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8(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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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Svetlana Alexievich)가 최근 ‘2017 서울국제문학포럼’에 참석하기 위해서 방한했습니다. 우크라이나에서 태어나고 벨라루스에서 활동하는 그녀는 일명 ‘목소리 소설(Novels of Voices)’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한 장본인입니다. 여기서 “목소리”란 작가가 직접 인터뷰한 사람들의 목소리를 의미합니다. 보통 작품 한 편을 집필하는데 200-500명을 인터뷰하고 그것을 기반으로 탄생하는 소설이기 때문에 ‘소설 합창(chorus)’이라는 재미있는 별명이 붙어있기도 합니다. 여간 힘든 작업이 아닙니다. 몇 번씩이나 같은 사람을 찾아갈 때도 있고, 그렇게 해서 모인 자료를 정리하고 편집하는데 5-10년이 걸릴 때도 있다고 하니 말입니다.
한국에는 노벨상 수상 직후에 『세컨드 핸드 타임』(김하은 옮김, 이야기가 있는 집)이라는 책이 번역·출간되었습니다. 부제(副題)가 “호모 소비에티쿠스(homo sovieticus)의 최후”입니다. 그렇습니다. 소련 공산주의의 쇠퇴와 몰락이 배경입니다. 그러다 보니 러시아 내부적으로는 ‘안티’가 월등히 많다고 합니다. “일부는 위대한 소련을 깎아내리고 그 더럽고 비참한 실상을 낱낱이 드러내 보여 얻고자 하는 것이 무엇이냐며 목소리를 높이고, 더러는 이건 문학이 아니라 기획취재라며 힐난한다.”(김하은, 659 p.) 하지만 이 책은 평단이나 작가의 말이 아니라, 실제로 역사의 현장을 살아낸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퇴직 노동자, 건축가, 작가, 의사, 평범한 여대생 등의 이야기로 가득합니다. 작가는 말합니다. “평범한 사람들의 역사가 그냥 사라지지 않도록 하는 게 나의 임무다.”
참으로 역설적이지 않습니까? ‘호모 소비에티쿠스’란 말은 ‘사회주의적 인간’이란 뜻입니다. 마르크스-레닌주의자들은 옛사람 아담을 새로운 유형의 인간으로 개조할 수 있다는 신념으로 또한 실제로 개조하려는 실험에 막대한 시간과 물질과 장비와 인력을 쏟았지만 결국은 역으로 자신들이 신봉했던 이념의 몰락이라는 결과를 자초하고 말았습니다. “국가는 역사 속에서 서민들을 이용하고 죽게 만들었다. (하지만) 내 책에 나와 있는 작은 사람들은 역사의 영웅들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스몰 피플(small people)’이란 말 대신 ‘빅 피플(big people)’이란 말을 쓰고 싶다.”(작가와의 인터뷰 중에서 인용) 그렇습니다. 역사를 움직이는 주체는 조지 오웰이 『1984』에서 언급한 ‘빅 브라더’도 아니요, 무라카미 하루키가 『1Q84』에서 풍자적으로 묘사한 ‘리틀 피플’도 아니요, 평범해 보이는 진정한 영웅들 곧 ‘빅 피플’이라는 알렉시예비치의 견해는 거대한 변화를 겪고 있는 작금의 우리에게 공감되는 바가 큽니다.
그런데 소개한 책 후반부에는 뜻밖에 이런 내용이 등장합니다. “난 독방에서 사형을 기다리고 있었어요. 생각을 많이 했어요. 사면이 벽인 이곳에서 누가 날 도와주겠어요? 그런 곳에 있으면 더 이상 시간은 무의미해지고 뭔가 추상적인 개념이 되어버려요. 난 아주 큰 공허함을 느꼈어요.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나도 모르게 내 속에서 소리가 터져나갔어요. ‘주님, 만약 계시다면 도와주세요! 날 버리지 마세요! 난 기적을 바라는 게 아니에요. 나한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이해할 수 있게 해 주세요.’ 그리고는 무릎을 꿇고 기도를 했어요. 주님은 주님을 구하는 자들을 오래 기다리게 하지 않으세요.”(625 p.)
단순한 개인들의 합만으로는 될 수 없고, 오직 주님 안에서만 그리될 수 있다는 고백처럼 들립니다.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고후 6:9-10) 그렇습니다. 주님 안에 있을 때 지극히 작은 자들이야말로 동시에 지극히 큰 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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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칼럼] 빅 피플(big peop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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