는 전략이다. 김일성은 평화통일을 호소한 뒤에 무력으로 남한을 침략한 것이다. 그 역시 독재자들의 수법을 그대로 답습한 것이다. 처칠은 전체주의 독재자들과 물질제공 협상이나, 굴복 혹은 그들과 평화협정을 맺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은 없다고 했다. 역사는 이를 증명했다. 최근, 미국 트럼프대통령은 김정은과 평화를 위한 대화에 응할 의사가 있다고 밝혔다. 김정은도 속내로는 체제보장과 경제적 지원을 전제로 미국과 정전협정 혹은 평화협정을 맺고 싶어한다. 우리정부도 최근 북한 대화론자들을 국정원장, 통일부장관과, 국가안보실장 등으로 지명하면서 북한과 평화(정전)협정을 위한 대화를 이어가겠다고 선언했다. 북한은 아직도 김일성의 유훈을 헌법상 그들의 국가이념으로 받들고 있는 김일성주의 독재국가이다. 뮌헨의 교훈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한국교회와 교회지도자들도 우리가 원하는 평화통일이 누구를 위한 통일이어야 하는가를 매우 진지하게 고민하면서, 정부의 동향을 주시해야만 한다. 자유와 민주주의가 없는 사회에서는 신앙의 자유도, 복음전도의 자유도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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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7-14
  • [시사칼럼] 창과 방패 같은 차별 금지
    춘추전국시대 초(楚)나라에 한 장사꾼이 살았습니다. 한 날은 그가 팔던 방패를 소개하면서 하도 단단하게 만들어져 천하에 무엇으로도 뚫을 수 없노라 했습니다. 뒤이어 같이 팔던 창 한 자루를 들고는 천하에 어떤 물건이라도 뚫지 못함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구경꾼 하나가 만일 그 창으로 그 방패를 찌르면 어떻게 되느냐고 묻자 답을 하지 못했다는 이야기가 중국 고전『한비자(韓非子)』에 전합니다. ‘모순(矛盾)’이라는 말이 여기서 유래했는데, 모(矛)란 창이요 순(盾)이란 방패를 가리키는 한자라서 그렇습니다. 이처럼 모순은 일견 보기에도 또한 듣기에도 서로 양립할 수 없는 두 가지 사실이나 의견이 공존하려 할 때 나타나는 비논리적 현상입니다. 모순 현상이 발생하면 특히 발화하는 사람이 주장하는 바가 설득력을 잃게 됩니다. 물론 모순의 성질을 일부러 이용하여 자기 의견의 타당성을 극적으로 배가시키려는 기법도 존재합니다. 아이러니(irony)와 패러독스(paradox)가 그러합니다. 그렇지 않을 경우라면 모순은 의견이나 주장에 아주 치명적인 요소로 작용할 때가 많습니다. 바이러스 사태가 장기화되고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면서, 이제는 ‘코로나 20’이라고 명명해도 어색하지 않을 상황이 되었습니다. 7월 8일 중앙방역대책본부는 세계보건기구(WHO)의 수장 후보로까지 거론되고 있는 정은경 질병관리본부장을 통해 교회를 향한 담화문을 발표했습니다. “7월 10일 18시부터 정규 예배 외 모임 · 행사 금지, 단체 식사 금지, 상시 마스크 착용 등 방역 수칙 준수를 의무화한다... 교회 내에서도 찬송 자제, 통성 기도 및 큰 소리 금지, 음식 금지, 마스크 착용과 거리두기의 수칙을 준수해야 한다... 이를 어길 경우 벌금 및 집합금지명령을 발할 수 있다.” 당장 교계는 반발하고 나섰습니다. 사회적 안전을 위한 취지를 십분 공감하더라도 왜 교회만 특별한 제한과 제재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반발이었습니다. ‘역차별(reverse discrimination)’을 거론하는 분도 있지만 취약 계층에 대한 ‘적극적 우대조치(affirmative action)’ 때문에 초래되는 불이익이라 볼 수는 없기 때문에, 정확하게 정의하자면 ‘개신교에 대한 차별’이라는 용어가 보다 적합합니다. 