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9(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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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최대의 시인 롱펠로우는 쓰라린 인생의 경험자였다. 그의 나이 75세로 임종이 가까웠을 때 한 기자가 물었다.󰡒선생님은 두 부인의 사별뿐 아니라 많은 고통을 겪으며 살아오신 것으로 압니다. 그런 환경에서도 어떻게 그토록 아름다운 시들을 쓸 수가 있었습니까?󰡓이에 롱펠로우는 마당에 보이는 사과나무를 가리키며 이렇게 말했다.󰡒저 나무가 나의 스승이었습니다. 저 사과나무는 몹시 늙었지만 해마다 꽃이 피고 열매가 열립니다. 옛 가지에서 새 가지가 조금씩 나오기 때문입니다. 나도 생명의 주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새 생명을 계속 공급받아 인생의 새로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으며 살아왔습니다. 그렇다. 비단 롱펠로우 뿐만 아니라 생명과 부활이 되신 그리스도 안에 사는 사람은 날마다 그 삶이 새로워지고 풍성해진다. 부활의 세계는 지칠 줄 모르는 생명의 세계다. 그래서 부활 신앙을 가진 그리스도인의 삶을 ‘더 좋은 삶을 위한 거룩한 몸짓’이라 하는 것이다. 부활의 계절 4월이 가면 한층 성숙해진 아름다운 5월이 자연을 통해 우리 삶의 자리를 더욱 새롭게 한다. 5월은 차오르는 만물의 생명력이 보다 강하고 행복과 감사가 삶에 더욱 충일해지는 느낌이다. 이 기운의 5월을 가정의 달이라 명명하는 것에서도 헤아릴 수 있는 축복의 때이다. 이런 5월의 첫째주일은 어린이주일로, 둘째주일은 어버이주일, 그리고 셋째 넷째 주일은 각각 청년주일과 가정주일로 지킨다. 명명되어지는 주일 이름들 자체만으로도 행복이고 감동이며 생명이다. 그래서 5월을 가정의 달이라 한다. 모든 ‘교회가 가정 같은 교회, 교회 같은 가정’이라는 말을 상용한다. 그것은 근원적으로 가정과 교회는 행복하고 아름다운 지고의 공통분모를 갖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하나님은 사도바울을 통하여 에베소에 보내는 편지에서 이 아름다운 관계를 말씀하셨다. 결혼이라는 제도와 가정이라는 기관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최고의 선물이다. 가정은 사회의 가장 작은 집단이며 인간은 이 최소 집단에서 사회생활에 필요한 기본을 습득하며 훈련받는다. 가정에서 올바른 교육을 받게 될 때 그는 건전한 정신을 가지고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서 온전한 삶을 영위하게 된다. 우리 사회는 이와 같이 가정교육이 있고 학교 교육이 있으며 사회 교육이 있다. 그럼에도 우리 아이들은 모든 부모가 원하는 아이들로 자라나지 못하고 있음에 모두들 걱정하며 부모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숙고한다. 에릭슨(Erikson)은 “부모가 되고자 하는 것은 인간의 성숙과정의 일부”라고 했다. 그러나 성경은 ‘부모’란 거룩한 사역으로써 “자식은 여호와의 주신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로다(시127:3).”라고 깨우치고 있다. 그렇다. 자식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기업으로써 부모에게 있어 최고의 재산이요 유산이며 유업이다. 그런데 지금 가정에서 부모의 성경적 역할이 온전히 시행되고 있는가?  칼빈은 말하기를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하나님의 자녀는 교회라 불리는 어머니 품에서 자라나야 한다.”고 했다. 초대 교회의 유명한 교부 중 한 사람인 키프리안(Cyprian)은 “교회를 당신의 어머니로 가지지 않는 한 하나님을 당신의 아버지로 가질 수 없다.”고 했다. 이 말은 교회의 본질과 능력을 아주 잘 표현한 말이다. 즉 성도들은 교회를 어머니 품으로 이해하고 교회는 성도들을 어머니처럼 품어야 하는 양면을 가장 적절하게 표현한 말이다. 한국의 행복한 가정은 3가지 내용적인 요소를 갖고 있었다. 김홍도의 <자리 짜기> 명화에도 담겨 있는 내용으로써 첫째는 아이의 글 읽는 소리요 둘째는 어머니의 물레 돌리는 소리, 그리고 셋째는 아버지의 자리 짜는 소리가 그것이다. 이는 가족 구성원이 자기 본분에 맞는 삶을 살아가는 가정 내의 질서가 조화를 이루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곧 위치질서, 역할질서, 관계질서를 통한 조화를 이루는 가정을 행복한 가정이라고 하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오늘날 우리네 가정에서는 이와 같은 행복이 사라지고 있다. 달리 표현하면 가족 구성원들이 자기 자리에서 자기 몫을 잘 감당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가정이 어둠 내린 저녁 등불 꺼진 창 같은 상황이 되어가는 것을 본다. 그런 가정이라면 교회를 ‘가정 같은 교회’라 할 수 없고, 교회가 성령의 불이 꺼진 상황이라면 ‘교회 같은 가정’이라는 말 또한 사용할 수 없다. 생각만 해도 가슴이 떨릴 이야기다. 세상에서 지친 영혼들을 어머니의 마음으로 품어주는 곳이 교회이다. 때론 속상할 일들이 많지만 그래도 끊임없이 용서하고 사랑하면서 어루만져주시는 어머니 손길 같은 곳, 힘들고 외롭고 아파 제단 앞에 엎디어 울 때 온전한 위로가 되는 어머니의 부드러운 손길, 그것을 경험할 수 있는 어머니 품 같은 곳이 교회가 아닌가. 그런 교회가 그리워진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는 황량한 사막 같고 기댈 곳 없는 허허 벌판 같은 냉기가 느껴지는 곳이 많다는 것이 아픔이다. 가정은 인간이 세상에 태어나 삶의 원동력을 얻으며 또 그 삶을 마무리하는 보금자리이다. 어머니는 어머니 자리로 돌아오고, 아버지는 아버지 자리에서 열심히 일하며 꾸린 가족의 보금자리, 그곳에서 아이들의 왁자한 웃음소리가 피어나는 곳, 서로가 서로를 품어 안는 행복이 있는 가정들로 모두가 회복되기를 소망한다. 나가 놀다가 언제라도 엄마! 하고 뛰어 들어오는 어린이주일의 교회, 노쇠하여 무기력한 부모일지라도 등에 없고 감사 찬송을 부르는 어버이주일의 교회, 몸은 생기(生氣)로, 머리는 총기(聰氣)며, 눈은 정기(精氣)요, 얼굴에는 화기(和氣)로, 마음에는 덕기(德氣)로 충만한 젊은이들이 꿈을 펼치는 청년주일의 교회, 평행감축(평안, 행복, 감사, 축복)을 노래하는 가정주일의 교회가 되어야 한다. 이 땅에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그렇게 되어야 한다. 그 때, 가정 같은 교회, 교회 같은 가정이 되어 ‘가정 같은 교회, 교회 같은 가정’이라는 상용어가 격에 맞는 행복지수의 척도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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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임중 칼럼]가정의 달 단상(斷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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