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서른, 잔치는 끝났다』(2015)로 유명한 여류 시인 최영미 씨가 세상을 발칵 뒤집어 놓은 시를 한 편 발표했습니다. “노털상 후보로 En의 이름이 거론될 때마다/ En이 노털상을 받는 일이 정말 일어난다면,/ 이 나라를 떠나야지/ 이런 더러운 세상에서 살고 싶지 않아// ‘괴물’을 키운 뒤에 어떻게/ 괴물을 잡아야 하나.” 매년 노벨상 후보로 거론될 정도로 지명도가 있는 원로 시인으로부터 본인이 받았던 성추행을 고발하면서 그녀는 그를 “괴물”이라고 지칭했습니다. 문단의 권력자일 뿐만 아니라 민주화 운동의 대부로도 불리고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그는, 사회적으로 잘 알려진 저명한 시인이었지만 그래도 연약한 여인으로서는 도저히 어찌 해 볼 도리가 없었던, 상습적으로 여자 후배들을 집적거렸지만 알고서도 다들 쉬쉬하며 입을 닫을 수밖에 없었던, 일종의 ‘괴물’이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연극계에도 파란(波瀾)이 일어났습니다. 익명의 여배우들이 연극계의 거장이라 불리는 한 인물을 지목하면서 역시 성추행 사실을 폭로했기 때문입니다. 지목을 당한 당사자가 기자회견을 자청하고 잘못된 성적 취향을 사과했지만 성폭행 사실은 부인하자 동료 연출가가 이렇게 입을 열고 말았습니다. “그곳은 지옥의 아수라였다. 당장이라도 도망가고 싶었다. 도저히 인간으로서 할 수 없는 일들이었다. 방금 전까지 사실이라고 말하던 선생님은 이제 내가 믿던 선생님이 아니었다. 괴물이었다.” 마치 벌거벗은 임금님처럼 어린 여인들에게 몹쓸 짓을 강요해도 그 누구 하나 본 대로 들은 대로 말할 수 없었던, 유사한 내용의 의혹이 일자 잠적해버린 대학교수요 모 극단의 대표인 그의 선배와 마찬가지로 그도 역시 ‘괴물’이었던 셈입니다. 연이어서 유명한 탤런트이자 연극영화과 교수로 재직하던 배우 역시 비슷한 과정을 통해 ‘괴물’이라는 달갑지 않은 호칭을 그것도 직계 제자로부터 들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어디 문단이나 연극영화계에만 국한되는 이야기겠습니까? 오랫동안 간헐적으로나마 알려져 왔던 대학 내부에는 그와 같은 ‘괴물’이 존재하지 않을까요? 심지어 종교계는 어떠합니까? 며칠 전 JMS 교주 정명석이 형기를 마치고 출소했습니다. 그에 비하면 전술한 원로 시인이나 연출가나 배우는 명함도 못 내밀 처지가 아닙니까? 이단이라서 그렇다고 한다면, 기독교센터를 차려놓고 상처 입은 청년들을 위로하고 상담하는 척하면서 상습적으로 농락한 젊은 목사 이야기는 어떻습니까? 유명한 초대형교회 담임으로 여학생들을 유린하고도 그 흔한 사과 한 번 없이 지금도 버젓이 정통 교단을 자처하며 목회하고 있는 중견 목사는 어떻습니까? 아니, 어쩌면 그런 괴물들을 알면서도 방관하고 그래서 또 다른 괴물들을 양산해 온 이 사회야말로, 토마스 홉스(Thomas Hobbes)가 말한 대로 “리워야단”(시 74:14; 사 27:1) 같은 존재가 아닐까요? 세상의 빛이 되어야 하건만 오히려 괴물이 되어버린다면 그런 목회자들이야말로 “괴물 중의 괴물”이 아니겠습니까?(딤전 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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