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8(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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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젊은 시절 참 많이 울었다. 불신 가정에서 쫓겨나 겨울 눈보라 속을 걸으며 손등으로 눈물을 훔쳤다. 가난한 신학생이라 양복이 없어 설교를 할 수 없을 때도 채플실 바닥에 엎드려 하염없이 울었다. 서울에 올라와 가락동에서 개척을 한 후에도 토요일이면 설교연습을 했다. 아무리 노력을 해도 억센 전라도 사투리가 고쳐지지 않는 것이다. 설교 원고를 교정하고 다섯 번에서 일곱 번을 강단에 서서 소리 내어 연습했다. 내일 누가 올지도 모르는 절망적인 상황이었지만 그래도 눈물을 흘리며 설교연습을 했다.
 뿐만 아니라 전도지를 들고 동네를 누비며 눈물로 전도하고 다녔다. 그때는 사람이 너무나 그리웠다. 오죽하면 토요일 저녁에 빈 의자를 붙잡고 하염없이 울면서 기도한 적이 있다. “주님, 이 빈 의자에 내일 사람을 앉혀 주세요. 지나가는 거지가 되었든, 넝마주의가 되었든 사람을 앉혀 주세요.”그 눈물은 결코 비관과 절망의 눈물이 아니었다. 그 눈물은 도전과 희망의 눈물이었으며 내 영혼을 살리는 꽃씨가 되었다. 영혼을 사르는 불덩이가 되었다. 아니, 이 땅의 불덩이를 넘어 절망과 어둠의 밤을 밝히는 꿈의 별이었다.
 야곱도 요셉도 눈물로 꿈을 성취했다. 이사야와 예레미야 등 구약의 선지자들도 조국을 위해 피눈물을 쏟으며 울었다. 예수님도 감람산 언덕에서 훗날 예루살렘의 멸망을 바라다보며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하며 우셨다. 예수님은 그 당시 정치지도자들과 종교지도자들의 타락으로 인해 이스라엘이 당해야 할 처참한 심판을 예견하며 우셨다. 예루살렘은 무너졌지만 주님의 눈물은 마침내 새 이스라엘을 이루었지 않았던가.
 젊은이들이 꿈을 잃고 방황하는 비극적 시대다. 직장을 잃은 가장들이 가족을 책임지지 못한 죄책감에 스스로 목숨을 끊는 절망과 상실의 시대다. 그러나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꿈은 뜨거운 눈물에 젖을 때 빛이 난다는 사실을. 눈물을 적시지 않으면 꿈은 빛나지 않는다. 눈물이 무엇일까? 아픔과 통증, 고독과 가난, 치를 떨게 하는 외로움의 젖은 고백이 아닐까. 꿈은 아픔을 동반한다. 시련과 역경의 채찍에 맞아야 꿈틀거리며 깨어난다. 그러므로 힘들고 어려워도 눈물을 쏟아야 한다.
 인생을 쉽게 포기하는 사람들을 보면 너무 마음 아프다. 인기 연예인, 정치인, 관료, 학자, 사업가 등 우리 사회의 지도층들마저도 고난을 이겨내지 못하고 스스로 삶의 꽃을 꺾어버린다. 차라리 울어야 한다. 그냥 울기만 해도 다시 꿈을 꿀 수 있다. 새 희망이 솟아날 수 있다. 삶이 너무 고통스러울 때, 고난의 산이 첩첩산중으로 막혀 도피할 수 없을 때 그저 하염없이 눈물을 쏟아보면 어떨까. 울고 울다 밤이 깃들고 산도 강도 모두 잠들 때 까지 울고 또 울어보면 어떨까.
 산천도 고요하고 밤의 적막에 휩싸였을 때 그 깊은 슬픔의 끝에서 가느다란 삶의 희망의 실타래를 붙잡을 수 있을지도. 더 나아가 나만을 위한 눈물이 아니라 아픈 시대를 위해서 울고, 타인의 상처를 보듬고 울고, 미래의 역사를 바라보며 울고 또 울어본다면 더 맑은 영혼의 정화를 느낄 수 있으리라.
 울어야 살 수 있다. 울어야 희망이 있다. 차디찬 새벽 도로에서 쓰러져 잠든 청춘이여, 인생을 비관하고 절망에 빠진 상처 받은 이들이여, 누군가 당신을 위하여 울고 있다는 생각을 해 보았는지. 상처 받은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않는 그 분의 사랑이 당신을 지키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지. 도시의 밤은 냉혹하고 어둠에 쌓여도 콘크리트 벽에 사랑의 이름을 새겨 넣는 이가 있다. 잠긴 창문 너머로 반짝이는 별들이 당신을 향한 누군가의 눈물이라면, 가을 강가의 은빛 갈대가 당신을 향해 손을 내미는 그 분의 사랑의 손길이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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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강석 칼럼] 꿈은 눈물에 젖을 때 빛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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