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펜젤러가 1885년 한국에 입국하기 전 일본에 잠시 체류하는 동안 박영효는 그에게 한국어를 가르쳐주고 한국선교를 준비하도록 배려해 준 일도 있었다. 이런 일련의 과정에서 박영효는 기독교를 접하게 되고 선교사들과 교류하게 된다. 이런 과정에서 박영효는 1907년 6월 망명생활을 청산하고 부산을 방문하게 되었을 때 어빈 집에 유하게 된 것이다. 말하자면 박영효는 기독교 신자가 되었고, 정치적으로 민감한 시기에 조선으로 돌아오면서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선교사인 어빈 집에 은밀하게 기거하게 된 것이다.
개화파 인사들의 기독교와의 접촉은 박영효의 경우만은 아니었다. 불교신자였던 김옥균도 서구문명의 수용을 위해 기독교와 접촉하고 기독교를 통한 개화를 갈망했다. 후일 김옥균은 일본의 청산학원 설립자인 맥클레이 선교사를 만나 한국선교를 호소해 후에 한국이 기독교를 수용하는 과정에서 적지 않은 도움을 주었다. 그는 장로교 목사인 야스카와(安川亨, ?-1908) 와도 가까이 지냈으며, 그에게 편지를 보내 “기독교 교리를 가르쳐 달라”고 부탁한 적도 있었다. 비록 갑신정변이 실패했지만 박영효 등 개화파 인사들은 한국의 선교의 장을 여는 데에 적지 않는 기여를 하게 된다. 박영효와 루미스와의 친분은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후에 박영효가 한국에 돌아가 다시 내각에 등용된 후 그가 헨리 루미스에게 다음과 같은 감사의 편지를 보냈다.
“존경하는 헨리 루미스 목사님, 나는 일본에서 13년을 보냈습니다. 내가 이 여러 해 동안 안전할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당신의 친절한 보호덕택이었으며, 나는 어떤 말로도 나의 감사를 표현 수 없습니다. 최근 나는 나의 조국의 부름을 받고 돌아왔는데, 황제 폐하께서 나의 반역을 은혜롭게도 용서해 주셨고, 나를 이전 직책에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나는 천수(天壽)를 누려 왔으며, 이제 나는 눈물로 이에 대해 나의 주님께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개화 사상가이자 혁명가였던 박영효가 기독교계와 접촉했기에 그가 부산에 왔을 때 선교사 어빈 집에 일주일가량 기거하게 된 것이다. 후일 그는 3·1 만세 운동 당시 민족 지도자의 한 사람으로 서명을 요청받았으나 거절했고, 조선총독부에서도 그에게 3.1 운동의 진압이나 해체를 촉구하는 담화나 서신 작성을 의뢰하였으나 이 또한 거절하였다. 그런데 그가 기독교인이었던가에 대해서는 의문이다. 왜냐하면 1921년 11월에 경성에서 개최된 조선불교대회의 고문으로도 위촉된 일이 있고, 1925년에는 불교연합단체인 조선불교단이 설립되자 고문에 위촉되었다. 이점은 그가 불교도로 간주되고 있었음을 암시한다. 1931년 11월에는 단군신전봉찬회 고문에 추대된 일이 있고, 1932년 6월에는 공자의 도를 되살리고 기독교를 배척한다는 취지로 조직된 유림단체 대성원에 가입하여 고문으로 추대된 일이 있기때문이다. 1933년 10월에는 조선신궁봉찬회 발기인으로 참여하여 고문에 임명되었고, 경성부에서 불교계가 개최한 이토 히로부미 25주기 추도제에 참석하기도했다. 종교적 유존과 개화와 친일의 길을 거듭하던 그는 78년의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하고 1939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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