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비스는 그의 편지에서 전해들은 바를 이윙 목사에게 소개하고 있는데, “그들의 말에 따르면 서울 4대문 안에는 15만 명의 사람이 살고 있고, 인접 외곽 지역에도 비슷한 숫자가 살고 있다고 말합니다. 서울은, 일부러 접근이 어려운 곳에 위치하려는 듯이 여러 산들 사이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하지만 전선이 도시를 간통하여 지나가고 있습니다. 북쪽으로는 일본 영사관 건물이 있고 그 옆에는 일본인들이 전적으로 관리하는 우체국이 있습니다. 이곳에는 한국 우표가 없기 때문에 일본 우표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중국 대사관 건물이 있습니다. 길 건너편에는 영국 국기인 유니온 잭과 그 옆에는 미국 국기가 펄럭이고 있고, 그 옆에는 러시아 국기도 보였습니다. 마을 북동쪽 약간 떨어진 곳에는 2층으로 된 커다란 벽돌 건물로 지어진 로마 가톨릭 선교회가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데이비스는 10월 8일 월세 15원을 지불하기로 하고 집을 빌리게 되었는데, 9일에는 제물포에서 부친 짐이 도착했다. 이제 보다 안정적으로 한국생활을 시작하게 되는데, 서울의 주변 환경에 대한 편지 내용은 이러했다. “여기에는 제물포에 있는 중국인 사업가가 운영하는 가게의 지부인 커다란 상점이 이미 들어와 있는데, 각종 외제 물건을 살 수 있습니다. 이곳에서는 스티븐회사의 검정-파랑 잉크를 위시하여 미제 난로까지 다 있습니다. 편지 한 통으로 이 마을의 전체적인 모습을 설명하기가 아주 어렵습니다. 잘못된 인상을 전할 가능성이 많으니까요. 사실 이곳의 상황을 바르게 설명하기가 어렵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기이한 지붕 모양을 한 집 앞에는 깔끔하게 관리된 잔디밭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집 앞문 밖으로 나가 길을 따라 걸을 때는 강력한 소독약을 살포했으면 하는 생각이 듭니다. 불결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리고, 한국에서 쓴 첫 편지는 이렇게 정리되고 있다. “그 동안 꽤 많은 한국인 크리스천을 만나기는 했지만 제가 많은 것을 말씀드릴 만큼의 신자들은 만나지 못했습니다. 저는 이곳에서 아이들이 영어찬송, 예컨대, ‘예수사랑 하심은...’을 노래하는 것을 들었는데, 여행에서 돌아와 저녁 식사 전 잠시 쉬는 동안에 ‘우리는 약하나 예수 권세 많도다.’하는 노래가 들립니다. 저를 향한 뭔가 격려의 메시지로 들립니다. 저는 스크랜톤 부인의 어린 손주들이 노래 부르는 줄로 생각했는데, 돌아보니 감리교 선교부의 기숙학교 한국인 여아들이 부르는 노래였습니다. 이제 그만 써야겠습니다. 그리고 한국어 공부를 시작해야겠습니다. 우리를 위해 지속적으로 기도해 주기를 바라면서 이만 줄입니다. J. 헨리 데이비스.”
1889년 10월 5일 서울에 도착한 그는 언더우드와 가까이에 살면서 서로 교통하며 조선어 고부에 몰두했고, 5개월이 지난 1890년 3월 14일 서울을 떠나 부산으로 향하게 되지만 부산에 도착한 다음날인 1890년 4월 5일 부산에서 사망함으로 조선 땅을 밟은지 183일 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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