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9(금)
 
1. 하나님의 고민?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가장 고민하셨던 부위는 인간의 뇌가 아닐까? 너무 완벽하게 만들면 하나님을 넘어설 것이고, 너무 뒤쳐지게 만들면 인간 종이 멸종당할 터, 그래서 뇌라는 복잡한 것을 만들어 그 뇌의 기능을 다 사용하지 못하도록 만드셨는데, 이제 뇌의 기능을 확장시킨 인간들은 자유의지를 통해 하나님을 배반하고 그들 인간만의 역사를 만들어 온 것이 우리 문명사가 아닐까? 
베르나르 베르베르는 그의 소설『뇌』에서 인간의 뇌에는 파충류의 뇌와 관련된 동기유발 부분과 포유류의 뇌와 관련된 동기유발 부분, 마지막으로 이 모든 것을 뛰어넘는 ‘최후의 비밀(소설의 원제가 L’Ultime Secret, 최후의 비밀)’이라는 부분을 통해서 미래의 인간이 도달하게 될 뇌의 한 부분을 말하고 있다. 자아의 확장, 자신의 존재를 뛰어넘는 개별자아의 확장이 인류가 미래에 도달하게 되는 진화의 마지막 단계라고 역설하고 있다. 사실 인간의 뇌는 각각의 부위마다 다른 역할을 수행하고 있지만 그것을 통합하고 조합하여 사고라는 과정을 만들어내는 부분은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았다. 마치 호수에 물이 여기저기서 파동을 만들어 내는 것은 확인되나 그것들이 전체적으로 조합이 되어 (사고라는) 큰 그림을 역어내는 부분은 찾지 못한 것과 같다.
뇌-1.jpg
 
2. 뇌의 고민: 스키마, 선입견과 고정관념
“니 아버지 뭐하시노?” 곽경택 감독의 영화 <친구(Friend, 2001)>에서 선생님이 동수(장동건 분)에게 물었던 질문이다. 이것은 우리 뇌가 고정관념이라는 편리한 판단기준을 통해 사람을 미리 재단하기 때문에 가능한 질문이다. 성별, 인종, 출신 지역, 가정환경 등을 통해 쉽게 대상을 일반화하려는 것이다. 뇌작용의 이런 선입견이나 고정관념을 ‘스키마(Schema)’라고 한다. ‘과거의 경험이나 지식들을 토대로 새로운 경험을 친숙하게 받아드리는 것’이다. 뇌가 정보를 여러 범주로 조직화할 때 이용하는 기록체계의 일종으로 다양하고 복잡한 정보들 속에서 상황을 빠르게 파악하고 그 사람에 대한 판단을 결정하는데 도움을 준다.
사실 정글에서 생활하는 원시인들은 사람의 얼굴을 판단하는 데 그들의 뇌에 필요한 시간은 약 0.4~0.6초이다. 또한 그 사람이 매력적인 사람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데 필요한 시간은 겨우 0.2초이다. 원시시대에 유용한 이러한 스키마가 복잡한 현대사회에서는 종종 잘못된 판단을 야기하기도 한다. 뇌의 태생적 고민이 시작되는 부분이다. 
우리의 뇌는 ‘여성은 모성적이고, 흑인 남성은 공격적이며, 유대인은 지갑을 절대 열지 않을 것’이라는 성적, 인종적 편견을 가지고 있다. ‘아줌마는 억척스럽고 아저씨는 뻔뻔하며 요즘 애들은 버릇없고 나이든 노인은 성욕을 잘 다스린다’는 선입견도 갖고 있다. 직업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예술가는 섬세하고, 정치가는 권모술수가 능하며, 교수는 논리적으로 따지고, 사업가는 통이 크다’고 생각한다. 중요한 결정을 할 때 우리 뇌는 이런 고정 관념이 불쑥 튀어나오는 것이다. 성격의 문제를 넘어 뇌의 문제로 뇌의 고민인 것이다.

