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1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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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라 하면 쇄국정책을 생각하게 된다. 흔히 쇄국(鎖國)은 조선을 멍들게 한 정책으로 여기지만 당시로서는 불가피한 방아책(防我策)이었고 상당한 지지를 받았다. 그 기세등등하던 징기스칸의 몽골제국이 백년을 채우지 못하고 무너졌는데, 조선조는 드물게도 519년(1392-1910) 간 존속한 것을 보면 왕조를 지탱했던 내적 결속력이 있었고, 실사구시를 추구한 정책도 한 몫 했을 것이다. 시간적 측면에서 조선왕조는 로마제국의 존속기간과 맞먹는다는 점은 예사로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19세기 변화하는 역사의 길목에서 조선조가 택한 마지막 정책이 쇄국이었다. 그러나 이런 은둔의 나라로 향하는 신흥서구세력과 일본의 도전을 피할 수 없었다. 그 실체가 18세기부터 조선의 항구로 스며드는 외국 선박 곧 이양선(異樣船)의 출몰이었다. 탐험이니 측량이니 하면서 서양의 함선들이 출몰하면서 개항과 통상을 요구하자 쇄국의 벽은 높아만 갔다. 그러나 개화지향 세력의 대두와 압력으로 쇄국정책은 10년(1863-1873)으로 막을 내린다. 이런 변화의 와중에서 우리나라와 부산항으로 들어온 첫 이양선은 무엇이었을까?
 
귀츨라프가 지금의 충청도 보령시에 속한 고대도로 왔을 때가 1832년이었고, 곧 북한지역 동해안의 단천(1848), 북청(1848), 함흥(1897)에 이어 제너럴 셔먼호가 평양으로, 그리고 프랑스함대가 천주교도 박해를 구실로 강화도로 침입했을 때가 1866년이었다. 2년 후인 1868년에는 충청도 아산만에 상륙하여 덕산에 있던 대원군의 부친 남연군의 무덤을 도굴하는 오페르트 도굴사건이 발생했다. 영국군이 거문도를 점거했을 때는 1885년이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 그리고 부산에 첫 이양선이 나타난 때는 언제였을까? 그때가 1797년 정조 21년이었다. 1797년 10월 14일 이른 새벽 부산 용당포 해안으로 이국의 배가 나타났다. 날이 밝자 주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선박은 조선의 선박과 다른 것이었다. ‘다른 모양의 선박’라는 점에서 ‘이양선’이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작은 쪽배를 탄 선원들이 해안으로 상륙했고 땔감 나무와 식수를 요청했다. 이 선박에 대한 첫 기록이 조선왕조실록 정조조 21년 9월, 곧 1797년 10월 26일이었다. “이국선 한척이 동래 용당포 앞 바다에 도착했다. 어떤 나라의 선박인지 무슨 연류로 도래했는지, 중국어 만주어 일본어 몽고어로 물었지만 통하지 않았고, 붓을 받아 글을 쓰는데, 그 모양이 구름이 산을 넘는듯하여 해독할 수가 없었다.” 이 배가 영국 군함 프로비던스(Providence)호로 영국 해군 윌리엄 로버트 브로톤(William Robert Broughton) 함장의 휘하에서 북태평양 탐험 중 땔감과 식수를 구하기 위해 일시 용당포로 기항한 군함이었다. 바로 이 배가 우리나라에, 그리고 부산에 나타난 첫 이양선이었다. “구름이 산을 넘는듯하여 해독할 수가 없었던” 엉어는 바로 영어였다. 1866년 대동강으로 거들러 올라가 평양으로 향했던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호가 80톤급 증기범선이었는데, 프로비던스호는 86톤급이었다고 김재승 박사는 지적한다.
이 선박 승선원은 이 때 부산항을 그렸는데, 부산항을 조선 하버(Chosan Harbour)라고 불렀다. 이런 연유로 부산항은 조선항이란 이름으로 서구에 알려지게 된 것이다. 이런 접촉이 후일 기독교의 전파를 가능하게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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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규 교수의 부산기독교이야기] 부산에 첫 이양선이 나타난 때는 언제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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