그런데 최근 이른바 ‘차별금지법안’이 국회의원 10인의 발의로 다시 등장하면서 이를 둘러싼 교계의 반발이 다시 격화되었습니다. “다시”란 말을 반복하는 이유는 이 문제가 지난 2017년부터 국회 제정 법률뿐만 아니라 지방자치단체 제정 조례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다투어져 왔기 때문입니다. 교계에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초대형 교회 목회자들 몇 분은 설교를 통해 차별금지법 반대 의견을 피력하고 성도들에게도 이에 동참해줄 것을 호소하기도 했습니다. 21대 국회 개원 이후 ‘차별금지법 반대’가 첫 번째 국민 청원이 되면서 벌써 10만 명 이상이 찬성 버튼을 누른 상태입니다. 하나님의 창조 질서에 반하는 내용이 있을 때, 아무리 법률의 이름으로 선다고 할지라도 그리스도인이라면 반대하는 목소리를 내야 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하지만 법안의 이름이 ‘차별금지법’입니다. 이런 말이 인터넷에 떠돌아다닙니다. “우리는 차별주의자가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차별금지법은 반대한다.” 두 문장은 상호 모순이 아닌가, 비아냥거리는 사람들이 올려놓은 우스갯소리랍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형이상학(Metaphysics)』에서 ‘제일학문의 공리’로 모순율을 제시하며, “어떤 것이 동시에 존재하며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어떤 것이 동일한 것에 동일한 관계에서 동시에 속하며 속하지 않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라 했습니다. 우리가 어떤 이유를 달고 아무리 그럴 듯한 설명을 해도, A의 부정의 부정은 A일 수밖에 없다고 여기는 현실 앞에 서 있습니다. 또한 지금 교회에 대한 차별을 반대하면서, 동시에 차별금지법에 대해 반대하는 주장은 설득력을 잃어버리거나 타당성을 희석시킬 가능성이 다분합니다. 성경은 차별을 조장하는 책이 아니지 않습니까? 우리 주님은 몸소 십자가를 지시고 중간에 막힌 담을 허무셨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도 교회가 차별을 일삼는 집단으로, 교인들이 차별주의자로 여김 받는 낙인 효과가 발생할까봐 우려됩니다. 그 어떤 때보다 성경적 지혜가 필요하며, 어젠다(agenda)의 재정비와 홍보전의 역량 강화가 절실한 시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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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7-14
  • 코로나19 이후, 새로운 미래가 온다
    엘 고어 전 미국부통령의 수석대변자이자 미래학자 관련 전문가인 다니엘 핑크의 베스트셀러인 ‘새로운 미래가 온다’(A Whole New Mind)에서 앞으로의 미래는 정보 중심 사회에서 감성의 시대로 변화한다고 말했다. 그가 말하는 시대의 변화는 예술적 감성적 아름다움을 창출하는 능력, 공감 능력, 통찰력 등 우뇌능력이 더욱 중시되는 관념과 시대가 될 것이라고 한다. 이전 산업화, 정보화 시대에는 암기력, 논리적, 분석력 등이 좌 뇌혈관 인간들이 인정을 받았다. 그러나 앞으로는 감성의 때에는 우뇌능력이 인재들이 사회를 이끌어 갈 것이라 말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미래 감성 중심의 사회에 리더가 되려면 이런 능력을 갖추어야 된다고 한다. 감동을 주는 리더, 눈물 나는 트로트 가수들의 가사에 귀를 기울이는 시대가 되고 있다. 요즘 대세를 이루고 있는 미디어 유튜브 설교 쇼핑하는 한국교회 신자들이 참된 신앙생활이 아니라고 정의를 내린다. 하나님은 코로나19 사태를 통해 한국교회에 주는 메시지가 무엇일까? 바로 참된 교회 예배의 본질을 회복하는 것이다. 외형적인 성장과 맘몬주의에 빠져 있는 한국교회를 향한 준엄한 경고라고 할 수 있다. 예수께서 “내 아버지 집은 장사 하는 집으로 만들지 말라”(요2:16)고 하신 것을 기억해야 된다. 