3. 중년의 고민: : 절정의 뇌
젊은 시절 약 2만종의 맛을 구별하던 인간은 나이가 들면서 (중년이 되면) 1만종의 맛을 구별하기도 버거워진다. 중년의 기억력 감퇴는 제일 먼저 이름과 얼굴을 잊어버리는 데서 시작한다. 신경과학자들이 정의한 ‘인생의 중년’은 나이 45살부터 68살까지인데, 중년의 뇌는 어떨까? 중년의 고민으로 남을 것인가? 최근 경영학과 신경과학이 융합된 ‘뉴로리더십(Neuroleadership)’이라는 분야는 리더가 제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뇌 상태를 정확히 파악하고 단점은 보완하고 장점은 살려나가야 한다고 말한다.  
미국 시애틀 세로연구소의 ‘뇌 인지능력 검사’ 결과는 중년의 뇌에 대한 놀라운 결과를 보여준다. 어휘능력, 언어기억능력, 계산능력, 공간지각능력(공간 정향 능력), 반응속도, 귀납적 추리 능력 등 6가지 능력이 가장 초절정의 성과를 내는 나이대가 45~53살 사이의 중년의 뇌로 나왔다는 것이다. 중년의 뇌는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 순발력은 다소 떨어지지만 복잡한 상황에서 문제를 발견하는 능력, 글을 읽고 주제를 파악하는 능력은 매우 뛰어나며, 결과를 예측하는 능력 또한 우수하다는 것이다. 또한 나이가 들수록 단기 기억력은 떨어지지만, 중요한 사실에 대해서는 장기 기억 능력이 오히려 좋아지는 것으로 나타났다(나이가 들수록 더 지혜롭고 현명해진다는 말은 뇌과학적으로 사실인 것이다!).
뇌-2.jpg
 
4. 신은 뇌 속에?
신을 영접하는 순간(혹은 명상을 하는 동안) 뇌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질까? 신학자와 철학자, 종교학자가 질문한 신의 문제에 물리학자, 심리학자들이 가세한 이후 이제 신경과학자들이 합류하여 “신은 실제로 존재하는가?, 우리는 신의 존재를 어떻게 인식하는가?, 왜 우리는 항상 우리보다 더 큰 어떤 존재와 연결되기를 바라는 것일까?”라는 질문에 개입하였다. 그리고 신경과학자들의 결론은 ‘인간의 뇌는 종교를 추구하도록 구조화되어 있다’는 것이며 ‘종교적 체험을 하는 동안 뇌의 특정 영역이 활성화되며, 종교적 체험이 우리의 뇌에 유익하기 때문에 인간이 종교활동을 영위한다’고 결론짓는다(뇌의 생물학적 구조와 기능이 존재하지 않은 신을 만들어냈을까?, 아니면 신이 자신을 숭배하도록 인간들의 뇌를 그렇게 만들었을까?).
20세기 말 펜실베니아 대학의 핵의학과 앤드루 뉴버그(A. Newberg) 교수는 종교적 체험을 하는 동안 인간의 뇌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에 관해 6년간 실험을 반복했다. 종교인들이 종교적 체험을 하는 동안 뇌활동에는 비정상적인 변화가 일어났고 자신들의 초월적인 종교적 경험을 아주 생생한 현실처럼 인식하게 된다는 것을 알아냈다. 실제로 현실에선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는데 그들은 마치 무언가가 존재하는 것처럼 생생한 각성을 경험했다는 것이다. 신경과학적으로 감정과 행동을 통제하는 전두엽(Frontal lobe)과 사고 기능을 조절하는 하두정엽(inferior parietal lobe)이 나란히 활성화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어떤 종교를 믿느냐에 관계없이 영적 체험을 하는 사람의 뇌활동 상태는 거의 비슷한 변화를 보였다. 따라서 뉴버그는 2001년, “신은 인간의 뇌 속에 들어 있다”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재미있는 것은 뉴버그 교수가 기독교인이 영어로 기도할 때와 방언으로 기도할 때의 뇌 스캔을 통하여 어떤 차이가 나는지도 실험한 것이다. 영어로 기도할 때는 언어를 관장하는 전두엽의 활동이 활발하게 나타났지만 방언으로 기도할 때는 활동이 감소되고 조용했다. 즉 방언으로 기도할 때는 내가 아닌 다른 존재(개신교적으로는 ‘성령’)가 나의 기도를 통제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불교의 수도승이 명상할 때와 프란체스코회 수녀가 기도할 때는 전두엽이 활발하게 작용했지만 개신교인이 방언을 말할 때는 전두엽 활동이 감소되는 것을 확인한 것이다. 즉 방언기도 할 때는 나의 생각이 아닌 나의 영이 직접 기도하기 때문에 두뇌를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말 신은 전두엽과 하두정엽에 있을까? 뇌에 전기자극을 가함으로 신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인가? 그렇다면 우리 인류의 원형적인 종교적 기억들은 미리 실현된 전기자극인가?

