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8(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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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조지 W. 부시 대통령을 만날 기회가 있었다. 당시는 노무현 대통령과 한미 정상회담을 앞둔 시점이었다. 그리고 북한의 대포동 미사일 사건 등으로 한반도에 긴장이 고조되고, 더구나 미국이 노무현 대통령과 참여정부에 대해서 달갑지 않게 생각했던 때였다. 그래서 짧은 만남이지만 정상회담 이전에 우리나라 대통령께 조금 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부지런히 영어 연습을 했다. 부시 대통령 에게 말하고자 한 요지는 이것이었다. “미국이 보기에는 한국이 미국과 멀리하면서 친 북한 정책만 펴는 것처럼 오해할지 모르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일본과의 긴장 관계를 조성하기 때문에 그렇게 보일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대한민국 대통령이 오시면 융숭하게 대접해 주시길 정중하게 부탁드립니다.”
이런 영어를 달달 외워서 갔다. 그런데 짧은 만남이었기에 그 분 앞에서 준비한 영어가 거의 생각나지 않았다. 그 대신 본능적으로 손짓, 발짓하면서 막장 영어를 막 쓰고 가슴까지 고개를 숙이며 감사의 인사를 하였다. 이 모습을 보고 동행한 아들이 나를 조롱하고 구박하는 것이다. “아빠는 한국을 대표할 정도의 목사님이면서 체통도 없어요? 반미감정을 가지고 있는 젊은이들은 그렇게 하는 것 좋아하지 않아요. 자존심을 지키셔야죠.” 이렇게 말하는 아들 앞에서 내 모습은 더 초라하고 작아 보였다.
하지만 나는 아들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아빠라고 해서 자존심이 없고 체통이 없겠느냐. 그러나 나의 힘없고 작은 조국의 안녕과 민족의 평화를 위해 서라면 소아적인 자존심이나 체통 같은 것은 언제든지 벗어 던질 수 있단다. 국민의 생명을 지켜내는 일이라면 구두라도 핥겠다.” 당시는 거의 준 전시체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계속 북한이 핵 실험을 했고, 부시는 김정일 위원장을 악의 축이라고 명명하며 전운이 감도는 삼엄한 시기였기 때문이다. 물론 한미관계와 외교관에 있어 다양한 견해가 있겠지만 한반도의 긴장을 완화시키기 위해 그렇게 한 것이다. 그리고 아들에게 그 말을 했던 것은, 지금 아빠가 부시에게 아부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라도 해서 대한민국의 전란을 막고 평화를 지키기 위해서 애쓰고 몸부림을 치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해 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나는 당시로서는 상황적 최선을 다했다고 본다. 부시 대통령을 만나고 난 후 이러한 이야기를 목양칼럼에 쓴 적이 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나의 글을 읽고 트위터를 비롯해 포털 사이트에 서 소강석이는 종미주의자라고 비난하면서 자존심도 없고 미국에 아부나 하는 생각 없는 목회자인양 비아냥거린 적이 있다. 그 분은 목회자의 아들인데 항상 대형교회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
현 시대를 규정하는 단어들 중에 하나가 분노 사회라는 말이다. 정치 지도자들 뿐만 아니라 학계, 문화예술계 등도 분노하라고 외친다. 물론 사회의 불의와 부정, 모순, 불평등에 대해서는 분노하고 싸워야 한다. 그러나 반대를 위한 반대, 분노를 위한 분노가 되어서는 사회적 공멸을 일으킬 수밖에 없다. 이러한 현상을 심리학적으로 분석해보면, 선택적 지각과 확증편향성 때문이다. 자기들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대로만 믿는다. 그러니까 아무리 이치에 맞는 이야기를 해도 삐딱하게 보고 균형적인 사고를 안 하려고 한다. 이런 사람은 계속해서 자기 이념과 진영의 패러다임에 갇혀 호미질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젠 호미적 사고에서 벗어나 하늘을 나는 드론적 사고를 하며 폭넓게, 멀리 볼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본질을 위해 싸우고, 믿음을 위해 싸우는 것에 대해서는 검투사의 심장을 가져야 하지만, 사람을 바라보고 품을 때는 정원사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 분노를 부추기는 사회 속에서 나라를 지키고 백성을 구하는 데는 검투사와 같지만, 국민을 하나로 통합하고 화해하는 일에는 정원사와 같은, 분노시대를 껴안을 가슴을 지닌 지도자는 과연 어디에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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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강석 칼럼] 분노시대를 껴안을 가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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