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17(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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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판도라(Pandora)>라는 한국 영화가 연말 개봉을 앞두고 ‘국내 최초 원전(原電) 재난 블록버스터’라는 거창한 제목으로 홍보 중입니다. 예상 밖의 지진을 겪으면서 특히 진앙(震央)과 멀지 않은 지역에 밀집된 원자력발전소에 대한 관심과 우려가 어느 때보다 급증했던 터라, 영화사 나름대로는 잠재 관객들을 자극하기에 가장 효율적인 전략을 찾은 듯합니다. 천문학적인 자금이 투입된 대작이라고 하니 영화는 개봉되어야 하겠지만, 누구나 실제로 원전(原電)을 담고 있는 지역의 판도라의 상자만은 열리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일 것입니다.
  판도라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여성 이름입니다. 인간을 위해 불을 훔쳤던 프로메테우스(Prometheus)에 대한 응징으로 제우스(Zeus)는 선물과 함께 판도라를 지상으로 보냅니다. 그것이 바로 ‘판도라의 상자’입니다. 프로메테우스의 동생 에피메테우스(Epimetheus)는 형의 경고를 무시하고 판도라와 결혼했고, 호기심을 이기지 못한 판도라는 결국 열지 말라는 금령(禁令)을 어기고 상자를 열어버리고 말았는데, 그 속에 들어있던 질병, 가난, 증오, 전쟁과 같은 것들이 튀어나와 인간 세상에 만연하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깜짝 놀란 판도라는 급하게 상자를 닫았는데, 그 바람에 무언가 하나가 갇혀서 미처 나오지 못했고, 신화는 그것을 <희망>이라고 명했습니다.
  그런데 수천 년 전 만들어진 그것도 신화(神話) 속 이야기 비슷한 일들이 지금 우리 사회에 벌어지고 있습니다. 판도라의 상자 같은 것이 열리고 그 속에 있던 무언가가 한꺼번에 튀어나와 세상을 가득채운 느낌입니다. 가난과 고통과 질병과 전쟁이 인류 사회에 등장하자마자 마치 오래 전부터 익숙했던 일인 마냥 일상과 역사의 일부가 되어 버린 것처럼, 범인(凡人)들은 한 번 들어보지도 못했던 이름들이 마치 오래 전부터 알고 지냈던 연인 마냥 입을 타고 전파를 타고 바다를 건너고 계층을 초월해 회자(膾炙)되고 있습니다. 그 동안 우리가 알지 못했던 암묵적인 동맹 혹은 침묵의 카르텔이 존재하기라도 했던 걸까요? 지식격차(knowledge gap)가 참여격차(participation gap)로 이어질 수 있다는 커뮤니케이션 학자들의 지적이 새삼 서글프게 살갑습니다.
  하지만 더욱 두려운 것은, 아직도 우리가 알지 못하는 또 하나의 판도라 상자가 이 사회 어딘가에 깊이 감추어져 있지는 않은가 하는 의구심입니다. 기밀의 정도와 보안의 강도는 정비례한다는 상식을 염두에 둘 때, 이번에 열린 상자로 인한 충격만 해도 지진으로 인한 내외상증후군쯤은 비교도 되지 않음을 익히 경험했는데, 만에 하나 존재할지도 모르는 또 하나의 상자가 정말로 개봉된다면 우리는 미증유의 당혹감과 대혼란을 체험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송곳은 겹겹이 싸도 튀어나오기 마련이고, 아무리 가려도 빛은 새어나오기 마련입니다. 만일 이 시대 판도라의 상자에 감추어진 것이 진리(眞理)라면, 아무리 꼭꼭 감싸고 은폐해도 언젠가는 반드시 튀어나오고 새어나오기 마련입니다.
  2017년은 종교개혁 500주년이 됩니다. 제네바 대학 곁 공원에 새겨진 네 사람의 종교개혁자들(칼빈, 파렐, 베자, 녹스) 부조(浮彫) 위에 이런 글귀가 새겨져 있습니다. <post tenebras lux> 그렇습니다. 문자 그대로 어두움 후에는 빛이 있습니다. 아니, 아우구스티누스의 말처럼, 어둠이라는 말 자체가 빛의 부재가 아니었던가요? 우리가 정말로 두려워해야 할 것은 진리를 현대판 판도라의 상자 속에 가두어 두고 있는 시대와 사회가 아니겠습니까? 진리를 수호해야 할 진리의 사도들이 시류와 대세에 편승하고 영합하여 스스로 어둠의 시종들로 전락하는 그런 시대와 사회가 아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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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칼럼] 어두움 후에 빛이 있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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