5. 엔그램: 기억의 장소
기억은 뇌 신경세포와 시냅스에 저장된다. 뇌에는 엄청나게 많은 신경세포(뉴런)가 있다. 대략 860억개 정도인데, 다른 체세포와 달리 신경세포에는 많은 가지(축삭과 가지돌기)들이 뻗어 나와 서로 연결되는데, 신경세포 하나에 무려 수천, 수만이나 된다. 신경세포들의 가지와 가지를 이어주어 신호를 주고받는 부위가 바로 시냅스이다. 사람의 뇌에는 무려 수십조 내지 100조개의 시냅스가 존재한다. 현대 뇌과학은 신경세포와 세포들 사이 시냅스의 전기적 신호로 만들어진 시공간적 패턴을 통해 기억이 만들어지고 저장된다고 가설한다. 따라서 신경세포들의 전기적 패턴을 지우거나 방해하면 기억을 지울 수 있고, 패턴을 재생하면 기억을 복원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기억의 메커니즘은 이런 신경세포와 시냅스의 작용을 통해 일어난다. 신경세포들은 기본적으로 전기적 방법으로 소통하지만, 세포들끼리의 신호 전달은 시냅스에서 물질을 교환해서 이뤄진다. 신경전달물질인 글루타민산염, 도파민, 세로토닌 물질이 신경세포의 활성을 ‘흥분시키거나 억제(스위치를 켜고(+, 흥분성), 끄는(-, 억제성)’시킨다. 이것이 바로 기억의 메커니즘이다.  
곧 기억의 메커니즘은 신경세포와 시냅스의 작용을 통해 일어나는데, 그것은 신경세포와 시냅스 분자들에 나타나는 변화이기도 하다. 또한 세포간 연결 패턴의 변화이기도 하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기억이란 어떤 생물학적 현상이라고 말해주는 단 하나의 답은 아직까지는 없다고 한다. 기억이 저장된 분자, 세포, 연결망 수준의 흔적, 즉 ‘기억 흔적’ 또는 ‘기억 장소’를 일컬어 과학자들은 엔그램(engram)이라고 부른다. 기억의 장소인 엔그램이야말로 신이 창조했거나, 혹은 신이 깃들어 있는 장소가 아닐까?

