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17(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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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기 6장을 보면 하나님 앞에 범죄하여 미디안의 손에 떨어져 극심한 고통을 받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부르짖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영웅을 보내 자신들을 구원해 주시길 구하였습니다. 그러나 뜻밖에도 그들을 찾아온 사람은 영웅이 아니라 한 선지자였습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구원자 이전에 선지자를 먼저 보내셨을까요? 그것은 그들이 고통에 빠진 원인을 규명해 주기 위함이었습니다. 마치 의사가 환자를 치료하기 전에 먼저 병의 원인을 말해 주는 것과 같습니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병의 원인을 모르면 설령 질병에서 고침을 받는다 하더라도 똑같은 상황에 떨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께서 구원자보다 선지자를 먼저 보내신 이유였습니다. 그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의 고통은 그들이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이라고 정확하게 지적해 주었습니다.
대한민국 사회에서 한국교회의 사명은 선지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우리는 선지자의 사명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첫째, 선지자는 인기가 없기 때문입니다. 선지자는 상대방이 듣기 싫어해도 바른 말, 즉 하나님의 뜻을 해 주어야 합니다. 이 때 이스라엘의 구원자로 보냄 받은 사람은 기드온이었는데, 나중에 보면 백성들이 기드온에게는 대대로 왕이 되어 달라고 청할 정도로 열광한 반면에, 선지자는 그 이름조차 나오지 않습니다. 언제나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선지자는 인기가 없었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불행하게도 한국교회는 무명의 선지자가 되려하지 않고, 인기 있는 기드온이 되려 한 것 아닌가 생각됩니다. 우리는 예레미야에게서 배워야 합니다. 그는 아무도 듣지 않는 유다 말기의 상황에서도 눈물을 흘리면서 끝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함으로써 후세로 하여금 그 멸망하던 유다 나라에 선지자가 있었음을 기억하게 하였습니다.
둘째, 선지자가 되려면 하나님의 뜻을 깊이 알아야 합니다.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야 합니다. 이를 위해 선지자는 하나님과 교통하는 영적 사람이어야 합니다. 깊은 영성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과 통하지 못하는 사람은 결코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없고,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면 선지자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과연 한국교회는 하나님과 깊이 교통하고 있을까요? 부수적인 일에 너무 바쁜 나머지 하나님과의 교제에 소홀하고, 따라서 무엇을 전해야 할지 모르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이제 정치와 교제, 그리고 복음 외적 일은 내려놓고 깊이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 주님의 음성을 경청해야 합니다. 그래서 세상은 듣지 못하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것을 전해야 합니다. 이 거룩한 영적 사명을 다해야 합니다.
셋째, 선지자는 전달한 말씀대로 먼저 살아내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말씀을 전달하는 것은 쉽지만, 말씀대로 사는 것은 어렵습니다. 말씀을 전하는 사람에게 돌아오는 반발들 중 가장 감당하기 힘든 것은 <그렇게 말하는 당신은 어떻게 사는가?>라는 질문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에스라는 오늘 한국교회의 모델이라고 여겨집니다. 그는 포로에서 돌아와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고 성벽을 재건한 백성들 중에서 사역을 감당했습니다. 그런데 본문은 그의 3대 결심을 보여줍니다. 첫째, 여호와의 율법을 연구하기로 했습니다. 이는 깊이 주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둘째, 먼저 자신부터 그 율법을 준행하기로 했습니다. 이것은 먼저 자신부터 그렇게 사는 것입니다. 셋째, 그 율례와 규례를 가르치기로 했습니다. 이것은 선지자의 역할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한국교회도 작금의 현실 속에서 이 시대의 에스라가 되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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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연구] 에스라의 3대 결심(에스라 7장 10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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