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8(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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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혼자 살아갈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하나님이 인간을 만드셨을 때 이미 아담과 하와를 통해 말씀하셨다.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창2:18).”는 말씀은 더불어 살아감의 이치를 말씀하신 것이다. 이를 ‘인간관계’라 한다. 즉 사회 집단이나 조직의 구성원이 빚어내는 개인적 정서적인 관계를 말한다.
그렇다면 가장 아름답고 지고한 인간관계는 어떤 것인가?
이 질문에 따른 보편적인 대답을 한다면 소위 ‘코드가 맞는 관계’라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의 옳고 그름을 떠나, 정사(正邪)를 떠나 코드가 맞으면 상호 분쟁이나 다툼, 갈등이 없는 관계를 소위 최상의 관계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선의 행태든 악의 행태든 코드만 맞으면 자기들의 관계는 나름 지고한 관계라 할 수 있으므로 ‘조폭은 조폭대로’, ‘성직자는 성직자대로’라는 관계개념이 정의되는 것이다. 그래서 코드관계란 나의 행복이 너의 행복이라는 공식이 만들어진다. 그러나 그것은 오히려 지역이기주의, 또는 집단이기주의가 되기 쉽다. 이기주의는 다른 사람이나 공동체의 권리, 또는 이익을 생각지 않고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생활태도를 가리킨다. 이런 경우를 ‘님비(NIMBY, Not In My Back Yard Syndrome)신드롬’ 또는 ‘룰루(LULU, Locally Unwanted Land Use)’, 또는 ‘핌피(PIMFY, Please In My Front Yard)’라고 한다.
그렇다면 어떤 인간관계가 진정 지고한 인간관계인가?
사도바울을 통해 하나님이 말씀 하신 것이 있다. 가정윤리에서 부부의 관계가 주께 하듯 해야 하고(엡5:22), 아랫사람과 윗사람의 상호 관계도 주께 하듯 해야 하며(엡6:1), 인간관계의 섬김에 있어서도 주께 하듯 해야 한다(엡6:3). 어디서 무엇을 하든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해야 하고(골3:23),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해야 한다(고전10:31). 이것이 하나님이 말씀하신 지고한 인간관계의 규범이다. 이를 살펴보면 기준이 하나님이다. 왜, 왜 그럴까? 출애굽기 20장에서 하나님은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출20:3).”고 하셨다. 그리고 이어서 인간생활의 규범윤리를 말씀하셨다. 요약하면, 인간은 의인이 없으며 모두가 죄인(롬3:10)이라는 것이다.
나는 일 년 내내 전국 농어촌, 산골 개척교회 등지를 다니면서 말씀사역을 한다. 어느 곳에 이르든 마을마다 예배당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더 없는 행복이며 기쁨이다. 선교사님들이 불교와 유교사상에 잠겨 있던 이 민족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한 후 한국교회는 세계선교의 중심에 서는 축복을 받았다. 다시 생각해도 분명한 것은 대한민국이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입은 나라다.
은퇴 이후 칠순의 나이에 이르렀어도 여전히 나날이 모자라도록 말씀선포의 초청을 받고 있다. 이 모든 것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의 부르심이다. 이렇게 교회들을 방문하면서 지나온 세월 그 어느 때보다 뼈저리게 느끼는 것이 있다. 마을마다 세워진 예배당과 세계선교의 중심에 선 복음의 나라 대한민국을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마음이다. 기쁨보다 더 큰 고통으로 아파하시는 하나님의 마음, 나를, 너를,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으셔야만 했던 분기점의 아픔보다 어쩌면 더 아픈 그 고통의 통증을 느낀다.
거두절미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구원의 은혜와 평강’이다. 그것이 좋은 교회다. 그것을 위하여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셨고 그것을 위하여 하나님이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으셨다. 그런데 교회가 구원의 은혜와 평강이 아닌 분쟁과 갈등으로 얼룩지는 모습을 보고, 듣고, 경험하며 하나님의 크나큰 아픔을 느낀다.
복음의 생활이 무엇인가? 예수님을 믿고 영혼이 구원받는 것으로만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이 복음의 삶이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나님과 나의 수직적인 관계가 믿음으로 정립이 되었다면 이웃과 나의 수평적인 인간관계의 기본윤리가 살아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무엇인가? 바로 성령의 열매다. 함축하면 이해와 관용과 용서와 사랑이다.
구약에서는 하나님의 경외가 근본이지만 신약에서는 모든 것이 “주 안에서”의 인간관계다. 구체적 개념으로 그것이 무엇인가?
주기도문을 통해서 우리는 날마다 이 사실을 읊조린다. 사도신경을 신앙으로 고백한다. 사도신경의 마지막 부분에서 “나는 성령을 믿으며, 거룩한 공교회와 성도의 교제와 죄를 용서 받는 것과 몸의 부활과 영생을 믿습니다.”라고 고백한다. 즉 여기에서 벗어나는 것이 사이비요 이단이다.
그런데 작금의 교회에서 주기도문과 사도신경이 고백되고 있는가? 입술로는 주기도문과 사도신경을 고백하면서 삶은 그 반대로 살아가는 것이 진정 그리스도인인가? 그리스도인의 거룩한 모임인 교회인가? 자의적 해석을 통해 악을 행하며 선이라 외치고, 불의를 행하면서 의라고 고함치는 기막힌 상황은 교회의 모습이 아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 것인가? 하나님은 바울을 통하여 갈라디아서 5:22~23을 통해 오늘도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이것이 정답이다.
교회를 위하여, 주의 영광을 위하여 외치는 사람들이 사랑이 아닌 것, 기쁨이 없는 것, 참지 않는 것, 가엽게 여기지 않는 것, 어질고 착하지 않은 것, 마음 중심으로 주의 뜻을 이루지 않는 것, 온화하고 부드럽지 않은 것, 정도를 넘지 않고 적절하게 자신을 제어하는 조절이 안 된다면 그것은 성령으로 행하는 것이 아니다. 성령의 사람은 성령으로 살아간다. 성령으로 살아가는 사람의 기준은 하나님이다. 하나님이 중심이 되는 인간관계가 지고한 은혜와 평강의 삶을 엮어갈 수 있다. 그것이 복음의 삶이다. 곧 이해와 관용과 용서와 사랑이다. 예수님께서 모범을 보이신 그 사랑이다. 그러므로 사랑보다 아름다운 것은 없다.(요1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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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임중 칼럼] 인간관계(人間關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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