온갖 물건이며 기업도 아니고 여전도회나 마치 시장 거리 장사꾼으로 둔갑하듯 마구 물건을 맡기고 팔고 이것을 가지고 선교사의 미명아래 장사하는 것 하나님이 받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제 코로나19 사태가 주는 경고는 “신이 내린 인류 생존의 마지막 시험”이라는 눈으로 바라 볼 때 근본적으로 그리스도교 운명과 뺄 수 없이 얹혀 있다고 홍순원 목사(기장 총회 영성훈련원 원장)가 쓴 “신이 내린 인류의 마지막 생존 시험”이란 강좌에서 그는 한국교회가 현실의 세속 안에 새 인간과 새 세계를 출현시킬 수 있는 구체적인 신앙의 공동체가 될 수 있느냐? 퇴행성 종교가 아니라 ‘생명종교’를 체험하고 훈련하고 누리는 ‘생활 공동체’가 될 수 있는가? 시험하는 시기인가를 본다. 최근 기장 목회자협의회(상임회장 이준 목사)가 발간한 “코로나19, 무엇을 허물고 무엇을 세우나?”라는 명제로 강의한 내용의 일부에서 한 말이다. 일단 그는 현실을 진단하고 경제적으로 자립할 수 없는 작은 교회가 작은 것이 문제가 아니라 많은 작은 교회들이 비성서적이고 비복음적인데 문제가 있다고 말하면서 신천지는 아닐지라도 못지않게 반지성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다는데 문제를 지적하면서 무인가 신학교, 사이비 교역자들의 구성과 난무하듯 들어서는 교회, 이런 것들을 한국교회가 과감히 식별하여 도려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아주 건강하고 복음적인 작은 교회도 있는데도 문을 닫게 된 미자립교회에 교회나 상가임대 교회도 많다고 하고 이런 경우 힘을 모아 살려야 한다고 했다. 반면에 큰 교회나 자립하는 교회는 어떠할까? 지금의 모습으로 있는 한 문을 닫고 있는 작은 교회 운영과 같다고 했다. 소위 한기총이 아니더라도 반지성적 토대에서 정치적으로 대중 앞에 앞장 서는 복음주의를 표방하는 교회들이 대부분 한국교회라고 힐난하게 비판했다. 그러면 전혀 희망은 없는가? 단지 살아남으려는 몸부림에 의해서가 아니라 교회 원래의 본질을 회복하고 새로이 복음의 생명을 실현할 변화를 일려고 노력할 때만이 코로나19 이후에도 살아남을 수 있다는 희망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다. 그는 또 에릭 프로이센이 말했듯이 새로운 사회 실현 가능성을 물으면 희망의 조직의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가 현재의 사회 체제에 대하여 불만의 표시가 늘어나는 것과 많은 사람들이 점점 세기의 불안을 감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아울러 이러다가 자기도 교회도 곧 사라진다. 내가 불안을 느끼면서 인류의 지구를 보전하지 못한 그 책임을 하나님은 교회에 물을 것이다는 레위기26:30~35말씀처럼 너희 땅은 쑽밭이 되리라 나는 칼을 빼들고 너희를 쫓아 이 민족사에 흩어 버리리라는 경고를 들어야 한다. 코로나19로 세계적으로 사람의 활동이 멈추자 대기가 단번에 맑아졌고 이산화탄소 탄소 배출량이 두어달 사이에 6%나 줄었다는 보고를 본 적 있다. 자연재앙도 인간성 상실에서 인간이 만든 원인 제공라는 뜻이다. 이제 바이러스라는 미세한 생물이 인간에게 보복하여 지금 코로나19로 50만명(6월 현재)이 사망하고 미국은 하루에 5만명이 확진되는 이 지구촌의 재앙은 당연히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에덴동산에서 쫓겨간 제2의 아담이 될 것을 예언하는 징조다. 이제 우리 예수를 믿는 사람만이라도 하나님께 회개하고 모세에게 이르신 언약의 계명을 지킬 때만이 이 지구촌은 바이러스로부터 해방될 것임을 인식했으면 하는 바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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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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