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1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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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명히 처음 보는 사람이나 장소인데도,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것 같고 언젠가 한 번은 가본 적이 있는 것 같은 경험을 할 때, 우리는 이러한 현상을 '기시감' 혹은 '데자뷰(deja vu)'라고 부릅니다. 20세기 초 의사이자 심리학자였던 플로랑스 아르노(Florance Arnaud)가 최초로 이러한 현상을 규정했고, 에밀 부아라크(Emile Boirac, 1851∼1917)가 용어로서는 처음 사용했다고 합니다(위키백과). 이후 심리학뿐만 아니라 사회문화 전 방위에 걸쳐 널리 애용되는 단어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멀리 갈 것 없이, 2016년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데자뷰'라 할 만합니다. 오랜 세월이 흐른 뒤 역사학자들은 한국의 1987년과 2016년을 함께 거론하게 될 것이 분명합니다. 장차 더 중요해질 역사의 한 페이지를 우리는 날마다 살고 있는 셈입니다.
  이번처럼 기시감(deja vu)이 사회 변화를 야기할 수도 있습니다만, 혁신적 변화는 종종 미시감(vuja de)에서 기인한다는 것이 와튼스쿨 아담 그랜트(Adam Grant) 박사의 견해입니다. 미시감이란 기시감과 반대로 '본 적이 없는, 낯선' 정도로 번역할 수 있겠지만, 익숙한 일들이라도 새로운 시각과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바라보는 것으로 정의할 수도 있습니다. 그랜트 박사는 “늘 봐온 익숙한 것이라도 그것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봄으로써 기존 문제를 새로운 방식으로 해결”(『오리지널스』, 29)할 때가 있는데, 순응(conformity)과 구별되는 이러한 독창성(originality)이야말로 창조적 파괴의 동력이라고 했습니다. 기존의 문제는 기존의 방식으로는 풀리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지금 이대로가 아니라 무언가 변화를 원한다면 창의적인 시각과 사고로 당면한 현안들을 마주 대해야 합니다.
  하지만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걸어가는 일은 누구에게라도 결코 쉽지 않습니다. 마틴 루터(Martin Luther)는 수도사로서 성경을 연구하고 명상하며 살기를 원했지 결코 종교개혁의 기수가 되려는 의사가 없었습니다. 존 칼빈(John calvin) 역시 기욤 파렐(Guillaume Farel)이 반협박조로 강권하지 않았다면 개혁가로서의 인생을 살지 않았을 사람이었습니다. 마틴 루터 킹(Martin. L. King) 목사는 흑인민권운동의 지도자로 나서는 일을 상당히 망설였습니다. 이미 목회 활동을 하면서 박사 학위를 따고 대학총장을 꿈꾸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가 걸어가는 길 또한 그렇지 않습니까? 이제 우리가 만날 시대와 사회는 데자뷰(deja vu)가 아니라 뷰자데(vuja de)의 세상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본능적으로 두려움과 망설임이 우리 마음과 발걸음을 붙잡을 것입니다. 환경마저 변화에 저항할 때가 많습니다. 스룹바벨과 느헤미야가 주도한 사역은 시급하기도 했고 또 대의명분(大義名分)도 확실했지만, <그냥 이대로>를 부르짖는 무리들의 커다란 저항에 직면해야 하지 않았습니까?
  우리는 변화해야 합니다. 변화는 이제 잉여(surplus)가 아니라 생존(survival)의 키워드가 되었습니다. 변화하지 않는 개체는 존속하기 어려운 사회적 생태계 안에서 살아가는 시대입니다. 그런데도 작은 변화마저 어려운 것이 현실입니다. 왜 그럴까요? 이에 관해 마셜 골드스미스(Marshall Goldsmith)는 『트리거(Triggers)』에서 실질적인 변화를 이루기 어려운 가장 큰 이유로, 정작 자신에게 변화가 필요함을 쉽게 인정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꼽았습니다. 그러니 무엇보다도 인식의 대전환이 필요합니다. 그렇게 어렵게 변화를 결심해도 데자뷰(deja vu) 같은 방해자들을 만나게 됩니다. 처음으로 등장하는 강적은 우리 안에 있는 타성(惰性)입니다. 이어서 친숙한 타인(他人)과 친근한 환경이 차례로 등장하게 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어차피 주님이 가신 길은 아무도 가지 않은 길, 문자 그대로 미시감(vuja de) 가득한 좁고 협착한 길이요 십자가의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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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칼럼] 기시감(旣視感)과 미시감(未視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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