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8(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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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21일 밤, 나는 잠을 설쳤다. 어린 시절 소풍을 가기 전날 밤처럼 말이다. 다음 날, 단국대에서 명예문학박사 학위 수여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논문을 써서 두 개의 석사학위와 이어 목회학박사를 받았고 모교인 광신대학교에서 명예신학박사를, 백석대학교에서는 명예철학박사를 받았다. 그런데 이번 명예문학박사는 정말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였다. 목회자가 명예문학박사를 받는다는 것은 거의 없는 일이기에 총장님 옆에 앉았던 나는 겉으로는 웃고 있었지만 정말 눈물이 나려고 하였다.
나의 순서가 오기까지 많은 졸업자들의 석박사 학위 수여식이 있었다. 논문을 쓰느라 그들 모두가 얼마나 수고를 하였겠는가? 그들의 학위 수여식 중 나의 머릿속에는 지나온 삶의 여정이 스쳐갔다. 나는 어릴 때부터 문학적, 예술적 감성과 상상력이 컸던 것 같다. 라디오 연속극을 들으면 상상의 나래를 펴고 꿈속으로 날아갔고 동화책이나 소설책을 읽으면 그 이야기가 펼쳐지는 문학적, 예술적 사유를 꿈속으로까지 끌고 갔다. 만약 내가 일반대학교를 갔더라면 국문과나 영문과를 갔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하나님의 거룩한 소명을 받으면서부터 오랫동안 문학적 사유를 중단하고 절필을 하였다. 오로지 신앙의 투혼을 불사르며 영적 사유에 정진을 하였다. 그러다가 어느 정도 목회의 길을 다지게 된 후, 다시 문학적 향취를 회상하며 펜을 들고 글을 쓰며 시를 쓰기 시작했다. 문학을 전공하지 못한 사람이 글을 쓰기 때문에 그것은 독학이요 습작이었을 것이다. 그래서였는지 나의 글은 붉은 고원에서 고독하게 쓰여져야 했다. 그렇게 쓰여진 글은 저 고원의 계곡 아래로 내동댕이쳐지기도 했다. 그럼에도 수많은 산간 협곡을 지나고 오지를 넘어 나의 길, 나의 세계를 개척해 나갔다. 목사이기에 설교만 열심히 하면 될 걸, 왜 그토록 글쓰기에 도전하고 문학의 지평을 열고자 했는지...
그러나 그런 문학적 목마름과 갈망 때문에 부지런히 시를 쓰고 책도 냈다. 뿐만 아니라 여러 메이저 일간지에 글쓰기 도전도 하였다. 하지만 목회자가 비난당하던 시대에 그 자리에 오르기 위해서는 깊은 계곡 아래에 떨어져야 하는 절망도 경험해야 했다. 그러나 나는 산기슭이나 계곡의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썩은 고기만을 찾아다니는 하이에나가 되고 싶지 않았다. 저 산정 높이 올라가 굶어서 얼어 죽더라도 도전에 살고 죽는, 조용필의 킬리만자로의 표범이 되고 싶었다. 바람처럼 왔다가 이슬처럼 갈 순 없지 않는가. 문학적 사유와 잠재력을 갖고 태어난 사람이 그래도 내가 쓴 글의 흔적일랑 남겨두고 싶었다.
마침내 나는 마음으로 잠시 오른 킬리만자로의 정상에서 여름의 푸른 강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여름 강을 넘어 푸른 초원을 만날 수 있었다. 그래서 목회자로는 유일하게 주요 일간지에 글을 쓰고 각종 문학상을 받는 꿈같은 일을 누리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목회자가 거의 받지 않는 명예문학박사 학위를 받게 되었다. 그러니 그 자리에서 태연한 척 웃고 있어도 온 몸이 긴장되고 눈물이 날 수 밖에 없었다.
나는 답사를 어떻게 했는지도 모르겠다. 기억나는 것은 나의 진심이고 울먹이는 가슴이었다. 베드로는 선포적 사역을 많이 하였지만 글쓰기에는 부족하였다. 그러나 바울은 글을 많이 써서 그의 사후에 더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칼빈도 루터보다 많은 글을 남겨서 더 큰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 이제 나의 글에 삶의 진액을 담고 싶다. 그 글로 세상의 그늘을 지워나가고 싶다. 나의 글이 세상에 꿈이 되게 하고 싶다. 아니, 나의 글이 작은 별 하나가 되어서 어둔 세상을 반짝이며 복음 선교에 한 줌의 중보가 되고 교회의 이미지를 격상시키는 별빛이 되기를 원한다. 그러다가 조용필이 불렀던 저 킬리만자로의 표범처럼 가죽을 남기고 죽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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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강석칼럼] 웃고 있어도 눈물이 나는 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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