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1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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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 목사님들과 식당에 갔다. 손으로 만든 두부요린데 값도 싸고 맛깔스럽기로 소문난 집이라 정말 손님도 많았다. 3인분을 주문하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중에 L목사님이 식당직원을 불러 묻는다.
“이곳이 중국집입니까?” “예?” “아니, 음식주문한지 벌써 10분이나 지났는데, 배고프네요. 빨리 좀 주소.” “우리 집 손 두부는 정성을 담기때문에 시간이 좀 걸려요. 조금만 기다리세요.” 웃으면서 돌아가는 직원을 보고 한 마디 더 한다. “대충 대충 해 주소. 배고파 죽겠네.” 순간 내 얼굴에 열기가 올라왔다. 그 직원이 우리가 목사라는 것을 알든 모르든 친구의 말이 마음에 걸렸다. 그래서 한마디 건넸다. “이 사람아, 맛있는 음식일수록 기다리는 맛이 더하기 되는 것을 모르는가?” “그놈의 손 두부 한 그릇 먹는데 맛은 무슨 맛? 두부가 두부 맛이지 찌개 맛인가?” 주문한 음식을 받았지만 내 마음의 미각은 이미 두부 맛을 느낄 수가 없다. 아픈 추억이다. “대충 대충”, “두부가 두부 맛이지 찌개 맛인가?” 그 말은 아직도 여운으로 남아 생각이 날 때마다 죄지은 듯 내 얼굴이 화끈거리는 아픈 말이 되었다.
인생을 그렇게 대충 대충 살아서는 안 된다. 목회 또한 그렇게 해선 안 된다. 인간관계도 물론이다. 두부가 당연히 두부 맛이지만 같은 두부라도 어떻게 만드느냐에 따라 그 맛은 깊이가 다르다. 그래서 조금은 비싼 손 두부라도 일부러 먼 곳까지 그렇게 사람들이 몰려가는 것이다. 우리가 사는 시대를 초스피드시대, 인스턴트 시대, 광속의 시대라고들 한다. 그 증거로 우리네 삶의 문화는 조급증 자체가 되었고, 기다림이라는 아름다움이 사라지고 있다. 세계 여러 나라를 방문해 본 사람들은 알 것이다. 인터넷 속도가 대한민국만큼 빠른 나라가 없다는 것을. 우리는 더러 1~2초의 짧은 순간도 참지 못하고 화를 내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러니 빨리 빨리 문화의 주역으로 우리나라가 꼽히는 것도 이상한일이 아니다.
기다림이 훈련되지 않은 우리네다 보니 자판기 커피를 뽑을 때도 버튼을 누르고는 바로 허리를 숙여 커피가 내려지는 것을 들여다본다. 극장에선 영화가 끝나고 The End 자막이 오르기 전에 주섬주섬 일어들 난다. OST에는 관심도 없다. 교회 예배도 ‘설교가 짧아야 명 설교’라는 희한한 논리가 정설이 되어가는 현상이다. 그래서 임직식 행사에서 “설교와 축사는 짧게 하는 사람이 복이 있나니 다음에 또 초청을 받을 것요”라는 듣지 말아야 할 농담도 종종 듣는다.
아브라함도 기다림의 훈련 부족으로 하갈을통해 이스마엘을 얻었고, 그로인해 가문의 비극이 시작된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사울  왕도 사무엘을 기다리지 못하고 분향하여 하나님 앞에 범죄함으로 버림을 받는다. 그것은 한 국가의 불행이자 가문의 몰락으로까지 이어졌다. 쌀 한 톨을 얻기 위하여 이른 봄부터 씨를 뿌리며 가을을 기다리는 농부의 마음은 그래서 지고지순이다. 잉태한 여인이 출산의 고통을 알면서도 열 달을 기다리는 마음은 가없는 사랑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기다림에 익숙하지 않다.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그로부터 사랑받을 것도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 내가 사랑하는데 왜 나를 사랑하지 않느냐고 조급해 할 이유는 하나도 없다. 왜냐하면 내가 전심으로 사랑하면 그 사랑은 언젠가 더 큰 사랑으로 돌아오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입으로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그 사랑이 가슴에 담기지 않는다면 기다림의 행복을 알지 못한다. 사랑이 가슴에 담겨 있으면 기다림 그 자체도 행복이다. 옛 시절 누구나 한 번쯤은 해 보았을 것이다. 약수터 작은 옹당이 앞에 앉아 졸졸 흐르는 물을 한 바가지 떠내는 것. 그렇게 떠낸 샘이 채워지는 물을 바라보는 것, 그것이 행복이다. 그렇게 채워진 물을 한 바가지 담아 마시는 것이 약수(藥水)다.
내가 잘 아는 목사님은 평생을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바쳤다. 아낌없이 주는 나무처럼 모든 것을 다 바쳐 사역하고 은퇴를 했다. 목양 당시 더 없이 사랑한다며 더불어 울고 웃던 사람들이 말로 다 할 수 없는 일들을 만들어 목사님을 향해 돌을 들었다. 모질게 던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 돌을 내려놓는 사람도 있었다. 던진 돌에 맞아 온 몸이 터지고 상처투성이가 되었다. 세월이 깊어가면서 이마의 주름살도 깊어갔다. ‘돌에 맞을 이유가 하나도 없으면서 왜 그렇게 맞기만하고 침묵하느냐’고 오히려 주위 사람들이 아파했을 때 그 목사님은 빙그레 웃으며 ‘기다리는 행복’이라는 이해인 수녀님의 시를 소개했다.
<겨울 항아리에 담긴 포도주처럼 나의 언어를 익혀 내 복된 삶의 즙을 짜겠습니다. 밀물이 오면 썰물을, 꽃이 지면 열매를, 어둠이 구워내는 빛을 기다리며 살겠습니다.> 그리고 목사님은 눈시울을 붉히며 가슴 시린 한마디를 했다.“부활의 아침을 기다리는 것은 믿음 없인 안되지. 믿음 없이는 기다림도 없는 거야. 기다림의 신앙은 믿음이 바탕이 되어야 해요. 나는 우리 성도들을 믿어요.”
12월 대림절(待臨節)이 깊어가며 성탄을 기다린다. 어두운 이 세상을 빛으로 밝히는 메시아의 오심을 기다리는 대림절을 보내며 우리는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마음이 간절하다. 이 기다림은 지루한 불행이 아니라 행복이다. 이 기다림은 조급함이 아니라 느긋함이다. 이 기다림은 미움이 아니라 사랑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그렇게 기다리는 절기가 대림절이다. 이것이 기다림의 신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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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임중 칼럼] 기다림의 은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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