6. 고향
뇌과학적으로 고향이 편한 이유는 어릴 적 경험한 음식, 소리, 얼굴과 풍경, 이 모든 것들이 우리의 뇌를 완성시킨 바로 그 요소들이기 때문이다. 나란 존재를 만든 고향, 그 고향을 떠난다는 것은 나란 존재의 원인과 이유를 의심하기 시작한다는 말과 같다. 따라서 인간은 고향을 그리워할 수 밖에 없다.
1000억개 신경세포들 간의 수많은 시냅스(연결고리)들의 위치와 구조를 유전적으로 물려받기는 불가능하기에 뇌는 미완성 상태로 태어난다. 대신 뇌는 약 10년간의 ‘결정적 시기(critical period)’라는 것을 갖고 있다. 결정적 시기 동안 자주 쓰이는 시냅스들은 살아남고 사용되지 않는 시냅스들은 사라진다. 따라서 결정적 시기의 뇌는 찰흙같이 주변 환경에 의해 주물러지고 모양이 바뀔 수 있다. 어쩌면 조기 인성 교육이 조기 어학 공부 및 선행 학습보다 중요한 이유이기도 하다(우리 속담에 “세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고 하지 않았던가!). 
인문학적으로(아니 신학적, 종교적으로까지!) 우리는 고향으로 향하는 존재이다. 따라서 우리는 모두 출애굽한 이스라엘, 혹은 오디세우스의 후손들이다. 키르케 섬에서 탈출한 오디세우스는 지옥 하데스에서 예언자 테이레시아스를 만나서 그에게 물어본다. 자신은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느냐고, 그러자 예언자는 말한다. “그래, 오디세우스야, 오랜 시간이 걸리겠지만 넌 결국 이타카로 돌아갈 것이다. 사랑스러운 아내를 품에 안을 것이고, 멋진 청년으로 자란 아들을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오디세우스야, 이것만은 알아야 한다. 네가 아는 고향에 도착한 넌 다시 네가 아는 고향을 떠나야만 너의 진정한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단다. ……”
우리의 진정한 고향은 하늘나라이기에 이 땅에서의 고향은 잠시 머무는 것임을 호메로스도 알았던 것일까? 아니면 우리의 고향은 뇌가 형성된 어린시절, 혹은 창조의 때인가? 기억의 장소인 엔그램은 이 땅에 진정한 고향이 없음을 오디세우스의 이야기를 통해 잘 보여준다.

7. 영화 <루시>: ‘신화적 예수’의 ‘과학적 구현’?
뤽 베송(Luc Besson) 감독이 오랜만에 복귀하여 만든 액션 영화 <루시 (Lucy, 2014)>에서 주인공 루시(스칼렛 요한슨 분)는 평범한 삶을 살다 어느 날 갑자기 인간의 모든 한계를 뛰어넘어 두뇌와 육체를 완벽하게 컨트롤하게 된다. 영문도 모른 채 지하세계의 절대 악 미스터 장(최민식 분)과 만나게 되었다가 결국 신종약물(C.P.H.4로 임산부가 임신 중 자신의 신체에서 만드는 것으로 아기의 뼈 구성에 필요한 에너지를 주며, 힘을 갖게 만드는 물질)을 다른 나라로 운반해야 되는 전달자로 이용당하게 된다. 하지만 루시를 겁탈하려는 부하의 폭력에 의해 뱃속에 든 약물이 루시의 몸 안에서 퍼지게 되고, 이로 인해 몸 속의 모든 세포와 감각이 깨어나게 된다. 이후 뇌의 활용도가 점점 높아져 가는 루시는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인간의 역사를 경험하고, 최초의 인류인 루시를 만나기도 한다. 
루시는 자신의 뇌 기능을 100%까지 사용하게 되었을 때, 인간의 신체성을 벗어버리고, ‘언제나 어디서나 존재하는(ubiquitous)’ 신적 존재로 변화된다. 그리고 루시는 노먼 박사에게 자신의 모든 지식을 USB에 담아 전달해 준다. 인간의 신체성을 벗어버리고, 인류의 시작(원시인 루시)과 현재(노먼 박사)에 지식을 전달해주는 것이다. 이 지식은 인류의 기원과 미래의 비밀이 담긴 지식으로 인류 구원의 다른 이름이다. 그리고 이것은 십자가에서 자신의 몸을 내어주고, 인류에게 구원의 길을 보여주신 예수의 길이라 할 수 있다. 태초에 계셨으며, 마지막에도 계실 분, 알파와 오메가이신 예수, 시간의 처음과 나중이며, 시간을 넘어서 계신 분! 우리는 루시에게서 ‘신화적 예수’의 ‘과학적 구현’을 보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신은 인간의 뇌 속에 들어있을지도 모른다?

(이 글의 뇌관련 정보와 예시는 정재승 교수의 ‘영혼공작소’ 및, 정재승, 김대식 교수의 저서와 번역된 앤드류 뉴버그 교수의 저서 등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최병학 목사.JPG
최병학 목사 (남부산용호교회 담임) 
 
*이 글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태그
비밀번호 :
메일보내기닫기
기사제목
[문화] 최병학 목사의 문화펼치기 20 : 뇌
보내는 분 이메일
받는 분 이메일